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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찾아온 마두들

 

 

밤공기가 서늘하다.

독수리들의 부리에 찢기고 피에 절은 옷을 벗어버린 탓에 벌거숭이가 된 상체에 소름이 돋는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씨익 웃은 임청우는 모옥 앞으로 가서 바닥에 흩어진 약초들을 주워 모았다.

뿌리 채 뽑아온 약초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초지에 심고 물을 주었다.

나머지는 그늘에 말려놓은 다른 약초들과 함께 부엌으로 가져가서 다렸다.

침상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장만 보고 있는 어머니의 머리맡에 약사발을 가져다 놓았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헤아려 보니 오늘은 칠월칠일, 즉 칠석(七夕)이다.

견우와 직녀도 일 년 만에 만난다는 날이지만, 임청우는 어머니를 떠나가야만 한다. 비록 자신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어머니이긴 하지만...

 

***

 

모옥을 나온 임청우는 서쪽의 절벽으로 갔다.

천길 벼랑 바닥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길 정도 아래쪽에는 임청우의 피난처이자 보금자리인 작은 동굴이 있다.

임청우는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려 동굴 앞으로 삐죽 나와 있는 돌출부에 내려섰다.

절벽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굴 입구는 임청우가 겨우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하지만 동굴 안은 좁은 입구와 달리 제법 넓다.

입구 맞은편에는 임청우가 직접 벽을 파고 다듬어서 만든 돌침대가 있다.

돌침대 위에는 이부자리와 옷가지 외에도 임청우가 힘들게 모은 책 수십 권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임청우는 돌침대 머리맡에 놓인 기름등에 불을 밝혔다.

불을 밝힌 후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끌렀다.

끼이!

호리병을 돌침대 위에 내려놓자 금관혈린사가 머리를 삐죽 내밀며 두리번거린다.

날 새려면 아직 멀었다. 더 자라.”

임청우는 이불과 함께 개어놓은 여벌의 옷을 집어들며 말했다.

말귀를 알아듣는 영물답게 금관혈린사는 머리를 다시 호리병 속으로 끌어들였다.

(자식을 죽이려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무서워 도망치는 자식이라니...!)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옷을 입었다.

자신의 팔자가 너무도 기구하게 느껴졌지만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동굴 안의 물건들 중 애착이 가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특히 수십 권에 이르는 책은 너무도 소중하다.

어렵게 채집한 약초와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한 산짐승들을 팔아서 산 책들이다.

제각각의 사연이 깃들어 있는 그 책들은 임청우가 어머니의 모진 학대를 견뎌온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옛 성현들의 지혜가 깃든 책을 읽을 때만큼은 비참하고 쓰디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수십 권의 책 중에서 귀하지 않은 건 단 한권도 없다.

하지만 먼 길을 가야하니 다 가져갈 수는 없다.

다른 책들은 굳이 가져갈 필요 없고... 장자(莊子)와 육일거사(六一居士)의 일옹청풍일지(一翁淸風日誌)만 가져가자.”

임청우는 수십 권의 책 중에서 단 두 권만 챙겼다.

장자는 도교(道敎)의 비조(鼻祖)인 노자(老子)와 함께 노장(老莊)으로 일컬어지는 장주(莊周)의 존칭이면서 그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일옹청풍일지를 쓴 육일거사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사람으로 당나라의 한유(韓愈)의 뒤를 이어 고문(古文)을 일으켰던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가 스스로 정한 호().

말하기를, 집고록(集古錄) 일천 권과 장서(臧書) 일만 권, 거문고 한 채, 바둑판 한 개가 있고 항상 술 한 단지를 두고 구양수 자신이 늙어가니 이를 육일(六一)이라 한다고 했다.

임청우는 또 다른 호를 취옹(醉翁)이라 했던 구양수를 좋아했다. 그의 글들은 자유분방하고 거칠 것이 없는 장자와는 또 다른 묘미가 있었다.

이것들만 있으면 어디 가더라도 심심하진 않겠지.”

임청우는 장자와 일옹청풍일지를 품속에 넣었다.

그저 책 두 권을 품었을 뿐인데도 마음이 든든하다.

떠날 준비를 마친 임청우는 동굴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늘 어머니의 학대와 독설에 시달리며 살았지만 이 동굴로 숨어들면 안전하고 편안했었다.

정이 들었던 피신처를 떠나려니 복잡한 감회가 치밀어 오른다.

동굴을 둘러보던 임청우의 눈에 금관혈린사가 들어있는 호리병이 들어왔다.

금관혈린사가 사람 말귀도 알아듣는 영물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뱀은 뱀이다. 가까이 하기에는 꺼림칙한 존재인 것이다.

저 녀석을 데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임청우는 호리병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끼이!

그러자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호리병이 약간 흔들리더니 금관혈린사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이제 여길 떠나야한다. 나를 따라 갈 테냐 여기에 남을 테냐?”

임청우는 붉은 보석같은 금관혈린사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람에게 하듯 물었다.

스르르르!

임청우의 말을 들은 금관혈린사는 호리병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그리고는 호리병의 잘룩한 부분을 꼬리로 감아 끌면서 임청우에게 다가왔다.

같이 가고 싶어?”

임청우가 확인하듯 묻자 금관혈린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너라도 길동무가 되어주면 덜 쓸쓸하겠지!”

임청우가 금관혈린사의 매끄러운 등을 쓰다듬자 금관혈린사도 고개를 돌려 그의 손등들을 긴 혀로 핥았다.

대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는 너 먹기 없기, 너는 나 먹기 없기,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해결하기다.”

임청우의 말에 금관혈린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같이 지내려면 부를 이름이 있어야하는데... , 뭐가 좋을까?”

임청우는 금관혈린사의 몸통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금관혈린사도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임청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먹이의 길이를 먼저 잰 후에 먹는 게 네 식성이니까 척포(尺飽)라고 하자!”

임청우는 금관혈린사가 북두무랑 앞에서 몸길이를 재어 똑같은 길이의 뱀을 먹었던 것을 떠올렸다.

척포, 어때? ?”

임청우가 묻자 금관혈린사는 고개를 주억 거려 좋다는 표시를 했다.

좋다고? 그럼 이제부터 네 이름은 척포다!”

임청우는 금관혈린사의 등을 쓰다듬었다.

스르르!

척포라는 이름을 얻은 금관혈린사는 알았다는 듯 꼬리를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호리병으로 기어들어갔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게 인생이라더니... 어머니 슬하를 떠나게 되자 친구를 대신 얻게 되었구나.”

임청우는 척포가 들어간 호리병을 집어 들었다.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몸, 세상에 나서는데 필요한 것이 뭐 그리 많겠는가? 어차피 이 험난한 세상에 태어날 때도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이었는데...”

척포가 들어있는 호리병을 허리에 차며 임청우의 마음은 조금 밝아졌다. 비록 미물이긴 해도 동반이 생겼기 때문이다.

 

***

 

임청우는 늘 하던 대로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는 돌출부를 잡고 절벽 위로 올라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국자가 거의 수직으로 일어서 있다. 자정이 다된 시각이다.

모옥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

아직도 떠나지 않았느냐?”

임청우가 다가가자 모옥 안쪽에서 임단심의 싸늘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지금 떠납니다 어머니!”

임청우는 모옥을 향해 절을 했다.

, 마음에도 없는 헛치레는 집어 치워라. 내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넌들 나를 아끼는 마음이 있겠느냐?”

저는 그저 자식의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임청우는 무릎을 꿇은 채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어미 노릇을 못한다고 비꼬는 것이냐?”

싸늘한 외침과 함께 모옥의 문이 덜컹 열렸다.

죽일 놈!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속을 뒤집어놔?”

이를 바득 갈며 집 밖으로 나서는 임단심의 눈빛이 새파랗게 번뜩여서 귀기스럽다.

평소였다면 임청우는 어머니가 살기를 드러내는 걸 보자마자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는 대신 착 갈아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떠나기 전에 어머니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소자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네 아비가 누구냐고?”

임청우를 노려보는 임단심에게서 수많은 바늘이 찌르는 것같은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살기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임청우는 말없이 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임단심의 표정과 눈빛이 짧은 사이에 여러 번 변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목숨이 몇 번이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는 눈 몇 번 깜박이는 정도로 짧았지만 임청우에게는 억겁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 지났다.

아비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이윽고 임단심이 침묵을 끝냈다.

금포염왕을 찾아가서 물어봐라. 그럼 네 아비가 누군지 가르쳐줄 것이다.”

임단심은 차갑게 웃으며 내뱉었다.

(비단 옷을 입은 염라대왕!)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임청우는 오싹한 전율이 온몸을 훑으며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인적 드물고 궁벽한 농산에서 살아온 탓에 금포염왕이 누군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청우의 뇌리에는 어떤 인물의 형상이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북두무랑을 빠져나올 때 진법 속에서 보았던 인물!

태산처럼 웅장하게 느껴지는 몸에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인물이 안개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금관혈린사가 보인 반응으로 미루어볼 때 안개 속에 누군가가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금포염왕... 금포염왕이란 인물은 아버지와 어떤 사이인지요?”

임청우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물었다.

네놈을 위해서 더 말해줄 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 속에는 네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끓고 있으니...”

임단심의 매정한 말이 임청우에게서 모든 기대를 앗아갔다.

그러시다니 소자 이만 떠나겠습니다.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필요한 약초는 대부분 옮겨 심어놓았으니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임단심에게 절을 하고 일어난 임청우는 계곡 입구를 향해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세상으로 나가서 금포염왕이란 인물을 만나보고 싶을 뿐이다.

멀어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임단심의 표정이 여러 번 바뀌었다. 살기와 연민이 망설임으로 반죽이 되어 그녀의 결단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 은밀하게 쥐어져 있던 머리가 뭉툭한 한 대의 철정(鐵釘)이 쩡! 소리가 나면서 떨어졌다.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임단심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결국 내손으로 죽이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되는구나.”

헌데 중얼거리던 그녀의 안색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하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거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임단심은 마침내 왁! 하고 한 덩어리의 피를 토해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피를 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임청우의 모습은 이내 좁고 어두운 계곡 입구로 사라져 버렸다.

청우! 네 놈을 세상으로 내쫓는 진짜 이유는 고질이 되어 버린 내 내상(內傷) 때문이다. 바로 네 아비에게 당한...”

잇달아 두 번 더 피를 토한 임단심은 가슴을 부여잡고 뇌까렸다.

더 이상 네 놈을 괴롭힐 수도 없기에... 무공도 가르치지 않고 무림에 내보내 고생하다 죽기를 바랄 뿐이다.”

원한 맺힌 눈으로 한동안 어둠 속을 노려보던 임단심은 비틀거리며 모옥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달빛 아래 모옥 앞 초지에 가득 심겨져 있는 화초와 진기한 약초들만이 바람결에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

 

임청우는 세상을 벗어나기라도 하듯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모든 것, 심지어는 어머니란 존재마저도 잊어버리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비련곡(悲戀谷) 입구에 다다랐다.

곡구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금도 마음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늘 내뱉는 말처럼 자기가 인간같지 않은 아버지를 닮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청우는 피식 웃으며 허리에 걸려있는 호리병을 툭 쳤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척포란 놈이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머리를 내밀고 화난 듯이 혀를 날름거리다가 쏙 들어간다.

콰아아아아!

비련곡 밖에 있는 천류폭포는 여전히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을 내고 있다.

임청우는 한쪽 절벽에 세워둔 대나무 죽마를 집어 들었다.

곡 밖에 있는 호수 같이 넓게 퍼진 물이 비록 깊지는 않지만 그냥 건너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배를 이용할 만한 곳도 아니다.

대나무 죽마는 임청우가 비련곡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도구다.

한데 그가 막 대나무 죽마에 올라타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휘익!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나더니 두 개의 그림자가 새처럼 날아 들어와 비련곡 입구에 내려섰다.

임청우가 서있는 곳은 절벽 아래쪽의 달빛 그림자에 가리워진 부분이라 얼핏 보아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임청우는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두 명의 인물이 그에게서 불과 일장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있었다.

(저 괴물들이 어떻게 여길...)

임청우의 몸이 저절로 떨렸다.

나타난 자들은 그가 낮에 표운봉에서 만났던 마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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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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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파국(破局)의 전조(前兆)

 

 

 

일신재(日新齋)는 제왕성 소성주 모용준의 거처다.

섭장천은 양자로 삼은 종매의 손자 모용준이 제왕성 성주에 걸맞는 인재가 되길 원하는 마음에 일신재라는 당호(堂號)를 지어주었다.

