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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반지

 

 

 

제왕성에 경사가 생긴 것은 십팔 년 만이다.

소성주 모용준(慕容俊)이 배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제왕성 섭씨일족은 자손이 귀하다.

삼대(三代)가 거푸 외아들로 이어져 올 정도였다.

당대 성주인 철면제왕 섭장천도 자식 복이 없었다. 본처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첩을 뒀지만 후손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본처가 병으로 죽자 섭장천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후처를 들였었다.

섭장천의 두 번째 아내 주영청(朱永淸)은 황제의 누이였다.

주영청은 열여섯 살에 출가했다가 다음해 남편이 죽어 청상(靑孀)이 되었었다.

황제는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어 쓸쓸히 지내는 누이를 보다 못해 재가를 권유했다.

이에 주영청은 다른 좋은 혼처를 모두 마다하고 할아버지뻘인 섭장천에게 시집을 왔었다.

다행히 그녀는 시집 온 다음 해에 늙은 남편을 위해 아들을 낳아주었다.

하지만 그 귀한 아들 섭무궁(葉無窮)의 돌 잔칫날에 비극이 벌어졌다.

마교 교주 귀면지존이 달마묵장을 노리고 제왕성에 잠입했다가 주영청을 살해하고 섭무궁을 납치해간 것이다.

그날 이후 제왕성에서는 웃음이 끊겼다.

섭장천은 두문불출하며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성격도 모질고 괴팍해져서 눈에 거슬리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관대하고 정의롭던 제왕성이 포악한 패도(覇道)의 집단이 된 것도 십팔 년 전의 그 비극이 벌어진 이후부터였다.

백여 년의 세월동안 무림을 지배해온 제왕성은 어느덧 존경과 흠모의 대상에서 두려움과 증오의 악역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십여 년에 걸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면지존에게 납치당한 섭무궁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섭장천의 나이는 칠순을 넘어버렸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 후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섭장천은 양자를 들여 제왕성의 대를 이을 결단을 내렸다.

섭장천의 결단으로 덕을 본 행운아가 바로 모용준이다.

모용준은 하남성에 근거를 둔 모용세가(慕容世家)의 소가주였다.

모용세가는 하남성에서는 제법 기침 꽤나 하지만 무림 전체로 놓고 보면 딱히 특출 날 것도 없는 가문이다.

그래도 모용세가가 내세울만 자랑거리가 한 가지는 있었다.

전전대의 안주인이 철면제왕 섭장천의 먼 친척 누이였다는 게 그것이다.

섭장천은 생판 남보다는 그래도 약간의 피가 섞인 모용준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모용준은 핏줄 덕분에 그저 그런 가문의 후계자에서 일약 무림의 패자인 제왕성의 소성주가 된 것이다.

바로 그가 내일 혼례를 올릴 예정이다.

 

* * *

 

(이런 허접 쓰레기를 예물이라고 내놓다니...)

진상파(陳祥芭)는 치밀어 오르는 경멸의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

제왕성의 내()총관 구숙정(具淑貞)이 가져온 패물함의 내용물이 그녀를 기막히게 만든 것이다.

 

내일 모용준과 혼례를 올릴 예정인 진상파는 황금성(黃金城)의 성주다.

무림을 지배하는 것이 제왕성이라면 대륙의 상계(商界)는 황금성이 장악하고 있다.

황금성의 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황실조차도 황금성의 눈치를 본다고 할 정도다.

올해 나이 스무 살인 진상파는 바로 그 황금성의 성주다.

전대 성주였던 새석숭(賽石崇) 진보륜(陳寶輪)이 돌연사하면서 외동딸인 진상파가 대를 이었던 것이다.

전대 성주의 유일한 핏줄이라 황금성을 물려받긴 했으나 아무래도 여자라는 한계가 있다.

지난 일 년 간 진상파를 몰아내고 황금성을 차지하려는 음모와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수많은 친인척들이 호시탐탐 진상파의 자리를 노려왔다.

범인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암살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던 중 제왕성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제왕성의 무력이라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진상파는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였었다.

 

이 패물들이 황금성의 주인이신 소저 눈에는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을 거예요.”

제왕성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내총관 구숙정은 진상파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패물함의 패물들은 질과 양에서 민망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사연과 배경이 있는 물건들이랍니다. 영청공주(永淸公主)님께서 제왕성으로 시집오실 때 황실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이거든요.”

구숙정은 붙임성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삼십대 중반의 나이지만 구숙정은 여전히 화사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주도면밀한 성격이라 그녀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구숙정에게는 구미호리(九尾狐狸)라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별호가 붙어있다.

성주님께서 다음 대 제왕성의 안주인이 되실 소저에게 친히 내리신 것이니 소중하게 다뤄주시길 바라겠어요.”

구숙정은 패물함을 진상파쪽으로 조금 더 밀어주며 말했다.

그렇게 하지요. 성주님께는 총관이 나 대신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진상파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혼례를 치르기 위해 제왕성에 왔지만 진상파는 아직 성주인 섭장천을 접견하진 못했다.

소저의 말씀은 그대로 성주님께 전해드리지요. 내일 있을 혼례를 잘 치르기 위해서라도 오늘 밤 잠자리가 편하시기를 바라겠어요.”

구숙정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열려있는 문 밖에는 여자답지 않게 당당한 체격에 황금색 갑주로 무장한 여자 무사들이 방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거구의 여자들은 진상파의 전속 호위들인 백팔금차(百八金叉)들이다.

어려서부터 온갖 약물로 단련된 그녀들의 몸은 금강불괴나 다름없다.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백팔금차들의 충성심은 절대적이다.

단 한시도 신변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백팔금차들 덕분에 진상파는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당연히 백팔금자들은 구숙정의 일거수일투족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년...)

백팔금차들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영빈관(迎賓館)을 나서는 구숙정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진상파의 차갑고 오만한 태도가 구숙정의 배알을 뒤틀리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 지나면 그 상판에 눈물 마를 날이 없게 될 것이다. 제왕성의 진짜 안주인이 누군지 알게 될 테고...)

독기를 품고 영빈관을 떠나는 구숙정의 뒤에서 백팔금차들이 방문을 닫고 있었다.

 

문이 밖에서 닫히고 방안에는 진상파 혼자 남게 되었다

이 패물들이 내 눈에는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주제라도 아니 다행이네.”

진상파는 코웃음 치며 패물함의 내용물들을 흘겨보았다.

세공(細工)은 고리타분하고 보석의 질은 그다지 높지 않다. 게다가 관리 상태까지 엉망이고...”

진상파는 패물들을 건성으로 뒤적였다.

물론 패물함의 패물들이 값어치가 전혀 없는 쓰레기들은 아니다. 금과 은, 그리고 각종 진귀한 보석들로 만들어져 있어서 제법 값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최상의 품질을 지닌 보물들만 보며 자라온 진상파의 눈에는 한 없이 허접하게만 보였다.

황실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이면 뭐해? 이 패물들을 다 팔아봐야 내가 끼고 있는 반지 하나 값도 안 나올 텐데...”

패물들을 뒤적이는 진상파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는 잘 세공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다.

자두 씨만한 금강석이 박힌 그 반지를 팔면 수만 평의 옥토(沃土)를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왕성에서 보물로 취급하는 물건들이니 팔아치울 수는 없겠지만...”

냉소하던 진상파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패물을 뒤적이던 진상파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특이한 형태의 반지가 쑥 끼워졌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오른손을 들어 중지에 저절로 끼워진 그 반지를 살펴보았다.

용 두 마리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조각이 새겨진 반지인데 재질은 은이며 용의 눈 부위에는 콩알보다도 작은 붉은 색의 보석들이 박혀있다.

하다하다...”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진 그 반지를 보며 진상파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쌍룡패미(雙龍敗尾)! 두 마리 용이 서로의 꼬리를 삼키는 세공이라니... 황실에서 나온 물건이라면서 어쩜 이토록 조잡할 수가 있지?”

진상파는 기가 막혀서 오히려 흥미가 동했다.

재질은 은(), 용의 눈이라고 박아 넣은 건 질 낮은 홍옥(紅玉), 잘 춰줘야 은자 백냥 정도 나갈 이따위 싸구려 반지까지 패물이라고 내놓아? 황금성의 성주인 날 엿 먹여도 유분수지.”

진상파는 왼손으로 오른손 중지에 끼워진 그 반지를 뽑아내려했다.

헌데 반지는 의외로 꽉 끼어서 빠지지 않았다. 끼워질 때는 어째서 그리 쉽게 끼워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별개 다 속을 썩이네.”

오만상을 쓰며 반지를 뽑으려던 진상파의 손이 멈칫, 멈춰졌다.

말해!”

진상파는 왼손으로 반지를 만지면서 누군가에게 말했다.

 

<모용준은 저녁 무렵부터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

진상파의 뒤쪽으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나며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는 친구들이라는데 그다지 질은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개가 뭉치듯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건장한 체격의 여자였다.

여자는 키가 무려 칠척(七尺) 가까이 되는데 엄청난 거구면서도 완벽한 균형을 이룬 몸매를 지니고 있다.

얼굴 또한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미인 소리를 들을만한 이 거녀(巨女)의 이름은 철관음(鐵觀音)이다.

진상파의 수신 호위들인 백팔금차의 수령이 바로 그녀다.

백팔금차의 수령답게 철관음의 무공은 심후하여 신주이십팔숙중 오왕, 육패, 칠절에 필적할 정도다.

