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에 해당되는 글 152건

  1. 2020.03.24 [고독천년] 제 11장 누란왕후라는 여인
  2. 2020.03.24 [고독천년] 제 10장 동굴 속의 시체들
  3. 2020.03.23 [북두무맥] 제 19장 미녀각기검
  4. 2020.03.23 [달마묵장] 제 20장 마지막 고비
  5. 2020.03.23 [금포염왕] 제 12장 마두들이 준 기연 2
  6. 2020.03.23 [북두무맥] 제 18장 사자검의 비밀
  7. 2020.03.23 [달마묵장] 제 19장 운명을 읽는 눈
  8. 2020.03.23 [금포염왕] 제 12장 마두들이 준 기연 1
  9. 2020.03.22 [금포염왕] 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 2
  10. 2020.03.22 [달마묵장] 제 18장 영물을 잡는 법
  11. 2020.03.22 [북두무맥] 제 17장 소년이여. 창평곡에 와서 검을 받으라.
  12. 2020.03.22 [금포염왕] 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 1 1
  13. 2020.03.22 [달마묵장] 제 17장 마검칠식
  14. 2020.03.22 [전설신검] 제 10장 두 가지 선물
  15. 2020.03.22 [북두무맥] 제 16장 절벽에 숨겨진 문
  16. 2020.03.21 [고독천년] 제 9장 신비한 동굴 2
  17. 2020.03.21 [금포염왕] 제 10장 향로 속의 무공비결 3
  18. 2020.03.21 [만화시나리오] 집필내역
  19. 2020.03.21 [달마묵장] 제 16장 첫번째 살인 1
  20. 2020.03.21 [북두무맥] 제 15장 그릇 깎는 미녀 2
  21. 2020.03.21 [전설신검] 제 9장 마녀의 연심
  22. 2020.03.21 [고독천년] 제 8장 독수리를 타고
  23. 2020.03.20 [금포염왕] 제 10장 향로 속의 무공비결 2 1
  24. 2020.03.20 [달마묵장] 제 15장 첫번째 실전
  25. 2020.03.20 [북두무맥] 제 14장 연못에서 건진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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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누란왕후라는 여인

 

 

측천무후의 경우 외에도 당나라를 기울게 만들어 경국지색의 고사를 만든 양귀비도 원래는 현종(玄宗)의 다섯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였다.

, 현종은 며느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든 것이다.

이처럼 유목사회에서는 형사취수같은 수계혼(收繼婚)의 풍습이 형제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부자지간에도 적용되었었다.

 

누란왕국은 흉노를 포함한 유목사회의 한 가운데 존재했었다. 그 때문에 형사취수처럼 유목사회에서 보편적이던 제도와 풍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누란왕후 흑요설의 신세는 비참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일부종사(一夫從事)는 고사하고 불과 몇 년 사이에 거푸 세 남자를 남편으로 삼아야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행로는 남편이 세 번 바뀌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누란왕국이 연거푸 일어난 왕위찬탈로 쇠락하자 호시탐탐 누란왕국의 부()에 눈독을 들여온 주위의 나라들이 일제히 쳐들어온 것이다.

총 십삼 개의 소국이 연합하여 누란왕국에 쳐들어왔고 연이은 반란으로 국력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누란왕국으로서는 십삼 국 연합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흑요설의 양아들이기도 했던 신임 누란왕은 아름다운 양모의 육체와 부귀영화를 얼마 누려보지 못하고 오체분시(五體分屍)당해 죽고 말았다.

그와 함께 화려했던 누란왕국도 잿더미로 화해 버렸으며 그 얼마 후 불어 닥친 강력한 모래폭풍에 휩쓸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비운의 절세미인 누란왕후 흑요설도 전란과 재앙의 와중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누란왕후 흑요설은 죽은 게 아니라 누란왕국을 멸망시킨 십삼 개 국 국왕들의 공동 전리품이 되어 버렸었다.

누란왕국의 막대한 보물을 공평하게 나눠가진 십삼 국의 국왕들은 누란왕후 흑요설의 처리 문제에 이르러서는 골치를 앓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흑요설의 나이는 겨우 이십이 세였다.

한창 완숙하여 물이 오른 그녀의 미모에 십삼 국 국왕들이 홀딱 반한 것은 필연이었다.

십삼 국 국왕들은 흑요설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으며 급기야 십삼 국 사이의 전쟁으로 비화될 판국이었다.

이에 십삼 국 국왕들은 한 가지 절충안을 짜내기에 이르렀다. 흑요설을 어느 곳에 감금해두고 한명이 한 달씩 돌아가며 소유하기로 한 것이었다.

결국 흑요설은 은밀한 이궁(離宮)에 갇힌 채 십삼 국 국왕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국의 왕후였던 고귀한 신분에서 욕정에 미친 사내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게 된 흑요설은 처음에는 반쯤 미쳐버렸다.

그러나 본래 총명하고 의지견정 했던 흑요설인지라 오래지 않아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는 짐승같은 세상의 사내들에게 복수를 다짐했고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후 삼년의 세월동안 흑요설은 십삼 국 국왕들의 노리개 노릇을 충실히 해냈다.

과연 흑요설이 굴욕과 수치를 참으며 인내한 보람이 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오래 먹다보면 질리게 되는 법이다.

흑요설의 육체를 돌아가며 탐닉하던 십삼 국 국왕들도 삼년의 세월이 지나자 차츰 발길이 소원해졌다.

그때를 노려 흑요설은 이궁을 탈출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된 흑요설은 대과벽으로 달아났다.

그녀는 오래 전 누란왕국의 보물창고에서 한 장의 장보도(藏寶圖)를 본적이 있었다. 그 장보도는 현음마모(玄陰魔母)라는 전설적인 상고기인의 은거지를 찾을 수 있는 지도였다.

현음마모는 경이적인 무공뿐 아니라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신술(神術)마저 지녔었다고 알려진,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이었던 전설적인 고수였다.

무림 역사를 통틀어 봐도 현음마모만큼 강했던 여인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 현음마모가 남긴 절기를 익히기만 하면 흑요설은 자신을 농락한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그녀는 현음마모의 은거지였던 이곳 현음동천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음동천 어디에도 현음마모의 유학(遺學)은 남아있지 않았다. 흑요설이 현음동천에 들어왔을 때는 숱한 보물들 외에 무공과 관련된 유물은 단 한 가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 흑요설은 절망에 빠졌다.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보물이 아니라 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연자실해 있던 흑요설은 오래지 않아 복수를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도를 생각해냈다.

본래 그녀에게는 남들이 지니지 못한 한 가지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내들을 기쁘게 해주는 방중비법(房中秘法)이었다.

첫 번째 남편이었던 누란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배웠던 그 방중비법에는 사내의 양기를 갈취하여 젊음을 유지하는 채양보음(採陰補陽)의 술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흑요설은 자신의 장기인 채양보음을 바탕으로 한 가지 독계(毒計)를 구상했다. 몇 명의 고수들을 현음동천으로 유인하여 내공을 갈취하는 게 그것이었다.

이를 위해 네 명의 고수가 선택되었다.

 

<서역사천왕(西域四天王)>

 

당시 서역 일대를 주름잡던 최강의 무사들로 개개인이 한 가지 방면에서 가히 우내최강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마화존자(魔火尊者)!

-천붕랑왕(天鵬狼王)!

-유사신령(流砂神靈)!

-파천도성(破天刀星)!

 

이들이 서역사천왕인 바, 중원무림의 역대 어떤 고수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지닌 절세고수들이었다.

개개인의 내공이 오갑자(五甲子) 이상이었던 그들을 혹자는 중원무림 역사상 최강자들인 고금오대고수와 비견하기도 한다.

서역무림, 아니 변황무림이 배출한 최강의 고수들인 서역사천왕은 당시 서역을 사분(四分)한 채 웅거하고 있었다.

흑요설은 그들에게 은밀히 현음마모의 장보도의 사본(寫本)을 보내 현음동천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그녀가 의도한 대로 네 명의 절세고수들은 거의 동시에 현음동천에 이르렀고 흑요설도 우연을 가장하여 그들과 합류했다.

서로를 잘 알고 있던 서역사천왕은 치열한 암투를 벌이면서도 흑요설과 함께 현음마모의 유물을 찾았다.

 

* * *

 

<현음마모의 유물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 계집이 노린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네 사람의 내공이었다. 그 계집은 빼어난 미모와 육체로 우리 네 사람을 차례로 유혹했고,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 계집의 간계에 넘어가 그년의 육체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 계집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회한과 원통함으로 가득한 글이 이어졌다.

만년한철의 철문에 글을 새기고 죽은 늑대 가죽의 거한은 바로 서역사천왕중에서도 가장 패도적인 인물이었다는 천붕랑왕이었다.

천붕랑왕은 다른 무공도 뛰어나지만 늑대와 날짐승을 다루는 재주에서도 일가를 이룬 기인이다.

이검한의 추측대로 그를 이곳 현음동천으로 데려온 철익신응은 천붕랑왕이 기르던 영물이었다.

 

* * *

 

흑요설이 쳐놓은 함정은 완벽했다.

서역사천왕은 초절한 무공을 지닌 만큼 자존심도 극도로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조차도 고금제일의 미인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는 흑요설의 치명적인 매력 앞에서는 그저 무기력한 수컷에 불과했다.

서역무림인들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던 서역사천왕이었건만 흑요설의 육체를 독점하기는커녕 그저 넷이서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어이없게도 그들은 매일매일 흑요설의 부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역사천왕은 자신들의 몸에서 내공의 태반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렸다.

서역사천왕은 아연실색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들의 막강한 내공 대부분을 흑요설이 갈취해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가히 천년(千年) 수위의 내공이 모두 흑요설의 한 몸으로 흘러든 것이다.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한 서역사천왕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흑요설을 죽이기 위해 협공을 하게 되었다.

다른 무공은 차치하고라도 무려 천년 수위에 육박하는 전무후무한 공력을 지닌 마녀가 세상으로 뛰쳐나간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겠는가?

서역사천왕은 세상을 위해서라도 흑요설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한 여인과 네 사내 사이에 생사를 건 격전이 벌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파천도성과 유사신령이 먼저 흑요설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파천도성은 무엇이든 벨 수 있는 파천삼식을 구사할 수 있고 유사신령은 어떤 공격이라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유사잠행술을 지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내공의 태반을 상실한 터라 흑요설에게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치명상을 입었다.

천붕랑왕과 마화존자 역시 예외가 아니라 흑요설의 독수에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그렇기는 해도 천붕랑왕과 마화존자는 어찌 어찌 흑요설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먼저 천붕랑왕이 사력을 다해 분 초붕적(招鵬笛)의 힘이 흑요설의 혼백을 뒤흔들어 기절하게 만들었다.

그후 마화존자가 정신을 잃은 흑요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다.

 

* * *

 

<본좌와 마화존자가 천신만고 끝에 흑요설을 쓰러뜨리기는 했으나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그 계집은 우리 네 사람의 내공을 융합하여 사람의 손으로는 죽일 수 없는 불사지체(不死之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네 사람 중 최강자인 마화존자가 한 가지 금제(禁制)로 그 계집을 영원히 잠재우겠다며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마화존자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본좌이지만 과연 마화존자가 흑요설을 금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서 이에 경고하거니와 그대는 발길을 돌릴지어다. 그 대가로 우리 네 사람의 절기를 그대에게 남기노니 그것으로 만족하기를 바란다!>

 

천붕랑왕의 회한에 찬 글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여색이 원인이 되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 하는 천붕랑왕의 참담한 감정이 그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천붕랑왕이 남긴 글을 다 읽은 이검한은 마치 한 편의 전설을 읽은 느낌이 들었다.

서역제일미인으로 이름난 누란왕후가 이 안에 잠들어 있단 말이지?”

이검한은 눈을 빛내며 철문을 주시했다.

(과연 그 여자가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서역사천왕 정도 되는 인물들조차 미혹케 했단 말인가?)

이검한은 강렬한 호기심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당장 철문을 열고 들어가 누란왕후 흑요설이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천붕랑왕의 경고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경계심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래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한 법이다.

이검한은 강렬하게 치미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이미 천 년 이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 여자가 아직 살아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한 이검한은 손을 뻗어 철문을 밀었다.

그그긍!

육중한 철문은 그리 어렵지 않게 열려졌다.

(... 저럴 수가...!)

그리고 열리는 철문 안쪽을 들여다보던 이검한은 놀라 눈을 치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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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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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동굴 속의 시체들

 

 

다시 얼마나 더 걸어 들어갔을까?

와아!”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걸음을 멈췄다.

멈춰선 이검한 앞쪽에는 널찍한 지하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지하 광장은 동굴의 깊은 안쪽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환했다. 광장의 벽과 천장 곳곳에 야명주가 박히거나 매달려 있는 덕분이었다.

수백 평은 족히 됨직한 드넓은 지하 광장은 궁궐처럼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바닥은 융단과 대리석으로 덮여있으며 가재도구들은 하나같이 금은보화로 장식되어 있다.

흡사 황제의 거처에 들어온 것같은 지하 광장의 화려함은 보는 이의 입을 저절로 벌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지하의 궁궐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금은보화로 장식된 가재도구들과 값 비싼 장식품들의 대부분은 강력한 힘에 의해 부서지고 으깨어져 있었다.

마치 한바탕의 거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시체가 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지하 광장으로 들어서던 이검한의 눈이 반짝 빛났다. 두 구의 시체를 발견한 때문이다.

첫 번째 시체는 지하 광장 가운데에 자리한 연못에 몸을 반쯤 담근 채 죽어 있었다.

직경 일 장쯤인 원형의 연못에는 우윳빛의 반투명한 액체가 가득 고여 있다.

그 뽀얀 액체에 잠겨있는 시체의 상체는 전혀 썩지 않아서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반면 연못 밖으로 드러나 있는 시체의 하체 부분은 마도 파천의 주인처럼 바짝 말라 목내이가 되어 있다.

아마도 연못에 고여 있는 액체가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아온 듯 했다.

이검한은 연못으로 다가가 시체를 살펴보았다.

반투명한 액체 속에 상체가 잠겨있는 인물은 백발의 노인인데 얼굴도 백짓장처럼 창백하다. 마치 단 한 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기라도 한 듯이...

안색이 창백한 그 노인의 시체 옆에는 벽옥패(碧玉牌)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유사지존령(流砂至尊令)!

 

벽옥패의 전면에는 그와 같은 글이 전자체로 새겨져 있으며 글 옆에는 두 마리 용이 모랫속을 누비고 다니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 벽옥패의 뒷면에는 한 가지 무공비결이 깨알보다도 작은 크기의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

 

-유사잠행술(流砂潛行術)!

 

믿어지지 않지만 이 무공을 익히면 흐르는 모래, 즉 유사(流砂) 속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닐 수 있다고 적혀있다.

일단 빠지면 두 번 다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유사다.

헌데 그 공포스러운 유사 속을 물처럼 헤집고 다닐 수 있는 비법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검한이다.

유사잠행술을 익히면 가공할 무게로 눌러대는 유사의 압력을 오히려 몸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전환시킬 수가 있다.

누르는 힘이 강해지면 반발력도 비례해서 강해지는 용수철의 원리를 이용한 무공인 것이다.

몸에 가해지는 압력을 더 강한 반발력으로 상쇄할 수만 있으면 유사든 땅 속이든 자유자재로 헤집고 다닐 수가 있다.

(유사잠행술의 이같은 이치는 다른 무공에도 적용시킬 수 있겠다.)

유사잠행술의 비결을 읽어본 이검한은 가슴이 뛰었다.

압력이 가해지는 즉시 더 강력한 반발력으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어떤 공격에서도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파천삼식도 대단한 무공이지만 유사잠행술은 더 쓸모가 많겠구나.)

이검한은 유사지존령을 갈무리하며 이 광장에서 발견한 두 번째 시체로 다가갔다.

 

두 번째 시체는 지하 광장의 끝에 있었다.

지하 광장이 끝나는 그곳에는 어디론가 통하는 철문이 있는데 오래 전에 만들어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파란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 철문이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시체는 바로 그 만년한철로 주조된 철문 앞에 우뚝 선 채 죽어 있었다.

육척이 넘는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인 그 인물은 늑대가죽으로 만든 피의(皮衣)를 걸치고 있는데 복부에는 한 자루 기형검(奇形劒)이 관통해 있었다.

피의인의 명치 부분을 궤뚫은 기형검은 칼날 양쪽에 삐죽삐죽 가시가 돋아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검을 낭아검(狼牙劒)이라고 부른다.

낭아검은 거한의 명치 부분을 관통한 후 뒤쪽의 철문에 깊이 꽂혀 있었다.

만년한철로 주조된 철문을 간단히 뚫고 들어간 것으로 보아 그 낭아검도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피의인은 스스로의 몸을 낭아검으로 찔러 철문에 고정시킨 듯했다. 마치 죽어서라도 철문을 지키겠다는 듯이...

그 인물의 오른손에 한 자루의 짧은 뿔피리가 움켜쥐어져 있는 게 이검한의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이 철익신응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검한은 눈을 반짝이며 뿔피리를 살펴보았다. 그 뿔피리가 뭇 조류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신기(神器)임을 알아본 것이다.

(철익신응 정도 되는 영물을 부렸다면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을 텐데... 대체 이 인물이 죽어서도 지키려 한 것은 무엇일까?)

이검한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철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시체 옆의 철문에는 빽빽하게 글이 적혀 있었다.

 

<걸음을 돌려라 인연자여! 그대의 호기심이 자칫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으니...!>

 

철문의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 글은 물론 늑대 가죽을 걸친 거한이 죽기 전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걸음을 돌리라는 경고를 두 번이나 보게 되네.)

이검한 눈을 빛내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어리석게도 우리 사천왕은 죽기 전에야 그 요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현음마모(玄陰魔母)의 유물로 우리를 이곳 현음동천으로 유인한 요부는 놀랍게도 몇 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누란왕후(樓蘭王后) 흑요설(黑妖雪)이었던 것이다!>

 

누란왕후 흑요설!”

거기까지 읽은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누란왕후 흑요설!

그녀가 누군가?

저 전설의 왕국 놉-노르, 즉 누란의 마지막 왕후였던 절세미녀가 아닌가?

서역 일대에서는 아직도 그녀를 고금제일미인(古今第一美人)으로 추앙하고 있다.

최소한 서역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란왕후 흑요설이 양귀비(楊貴妃)나 왕소군(王昭君)을 능가하는 미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누란왕후 흑요설은 그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누란은 천산남로(天山南路)의 남쪽 공작하(孔雀河)의 끝, -노르(羅布泊)호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당시 서역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였다고 한다.

누란이 부유하게 된 것은 전한(前漢) 시대에 열린 비단길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 덕분이었다. 머나먼 서방으로 장사를 떠나는 대상(隊商)들은 반드시 누란을 경유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흑요설은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누란왕의 눈에 들어 서역 제일의 부국 누란의 왕후라는 고귀한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흑요설이 십구 세 되던 해 누란왕은 흑요설의 미모에 욕심을 낸 자에 의해 피살당하고 말았다.

살인자는 다름 아닌 누란왕의 동생이었다.

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그자는 왕위 뿐 아니라 형수인 흑요설까지 차지해버렸다.

흑요설은 모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남편을 죽인 원수와 부부로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녀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흑요설이 이십이 세 되던 해에 두 번째 남편이었던 시동생마저 타인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흑요설의 두 번째 남편을 살해한 인물은 전 남편의 아들이었다.

흑요설에게는 전처소생의 아들이 한명 있었는데 바로 그자가 숙부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왕위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자 역시 짐승과 다름없는 사내였다. 그자는 숙부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에 그치지 않고 양모인 흑요설까지 유린한 것이었다.

양모를 범해서 아내로 삼다니...

이같은 패륜무도한 일은 유교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중원에서야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유목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유목사회에서는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 자체가 큰일이다.

특히 연약한 여자들은 반드시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형사취수(兄死取嫂)라는 유목민의 전통도 그 때문에 생겼다. 형이 죽어 홀로 된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삼아 보살펴주는 것은 권리라기보다는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징기스칸의 어머니이며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리는 호엘룬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시동생인 다리타이의 아내로 살아야만 했었다. 징기스칸의 강력한 권위로도 숙부가 자신의 어머니를 차지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유목사회에서 여자에게는 아무런 인권도 없다. 그저 말이나 양같은 재산의 일부로 여겨질 뿐이다.

형수든 누구든 일단 자신들의 가족 속에 들어오면 그 여자는 가족의 공동 재산이 된다.

그리고 가족의 공동 재산인 여자를 다른 가문의 사내에게 무상으로 양도할 수는 없다.

노동력을 지닌 여자를 가족의 공동 재산으로 여기거나 홀몸이 된 여자를 가족 중의 누군가가 아내로 삼아 부양하는 전통은 비단 형제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부자(父子) 사이에도 동일한 규칙이 적용된다.

전한시대의 절세미인 왕소군은 흉노의 추장인 호한야선우(呼韓耶單于)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었다.

그후 연로한 호한야선우가 죽자 그의 장남인 복주루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아들을 더 낳았다는 고사가 한서 흉노전(匈奴傳)에 기록되어있을 정도다.

이처럼 유목 사회에서 아버지의 사후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첩들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여자들도 아버지가 남긴 재산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의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물려받는 것으로도 인식이 된다.

서방의 유다민족 역시 유목민족이었던 탓에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후 아버지의 여자들을 모두 범한 기사가 구약에 나온다.

심지어 압살롬은 지붕 위에 천막을 쳐놓고 그곳에서 아비의 후궁들을 차례로 범하는 장면을 백성들에게 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선비전(鮮卑傳)에도 선비족은 형사취수의 제도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여자들은 차지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선비족은 몽고와 같은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제삼대 황제 고종(高宗)도 자기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무씨(武氏)를 차지하여 황후로 삼았었다. 성군으로 이름 높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었건만 아들이 자신의 후궁을 차지하는 봉변을 당한 것이다.

당고종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그 후궁이 후일의 측천무후(測天武后).

하긴 당태종 이세민으로서는 자신이 품었던 미녀를 아들이 차지한 것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나라를 세운 이씨 일족이 원래 선비 계통의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중원을 정복하긴 했으나 유목민의 피가 짙게 남아있던 당 황실에서는 아비와 자식간에 여자를 주고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고종의 경우도 부황인 이세민이 살아있을 때부터 배분상으로는 어머니인 무씨와 사통했다고 하며 이세민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아들을 크게 나무라진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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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미녀각기검(美女刻器劍)

 

 

말 그대로 세외선경인 창평곡이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유는 창평곡 주위에 펼쳐져 있는 세 가지 절진 때문이다.

창평곡의 원래 주인이었던 상고시대의 기인이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설치한 진법을 이백이 보완하여 난공불락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백은 제갈공명이 남겼다는 팔진도해(八陣圖解)를 얻어 기문둔갑으로도 일절(一絶)이었었다.

이백에 의해 창평곡 주위에 구축된 미혼(迷魂), 산백(散魄), 박령(縛靈)의 절진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 세대에 한 둘 정도에 불과하다.

삼대절진(三大絶陣)은 비단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것 역시 저지한다.

창평곡 밖으로 나가려면 삼대절진의 바탕이 된 팔진도해가 있어야한다.

헌데 동부 어디에서도 팔진도해는 발견되지 않아서 백남빈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장은 사자검결의 수련에 전념해야하는 터라 창평곡을 빠져나가는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

 

히히힝! 푸르르!

천리마인 흑왕은 보름 넘게 마음껏 달리지 못해서 갑갑한지 풀밭의 이쪽에서 풀쩍 저쪽에서 풀쩍 하면서 뛰고 있다.

백남빈은 녹지 앞의 작은 바위에 앉아 그 모양새를 보고 있었다.

 

지난 열흘 간 백남빈은 사자검결의 모호한 구절들을 수없이 되씹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사자검결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백남빈은 강미루가 나무 그릇을 깎는 것을 보며 만든 검초의 연습에 매진했다.

그렇게 열흘간 연습한 결과 사자검을 찌를 때마다 고리같은 검기가 자연스럽게 쏘아져 나가게 되었다.

어느덧 백남빈의 이 검초는 천의무봉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비록 단 한 수뿐이지만 수비와 공격 모두를 겸하여 전혀 빈틈이 없는 검초다.

고리같은 검기는 뻗어나가는 방향마다 각기 다른 변화를 보이니 실은 수만 초로 이루어진 검법이나 다름없다.

강미루도 좌측 석실에 구비되어 있는 철검(鐵劍)들 중 하나를 꺼내 연습하고 있지만 백남빈 정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 검기를 뽑아내지 못한다.

백남빈은 강미루에게 사자검을 써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강미루는 사자검은 너무 무거워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사양했다.

사실 무겁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사자검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주인이므로 자신이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된다 생각하고 있었다.

강미루의 그런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백남빈은 그녀가 그저 고맙고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무공의 성취와 달리 백남빈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사자검결을 접한 후로 그의 마음속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왜 그토록 사람들을 각박하게 대했을까? 과연 무엇을 위해 그리했을까?)

백남빈은 철이 든 이래 처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백 조사(祖師)께서는 황제도 미워하고 전쟁도 미워하셨다. 각기 다른 출신과 배경을 지니셨던 열 두분의 전인들께서도 하나같이 황제처럼 힘 있는 자들에 의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졌음을 한탄하는 글을 남기셨다.)

원래 진지하고 생각이 많은 성격의 백남빈이었다.

그 때문에 이백과 사자검전 전인들의 사연과 생각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위하여 살아왔을까? 무황성을 위해서? 아니면 내 자신을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해답을 구할 수 없는 의문이 끝없는 일었다.

그에 따라 자연히 말수가 적어지고 강미루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입을 여는 일도 없어졌다.

그런 백남빈을 지켜보던 강미루는 전처럼 신나고 활발하게 만들려고 적지 않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변방의 쾌활한 연가(戀歌)를 불러 주기도 하고 재미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만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갈아앉은 백남빈의 기분은 쉽사리 되살아나지 않았다.

(저 사람의 기분을 되살리려면 헐렁한 옷과 풀치마를 입고 있을 때처럼 도발을 해서 가슴에 불이라도 질러 줘야하는 것일까?)

별별 생각을 다하는 강미루였다.

 

슥!

녹지 가에 앉아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백남빈에게 강미루가 철검을 확 찔러왔다.

철검의 끝이 나사처럼 돌면서 날아든다.

바로 백남빈이 창안한 그 검초였다.

“억!”

백남빈은 갑작스런 강미루의 공격에 깜짝 놀라 몸을 옆으로 굴려 가까스로 피해냈다.

비록 백남빈처럼 검기를 쏘아내지는 못했지만 강미루의 이 검초는 빠르고 강했다. 녹지의 물을 꾸준히 마셔서 내공이 심후해진 결과다.

(아니 왜 이래?)

라는 소리가 백남빈의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데 강미루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쫑알거렸다.

"대체 이 검법의 이름은 뭐죠? 그냥 무명검법(無名劍法)이라고 할까요?"

강미루는 백남빈이 심기일전하도록 일부러 도발을 해온 것이다.

“그럼 미루일검(美樓一劍)이라고 이름을 붙일까?”

백남빈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하며 대꾸했다.

"아니면 소녀절세검(少女絶世劍)? 그것도 아니면 미녀참마검(美女斬魔劍)이라고 할까?"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장난기를 회복하는 백남빈이었다.

"장난처럼 말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당신의 이 검법은 정말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절학이란 말이에요."

백남빈이 오랜만에 농을 하자 강미루는 내심 기뻤지만 눈을 흘기는 척 했다.

"당신이 그릇 깎는 것을 보고 훔쳐 배운 것에 불과한데 무슨 절학이라고까지 하겠소. 그냥 미녀각기검(美女刻器劍)이라고 하지. 그래 그게 가장 적합하겠어."

대충 대답하던 백남빈의 눈이 반짝였다. 별 생각없이 지어낸 미녀각기검이란 이름이 마음에 든 것이다.

"쳇, 검법이라면 이름도 위풍 있고 당당해야지 그게 무슨 검법이름 같기나 해요?"

강미루도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싫지는 않은 듯 했다.

그리하여 백남빈이 강미루가 나무 그릇을 깎는 것을 보고 만들어낸 기이한 검초는 미녀각기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강미루의 도발이 성공해서 백남빈의 무거웠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미루, 당신을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오."

백남빈은 녹지 가에 강미루와 함께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사과했다.

“사자검전을 이어야한다고 생각하니 이백 조사와 여러 전인들의 삶이 절절하게 와 닿아서 마음을 무겁게 했소.”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강미루도 백남빈의 허리를 뒤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저도 열 세분 전인의 사연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며지는 기분이 되곤 한답니다.”

강미루는 한숨을 쉬며 백남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울였다.

시대 탓인지 운명인지 모르지만 사자검의 전인 열세명의 삶은 누구 하나 평탄하지 못했다.

모두가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결국 실의하고 창평곡으로 돌아와 쓸쓸히 삶을 마치곤 했다.

살아있는 신선이라 불리던 이백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백남빈과 강미루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사자검의 마지막 전인인 진룡(陳龍)이란 인물의 삶이었다.

 

***

 

사자검의 전인들은 절세의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무림에서 활동하지는 않았다. 시조인 이백을 필두로 좁은 강호가 아닌 더 큰 세상에 뜻을 두고 대의(大義)를 펼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무림의 패권다툼에 개입한 바가 없다 보니 사대비문으로 꼽힘에도 불구하고 사자검전에 대해 자세히 아는 무림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사자검의 전인들은 세상에 뜻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영합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결국 세상에서 배척을 당해 말년에는 쓸쓸히 창평곡에 돌아와 생을 마치곤 했다.

명재상(名宰相)이었던 제이대 우승유는 물론이고 제칠대 조개지(趙介志)는 왕공(王公)이었음에도 끝내 뜻을 펴보지 못했었다.

그들 중에서도 제십삼대 진룡은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창평곡에 들어왔으며 다음 대 전인조차 지정하지 않고 외롭게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진룡은 백남빈. 강미루와 팔십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살았었다.

진룡의 유해 앞에 남겨진 사연은 구구절절 두 사람의 심금을 울렸는데 그가 남긴 검결에는 실용적인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전인들의 검결은 대부분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듯한 내용이었다.

그에 반해 진룡의 검결은 비록 염세적인 분위기에다가 고독과 허무가 느껴지긴 하지만 이해가 쉬운 편이었다.

그래서 백남빈과 강미루는 이백의 사자검결 다음으로 진룡의 검결을 많이 본 터였다.

이 진룡이란 인물의 신세는 실로 파란만장하여 백남빈과 강미루는 깊이 동정하고 있었다.

 

***

 

진룡은 원(元)말 반란군의 우두머리 중 한명이던 한왕(漢王) 진우량(陳友諒)의 넷째아들로 자는 거비(去非), 호는 낙이(樂而)였다.

진우량이 홍건적(紅巾賊)에 몸을 담고 있을 무렵에 얻은 넷째아들 진룡은 날 때부터 눈이 부리부리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대장군의 태(態)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또한 불과 사, 오세때부터 시(詩)를 짓는 총명을 드러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진룡은 자라면서 시문에 더욱 능해져서 무인으로 키우려는 부친과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열일곱 살 때 아버지 진우량과 포로들의 처우 문제를 두고 큰 의견 충돌을 빚었다.

분노한 진우량은 칼을 뽑아 진룡을 죽이려 하였으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내치는데 그쳤다.

부친으로부터 내침을 당하자 진룡은 차라리 잘 되었다 싶어 문인이 되기로 뜻을 정하였다.

그날로 어머니를 찾아뵙고 작별인사를 드린 진룡은 집을 나와 천하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진룡이 여산(廬山)을 구경하고 내려와 파양호반(鄱陽湖畔)을 거닐 때였다.

한 노파가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 보였다.

진룡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다가가 물어보았다.

"할머니 무슨 일인데 그리 슬프게 우십니까?"

"아이고 애고..."

노파는 더욱 설움이 복받치는지 더 크게 울었다.

잠시 노파가 진정되기를 기다려서 한 차례 더 물었다.

"할머니 영감님이 돌아가셔서 우십니까?"

노파는 훌쩍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했다.

"젊은이... 영감이 죽었으면 험한 꼴 보지 않고 잘 죽은 거라오."

"...!"

"큰 아들 놈은 일월교(日月敎)에 미쳐 돌아다니더니... 한산동(韓山童;일월교, 또는 명교라 불리는 백련교의 교주) 밑에서 죽고, 둘째 놈은 친구 따라 주원장(朱元障) 밑에 들어가더니 진우량 그 난폭한 놈에게 잡혀서 죽었소."

“...!”

“막내놈만은 끼고 살며 밤낮으로 밖에 내놓지 않았는데 이번엔 장사성(張思誠)이 와서 빼앗아 가버렸다오. 가면 죽는 것이 전장(戰場)인데 오늘 달려갔으니 다시는 못 볼 것같아서 내 이런다오.”

장사성은 주원장과 마지막까지 패권을 다퉜던 강남의 유력한 군벌이다.

"전쟁에서 나간 군사들이 다 죽는 것은 아니랍니다."

진룡이 위로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쟁을 하려면 제 놈들이나 할 일이지... 이것 뺏고 저것 뺏고 하더니 이제는 내 아들까지 빼앗아가? 천하에 벼락 맞아 죽을 것들! 왕은 무슨 왕이고 황제는 무슨 놈의 황제야? 몽땅 도적이고 강도일 뿐이지."

진룡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노파가 실성한 듯이 하는 말이 그른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파는 진룡이 묵묵히 듣기만 하자 용기가 났는지 벌떡 일어섰다.

"내 이 장사성 놈을 호미로 찍어 죽이고 말테다."

노파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진룡은 노파가 떠난 자리에 넋을 잃은 듯이 그냥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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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장

 

                    마지막 고비

 

 

문은 물론 창문까지 굳게 닫혀있어서 마차 안은 어둑했다.

강유와 진상파는 마차 안에 설치 된 의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양산을 떠난 두 사람은 제왕성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산길로만 이동하여 마두집에 이르렀었다.

하지만 마두집에서 개봉까지는 평지라 마땅히 몸을 숨기며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부득불 두 사람은 마두집에서 마차를 대절하여 개봉까지 온 것이다.

“시간상 곧 개봉에 도착할 거예요.”

마차의 앞쪽을 보는 위치에 앉아있는 진상파가 말했다.

그녀의 품에는 섬전초가 몸통 길이만한 꼬리를 동그랗게 만 채 잠들어 있다.

강유에게 사로잡힌 후 이틀 밖에 안 지났건만 섬전초는 마치 오래전부터 길들여진 것처럼 진상파를 따르고 있다.

수백 년을 산 영물이라 진상파의 남 다른 점을 알아차린 듯 했다.

“개봉은 오대십국(五代十國) 이래 여러 왕조의 도읍이었을 뿐 아니라 수운(水運)의 중심지이기도 해요. 그 때문에 개봉의 분점은 저희 황금성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답니다.”

“개봉분점에만 무사히 진입하면 제왕성의 추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최소한 모용준의 심복들이 허튼 짓을 시도하진 못하겠지요.”

“그렇겠습니다.”

진상파의 말에 강유도 동감을 표했다.

“그나저나 저 때문에 안탕산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제법 멀리 돌아가시게 되었군요.”

진상파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가친이 맡긴 일은 완수하고 돌아가던 길이었으니...”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사실 강유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우와의 대결 과정에서 강유 자신의 정체가 제왕성에 노출되었었다.

제왕성의 보복이 있을지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안탕산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경고를 해야만 한다.

“달마독명안의 비결은 완전히 외우셨습니까?”

초조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강유는 화제를 돌렸다.

“외우기는 했는데... 소림사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제가 달마독명안을 수련해도 되는 것인지요?”

진상파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림에서 다른 문파의 절기를 허락 없이 익히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그리고 강유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달마독명안을 만든 인물은 소림사의 고승 고불선사다.

소림사가 자신들의 절기가 유출되는 것을 병적으로 꺼려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물며 달마독명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까지 하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과거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은 무림인인 저보다 황금성을 이끌어가야 하는 소저에게 더 필요한 능력일 것입니다.”

강유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사실 그는 충동적으로 진상파에게 달마독명안을 가르쳐주었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어쩐지 달마독명안이 진상파를 위해 만들어진 절기인 듯이 느껴진 때문이다.

“물론 수많은 인간을 상대해야하는 제게 정말 유용한 재주이긴 하지만...”

진상파는 석연찮은 기색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했다.

