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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뜻밖의 제안

 

 

“당신들에게 할 말이 있어요!”

냉약빙은 고독헌 밖으로 나서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녀의 말에 유령마제가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흐흐!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이오 냉여협?”

하지만 그자는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냉약빙이 지니고 있는 굉천벽력탄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며 냉약빙은 싸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비겁한 자들, 너희들은 평생 가도 오라버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차갑고 오연한 음성으로 알을 이었다.

“오라버니께서는 당신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어요.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들 마음에 달렸어요!”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군웅들을 쓸어보며 한손을 쳐들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세 권의 낡은 비급이 들려 있었다.

“오오! 저...저것은 혈마대장경이다!”

군웅들 사이에서 경악과 환호성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그렇다. 냉약빙이 쳐든 것은 바로 혈마대장경이었다.

혈마대장경을 본 군웅들의 눈이 탐욕과 흥분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유령마제 등 삼인은 온전히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저 계집, 무슨 꿍꿍이지?)

그자들은 갑자기 냉약빙이 혈마대장경을 쳐들자 환호하는 대신 이마를 찌푸렸다.

냉약빙의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당신들이 고독애로 몰려와 오라버니를 귀찮게 한 이유는 이 혈마대장경 때문이지요? 안 그런가요?”

그녀의 말에 독천존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 맞는 말이오. 냉여협!”

그자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냉약빙의 손에 들린 혈마대장경을 주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오라버니께서는 더 이상의 소란을 원치 않으세요.”

냉약빙은 차가운 표정으로 군웅들을 대표하는 삼인의 고수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이 세 권의 비급의 처분을 당신들 세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셨어요. 이 제안을 받아들이든지 끝내 오라버니께 대항하다가 몰살당할지는 전적으로 당신들의 자유예요!”

“그, 그럴 수가...!”

“혈, 혈마대장경을 내놓다니...!”

갑자기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냉약빙의 제안은 실로 천만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을 선뜻 포기할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군웅들 사이에 분분한 소란이 일어났다.

유성신검황 등의 안색도 당혹으로 물들었다. 고독마야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독마야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는 그들이다. 비록 무형지독에 중독되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자신들과 동귀어진 할 수도 있었다.

유성신검황이 군웅들의 소란을 저지하며 냉약빙을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잠시 의논할 시간을 주시오 냉여협!

이어 그는 독천존과 유령마제를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장내는 일순 조용해지며 군웅들은 숨을 죽인 채 세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 자리에 모인 세 거두는 머리를 맞대고 전음입밀(傳音入密), 즉 내공으로 뜻을 전하는 수법을 써서 숙의하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를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일각(一刻;15분)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세 거두는 숙의를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유성신검황이 삼인을 대표하여 냉약빙을 향해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 삼인이 연노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해 주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군웅들 사이에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빌어먹을, 혈마대장경을 자기들끼리 나눠먹겠다는 건가?)

(이렇게 되면 우리는 헛물만 들이킨 꼴이 아닌가?)

군웅들은 저마다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이지러트렸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드러내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했다. 독천존과 유령마제 등이 그만큼 무섭기도 하거니와 현재 고독애 일대에는 세 거두의 수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 잘 생각했어요!”

유성신검황의 말에 냉약빙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며 혈마대장경을 양손으로 나눠들었다.

“받아요.”

피핑!

냉약빙은 세 권의 혈마대장경을 각기 한 권씩 삼인에게 날려 보냈다.

파팟! 팟!

유성심검황등은 행여 남에게 빼앗길 새라 급히 몸을 날려 자신들에게로 날아드는 비급을 받아들었다.

(진품이다!)

혈마대장경을 받아든 즉시 뒤적여본 삼인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그들이 받아든 비급은 틀림없이 혈마대장경임을 확인한 것이다.

“경고해 두겠어요! 이 시간 이후 고독애 주위를 얼쩡거리는 자는 나 냉약빙과 오라버니의 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참살할 테니 그리 아세요!”

냉약빙은 장내를 둘러보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독천존이 혈마대장경을 품 속에 갈무리한 후 냉약빙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흘흘, 알겠소이다. 냉여협! 노부는 그럼 이만 실례하오!”

쐐애액!

독천존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날려 고독애 아래로 사라졌다. 그러자 군웅들 중에 섞여있던 독천존의 수하들도 그자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뒤이어 유령마제도 수하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과연 이것이 잘하는 짓인가?)

마지막으로 유성신검황은 회의와 갈등의 눈빛으로 무겁게 발길을 돌렸다.

유성신검황마저 떠나자 나머지 군웅들도 앞을 다투어 고독애 아래로 날아 내려갔다.

삽시에 장내는 적막에 휩싸이게 되었다. 여기저기 죽어 넘어진 시체들만이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길 뿐...

“어리석은 인간들...!”

냉약빙은 군웅들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넉넉잡아 십오 년, 십오 년만 기다려라! 네놈들에게 오늘의 빛을 받으러 갈 아이가 있을 테니...!)

그녀는 싸늘하게 눈을 번득이며 고독헌으로 들어갔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감회에 찬 눈길로 자신의 무릎에 누인 사내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 아이라면 고금제일인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의 경지를 초월해 보려던 나 연남천의 숙원을 이루어 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가슴이 실로 오랜 만에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사내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장차 무림이 운명을 바꾸어놓을 천고기재와 천하제일인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은 고독애!

운명의 씨앗이 배태(胚胎)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 * *

 

세월여류(歲月如流)라 했던가?

곤륜산 고독애에서 신마풍운록 상의 고수들이 절반 가까이 몰살당한 혈겁이 벌어진 것도 어느덧 십사 년 전의 일이다.

그 십사 년의 세월 동안 무림인들은 공포와 근심으로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십사 년 전에 벌어진 두 가지 참사로 인해 무림에 머지않아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이 흐르는 대혈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때문이었다.

두 가지 겁난(劫亂) 중 첫째는 물론 고독애의 혈겁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한 지방을 제패하고 있던 수백 명의 고수들이 한꺼번에 몰살을 당했다.

결국 혈마대장경이 사방무신 중 세 사람의 손에 넘겨지는 것으로 고독애의 겁난은 해소되었다.

그 후 고독애 사방 백 리는 금역(禁域)으로 화해서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두 번째 겁난은 신주사패천에 들던 태양곡이 의문의 궤멸을 당한 사건이었다.

태양곡이라면 불과 이십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신마풍운록 서열 육위에 올랐던 일대기협 태양신협 이청천의 거처가 아닌가?

바로 그 태양곡이 고독애의 겁난이 있기 며칠 전에 초토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소문을 접한 무림인들이 경악하며 달려갔지만 태양곡은 이미 온전한 기왓장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괴멸된 후였다.

생존자는 없었다. 흉수들은 인간은 물론이고 개 한 마리도 살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혈겁이 누구의 짓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혈겁이었건만 흉수에 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태양곡의 멸망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무림인들은 태양곡의 참사를 장차 무림을 피로 씻을 대겁풍의 전조로 여기고 전전긍긍했다.

혹자는 미리 겁난을 피하기 위해 세외로 은신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림인들이 예상했던 겁풍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중원무림에는 유래 없는 평화가 도래했다.

그같은 평화가 십사 년 간 이어지자 무림인들은 차츰 안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의 씨앗은 좀처럼 제거되지 않았다.

현자(賢者)나 노강호(老江湖)들은 지금의 평화가 폭풍전야의 고요라고도 했다.

작금의 평화가 정말 폭풍전야의 고요인지 진정한 평화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모든 것을 밝혀줄 뿐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고독한 천하제일인의 거처가 있는 곤륜산 고독애에서 바야흐로 향후 무림 천년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잠룡(潛龍)이 자라고 있음을...!

 

***

 

우르르릉!

구름 속에서 뇌성이 운다.

마치 굶주린 거대한 짐승의 뱃속이 공복으로 울어대는 듯한 뇌성이다.

곤륜산 고독애 일대는 짙은 먹장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낮게 깔린 먹장구름은 당장이라도 곤륜산으로 쏟아져 내려올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쏴아아아!

어느 순간 시커먼 먹장구름은 장대같은 폭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대지를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의 소리가 마치 천군만마가 일제히 질주하는 듯 요란하다.

하늘을 향해 깎아지른 고독애의 북쪽에는 깊은 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계곡은 지하에 대량의 열천(熱川)이 흐르고 있어 사시사철 봄처럼 따스하다.

그래서 장춘곡(長春谷)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장춘곡 끝에는 아담한 초가집이 한 채 서있다.

십사 년 전부터 금지가 된 고독애 근처에 누가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일까?

“차핫!”

문득 초가집 안으로부터 낭랑한 소년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펑! 쐐애액!

이어 초가집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한 명의 소년이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초가집 밖으로 질풍같이 뛰쳐나왔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짧은 단삼(單衫)을 걸친 소년인데 육척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체격을 지녔다.

하지만 건장한 체격과 달리 소년의 나이는 잘해야 십칠팔 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어린애다운 치기가 남아있는 소년의 얼굴은 마치 조각을 한 듯 단아하다.

단순히 잘 생긴 것이 아니라 숯같이 짙은 눈썹에다가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루어 인상적이다.

쐐애액!

초가집을 박차고 뛰쳐나온 소년은 엄청난 속도로 계곡 밖을 향해 달려갔다.

소년이 내달리는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저 한줄기 검은 선이 장춘곡 밖으로 쭈욱 뻗쳐나간 듯이 보일 뿐이었다.

소년의 모습은 삽시에 폭우 속으로 사라졌다.

헌데 채 일다경(一茶頃;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우!”

장춘곡 밖에서 다시 낭랑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예의 그 단삼 소년의 음성이었다.

쏴아아아!

장소성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소년의 건장한 모습이 계곡의 어귀에 다시 나타났다.

스파앗!

장춘곡 입구에 나타났다 싶은 순간 소년은 이미 한 걸음에 계곡을 날아 건너 초가집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누나! 다녀왔어!”

초가집 안으로 뛰어든 소년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의기양양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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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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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 章

 

               天罡摩罅維深經

 

 

천강마존은 담담한 눈길로 기검룡을 응시했다.

[펼쳐보아라.]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순간, 그의 두눈은 갑자기 크게 떠졌다.

 

<무적팔해(無敵八解).>

 

두루마리에는 실로 가공할 위력의 무공이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___제 일해(一解) 개천뢰명(開天雷鳴),

___제 이해(二解) 폭화소천(瀑火燒天),

___제 삼해(三解) 붕천압지(崩天壓地),

___제 사해(四解) 벽뢰파산(霹雷破山),

___제 오해(五解) 노룡자천(怒龍刺天),

___제 육해(六解) 단천복지(斷天覆地),

___제 칠해(七解) 유성파천(流星破天),

___제 팔해(八解) 멸혼극참(滅魂極斬),

 

천강마존은 엄숙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사백 년(四百年) 전의 기인 무적도군(無敵刀君)이 남긴 무공이다. 도법(刀法)이나 검법(劍法) 어느쪽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극강함과 패도적인 위력은 천하에서 또한 으뜸이다. 내일부터 무적팔해의 수련에 들어갈테니 미리 기억해 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기검룡의 얼굴에는 힘찬 투지가 불끈 치솟았다.

 

X X X

 

철썩___ 쿠르릉...!

쏴___ 아___!

교교한 월광(月光)이 파도를 타고 일렁이고 있었다.

파석도(波石島).

그 바위의 정상에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칠 척(七尺)에 달하는 거구에 위풍당당한 풍모.

기검룡! 바로 그였다.

그는 바위 위에 우뚝 선채 두 손에 한 자루의 검(劍)도 아니고 도(刀)도 아닌 기형(奇形)의 병기를 들고 있었다.