내일 혼례를 앞둔 인간이 악우(惡友)들과 어울리고 있다?”

철관음의 보고를 받은 진상파는 이를 바득 갈았다.

철관음은 진상파의 지시로 제왕성의 소성주 모용준의 동태를 살피고 온 것이다.

당연히 그 자리에 계집들도 있겠지?”

진상파는 철관음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게...”

철관음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진상파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대로 말해! 언니 잘못은 아니니까.”

!

진상파는 주먹을 쥔 오른손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 타당!

패물이 들어있던 패물함이 탁자 위로 펄쩍 튀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진상파는 황금성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수업에 매진해온 탓에 무공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진상파의 무공 수준은 거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미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파가 정색하고 화를 내면 단번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타고난 기질과 위엄이 남다른 탓이다.

... 환락가로 유명한 양주(揚州)에서 창기(娼妓)들을 여럿 불러와 놀고 있습니다.”

철관음은 식은땀을 흘리며 진상파의 눈치를 보았다.

 

장강과 대운하가 만나는 요충지 양주는 환락가로 유명하다.

대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북경과 금릉을 제외하면 창기로 이름난 네 고장이 있고 그중 한 곳이 양주다.

양주의 창기들은 양주수마(揚州瘦馬)라 불린다.

양주수마에 비견되는 유명한 창기들로는 대동파이(大同婆姨), 서호선낭(西湖仙娘), 태산고자(泰山姑子)가 있다.

양주는 태산에서 그리 멀지 않다.

모용준은 그래서 양주로부터 창기들을 조달해왔을 것이다.

제왕성이 자리한 태산에도 태산고자라는 이름의 특별한 창기들이 있다.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태산고자는 매춘을 하는 도고(道姑)들이다.

아무리 대담한 모용준이라 해도 음란한 도고들을 제왕성으로 불러들일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논다니들까지 끼고 농탕(弄蕩)을 치고 있다 이거지?”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와 혐오감에 이를 바득 갈았다.

진상파는 당연히 남편이 될 모용준의 뒷조사를 했다.

그녀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모용준은 섭씨일족의 피가 조금 흐른다는 이유로 운 좋게 제왕성의 후계자가 된 행운아일 뿐이다.

성격은 독선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무엇보다도 여색을 밝혔다.

그저 출신 배경이 남다르다는 것 외에 장점이라고는 찾기 힘든 사내가 모용준인 것이다.

모용준이 지금까지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는지 진상파는 자세히 알고 있다.

모용준의 악행과 엽색에 관한 보고서의 지면이 백장을 넘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파가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인 것은 황금성 성주로서의 지위가 나날이 위태로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모용준이 도덕군자이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결혼식을 앞둔 작자가 창기들까지 끌어들여 놀아나고 있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된다.

혼례를 앞둔 몸으로 제왕성 내의 계집들을 끼고 놀면 뒷말이 생길 것같으니까 밖에서 창기들을 조달한 듯합니다.”

찰관음은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이 되어 말했다.

앞장서! 그 인간이 있는 곳으로...”

진상파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상파는 거친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고 철관음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행실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감히 나와 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 창녀들을 집에 끌어들여?”

!

진상파는 거칠게 문을 열며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서 지키고 있던 백팔금차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앞날을 위해서라도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놔야만 해!)

진상파는 이를 부득 갈며 영빈관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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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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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 章

 

                 風雲氷竹島

 

 

빙죽도(氷竹島)!

사해선문의 총단이 있는 절유도(絶有島)와 마주보고 있는 고도(孤島).

희구한 빙죽(氷竹)으로 빽빽이 둘러싸여 있는 신비의 섬이었다.

진시초(辰時初), 수십 척의 거선이 빙죽도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선두(先頭)의 거선___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뒤엉켜있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선수에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우뚝 서 있었다.

맨 중앙에 선 인물은 바로 사해신룡 이었다.

청색무복을 가뿐하게 걸친 그의 전신에는 기개가 넘쳐흘렀다.

그 옆에는 가벼운 옷차림의 능부인이 서 있었고 기검룡과 능소취도 그녀의 옆에 서서 다가오는 빙죽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뒤로는 육 명의 장한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사해선문의 내삼당(內三堂), 외삼당(外三堂)의 당주(堂主)들이 그들이었다.

 

외삼당주(外三堂主),

___흑수창객(黑水創客),

___동해쌍교(東海雙蛟),

내삼당주(內三堂主),

___백객(白客) 조인창(曺仁滄),

___신력대도(神力大刀) 탁몽(卓蒙),

___철배수(鐵徘手) 독고인(獨孤仁),

 

이때, 빙죽도로부터 한 척의 소주(小舟)가 쾌속하게 거선을 향해 다가왔다.

소주에는 비천해응 하후염이 피풍을 펄럭이며 우뚝 서 있었다.

___ !

하후염이 이십여 장의 거리를 단번에 날아 범섬 위로 올라섰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그는 사해신룡을 바라보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해신룡 역시 진중한 음성으로 지시했다.

[수고하셨소. 본 문주(門主)는 내삼당의 칠십이도객(七十二刀客)들과 섬으로 오를테니 당주께서 거선들을 지휘하여 주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후염은 즉시 허리를 굽혔다.

곧 그들을 태운 거선은 빙죽도에 닿았다.

철썩... ___ !

파도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하해신룡을 필두로 기검룡과 능소취, 능부인은 배에서 내려섰다.

뒤이어, 능부인의 시중을 드는 네 시녀가 내렸고 두 척의 거선에서 칠십 이 명의 체격이 우람하고 건장한 괴한들이 따라 내렸다.

칠 십 이명의 거한들은 모두 등에 커다란 감산도(坎山刀)를 메고 있었다.

___칠십이도객(七十二刀客), 이들이 바로 사해선문 최정예들이었다.

사해신룡 일행은 빙죽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하나의 구릉을 넘어 그다지 넓지않은 계곡에 이르렀다.

계곡의 긑은 칠팔 장 높이의 석벽으로 막혀있었고 그 주위네는 빙죽도 특유의 빙죽(氷竹)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계곡의 입구에 들어서자 사해신룡은 칠십이도객을 향해 명했다.

[파랑대도진(波浪大刀陣)을 펼쳐라!]

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칠십이도객들은 신속히 몸을 움직여 하나의 진식(陣式)을 형성했다.

사해신룡은 이번에는 내삼당의 세 당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본문의 전력(全力)은 전격적으로 빙죽도에 총집결되어 있소. 이백여 척의 전선(戰船)이 빙죽도 주변의 해상을 봉쇄하고 있고 이 섬에도 오백여 명의 본문 수하들이 진을 치고있소.]

[...!]

[허나 이번 거사(巨事)가 극비에 붙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밀이 밖으로 새어나가 오늘이 빙죽도에 적들이 내침할 것으로 추축되오.]

그말에 일순 백객 조인창의 시선이 가늘게 떨림을 아무도 발견치 못했다.

허나, 한쪽 옆에서 한쌍의 서글서글한 눈동자가 뚫어져라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조인창 또한 알지 못했다.

능부인 바로 그녀였다.

사해신룡은 엄숙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의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본문은 능히 사해구주를 위무할 수 있을 것이오. 허나 오늘의 일이 실패한다면 본분은 멸문의 화를 면치못할 면치못할 것이오.]

사해선문 수하들의 안색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비록 강대문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두려워 해본 적이 없는 사해선문이었다.

허나 이번 일만은 실로 막중한 것인지라 그들은 초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해신룡은 나머지 고수들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여러 형제들은 삼당주의 지휘를 받고 자기의 위치를 고수하여 주시오!]

그는 말을 마치고 문득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용아는 이곳에서 취아와 숙모를 지켜다오.]

기검룡은 염려말라는 듯 주먹을 쥐어보였다.

[걱정마십시오. 취아와 숙모님은 용아가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어요.]

[하하... 그래 용아만 믿겠다.]

사해신룡은 껄걸 웃으며 기검룡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어 그는 계곡 밑의 석벽으로 다가가 족히 천 근(千斤)은 됨직한 거석(巨石)을 두 팔로 껴안았다.

[으협___!]

힘찬 기합성과 함께 그는 거석을 번적 들어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곳에는 하나의 석동이 입을 쩍 벌리며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순간,

[...! 저런 곳에 동굴이 있었다니...!]

중인들은 두눈을 크게 뜨며 경악의 탄성을 발했다.

이때 석동 안으로부터 극심한 한기가 뻗어나와 그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허나 사해신룡은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능부인을 돌아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들어갔다 오리다.]

[...]

능부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염려의 기색이 가득했다.

사해신룡은 등을 돌려 성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

[...]

그가 동굴 안으로 사라지자 사위는 갑자기 깊은 적막에 빠졌다.

근 육백여 명의 인물들이 모여있었으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그들의 전신을 압박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___ !

일진 표향이 일었다.

중인들은 흠칫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섬의 서쪽에서 급격히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순간 기검룡은 벌떡 일어섰다.

[여기들 계십시오!]

그는 중인들에게 외친 후 가볍게 몸을 날렸다.

___!

그는 약 십여 장 높이의 빙죽긑에 올라섰다.

그러자 섬 주위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해선문의 크고 작은 이백여 척의 전선들이 빙죽도를 몰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헌데, 지금 급격히 서쪽방향에서 백여 척의 대선단이 나타나 빙죽도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두눈을 번쩍 빛내며 소리쳤다.

