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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법에 빠진 두 남녀

 

 

두두두!

마상에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 격투 끝에 두 남녀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찰떡처럼 붙어있는데 흑왕은 정신없이 당산산맥 안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방금 전까지 자신의 꼬리에 달라붙어있던 귀신같은 놈이 따라붙을까봐 전력으로 치달리고 있는 것이다.

요동평야를 활개치고 다녔던 흑왕은 강미루의 형부인 광평객(廣平客) 신가람(申加籃)이란 인물에게 사로잡혀 길들여졌었다.

당시의 흑왕은 발정기에 접어든 암컷에게 한눈을 팔다가 기습을 당해서 올가미가 목에 걸렸었다.

만일 경계하고 있었던 상태라면 절세고수인 신가람이라 해도 흑왕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신가람이 사흘 내내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치고도 흑왕을 따라잡지 못한 게 그 증거다.

당연히 흑왕은 달리는 자기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던 터에 백남빈에게 꼬리를 잡혔었기에 그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귀신같은 존재가 지금은 자기의 등위에 앉아있음은 꿈에도 모르고 있고...

 

***

 

대려장의 기마대는 백남빈과 흑왕이 일으킨 대량의 흙먼지로 인해서 앞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먼지가 갈아 앉았을 때는 강미루와 흑왕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쫓던 철령보 전령의 모습도 사라진 후였다.

해가 지면서 급격히 짙어지는 당산산맥의 산그늘이 두 남녀와 흑왕을 삼켜버린 것이다.

단지 백남빈이 타고 있던 말이 흑왕의 뒤로 쳐져서 대려장의 무사들에게 사로잡혔다.

대려장 무사들 중 몇은 보고를 하기 위해 그 말을 끌고 북쪽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당산산맥 안쪽으로 들어가 강미루와 흑왕의 종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람같이 사라진 흑왕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오면서 수색은 난관에 부딪혀 버렸다.

 

***

 

그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흑왕의 넓은 등은 아기 혼자 태워놓아도 떨어지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안락하다.

백남빈은 흑왕의 엉덩이를 보는 방향으로 앉아있다.

그 때문에 주변의 풍경이 뒤쪽으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당산산맥 안쪽으로 깊이 들어왔구나.)

백남빈은 조금 여유를 되찾아서 자신들의 현재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물론 지금의 상황도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벌어졌던 격전은 그야말로 아찔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아차 실수라도 했었다면 중상을 입었거나 심하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저런 부상을 당해본 적은 있지만 턱을 물리긴 또 처음이군.)

백남빈은 자신의 턱을 물고 있는 붉은 옷의 소녀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턱을 물고 물린 자세다 보니 서로의 코가 아주 가깝다.

소녀는 입으로 백남빈의 턱을 가득 베어 물고 있는 탓에 숨은 전적으로 버선코같이 오똑하고 어여쁜 코로만 쉬고 있다.

(사람의 숨결이 이렇게 달콤할 수도 있구나.)

연신 새근대며 코로 뿜어내는 소녀의 숨결이 바로 위쪽에 자리한 백남빈의 코로 흘러들어온다.

내뿜는 숨결이니 당연히 탁하고 역겨워야하는데 난초나 매화의 향기처럼 그윽하게 느껴져서 백남빈을 혼란에 빠트렸다.

백남빈은 약관을 바라보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이제껏 여자의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다.

백남빈이 알고 있는 여자라고는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사 년 전에 마지막으로 뵌 이모뿐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물론 하녀들이야 적지 않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진지한 성격인 백남빈을 어려워해서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사내들하고만 부대끼며 살아오다 보니 사람 몸에서 나는 냄새는 당연히 시큼하고 쿰쿰하다는 편견이 백남빈에게 있었다.

헌데 자신의 품에 답삭 안겨있는 이 붉은 옷의 소녀는 다른 세상의 존재같다.

몸은 뼈가 하나도 없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용수철 같고 봄날의 버드나무 가지 같은 탄력을 지녔다.

살결은 극상품의 백옥같이 희고 깨끗해서 설부(雪膚)라는 표현이 어째서 생겼는지 알게 해준다.

특히 냄새!

소녀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는 땀조차 향기롭다.

(양귀비의 몸에서 난 땀이 그 어떤 꽃보다 향기로웠다는 고사가 그냥 지어낸 게 아니겠구나.)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소녀가 온몸으로 흘려내는 그윽한 내음에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를 강미루는 커다란 두 눈을 흡뜬 채 노려보고 있다.

두 사람의 몸은 서로의 움직임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밀착되어 있었다.

봉긋한 강미루의 젖가슴의 감촉과 그 안쪽의 심장이 쿵닥거리는 것도 백남빈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진다.

반대로 백남빈의 몸에서 일어나는 망측한 변화 역시 강미루는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물며 백남빈은 두 다리로 강미루의 허리를 휘감은 자세로 마주 앉아있기까지 하다. 그 때문에 백남빈의 아랫도리는 강미루의 하복부와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

(죽일...)

강미루는 서로의 몸이 강하게 짓눌려 있는 부분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백남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수치심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속에서는 열불이 나지만 강미루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지금의 소강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건가?)

분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설움이 몰려와서 울컥해지는 강미루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백남빈의 턱을 물고 있다 보니 힘까지 들어서 눈물이 저절로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뽀얀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백남빈은 잠시 고통도 잊고 중얼거렸다.

