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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십 리를 간 후 돌아오라.

 

 

숭산(崇山)이 유명한 것은 소림사(少林寺)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소실봉(少室峰) 역시 그 중턱에 소림사가 자리하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드문 명승이 되었다.

하지만 숭산에 소실봉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실봉(太室峰)과 준극봉(峻極峰)등 칠십이 개의 봉우리가 어우러져 숭산을 중악(中岳)이라 불리게 만들었다.

 

장강 변의 위가진을 떠난 강유는 닷새 만에 숭산에 도착했다.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며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한 결과다.

해가 한 뼘쯤 남은 오후에 강유는 태실봉을 올라갔다.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태실봉을 올라가던 강유는 중턱쯤에서 숨을 돌렸다.

산바람에 땀을 식히며 돌아보는 강유의 오른쪽에 태실봉보다 좀 낮지만 자락이 아주 넓은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 중턱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는데 숲속에 수많은 건물과 탑들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봉우리가 소실봉이고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사찰이 소림사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라는 말대로 무림에 퍼져 있는 무공들 중 대부분은 소림사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강유는 멀리 보이는 소림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비록 오랫동안 인재가 끊긴 탓에 무림에 끼치는 영향력은 초라해졌지만 소림사가 천하무림의 종가(宗家)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강유는 다시 걸음 옮겼다.

(그 소림사를 지척에 두고도 들르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심부름에 집중할 때다.)

강유는 아쉬움을 애써 떨치며 암벽의 중간에 나있는 산길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모퉁이를 돌자 암자 한 채가 보인다.

깎아지른 절벽 중간에 세워진 암자는 거리가 제법 멀고 또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성냥갑처럼 작게 보인다.

그 암자로 올라가는 수많은 계단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저 암자가 고불암이다.)

강유는 수많은 계단 위쪽으로 작게 보이는 암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는 동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고불암에 기거하는 분은 고불선사(古佛禪師)라는 고승이다.)

족히 천여 개는 되어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강유는 고불암에 대해 수소문 한 것을 되새겨보았다.

숭산에 자리한 암자에 기거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고불선사는 소림사 출신이다.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 출신이므로 고불선사는 당연히 무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고불선사는 무공보다는 학식(學識)으로 더 유명했다.

특히 고대(古代)의 범어(梵語;천축어)에 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불선사가 고불암에 홀로 기거하는 이유도 좋아하는 범어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버지는 대체 어떤 경로로 고대 범어의 권위자인 고불선사와 교류를 나누게 된 것일까?)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같은 계단을 올라가며 강유는 새삼 의문을 느꼈다.

 

* * *

 

고불암은 절벽 중간에 조금 튀어나온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암자가 자리한 그 돌출부의 위쪽으로나 아래쪽으로나 깎아지른 절벽이다.

그래도 고불암 앞쪽에는 제법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다.

 

(드디어 다 올라왔다.)

강유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암자 앞의 마당으로 올라섰다.

(비록 외지고 험해도 절경이긴 하다.)

강유는 주변을 둘러보며 암자로 다가갔다.

저 멀리로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이 보인다.

(세상 풍파와 온전히 단절된 곳이니 수행을 하거나 공부를 하기에는 최적이겠구나.)

강유는 소매로 땀을 닦으며 암자 문 앞에 이르렀다.

(암자 안에 인기척이 있다.)

암자의 닫혀진 문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잔기침 섞인 숨소리가 들려서 강유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청수(淸修)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스님.”

강유는 의관을 정제한 후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암자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스님께 맡겨둔 물건을 받아오라는 분부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다시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반응이 있었다.

아미타불! 들어오게나.”

암자 안에서 세월이 느껴지는 늙은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허락을 받은 강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암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넓지 않은 암자 내부는 책으로 가득 차있었다.

사방 벽에는 수많은 책들이 쌓여있고 바닥에도 책들이 쌓여있거나 이리저리 널려있다.

그 때문에 비좁을 대로 비좁아진 암자 중앙에는 앉은뱅이 탁자가 하나 있고 그 탁자 너머에는 한 명의 노승이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늙었지만 여전히 건장한 체격에 상당히 우락부락한 인상을 지닌 노승이었다.