[서쪽에 대서단이 나타났어요! 아마 해룡방(海龍幫)에서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말에 중인들은 바짝 긴장했다.

이때, 사해선문의 주역전선들이 점차 서쪽 해상으로 집결하는 것이 보였다.

기검룡은 빙죽 위에 선채 다시 상황을 알렸다.

[동북쪽에서도 몇 척의 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쪽에서 역시 두 척의 선박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어요.]

그말에 삼당주 중 한 명인 탁몽이 나직 이침음했다.

[, 본문의 수하들에게도 극비로 붙여졌던 일인데 강호로 유출되다니 기이한 일이로군.]

순간, 백객 조인창의 두눈에 당황함이 스쳤다.

허나 곧 그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때, 해룡방의 전선들이 무서운 속도로 진젹하여 사해선문의 전선들과 충돌했다.

___ 우지끈___

[___!]

[죽여라___!]

폭음과 굉음, 바다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올랐다.

이어, 무수한 화전(火箭)이 날았다.

삽시에 몇 척의 전선이 불길에 휩싸였다.

기검룡은 숨을 조이고 사태를 관망했다.

허나, 사해선문의 선진(船陣)이 서서히 무너지고 해룡방의 전선들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쇄도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선진(船陣)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군.]

기검룡은 검미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허나 그 순간 그는 갑자기 두눈을 크게 떴다.

사방으로 무질서하게 흩어졌던 사해선문의 전선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거대한 환()을 만들어 해룡방의 전선들을 포위하는 것이 아닌가?

[! 정말 멋진 유인술이다!]

기검룡은 감탄의 탄성을 터뜨렸다.

이때, 사해선문의 전선사이로 몇십 척의 작은 갑선(甲船)들이 나타났다.

갑선들은 쏜살같이 해룡방의 전선들을 향해 부딪쳐 갔다.

순간, ___ 콰르릉___

엄청난 폭음과 함께 해룡방의 전선들은 순식간에 절반 이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파산했다.

허나, 그 중에서도 선단의 삼층 누각이 세워진 한 척의 거선은 십여 채 거선의 호위를 받으며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왔다.

그러자, 사해선문의 선진에 선 수십 척의 전선이 이를 추격했다.

___ ! ___

또다시 가공할 폭음이 터져 나왔다.

삼층누각의 거선을 호위하던 십여 척의 전선들이 갑선에 의해 파산한 것이다.

허나 삼층누각의 거선은 또 다른 전선들의 추격을 저지하는 사이에 빙죽도를 향해 바짝 접근했다.

이때, 사해선문의 저선 중 한 척의 전선이 굉장한 속도로 거선을 육박해 들어갔다.

그곳에는 바로 비천해응 하후염이 타고 있었다.

___ !

그는 순식간에 선수를 박차고 거선의 뱃전으로 날아 올랐다.

[해룡왕(海龍王)! 나서라!]

하후염이 맹렬한 기세로 소리치자 십여 명의 인물들이 그를 막아섰다.

허나,

[___ ___ !]

[___ !]

그들은 한꺼번에 피보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이때,

[비천해응! 멈춰라!]

삼층 누각으로부터 두 명의 적포노인들이 날아와 비천해응의 공격을 막아갔다.

___ ___!

장력이 무섭게 격동하는 순간, 비천해응 하후염은 비천응신술을 펼쳐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동시에 그는 벼락같이 쌍장을 후려쳤다.

[___ ___ !]

[___ !]

두 명의 적포노인은 처절한 단말마를 내지르며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허나, 바로 그때, 다시 한 명의 금포중년인이 하후영의 말을 가로 막았다.

금포인의 공력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그의 장()은 마치 천근 바위가 짓눌려 오는 듯 무서운 맙력을 내포했다.

___

정면으로 금포인의 장력을 받아친 하후염은 일순 신형을 휘청하여 해면으로 떨어졌다.

[!]

하후염은 일순 다급성을 발했다.

이때,

[조심하십시오!]

한소리 외침과 함께 전선에서 달려온 흑수창객이 떨어지는 하후염의 발밑으로 판자를 날려 보냈다.

[타앗!]

하후염은 판자를 딛고 흑수창객의 전신으로 신속히 날아 올랐다.

허나 그 사이 행룡방의 거선은 이미 빙죽도에 닿았다.

[상륙하라___]

금포인의 우렁찬 외침에 이어 백여 명의 해룡방 수하들이 속속 빙죽도로 뛰어 내렸다.

이때, 문득 남쪽으로 고개를 돌린 기검룡은 흠칫 했다.

예의 두 채의 거선이 사해선문 전선들의 제지를 뚫고 거의 빙죽도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검룡은 빙죽에서 가볍게 아래로 뛰어 내리며 중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준비 하십시오. 선진(船陣)이 뚫려 적도들이 빙죽도에 상륙했어요.]

중인들은 바짝 긴장하여 병기를 움켜 쥐었다.

그 순간,

[__ __ !]

[__ __ !]

___! ___ !

남쪽과 서쪽, 그리고 동북쪽에 상륙한 적들이 사해선문과 무섭게 충돌했다.

비명! 비명! 비명!

온통 어지러운 폭음과 비명이 바다를 집어삼킬 듯 뒤 흔들었다.

급기야 남쪽의 거선은 사해선문의 포위망을 뚫고 순식간에 계곡쪽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한 식경이 채 미치지 못해 이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장내로 날아내렸다.

___ ___ !

선두에 선 인물은 삼십(三十)전후의 냉오한 인상의 중년검수였다.

그의 뒤로 안광이 형형한 흑의검수 이십여 명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백객 조인창이 안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귀하는 어느 방문의 고수들이오?]

중년검수는 냉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당당히 말했다.

[본인은 남해제일도(南海第一島) 휘하의 흑석도주(黑石島主) 사공망이오. 빙죽도를 접수하러 왔소!]

그의 안하무인격인 말에 중인들은 안색이 변했다.

 

남해문(南海門)___

이는 남해(南海)의 십팔 개 섬이 연합한 문파였다.

그들은 중원에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었으나 그 위력은 실로 막강하여 중원을 제패하고도 남을 정도라 했다.

남해문의 문주(門主)는 남해제일도(南海第一島)라 불리는 잠룡도(潛龍島)였다.

중원인은 이들의 동태를 모르고 있었으나 사해선문이나 해룡방 등에서는 항상 이들을 경원해 왔다.

헌데, 지금 남해십팔도 중 제 십칠도인 흑석도(黑石島)의 고수들이 출현한 것이었다.

 

성격이 불같이 급한 탁몽이 중년검수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빙죽도는 본문이 오랫동안 소유해온 영지요. 허튼소리 집어 치우시오.]

허나, 중년문사는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그대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곱게 말할 때 물러가라!]

탁몽은 분노한 두눈을 부릅떴다.

[무엇이라고? 이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받아랏!]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벼락 같이 감산대도를 휘둘렀다.

___ ___ !

산악같은 도기가 무섭게 허공을 덮었다.

[!]

사공망은 허나 코웃음치며 장검을 번쩍 치켜 들었다.

[어림없다!]

탁몽은 자신있다는 듯 장검을 마주쳐 갔다.

허나,

[흐흡!]

그는 다급한 신음을 터뜨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순간, 사공망은 쾌속한 일검을 그어냈다.

___ !

[___ !]

탁몽은 황급히 물러섰으나 어느새 왼팔이 어깨에서부터 잘려나가고 말았다.

이때 보고있던 백객 조인창과 철배수가 동시에 사공망을 향해 출수했다.

허나 사공망은 여유있는 웃음을 흘리며 기이한 검식을 펼쳤다.

[___ !]

미처 생각지못한 각도에서 밀려오는 검기에 백객과 철배수는 가볍지 않은 검상을 입었다.

헌데 이때,

[__ __ __ ___!]

동북쪽에서 돌연 웅후한 장소성이 울려퍼졌다.

그러자 사공망은 다급히 검세를 증폭시키며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요지(要地)를 점령하랏!]

순간 흑의검수들은 일제히 칠십이도객을 덮쳤다.

허나 그와 동시에 탁몽이 감산도를 높이 치켜들며 칠십이도객을 향해 명했다.

[발진(發陣)!]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칠십이도객은 일제히 신형을 움직여 덮쳐드는 흑의검수들에 맞섰다.

___ ___ !

___ 차차창___!

그들이 펼쳐낸 도막(刀幕)에 발진되어 흑의검수들은 속속 퉁겨나갔다.

___파랑대도진,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흑의검수들은 신랄한 검식으로 어지러이 움직였다.

허나 그들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관전하던 사고망은 두눈을 부릅뜨며 거칠게 소리쳤다.

[바보같은 놈들! 그까짓 도진(刀陣) 하나 파해하지 못하다니!]

이어 그는 시녕을 번뜩 하는 순간 칠십이도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백객과 철배수가 급히 그의 공세를 차단했다.

허나,

[크윽!]

[으음...]

그들은 가슴에 치명적인 일검을 맞고 쓰러졌다.

사공망은 휙!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어 그의 신형은 칠십이도객의 머리 위로 내리 꽂히는 것이 아닌가?

[___ !]

[__ ___ !]

여덟 명의 도객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 것은 그야말로 섬전일순 이었다.

그들로 인해 도진이 멈칫 하자 흑의검수들이 급격히 도진에 충돌했다.

___ 차창___!

허나 칠십이도객들은 황급히 전열을 가다듬어 그들을 밀어냈다.