달마독명안이 소림사 출신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곱씹어볼수록 너무도 대단한 비술인 게 느껴져서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다.

“고불선사께서도 당신이 고심하여 만든 절기가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다 여기고 흡족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강유가 안심을 시키자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고불선사님께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니 그분의 딸을 찾는 데 저희 황금성의 능력을 총동원하도록 하겠어요.”

“그래 주시면 제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강유가 대답할 때였다.

덜컹!

느리지만 천천히 가고 있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끼이...

그 바람에 강유와 진상파가 움찔했을 뿐 아니라 잠 들어있던 섬전초도 깨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강유의 자기 뒤쪽의 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벽 뒤가 마부석이다.

 

<밖... 밖에 좀 나와 보셔야겠습니다요 손님.>

 

마부석 쪽에서 전노인의 겁에 질린 음성이 들려왔다.

(문제가 생겼구나.)

직감적으로 변고를 알아차린 강유는 마차 문을 조금 열고 밖을 살펴보았다.

백여 장 쯤 앞쪽에 개봉성의 동문이 보이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려던 우마차들과 사람들이 멈춰 서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성문 앞에 일단의 무사들이 진을 친 채 검문을 하고 있었다.

그자들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마차는 내부를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통과시키고 있다.

그 때문에 심각한 정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관병(官兵)들은 아닌데... 어떤 자들이 관도를 막고 검문 중입니다요.”

전노인이 겁에 질려서 앞쪽을 살펴보며 말했다.

(제왕성의 인간들이다!)

강유는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검문을 하고 있는 자들은 제왕성의 위사들인데 철(鐵)위사 뿐 아니라 그 윗 서열인 동(銅)위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십여 명의 철위사들이 직접 검문을 하고 있으며 길가의 조금 높은 곳에는 세 명의 동위사들이 서서 길 전체를 감시하고 있다.

세 명의 동위사들중 한명은 바로 동위사대의 대주인 독두태보였다.

외총관 궁무독의 판단에 따라 은(銀)위사대 대주 백월사신은 금릉 방향을 수색 중이고 개봉쪽은 독두태보가 담당한 것이다.

이곳 동문 뿐 아니라 개봉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제왕성의 고수들이 통제하고 있는 중이다.

(전체 인원이 오백 명 정도인 동위사들은 개개인이 철위사대 대주였던 냉혈철심 사우에 필적하는 고수들이라던가?)

강유는 조금 연 문을 통해 성문쪽을 살피며 심각해졌다.

하마터면 자신을 죽일 뻔했던 사우에 못지않은 고수가 최소한 세 명이나 더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아마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 뇌종횡(雷縱橫)일 것이다.)

강유는 두 명의 동위사를 거느린 채 눈을 부라리면서 사람들과 마차들을 노려보는 독두태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독두태보는 그 독특한 외양 때문에 멀리서도 알아볼 수가 있다.

(상대가 동위사대 대주라면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필살일초를 쓴다 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데...)

강유가 난감해 할 때였다.

“제왕성의 인간들인가요?”

뒤에서 진상파의 음성이 들렸다.

“제왕성 측에서도 소저를 개봉에 들여보내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철위사들 뿐 아니라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가 직접 나서서 검문을 하고 있군요.”

마차의 문을 닫은 강유는 다시 진상파와 마주 앉았다.

“아슬아슬하네요.”

진상파는 아미를 조금 모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개봉이 바로 목전인데...”

“개봉까지의 거리도 있지만... 사실 저를 도와줄 분이 조만간 이곳에 도착할 거예요.”

“그렇습니까?”

진상파의 말에 강유는 흠칫 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저의 몸에서는 백리향(百里香)이 배어있답니다.”

진상파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옅은 홍조를 띤 그녀의 두 볼이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강유였다.

“백리향이라면 백 리밖에 까지 향기가 퍼진다는 꽃 아닌지요?.”

“백리까지는 아니고... 훈련받은 사람이라면 십 리 밖에서도 백리향의 출처를 가늠할 수 있어요.”

“그럼 소저의 몸에서 나던 은은한 향수같은 게...”

“저는 유괴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갓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음식에 백리향을 섞어서 먹어야만 했어요. 덕분에 저의 몸에는 백리향이 깊이 배어있어서 어디를 가든 흔적이 남는답니다.”

진상파는 애잔한 표정이 되었다.

귀하고 부유하게 태어난 인생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철이 든 이래 진상파는 늘 독살과 유괴의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소저를 호위하는 분들이 백리향을 맡으며 접근하고 있겠습니다.”

“아마 거의 접근해왔을 텐데... 자칫 제왕성의 인간들에게 먼저 발견될 수도 있겠어요.”

“그럼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봐야겠지요.”

덜컥!

강유는 웃으며 다시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무얼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음이 간다.)

진상파는 강유가 마차에서 나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며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문이 닫히고 이제 마차 안에는 진상파 혼자 남게 되었다.

(이제껏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해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하나뿐인 핏줄인 나를 강하게 훈육하신 덕분인데... 어제 이후로는 강유, 저 사람에게 저절로 의지하게 되었다.)

닫힌 문을 보며 진상파의 얼굴이 도화 빛으로 물들었다.

강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평안해지고 몸은 더워진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상상을 못했던 변화다.

“언니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 모양이구나 초아야.”

진상파는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가르릉!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섬전초도 꼬리를 흔들며 고양이처럼 골골 거렸다.

 

“올라가겠습니다.”

마차에서 나온 강유는 고개를 숙인 채 마부석으로 올라갔다.

“공자! 안에 계시지 않고...”

마부 전노인은 옆으로 물러앉아 강유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죽립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요.”

마부석에 앉은 강유는 전노인이 건네준 죽립을 머리에 썼다. 제왕성의 무리들로부터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냉혈철심 사우를 죽인 강유의 용모파기는 이미 널리 배포되었을 것이다.

“답답해서 나오셨는지요?”

“그렇기도 하지만... 이걸 받아주십시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강유는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를 전노인 손에 쥐어주었다.

“삯이라면 이미 과하게 주셨는데...”

전노인은 돈주머니를 두 손으로 받으며 입이 귀에 걸렸다.

“삯을 더 드리는 건 제가 하자는 대로 해주셨으면 해서입니다.”

돈주머니를 챙기던 전노인은 강유의 낮지만 심각한 목소리에 침을 꿀꺽 삼켜야했다.

 

* * *

 

독두태보는 언덕 위에 서서 관도를 오가는 사람들과 우마차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법 높은 이 언덕은 개봉 성문과 오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있다.

독두태보 뒤에는 동위사 두 명이 서서 관도의 좌측과 우측을 따로 감시하고 있었다.

(총관 말대로 진상파는 개봉으로 행로를 바꿨을 가능성이 크다. 황금성 본점이 있는 금릉까지는 너무 멀어서 우리 제왕성의 이목에 걸리지 않고 갈 자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두태보는 언덕 아래를 지나 개봉의 동문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우마차들을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다.

철위사들이 사람들은 물론이고 모든 우마차의 문을 열어서 꼼꼼하게 검문을 하는 게 그의 눈에 들어온다.

(진상파가 황금성 개봉분점으로 피신할 생각이라면 오늘쯤 모습을 드러낼 게 분명하다. 진상파와 동행하고 있는 소요신군의 아들 놈 역시...)

독두태보가 기필코 진상파와 강유를 포획하고 말겠다는 결의를 다질 때였다.

진상파와 강유를 태운 마차가 마침내 철위사들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 * *

 

두 명의 철위사가 진상파와 강유가 탄 마차로 다가왔다.

앞쪽에는 검문을 통과한 마차들이 개봉의 동문을 향해 가고 있으며 좌우에는 몇 대의 마차가 멈춰 서서 검문을 받고 있었다.

“이 마차에는 몇 명이 타고 있소?”

철위사 중 한명이 마부석에 나란히 앉은 강유와 마부를 예리한 눈으로 살펴보며 물었다.

그자의 동료는 마차의 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그게...”

전노인은 긴장해서 더듬거릴 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죽립을 깊이 눌러쓴 강유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실례하겠소.”

마차로 다가간 철위사가 마차의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팅!

팔짱을 낀 자세인 강유가 손 안에 숨기고 있던 동전 하나를 나란히 서있는 다른 마차의 말에게 은밀히 튕겼다.

퍽!

동전은 말의 엉덩이에 깊이 꽂혔다.

히히힝!

순간 말이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번쩍 쳐들고 날뛰었다.

“헉!”

“이놈의 말이 왜 갑자기...”

그 마차를 검문하던 철위사들은 기겁하며 물러섰고 마부는 당황하여 급히 말고삐를 당겼다.

두두두!

하지만 동전이 엉덩이에 깊이 박힌 탓에 고통과 공포에 휩싸인 말은 마차를 끌고 미친 듯이 앞으로 돌진했다.

앞서가던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기겁하며 길가로 피했다.

“잡아라!”

“저 마차가 수상하다.”

휘익! 휙!

철위사들 몇 명이 미쳐 날뛰는 말이 끄는 마차를 따라 몸을 날렸다.

언덕 위의 독두태보와 두 명의 동위사도 눈을 번뜩이며 그 마차를 주시했다.

팅! 티팅!

그 사이에 강유는 동전들을 연달아 좌우에 서있는 말들에게 튕겨 보냈다.

퍽! 퍼퍽!

강유가 날린 동전들은 여지없이 말들의 엉덩이에 깊이 박혔으며,.

히히힝! 히히힝!

두두두! 콰드드!

동전에 맞은 말들은 미친 듯이 날뛰거나 앞으로 돌진했다.

“헉! 이게 무슨...”

“말들이 미쳐 날뛴다.”

“조심해라!”

검문을 하던 철위사들이 당황하여 이리저리 피한다.

“지금입니다.”

주변의 다른 마차들이 치달리는 것을 확인한 강유가 전노인에게 짧게 말했다.

촤락! 철썩!

그 즉시 전노인은 고삐를 세차게 흔들어 말들의 엉덩이를 때렸다.

히히힝! 히힝!

두두두!

주인이 흔든 고삐에 세차게 얻어맞은 두필의 말이 맹렬히 앞으로 돌진했다.

“흑!”

그 바람에 마차 안의 진상파는 하마터면 바닥에 나뒹굴 뻔 했다.

끼이!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섬전초가 깜짝 놀라며 품으로 파고 들었다.

두두두! 두두!

어느덧 진상파와 강유가 탄 마차를 포함한 십여 대의 마차들이 경주하듯이 개봉의 동문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했다

“전부 잡아라!”

“마차를 멈추게 하라.”

“저 마차들 중 하나에 진상파가 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휘익! 쐐액!

철위사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마차들을 따라왔다.

팅! 팅!

달리는 마차의 마부석에 앉은 강유는 쥐고 있던 동전들을 모두 좌우로 날려 보냈다.

퍼퍽! 퍽!

그 동전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날아가 주변의 말과 소들의 몸뚱이로 파고들었다.

상처를 입은 말과 소들은 예외없이 미쳐 날뛰었다.

“조... 조심해라!”

“위험하다. 피해라!”

마차들을 쫓던 철위사들이 기겁했다. 다친 말과 소들이 부리는 난동에 휘말려 버린 때문이다.

두두두! 두두!

추격하려던 철위사들이 허둥대는 사이에 십여 대로 불어난 마차들은 개봉을 향해 돌진해갔다. 마치 마차 경주라도 하듯이...

앞서 가던 우마차와 사람들은 길가로 피했고 맨 처음에 달려간 마차를 추격하던 철위사들도 다급히 몸을 날려 관도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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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마두들이 준 기연(奇緣) (2)

 

 

(우라질...)

철선동시는 생사를 도외시한 마면혈도의 공격에 진땀을 흘렸다.

독기가 임청우의 몸속으로 퍼져나가면서 몸 상태가 조금 좋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팔과 다리가 잘리는 중상을 입었는지라 공력의 운행이 전 같을 수가 없다.

철선동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말대가리는 같이 죽기만 바랄 뿐이다. 이대로 공력을 겨룬다면 결국엔 둘 다, 아니 이 쥐새끼는 원래 죽을 놈이었으니 셋 다 죽게 된다.)

돌아가는 상황을 판단한 철선동시는 독심을 품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저 말대가리를 먼저 죽이지 않을 수가 없구나.)

(헛!)

마면혈도는 갑자기 철선동시의 공력이 폭발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철선동시도 마면혈도가 그랬던 것처럼 독기를 억누르고 있던 공력마저 풀어서 공격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공력은 철선동시가 마면혈도보다 심후하다.

그 때문에 임청우의 모든 경맥에서 마면혈도의 공력이 급격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임청우의 몸 속에서는 두 절정고수의 공력이 충돌하며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장은 공력에 충격을 받아 망가지기 직전이 되었으며 혈관은 팽창하고 심장은 박동을 급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차디찬 서리로 뒤덮여 하얗게 변해있다.

그 서리 아래의 피부는 독기로 인해 시꺼멓게 변색 되어있었다.

그러던 중 철선동시가 전력으로 공격을 하여 마면혈도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임청우의 몸을 덮고 있던 서리는 점차 줄어들고 대신 마면혈도의 몸에 두터운 서리가 쌓이기 시작했다.

철선동시가 심후한 공력으로 공격하면서 임청우의 몸속에 있는 빙골산의 독기마저 마면혈도의 몸에 밀어 넣은 때문이다.

마면혈도는 이미 빙골산의 독기에 중독당한 상태였다.

헌데 더 많은 빙골산의 침습을 받게 되자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들면서 공력이 점점 위축되었다.

이렇게 되자 임청우의 몸속에서 벌어지던 공력의 충돌이 잦아들고 빙골산의 독기도 감퇴했다.

빙골산이 빠져나가면서 한기가 수그러들자 임청우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으으으...)

정신을 차렸지만 임청우는 신음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했다. 지독한 한기 때문에 입과 혀가 얼어붙은 때문이다.

정신이 되돌아오자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극심한 고통이었다.

온몸이 쇠망치에 수없이 맞아 짓이겨진 것같다.

뼈란 뼈는 다 부러지고 근육은 갈가리 찢어진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그 때문에 몸뚱이가 자신의 것이 아닌 양 통제할 수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목구멍으로 올라오려는 듯 속이 니글거리기까지 한다.

헌데 가까스로 힘을 내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서리에 덮인 이마에서 송알송알 땀을 쏟고 있는 마면혈도와 눈길이 부딪혔다.

(허억!)

흉측하면서도 기괴한 마면혈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접한 임청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반면 마면혈도는 뛸 듯이 기뻤다.

할 수만 있다면 크게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얼어 죽은 시체 놈! 내가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낼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미련한 그답지 않게 머릿속으로 절묘한 계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심이 서자 마면혈도는 임청우의 몸에서 즉시 자신의 공력을 거두어 들였다.

우르르!

그러자 철선동시의 공력이 봇물이 터지기라도 한 듯 마면혈도의 몸으로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반격하지 않고 굳게 방비만 하자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속에서 돌아다니는 기이한 힘을 느꼈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울 때 나타났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힘이었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워보았지만 몸속을 누비는 기이한 힘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그 힘은 살아있는 뱀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임청우의 몸속을 제멋대로 헤집고 다닌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해결 방법이다.

임청우는 헛된 노력은 포기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

여전히 혼미하고 멍한 정신을 온전히 하는 게 그것이었다.

임청우는 북두무랑에서 보았던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렸다.

끝없는 별의 바다를 유영하며 자기 몸속에 깃든 북두칠성을 확인했다.

그러자 온몸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고통이 점차 잦아들고 정신은 또렷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살고 싶으면 내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의 귓속으로 모기가 앵앵거리는 듯 나직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눈을 번쩍 뜨고 보니 마면혈도가 눈을 껌뻑한다.

임청우는 그자의 얼굴이 정말 말 귀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입과 코 부분은 영락없이 말이다.

그런 입에서 인간의 말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나른하고 권태롭게까지 느껴지는 마음이 된 임청우는 마면혈도의 말을 들은 척 만척했다.

 

<네 손목을 잡고 있는 얼어 죽은 시체같은 놈은 정말 나쁜 놈이다.>

 

마면혈도의 가느다란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와하하하하!)

임청우는 하마터면 큰소리로 웃을 뻔 했다. 마면혈도의 잔학성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바 있는 그였다.

마면혈도는 임청우가 농산 표운봉에서 만났던 소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제 딴에는 임청우를 설득해보려고 철선동시의 험담을 한 것이다.

그같은 수작은 임청우에게 인간이 얼마나 뻔뻔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누가 누굴 보고 나쁜 놈이라는 건가?)

임청우의 혀끝에서 마면혈도의 양심을 찌르기 위한 말이 맴돈다.

그러다가 마면혈도의 음성이 들림에도 불구하고 그자의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음을 생각하고 놀랐다.

(이 말대가리 귀신은 입이 두갠가?)

마면혈도가 진짜 말 귀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싹 소름이 끼친다.

불심연화지를 깨우치기 전까지는 무공을 배워본 적이 없는 임청우다.

당연히 공력을 써서 특정 대상에게만 소리를 전할 수 있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이라는 무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리 없다.

임청우가 놀라고 있을 때 마면혈도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만약 네가 노부를 사부로 모시겠다면 눈을 한번만 깜박여라. 그럼 노부는 죽어도 너는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

 

임청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몇 권의 의서를 읽어보았기에 자기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다. 두 가지의 치명적인 극독이 몸속에 스며들어 있으니 해독하기 전에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

그리고 마면혈도가 얼마나 흉악한 괴물인지는 이미 경험한 임청우였다.

남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겨온 마면혈도가 굳이 임청우 자신을 살려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시체같은 철선동시도 후회하느니 어쩌니 하더니 지금은 자신의 손목을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잡고 있다.

임청우로서는 마면혈도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말해도 믿지 못할 터였다.

만에 하나 마면혈도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손목을 잡고 있는 철선동시가 자신을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믿을 말을 믿지.)

임청우는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마면혈도를 흘겨보았다.

말을 닮은 그자의 얼굴은 다시 봐도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헌데 마면혈도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임청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자의 눈에는 어떤 열기 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설마 날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게 진심인 건가?)

임청우는 흠칫했다.

(속은 것은 한번으로 족하다.)

하지만 임청우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마면혈도를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되지 않을 소리다.

아무리 살기 위해서라도 해서 될 것과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법이다.

(저 흉악한 마귀의 흉악한 수법을 배워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요사스런 수법을 익혀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오히려 그런 건 몸을 해치게 마련인데...)

임청우의 단호한 표정을 본 마면혈도는 당황했다.

(쥐새끼 정도로 생각했던 놈이 뼈마디가 보통 단단한 게 아니었군. 구슬리자면 꽤 힘이 들것 같군.)

그 사이에 철선동시의 공력이 더 거세게 밀려들어 심장이 터질 것같은 압박이 전해진다.

잠시 전력을 다해 방어한 후 마면혈도는 간절한 어조로 다시 임청우에게 말했다.

 

<노부의 무쌍층층공(無雙層層功)은 대성하기만 한다면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운 절세의 신공이다. 노부는 비록 칠성(七成) 수준 밖에 이르지 못했지만 강호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가 되었다.>

 

마면혈도의 간절한 말에도 불구하고 임청우는 요지부동, 도무지 눈을 뜨지 않았다.

우협 장백승의 모습이 마치 화인(火印)처럼 뇌리에 박힌 임청우다.

무쌍층층공 어쩌고 아무리 떠든다 하더라도 소귀에 경 읽기라는 것을 마면혈도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소중한 공력을 허비하며 억지로 말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우르르르...

철선동시는 마면혈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임청우의 몸으로 색혈지독을 옮기기 전에 공력이 소진되어 자신이 먼저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면혈도를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생각에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이 없다!)

철선동시의 맹공격에 궁지에 몰린 마면혈도는 다급해졌다.

그래서 임청우가 장백승에게 들은 것 외에는 무공이니 무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벽창호라는 사실도 모른 채 안간힘을 다해 말을 이어갔다.

 

<무쌍층층공은 일성(一成)을 익히게 되면 맨손으로 바위를 깨뜨릴 수 있고, 이성(二成)을 익히면 일성의 두 배가 되며, 삼성(三成)은 이성의 두 배가 되고, 사성(四成)은 삼성의 두 배가 된다. 자질과 인연이 닿아서 십이성(十二成)을 대성하게 된다면 무림에서 제일가는 인물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래도 내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

 

어조가 사뭇 애원조다.

그래도 마음이 돌덩이 같은 임청우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임청우는 목숨마저 체념하고 편안한 마음이 되어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을 떨게 만들던 한기도 이미 많이 가셨다.

대신 마면혈도의 몸에 서리가 덮여 얼음이 되었다.

임청우의 몸속에서 빙골산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철선동시의 공력이 몸속에서 돌고 있기 때문에 한기를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다만 몸을 자꾸 무겁게 하는 그 무엇이 약간 불편할 따름이다. 그것도 실상은 철선동시가 그의 몸 안으로 불어넣은 색혈지독 때문이기는 하지만...

마면혈도는 자신이 그처럼 애원하는 데도 불구하고 임청우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속에서 불이 나는 것같다.

(이 어린놈은 바보 멍청이인가? 죽을 사람이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고 하는데도 사부로 모시지 않겠다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는가? )

철선동시의 공력은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지는데 겨우 찾아냈다 싶은 마지막 수법은 사용도 하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마면혈도는 억울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속으로 자기는 재수가 정말 없는 놈이라 생각하며 전음입밀로 말한다.

 

<좋다, 이놈아! 내 제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네놈이 살기 위해서는 내가 하는 말대로 해야 할 것이다.>

 

말투가 거칠어지고 떨려나온다.

빙골산의 독기를 방비하지 않은 탓에 이미 한 치 두께로 얼어붙은 서리가 마면혈도의 몸을 덮고 있다.

그러나 마면혈도가 뭐라 하던 간에 임청우는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잠잠히 있었다.

철선동시의 심후한 공력은 임청우의 몸을 경유한 후 마면혈도를 공격하고 있는 중이다.

비유하자면 미친 들소 떼가 비좁은 골목길을 치달리며 닥치는 대로 짓밟고 뭉개버리는 형국이었다.

우둑! 우두둑!

손목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왔다가 발목으로 빠져나가는 철선동시의 공력이 경맥과 근육을 제멋대로 뒤틀리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청우는 그리 큰 고통은 느끼지 않고 있었다.

망망하기 이를 데 없는 별의 바다를 유영한 기억이 정신을 육신에서 분리해주고 있는 덕분이다.

임청우는 어느덧 자신의 육신이 두 악귀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는 것을 남의 일처럼 관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고통 속에서 자신의 몸을 잊는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상태에 은연중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두 괴인은 임청우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 더구나 알 생각도 없다.

단지 서로가 임청우를 이용하여 상대를 해치려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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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장

 

            사자검의 비밀

 

 

"과연 어부 소년이 찾아와서 시선의 뒤를 이었을 것 같소?"

백남빈이 궁금해 하며 강미루에게 물었다.

"바로 아래에 계신 저분이 그분 아닐까요?"

강미루는 이백이 좌화한 바위섬의 정상 바로 아래쪽의 석감에 앉아 있는 인물을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풍채가 좋은 이백과 달리 호리호리하게 마른 체격이지만 역시 청수한 인상을 지닌 노인이다.

그 노인이 이백이 동정호에서 만났던 어부 소년의 나이 든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시선께서 전한다는 검법이 이것이란 말인가?"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가던 백남빈은 의아해하며 누구에게 묻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말했다.

이백이 좌정한 앞쪽 바닥에는 천여 자의 글만 더 적혀 있을 뿐 검법의 이치를 담은 검보(劍譜)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眞理)는 몸에 담고 빛은 정신(精神)에 비추었으며,

움직이지 아니하여 극(極)에 이르렀도다.

하늘의 무거움은 몸으로 느끼며

땅의 너그러움을 품안에 가두었다.

지혜(智慧)에 머물러 흐려짐이 없었고

어짐(仁)을 함께 하여 치우침이 없었도다.

낯빛은 항상 부드러웠고 태도는 자연스러워 어디에도 두드러짐이 없었으니,

사자(獅子)는 담백한 뜻과 맑은 정신이 흔들리는 법 또 한 없었도다.

 

뜻이 흩어지면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고 사람을 해(害)하고

정신이 흐려지면 근본을 잃고 마는 것인지라,

담백한 뜻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용(龍)을 누르고 범(虎)을 방비하듯 해야만 한다.

한순간 가벼우면 용은 승천하고 말 것이요.

범은 뜻을 상하게 하고 말 것이로다.

 

뜻을 저해하는 모든 것이 범이니,

범은 그 모습이 따로 있지 아니하고,

용은 스스로 비롯하는 것이니 범보다 더욱 지키기 어렵도다.

독기를 뿜어 사람으로 하여금 나약하게 하는 것이 능수(能手)이나

위험에 처하더라도 움직이지 아니하면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때로 용호(龍虎)가 안팎으로 발호하여 뜻을 흩으려는 바 있으나,

그 기세가 비록 장엄한 바 있어도 모두가 허상이니,

스스로 동(動)하지 않으면 털 한 올 도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가벼울 지라도 스스로 지키어 움직이지 아니하면 절로 소멸하고 만다.

 

대저 먼저 그치고 나중에 움직임이 대도(大道)인즉,

가슴속에 일어나는 분노와 욕망을 능히 견뎌야 한다.

정신은 참고 견딤으로 맑아지고 자라게 되며,

정신이 길러져야 대사(大事)를 이룩할 수 있으니,

참으면 참는 만큼, 견디면 견딘 만큼 정(正)은 자라는 것이다.

정(正)을 기름으로 근본은 두터워 지고 사악함과 요괴함이 절로 물러나게 된다.

 

사자(獅子)는 어떠한 경우에 처하여도 놀라지 아니하였으며,

무엇으로 말미암아서도 두려워한 바 없고,

사물을 대하여 마음으로 의심치 아니 하였을 뿐 아니라

옳지 않은 것에 현혹됨이 없었다.

의혹을 몰아내면 자연히 원정기(元精氣)가 자라고,

원정기가 자라지 않으면 어느 새 사마(邪魔)가 자리 잡는다.

 

놀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두려워 않으면 그치지 않을 것이며

의심치 않으면 변하지 않을 것이요

현혹되지 않으면 응(應)하지 않을 것이다.

정성(精誠)을 다하였으니 사자(獅子)에게는 빠르고 느림이 존재하지 않았다.>

 

천여자의 비결(秘訣)이 이어진 후 이백의 글은 더 이상 없었다.

무엇인가 잡힐 듯 말듯 아른거림에 백남빈과 강미루는 깊은 생각에 빠져 들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검법을 전한다 했는데 어디에도 검을 쓰는 비결은 보이지 않고 모호한 글만 적혀있다.

하지만 백남빈과 강미루는 그 경구들이 바로 검법의 놀라운 비결이라 여겼다.

"뒷부분으로 올수록 내용이 와 닿는 듯도 하지만... 깊은 뜻은 한마디도 짐작할 수 없구나."

사자검결(獅子劍訣), 흑은 천자검결(千字劍訣)이라 이름 붙일만한 글들을 몇 번 읽어본 백남빈은 난감해졌다.

강미루는 고민하는 대신 통 채로 외우려는 듯 자꾸만 사자검결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언젠가는 알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백남빈도 사자검결을 외워버리기로 작정했다.

 

***

 

그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기억에 없다.

백남빈은 사자검결을 앞에서 뒤로 외고 그것이 가능해지자 뒤에서 앞으로 외는데 전념했다.

그렇게 수없이 반복하자 저절로 술술 입에서 나와 더 이상 외우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백남빈에 비해 강미루는 암기하는 게 백남빈하지 않은 듯 했다.

중얼중얼 외면서 한두 구절 씩 막혀서 다시 외우곤 했다.

백남빈이 비결의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며 도와주었다.

"먼저 이만큼만 외우도록 해요. 그리고 나서 다시 이만큼만 외우고... 나중에 이것들끼리만 백남빈하게 이어버리면 되지 않겠소?"

방법을 알고 나자 금방 앞에서 뒤로 줄줄 외우는 강미루였다.

 

***

 

백남빈과 강미루가 이백의 유해(遺骸) 앞에서 넋을 놓고 있는 동안 밤은 휑하니 지나가 버리고 창평곡에는 해가 한 뼘 넘게 떠 있었다.

동부의 입구는 보름달이 서쪽으로 지면서 다시 닫혀버렸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고대의 신묘한 기술에 의해 동부의 입구는 한달에 한 번, 보름달이 중천에 뜰 때 저절로 열렸다가 닫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서 열고 닫는 장치가 있어서 입구를 어렵지 않게 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과일을 따먹고 녹지의 물에 피를 풀어 마셨다.

배를 채운 후 오두막으로 들어가 지친 몸을 나란히 뉘었을 때 강미루가 말했다.

"머릿속에서 사자검결들이 마구 굴러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이 그러했다.

신경의 소모가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

 

백남빈이 조사전(祖師殿)이라 이름붙인 마지막 석동의 인물들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이백과 그의 전인(傳人)들이었다.

원래 바위섬은 모양이 특이하긴 했지만 딱히 의미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백이 바위섬의 정상을 평평하게 다듬고 진전을 남긴 후 그의 전인 우승유(宇承悠)가 본받아 아래쪽에 자신의 좌화단(座化壇)과 심득(心得)을 남길 곳을 만들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우승유의 전인 초장객(楚璋客) 이하 모든 전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바위섬은 기묘한 탑으로 변해 버렸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이백이 남긴 사자검결 외에도 사자검의 전인 십삼인의 심득(心得)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연들과 뜻이 모호한 비결들만 있을 뿐 실제로 검을 쓰는데 유용한 검보는 구경할 수 없었다.

 

***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처를 오두막에서 동부로 옮겼다.

동부에 들어와 살면서 곧 그 안의 기물(器物)들에 백남빈해졌다.

특히 맨 좌측 석실에 있는 수백 권의 책들 중 <창평곡기(蒼平谷記)>라는 책을 통해 창평곡의 모든 사정들을 알게 되었다.

창평곡기는 이백과 역대 전인들이 창평곡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어놓은 것인데 팔십여 년 전부터는 기록이 끊겨 있었다.

창평곡기에 의하면 창평곡은 이백 이전에도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이백은 당나라 현종이 선물로 준 연단술(鍊丹術)과 관련된 고서(古書)에서 창평곡의 존재를 알았다.

그 고서를 통해 이백이 찾아낸 창평곡에는 두 가지 보물이 있었다.

 

첫 번째 보물은 물론 사자검이다.

이백도 사자검의 재질이 무엇이고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랐다.

이백이 옛사람이라 칭한 상고시대의 어떤 기인이 남긴 사자검은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하기 힘든 조화(造化)를 만들어낸다.

사자검은 사용하는 자의 의지(意志)를 실체(實體)로 구현(具顯)해주는 힘을 지닌 것이다.

그 때문의 사자검의 위력은 주인의 그릇과 상상력의 크기로 결정된다.

필부(匹夫)가 얻으면 그저 무겁고 단단한 쇳덩이일 뿐이지만 초인(超人)이 쓰면 신선이나 귀신도 벨 수 있을 정도다.

삼재검법 외에는 아는 무공이 없던 백남빈이 검도의 최상승경지인 검기를 단번에 뽑아낼 수 있게 된 것도 사자검의 조화였다.

사자검의 이같은 신비한 힘은 <사자검을 전한다(獅子劒傳)>라는 문파의 이름이 지어진 연유이기도 하다.

사자검전에서 중요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자검 자체인 것이다.

이백은 사자검과 함께 뜻이 모호한 비결을 백여 자 얻었었다. 사자검의 원래 주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그 비결은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많은 부분이 소멸된 상태였었다.

이백은 육십여 년 간 사자검을 쓰면서 불완전한 그 비결을 갈고 닦아서 천여자로 이루어진 사자검결을 만들었다.

다만 사자검결은 실제로 검을 쓰는 검결이 아니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서 마음이 자라게 하는 양심(養心)의 비결이다.

이 사자검결로 얻을 수 있는 성취의 크기는 개인의 도량으로 결정된다.

그 때문에 이백 이후의 전인들이 사자검결을 통해 이룬 것은 제각각이었다.

 

이백이 창평곡에서 찾아낸 두 번째 보물은 바로 녹지의 물이었다.

녹지의 물은 창평곡 지하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어떤 광물질이 녹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 물은 그냥 마실 경우 침과 섞이면서 치명적인 독이 된다.

하지만 피와 섞이면 공력을 비약적으로 증진시켜줄 뿐 아니라 강인한 몸과 엄청난 치유력을 갖게 해주는 영약이 된다.

백남빈의 허벅지에 났던 깊은 상처가 단번에 치유된 것도 녹지의 물 덕분이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영약이 되어 몸속으로 다시 흡수되었던 것이다.

강미루도 백남빈과 함께 하체를 녹지에 담그고 있었던 터라 환골탈태에 가까운 효험을 봤었다. 백남빈의 상처가 만든 영약이 피부를 통해 흡수된 덕분이다.

피가 섞인 녹지의 물은 기사회생의 효능을 지녔다는 자부현청(紫府玄淸)이나 공청석유(空靑石乳)에 비견될만한 영약이다.

그것을 매일 식수 대신 마셨기에 백남빈과 강미루의 공력은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증진되어 있었다.

녹지의 바닥에는 백남빈이 발견한 장방형의 매끈한 석괴가 있다.

어떤 이치인지는 이백도 몰랐지만 그 석괴는 보름달의 달빛을 온전히 받으면 아래로 내려가면서 벽쪽에 숨기고 있던 배수구를 드러낸다.

그 배수구를 통해 녹지의 물이 창평곡 밖으로 흘러나가면서 동부의 입구가 열리는 것이다.

녹지 아래의 석괴가 한 달에 한 번씩 동부의 입구를 열었다 닫기도 하지만 내부에서도 입구의 개폐와 고정이 가능하다.

그 장치는 입구의 바로 안쪽에 있었다.

 

사자검과 녹지의 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창평곡에는 보물이라 할만한 것들이 여럿 더 있었다.

숲에서 열리는 자령과(紫靈果)라는 붉은 색 과일은 장복하면 대부분의 독에 내성이 생긴다.

또 풀밭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별모양의 열매는 근골을 튼튼하게 해주고 밤눈을 밝게 해주는 약효를 지녔다.

그 외의 각가지 열매나 과일도 세상에 나가면 영약 소리를 들을만한 보물들이었다.

창평곡에서 자라는 과일과 열매들의 약성이 그토록 뛰어난 것은 녹지의 물을 흡수하며 자라는 덕분일 것이다.

짐승들도 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청묘(雪靑猫)라는 흰 털의 야생묘(野生猫)가 있으나 영특하여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설청묘들이 숨어 사는 곳도 물론 창평곡기에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창평곡에는 별별 신기한 것들이 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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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운명을 읽는 눈

 

 

(황금성에 갇혀있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수한 곤경과 상심을 겪겠지만 오늘 밤의 이 따뜻하고 유쾌한 기억이 그때마다 큰 위안과 힘이 될 것이다.)

섬전초를 품에 안은 진상파의 가슴 깊은 곳에서 따스한 감정이 번져 올랐다.

(강유, 저 사내가 아니었다면 결코 할 수 없었던 특별한 경험...)

고개를 들며 강유를 훔쳐보려던 진상파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언제부터인지 강유는 고개를 돌려서 오른쪽 절벽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상파를 긴장시킨 것은 강유가 단순히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강유는 한쪽 무릎을 꿇어서 언제든지 위로 뛰어오를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왼손으로는 바닥에 놓여있던 검을 끌어당겨 움켜잡고 있다.

(강소협의 온몸에서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진상파는 숨을 멈추며 강유의 모습을 주시했다.

섬전초도 무언가 느낀 듯 우는 소리를 내지 않고 강유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뭘까?)

긴장한 진상파는 강유가 보고 있는 오른 쪽 절벽 위를 함께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진상파의 이목에는 감지되는 것이 없었다.

내공이 그리 심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강유가 지닌 특별한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스으...

진상파와 달리 강유의 이목에는 무언가 절벽 위에서 사라지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산짐승이었을까?)

강유는 절벽 위를 노려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이제 더 이상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산짐승은 아니다. 방금 전까지 날 지켜보던 시선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다.)

강유는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되었다.

고불선사가 묵장진언을 연구하여 만든 달마독명안을 수련한 덕분에 강유는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보다 몇 배 더 민감해진 강유의 감각은 방금 전까지 오른쪽 절벽 위에 누군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등봉현부터 날 따라다닌 시선의 주인일 텐데... 대체 어떤 자이기에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는 것인가? 고불선사님을 이용하고 시해한 귀면지존과 관련 있는 자일까?)

