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제 8장

 

            내 아들이 아니다!

 

 

"으음!"

이윽고 신음소리와 함께 당혜선이 힘겹게 눈을 떴다.

"어머니...!"

고검추는 안도하며 당혜선의 무참한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죽지 않았다니...)

당혜선은 고검추의 품에 안긴 채 망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살아있는 게 믿기지 않는 그녀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방금 전 자신에게 벌어졌던 끔찍한 만행을 떠올리며 바르르 떨었다.

주르르!

당혜선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배어 눈 꼬리를 타고 좌우로 흘러내렸다.

"흐윽... 추아야."

당혜선은 오열하며 고검추의 품에 안겼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고검추도 분노와 회한에 오열을 느끼며 당혜선을 끌어안았다.

아들이 되어서 어머니가 무참한 만행을 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고검추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두 모자의 뜨거운 오열은 어두워지는 청룡탄 위를 서럽게 물들였다.

 

***

 

“역시 생각한 대로다!”

사신각주의 눈이 흥분으로 희번덕거렸다.

그자는 만행이 벌어졌던 단애가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 서있었다. 거리는 대략 삼리 정도다.

“아랫놈들이 수집해온 첩보에 의하면 당가년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놈의 성이 고씨인 걸 보면 철사자 고창룡의 아들인 게 분명하다. 당가년이 사람들 눈을 피해 고창룡과 붙어먹었다가 생긴 놈일 테고...”

사신각주는 삼리 쯤 떨어진 단애 위를 노려보며 흥분에 휩싸였다.

밤이고 제법 거리가 멀지만 사신각주의 눈에는 고검추와 당혜선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고창룡의 아들까지 낳았다면 당가년이 복마신검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흐흐흐!”

사신각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가년이 아무리 독해도 복마신검을 아들의 목숨과 바꾸진 못할 것이다!”

사신각주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자는 당혜선이 아들을 데리고 선녀곡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당혜선의 아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혜선을 고문한 후 초혼전으로 죽인 척 하고 현장을 떠났었다.

당혜선이 죽어가는 걸 보면 숨어있던 당혜선의 아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신각주의 예상대로 마침내 고검추가 숨어있던 은밀한 동굴을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고검추를 잡아서 협박하면 독하기 이를 데 없던 당혜선도 어쩔 수 없이 복마신검의 행방을 실토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사신검 중 하나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구나.”

사신각주는 득의하며 단애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삐익!

멀리서 새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 사신각주의 몸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삐익! 삑!

새가 우는 것같은 소리는 이곳저곳에서 연이어 들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영락없이 새 울음소리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신각주의 귀에는 새가 우는 것같은 그 소리들에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들렸다.

“대늙은이가 서남쪽에서 급속 접근중... 일백을 셀 정도의 시간 안에 내가 있는 이곳까지 도착할 예정...”

새가 우는 것같은 소리들을 해석하며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갈았다.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진 때문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 가공할 인물이 급속 접근중이다.

어물쩍거리다가는 그 인물의 눈에 포착되어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당연히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를 생포할 시간 따위는 없다.

“똥물에 빠져 죽을 늙은이...”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부득 갈며 서남쪽을 돌아보았다.

삐익! 삑!

새 우는 것같은 피리소리들이 점점 더 급박해지고 멀리고 허떤 인물이 한 가닥 유성처럼 날아오는 게 보인다.

“대늙은이! 오늘 진 빚은 반드시 갚고 말겠다!”

팟!

사신각주는 저주를 내뱉으며 날아올랐다.

사신검 중 하나를 손에 넣기 직전이었지만 목숨이 더 중요하니 포기해야만 한다.

속이 너무도 쓰리고 쓰린 사신각주였다.

곧 사신각주의 모습은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

 

단애 위에서는 한 차례 격정의 물결이 지나갔다.

"지금부터 어미가 하는 말을 명심해 듣거라."

알몸에 대충 옷가지를 걸친 당혜선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고검추는 무릎을 꿇고 당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나는 사실...”

당혜선은 내적인 갈등이 심한 듯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당혜선은 본론을 꺼냈는데 그것을 듣는 순간 고검추는 하마터면 기함(氣陷)할 뻔했다.

"나는... 사실 너를 낳은 생모(生母)가 아니다."

당혜선의 말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무슨... 지금 무슨 말씀을..."

고검추는 숨이 막혀 꺽꺽거렸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귀가 멍멍해지고 주변 사물이 제멋대로 이지러지는 듯했다.

이제껏 유일한 피붙이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당혜선이 자신의 생모가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당혜선은 혼란이 극에 달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고검추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내게는 인중지룡인 사형이 한 분 계셨다. 너는 바로 그 분의 아들이다."

"어... 어머니의 사형 되시는 분이 제 아버지란 말씀입니까?"

고검추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헉헉 대며 물었다.

당혜선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분의 성함은 고창룡... 무림인들은 그 분에게 철사자라는 별호를 지어 주셨다. 그만큼 의지견정하고 용맹한 분이셨지."

"고... 고창룡이라고 하셨습니까?"

고검추는 온몸을 떨며 되물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당혜선은 흠칫했다.

"어... 어디서 그 분의 성함을 들은 적이 있느냐?"

"저녁 무렵에 옥여상이란 분을 만났었습니다."

고검추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옥여상!"

당혜선의 안색이 일변하고 두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만큼 옥여상이란 이름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 분을 아십니까?"

당혜선이 놀라는 모습을 본 고검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이다. 무림인 된 자 치고 희세의 마녀 은발마희(銀髮魔姬) 옥여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혜선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옥부인이 그 정도로 대단한 분이었습니까?"

놀라는 고검추에게 당혜선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설명해주었다.

"옥여상은 당금 무림의 최강자들인 우내팔강(宇內八强)의 일인이며 마도 무림의 맹주격인 마천루(魔天樓)라는 문파의 지존이기도 하다."

"아!"

고검추는 자기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옥여상이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림에서 가장 강한 여덟 사람에 들며 또 거칠고 사나운 마도 무림을 다스리는 마천루라는 문파의 주인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실제로 은발마희 옥여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림인들은 사색이 된다.

그녀는 냉혹 비정한 성정을 지녀서 눈에 거스르는 자는 가차 없이 죽이는 것으로 악명을 떨쳐왔다.

나이는 비록 삼십대이지만 그녀와 겨룰 수 있는 고수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다섯 명이 채 안된다.

(내게는 더할 수 없이 다정하게 대하신 분인데... 사실은 마녀같은 존재였구나.)

고검추는 인간 세상의 존재같지 않았던 옥여상의 모습을 떠올리며 등줄기로 찌릿한 전율이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옥여상에게 은발의 마희라는 별호가 붙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혜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인 옥여상이 왜 고검추 자신에게는 그토록 다정하게 대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고검추였다.