문득, 우우우... 웅...!

갑자기 기형의 병기가 은은한 울부짖음을 발하며 한 차례 떨렸다.

푹은 한 치에 미치지 못했지만 검신의 길이만 근 네 자.

전체모양은 검(劍)의 형태였지만 날이 한쪽으로 서 있는 끝이 위로 약간 구부러져 검(劍)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이한 병기.

헌데 지금 그 기형의 병기가 은은한 음향을 발하며 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 우... 웅!

차츰 병기의 울림이 높아졌다.

순간, 기검룡의 몸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기병기를 중심으로 점차 원반형의 거대한 백색환(白色環)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급격히 백색환은 확산되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순간, 파파팍...!

주위의 암석들이 일제히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갔다.

[멸혼극참(滅魂極斬)!]

파석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검룡의 대갈일성이 터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파팟...! 콰르릉___ 쾅!

아! 천지개벽이 일어나려는가?

거대한 백색환이 전광처럼 폭사된 곳은 바닷 속.

헌데 보라! 거대한 포말과 함께 미친 듯이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는 바다의 용트림을.

그 순간 월광마저 포말 위에 부서져 찬란히 흩어졌다.

아아! 실로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어지지 않는 가공할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하하... 성공이다! 멸혼극참을 연성하고야 말았다. 하하하하...]

기검룡은 찌렁찌렁한 대소를 터뜨리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때,

[허허... 용아! 드디어 성공했구나. 아주 훌륭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낙척문사가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기검룡의 등뒤에 우뚝 서 있었다.

[할아버지!]

기검룡은 그를 바라보며 희열의 음성으로 소리쳤다.

낙척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큰 할아버지께 어서 무적팔해를 연성했다고 말씀드려야지. 무척 기뻐하실 것이다.]

[네, 어서가요.]

그들은 곧 몸을 날렸다.

 

석실___.

[할아버지, 용아가 드디어 무적팔해를 모두 연성했어요.]

기검룡은 석실끝의 석상에 앉아있는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일순 천강마존의 안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나 그것은 떠올랐던 것보다 더 빨리 사라지고 그는 곧 엄숙한 표정이 되었다.

[수고했다. 허나 무적팔해를 익히는데 무려 일년(一年)이라는 기간을 소요했다. 앞으로 더욱 증진해야만 천강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

그말에 기검룡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자, 내일부터는 이것을 연마하도록 해라.]

천강마존은 그런 기검룡에게 하나의 낡은 비급을 건네주었다.

 

<절존검보(絶尊劍譜).>

 

비급의 겉장에는 위와같은 네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있었다.

천강마존은 엄숙한 어조로 기검룡에게 설명했다.

[절존검보는 절존검후(絶尊劍后)라는 여걸께서 남긴 비급이다. 무적팔해가 천하에서 가장 극강하고 패도적인 무공인데 반해 절존검보 내의 만절극변검식(萬絶極變劍式)은 가장 현묘하고 유(柔)하면서도 난해한 검법이라 모두 삼백육십식(三百六十式)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식마다 스물 네 가지의 변화를 내포한다. 따라서 모두 팔천 육백 사십(八千六百四十) 가지의 변화를 일으킨다.]

기검룡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팔천 육백 사십 가지의 변화를 내포한 무학.

범인이라면 평생을 걸려서도 기억조차 못할 엄청난 불량이 아닌가?

허나 천강마존은 준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강무공을 익히려면 이 정도의 난해한 무공을 일년(一年)안에 모두 익힐 수 있어야 한다. 너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기검룡은 마음이 무거웠다.

허나 그는 곧 의지가 서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밤부터 당장 연마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기형병기를 들고 다시 석실을 빠져나갔다.

___무적패도(無敵覇刀).

과거 무적도군(無敵刀君)이 사용하던 천하의 도다.

그것을 불끈 움켜쥔 그의 두눈은 불타는 투지와 원대한 포부로 빛나고 있었다.

기검룡이 석실을 나가고 나자 문득 천강마존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형도 무적팔해를 연성하는데는 꼬박 이 년(二年)이 걸렸었지. 과연 저 아니는 모든 면에서 노부를 능가하는 기재로군.]

그는 기검룡이 무척 대견스러운 듯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아이가 서운해 할지 모르나 어쩔 수 없네. 천강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강(强)한 자질이 필요하니...]

낙척문사는 충분히 그의 뜻을 알고 있었다.

[용아는 영리합니다. 형님께서 겉으로는 엄하게 대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잘 알고있습니다.]

그의 말에 천강마존은 엷은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뼈를 깎는 고련(苦鍊)의 세월.

기검룡은 숱한 고통과 역경을 견디며 오로지 무공연마에만 몰두했다.

천강마존은 처음부터 그러했듯이 일언반구의 조언조차 해주지 않았다.

기검룡 스스로 검도를 깨우치게 하려함이었다.

이윽고 반년(半年)___

기검룡은 마침내 팔천 육백 사십 가지의 만절극변검식을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반년이 흐르자 그는 드디어 만절극변검식을 마음대로 펼칠 수가 있게 되었다.

아! 이는 실로 놀라운 진보가 아닐 수 없었다.

절존검법을 모두 연성한 후 기검룡은 다시 천강마존과 마주앉았다.

천강마존은 또 다른 한 권의 비급을 건네주며 여전히 준엄한 어투로 말했다.

[이것은 칠백 년(七百年) 전의 절정 마두였던 혈음마황(血陰魔況)의 혈황경(血荒經)이다. 다른 부분은 지극히 잔악한 마공들이라 모두 없애버렸다.

다만 혈음패황도(血陰覇皇刀)를 펼칠 수 있는 혈황도식(血荒刀式)과 천천마음의 연마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혈음탈혼소(血陰奪魂笑)만을 남겨 놓았다. 이것을 반년(半年) 안에 연성해야 한다.]

기검룡은 묵묵히 그러나 굳은 의지의 표정으로 비급을 들고 석실을 나왔다.

그날부터 또 다른 수련은 시작되었다.

 

<혈황오식(血皇五式).>

 

___제 일식(一式) 소혼혈(素魂血).

___제 이식(二式) 척혈살(剔血殺).

___제 삼식(三式) 비혈참(飛血斬).

___제 사식(四式) 환혈류(幻血流).

___제 오식(五式) 혈황극(血荒極).

 

이는 혈음패왕도를 위해 만들어진 도법(刀法)이었다.

그 도세가 독랄, 쾌속하기 이를데 없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마는 잔혹한 필살(必殺)의 도법이었다.

기검룡의 이 도식을 모두 연마하는데에는 삼개월을 소요했다.

이 또한 눈부신 성취라 나이할 수 없었다.

___혈음탈혼소(血陰奪魂笑), 이는 웃음소리로 사람을 살상할 수가 있으며 필요에 따라 사이한 섭혼술(攝魂術)과도 같은 마력(魔力)을 발한다.

기검룡은 이 무공의 수련에는 불과 한달을 소요했을 뿐이었다.

이미 척천마음을 통해 음률에 대한 조예를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남자 기검룡은 천해비보(天海秘譜) 중에서 본 천뢰삼도(天雷三刀)의 수련에 들어갔다.

 

<천뢰삼도(天雷三刀).>

___광극뢰(光極雷),

___심극뢰(心極雷),

___천극뢰(天極雷),

광뢰극! 빛줄기가 번뜩 스치는 순간 이미 적의 몸은 동체에서 날아가 버린다.

심극뢰! 광극뢰보다 두배 빠른 도식(刀式), 살의(殺義)가 이는 순간 도(刀)는 이미 상대의 심장을 뚫고 돌아와 도집에 들어가 있다.

천극뢰! 이것의 위력은 실로 통천가공할 정도, 상상을 불허하는 쾌도(快刀)의 최고 경지다.

비단 빠르기가 심극뢰의 배가 될뿐 아니라 일시에 방원 십 장을 질타하는 위력 앞에서는 그 어떤 공격도 풍지박살을 면치못한다.

기검룡은 천뢰삼도의 도식을 익히며 실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꼬박 두달이 걸려서야 그는 광극뢰와 신극뢰를 익힐 수가 있었다.

허나 마지막 도식인 천극뢰만은 그의 천고적인 자질이라해도 터득이 불가능한 것이라 다음으로 미루었다.

 

기검룡! 그는 이제 당당한 십팔 세의 청년으로 변모했다.

그가 다시 반년간의 수련을 마치고 천강마존을 찾아갔을 때 천강마존은 단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앞으로 일 년간은 작은 할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아라.]

그리하여 기검룡은 그날부터 무적패도를 내려놓고 낙척문사와 생활하게 되었다.

낙척문사가 그에게 가르친 것은 대부분 학문(學文)이었다.

허나 강호출도(江湖出道)를 대비한 다방면의 잡학들도 아낌없이 전수했다.

독술(毒術), 의술(醫術), 암기수법, 기관지학, 성복지술(星卜之術), 대화술 등은 물론 심지어는 도박수법까지 가르쳤다.

마지막으로 낙척문사는 두 가지의 절세무공을 전수했다.

___의형수강(意形手罡).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강기(罡氣)로 최고 백여 장까지 떨쳐 낼 수 있는 가공할 무공이었다.

___허기머리보(虛氣迷鯉步).

고금(古今)이래 최고의 신법(身法).

낙척문사가 수많은 경공들을 종합 연구하여 창안한 그의 독문경공술이다.

하루에 능히 삼천 리(三千里)를 달릴 수 있다.

이것의 특징은 경공을 펼칠시에 전혀 지면을 밟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면과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발바닥에서 유출시키는 공력의 힘으로 펼치는 경공술이었다.

 

다시 일년(一年)의 세월이 흘렀다.

기검룡에게 있어서는 어느 한순간도 휴식이 없었던 고련의 나날이었다.

천강마존은 다시 기검룡을 불러 앉혔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이제부터 천강무공의 수련에 들어간다.]

천강마존의 그 한마디에 기검룡의 가슴은 벅찬 격동으로 끓어올랐다.

천강무학(天罡武學)!

이 얼마나 익히기를 원하던 무공인가?

천강마존은 겸양하여 택그성황의 배끝에도 못미치는 보잘 것 없는 무공이라 하지만 기검룡은 잘알고 있었다.

천강무공, 그것이야말로 택그성황의 성취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광세절학이라는 것을, 기검룡은 격동과 희열에 벅차게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천강마존을 응시했다.

허나 문득 천강마존은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이 할아버지와 네 신분에 대해서 이야기해 두는 것이 좋겠다.]

[...!]

순간 기검룡의 안면이 굳어졌다.

자신의 신세내력, 그동안 그는 많은 고통과 의문을 가지고 자신의 내력을 알고자 했다.

허나 그것을 물을 때마다 천강마존은 굳게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다만 시기가 임박하면 알려주겠다는 그 한마디를 할뿐,

이때, 천강마존은 기검룡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나 한 가지 할아버지 앞에서 약속해야한다. 어떤 경우에도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 이 할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은 악인(惡人)보다도 나약한 인간이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약속합니다. 할아버지, 여하한 경우에도 눈물을 보이는 못난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소자야말로 진정한 천강마존의 손자가 아닙니까?]

기검룡은 내심의 긴장과 불안을 숨기며 자신있게 다짐했다.

(불쌍한 녀석...)

문득 천강마존의 노안(老眼)에는 측은해 하는 비치 떠올랐다.

허나 그는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백 오십여 년 전, 북건성 일대에 검궁(劍宮)이라는 문파가 있었다.

___팔황신검(八荒神劍) 구양신운(九陽神雲).

그가 바로 검궁의 궁주(宮主)였다.

그는 당시 무림의 최절정고수였던 무림팔걸(武林八傑)의 일인이기도 했다.