덜컥!

강유는 움켜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팽팽하던 긴장도 풀었다.

(상황이 끝났네.)

그제야 진상파도 소리없이 안도의 한숨 내쉬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저곳에 무언가 있었군요.”

진상파는 절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마 지나가던 산짐승이었을 것입니다.”

강유는 웃으며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깊은 산중이니 오가는 짐승도 많겠지요.”

진상파는 강유가 자신이 걱정할까봐 둘러대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이래저래 쉽게 잠들기는 틀린 것같습니다.”

“저도 잠이 다 달아나버렸네요.”

진상파는 품에 안겨 골골 거리는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잠도 오지 않고 하니 한 가지 재미있는 재주를 배워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 그녀에게 강유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르쳐주신다면 저야 고맙지요. 그래 제게 가르쳐주실 재미있는 재주라는 게 무언가요?”

 

<달마독명안이라는 비술입니다.>

 

진상파의 물음에 강유는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대답했다.

전음술(傳音術)이라고도 불리는 전음입밀은 내공을 이용하여 특정 대상에게만 말을 건넬 수 있는 기술이다.

(갑자기 전음술로 말하다니... 달마독명안이라는 게 남이 알면 안되는 재주인 모양이네.)

 

<맞습니다.>

 

진상파가 생각할 때 강유가 다시 전음술로 말했다.

(내 생각을 읽었다?)

진상파의 눈이 놀라 동그랗게 치떠졌다.

 

<저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달마독명안을 온전히 구사할 수 있게 되면 상대방의 운명(運命)까지 읽을(讀) 수 있습니다.>

 

(세상에나...)

강유의 설명을 들으며 진상파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율을 느꼈다.

 

* * *

 

스윽!

강유와 진상파가 있는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 위로 소리 없이 나타나는 인물이 있었다.

얼굴에 섬뜩한 형상의 귀신 가면을 쓴 인물!

바로 마교의 당대 교주로 알려진 귀면지존이었다.

등봉현부터 끈질기게 강유를 따라다닌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귀면지존이었던 것이다.

“...!”

산봉우리에 내려선 귀면지존은 무언가 생각하며 멀리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작은 불빛이 어둠 속에 보인다. 강유와 진상파가 있는 계곡에 피워진 모닥불의 불빛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같은 상황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된다.)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찡그려졌다.

(방금 전에도 저놈은 내 존재를 확실하게 알아차렸었다.)

귀면지존은 강유가 갑자기 자신이 서있던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장면을 떠올리며 가슴이 섬뜩해졌다.

강유는 정말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당금 무림에서 마음먹고 은신한 날 탐지해낼 수 있는 인간은 철면제왕 섭장천을 포함하여 다섯 명 안팍에 불과하다. 헌데 저놈은 번번이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다.)

귀면지존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는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인물이다. 천하를 통틀어도 자신의 윗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철면제왕 섭장천뿐이라 확신해왔다.

당연히 강유 정도의 애송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강유는 수시로 귀면지존이 숨어있는 곳을 돌아보곤 했다.

한 두 번 반복 된 일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강유는 귀면지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불암을 떠난 걸 확인한 후 다시 등봉현에서 발견될 때까지 저놈의 종적을 잠깐 놓쳤었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공백 동안 저놈에게 무언가 기연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강유와 진상파가 머물고 있는 계곡을 노려보는 귀면지존의 눈으로 냉혹한 살기가 번개 치듯 지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강유를 잡아족쳐 마음속의 의혹을 해소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귀면지존에게는 강유를 이용하여 추진중인 원대한 계획이 있다.

찜찜한 기분을 해소하려고 오랜 세월 공 들여온 노력을 무산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저놈의 주변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겠다. 들키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겠지만...)

휘익!

귀신 가면 속에서 스산한 눈빛을 흘리며 귀면지존은 산봉우리를 날아 내려갔다.

 

* * *

 

밤은 깊을 대로 깊어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냉혈철심 사우의 시체가 안치 되어 있는 제왕성의 분타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제왕성 분타의 그 누구도 밤 새 잠들지 못했다.

 

“소요신군의 아들놈은 진소저와 함께 금릉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소이다.”

사우의 수하들이 자신들의 대주가 안치 된 관에 뚜껑을 고정시키는 것을 보며 궁무독이 말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오?”

동위사대 대주 독두태보가 고리같은 눈을 희번덕이며 물었다.

반면 은위사대 대주인 백월사신은 뭔가 알아차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우를 살해한 이후 금릉으로 향하는 길 어디에서도 둘의 종적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도 있소이다만...”

궁무독은 생각에 잠긴 백월사신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진소저 입장에서는 굳이 황금성 본점이 있는 금릉으로 가지 않아도 안전을 확보할 방도가 있기 때문이오.”

“개봉!”

쾅!

비로소 깨달은 독두태보가 주먹으로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사우의 관에 뚜껑을 닫고 있던 철위사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진소저는 금릉이 아니라 여기서 멀지 않은 개봉의 황금성 분점으로 향할 수도 있겠소!“

독두태보가 초조한 표정이 되어 이를 부득 갈았다.

“황금성 개봉 분점의 경호능력은 금릉의 본점에 못지 않소. 일단 진소저가 개봉 분점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로서도 손을 쓸 방도가 없다고 봐야만 하오.”

궁무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저도 진소저지만 강유라는 놈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오! 십팔 년 전 비극의 열쇠를 쥐고 있는 놈이니...”

독두태보의 대머리로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중년 이상의 나이인 제왕성 무사들 중 십팔 년 전의 비극을 떠올리고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 자는 없다.

자신들의 주모인 무후 영청공주는 천마구절기중 마검칠식에 시해 당했었다.

그리고 냉혈철심 사우 역시 그 마검칠식에 죽임을 당했다.

진상파를 제왕성으로 데려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검칠식을 구사한 강유를 놓칠 수는 없다.

“강유란 놈의 추적은 노부들이 맡을 테니 사대주의 운구는 총관께서 맡아주시오.”

침묵하고 있던 백월사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두 분 대주께서 수고해주시오.”

궁무독은 백월사신과 독두태보에게 포권을 했다.

“맡겨주시오!”

“수시로 연락드리겠소!”

휙! 휙!

백월사신과 독두태보도 궁무독에게 포권을 한 후 대청에서 달려 나갔다.

(십팔 년... 십팔 년만에 소성주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었다.)

직속 수하들과 함께 분타를 빠져나가는 백월사신과 독두태보의 뒷모습을 보며 궁무독의 눈이 숨길 수 없는 흥분으로 물들었다.

(마검칠식을 사용한 자가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이라는 게 의외이긴 하지만 드디어 혈가람 패거리들에게 반격할 기회가 온 것이다.)

궁무독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섭무궁(葉無窮)! 우리 제왕성의 진정한 후계자인 섭무궁공자만 찾아내면 혈가람과 마교의 세력을 제왕성에서 일거에 뽑아버릴 수 있다!)

 

궁무독은 대대로 섭씨일족을 섬겨온 가신(家臣) 집안 출신이다.

반면 혈가람등 제왕성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근래에 영입된 자들이다.

혈가람이 대표격인 신흥세력은 모용준이 섭장천의 후계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때문에 전대부터 섭씨일족을 섬겨온 충신들은 제왕성 내에서 급격히 입지를 상실하고 있다.

궁무독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원래 제왕성에는 총관이 궁무독 한명이었다.

헌데 부성주인 혈가람등은 총관 자리를 둘로 늘렸으며 새로 신설된 내(內)총관 자리에 모용준의 유모 출신인 구미호리 구숙정을 앉혔다.

자연히 궁무독의 역활은 제왕성의 대외적인 업무만 담담하는 외(外)총관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그 결과 제왕성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궁무독도 자세히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흥세력들 중에는 마교와 연줄이 닿는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이 다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자들은 어느덧 제왕성의 요직을 차지해가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제왕성이 마교에 의해 장악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궁무독이 느끼고 있는 이 절박한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다.

귀면지존에 의해 납치당한 소성주 섭무궁을 찾아내는 게 바로 그것이다.

섭무궁이 제왕성으로 돌아온다면 모용준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모용준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려온 혈가람 일파도 간단히 일소해버릴 수 있다.

제왕성에 침투한 마교의 무리들에게도 철퇴를 내릴 수 있을 테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섭무궁 소성주의 행방을 알아내야만 한다.)

궁무독은 결의를 다지며 대청 안을 둘러보았다.

사우가 안치 된 관의 뚜껑을 고정시킨 철위사들이 관을 둘러싼 채 비통해하고 있다.

“네놈들...!”

궁무독은 사우의 수하들에게 준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철위사들이 깜짝 놀라며 궁무독을 돌아본다.

“어이없이 죽은 너희 대주를 위해 복수할 결의가 되어 있느냐?”

“하명만 하십시오 총관님!”

“기꺼이 섭을 지고 불속에라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궁무독의 말에 철위사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결의라니 좋다. 네놈들에게 마음껏 분풀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마.”

독검마유 궁무독의 얼굴에 음산한 웃음이 번졌다.

 

* * *

 

변경(汴京)이라고도 불리는 개봉(開封)은 송(宋)나라를 비롯한 여러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던 유서 깊은 고도(古都)다.

때는 해가 지기 직전인 저녁 무렵이다.

개봉의 동문(東門)으로 이어진 넓은 관도는 오가는 사람들과 우마차들로 북적이고 있다.

“오늘 따라 길이 왜 이리 막히누?”

전(全)씨 성의 늙은 마부는 쓰고 있는 죽립 끝을 쳐들며 앞쪽을 살펴보았다.

개봉으로 들어가는 길은 엄청난 정체를 빚고 있었다.

개봉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나 우마차의 행렬은 순조로운데 들어가는 길만 막히고 있는 것이다.

“해 지기 전에는 성문에 닿아야하는데...”

마음이 급해진 전노인은 연신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앞쪽의 상황을 살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해가 지면 성문을 닫는다.

그리고 일단 닫힌 성문은 다음날 해가 떠야만 열린다.

도적이나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인데 일몰 이후에는 특권층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오늘 안으로 개봉에 들어가려면 해가 지기 전에 성문에 도착해야만 하는 이유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손님들과 함께 노숙을 하게 생겼구먼.)

전노인은 혀를 차며 자신이 몰고 있는 마차를 돌아보았다.

전노인의 집은 개봉에서 동북쪽으로 백여 리쯤 떨어진 마두집(碼頭集)이란 마을에 있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두 마리의 말과 마차 한 대로 열 명이 넘는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온 늙은 마부가 전노인이다.

오늘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한 쌍의 남녀가 전노인의 집을 찾아와 마차를 대절(貸切)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개봉으로 데려다달라면서 무려 백 냥의 거금을 내놓은 것이다.

백 냥은 전노인이 몇 달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거금이다.

오늘 안으로 개봉까지 데려다달라는 주문이 조금 벅차긴 했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잘 아는 길이기도 해서 힘껏 달린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개봉 근처에 이를 수가 있었다.

헌데 정작 개봉에 거의 다 와서 길이 막히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날도 저녁 무렵에는 막히긴 하지만 이렇게 심하게 막힌 적은 없는데...)

전노인은 고개를 학처럼 빼며 개봉의 성문쪽을 살폈다.

그런 전노인의 시야로 전에는 보지 못한 특이한 상황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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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마두들이 준 기연(奇緣) (1)

 

 

(이러다간 정말 죽고 말겠다. 고열에 시달리다가 겨우 살아났는가 싶었는데...)

정신을 거의 잃을 지경이 된 임청우는 필사적으로 약사여래불을 향해 기어갔다. 조금이라도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로부터 떨어지기 위해서였다.

임청우가 힘겹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등에 박혀있는 철선동시의 팔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물위에 떠있는 조각배의 돛대처럼...

(불심연화지라는 무공이 이번에도 나를 살려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불심연화지의 비결을 떠올렸다.

불심연화지를 수련한 덕분에 끔찍한 고열을 극복했었다.

어쩌면 불심연화지가 이 지독한 냉기에서도 자신을 살려줄지 모르는 일이다.

“네놈이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우린 금포염왕을 이기고 천하를 장악할 수 있었을 텐데... 이 모든 게 얼어 죽은 네놈의 욕심때문이다.”

뒤쪽에서 마면혈도가 분통이 터져 내뱉는 말소리가 들린다.

 

철선동시도 내심 후회막급이었다.

(기습으로 저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내 무공을 너무 과신했다. 저놈이 그런 괴상한 수법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악다구니에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처음부터 신중하게 손을 썼더라면 마면혈도가 비장의 수법을 숨기고 있었어도 능히 이길 수 있었을 철선동시였다.

마면혈도는 어쩌면 철선동시 자신보다 무공이 약한 척하여 방심을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땅을 치고 후회하고 싶지만 한쪽 팔과 다리를 잃어버렸으니 이제는 일어나 땅조차 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제기랄... 제기랄...)

철선동시는 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자신의 품속에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반부의 몽선도가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 널브러져 있는 마면혈도의 품에 나머지 반부의 몽선도가 있다.

그 몽선도의 비밀을 풀기만 하면 고금제일인이 될 수 있다는 전설이 오래 전부터 무림에 전해지고 있었다.

평생 억눌려 지내왔던 금포염왕이란 절망적인 존재!

같은 삼괴에 속하면서도 자신들을 종 부리듯 하던 무비옹의 횡포!

그들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있는 최후, 최고의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이제 몽선도의 비밀을 풀어서 무공을 연마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작은 실수 하나로 말미암아 고금제일의 고수가 되기는커녕 곧 죽어야만 한다.

그 사실에 철선동시는 미칠 것만 같다.

그러던 어느 순간 철선동시의 머릿속으로 번갯불 같은 영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막힌 생각이 한 가지 떠올랐던 것이다.

(저 말대가리의 색혈지독(索血之毒)은 천년설삼(千年雪蔘)같은 영약이 없으면 해독할 수 없다. 그렇지만 꼭 해독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철선동시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내게는 정종 무공인 용조수 공력이 있고, 이 공력을 이용한다면 다른 놈 몸에 내 몸 속의 독을 옮겨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비록 아직 화경(化境)에 달하지 못해 직접 몸 밖으로 배출해 버릴 수는 없겠지만...)

머리가 나쁘거나 자질이 둔한 자가 절정의 무공을 깨우쳐 익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절정의 무공을 소유한 자는 그 외모가 어떻든 간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뛰어난 근골과 머리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철선동시는 물론이고 비록 머리회전이 조금 늦기는 하지만 마면혈도 역시 그런 인물들 가운데 한명이다.

죽음 가운데에서 살 수 있는 길을 발견한 철선동시는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한 쪽으로 기어가고 있는 빙골산에 중독된 쥐새끼를 돌아보았다.

등에 자신의 팔이 박혀있는 임청우가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휘릭! 털썩!

“흐흐흐... 네놈은 이 나으리의 빙골산에 중독되었으니 곧 얼음덩어리가 되어 죽을 것이다.”

철선동시는 몸을 나무토막처럼 굴려서 임청우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임청우는 몸속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는 냉기를 몰아내보려고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반복해서 외우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겨우 입문한 불심연화지의 구결로 빙골산이란 극독을 몰아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갈수록 의식이 희미해져 오는 중이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주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와중에 임청우는 철선동시의 갈까마귀가 우짖는 것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가만 둬도 죽을 지경인데 아예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건가?)

불끈 오기가 치밀면서 화가 났다.

휘릭! 털썩!

철선동시는 다시 몇 바퀴 굴러서 거리를 좁히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놈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임청우의 귀가 번쩍 띄었다.

어쨌든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났다.

그는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 어떤 방법이오?”

하지만 말을 내뱉자마자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저 마두가 죽을 때가 되자 참회를 한 것도 아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라면 몰라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분명히 다른 의도가 있음이 틀림없다.

사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넙죽 대답하고만 자신이 멍청이같다.

스스스!

자신에게 화가 나 입을 벌리는데 턱이 달달 떨리고 입에서 차가운 흰 김이 나온다. 이미 빙골산의 독기가 뼛속 깊이 스며든 증거다.

철선동시는 임청우의 중독이 심한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났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색혈지독을 모두 옮겨버리기 전에 임청우가 죽어버린다면 고심해서 생각해낸 방법이 말짱 도로묵이 되고 만다.

그래서 철선동시는 듣기 싫은 음성이지만 최대한 목청을 가다듬고 고통스런 신음소리까지 섞어서 임청우의 동정심을 이끌어 내려고 시도했다.

“이 나으리는 지금 너무도 고통스럽다. 으으... 저 말대가리가 칼에다 지독한 극독을 묻혀놓았기 때문에 나도 곧 죽게 될 것이다.”

“당신도... 똑같은 짓을 하지 않았소?”

임청우가 벌벌 떨면서도 퉁명스럽게 말했다.

“큭큭큭...”

철선동시의 수작을 지켜보고 있던 마면혈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시시!

웃는 마면혈도의 입에서 피가 쿨럭쿨럭 쏟아지다가 이내 동결되어 버린다.

그자의 얼굴은 마치 철선동시의 다치기 전의 모습처럼 하얗게 변해있다. 서리가 얼굴을 뒤덮은 때문이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임청우가 쉽게 속지 않자 철선동시는 속에서 불이 나는 것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애처로운 표정과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후회하고 있다. 그래서 네 녀석의 중독을 풀어주고 싶다.”

말하는 철선동시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얼굴 뿐 아니라 몸도 급격히 굳어지고 있다.

색혈지독이 철선동시가 내공으로 형성한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의... 의심하지... 마라. 전... 적으로... 너를 도와주려는 거뿐이다.”

안면의 근육이 굳어지며 혀도 잘 돌아가지 않아서 말소리가 웅얼거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임청우는 철선동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철선동시의 말이 어눌해졌을 뿐 아니라 임청우 자신도 지독한 한기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유달리 강인한 몸을 타고 난 덕분에 아직까지는 정신을 완전히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은 이미 마비되어 버렸고 평소의 습관과 버릇에 따라 반사적인 행동과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뿐이다.

마면혈도나 철선동시와 달리 임청우는 독에 저항할 수 있는 공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몸은 점차 굳어지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임청우의 그런 사정은 생각지도 못하고 철선동시는 그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임청우의 손이나 발목, 하다못해 손가락이라도 잡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이다.

“해독약은... 내 옷... 속에 있다. 나는... 너무 고통... 스럽다. 내 옷에서... 해독약을... 꺼내는 즉시 내... 겨드랑이의... 소요혈(笑腰穴)을 눌러... 주기 바란다. 죽는... 것만이 이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

임청우가 속아 넘어가서 겨드랑이를 누르려고 하면 철선동시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마면혈도 역시 내공으로 빙골산의 독기를 억제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철선동시의 말을 듣는 순간 무슨 짓을 하려는지 단숨에 깨달았다.

“교활한 놈!”

팟!

마면혈도는 버럭 소리치며 몸을 뒤집어 자벌레처럼 몸을 굽혔다가 확 튕겨 올렸다.

“네놈 뜻대로는 안된다!”

털썩! 콱!

몸을 굽혔다가 펴는 반동으로 튀어 올랐던 마면혈도는 임청우 곁으로 떨어지며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철선동시에 의해 이용당하기 전에 먼저 임청우를 죽여 버리려는 것이다.

콱!

그러나 철선동시도 마면혈도와 거의 같은 순간에 임청우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빠지직! 우두둑!

두 마두는 임청우의 발목과 손목을 잡자마자 전력을 기울여 공력을 쏟아 넣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지독한 한기에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던 임청우였다.

그런 그의 몸으로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하체는 끓는 기름에 담가진 것 같고 상체는 얼음구덩이에 던져진 것같다.

산 채로 몸이 둘로 찢어지는 것같기도 하다.

“끄으윽...”

지금까지 상상조차 못해봤던 그 끔찍한 고통에 임청우는 그대로 까무라쳐 버렸다.

고통이 너무도 엄청난 탓에 불심연화지의 비결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북두칠성의 힘을 불러내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사용하지 않은 후로 수백 년이 지난 대안탑 칠층의 먼지 쌓인 바닥에 조각 편(片)자 비슷한 형태로 누운 세 사람의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마면혈도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살아날 가망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다.

빙골산은 원래 해약(解藥)이 없는 지독한 독이다.

철선동시가 마치 강시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것도 이 빙골산을 오랫동안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선동시가 빙골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독되지 않은 것은 어떤 특별한 묘방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몸속에 빙골산의 독기가 서서히 쌓이면서 내성(耐性)이 생긴 것뿐이다.

철선동시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마면혈도로서는 내공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마면혈도는 늘 내뱉던 말처럼 얼어 죽은 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억울한 노릇이다.

나쁜 짓으로 말하자면 자기 못지않게 철선동시도 했다.

더구나 나쁜 짓으로나 무공으로나 전혀 미칠 수 없는 대형(大兄) 무비옹도 있다.

무비옹은 몰라도 최소한 철선동시와는 함께 죽어야 한다.

헌데 철선동시는 색혈지독을 임청우의 몸을 빌어서 배출하려고 한다.

철선동시와 함께 죽자면 임청우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

임청우만 죽이면 철선동시도 따라 죽게 된다.

결심이 서자 마면혈도는 빙골산에 저항하던 내공마저 풀어버렸다.

우르르!

대신 임청우를 죽이기 위해 임청우의 발목에 자리한 태계혈(太溪)에 모든 공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심맥을 모두 끊어 주겠다 쥐새끼야!)

어차피 죽을 목숨, 마면혈도는 물귀신처럼 한명이라도 더 물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이렇게 되자 철선동시도 다급해졌다.

무공에 있어서 그는 마면혈도보다 약간 위였다.

하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임청우가 마면혈도의 손에 죽지 않도록 보호해한다.

(저놈의 말 대가리가...)

철선동시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임청우의 몸속으로 자신의 용조수 공력을 주입했다.

우르르!

손목에 있는 혈도인 맥문(脈門)을 통해서 철선동시의 대해와도 같은 공력이 주입되며 임청우의 내장과 심맥을 두텁게 감쌌다.

마면혈도가 주입한 내공과 철선동시의 내공이 임청우의 몸속에서 호각으로 대치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 마면혈도는 필사적으로 내공을 임청우의 몸에 쏟아 넣었다.

덕분에 철선동시의 우세한 내공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다.

철선동시는 공력을 임청우의 몸속에 쏟아 넣으면서 색혈지독도 함께 조금씩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츠츠츠!

그러자 임청우의 하얗게 서리로 뒤덮힌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해갔다.

철선동시는 흠칫하며 독기를 줄이고 공력을 더 많이 주입하여 임청우의 심맥과 오장을 보호했다.

임청우는 빙골산에 중독된 후라 색혈지독에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죽이려고 독을 밀어 넣으면서 죽지 않게 공력으로 보호해주어야 하다니...)

철선동시는 기가 막힌 상황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임청우가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철선동시 자신의 기발한 계획도 말짱 헛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갑자기 그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이 머리가 쭈뼜해졌다.

그와 함께 속에서 울컥 피가 올라오려고 했다.

(이런...)

철선동시가 보인 찰나적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면혈도가 직접 공력을 움직여 공격해온 것이다.

우르르!

마면혈도의 공력이 맹렬히 밀고 올라왔다.

철선동시는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하고서야 겨우 마면혈도의 공력에 대항할 수 있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속에서 철선동시와 마면혈도의 공력이 기경팔맥을 타고서 말이 달리듯이 급박하게 쫓고 쫓기고, 밀고 밀리면서 치닫는 데도 깨어날 줄 몰랐다.

자신의 몸이 두 사람의 전쟁터가 되리라곤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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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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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血鬪) (2)

 

 

임청우는 윗부분이 반쯤 날아가 버린 불심연화로 속에 고동의 알맹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수평혈도참에 하마터면 머리가 날아갈 뻔 했다.

생각하면 실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척포도 크게 놀랐는지 다시 호리병 속으로 기어들어가 나오려 하지 않는다.

(칼이 수천 근도 넘을 구리 향로를 소리 없이 베어버리다니... 척포 이놈은 저 무시무시한 칼날아래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혈도의 가공할 위력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마면혈도가 혈도를 휘둘러 붉은 빛줄기를 철선동시에게 퍼붓는 것이 보였다.

우우웅!

마치 붉은 피의 파도가 몰려가는 듯하다.

마면혈도의 끔찍스런 용모와 함께 어우러진 그 광경은 마치 무서운 그림책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정말 사부님이 이기지 못한다고 할 만하구나. 세상에 저보다 더 무서운 무공이 있을 수 있을까?)

마면혈도의 도법을 본 임청우는 간담이 서늘해져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견문이 짧은 임청우로써는 처음 보는 가공한 장면이었다.

카카캉!

하지만 철선동시는 용조수로 괴이한 강기의 막을 형성하여 혈도의 도기를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화악! 파지직!

두 가지 힘이 부딪히며 예리한 경풍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삭!

마면혈도의 발에 밟힌 아미타여래의 머리가 과자부스러기처럼 가루가 되어버렸다.

“끼요오오!”

마면혈도는 괴성을 지르며 더욱 세차게 혈도를 휘둘렀다.

“몽선도를 내놔라!”

철선동시 역시 혈도의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며 갈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카카캉!

철선동시는 용조수로 마면혈도의 혈도를 튕겨내었다.

촤라락!

뒤이어 그자의 빙혼철선이 접혔다가 확 펴지면서 마치 칼처럼 마면혈도의 목을 베어갔다.

마면혈도는 혈도의 끝부분으로는 용조수의 강기를 막고, 손잡이 부분으로는 빙혼철선을 가로막았다.

치이익! 빠카카캉!

달군 쇠가 물에 들어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푸른 불똥이 튀었다.

휘익!

철선동시는 껑충껑충 뛰면서 바람처럼 재빠르게 물러섰다. 그의 모습은 이야기로나 듣던 강시와 다름이 없다.

두 괴물의 움직임은 귀신이 놀랄 정도로 빨랐다.

마면혈도의 혈도에서 뿌려지는 붉은 빛과 함께 용조수를 펼치는 철선동시의 손톱에서도 푸른빛이 귀화처럼 튀어나와 사방으로 치달린다.

철선동시의 그 기다란 손톱에는 독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강시가 말대가리에게 이기겠구나.)

임청우는 코 윗부분만 빼꼼히 불심연화로 밖으로 내민 채 구경하며 생각했다.

(발목이 잘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빼앗으려는 걸 보면 몽선도라는 게 정말 중요한 물건인가 보다.)

그리고 보니 철선동시는 농산에서도 몽선도를 탐내는 듯한 말을 했었다.

그 사이에도 참혹한 싸움은 이어졌다.

철선동시의 발목은 지혈을 하지 않아서 피가 줄줄 흘러 대안탑 칠층 바닥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

그런가하면 어깨의 살이 움푹 뜯겨나가 뼈가 허옇게 드러난 마면혈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용조수와 빙혼철선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임청우의 생각처럼 두 괴물 간의 우열은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혈도가 내뿜는 혈광은 점점 위축되는 반면 철선동시의 기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있었다.

철선동시의 빙혼철선은 접혔다 펼쳐졌다를 마음대로 하면서 마면혈도의 요혈을 노리고, 용조수는 가공할 기세로 상대를 핍박한다.

카카캉!

마면혈도는 철선동시의 공격을 가까스로 받아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진짜 강시인 듯 껑충껑충 뛰는 철선동시의 경신술은 기이하면서도 빠르다.

마면혈도는 지금까지는 거의 위치를 옮기지 않고 싸웠다.

하지만 제자리에서 철선동시의 공격을 감당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져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둑! 콰직!

마면혈도가 한걸음씩 물러날 때마다 그자의 발이 대리석 바닥으로 푹푹 파고들었다.

(얼어 죽은 놈이 무공을 속이고 있었구나. 대체 어디서 소림사의 용조수를 배운 것일까?)

마면혈도의 흉측한 얼굴이 식은땀으로 뒤덮였다.

쫘악!

마면혈도가 생각하면서 생긴 실날같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철선동시의 용조수가 그자의 왼쪽 소매 자락을 뜯어놓았다.

손톱에 직접 닿지도 않은 팔목이 화끈거린다. 용조수의 경풍에 스친 것이다.

팔을 뒤로 물리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마면혈도의 팔은 팔꿈치에서부터 뜯겨 나갔을 것이다.

(위험했다.)

마면혈도의 등골로 식은땀이 쫙 흘렀다.

반면 얼어 죽은 시체처럼 창백한 철선동시의 얼굴에는 득의의 웃음이 피어오른다.

촤라라랑!

빙혼철선이 마면혈도의 머리를 노렸다가 빙글 돌며 아랫배를 찌르고 들어갔다.

촤악!

동시에 용조수는 마면혈도의 혈도 중간쯤을 비스듬히 가격하고 있었다.

(승부가 났다!)

임청우는 내심 소리쳤다.

마면혈도에게는 뒤로 물러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막거나 피할 방법 역시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마면혈도는 과연 삼괴 중의 일인다웠다.

스악!

마면혈도는 몸을 비스듬히 돌려 빙혼철선을 스쳐 보내며 혈도의 손잡이로 철선동시의 팔꿈치를 가격했다.

철선동시는 팔이 깨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손을 움츠리지 않을 수 없었고, 마면혈도는 아슬아슬하게 철선동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크카카캇!”

화악!

회심의 일격에 실패한 철선동시는 괴성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팟! 쏴아!

마면혈도가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뒤로 날아갔던 철선동시는 벽을 차고 더욱 빠르게 날아들었다.

철선동시는 날아들면서 손을 어지럽게 아래위로 흔들었다.

샤샤샥!

순간 철선동시의 손에서 수십 수백의 손 그림자가 생겨났다.

새로 생긴 그림자가 먼저 생긴 그림자를 밀면서 노도같이 마면혈도를 향해 밀려갔다.

드드드!

그 가공할 위세에 반만 남은 불심연화로마저 진동했다.

무릇, 강호의 고수들은 대부분이 진실한 절기 하나 둘쯤은 결코 드러내지 않고 숨겨놓기 마련이다.

마면혈도도 이같은 생사의 존망에 처하자 숨기고 있던 비전의 수법을 펼쳐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휘익!

갑자기 마면혈도의 허리가 뒤로 완전히 꺾이며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무슨 짓을...)

철선동시는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했다.

번쩍!

직후 그자의 발 앞에서 붉은 빛이 벼락같이 솟구쳤다.

“헉!”

철선동시는 기겁을 하면서 빙혼철선을 아래로 휘둘렀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크악!”

쩍!

철선동시의 왼쪽 다리와 왼쪽 팔이 동시에 베어져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후두두둑!

피 보라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마면혈도는 자벌레처럼 몸을 뒤로 꺾어 자신의 두 다리 사이로 머리를 내밀며 혈도를 베어 올렸던 것이다.

바로 혈왕도법 중의 최후 절초인 구사일생(九死一生)이었다.

휘익!

반격에 성공한 마면혈도는 한 바퀴 굴러 자세를 바로 했다.

팔 다리가 하나씩 잘린 철선동시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는 것이 그자의 눈에 들어왔다.

화악!

마면혈도는 내친김에 철선동시의 목을 벨 심산으로 철선동시를 덮쳐갔다.

퍽!

하지만 그 직후 접혀진 빙혼철선이 마면혈도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철선동시는 쓰러지면서 빙혼철선을 던졌었다.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에 흥분한 마면혈도를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철선동시에게 덮쳐갔었다.

날아드는 빙혼철선에 자진해서 몸을 들이민 격이 된 것이다.

퍼억!

가슴에 빙혼철선이 박힌 마면혈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엎어졌다.

쿠당탕!

균형을 잃은 철선동시의 몸이 불심연화로에 부딪혔다가 아무렇게나 처박힌 것과 거의 동시였다.

 

후두둑!

임청우는 흠뻑 피를 뒤집어썼다. 철선동시의 팔 다리가 잘려지며 뿜어진 피가 가까이에 있던 불신연화로에 흩뿌려진 것이다.

오라는 비는 오지 않고 엉뚱하게도 대안탑 안에서 피비를 맞았다.

드드드!

끈적거리는 불쾌감에 이어 불심연화로가 넘어갈 듯 흔들렸다. 균형을 잃고 쓰러진 철선동시의 몸뚱이가 부딪힌 때문이다.

(어이쿠! 이러다간 들키고 말겠다.)

임청우는 요동치는 불심연화로를 바로 하려고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퍼억!

그 직후 등덜미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헉!”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쿵!

그 바람에 철선동시의 몸이 부딪혀 흔들리던 불심연화로가 기우뚱거리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콰당탕!

임청우는 밖으로 굴러 나와 약사여래불 앞에 모질게 엎어졌다.

휘익!

엎어지는 임청우의 손에서 벗어난 호리병이 천장의 틈을 통해 대안탑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으으으...”

등이 근질근질해지면서 손발이 떨려온다.

철선동시의 잘려진 왼팔이 높이 날아올랐다가 임청우의 등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시퍼런 손톱은 떨어지는 기세로 임청우의 등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임청우는 전신의 맥이 빠지며 학질에 걸린 듯이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온몸으로 확 퍼져가는 끔찍한 냉기에 비하면 등줄기의 통증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으으으...”

임청우는 이빨을 달달 마주치며 무작정 앞으로 기어갔다.

정신이 몽롱해져 왔다.

몸속에 깃들어있는 북두칠성의 힘을 깨우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두 마두에게서 멀어져야만 한다.

그때 마면혈도가 엎어졌던 몸을 겨우 뒤집으며 거친 음성을 천천히 내뱉었다.

“크크큭! 숨어있던 쥐새끼가 벼락을 맞았군. 저 강시 놈의 빙골산(氷骨散)은 해약이 없는 극독인데...”

마면혈도는 임청우라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불심연화로 속에 누군가가 숨어있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다만 호흡이 정제되지 못하고 거친 것으로 보아 무공을 익히지 못한 자라는 것을 알았기에 서둘러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사정은 철선동시도 마찬가지였다.

“끼끼끼... 말대가리, 네놈도 혈도에 색혈사(索血蛇)의 독혈(毒血)을 발라놨었군. 덕분에 셋 다 살아나기는 틀렸어.”

철선동시가 팔과 다리가 잘려져 널브러진 채 키득거렸다.

이상하게도 그자의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면혈도의 혈도에 묻어있던 색혈사의 독혈이 그의 피를 응결시켜 버린 것이다.

그 독기는 심장을 향해 가면서 모든 피를 굳혀버린다.

싸우는 동안에는 몸의 움직임이 급격하여 피가 솟구쳐 나왔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게 된 지금은 피가 상처에서부터 심장 쪽으로 급격히 굳어지고 있었다.

철선동시는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기 위해 혼신의 공력으로 색혈사의 독혈이 몸속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결국엔 독기를 이기지 못하고 죽을 운명이었다.

팟!

“썩을 놈!”

한숨 돌린 마면혈도가 가슴에 박힌 빙혼철선을 뽑아 던지며 악다구니를 썼다.

푸악!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진다.

빙혼철선에도 철선동시가 사용하는 빙골산이 묻어있었다.

빙골산은 극심한 냉기를 품고 있는 특이한 독약이다. 이에 중독된 자는 얼어 죽게 되는데 천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썩지 않는다.

빙골산의 독기에 의해 마면혈도의 가슴 상처에 서리가 앉으며 허옇게 변하고 있었다.

용조수에 살이 뜯겼던 그자의 어깨는 공력의 운행이 중단된 탓에 벌써 서리가 두텁게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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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장

 

              영물을 잡는 법

 

 

“제가 상처를 잘못 건드렸는가요?”

강유의 등에 약을 발라주던 진상파가 놀라서 물었다.

“아닙니다.”

강유는 고개를 조금 저으며 앞쪽을 살펴보는데 집중했다.

(왜 이러지?)

진상파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들어서 강유와 함께 모닥불 너머의 어둠 속을 보았다.

반짝!

순간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을 띤 한 쌍의 빛이 반짝이는 게 진상파의 눈에도 들어왔다.

“흑...”

진상파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질렀을 때였다.

슥!

그 한 쌍의 붉은 빛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쪽 어둠 속에... 뭔가 있군요.”

진상파는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여자라 사람보다는 짐승이 더 무섭다.

“귀찮은 놈이 따라붙었습니다.”

강유는 한숨을 쉬며 누더기가 된 웃옷을 입기 시작했다.

“섬전초라는 그 담비인가요?”