이때 사공망이 지면으로 날아내리며 외쳤다.

[흑살합벽검(黑煞合碧劍)을 펼쳐라!]

순간 흑석도의 검수들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장검을 휘둘렀다.

___ ___! ___ !

그 기세는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콰르릉___!

검세가 파랑대도진과 맞닥뜨리자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___ !]

[__ __ __ !]

[___ !]

십여 명의 도객들이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이 광경에 탁몽은 핏발 선 눈으로 절규하듯 외쳤다.

[뚫리면 안된다. 막아랏!]

그는 외팔로 도()를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도진을 이끌었다.

허나, ___! ___ !

[___ ___ !]

[___ !]

도객들은 잇달아 흑살합벽검에 부딪쳐 죽어갔다.

이때였다.

[도진(刀陣)을 푸시오! 희생만 늘 뿐이오!]

부다못한 기검룡이 소리쳤다.

순간 탁몽은 멈칫 했다.

허나 곧 그는 남은 도객들을 지휘하여 천해비동의 입구를 막아섰다.

기검룡은 어느새 여섯 자 길이의 빙죽을 깨어들고 번득 신형을 날려 사공망의 앞을 막아섰다.

[멈추시오! 더 이상 다가오면 용서치 않겠소!]

[흐흐... 애송아 비켜랏!]

사공망은 기검룡을 얕잡아보고 육성의 공력으로 가볍게 장력을 밀어냈다.

허나 기검룡은 슬쩍 신형을 피하며 위품있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경고했소!]

이어 그는 들고있는 빙죽을 급속히 휘둘렀다.

___ ___!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빙죽은 무서운 기세로 사공망을 짓쳐들었다.

사공망은 흠칫 하며 몸을 피했다.

허나, 파파팍___!

[으윽!]

빙죽의 기세가 너무도 급격해 그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가슴에서 선명한 핏줄기가 푹 솟구쳐 올랐다.

[... 이놈의 꼬마가...!]

그는 급히 지혈을 하고 다시 전력을 다해 일장을 후려쳤다.

허나 기검룡의 공격은 그보다 한수 빨랐다.

[벽력진천___!]

___!

두 사람의 장력이 맞닥뜨리자 가공할 폭음이 들썩 사위를 흔들었다.

[... 이럴 수가...!]

사공망은 크게 한 걸음을 밀려나 창백한 안색으로 경악성을 발했다.

기검룡 그는 상체를 약간 휘청했을 뿐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랍다. 애송이 놈이 백년공력을 지닌 나를 능가하다니...!]

사공망의 안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허나 곧 그는 입술을 불끈 깨물며 양손으로 장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그의 보검에서 마치 흑무(黑霧)를 연상케하는 시커먼 검기(劍氣)가 쏟아져 나와 사위를 휘감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이 돌연한 광경에 바짝 긴장했다.

그는 빙죽을 버리고 양손에 천강신공을 끌어모았다.

헌데 이때, 휘익! ___!

장내에 한 명의 인영이 바람처럼 날아버렸다.

순간 백객 조인창의 안색이 홱 변했다.

[... 태산일수(太山一叟)!]

그는 경악의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___태산일수, 그는 십년 전 낙혼애의 일전에서 천강마존에게 죽은 백팔무인의 일인(一人) 태산일괴(太山一怪)의 제자였다.

그의 사부는 죽었으나 그는 오히려 태산일괴보다 자질이 뛰어난 절정고수였다.

태산일수는 장내에 대치한 기검룡과 중년검수를 바라보았다.

기검룡에게 시선이 닿은 순간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 저런 기재가 있었다니... 어린나이에도 저 흑의검수의 기세를 오히려 능가하는구나.)

그는 내심 경악을 금치못했다.

이때,

[흑무절살(黑霧絶煞)!]

사공망은 대갈을 터뜨리며 치켜들었던 검을 휘둘렀다.

___ !

그의 전신을 짙게 감쌌던 흑빛검기가 해일처럼 기검룡에게 밀어닥쳤다.

허나 기검룡 또한 지지않고 번득 우수를 휘둘렀다.

[참마절(斬魔絶)!]

순간, 츠츠츠츠츳___! ___!

검은빛의 검기가 새파란 광채를 띄운 천강신공에 의해 물결갈라지듯 쫙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크흑!]

[...!]

동시에 답답한 신음이 잇따라 터졌다.

! 헌데 보라!

사공망은 칠팔 보나 뒤로 물러서 울컥 선혈을 토해내고 있었다.

허나 기검룡은 서너 군데 검상을 입었지만 그 자리에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관전하던 중인들은 모두 경악의 탄성을 발했다.

이때, 털썩___!

사공망은 마침내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그 주위로 재빨리 흑의검수들이 검진을 펼쳐 호법을 섰다.

그때였다.

[용오빠___!]

능소취가 울먹이는 음성으로 기검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검룡은 선혈이 배인 상처에 지혈을 시키며 그녀를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검에 약간 베었을 뿐이니까.]

보고있던 능부인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문득 기검룡의 곁으로 다가서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상처를 좀 보자꾸나.]

허나 기검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요. 강적들이 주위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___ !

한 명의 적포괴인이 번득 장내로 날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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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달마와 천마의 비사

 

 

 

십칠 년 전의 일이었다.

소림사의 제자임에도 무공수련보다는 금석학(金石學)과 고전(古典)에 관심이 더 많았던 고불선사는 천하를 떠돌며 전대의 고승들이 남긴 유적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날도 고불선사는 천태산(天台山)에 남아있는 육조(六祖;선종의 육대 종사 혜능)의 유적을 연구하러 가던 길이었다.

비가 제법 거세게 쏟아지는 굳은 날씨였다.

하지만 머지않은 곳에 있다는 육조의 귀한 유적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고불선사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아아악!”

헌데 빗속을 뚫고 발길을 재촉하던 고불선사의 귀에 다급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불제자로서 위급한 처지의 중생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달려가 보니 산적들이 산속의 무덤가에서 젊은 여인을 겁탈하려는 중이었다.

고불선사는 산적들을 혼내 쫓아 보내고 여인을 구했다.

전삼낭(全三娘)이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사냥꾼의 아내였다고 했다.

하지만 사냥꾼이었던 남편은 사냥 도중에 변을 당해 죽었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를 근처 산채의 산적들이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겁탈당할 뻔 했던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차가운 가을비를 맞은 탓인지 전삼낭의 몸은 펄펄 끓고 있었다.

불제자로서 아녀자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를 방치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불선사는 전삼낭을 안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전삼낭을 보살피던 중 고불선사는 그만 파계를 하고 말았다.

무엇에 홀린 듯 전삼낭을 범하고 만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고불참회기를 읽으며 강유의 머릿속에서는 의혹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고불선사쯤 되는 고승이 그저 여자와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욕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혹시 그 여자가 함정을 파서 고불선사를 유혹한 것이 아닐까?)

강유는 가슴 속에서 불길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꿈같은 하루 밤낮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고불선사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절망했다.

금색계를 지켜야하는 불제자로서, 그것도 손녀뻘인 젊은 여인을 간음하는 크나큰 죄를 지은 것이다.

고불선사는 회한과 죄책감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전삼낭의 필사적인 애원에 고불선사는 자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삼낭은 부처님이 정말 계신다면 고불선사가 자신을 범한 것에도 우매한 인간들은 알 수 없는 섭리가 있을 것이라며 설득했던 것이다.

그렇게 전삼낭으로부터는 용서받았지만 고불선사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노리개를 전삼낭에게 증표로 주고 떠나며 언제든 소림사로 찾아와 죄의 대가를 받아가라는 말을 남겼다.

강유가 고불암에서 가져온 노리개는 예상과 달리 원래부터 고불선사의 것이었다.

 

전삼낭과 헤어져 소림사로 돌아온 고불선사는 토굴(土窟)에 스스로를 가두고 참회의 나날을 보냈다.

헌데 일 년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통의 밀봉된 편지가 고불선사가 참회하고 있던 토굴에 은밀히 전해졌다.

봉투 안에는 고불선사가 전삼낭에게 증표로 주었던 노리개와 함께 편지가 한 장 들어있었다. 자기를 보러 와달라는 전삼낭의 편지였다.

고불선사는 토굴을 나와 한달음에 전삼낭을 인연을 맺은 곳으로 달려갔고... 그곳에는 전삼낭이 갓난아기를 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일 년 전에 있었던 단 하룻밤의 인연으로 전삼낭은 고불선사의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불선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삼낭과 아기뿐만이 아니었다.

흉측한 귀신 가면을 쓴 자가 아기의 목에 칼을 댄 채 웃고 있었던 것이다.

고불선사는 비로소 일의 전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고불선사가 전삼낭을 만난 것도,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모두 마교의 당대 교주인 귀면지존이 꾸민 짓이었던 것이다.

 

(마교의 당대 교주 귀면지존!)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도 무림의 종가다.

동진(東晋) 시대에 결성 된 비밀결사 백련사(白蓮社)는 서역의 배화교(拜火敎)와 천축의 미륵(彌勒)사상을 받아들여 마침내 마교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마교는 오십 여 년 전 제왕성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세상에서 모습을 감춰버렸다.

(제왕성에 의해 뿌리가 뽑혔다고 알려진 마교가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암약하고 있었단 말인가? 헌데 마교의 교주 귀면지존은 무슨 목적으로 고불선사님을 파계시키는 함정을 판 것일까?)