검궁은 당시의 어느 방파보다 방대한 세력을 갖춘 명실공히 맹주(盟主)역을 맡고 있었다.

헌데, 어느 해였던가?

서역으로 볼일이 있어 서역에 간 구양신운(九陽神雲)은 이름모를 폐사(廢寺)에서 하룻밤을 거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 폐사의 허물어진 장경각에서 한 권의 고서를 얻게 되었다.

고서는 서역에서도 오래 전에 사용하지 않게 된 고어(苦語)로 기술되어 있어서 구양신운은 전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그후, 서역에서 돌아온 구양신운은 그때 비로소 자신이 광세기연을 만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당시, 구양신운(九陽神雲)에게는 열살 정도된 어린아들이 하나 있었다.

구양천(九陽天),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이라고 소문이날 정도로 총명이 과인한 아이였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구양천을 반년 이상 가르치지 못했다.

반년만 지나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널리 학식있는 스승을 구하게 되었고 마침내 한 명의 박고통금한 지식을 지닌 노문사 한 분이 구양천을 가르치기를 자원하여 구양천의 스승이 되었다.

서역에서 돌아온 구양신운은 즉시 그 뜻모를 고서를 노문사에게 보였다.

헌데 고서를 받아든 노문사의 안색이 크게 변하였다.

노문사는 그 고서의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천강마하유심경(天罡摩罅維深經).>

 

노문사가 읽어낸 고서의 제목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이미 천여 년 전 천축에서 실전한 초고의 내공심경(內功心經)이 아닌가?

구양신운은 기연을 얻었다고 뛸 듯이 기뻐하며 노문사에게 그 내용을 자기 아들 구양천(九陽天)에게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기쁨도 일순.

구양신운이 광세절기가 담긴 비급을 얻어 암중에 연마하고 있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졌다.

그러자 이제까지만해도 다정한 친우들이던 팔걸(八傑)이 주측이 되어 전체 강호인들이 호시탐탐 검궁(劍宮)을 노리게 되었다.

결국, 어느 비오는 날 밤___.

수천의 무림고수들이 검궁으로 난입, 강호제일의 대파를 군림하던 검궁은 하룻밤 사이에 초토화 되고 말았다.

그 구양신운을 비롯하여 천여 명 검궁의 신하들은 완저히 몰살당했다.

허나 천운이었던가?

구양신운의 아들 구양천은 노문사가 피신시켜 다행히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노문사는 사실 전대의 기인으로서 신분을 감춘 채로 검궁에서 살고 있다가 구양처능ㄹ 구해낸 것이다.

 

<죽이리라! 무림을 피로 씻으리라!>

 

노문사에 의해 설산(雪山)으로 피신한 구양천은 절규했다.

눈앞에서 부모형제가 도륙당하는 것을 본 그는 반미치광이가 되다시피 무공을 익혔다.

노기인은 암연히 탄식을 하면서도 구양천에게 천강마하유심경을 가르쳐 주고 또한 전대 기인의 무적도군(無敵刀君)의 진전을 물려주었다.

그 뒤 십년 후, 중원무림에는 한 명의 대살성이 출현했다.

미친 듯이 쏟아내는 도세 속에 천하를 울리던 팔걸(八傑)들이 처참하게 쓰러지고 근 이천의 고수가 화를 당했다.

전체 무림은 구양천 한 명에게 피로 씻기게 된 것이었다.

전 강호인들이 전전긍긍 공포에 쌓여 있을 무렵 구양천을 찾은 한 명의 노진인이 있었다.

 

<만검진인(萬劍眞人).>

 

이십여 년 전에 은퇴했던 무당파 최고의 고수.

잠상봉 조사 이후에 처음으로 대라태청강기(大羅太靑罡氣)를 완전히 연성하고 무당최고의 비기 무상혜검(無常慧劍)을 연마해낸 절대고수였다.

만검진인은 좋은 말로 구양천에게 혈겁을 멈추라고 타일렀다.

허나 구양천은 만검진인의 충고를 일소에 붙이고 오히려 그에게 도전했다.

마침내 두 절정고수는 서로 충돌했다. 그러나 구양천은 참담하게 폐했다.

불완전한 천강신공(天罡神功)은 대라태청강기(大羅太靑罡氣)의 강맹한 쇄도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무상혜검의 현기 앞에 무적팔해는 너무도 무기력했다.

결국, 만검진인의 백여초를 견디지 못한 구양천은 분루를 흘리며 그 앞에 무릎꿇었다.

 

<빈도를 제압할 자신이 섰을 때 다시 중원으로 들어오시오.>

 

만검진인은 그렇게 구양천을 중원에서 추방했다.

이것이 구양천 즉 천강마존에 있어서의 최초이자 최후의 패배였다.

천외유천(天外有天)!

하늘밖에 하늘이 있음을 안 구양천은 낙심하여 설산(雪山)으로 들어갔다.

십년(十年)의 세월___

고심참담의 뼈를 깎는 듯한 수련 속에서 구양천은 점차 최초의 분노가 가라앉고 만 것

인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다.

바로 그 무렵 그의 머리 속에는 삼식(三式)의 검법이 구상되고 있었다.

허나 늘 무엇인가 부족한 듯 그 실체가 잡히지 않아 그는 고심했다.

헌데 어느날이었다.

당시 설산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던 설산인마(雪山人魔)가 그에게 도전을 청했다.

많은 수련 끝에 마음의 수양을 쌓은 구양천이었지만 도전을 피하지는 않았다.

곧 치열한 혈전은 벌어졌다.

그 결과 설산인마는 구양천의 무적패도를 감당치 못하고 참담하게 죽고 말았다.

허나 구양천 또한 혈전 끝에 천인단애로 떨어져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그는 단애 아래에서 천고의 영약 만년설매실(萬年雪梅實)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하나의 빙벽 속에서 무림사상 최고의 여마 절존검후(絶尊劍后)의 진전을 이어받게 된 것이었다.

절존검후의 먼절극변검식의 팔천 육백 사십 가지 변화를 대하는 순간 천강마존은 확연히 깨달았다.

자신이 구상하던 검법에 있어 부족한 점이 바로 변화(變化)와 부드러움(柔)이라는 것을.

다시 십년(十年)의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다.

구양천은 그동안 오직 삼식(三式)의 검법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피어린 수련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사상유래 없었던 엄청난 검식을 창안하고야 말았으니...!

그것이 바로 천강삼식(天罡三式)이 아닌가?

패도적인 극강함은 무적팔해를 능가하며 종잡을 수 없는 변화는 만절극변검식의 팔천 육백 사십 가지의 변화에 필적했다.

그후, 무림에는 신비한 한 명의 검수(劍手)가 나타났다.

늘 청삼을 걸치고 한 자루 반투명한 보검을 지니고 다니는 중년인(中年人), 그가 가는 길에는 적수를 찾을길 없었다.

아니 적수는 고사하고 그의 일초반식(一招半式)을 제대로 받아낸 자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강(强)했다.

헌데 그는 항상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남이 자신을 건들이지 않으면 자신도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그의 철칙, 허나 막상 그의 눈을 벗어나는 자는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었다.

개세무적의 고수 더 나아가 대방파라 할지라도 그 한 사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암중에 무림제패를 꿈꾸던 무위대제(武威大帝)와 무위궁(武威宮)의 제물이었다.

단 일검에 무위대제의 몸이 양단되었고 무위궁의 최정예 무위삼십육천(武威三十六天)의 태반이 몰살당한 것이 아닌가?

 

<천강마존(天罡魔尊).>

 

이것이 무림인들이 그글 경원하여 붙인 별호였다.

천강마존은 그후 사제와의 대회전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이야기를 하고 말을 멈추었다.

[...]

[...]

두 노소는 말없이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검룡의 눈에는 앞에 앉아있는 병색완연한 천강마존이 태산과 같이 느껴졌다.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미동도 않을 것만 같은 거산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할아버니는 지나간 할아버니의 생애를 결코 후회의 눈으로 되돌아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신념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천강마존은 문득 말을 멈추고 앞에 앉아 있는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도 노부와 비슷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자칫하면 제 이의 천강마존이 될 수도 있다.)

천강마존은 착잡한 눈빛으로 기검룡을 주시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노부는 네가 노무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네,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기검룡이 힘있게 대답하자 천강마존의 눈속에 안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부 평생에 후회가 되는 일은 가문을 이어 부모님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일이다. 너는 노부의 전철으 밟지 않도록 명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기검룡은 가문의 이야기가 나오자 바짝 긴장하였다.

[이제는 네 신상에 얽힌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천강마존이 입을 떼자 기검룡은 모든 신경을 천강마존의 말에 기울였다.

[할아버지가 언급한 바가 있었지. 노부이후에 중원패주(中原覇主)가 되기에 충분한 인물이 있었다고 말이다.]

[네. 황룡대제(黃龍大帝) 기용천(奇龍天)이라는 분이 그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말하는 순간 기검룡은 이상하게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천강마존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는 본시는 서역 황교(黃敎) 출신이었으나 태양성자(太陽聖子)의 진전까지 얻은 듯 했다.]

천강마존의 말을 들으며 기검룡은 무의식적으로 목에 걸린 황룡옥패를 만졌다.

문득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그분이 소손과 무슨 관계라도...?]

천강마존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렇다. 너는 황룡대제 기용천과 청해설랑(靑海雪랑) 모연옥과의 사이에서 난 그의 일점혈육이다.]

순간,

[아아...!]

기검룡은 마치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괜찮겠느냐?]

어느새 다가온 낙척문사가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기검룡은 전신을 경련하며 두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허나 차츰 그는 안정을 되찾았다.

[괜... 괜찮습니다.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이를 악문 채 힘겹게 천강마존을 응시했다.

찢어질 듯 흡떠진 그의 두눈은 무섭게 충혈되었고 악다문 입술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천강마존은 가슴이 쓰라렸다. 허나 그는 지금이 기검룡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임을 잘 알고 있엇다.

자칫 기검룡이 감정을 억제치 못한다면 강호에는 또다시 제 이의 천강마존이 탄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강마존은 침착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전부다. 이후의 판단은 네 스스로에게 달린 문제, 할아버지가 간섭할 일이 못된다. 다만 할아버지는 네가 강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검룡은 멍한 눈빛으로 허고을 쏘아보고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의 두 손은 너무도 힘주어 움켜쥐어 붉은 선혈이 터져 흘렀다.

허나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천강마존은 그의 모습을 대하기가 고통스러운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으아아... 아아___!]

파석도 정상에서는 바다를 뒤엎을 듯한 처절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쿠르르... 콰___ 릉___!

미친 듯한 파도의 소용돌이는 여전히 섬의 전부를 함락시킬 듯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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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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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겁난(劫難) 중의 인연 (1)

 

 

“쯧쯧! 하여간 계집만 보면 물건을 세운단 말이야!”

비틀거리며 초지에 내려선 철선동시는 혀를 찼다.

모옥 앞 꽃밭에서는 마면혈도가 임단심을 찍어 누른 채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저년이 대체 무슨 암기를 날렸기에 피할 수가 없었지?”

철선동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허벅지에 박힌 철정(鐵釘)을 뽑아들었다. 새파란 빛을 발하는 길쭉한 쇠못 형태의 암기였다.

“사망정(死亡釘)!”

그 쇠못을 본 순간 철선동시는 독사라도 만진 듯 놀람과 두려움이 뒤범벅된 음성으로 외쳤다.

사망정은 그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누군가의 신물(信物)이다.

비록 그 인물이 무림에서 활동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만 그의 공포스러운 무공과 잔혹한 술수를 떠올리자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철선동시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허벅지의 통증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철선동시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멍석을 말아간 듯이 화초들이 길게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그 흔적은 서쪽의 절벽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마면혈도에게 돌을 던진 것으로 보이는 소년은 찾을 수 없었다.