진상파도 비로소 사라진 불빛이 유별나게 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낮에 겁을 주었던 게 별로 효과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강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옷을 조심스럽게 걸쳤다.

“그런 것같군요.”

진상파는 강유가 옷을 입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조금 뒤로 물러앉았다.

“저놈을 방치하면 우리가 어디로 가든 제왕성 측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상의를 걸친 강유는 허리띠를 매면서 일어났다.

“그럼...”

“잡아서 혼을 좀 내줘야겠지요. 더 이상 따라다니지 못하도록...”

강유는 싱긋 웃으며 일어났다.

모닥불 옆에는 밤새 불을 지피기 위해 강유가 주변에서 모아온 마른 나뭇가지들이 제법 많이 쌓여있었다.

강유는 그것들 중에서 가는 것만 한 아름을 추려내었다.

쿡! 쿡!

그리고는 그 나뭇가지들을 모닥불 앞쪽의 공터에 박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걸까?)

진상파는 모닥불 뒤에 무릎 꿇고 앉아서 강유가 나뭇가지들을 바닥에 줄 지어 꽂는 것을 지켜보았다.

(번개같이 빨라서 섬전초라는 이름까지 붙은 그 영물을 나뭇가지 몇 개 꽂은 것으로 잡을 수 있다는 걸까?)

진상파가 의아해할 때였다.

“대충 완성되었습니다.”

이윽고 강유가 숙였던 허리를 펴며 웃었다.

어느덧 바닥에는 나뭇가지들이 깔때기 형태로 박혀있었다.

바깥쪽은 넓고 모닥불과 동굴 쪽은 좁아서 마치 물고기 잡는 통발 같이 보이는 울짱(담장)이다.

나뭇가지를 꽂아 설치한 그 울짱의 넓은 쪽의 폭은 이장 정도고 모닥불 앞의 좁은 쪽은 불과 한자 남짓이다.

또 울짱을 형성하는 나뭇가지들은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섬전초가 위로 튀어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구조다.

“특이한 형태의 함정이로군요. 마치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하는 어살(魚箭)같기도 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기다리던 진상파가 울짱을 살피면서 말했다.

“어릴 적에 저는 안탕산의 험한 산속을 누비며 산토끼들을 잡으러 다녔었습니다.”

모닥불 앞으로 돌아온 강유는 자신의 물건들 중 명주실을 꼬아 만든 가느다란 밧줄을 집어들며 말했다.

“하지만 산토끼란 놈은 워낙 빠르고 기민한 탓에 무작정 쫓아다녀서는 잡을 수가 없었지요.”

강유는 그 가느다란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이런 올가미였습니다.”

강유는 만든 올가미를 들고 통발 형태로 꽂아놓은 나뭇가지 울짱의 가장 좁은 곳에 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섬전초를 함정 안쪽으로 몰아와서 그 올가미로 잡으실 계획이시군요.”

진상파의 눈이 반짝 빛났다.

“토끼나 사슴처럼 빠르게 달리는 게 장기인 짐승들은 부상당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합니다. 그래서 늘 다니던 길로만 다니고 장애물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습성이 있지요.”

강유는 올가미와 연결된 밧줄 끝을 바닥에 깊이 꽂아놓은 굵은 나뭇가지에 묶었다.

“어떤 짐승보다 빨리 달리는 섬전초 역시 비슷한 습성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유는 올가미를 원형으로 펴서 좌우의 나뭇가지에 살짝 걸쳐놓았다.

“섬전초도 일단 함정 안으로 들어오면 울짱을 뛰어넘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겠군요.”

“비록 급조한 함정이긴 해도 효과는 있을 겁니다.”

웃으며 일어나는 강유의 손에는 방책을 만들고 남은 두 개의 나뭇가지를 들고 있다.

“이제 그놈을 이 울짱 안쪽으로 몰아넣기만 하면 됩니다.”

강유는 나뭇가지를 양손에 나눠들고 어둠 속을 향해 돌아섰다.

“그럼 숨바꼭질을 시작해볼까?”

딱! 딱!

이어 강유는 나뭇가지들을 부딪혀 소리를 내며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재미있어하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늠름한 어른처럼 보이지만 아직 순진한 소년의 면모도 지니고 있는 사내야.)

강유에게 한층 더 호감이 생기는 진상파였다.

 

계곡 입구 쪽의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섬전초는 움찔했다

딱! 딱!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느낀 섬전초는 숨어있던 바위 위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역시 떠나지 않고 근처에 머물러 있었구나.”

딱! 딱!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 두개를 부딪혀 소리를 내며 강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유는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섬전초의 붉은 눈을 단번에 찾아낸 것이다.

카아!

휘릭!

섬전초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숨어있던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내가 내는 소리에 호기심을 참지 못해 숨어있던 곳에서 머리를 내밀어 들키기도 하고... 짐승은 어쩔 수 없는 짐승이로구나.”

강유는 웃으며 섬전초쪽으로 다가왔다.

끼이! 팟!

섬전초는 재빨리 튀어 올라서 계곡 입구쪽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어림없다.”

동시에 강유가 나뭇가지 하나를 강하게 던졌다.

패앵!

나뭇가지는 풍차처럼 돌면서 섬전초를 노리고 날아갔다.

스팟!

앞으로 달려가던 섬전초는 몸을 옆으로 홱 틀어서 그 나뭇가지를 피했다.

빠각!

섬전초를 스쳐 지나간 나뭇가지는 앞쪽의 바위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휘익!

나뭇가지를 피한 섬전초는 방향을 틀어 바람같이 달려갔다.

그 때문에 이제 놈이 달려가는 쪽은 계곡 입구가 아니라 계곡 안쪽이었다.

“서라 이놈아!”

강유는 짐짓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려 섬전초를 따라갔다.

휘익!

섬전초는 절벽 아래쪽을 따라 한줄기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놈의 앞쪽 이십여 장 쯤에 모닥불이 타고 있고 강유가 급조해놓은 울짱도 보인다.

진상파는 모닥불 뒤쪽에 앉아있어서 그 모습이 섬전초에게는 안보였다.

하지만 섬전초가 달리는 방향은 절벽 바로 아래쪽이라 울짱 안으로는 들어갈 것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맞아랏!”

그때 섬전초를 쫓아오던 강유가 두 번째 나뭇가지를 던졌다.

파캉!

이번에도 빠르고 강하게 회전하며 날아간 나뭇가지는 섬전초가 달려가는 앞쪽 절벽에 부딪혀서 박살난다.

팟!

그러자 섬전초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어서 부러진 나뭇가지 파편을 피했다.

휘릭!

그리고 그놈이 다시 바닥에 내려섰을 때는 어느덧 강유가 설치한 울짱의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대단하네.)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본 진상파의 눈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나뭇가지 두 개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짐승이라는 섬전초를 함정으로 몰아넣었어.)

감탄하는 진상파의 눈에 건너편 어둠 속에서 섬전초가 나타나 울짱 안으로 뛰어드는 게 보인다.

그리고 그 놈 뒤에서 따라오는 강유의 모습도 흐릿하게 보였다.

쐐애액!

울짱 안쪽으로 들어선 섬전초는 좌우는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날 듯이 달려왔다.

울짱의 좁은 끝 부분이 섬전초 앞으로 확 다가왔다.

그곳에 올가미가 설치되어 있지만 물론 섬전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촤악!

그리하여 나뭇가지로 만든 울짱 밖으로 튀어나가려던 섬전초의 목에 올가미가 확 걸렸다

“캥!”

팽!

올가미가 목에 걸린 섬전초의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홱 뒤집어졌다.

(걸렸네.)

진상파가 눈을 치뜰 때였다.

퍼억!

허공으로 튕겨졌던 섬전초의 몸이 바닥에 세차게 패대기쳐졌다.

달려온 속도가 빨라서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것도 아주 세찼다

“맛이 어떠냐 이놈아?”

휙!

강유가 껄껄 웃으며 섬전초 옆으로 내려섰다.

팟!

동시에 바닥에 패대기쳐졌던 섬전초의 몸이 용수철 튀듯이 일어났다.

까득!

이어 그놈은 자기 목을 묶은 올가미와 연결된 밧줄을 입으로 물어뜯고 앞발로 눌렀다.

“그렇게는 안되지.”

콱!

강유는 재빨리 섬전초의 목을 뒤에서 움켜쥐었다.

“카악!”

목이 강유의 강철같은 손아귀에 조여지자 섬전초는 비명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자연스럽게 그놈은 물고 있던 밧줄도 토해내게 되었다.

“못된 말썽장이 같으니... 다시는 허튼 짓을 못하게 만들어주마.”

휘릭! 휙!

강유는 오른손으로 섬전초의 목을 움켜쥔 채 왼손으로는 밧줄을 재빨리 움직여서 그놈의 네 발을 하나로 묶어버렸다.

섬전초는 칵칵 거리며 몸부림쳤지만 꼼짝 못하고 네 개의 발목이 하나로 묶여버렸다.

그 때문에 그놈의 긴 허리가 활처럼 아래로 휘어졌다.

“분명 경고를 했는데 따라와서 알짱거린 대가를...”

말하던 강유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콱!

섬전초가 고개를 필사적으로 뒤로 돌려서 자기 목을 쥐고 있는 강유의 팔뚝을 물어버린 것이다.

다만 목을 억지로 돌려서 문 탓에 그리 깊이 물지는 못했으며 입의 한쪽으로만 문 상태였다.

그래도 섬전초의 날카로운 이빨이 강유의 팔뚝에 상처를 내서 피가 배어나온다.

“흑!”

그걸 본 진상파가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르르!

섬전초는 강유의 팔뚝을 문 채 물지 않은 쪽의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하지만 그 직후 섬전초의 눈이 위로 흡 떠졌다. 눈을 부라리며 내려다보는 강유의 표정이 아주 살벌했기 때문이다

끼이...

주눅이 든 섬전초는 곁눈질로 강유의 눈치를 살폈다. 입으로는 여전히 강유의 팔뚝을 문 채...

“날 물었다 이거지? 대충 혼내주고 풀어줄 생각이었다만 마음이 바뀌었다.”

강유는 자기 팔을 물고 있는 섬전초를 들고 모닥불로 다가갔다.

카아!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가까워지자 섬전초는 깜짝 놀라 강유의 팔뚝을 물고 있던 이빨을 뽑았다.

“강소협! 설마...”

진상파도 깜짝 놀랄 때였다.

“살려두면 사람을 해칠 놈입니다. 마침 출출하기도 하니 이놈을 구워서 야식으로 먹어야겠습니다”

강유는 냉혹하게 웃으며 섬전초를 모닥불 위쪽에 드리웠다.

까아! 까아!

섬전초는 등쪽이 모닥불 위로 드리워지며 겁에 질려 몸부림쳤다.

치치치!

끼잉! 낑!

등쪽 털이 모닥불의 열기에 그슬려지기 시작하자 섬전초는 강유를 돌아보며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애원해봤자 늦었다 이놈아. 마침 배도 고프던 참이니 맛있게 먹어주마.”

강유는 섬전초의 애원을 무시하며 입맛까지 쩝쩝 다셨다.

끼이이!

강유의 그 표정을 본 섬전초는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구워볼까?”

강유는 히죽 웃으며 섬전초를 모닥불에 더 가까이 내려 보냈다.

치치치!

그러자 섬전초의 털이 더 많이 그슬려졌고..

카아! 카!

섬전초는 겁에 질려 몸부림치며 울어대었다.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

강유가 그런 섬전초를 보며 또 입맛을 다실 때였다.

“그만 하세요!”

팟!

보고 있던 진상파가 급히 일어나 강유의 손에서 섬전초를 낚아챘다.

“조금 귀찮게 굴었다고 태워죽일 것까지는 없잖아요.”

진상파는 털이 제법 많이 그슬린 섬전초를 품에 안고 다시 바닥에 앉으며 눈을 흘겼다.

끼이!

구사일생(?)한 섬전초는 애처롭게 울면서 진상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소저, 조심하시오. 언제 표변해서 물지 모르는 사나운 놈이오.”

“걱정해주실 거 없어요.”

강유의 경고에 진상파는 섬전초를 보듬어 안은 채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 해도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법이 어디 있...”

강유에게 화를 내던 진상파는 흠칫했다. 그제서야 강유가 실실 웃고 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진상파는 비로소 강유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요 녀석을 순치(馴致;짐승을 길들임)시키려고 구워 먹을 것처럼 겁을 줬던 거야.)

진상파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안고 있는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불쌍한 것! 많이 놀랐지?”

이어 그녀는 섬전초의 네 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주었다.

다만 만일을 대비해서 목에 걸린 올가미는 풀어주지 않았다.

끼잉! 끼잉!

함께 묶여있던 네 개의 발이 풀리자 섬전초는 겁에 질려 진상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본능적으로 자길 보호해줄 수 있는 존재가 나뿐이라는 걸 알고 안겨드네.)

진상파는 미소를 지으며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이거 참 아쉽구만.”

강유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진상파 건너편에 책상 다리를 하며 주저앉았다.

“그놈을 노릇노릇 구워서 뜯어먹으면 아주 맛났을 텐데 말이야.”

그리고는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들쑤셔서 불길이 확 일어나게 만들었다.

불길이 세차게 치솟자 섬전초는 기함을 했다.

낑! 낑!

그놈은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면서 필사적으로 진상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적당히 하세요.”

진상파는 모닥불을 위협적으로 들쑤시는 강유에게 눈을 흘기면서 웃었다.

“이 애도 이제 소협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깨달았을 거예요. 그렇지?”

그녀는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끼잉!

섬전초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엾기도 하지. 언니 말만 잘 들으면 별일 없을 테니 안심하렴.”

어느덧 섬전초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진상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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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소년이여. 창평곡에 와서 검(劒)을 받으라!

 

 

"우리 이쪽 문도 열어 봐요"

강미루는 백남빈의 손을 잡고 가운데 석문으로 갔다.

그긍!

백남빈이 손으로 밀자 가운데 석문도 그 무게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열렸다.

석문 안쪽의 석실에는 석탁이 하나, 돌로 만든 침대가 하나가 놓여있다.

침실인 게 분명한 데 특이하게도 의자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맨 우측의 석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데 그곳은 앞쪽의 두 곳과 달리 그냥 석실이 아니었다.

“어머!”

“억!”

석문을 열고 들어서던 강미루와 백남빈의 입에서 놀람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놀란 것은 석문을 열자마자 한기(寒氣)가 확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탄성을 토한 석문 안쪽에 상상도 못하던 광경이 펼쳐져 있어서였다.

 

***

 

마지막 석문의 내부는 앞선 두 곳과 전혀 달랐다.

먼저 넓이가 달랐다.

석문 안쪽에는 석실 밖의 뜰 보다가 넓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넓을 뿐 아니라 그 형태도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

마지막 석문 내부는 천장이 아주 높은 천연의 지하광장이었는데 전체적인 형태는 타원형이다.

입구에서 열 걸음 쯤 가면 갑자기 길이 뚝 끊기면서 수직의 절벽이 나타난다.

높이가 오장 쯤 되는 그 절벽 아래쪽은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고여 있는 연못이다.

백남빈과 강미루를 오싹하게 만든 한기는 그 차가운 연못물이 뿜어내는 것이었다.

직경이 삼십 장 쯤 되는 타원형의 연못 한 가운데에는 바위섬이 하나 솟아있다.

헌데 이 바위섬의 형태가 기묘했다.

위는 좁고 밑은 넓으면서 전체 형태는 둥근 원추(圓錐)형인 것이다.

마치 깔때기를 엎어 놓은 듯한 바위섬의 평평한 정상은 폭이 일장쯤이며 맨 아랫부분은 직경이 십여 장 쯤 되어 보인다.

원추형의 바위섬에는 정상에서 아래쪽으로 빙빙 돌아가는 나선형의 길이 나있다.

그 나선형 길 중간 중간에는 석감(石龕;불상등을 안치하기 위해 바위에 판 공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석감마다 좌화(座化)한 시신들이 한 구씩 앉아있는데 그 숫자가 모두 열셋이었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그 기묘한 바위섬에 창평곡의 모든 비밀이 숨어 있음을 직감했다.

석문의 입구와 높이가 같은 바위섬의 정상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녹이 슬지 않는 쇠로 만들어진 다리는 폭이 좁아서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어떤 분들인지 건너가서 살펴봅시다.”

백남빈은 바위섬으로 건너가기 위해 다리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좁은 철제 다리 옆에 사람 키만한 비석이 하나 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사자검처럼 짙은 녹색인 그 비석에는 아주 오래전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네 자의 글이 적혀있었다.

 

<獅子劒傳>

 

“사자검전(獅子劒傳)!”

녹색의 비석에 적힌 글을 확인한 강미루의 입에서 비명같은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왜 그러시오 미루?”

강미루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백남빈이 놀라며 돌아보았다.

“이런... 이런 바보같은... 아아! 난 정말 멍청한 계집이에요! 사자검을 보고도 사자검전을 떠올리지 못하다니...”

강미루는 흥분이 극에 달한 표정으로 자기 이마를 치며 자책했다.

백남빈은 영문을 몰랐지만 말없이 기다렸다. 강미루의 흥분이 갈아 앉아야만 자책하는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대비문(四大秘門)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요?”

강미루는 녹색의 비석을 어루만지며 백남빈에게 물었다.

“네 개의 비밀스러운 문파라... 무림에 그런 문파들이 있었소?”

백남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양부 이탁의 영향으로 독서량이 남다른 백남빈이지만 사대비문이라는 이름은 금시초문이었다.

“불교로 비교하자면 구대문파처럼 세상에 잘 알려진 문파들은 현교(顯敎;교리가 드러난 종파)이고 사대비문은 밀교(密敎;교리가 감춰진 종파)라 할 수 있는데...”

구구절절 설명하려던 강미루는 방법을 바꿨다. 백남빈이 뜬 구름 잡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본 때문이다.

“마교(魔敎)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 알고 있소. 명교(明敎)라고도 불리었으며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 주원장이 한 때 몸을 담았다고 알려진 비밀결사 아니오?”

강미루의 물음에 대답을 하던 백남빈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혹시 마교도...”

“사대비문중 하나예요.”

강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 외에 삼성동(三聖洞), 북두무맥(北斗武脈), 그리고 사자검전이 사대비문이랍니다.”

쉽사리 흥분을 갈아 앉히지 못한 강미루는 녹색의 비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교-!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누구는 동진(東晋) 시대에 존재했던 비밀결사 백련사(白蓮社)가 마교의 뿌리라고 한다.

또 누구는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의 배화교(拜火敎)와 마니교(摩尼敎)가 중원에 전래되었다가 사교(邪敎)로 낙인찍혀 지하로 숨어들면서 마교가 되었다고도 한다.

분명한 것은 난세가 되면 마교가 백련교, 명교, 미륵교등의 이름으로 민초들 사이에 요원의 불길처럼 세력을 뻗힌다는 사실이다.

마교의 기본 교리가 명왕(明王)이 현세하여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 신앙과 맥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역대 왕조는 자신들의 정권에 위협이 되는 마교를 탄압하기에 혈안이 되어 왔다.

명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홍무제 주원장의 권력 기반이 되어주었던 마교, 즉 명교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 결과 마교는 깊이 잠적하여 지금은 종적이 묘연해진 상태다.

 

삼성동-!

북송(北宋) 시절에 살았던 무공과 의술과 공장(工匠) 방면에서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세 명의 기인이 세운 문파다.

십절무성(十絶武聖), 대라의성(大羅醫聖), 성수신장(聖手神匠)이 삼성(三聖)이다.

삼성은 각 방면에서 절세적인 경지에 이르렀지만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고향이 같다는 인연으로 해서 의기투합하여 만든 문파가 삼성동이다.

 

북두무맥-!

천여 년 전의 인물이지만 여전히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으로 추앙받고 있는 북두무제(北斗武帝) 섭장홍(葉長紅)의 후예들이다.

북두무제 섭장홍은 스승도 없이 무공을 깨우쳤으며 이십오 세 이전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수들을 꺾은 것으로 신화가 된 인물이다.

고금제일인으로 불리는 만큼 북두무제의 무공은 박대정심(博大精深)하여 한 사람이 다 물려받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북두무제는 일곱 명의 기재를 제자로 받아들여 자신의 심득을 나누어 가르쳤다.

북두무제의 일곱 제자들은 북두칠성을 관장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으로 불렸다.

 

“사자검전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마교, 삼성동, 북두무맥보다도 없어요.”

강미루는 어느 정도 흥분이 갈아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무림 어딘가에 검을 쓰는 일인전승(一人傳承)의 문파가 있으며 사자검전이라 불리는 그들의 검술이 절세적이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랍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허리에 차고 있는 기괴한 검, 사자검을 곁눈질로 보았다.

“사자검(獅子劒)을 전(傳)한다라... 문파 이름도 특이하군.”

백남빈도 새삼 자신의 사자검을 만져 보았다.

사자검을 휘두르면 검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고 몸속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힘이 용솟음 쳤던 것이 모두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헌데 미루는 세상 사람들이 거의 모르는 사대비문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는 거요?”

백남빈은 두 살이나 어린 강미루의 견문이 자신과 비교도 안되게 넓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 물었다.

“어렸을 때 형부가 옛날이야기 대신 해줘서 알고 있었어요.”

강미루의 대답을 들은 백남빈은 그녀의 형부인 광평객 신가람이란 인물에 대해 새삼 신비한 느낌을 받았다.

아직 마흔 살도 안되었다는 광평객 신가람은 어떻게 독안룡 이탁도 모르고 있는 것같은 강호의 깊은 비밀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축하드려요. 사자검을 얻으셨으니 공자님은 이제 사대비문중 사자검전의 전인(傳人)이세요.”

강미루가 두 손을 모은 채 진심어린 표정으로 축하했다.

“사자검은 우리 둘의 공동 소유요. 따라서 미루 역시 사자검전의 전인이니 축하드리겠소.”

백남빈은 강미루에게 포권을 하며 웃었다.

(나... 나도 사자검전의 제자라니...)

백남빈의 말이 진심임을 알기에 기쁨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강미루였다.

 

***

 

백남빈이 앞장서고 강미루가 뒤 따르며 좁은 다리를 건넜다.

원추형의 바위섬 정상은 평평한 데 폭이 일장 남짓으로 제법 널찍하다.

경건한 자세로 그곳에 들어선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신선같은 풍모(風貌)를 지닌 노인이었다.

바위섬 정상의 평지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이 노인은 오래 전에 좌화한 시신이건만 얼굴이 불그스레하여 금방이라도 눈을 부릅뜰 것만 같다.

바위섬을 에워싼 차가운 연못물의 냉기가 시신의 원형을 보전해주기도 했지만 생시에 내공이 신화경에 이르렀었다는 반증이다.

풍채도 좋아서 보는 이를 절로 숙연하게 만드는 노인의 시신 주변 바닥에는 글이 가득 새겨져 있다. 어떤 명가(名家)의 글씨보다 수려한 필체의 글이었다.

 

<나 이백(李白)이 마침내 술을 깨고 보니 더 이상 세상에 아름다운 이가 보이지 않았다.

가인(佳人;양귀비)의 마음은 추악하고 제왕(帝王;당 현종)은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오히려 탐욕스러웠다.

인세의 드문 수재(秀才)인 친구(親舊;杜甫.)는 날마다 굶어서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이었다.

도적이 곳곳에 일어나도 혼미한 대부(大夫;벼슬아치)들은 자신의 곳간만 지킬 뿐이었다.

벗의 말마따나 대부들의 집에선 고기가 썩어 나가고 백성들의 집에서는 날마다 아사(餓死)한 시체가 썩어 나갔다.

나는 술 취한 사람이라 그렇다지만 나라는 어찌 하여 비틀거리며 기강을 잃었단 말인가?

황제도 의지할 바 못되고 지사(志士)도 믿을 바가 못 되도다.

평생의 뜻을 얻고자 천하를 주유했으나 성인(聖人:德이 많은 사람, 또는 孔子)은 보이지 않고 문왕(文王: 周의 문왕)도 만나지 못했도다.

세상의 친구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처량하게 되었으니 취한 유객(遊客)이 마침내 잔(盞)을 버리고 달 속에 들었도다.>

 

붓으로 직접 바위에 쓴 듯한 수려한 필체의 글은 이런 내용이었다.

백남빈은 읽기를 중단하고 노인의 시신에 대고 큰절을 했다.

"시선(詩仙)의 유해(遺骸)가 이곳에 계셨습니다. 후진이 일찍이 시선의 유협(遊俠)을 부러워하고 분방함을 존경하여 마지않았는데 유해나마 직접 뵙게 되었으니 어찌 큰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신선의 풍모를 지닌 노인은 바로 시선으로 불리던 이백, 이태백이었다.

놀랍게도 사대비문중 사자검전의 시조는 다름 아닌 이백이었던 것이다.

이백이 천의무봉(天衣無縫)한 대시인일 뿐 아니라 협객으로도 이름을 청사(靑史)에 남겼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백이 사대비문 중 사자검전의 시조였을 줄을 백남빈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강미루도 덩달아 이백의 시신에 절을 올리고 이백의 유지(遺旨)를 함께 읽어 내려갔다.

 

<짧은 깨달음에 의지하여 잔을 들듯 검을 들기를 육십여 년, 잔은 전하여지지 않아도 나의 기호(嗜好)이니 무방하나 검은 옛사람으로부터 전해진 것이기에 묻을 수가 없다.

마침내 동정호에서 어부 소년을 만나 그에게 전하기로 하였다.

유객이 말하기를

"그대 창평곡에 와서 검(劒)을 받으라."

하였더니

소년 어부가 답하여 가로되

"검으로는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선기(禪氣)를 지녔으니 가히 옛사람의 법을 전할 만하지 않겠는가?

세세히 그림을 그려 이곳을 일러주고 찾아오기를 거듭 당부하였다.

백(;李白)은 여기서 죽는다마는 검은 마침내 전해지리라.

소년, 그대 지금 나를 보거든 구배(九拜)하기를 주저치 말라.

오늘 여기에 옛사람의 검을 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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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血鬪) (1)

 

 

(사부...)

척포에게 당하는 간지러움을 참느라 기진맥진해있던 임청우는 우협 장백승이란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임청우는 이미 장백승을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포스럽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철선동시의 입에서 우협 장백승이란 이름이 흘러나오자 온 신경을 모으고 귀를 기울였다.

 

“우협... 그가 왜 나를...”

마면혈도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중얼거렸다.

철선동시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냉소를 했다.

“자네는 물론 우협을 이길 수 있겠지.”

마면혈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선동시가 또 말했다.

“하지만 우협이 검주 유소기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것도 인정하겠지?”

마면혈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철선동시는 바닥에 구르고 있는 아미타여래의 머리에 한 발을 턱 걸치며 말했다.

“자네는 우협을 이길 수 있겠지만, 우협은 마음만 먹으면 자네를 간단히 죽일 수 있다. 더우기 우협은 지금 자네를 죽이기 위해 뒤쫓고 있는 중이지.”

“우... 우협이 날 죽이려 뒤쫓고 있었다니...”

극도의 두려움으로 다리가 풀린 마면혈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부는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 했고 마면혈도도 자신이 사부를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부가 마음만 먹으면 마면혈도를 간단히 죽일 수 있다니...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임청우는 혼란스러워졌다.

(더구나 저 두 사람은 검주 유소기라는 사람을 피해서 도망 다니고 있는 중인데... 사부는 그 유소기라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인물이라고도 하고...)

임청우가 의혹에 휩싸여있을 때 마면혈도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철선동시, 자넨 어떻게 우협이 나를 뒤쫓는 것을 알았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 번이나 우협을 만났었네.”

철선동시가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면서 말했다.

“세 번이나?”

마면혈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되물었다.

“그래 세 번! 마지막 세 번째 만남 이후로는 채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았네.”

철선동시는 발을 올려놓았던 아미타여래의 머리를 의자삼아 앉으면서 말했다.

“언제... 우협이 언제부터 날 쫓고 있었는가?”

마면혈도는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물었다. 식은땀이 난 모양이었다.

“그전부터 쫓아오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우협을 처음 발견한 것은 한수(漢水)에서였네. 그는 어부에게 자네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고,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어부는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에게 굽신거리며 모른다고 말하는 중이었지. 우협은 곧 가버렸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나는 몰래 다가가 그 어부를 죽여 버렸네.”

철선동시가 마면혈도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런 일이 벌어질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마면혈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자넨 그 어부의 계집을 겁탈하고 있는 중이었지.”

철선동시의 말에 마면혈도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면혈도는 말같이 생긴 추악한 용모 때문에 여자의 환심을 사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만 보면 여염집 규수와 과부, 여승과 처녀를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겁탈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까지 마면혈도에게 겁탈당하고 죽거나 미쳐버린 여자는 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우협을 만난 건 우리가 함양(咸陽)의 기루에 숨었을 때일세.”

진시황의 궁전이 있었던 함양은 서안의 북서쪽 육십여리 쯤에 자리하고 있다.

“그때도 자네는 계집을 끌어안고 뒤엉켜있었는데, 기루 안으로 들어서는 우협을 창가에 앉아있었던 내가 운 좋게 먼저 보았지. 기세로 보아 우협은 우리가 그 기루에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온 것 같았네.”

“그날 기루에 불을 지른 게 바로 자네였군.”

마면혈도가 생각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선동시는 대답대신 빙그레 웃었다.

두 마두는 검주 유소기를 피하기 위해 농산에서 태백산(太白山)을 거쳐 민산산맥(岷山山脈)을 넘어 한수까지 갔었다.

헌데 한수에 이르렀을 때 철선동시는 유소기뿐 아니라 우협 장백승도 자신들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급히 방향을 바꾸어 민산산맥을 다시 넘어서 함양으로 갔었으며 그후에 황하 줄기를 따라 내려와 서안에 이른 것이다.

“세 번째로 우협을 본 건 어디서였는가?”

마면혈도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바로 이곳 자은사!”

철선동시의 짧은 대답에 마면혈도는 침묵했다.

 

서안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자은사를 찾아왔었다.

물론 불공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소기를 피해 숨을 곳을 찾는 게 목적이었다.

헌데 철선동시가 또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자은사를 도로 나와 근처 객점에서 한잠 늘어지게 잤었다.

그런 후에 다시 자은사를 찾아온 것인데 철선동시가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자은사에 들렀을 때 우협 장백승도 자은사에 있었던 것이다.

철선동시는 장백승이 한번 돌아보고 간 곳이 제일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자은사의 대안탑을 은신처로 선택했었다.

철선동시의 그같은 생각도 몰랐다니...

마면혈도는 내심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했다.

 

(사부가 자은사에 왔었구나!)

임청우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가슴이 벅차오는 기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우협 장백승이야말로 임청우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명의 지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욕정에 눈이 멀어 마황을 건드렸었는데...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우협까지 모르는 사이에 자극한 모양이다. 아마 계집들을 마구잡이로 건드리고 다닌 게 우협을 화나게 했겠지.)

바닥에 주저앉은 마면혈도는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힐끔 철선동시를 쳐다보았다.

철선동시는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속을 감춘 웃음을 짓고 있다.

(저 얼어 죽은 놈은 근 한 달 째 내게 선심을 쓰고 있다. 물론 선심을 쓰는 목적은 내 손에 있는 몽선도의 반쪽을 넘겨받는 것이겠지.)

마면혈도는 이를 부득 갈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안되지 안돼. 죽었다 깨어나도 몽선도는 넘겨줄 수 없다.)

마면혈도는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지만 나름대로의 법도를 가지고 있었다.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과, 진 빚은 꼭 갚고야 만다는 게 그것이다.

헌데 벌써 수차에 걸쳐 철선동시의 신세를 지고 말았다.

그 빚을 갚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마면혈도를 괴롭혔다.

철선동시는 아닌 척하면서 마면혈도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그러나 철선동시는 이내 실망했다.

진 빚은 반드시 갚고야마는 성격의 마면혈도이건만 자신에게 몽선도를 바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몽선도는 쉽게 내놓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것이 결국 네 목숨을 재촉할 뿐이다.)

철선동시는 흉악한 마음을 먹으며 입을 열었다.

“우협만 아니라면 검주 유소기는 내가 어떻게 해볼 수도 있으련만...”

마면혈도가 우협을 자극했기 때문에 쫓겨 다닌다는 듯한 말투다.

마면혈도는 고개를 치켜들고 두 눈 가득 혈광을 뿜어냈다.

“내가 적지 않은 잘못을 범한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철선동시! 설마 너 혼자서 검주 유소기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철선동시가 백납처럼 하얀 얼굴에 강시처럼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유소기는 우리 삼괴 다음 서열인 칠절에 속한다. 비록 그놈이 칠절의 우두머리라고는 하지만 내가 이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크하하핫!”

순간 마면혈도가 큰소리로 웃었다. 커다란 입과 턱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얼어 죽은 놈! 유소기가 근처에 없다고 그런 허풍을 치다니...”

마면혈도는 웃음을 뚝 그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럼 지금까지 왜 도망만 쳤느냐? 나 마면혈도도 유소기의 삼검(三劒)을 당하지 못하고 겨우 도망쳤는데... 설마하니 네놈의 무공이 나보다 강하단 말이냐?”

“키키키... 자네는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내 빙혼철선(氷魂鐵扇)은 유소기의 검보단 반 푼 정도 무섭고 자네의 혈도보단 두 배 정도 강하지.”

철선동시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웃는 그 얼굴에 섬뜩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스팟!

“이제 보니 네놈은...”

마면혈도는 무엇을 느꼈는지 바람처럼 신속하게 물러서며 소리쳤다.

“키카캇! 말대가리가 제법이군. 그걸 알아차리다니... 카카캇! 네놈이 직접 바치지 않으니 죽이고 빼앗는 수밖에...”

화악!

철선동시가 그림자처럼 마면혈도를 쫓아가며 손톱으로 할퀴는데 그 수법이 흉흉하기 그지없다.

스악! 서걱!

철선동시는 손가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풍만으로도 마면혈도의 가슴부위 옷자락을 찢어버렸다.

그럴진대 손톱에 직접 할퀴어지면 치명상을 입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헛! 용조수(龍爪手)!”

마면혈도가 놀라 소리치며 피했다.

용조수는 응조수(鷹爪手)와 함께 소림사(少林寺)의 칠십이절기(七十二絶技) 중 하나다.

가공할 위력을 지닌 이 무공은 그러나 당금에 이르러서는 소림사에서도 절전되어 익힌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뜻밖에도 얼어 죽은 귀신같은 몰골인 철선동시의 손에서 펼쳐졌으니 그와 오랫동안 사귀어왔던 마면혈도조차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쩍! 번쩍!

마면혈도는 혈도를 휘둘러 세 가닥의 붉은 고리를 만들며 뒤로 물러섰다.

철선동시는 눈을 어지럽히는 혈도의 혈광 속으로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기의 하나인 용조수의 위력은 과연 놀랄 만했다.

파카캉!

혈도의 측면을 후려친 철선동시의 손톱은 다음 순간 마면혈도의 얼굴을 할퀴려 들고 있었다.

“크카카캇! 용조수를 알아보았으면 순순히 반부의 몽선도를 내놓으시지.”

철선동시의 살벌한 공격을 그러나 마면혈도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붉은 눈을 이글거리며 혈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수평혈도참(水平血刀斬)!”

번-쩍!

아침 해가 바다에서 떠오를 때 붉은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듯, 무시무시한 붉은 광채가 노도같이 철선동시에게 밀려갔다.

쩌어억!

칠층 중앙에 서있던 불심연화로의 상반부가 혈도의 도기에 베어져 옆으로 떨어졌다.

퍼억!

석가여래의 허리도 무참히 베어져 상체가 앞으로 쓰러진다.

팟!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이미 늦어서 왼쪽 발목이 뎅강 날아가고 말았다.

수평혈도참은 마면혈도의 삼십이초(三十二招) 혈왕도법(血王刀法) 중 최후의 이(二) 초식 가운데 첫번째 초식이다.

지금까지 어떤 강적을 만났을 때도 마면혈도는 수평혈도참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철선동시는 수평혈도참의 존재를 몰랐고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말았다.

하지만 당하기만 할 철선동시가 아니었다.

화악!

잘려진 발목 때문에 허공에서 불안한 몸짓을 보이면서도 철선동시는 용조수 중의 절초를 펼쳐냈다.

쫘악!

마면혈도의 어깨에서 옷과 함께 피 묻은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왔다.

휙! 휘릭!

피차 피를 본 두 사람은 훌쩍 물러나 이장을 격하고 마주 섰다.