섭장천도 경박하고 호색한 모용준의 인성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섭씨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들 중에서만 후계자를 고르다보니 모용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신재라는 당호에는 어쩔 수 없이 모용준을 양자로 삼아야만 했던 섭장천의 고뇌와 기대가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호호호 아이 공자님도...!”

어머나 엉큼하셔라.”

띠리리링! 띠링!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당호가 무색하게 일신재에서는 풍악소리와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질탕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가 아직 남아있을 때부터 시작된 농탕질은 밤이 되면서 그 정도가 걷잡을 수 없이 짙어지고 있었다.

무얼 보았는지 일신재를 드나들며 술과 음식을 나르는 하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혐오로 물들어있었다.

소성주님 거처에서 나오는 년들마다 가자미눈이 되는군.”

일신재 주변을 지키던 제왕성 무사들 중 한명이 혀를 찼다.

그럴 만도 하지. 내일 장가 갈 새신랑이 갈보들을 끼고 질펀하게 노는 걸 봤을 테니 배알이 꼬이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

다른 무사가 이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후환이 없을지 모르겠구만. 황금성의 진소저도 한 성깔 한다는 소문이던데...”

처음 말을 꺼낸 무사가 혀를 찼다.

계집 성깔이 대단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일단 한 남자의 마누라가 되면 끈 떨어진 갓 꼴이 되는 건데...”

입조심하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잖아.”

듣고 있던 동료무사가 급히 두 사람에게 주의를 주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돌아보는 쪽에서 크고 작은 두 명의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앞장 선 여자는 보통보다 조금 더 큰 키지만 뒤따르는 여자는 칠척 가까운 거구의 소유자다.

진상파와 철관음이다.

황금성의 암호랑이께서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군.”

이거 뭔 일 나도 나겠는걸.”

내가 안에 들어가 기별함세.”

무사들 중 한 명이 급히 일신재 안쪽에 통보하려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자의 발걸음은 진상파가 내뱉은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자리에서 꼼짝 마라.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될 테니...”

무사들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되어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리 크지 않고 듣기 좋은 음색이지만 진상파의 말에는 잘 벼린 칼날같은 삼엄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 띠딩!

호호호! 하하하!

일신재로 다가온 진상파의 귀에 풍악소리와 함께 남녀가 수작을 벌이는 낮 뜨거운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짐승같은 것들...)

진상파는 치를 떨었다.

철관음의 보고를 들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고 찾아왔었다.

하지만 직접 귀로 들어 확인하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놀아나고 있는지 내 눈으로 봐주겠다.)

진상파는 이를 갈며 일신재 입구로 다가갔다.

(일 났구만!)

(저 암호랑이가 들이닥친 걸 알리지 못한 우리에게도 불똥이 튀겠어.)

곁눈질로 진상파를 훔쳐보는 무사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 * *

 

일신재 안에서는 진상파가 생각하는 대로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가운데 열 명이 넘는 남녀가 발정난 짐승처럼 뒤엉키고 있었다.

사내는 다섯 명이고 여자는 그 배가 넘는 열 명 이상이다.

다섯 명의 사내들은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여자들을 끼고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밤 새자! 오늘은 갈 때까지 가보는 거다.”

방문 정면의 주안상을 앞에 두고 앉은 모용준은 흥에 겨워 웃었다.

상의를 풀어헤쳐 맨살을 드러낸 모용준 좌우에는 옷을 입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기녀 두 명이 달라붙어 교태를 부리고 있다

이 밤만 지나면 슬프게도 난 더 이상 총각이 아닌 거다. 불쌍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네놈들이 더 화끈하게 놀아야한다.”

모용준은 술잔을 쳐들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얼굴은 멀끔하게 생겼지만 행동거지나 말하는 본새는 영락없는 시정의 파락호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비로소 인생의 진미를 알게 되는 건데...”

주안상 사이에 기녀를 눕히고 희롱하고 있던 자가 모용준을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장가를 가야 인생의 진미를 알게 된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모용준도 마주 눈을 흘기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먼저 장가 간 형님의 말씀이니 잘 새겨들어 임마. 마누라가 있어야 제대로 된 오입질을 할 수 있는 거다.”

사내가 다시 하던 짓에 집중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개소리의 근거를 말해보라니까.”

!

모용준은 짐짓 거칠게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눈을 부라렸다.

준이 넌 풍류한량을 자처하는 놈이 일도(一盜), 이비(二卑), 삼기(三妓), 사첩(四妾), 오처(五妻)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

옳거니!”

모용준은 그제야 악우(惡友)의 말뜻을 깨닫고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자고로 계집은 훔쳐 먹는 게 가장 맛나고 하녀와 창녀, 첩이 그 다음 순서인 거다.”

물론 가장 재미없는 건 마누라야. 마누라와 동침하는 건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니까.”

맞아. 맞아. 대를 이을 새끼를 만들어야하는 게 아니라면 마누라하고는 살도 맞대기 싫지.”

다른 놈들도 낄낄 대며 친구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마누라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이거야. 눈 부라리며 감시하는 마누라가 있어야 몰래 훔쳐 먹거나 사먹는 게 맛나거든...”

여자를 눕히고 희롱하는 놈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뭐냐? 제대로 된 오입질은 마누라 눈을 속이면서 하는 것이다?”

모용준은 피식 웃었다.

마누라 몰래 다른 여자 건드리는 게 얼마나 흥미진하고 살 떨리는 경험인지 준이 너도 곧 알게 될 게다.”

모용준 옆에서 두 명의 기녀를 함께 희롱하고 있던 다른 놈이 웃으며 말했다.

네놈들 말을 들으니 낙담 대신 기대가 되는구나. 나도 내일 부터는 제대로 된 바람을 피워볼 수가 있게 될 테니 말이다.”

모용준은 술잔을 쳐들면서 음험하게 웃었다.

진정한 오입의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모용준!”

장래의 제왕성 성주가 오입장이라니 볼만하겠구먼.”

못된 친구놈들이 왁자지껄 웃을 때였다.

!

일신재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

뭐냐?”

꺄악!”

엄마야!”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내놈들과 기녀들은 기겁하며 문쪽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에 활짝 열린 문 밖에 진상파가 서있는 게 보였다.

의외로 진상파의 표정은 차분하다.

다만 눈빛만은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이크!”

... 진소저!”

엉겨 붙어 있던 사내놈들과 기녀들이 불 맞은 짐승들처럼 펄쩍 뛰며 떨어졌다.

... 진소저! 여긴 어쩐 일로...”

어서 오시오 진소저.”

사내놈들은 억지로 웃으며 급히 옷을 추스렸다.

기녀들도 겁에 질려 진상파의 눈치를 보며 사내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가요.”

진상파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

가라니... 어디를...”

무슨 말씀이신지...?”

사내들은 당황하여 진상파의 눈치를 살폈다.

모용준도 술잔 내려놓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당장 제왕성에서 사라지도록 해요. 만일 다시 내 눈에 띠는 인간이 있다면...”

진상파의 들끓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 인간과 그 인간의 집안을 완전한 알거지로 만들어버리고 말겠어요.”

진상파는 고저(高低)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내들은 진상파의 서늘한 눈가로 푸른 불꽃이 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용서하십시오 진소저.”

당장 사라지겠소이다.”

두 번 다시 제왕성에 얼씬 거리지 않겠소.”

사내들은 겁에 질려 좌우의 쪽문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진상파가 서있는 정문으로는 나갈 엄두를 못낸 것이다.

겁에 질린 기녀들도 벗어놓았던 옷가지를 끌어안고 사내들 뒤를 따랐다.

모용준의 친구들은 제법 사는 집안 출신들인지라 황금성에 죄를 지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쌀 한 톨 기름 한 방울 구할 수 없어 마침내 돈을 쌓아놓고도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황금성에 밉보이면서까지 거래를 하려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곧 일신재 안에는 모용준만이 남게 되었다.

진상파는 문 밖에 서서 모용준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젠장...)

진상파의 시선을 피하면서 모용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모멸감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친구들 앞에서 당한 수모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양부 섭장천이 추진한 이 혼사가 깨질 경우 자신이 제왕성의 주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 불쾌했다면 용서하시오 소저. 소꿉친구들과 기분을 내는 게 좀 지나쳤던 것같소. 내 사과하리다.”

모용준은 억지로 웃으며 포권을 했다.

진짜 대장부라면 목에 칼이 들어올지언정 자기 소행을 변명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하물며 무림의 주인인 제왕성의 후계자께서 남에게 머리를 숙일 일을 해서야 되겠어요?”

진상파가 여전히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모멸감으로 얼굴이 이지러지긴 했지만 모용준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시는...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길 바라겠어요.”

그 말을 남기고 진상파는 일신재를 떠났다.

(경고는 충분히 되었을 거야.)

철관음을 거느리고 일신재에서 멀어지며 진상파는 생각했다.

(몸에 밴 못된 버릇이 쉽사리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더 나빠지지 않게 통제할 수는 있다. 어쩔 수 없이 부부가 되어 살아야한다면 겉모습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갈 수밖에...)

진상파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와장창!

갑자기 뒤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

뒤이어 분을 못 참고 악을 쓰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저 졸장부가...)

진상파는 미간을 모으며 일신재 쪽을 돌아보았다.

주변의 무사와 하녀들도 겁에 질려 일신재를 보고 있었다.

와장창! 쨍그랑!

그 사이에도 일신재 안에서는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용준이 분을 참지 못하고 집기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가씨...”

걱정마. 나도 간단한 싸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까.”

난감해하는 철관음에게 말하며 진상파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속 좁고 천박한 인간!)

진상파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모용준에 대한 혐오와 실망이 진상파의 가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강요하지만 않았어도 저런 졸장부와 부부가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진상파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왕성에서 혼담이 들어왔을 때 진상파가 바로 응한 것은 아니다. 뒷조사를 통해서 모용준의 인성이 개차반이라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다.

망설이는 진상파에게 적극적으로 혼사를 권한 것은 그녀의 어머니, 정확하게는 의모(義母)였다.

이름이 조예(趙芮)인 진상파의 의모는 새석숭 진보륜이 늦으막이 거둔 후처였다.

비록 새석숭과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조예는 황금성의 가장 큰 어른이다.

의모의 강력한 권유도 있고 해서 진상파는 망설이던 마음을 접고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였었다.

 

(아버지가 피땀 흘려 키워온 황금성을 탐욕스러운 떨거지들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혼인을 물릴 수도 없다.)

진상파의 손이 핏줄이 드러나도록 강하게 쥐어졌다.

(결국 저 못난 인간을 길들이는 것 외에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진상파는 거푸 심호흡을 하여 참담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렸다.

 

* * *

 

밤이 깊어졌다.

하지만 제왕성은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었다.

내일 치러질 소성주의 혼례식에 참석하기 휘해 원근각지에서 몰려든 하객들 때문이다.

무림의 주인인 제왕성이 십팔 년 만에 맞이한 경사다.

무림의 거의 모든 방파와 가문의 수장들이 축하하기 위해 제왕성을 찾았다.

제왕성의 식솔들은 수천 명에 이르는 하객들을 대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도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모여 있는 네 명의 남녀가 있었다.

 

진소저가 기선을 제압했군!”

제왕성의 부()성주 중 한명인 살천인조(殺天忍祖)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제왕성에 부성주라는 직책은 없었다.

그러다가 십팔 년 전 처음으로 부성주 두 명이 세워졌다.

납치당한 아들을 찾는 데 전념하던 섭장천은 자신을 대신하여 제왕성의 대소사를 꾸려갈 인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성주라는 직책은 그렇게 생겼으며 그중 한명이 살천인조다.

인조(忍祖)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살천인조는 왜국(倭國) 출신의 전설적인 자객이다.

지금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지닌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지만 현역일 때의 살천인조가 노린 표적은 결코 죽음을 면치 못했었다.

비록 섭장천 때문에 신주이십팔숙에는 끼지 못하지만 살천인조는 섭장천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절세고수다.

웃을 일이 아니오 인조! 소성주가 느꼈을 수모와 모멸감을 생각해보시오.”

머리를 제외한 온몸이 붉은 빛 털로 뒤덮인 거구의 중이 화등잔같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불곰을 연상케 하는 육중한 체격을 자랑하는 노승의 별호는 혈가람(血伽藍)이다.

혈가람은 소림사 출신으로 소림사 당대 방장에게는 사숙 뻘이 된다.

하지만 혈가람은 성격이 급하고 살기가 넘쳐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는 일단 때려죽이고 보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천명이 넘는 목숨이 혈가람의 손에 희생되자 결국 소림사는 혈가람을 파문시켜버렸었다.

비록 소림사에서 쫓겨난 몸이지만 혈가람의 무공은 막강했다.

섭장천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패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진적이 없는 인물이 혈가람이다.