불안한 의혹을 가슴에 품고 두려움을 손끝에 간직한 채 철선동시는 모옥 앞으로 갔다.

임단심을 화초 위에 던져놓고 겁탈하는 마면혈도는 어느덧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마면혈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격렬하게 둔부를 들썩이고 있고 혈도가 제압당한 임단심은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유린당하고 있었다.

“지금이 한가하게 그 짓이나 할 때냐 말대가리야?”

팟!

철선동시는 버럭 외치며 마면혈도의 등덜미를 잡아당겼다.

마면혈도는 갑자기 임단심의 몸에서 떨어지게 되자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우라질 미친놈아! 마음이 있으면 이 형님이 먼저 즐긴 후에 즐길 것이지 도중에 방해를 해?”

마면혈도의 말의 그것처럼 거대한 남성에는 임단심을 유린한 흔적이 묻어있었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악다구니에 대꾸하는 대신 왼손을 불쑥 그자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철선동시의 손에는 사망정이라고 부르는 쇠못이 들려있었다.

“사... 사망정!”

순간 마면혈도의 성욕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찬물을 끼얹은 듯 변해버렸다.

그자는 이마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내뱉었다.

“설...설마 저 계집이 마황(魔皇)과 관계가 있다는 말...!”

마면혈도는 다시 한 번 자기가 강간하던 임단심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음탕한 눈빛이 아니라 두려움이 깃든 눈빛이었다.

철선동시가 무거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대형이 말한 삼보면천을 저 계집이 펼쳤다. 어쩌면 대형이 찾고 있는 자는 마황, 바로 그자인지도 모른다.”

마면혈도가 거듭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그건 안돼! 안돼! 대형의 무공이 강하기는 하지만 마황은 결코 당할 수 없다.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철선동시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말대가리, 그럼 마황과 관계가 있는 계집을 강간한 자넨 무슨 짓을 한 건가?”

“으으으..."

마면혈도의 손발이 덜덜 떨렸다.

마면혈도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에 속한다. 제 아무리 상대가 강하더라도 이같은 공포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헌데 마황이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마면혈도가 이름만 듣고도 공포에 떨게 되는 것인가?

정신이 아득해졌던 마면혈도가 갑자기 흉포한 눈빛을 발하며 소리쳤다.

“이 계집을 죽여서 수십, 아니 수백 수천 토막을 내고 기름에 태워서 재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버린다면... 제아무리 마황이라 하더라도 내가 한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마면혈도의 음성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배어있었다.

스르릉!

하지만 그자는 혈도를 뽑아들며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감히 마황에게 불경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철선동시는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황이 이번 일을 안다고 하더라도 직접 손을 쓴 것은 말대가리니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가 모르면 더욱 좋고...)

철선동시는 마면혈도가 내릴 결론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마면혈도로 하여금 손을 쓰게 하기 위해 말로써 그자를 자극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은 결코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교활한 심보가 깔려 있는 행동이었다.

사지를 활짝 벌리고 쓰러져 있는 임단심 앞으로 다가간 마면혈도는 눈을 질끈 감고 혈도를 내리쳤다.

번쩍!

혈도가 붉은 빛과 함께 싸늘한 한기를 내뿜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쉿!

한 가닥의 붉은 빛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와 마면혈도의 혈도를 가로막고 튕겨나갔다.

쨍! 하는 맑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칼도 붉은 빛이고 날아온 물건도 붉은 빛이었다.

“억!”

마면혈도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자의 혈도는 금옥(金玉)을 무우 베듯 할 수 있는 보도(寶刀)다.

그런데도 옆에서 날아온 붉은 빛은 튕겨져 나갔을 뿐 베어지지 않았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임단심을 없애려던 순간이었다.

그때에 맞춰서 자신의 행위를 방해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에 마면혈도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쉬쉭!

그 사이에 튕겨져 나갔던 붉은 빛이 방향을 바꿔 다시 마면혈도를 향해 날아들었다. 번개를 방불케 하는 속도로...

번쩍! 번쩍!

마면혈도도 이번에는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 혈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터텅! 쉬익!

붉은 빛은 혈도에 맞아 튕겨나갔다가 다시 빛살처럼 덤벼들 뿐이었다.

(대체 무슨 괴물이기에...)

마면혈도는 손아귀에서 진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철선동시는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기만 할 뿐 마면혈도를 위해 손을 쓰지는 않았다.

비록 삼괴의 일원으로서 함께 이름을 날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철저한 앙숙이었다. 자기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 한 상대방을 도울 관계는 결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상대방을 죽일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원수에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붉은 물체가 언제 철선동시 자신을 향해 공격의 방향을 돌릴지 모르는 일이다.

철선동시는 붉은 물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마면혈도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때 뒤로 물러서던 마면혈도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금관혈린사! 금관혈린사다!”

그자를 공격했던 붉은 물체는 바로 척포였다.

임청우도 모르게 호리병에서 빠져나온 척포가 임단심을 죽이려는 마면혈도를 막아선 것이다. 천고의 영물답게 척포는 임단심과 임청우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금관혈린사!)

마면혈도의 외침에 철선동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독사만 먹고 산다는 금관혈린사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독을 가진 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연신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마면혈도를 공격하는 붉은 물체는 머리에 황금빛 뿔이 달려있으며 그리 크지 않은 몸은 타는 듯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는 뱀이었다.

뱀들의 제왕일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독물(毒物)들의 제왕이기도 한 금관혈린사의 모습이 틀림없다.

금관혈린사는 품고 있는 독이 지독할 뿐 아니라 도검이 불침하여 쉽사리 죽일 수도 없다.

번쩍! 텅! 텅!

그 사이에도 마면혈도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금관혈린사, 즉 척포의 공격을 막아내며 물러서고 있었다.

마면혈도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주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다.

만약 어리석은 인물이었다면 상승의 무공을 익혀 무림의 최절정 고수의 반열에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면혈도 역시 금관혈린사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금관혈린사의 독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금관혈린사가 독기를 내뿜으면 이장 밖에 있는 황소도 쓰러뜨린다.

한데 금관혈린사는 집요하게 마면혈도를 물려고 덤빌 뿐, 독기를 내뿜지는 않았다.

(저 놈이 왜 독기를 뿌리지 않는 건가?)

마면혈도는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자는 척포가 임단심에게 해가 갈까봐 독기는 뿜어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철선동시가 놀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계집이 없어졌다!”

“뭐?”

마면혈도는 당황하여 하마터면 척포에게 물릴 뻔 했다.

 

(어머니가 없어졌다고?)

다시 절벽위로 올라오려던 임청우는 깜짝 놀랐다.

임청우는 철선동시가 철선으로 내뿜은 냉기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머릿속으로 북두무랑에서 본 천상열차분야도가 떠올랐다.

상하 좌우로 경계가 없이 펼쳐진 별의 바다...

광막한 넓이와 깊이를 지닌 그 별의 바다에 비하면 자신의 피를 얼어붙게 만든 냉기는 실바람만도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몸에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주관하는 북두칠성이 깃들어있기까지 했다.

그것을 깨닫자 얼어붙었던 몸에 감각이 갑자기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자신을 움켜쥐려던 철선동시가 허공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감각은 돌아왔어도 아직 자유롭게 움직이지는 못하는 몸으로 절벽을 향해 굴러갔다.

철선동시의 시선을 피해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임청우는 동굴 입구의 돌출부에 떨어졌다.

그곳에 누워 몇 번인가 긴 호흡을 들이고 내쉬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벌벌 기어 동굴로 기어들어간 임청우는 떠나면서 남겨두었던 활과 화살을 챙겼다. 마귀같은 두 괴물에게 화살이 통할지 모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헌데 화살 통을 등에 짊어지고 활은 목에 건 채 다시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가려는데 철선동시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어머니가 없어졌다니...

어머니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절벽의 삐져나온 부분을 잡고 기어 올라간 임청우는 머리만 내밀고 모옥 쪽을 살펴보았다.

“말 대가리! 넌 계곡 입구 쪽을 살펴봐라!”

철선동시가 마면혈도에게 고함을 치며 모옥 앞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마면혈도는 여전히 척포에게 밀리며 계곡 입구 쪽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어머니 임단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밤바람이 작은 천 조각 하나를 임청우 앞으로 날려 보냈다.

그것을 본 순간 임청우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얼굴 앞을 스치고 절벽 밑으로 사라지는 천조각에는 어머니의 체향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임단심이 유린당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 임청우는 그녀의 옷이 마면혈도에 의해 갈가리 베어졌음을 알지 못했다.

단지 어떤 이해하지 못할 느낌에 머리끝이 쭈뼜해졌을 뿐이다.

 

펑펑!

전력을 다해 장력을 쏟아내어 척포를 날려버린 마면혈도는 모옥 앞에 망연하게 서있는 철선동시 곁으로 달려갔다.

임단심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척포는 더 이상 마면혈도를 공격하지 않았다.

모옥 앞에 심어져 있었던 화초들은 짓이겨져 있고 그 위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임단심이 당한 무참한 유린의 흔적이다.

철선동시는 냄새로 임단심의 종적을 찾으려 했지만 도무지 찾을 도리가 없다.

한마디로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분명히 네 곳의 마혈(痲穴)을 짚어놓았는데...”

다가온 마면혈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라진 여자가 보통 여자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황과 관련이 있는 여자인 것이다.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겁에 질려 모옥을 뒤지고 비련곡의 풀뿌리 하나까지 살펴보았다.

 

허둥대는 두 괴물을 숨어서 지켜보던 임청우는 너무 깊어서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사라졌다면,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음이 틀림없다.

“저 말대가리가 어머니를...!”

임청우는 나직하게 내뱉었다.

저 멀리서 마면혈도가 바지도 입지 않은 채 허둥대며 돌아다니고 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절벽으로 몸을 던진 것이 말대가리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감히 절벽 위로 올라갈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 죽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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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달아난 신부

 

 

 

(천한 계집?)

숨어서 듣고 있던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철이 든 이래 남에게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모욕적인 말을 들은 때문이다.

모두 물러가라. 소성주는 내가 달래서 화를 풀게 할 테니...”

진상파가 분노에 치를 떨 때 일신재 입구에 이른 구숙정은 사우 일행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존명!”

사우는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철수한다!”

이어 그자는 앞장서서 일신재 앞을 떠났다.

사우의 뒤를 따라 일신재를 에워싸고 있던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전부 자리를 비워도 되나 몰라?”

그러게 말일세.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는 법인데...”

관목 앞을 지나가는 철위사들의 우려 섞인 속삭임이 진상파의 귀에 들렸다.

이 친구들 참, 눈치 없긴... 내총관께서 우리 보고 물러가라고 한 이유를 정말 모르겠나?”

철위사중 한명이 수군대는 동료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럼 혹시...”

설마 소성주님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걸 방해받지 않으려고...”

우려를 표하던 자들도 비로소 깨달았는지 안도의 표정이 되었다.

이럴 때 방해하지 말고 자리를 피해주는 게 아랫것들의 도리야.”

흐흐흐... 아무렴 그렇고 말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철위사들은 모두 일신재 앞을 떠났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인가? 뜨거운 시간을 보낸다니...)

숨어서 듣고 있던 진상파는 불길하고도 끔찍한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고개 돌려 일신재 쪽 보니 구숙정이 주변을 살피며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문을 닫기 직전 구숙정의 얼굴에 떠오르는 야릇한 미소가 진상파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저 천한 년이 이 밤중에 모용준의 거처를 찾아온 이유가...)

생각하기도 싫은 혐오스러운 상상으로 진상파의 온몸이 벌벌 떨렸다.