노승이 앞에 두고 앉아있는 탁자에는 문방사우 뿐 아니라 주전자, 찻잔, 여러 권의 책등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저분이 고불선사...)

강유는 문을 닫으며 노승, 고불선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암자 안의 분위기는 예상한 대로지만 고불선사의 모습은 강유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왜소하고 꼬장꼬장한 늙은 선비같은 인상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풍채가 좋고 인상이 호방해서 도저히 학승(學僧)으로 보이지 않는다.)

강유는 글을 쓰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고불선사를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말학후진 강유가 선사께 인사 올립니다.”

강유는 탁자 앞에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했다.

강유라...”

고불선사는 중얼거리면서도 강유는 보지 않고 종이에 글만 쓰고 있었다.

원하는 걸 가져가려면 증표를 보여라.”

고불선사는 여전히 강유를 보지 않고 글을 쓰면서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딸칵!

강유는 품속에서 꺼낸 노리개를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그러자 그때까지 글을 쓰고 있던 고불선사의 손길이 멈춰졌다.

고불선사는 고개를 조금 들어서 탁자 위에 올려진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강유는 붓을 들고 있는 고불선사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랜 수행을 해온 노승이 격동하고 있다. 대체 저 볼품없는 노리개가 무엇이기에 불문 고승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인가?)

강유의 의아함을 느낄 때 붓을 내려놓은 고불선사가 노리개를 집어들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떨리는 손으로 노리개를 집어든 고불선사의 입에서 회한이 서린 불호가 흘러나왔다.

이 어리석은 비구(比丘)가 쌓은 업보가 구천(九天)에 이를 정도로구나.”

긴 한숨을 토해내는 고불선사의 주름진 눈가에 언뜻 물기가 어린다.

강유는 궁금증이 구름같이 일었지만 말없이 그런 고불선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건은 확실히 받았네.”

고불선사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강유를 보았다.

헌데 시주는 이 물건을 맡긴 인물과 어떤 사이인가?”

고불선사는 강유를 살펴보면서 노리개를 다시 탁자에 내려놓았다.

제게 중임을 맡기신 분은 가부입니다.”

가부라...”

강유의 대답을 들은 고불선사는 강유를 지긋이 보며 미간을 조금 모았다.

불가해(不可解)... 불가해로다. 그에게 시주같은 보배가 열매로 맺힐 복연(福緣)은 없어 보였거늘...”

(무슨 뜻인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분은 아버지와 교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강유가 의아해할 때였다.

사연과 내막이야 어찌 되었든 약속은 지켜야겠지.”

고불선사는 혼잣말을 하며 탁자 위에 쌓여있는 종이와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었군.”

이윽고 고불선사는 책 사이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크지는 않지만 상당히 두툼한 봉투였다.

패옥을 전해주라고 한 중생에게 이걸 가져다주면 될 걸세.”

고불선사는 봉투를 강유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스님.”

무릎 꿇고 있었던 강유는 상체를 세우며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스님의 청수를 어지럽힌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후학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봉투를 품속에 갈무리한 강유가 일어나려 할 때였다.

잠깐... 잠깐 기다리게.”

고불선사가 다시 탁자 위의 책들을 뒤지면서 말했다.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이 늙은 중의 작은 성의이니 가져가게나.”

곧 고불선사는 쌓여있던 책들 사이에서 얇은 책을 한권 꺼내 강유에게 내밀었다

헌데 그 책을 받으려던 강유는 깜짝 놀랐다.

책의 표지에는 탄지신통(彈指神通)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스님! 혹시 그 책은 혹시...”

강유는 내밀었던 손을 급히 거두며 굳어진 표정으로 고불선사를 바라보았다.

소림칠십이절기 중 탄지신통을 수련할 수 있는 비결일세. 진본은 아니고 노납이 심심할 때 적어놓은 필사본이지.”

고불선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맙소사!)

하지만 강유는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무림인이라면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를 수가 없다.

단 한 가지만 제대로 익혀도 강호를 독보할 수 있는 게 소림칠십이절기다.