철선동시도 마면혈도도 무시못할 중상을 입었지만 작은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저 불꽃이 튀기는 듯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할 뿐이었다.

촤라락!

철선동시가 접은 채 들고 있던 빙혼철선을 펼쳤다.

스윽!

마면혈도는 혈도를 비스듬히 내려서 철선동시의 하체를 겨누었다.

철선동시의 잘려진 발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먼지 쌓인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순간적인 방심이 만들어낸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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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마검칠식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깊은 밤중이지만 강변에 자리한 한 채의 장원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장원 안팍에는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이 장원은 제왕성의 분타중 한 곳이다.

불야성을 방불케 하는 장원 중에서도 대청 일대가 가장 환하다.

여러 개의 등이 밝혀진 대청 안에는 관이 하나 놓여있다.

뚜껑이 열려있는 관 속에는 수의를 걸친 냉혈철심 사우의 시체가 누워있다.

사우의 시체가 걸치고 있는 수의의 가슴 부분은 피로 물들어 있다.

관의 뒤쪽에는 사우가 죽임을 당할 때 현장에 있었던 십여 명의 철위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철위사들은 고개를 떨 군 채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자신들의 대주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휘익!

갑자기 세찬 바람이 대청 안으로 들이쳤다.

철위사들이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틈엔지 대청 안에는 세 명의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뚜껑이 열려 있는 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세 사람 중 한명은 제왕성의 외(外)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그가 급보를 받고 수백 리 길을 반나절 만에 달려온 것이다.

궁무독과 동행한 인물들은 대조적인 모습의 노인들이었다.

한 명은 깡마르고 훤칠한 체격의 백발노인인데 옷자락에는 <銀>자와 수놓아져 있으며 양쪽 소매에는 세 개의 줄이 은실(銀絲)로 새겨져 있다.

이 백발노인이 제왕성 사대무력집단 중 은위사대(銀衛士隊)의 대주인 백월사신(白月死神)이다.

다른 노인은 백월사신과 여러모로 대조적인 모습의 소유자다.

체격이 장대하고 대머리인데 옷자락에는 <銅>자가 수놓아져 있으며 양쪽 소매에는 세 개의 푸른 줄이 새겨져 있다.

청동으로 빚어진 듯한 인상의 이 대머리 노인이 동위사대(銅衛士隊) 대주인 독두태보(禿頭太保)다.

“총... 총관님!”

“분합니다 총관님!”

궁무독 일행을 본 십여 명의 철위사들은 분루를 흘리며 엎드렸다.

“속하들도 대주님을 따라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원수가 누구인지 보고하기 위해 치욕스럽게 살아 돌아왔습니다.”

“대주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속하들을 죽여주십시오.”

쿵! 쿵!

철위사들은 바닥에 이마를 찍으며 오열했다.

그들의 이마가 삽시에 피로 물들었다.

“닥쳐라!”

쾅!

하지만 궁무독은 발을 구르며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드드드!

궁무독의 내공이 실린 진각(振脚)과 고함으로 인해 대청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내공의 심후함만으로도 궁무독이 사우를 간단히 능가하는 고수임을 알 수 있다.

대청 밖에서 경비를 서던 철위사들이 돌아보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대청 안의 철위사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울음을 삼켰다.

“계집처럼 질질 짜지 마라. 너희들의 대주를 위한다면 복수를 위해 가슴 속에 칼을 갈아야하지 않느냐?”

궁무독은 살기 어린 눈으로 철위사들을 노려보았다.

철위사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 떨군 채 울음을 삼킬 뿐이었다.

“못난 인간 같으니... 이름도 없는 놈에게 죽임을 당해서 제왕성의 이름에 먹칠을 해?”

궁무독은 관속에 누워있는 사우를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사우가 남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로 인해 제왕성의 위명이 실추되었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노부가 사(査)대주의 사인을 살펴보겠소이다.”

그때 은위사대 대주인 백월사신이 관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수고해주시오 백(白)대주.”

궁무독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물러섰다.

“다른 외상은 없고...”

백월사신은 관 속에 누워있는 사우의 시체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 사우가 걸친 수의의 가슴 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게 들어왔다

“가슴에 당한 일격이 치명상이었군.”

슥!

백월사신은 사우가 걸친 수의의 가슴 부분을 젖혀 보았다.

그러자 드러나는 사우의 가슴에는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등까지 뚫려있었다.

“이건!”

“헉!”

사우의 가슴에 나있는 구멍을 보는 순간 백월사신뿐 아니라 독두태보와 궁무동의 입에서도 비명같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사... 사대주의 등까지 뚫려있는 상처의 측면이 나선형으로 파여 있군. 그렇다는 건...”

백월사신은 덜덜 떨며 손으로 상처의 측면을 만져보았다.

특이하게도 사우의 가슴에 나있는 상처의 측면은 나선형의 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검칠식! 천마가 세상에 남겼다는 천마구절기(天魔九絶技)중 마검칠식이오.”

궁무독이 전율하며 말했다.

“마... 마검칠식이라면 십팔 년 전에...”

독두태보는 너무 놀라 헉헉 대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맞네. 무후님... 영창공주님을 시해한 흉수가 쓴 무공도 마검칠식이었지.”

백월사신이 이를 부득 갈며 내뱉었다.

(맙소사! 역시 대주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검법은 마검칠식이었구나.)

(십팔 년 전 주모님이 시해 당하신 것과 같은...)

무릎을 꿇고 있던 철위사들도 전율했다.

 

십팔 년 전, 마교 교주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훔치기 위해 제왕성에 잠입했었다.

그리고 달마묵장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 직후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지키던 흑백신귀에게 종적이 발견되어 쫓기게 되었다.

무사히 제왕성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없게 되자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안주인인 무후 주영창, 즉 영창공주의 거처로 들이닥쳤었다.

그곳에서 귀면지존은 갓 돌을 맞은 제왕성의 소성주 섭무궁을 인질로 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영창공주를 살해했었다.

영창공주는 귀면지존의 검에 찔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는 끔찍한 상처를 입고 절명했었다.

그리고 십팔 년 만에 영창공주를 죽게 만든 마공, 마검칠식의 흔적이 냉혈철심 사우의 시신에서 발견된 것이다.

 

“마... 마검칠식은 마교에서도 오래 전에 실전(失傳)되었다고 알려진 악랄하고 치명적인 검법인데...”

“총관! 드디어 십팔 년 전 무후님을 시해한 원수에 대한 단서를 잡은 것 같소.”

독두태보와 백월사신이 극도의 흥분으로 떨며 궁무독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의 대주를 살해한 자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라.”

궁무독은 두 노인에게 대답하는 대신 무릎을 꿇고 있는 철위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놈은 약관도 안된 애송이었는데...”

강유와 대결했다가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철위사 장흔이 일행을 대표하여 보고했다.

“살아계실 때 대주님이 하신 말씀에 의하면 놈이 사용한 다른 무공은 칠절 중 소요신군 강조의 것이었습니다.”

“소요신군 강조!”

궁무독과 백월사신, 독두태보는 전율하며 눈을 부릅떴다.

 

* * *

 

산중의 밤은 더욱 어둡다.

휘익!

섬전초는 칠흑같은 어둠 속을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급히 속도를 줄이는 그놈 앞쪽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섬전초는 절벽 끝으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절벽 끝에 이르러 내려다보는 섬전초의 눈에 불빛이 들어왔다.

아래쪽은 삼면이 높은 절벽으로 막혀있는 계곡인데 그 끝에서 흐릿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끼이...

섬전초의 등이 긴장으로 활처럼 굽어졌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떨면서도 섬전초는 소리없이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계곡 막다른 곳의 절벽 아래쪽에는 동굴이 하나 입을 벌리고 있다.

그 동굴 입구에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피운 모닥불이 타고 있다.

모닥불에는 물기가 있는 쑥대가 얹혀져 있어 자욱한 연기를 만들어낸다. 극성스러운 모기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피운 모깃불인 것이다.

강유는 동굴을 등지고 모닥불을 앞에 둔 위치에 앉아있다.

상의를 벗은 상태인 강유는 사우와 싸우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다.

납작한 도자기 용기에 들어 있는 고약을 손가락으로 떠낸 강유는 상당히 깊게 갈라진 상처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그 고약은 어머니 냉상영이 비상약으로 챙겨준 금창약(金瘡藥)이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강유 옆에는 검 외에도 여러 가지 물건이 놓여있다.

단도 한 자루와 몇 개의 약병, 갈아입을 속옷과 먹다 남은 건량, 명주실을 꼬아 만든 한 다발의 가느다란 밧줄등이 그것이다.

모두 강유가 짊어지고 다니던 봇짐에 들어있던 물건들이다.

정작 봇짐을 싼 보자기는 보이지 않는다.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그 물건들 외에 고불선사에게서 받은 봉투도 함께 놓여있다.

 

강유와 진상파가 머물고 있는 곳은 개봉(開封)의 동북방 삼백여리 쯤에 자리한 양산(梁山)이라는 곳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을 기준으로 삼으면 황금성이 있는 금릉과는 오히려 백여 리쯤 멀어진 상태다.

제왕성의 인간들은 당연히 진상파가 금릉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고 그쪽으로 추격대의 주력을 보냈을 것이다.

이를 예상한 진상파는 목적지를 금릉과 반대쪽인 개봉으로 바꿨다.

천년고도인 개봉에도 황금성의 분점(分店)이 있다.

그것도 보통 분점이 아니라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거대한 분점이다.

금릉의 황금성 정도는 아니더라도 개봉의 분점에 들어가기만 하면 제왕성의 추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진상파는 금릉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서 개봉을 목적지로 삼은 것이다.

다만 강유의 상처가 가볍지 않고 진상파 자신도 밤눈이 어두운 것을 감안하여 오늘 밤은 양산의 깊은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강유가 등지고 앉아있는 동굴은 그리 깊지 않다. 입구에서 오장쯤 들어가면 막다른 곳이 나온다.

동굴 끝의 바닥에는 마른 풀잎과 나뭇잎이 푹신하게 깔려있고 그 위에 진상파가 반듯하게 누워있다.

고개를 돌리면 동굴 입구를 볼 수 있도록 가로로 누워있는 그녀의 몸에는 강유의 봇짐을 쌌던 천이 덮여 있다.

밤이 깊었지만 진상파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고는 있으나 두 사내의 모습이 번갈아 뇌리에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두 사내는 물론 강유와 모용준이다.

(같은 인간이고 사내인데 어찌 그렇게 다를까?)

진상파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누구는 오직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했던 데 반면 또 다른 사내는 생면부지인 나를 구해주려고 목숨을 도외시했었다.)

진상파는 모용준이 유모인 구숙정과 짐승처럼 뒤엉키던 장면을 떠올리고 새삼 혐오감에 치를 떨었다.

(똑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것에 담긴 영혼에는 천양지차가 날 수 있구나.)

감았던 눈을 뜬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돌려 동굴 입구를 보았다.

그곳에는 강유가 진상파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앉아서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다.

강유의 몸에 가려서 모닥불의 불빛은 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칠절의 첫째인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 강유...)

상의를 벗고 있는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처녀인 나를 배려해서 동굴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을 대비하여 입구를 지키고 있다.)

진상파는 시선이 자꾸만 강유에게 끌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협객이며 대장부... 어쩌면 나는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맨살을 드러낸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는 자신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살인을 했다.)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는 강유의 얼굴에서는 그늘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필살일초에 당해 죽어가며 눈을 부릅뜨던 냉혈철심 사우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비록 나를 죽이려고 했던 적이었지만 한 인간의 목숨을 내손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그에게도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과 비탄에 잠길 가족이 있을 텐데...)

상처에 고약을 바르는 강유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몸에 묻었던 그자의 피는 씻어버렸으나 내 영혼에는 살인의 기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게 될 테지.)

깊은 한숨이 강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림인으로 살아가려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살인을 경험하자 후회와 자책의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나란 놈은 너무 심약해서 무림인으로서의 거친 삶을 견디지 못할 것만 같구나.)

강유가 우울하게 한숨을 쉴 때였다.

사박!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진상파가 덮고 있던 보자기를 어깨에 두른 채 입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저... 밤이 이미 깊었는데 주무시지 않고 계셨습니까?”

강유는 멋쩍어져서 벗어놓았던 상의를 집어 앞을 가렸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던 탓인지 쉽게 잠 들 수가 없군요.”

진상파가 강유 뒤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내일 또 강행군을 해야 하니 억지로라도 주무셔야...”

말하던 강유는 움찔했다. 진상파의 손이 강유가 왼손에 들고 있는 고약 통을 잡았기 때문이다.

“등 쪽 상처에는 손이 닿지 않으실 테니 제가 약을 발라드릴게요.”

강유의 뒤쪽에 무릎을 꿇은 진상파가 고약 통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신세를 지겠습니다.”

강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등을 진상파에게 맡겼다.

진상파는 매끄러운 손가락으로 떠낸 금창약을 강유의 등 쪽에 난 상처에 발라주었다.

그녀가 아버지 이외의 사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난생 처음이다.

진상파의 손가락이 살에 닿자 강유의 몸에 움찔 경련이 치달렸다.

(이런 느낌이로구나.)

강유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주는 진상파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 그것도 남자의 몸을 만지는 느낌은 이토록 흥분되면서도 경이로운 것이었어.)

진상파는 가빠지는 숨결을 강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강유 역시 심장이 거칠게 뛰노는 것을 행여나 진상파가 눈치챌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분이 외의 여자가 내 몸을 만지는 건 이토록 긴장되고 떨리는 경험이로구나.)

입 안이 바짝 바짝 말라 들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강유였다.

(만일 분이가 이런 장면을 본다면 난리가 나겠지?)

그 와중에도 분이의 화난 표정이 떠올라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헌데 그 직후의 일이었다.

반짝!

모닥불 건너편의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붉은 빛이 반짝이는 것이 강유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강유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그 빛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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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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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두 가지 선물

 

 

"담세황이란 놈이 내게서 노리고 있는 두 가지 보물이 무엇인지 아느냐?"

옥여상은 꼭 끌어안고 있던 고검추의 머리를 조금 풀어주며 물었다.

"세... 세이경청하겠습니다."

고개를 조금 든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부끄러운 변화를 옥여상에게 들켰음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보물 중 하나는 장보도(藏寶圖)란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고검추의 모습을 본 옥여상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장보도라면 어떤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그린 지도겠군요."

고검추는 흠칫 놀라며 옥여상을 내려다 보았다.

"십칠 년 전, 그다지 친분도 없던 어떤 인물이 인편으로 손수건 한 장을 보내왔었다. 그 손수건 위에는 복잡한 암호가 기재되어 있었는데... 십여 년이 흐른 후에야 그것이 한 자루의 신검을 감춘 장보도인 줄 알게 되었단다."

(신검을 감춘 장보도!)

고검추는 어떤 예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복마신검을 어디에 숨겨 놓았느냐?>

 

사신각주가 자신의 양모 당혜선을 다그치던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아... 아주머니께서 장보도를 보낸 분이 누구입니까?"

고검추는 떨리는 음성으로 옥여상에게 물었다.

옥여상은 야릇한 눈빛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 사내는 내가 장보도를 받은 직후 불미스러운 일로 자결했다고 한다. 정파백도의 차기 맹주로 손꼽히던 철사자 고창룡이 그 장본인이다."

"...!"

고검추의 몸이 다시 한 번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옥여상이 고검추에게 주겠다고 한 장보도는 사신검 중 복마신검을 감춘 장소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보도를 옥여상에게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고검추 자신의 부친인 철사자 고창룡이었다.

 

십칠 년 전, 고창룡은 친분도 별로 없는 옥여상에게 복마신검의 장보도를 보냈었다.

고창룡과 옥여상은 한두 번 얼굴 마주친 정도의 교분밖엔 없었다. 각자 걷는 길이 다른지라 흑백양도를 대표하는 기재들은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사귈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헌데 고창룡이 늙은 하인을 시켜 암호가 적힌 손수건을 옥여상에게 보냈다. 비록 가는 길은 다르나 옥여상이라면 믿을만 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옥여상이 손수건을 전해 받은 얼마 후 고창룡이 패륜아로 몰려 자결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고창룡의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옥여상의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고창룡이 죽음을 예견하고 암호가 적혀잇는 손수건을 보낸 듯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옥여상은 고창룡이 자신에게 손수건을 보낸 사실을 곧 잊어버렸다. 손수건에 적혀있는 암호는 난해해서 해독하기 어려웠으며 마천루의 제이대 루주가 된 직후라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옥여상은 마천루를 훌륭히 영도하여 마도 무림의 맹주라는 지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호천무맹이 봉문한 무림에서 마천루에 맞설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옥여상도 마도제일인을 넘어 중원제일인이라는 찬사까지 받게 되었다.

이룰 만큼 이루었고 큰 우환도 없어서 여유가 생긴 옥여상은 고창룡이 보낸 손수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몇 달에 걸친 연구 끝에 암호가 적혀있는 손수건이 사신검 중 하나를 감춘 장보도임을 알아내었다.

 

(아버지는 어째서 장보도를 전혀 남인 이 분께 보내셨을까? 어머니나 양모님은 물론이고 호천무맹의 원로들 중에서도 믿을만한 분이 계셨을 텐데...)

고검추는 옥여상의 풍만한 몸 위에 엎드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세상이 발칵 뒤집힐 일이로구나. 철사자 고창룡에게 아들이 있었다니...)

옥여상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검추의 경악하는 모습에서 그와 고창룡의 관계를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치 않고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담세황이 노리던 두 가지 보물을 네게 모두 줄 작정이다. 거절하지 않겠지?"

고검추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아니... 고모님!"

"고모..."

고모라는 고검추의 호칭에 옥여상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천애고아인 그녀로서는 누군가에게 친근한 호칭으로 불려진 건 오늘이 처음이다.

“무...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고검추는 옥여상의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 옥여상이 아버지의 지인인 것을 알고 별 생각없이 고모라 부른 것이다.

“무례는 무슨... 너같이 귀여운 조카가 생겨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옥여상은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감... 감사합니다.”

고검추는 꽃잎같이 부드러운 옥여상의 입술을 이마에 느끼며 안도했다.

"헌데 너는 사신검의 장보도 말고 다른 한 가지 보물이 무엇인지나 알고 감사하는 것이냐?"

옥여상은 야릇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팔 다리는 여전히 고검추를 휘감고 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자신이 옥여상의 품에 아기처럼 안겨 있는 것을 의식하며 고검추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옥여상이 옥용을 발그레 물들이며 대답했다.

"그건 바로... 고모의... 처녀(處女)다."

"예엣?"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아연실색했다.

옥여상이 고검추 자신에게 주겠다는 두 번째 보물이라는 게 처녀라니... 고검추로서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두 번째 것은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고모님과..."

고검추는 너무 놀라 말도 채 맺지 못하고 옥여상의 시선을 피했다.

비록 젊어 보이지만 옥여상은 고검추 자신에게 어머니뻘인 중년여인이다.

그런 그녀와 어떻게 교접을 한단 말인가?

"네가 왜 나의 두 번째 선물을 못받겠다고 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래도 반드시 받아 주어야만 한다. 그게 고모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옥여상은 옥용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처... 처녀를 제게 주시는 것이 고모님을 구하는 방법이라니... 무슨 뜻이신지요?"

고검추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었다.

"휴우... 이 모두가 담세황이라는 그 음흉한 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옥여상의 옥용이 분노와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다.

 

은발마희 옥여상에게는 한 명의 사제(師弟)가 있었다.

옥면마성 담세황-!

바로 그 자였다.

동문의 사형제이지만 옥여상과 담세황은 모자지간이라 해야 좋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난다. 옥여상은 마흔 세 살이고 담세황은 스물일곱 살인 것이다.

옥여상이 일찍 시집을 갔으면 담세황 또래의 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사형제면서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담세황은 마천루를 세운 구천마야(九天魔爺) 담백양(潭白楊)의 다소 먼 친척이다.

비록 친척이라 해도 구천마야는 담세황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마도 무림의 맹주인 마천루를 이끌어가려면 탁월한 무공과 영도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담세황의 집안이 역모에 연루되어 멸족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구천마야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담세황의 일가의 식솔 대부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때 구천마야가 유일하게 구해낸 것이 담세황이었으며 당시 여덟 살이었다.

원래 구천마야는 후계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옥여상 외에는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천애고아가 된 담세황이 가엾어서 제자로 받아들였다.

대신 구천마야는 마천루의 차기 루주는 대제자인 옥여상이라는 것을 수시로 천명했다. 옥여상의 위상과 정통성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스승의 그같은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옥여상은 담세황을 친동생인 듯 성심껏 돌보아 주었다.

다만 담세황이 지나치게 영악하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재주가 남다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모든 언행이 계산 끝에 나온 게 느껴져서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집안이 멸족당한 후유증이거니 생각하며 담세황의 행태를 이해하려 애썼다.

옥여상은 담세황을 돌봐주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 스승 역할까지 해야만 했다.

담세황을 제자로 맞아들일 당시 구천마야는 이미 팔순을 넘겨 사실상 은퇴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옥여상이 늙은 사부를 대신하여 담세황을 가르쳐야만 했다.

옥여상과 담세황은 사형제가 아니라 사실상 사제지간이었던 것이다.

최소한 옥여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헌데 삼 년 전 어느 날 사단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외출했다가 돌아온 담세황이 한 권의 오래 된 책을 옥여상에게 주었다. 그 고서는 상고시대의 절기가 실려있는 비급이었다.

 

-헌원태을경(軒轅太乙經)!

 

담세황은 그같은 이름의 비급을 천산(天山)의 어느 빙동(氷洞)에서 얻었다고 했다.

옥여상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헌원태을경이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남겼다고 알려진 비급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원태을경은 황제 헌원씨가 총애하던 소녀(素女)를 위해 지은 비급이다.

황제는 소녀가 헌원태을경을 익혀서 몸을 지키길 원했다. 그런 사연이 있어서 헌원태을경의 무공들은 수비와 보신에 특화되어 있다.

헌원태을경에 수록된 무공들의 정수는 태을강기(太乙罡氣)다.

태을(太乙)은 북극성(北極星)을 의미하며 북극성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한다.

그 태을이 이름에 들어간 태을강기를 완전히 수련하면 생사에 초연해질 수 있다. 온몸의 모공에서 늘 강기가 흘러나와 외부의 충격에 즉각 반응하기 때문이다.

태을강기를 깨트릴 수 있는 무공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을 정도다.

다만 태을강기에는 두 가지 심각한 약점이 있다.

먼저 수련하기가 극히 어렵다.

온몸의 모공으로 강기를 뿜어내려면 온몸의 경맥이 완전하게 뚫려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명이 채 안될 것이다.

즉, 태을강기의 수련 비결을 안다고 해서 누구나 태을강기를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번째 약점은 더욱 치명적이다.

태을강기는 팔만사천 개로 알려진 전신의 모공으로 발산과 수렴을 하는 까닭에 통제하기가 메우 어렵다. 십성에 이르기 전까지는 수련하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속을 제 멋대로 떠도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으니 남에게 빼앗기는 것도 막을 수 없다.

태을강기를 수련중인 인물을 제압하여 채음보양이나 채양보음의 사술을 쓰면 그때까지 축적해놓은 태을강기를 고스란히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담세황, 그 배은망덕한 놈은 내가 사신검의 장보도를 지니고 있는 걸 눈치 챈 것 같았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놈은 내게서 장보도를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온 게 분명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헌원태을경을 얻게 되었으며... 일석이조(一石二鳥)를 노리고 그걸 내게 준 것이다."

듣고 있던 고검추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스스로 태을강기를 익힐 자신이 없었던 그 자는 고모님으로 하여금 태을강기를 수련하게 한 후 갈취할 생각이었겠군요."

옥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 년 가량 수련한 결과 나의 태을강기는 구성(九成)을 넘겼다. 그걸 확인한 담세황은 방심하고 있던 나를 쇄심마장으로 암습했다. 지금으로부터 열하루 전의 일이다."

"도저히 용서 못할 말종이로군요."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분노를 금치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옥여상은 그런 그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나의 처녀가 왜 보물인지 알겠지?"

“예...”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옥여상이 중년을 넘긴 나이임에도 아직 처녀라는 사실과 태을강기를 이전받으려면 그녀와 관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때문이다.

구성 수준의 태을강기를 얻은 후 조금만 더 수련하면 십성에 이를 수 있다. 그럼 어떤 무공에도 다치지 않는 사실상의 불사지체가 된다.

"아...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고모님."

잠시 고민하던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옥여상의 호의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고모가 쉰 살을 바라보는 늙은 계집이라 싫은 것이냐?"

옥여상의 말에 고검추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난처한 듯 더듬거리던 고검추는 이윽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자꾸만 고모님이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어머니 같아서 도저히 무례할 수가 없습니다."

"...!"

고검추의 말을 들은 옥여상의 두 눈에 한 줄기 파문이 일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봉목 가득 뽀얗게 물기가 차올랐다.

"내게도 너같이 착한 아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옥여상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고검추를 꼬옥 끌어안았다.

"마녀라 불리는 나같은 계집을 그렇게 소중하게 대해주니 고맙구나."

"고모님..."

옥여상의 품에 안긴 고검추의 가슴도 뜨거워졌다.

"하지만 너는 반드시 고모의 처녀를 취해야만 한다. 그것이 고모와 천하무림을 위하는 길이란다."

옥여상은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옥여상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만년화리를 구하러 북해로 갈 작정이다. 하지만 만년화리를 잡아서 쇄심마장의 마기를 제거할 수 있을지, 그보다 담세황의 추적을 벗어날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옥여상은 그늘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나의 내공은 절반 이상이 쇄심마장의 마기를 억누르는데 소모되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담세황과 백초도 겨루지 못한다."

본래 옥여상은 담세황 정도는 삼십 초 안에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설마 담세황이 사실상의 사부인 자신을 기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그녀는 방심하다 암습당해서 담세황과 백초도 겨룰 수 없는 참담한 신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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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절벽에 숨겨진 문

 

 

"어? 당신 손에 있던 단검은 어쨌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손에 단검이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했다.

"녹지에 던져 버렸어요."

강미루가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대답했다.

"아니 왜?"

"당신을 찔렀던 물건을 계속 갖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못해서요. 혹시 당신을 찌르는 경우가 또 생기면 어떡하라구요?"

말하는 강미루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서린다.

백남빈은 그런 강미루의 마음씨에 감격했다. 그녀가 자신을 깊이 생각해 주는 줄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애정이 깊을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강미루의 깊은 애정에 다 보답하지 못하는 듯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날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그토록 깊을 줄은 몰랐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당신이 내 곁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내 결코 당신을 저버리지 않겠소”

완곡한 표현이지만 틀림없는 구혼(求婚)이다.

그것을 깨달은 강미루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백남빈이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자 강미루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

대려장의 홍의창이라 불리던 여걸의 흔적은 이미 그녀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백남빈도 강미루가 아무 말이 없자 민망해져서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 녹지의 푸른 물을 보았다.

두 사람은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앉아 녹지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있었다.

 

이윽고 보름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그러자 창평곡의 야경(夜景)이 어딘지 모르게 전과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평곡은 사방이 수백 길 절벽으로 에워싸인 항아리같은 구조다. 그 때문에 햇빛에 의하든 달빛에 의하든 한쪽에는 늘 그늘이 진다.

그러다가 해나 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면 잠깐 동안이지만 그늘이 완전히 사라진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보름달이 중천에 이르자 창평곡 어느 곳에도 절벽의 그늘은 생기지 않게 되었다.

노란 보름달은 새파란 녹지 중앙에도 떠올랐다.

녹지에 비친 보름달의 모습이 마치 눈동자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콕 찍어 누르는 송곳자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은 백남빈과 강미루는 보름달이 녹지 중앙에 떠오르며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두 사람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눈을 치떴다.

녹지의 수면이 천천히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물이 줄어들고 있다!>

 

거의 동시에 알아차린 백남빈과 강미루는 서로 기대고 있던 어깨를 떼며 몸을 앞으로 세웠다.

마치 보름달의 달빛에 실린 무게에 짓눌리기라도 하듯 녹지의 수면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백남빈과 강미루가 알아차렸을 때 녹지의 수면은 이미 한길 이상이나 갈아 앉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크럭! 크르럭!

어디선가 쇠사슬 감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보았다.

크럭! 크드드!

연달아 쇳소리가 들린 곳은 두 사람이 앉아있는 맞은편, 즉 서쪽 절벽인데 그 절벽의 일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蒼平谷>이라 적혀있는 부분이 절벽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폭과 두께는 각 일장쯤이고 길이는 오장 가까이나 되는 거대한 석괴가 위쪽부터 절벽에서 떨어져 나와 아래로 기울어지고 있다.

크릭! 끼끼익!

석괴의 안쪽 윗부분에는 두 가닥의 굵은 쇠사슬이 달려있어 석괴가 절벽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지탱하고 있다.

마치 해자(垓字) 위에 놓여지는 다리처럼 내려오는 석괴 뒤로 검은 공간이 보인다.

"글... 글씨가 적혀 있던 부분이 감춰진 문이었어요!"

“가봅시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손을 잡고 함께 신법(身法)을 펼쳐서 나는 듯이 달려갔다.

 

***

 

크럭 크럭 끼릭 끼릭!

거대한 석괴를 안쪽에서 지탱하고 있는 어른 팔뚝 굵기의 쇠사슬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쇠가 타는 냄새를 공기 중에 뿌린다.

크드드!

이윽고 석괴의 윗부분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려오면서 그 뒤에 감춰져 있던 석문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석문 안쪽은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어 그리 어두워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백남빈과 강미루는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내공이 크게 증진되어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력(眼力)이 생긴 터였다.

그래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비밀장치를 주의하면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석문 안으로 들어갔다.

 

석문의 내부는 천연의 동굴에 약간의 인공(人工)을 가미한 통로였다.

천장에는 종유석(鐘乳石)들을 제거한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그 외의 곳의 종유석들은 원형을 보전하고 있다. 그 때문에 기기묘묘한 형태의 종유석들이 열주랑(列柱廊)처럼 안쪽까지 도열해 있다.

종유석들의 열주랑을 지나 왼쪽으로 꺾이는 부분은 일반적인 암동(巖洞)으로 종유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암동 끝은 천장에 구멍이 나있는지 달빛이 흘러들어와 밝았다.

 

십여 장 길이의 암동을 지나자 백 평 정도의 제법 넓직한 뜰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사방의 석벽이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고 그 끝에 하늘이 조그맣게 드러나 보였다.

이곳은 두 개의 절벽이 겹치면서 만들어진 천연의 동부(洞府)였다.

달빛이 흘러드는 위쪽 입구는 까마득하게 높은데, 그 입구마저 바깥쪽 절벽이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때문에 외부에서는 이 동부의 존재를 결코 눈치 챌 수 없다.

뜰에는 키가 작으면서도 옆으로 떡 벌어진 몇 그루의 나무들과 풀이 자라고 있고 그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납작한 돌판으로 덮인 오솔길을 따라가자 세 개의 석문(石門)이 나란히 붙어있는 벽이 나왔고 벽 한쪽에는 돌로 만든 바가지가 놓여있는 작은 옹달샘이 보였다.

"바깥도 아름다운데 여기는 오밀조밀해서 더 아름답군요. 정말 신선이 살았던 곳이 아닐까요?"

신비한 정경에 도취되어 묻는 강미루의 말에 백남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직도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소?"

그의 말에 강미루가"칫!" 하는 소리를 냈다.

"여길 보세요. 이 바가지는 사람손이 닿지 않아 먼지가 반치는 쌓였는데 누가 살고 있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어요?"

"당신이 그토록 총명하니 장차 남편을 마음대로 흔들겠군."

백남빈이 웃으면서 농(弄)을 했다.

"어쩜, 지금 같은 때에도 장난이 나와요? 저를 놀려서 당신은 무엇이 좋은가요? 아까 밖에서 저한테 했던 말도 장난이 아닐까 싶어지는군요."

강미루가 눈을 흘기며 힐난하자 뜨끔해진 백남빈은 얼른 굽신거리며 둘러대었다.

"천만에, 천만에! 내말은 장난인 것 같으면서도 진정이고 진정인 것 같으면서도 진정이고..."

강미루는 보면 볼수록 교묘한 동부인지라 백남빈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말했다.

"엉뚱한 말씀은 그만 하시고 우리 이 문들이나 열어 봐요."

백남빈이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어깨에 걸린 검을 툭 치면서 말했다.

"이 검의 원래 주인이 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검을 돌려 달라고나 하지 않을지 걱정이로군."

"차라리 검법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좋잖아요."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쓸데없이 주고받는 말들이었다.

 

세 개의 문 중 좌측 문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그긍!

백남빈이 슬쩍 밀자 석문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석문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눈에 가장 먼저 뛴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몇 권의 책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든지 보다가 던져져서 엎어진 책장(冊張)들이 바닥에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백남빈은 그중 하나를 집어서 먼지를 툭툭 털고 제목을 읽었다.

 

<이백시선(李白詩選)>

 

바로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를 모은 시집이었다.

"이태백(李太白;이백)의 시를 좋아한 걸 보면 이곳의 주인은 매우 아취(雅趣)가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군요"

함께 보고 있던 강미루가 말하자 백남빈이 대뜸 받았다.

"설마 그런 사람이 책도 어질러 놓으려고?"

"남의 거처에 와서까지 주인을 욕하는 거예요?"

백남빈은 강미루의 그 말에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다.

입심이 센 그녀를 말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백남빈이었다.

강미루가 백남빈의 손에서 책을 받아 옆에 있는 서가의 빈곳에 가지런히 놓았다.

천정에 박힌 야광주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은은히 비치는 이 석실에는 수백 권에 달하는 책들이 서가와 바닥에 흩어져 있다.

책 뿐 아니라 가재도구와 옷가지 등도 석실의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대충 보기에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나가요. 밀폐되어 있어서인지 공기가 탁해요"

강미루가 백남빈을 석문 밖으로 밀며 말했다.

백남빈이"어__?" 하며 밖으로 밀려 나가자 강미루는 재빨리 안에서 석문을 닫아버렸다.

"미루, 미루, 왜 그러는 거요?"

강미루의 갑작스러운 행위에 백남빈은 겁이 털컥 나서 석문을 두드렸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나갈게요."

석문 안쪽에서 강미루의 대답이 들린다.

 

사실 강미루는 창평곡에 들어온 이후로 옷 같은 옷을 입어 보지 못했다.

비록 기후가 따뜻해서 지내는데는 지장이 없다 할지라도 여자로서의 불편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지금도 상체는 백남빈이 벗어 준 남색 상의를 입고 있지만 아랫도리는 풀로 엮어 만든 치마로 대충 가리고 있었다.

버석거리고 까칠한 감촉은 둘째 치고 자칫 방심이라도 하면 속살이 드러나곤 해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석실에 들어오자마자 모퉁이에 놓여있는 옷가지들을 발견한 강미루는 대단히 기뻤었다. 어떤 종류의 옷이든 가릴 게재가 아니었다.

"전부 남자들의 옷뿐이네."

그래도 옷가지들을 들쳐본 강미루는 한숨을 쉬었다. 이 석실 안에 구비되어 있는 옷은 모두 남자들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 옷이라도 풀치마보다는 났다.

강미루는 헐렁한 남색 상의를 벗어버리고 옷가지들 중에서 가장 작아 보이는 흰색 옷을 집어 들었다.

먼지를 탁탁 턴 후 입어 보니 옷 전체가 몸에 착 붙고 가느다란 소매는 팔목을 살짝 조였다. 상당히 작은 체형의 사내가 입었던 옷 같았다.

한 벌인 듯한 꼭 끼는 바지를 마저 입고 허리에 띠를 둘렀다.

하지만 속옷도 없이 맨살에 겉옷만 두른 상태라 뭔가 허전하다.

"뭘 하는 거요?"

밖에서 초조해진 백남빈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 됐어요."

강미루는 마주 소리치며 재빨리 헐렁한 장삼을 하나 집어 들어 몸에 걸쳤다.

그리고는 장삼의 허리 부분을 허리띠에 끼워서 대충 크기를 맞추었다.

몸을 슬쩍 돌려 살펴보니 그런 대로 마음에 들었다.

 

강미루는 몇 벌의 옷을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

“어!”

확 달라진 강미루의 모습에 백남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내아이같이 변한 강미루의 모습은 어여쁠 뿐 아니라 깜찍하기까지 했다.

강미루는 백남빈의 뜨거운 시선을 애써 모른 채 하며 안고 나온 옷가지들 중 하나를 골라서 입혀 주었다.