(만일... 만일 내 생각이 맞다면...)

진상파는 치를 떨며 관목 뒤에서 나와 일신재 쪽으로 다가갔다.

(제왕성이고 뭐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진상파는 제멋대로 떨리고 후들 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일신재의 창문으로 접근했다.

그런 그녀가 확인한 것은 끔찍하고도 절망적인 사실이었다.

 

어쩜... 어쩜 이렇게 늠름해지셨을까? 그 귀엽던 아기가...”

... 숙정 당신이 잘 먹이고 잘 키워준 덕분이지 뭐.”

창문을 통해 들리는 난잡한 대화가 진상파의 귀에 천둥처럼 들렸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리는 모용준과 구숙정의 대화를 통해 진상파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숙정은 원래부터 제왕성 소속은 아니었다.

모용세가 출신인 그녀는 모용준의 유모였으며 둘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은밀한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었다.

모용준은 섭장천의 양자가 되어 제왕성으로 들어올 때 내연관계인 구숙정을 데리고 와서 내총관으로 앉혔던 것이다.

어떻게... 절 어떻게 하실 거예요 도련님?”

...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 내일부터 진가년이 도련님의 공식적인 마누라잖아요. 그럼... 나이 들고 볼품없어진 저같은 년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겠지요?”

... 그럴 일 없어. 명목상으로는 진상파 그년이 내 본처라 해도... 제왕성의 실질적인 안주인은 숙정 당신이야. 난 절대 당신을 홀대하거나 버리지 않아.”

... 고마워요 도련님! 고마워요!”

... 진가년이 필요한 건 내 자식을 낳을 때까지야. ... 자식이 생겨서 황금성을 공식적으로 집어삼킬 수 있게 되면 그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 아비 곁으로 보내버릴 계획이야.”

... 도련님 말씀을 들으니 진가년이 불쌍하게까지 느껴지네요.”

... 진가년 생각은 그만하고 가능한 빨리 내 아이를... 내 자식을 낳아줘. ... 그럼 그 아이로 제왕성의 후계자를 삼을 테니까.”

... 노력해볼게요 도련님.”

 

너무나도 엄청난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현실감이 없어졌다.

진상파는 지금 자신이 듣고 경험하는 게 꿈속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짐승들!)

진상파는 이를 갈며 뒷걸음질로 일신재의 창문에서 떨어졌다.

(날 이용만 하고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이거지? 하지만 너희 년놈들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황금성의 동전 한 푼도 제왕성의 것이 되지 않을 테고...)

진상파는 꿈속을 걷는 듯 허우적거리는 걸음으로 일신재에서 멀어졌다.

모용준과 구숙정은 자신들이 방금 전 치명적인 재앙을 야기했음을 알 리 없었다.

 

* * *

 

밤이 아주 깊어 제왕성에 불이 켜진 건물이 드물다.

하지만 제왕성의 정문 일대는 여전히 대낮같이 환했다. 손님들을 태우고 왔던 마차들이 줄줄이 정문을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일 있을 혼례식을 위해 무려 만 명이 넘는 하객이 제왕성을 찾아왔다.

제왕성이 아무리 규모가 커도 그 많은 하객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찾아온 하객들은 돌아갔다가 아침에 다시 오도록 권유받았다.

진상파는 제왕성을 빠져나가는 마차들 중 하나에 몸을 싣고 있었다.

마차의 주인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부유한 상인이어서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두고 보자! 두고 보자!)

혈도가 짚여 기절한 마차 주인 옆에 쪼그려 앉은 채 진상파는 가슴 속의 칼날을 벼리고 또 벼렸다.

얼마 전 일신재에서 엿들어 알게 된 추악한 비밀은 설령 죽어 재가 된다 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모용준이 황금성의 재물을 노리고 자신과 결혼을 하려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

(가능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그나마 제왕성의 폭압으로부터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곳은 집뿐이니...)

금릉(金陵)에 자리한 황금성까지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진상파였다.

(모용준! 구숙정! 나 진상파를 적으로 돌린 게 얼마나 끔찍한 실수인지 알게 해줄 것이다.)

진상파는 초조한 마음을 살의와 분노로 다스리려 애썼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차는 천천히 제왕성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 * *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제왕성은 발칵 뒤집혔다.

사대무력집단을 포함한 제왕성의 모든 무사들이 나서서 제왕성의 내외를 수색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일찍 깨어난 하객들에게는 거처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는 살벌한 경고가 떨어졌다.

 

* * *

 

지금 그걸 말이라고 씨부리는 것이냐?”

혈가람의 화등잔만한 눈에서 불이 뿜어졌다.

오늘 혼례를 올리기로 되어있는 신부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이유와 사정을 아는 놈이 한명도 없다는 게 말이 돼?”

혈가람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이유는 진상파가 사라진 사실을 보고 받은 때문이다.

대청 안에는 외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을 비롯해서 여러 명의 나이 든 무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모용준은 오만상을 쓰며 상좌에 앉아있고 그의 뒤에는 구숙정이 병아리를 지키는 암탉같은 모습으로 서있다.

고정하십시오 부성주님. 살천인조께서 본성의 사대무력집단 전부를 동원하여 수색에 나서셨으니 곧 상황 파악이 될 것입니다.”

궁무독이 혈가람의 격노를 갈아 앉히려 애쓰며 말했다.

듣기 싫다.”

혈가람은 솥뚜껑만한 손을 거칠게 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자존심이 상한 궁무독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찡그려졌다.

일이 터진 후에 수습하면 뭘 해? 이런 일이 애초에 벌어지지 않게 했어야지! 궁무독 너는 외총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누가 제왕성을 들고 나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냐?”

면목이 없습니다 부성주님.”

궁무독은 치미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게 대체 무슨 개망신이냐 말이다. 제왕성이 소성주의 신부될 계집 하나 지키지 못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냐?”

혈가람의 질타에 할 말이 없는 궁무독과 무사들은 고개 떨군 채 듣고만 있었다.

당장 진상파, 그 년을 찾아내서 끌고 와라! 그년을 찾지 못하면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올 생각 말고!”

혈가람은 이를 바득 바득 갈면서 손을 저었다.

존명!”

진소저를 반드시 찾아서 데려오겠습니다.”

궁무독과 무사들은 일제히 포권을 한 후 대청을 빠져나갔다.

이제 대청에는 혈가람과 모용준, 구숙등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밥 버러지같은 놈들! 제왕성의 이름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대청 밖으로 멀어지는 궁무독 일행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혈가람은 성난 황소처럼 씨근거렸다.

상심이 되겠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진가년을 붙잡아 와서 소성주의 품에 안겨줄 테니...”

그러다가 모용준을 돌아보는 혈가람의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그걸 보며 모용준은 사람의 표정이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야 대사님만 믿을 따름입니다.”

모용준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저 머저리들은 도무지 믿음이 안가. 노납이 직접 성을 나가서 진가년을 찾아보도록 하겠네.”

혈가람이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셨다.

살천인조께서 나서셨는데 대사까지 수고하실 것까지야...”

곧 좋은 소식 갖고 돌아오도록 하겠네.”

휘익!

모용준의 만류에도 혈가람은 바람같이 대청 밖으로 날아나갔다.

저 땡중이 도련님께 잘 보이려고 갖은 재롱을 다 부리는군요.”

그 모습을 본 구숙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준걸(俊傑)인 게야.”

모용준도 비웃음을 흘렸다.

준걸이라뇨? 중놈 주제에 살인을 밥 먹듯 하고 술과 계집에 환장하는 저 땡중이?”

옛말에 시세(時勢)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고 했잖아. 저 땡중은 다음 대 천하의 주인이 나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거야.”

옳거니! 준걸이라는 게 그런 뜻이었군요

황금성의 인간들은 뭐하고 있어?”

진가년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우리보다 더 자지러지게 놀라더군요.”

그렇다는 건 진상파를 황금성의 인간들이 빼돌린 건 아니라는 건데...”

모용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고독모모를 비롯해서 진가년의 호위들인 백팔금차 전원은 이미 본성을 빠져나가 수색을 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지금은 황금성의 몇몇 늙은이들과 아랫것들만 성중에 남아있는 상태구요.”

혹시 고독모모나 백팔금차가 진가년을 먼저 찾아내는 거 아니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모용준의 우려 섞인 말에 대답하면서 구숙정은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반짝!

그러자 천장 구석에서 짐승의 눈 한 쌍이 반짝이며 나타났다.

휘익!

이어 천장에서 아래로 날듯이 뛰어내린 것은 한 마리의 담비였다.

특이하게도 온몸이 황금빛 털로 덮인 그 담비는 한 쌍의 눈은 붉은 핏빛이다.

그놈은...!”

담비를 본 모용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본교(本敎)의 영물인 섬전초(閃電貂)예요.”

구숙정은 금모적안(金毛赤眼)의 담비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끼이! !

그러자 섬전초라 불린 담비는 가볍게 튀어올라 구숙정의 품에 안겼다.

원래 담비는 체격은 작아도 날래고 사납기 이를 데 없는 짐승이다.

호랑이 잡는 담비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 담비들 중에서 우연히 천고영약을 먹어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이 섬전초다.

그놈은 호랑이도 어렵지 않게 잡아 죽이는 흉포함과 함께 빠르기가 번개같아서 섬전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혹시 몰라서 이놈을 데리고 왔는데 유용하게 써먹게 되는군요.”

구숙정은 자신의 품에 안긴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여간 유모의 준비성은 알아줘야한다니까.”

이 아이는 빠르기가 번갯불 같을 뿐 아니라 후각이 사냥개들보다 몇 배 더 민감해요. 진가년의 냄새가 밴 물건만 있으면 그년이 어디에 있든 안내해줄 거예요.”

구속정은 말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모용준이 따라서 돌아보니 철위사대의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가 대청 옆에 달린 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져왔습니다 외총관님.”

다가와서 모용준에게 인사하는 사우의 두 손에는 몇 벌의 여자 옷이 들려있다.

그 옷가지들은?”

진가년이 입던 옷들이에요. ()대주가 손을 써서 구해왔군요.”

구숙정은 섬전초의 얼굴을 사우가 내미는 옷가지에 대어주었다.

휘익!

코를 벌름거리며 옷가지에 배린 냄새를 맡던 섬전초는 이내 눈을 빛내며 구숙정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려선 섬전초는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휘익! 끼이!

그러다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빠르기로 대청에서 달려나갔다.

발이 특히 빠른 자들을 데리고 섬전초를 따라가라. 진가년에게 안내해줄 것이다.”

구숙정이 재빨리 사우에게 지시했다.

험하게 다뤄도 상관없으니 다른 인간들 보다 먼저 진가년을 찾아내서 끌고 와라. 소성주님께 드리기 전에 내 손으로 단단히 교육을 시켜야하니까.”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냉혈철심 사우는 대답과 함께 대청에서 날아갔다.

대청 밖에는 십여 명의 무사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철위사들인데 경신술이 특기인 자들이다.

따라와라!”

사우는 이미 상당히 멀리 간 섬전초를 따라서 날아가며 외쳤다.

예 대주님.”

가자!”

철위사들도 바람같이 몸을 날려 사우를 따라갔다.

곧 섬전초와 사우 일행은 제왕성을 빠져나갔다.

혼례를 앞두고 달아난 신부를 찾아내기 위한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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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싹 트는 연정(戀情)

 

 

푸른 색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의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과 거의 맞닿아 있다.

지난 밤 흑왕이 떨어진 절벽인데 윗부분이 앞쪽으로 비스듬하게 나와 있어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절벽 아래쪽과 연못 사이의 넓지 않은 바닥에는 동물들의 뼈가 흩어져 있었다. 강미루와 흑왕처럼 길을 잘못 들어 절벽에서 떨어진 놈들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절벽의 수십 장 위쪽에는 집채만한 바위가 하늘을 향해 돌출해있다.