혈가람도 제왕성의 부성주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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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슴 떨리는 치료법

 

 

연못가 풀밭에 눕혀진 강미루의 피부는 먹물을 담은 통에 빠졌다 나온 듯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뿐만 아니라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럽던 몸이 돌처럼 단단해져 있다. 뜨거운 연못물에서 꺼낸 직후부터 급격히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강미루의 모습은 마치 흑옥(黑玉)으로 빚어놓은 옥상(玉像)인 듯 보였다.

(뭔가에 중독되었다.)

백남빈은 검게 변한 강미루의 얼굴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향기로운 숨결을 토해내던 연약하고 오똑하던 콧날도 이제는 아주 딱딱해져 있다.

(이 소녀는 너무도 쉽게 죽었구나. 이렇게 죽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백남빈은 돌덩이처럼 굳어진 강미루를 보며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철이 든 이래 처음 살을 맞대본 여자였다.

게다가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마음이 서로 통하기도 했었다.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짧은 삶을 마감한 어여쁜 소녀의 죽음은 가슴이 저미도록 안타깝다.

흑마의 등에서 자신의 턱을 물었던 악착스러움까지도 죽은 지금은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안타까움과 연민의 감정이 복받친 백남빈은 자신도 모르게 강미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싸늘한 체온이 손가락 끝에 전해진다.

하지만 백남빈 몸속의 피는 꽃같은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백남빈은 자신의 왼손이 닿은 강미루의 오른쪽 귀가 언뜻 흰빛을 띄는 것을 보았다.

손을 떼자 강미루의 오른쪽 귀는 다시 검어 졌다.

왼손을 또 갖다 대자 강미루의 피부는 흰빛을 되찾았다.

왼손을 대었다 떼었다 몇 번 해본 백남빈은 그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이 왼손 중지에 끼고 있는 다섯 가지 색의 금반지, 오채금환의 조화임을 알았다.

오채금환은 신랑성의 부성주 완안진에게서 압수한 것으로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이었을 것이다.

오채금환을 얼굴에 갖다 대자 강미루의 얼굴에서 검은 색이 잠시 없어졌다.

그걸 보며 백남빈은 생각했다.

(이 반지는 독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는 모양이다. 문제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인데...)

혹시 마땅한 실험대상이 없는가 싶어 두리번거리던 백남빈의 눈에 녹초가 되어 엎어져 있는 흑왕이 보였다.

백남빈은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에서 강미루를 꺼내면서 흑왕도 함께 끌고 나왔었다.

흑왕은 오랫동안 뜨거운 온천수 속에서 허우적댄 탓에 녹초가 된 외에는 딱히 독에 중독되거나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이 여자가 어디에 독상을 입었는지를 살펴보아야겠구나. 저 말은 멀쩡한데 사람만 중독되는 독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니...)

백남빈은 강미루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는 몇 겹의 옷이 걸쳐져 있어서 상처가 났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다.

사아악!

잠시 망설인 후에 백남빈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강미루가 걸치고 있는 붉은 옷을 청랑검으로 잘라서 벗기기 시작했다.

몸이 이미 돌처럼 단단해져 있기 때문에 옷을 훼손하지 않고는 벗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옷과 속옷이 모두 청랑검에 잘려나간 후 강미루의 알몸이 흑옥같은 빛을 띤 채 드러났다.

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데 소녀는 전라의 모습으로 새벽을 맞고 있었다.

백남빈은 자신의 호흡이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짐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시체같이 굳어진 모습이지만 굴곡이 뚜렷한 여체를 난생 처음 보는 때문이다.

독에 중독된 후 모든 근육이 긴장을 일으킨 탓에 가슴은 일부러 세운 듯 봉긋했고 다리며 팔은 마치 깎아놓은 조각품 같이 쭉 뻗어있다.

팽팽한 아랫배가 끝나는 곳에 자리한 두둑한 둔덕에는 피부색같이 검은 풀같은 것들이 소담스럽게 덮여 있다.

미끈하기만 한 피부에 갑자기 나타난 그 숲에 시선이 닿는 순간 백남빈은 마치 독사를 보기라도 한 듯이 질겁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언 듯 시야로 스쳐지나간 수림 아래의 깊이 갈라진 형적이 백남빈의 심장을 금방이라도 터트려버릴 듯이 두근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언제까지 눈을 감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남빈은 억지로 용기를 내어 눈을 뜨고 강미루의 몸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런... 이런...”

하지만 굳은 다짐과 달리 소녀의 알몸을 본 백남빈은 그 매혹적인 모습에 당황하여 지리멸렬한 신음만을 연발하고 있었다.

약관이 목전인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여자를 이처럼 가까이에서, 더욱이 적나라한 모습으로 본 적은 없었다.

주위에서 누가 보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얼굴이 화끈 거리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죽은 것같은 여인을 보면서 그러는 자신이 스스로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비록 큰 맘 먹고 옷을 벗기기는 하였으나 막상 벗기고 나자 독상(毒傷)을 입은 곳을 찾기는커녕 왜 발가벗겼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여자를 모르는 숫총각에게 벌거벗은 여체는 낯설고도 충격적이다.

눈을 감아도 선하고 눈을 뜨면 정신이 몽롱해 지는것 같았다.

"대장부가... 대장부가... 겨우 여자의 알몸 때문에 평정심을 잃다니..."

백남빈은 용기를 갖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했다.

그러나 마음은 더욱 떨려왔고 손마저 부들부들 떨린다.

젊음의 끓는 피라는 게 이성(理性)에 의하여 진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반증이다.

검은 조각상같은 강미루의 모습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다.

비록 백남빈이 아닌 다른 누구라 할지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리라.

 

잠시 시간이 지나자 백남빈은 어느 정도 이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강미루의 몸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훑어보았지만 작은 상처 하나 눈에 뛰지 않았다.

"상처를 입은 게 아니라 독을 먹었던 것이로구나. 그걸 몰랐어. 그런데 어디서 독을 먹었을까?왜 먹었을까?"

백남빈은 마침내 강미루가 독상을 입은 게 아니라 음독(飮毒)한 것을 알았다.

백남빈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강미루의 뻣뻣해진 입술을 억지로 벌리고 오채금환을 갖다 대었다.

푸시시!

그러자 오채금환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하더니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독을 빨아들인 후 연기로 만들어 배출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입 속이 독으로 가득 차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백남빈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혹시 연못의 물이 독인 것은 아닐까? 뜨겁기도 했지만 뭔가가 살고 있는 것같지 않았었다."

백남빈은 그 즉시 연못물에 젖어 있는 자신의 옷에 반지를 대어보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었나?”

내심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가자 백남빈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 소녀는 독을 마신 게 분명한데...”

백남빈은 자신이 조금 벌려놓은 강미루의 입술을 돌아보며 미간을 모았다.

(혹시...)

강미루의 벌어진 입술을 보는 순간 백남빈은 생각 난 것이 있어 연못물에 젖어있는 자신의 옷에 침을 뱉어 보았다.

츠츠츠!

순간 침이 닿은 옷자락은 먹물에라도 닿은 듯이 검은 색으로 확 변해 버렸다.

"그럼 그렇지! 바로 이것이었다."

백남빈은 손으로 자기의 이마를 탁! 소리가 나도록 쳤다.

본래 연못물은 독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액(唾液)과 섞이면 독특한 극독(劇毒)이 되어 생명체를 석상처럼 굳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약하게 중독된 사람은 생각도 그대로 할 수 있고 보고 들을 수도 있으나 몸은 돌처럼 굳어져 꼼짝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강하게 중독된 사람은 의식마저도 잃어버리고 숨도 멈춰서 완전히 검은 조각상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강미루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연못으로 떨어지는 순간 연못물을 들이켰었다.

그래도 흑왕이 헤엄치면서 떠받쳐준 덕분에 연못물을 아주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만약 조금만 더 마셨더라면 강미루는 온몸이 진짜 돌같이 굳어져서 백남빈이 입을 열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남빈의 영감(靈感)이 독을 찾아내었고 이제 치료하는 일만 남았다.

백남빈은 절뚝거리며 일어나 흑왕에게 다가갔다.

파김치가 되어 주저앉아있는 흑왕에게 다가간 백남빈은 허벅지의 상처를 묶었던 머리띠를 끌러서 침을 뱉었다.

연못물에 젖어 있던 머리띠가 순식간에 검은 색으로 변했다.

푸르르!

그것을 본 흑왕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는지 움찔했다.

백남빈은 그런 흑왕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지. 지금 네 주인은 죽어가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좀 도와주어야겠구나. 잠시 동안만 참아보렴. 네 주인을 구해야하지 않겠느냐?"

백남빈의 부드러운 말에 흑왕이 가만히 있을 때 백남빈은 왼손에 쥐고 있던 머리띠를 푸릉거리는 흑왕의 입속에 확 넣어버렸다.

흑왕이 깜짝 놀라"푸럭" 하며 머리띠를 뱉었으나 이미 늦었다.

퍼억!

입속으로 독이 들어가자마자 흑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무너지는 탑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정말 무서운 독이었다.

보통 말의 두 배나 되는 거구의 천리마 흑왕마저 순식간에 중독되어 쓰러진 것이다.

본래 검은 색이던 흑왕의 몸은 쇳덩어리처럼 굳어져 가기 시작했다.

목에 손을 대 보니 벌써 뻣뻣해져있다.

말이 사람보다도 더 독에 민감한 것 같았다.

스윽!

백남빈은 쓰러진 흑왕의 가슴을 청랑검으로 가볍게 그었다.

벌써 진하게 굳어진 검은 피가 상처에서 배어나왔다.

백남빈은 그 상처에 오채금환을 갖다 대었다.

푸스스스!

그러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백남빈은 코를 막으며 연기가 위로 올라가도록 바닥으로 머리를 수그렸다.

푸시시!

시간이 지날수록 오채금환에서 나는 연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그와 함께 돌처럼 굳어졌던 흑왕의 몸이 가슴의 상처부위부터 시작해서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됐다!”

백남빈은 뛸 듯이 기뻤다.

자신이 생각한 오채금환의 사용법이 들어맞은 것이다.

이제 자신의 말()만큼이나 드센 대려장의 말괄량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대려장의 무사들을 죽일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백남빈이다.

헌데 대려장의 소녀를, 그것도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를 구하는데 왜 이처럼 정성을 쏟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여자가 죽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럴까?"

백남빈은 반문해 봤으나 뚜렷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오채금환은 크기는 작아도 독을 제거하는 효능은 아주 강력해서 벌써 흑왕의 중독은 거의 다 풀린 것 같았다.

오채금환에서 나는 연기가 점차로 줄어들다가 종래에는 나지 않았다.

몸에서 독이 빠지자마자 흑왕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푸르르!

고개를 든 그놈은 겁에 질린 눈으로 백남빈을 보고 있었다.

백남빈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먹은 그놈의 모습에 실소를 하며 강미루에게 돌아갔다.

푸른 풀밭 위에 누워있는 소녀의 검은 나체가 희미한 새벽에 한눈에 확 들어왔다.

백남빈의 가슴은 다시금 세차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진정하자!)

벌렁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강미루에게 다가간 백남빈은 말에게 했듯이 그녀의 왼쪽 젖가슴을 가볍게 칼로 그었다.

그러나 강미루의 중독 상태는 흑왕보다 심해서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당황하여 조금 더 깊이 베었으나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백남빈은 강미루의 가슴에서 동전만한 크기로 살점을 도려내었다.

도려진 살점은 돌조각 같이 딱딱했다.

불룩한 젖가슴 위에 파여진 오목한 부위는 검은 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백남빈은 오채금환을 그 상처 부분에 집어넣었다.

치이이!

그러자 달군 쇠를 물속에 집어넣은 듯한 소리가 나면서 검은 연기가 뭉클 일어났다.

강미루의 왼쪽 젖가슴 위에 뚫린 구멍은 마치 화산(火山)의 분화구(噴火口)인양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강미루의 검은색 나신은 점차 흰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백남빈은 얼굴은 점점 홍당무로 변해가며 강미루의 나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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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몰려든 군웅들

 

 

아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냉약빙이 자책하며 급히 미소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힘없이 쓰러지는 미소부의 가슴에는 비수가 손잡이만 남긴 채 깊이 박혀있었다.

(제발...)

우르르!

냉약빙은 행여나 하는 마음에 미소부의 단전에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붙이고 내공을 주입했다.

으음!”

심후한 내공이 주입되자 숨이 끊어지려던 미소부는 부르르 떨며 힘겹게 눈을 떴다. 냉약빙이 주입해준 내공이 죽어가는 그녀를 잠시 되살린 것이다.

... 정말 전모 냉여협이신가요?”