품이 넉넉한 장삼을 걸치고 사자검을 허리에 찬 백남빈의 모습이 옛날이야기 속의 검선(劍仙)을 떠올리게 해서 강미루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은 두 사람은 엿새만에 사람의 형용(形容)을 되찾게 되었다.

석실 안팍에 벗어놓은 남색상의와 풀잎 옷 한 벌은 장차 높이 날아오를 그들의 껍질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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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신비한 동굴

 

 

-대과벽(大戈壁)!

 

갑자기 이검한 앞에 나타난 장대한 단층지대는 서역 제일의 절경이라는 대과벽이었다.

무려 삼천여 리에 걸쳐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절벽인 대과벽은 마치 거대한 용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듯하다.

그 거대한 대과벽이 지금은 저녁노을에 물들어 피를 칠한 듯 시뻘겋게 보였다.

“책에서 읽었던 대과벽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대과벽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이검한의 가슴은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쏴아아아!

그 사이에 이검한을 태운 철익신응은 대과벽을 향해 비스듬히 날아 내려갔다.

이검한은 고개를 빼든 채 철익신응이 날아내려가는 아래 쪽을 살펴보았다.

그런 그의 시야로 대과벽 중간쯤에 쩍 갈라진 틈바구니가 보였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삼각형 형태의 틈바구니다.

(신응이 나를 데려온 목적지가 저기인 모양이다.)

쏴아아아!

이검한이 생각하는 사이에 철익신응은 대과벽 중간쯤에 나있는 삼각형의 틈바구니를 향해 빠르게 접근해갔다.

삼각형의 틈바구니는 어떤 동굴의 입구였는데 그 절묘한 위치 때문에 허공에서 보지 않으면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즉, 새를 타고 살펴보기 전에는 그 동굴의 존재를 결코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콰아아아! 화악!

이검한을 태운 철익신응이 동굴 안쪽으로 날아 내렸다.

철익신응이 내려선 동굴 입구는 상당히 넓었다. 천장까지의 높이는 십여 장이나 되고 아래쪽의 폭은 그 이상이다.

“이곳에 내게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라도 하다는 거냐?”

휘릭!

이검한은 철익신응에게 물으며 그놈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구우우!

철익신응은 나직하게 울며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놈의 눈가로 물기가 번지는 것이 이검한의 눈에 들어왔다.

(저 안쪽에 철익신응과 관련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건가?)

눈시울을 붉히는 철익신응의 모습을 본 이검한은 흠칫했다.

그리고는 검미를 모으며 동굴 안쪽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동굴은 아주 깊고 어둑해서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구우우!

철익신응이 낮게 울며 부리로 이검한의 등을 밀었다.

“알았어. 들어가 볼께!”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뜻을 알고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우우우!

철익신응은 동굴 안쪽으로 사라져가는 이검한의 뒷모습을 보며 만감이 서린 울음소리를 토해내었다.

 

***

 

얼마나 걸어들어 갔을까?

“이런 곳에 사람이 만든 석문(石門)이 있다니...!”

이검한은 흠칫하며 멈춰 섰다.

동굴 입구로부터 백여 장 정도 들어온 이검한의 앞을 육중한 석문이 가로막아 섰다.

강철 못지않게 단단하다는 청강석(靑剛石)을 깎아 만든 그 석문 위에는 난해한 문양(紋樣)이 사람 머리통 정도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마치 올챙이들이 이리저리 꼬물거리는 듯이 보이는 복잡한 문양이었다.

(과두문(蝌蚪文)이다!)

그 기괴한 문양을 살펴본 이검한은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석문 위에 적혀있는 사람 머리 크기만한 문양은 한자(漢字) 이전 시대에 쓰였던 상형문자인 과두문이었다.

전모 냉약빙은 엄청난 거구 때문에 미련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박학다식했다. 총명한데다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다.

그런 냉약빙에게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이검한은 한자뿐만이 아니라 서역과 천축의 문자도 대충 읽을 수가 있었다.

물론 냉약빙이 가르쳐준 다양한 문자들 중에는 한자의 원형인 전자(篆字)뿐 아니라 과두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음동천(玄陰洞天)>

 

이검한이 기억을 더듬어 해독한 과두문은 그런 뜻이었다.

그리고 현음동천이라는 글자들 아래로는 전자체의 글들이 몇 자 더 적혀 있었다. 크기가 주먹만한 그 글들은 현음동천이란 뜻의 과두문이 새겨진 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추가된 듯했다.

 

<이곳은 사천왕(四天王)의 영지다. 난입(亂入)하는 자에게는 구족지멸(九族之滅)의 신벌(神罰)이 있으리라!>

 

전자체로 새겨진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사천왕? 무림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린 인물들은 없었던 것같은데...”

글을 읽은 이검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검한이 아는 한 무림의 역사를 통해 사천왕이라는 존재는 없었다.

“사천왕이라는 게 혹시 수미산의 사방에서 불법을 수호한다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을 가리키는 것일까? 여기는 무림과는 상관이 없는 불가(佛家)의 유적이고?”

이검한은 석문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 험한 표현을 써가며 경고를 해놓은 걸 보면 들어가면 안되는 곳 같은데...)

허락 없이 석문 안으로 들어가면 구족이 멸해지는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글귀가 마음에 걸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소년다운 호기심이 꺼림칙함을 눌러 버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나갈 수는 없지.)

이검한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석문을 밀어보았다.

그그긍!

육중해 보이는 것과 달리 석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시, 시체!”

헌데 석문을 밀어 젖히며 안쪽으로 들어서던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주춤 물러섰다. 이검한이 열고 들어간 석문 앞에 시체 한 구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석문 안쪽은 일정한 간격으로 야명주가 박혀 있어 그리 어둡지 않은 복도였다.

그 복도에 석문을 향해 기어오는 듯한 자세로 죽어 있는 시체가 한구 있다.

깡마른 몸에 검은 색의 옷을 걸친 그 시체의 왼손에는 칼날의 폭이 좁은 장도(長刀)가 한 자루 쥐어져 있다.

길이가 네 자 정도인 그 칼은 만들어진 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섬뜩한 빛을 흘리고 있다. 아마도 금석(金石)을 흙 베듯 하는 신병이기일 것이다.

“이... 이 사람은 누군데 이런 곳에 죽어 있는 걸까?”

이검한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시체로 다가갔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의 시체는 아직 어린 소년인 이검한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시체는 목내이(木乃伊;미이라)처럼 바짝 말라있다.

비록 목내이가 되긴 했어도 시체의 얼굴은 살아있었을 때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냉혹하고 성말라 보이는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반백이다. 시체의 주인은 죽을 당시에 이미 노년이었을 것이다.

(혹시 이 사람이 석문에 쓰여 있던 사천왕중 한 명이 아닐까?)

평범해 보이지 않는 시체의 얼굴을 살펴본 이검한은 몸을 숙였다. 시체의 왼손이 쥐고 있는 칼을 빼내 살펴보려고 한 것이다.

우두둑! 퍼석!

헌데 이검한이 칼을 빼내려고 손을 대는 순간 시체는 바싹 마른 흙덩이처럼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헉!”

깜짝 놀란 이검한이 급히 허리를 펴면서 물러났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퍼억! 푸스스!

방금 전까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시체는 고운 모래처럼 무너져 내려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시체의 주인은 아주 오래 전에 죽었으며 서역의 건조한 기후는 시체를 완전하게 건조시켜버렸었다.

그러다가 이검한의 손이 닿자 그대로 무너져 버린 것이다.

“고인의 유해를 훼손하다니...!”

이검한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시체 주인의 명복을 빌어준 이검한은 자신의 손에 들려진 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도(魔刀) 파천(破天)

 

설화석고(雪花石膏)로 장식된 희고 매끄러운 칼의 손잡이에는 그같은 글이 음각(陰刻) 되어있다.

“하늘을 깨트리는 마귀의 칼? 섬뜩한 이름을 지닌 놈이다.”

손잡이에 새겨진 칼의 이름을 확인한 이검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마도 파천이라는 이 칼은 이름만 섬뜩한 것이 아니었다.

칼을 쥐고 있자니 절로 불끈불끈 살기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당장 무엇이든 베어보고 싶은 욕구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살기를 부추기다니... 마물(魔物)이다!)

이검한은 오싹한 한기를 느끼면서도 마도 파천을 버리진 못했다. 무언가 인연같은 것이 그 칼에서 느껴진 때문이다.

이검한은 무너져 내린 시체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을 끌러내어 마도 파천을 집어넣었다. 시퍼런 한기를 뿜어내던 칼날이 칼집 안으로 사라지자 비로소 들끓던 살기가 갈아 앉는다.

이검한은 칼집에 넣은 마도 파천을 허리에 찼다.

이어 그놈의 주인의 신원을 밝힐만한 단서가 없을까 해서 무너져 내린 시체 무더기를 조심스럽게 뒤져보았다. 그리고 곧 두 가지를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검한이 먼저 찾아낸 것은 얇은 책자 한 권이었다.

 

<파천도보(破天刀譜)>

 

비단을 엮어 만든 책의 표지에는 그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책의 표지 안쪽에는 내공심법 한 가지와 삼초로 이루어진 도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폭혼낙백심결(爆魂落魄心訣)!

-파천삼식(破天三式)!

 

폭혼낙백심결-!

일신의 내공을 응축시켰다가 한순간에 토해내는 파격적인 내공심법이다. 폭혼과 낙백이라는 이름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일거에 폭발시켜 상대방의 혼백을 끊어버리는 위력을 지닌 것이다.

편협하고도 신랄한 이 폭혼낙백심결을 운용하면 자기보다 몇 배 더 심후한 내공을 지닌 고수와도 맞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내공을 일거에 토해내는 탓에 그 뒤에는 완전히 탈진해버려 운신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 단점이다. 폭혼낙백심결을 써서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그 자신이 적의 손에 죽게 되는 것이다.

 

파천삼식-!

단 삼초로 이루어진 이 도법에는 수비란 개념이 아예 없다. 오로지 적을 베어버리기 위한 공격적인 초식만으로 이루어진 도법이 파천삼심이었다.

 

“대... 대단하다! 폭혼낙백심결과 파천삼식이 실제로 구사된 무공이라면 이 시체의 주인은 고금을 통틀어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일 것이다!”

파천도보를 한차례 읽어본 이검한은 절로 혀를 내둘렀다.

이검한은 냉약빙으로부터 전궁만리비의 경신술 외에도 여러 가지 무공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냉약빙이 가르쳐준 무공들 중 폭혼낙백심결이나 파천삼식만큼 신랄하고 패도적인 것은 없었다.

(폭혼낙백심결은 몰라도 파천삼식은 익혀볼 가치가 있다.)

파천도보를 품속에 넣은 이검한은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파천도보에 이어 이검한이 발견한 두 번째 단서는 바닥에 새겨진 수십 자의 글이었다. 모래처럼 곱게 부서진 시체의 잔해 아래쪽에 판독하기 어려운 난잡한 글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마도 파천의 주인이 죽어가며 남긴 유언인 듯했다.

 

<마... 마녀(魔女)! 모든 것이 그 계집... 누란(樓蘭)...의 짓... 어리석게도 우리 사천왕은 그 계집에게 모든 양정(陽精)을 갈취당하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 머지 않아 천년공력(千年功力)을 지닌 마녀가... 세상의 종말이...!>

 

이검한이 어렵게 판독한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양정을 갈취 당하다니... 무슨 뜻일까? 또 어떻게 인간이 천년 수위의 내공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이검한은 앞뒤의 연결이 불분명한 바닥의 글을 읽으며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아직 남녀 관계를 알지 못하는 순진한 소년인 이검한으로서는 여자가 남자의 양정을 갈취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리 없었다.

(이 동굴 안쪽에서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바닥에 새겨진 글까지 읽어본 이검한은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지 마라! 천년마녀(千年魔女)가 깨어난다!>

 

마도 파천 주인의 혼령이 이검한의 발길을 저지하기 위해 울부짖는 듯했다.

하지만 이검한의 왕성한 호기심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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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3)

 

 

(바로 이것이었구나! 현장법사는 명산에 수장하는 심정으로 이 향로 안에 글을 새겨 두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절묘한 방법이다. 책이라면 손상될 수도 있겠지만 구리로 만든 향로라면 천년이 아니라 수천 년을 간다 하더라도 여전할 것이다. 더구나 이 향로는 향불을 피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재를 비우기 위해 들어올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임청우는 끔찍한 고통과 신열에 시달리면서도 오른손으로 향로의 안쪽을 더듬기 시작했다.

손톱보다 조금 큰, 즉 발톱만한 글자들이 향로 안쪽에 촘촘히 박혀있었다.

임청우는 윗쪽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더듬어 내리며 읽었다.

 

<노납 현장은 황상(皇上)의 윤허도 받지 않고 홀로 장안을 출발하여 간다라를 거쳐 마침내 천축에 이르렀다.

-중략(中略)-

십팔 년이 지나 노납은 일백오십 개의 불사리(佛舍利)와 여덟 체의 불상(佛像), 육백오십칠 부의 경전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중략-

자은사에 대안탑을 세우고 불경을 번역하기 이십칠 년, 노납의 나이 고희에 달했으며 번역하지 못한 책은 오직 한 권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헌데 노납의 실책인가? 아니면 삼세를 굽어 살피시는 불타의 뜻이신가? 노납이 천축에서 가져온 경전 중 마지막 한부가 불법을 설파한 것이 아닌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오?

노납은 삼 년의 망설임 끝에 그 마지막 한 부를 번역했다.

하지만 그 내용의 가공함으로 인하여 감히 세상에 흘리지 못하고 노납이 머물던 대안탑 칠층에 불심연화로(佛心蓮花爐)를 만들어 깊이 숨기는 바이다.

뜻이 있는 자는 구할 것이오, 인연이 있는 자는 얻을 것이다.

행하는 자는 불타의 자비를 잊지 말 것이며, 전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

 

글을 읽은 임청우는 고소했다.

“불심연화로! 역성(譯聖)께서는 자신이 애써 만든 불심연화로가 한낱 떠돌이 임청우의 무덤이 될 줄을 생각이나 하셨을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현장이 그토록 고심한 내용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임청우 자신은 이 향로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생을 마쳐야할 운명에 처해있었다.

그렇다고 읽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천명(天命)이라면, 은밀하게 숨겨져 온 비전(秘傳)을 접하게 된 것 또한 천명이 아니겠는가?

줄이 바뀌면서 갑자기 문장이 바뀌었다.

“불심연화지(佛心蓮花指)?”

임청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글자들 보다 약간 크게 쓰여진 굵은 글자는 <불심연화지>였다.

(이럴 수가...!)

제목에 이어진 내용을 읽어가던 임청우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처럼 생소하고 기이한 문장을 그는 한 번도 대해본 적이 없었다.

천지(天地)의 도(道)를 이야기할 때는 모든 성인(聖人)들과 비슷했으나 신체의 굴신(屈身)에 대한 구절에서는 도가의 양생술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 내용들은 마치 한 줄에 꿰인 수백 개의 곶감들처럼 어떤 오묘한 원리에 의해 이어져 있었다.

인체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 부분에서는 의서를 읽는 듯했고, 전혀 이해하지 못할 기(氣)라는 것에 대한 부분에서는 마치 무서(巫書)를 읽는 듯이 황당무계하면서도 신비한 감이 있었다.

임청우는 그 오묘하면서도 신비한 불심연화지의 구결에 빠져들어 몸이 아픈 것조차 잊어버렸다.

입으로는 연신 구결을 중얼거리며 눈은 망연히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손가락으로는 구결을 더듬었다.

구결을 외워감에 따라서 몸속에서 이해하지 못할 뜨거운 열기가 생겨났다.

그 열기는 배꼽 아래 세치 쯤 되는 곳이 간질간질해지더니 생겨났다.

아지랑이같고 연기같던 열기는 이내 뭉쳐져 불덩이처럼 변하더니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랫배와 명치를 지나 가슴 앞쪽을 통과한 불덩이같은 기운은 얼굴로 올라왔다.

턱 중앙을 지나 코 위로 흘러간 그 기운은 미간을 약간 더 올라간 위치에서 더욱 단단하게 뭉쳐지고 있었다.

마치 불이 붙은 솜이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같지만 전혀 뜨겁지 않았다.

다만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임청우는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거듭 반복하여 읽었다.

읽을수록 머릿속은 선명해지고 온몸을 뜨겁게 달구던 신열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이렇게 죽으란 법은 없구나. 이 글속에 이처럼 신비한 힘이 있을 줄이야.)

임청우는 뛸 듯이 기뻤다. 몸의 상태가 구결을 외움에 따라 표가 날 정도로 좋아지고 있는 것을 안 것이다.

네 번을 거듭 읽고 나자 거의 암송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임청우는 눈을 감은 후 빠른 속도로 암송했다.

그에 따라 그의 몸속에서도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났다.

배꼽 아래쪽에서 꾸준히 생겨난 기운은 이마의 튀어나온 부분까지 상승하여 하나로 뭉쳐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꽃같이 뜨겁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꽃같진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얼음 덩어리 같기도 했다.

그 속성을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사실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었다.

임청우는 농산에 살면서 수없이 많은 진기한 약초를 채집하고 또 복용해왔었다.

덕분에 임청우의 몸속에는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양의 영약 기운이 잠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임청우가 내공심법의 구결을 외자 단전에 잠복하고 있던 그 영약 기운은 구결을 따라 앞머리의 신정혈(神庭穴)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일반적인 내공심법은 공력을 단전(丹田)에 모은다.

그에 반해 임청우가 암송하고 있는 불심연화지는 단전이 아닌, 이마 위에 자리한 신정혈에 공력을 모으는 특이한 내공심법이었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움에 따라서 임청우의 몸에서 신열은 사라지고 부어올랐던 팔의 부기도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한데 임청우가 도취된 듯이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암송하고 있을 때였다.

 

“지독한 유가놈! 하지만 제 놈도 설마 우리가 이 대안탑에 숨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 큿큿!”

임청우의 귓가로 갑자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마...마면혈도란 자다!)

임청우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들린 음성은 바로 비련곡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달아났던 마면혈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임청우가 너무 놀라 숨조차 멈춘 직후 아래층에서 또 하나의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말대가리! 또 검주 유소기를 과소평가하는군. 이곳을 찾지 못하길 바랄 수 있을 뿐, 찾지 못한다고 단정하고 있다간 그의 검에 목이 달아나게 될 걸?”

철선동시의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 까마귀가 우는 듯한 역겨운 음성이었다.

(저 괴물들이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재수가 없구나. 마치 내가 가는 곳마다 일부러 쫓아오는 것같다.)

임청우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동료인 척포를 깨웠다.

임청우가 호리병을 살랑살랑 흔들자 척포가 금빛 뿔이 달린 머리를 내밀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쉿!)

임청우는 자기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때 다시 마면혈도의 음성이 들려왔다.

“흐흐흐... 하지만 우리가 몽선도의 비밀을 풀기만 하면 유소기 놈쯤이야 간단히 찢어죽일 수 있지!”

츠으!

마면혈도의 음성을 들은 척포의 눈이 붉은 빛을 쏘아냈다.

척포는 농산의 비련곡에서 마면혈도와 싸울 때 그자의 혈도에 맞아 상당수의 비늘이 상하는 타격을 입었었다.

그 원한이 뼛속에 사무쳐 있었던 모양이다.

쉬쉭!

척포는 혀를 날름거리며 호리병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지금 나가면 안돼!)

임청우는 다급히 척포의 머리를 눌렀다.

끽!

괴상한 소리를 내며 척포의 머리가 호리병 속에 밀려들어가 버렸다.

(휴! 큰일 날 뻔했다. 만약 이 녀석이 뛰쳐나간다면 저는 몰라도 나는 말 그대로 죽은 목숨이지.)

임청우는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척포는 임청우가 손바닥으로 막아버린 호리병 속에서 나오려고 기를 쓰기 시작했다.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주둥이로 쿡쿡 찍어대는 데 간지러워서 미칠 지경이다.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지만 웃을 수가 없다.

(이 바보 같은 놈이 나를 죽이려고 드는구나.)

임청우는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속으로 욕을 했다.

(만약에 들통이 나게 되면 네 녀석을 호리병 채 불속에 넣어서 구워버리겠다.)

막상 척포를 욕하고 나니 우습지만 그놈의 잘못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저 말귀신과 얼어 죽은 강시는 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건가?)

임청우는 대상을 바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욕하기 시작했다.

(전생에 나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농산에서 두 번이나 보고 수백 리나 떨어진 이 대안탑에서까지 만난단 말인가? 귀신은 저놈들 안 잡아가고 뭣하며 벼락은 눈이 멀기라도 했나?)

간지러움을 참기 위해 평소에는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던 욕도 마음속으로 실컷 해댔다.

그러는 사이에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대안탑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는지 마음 놓고 이야기하며 칠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조바심이 나서 미칠 지경인데도 척포는 여전히 그의 손바닥을 간질이고 있었다.

(제발 그만해라 뱀 새끼야!)

임청우의 얼굴이 숫제 울상이 되었다.

 

“제길. 유소기 그 개같은 놈만 아니라면 우리가 이렇게 도망쳐 다닐 필요도 없는데...”

마면혈도는 칠층의 바닥을 밟으면서 소리쳤다.

철선동시가 속이 뒤집어질 것같은 역겨운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유소기보다도 더 무서운 자가 자네를 뒤쫓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그자에 비하면 유소기는 아무것도 아니지.”

마면혈도는 안색이 홱 변하며 급히 물었다.

“이봐, 철선동시! 마황이 나를 뒤쫓기 시작한 기미라도 있나?”

마면혈도의 어조는 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 그동안 철선동시에게 한 수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마황은 멀리 있고 그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철선동시가 냉소하며 대답한다.

“그? 그라니 대체 누굴 말하는가?”

마면혈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철선동시는 입가로 묘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빙빙 돌렸다.

“하지만 자네가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아니니 패할 걱정은 할 필요 없네.”

“그럼 들을 필요도 없군. 그만하지.”

마면혈도는 석가여래의 무르팍에 걸터앉으면서 손을 저었다.

철선동시는 그런 그자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갑자기 마면혈도가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휘익!

그자는 벼락같이 달려들어 철선동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마면혈도에 비해 키가 작은 철선동시가 발까지 땅에서 떨어져 대롱대롱 흔들렸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유소기보다 더 무섭다는 자가 나를 이길 수 없다니... 그런 개같은 소리가 어디 있느냐?”

마면혈도는 고함을 치면서 철선동시의 멱살을 흔들었다.

휘익!

순간 철선동시의 발이 빙글 돌아가며 마면혈도의 턱과 겨드랑이 아래를 동시에 노렸다.

쩌엉!

경쾌한 바람소리와 함께 마면혈도는 철선동시를 집어던지고 혈도를 뽑아들었다.

철선동시의 멱살을 그대로 잡고 있었으면 턱이 부서졌거나 팔이 떨어졌을 것이다.

휘릭!

철선동시는 몇 바퀴 맴을 돈 후에 아미타여래의 어깨 위에 내려서면서 소리쳤다.

“말대가리! 아무리 똑똑한 척해도 네놈은 돌대가리야. 기껏해야 그 정도까지만 생각할 줄 아는 걸 보면...”

“개 수작마라! 당장 말하지 않으면 얼어 죽은 놈이 칼 맞아 죽은 놈으로 변할 것이다.”

마면혈도가 혈도를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번쩍!

혈광이 번득이는 순간 철선동시는 아미타여래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비로자나불의 머리위로 피했다.

쿵!

혈도에 베어진 아미타여래불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쩍!

마면혈도는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하자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그대로 철선동시를 베어갔다.

실로 놀랍도록 빠른 수법이었다.

철선동시의 가슴 앞자락이 길게 베어졌다.

휘릭!

철선동시는 급히 비로자나불 뒤로 뛰어내려 숨었다.

“끼압!”

화가 꼭지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마면혈도는 공력을 돋우어 괴성과 함께 비로자나불을 양단해버렸다.

쿠르르르!

비로자나불이 두 조각이 되어 좌우로 나누어졌다.

순간 철선동시가 좌측으로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이 미친 말대가리 놈아! 말은 끝까지 들어야 아는 것 아니냐? 네놈을 쫓는 사람이 우협 장백승이라 해도 내말이 틀렸다고 할 테냐?”

순간 마치 시간이 멎어 버리기라도 한 듯이 마면혈도가 우뚝 서버렸다.

그자의 몸이 석고처럼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은 이미 산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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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해보니 만화 시나리오도 참 많이 썼군요.

현대물과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도 몇편 썼지만 무협극화 시나리오만 정리해봤습니다.

극화와 비교해서 보시면 제법 흥미로우실 것입니다.

 

<이재학>

 

철사자 (1993년)

천마성 (1994년)

전신 (1995년 01월)

무림악인전 (1995년 07월)

요마환술록 (1995년 10월)

 

<야설록>

 

남성북궁 (1995년 12월)

율궁협성 (1996년 04월)

제왕기행 (2001년 10월)

불사기행 (2001년 11월)

천마2세 (2002년 04월)

사대세가 (2002년 07월)

천하무적 (2002년 08월)

오수맹 (2003년 01월)

무림왕 (2004년 08월)

귀면왕 (2004년 10월)

구룡왕 (2004년 11월)

옥면염라 (2005년 04월)

호색군자 (2005년 07월)

사자왕 (2005년 12월)

도룡계 (2006년 04월)

다정사신 (2006년 08월)

전신강림 (2007년 01월)

협골독심 (2007년 05월)

실명대협 (2008년 04월)

천애독행 (2013년 10월)

제왕본색 (2014년 09월)

대도독행 (2015년 04월)

악군자전 (2015년 09월)

마협독행 (2016년 06월)

살수대협 (2016년 11월)

 

<황성>

 

마검천자 (1995년 04월)

십왕지존 (1996년 04월)

혼돈마조 (1996년 07월)

백치룡 (1997년 04월)

장한검 (1997년 07월)

마인 (1998년 05월)

역천행 (2002년 04월)

구마경 (2002년 10월)

아수라 (2003년 01월)

낭왕일대기 (2003년 04월)

백면무적 (2003년 09월)

도부 (2003년 11월)

지옥도 (2004년 03월)

냉혈대협 (2004년 07월)

달마2세 (2004년 11월)

백인천 (2005년 02월)

파죽지세 (2005년 03월)

태산북두 (2005년 11월)

생사탄 (2006년 05월)

남사여호 (2006년 08월)

무적의생 (2006년 10월)

천방지축 (2007년 03월)

일기당천 (2007년 07월)

사자불루 (2007년 11월)

질풍노도 (2008년 04월)

황금전장 (2008년 08월)

금포염왕 (2008년 10월)

요리지존 (2009년 01월)

혈로독행 (2009년 07월)

무림창세기 (2010년 02월)

오대무벌 (2010년 04월)

백마사원 (2010년 06월)

독행일지 (2010년 08월)

구중천 (2010년 11월)

고금제일인 (2011년 03월)

칠보하천하 (2011년 06월)

무명초인 (2011년 11월)

승풍파랑 (2012년 01월)

용맥백정 (2012년 06월)

마귀대협 (2012년 10월)

협기천추 (2013년 03월)

무제천추 (2013년 06월)

기인천추 (2013년 10월)

마면기정 (2014년 03월)

마왕유희 (2014년 07월)

건곤일척 (2015년 02월)

아랑힐월 (2015년 10월)

투천환일 (2016년 06월)

마고천장 (2017년 02월)

보보경천 (2017년 04월)

불멸무성 (2017년 05월)

퇴마신협 (2017년 07월)

마인총 (2017년 10월)

천지무쌍 (2017년 12월)

발검진천 (2018년 01월)

마왕강림 (2018년 03월)

신마유희 (2018년 05월)

자객일지 (2018년 07월)

무쌍일지 (2018년 10월)

신선부 (2018년 12월)

폭풍신마 (2019년 04월)

몽유강호 (2019년 07월)

견자전설 (2020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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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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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첫 번째 살인

 

 

 

“그럼 그렇지!”

“역시 대주님이시다.”

잠시 마음을 졸였던 철위사들은 안도하며 환호했다.

그자들이 보기에도 강유의 공격은 실로 맹렬했던 것이다.

반면 진상파의 얼굴은 점점 초조한 기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녀가 제왕성으로 끌려가지 않을 유일한 가능성은 강유가 사우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유는 전력으로 공격하는 것같은 데도 사우를 직경 다섯 자쯤의 원 안에서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비참해질 운명인 것같구나.)

진상파가 체념하며 소리없이 한숨을 쉴 때였다.

“크왓!”

강유가 벼락같이 기합을 토해내었다.

가가강! 슈학!

그와 함께 강유의 검이 파도치듯 너울거리는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며 사우를 쓸어갔다. 붕정검법의 초식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이고 현란한 대붕전시(大鵬展翅)가 펼쳐진 것이다.

사우도 이번에는 표정을 굳히며 검을 휘둘러 순간적으로 열 번을 베고 다섯 번을 찔렀다.

카카캉! 빠카캉!

서로의 검이 섞이면서 요란한 금속성이 터지고 시퍼런 불꽃이 작렬했다.

강유가 일으킨 수많은 검의 그림자는 베어지거나 튕겨졌다.

콰드득!

하지만 사우 역시 상당한 압박을 받은 듯 두 발이 뒤로 밀려서 하마터면 원 밖으로 나갈 뻔했다.

“방금 것이 제십 초! 이제 네놈이 살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부악!

밀려나던 몸을 멈춘 사우가 폭발적인 기세로 강유에게 쇄도하며 비스듬히 검을 내리쳤다.

강유가 방금 전에 펼쳤던 대붕전시가 사우가 양보한 십초의 공격중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쩍!

강유를 향해 비스듬히 내려치는 사우의 검 끝에서 시퍼런 검기가 내뻗힌다,

헌데 그 검기의 형태가 특이했다. 직선으로 내리쳐지던 검기의 끝 부분이 돌연 홱 꺾이며 강유를 베어온 것이다.

(위험...)

흡사 낫을 연상케 하는 사우의 검기가 날아들자 강유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스팟!

강유는 사력을 다해 뒤로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러 방어하려고 했다.

캉! 쩌억!

하지만 사우의 검기는 강유의 검에 막히는 순간 다시 홱 방향을 틀며 목으로 파고들었다.

낫의 형태를 한 검기가 거듭 궤적을 바꾸니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다.

“!”

패액!

거의 동시에 강유는 어떤 영감을 느끼고 몸을 홱 틀었다.

서걱!

강유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 사우의 검기 끝이 강유의 목 대신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푸학!

강유는 불에 덴 듯 화끈한 감각과 함께 가슴에서 피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목이 잘리는 것은 면했지만 가슴에 상당히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악!”

보고 있던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달마독명안 덕분에 살았다!)

휘릭!

강유는 단번에 삼장 밖으로 물러나며 몸서리를 쳤다.

사우의 이번 공격에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은 수박 겉핥기로 깨우친 달마독명안 덕분이었다.

위기의 순간 달마독명안의 예지력(豫知力)이 발동하여 가장 가벼운 피해를 입는 쪽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꼴좋다 강가야!”

“제왕성에 맞선 것을 후회하며 죽어라.”

철위사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

반면 비명을 질렀던 진상파는 두 손을 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끼이...

사람들과 함께 관전하고 있던 섬전초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시 자기 꼬리 다듬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물인 그놈이 보기에도 강유와 사우의 대결은 결말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놈! 운이 좋았구나! 하지만 그 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두고보자.”

사우는 강유에게 흐르듯 다가서며 검을 휘두르고 그었다.

쩌억! 부악!

그때마다 사우의 검에서 끝이 낫처럼 휘어진 검기가 내뻗혀 강유를 베어왔다.

캉! 카캉!

강유는 소요보법을 극한까지 펼치면서 검을 휘둘러 사우의 공격을 막았다.

푸학! 서걱!

치명상은 어찌어찌 피하지만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긴다. 어설픈 달마독명안으로는 사우의 변화막측한 검법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삽시에 강유의 몸은 피로 물들었다.

사우의 검기에 베어져 생기는 상처에서 피를 뿜어대는 강유의 모습은 끔찍한 것이었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고통만 길어질 뿐이다. 포기하고 목을 늘어트려라.”

스악! 쩍!

사우는 냉혹하게 웃으면서 검을 휘둘러 강유를 몰아붙였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겨우 겨우 사우의 공격을 막고 피하면서 강유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아직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출혈이 과다하다는 게 문제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급격히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결국 사우의 검에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른 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인 건가?)

공포와 절망이 강유의 온몸을 휘감았다.

헌데 절체절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강유의 뇌리에 섬전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 검법의 이름은 아비도 모른다. 그래서 임의로 필살일초(必殺一招)라고 명명했다.>

<일단 펼쳐지면 반드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고 마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써선 안된다.>

 

바로 안탕산을 떠날 때 아버지 강조가 자신에게 필살일초라는 검법을 전수하며 하던 장면이었다.

(바로 지금이다! 아버지가 구명(救命)의 절초(絶招)로 가르쳐주신 그 검법을 사용할 때가...!)

부악! 휘익!

강유는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러 사우의 공격을 막은 후 훌쩍 물러섰다.

이번에도 사우의 검기를 완전히 막지 못해서 왼쪽 뺨에 반 뼘 가량의 상처가 생겼다.

하마터면 얼굴에 치명상을 입을 뻔 했지만 그 대가로 강유는 사우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어떠냐? 슬슬 네 운명이 어찌 될지 실감이 가겠지?”

사우는 얼굴까지 피로 물들인 채 비틀거리는 강유를 보면서 음산하게 웃었다.

“저는 상관하지 말고 떠나세요.”

보다 못한 진상파가 외쳤다. 무공 방면에는 그리 정통하지 않은 그녀가 보기에도 이 승부의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퇴로를 차단하자!”

“네놈은 살아서 여길 떠나진 못한다!”

스슥! 슥!

진상파의 안타까운 마음을 비웃듯 철위사들은 강유의 뒤쪽으로 이동하며 퇴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이어진 강유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달아나거나 피하려는 시도 대신 오히려 사우에게 검을 겨누며 다가간 것이다.

“...”

그걸 본 사우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저 애송이놈이...”

“달아나려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투지 하나는 감탄스러운 놈이로군.”

철위사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강유의 행동에 진상파의 미간도 모아졌다.

징!

그때 사우를 향해 내밀어진 강유의 검이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최후의 발악인 것이냐?”

사우는 자신에게 다가서는 강유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네놈이 어떤 한 수를 숨기고 있는지 견식해 보도록 하자.”

비록 웃고 있긴 하지만 사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착 갈아 앉은 강유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불길함이 느껴진 때문이다.

사우는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크아!”

그 직후 사나운 기합과 함께 강유가 벼락같이 검을 내뻗었다.

쩌엉!

사우를 향해 내뻗치는 강유의 검 검신(劍身)이 나선형으로 홱 꼬인다.

(이 검법은 설마...)

소스라치게 놀란 사우는 전력을 기울여 검을 휘둘렀다.

쩌억! 가앙!

사우의 검에서 몇 가닥의 검기가 확 내뻗혀 강유를 찍어갔다.

한 가닥도 아니고 여러 가닥의 검기가 날아드니 강유가 피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보였다.

“흑!”

그걸 알아차린 진상파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벌어졌다.

투쾅! 텅!

나선형으로 꼬이면서 내질러지는 강유의 검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잠경(潛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사우의 검기들을 간단히 튕겨버린 것이다.

사우 자신의 공격은 허무하게 무산되고 강유의 검은 벼락같이 가슴으로 날아든다.

사우는 반사적으로 검을 가슴 앞에 세워서 강유의 검을 막으려 했다.

쩍!

검신이 나선형으로 뒤틀린 강유의 검극(劍極), 즉 검의 끝 부분이 사우의 검날과 접촉했다.

빠캉!

다음 순간 사우의 검은 그대로 유리처럼 깨져 흩어졌다.

“헉!”

명검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자신의 검이 허무하게 깨지자 사우는 기겁하며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늦었다.

사우의 검을 간단히 깨트리고 다가선 강유의 검 검극은 이미 사우의 가슴에 닿아있었다.

화악!

뒤틀리는 강유의 검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파괴력이 사우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결과는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펑!

폭발과 함께 사우의 가슴과 등으로 이어지는 구멍이 났다.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몸통의 앞뒤로 매끈하게 나버린 것이다.

푸학!

사우의 등쪽으로 난 구멍을 통해서 잘게 다져진 살과 뼈와 장기들이 확 터져 나갔다.