"찔리고 물린 내가 울지 않는데 찌르고 문 여나찰(女羅刹)이 우는군."

물론 그 중얼거림은 턱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말같이 되어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하지만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기를 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직은 철부지같은 성미의 이 말괄량이가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강미루는 턱에 힘을 가하여 더 세게 백남빈을 턱을 깨물었다.

"!"

강미루가 온힘을 다해 물은지라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아픈지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턱이 시원해지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하하!"

이 독종(毒種)이 마음이 바뀌어서 놓아주었나 싶어 어리둥절하던 백남빈은 강미루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크게 웃어버렸다.

강미루는 입을 헤 벌리고 있어서 표정이 야릇했다. 백남빈을 깨물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주는 바람에 턱이 빠져 버린 것이다.

입을 바보처럼 벌린 채 두 눈으로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강미루를 보면서 백남빈은 모든 것이 한편의 연극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함께 백남빈은 눈앞의 이 말괄량이 소녀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더 이상 이 소녀에게 악감정도 살기도 생기지 않았다.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풀어 한 손으로는 강미루의 머리를 부드럽게 누르고 다른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입안에 걸치며 턱을 받쳐 올려서 교정시켜 주었다.

강미루로서는 백남빈의 이같은 행동이 너무도 의외였다.

하마터면 자신을 죽일 뻔한 적의 턱을 교정해주는 것이건만 백남빈의 손길에는 정성이 가득하다.

(이 작자 뭐야?)

강미루는 잘 끼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턱을 만지는 백남빈을 바라보며 얼굴이 발개졌다.

어느덧 그녀의 가슴 속에서도 야릇한 감정이 샘 솟아서 두 팔이 자유스러워졌지만 백남빈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의 살기는 봄눈 녹 듯 걷혀졌다.

마주 보며 말 등에 앉아있는 두 사람의 자세는 묘하다.

이제는 껴안고 있지 않았지만 백남빈의 다리는 여전히 강미루의 허리에 감겨 있는 것이다.

"!"

이 야릇한 상황에서 강미루는 방금 전까지의 상황이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여겨져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 남자, 참 잘생겼구나.)

어리둥절해하는 백남빈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미루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비로소 상대가 보기 드물게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임을 알아본 것이다.

열일곱 살 소녀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걸 알 리 없는 흑왕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름 모를 계곡으로 접어들어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

 

밤이 깊어졌다.

그믐은 아니지만 하늘에 짙은 구름이 끼어있어서 칠흑같이 어둡다.

푸악!

백남빈이 허벅지에서 단검을 뽑자 뜨거운 피가 확 튀겼다.

백남빈은 아픔을 참으며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은 단검을 강미루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띠를 끌러 허벅지의 상처를 싸맸다.

강미루는 단검을 받아 허리춤의 칼집에 집어넣었다.

이어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침과 피로 얼룩진 백남빈의 얼굴 하단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백남빈은 묵묵히 강미루의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백남빈은 이미 이 대려장의 말괄량이 소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되고 있었다.

백남빈의 얼굴을 닦아준 강미루의 시선이 아직도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백남빈의 다리로 슬쩍 향한다.

... 미안하오.”

백남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강미루의 허리에서 다리를 슬그머니 내렸다.

천리마 흑왕이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가고 그놈 위에 마주 앉은 두 남녀의 몸과 마음도 따라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남빈과 강미루는 거의 동시에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비록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긴 하지만 내공이 정심한 두 사람인지라 주위를 완전히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느낌이 드는 것이, 마치 똑같은 길을 계속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둠 속의 풍경은 한동안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두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그와 함께 같은 처지라는 은연중의 생각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동료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강미루는 백남빈의 앞쪽으로 이동하여 말고삐를 바르게 잡았다.

백남빈도 돌아앉아 강미루의 바로 뒤에 걸터앉았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긴장과 불안한 감정이 원래 적이었던 두 사람을 한마음이 되게 만들었다.

"끼럇!"

두두두! 히히힝!

강미루가 박차를 가하자 흑왕은 나는 듯이 앞으로 달렸다.

어느 정도 달리자 그들의 앞길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분명 말이 달린 흔적이었다.

백남빈이 두 손으로 강미루의 허리를 잡아 당겨 말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파팟! 휘릭!

강미루가 말고삐를 잡아채자 흑왕은 언제 달렸는가 싶을 정도로 순간적으로 멈춰 섰고 백남빈은 훌쩍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흑왕 앞쪽으로 간 백남빈은 바닥에 생생하게 남은 말발자국을 뼘으로 재어보았다.

그리고 흑왕의 뒤로 돌아가 그놈이 방금 전에 딛은 발굽 자국과 비교해 보니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백남빈의 낯빛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흑왕을 타고 같은 장소를 뺑뺑이 돈 것이다!

"기문진(奇門陣)이오. 느끼지도 못하는 새 어떤 진법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버렸소."

기문진에 빠졌다는 백남빈의 말에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동북의 제갈량이라 불리는 강진남의 딸이었지만 성격이 차분하지 못하여 진법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백남빈의 표정을 보니 심상치 않은 상황인 듯한 데 진법에 문외한이다시피 한 강미루로서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그저 백남빈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기문진법의 대가인 독안룡 이탁을 양부로 둔 백남빈 역시 파진법(破陣法)에는 그리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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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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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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