미소부는 죽어가는 눈으로 냉약빙을 올려다보며 미약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요. 내가 바로 냉약빙이에요!”

냉약빙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죽기 전에 냉여협을 만나다니... 하늘이 저희 이씨(李氏) 집안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셨군요!”

미소부는 냉약빙의 대답에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가쁘게 숨을 할딱였다.

(이씨!)

냉약빙은 미소부의 말을 듣는 순간 흠칫했다. 그녀의 뇌리로 이씨 성을 지닌 젊은 기협(奇俠)이 떠오른 때문이다.

, 부탁이 있어요 냉여협!”

미소부는 꺼져드는 미약한 음성으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말씀해 보세요!”

냉약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부를 내려다보았다.

미소부는 소나무 아래 쓰러져 있는 사내아이를 돌아보며 처연한 눈빛을 지었다.

... 아이를 부탁드려요. 저 아이... 아버지의 이름은... 이청천(李靑天)...!”

이청천!”

미소부의 말을 듣는 순간 냉약빙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이청천이란 이름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청천이란 인물은 냉약빙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태양신협(太陽神俠) 이청천!

 

신마풍운록의 서열 육위(六位)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비록 신마풍운록 상의 서열은 여섯 번째지만 무림인들의 대부분은 그가 사실상의 천하제이인(天下第二人)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태양신협 이청천이 신마풍운록의 서열 육위 내에 드는 기인들 중 가장 젊기 때문이다.

태양신협 이청천의 나이는 이제 겨우 이십대 후반에 불과했다. 서른 살이 채 안된 나이에 신마풍운록에 서열 육위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가히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태양신협 이청천은 비단 무공이 막강할 뿐 아니라 젊은 나이답지 않게 성격이 인후관대하기 이를 데 없어 많은 기인이사들이 따르고 추종했다.

만일 그가 천하제패의 야심만 있었다면 단시일 내에 거대한 조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격이 담백하고 욕심이 없는 태양신협 이청천은 애초에 천하의 패권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한창 피가 끓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蘭州)의 교외에 자리한 태양곡(太陽谷)에 장원을 짓고 칩거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서북제일미인(西北第一美人)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옥수상아(玉手霜娥) 우담혜(憂曇慧)!

 

태양신협 이청천이 혼탁한 강호를 떠나 태양곡에 은거할 수 있었던 것도 절세미인인 이 여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태양신협 이청천에게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바로 이대협의 아내인 옥수상아 우담혜...!)

태양신협 이청천의 위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냉약빙인지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내들에게 무참히 유린당한 후 자살을 시도한 미소부는 바로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내이며 서북제일미인이라 불리던 옥수상아 우담혜였다.

(대체 태양곡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옥수상아가 이런 참변을 당했단 말인가?)

냉약빙은 의아함과 함께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

옥수상아 우담혜가 어린 아들과 함께 변을 당한 것으로 보아 태양신협 이청천의 신변에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냉약빙은 태양신협 이청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미 기력이 쇠잔한 옥수상아 우담혜가 그녀의 품에서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절벽 아래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생겨났다. 물론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내인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이었다.

(가엾은 여인이다. 장차 천하제일인이 될 인물의 아내가 이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다니...!)

냉약빙은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 앞에 서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품에는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 안겨있었다. 귀엽고 총기 있는 용모를 지닌 이 아이는 출혈이 심해 정신을 잃었을 뿐 머리의 상처는 대단하지 않았다.

(훌륭한 근골(筋骨)이다. 오라버니께서 이 아이를 보시면 기뻐하시겠구나!)

냉약빙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사내아이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오라버니를 도우러 가야만 한다!)

냉약빙은 다시금 자신이 처한 급박한 사정을 깨달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편히 잠드세요 우부인! 아드님은 나 냉약빙이 친아들처럼 보살펴 줄 테니...!”

그녀는 다시 한 번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스팟!

옥수상아의 무덤에 대고 맹세를 한 직후 냉약빙은 쏟아지는 빗속으로 거구를 날려 사라졌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는 방금 전 이곳에서 벌어진 무참한 만행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내고 있었다.

 

***

 

곤륜산은 천산(天山)과 함께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를 남북으로 감싸고 있는 대륙의 지붕이다.

본래 곤륜(崑崙)은 신들의 거처를 뜻한다. 옥황상제를 비롯하여 전설과 설화에 나오는 뭇 신들이 곤륜산에 금전옥루(金殿玉樓)의 궁궐을 불로장생을 누리고 있다던가?

그 장대한 곤륜산의 동쪽 끝에는 남쪽의 청해성(靑海省)을 굽어보고 있는 천길 단애가 자리하고 있다.

 

-고독애(孤獨崖)!

 

지면에서 수직으로 수백 장이나 치솟아 올라 있어 마치 거꾸로 꽂힌 칼의 허리 부분을 뚝 분질러 세워놓은 듯 웅장한 단애의 이름이다.

너무 높아 허리 부분이 늘 운무로 휘감겨 있는 고독애의 형상은 이름 그대로 고독하고 쓸쓸해 보인다.

그 고독애의 정상부분은 의외로 넓어서 만여 평에 달하는 평지가 펼쳐져 있다.

대부분이 울창한 송림으로 들어차있는 넓직한 평지 끝에는 돌로 지은 석옥(石屋)이 한 채 서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운치 있게 지어진 석옥은 마치 세외도원의 일부인 듯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별세계의 선경과도 같은 고독애 일대에서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고독애 정상의 넓은 평지에는 천여 명의 무림인들이 운집해 있는데 그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고독애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석옥 주변에는 머리가 으깨졌거나 몸뚱이가 짓뭉개진 수백 구의 시신들이 처참한 형상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 시신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내장들이 질펀하게 바닥을 적시고 있다. 보기만 해도 전율하게 되는 끔찍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그 처참한 시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체가 된 자들의 신분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한 지역의 패자들이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자들은 하나같이 신마풍운록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명숙들이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하나같이 막중한 신분을 지닌 인물들이 중원으로부터 머나먼 이곳 곤륜산의 고독애에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것이다.

“...!”

“...!”

장내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비록 운집한 군웅들 중 절반 정도가 죽음을 당했으나 여전히 고독애에는 오륙백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내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터질 듯 팽팽한 긴장감과 침묵이 장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군웅들은 그 납덩이같은 침묵 속에 반월형의 포위망을 구축한 채 고독애 끝에 자리한 석옥을 에워싸고 있었다.

석옥을 포위하고 있는 군웅들의 면면을 보면 실로 대단했다. 당금 무림의 명숙들이 이곳에 다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군웅들은 하나같이 긴장과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석옥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 한 명만 나타나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는 절정고수들이 수백 명이나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가에 떠올라있는 이 공포의 빛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이 에워싸고 있는 석옥 안에는 과연 누가 있기에 뭇 군웅들을 떨게 만든단 말인가?

 

군웅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세 명의 인물이었다.

석옥 뒤쪽의 천길 단애를 제외한 삼면을 포위하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도 세 사람의 기도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할만 했다.

반월형 포위망의 정면 맨 앞쪽에 서있는 인물은 일신에 푸른색 학창의(鶴氅衣)를 걸치고 있으며 가슴까지 드리운 검은 수염이 인상적인 노검수(老劒手)였다.

보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그 노검수의 허리춤에는 칠흑같이 검은 나무로 깍은 목검(木劒)이 한 자루 걸려 있었다.

그 목검은 유서 깊은 검술명가(劒術名家)의 상징이다.

 

<혁련검호각(赫蓮劒豪閣)>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검술명가다.

현련검호각은 연원을 따져보면 무려 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강호무림의 명문 중의 명문이다.

현력검호각의 일족은 오랜 세월 오직 검술 한 가지에만 매진해 왔으며 그 결과 무적의 검법을 이룩해냈다.

당금 무림에서 검법으로 혁련검호각에 필적할 수 있는 세력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의를 걸친 노검수는 바로 그 혁련검호각의 당대 가주다.

 

-유성신검황(流星神劒皇) 혁련휘(赫蓮輝)!

 

신마풍운록 서열 삼위(三位)에 올라있는 인물이 바로 그다.

비록 당금 무림의 세 번째 고수로 꼽히지만 단순히 검법만으로 따진다면 천하제일인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일대검호가 유성신검황 혁련휘인 것이다.

 

유성신검황 혁련휘의 왼쪽에는 오척(五尺) 단구(短軀)의 꼽추노인이 바위에 걸터앉아 거의 자기 키만한 길이의 긴 곰방대를 빨고 있다.

기이하게도 이 꼽추노인의 피부는 녹색 물감을 뒤집어 쓴 듯 짙푸른 녹색을 띠고 있었다.

비단 피부색만이 녹색이 아니었다. 이 인물은 눈동자마저도 섬뜩한 녹색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마치 뱀이나 악어가 인두겁을 쓰고 있는 듯한 그자의 기괴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싹 끼친다.

이 괴상망측한 행색의 꼽추노인 주변 십여 장 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군웅들은 꼽추노인을 극히 두려워하는 듯 연신 곁눈질을 하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독천존(毒天尊) 서래음(西來音)!

 

신마풍운록의 서열 사위(四位)의 인물로서 일반 무림인들이 고독마야 연남천보다 오히려 더 무서워하는 인물이다.

독천존 서래음이 독공(毒功)으로는 천하제일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몸 전체에는 치명적인 극독이 배어 있어 단지 숨결만으로도 십 리 밖의 적을 독살시킬 수 있다고 한다.

무림인들이 역신(疫神)처럼 두려워하는 독천존 서래음은 대리(大里)에 자리한 독성부(毒聖府)의 부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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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七 章

 

                모여드는 群雄

 

 

 

순간,

[적염혈마(赤髥血魔)!]

태산일수는 안색이 변해 외쳤다.

적포괴인___.

그는 얼굴이 온통 적염(赤髥)으로 뒤덮여 흉악하기 이를데 없었다.

[흐흐흐... 누군가 했더니 태산의 늙은 너구리였군.]

적포괴인, 즉 적염혈마 역시 태산일수를 발견하고 음침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허나 곧 적염혈마는 걸음을 옮겨 성큼성큼 천해비동의 입구로 다가갔다.

순간, 기검룡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흐흐흐... 꼬마야 비켜라!]

[어림없는 소리!]

적염혈마는 두눈을 부릅떴다.

[건방진 놈!]

그는 벼락같이 적색장력을 내뻗었다.

꽈르릉!

허나 기검룡도 물러서지 않고 풍천벽력장을 후려쳤다.

[물러가시오!]

콰쾅___!

두 사람의 장력이 격돌하는 순간 고막을 파열시키는 폭음이 터졌다.

[___ !]

적염혈마는 다급성을 발하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일 장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이 떠올랐다.

허나 그는 천해비동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곧 전 공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적염혈마의 수염과 모발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그의 전신이 완전히 핏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어린 놈! 제법이다. 이번에는 적살마강(赤煞魔罡)을 받아봐라!]

그말에 태산일수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저놈이 최후의 비기(秘技)까지 펼치다니...!)

이때, 적염혈마의 전신에 퍼진 핏빛 강기가 급격히 서로 뭉쳐졌다.

[흐흐흐... 뒈져랏!]

적염혈마는 음침하게 소리치며 쌍장을 교차시켰다.

기검룡도 황급히 그에 대항하여 쌍장을 후려쳤다.

[벽력패왕수!]

츠츠츠... ... 콰쾅!

천번지복(天翻地復)을 방불케하는 가공할 폭음이 장내를 뒤집어 엎었다.

잠시 후, 폭음이 걷히고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 장 정도의 커다란 구덩이가 움푹 패여져 있었다.

그 구덩이 양쪽에 선 두 사람___

기검룡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두눈을 감고 있었다.

허나 적염혈마의 신색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입가에 선혈을 주르르 흘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공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에 중인들은 일제히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저 어린 소년이 적염혈마를 이기다니...)

그들은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때 문득 능부인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칠십이도객! 용아를 호위해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칠십이도객들은 일제히 기검룡을 둘러쌌다.

그때였다.

! ___!

장내에 다시 네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순간, 그들을 본 능소취가 두눈을 반짝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기 앞장선 자가 바로 지난밤 용오빠와 싸웠던 그 노인이예요.]

그말에 능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백객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당주, 저들은 누구죠?]

백객은 일순 흠칫 했다.

허나 그는 곧 표저응가다듬으며 말했다.

[저 앞에선 회의인은 독수인마라고 하는 자입니다. 뒤의 삼인(三人)은 북망삼괴(北亡三怪)로서 북망사신(北亡邪神)의 제자들입니다.]