강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불참회기를 읽었다.

 

전삼낭 모녀를 인질로 잡은 귀면지존은 몇 장의 종이를 고불선사에게 건네주며 해독(解讀)할 것을 요구했다.

그 종이들은 원통형의 물체 표면에 새겨져 있는 문양의 탁본(拓本)이었다.

노납은 탁본의 문양들이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고대(古代)의 범어(梵語)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 귀면지존은 그 고대 범어를 해독하기 위해 옛날 문자에 박학(博學)한 고불선사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었다.

비록 음모에 빠져서 관계를 맺은 결과이긴 하지만 고불선사는 전삼낭이 낳은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귀면지존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만 탁본에 새겨진 범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쓰이지 않은 것인 탓에 고불선사로서도 해독에 시간이 걸렸다.

그 사실을 말하자 귀면지존은 고불선사는 증표로 노리개를 요구했고 그것을 가져오는 자에게 탁본의 해독본(解讀本)을 건네주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노리개가 고불선사께서 귀면지존에게 건네준 증표라는 건데...)

강유는 탁자에 내려놓은 노리개를 만져보며 검미를 모았다.

(이게 어떻게 아버지의 수중에 들어간 것일까? 또 아버지는 어떤 경로로 고불선사께서 탁본을 해독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걸까?)

풀릴 길 없은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설마!)

어느 순간 강유의 눈이 부릅뗘졌다.

(아버지도 귀면지존에게 협박을 당하고 계신 게 아닐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를 대신 보내 탁본의 해독본을 받아오라고 하셨고?)

강유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어쩌면 아버지와 어머니도 귀면지존의 마수에 빠져있는 상태일지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확인해야만 한다.)

강유는 뜨거운 가마솥에 빠진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귀면지존이 고불선사님을 함정에 빠트려가면서까지 해독하라고 강요한 탁본의 내용은 무엇일까?)

강유는 타들어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다시 고불참회기를 집어들었다.

(전삼낭으로 하여금 고불선사님을 유혹하여 아이를 낳게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걸 보면 결코 평범한 내용은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강유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 맙소사!)

강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불참회기를 넘겼다.

 

<노납은 십여 년에 걸친 연구 끝에 마침내 탁본의 내용을 해독할 수가 있었는 바, 그 내용과 실체는 실로 놀라웠다. 귀면지존이 노납에게 맡긴 탁본은 바로 달마묵장에서 뜬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불참회기의 내용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나 다 아는 달마대사의 고사를 굳이 수기에 적어놓으신 이유가 있었구나.”

강유는 고불참회기가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된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견문이 일천한 강유는 모르고 있었지만 달마묵장은 무림에 전해지는 가장 귀한 보물들인 무림칠보(武林七寶)의 으뜸이다.

달마대사가 달마묵장에 숨겨둔 비밀스러운 힘을 얻으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고불선사에게 일어났던 일련의 음모는 바로 그 달마묵장으로 인해 벌어졌던 것이다.

(달마묵장이 마교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무림은 다시 한 번 마교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강유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한기는 느끼며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고불선사는 십년이 넘는 시간을 소모한 끝에 달마묵장의 탁본을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탁본에는 두 가지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었다.

첫 번째 비결은 삼백육십오 자로 이루어진 묵장진언(墨掌眞言)이라는 것이었다.

그리 많지 않은 글로 이루어진 묵장진언에는 그러나 천지(天地)와 고금(古今)의 이치가 모두 담겨 있었다.

문자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정수 중의 정수가 묵장진언인 것이다.

묵장진언을 이루고 있는 삼백육십오 개의 문자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무공과 술법이 만들어질 수 있다.

, 묵장진언에서 어떤 힘을 얻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소질과 기연에 달린 것이다.

달마가 달마묵장에 남긴 두 번째 비결은 아주 짧은 것이었다.

하지만 불과 열두 자로 이루어진 그 비결에는 묵장진언에 못지않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쌍혜합벽(雙鞋合壁), 묵장전지(墨掌展指), 천마심현(天魔心現)>

 

이것이 달마묵장에 숨겨져 있던 두 번째 비결이다.

그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한 쌍의 신발이 합쳐지면(雙鞋合壁)

검은 손바닥이 손가락을 펼 것이며(墨掌展指)

천마의 심장이 나타날 것이다(天魔心現)

 

한 쌍의 신발이라면 달마가 세상에 남겼다는 가죽신, 달마혜(達磨鞋)일 것이다.

달마는 가죽신 중 한 짝은 자신의 관 속에 남겼고 다른 한 짝은 지팡이에 매단 채 서쪽으로 가져갔었다.

달마가 한 쌍의 신발을 그렇게 멀리 떨어트려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 비결에 포함되어 있는 천마의 심장, 천마심(天魔心)이란 것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무림칠보의 서열이위(序列二位)이기도 한 천마심은 마교의 중흥조(中興祖)인 천마조종(天魔祖宗)의 심장, 정확히는 그의 내단(內丹)이다.

 

보통 천마(天魔)라 불리는 천마조종은 고금제일인을 거론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마교의 제칠대 교주였던 천마의 무공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마교는 오십여 년전까지만 해도 제왕성과 패권을 다퉜던 막강한 세력이다.

하지만 마교에 전해지는 것은 천마의 진정한 능력의 일할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천마에게 불운했던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달마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천마의 나이가 달마보다 일갑자(一甲子;60)쯤 많기는 했지만 두 절대고수의 생애는 상당 기간 겹쳐져 있었다.

마도와 정파를 대표하는 그들 간의 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천마의 패배였다.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천마는 달마와의 결투에서 지고 말았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천마는 스스로의 몸을 태워버렸으며 그의 모든 힘과 저주가 천마심으로 남았다고 한다.

무림에는 천마심을 얻는다면 제이(第二)의 천마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달마묵장은 달마의 비밀스러운 힘이 숨겨져 있는 보물일 뿐 아니라 천마의 저주, 천마심을 봉인하고 있는 법기(法器)인 것이다.

달마묵장은 무엇으로도 훼손이 불가능하다.

그 달마묵장이 손가락을 펴서 천마심을 드러내는 것은 단 한 가지 경우뿐이다.

바로 달마의 가죽신, 달마혜가 다시 합쳐지는 게 그것이다.

 

고불선사는 십여 년 만에 달마묵장의 탁본을 해독하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그 후 오 년 동안 삼백육십오자로 이루어진 묵장진언을 연구했다.

물론 귀면지존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유감스럽게도 고불선사는 묵장진언에서 어떤 무공비결도 얻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자질과 지식이 무공과는 인연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불선사는 묵장진언을 오 년 간 연구한 결과 무공 대신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을 만들어냈다.

 

-달마독명안(達磨讀命眼)

 

바로 이것이다.

달마독명안은 일종의 관법(灌法;진리를 살피는 법)이다.

이것을 온전히 수련해 내면 진짜와 가짜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게 되며 흘러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엿볼 수 있게 된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달마독명안에 대한 설명을 읽은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달마독명안은 어떤 무공보다도 오히려 더 무서운 신통력일 것이다. 불문에서 말하는 육신통(六神通)과 흡사한...)

육신통은 인간이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궁극의 여섯 가지 능력을 말한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모든 것을 궤뚫어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남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

나와 남의 운명을 알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누진통(漏盡通)!

 

달마독명안은 바로 이 육신통과 여러모로 통하는 능력이다.

(묵장진언을 불과 오 년 간 연구하여 육신통에 버금가는 달마독명안을 만들어내신 걸 보면 고불선사님도 결코 평범한 분은 아니셨다.)

강유는 새삼 고불선사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 적어놓은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갈 경우 그 폐해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런 즉 두 가지 비결을 외워 기억한 후 반드시 고불참회기를 태워 없애야할 것이다.>

 

고불참회기는 고불선사가 남긴 당부로 마무리 지어졌다.

 

<염치없지만 시주에게 소원이 한 가지 있다. 만약 인연이 닿는다면 전삼낭과 그녀의 딸을 귀면지존의 마수에서 구해주었으면 한다. 그리하면 그 은혜를 삼생(三生)에 걸쳐서라도 갚을 것이다.>

 

(스님의 근심하신 바를 기억해두겠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강유는 고불참회기와 노리개를 향해 합장을 했다.

그는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전삼낭 모녀를 찾아내어 보살펴주어야겠다 결심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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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름이 새겨지다.

 

 

안개의 벽속에는 여전히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괴한 형상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진법에 의해 만들어진 환각일 거라고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들은 너무나 생생하고 섬뜩해서 식은땀이 흐르는 임청우였다.

기괴한 형상들은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는 임청우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임청우는 의식적으로 그것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바닥에 찍혀있는 광점만 보고 걸어갔다.

그렇게 안개의 벽을 절반 쯤 지났을 때였다.

“...!”

임청우는 오싹 소름이 끼쳐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기괴한 형상들의 모호한 시선이 아니다.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같이 강렬한 시선이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 뭐지?)

임청우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수많은 기괴한 형상들 속에 어떤 인물이 뒷짐을 지고 서서 임청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얼굴은 모호해서 알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옷!

건장한 몸에 걸쳐진 화려한 비단옷은 무채색인 기괴한 형상들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렬하게 부각된다.

(비단 옷을 입은 누군가가 진법 속에 있다.)

임청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듯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인물을 자세히 보려고 했다.

부르르!

바로 그때 허리춤에서 경련이 느껴졌다.

