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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한 계곡

 

 

무공과 달리 기문둔갑(奇門遁甲), 즉 진법은 짧은 시간의 공부나 타고난 재능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공부와 다양한 경험을 걸쳐야만 진법을 설치하고 깨트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물론 백남빈은 보통 사람보다는 기문진법에 대해 아는 바가 많다. 양부 이탁이 기문진법을 설치하고 해체하는 현장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지금 자신들이 빠진 진법과 유사한 것은 본 적이 없다.

 

<삼재검법(三才劍法)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단순하고 평범한 검법이지만 그 안에 무학의 모든 이치를 담고 있다.>

 

난감해하던 백남빈은 양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독안룡 이탁은 백남빈에게 기초적인 무공 두 가지만 가르쳤었다. 무림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삼재검법과 육합심법(六合心法)이 그것이다.

그 두 가지 무공은 천년 이상 무림인들 사이에서 수련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이 이루어져 결점이 거의 없는 완벽한 무공이 되었다.

물론 무공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것과 위력이 강한 것은 별개의 문제다.

삼재검법과 육합심법은 워낙 단순하고 변칙이 없는 무공이라 그 위력이 위협적이거나 빼어나지는 않다.

그 때문에 무림에서 삼재검법과 육합심법을 진지하게 수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헌데 이탁은 다른 무공들은 다 제쳐두고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을 백남빈에게 가르쳤다.

심지어 자신의 독문절기인 칠로절천검(七路絶天劍)도 전수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백남빈이 백무염을 만나 가문의 절기를 익히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탁의 말을 통해 백남빈은 자신의 아버지 백무염도 무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이탁을 뛰어넘는 무공을 지닌...

하지만 이탁은 구체적으로 백무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백남빈이 주변 사람들을 통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백무염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단한 고수일 게 분명한 자신의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백남빈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백남빈은 가전절기를 익혀야하므로 함부로 다른 무공은 익히면 안된다는 양부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무공을 폭 넓고 다양하게 익히는 대신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을 극한까지 수련해온 것이다.

만일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으로 겨룬다면 백남빈은 천하무적일 것이다.

백남빈이 오 년 전 등천제에서 우승할 때 사용한 유일한 무공도 삼재검법이었다.

위력이 평범한 삼재검법만을 구사하다 보니 매번 어려움에 처했었다.

그러나 결국 근본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 덕분에 백남빈은 상대 무공의 결점을 파악해서 승리하길 반복했었다.

 

(하늘의 뜻, 땅의 이치, 인간의 도리...)

백남빈은 삼재검법의 검결을 되새겼다.

(), (), ()을 삼재(三才)라 부르며 도가에서는 우주가 오직 삼재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진법이라는 것도 결국 우주의 원리를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복잡한 진법이라도 삼재가 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삼재 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하늘의 법칙, 즉 천문(天文)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 진법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백남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 사이에 구름이 다소 흩어져 반쯤 찬 달과 함께 여러 개의 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저쪽에 있으니 북쪽은 이 방향이고...)

백남빈은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북두칠성을 찾았다.

그리고는 북두칠성이 떠있는 방향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빙글 돌았다.

앞쪽 하늘에 있던 북두칠성이 갑자기 좌측으로 성큼 돌아가 버린 것이다.

진법이 발동한 것이다!

다시 몇 걸음 내딛자 하늘이 또 빙글 돌면서 북두칠성의 위치가 다시 바뀌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백남빈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북두칠성이 바뀌는 방향과 걸음을 옮긴 거리 사이에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는 게 확인된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되풀이 하자 주위의 경물이 확 바뀌었다.

 

***

 

!”

흑왕의 등에 앉아 있던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백남빈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더니 갑자기 꺼지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흑왕을 황급히 돌려서 백남빈이 있던 곳으로 갔지만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마치 안개가 흩어진 것처럼...

주위는 어둡고 함께 있던 사람마저 갑자기 없어져 버렸다.

너무도 고요한 공간에 강미루 자신만이 홀로 남겨진 것이다.

사방에서 무언가 무서운 것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생겨난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숨을 쉬기도 어렵게 만든다.

공포에 휩싸이자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고 이빨은 저절로 닥닥 부딪친다.

"...!"

극심한 공포에 질린 강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뱉으며 흑왕의 등에 와락 엎드렸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은 채 미친 듯이 흑왕의 배를 걷어찼다.

히이이잉! 두두두!

갑자기 박차가 가해지자 흑왕도 깜짝 놀라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앞으로 달려갔다.

사람은 두려움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말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발굽의 진동이 전해지지 않음을 느낀 강미루가 눈을 번쩍 떴을 때에는 말과 사람이 함께 경사가 심한 비탈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주르르르! 티틱!

흑왕은 뒷발을 웅크리고 앞발은 버티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콰드드드!

그러나 비탈의 경사는 거의 수직에 가까울 정도라 점점 더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순식간에 삼십여 장을 미끄러져 내려갔을 때 강미루는 십여 장쯤 앞쪽에 집채만한 바위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흑왕이 미끄러져 가는 속도는 이미 쏘아진 화살 같다.

이대로 미끄러진다면 말과 사람은 그 바위에 부딪혀서 서로를 구분 못할 정도의 피떡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히히힝!

흑왕도 위기를 느끼고 웅크렸던 뒷발을 벌떡 세웠다.

파앗!