능부인은 아미를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북망사신이라면 백팔무인 중 일인(一人)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북망삼괴의 무공은 적염혈마에 못지 않습니다. 또 저들은 최초로 상강일괴(湘江逸怪)의 수하로 들어갔다고 하니 주위에 방조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말에 능부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럼 상강일괴 그자가 직접 이곳에 와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백객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독수마인이 휙 신형을 날려 기검룡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탁몽과 백객이 급히 그를 제지했다.

허나,

[흐흐흐... 비켜라!]

북망삼괴가 음산한 괴소를 흘리며 그들을 막아섰다.

이것을 틈타 독수인마는 다시 눈을 감고 운공중인 기검룡에게 덮쳐들었다.

칠십이도객들이 이를 좌시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완벽한 방어의 자세로 기검룡을 호위했다. 그러자 독수인마는 험악하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비켯!]

그는 벼락같이 양소매를 휘둘렀다.

순간 그의 소매 속에서 무수한 암기가 발출되어 칠십이도객들을 덮어씌웠다.

허자 도 객중 십여 명이 일제히 도()를 휘둘렀다.

! !

독수인마의 암기는 맹렬한 도기에 그대로 튕겨나고 말았다. 그러자 독수인마는 흉광을 내뻗으며 번쩍 쌍장을 치켜들었다.

순간,

[___ !]

[크윽___!]

순식간에 사오 명의 도객들이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

독수인마는 그들 사이를 뚫고 다시 기검룡에게 덮쳐들었다.

허나 그 순간, 기검룡이 두눈을 번쩍 뜨며 벼락같이 양수(兩手)를 내뻗는 것이 아닌가!

[___ ___ !]

독수인마는 미처 방어할 틈도없이 앞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허망하게 날아갔다.

___천강신공, 그것을 펼친 것이었다.

기검룡은 일순 싸늘한 눈빛으로 장내를 훑고는 휙! 몸을 돌려 북망삼괴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당신들은 아직도 물러갈 생각이 없소?]

그의 싸늘한 물음에 북망삼괴 중 대괴(大怪)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흐흐흐... 그렇다. 꼬마.]

[그럼 죽어야지!]

기검룡은 싸늘히 일갈하며 다짜고짜 쌍장을 쫙 벌렸다.

뻗어냈다.

도객들의 죽음에 살기가 치뻗힌 것이었다.

순간, 꽈르릉___!

___!

[___ !]

대괴는 다급히 장력을 마주쳤으나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사오 보나 후퇴했다.

[놓치지 않는다!]

기검룡은 차갑게 외치며 재차 장을 뻗어냈다.

___!

[___ !]

폭음과 함께 대괴는 피보라를 뿌리며 날아갔다.

이때,

[! 아버님!]

능소취가 갑자기 천해비동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사해신룡, 그가 전신에 서리가 가득히 앉은 채로 걸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가 나타나는 순간, 중인들의 시선은 모두 탐욕으로 빛났다.

그의 수중에 하나의 백옥함과 기()가 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 부인, 운공을 해야겠으니 호법을 부탁하오.]

이어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능부인을 비롯한 네 명의 비녀가 빠르게 그를 에워쌌다.

어느새 그녀들의 수중에는 두 자 길이의 짧은 보검이 들려 있었다.

이때,

[타핫!]

돌연 적염혈마가 대갈일성과 함께 사해신룡에게 덮쳐들었다. 그러자 그것을 신호로 북망이괴와 사공망, 심지어는 태산일수조차도 일제히 몸을 날려 사해신룡에게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멈추시오!]

기검룡은 황급히 소리치며 그들을 가로막았다.

허나 적영혈마가 음산하게 그를 노려보며 적살마강을 후려쳤다.

[흐흐흐.... 꼬마야 비켜랏!]

기검룡 또한 물러서지 않고 참마제룡수(斬魔制龍手)로 그의 공격을 맞받았다.

파파___ !

[___ !]

적염혈마는 앞가슴을 거세게 얻어맞고 다급히 물러섰다.

이때,

[! ... 빙백신공(氷魄神功)! 당신은 빙궁(氷宮)...]

돌연 북망이괴의 경악에 찬 부르짖음이 터졌다.

그말에 중인들은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능부인, 그녀의 온화한 얼굴에 싸늘한 서리가 덮이고 있었다.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녀는 얼음으로 깎아만든 듯 투명한 옥수(玉手)를 휘둘렀다.

순간,

[___ !]

[___ !]

북망이괴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헌데,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어 전신이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은 그들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즉사했다.

! 실로 끔찍하고도 가공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경악할 사태에 장내는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지고 말았다.

 

빙궁(氷宮).

 

이 얼마나 두려운 이름인가!

이백 년 전___

희세의 대도(大盜) 천수야제(千手夜帝)가 빙궁의 지보(至寶) 빙백신검(氷白神劍)을 훔친 일이 있었다.

빙궁에서는 천수야제를 잡기위해 사자를 파견했다.

빙궁설녀(氷宮雪女)___

그녀는 천하를 다 뒤졌으나 결국 천수야제를 찾지 못하고 중원무림에 대혈겁을 일으켰다.

그녀의 무공은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중원인 중 그녀의 일초 반식을 받아낸 인물이 없었다.

그녀가 중원을 종횡무진 휩쓸며 살겁을 일으킨지 일 년(一年).

돌연 빙궁설녀가 사라졌다.

그 이후, 빙궁은 중원무림인들에 있어 일대 공포의 존재로 알려져 왔다.

헌데, 놀랍게도 능부인의 손에서 빙궁의 절기가 펼쳐진 것이 아닌가?

 

이때였다.

[크흐흐... 정말 뜻밖이군. 이런 곳에서 빙궁의 절학을 보게 되다니...]

돌연 듣기 거북한 탁음이 조용한 장내를 울렸다.

이어, ! !

계곡후면의 석벽을 날아 두 명의 인영이 내려섰다.

각각 백의(白衣)와 금의(金衣)를 걸친 노인이었다.

백의(白衣)를 입은 노인은 마치 해골에 가죽을 씌워놓은 듯 비쩍마른 체구였다.

반대로, 금의노인은 통통한 체구를 지닌 자였다.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 중인들 사이에서 경악의 부르짖음이 터졌다.

[북망사신(北亡邪神)!]

[... 상강일괴(湘江逸怪)까지...]

백의노인___ 그가 바로 백팔무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십여 명의 일인(一人)인 북망사신이었다.

금의노인___ 그는 상강일대의 패주로 군림하는 상강일괴였다.

북망사신은 능부인을 바라보며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 본 사신의 제자들을 해쳤으니 죽어 마땅하다!]

이어, 그는 우장(右掌)을 치켜들었다.

순간 지독한 악취가 장내를 뒤덮었다.

능부인도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백옥같은 옥수를 들어올렸다.

츠츠츳... ___!

두 사람의 장력이 격돌하는 순간 시커먼 독무(毒霧)와 새하얀 빙기(氷氣)가 서로 뒤엉켰다.

[...]

[... ...]

그들은 동시에 상체를 휘청했다.

허나 곧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다시 몸을 움직였다.

능부인과 북망사신이 어지럽게 혼전을 치루고 있는 것을 틈타 상강일괴는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운공하고 있는 사해신룡에게 다가갔다.

[서랏!]

기검룡이 이를 발견하고 크게 소리치며 표표히 상강일괴 앞에 내려섰다.

[흐흐... 꼬마야 비켜랏!]

상강일괴는 번득 우수를 휘둘렀다.

___!

강맹한 장력이 쏟아지며 폭음이 일었다.

[이놈!]

상강일괴는 한 걸음 밀려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재차 장을 후려쳤다.

___ ___ !

서너 차례의 폭음이 잇따라 터졌다.

[!]

기검룡은 일순 신형을 비틀했다.

허나 그는 급히 몸을 바로잡으며 좌장을 내질렀다.

[벽력패왕(霹靂覇王)!]

상강일괴 역시 성명절학을 쏟아냈다.

[옥청강수(玉靑罡手)!]

___ 꽈르릉___!

엄청난 폭음이 장내를 뒤집어 엎었다.

기검룡은 울컥 선혈을 토하며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반면 상강일괴는 무릎까지 푹 박혀 들어갔다.

이때, 적염혈마가 교활한 눈빛으로 번개같이 사해신룡을 호위하는 네 소녀에게 덮쳐들었다.

[!]

[어딜!]

네 소녀는 교갈을 터뜨리며 네 개의 단검을 교차시켜 찬란한 광망을 일으켰다.

차차차창___!

[으헉!]

적염혈마는 허리를 난도질 당해 선혈을 쏟으며 튕겨났다.

이때 기회만 노리던 사공망의 보검이 번득 네 소녀사이를 파고들었다.

[!]

한 명의 시녀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보던 기검룡은 두눈에 불빛을 뿜었다.

이때,

[크흐흐...]

허리에 일검을 맞은 적염혈마가 다시 괴소를 흘리며 진()이 무너진 소녀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기검룡은 불끈 입술을 물며 극영쇄심인(克影碎心印)을 발출했다.

[___ ___ !]

적염혈마는 심장을 관통당한 채 피보라를 뿌리며 즉사했다.

허나 위기는 계속되었다.

사공망과 상강일괴, 태산일수가 번갈아가며 세 소녀를 공격했다.

기검룡은 휙! 신형을 날려 사해신룡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이때,

[호호호홋...!]

갑자기 간들어지도록 뇌살적인 여인의 교소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중인들은 흠칫하여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계곡 뒤쪽의 석벽 위___.

한 명의 타는 듯 붉은 나삼을 걸친 여인이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략 이십여 세 정도 되었을까?

붉은 나삼은 몸에 꼭 끼어 선정적인 육체의 선이 그대로 나타났다.

용모또한 천하에서 보기드문 미인이었다.

___ !

그녀는 교구를 날려 사뿐히 중인들 앞에 내려섰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그녀의 미모는 더욱더 선정적이고 뇌살적이었다.

추수같은 맑은 눈에는 은은한 색기(色氣)가 어려 단번에 사내의 마음을 끄는 마력(魔力)이 풍겼다.

오똑 솟은 콧날 아래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고 도톰한 입술.

그것은 너무도 육감적이었다.

상강일괴와 태산일수, 사공망들은 일순 넋나간 표정으로 나타난 여인을 응시했다. 허나 기검룡은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불쑥 물었다.

[이것보시오! 당신은 또 무엇이오?]

그 말에 고개를 돌린 홍의여인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어머! 귀여운 공자님!]

그녀는 탄성을 발하며 기검룡에게로 다가왔다. 허나 기검룡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다가오지 마시오! 당신도 보물을 노리고 왔소?]

홍의여인은 선정적인 교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 그래요. 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어요. 나는 공자님을 돕고 싶어요.]

[...?]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때,

[...! 이제보니 소저는...!]

태산일수가 그제서야 홍삼여인이 누구라는 것을 짐작한 듯 입을 열었다.

허나 홍삼여인은 얼른 그의 말꼬리를 가로챘다.

[그래요. 본 낭자가 바로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홍라선희(紅羅仙姬)예요.]

그말에 보고있던 능소취가 문득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스스로 천하제일미로 자화자찬하는 그녀의 태도가 우스웠던 것이다.

허나 홍삼여인, 즉 홍라선희는 기검룡을 바라보며 문득 장난기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공자님, 만일 제가 공자님을 도와드리면 그 대가는 어떻게 치루겠어요?]

그녀의 말에 상강일괴 등의 안색이 홱 변했다.

상강일괴는 홍라선희를 바라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낭자께서는 저 꼬마를 도와주려고 하시오?]

[못할 것도 없죠.]

홍라선희는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___홍라선희.

그녀는 이년(二年) 전부터 강호에 나타나 자칭 천하제일미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여인이었다.

허나 여인의 일신무공은 실로 추측할 길없이 고강하여 수많은 수많은 절정고수들이 무릎을 꿇었다.

헌데, 그런 그녀가 기검룡을 도우려 하니 상강일괴 등은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홍라선희는 문득 기검룡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아보였다.

[공자님, 싸움이 끝나고나면 공자님은 재뺨에 입맞춤을 해주시겠어요.]

[...]

그말에 기검룡은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자 홍라선희는 다짜고짜 기검룡의 새끼손가락을 걸어 흔들며 만족한 듯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약속... 약속 하셨어요. 공자님.]

헌데 이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능소취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허나 홍라선희는 몹시 기분좋은 듯 중인들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느분이 가르침을 주시겠어요?]

그러자 태산일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보검을 뽑아들었다.

[노부가 낭자의 가르침을 받아보겠소.]

[! 추상신검(秋霜神劍)이군요. 당신의 자운십이식(紫雲十二式)이 무적(無敵)이라는 소문은 들었어요. 소녀에게 견식좀 시켜주세요.]