"그 마녀가 네 아버지에 대해 무어라 말하더냐?"

당혜선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검추에게 물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소자에게 고창룡이란 분을 아느냐고 묻기만 하셨습니다."

"으음..."

고검추의 대답을 들은 당혜선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검추는 당혜선의 마음 속에서 격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당혜선은 결심한 듯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어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낙망해서는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검추는 고개를 숙였다.

생모로 믿어온 당혜선이 졸지에 아버지의 사매, 즉 사고(師姑)로 변한 마당에 더 놀랄 것도 없었다.

"네게는 아버지시고 어미에게는 사형되시는 그 분은 아주 악독한 음모에 희생당해 돌아가셨다."

당혜선은 처연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철사자 고창룡에 연루된 그 치욕스런 비사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고창룡이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사모인 다정관음 능벽운을 능욕한 일, 그 직후에 죄책감을 느껴 자결한 일등을...

 

-날수비연(辣手霜娥)

 

이것이 당혜선의 별호다.

사천당문(四川唐門) 출신인 그녀도 호천무맹의 맹주 십자검존의 제자였다.

호천무맹에서 사천당문이 맡은 역할은 매우 크다. 독과 암기와 관련된 모든 사안은 사천당문이 처리하기 때문이다.

십자검존은 사천당문이 호천무맹에 헌신한 보답으로 당씨일족의 여식인 당혜선을 제자로 삼아준 것이다.

당혜선과 고창룡 외에도 십자검존에게는 두 명의 제자가 더 있었다.

그 중 막내가 당혜선이 고검추로 하여금 찾아가라고 했던 철봉황 고현경이란 여인이다.

당혜선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대사형인 고창룡과 함께 생활했다.

자연스럽게 당혜선은 고창룡에게 연심(戀心)을 품게 되었다.

잘 생겼고 다정다감하며 수백 년 만에 나타난 기재라는 평가를 받는 고창룡이었다.

그런 그를 지척에서 보고 자랐으면서 반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당혜선에게는 불운하게도 고창룡은 그녀를 그저 귀여운 누이동생 정도로 여겼다.

그 때문에 당혜선은 혼자 가슴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애정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대사형 고창룡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대려군(代麗君)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여인은 신분과 출신내력 모두가 비밀에 싸여 있었다.

분명한 것은 대려군이 대단한 미모와 무공을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고창룡과 대려군은 우연히 마주쳤으며 만나는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 사실을 안 당혜선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찢어지는 듯한 속내를 감추고 사형 부부의 결합을 축하해 주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고창룡과 대려군은 인간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비록 연인을 빼앗아간 연적이긴 해도 대려군의 고고한 기품과 다정한 마음씨에 반한 당혜선은 그녀를 친언니같이 여겼다.

호천무맹의 사람들 몰래 고창룡과 대려군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당혜선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혜선 자신도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함께 기거했다. 언젠가는 사형이 자신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벋어 줄 것을 기대하고...

세 남녀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윽고 대려군은 고창룡과의 사랑의 결실을 잉태하였다.

비극이 벌어진 것은 대려군이 임신한 지 팔 개월 째 되던 때였다.

고창룡이 갑자기 미쳐서 언어도단의 패륜을 자행한 후 자결한 것이다.

그 일은 당혜선에게는 물론 대려군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남편이 저지른 짐승만도 못한 난륜을 전해들은 대려군은 극도의 상심에 빠졌으며 그 충격으로 두 달 빨리 사내아이를 분만했다.

그 사내아이는 물론 고검추였다.

 

<세상 모든 사내를 저주하겠다!>

 

대려군은 출산한 직후 그같은 저주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핏덩이인 아들까지 내팽개친 채...

당혜선은 어쩔 수 없이 고아가 된 고검추를 기르게 되었다.

그리고 고검추가 대사형 고창룡의 아들임이 알려지면 해를 입을까 두려워 몰래 호천무맹을 떠나났던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6장

 

             장춘곡의 남녀

 

 

초가집 내부는 단촐하고 검박(儉朴)했다.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나무로 깎아 만든 소박한 가구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다.

방 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큼직한 탁자가 놓여 있는데 그 탁자 앞에는 특이한 외모를 지닌 여인이 앉아 있다.

먼저 여인의 체격이 확 눈에 뛴다.

그녀는 무려 칠척이나 되는 거구를 지녀서 의자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은키가 보통 사람의 선 키 만하다.

팔 하나가 어지간한 장정의 허벅지같이 우람하고 청동으로 빚은 듯 강인한 인상을 풍겨 마치 전쟁의 여신이 강림한 듯하다.

그러면서도 여인은 결코 우락부락하거나 추하지가 않다. 비록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긴 하지만 단정한 선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 얼굴은 경국지색이란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어마어마하게 큰 체구 역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넉넉한 저고리에 감싸인 젖가슴은 숨이 막힐 정도로 크지만 허리는 확실히 들어갔고 비록 엄청나게 굵기는 해도 두 다리 역시 늘씬하여 절로 시선을 잡아끈다.

이런 특이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은 하늘 아래 단 한 명뿐일 것이다.

 

-전모 냉약빙!

 

바로 그녀였다.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 연남천을 오라비로 두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여인인...

십사 년의 세월이 흘러 냉약빙의 나이도 어느덧 삼십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십사 년 전 그대로였다.

얼굴뿐 아니라 몸매도 거의 변화가 없다. 아이를 낳은 적도 없고 또 내공이 정심한 덕분에 그녀는 여전히 이십대 초반의 젊은 처자로 보인다.

잔혹한 세월의 흐름도 전쟁의 여신같은 그녀의 모습에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어. 석련(石蓮)의 잎사귀!”

질풍같이 초가집 안으로 들어선 단삼의 소년은 약간 숨이 거칠어진 채 연꽃 잎사귀 하나를 냉약빙에게 내밀었다.

소년이 내미는 것은 석련이라는 바위에 피는 희귀한 연꽃의 잎사귀였다.

석련은 곤륜산의 특산으로 이곳 장춘곡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석룡벽(石龍壁)이라는 곳에서만 자생한다.

헌데 단삼소년은 일다경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 왕복 육십여 리나 되는 그 석룡벽까지 달려가서 연꽃잎을 따온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빠르기의 경공이 아닐 수 없었다.

“쯧쯧! 겨우 육십 리를 왕복한 정도로 호흡이 거칠어지다니... 제대로 전궁만리비의 경공을 시전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하지만 냉약빙은 단삼소년을 바라보며 준엄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좀 봐줘 누나. 다음에는 잘 할게!”

단삼소년은 혀를 낼름 내밀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소년의 그런 모습은 티 없이 맑고 순진무구해 보인다. 그것은 소년에게 냉약빙은 이 세상에서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이리 와 봐라! 빗물이 묻었는지 보자.”