호리병이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뱀 중의 왕인 이놈이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임청우는 호리병 속의 금관혈린사가 잠에서 깨어나 떨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영물이라 보지 않고도 느꼈다는 건가? 그렇다면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가 저곳에 있다는 건데...)

호리병에 잠깐 시선을 돌렸던 임청우는 다시 안개 속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없었다.

기괴한 형상의 존재들만이 배회하고 있을 뿐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인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임청우는 자신이 혹시 헛것을 보고 착각한 게 아닌가 속으로 반문해보았다.

(나 혼자 잘못 본 것이라면 영통한 이놈까지 두려움에 떨 리가 없다.)

호리병 속의 금관혈린사가 아직도 떨고 있는 것을 확인한 임청우는 자신이 결코 착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그 인물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확인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 빨리 여길 빠져나가자.)

임청우는 겁에 질려 안개의 벽 밖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뒷덜미를 홱 낚아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

 

훼손된 북두무랑으로 들어서는 인물이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다.

임청우가 안개의 벽 속에서 보았던 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

북두무랑으로 들어선 인물은 입구 바로 안쪽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참하게 훼손된 북두무랑의 참상이 그 인물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임청우조차 분노했던 만행을 보면서도 그 인물의 표정에는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잠시 서있던 그 인물은 다시 걸음을 옮겨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사사사!

그 인물이 지나가는 것에 맞추어 훼손되었던 북두무랑의 양쪽 벽이 매끈하게 갈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매끈해진 벽면에는 수많은 글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 글들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던 무학비결들이었다.

북두무랑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 인물은 천상열차분야도가 새겨진 흑옥의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칠흑같이 검고 깊은 벽 속에서 북두칠성은 흐릿하게 빛나고 있고 북극성 자리에는 북두홀이 끼워져 있다.

달칵!

그 인물이 손을 대자 북두홀은 간단하게 흑옥의 벽에서 분리되었다.

“...”

벽에서 떼어낸 북두홀을 어루만지는 그 인물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희미한 한숨이 일자로 굳게 닫혀있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이다.

 

그 인물은 오른쪽의 월동문으로 나왔다.

북두무랑을 나온 그 인물은 월동문 옆에 새겨져 있는 서명을 확인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 인물은 벽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파파팟!

그러자 불꽃과 돌가루가 튀며 새로운 이름이 서명에 추가되었다.

서명의 맨 아랫줄에 새겨진 이름은 <林靑牛>였다.

 

***

 

농산 깊은 곳에 자리한 천류폭포(天流瀑布)는 높이가 오십 장이 넘는다.

높을 뿐 아니라 수량도 엄청난 폭포다. 혹시 세상이 너무 좁아서 천류폭포가 쏟아내는 물로 인해 잠겨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자아내게 할 정도다.

말의 귀처럼 뾰족하게 솟아있는 두개의 봉우리 사이로 흘러내린 폭포수는 호수처럼 넓게 퍼졌다가 다시 급해지고 가늘어지면서 황하(黃河)로 흘러간다.

물이 퍼지면서 만들어진 호수에는 작은 바위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줄을 서서 왼쪽 봉우리로 이어진다.

그 왼쪽 봉우리 아래쪽에는 진짜 말의 귀인 것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말의 귓구멍 같은 부분은 아래위로 좁게 갈라진 틈새다.

폭은 좁고 높이는 높은 그 틈새 안쪽에는 한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계곡이 숨겨져 있다.

 

별들 사이로 반달이 얼굴을 내밀고 물위에는 별들이 아가들의 눈동자처럼 깜빡이며 빛을 발한다.

어둠이 농산에 무게를 주어 만물을 침묵하게 했다.

오직 특권을 허락받은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이 이따금 밤의 적막을 깰 뿐이다.

첨벙! 첨벙!

문득 물소리가 들리며 키가 껑충하게 큰 괴물이 폭포 아래쪽의 호수에 나타났다.

반달을 등지고 나타난 괴물의 다리는 두 개뿐인데 아주 가늘면서 길이는 무려 이장(二丈;6미터)이 넘는다.

괴물의 몸뚱이는 그 긴 다리의 사분의 일 정도에 불과하다.

다리에 비해 기형적으로 작은 몸뚱이의 허리 어림에는 대가리인 듯한 것이 매달려 앞뒤로 흔들거리고 있다.

첨벙! 첨벙!

괴물은 기다란 다리로 한 번에 일장 넘게 움직여 호수를 가로질렀다.

징검다리처럼 깔려있는 바위섬들을 지난 괴물은 왼쪽 봉우리 가운데에 자리한 계곡 입구로 다가갔다.

말의 귓구멍인 듯 움푹 들어간 계곡 입구는 수면에서 일장 남짓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 이른 괴물의 몸뚱이가 마치 줄을 타는 거미처럼 다리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이윽고 계곡 입구에 내려선 그것은 괴물도 뭐도 아닌, 망태를 짊어진 소년이었다.

바로 해질 무렵 표운봉 아래의 계곡을 떠난 임청우였다.

임청우는 길이가 이장이 넘는 대나무로 만든 죽마(竹馬)를 사용하여 호수를 건너온 것이다.

두개의 대나무 죽마를 암벽에 기대어 놓은 임청우는 계곡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휘이잉!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틈새를 통해 끊임없이 찬바람이 불어나온다.

이곳은 농산의 다른 곳과 달리 한여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늘하다.

 

바위 사이의 좁고 긴 틈새가 끝나는 곳에는 한 채의 모옥(茅屋)이 서있다.

모옥 앞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초지가 있고, 모옥 옆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이다.

모옥은 절벽 위의 암반에 위태롭게 세워져 있는 것이다.

어머니! 저 돌아왔습니다.”

모옥 바로 앞에 서있는 늙은 팥배나무를 지나며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불 꺼진 모옥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혹시!)

임청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병이 깊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어머니!”

덜컹!

임청우는 급히 모옥의 문을 열었다.

쉬잇!

헌데 문이 왈칵 열린 순간 칠흑같이 어두운 모옥 안에서 새하얀 손이 나타나 임청우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짜악!

반사적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임청우의 오른쪽 뺨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

콰당탕!

임청우는 시리도록 새하얀 손에 얻어맞은 뺨을 감싸며 마당에 나뒹굴었다.

무고하셨군요.”

하지만 임청우는 벌겋게 부풀어 오른 볼을 문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응당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어야 할 임청우의 얼굴에는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별일 없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몇 시냐?”

모옥 안쪽에서 냉기가 풀풀 날리는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삼경(三更;11~새벽 1)에 막 접어든 것 같습니다.”

임청우는 밤하늘의 별 자리를 살피며 대답했다.

북쪽 하늘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국자가 왼쪽으로 많이 일어서 있다.

갑자기 피핏!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옥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병색이 완연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여인이 탁자 옆에 서서 기름등잔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임청우의 어머니 임단심이다.

반 시진(한 시간)만 지나면 오늘도 끝이다.”

기름등잔의 심지에 불을 붙인 임단심이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침에 경고한 대로 오늘 안에 여기를 떠나라. 일각이라도 시간을 지체한다면... 내손으로 네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임청우를 돌아보는 임단심의 눈이 새파란 빛을 흘린다.

어머니는 온통 저를 죽일 생각뿐이시군요.”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노상 당해온 냉대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쓰리다.

어쨌든 자정이 되기 전에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을 죽이려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네 놈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임단심은 표정을 굳히며 문을 닫으려 했다.

임청우는 그런 그녀에게 한마디 더 던졌다.

그럼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어머니 같지는 않겠군요.”

화악!

임청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으려던 임단심이 유령처럼 임청우를 덮쳐왔다.

!

약초가 담긴 망태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집 밖으로 뛰쳐나온 임단심이 벼락같이 손을 휘둘렀지만 그럴 줄 짐작하고 있었던 임청우는 망태를 들어 뺨을 가렸던 것이다.

임단심이 임청우가 서있던 곳에 내려섰을 때 임청우는 서쪽으로 다람쥐처럼 달려가 절벽 끝에 이르러 있었다.

놀란 모습도 아니고 두려워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늘상 있는 일이 다시 시작된 듯 약간은 권태로운 표정이었다.

어머닌 저를 죽일 수 없어요. 벌써 천번도 넘게 시도했지만 실패만 하지 않았어요?”

바보같은 놈!”

임단심이 살기어린 눈으로 임청우를 쏘아보며 내뱉었다.

지금까지 네 놈이 살아있는 것은 그 귀신같은 눈치도 눈치지만 내게 네 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과 살려두고 싶은 마음이 각기 반반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 것은 어째서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까?”

“...”

임청우의 말을 들은 임단심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하다.

그러나 임청우는 절벽가로 한걸음 더 물러섰을 뿐,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병이 깊어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께서 저를 괴롭히는 낙도 없다면 어떻게 하루인들 더 살 수 있겠어요? 그것이 저를 죽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닙니까?”

, 그렇다면 왜 절벽가로 도망치느냐? 죽지 않을 자신 있다면서...”

무엇이든 참는 것이 수양(修養)에는 더할 바 없이 좋은 것이라지만...”

임청우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통을 당한다는 건 왠지 사람답지 않은 것같아서입니다.”

임단심은 무서운 눈초리로 임청우를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덜컥!

닫혀진 방문 안쪽에서 그녀의 말이 흘러나왔다.