[조심하시오!]

태산일수는 한 마디 크게 외치며 추상신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순간, 뭉클! 십여 송이의 검화가 치솟아 올랐다.

[호호... 좋아요!]

홍라선희는 교수를 앞가슴에 교차시키며 쾌첩하게 일장을 내뻗었다.

헌데 이때,

[흑무절살(黑霧絶煞)!]

[옥청강수!]

상강일괴와 사공망이 동시에 기검룡을 덮쳤다.

허나 기검룡은 추호의 당황함 없이 전력으로 쌍장을 후려쳤다.

츠츠츠... ___!

[으흑!]

기검룡은 옥청강수를 받은 손이 부서져 나갈 듯이 아프아고 느낀 순간 사공망의 보검에 허리를 스쳤다.

허나,

[흐흐... 다시 받아 보아라!]

상강일괴가 음침하게 웃으며 재차 옥청강수를 쏟아냈다.

동시에 사공망의 보검이 기쾌하게 사해신룡을 베어갔다.

[!]

기검룡은 일순 다급성을 발했다.

정면에서는 옥청강수가 날아들고 사공망의 검세는 세 시녀를 뚫고 곧바로 사해신룡을 짓쳐드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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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한 계곡

 

 

무공과 달리 기문둔갑(奇門遁甲), 즉 진법은 짧은 시간의 공부나 타고난 재능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공부와 다양한 경험을 걸쳐야만 진법을 설치하고 깨트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물론 백남빈은 보통 사람보다는 기문진법에 대해 아는 바가 많다. 양부 이탁이 기문진법을 설치하고 해체하는 현장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지금 자신들이 빠진 진법과 유사한 것은 본 적이 없다.

 

<삼재검법(三才劍法)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단순하고 평범한 검법이지만 그 안에 무학의 모든 이치를 담고 있다.>

 

난감해하던 백남빈은 양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독안룡 이탁은 백남빈에게 기초적인 무공 두 가지만 가르쳤었다. 무림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삼재검법과 육합심법(六合心法)이 그것이다.

그 두 가지 무공은 천년 이상 무림인들 사이에서 수련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이 이루어져 결점이 거의 없는 완벽한 무공이 되었다.

물론 무공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것과 위력이 강한 것은 별개의 문제다.

삼재검법과 육합심법은 워낙 단순하고 변칙이 없는 무공이라 그 위력이 위협적이거나 빼어나지는 않다.

그 때문에 무림에서 삼재검법과 육합심법을 진지하게 수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헌데 이탁은 다른 무공들은 다 제쳐두고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을 백남빈에게 가르쳤다.

심지어 자신의 독문절기인 칠로절천검(七路絶天劍)도 전수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백남빈이 백무염을 만나 가문의 절기를 익히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탁의 말을 통해 백남빈은 자신의 아버지 백무염도 무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이탁을 뛰어넘는 무공을 지닌...

하지만 이탁은 구체적으로 백무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백남빈이 주변 사람들을 통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백무염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단한 고수일 게 분명한 자신의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백남빈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백남빈은 가전절기를 익혀야하므로 함부로 다른 무공은 익히면 안된다는 양부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무공을 폭 넓고 다양하게 익히는 대신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을 극한까지 수련해온 것이다.

만일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으로 겨룬다면 백남빈은 천하무적일 것이다.

백남빈이 오 년 전 등천제에서 우승할 때 사용한 유일한 무공도 삼재검법이었다.

위력이 평범한 삼재검법만을 구사하다 보니 매번 어려움에 처했었다.

그러나 결국 근본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 덕분에 백남빈은 상대 무공의 결점을 파악해서 승리하길 반복했었다.

 

(하늘의 뜻, 땅의 이치, 인간의 도리...)

백남빈은 삼재검법의 검결을 되새겼다.

(), (), ()을 삼재(三才)라 부르며 도가에서는 우주가 오직 삼재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진법이라는 것도 결국 우주의 원리를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복잡한 진법이라도 삼재가 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삼재 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하늘의 법칙, 즉 천문(天文)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 진법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백남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 사이에 구름이 다소 흩어져 반쯤 찬 달과 함께 여러 개의 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저쪽에 있으니 북쪽은 이 방향이고...)

백남빈은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북두칠성을 찾았다.

그리고는 북두칠성이 떠있는 방향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빙글 돌았다.

앞쪽 하늘에 있던 북두칠성이 갑자기 좌측으로 성큼 돌아가 버린 것이다.

진법이 발동한 것이다!

다시 몇 걸음 내딛자 하늘이 또 빙글 돌면서 북두칠성의 위치가 다시 바뀌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백남빈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북두칠성이 바뀌는 방향과 걸음을 옮긴 거리 사이에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는 게 확인된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되풀이 하자 주위의 경물이 확 바뀌었다.

 

***

 

!”

흑왕의 등에 앉아 있던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백남빈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더니 갑자기 꺼지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흑왕을 황급히 돌려서 백남빈이 있던 곳으로 갔지만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마치 안개가 흩어진 것처럼...

주위는 어둡고 함께 있던 사람마저 갑자기 없어져 버렸다.

너무도 고요한 공간에 강미루 자신만이 홀로 남겨진 것이다.

사방에서 무언가 무서운 것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생겨난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숨을 쉬기도 어렵게 만든다.

공포에 휩싸이자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고 이빨은 저절로 닥닥 부딪친다.

"...!"

극심한 공포에 질린 강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뱉으며 흑왕의 등에 와락 엎드렸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은 채 미친 듯이 흑왕의 배를 걷어찼다.

히이이잉! 두두두!

갑자기 박차가 가해지자 흑왕도 깜짝 놀라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앞으로 달려갔다.

사람은 두려움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말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발굽의 진동이 전해지지 않음을 느낀 강미루가 눈을 번쩍 떴을 때에는 말과 사람이 함께 경사가 심한 비탈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주르르르! 티틱!

흑왕은 뒷발을 웅크리고 앞발은 버티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콰드드드!

그러나 비탈의 경사는 거의 수직에 가까울 정도라 점점 더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순식간에 삼십여 장을 미끄러져 내려갔을 때 강미루는 십여 장쯤 앞쪽에 집채만한 바위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흑왕이 미끄러져 가는 속도는 이미 쏘아진 화살 같다.

이대로 미끄러진다면 말과 사람은 그 바위에 부딪혀서 서로를 구분 못할 정도의 피떡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히히힝!

흑왕도 위기를 느끼고 웅크렸던 뒷발을 벌떡 세웠다.

파앗!

그리고는 미끄러져 내리던 속력보다 더 빨리 달려서 눈앞의 커다란 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바위 너머는 허공이었다.

바위는 가파른 비탈의 끝 부분이었으며 그 너머는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시커먼 절벽이었던 것이다.

쐐애액!

바람 소리가 강미루의 귓가에 비단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흑왕도 허공에서 곤두박질 쳐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강미루와 함께 떨어졌다.

아아악!”

죽었구나 싶은 생각에 강미루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을 토해내었다.

그 직후 강미루는 후끈한 열기가 절벽 아래쪽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북두칠성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옮기기를 십여 차례 했을 때 백남빈은 마침내 원형의 미로를 벗어나 진법의 다른 부분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곳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좁은 협곡이었다.

주위의 경물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강미루와 흑왕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아차!)

깜짝 놀란 백남빈이 강미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협곡으로 들어 온 방법으로는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아아악!>

멀리서 강미루가 내지른 게 분명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들려서 백남빈의 속을 바짝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소저! 내 목소리가 들리시오?”

비명이 들린 방향을 어림하여 외쳐보았다.

하지만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서 불러 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어쩔 수 없이 백남빈은 바위들 틈에 나있는 사람이 다닌 듯한 길을 따라갔다.

 

***

 

길은 빙글빙글 돌면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형태였다.

끊겼는가 싶으면 바위 뒤로 이어져 있고 오른쪽으로 도는가 싶으면 밑으로 내려가고 수시로 꼬불꼬불해져서 묘하기 짝이 없었다.

내친김에 끝까지 가보기로 작정한 백남빈은 단검에 찔려 아픈 다리를 끌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윽고 내려가는 길이 사라졌을 때 백남빈은 자신이 상당히 넓은 분지(盆地)의 바닥에 이른 것을 알아차렸다.

밤인 데다가 지면에서 한참 아래로 내려온 바닥이라 분지의 형태와 넓이는 짐작할 수가 없다.

(그 말괄량이가 무사한지 모르겠다.)

백남빈은 강미루가 아직도 원형의 미로를 떠돌고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든 빠져 나갔는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당장은 좀 쉬어야한다.

하루 종일 말을 달려 지친 데다가 강미루의 단검에 찔린 허벅지의 상처에서 출혈이 가볍지 않아서 어지럽다.

털썩!

백남빈은 풀이 무성하게 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밤하늘을 덮고 있던 먹장구름이 흩어지면서 상큼한 반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숨을 고르며 소지품을 점검해봤다.

악전고투를 치뤘지만 다행히 잃어버린 물건은 없었다.

무황성에 제출해야하는 밀서를 만지던 백남빈의 손길에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가 만져졌다.

정교하게 만든 그 주머니 안에는 손바닥 반쪽만한 옥패가 들어있다.

옥패는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를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단단하다.

그 옥패가 막아준 덕분에 백남빈은 강미루가 날린 화살에 가슴을 맞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어디 계시는지... 살아계시기나 하시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날 지켜주신 셈이다.)

백남빈은 냉옥패를 어루만지면서 너무 어렸을 때 헤어져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푸르르! 꿀럭! 꿀럭!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괴상한 소리가 상념에 잠긴 백남빈으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 뭔가?)

마치 거대한 괴물이 숨을 쉬는 듯한 소리에 백남빈은 모골이 송연해 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백남빈은 토곤이 강진남에게 예물로 보내려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꾸르륵! 푸르르!

그 사이에도 무언가를 토해내는 듯한 괴성이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청랑검이라 이름 붙인 단검의 날을 번득이지 않도록 수건으로 감싼 백남빈은 살금살금 기어서 괴성이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에 하늘에서는 반달이 완전히 구름에서 벗어나 별들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달빛이 제법 환해 주변을 분간할 수 있다.

거대한 분지의 가운데로 다가가니 바닥에서 크고 작은 불빛이 일렁이고 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살펴본 백남빈은 이내 그것이 실제 불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넓이가 족히 삼십 장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연못에 달빛과 별빛이 비친 것이다.

꾸르르! 푸륵!

괴성(怪聲)은 바로 그 연못 가운데에서 나고 있었다.

연못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흙은 따뜻하고 공기는 훈훈해졌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연못은 온천(溫泉)인 게 분명하다.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 주변에는 여러 가지 풀이 자라고 있으며 꽃이 핀 것과 열매가 달린 것도 있었다.

살금살금 기어 연못으로 다가가고 있는 백남빈의 콧속으로 풀냄새와 함께 각가지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심신을 상쾌하게 하는 향기다.

푸륵! 푸르르!

연못 가운데에서 다시 괴성이 들렸는데 말이 내는 투레질 소리 같다.

백남빈은 몸을 숨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살펴봤지만 딱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 백남빈은 몸을 일으켜 연못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푸르르! 푸릉!

붉은 색의 무언가가 물위에 떠 있고 시커먼 말 한 마리가 발버둥을 치면서 고개를 물 밖으로 내었다 잠겼다 하기를 반복한다.

그 시커멓고 거대한 머리로 보아하니 강미루의 천리마 흑왕인 게 분명하다.

(붉은 물체는 대려장의 그 말괄량이겠구나.)

백남빈은 비로소 흑왕과 강미루가 자기보다 먼저 이 신비한 절곡에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구하고 볼 일이다.

연못에 발을 담가 보니 너무 뜨거워서 살갗을 바늘로 치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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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속의 인연

 

 

-기련산(祈蓮山)!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의 경계에 자리한 험산으로 서북쪽에는 그 유명한 옥문관(玉門關)이 자리하고 있다.

중원과 서역을 잇는 중요한 무역로인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남쪽에서 굽어보고 있는 기련산의 서쪽 끝은 곤륜산의 장대한 산맥과 이어져 있다.

쏴아아아!

늦여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는 기련산 전역을 맹렬한 기세로 두들기고 있었다.

쐐애애액!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거센 폭우 속을 질풍같이 질주하는 인영(人影)이 있었다.

이 인물의 경신술은 너무도 빨라서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설령 상당한 수준의 내공을 지닌 무림고수라 해도 그저 흐릿한 사람 형상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도약할 때마다 무려 백여 장씩이나 쭉쭉 나아가는 경이적인 경신술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서둘러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테니...”