냉약빙은 소년을 손가락을 까닥거려 불렀다.

“만일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묻었다면 앞으로 삼 일 간 면벽폐관 해야만 한다.”

냉약빙의 엄한 음성에 소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오... 오늘은 그냥 넘어가면 안돼?”

소년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비실비실 뒷걸음질 쳤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달려왔는데 빗방울이 몸에 묻었는지를 조사하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사실 경신술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 빠른 속도 때문에 몸 주위에 진공의 막이 생겨 빗물이 침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같은 경지에 이른 경신술의 대가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냉약빙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설마 냉약빙은 아직 어린 소년에게 자신과 같은 수준의 경신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꾀를 부려도 소용없다.”

스윽!

냉약빙은 준엄하게 말하며 천천히 거구를 일으켰다. 비록 단삼 소년이 육척에 가까운 키를 지녔지만 냉약빙이 몸을 일으키자 어린 아이처럼 작게 느껴진다.

“아이쿠!”

피잉!

단삼소년은 냉약빙이 자신을 잡으려고 하자 비명을 지르며 맹렬하게 초가집 밖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어딜!”

콱!

하지만 냉약빙의 차가운 교갈이 일며 소년의 오른쪽 손목이 마치 솥뚜껑같이 큼직한 손에 움켜쥐어졌다. 비록 소년의 몸놀림이 경이적으로 빠르긴 했지만 아직은 천하에서 가장 빠르다는 냉약빙을 능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에이! 잡히고 말았네!”

소년은 냉약빙의 커다란 손에 손목을 잡힌 채 입을 삐죽거렸다.

“네 녀석이 뛰어봤자 벼룩이지!”

스슥!

눈을 흘기는 냉약빙의 큼직한 손이 빛살같이 빠르게 소년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행여 소년의 몸에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튀었을까 조사하는 것이었다.

헌데 냉약빙의 손이 막 소년의 사타구니 부분을 쓰다듬고 지나갈 때였다.

(아이쿠!)

소년은 얼굴이 화끈 붉어지며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사내아이가 십대 후반의 나이라면 한창 양기가 충천할 때다. 솥뚜껑같이 큼직하지만 어쨌든 보드라운 여자의 손이 사타구니를 더듬자 자신도 모르게 하체 일부가 불끈 곤두선 것이었다.

“...!”

한 겹의 얇은 옷 사이로 느껴지는 큼직하고 단단한 불기둥의 느낌에 냉약빙도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움찔했다.

“헤헷! 기회당!”

스팟!

소년은 장난스런 웃음소리와 함께 제압당한 손목을 미꾸라지처럼 냉약빙의 손에서 빼내며 문밖으로 날아갔다.

“검한(劒恨)아!”

냉약빙은 급히 달아나는 소년을 불렀다.

그러나 소년의 모습은 순식간에 퍼붓는 빗줄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헤헤! 할아버지에게 다녀올 게!”

멀리서 소년의 장난기 서린 음성만이 여운을 끌며 들려올 뿐이었다.

“휴!”

냉약빙은 고개를 저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감돌았다.

(검한이도 어느덧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냉약빙은 소년의 늠름한 실체를 만졌던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 튼튼하고 탄력 있는 감촉이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손바닥에 생생이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 삼 년 전부터는 혼자 목욕을 하겠다고 했었지!)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냉약빙은 직접 소년을 목욕시켜주곤 했었다.

소년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준 냉약빙이 몸을 닦아주는 걸 당연하게 여겼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쪼그려 앉아서 근육이 아직 붙지 않은 소년의 여린 몸을 닦아주는 게 냉약빙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비록 처녀의 몸이지만 소년을 통해서 육아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삼 년 전부터 소년은 냉약빙과 함께 목욕하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그 무렵 귀엽기만 하던 소년의 몸에 변화가 생겼었다. 목소리도 좀 굵어지고 맨숭맨숭하던 불두덩에 가뭇가뭇 어른의 흔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의 키가 어느덧 오척을 넘겼고 뼈대도 제법 굵어졌지만 냉약빙은 별 생각없이 씻겨주었었다.

그전까지는 냉약빙이 고추를 만지고 사타구니 구석구석을 닦아줘도 신경 쓰지 않던 녀석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소년은 냉약빙의 손길이 아랫도리 쪽으로 접근하면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며 몸을 배배 꼬곤 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삼 년 전부터 소년은 혼자 목욕하겠다고 선언했다.

냉약빙으로서도 소년의 성장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소년을 직접 목욕시켜주는 걸 그만 두었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난 지금 소년의 몸에서는 성인의 모습이 문득 문득 느껴졌다.

방금 전 사타구니를 더듬다가 만져본 소년의 몸 가락은 이미 더 이상 어린 아이의 귀여운 고추가 아니었다. 얼추 느끼기에도 한 뼘은 충분히 됨직한 튼실한 양물이었다.

(세월 한 번 빠르구나. 기련산에서 어린 검한이를 거둔 것이 벌써 십사 년 전의 일이라니...!)

소년의 양물의 감촉이 남아있는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냉약빙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초가집 밖으로 달아난 소년은 바로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었다.

고독마야는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소년에게 검한(劒恨)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도검(刀劍)에 운명을 건 자신의 지난 생애를 한스럽게 생각해온 고독마야로서는 소년이 무림인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사방무신 중 한명이었던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들인 이상 어쩔 수 없이 무림인으로 살아야만 한다.

그래서 고독마야는 소년에게 검(劒)을 한(恨)스러워한다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소년 이검한은 자신의 출신내력을 모른다. 기련산에서 변을 당할 때 나이가 서너 살에 불과했기도 했지만 당시 머리에 입은 부상 때문에 어렸을 때의 기억이 없는 것이다.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때로 이검한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속이 깊은 이검한은 굳이 고독마야와 냉약빙에게 부모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떼를 쓰진 않았다. 때가 되면 알려줄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이검한은 구김살 없이 자랐다. 냉약빙과 고독마야가 피붙이에 못지않은 따뜻한 관심과 애정으로 보살피고 양육을 해준 덕분이다.

이검한은 철이 들자마자 냉약빙과 고독마야에게서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냉약빙과 고독마야! 그들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최고의 스승이었다.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 고독마야!

경신술로 천하무적인 냉약빙!

그들의 지도하에 이검한은 이미 일류고수가 되어 있었다. 지금의 실력으로도 이검한은 능히 천하백대고수(天下百大高手) 안에 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검한 자신은 단 한 번도 남과 싸워보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검한은 고독마야의 제자다.

하지만 이검한이 알고 있는 무공의 대부분은 사저(師姐)뻘인 냉약빙이 전수해준 것이었다.

고독마야는 이검한에게 단 한 가지의 내공심법만을 전수해 주었을 뿐이다.