어젯밤 가파른 경사를 미끄러져 내리던 흑왕이 뛰어넘었던 그 바위다.

만일 흑왕이 그 바위를 뛰어넘기 위해 도약하여 멀리 뛰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바위에 부딪혀서 즉사했거나 절벽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서 피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강미루는 아찔해졌다.

흑왕의 도약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연못에 빠지지 못하고 절벽 아래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럼 강미루 자신과 흑왕도 저 이름 모를 짐승들의 백골처럼 되어서, 혹시 살아남은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비스듬히 앞쪽으로 기울어진 절벽의 중간 부분에 낀 이끼가 마치 글자의 모양을 이루고 있는 듯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창평곡(蒼平谷)>이라고 읽혔다.

(이 분지의 이름이 창평곡이었군.)

(전에 누군가 여기에서 살았었네.)

백남빈과 강미루는 하나하나가 사람보다도 더 큰 창평곡이라는 글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누군가 절벽에 깊이 글을 새겨놓았었는데 그늘이 져서 서늘한 그곳에만 이끼가 잘 자라 글씨를 푸르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살았었던 흔적을 발견한 두 사람은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창평곡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빠져나갈만한 길은 없었다. 창평곡 전체가 수백 길의 절벽으로 둘러싸여있는 항아리 같은 구조였기 때문이다.

모험을 하면 절벽을 올라가지 못할 갈 것도 아니지만 그럴 경우 목숨을 걸어야한다.

하물며 왼쪽 다리에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백남빈으로서는 수백 길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창평곡 내에 과일이 많아서 굶어 죽을 염려는 없다는 점이었다.

 

창평곡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백남빈은 속이 타들어갔다.

자신은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대대적인 중원 침공이 임박했다는 증거들을 무황성에 전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을 띠고 있다.

헌데 이 괴상한 골짜기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전서구라도 무황성에 잘 도착했을까?)

답답한 생각에 앞쪽에 앉아있는 강미루에게 집적거렸다.

"소저! 혹시 철령보에서 무황성으로 날린 전서구들도 모두 붙잡은 거요?"

그러나 강미루는 무슨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백남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소저!”

백남빈은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해있는 강미루의 손목을 잡아 주의를 환기시켰다.

... 왜 이래요?”

손목이 잡힌 강미루는 백남빈이 혹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당황했다. 아랫도리를 사실상 발가벗은 채 바로 앞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백남빈이 이성을 잃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걸 방해했다면 미안하오. 소저에게 물어볼 게 좀 있소.”

... 물어보세요.”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신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 안심과 동시에 아쉬움을 느꼈다.

"혹시 우리가 무황성으로 날려 보낸 전서구들을 전부 잡았소?"

백남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려장은 해동청(海東靑)을 비롯한 많은 매를 길들여 부리고 있다. 그 매들을 모두 동원했다면 철령보의 전서구들은 전멸했을 수도 있다.

다행히 강미루는 고개를 저었다.

"전서구를 모두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우린 철령보에서 나오는 전령들을 집중적으로 노렸어요."

강미루의 말에 백남빈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전서구들이 전멸하지만 않았다면 무황성과 명나라 황실에서도 신랑성의 동향에 어느 정도는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직접 증거를 제출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났다.

 

"허벅지의 상처는 어때요?"

강미루가 백남빈을 돌아보며 미안한 듯이 물었다.

"썩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붓고 열이 나오."

"당신의 그 신기한 반지로도 치료할 수 없는 건가요?"

강미루가 근심스럽게 다시 물었고 백남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소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시험해 봤지만 이 반지는 독을 제거하는 효능만 있는 것 같소"

강미루는 고개를 계속 뒤로 돌리고 이야기하기가 거북하고 힘이 들었다.

!

그래서 별 생각없이 백남빈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 바람에 풀로 만든 치마가 흔들리며 상아같이 희고 매끄러운 속살이 보일 듯 말 듯하여 백남빈의 눈을 어지럽혔다.

상체에 걸친 헐렁한 남색상의 사이로도 탐스러운 젖가슴이 다 가려지지 못하고 살짝살짝 엿보였다.

백남빈은 눈앞이 아롱거려 주위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깊은 가을인데도 여기는 참 따뜻하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흑왕의 등에 마주 보고 앉은 백남빈과 강미루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이 샘솟았다.

두 사람은 어느덧 황홀경에 빠져들어 자기들이 앉아있는 곳이 말등인지 소등이지도 잊어버렸다.

서로에 대해 묻고 대답하며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인 상대라는 사실 때문인지 강미루는 백남빈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좋게 보였다.

그가 자기 집안과 원수지간인 철령보의 소보주라는 사실도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백남빈 역시 여자와 이토록 가까이, 이토록 오랫동안 있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지금의 상황이 무작정 좋기만 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대려장 장주의 둘째 딸과 깊이 마음을 나누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무황성에 대한 근심이 감해지기까지 해서 백남빈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이 순간만이 시간의 전부를 차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남빈은 무심코 말했다. 깊은 정이 깊이 배인 말이다.

그러나 강미루는 자기 나름대로의 감정에 도취되어 있었기에 그 말을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다.

단지 백남빈의 중얼거림에 스며있는 애틋한 정만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천하의 여장부인 내가 그토록 경멸스러워하던 다른 여자들처럼 사내 앞에서 교태나 부리고 있다니...)

강미루는 차츰 혼란한 감정에서 벗어나며 한탄했다.

(미루야! 미루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지금 집에선 아버지와 형부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넌 원수인 철령보의 소보주에게 푹 빠져서 집에 돌아갈 생각마저도 않는구나.)

그렇게 자책을 하면서도 강미루는 이미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연정(戀情)이라는 피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치명적인 덫에...

 

***

 

이 앞쪽에서 실종된 동료들이 있단 말이지?”

신가람은 앞쪽에 펼쳐진 계곡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침 점호에 일곱 명의 형제가 빠져서 확인을 해봤더니... 흑왕의 것으로 보이는 발굽자국을 발견하고 이 계곡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대려장의 기마대를 이끌고 당산산맥까지 온 구철륵(具鐵勒)이란 중년의 무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곱 명중 세 명은 기진한 모습으로 계곡 안쪽에서 발견되었지만...”

구철륵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신가람과 구철륵에게서 멀지 않은 뒤쪽에 세 명의 사내가 동료들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그자들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십 년쯤 나이를 먹은 듯 탈진한 모습으로 누워있다.

나머지 네 명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구철륵은 다시 계곡 쪽을 보며 좀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미혼진(迷魂陣)이 설치되어 있군.”

신가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계곡 쪽을 보았다.

보기에는 그저 그런 계곡이다.

하지만 그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네 명은 실종되고 세 명은 반송장이 된 채 발견 되었다.

계곡 안쪽에 사람을 가두고 탈진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속하들도 그리 생각하고 깊이 진입은 하지 않았습니다.”

구철륵이 신가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잘 했다. 다시 돌아 나온 셋은 그나마 침착해서 들어갔던 길을 되짚어 빠져나왔지만 나머지는 공포에 사로잡혀 밤새 치달리다가 탈진해버렸을 것이다.”

신가람은 계곡 안쪽을 살피며 눈을 번뜩였다.

그는 무공이 강진남을 한참 능가할 뿐 아니라 기문진법의 재주도 장인에 못지 않다.

덕분에 계곡 안쪽에 흉험한 진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십 년 넘게 진법을 연구하고 공부해온 신가람으로서도 처음 접해보는 미지의 진법이다.

그 어떤 강적보다도 위험한 곳이다. 동료들에게 연락하여 누구도 이 계곡 근처로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신가람은 계곡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구철륵에게 말했다.

... 조심하십시오 공자님!”

구철륵과 대려장의 무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들을 등지고 천천히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며 신가람은 오랜만에 잠잠하던 몸 속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진법이 구축되어 있는지 확인해보자.)

계곡 일대에 설치 된 진법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과 승부욕이 신가람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

 

정말 못 말리는 것이 젊은이들의 벼락같은 사랑이다.

백남빈과 강미루의 감정적 연대는 짧은 시간이건만 더할 수 없이 깊어 갔다.

서로에 대한 연모의 감정에 취해 두 사람은 흑왕이 창평곡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왔을 때 백남빈과 강미루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강미루의 얼굴은 발그레하여 햇살 아래 더욱 붉었고 백남빈의 얼굴도 행복감에 도취되어 상기되어 있었다.

흑왕이 연못가에 와서 발을 멈추었을 때야 강미루가 활짝 웃으며 백남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헌데 뛰어내리는 순간 백남빈하지 않은 풀잎 치마가 위로 훌렁 올라가는 바람에 그녀의 눈부신 아랫도리가 고스란히 들어나 보였다.

잘 익은 복숭아같이 탐스러운 엉덩이가 펄럭이는 풀잎 치마 밖으로 언듯 들어났다가 숨어버린다.

강미루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백남빈은 차마 못 볼 것을 보고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뛰어내린 강미루가 말에서 내리려는 백남빈을 향해 팔을 벌렸다.

백남빈은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다리를 다친 상태에서 훌쩍 뛰어 내리는 것이 여의치 않아 강미루의 손에 몸을 맡겼다.

비록 소녀에 불과하지만 무공을 익힌 강미루의 완력은 대단하여 백남빈의 몸을 가볍게 받아 땅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이다.

하지만 항아리 형태인 깊은 골짜기에서 낮은 짧을 것이 불문가지다.

백남빈은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말을 꺼내기가 멋쩍었다.

<잠자리>라는 말이 잠은 자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남녀 간의 육체관계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하늘을 보았다가 숲을 보았다가 했다.

(저 사람이 어젯밤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백남빈이 갑자기 하늘을 보고 숲을 보고 하자 강미루는 덜컥 겁이 났다. 낮선 곳에서 밤에 홀로 남겨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몸서리 처지도록 경험했었다.

또 혼자 남겨질 수는 없다.

강미루는 백남빈을 부축하는 척하면서 그의 허리띠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어젯밤에도 나 혼자 도망치려고 했던 게 아닌데...)

백남빈은 강미루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지난밤 자신이 처했던 상황과 사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아야 한다면 언젠가 알 때가 있겠지.)

그것이 백남빈의 생각이었고 원래 성격이었다.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은 진지하게 성의를 다하지만 자신의 사정에 대해서는 무심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양부 독안룡 이탁의 성격을 닮지 않았으니 아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생부 백무염으로부터 물려받은 성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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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뤄진 혈겁

 

 

(나 연남천은 팔십 평생 단 한 번도 도전을 회피해 본 적이 없다. 비록 저 어리석은 자들이 남의 꾐에 빠져 도전해 오기는 했으나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서늘한 안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창밖에 운집해 있는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 모두는 나 연남천과 함께 이곳 고독애에 뼈를 묻게 되리라! 비록 무형지독에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너희들을 지옥으로 함께 데려갈 힘은 남아 있으니...!)

고독마야는 서탁 위로 손을 뻗어 혈마대장경을 집어 들었다.

(먼저 이 저주받은 마물들부터 없애야 하리라. 못된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세상에 크나 큰 화근이 될 테니...!)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진 혈마대장경에는 전설에 전해지는 대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역천마공(逆天魔功)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단순히 파괴력으로 따진다면 비록 고금오대고수의 일인인 흡혈마조가 남긴 혈마대장경상의 무공도 고독마야의 일신 절기보다는 못했다.

그러나 혈마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마공들의 잔혹하고 신랄한 면은 고독마야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해서 고독마야는 죽기 전에 아예 이 화근덩어리를 없애버릴 작정을 한 것이다.