질풍같이 달리는 인영으로부터 문득 초조함과 근심이 가득 서린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사내처럼 걸걸하기는 하지만 틀림없는 여자의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마치 섬전처럼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이 인물이 여자라는 뜻인데...

도대체 이 여인은 어떤 경신술을 연마했기에 이토록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일까?

고오오오!

너무 빨리 달리는 탓에 여인의 몸 주위로는 진공(眞空)의 막()이 생겨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어리석은 자들! 이 모두가 오라버니를 해치려는 간악한 음모이거늘... 그 까짓 비급에 눈이 멀어 고독애로 몰려들다니...!”

인간이라 믿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질주하며 연신 이를 가는 여인의 모습은 아주 특이하여 한번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거구(巨軀)!

여인은 무려 칠척(七尺; 2m 10cm)에 가까운 거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가 두 개쯤 더 달린 정도로 큰 키를 지닌 이 여인은 다리 하나의 굵기도 어지간한 사내들의 몸통만하다.

투학!

그 강인한 다리로 지면을 박찰 때마다 여인의 늘씬한 몸이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간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쯤일까?

비록 엄청난 거구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여인은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다. 구릿빛 피부에 조각을 한 듯 뚜렷한 이목구비는 경국지색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얼굴만이 아니다.

칠척 가까운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몸매는 균형이 잘 잡혀 있다. 팔 다리가 늘씬할 뿐 아니라 들어갈 곳은 확실하게 들어가 있고 나올 곳은 당당하게 나와 있다.

무지막지한 거구의 소유자라는 것만 빼면 사내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매력적인 미인인 것이다.

(만에 하나 오라버니께서 이미 변을 당했다면... 전 무림이 나 냉약빙(冷若氷)의 손에 피로 씻기리라!)

거구의 여인은 질풍같이 날아가며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큼직한 손은 허리춤에 찬 가죽주머니를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 주머니에서는 은은한 화약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내게 오라버니는 생명과 다름없다! 그분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 굉천벽력탄(轟天霹靂彈)보다 더한 것이라도 쓸 수 있다!)

냉약빙이란 이름의 여인은 결연한 눈빛을 지었다.

그녀가 허리에 차고 있는 가죽주머니 속에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화탄(火彈) 십여 개가 들어있다. 굉천벽력탄이라는 그 화탄은 한 알로 십장 안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다.

(하여간 서둘러야 한다! 곤륜산의 고독애까지는 아직도 천여 리나 남았으니...!)

쐐애애액!

냉약빙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몸을 날렸다.

천여리라면 보통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먹히는 아득한 거리다.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경신술을 지닌 이 여인에게는 천리 길도 그저 하루 정도면 주파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헌데 냉약빙이 막 하나의 산봉을 새처럼 날아 넘을 때였다.

아악!”

퍼붓는 빗속에서 한소리 애처로운 여인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산 속에서 웬 여자가...!)

콰우우우!

빛살처럼 질주하던 냉약빙의 몸이 송곳을 꽂듯이 딱 멈춰졌다. 그녀는 달리는 것도 빨랐지만 멈춰서는 것 역시 빨랐다.

쏴아아아!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있던 것처럼 우뚝 멈춰선 냉약빙의 몸으로 세찬 빗줄기가 퍼부어졌다. 그녀의 거구가 삽시에 빗물에 젖어들면서 얇은 여름옷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흠씬 젖은 옷자락을 통해 그 형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냉약빙의 젖가슴은 하나하나가 가장 큰 수박만하다. 그 육중한 한 쌍의 살덩이들은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와 숨이 가빠진 탓에 연신 아래 위로 출렁거린다.

멈춰선 냉약빙은 먹물을 칠한 듯 짙은 눈썹을 모으며 비명이 들려온 우측의 계곡을 돌아보았다.

(가볼까?)

냉약빙은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평상시였다면 당연히 달려가 보았을 것이다. 남의 어려움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그녀의 호협(豪俠)한 성격이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촌각을 다투어 곤륜산까지 가야만 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위험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냉약빙이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아악! 안돼! 안된다 이놈들아! 아악!”

또 다시 여인의 절박하고도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어떤 여인이 사내들에게 겁탈당하면서 내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냉약빙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이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비록 마음은 달궈진 가마솥에 빠진 개미같이 초조했지만 같은 여인의 입장으로써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스파앗!

다음 순간 냉약빙의 모습은 흐릿하게 변해서 어떤 여인의 다급한 비명이 들려온 계곡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있는 계곡에도 장대발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그 계곡의 끝은 높은 절벽으로 막혀있다.

수십 길 높이인 그 절벽 앞쪽으로는 제법 넓직한 공터가 있는데 지금 그곳에서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뻘건 옷을 걸친 사내 십여 명이 어떤 여인을 겁탈하고 있는 중이었다.

흘흘! 고것 육덕 한번 기막히군!”

빨리 끝내라 장가야! 너 혼자 즐길 계집이 아니지 않느냐?”

빙 둘러선 혈포인들이 저마다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보는 가운데 한 명의 여인이 다섯 명의 사내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사내들에게 깔려 능욕당하고 있는 그 여인은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미소부(美少婦)였다.

여인은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이면서 우아한 기품까지 지녀 한눈에 보기에도 명문가의 안주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걸치고 있던 옷은 갈가리 찢겨 있으며 머리카락은 빗물에 젖은 채 제멋대로 풀어 헤쳐져 봉두난발이 되어 있었다.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된 미소부의 팔 다리는 흉칙한 인상의 사내 넷이 활짝 벌려서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런 미소부의 몸 위에서 한 명의 사내가 짐승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그자가 하체를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아래에 깔린 여체는 마치 작살을 맞은 듯 물고기처럼 퍼득이며 경련을 일으킨다.

하지만 여인의 입에서는 더 이상 신음소리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

여인은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한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소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한 그루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인데 그곳에는 사내아이 한명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서너 살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귀엽고 잘 생긴 그 아이는 바로 유린당하고 있는 미소부의 아들이었다.

사내아이는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내들은 미소부의 아들을 해치고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는 중이었다.

... 정말 기가 막히구만! 이런 계집을 마누라로 두었었느니 태양신협(太陽神俠)이란 놈도 여한은 없었겠다.”

미소부의 몸 위에서 날뛰는 사내가 헐떡이며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였다.

크악!”

커억!”

돌연 단말마의 비명 십여 마디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와 장내를 뒤흔들었다.

무슨 일이냐 산통깨지게!”

미소부를 유린하던 사내는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그 직후 그자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퍼퍼퍽! 콰당탕!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동료들의 몸뚱이가 피를 뿌리며 나무토막처럼 거꾸러지는 것을 본 때문이다.

육시를 할 놈들!”

화악!

뒤 이어 사나운 일갈과 함께 장내로 한 명의 여인이 질풍같이 장내로 날아 내렸다. 바로 냉약빙이라는 거구의 여인이었다.

, 당신은!”

엄청난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냉약빙을 본 순간 미소부의 몸에 올라타고 있던 사내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자의 뇌리로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올라있는 여살성(女煞星)의 존재가 떠오른 때문이다.

... 전모(電母) 냉약빙!”

파앗!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여체에서 떨어진 사내는 다급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자는 벌거벗은 하체를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에 나타난 여인의 존재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전모 냉약빙!

 

여자의 몸으로 신마풍운록에 서열 십위(十位)로 기록되어 있는 절세고수다.

별호가 암시하듯 냉약빙의 경신술은 단연 우내최강이었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당금 무림의 그 누구도 그녀보다 빠르지 못하다.

냉약빙이 구사하는 전궁만리비(電弓萬里飛)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빠른 경신술로 알려져 있다.

전궁(電弓)은 번개를 뜻한다.

전모라는 별호는 냉약빙의 경신술이 번개가 치는 것만큼 빠르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일단 냉약빙의 표적이 된 자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그 전모 냉약빙이 나타났으니 일개 음적에 불과한 사내가 사색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으헉!”

나타난 여인이 전모 냉약빙임을 알아보고는 사색이 되어 몸을 날리던 사내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스스스!

갑자기 눈앞이 뿌옇다 싶은 순간 냉약빙의 모습이 유령같이 앞쪽에 나타난 것이다.

쩌어엉!

이어 그녀의 큼직한 손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지고...

안돼, 케엑!”

퍼억! 후두둑!

처절한 비명과 함께 허연 뇌수가 빗속으로 확 뿌려졌다. 냉약빙의 손가락에서 일어난 강력한 파괴력이 사내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

머리통이 으깨져 나뒹구는 음적의 시체를 노려보며 냉약빙은 이를 바득 갈았다.

헌데 그 직후였다.

흐윽!”

그녀의 뒤에서 짤막한 여인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반사적으로 돌아본 냉약빙의 안색이 홱 변했다. 사내들에게 유린을 당하던 미소부가 한 자루 비수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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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강 무협소설

 

             고독천년 -孤獨千年

 

 

서장

 

            신마풍운록의 음모

 

 

 

-신마풍운록(神魔風雲錄)!

 

이것은 무림인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인명부(人名簿)다.

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인명부로 인해 무림역사상 최악의 살겁이 벌어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수많은 생명이 허무하게 스러진 대참사가 어이없게도 그저 이름을 나열해놓았을 뿐인 한 권의 책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

 

-신마풍운록!

 

제목 그대로 당금의 무림에서 천신(天神)과 마귀(鬼魔)처럼 풍운(風雲)을 일으키고 있는 고수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인명부다.

물론 무림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신마풍운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 지방의 패주(覇主)이거나 어떤 방면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인물들만이 신마풍운록을 장식할 수 있다.

즉,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무림의 정세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유력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마풍운록이 누구에 의해 작성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 한 권의 인명부는 어느 날 문득 천하 각지에서 발견되기 시작했을 뿐이다.

누군가에 의해 작성되어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에 거의 동시에 배포된 신마풍운록은 무림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오른 인물들은 득의해 마지 않았다. 신마풍운록에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당금 무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임이 증명된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득의는 오래지 않아 공포와 의혹으로 돌변하였다. 신마풍운록에 이름을 올린 명숙들이 무참하게 살해되는 참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무림명숙들을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는 이내 밝혀졌다.

 

신마풍운록-!

 

도처에서 일어난 참사의 원흉은 바로 신마풍운록이었다.

물론 신마풍운록이 직접 살인을 한 것은 아니다. 신마풍운록은 그저 살인의 원인을 제공했을 뿐이다.

문제가 된 것은 신마풍운록에 올려진 이름들에 서열(序列)이 매겨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신마풍운록의 작성자는 대단한 통찰과 분석력으로 무림인들의 능력을 분석하여 서열을 매겨 놓았는바, 그것이 재앙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제삼자가 보기에 신마풍운록 상의 서열은 수긍이 갈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열이 매겨진 당사자들의 생각까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데 혈겁의 단초가 숨겨져 있었다.

 

-내가 왜 그 작자보다 서열이 낮은가?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오른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그같은 불만을 품었으며 급기야 자기보다 상위 서열로 기록된 인물들에게 격렬한 질시와 살의를 느끼게 되었다.

 

-만일 그자가 사라진다면 내가 그자의 서열을 차지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같은 악마의 속삭임이 불만을 느낀 무림인들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대참극의 시발점이었다.

신마풍운록의 서열에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자기보다 윗 서열의 인물을 암살하는 사태가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최초의 희생자는 신마풍운록에 서열 칠십이위(七十二位)로 기록 된 상강조수(湘江釣搜)란 인물이었다.

한 자루 낚싯대만 있으면 고래라도 낚아 올릴 수 있다는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상강조수는 세상의 욕심과 명예 따위는 하찮게 여겨왔었다.

그런 그가 자신보다 하위 서열로 기록 된 몇 명의 인간들에게 합공을 당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이 피 빛 회오리의 시작이었다.

상강조수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신마풍운록의 서열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자기보다 윗 서열의 고수들을 암살하는 일이 도처에서 발생했다.

질투가 원인인 이같은 추악한 암살극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으며 일단 일어난 피바람은 일거에 전 중원을 휩쓸었다.

피는 피를 부르고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낳았다.

신마풍운록의 고수들은 서로를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다. 살아남으려면 먼저 상대를 죽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의심은 공포를 낳고 공포는 무자비한 살육으로 이어졌다.

이제 평화란 말은 사라지고 살육과 피비린내만이 강호를 휩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림에 퍼진 한 가지 소문에 의해 신마풍운록이 일으킨 혈풍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고독마야(孤獨魔爺)가 혈마대장경(血魔大藏經)을 얻었다!>

 

이같은 소문을 접한 무림인들은 공포와 경악으로 전율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문에 언급된 한 인물의 이름과 비급의 제목이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독마야 연남천(燕南天)!