내공 외에 경신술 등 잡다한 무공을 전수하는 것은 모두 냉약빙의 몫이었다.

냉약빙은 이검한을 친 아들처럼 사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검한을 보살펴온지라 냉약빙은 종종 자신이 이검한을 낳은 생모인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검한이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결코 기뻐할 일만도 아니다.)

냉약빙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녀의 두 눈에는 애틋한 정감이 가득했다.

(검한이도 머지않아 자기를 낳아준 생모와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저 아이가 그때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냉약빙의 새하얀 뺨으로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옥수상아 우담혜가 음적들에게 유린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칼로 저미는 듯한 슬픔이 느껴지는 냉약빙이었다.

그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냉약빙이 이검한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부디 언제까지나 지금의 그 밝은 성품을 잃지 말거라. 검한아!)

냉약빙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이검한이 사라진 초가집 밖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장대같이 쏟아지던 폭우도 어느덧 가늘어져 가랑비로 변해가고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9

 

              겁난(劫難) 중의 인연 (2)

 

 

한동안 미친 듯이 사방을 뒤지던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다시 모옥 앞으로 왔다.

그들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처리하도록 하게.”

철선동시가 말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는 마면혈도가 주섬주섬 바지를 끼워 입고 모옥에 불을 질렀다.

곧 불꽃이 일렁이며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투타탁! 투탁!

불속에서 뭔가가 불에 타면서 튀는 소리가 들린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뒤통수에 대고 음산한 어조로 내뱉었다.

이곳도 결국 안전한 곳이 못되는군.”

그래, 모두 내 탓이다. 내 탓...”

마면혈도는 화난 목소리로 버럭 소리치며 계곡의 입구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마면혈도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철선동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섬뜩하게 웃었다.

말대가리... 아직 멀었다. 네놈의 심력(心力)은 좀 더 소모되어야 한다. 흐흐흐... 몽선도(夢仙圖)의 주인은 나 혼자로 족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마황이 뭐 무서울 것이 있겠는가?”

몽선도...!

몽선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기에 그것을 얻기만 하면 그토록 무서워하던 마황도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지금 철선동시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는 욕심과 음모의 근원은 몽선도란 것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불측한 의도를 품고 있는 철선동시도 걸음을 옮겨 비련곡을 빠져 나갔다.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자가 혹시 불빛을 보고 찾아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만사휴의다.

철선동시는 불타는 모옥이 만든 자신의 긴 그림자를 밟고 곡구에 다다랐다.

화를 내며 먼저 갔던 마면혈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징검다리처럼 줄지어 있는 바위섬들을 밟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는구나.”

임청우는 불꽃을 보면서 꿈결인 듯 중얼거렸다.

악귀에게 유린당한 어머니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고, 집은 불타고 있으며, 이제 자신은 농산을 떠나야한다.

임청우 모자가 이곳에서 살았던 흔적은 모옥 앞 초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과 약초들뿐이다.

애잔한 아쉬움이 임청우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지만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슬프지 않은 것은 이미 그녀와의 정이 오래전에 끊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세속에서 말하는 정 같은 것은 원래부터 임청우에게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임청우는 고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 그의 귓속으로 마치 천둥이 울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불은 네가 질렀느냐?”

임청우는 이같은 음성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크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

그러나 위엄으로 가득 차있으며 은연중에 사람을 압도해 버리는 음성이었다.

한 번 듣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멍하니 서있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불은 네가 놓았느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와서야 임청우는 엇!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앞에 육척이 넘는 장대한 체구를 지닌 노인이 서있었다. 머리는 반백이고 네모 난 얼굴에는 짧게 깎은 수염이 은빛을 발한다.

으악!”

노인의 눈을 보는 순간 임청우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고 말았다. 노인의 눈은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강렬한 광채를 뿜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노인의 전신에서 풍기는 위엄은 절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기에 족했다. 노인의 어깨에 걸려있는 장검조차도 주인의 위풍에 의해 있는 둥 마는 둥하다.

노인은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으로 비틀거리는 임청우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따뜻한 기운이 노인의 커다란 손에서 흘러나와 임청우의 손목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임청우는 떨리던 몸과 마음이 함께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러나 감히 노인의 눈을 다시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한데 임청우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노인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놈...!)

노인은 마음속의 커다란 놀라움을 다스리지 못하고 급히 다른 손으로 임청우의 어깨를 만져보았다.

(천골(天骨)이로다!)

임청우의 골격을 만져보는 노인의 눈에 놀라움과 흥분의 빛이 떠올랐다.

임청우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골격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강호를 주유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보아온 노인조차 임청우만한 골격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게다가 임청우의 몸에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다.

말 그대로 갈지 않은 원석인 셈이다.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왔지만 내가 아주 복이 없지는 않구나.)

임청우의 골격을 어루만지고 몸을 살펴보면서 노인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생각지도 않게 기막힌 보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때 임청우가 용기를 내어 노인을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노야(老爺)께서는 낮에 길게 소리쳤던 그분이십니까?”

길게 소리를 쳐? !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말이로군.”

검주 유소기요?”

허허허. 무림칠절(武林七絶)의 우두머리인 뛰어난 인물이지!”

노인은 진심으로 찬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고 노부는 노부다. 노부는 그렇게 큰소리를 지르진 않아. 실상 지르지도 못하지만...!”

노인은 웃으면서 임청우의 손을 놓고 절벽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임청우는 마치 자석에 끌리기라도 한 듯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는 네 집이냐?”

노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노인의 음성은 마치 사방의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 아니면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듯하다고 생각하며 임청우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노인은 멀리 어둠 속에 보이는 산봉과 그 위의 하늘을 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곳이군. 이곳에 이름이 있느냐?”

어머니께서 비련곡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비련곡?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야. 자당(慈堂)은 아마도 한이 많으셨던 분인 모양이군.”

“...”

자당은 어디 계시는가?”

노인이 임청우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임청우는 말없이 절벽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노인은 흠칫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임청우도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있기만 했다.

노인 옆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임청우는 말로 형용하지 못할 기묘한 기쁨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폭염 중에 쏟아지는 소나기의 청량감 같기도 했다.

그렇게 반 시진 가량이 지나갔다.

시간은 어느덧 자시(子時)를 훨씬 넘어 인시(寅時)가 되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오연히 고개를 들고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노부는 우협(愚俠) 장백승(莊百勝)이라고 한다.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임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별호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리석은 협객이라니...

우협 장백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무림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느냐?”

이번에도 임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무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그인지라 이 노인이 저 일왕(一王) 금포염왕과 비견되는 일세고수 일협(一俠)임을 알 리 없었다.

무림의 은원 때문에 환난을 겪은 것 같거늘 무림을 모른다?”

장백승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함께 살 가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임청우가 대답했다.