네놈은 사람이 아니다. 네놈의 아비도 마찬가지고...”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임청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의 살수(殺手)에 수시로 노출되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도 태연히 웃으며 응대하던 임청우였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단 한마디에 고소를 지으며 검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버지라는 말은 그에게 생소할 뿐만 아니라 저 하늘에 있는 작은 달보다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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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진법에 빠진 두 남녀

 

 

두두두!

마상에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 격투 끝에 두 남녀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찰떡처럼 붙어있는데 흑왕은 정신없이 당산산맥 안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방금 전까지 자신의 꼬리에 달라붙어있던 귀신같은 놈이 따라붙을까봐 전력으로 치달리고 있는 것이다.

요동평야를 활개치고 다녔던 흑왕은 강미루의 형부인 광평객(廣平客) 신가람(申加籃)이란 인물에게 사로잡혀 길들여졌었다.

당시의 흑왕은 발정기에 접어든 암컷에게 한눈을 팔다가 기습을 당해서 올가미가 목에 걸렸었다.

만일 경계하고 있었던 상태라면 절세고수인 신가람이라 해도 흑왕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신가람이 사흘 내내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치고도 흑왕을 따라잡지 못한 게 그 증거다.

당연히 흑왕은 달리는 자기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던 터에 백남빈에게 꼬리를 잡혔었기에 그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귀신같은 존재가 지금은 자기의 등위에 앉아있음은 꿈에도 모르고 있고...

 

***

 

대려장의 기마대는 백남빈과 흑왕이 일으킨 대량의 흙먼지로 인해서 앞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먼지가 갈아 앉았을 때는 강미루와 흑왕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쫓던 철령보 전령의 모습도 사라진 후였다.

해가 지면서 급격히 짙어지는 당산산맥의 산그늘이 두 남녀와 흑왕을 삼켜버린 것이다.

단지 백남빈이 타고 있던 말이 흑왕의 뒤로 쳐져서 대려장의 무사들에게 사로잡혔다.

대려장 무사들 중 몇은 보고를 하기 위해 그 말을 끌고 북쪽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당산산맥 안쪽으로 들어가 강미루와 흑왕의 종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람같이 사라진 흑왕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오면서 수색은 난관에 부딪혀 버렸다.

 

***

 

그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흑왕의 넓은 등은 아기 혼자 태워놓아도 떨어지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안락하다.

백남빈은 흑왕의 엉덩이를 보는 방향으로 앉아있다.

그 때문에 주변의 풍경이 뒤쪽으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당산산맥 안쪽으로 깊이 들어왔구나.)

백남빈은 조금 여유를 되찾아서 자신들의 현재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물론 지금의 상황도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벌어졌던 격전은 그야말로 아찔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아차 실수라도 했었다면 중상을 입었거나 심하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저런 부상을 당해본 적은 있지만 턱을 물리긴 또 처음이군.)

백남빈은 자신의 턱을 물고 있는 붉은 옷의 소녀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턱을 물고 물린 자세다 보니 서로의 코가 아주 가깝다.

소녀는 입으로 백남빈의 턱을 가득 베어 물고 있는 탓에 숨은 전적으로 버선코같이 오똑하고 어여쁜 코로만 쉬고 있다.

(사람의 숨결이 이렇게 달콤할 수도 있구나.)

연신 새근대며 코로 뿜어내는 소녀의 숨결이 바로 위쪽에 자리한 백남빈의 코로 흘러들어온다.

내뿜는 숨결이니 당연히 탁하고 역겨워야하는데 난초나 매화의 향기처럼 그윽하게 느껴져서 백남빈을 혼란에 빠트렸다.

백남빈은 약관을 바라보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이제껏 여자의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다.

백남빈이 알고 있는 여자라고는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사 년 전에 마지막으로 뵌 이모뿐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물론 하녀들이야 적지 않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진지한 성격인 백남빈을 어려워해서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사내들하고만 부대끼며 살아오다 보니 사람 몸에서 나는 냄새는 당연히 시큼하고 쿰쿰하다는 편견이 백남빈에게 있었다.

헌데 자신의 품에 답삭 안겨있는 이 붉은 옷의 소녀는 다른 세상의 존재같다.

몸은 뼈가 하나도 없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용수철 같고 봄날의 버드나무 가지 같은 탄력을 지녔다.

살결은 극상품의 백옥같이 희고 깨끗해서 설부(雪膚)라는 표현이 어째서 생겼는지 알게 해준다.

특히 냄새!

소녀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는 땀조차 향기롭다.

(양귀비의 몸에서 난 땀이 그 어떤 꽃보다 향기로웠다는 고사가 그냥 지어낸 게 아니겠구나.)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소녀가 온몸으로 흘려내는 그윽한 내음에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를 강미루는 커다란 두 눈을 흡뜬 채 노려보고 있다.

두 사람의 몸은 서로의 움직임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밀착되어 있었다.

봉긋한 강미루의 젖가슴의 감촉과 그 안쪽의 심장이 쿵닥거리는 것도 백남빈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진다.

반대로 백남빈의 몸에서 일어나는 망측한 변화 역시 강미루는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물며 백남빈은 두 다리로 강미루의 허리를 휘감은 자세로 마주 앉아있기까지 하다. 그 때문에 백남빈의 아랫도리는 강미루의 하복부와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

(죽일...)

강미루는 서로의 몸이 강하게 짓눌려 있는 부분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백남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수치심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속에서는 열불이 나지만 강미루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지금의 소강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건가?)

분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설움이 몰려와서 울컥해지는 강미루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백남빈의 턱을 물고 있다 보니 힘까지 들어서 눈물이 저절로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뽀얀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백남빈은 잠시 고통도 잊고 중얼거렸다.

"찔리고 물린 내가 울지 않는데 찌르고 문 여나찰(女羅刹)이 우는군."

물론 그 중얼거림은 턱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말같이 되어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하지만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기를 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직은 철부지같은 성미의 이 말괄량이가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강미루는 턱에 힘을 가하여 더 세게 백남빈을 턱을 깨물었다.

"!"

강미루가 온힘을 다해 물은지라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아픈지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턱이 시원해지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하하!"

이 독종(毒種)이 마음이 바뀌어서 놓아주었나 싶어 어리둥절하던 백남빈은 강미루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크게 웃어버렸다.

강미루는 입을 헤 벌리고 있어서 표정이 야릇했다. 백남빈을 깨물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주는 바람에 턱이 빠져 버린 것이다.

입을 바보처럼 벌린 채 두 눈으로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강미루를 보면서 백남빈은 모든 것이 한편의 연극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함께 백남빈은 눈앞의 이 말괄량이 소녀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더 이상 이 소녀에게 악감정도 살기도 생기지 않았다.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풀어 한 손으로는 강미루의 머리를 부드럽게 누르고 다른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입안에 걸치며 턱을 받쳐 올려서 교정시켜 주었다.

강미루로서는 백남빈의 이같은 행동이 너무도 의외였다.

하마터면 자신을 죽일 뻔한 적의 턱을 교정해주는 것이건만 백남빈의 손길에는 정성이 가득하다.

(이 작자 뭐야?)

강미루는 잘 끼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턱을 만지는 백남빈을 바라보며 얼굴이 발개졌다.

어느덧 그녀의 가슴 속에서도 야릇한 감정이 샘 솟아서 두 팔이 자유스러워졌지만 백남빈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의 살기는 봄눈 녹 듯 걷혀졌다.

마주 보며 말 등에 앉아있는 두 사람의 자세는 묘하다.

이제는 껴안고 있지 않았지만 백남빈의 다리는 여전히 강미루의 허리에 감겨 있는 것이다.

"!"

이 야릇한 상황에서 강미루는 방금 전까지의 상황이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여겨져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 남자, 참 잘생겼구나.)

어리둥절해하는 백남빈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미루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비로소 상대가 보기 드물게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임을 알아본 것이다.

열일곱 살 소녀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걸 알 리 없는 흑왕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름 모를 계곡으로 접어들어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

 

밤이 깊어졌다.

그믐은 아니지만 하늘에 짙은 구름이 끼어있어서 칠흑같이 어둡다.

푸악!

백남빈이 허벅지에서 단검을 뽑자 뜨거운 피가 확 튀겼다.

백남빈은 아픔을 참으며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은 단검을 강미루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띠를 끌러 허벅지의 상처를 싸맸다.

강미루는 단검을 받아 허리춤의 칼집에 집어넣었다.

이어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침과 피로 얼룩진 백남빈의 얼굴 하단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백남빈은 묵묵히 강미루의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백남빈은 이미 이 대려장의 말괄량이 소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되고 있었다.

백남빈의 얼굴을 닦아준 강미루의 시선이 아직도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백남빈의 다리로 슬쩍 향한다.

... 미안하오.”

백남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강미루의 허리에서 다리를 슬그머니 내렸다.

천리마 흑왕이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가고 그놈 위에 마주 앉은 두 남녀의 몸과 마음도 따라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남빈과 강미루는 거의 동시에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비록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긴 하지만 내공이 정심한 두 사람인지라 주위를 완전히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느낌이 드는 것이, 마치 똑같은 길을 계속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둠 속의 풍경은 한동안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두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그와 함께 같은 처지라는 은연중의 생각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동료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강미루는 백남빈의 앞쪽으로 이동하여 말고삐를 바르게 잡았다.

백남빈도 돌아앉아 강미루의 바로 뒤에 걸터앉았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긴장과 불안한 감정이 원래 적이었던 두 사람을 한마음이 되게 만들었다.