 

그가 누구인가?

자타가 공인하는 당금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아닌가?

신마풍운록의 첫 장을 차지하고 있는 서열 일위(一位)의 절대고수가 바로 고독마야 연남천인 것이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육십여 년의 세월을 실로 고독하게 살아 왔다.

그에게는 친구는 물론이고 적수도 없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그 누구도 고독마야의 삼초지적(三招之敵)이 되지 못했다.

적수조차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불행한 일인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 강했기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던 고독한 절대자!

그가 바로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혈마대장경!

 

그 이름은 고독마야 연남천보다 오히려 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혈마대장경은 무림 역사상 최강자들인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중 한 명이 남긴 비급이었다.

 

-흡혈마조(吸血魔祖)!

 

사파(邪派) 무림에서 종가로 숭배받는 혈교(血敎)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인육(人肉)을 즐겨먹고 인혈(人血)을 술 대신 마셨다는 전설 속의 마인이었다.

흡혈마조는 천인공노할 악행을 숱하게 자행하였으나 일백 수십 살의 천수를 누린 후 죽었다. 너무도 강한 그자를 세상 그 누구도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염라대왕마저도 두려워서 끝까지 살려두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흡혈마조는 막강했으며 공포 그 자체였다.

흡혈마조가 창안한 저주받을 마공들이 수록되어 있는 비급이 혈마대장경이다.

바로 그 혈마대장경이 고독마야 연남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소문을 접한 무림인들은 공포와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천하무적으로 여겨져 온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까지 연마한다면 그 결과는 삼척동자라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독마야에게 혈마대장경을 연마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그가 혈마대장경마저 익힌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영원히 고독마야를 능가하지 못한다!

-혈마대장경의 마공 중 한 가지만 얻어도 독패군림(獨覇君臨)할 수 있다!

 

두려움과 함께 추악한 탐욕이 전 무림을 열병처럼 휩쓸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수많은 무림인들이 고독마야 연남천의 거처인 곤륜산(崑崙山) 고독애(孤獨崖)로 몰려갔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신마풍운록 상의 고수들 거의 전원이 곤륜산으로 운집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천하를 집어 삼키려는 음모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치밀하고도 잔혹한 음모의 그물이 전 무림을 옥죄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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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사로잡힌 여인

 

 

휘익!

질풍같이 내달리던 당혜선이 돌연 급정거했다.

"...!"

감았던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던 고검추는 흠칫했다.

당혜선이 멈춰선 곳은 깎아지른 단애 위였다도끼로 쪼개놓은 듯 쩍 갈라진 절벽 아래로는 거친 물줄기가 굽이치며 흐르고 있다.

 

-청룡탄(靑龍灘)!

 

기련산을 남북으로 가르며 흘러가는 험한 물줄기다산속을 수백 리 치달린 거친 계류는 황하와 이어진다.

당혜선이 멈춰선 단애는 그 청룡탄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콰르르!

족히 오십여 장은 됨직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거센 물줄기가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다.

팽가촌에서 청룡탄까지의 거리는 오십 리가 넘는다당혜선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으음... 틀렸단 말인가?"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던 당혜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검추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당혜선은 선녀곡을 벗어난 직후부터 추격이 따라붙은 걸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련산에서도 험한 곳을 골라 치달렸건만 끝내 추격을 떨쳐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특히 나중에 추격에 가세한 자의 속도는 놀라웠다처음에는 이십여 리의 간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십리 안쪽으로 따라붙었다.

혼자라면 어찌 어찌 떼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볍지 않은 고검추를 안고 그자의 추격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자는 사신각주 본인일 텐데... 추아만이라도 그 살인귀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

비장한 표정이 된 당혜선은 고검추를 안고 우측의 석벽으로 다가갔다.

석벽 아래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그 바위들 사이를 지나자 그리 크지 않은 동굴이 나타났다입구에 바위들이 겹쳐 있어서 밖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동굴이다.

당혜선은 팽가촌 근처에 출몰하는 맹수들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이 동굴을 발견했었다.

치명상을 입고 달아난 표범이 석벽 근처에서 돌연 사라졌었는데 피 냄새를 따라 가보니 동굴 안에서 죽어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숨기면 누구도 추아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파팟!

동굴로 들어간 당혜선은 고검추의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을 짚은 후 바닥에 눕혔다.

동굴 입구는 교묘하게 감춰져 있고 멀지 않은 곳으로는 청룡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내공이 제 아무리 심후한 자라도 이 동굴 안에 숨겨진 고검추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설마...)

고검추는 혀가 굳어지고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놀란 눈으로 당혜선을 바라보았다.

대략 반 시진(1시간)쯤 지나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당혜선은 혈도가 짚여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된 고검추를 만감이 서린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혈도가 풀리더라도 팽가촌으로는 돌아가지 마라사신각의 악귀들이 팽가촌을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대신 복우산(伏牛山)에 자리한 호천무맹으로 가서 철봉황(鐵鳳凰고현경(高玄鏡)이란 아이를 만나라내 이름을 대면 그 아이가 널 돌봐 줄 것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검추를 내려다보던 당혜선은 동굴을 나갔다.

휘익!

당혜선은 동굴 안에 누워있는 고검추를 한 번 더 돌아본 후 새처럼 날아올라 사라졌다.

(어머니...!)

고검추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사신각의 무리들을 유인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하지만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속내와 달리 고검추는 말을 할 수도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무사하기를막혀있는 혈도가 빨리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헌데 당혜선이 사라지고 일다경쯤 지났을 때였다.

스악!

한 줄기 검붉은 그림자가 질풍같이 동굴 앞을 스쳐지나갔다.

(... 사신각의 살인귀들 중 한명일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고검추는 곁눈질로 동굴 밖을 살펴보았다.

엇갈리게 서있는 바위들 틈새로 동굴 밖이 보인다.

하지만 나타났던 자의 경신술은 아주 빨라서 순식간에 고검추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몸놀림이 어머니에 못지않은 걸 보면 사신각이란 조직의 두목일지도 모른다.)

고검추는 속이 타들어갔다검붉은 그림자가 날아간 곳이 당혜선이 사라진 쪽이었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어머니가 무사하셔야할 텐데...)

고검추는 달궈진 가마솥에 빠진 개미의 심정이라는 어떤 것인지 절감했다.

어머니가 과연 사신각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을까?

입이 바싹 타들어갔지만 고검추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반시진은 지나야 혈도가 풀릴 것이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의 고검추에게 반시진은 말 그대로 여삼추(如三秋)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화라락!

당혜선과 검붉은 그림자가 날아간 쪽에서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사신각의 추격을 따돌리고 돌아오시는 것일까?)

고검추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동굴 밖을 주시했다.

휘익!

이윽고 하나의 그림자가 동굴 앞으로 날아 내렸다.

(!)

그 직후 고검추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나타난 자는 검붉은 장포를 걸친 인물인데 얼굴은 같은 색의 복면으로 가리고 있다그자가 쓰고 있는 복면 이마부분에는 <()>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바로 사신각주였다.

헌데 사신각주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축 늘어져 있었다.

(... 어머니!)

고검추는 기겁했다사신각주의 옆구리에 끼어있는 여인은 바로 당혜선이었기 때문이다.

당혜선은 결국 달아나지 못하고 사신각주에게 제압당한 것이다.

기련산 일대에서 으뜸가는 고수라 불리던 흑모철웅조차 쓰러트린 당혜선이다.

그런 그녀가 별 저항도 못하고 사로잡힌 것만으로도 사신각주가 얼마나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당가년이 이 근처에서 잠깐 지체했었는데...)

사신각주는 음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자는 심후한 공력으로 당혜선의 이동 경로를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그래서 당혜선이 이쯤에서 잠시 멈췄던 것을 알아차렸었다.

사신각주가 주의 깊게 살펴보았으나 주변에서 딱히 눈에 띠는 것은 없었다.

천시지청술을 펼쳐서 탐색하려고 해도 멀지 않은 곳에서 청룡탄의 물줄기가 요란하게 흐르고 있어서 불가능하다.

당혜선이 의도한 대로 사신각주는 지척에 숨어있는 고검추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털썩!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사신각주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당혜선을 바닥에 던졌다.

"...!"

모질게 바닥에 던져졌지만 당혜선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신음조차 토하지 않았다움직이려는 시도도 못하는 것으로 보아 혈도가 짚인 듯 했다.

"당혜선더 괴로움을 당하기 전에 복마신검을 내놔라."

사신각주는 힘없이 누워있는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복마신검을 내놓으라니...?"

당혜선은 감고 있던 눈을 치뜨며 앙칼지게 대꾸했다.

"흐흐흐알만한 인간은 다 알고 있는 사안인데 발뺌할 작정이냐?“

사신각주는 칙칙한 살기가 서린 눈으로 당혜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당혜선의 태도는 단호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복마신검을 어떻게 내놓는단 말이냐?"

"그럼 네년은 왜 십칠 년 전 호천무맹을 도망치듯 떠났느냐?"

"...!"

사신각주의 이어진 추궁에 당혜선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다정관음 능벽운을 제외하면 고창룡과 가장 가까웠던 건 바로 사매인 네년이었다당연히 고창룡은 죽기 전에 네년에게 복마신검을 숨겨둔 곳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사신각주의 두 눈이 흥분으로 희번덕거렸다.

헌데 복마신검이라니... 십칠 년 전 철사자 고창룡이 사모를 겁탈하고 죽은 참사가 사신검중 복마와 관련 있단 말인가?

고창룡이 죽은 이상 오직 네년만이 복마신검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추론할 수 있다그러니 씨알도 먹히지 않는 발뺌을 해볼 생각은 마라

사신각주가 쓰고 있는 복면 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일 테면 죽여라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내 입에서 네놈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당혜선은 단호하게 내뱉은 후 다시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네년이...!"

사신각주의 두 눈이 살기로 새파랗게 물들었다.

그자는 당혜선의 태도에 격노했지만 달리 어찌 해볼 수단이 없었다.

사실 사신각주는 당혜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혜선의 성격이 얼마나 당찬지 잘 알고 있었다당혜선은 일단 결심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고문은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섭혼술을 쓰면 입을 열게 할 가능성이 있지만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모된다.

문제는 사신각주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가공할 고수가 기련산에 들어와 있는 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고수에게 포착되기 전에 어떻게든 당혜선의 입을 열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신각주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흐흐흐좋다네년의 입에서 복마신검의 행방을 듣는 것은 포기하겠다그 대신 다른 것을 갖도록 하지."

사신각주는 음산하게 웃으며 당혜선에게 다가갔다.

"...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당혜선은 불길한 예감에 교구를 부르르 떨었다.

"크크크복마신검은 포기하고 무맹사신재(武盟四神才)중 한 명이었던 네년의 속살 맛이나 봐야겠다."

사신각주는 음험한 눈으로 당혜선의 풍만한 몸매를 쓸어보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

당혜선의 분노에 찬 음성은 채 이어지지 못하고 날카로운 비명으로 바뀌었다.

사신각주가 당혜선의 상의를 찢어버리듯 단번에 벗겨냈기 때문이었다.

... 네놈이... 흐윽!”

사신각주는 분노와 수치로 떠는 당혜선의 치마마저 거칠게 벗겨 내렸다.

이제 당혜선은 작은 속곳으로 은밀한 곳만 가린 민망한 자태가 되었다.

"흐흐흐... 그럼 네 년의 꿀단지도 구경해볼까?"

사신각주는 음험한 웃음을 흘리며 그 속곳에도 손을 댔다.

"... 안된다제발 이러지 마라!"

사신각주의 손이 속곳에 닿자 당혜선은 사색이 되었다.

바로 지척에 고검추가 숨어있다.

아들이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몸을 더럽힐 위기에 처했다.

당혜선은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고 싶었다.

물론 혈도가 찍힌 상태라 혀를 깨물 수도 없다.

본좌에게 기쁨을 주고 싶지 않다면 복마신검의 소재를 대라.”

사신각주는 당혜선의 속곳으로 가려진 부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순간 당혜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신각주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모른다난 복마신검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네 놈 마음대로 해라.”

당혜선은 악에 바쳐 외쳤다.

그렇게 결심했다니 어쩔 수 없군.”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살기를 뿜어냈다겁탈하겠다는 협박도 당혜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다.

하지만 당혜선의 그같은 반응도 사신각주가 예상한 것이다.

흐흐흐네년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당혜선의 몸에 마지막 남아있던 보루인 작은 속곳을 거칠게 찢어버렸다

"흐윽!"

하체가 썰렁해지는 것을 느낀 당혜선은 절망에 찬 신음을 토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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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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