노인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노부를 따라가지 않겠느냐?”

저는 노야가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사람의 대장부로서 남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그럼 노부의 제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느냐?”

대화가 여러 차례 오가게 되자 임청우는 느긋한 마음을 회복하고 웃으며 물었다.

노야께선 제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검술(劒術)이다.”

장백승이 짊어지고 있던 검을 풀어서 내리며 말했다.

무사들이 사용하는 그런 검술입니까?”

비슷하지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한번 보겠느냐?”

노야께 제가 검술을 배운다면 말대가리같이 생긴 자를 이길 수 있습니까?”

임청우는 혈도를 휘두르던 마면혈도의 공포스런 모습을 생각하며 물었다.

장백승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마면혈도를 만났구나! 그놈은 어디에 있느냐?”

얼마 전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노야께선 제 물음에 대답해 주십시오.”

장백승은 곡구를 힐끗 보다가 탄식하고 말했다.

마면혈도... 그놈의 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구나. 이번엔 반드시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건만...”

그는 임청우가 여전히 자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고 말을 이었다.

당금의 무림에는 최절정으로 꼽히는 열 두 명의 고수가 있지. 그들을 사람들은 일왕(一王) 일협(一俠) 삼괴(三怪) 칠절(七絶)이라 부른다.”

임청우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장백승의 말에 빨려 들어갔다.

네가 만난 마면혈도는 삼괴의 둘째로 무공이 극히 고강하다. 당금의 무림에서 그놈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열손가락에 꼽히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너는 노부의 검술을 배워서는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 노부라 하더라도 그놈을 이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

임청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장백승을 보았다.

무공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장백승의 기도는 마면혈도 따위가 비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장백승이 태양이라면 마면혈도는 반딧불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장백승이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니...

장백승은 이어서 말했다.

아니, 노부는 마면혈도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긴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노야께선 함자를 <백승(百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이런 경우를 들어서 허명(虛名)이라고 하는 것이지. 백승은 이름뿐이야. 젊었을 때 노부를 가르치신 은사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

임청우가 다시 물었다.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유림(儒林)이라고 하는 것처럼 무림이라는 것은 무()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까?”

장백승이 그렇다고 끄덕이자 임청우는 또 물었다.

노야께서는 그 무림에서의 위치가 어떻습니까?”

장백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허명은 여기에도 있지. 일왕 일협 중의 일협이 바로 우협, 이 바보 늙은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임청우는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일왕 다음에 일컬어지는 일협이라면 당연히 그 무공의 강함도 측량하기가 어려울 것이 아닌가?

헌데 아무도 이긴 적이 없고 이길 수도 없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로 보아 마면혈도를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구나. 만약에 노부의 제자가 될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이걸 증표로 종적을 물으면 노부에게 안내해주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장백승은 풀어서 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검을 임청우의 손에 쥐어주었다.

별 장식이 없는 평범한 청강검(靑鋼劒)인데 단지 손잡이 부분에 한 마리 포효하는 사자(獅子)가 투박하게 음각되어있는 것이 눈에 띌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노야!”

임청우가 장백승의 따스한 말에 감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우협 장백승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는 마치 신선처럼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장백승은 임청우가 빤히 지켜보고 있는 중에 홀홀히 밤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마치 백일몽(白日夢)을 꾼 것만 같았다. 손에 남겨져 있는 한 자루의 검이 아니라면 꿈을 꾼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리라.

그러나 장백승의 마치 천신(天神)같던 기도는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제 어디 가서 노야를 찾는단 말입니까.”

임청우는 장백승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물었다.

장백승이 사라진 밤하늘에는 별빛만이 더욱 초롱할 뿐이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3

 

            만나다!

 

 

(누군가의 시선이 줄곧 날 따라오고 있는 것같다.)

금릉으로 향하는 관도를 가고 있는 강유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숭산에서 안탕산으로 가려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강유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동쪽으로 멀리 우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끈적한 시선이 등봉현의 객잔을 떠난 직후부터 집요하게 따라붙고 있었던 것이다.

(고불참회기를 읽은 후로 내가 너무 예민해진 것일까?)

강유는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살펴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그가 가고 있는 관도에는 제법 행인이 많다. 강유처럼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마차나 말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 딱히 의심 가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단순히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으로 돌리기에는 느껴지는 시선이 너무도 집요하고 확실하다.)

이마를 찡그리는 강유의 백보 쯤 앞쪽에 주점이 하나 보였다.

경치 좋은 강가에 위치해서인지 제법 많은 손님들이 주점을 드나들고 있었다.

(분명 날 감시하는 자가 있다. 다만 내 능력으로는 탐지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어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이고...)

강유는 생각에 잠겨 주점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쌍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게 느껴진다.

(어쩌면 달마독명안을 외운 덕분에 감각이 예민해져서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저 시선을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불선사는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암기한 후 태워버리라고 고불참회기에 적어놓았었다.

고불선사의 당부에 따르기 위해 강유는 밤새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을 외웠었다.

그 과정에서 강유는 달마독명안의 이치를 일부 깨닫게 되었다.

달마독명안은 육신통에 필적하는 경이적인 능력이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자 강유의 감각은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눈과 귀가 몇 배나 밝아진 것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던 것까지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유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맛보기도 이 정도인데 달마독명안을 온전히 구사하게 되면 정말 신통력을 발휘하는 셈이 되겠구나.)

강유가 달마독명안의 힘에 새삼 감탄하며 주점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냐?”

갑자기 주점에서 터져 나온 고함 소리에 관도를 오가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지나치려던 강유도 걸음을 멈추며 문이 열려 있는 주점 안쪽을 돌아보았다.

누굴 눈 뜬 장님으로 아는 거냐? 이 따위 유리조각으로 사기를 치려하고?”

주점 입구의 계산대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누군가에게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그자의 왼손에는 자두 씨만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들려 있고 오른손에는 식칼이 쥐어져 있다.

탐욕스러운 인상의 주점 주인과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서있는 인물은 늘씬한 체형의 여자였다.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들었지만 별 장식이 없는 수수한 옷을 입은 그 여자는 바로 황금성의 성주인 진상파였다.

 

지난 밤 진상파는 들키지 않고 황금성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었던 것이다.

태어난 이래 돈을 주고 뭔가를 사본 적이 없는 진상파다.

당연히 돈을 갖고 다닐 이유와 필요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날이 밝고 허기가 지면서 진상파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어려움에 처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제왕성이 자리한 태산에서 황금성이 있는 금릉까지 가려면 열흘 가까이 걸린다.

그동안 먹고 자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현실적인 해결 방법은 가까운 황금성의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제왕성의 인간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황금성 지점에 들렸다가는 간단히 사로잡혀 제왕성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결국 진상파는 황금성 지점을 찾아가는 건 포기하고 무작정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었다.