고불선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절기에 속하는 탄지신통의 비급을 선물이라고 내놓은 것이다.

탄지신통을 익히면 십장 밖에 있는 한 치 두께의 철판도 궤뚫을 수 있다네. 무림인이라면 몽매에도 얻길 원하는 절세신공이라고 할 수 있지.”

고불선사는 강유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스님의 성의는 마음으로 받아두겠습니다.”

강유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가부의 명을 수행한 대가로 보상을 받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양하지 말게나. 노납의 성의이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불선사가 다시 권했지만 강유는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자기 사문의 무공을 임의로 유출할 생각도 하고... 여러모로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분이로구나.)

강유는 쓴웃음 지으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좋네 좋아. 더 이상 강권하진 않겠네.”

강유가 탄지신통의 비급을 사양하자 고불선사는 차가 반쯤 들어있는 찻잔에 오른손 검지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대신 노납의 인사는 받고 가시게나.”

결례를 했다면 용서를...”

문간에서 돌아서던 강유의 눈이 치떠졌다.

용서는 노납이 빌어야 하지 않겠는가?”

스윽!

고불선사가 찻잔에 담갔다가 뺀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찻물로 탁자에 글을 쓴다.)

강유는 고불선사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다시 탁자 앞으로 갔다.

다가가서 보니 탁자 위에는 찻물로 <五十里去後 回歸>라는 글이 적혀있다.

(오십리거후(五十里去後) 회귀(回歸)... 오십 리를 갔다가 다시 돌아오라?)

강유가 탁자에 찻물로 적힌 글을 읽고 놀랄 때였다.

산길이 험하니 조심해서 살펴 가시게나.”

!

강유가 글을 읽은 것을 확인한 고불선사는 찻물로 쓴 글을 소매로 쓸어 지워버렸다.

(이건 무슨 뜻인가? 이분은 설마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어서 감시하는 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찻물로 뜻을 전한 것인가?)

강유가 놀라고 당황할 때였다.

고불선사는 고개를 들어서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대들보를 왜...)

강유는 반사적으로 고불선사와 함께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아미타불! 인연이 있다면 우리는 곧 다시 보게 될 걸세.”

고불선사가 합장을 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저 역시 스님을 다시 뵐 수 있는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강유도 마주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불선사와 인사를 나눈 강유는 암자를 나갔다.

!

문이 닫히고 고불암에는 다시 고불선사 혼자만 남게 되었다.

선재(善哉)로다! 세존의 가호로다.”

고불선사는 닫힌 문을 보며 합장을 했다.

크나큰 죄를 안고 소리없이 지옥으로 들어가려 했거늘... 세존께서는 못난 제자가 세상에 뿌려놓을 업보를 거둘 인연을 마련해두셨구나.”

주르르!

합장한 고불선사의 주름 진 손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분명 뭔가 있다.)

강유는 마당 끝의 계단 입구로 가며 곁눈질로 고불암을 보았다.

(탄지신통의 비급을 주겠다고 한 것은 아마 나에 대한 시험이었을 것이다.)

고불선사가 왜 뜬금없이 소림칠십이절기 중 한 가지를 선물이라며 내놨는지 짐작이 가는 강유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옳다구나 하고 받았을 테지만... 그걸 거절한 덕분에 나는 고불선사님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겠지.)

강유는 온몸의 신경이 끊어질 듯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탁자에 찻물로 글을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게 분명하고... 일단 고불선사님의 지시대로 오십 리쯤 갔다가 다시 돌아와 보자.)

강유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유의 모습이 고불암 앞의 마당에서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스!

마당 가운데에 안개 같은 것이 서리더니 이윽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얼굴에 이빨을 드러낸 공포스러운 귀신 형상의 가면을 쓴 인물!

바로 안탕산 깊은 곳에 처참한 모습으로 갇혀있는 제갈륜을 협박했던 마교 교주 귀면지존이었다.

그자가 안탕산에서 이천여 리나 떨어진 숭산에 나타난 것이다.

“...”

마당 끝으로 간 귀면지존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유가 날렵한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것이 귀면지존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확인한 귀면지존은 고불암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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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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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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