흡혈마조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비록 저주받을 마공이긴 해도 필생의 성취라고 남겼는데 없애 버려야 하니...”

고독마야는 고소를 흘리며 삼매진화를 일으켜 혈마대장경을 태워버리려 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우우!”

돌연 한소리 날카로운 장소성이 고독애 아래에서 들려왔다. 걸걸하기는 하지만 그 장소성은 분명 여자의 것이었다.

(이 목소리는...!)

막 혈마대장경을 재로 만들어 버리려던 고독마야는 흠칫하며 삼매진화의 운용을 멈추었다.

쐐애애액!

그 직후 고독애 측면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쪽에서 한줄기 흐릿한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올랐다. 그 인영이 날아오르는 속도는 너무도 빨라서 하나같이 천하를 위진 시키고 있는 고수들인 군웅들의 눈에도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전모 냉약빙이다!”

막아랏!”

고독헌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있던 군웅들 사이에 분분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토록 빠른 경신술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은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단 한 명뿐임을 안 때문이다.

멈춰라 전모!”

못 들어간다!”

파팟! 쐐애액!

근처에 있던 군웅들이 급급히 날아올라 절벽 위로 솟구쳐 오르는 인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쏴아아아!

고독애 측면의 절벽을 날아오른 인영은 자신을 막아서려는 군웅들의 머리 위를 한 걸음에 뛰어넘어 고독헌 쪽으로 날아갔다.

훤칠하다 못해 장대한 체격을 지닌 그 인영의 이같은 가공할 경신술은 이곳에 운집한 무림의 최고 고수들을 닭 쫓던 개처럼 만들어버렸다.

잡아랏! 혈마대장경이 전모의 손에 들어가면 끝장이다!”

... 서랏!”

쐐애액! 휘익!

일차 저지에 실패한 군웅들은 저마다 고함을 터트리며 고독헌 쪽으로 날아가는 인영의 뒤를 쫓아갔다.

절벽을 날아오른 후 일거에 군웅들의 포위망을 날아 넘은 여인은 다름 아닌 전모 냉약빙이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이같은 경이적인 경신술을 발휘할 수 있다.

죽고 싶은 작자들은 와라!”

단번에 군웅들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고독헌 앞에 내려선 냉약빙은 빙글 돌아서며 군웅들을 향해 사나운 일갈을 터뜨렸다.

피핑!

동시에 그녀의 손이 휘둘러지며 검붉은 구슬 하나가 추적해오는 군웅들을 향해 던져졌다.

(저것은...!)

원래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유성신검황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한 눈에 냉약빙이 던져낸 검붉은 구슬이 무엇인지 알아본 것이다.

피해라! 굉천벽력탄이다!”

유성신검황의 입에서 다급한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한걸음 늦고 말았다.

콰르릉! 콰콰쾅!

수십 개의 천둥이 일제히 작렬하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강력한 폭발이 장내를 휩쓸었다.

드드드드! 콰아아아!

그와 함께 고독애 전체가 무너질 듯 뒤흔들리면서 시뻘건 화염과 매캐한 화약 연기가 수십 장을 뒤덮었다.

크아악!”

케에엑!”

처절한 비명이 하늘을 찌르고 일거에 수십 명의 군웅들의 육신이 갈가리 찢겨 날아갔다.

굉천벽력탄이 터진 자리에는 깊이 삼장, 너비 십여 장의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그 주위로 터지고 그슬린 인간의 육신들이 널려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벽력당(霹靂堂)의 화기를 지니고 있다니...!”

히익!”

몸을 날린 게 늦은 덕분에 살아난 군웅들은 사색이 되어 고독헌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놀란 개미떼처럼 흩어지는 군웅들을 바라보며 냉약빙의 두 눈은 싸늘한 한광을 토해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들은 경거망동해도 좋다!”

칠척 가까운 거구로 고독헌 입구를 완전히 가린 채 우뚝 선 냉약빙은 오른손을 번쩍 쳐들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몇 알의 검붉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바로 방금 전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던 굉천벽력탄이었다.

냉약빙의 수중에 들린 굉천벽력탄을 본 독천존과 유령마제의 안색이 낭패로 물들었다.

으득! 저 계집이 산통을 다 깨는군!”

독천존과 유령마제도 일세를 풍미하는 고수들이긴 하지만 굉천벽력탄의 파괴력만큼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냉약빙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내최강의 경공술을 지니고 있다. 만일 냉약빙이 자신들을 폭사(爆死)시킬 작정을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냉약빙이 번개가 치는 듯한 빠르기로 달려들어 던지는 굉천벽력탄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독천존과 유령마제가 낭패함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명심해라! 고독헌에 접근하는 놈에게는 반드시 굉천벽력탄을 안겨줄 것이다!”

냉약빙은 군웅들에게 경고를 남기고는 거구를 홱 돌려 고독헌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두가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장내의 그 누구도 냉약빙의 가슴 섶이 유난히 불록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허허! 한 걸음 늦었다 약빙아!”

고독마야는 고독헌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냉약빙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무하기만 하던 그의 두 눈에 지금 이 순간만은 따스한 정감이 깃들었다. 그것은 냉약빙이야말로 고독마야가 이 하늘 아래에서 마음을 주고 있는 단 한 명의 친인(親姻)이기 때문이다.

먼 친척 사이인 두 사람은 비록 조손(祖孫) 사이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사이좋은 오빠고 누이동생이었다.

게다가 고독마야가 자신의 무공을 가르친 유일한 존재가 냉약빙이다. , 고독마야에게 냉약빙은 누이동생일 뿐 아니라 제자이기도 한 것이다.

오라버니...!”

칠척 거구의 냉약빙이 들어서자 그리 넓지 않은 고독헌 안이 꽉 차 보인다.

냉약빙도 본래는 평범한 계집아이였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같은 어마어마한 거구가 된 데에는 세상이 모르는 사정이 있었다.

냉약빙은 어린 시절 우연히 거령삼왕(巨靈蔘王)이라는 천고의 영약을 복용하게 되었다.

거령삼왕은 산삼의 일종으로 기사회생의 약효를 지니고 있다. 다만 그 약효가 지나쳐서 복용한 사람의 체격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만들어버리는 부작용이 있다. 거령(巨靈)이라는 이름은 그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거령삼왕을 복용한 덕분에 냉약빙은 무려 오갑자(五甲子)에 이르는 막강한 내공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여자임에도 칠척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체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고독마야는 냉약빙의 막강한 내공과 엄청난 체격을 살리기 위해 집중적으로 경신술을 가르쳤고 그 결과 냉약빙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인물이 되었다.

 

, 중독당하셨군요 오라버니...!”

고독헌 안으로 들어선 직후 냉약빙은 사색이 되었다. 고독마야가 지독한 극독에 중독된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바득, 잠깐만 기다리세요. 서래음에게서 해약을 빼앗아오겠어요!”

냉약빙은 이를 바득 갈며 고독헌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오라비를... 부끄럽게 만들 작정이냐 약빙아?”

하지만 고독마야의 나직한 한 마디 말에 냉약빙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고독마야는 자존심이 극도로 강한 인물이다. 살기 위해서 남에게 구걸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크흐윽, 오라버니...!”

냉약빙은 분노와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 돌림병으로 일가 피붙이를 모두 잃은 그녀에게 고독마야만이 유일한 친인이다.

헌데 그 고독마야마저 지금 중독당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울지 마라 약빙아! 인간이란 언제고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일 뿐...!”

고독마야는 오열하는 냉약빙을 향해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냉약빙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더할 수 없이 따스한 정감이 담겨져 있었다.

하여간 잘 왔다. 저 어리석은 작자들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기 전에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는데, 이제 네게 그것을 맡기면 되겠구나.”

고독마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 쓰레기들과 동귀어진하실 작정인가요 오라버니?”

하지만 냉약빙은 깜짝 놀라며 고개들 들어 고독마야를 올려다보았다.

쓰레기들이라니...! 그래도 저자들은 최소한 한 지역의 패자들인 대단한 고수들 아니냐?”

고독마야는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마풍운록에 기록된 자들을 모조리 동반하여 저 세상에 간다면 손해 볼 것도 없다!”

냉약빙은 고독마야의 그 말에 질겁했다.

, 그래서는 안돼요 오라버니...!”

그러나 고독마야의 뜻은 이미 확고해진 상태였다.

비록 너라고 해도 나를 막지는 못 한다 약빙아!”

부드러운 가운데 단호한 결의가 깃든 음성으로 말하는 고독마야를 올려다보며 냉약빙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소매에게는 오라버니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만한 수단이 있어요!”

그녀가 자신에 차서 장담했지만 고독마야는 믿지 않았다.

그래? 그것이 무엇이냐?”

고독마야는 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자신의 결심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내포한 미소였다.

그러나 고독마야는 이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바로 이 아이가 소매의 무기예요!”

냉약빙이 눈물을 닦으며 자신의 가슴 섶을 좌우로 벌려보였다.

“...!”

순간 고독마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몸으로 한 차례 세찬 경련이 스쳐가기까지 했다.

냉약빙의 헐렁한 겉옷 안쪽에는 머리를 흰 천 조각으로 동여맨 사내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서너 살 쯤 되어 보이는 그 사내아이를 본 순간 고독마야는 숨을 죽였다.

(천골(天骨)이다!)

한눈에 사내아이가 세상에 다시없을 자질을 타고 났음을 알아본 것이다.

물론 사내아이는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었다.

설마 오라버니께서 팔십 평생 이룩한 성취가 절전(絶傳)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시겠죠?”

고독마야가 말을 잃을 정도로 망연자실해 있을 때 냉약빙이 소중하게 품고 있던 사내아이를 내밀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정말 교활한 아이구나 약빙아!”

고독마야의 창백한 안색에도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그의 깡마른 두 손이 어느새 냉약빙이 내미는 사내아이를 향해 뻗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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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九 章

 

            古今第一人

 

 

[! 저놈은 만년백경(萬年白鯨)!]

그렇다. 바로 위에는 마치 거대한 섬을 방불케 하는 하얀 고래가 막 사해선문의 선단을 향해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딪쳐 오고 있었다.

기검룡의 외침에 중인들은 모두 대경했다.

만년백경은 바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전설과 같은 영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기검룡은 달려오는 백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놈은 내가 자기의 내단(內丹)을 갖고있는 것을 알고 쫒아오는 것 같구나.]

그 말에 사해신룡은 안색이 변했다.

[용아, 네가 내단을 갖고있단 말이냐?]

이때,

[! 피해라! 부딪치면 안된다!]

경악성이 울렸다.

허나 이미 늦었다.

___! 우지끈___!

삽시간에 십여 척의 선박이 풍지박살났다.

도저히 만년백경의 힘을 막을 수가 없었다.

기검룡은 입술을 물며 결심했다.

[숙부님, 용아는 저놈을 유인해 갈테니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그 말에 깜짝 놀란 것은 능소취였다.

[안돼! 오빠! 가지마, 가면 안돼...!]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매달렸다.

기검룡은 그녀를 번쩍 안아 뺨을 비비며 말했다.

[염려마, 다시 만나게 될거야, 이 용아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으니까.]

다음 순간 기검룡은 그녀를 내려놓고 몸을 휘익 날렸다.

[조심하거라, 용아!]

사해신룡의 외침이 들렸다.

[___ ! 이놈아! 난 여기 있다!]

기검룡은 외치며 파도를 밟고 백경을 향해 날아갔다.

콰르릉___ ___ !

백경은 마침내 그를 발견하고 방향을 돌렸다.

[하하하... 날 쫓아와라! 내단은 아직도 네 품속에 있다.]

기검룡은 방향을 사해선문과 정반대로 돌려 파도를 박차고 날아갔다.