그러다가 허기를 참지 못하고 이 주점에 들어와 국수를 한 그릇 사먹게 되었다.

지닌 돈은 없지만 끼고 있는 반지로 값을 치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끼고 있던 반지가 도저히 진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뭐 이게 금강석(金剛石)이라고? 개 풀 뜯는 소리 하지 마라.”

주인은 왼손으로 쥔 반지를 진상파 얼굴에 들이밀며 눈을 부라렸다.

진상파는 그자의 무례함에 극도로 불쾌해졌지만 즉각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점원들 뿐 아니라 주점 안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느껴져 숨이 턱 막힌 탓이다.

이런 수모와 난감한 상황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진상파였다.

이만한 크기의 금강석이면 비옥한 땅 수만 평을 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길바닥 장사치인 나도 안다. 헌데 겨우 국수 한 그릇 먹은 값을 이걸로 치르겠다고?”

탕탕!

주인은 식칼로 계산대를 연신 내리쳐서 흠집을 내며 진상파를 윽박질렀다.

(귀티 나 보이는 여자인데 돈 없이 국수 한 그릇 먹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흥미가 생긴 강유는 걸음을 멈춘 채 일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의 성격상 타인의 곤경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한다.

하물며 수모를 당하고 있는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하게 자란 태가 난다.

강유는 그 여자에게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사이에 주점 주인의 패악질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돈이 없다고 말했으면 그깟 국수 한 그릇 그냥 말아줄 수도 있었어. 그런데 뻔뻔하게 사기를 치려고 해서 날 열 받게 해?”

주인은 눈을 부라리며 식칼을 진상파의 면전에 대고 흔들었다.

... 저런...”

주인이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군.”

저러다 사고치지.”

보고 있던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눈치 빠른 손님들은 주인이 진상파를 지나칠 정도로 거칠게 대하는 이유를 짐작하고 혀를 찼다.

진상파를 협박하면서도 주인의 툭 튀어나온 눈알이 수시로 진상파의 몸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난생 처음 보는 절세미녀인 진상파에게 엉큼한 속셈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요. 그게 금강석이 아니라고 쳐요.”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와 살기를 억지로 누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지의 고리를 이루는 금의 무게만도 두 돈이 넘으니 국수 한 그릇 값으로는 충분하고도 넘칠 거예요.”

진상파는 주인이 쳐든 반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도도하게 말했다.

주인도 장사치인지라 반지의 고리가 금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상파에게 엉큼한 마음을 먹고 있는 터라 기세를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 보자보자 하니까 이젠 구리를 금이라고 속이려 들어?”

그자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식칼을 쳐들어 진상파를 내려칠 듯이 위협했다.

진상파를 겁에 질리게 만들어서 자신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게 할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다.

하지만 그자의 의도와 달리 진상파는 미간은 찡그리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대신 보고 있던 주점 안의 손님들 일부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오냐! 네년이 언제까지 뻣뻣하게 굴 수 있는지 보자!)

주인이 독이 올라 식칼을 진상파의 목에 대려고 할 때였다.

!

그자의 칼 든 손목을 움켜잡는 강철 족쇄같은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뭐야?”

주인은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오만상을 쓰며 돌아보았다.

진상파도 흠칫 하며 주인의 손목을 틀어쥔 인물을 돌아보았다.

그만하시오 주인장. 분풀이치고는 도가 지나치지 않소?”

칼 든 주인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엄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은 강유였다.

그가 보다 못해 개입한 것이다.

당신 누군데... 어흑!”

강유에게 눈을 부라리며 잡힌 손목을 뽑아내려던 주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둑!

강유가 주인의 손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가한 것이다.

(... 무림인!)

주인은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와락 겁에 질렸다.

눈치 빠른 장사치답게 그자는 강유가 범상치 않은 무공을 지닌 무림인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분 소저께서 드신 음식 값은 내가 대신 내겠소. 그러니 그냥 보내드리시오.”

강유는 주인의 손을 놔주며 말했다.

이봐요! 귀하가 끼어들 일이 아니에요.”

보고 있던 진상파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남에게 신세를 져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진상파인지라 강유의 개입이 고맙기보다는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도 마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니 이걸로 이분 소저의 식대를 함께 계산하시오.”

찰랑!

강유는 진상파의 말은 무시하고 몇 개의 동전을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 그렇게 합죠. 식사는 뭘로 준비해드릴깝쇼?”

촤락!

주인은 급히 동전 쓸어서 챙기며 강유의 눈치를 보았다.

길을 서둘러야하니 가장 빨리 되는 것으로 준비해주시오.”

강유는 고개를 돌려 주점 안의 빈자리를 찾으며 말했다.

일이 원만히 해결될 기미를 보이자 마음 졸이고 있던 손님들은 다시 먹고 마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요.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요.”

찰랑!

주인은 강유가 준 동전을 불룩한 아랫배에 찬 전대에 넣으며 돌아서려 했다.

!

그런 주인의 어깨를 강유의 손이 움켜잡았다.

...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

주인은 겁에 질려 강유의 눈치를 보며 돌아보았다.

이분 소저에게 돌려드릴 게 있지 않소?”

강유는 웃으면서 주인이 그때까지 왼손으로 들고 있던 반지를 보았다.

아이쿠 이런!”

주인은 짐짓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마빡을 쳤다.

국수 값은 받았으니 이 반지는 돌려드리겠소.”

그리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반지를 진상파에게 내밀었다.

강유 옆에 서있던 진상파는 불쾌한 표정으로 반지를 낚아챘다.

(아깝구만. 유리조각인지는 몰라도 예쁘장해서 마누라에게 주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주인은 입맛을 다시며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

받아요.”

진상파는 점원의 안내를 따라 빈자리로 가려는 강유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물 한 모금 얻어 마셨어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라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어요.”

소저! 나는...”

인정이니 선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요. 난 기필코 당신에게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니까요.”

진상파는 난감해하는 강유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저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국수 한 그릇 대접한 대가로 수만 냥짜리 반지를 받을 수는 없군요.”

강유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반지를 보았다.

귀하는 이 반지의 보석이...”

진상파는 눈썹 끝을 조금 올리며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강유를 보았다.

진품의 금강석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강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들어볼까요?”

강유에게 흥미가 생긴 진상파의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진상파는 지금껏 숱한 미남자와 귀공자들을 보아왔다.

그 때문에 느닷없이 끼어든 이 청년의 인상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키가 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해서 사내답게 느껴진다는 정도였었다.

그랬는데 강유의 말을 듣다 보니 점점 더 호기심이 생긴다.

소저 자체가 귀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진 강유의 그 말이 진상파의 고요하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내...)

진상파는 자신의 심장이 움찔하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보옥(寶玉)같은 귀인께서 한갓 유리조각 따위로 자신의 존엄을 흠집 내실 리가 있겠습니까?”