“...!”

“...!”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놀라 숨이 멎었고 꼬리를 다듬고 있던 섬전초도 온몸을 덮고 있는 황금색 털을 고추 세우며 굳어졌다.

너무도 충격적인 결말이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컥!”

털썩!

강유는 피를 왈칵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에 구멍이 난 사우는 비틀거리며 서있는데 정작 사우에게 치명상을 입힌 강유가 먼저 주저앉은 것이다.

(경... 경맥이 뒤틀려서 끊어지려 한다.)

강유는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인의 손이 몸 전체를 움켜잡고 젖은 수건에서 물을 짜듯 비틀어대는 기분이다.

필살일초는 단전에서부터 진기를 나선형으로 비틀며 끌어올리는 운기법을 포함하고 있다.

내공의 근원으로부터 비틀리며 발휘되는 힘이기에 부딪히는 건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신 구사하는 쪽도 경맥이 뒤틀려서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된다.

자칫 일신의 경맥이 모두 터지거나 끊어져서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게 필살일초였다.

“끄륵! 네놈... 네놈이 어떻게 마교의 마검칠식(魔劍七式)을...”

주저앉은 강유를 노려보는 사우의 입과 코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마교의 마검칠식?)

강유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끄윽... 무후님을 시해한 게 네놈 아비...”

비틀거리던 사우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퍼억!

하늘을 보는 자세로 나뒹군 사우의 몸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절명한 것이다.

“대... 대주님!”

“안돼!”

너무도 충격적인 결과에 넋이 나가 있던 철위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죽일 놈!”

“감히 대주님을 시해하다니...”

“다 함께 공격해서 죽이자!”

철위사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강유를 공격하려 했다.

“잘 생각하시오.”

슥!

강유는 입과 코에서 흘러내린 피를 왼쪽 소매로 닦으며 일어났다.

사우에게 당한 상처도 상처지만 온몸의 경맥이 뒤틀려있는 상태에서 움직이자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하지만 강유는 내색하지 않고 검으로 앞쪽의 철위사들을 겨누었다.

“당신네 대주도 간단히 죽인 내 공격을 받아낼 자신이 있다면 덤벼도 좋소.”

쿠오오오

강유의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음산한 살기는 철위사들의 피를 싸늘하게 식혀버렸다.

자신들이 하늘같이 여기던 대주조차 간단히 죽인 상대다.

철위사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사우를 향해 돌아갔다.

가슴에 사발만한 구멍이 난 채 죽어있는 사우의 시신은 철위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으으...”

“으으...”

철위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더 이상 강유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됐다!)

자신의 협박이 통한 것을 확인한 강유는 내심 안도했다.

지금의 강유는 내, 외상이 심각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상태였다. 만일 철위사들이 일제히 덤빈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진소저! 그만 갑시다.”

강유는 검으로 무사들을 겨누며 진상파에게 말했다.

“그러지요.”

퍼뜩 정신을 차린 진상파는 도도한 자태로 걸음을 옮겨 공터 밖으로 향했다.

강유는 철위사들을 감시하며 진상파를 따라갔다.

다행히 철위사들은 제 자리에 얼어붙은 채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끼이...

다만 섬전초는 눈을 번뜩이며 진상파와 강유를 따라오려고 했다.

“네놈도 잘 생각해라.”

강유는 걸음을 멈추며 섬전초를 노려보았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산 채로 가죽을 홀라당 벗겨버릴 것이다.”

끼이!

강유의 서늘한 눈빛을 접한 섬전초는 등을 활처럼 구부리며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수백 년을 산 영물답게 강유의 말이 결코 헛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영특한 놈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기색이다.)

겁에 질린 섬전초를 돌아보며 강유는 진상파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터를 떠나는 강유의 발걸음은 그러나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사우와의 악전고투로 가볍지 않은 내상과 외상을 입은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유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진짜 원인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었다.

비록 살기 위해서라지만 한 인간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끝냈다는 사실은 강유의 마음을 납덩이처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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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그릇 깎는 미녀

 

 

사자검은 보면 볼수록 백남빈의 마음을 끌어 당겼다.

백남빈은 사자검을 어깨에 메고 이리저리 어린아이처럼 왔다갔다하며 좋아했다.

조금 가다가 휙 뽑아서 흔들어 본 후 집어넣고, 그러다가 다시 한 번 뽑아서 재주를 넘으며 찌르고 하여 강미루로 하여금 입을 가리고 웃게 만들었다.

나이답지 않게 진지하여 어른들도 어려워하던 철령보의 소보주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애들 장난같던 백남빈의 검무(劍舞)는 점점 격식을 갖추면서 정교해져 갔다.

양부 이탁에게서 배운 삼재검법이 누에가 실을 뽑듯이 펼쳐졌다.

지금까지 수천 번, 수만 번 펼쳐봤던 삼재검법이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웅! 웅!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배 이상 증진된 내공으로 인해 백남빈이 휘두르는 사자검은 웅혼한 바람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쿠오오! 파파팟!

사자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자 그 궤적을 따라 강한 바람이 일어나 주변의 작은 돌들과 흙을 휘감아 튕겨 내었다.

자신의 내공이 이 정도로 증진되어있을 줄은 백남빈도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힘을 쓰면 쓸수록 늘어나 펄펄 날 것만 같아서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백남빈은 이내 자신이 아는 유일한 검법인 삼재검법만으로는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힘을 도저히 다 뿜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갑함을 느낀 백남빈은 격식에서 벗어나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사자검을 움직였다.

쿠쿠쿠! 쩌저적!

강맹한 바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연달아 번쩍이는 검광(劍光)에 가려 백남빈의 모습은 강미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뭔... 뭔가 일어나려 하고 있어!)

강미루는 돌풍과 검광에 가려진 백남빈 쪽을 보며 숨도 제대로 크게 쉬지 못했다.

강미루의 놀란 심정을 알 리 없는 백남빈은 자신의 몸속에서 폭발을 기다리는 용암처럼 들끓는 힘을 분출할 수 있는 검로(劍路)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위... 위험해!)

백남빈의 몸에서 폭풍처럼 터져 나오는 검광과 검풍(劍風)을 보며 위기감을 느낀 강미루는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십장 이상 물러섰음에도 강맹한 바람은 그녀의 몸을 단숨에 하늘 밖으로 날려 버릴 듯 했고 작렬하는 검광은 그녀를 당장이라도 갈가리 난도질해버릴 것만 같았다.

"으야압!"

그러던 어느 순간 백남빈은 천둥치는 듯한 폭갈을 터뜨리며 온 힘을 다해 사자검을 휘둘렀다.

크와앙!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자검에서 한 무더기의 기운이 쏘아져 나가 녹지의 표면을 강타했다.

퍼엉!

수십 장 넓이의 녹지가 둘로 쩍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백남빈은 바닥에 팍 엎어졌다. 몸속에서 들끓던 강대한 기운이 일거에 밖으로 쏟아져 나가 기진맥진해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백남빈은 강미루가 경악하면서"검기(劍氣)"하고 외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몸에 기운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어렵다.

그러나 답답하게 꽉 막혀있던 가슴이 확 트인 듯하여 시원하고도 통쾌해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서 불쑥 치솟아 전중혈(田中穴)을 지나 검으로 빠져나갔었다.

그 기운이 어떻게 움직였고 어떻게 해서 수십 장 넓이의 녹지를 순간적으로 갈라버렸는지 백남빈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탈진해서 몸은 나른하지만 반대로 마음은 아주 후련해져서 눈도 뜨기 싫었다.

“공자님!”

강미루가 뛰어와 그의 머리를 안아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으며 놀란 가슴을 달랬다.

"무서워 혼났어요. 하지만 정말 축하해요."

백남빈은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가 일으켰던 거센 돌개바람은 아직도 작은 회오리들을 만들며 완전히 사그라 들지 않고 있었다.

잠시 아늑한 기분을 만끽하던 백남빈이 눈을 감은 채 잠결처럼 물었다.

"미루, 내가 대체 뭘 한 거요?"

"미친 듯이 검무를 추었잖아요. 가까이 있었더라면 나도 살아있지 못했을 거예요."

강미루는 자신이 본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춤을 추기 시작하자 힘이 마구 들끓었었소. 주체할 수가 없어서 미칠 것같았는데 갑자기 속이 후련해지더군."

백남빈도 자신이 느꼈던 감각을 최대한 자세히 강미루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은 이제 검으로 검기를 발출하게 된 거예요. 우리 형부도 검기를 발출할 수 있는데 멀리서 검을 휘둘러 바위를 깨뜨리고 나무를 베어 버리더라구요."

강미루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전에 형부와 언니가 뭘 하는지 보기 위해 형부 집에 숨어들어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형부가 검을 들고 있다가 저를 보지도 않고 갑자기 휘둘렀어요. 그런데 그 바람에 오장이나 떨어져 있던 내 머리에 쓴 모자가 잘려버리지 않았겠어요? 나도 깜짝 놀랐지만 형부도 어쩔 줄을 몰라 쩔쩔 맸다고요"

백남빈이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무림에 고수는 많지만 검기를 마음대로 발출해 낼 수 있는 고수는 드물다고 들었는데 그대의 자랑스러운 형부는 검신(劍神)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인 모양이오."

백남빈의 말에 강미루가 핏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이제 당신도 검기를 발출하게 됐으면서... 자화자찬(自畵自讚)하지 마셔요."

백남빈이 빙그레 웃자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후로 형부에게 그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매번 졸랐지만 나는 내공이 부족해서 배울 수 없다면서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 대신 궁술과 창법을 가르쳐 주더군요."

"그렇다면 당신도 활과 창으로는 그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겠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당신이 어떻게 내손에서 살아날 수 있었겠어요? 단지 내 궁술과 창법이 치밀한 편이라 다른 사람을 상대로 싸울 수 있을 정도인데 그나마도 이젠 더 이상 늘지 않아요."

강미루가 백남빈의 볼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하는 말이었다.

백남빈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내공수련과 검기(劍技)가 부족한데 어째서 검기를 발출할 수 있었을까? 혹시 사자검이 부린 조화가 아닐까?"

강미루가 그럴 리 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되었지 당신이 쓰러질 때를 맞추어서 그렇게 될 리가 있겠어요? 당신이 어떤 기연을 얻은 모양이에요."

그녀는 말과 함께 손가락을 놀려 백남빈의 여기저기에 글로 적으며 의사표시를 해왔다.

다분히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럼 다시 한 번 더 해봐야겠어!"

백남빈은 옆에 떨구었던 사자검을 집어 들며 일어나려 했다.

강미루가 그런 그의 이마를 눌러 다시 눕히며 말했다.

"목이라도 축이고 다시 하셔요."

그녀는 물그릇(물론 백남빈의 가죽신이지만)을 가져와 백남빈에게 주었다.

미지근한 우유빛 물이 마치 유액(乳液) 같았다.

백남빈은 그 물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소매도 없는 팔로 쓱 닦았다.

폐부를 상쾌하게 해주는 신비의 물. 그것은 하늘 아래에서는 오직 이곳에만 있는 신령스러운 영약이지마나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시고 또 마셨다.

만일 다른 식수가 있었다면 마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몸속이 다시 힘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낀 백남빈은 강미루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스악!

정신을 검 끝에 모으고 기합과 함께 강하게 떨쳐내었다.

과연 기합소리와 동시에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그의 검 끝을 지나서 칙! 하는 소리를 내며 뻗어나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힘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연이어 몇 번을 휘두르자 검기는 실날같이 가늘게 뽑혀 나오며 그의 몸주위에 그물처럼 막으로 둘러싸기 시작했다.

강미루가 돌멩이를 주워 백남빈에게 던지자 돌은 검기에 부딪혀 소리도 없이 바스라져 버렸다.

진정 놀라운 경지였다.

그것은 백남빈에게 검술을 가르친 독안룡 이탁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였다.

 

***

 

백남빈은 새로운 검식을 만들기에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가 익힌 삼재검법은 검기를 펼치기에는 부적당한 것이기에 검과 검력에 알맞은 검식(劍式)을 고안해야만 했다.

가전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 다른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삼가야한다는 양부 이탁의 말은 이미 까맣게 잊은 후였다.

녹지에 다시 들어가 혹시 검식을 적은 검보(劍譜)가 있지 않나 찾아 봤다.

하지만 녹지의 바닥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

 

백남빈은 보름달이 떠올라 창평곡을 환하게 비출 때까지 검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강미루가 쪼그리고 앉아 달빛에 단검을 반짝이며 나루를 깎아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저녁 때 깎을 생각이었으나 백남빈이 검무를 추는 걸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미루었다가 이제야 깎는 것이다.

백남빈은 생각을 멈추고 묵묵히 그녀의 단검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일에 열중하여 전혀 백남빈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강미루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돌아보았다.

순간 강미루는 백남빈의 눈길이 닿은 곳이 자신의 단검임을 깨닫고 죄라도 진 듯이 황급히 손바닥 안에 단검을 감추었다.

그 단검으로 백남빈의 허벅지를 찔러 하마터면 죽게 만들 뻔한 기억 때문이다.

힐끗 보니 백남빈은 여전히 단검을 보고 있다.

핑!

강미루는 입술을 꼭 깨물며 녹지쪽으로 단검을 던져 버렸다.

퐁당! 하는 소리가 나며 단검은 녹지에 잠겨버렸다.

"아!"

그제야 백남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강미루가 깎는 둥근 나무그릇을 보면서 영감이 떠올라 깊은 생각에 잠겼던 것이다.

강미루가 깎는 나무 그릇은 원래 나무토막에 불과 했으나 그녀가 빙글빙글 돌리며 깎아나가자 점차 모양을 갖춰 동그란 나무그릇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검식도 저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백남빈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잡히지 않아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가 단검이 물속에 빠지는 퐁당 소리에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쉬릭! 쉭!

백남빈은 사자검을 들어 찌르는 것도 아니고 베는 것도 아닌,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선(螺旋)형으로 원을 그리면서 찌르는 것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으나 수십 차례 반복하자 뱀처럼 영활하게 검이 살아있는 듯이 뻗어 나갔다.

검이 뻗어나갈 때마다 검기로 형성되는 여러 개의 작은 원과 원이 서로 엉기면서 파도처럼 밀려가는데 정작 검에서는 바람소리 하나 일지 않았다.

오로지 한 초식뿐인 검법이지만 백남빈은 스스로 검법을 만든 것이다.

백남빈은 내심 기뻐하면서 강미루를 향해 씩 웃었다. 성취한 자의 여유가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당신, 내 단검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군요?"

강미루가 백남빈의 성취에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는 가슴을 쓰다듬어 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가슴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신의 단검을 보고 있자 불현듯 그의 허벅지를 찌른 것이 생각이 났었다.

비록 백남빈이 탓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애정을 품고 있는 지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강미루였다.

그래서 백남빈의 돌연한 태도에 비록 정이 든 단검이지만 물속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백남빈이 검초를 깨닫게 되었으니 하늘의 조화는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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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마녀(魔女)의 연심

 

 

당혜선의 한 맺힌 얘기가 드디어 끝을 맺었다.

"...!"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고검추의 얼굴은 밀랍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주먹은 너무 세게 움켜쥐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였다.

(나의... 나의 아버지가 용서받지 못할 패륜아였다니...)

고검추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어머니나 다름없는 사모를 겁탈한 패륜아가 아버지인 것이다.

무슨 낯으로 세상 사람들을 본단 말인가?

주르르...

질끈 감은 고검추의 두 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추야...)

당혜선은 그런 고검추의 모습을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검추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낳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라고 했다.

누가 뭐라 해도 고검추는 당혜선 자신의 아들인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태연할 수 있는 어머니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괴로워 할 것 없다 추아야. 사형은 결코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니니...”

당혜선은 고검추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네 아버지는 어떤 사악한 자의 음모에 희생되신 것이란다."

그녀의 말에 고검추는 흠칫하며 두 눈을 번쩍 빛냈다.

"그... 그 사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 자는..."

당혜선의 눈 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또 다시 심각한 갈등을 겪는 듯했다.

그같은 태도로 미루어 보아 당혜선은 음모자가 누구인지 아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말하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인간이 음모자임을 아셨기 때문에 구차한 변명도 하지 않고 자결하셨을 것이다.)

고검추는 당혜선이 음모자가 누군지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어머니... 제발... 소자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아버지를 음해한 자가 누구인지를..."

고검추는 간절하게 애원했다.

하지만 당혜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미를 용서하거라.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가 없구나."

그녀는 처연한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녀곡을 떠날 때 네게 준 나무상자는 네 생모 대려군 언니가 남긴 것이니 소중하게 간직하도록 해라."

말을 마친 당혜선은 천천히 일어났다.

고검추는 당혜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

몸을 일으킨 당혜선은 물기 가득한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았다.

(사형을 위해 고이 지켜온 정조를 유린당한 마당에... 더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녀의 창백한 뺨으로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몸에 남아있는 사신각주의 흔적이 얼마 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실감나게 한다.

무엇보다도 당혜선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사신각주에게 고문당하며 보인 자신의 반응이었다.

그 장면을 양아들인 고검추에게 보였다는 사실이 당혜선을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사형... 이제 소매가 사형을 만나러 갈 테니 기다려주세요.)

당혜선의 입가로 한 줄기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추아야. 절대... 무슨 일을 겪어도 좌절해서는 안된다."

화락!

그 말을 남기고 당혜선은 돌연 청룡탄 아래로 몸을 던졌다.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고검추는 순간적으로 현실감각을 상실했다.

(어머니가 왜 절벽에서 뛰어내리신 것일까?)

고검추는 멍한 표정으로 당혜선이 뛰어내린 절벽만 바라보았다.

"어... 어머니...!"

그러다가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은 고검추는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청룡탄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어디에서도 당혜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콰아아!

그저 오십 장이 넘는 까마득히 높은 절벽 아래로 청룡탄의 격랑이 허연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으아아아!"

고검추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단애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 안됩니다 어머니!”

고검추는 절벽을 내려다보며 목 놓아 울부짖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도 당혜선을 따라 투신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만 본 자신에게 살아있을 자격은 없다.

하지만 고검추는 끝내 청룡탄으로 뛰어내리지는 못했다.

두렵거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복수... 복수해야만 한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고검추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

(아버지를 위해한 자...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신각주... 네놈들을 내 손으로 쳐죽이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니다.)

고검추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맹세하며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어머니를 따라 죽을 수 없는 것은 복수 때문이다.

자신마저 죽어버린다면 누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해주겠는가?

결의를 다지는 고검추의 뇌리로 문득 스쳐가는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음성의 주인은 그윽한 눈매에 새하얀 은발을 지닌 여인이었다.

(은발마희!)

고검추의 눈이 새파랗게 번득였다.

(어머니 말씀대로 그분이 그렇게 무서운 분이라면... 나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고검추의 눈에 바닥에 뒹굴고 있는 핏빛 화살이 들어왔다.

초혼전!

사신각주가 당혜선의 하복부에 꽂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고검추는 초혼전을 천 조각으로 감싸서 집어들었다. 초혼전에 묻어있다는 백일취가 피부에 닿으면 안된다.

(언제고... 이것으로 네놈의 심장을 쑤셔 주겠다.)

초혼전을 노려보며 맹세한 고검추는 몸을 돌려 어두워지는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자신을 지켜보는 외눈의 어떤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

 

밤이 되었다.

하지만 하늘에는 보름달에 가까워진 달이 떠있어 그리 어둡지는 않다.

팽가촌 남서쪽 삼십여 리 쯤에는 은밀한 협곡이 하나 있다.

무성한 잡초로 뒤덮인 협곡의 끝은 십여 장 높이의 석벽으로 막혀 있다.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른 그 석벽의 대부분은 수많은 등나무 넝쿨로 뒤덮여 있다.

"허억! 헉!"

탁! 타탁!

숨이 턱에 찬 채 그 협곡으로 달려 들어오는 소년이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나타난 소년은 고검추였다.

“허억 헉!”

고검추는 협곡 막다른 곳에 서있는 석벽 앞에 멈춰서며 가쁜 숨을 추스렸다.

서걱...

얼추 숨을 고른 고검추는 떨리는 손으로 석벽을 뒤덮고 있는 등나무 줄기들을 젖혔다.

무성한 등나무 줄기들이 헤쳐지자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허리를 숙이고야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동굴이다.

하지만 동굴은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점 넓어져 이윽고 어른 남자가 서서 들어갈 정도의 넓이가 된다.

그러다 문득 동굴이 끝이 났다.

동굴의 막다른 곳에는 한 칸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석실 바닥에는 보드라운 마른 풀이 깔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석실 구석에는 몇 가지의 가재도구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고검추는 이 동굴을 우연히 발견하여 자신만의 비밀 장소로 꾸면 놓은 것이다.

(헉!)

헌데 막 석실로 들어서던 고검추는 깜짝 놀랐다.

석실 한쪽에 놓인 탁자 위에서는 황촉불이 흐릿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촛불도 고검추가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

헌데 마른 풀이 깔린 석실 바닥에는 한 명의 여인이 자는 듯 반듯이 누워 있었다.

마천루의 루주라는 은발마희 옥여상이었다.

그녀는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석실 바닥 가득히 흩어놓은 채 자는 듯 누워 있었다.

고검추가 놀란 것은 자신이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옥여상이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아주머니!"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옥여상이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검추는 급히 옥여상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옥여상에게서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 설마 내상이 도저서 타계하신 것일까.)

고검추는 떨리는 눈으로 옥여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와는 단 한번 만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런 그녀가 타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고검추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옥여상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그녀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동굴로 들어오기 전에 목욕을 했는지 옥여상의 검은 옷과 새하얀 살결을 물들이고 있던 피는 깨끗이 씻겨있다.

덕분에 역겨운 피 냄새 대신 향긋한 살 내음이 느껴진다.

그와 함께 고검추의 귓가로 뭉클한 육봉의 감촉이 느껴졌다.

헌데 고검추가 옥여상의 가슴에 귀를 댄 직후였다.

"호호호!"

옥여상은 까르르 웃으며 와락 고검추를 끌어안았다.

"읍!"

그 바람에 고검추의 얼굴은 옥여상의 육중한 젖가슴 사이에 파묻혀 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옥여상의 다리도 영사처럼 고검추를 휘감는 것이 아닌가?

몸 아래 느껴지는 더할 수 없이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소년의 피를 단번에 비등시켰다.

"노... 놓아 주십시오!"

당황한 고검추는 몸부림치며 옥여상의 젖가슴에서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호호호! 내가 죽은 줄 알고 겁이 난 모양이구나 겁쟁이 도련님!"

옥여상은 교소를 터뜨리며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팔 다리는 여전히 고검추를 휘감고 있었다. 비록 부드럽지만 엄청난 힘이 깃들어있는 옥여상의 팔 다리를 고검추가 뿌리칠 수는 없었다.

"장난이 지나치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옥여상의 몸에 올라탄 자세인 채로 퉁명하게 말했다.

"...!"

고검추의 말을 들은 옥여상의 봉목에 은은한 떨림이 일었다.

 

옥여상은 지금까지 냉혹하고 비정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철이 든 이래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윈 옥여상을 거둬준 스승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식이 없었던 스승은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 옥여상 외에도 여러 명의 소년과 소녀들을 제자로 받아들였었다. 옥여상같은 고아는 물론이고 자질이 뛰어난 아이는 납치해서라도 제자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끼리 경쟁을 시켰다. 수십 명의 제자들 중 오직 한 명만이 살아남아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이라 공언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스승이 평생을 걸쳐 세운 거대한 세력의 주인이 되기 위해 소년과 소녀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했다.

소년과 소녀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악귀 나찰이 되어 서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그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 옥여상이었다. 발군의 자질 뿐 아니라 냉철한 이성까지 갖춘 덕분이었다.

약속한 대로 스승은 옥여상을 후계자로 삼아 자신이 이룬 기업, 마천루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마천루의 루주가 되었다고 옥여상의 고단했던 삶이 편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시련과 고난은 마천루의 루주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마도 무림의 맹주라는 이름답게 마천루에 속한 인간들은 하나같이 거칠고 포악했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그런 자들을 통제하고 복종시키는 것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여상은 해내었다.

일 처리에 있어서 냉혹하고 가차 없으면서도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여 마천루 소속 마인들의 마음을 장악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심력의 소모로 머리가 백발이 되었지만...

여자의 몸으로 전 마도 무림을 호령하는 여종사가 된 것은 옥여상이 처음이었다.

마도 무림뿐 아니라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옥여상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그녀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러다가 고검추라는 이 어린 소년을 만나 처음으로 따뜻한 인간의 정을 느낀 것이다.

 

"정말... 나 때문에 놀랐느냐?"

옥여상은 확인하려는 듯 물으며 물기 어린 시선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물론입니다. 다시는 저를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고검추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옥여상의 눈 꼬리가 다시 미미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그녀의 망막이 뜨거운 물기로 덮였다.

"아아... 착한 것!"

옥여상은 치미는 감격을 참지 못하고 고검추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헉!)

고검추는 다시 옥여상의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얼굴에 짓눌려지는 부드러운 육질과 콧속으로 밀려드는 관능적인 살 냄새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아... 안돼!)

고검추는 추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옥여상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옥여상의 두 다리가 연체동물처럼 휘감고 있어서 옴쭉도 할 수 없었다.

(어려 보여도 충분히 사내 노릇을 할 수 있겠구나.)

아랫배에 느껴지는 어떤 용틀임에 옥여상의 옥용에는 노을 같은 홍조가 일었다.

(그렇다면 내가 주려는 선물을 무리없이 받을 수 있겠지.)

고검추의 상태를 확인한 옥여상은 어떤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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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독수리를 타고

 

 

이검한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그것은 오리 알만한 구슬이었다. 전체가 타는 듯 붉은 그 구슬에서는 은은한 주황빛 화기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내단(內丹)이다!”

이검한은 자기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 붉은 구슬은 다름 아닌 적린화룡의 내단이었던 것이다.

적린화룡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깊은 땅 속을 흐르는 용암의 기운을 흡수해 왔다.

그 용암의 화기가 응결된 것이 바로 내단이었다.

 

-화룡단정(火龍丹精)!

 

내단의 이름인데 만일 사내가 복용하면 십처백첩(十妻百妾)을 어렵지 않게 거느릴 수 있는 절륜무쌍의 양정(陽精)을 지니게 된다.

만일 무공을 연마한 자가 복용하면 몇 갑자의 내공과 함께 강력한 화염강살(火焰罡煞)을 얻을 수 있다.

“내단이라는 것이 정말 있었구나.”

이검한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적린화룡의 시체에서 화룡단정을 집어 들었다.

구우우! 화아악!

그 사이에 철익신응이 허공에서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이검한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그놈은 앉은키만 해도 무려 이장(二丈;6미터) 이상이나 되었다.

철익신응이 날아 내리자 이검한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이것은 네 것이었지...!”

이검한은 들고 있던 화룡단정을 철익신응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적린화룡을 죽인 것은 철익신응이니 화룡단정도 철익신응의 소유인 것이다.

꾸루룩!

하지만 철익신응은 낮게 울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걸 내게 양보하겠단 말이냐?”

철익신응의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이검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람에게 하듯 물었다.

구우우!

철익신응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울음소리를 토했다.

“고맙다 신응!”

철익신응의 그같은 모습에 이검한은 표정이 활짝 펴졌다.

(잘 되었다. 근래 할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 듯하신데 이 화룡단정을 드시면 다시 정정해지실 것이다!)

그는 화룡단정을 고독마야에게 갖다 줄 작정을 한 것이다.

사실 고독마야는 중환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십사 년 전, 그는 자칫 방심하다가 독천존 서래음이 살포한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당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형지독에 중독당한 이상 반나절 내에 온몸이 녹아 죽고 만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달랐다. 그는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덕분에 무형지독에 중독되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

고독마야는 무형지독의 독기를 내공의 힘으로 한곳의 혈도로 몰아넣은 상태였다.

그러나 무형지독이 워낙 독성이 지독한 극독인지라 그 독기가 조금씩 내장을 썩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고독마야는 매일매일 내장이 녹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한 번도 그 고통을 내색한 적이 없었다. 본래 고독한 성격의 고독마야인지라 어떤 경우든 남에게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검한은 그런 고독마야에게 화룡단정을 갖다 줄 작정을 한 것이다.

헌데 이검한이 기쁨에 들떠 있을 때였다.

구우우우!

철익신응이 낮게 울며 몸을 숙여서 이검한에게 등을 보였다.

“나를 태워주겠단 말이냐?”

철익신응의 예사롭지 않은 태도에 이검한은 흠칫하며 물었다.

그러자 철익신응은 낮게 울부짖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검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하하! 좋다! 나도 한 번쯤 곤륜산을 허공에서 관람했으면 했으니까!”

휘익!

이검한은 훌쩍 몸을 날려 철익신응의 등 위로 올라탔다. 워낙 거구인지라 철익신응의 등판은 어른 열 명이 족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직했다.

(목에 사슬을 걸고 있다!)

철익신응의 목덜미 쪽에 걸터앉던 이검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깃털에 묻혀 잘 안보였지만 철익신응의 목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둘러져 있음을 발견한 때문이다.

엄지손가락 굵기인 그 사슬은 길이가 넉넉해서 이검한 자신의 몸에 한 바퀴 두를 수 있을 정도였다.

(사슬을 두르고 있다는 건 이 영물이 전에도 누군가를 태우고 다녔었다는 건데...)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목에 걸려있는 황금 사슬을 자신의 몸에 한 바퀴 둘러 고정시키며 내심 놀랐다. 하늘의 지배자인 이 거대한 독수리에게 주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문이다.

구우우! 스윽!

이검한이 자기 목덜미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철익신응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기왕이면 해가 뜨는 쪽으로 가다오. 그쪽에 내 집이 있으니...!”

이검한은 고독애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철익신응의 등을 다독였다.

구워어억! 화아악!

철익신응은 웅혼한 울음을 토하며 거대한 날개를 퍼득였다.

쏴아아아!

직후 철익신응의 거대한 몸은 이검한을 등에 태운 채 선풍같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우와앗!"

이검한의 입에서 절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곤륜산의 웅장한 산봉들이 발 아래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몇 번 날개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철익신응은 이미 지상에서 수백 장 높이로 날아올라 있었다.

“이야아! 정말 장관이로구나!”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날개 아래쪽으로 휙휙 지나가는 곤륜산의 무수한 산봉우리들을 내려다보며 흥분하여 외쳤다.

그러다가 그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봐! 방향이 틀리잖아!”

그렇다. 지금 철익신응은 고독애가 있는 동쪽이 아니라 반대방향인 북서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쏴아아아!

이검한이 다급히 소리쳤으나 철익신응은 들은 척도 않고 북서쪽을 향해 질풍같이 날아갔다.

“야 임마! 안돼! 저녁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이모한테 혼난단 말이야!”

당황한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등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러나 철익신응은 방향을 틀기는커녕 점점 더 빨리 북쪽으로 날아갔다.

“뭐야? 너 지금 나 유괴하는 거냐?”

철컹!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목에 걸린 황금사슬을 잡아당기며 항의했다.

휘익! 휙!

그러거나 말거나 철익신응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북서쪽으로 꾸준히 날아갔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결국 이검한은 자포자기하여 벌렁 드러 누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서 수백 장 높이의 허공을 날고 있는 철익신응의 등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일이다.

부드러운 깃털로 덮인 철익신응의 등판은 아주 넓어 푹신한 침대같다. 게다가 몸을 쇠사슬로 한 바퀴 두른 상태라 안정감도 있었다.

“이모가 꽤나 걱정하겠는걸...!”

깍지 낀 두 손을 뒷덜미에 바친 채 철익신응의 넓은 등 위에서 드러누운 이검한은 흐르듯 뒤로 지나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검한은 더할 수 없이 안락한 기분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 * *

 

얼마나 잤을까?

쏴아아!

“어엇!”

이검한은 자신의 몸이 급격히 하강함을 느끼며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여, 여기는...!”

정신을 차리며 급히 몸을 일으키던 이검한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느 덧 시간은 흘러 황혼녘이 되었다. 철익신응이 날아가고 있는 주변 하늘은 온통 핏빛 노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피를 물에 풀어놓은 듯 온통 홍(紅) 일색으로 물든 하늘! 손으로 만지면 금방이라도 톡 터질 듯 가깝게 보이는 일몰 직전의 태양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붉은 비단휘장으로 뒤덮여 있는 듯한 저녁 하늘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검한은 그 화려한 장관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바다같이 막막한 일망무제의 사막(砂漠)뿐이었기 때문이다.

“서... 서역(西域)까지 왔구나!”

이검한의 입이 절로 쩍 벌어졌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던 것이다

 

-서역!

 

그렇다. 이곳은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사이에 자리한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 즉 서역인 것이다.

하토(鰕土)라고도 불리는 서역은 동서 일만 이천 여 리, 남북으로 육천여 리에 이르는 지상 최대의 분지다.

놀랍게도 철익신응은 곤륜산으로부터 서역까지 이검한을 태우고 날아온 것이다.

중원 사람들에게 옥문관 밖의 서역은 대부분의 땅이 모래로 뒤덮인 불모지대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역, 즉 탑리목분지의 곳곳에는 낙원같은 녹원(綠園;오아시스)과 사막의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가 지표로 용출하여 형성된 호수를 낀 비옥한 곡창지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그 때문에 고대이래로 서역 일대에는 수많은 군소 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해왔다.

특히 전한(前漢)시대 이래 서역은 머나먼 서쪽에 자리한 대진국(大秦國;고대 로마), 대식국(大食國;사라센제국)등과의 교역통로인 비단길로서 번영을 구가한 적도 있었다.

물론 서역의 곳곳에는 태고 이래로 인간의 발길을 거부해온 끔찍한 험지도 존재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유사지대(流砂地帶)와 맹독을 지닌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습지(濕地), 그리고 원시 아래로 인간의 손길을 거부해온 원시림 등등이 그곳이다.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곳!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환경이 집약된 곳이 바로 서역 탑리목분지인 것이다.

 

“반... 반나절도 안되어 서역까지 오다니...!”

이검한은 발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광활한 사막을 내려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독애가 자리한 곤륜산 남단에서 서역까지 오려면 적어도 이천여 리 이상을 주파해야만 한다.

헌데 철익신응이란 놈은 불과 반나절 만에 그 먼 거리를 날아온 것이다.

그와 함께 이검한의 가슴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냉약빙의 훈육 덕분에 고대사(古代史)에도 정통한 이검한의 뇌리로 비단길을 의지하여 흥망해간 전설적인 왕국들의 고사(古事)가 그림처럼 스쳐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모래폭풍에 휩쓸려 비극적인 종말을 고한 놉-노르, 즉 누란왕국(樓蘭王國)과 서역 역사상 최고의 미녀였다는 누란왕후(樓蘭王后)의 전설이다.

누란왕후-!

그녀는 그 뛰어난 미모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과 왕국을 잃었고 끝내는 여러 사내들의 품을 전전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그 외에도 서역 역사상 최강의 제국을 이루었던 서하(西夏)의 수도 흑수부(黑水府)의 애가(哀歌)와 북원(北元)의 후손으로써 여전히 중원정복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달단왕부(韃靼王府)의 전설이 주마등처럼 이검한의 뇌리로 스쳐갔다.

이국적인 전설과 몽환적인 신비를 품고 있는 서역 땅이 바로 지금 이검한의 눈 아래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헌데 이검한이 흥분에 몸을 떨 때였다.

구워어어억!

철익신응은 웅혼한 울음을 토하며 급격히 아래쪽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저것은...!”

이검한은 눈앞으로 확 다가오는 장대한 단층지대(斷層地帶)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치떴다.

갑자기 그의 앞쪽에 나타난 절벽은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얼마나 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지반의 남쪽이 어떤 이유로 침몰하여 이루어진 그 장대한 절벽의 모습은 마치 수많은 창(戈)을 꽃아 놓은 것같다.

“대, 대과벽(大戈壁)이다!”

이검한의 입에서 저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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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2)

 

 

대안탑은 총 칠층이다.

각층의 높이는 삼장(三丈;9미터)이나 되어 천장이 까마득히 높게 느껴진다.

임청우는 난간을 잡고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수십 번의 힘든 걸음이 위쪽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더 이상 계단이 없는 것을 느끼고서야 임청우는 자신이 이층으로 올라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다시 계단을 찾아 올라갔다.

눈이 어둠에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어딘가로 빛이 흘러들어오는 것인지 삼층에 이르자 희미하게나마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층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삼층에는 수많은 서가(書架)들이 열을 지어 서있었다.