그리고는 미끄러져 내리던 속력보다 더 빨리 달려서 눈앞의 커다란 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바위 너머는 허공이었다.

바위는 가파른 비탈의 끝 부분이었으며 그 너머는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시커먼 절벽이었던 것이다.

쐐애액!

바람 소리가 강미루의 귓가에 비단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흑왕도 허공에서 곤두박질 쳐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강미루와 함께 떨어졌다.

아아악!”

죽었구나 싶은 생각에 강미루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을 토해내었다.

그 직후 강미루는 후끈한 열기가 절벽 아래쪽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북두칠성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옮기기를 십여 차례 했을 때 백남빈은 마침내 원형의 미로를 벗어나 진법의 다른 부분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곳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좁은 협곡이었다.

주위의 경물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강미루와 흑왕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아차!)

깜짝 놀란 백남빈이 강미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협곡으로 들어 온 방법으로는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아아악!>

멀리서 강미루가 내지른 게 분명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들려서 백남빈의 속을 바짝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소저! 내 목소리가 들리시오?”

비명이 들린 방향을 어림하여 외쳐보았다.

하지만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서 불러 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어쩔 수 없이 백남빈은 바위들 틈에 나있는 사람이 다닌 듯한 길을 따라갔다.

 

***

 

길은 빙글빙글 돌면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형태였다.

끊겼는가 싶으면 바위 뒤로 이어져 있고 오른쪽으로 도는가 싶으면 밑으로 내려가고 수시로 꼬불꼬불해져서 묘하기 짝이 없었다.

내친김에 끝까지 가보기로 작정한 백남빈은 단검에 찔려 아픈 다리를 끌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윽고 내려가는 길이 사라졌을 때 백남빈은 자신이 상당히 넓은 분지(盆地)의 바닥에 이른 것을 알아차렸다.

밤인 데다가 지면에서 한참 아래로 내려온 바닥이라 분지의 형태와 넓이는 짐작할 수가 없다.

(그 말괄량이가 무사한지 모르겠다.)

백남빈은 강미루가 아직도 원형의 미로를 떠돌고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든 빠져 나갔는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당장은 좀 쉬어야한다.

하루 종일 말을 달려 지친 데다가 강미루의 단검에 찔린 허벅지의 상처에서 출혈이 가볍지 않아서 어지럽다.

털썩!

백남빈은 풀이 무성하게 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밤하늘을 덮고 있던 먹장구름이 흩어지면서 상큼한 반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숨을 고르며 소지품을 점검해봤다.

악전고투를 치뤘지만 다행히 잃어버린 물건은 없었다.

무황성에 제출해야하는 밀서를 만지던 백남빈의 손길에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가 만져졌다.

정교하게 만든 그 주머니 안에는 손바닥 반쪽만한 옥패가 들어있다.

옥패는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를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단단하다.

그 옥패가 막아준 덕분에 백남빈은 강미루가 날린 화살에 가슴을 맞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어디 계시는지... 살아계시기나 하시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날 지켜주신 셈이다.)

백남빈은 냉옥패를 어루만지면서 너무 어렸을 때 헤어져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푸르르! 꿀럭! 꿀럭!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괴상한 소리가 상념에 잠긴 백남빈으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 뭔가?)

마치 거대한 괴물이 숨을 쉬는 듯한 소리에 백남빈은 모골이 송연해 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백남빈은 토곤이 강진남에게 예물로 보내려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꾸르륵! 푸르르!

그 사이에도 무언가를 토해내는 듯한 괴성이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청랑검이라 이름 붙인 단검의 날을 번득이지 않도록 수건으로 감싼 백남빈은 살금살금 기어서 괴성이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에 하늘에서는 반달이 완전히 구름에서 벗어나 별들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달빛이 제법 환해 주변을 분간할 수 있다.

거대한 분지의 가운데로 다가가니 바닥에서 크고 작은 불빛이 일렁이고 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살펴본 백남빈은 이내 그것이 실제 불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넓이가 족히 삼십 장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연못에 달빛과 별빛이 비친 것이다.

꾸르르! 푸륵!

괴성(怪聲)은 바로 그 연못 가운데에서 나고 있었다.

연못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흙은 따뜻하고 공기는 훈훈해졌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연못은 온천(溫泉)인 게 분명하다.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 주변에는 여러 가지 풀이 자라고 있으며 꽃이 핀 것과 열매가 달린 것도 있었다.

살금살금 기어 연못으로 다가가고 있는 백남빈의 콧속으로 풀냄새와 함께 각가지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심신을 상쾌하게 하는 향기다.

푸륵! 푸르르!

연못 가운데에서 다시 괴성이 들렸는데 말이 내는 투레질 소리 같다.

백남빈은 몸을 숨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살펴봤지만 딱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 백남빈은 몸을 일으켜 연못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푸르르! 푸릉!

붉은 색의 무언가가 물위에 떠 있고 시커먼 말 한 마리가 발버둥을 치면서 고개를 물 밖으로 내었다 잠겼다 하기를 반복한다.

그 시커멓고 거대한 머리로 보아하니 강미루의 천리마 흑왕인 게 분명하다.

(붉은 물체는 대려장의 그 말괄량이겠구나.)

백남빈은 비로소 흑왕과 강미루가 자기보다 먼저 이 신비한 절곡에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구하고 볼 일이다.

연못에 발을 담가 보니 너무 뜨거워서 살갗을 바늘로 치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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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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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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