강유는 진상파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인물이다. 탁월한 지인지감(知人之鑑;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강유의 말을 들으며 진상파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영친께서 엄히 가르치셨다는 것은 알지만 소생의 사정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반지를 받게 되면 자칫 협기(俠氣)를 부리는 척 해서 이익을 챙겼다는 오해를 사지 않겠습니까?”

말씀하시는 뜻은 알지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고 고개를 숙이던 진상파의 눈에 자신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두 마리 용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반지인 쌍룡환(雙龍環)이다.

그 쌍룡환은 황실에서 나온 것이라며 구숙정이 가져다주었던 패물함을 뒤적이던 중 저절로 진상파의 손가락에 끼워졌었다.

(이거라면...)

진상파는 별 생각없이 오른손 중지에서 쌍룡환을 뽑았다.

원래 그녀는 쌍룡환으로 국수 값을 치르려 했었다.

하지만 제왕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쌍룡환은 좀처럼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았었다.

어쩔 수없이 왼손 중지에 끼고 있던 금강석 반지를 뽑아서 국수 한 그릇 값을 치르려다가 봉변을 당했었다.

!

헌데 이번에는 혹시 하며 뽑자 쌍룡환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손가락에서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조화람! 지금까지는 그렇게 안 빠지더니만...)

진상파는 의아해하면서 쌍룡환을 강유에게 내밀었다.

대신 이걸 드리겠어요.”

소저!”

우연히 갖고 있게 된 반지인데 보다시피 조악하여 그다지 값이 나가는 물건은 아니에요. 이것마저 거절하면 화내겠어요.”

진상파는 난감해하는 강유의 손에 쌍룡환을 억지로 쥐어주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라도 이 반지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절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강유는 어쩔 수 없이 쌍룡환을 받았다. 한 눈에 봐도 그리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이라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고명(高名)...?”

쌍룡환을 건네 준 진상파는 강유의 얼굴을 기억해두려는 듯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강유라고 합니다. 안탕산에 살고 있지요.”

진상파의 시선이 심상치 않게 느껴져서 강유는 얼굴이 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생각이 강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머니 냉상영이나 분이도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들이지만 눈앞의 이 도도한 인상의 여인에 비하면 처지는 면이 있다.

안탕산의 강유소협... 언제고 한번 안탕산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어요.”

강유의 이름을 되뇌이며 진상파는 주점을 나갔다.

살펴가십시오.”

강유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진상파는 관도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멀어졌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2

 

            지극한 정성

 

 

비록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지만 함께 잠자리를 만들자고 말하기 쑥스럽다.

그래서 백남빈은 혼자서라도 이슬을 피할만한 무언가를 마련해볼 생각으로 숲으로 갔다.

강미루는 영문도 모른 채 백남빈을 부축하고 따라갔다.

그러다가 숲으로 들어서자 그녀도 드디어 백남빈의 뜻을 알아차렸다.

몸도 편치 않으니 제게 맡기세요.”

강미루는 백남빈을 바위에 앉아있게 한 후 백남빈의 허벅지를 찔렀던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작은 나무들은 자르고 큰 나무들은 껍질을 벗겨 그것으로 줄로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나무들을 뗏목을 엮듯이 엮어 세우자 한쪽 벽이 될 수 있어 보였다.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미루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게 척척 잘해냈다.

"소저는 최고의 목수요."

구경하던 백남빈이 미안해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백남빈이 칭찬하는 말을 들은 강미루는 쌩긋 웃으며 나무줄기를 훑어 잎들을 백남빈을 향해 뿌렸다.

백남빈도 역시 나뭇잎들을 훑어 뿌렸다.

 

몇 차례의 장난질이 오가고 강미루는 다시 나무를 자르고 묶었다.

머잖아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서 백남빈도 아픈 다리를 끌면서 도왔다.

이날 그들은 자그마한 오두막 하나 짓는데도 그렇게 많은 나무가 든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백남빈은 따뜻한 온천 연못가에서 흑왕이 날라온 나무들로 집을 짜 맞추었다.

지붕에는 나뭇가지들을 얹고 진흙을 개어 발랐다.

따뜻한 창평곡의 기온 덕분에 지붕은 잘 말랐고 해가 질 무렵 오두막 하나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때쯤 두 사람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무리하게 몸을 쓴 탓에 아물어가던 강미루의 가슴과 백남빈의 허벅지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그 때문에 한 사람은 상체가 벌겋게 물들었고, 한 사람은 하체가 벌겋게 물들어 서로가 보기에 몹시도 처참하고 가련했다.

몇 개의 열매를 나눠먹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껴안은 채 지혈하는 것도 잊고 곯아 떨어졌다.

 

***

 

백남빈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다리의 통증이 그로 하여금 눈뜨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그의 품에는 강미루가 피곤에 지쳐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백남빈은 참기 힘든 통증에도 불구하고 행여 강미루를 깨울까봐 신음을 토하지 않았다.

퉁퉁 부은 왼쪽 다리는 그의 것이 아닌 양 고통 외엔 아무 감각이 없었다.

피도 많이 흘렸었다.

비록 급한 대로 상처를 싸매긴 했지만 그전에 말을 달리면서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그 때문인지 자꾸 눈앞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상처를 다시 치료해야겠구나)

백남빈은 청랑검을 꺼내 허벅지의 퉁퉁 부은 상처에 대고 그었다.

싸악! !

쇠도 자를 정도로 날카로운 청랑검의 날이 스치자 고름이 와락 쏟아지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누렇고 뻘건 고름은 보기에도 끔찍할 뿐 아니라 지독한 냄새까지 풍긴다.

계곡 밖이었다면 이토록 상처가 심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평곡의 따뜻한 기온이 그의 상처를 더욱 곪게 만든 것이다.

이를 악물고 고름을 짜내자니 식은땀이 팍팍 솟았다.

고름이 남지 않도록 빨아냈으면 좋겠는데 입이 상처에까지 닿지 않았다.

고름을 짜내면서 강미루의 가슴에 난 상처도 곪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약도 없는데 이러다가 우리 두 사람 모두 죽는 건 아닐까?)

백남빈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설마 숱한 사경을 경험한 내가 이런 정도의 상처에 죽기야 할려고...)

애써 위안해보았지만 크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여 죽는 일도 허다하므로 불안감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강미루가 깨어났다.

왜 그래요? !”

눈을 부비며 일어나던 강미루는 쩍 벌어진 백남빈의 상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백남빈의 왼쪽 허벅지는 퉁퉁 부어있는데다가 고름과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강미루는 자기가 낸 상처로 인해서 백남빈이 이토록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사실에 눈물을 쏟아냈다.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다물고 있던 백남빈이 숨을 몰아쉬며 그런 그녀를 위로했다.