임청우는 불경은 구경해본 적도 없는지라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어느 서가를 살펴보고 더듬어 보아도 단 한권의 책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던 불경들은 모두 어딘가로 옮겨지고 먼지 쌓인 서가들만 남아있는 것이었다.

더 구경할 것도 없었다.

임청우는 다시 사층으로 올라갔다.

사층이라고 해서 삼층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역시 텅 빈 서가들만이 근 백 여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휘유! 저 많은 서가에 불경이 가득 꽂혀 있었다면... 대체 몇 권이나 됐을까?”

임청우는 서가에 꽂혀있었을 불경들의 숫자를 생각하며 감탄했다.

하지만 대안탑에 자기가 볼 것이라고는 빈 서가들뿐인가 싶어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승려들이 불경 번역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사방 벽에 하나씩 나있는 창문은 모두 벽돌로 막혀있다.

아늑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마치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오층을 지나고 육층으로 올라올수록 점점 더 밝아졌고, 마지막 칠층에 올라섰을 때는 밖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밝기가 되었다.

천장을 올려다 본 임청우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안탑의 천장은 삼각형의 판자를 여러 장 엇갈리게 기대놓은 형태였다. 뾰족한 윗부분은 단단히 맞물려 있지만 아래쪽은 상당히 넓게 벌어져 있어서 사람 한명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천장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비와 눈은 들어올 수 없지만 바람과 빛은 그대로 통과한다.

위로 올라올수록 밝아진 이유는 바로 그같은 천장의 구조 때문이었다.

임청우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기진한 몸을 이끌고 칠층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다.

그 사이에 해는 졌고 대신 달이 떠올라 창백한 달빛이 지붕에 나있는 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한데 달빛 덕분에 자세히 볼 수 있는 칠층의 구조는 다른 층들과 달랐다.

서가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대신 네 좌의 불상이 동서남북 방향으로 놓여있으며 가운데에는 임청우의 키만큼 큰 청동으로 만들어진 향로(香爐)가 세 발로 버티고 서있었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불상은 석가여래불(釋迦如來佛)이었으며,

서쪽에 있는 것은 왼손을 든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고,

남쪽에 있는 것은 두 손을 가슴에 붙인 비로자나여래(毘盧蔗那如來)이며,

북쪽에 있는 것은 두 손을 나누어 들고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였다.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청동향로의 아랫부분에는 황동을 입혀서 만든 연화(蓮花)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로 말미암아 연꽃무늬는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다.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 대안탑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이 정도였다.

임청우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선선한 밤바람을 맞으며 투덜거렸다.

“하다못해 현장법사께서 쓰셨던 의자라도 구경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겨우 불상 넷과 향로 하나가 전부라니...”

실망하자 허기가 더욱 심하게 밀려왔다.

서있을 힘조차 없어진 임청우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바로 그때 천장에 난 틈으로 스며들어온 달빛이 비로자나여래의 이마를 비추었다.

그러자 비로자나여래의 백호(白毫:불상의 미간에 박혀있는 보석)가 빛을 발하며 향로의 한 부분을 비추었다.

헌데 백호를 통해 달빛이 반사된 향로 표면에는 물결이 일렁이듯 희미하게 글씨가 나타났다.

“어!”

임청우는 그 신비한 광경에 벌떡 일어섰다.

 

<관표(觀表)>

 

향로로 다가가 살펴보니 단 두자인 글씨는 이러했다.

“관표? 겉을 보다? 이게 무슨 뜻이지?”

임청우는 나직하게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마치 화두를 받은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면서 글씨는 사라져 버렸다.

(비로자나불의 백호에서 비친 빛이 글씨를 만들었다면 다른 불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임청우는 흥미가 일었다.

(다음번에는 달빛이 아미타여래를 비출 것이다. 그때 무슨 글씨가 나타나는지 봐야겠다. 아마 관표에 이어지는 글일 것이다.)

그는 기대에 차서 달이 움직여 아미타여래를 비추기만을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달빛이 마침내 아미타여래를 비추었다.

임청우는 침을 삼키며 청동향로를 응시했다.

달빛은 아미타여래의 백호에 반사되어 청동향로에 비춰졌다.

그리고 임청우의 짐작대로 두자의 글씨가 물결이 일렁이듯이 나타났다.

 

<망피(望皮)>

 

나타난 글자는 이러했다.

임청우는 먼저 나타났던 <관표>와 함께 읽어 보았다.

“관표망피(觀表望皮)? 겉을 보는 것은 껍질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지금까지 내가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을 지켜보고 적어놓은 듯한 글이로군.”

임청우는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순서상 달빛이 다음으로 비출 대상은 약사여래였다.

임청우는 끈기를 갖고 달빛이 약사여래를 비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삼경이 넘어가도 달빛은 약사여래를 비추지 않았다.

심지어 달빛은 약사여래뿐 아니라 석가여래도 비껴갔다.

“계절에 따라서 달이 움직이는 길도 조금씩 달라진다는데 지금은 약사여래와 석가여래에게 달빛이 닿지 않는 때인 모양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확인한 임청우는 실망했다.

지치고 낙담한 임청우는 청동향로의 세 다리 중 하나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더 이상 신경을 쓸 대상이 없어지자 허기가 극심하게 느껴졌다.

(관표망피... 관표망피...)

임청우는 허기를 잊을 목적으로 향로에 나타났던 글씨들에 정신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임청우의 머릿속으로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겉을 보는 것은 껍질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대구(對句)는 <속을 보는 것은 알맹이를 보는 것이다!>가 아니겠는가?)

임청우는 벌떡 일어났다.

(진짜 알맹이를 보려면 속을 보라는 뜻이다!)

임청우는 흥분하며 청동향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설마하니 보라는 속이 불상의 속은 아닐 테고... 이 향로의 속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노자(老子)도 좋은 책은 명산(名山)에 수장(收藏)한다고 했듯이 옛사람들은 책을 숨기기 좋아했다. 어쩌면 현장법사께서는 이 향로 속에 가장 귀중한 책을 숨겨놓았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자기의 짐작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없는 힘을 쥐어짜 자기 키만한 향로 위로 기어 올라갔다.

향로의 둥그런 배 부분의 직경은 여섯 자가 넘지만 입구는 상당히 좁아서 직경이 채 두자가 안된다.

향로 입구에 올라앉은 임청우는 속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둥근 항아리 형태인 향로 안쪽은 너무 어두워서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이렇게 큰 향로에 향불을 피우는 것은 거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임청우는 향로의 바닥을 살펴보기 위해 기웃거리며 생각했다.

이 향로는 너무 커서 향을 태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어둡고 깊은 향로 속은 마치 어머니 뱃속 같다.

위에서 들여다보아서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들어가서 살펴보자.)

향로 입구에 웅크리고 있던 임청우는 몸을 일으켰다.

향로가 깊긴 하지만 자기키보다는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휙!

임청우는 주저 없이 향로 속으로 뛰어 내렸다.

헌데 그는 향로의 입구가 상당히 좁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캉!

왼손에 들고 있던 우협 장백승의 청강검이 향로 주둥이에 가로로 걸려버렸다.

“억!”

뛰어내린 기세와 체중에 의해 홱 채여지면서 왼팔이 어깨로부터 쑥 빠져버렸다.

어깨와 팔꿈치가 시큰둥해지면서 힘이 하나도 없어졌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바보같이...!”

향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에게 화를 내며 오른손으로 왼팔을 주무를 때였다.

빡!

향로 주둥이에 걸려있던 청강검이 떨어지면서 임청우의 머리 꼭대기 백회혈(百會穴)을 강타했다.

백회혈은 인체의 급소중의 급소다.

또한 정강(精鋼)으로 만들어진 청강검의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악!”

백회혈에 불똥이 튀는 듯한 충격을 받은 임청우는 향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정신을 잃고 웅크린 그의 모습은 마치 어머니 배속에 든 태아와도 같아 보였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으으으! 정수리리가 뚫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임청우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엇갈린 구조의 지붕 틈 사이로 검은 하늘에 박혀있는 금싸라기 같은 별들이 보인다.

(아직 밤이로구나.)

임청우는 뜨뜨 미지근한 머리로 손을 가져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신을 잃었던 그 밤인지 아니면 하루나, 또는 그 이상을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들어 올리려던 왼팔이 시큰해지면서 하마터면 다시 졸도할 뻔 했다.

다쳤던 팔이 부어올라 소매가 팽팽해질 정도가 되어 있었다.

(큰일이다. 치료하지 않으면 팔을 잘라야 할지도 모르겠다.)

놀란 몸이 뜨거워지면서 열이 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때는 한 여름이다.

여름의 융성한 화기(火氣)는 열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이것은 겨울이 한기(寒氣)가 융성한 것과 마찬가지다.

혹자는 겨울이 추울수록 불이 자주 난다고 하는데 그것은 한기가 지나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려는 자연의 오묘한 법리라고 할 수 있다.

고열은 종종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열을 내리지 않으면 정신이 이상해져 버리거나 죽게 될 것이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농산의 깊은 산중에서 살아왔지만 어머니의 병 때문에 의서(醫書)도 여러 권 구해 읽었었다. 덕분에 의원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지간한 병증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다.

(침이라도 있으면 꽂아보련만...)

임청우는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들어갔다.

지금의 그에겐 흔한 쇠침 하나도 없었다.

열을 내릴 수단이나 방법이 전무한 것이다.

이 계절에 얼음을 구하는 것은 얼음 창고를 가지고 있는 황궁이나 고관대작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찬물로 몸을 식히기엔 가뭄이 너무 심하다. 마실 물도 구하기 어렵거늘 몸을 식힐 물이야 말해 무엇 하랴?

(큰일을 해보려고 했는데 겨우 향로 속에서 죽어 땅에 묻히지도 못하는 몸이 되는구나.)

임청우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누가 있어서 나 임청우가 세상에 존재했던 것을 알기나 할까?)

임청우는 한탄하면서 향로의 벽에 기댔다.

신열(身熱)이 머리까지 치밀어 올라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정신을 잃으면 안되는데...)

임청우는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불현 듯 머릿속으로 비련곡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임청우는 철선동시가 쇠 부채로 뿜어낸 한기를 뒤집어쓰고 하마터면 까무라칠 뻔 했었다.

하지만 북두무랑에서 본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리자 정신이 돌아왔었다.

(이번에도 그때 같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임청우는 멀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렸다.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고열 때문에 집중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청우는 점차 바닥도 없고 천장도 없으며 방향과 시간조차 없는 별의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멀리서 북두칠성이 그 국자같은 오묘한 형상을 뽐내고 있었다.

북극성 쪽으로 국자의 손잡이 끝을 향한 채 천천히 돌아가는 북두칠성을 보고 있자니 흐려졌던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흐릿하던 시야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비련곡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별의 바다를 한 차례 유영하자 정신이 맑아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정신은 회복되었지만 육신의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몸은 더 뜨거워져 불덩이 같고 어깨에서 빠진 왼쪽 팔에서는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통증 때문이 아니라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향로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태였다.

(내 인생도 여기까지로구나.)

임청우는 허탈해졌다.

어머니의 모진 학대와 살해위협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 깊은 향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다.

임청우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가능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죽음에 맞서 발버둥치기 보다는 조용하게 순응하고 싶었다.

“...?”

헌데 늘어뜨린 손바닥에 우둘투둘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그 감각은 마치 주물로 부어 놓은 활자(活字)를 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하면서 조금 더 더듬어 보았다.

만져지는 것은 정말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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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첫 번째 실전

 

 

 

이곳은 주점에서 오리 쯤 떨어진 숲속의 공터다.

“...”

진상파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숙인 채 공터 중앙에 서있었다.

진상파에게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는 섬전초가 앉아서 몸통 길이만한 탐스러운 꼬리를 앞발과 혀로 다듬고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여전히 도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진상파를 십여 명의 사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물론 그자들은 철위사대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와 그의 수하 철위사들이었다.

진상파는 주점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사우 일행에게 따라잡힌 것이다.

그녀에게 사우 일행을 안내한 놈은 한쪽에 앉아서 얄밉게 털을 고르고 있는 섬전초다.

무공 방면에서는 그다지 성취가 없는 진상파인지라 행적이 노출된 이상 섬전초와 사우 일행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진소저! 아무쪼록 우리가 무례를 범하지 않게 해주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셔오라는 명을 받은 터라 끝내 동행을 거부하시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소이다.”

사우가 포권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심기는 불편하지만 자신들의 안주인이 될 여자에게 무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돌아가세요.”

진상파가 옆으로 조금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세우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가서 당신들의 소성주에게 전하세요. 내가 왜 제왕성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날 밤 일신재에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진상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혐오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된 거였군.)

(소성주님이 내총관과 내연관계인 걸 알아버렸구나.)

사우와 그의 수하들은 진상파가 혼례식 전날에 갑자기 달아난 이유를 깨닫고 낭패한 심정이 되었다.

“죄송하지만 그 분부는 따를 수가 없소이다. 우리가 받은 명은 단 하나! 소저를 제왕성으로 모셔오라는 것뿐이었소이다.”

사우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

진상파는 미간을 조금 찡그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사냥개에 불과한 사우와 말을 섞어봐야 바뀌는 것은 없음을 아는 때문이다.

“더 시간 끌 거 없다. 진소저를 성으로 모시고 간다.”

사우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했다.

“예 대주님!”

“결례하겠소이다 진소저.”

그 즉시 두 명의 철위사가 좌우에서 진상파에게 다가섰다.

(여기까지인가?)

철위사들이 자신의 팔을 잡으려는 것을 보며 진상파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제왕성으로 끌려가면 모용준과 결혼할 수밖에 없다.

천박하고 음탕한 모용준과 부부가 될 경우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치욕을 당하는 것은 둘째 치고 황금성의 재산을 노린 탕부탕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진상파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같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바로 그때였다.

“그만들 하시오.”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음성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치떠졌다.

끼이...

탐스런 꼬리를 앞발로 다듬고 있던 섬전초도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그분 소저께서 귀하들과 함께 가는 걸 원하지 않고 있지 않소?”

공터로 들어서며 말하는 인물은 강유였다. 사우 일행의 뒤를 밟은 그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저놈은...”

“주점에서 대주님에게 죽을 뻔했던 애송이 아닌가?”

강유를 알아본 철위사들은 실소를 터트렸다.

다만 사우의 얼굴은 불쾌하게 찡그려 지고 있었다.

(저 사람이 또...)

숲에서 나와 공터로 들어서는 강유를 본 진상파는 반갑다기보다는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무공을 모르는 주점 주인을 혼내는 것과 사우 일행을 상대하는 것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진상파도 제왕성의 위사들이 얼마나 흉포하고 강한지 잘 알고 있다.

강유라는 이름의 청년은 의협심 때문에 자신을 도우려고 나섰겠지만 그 결과는 비극적일 것이다.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그것도 여럿이 아녀자 하나를 핍박하는 것은 무림인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오.”

공터 외곽에 멈춰선 강유는 사우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이거 참...”

사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 없는 네놈의 피를 본 부담도 있고 해서 좋은 말로 하마. 내일 해를 다시 보고 싶다면 모른 척 하고 갈 길 가라.”

사우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진상파의 마음은 복잡했다.

강유가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면서도 그가 변을 당하기 전에 알아서 물러갔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스릉!

진상파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강유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아버지 강조가 마련해준 그 검은 비록 보검은 아니지만 상당히 예리하다.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한다면 지금까지 애써 무공을 수련한 의미가 없소. 끝내 그 소저를 보내드리지 않겠다면 나부터 상대해야할 거요.”

“그 새끼 참 분위기 파악 못하네.”

강유의 진지한 말을 들은 사우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평소의 사우라면 당장 살수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제왕성의 안주인이 될 진상파가 보고 있는 자리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속하에게 맡겨주십시오 대주님! 능력도 안되면서 객기를 부리면 어찌 되는지 교훈을 내려주겠습니다.”

사우가 난감해할 때 철위사중 한명이 칼을 뽑으며 나섰다. 장흔(張欣)이라는 이름의 그자는 사우가 대동한 철위사들 중 가장 연장자다.

“교훈만 내려주고 죽이지는 마라. 진소저가 보는 앞이니...”

사우는 장흔에게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대주님 말씀 들었지? 네놈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팔 다리 하나쯤 날아가겠지만 죽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사우의 허락을 받은 장흔은 칼끝을 이리저리 돌려서 강유를 희롱하며 다가섰다.

“같은 말을 귀하에게 해드리겠소.”

강유는 냉소하며 마주 다가갔다.

“나 역시 저분 소저가 보는 앞이라 귀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물론 피를 보긴 하겠지만...”

“이 새끼가...”

강유의 비아냥을 들은 장흔의 얼굴이 분노로 이지러졌다.

“알아서 매를 버는구나.”

부악! 쩍!

다음 순간 장흔은 강유를 향해 빗발치듯 칼질을 했다.

칼을 쓰는 속도는 전광석화같고 노리는 부위는 하나같이 치명적이다.

장흔이 구사하는 이 도법은 허초(虛招)와 실초(實招)가 뒤섞여있기도 해서 상대하기가 실로 까다롭다.

비록 제왕성 사대무력집단의 최하위 집단에 속해있긴 하지만 철위사 개개인이 일류고수라는 무림의 평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스슥!

하지만 강유는 산보하듯 걸어서 장흔의 칼질을 피해내었다. 소요신군을 칠절의 첫째로 만들어준 소요보법이 펼쳐진 것이다.

(저 보법!)

한가로운 듯이 보이지만 장흔의 공격을 바람처럼 물처럼 흘려보내고 있는 강유의 보법을 보며 사우의 눈이 번뜩였다.

철위사대의 대주답게 사우는 무림에서 사대보법중 하나로 불리는 소요보법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크아!”

치칫! 쉬학!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악에 바친 장흔의 공격이 더 빠르고 신랄해졌다.

(명불허전... 제왕성 위사들중 최하등급인 철위사임에도 타복에 필적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

장흔의 격렬해진 공격을 피하면서 강유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찌익! 서걱!

빨라진 그자의 칼끝이 스치면서 강유의 옷이 여기저기 베어지고 있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지 보자!”

칼끝이 강유의 몸에 닿기 시작하자 장흔은 기세가 올라 더욱 사납게 칼질을 했다.

(소요보법으로도 피하는 게 한계가 있다.)

캉!

어쩔 수 없이 강유는 검을 휘둘러 장흔의 칼질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왔어야지!”

장흔이 살벌하게 웃으면서 빗발치듯 칼질을 했다.

쩍!

강유는 장흔의 칼질 안쪽으로 성큼 들어서며 빠르게 검을 찔렀다. 그런 강유의 뒤로 독수리가 날개 짓을 하는 듯한 형상이 떠올랐다.

(붕정검법까지...!)

강유가 구사하는 검법을 알아본 사우가 눈을 부릅뜰 때였다.

카캉! 빠카앙!

찌르는 강유의 검과 그어대는 장흔의 칼질이 엇갈리며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큭!”

장흔은 왼쪽 어깨에서 피를 뿜어내며 휘청거렸다. 강유가 찌른 검이 그자의 어깨를 관통한 것이다.

스팟!

일격을 성공한 강유는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리며 가슴 부위를 내려다보았다. 옷이 한 뼘 쯤 갈라져 있으며 피부에도 깊진 않지만 상처가 나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

“아니다. 장형쪽의 상처가 비교할 수 없이 깊다.”

관전하고 있던 철위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한 눈에 봐도 승패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강유는 옅은 자상을 입은 반면 장흔은 어깨가 앞뒤로 관통당하는 상처를 입어 삽시에 상체가 피로 물들고 있었다.

(철위사를 상대해서 이겼네.)

강유도 상처를 입긴 했지만 대단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이 새끼...”

장흔은 관통상을 입은 왼쪽 팔을 축 늘어뜨리며 강유를 노려보았다.

그자는 수치심과 분노로 치를 떨면서도 왼쪽 어깨의 상처가 가볍지 않아서 경거망동하지는 못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이번에는 내가 상대해주겠다.”

창!

또 한명의 철위사가 이를 갈며 칼을 뽑았다.

“그만 둬라.”

그자가 강유를 공격하려는데 사우가 저지했다.

“대주님! 하지만...”

“최윤, 네가 나서봤자 결과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몇 명이 협공 하지 않는 한 쓸데없이 피만 볼 뿐이니 물러서도록 하라.”

“예...”

사우가 나서자 최윤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철위사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물러섰다.

“네놈, 소요신군 강조와 무슨 관계냐?”

사우는 수하들 대신 강유와 마주 서며 물었다.

“무슨 소리요?”

강유는 내심 움찔하며 부인하려고 했다. 자신의 정체가 밝혀져 봐야 좋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발뺌해봤자 소용없다. 방금 전 네놈이 사용한 무공이 소요신군의 절기인 소요보법과 붕정검법이라는 걸 알아봤으니...”

사우는 음산하게 웃으며 강유는 노려보았다.

“소요보법과 붕정검법!”

“그건 칠절의 첫째인 소요신군 강조의 독문절기 아닌가?”

다른 철위사들도 비로소 장흔이 패한 이유를 깨닫고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일이 커져버렸다. 자칫하다가는 우리 집안이 제왕성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강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기왕에 정체가 들통 난 마당에 발뺌을 할 수도 없다.

“과연 제왕성 철위사대 대주의 안목은 비범하구려. 짐작하시는 대로 소요신군이란 분은 본인의 가친이시오.”

“소요신군의 아들!”

“어쩐지 평범하지 않다 했더니...”

강유의 시인에 철위사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상대가 칠절중 한명의 아들이라면 경솔하게 상대할 수는 없다.

“...”

강유의 정체를 안 진상파의 눈에도 이채가 반짝였다.

“소요신군 강조가 제법 빼어난 아들을 두었군.”

사우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아비의 얼굴을 봐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도록 하마.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물러난다면 네놈이 오늘 우리 제왕성에 죄를 지은 일은 없도록 하겠다.”

“유감스럽게도 대주의 호의는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사우의 말에 강유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이...”

“냉혈철심이라는 별호를 지니신 대주님께서 파격적으로 호의를 베풀고 계시거늘...”

철위사들은 분노하여 강유를 노려보았다.

사우도 불쾌한 표정으로 이마를 찡그렸다.

“만일 저분 소저와 함께라면 떠날 수도 있겠소이다만...”

강유는 진상파를 돌아보며 말했다.

“흐흐흐! 좋다 좋아. 네놈이 본좌로 하여금 소요신군과 원수지간이 되게 만드는구나.”

스릉!

사우가 음산하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하지만 철위사대 대주가 되어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을 핍박했다는 뒷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먼저 십초를 공격할 기회를 주겠다. 물론 본좌는 오직 방어만 할 것이고...”

치직!

사우가 검을 한 바퀴 휘두르자 그자를 중심으로 직경 다섯 자 쯤의 원이 그려졌다.

(검기(劍氣)...)

강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사우의 검에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뻗어 나와 바닥에 원을 그린 것을 알아본 때문이다.

검기라 불리는 그 기운은 직접 닿지 않아도 표적을 살상하는 힘을 지녔다.

당연히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검법이 검기를 구사할 수 있는 정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냉혈철심 사우가 그중 한명인 것이다.

강유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십초 안에 본좌로 하여금 이 원 밖으로 밀려나게 만들거나 네놈의 검이 옷자락에라도 닿으면 진소저를 데리고 떠나도 좋다.”

검기로 바닥에 원을 그린 사우가 비웃는 표정으로 강유를 보았다.

강유는 사우가 자신은 얕보고 있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자존심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우는 자신의 아버지 소요신군에 필적하는 고수다.

“지금 그 말 잊지 마시오.”

슈학!

강유는 일갈과 함께 벼락같이 검을 찔러갔다. 그의 이 일초는 아주 빠르고 강력해서 철위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제일초!”

캉!

철위사들의 걱정과 달리 사우는 강유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냈다.

캉! 카캉!

강유가 붕정검법으로 맹렬히 공격을 이어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우는 강유의 일방적인 공격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냉혈철심이라는 자신의 별호가 그저 모질고 독한 성격 때문에 붙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목숨이 오가는 대결에서도 그의 평정심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반응은 전광석화 같았다.

강유가 어떤 식으로 공격해도 사우는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반응했다.

사우가 철위사대의 대주가 된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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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연못에서 건진 검(劍)

 

 

"그만 갑시다. 내일 또 찾아보기로 하고..."

어느 정도 땀이 식자 백남빈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녹지 옆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계곡이 넓지 않아서 동쪽 끝에서 천천히 걸어도 서쪽 끝까지 오는데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물그릇으로 사용하는 백남빈의 신발이 석탁 위에 놓여져 세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미루가 손가락을 검으로 살짝 베어서 피를 몇 방울 신발 속으로 떨어 뜨렸다.

그러자 신발속의 녹색물이 순식간에 유백색(乳白色)으로 변하며 짙은 향기를 내기 시작했다.

"드세요."

살짝 교태가 배어 있는 강미루의 음성은 듣기가 좋았다.

백남빈이 신발을 받으며 농을 걸었다.

"말솜씨가 많이 늘었군. 이대로 잘 배우고 연습하면 틀림없이 사랑받는 아내가 되겠어."

"부끄럽게 하지 마셔요. 누가 절... 음... 절 아내로..."

칭찬은 들었지만 그 다음 말은 너무 부끄러워 이을 수가 없었다.

“미워요.”

민망해진 강미루는 눈을 흘기며 백남빈의 손등을 꼬집었다.

백남빈이 큰소리로 글을 읽듯이 말했다.

"내가 멍청하다고 마음대로 꼬집는 거요?"

강미루가 그제야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생각해 내고는 백남빈에게 말했다.

"오늘은 나무그릇이라도 하나 깎아야겠어요."

"신발로 물을 마시자니 내 발 냄새가 나서?"

"아니라구요!"

백남빈이 들었던 신발을 놓으며 강미루에게 묻자 그녀는 백남빈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강미루와 백남빈이 나누는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적당한 애정행위를 동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창평곡에 갇히고 사흘째 되던 날 녹지의 신비를 일부나마 풀어 식수문제를 해결했다.

녹지의 물은 침에 닿으면 독이 되고 피에 닿으면 아주 향기로운 물이 되었다.

어떤 작용인지는 몰라도 우유빛으로 변한 물을 마신 후 두 사람은 자신들의 내외공이 함께 증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과 사흘 정도 마셨을 뿐인데 두 사람의 내공은 이미 전보다 배 이상 증진되어 있었다.

 

"잘 봐요. 내가 마술을 보여줄 테니..."

백남빈이 강미루를 보면서 말했다.

푸스스!

계란만한 돌을 손에 쥔 백남빈이 가볍게 힘을 주자 돌은 소리없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돌을 부수는 것은 웬만한 공력을 소유한 자라면 다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백남빈처럼 새알을 쥐듯이 부드럽게 잡아서 소리도 없이 가루로 만드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강미루도 배시시 웃으면서 역시 계란만한 돌 두 개를 손바닥에 올리더니 양손 손바닥으로 슬슬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가루가 팥고물처럼 떨어지고 강미루의 손바닥에는 이내 콩알같이 작고 매끄럽게 변한 돌멩이 두개만 남게 되었다.

강미루가"훅" 하고 입김을 불자 그 작은 돌들은 휙 하니 날아가서 녹지에 퐁당 빠져 버렸다.

그걸 본 백남빈이 손뼉을 쳐서 찬사를 보낸 후 말했다.

"이 녹지에는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으니 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봐야겠소."

 

풍덩!

백남빈은 짧은 속바지만 입고 뜨거운 녹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녹지의 물은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웠다.

게다가 아주 짙어서 한치 앞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백남빈은 조금씩 헤엄쳐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을 향해 내려갈수록 물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데 밖에서 강미루가 뭐라 외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금방 나오지 않자 불안해졌다.

"조심하셔요!"

큰소리로 외쳤지만 그녀의 조바심은 더욱 심해졌다.

"저도 들어가겠어요"

결국 그녀도 풍덩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잠수하던 백남빈은 강미루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소리가 난 쪽으로 헤엄쳐 올라가 자신을 따라 들어온 강미루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푸우!”

“하아!”

백남빈과 강미루는 손을 마주잡고 수면위로 올라와 숨을 들이쉬었다.

녹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서로의 머리에서 물을 털어 주었다.

"녹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것같소. 그 외에 딱히 위험은 없는 것 같으니 당신은 걱정말고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내 금방 들어갔다 나올 테니..."

숨을 고른 후 강미루를 안심시킨 백남빈은 다시 녹지로 들어가려고 일어섰다.

"부디 조심하셔야 해요!"

강미루는 그런 백남빈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아내같이 백남빈을 염려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백남빈은 백근 정도 되는 바위를 안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바위의 무게로 인해서 그의 몸은 처음보다 비교도 안되게 빨리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정말 깊고 뜨거운 곳이구나. 내 피부가 영약으로 변한 녹지의 물을 마시고 강인해지지 않았더라면 이미 종이처럼 녹아버렸을 것이다.)

백남빈은 엄청난 수압에 귀가 멍멍해졌다.

두 눈은 뜨거운 온천수에 의해 눈알이 익어버릴 것 같아서 질끈 감고 있었다.

(제법 큰 바위를 안았는데도 부력이 이토록 세니 바위만 놓으면 그대로 물위로 솟구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발에 무언가가 닿았다.

녹지의 바닥이었다.

(어떻게 연못의 바닥이 이렇게 매끄럽고 평평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어쩌면 서쪽 절벽에 창평곡이라고 새겨놓은 사람이 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절세적인 능력을 지닌 기인이 이 창평곡에 살았었다는 사실이다.)

천근추(千斤鎚)의 신법으로 몸을 무겁게 만든 백남빈은 바위를 안은 채 발로 더듬더듬 바닥을 밟으며 돌았다.

매끈한 바닥은 결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서쪽 절벽에 새겨진 창평곡이란 글 이외에 처음 만나는 인간의 흔적이다.

그 사이에 숨이 턱까지 찼다.

하지만 다시 내려오는 수고를 하긴 싫어서 꾹 참고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보려고 했다.

깊은 물속에서는 바위도 아주 가벼워서 마치 솜덩이 같이 느껴졌다.

그 때문에 백남빈의 몸도 한걸음 한걸음에 수초처럼 일렁거리며 나아갔다.

잠시 조사해 본 백남빈은 녹지가 마치 우물같은 형태임을 확인했다. 연못가에서 중심부를 향해 몇 장 들어간 쪽부터 거의 직각의 벽을 이루며 바닥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람의 손길이 닿아 만들어진 구조다.

하지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이었다.

직경이 수십 장에 이르는 거대한 우물 형태를 어떤 인간이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엄청난 수압과 뜨거운 열기를 견디면서...

그런데 그때까지 반반하던 바닥에 뭔가 뭉툭한 것이 백남빈의 발에 밟혔다.

몸을 숙여 손으로 쓰다듬어본 백남빈은 그것이 무엇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검(劍)! 장검이로구나.)

백남빈의 발에 밟힌 것은 검집에 들어있는 한 자루의 길쭉한 장검이었다.

백남빈은 그때까지 안고 있던 바위를 놓고 대신 장검을 쥔 채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화악!

뜨거운 물이 귓가로 스쳐지나가며 화끈거렸다.

 

“푸학!”

삽시에 수면으로 올라온 백남빈은 탁한 숨을 내뱉으며 연못가로 헤엄쳐갔다.

"괜찮아요?"

녹지 밖에서 가슴 조리고 있던 강미루가 뛰어와 백남빈이 내미는 장검을 받았다.

후딱 물 밖으로 뛰쳐나온 백남빈의 피부는 발갛게 익어 있었다.

"이 연못은 확실히 이상하오! 바닥에 편편한 돌을 깔아 놓은 게 사람이 일부러 그래놓은 것 같소."

백남빈이 머리를 흔들어 귓속의 물을 빼며 말했다.

"이제부터 여기 살았던 전대기인의 흔적을 찾아 봐야 할 것 같소."

"그럼 심심하지 않아서 좋겠네요"

강미루가 즐거운 듯이 맞장구 쳤다.

"물속에 이 검만 있던가요? 혹시 창은 없었어요?"

강미루는 백남빈에게서 받아든 검을 살펴보며 말했다. 별호가 홍의창인 만큼 그녀의 무기는 창이었다.

"욕심 많은 아가씨로구만. 창 같은 건 없었어."

“욕심쟁이라 미안하네요.”

백남빈의 우스개소리에 강미루가 샐쭉 토라져버렸다.

"내가 다음에 좋은 창을 하나 구해주겠소."

미안해진 백남빈은 강미루를 달랬다.

"그런데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새침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강미루는 검을 백남빈의 손에 들려주었다.

토라진 척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작은 말에도 감동을 받는 법이다.

 

백남빈의 손에 들린 검의 청동색 검집에는 <사자(獅子)>라는 검명(劍名)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 검명은 지금은 쓰지 않는 상고시대의 고전체(古篆體)여서 처음에는 장식을 위한 문양인 줄 알았다.

“당신 별호에 잘 어울리는 검이네요.”

백남빈과 함께 살펴보다가 사자라는 검명을 판독해낸 강미루의 눈이 반짝거렸다.

별호가 검사자(劍獅子)인 백남빈이 연못 바닥에서 건져 올린 검의 이름이 사자검(獅子劍)이라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진 것이다.

"재질이 청동은 아닌 것같은 데... 무슨 쇠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묵직할까?"

백남빈도 사자검을 두 손으로 든 채 살펴보며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사자검은 보통의 검보다 폭과 두께가 한 배 반쯤 된다.

하지만 무게는 같은 크기의 검보다 서너 배 이상 나가서 아주 묵직하다.

스르르릉!

검병(劍柄;검의 손잡이)을 잡아서 비틀어 당기자 역시 짙은 녹색인 검신(劍身)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왔다.

비록 번쩍이지는 않지만 녹옥(綠玉)같은 은은한 빛이 감도는 게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사자검의 녹색 검신을 본 백남빈과 강미루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로 보검이구나.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런 검이 있다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자검의 검신은 날이 서있지도 않고 예기를 흘리지도 않으며 맑고 담백하다.

검이라는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것이지만 사자검은 누가 봐도 보물이라 할 만했다.

검신과 검병은 하나로 돼 있었고 검집은 청동으로 만든 것 같았다.

무겁긴 하지만 손에 꼭 들어오는 것이 마치 원래부터 백남빈 자신의 소유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보검을 얻게 된 백남빈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보검이 손에 드니 절로 춤이 나오는구나. 백만 오랑캐도 두렵지 않고 십만 악마도 두렵지 않도다. 검이 이르는 곳에 악도의 피가 튀고 웃음이 이르는 곳에 만마가 도망치는도다."

백남빈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사자검을 내키는 대로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찌르고 하였다.

강미루도 덩달아 기뻐하며 손뼉을 치면서 그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천도(天道)를 이 사자의 검으로 밝히리라!”

백남빈은 사자검을 쭉 뻗어 하늘을 가르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순간 사자검에서 긴 무지개같은 기운이 허공으로 뻗혀나갔지만 흐릿하고 또 순간적인 일이라 백남빈은 물론이고 강미루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하하...!"

자신이 사자검으로 상서로운 기운을 하늘 높이 뻗어가게 한 것을 알 리 없는 백남빈의 낭낭한 웃음소리가 오랫동안 창평곡을 맴돌았다.

 

***

 

(검기(劍氣)...)

신가람은 눈을 빛내며 멀리를 바라보았다.

신가람은 미혼진에 이어 산백진을 뚫고 들어가며 진땀을 빼던 중 잠시 숨을 돌리려 하늘을 보았었다.

그런 신가람의 눈에 멀리 앞쪽 몇 개인가의 산봉우리 너머에서 긴 무지개같은 기운이 허공으로 치솟는 것이 들어왔다.

찰라지간 나타났다가 사라지긴 했지만 신가람은 그 기운이 검기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신가람 자신이 평생 검법을 수련해왔기에 그 검기를 발견하는 게 가능했다.

(저곳에서 방금 전 신검(神劍)이 세상에 나왔다.)

신가람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검법을 수련하는 자가 오매불망하는 것은 훌륭한 검을 얻는 것이다.

상서로운 검기로 하늘을 찌른 신검이 출현했다는 것은 신가람을 흥분시키면서 동시에 걱정하게 만들었다.

신검을 얻은 자와 말괄량이 처제가 연관되어 있는 것같은 예감이 든 때문이다.

(장인 어른께 면목이 서려면 한시라도 서둘러야겠구나.)

신가람은 다시 사방에서 달려드는 이매망량의 환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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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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