___ ___!

백경은 빛살같이 그의 뒤를 쫓았다.

[용오빠...!]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능소취는 울먹였다.

 

파석도(破石島).

기검룡은 전신이 물에 흠뻑 젖은 채 파석도에 돌아왔다.

콰르릉___ ___ ___!

만년백경은 섬 주위에서 마구 몸부림치고 있었다.

백경은 내단을 잃어 점점 기력이 쇄잔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악착같이 기검룡을 쫓아왔으나 그를 자비 못했던 것이었다.

[하하하... 백경아! 내단은 미안하지만 돌려 줄 수가 없구나!]

기검룡은 품속에서 유백색의 내단을 꺼내며 대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는 내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 내가 먹노라... 으윽!]

문득 내단을 삼킨 순간 기검룡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전신이 엄청난 열기에 휩싸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 으으... ...!]

기검룡은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구 모래 바닥에서 뒹굴었다.

이때였다.

___ !

한 인영이 그의 옆에 떨어졌다.

그는 바로 낙척문사(落拓文士)였다.

[용아! 아니... 이게 어찌된 일...]

그는 기검룡을 번쩍 안아들었다.

검룡은 얼핏 그를 알아보았다.

[... ... 작은 할아버지... ... 용아는 만년백경의 내단을 삼... 켰어......]

[뭣이!]

낙척문사는 크게 놀랐다.

[너를 차자 수일을 헤맸건만 내단을 삼켰다고? ... 이런...]

낙척문사는 다음 순간 신형을 휘익 날렸다.

그는 매우 다급한 듯 했다.

실상 만년백경의 내단은 지극한 효험이 있는 것이었지만 필히 안정할 곳을 찾아 내공이 높은 조력자의 도움으로 내단을 녹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검룡이 그것도 모르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단을 삼켰으니...

낙척문사는 급히 천강마존이 있는 곳으로 간 것이었다.

 

[...!]

기검룡은 오랜 혼미 속에 깨어나 눈을 뜨는 순간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순간,

[큰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기검룡은 너무도 기뻐 크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나,

[!]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름을 느끼며 당황성을 발했다.

겨우 몸을 멈춘 그는 두눈을 크게 뜨며 의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니 용아의 공력이 이렇게 높아져 있다니 말입니다.]

낙척문사 역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이한 일이구나, 만년백경의 내단을 복용했다면 이갑자(二甲子) 정도의 내공을 얻는 것이 분명한데, 네 공력은 이미 삼갑자(三甲子) 이상에 이르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기검룡은 기억을 더듬어 그동안의 일을 차근차근 얘기하기 시작했다.

만년백경에게 먹혔던 일에서부터 무인도에서 만난 일, 사해선문을 도와 천해비보를 찾은 일까지.

허나, 자신도 모르게 무인도에서 본 일중에서 벽에 걸려 있던 기이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빠뜨리고 말았다.

만약 그 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라면 그는 일찍 더할 수 없는 광세기연(曠世奇緣)을 만날 수 있었겠건만...

기검룡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난 천강마존과 낙척문사는 안면 가득 놀라움의 빛을 띄었다.

낙척문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야 네 공력이 그토록 급증한 이유를 알겠구나.]

기검룡은 문득 짐작이 가는 듯 물었다.

[흑시... 그 이상한 복숭아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 그 복숭아는 금령천도(金靈天挑)라는 영과로서 도가에서 최고의 지보로 여기는 것이다. 만일 그것을 일곱 번으로 나누어 복용하고 칠일간 운공하면 금강지체(金剛之體)를 이룰 수 있다.]

이어 문득 그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허나 너는 그것을 모르고 한꺼번에 다 먹어버려 그 효능이 반감된 것이다.]

기검룡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엇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낙척문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렇다고 낙담하지는 마라. 이제 너는 전신에 만독(萬毒)이 불침하며 노력하면 일갑자의 내공을 더 얻을 수 있다. 앞으로 무공연마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어요. 헌데 그 무인도의 백골은 어느 고인의 것인가요?]

그의 물음에 이번에는 천강마존이 입을 열었다.

[무림사(武林史)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명멸해 왔으나 단연코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을 꼽으라면 꼭 한 사람이 있다.]

[그분이 누군가요?]

기검룡은 호기심으로 두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분은 바로 천 이백 년(千二百年) 전의 기인(奇人) 절대무성(絶代武聖) 태극성황(太極聖皇)이시다.]

천강마존의 어조는 지극히 공경스러웠으며 엄숙하기까지 했다.

[태극성황(太極聖皇)!]

기검룡은 나직이 입안으로 뇌까렸다.

천강마존은 다시 조용한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 이백 년 전 당시의 무림은 무림삼일(武林三日)이라는 세 명의 개세고수들에게지배당하고 있었다.]

 

<무림삼일(武林三日).>

 

___옥황대천(玉皇大天),

___천독마선(天毒魔仙),

___잠형유신(潛形幽神),

 

옥황대천, 그는 화타나 편작을 능가하는 의술의 명인이었다.

천독마선, 그는 만독(萬毒)의 조종(祖宗), 마공(魔功)의 집대성자였다.

잠형유신, 그는 실재(實在)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역용(易容)과 잠형술(潛形術)의 대가였다.

이들 삼인은 당시 무림의 최강(最强)을 지칭한 절대적 존재였다.

헌데, 그런 그들이 하루 아침에 실로 어이없는 좌절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날 홀연히 그들을 찾아온 한 젊은서생에게 그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패하고 만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성명절학을 전력(全力)으로 펼쳤으나 젊은서생의 십초(十招)를 당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으로 그들 삼인(三人)이 합공(合攻)하여 대항했으나 그 또한 그들의 상상을 벗어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완패, 실로 완전한 패배였던 것이다.

무림삼일을 패퇴시킨 후 신비의 서생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남기고 표연히 사라졌다.

 

___무림에 군림하려하지 말라. 본인이 그대들에게 됴구하는 것은 이것 뿐이다.___

 

무림삼일은 통탄을 금치못할 지경이었으나 곧 무림에 세웠던 모든 세력을 해체하고 은거하여 무림에서 사라졌다.

그 이후, 무림삼일을 은퇴시킨 신비의 서생은 백년(百年) 동안 무림에서 행도(行道)하여 크게 그 이름을 떨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성황(聖皇)이라는 영광스런 청호까지 받게된 것이었다.

헌데, 노년(老年)에 이른 그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근심거리가 생겼다.

백년 동안 천하를 주유했으나 자신의 진전을 이어받을 인재를 구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결국, 그는 후예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두 명의 기재를 기명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비록 태극성황의 전 무학을 이어받을 만한 인재는 되지 못했지만 몇 백년에 한 번 날까말까한 절세기재들이었다.

태극성황은 자신의 무공을 두 기재에게 적합하도록 음()과 양()으로 나누어 전수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림에 두 명의 절세고수가 탄생하게 되었다.

___태양성자(太陽聖子) 황보영(皇補英).

___현음마군(玄陰魔君).

허나 이들은 정사종주(正邪宗主)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었다.

그들은 사부인 태극성황의 부름을 받았다.

태극성황은 그를 찾아온 두 제자에게 두 가지 물건을 내놓았다.

 

<이것은 나의 진본무공(眞本武功)이 실린 태극유진(太極貴珍)이다. 이것을 갖게되면 태극일문(太極一門)의 장문인(掌門人)이된다. 또한 이것은 나의 최초의 신공(神功) 태극호연천신강(太極皓然天神罡)을 적어놓은 책자다. 태극호연천신강의 위력은 능히 택그유진의 십배에 달한다. 너희들은 하나씩 선택하도록 해라.>

 

태극성황은 두 가지 물건을 놓고 그렇게 분부했다.

태양성자와 현음마군은 고심했다.

명예(名禮)와 실리(實利)___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허나 결국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태양선자, 그는 태극유진을 택해 명예를 취했다.

반면, 현음마군은 실리를 택해 택극호연천신강을 얻었다.

그는 평소 자신보다 강한 태양성자를 꺾어보는 유일한 소원이었던 것이다.

허나 그는 미처 한 가지 사실을 깨닫지 못했으니...

태영성자와 현음마군은 천하의 기재였다. 그러나 태극성황은 그들에게 진본비기(眞本秘技)를 전수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진전을 전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이들의 자질이 부족해서였다.

헌데 택그유진보다 위력이 십 배나 강한 태극호연천신강의 난해함은 더 이상 말하여 무엇하랴!

결국, 현음마군은 현음교(玄陰敎)를 해산하고 잠적했다.

태극호연천신강을 연마하기 위해.

허나 끝내 그는 무림에 다시 나타나지 못했다.

일평생 태극호연천신강과 씨름하다 죽음을 당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후 태양성자 역시 은거하여 택그일문은 완전히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은 애초에 태극성황이 바라던 결과였는지 몰랐다.

 

천강마존은 긴 이야기를 끝내고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기검룡은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용아도 알 것 같군요. 무인도의 석옥에 있던 백골은 바로 현음마군이로군요.]

그는 낡은 비급에서 본 현음분뢰지(玄陰分雷指)라는 지공의 이름에서 그것을 추측한 것이었다.

천강마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할아버지들은 이것들을 보고 그 유골이 현음마군의 것이라는 것을 추측했다.]

그는 앞부분이 삭아 없어진 낡은 비급과 외줄의 소금을 가리켰다.

이어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현음마군이 태극성황에게 전수받은 것은 한 가지 신공(神功)과 장공(掌功), 그리고 일초(一招)의 지법(指法)과 음공(音功)이었다. 특히 음공 척천마음(擲天魔 고금제일이라 현음마군 조차도 완전히 연성하지 못했다.]

천강마존은 다시 소금(少琴)을 집어들며 말했다.

[용아도 이 소금의 위력을 체험해봤으니 잘 알 것이다. 이것은 현천마금(玄天魔琴)이라하며 태양성자가 받은 태극신검(太極神劍)과 함께 태극일문의 양대지보였다.]

이번에는 낙척문사가 입을 열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 석옥의 어딘가에 분명 태극호연천신강(太極皓然天神罡)의 비급이 있었을텐데 용아가 그것까지 얻지 못한 것이다.]

그 말에 천강마존이 담담히 웃었다.

[인연이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네. 용아가 그 태극호연천신강과는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지.]

낙척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하... 그 대신 용아는 그에 못지않은 기연을 얻은 수 있게 되었으니 섭섭하게 생각할 것 없다.]

[...?]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낙척문사를 응시했다.

낙척문사는 문득 하나의 붉은 구슬을 집어 들었다.

바로 기검룡이 사해신룡에게 받은 그 구슬이었다.

[사해신룡은 최대의 기연을 네 개 양보했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

[큰할버지께 옥황대천(玉皇大天)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느냐?]

그 말에 비로소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의술이 당대 최고였다던...]

낙척문사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태극성황에게 패한 옥황대천은 무공초식으로는 도저히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 다른 방도를 구했다.]

[...]

[그는 신선경지에 이를 수 있는 내공을 얻기위해 한 가지 절대신단(絶代神丹)을 만들었다.]

낙척문사는 수중의 붉은구슬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절대신단이 바로 이것이다. 옥황패천은 이 신단을 극허천룡단(極虛天龍丹)이라 이름했다.]

기검룡은 놀라움과 경이가 뒤엉킨 시선으로 붉은구슬, 즉 극허천룡단을 응시했다.

이때, 천강마존이 문득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용아의 공력이 급상승했으니 이제 상승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됐다. 내일부터 당장 무공수련에 들어간다. 허나 그 전에 우선 볼것이 있다.]

그는 문득 낙척문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낙척문사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그는 서재 한모퉁이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가지고와 두 사람 앞에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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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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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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