"울지 마시오 미루. 당신이 내 다리를 찌른 것은 그때 상황으론 잘한 일인데 왜 운단 말이오? 나도 당신의 가슴에 구멍을 내지 않았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머리칼을 가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저 참을 수 있을 만큼만 아플 뿐이니 자책하지 마시오."

강미루는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는 백남빈의 손을 잡고 오열했다.

"제가 나빴어요. 앞으로 절대로 당신을 상하게 하지 않겠어요. 제발 저를 미워하지 말아 주셔요."

백남빈은 한숨을 내쉬며 강미루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설령 이 상처로 인해 죽는다 해도 당신을 절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것이오. 이 상처 덕분에 당신의 마음을 얻었는데 내가 어찌 당신을 탓할 수 있겠소?"

공자!”

다정한 말을 들은 강미루는 백남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강미루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백남빈이 다시 말했다.

"진심이오 미루, 이대로 죽는다 해도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가니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소."

백남빈은 강미루가 엉엉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열로 인해 기절해 버렸다.

그의 몸은 불덩어리를 방불케 할만큼 뜨거웠다.

 

백남빈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강미루는 그의 허벅지 상처에서 고름을 다 빨아낸 후였다.

또 체열을 조금이라도 식혀주기 위해 백남빈의 옷을 몽땅 벗겨놓고 커다란 나뭇잎을 모아 부채마냥 부치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강미루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데 그래도 백남빈이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기뻐서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청초한 백합같아서 백남빈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그러나 강미루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백남빈의 다리는 다시 부어오르고 있었다.

열도 금방 올라가서 목이 타는 듯 화끈거린다.

백남빈은 가물거리는 정신을 잡으려고 애쓰며 강미루의 손바닥에 몇 마디를 적었다.

 

<온천물 속에 나를 넣어 주시오. 중독은 반지로 치료할 수 있으니 입에다 반지를 물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백남빈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

 

(쉽지 않구나! 쉽지 않아.)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신가람은 한숨을 쉬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계곡 일대에 구축되어 있는 진법은 만만하지가 않다.

수시로 변화를 일으켜서 그때까지 구사한 파진법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백남빈은 삼재검법의 간단하지만 원론적인 이치에 의지하여 진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었다.

반면 신가람은 진법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많은 탓에 오히려 파진(破陣)이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진법이 일으키는 변화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일일이 대조하다 보니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결국은 뚫고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처제의 안위가 걱정이다.)

신가람은 조금씩 가슴이 타들어갔다.

정황상 말썽쟁이 처제가 이 진법에 빠진 건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이미 시간은 이틀이나 지났다.

말괄량이라 소문났지만 아직 어려 세상 물정 모르고 겁도 많은 강미루다.

어린 처제가 위험에 처해 두려워할 것을 생각하자 속이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신가람이었다.

(진법의 중심부가 어딘지만 알아도 파진이 좀 더 수월할 텐데...)

신가람은 한숨도 자지 못해 시린 눈을 문지르며 다시 진법의 변화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

 

강미루는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지금처럼 울지는 않았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느덧 대려장의 강인한 홍의창 강미루가 아닌 연약한 소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에 백남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임을 그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타액이 닿기만 하면 무시무시한 독으로 변하는 온천 속에 백남빈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는 지금 방치하는 것 보다는 낫을 것 같았다.

하물며 백남빈이 정신을 잃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한 부탁인 따라주어야 한다.

간병하느라 기진맥진한 강미루는 백남빈의 몸을 들지도 못하고 질질 끌며 연못으로 갔다.

연못가에 이르자 백남빈의 왼손에서 오채금환을 빼어 입에 물렸다.

하얀 이빨 사이에 물려진 오채금환이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렇게 아름다운 반지를 입에 문 채 백남빈이 죽어가는 중임을 떠올리니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끝없이 일었다.

오채금환을 물고 있는 백남빈의 벌거벗은 몸은 연못 속에 천천히 잠겨들어 머리만이 물위에 떠 있었다.

무릎까지 온천수에 다리를 담근 강미루는 물가 바위에 걸터앉은 채 백남빈의 머리가 물속으로 갈아 앉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얼굴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이 펄펄 끓는 온천수에 잠기자 백남빈의 머리는 뜨거운 찜통처럼 김을 내뿜고 있었다.

강미루도 연못의 열기와 백남빈의 열기로 인해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새파란 온천 속에 한 사람은 몸을 담그고 한 사람은 다리를 담근 채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까무라치기를 수십 번 하였다.

백남빈의 머리와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강미루의 몸도 몇 번을 땀으로 뒤집어썼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어느덧 해는 다시 뉘엿뉘엿 서쪽에 걸쳐져 있고, 천리마 흑왕만이 두 사람이 염려스러운지 다가와서 힐끔힐끔 보다가 가곤 했다.

 

***

 

지면 아래 깊은 분지인 창평곡에도 저녁이 되자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창평곡 밖에서 밀려든 그 서늘한 바람이 스치자 강미루가 먼저 정신이 들었다.

몸이 가뿐해져 있는 것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있던 중에도 백남빈의 머리만은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백남빈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에서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의 열이 많이 내린 것이다.

숨도 고르게 쉬고 있었다.

단지 너무 심한 고통을 겪고 나서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입에 물고 있는 반지는 이빨에 걸려 있었지만 긍방이라도 떨어질듯 말듯 위태로웠다.

강미루는 재빨리 손을 뻗쳐 반지를 잡은 후 백남빈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평온해진 백남빈의 숨결은 폭풍이 지나간 것을 알리는 듯 했다.

비로소 강미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틀림없이 나도 따라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도 내가 죽었다면 따라 죽을까?)

강미루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직은 자신의 생각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때문이다.

(내 가슴의 상처는 작은 흉터만 남고 다 아물어 버렸구나. 이 연못의 물이 정말 신통한데... 이 사람의 상처도 이제 거의 다 나았겠지?)

백남빈을 연못에서 좀 더 끌어내 허리 아래만 온천수에 잠기게 했다.

그리고 난 후 백남빈이 정신을 차릴 동안 과일이나 몇 개 따올 생각으로 근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흑왕을 불렀다.

몸이 나른하여 힘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흑왕의 등에 오를 수는 있었다.

흑왕이 달리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게 되자 몸에 생기가 차오른다.

강미루가 숲으로 가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향긋한 열매들을 따서 돌아 왔을 때 백남빈도 정신을 차리고 나른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땀을 푹 뺀 두 사람의 얼굴은 완전히 하얀색이 되어 있었다.

강미루는 알몸의 백남빈을 연못에서 끌어내어 풀잎 웃도리를 감아 주었다.

다시 태어난 것같은 기쁨에 두 사람은 부끄러움도 다 잊어버리고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이전버튼 1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0.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