"끼럇!"

두두두! 히히힝!

강미루가 박차를 가하자 흑왕은 나는 듯이 앞으로 달렸다.

어느 정도 달리자 그들의 앞길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분명 말이 달린 흔적이었다.

백남빈이 두 손으로 강미루의 허리를 잡아 당겨 말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파팟! 휘릭!

강미루가 말고삐를 잡아채자 흑왕은 언제 달렸는가 싶을 정도로 순간적으로 멈춰 섰고 백남빈은 훌쩍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흑왕 앞쪽으로 간 백남빈은 바닥에 생생하게 남은 말발자국을 뼘으로 재어보았다.

그리고 흑왕의 뒤로 돌아가 그놈이 방금 전에 딛은 발굽 자국과 비교해 보니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백남빈의 낯빛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흑왕을 타고 같은 장소를 뺑뺑이 돈 것이다!

"기문진(奇門陣)이오. 느끼지도 못하는 새 어떤 진법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버렸소."

기문진에 빠졌다는 백남빈의 말에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동북의 제갈량이라 불리는 강진남의 딸이었지만 성격이 차분하지 못하여 진법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백남빈의 표정을 보니 심상치 않은 상황인 듯한 데 진법에 문외한이다시피 한 강미루로서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그저 백남빈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기문진법의 대가인 독안룡 이탁을 양부로 둔 백남빈 역시 파진법(破陣法)에는 그리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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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四海船門

 

 

일출(日出).

끝없이 펼쳐진 대해(大海)를 가르며 불끈 태양이 치솟아 올랐다.

만경창파(萬頃蒼波), 보검(寶劍)의 칼날처럼 출렁이는 물결 위에 시뻘건 불덩이가 퍼져오른다.

! 그것은 실로 형용할길 없는 벅찬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소주(小舟)___

기검룡 일행을 태운 작은배는 천천히 일출의 바다 속을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기검룡은 눈부시도록 찬란한 일출의 장관에 넋을 잃고 있었다.

[...!]

신비한 태양의 광휘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러자 문득 그는 가슴 속에 위대한 포부가 형성되는 느낌이었다.

()! 뜨거운 피가 불끈 치솟아 웅심(雄心)을 흔들었다.

능소취와 철담흑객도 멍한 표정으로 일출을 감상하고 있었다.

헌데 이때, 문득 기검룡이 무엇을 발견한 듯 소리쳤다.

[! 큰 배가 온다!]

그말에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대번에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안력을 돋구어 머리 앞을 바라보았다.

[...?]

허나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엄청난 태양의 광막이 안력을 차단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검룡은 똑똑히 보였다.

그는 능소취를 바라보았다.

[저기 태양의 왼쪽에 큰 배가 오는 것이 보이지 않아?]

허나 능소취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철담흑객도 의아하다는 듯 기검룡을 응시했다.

기검룡은 그제서야 깨달은 듯 고개를 갸웃했다.

[...? 그렇군. 정말 이상한 일이다. 전에는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니...!]

그는 의혹의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실상, 그것은 바로 무인도의 기이한 복숭아를 먿은 덕분이라는 것을 기검룡은 까마득히 몰랐다.

그로인해 내공과 시력이 급증했다는 사실도.

이때, 철담흑객이 탄성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 맞습니다. 그제서야 과연 공자님의 말씀대로 배입니다.]

능소취도 그제서야 그것을 발견하고는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허나 문득 철담흑객은 불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 해역에는 해룡방(海龍幇)의 배가 자주 출몰(出沒) 하는데, 혹시...?]

기검룡은 멀리 보이는 큰 배를 자세히 살폈다.

[선두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있는 깃발이 달려있는 배다!]

기검룡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철담흑객은 안색을 활짝 펐다.

[그럼 본문(本文)의 순시선이 분명합니다. 해룡방의 표식은 흑룡(黑龍) 입니다.]

그말에 능소취도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잠시 후, 거선은 점점 그들 가까이로 다가왔다.

[하후할아버지!]

능소취는 거선에 오르자마자 반가운 환성을 지르며 한 명의 백삼노인에게 안겼다.

백삼노인___ 약 칠순(七旬) 정도의 청수한 인상이었다.

허나 그의 두눈에는 번갯불같은 안광이 번뜩였다.

백삼노인은 달려오는 능소취를 안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취아! 얼굴이 새카맣게 탓구나.]

이어, 그는 철담흑객을 바라보며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어찌된 일인가? 호의무사들과 오향주(五香主)는 어찌되고 자네만 남았는가?]

철담흑객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 화후당주님. 오향주는 모두 전사하고 소인과 아가씨만 간신히...]

이어 그는 기검룡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 공자님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순간 백삼노인은 허연 눈썹을 꿈틀했다.

[, 해룡왕(海龍王)! 그 작자가 점점 담이 커지는군, 빨리 제거해야겠군.]

이어 그는 기검룡을 응시하며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허허... 소공자께서 우리 취아를 구해주셨다니 정말 고맙소.]

허나 기검룡은 그저 싱긋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러자 능소취는 백삼노인을 올려다보며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할아버지. 용오빠는 굉장해요. 그 단홍검(丹紅劍)이란 자를 일장(一掌)에 죽였고요. 바다위를 마음대로 걸어요.]

어느새 능소취는 기검룡을 오빠라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기검룡의 나이가 그녀보다 한 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백삼노인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굉장하구나.]

허나 그는 단순히 그녀의 말을 일축해 버리고 실제로 믿지는 않았다.

그러자 능소취는 정색을 하며 재차 말했다.

[어머! 정말이예요. 용오빠. 어디 한 번 보여줘요.]

그녀는 기검룡을 바라보며 재촉했다.

기검룡도 흥미가 있었다.

순간, 그는 바다 위로 휙! 몸을 날렸다.

이어, 파도를 밟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신법으로 거선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자,

[...! 저럴 수가...!]

[___ ___!]

백삼노인과 사해선문의 제자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윽고 거검룡은 유유한 신법으로 다시 배위로 올라왔다.

백삼노인은 두눈을 크게 뜬채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정말 놀랍구려. 혹시 그 경공은 해연약파(海燕躍破)가 아니요?]

[맞습니다.]

순간, 백삼노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필시 이 소년의 신분은 범상치가 않다...!)

그는 예리한 직감을 놓치지 않고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들 일행은 모두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백삼노인___.

그는 바로 사해선문의 수석당주인 비천해응(飛天海鷹) 하후염(夏候炎)이었다.

그는 비천응신술(飛天鷹身術).

이 경공은 과거 무림군웅보(武林群雄譜)에 올랐던 백팔무인(百八武人) 중 일인(一人)인 혈응신(血鷹神)의 경공에 맞먹는 절기로 알려졌다.

 

선실(船室)___.

기검룡과 능소취, 비천해응 하후염과 철담흑객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기검룡은 물론 능소취와 철담흑객도 몹시 시장해 있던 참이었다.

그들은 정신없이 허기진 배를 채웠다.

식사가 거의 끝날 때 쯤 비전해응 하후염이 문득 기검룡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공자 사부는 누구시오?]

허나 기검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모릅니다. 단지 저는 그분들을 작은 할아버지, 큰할아버지라고 불러왔어요.]

하후염은 더욱 관심이 깃든 어조로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그분들의 생김새는 어떠하오?]

기검룡은 천강마존과 낙천문사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낙척문사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다.

허나 천강마존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했다.

단지 매우 엄격하고 과묵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얘기했을 뿐.

그의 설명을 듣고난 하후염은 안색이 대변했다.

(... 그렇다면 틀림없이 한 분은 낙천문사(落拓文士)...! 그러면 나머지 한 분은 쌍기(雙奇)의 한 명이신 고죽취옹(枯竹醉翁)이 아니겠는가?)

내심 그렇게 추측한 그는 가슴이 크게 격당함을 느꼈다.

쌍기(雙奇)___ 이들이 어떤 인물인가?

무림군웅보의 당당한 서열 제 이위(二位)에 오른 전대고인이 아닌가?

허나 하후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설마 낙척문사 외의 기검룡의 또 다른 사부가 바로 천강마존일 줄은.

 

사해선문(四海船門).

동해를 주름잡는 사해선문의 총단은 동해의 절유도(絶有島)에 위치하고 있었다.

___사해신룡(四海神龍) 능천위(凌天威).

그가 사해선문의 문주(門主)였다.

사해선문은 중원과의 왕래가 거의 없으니 쟁쟁한 위력을 지닌 문파였다.

 

기검룡 일행이 탄 거선은 이윽고 절유도에 도착했다.

거대한 수채(水寨)로 형성된 사해선문의 총단.

그들은 마침내 거선에서 내렸다.

수십 척의 선박이 질서있게 정박해 있는 도선장(渡船場)에는 삼십여 명의 무인들이 늘어 서 있었다.

앞 장 선 사람은 한 쌍의 부부(夫婦)였다.

남자는 남포장삼을 걸친 우람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전신에서는 당당한 위엄이 넘쳐 흘렀다.

그는 사십 후반의 중년인으로 두눈은 정광으로 충만해 있었다.

여자는 백의궁장(白衣宮裝)을 한 삼십 전후(前後)의 미부인(美婦人)이었다. 이때,

[어머니...!]

능소취가 반가운 음성으로 소리치며 미부인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녀는 기품있는 자태에 온화하고 포근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품에 안긴 능소취의 머리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길을 한없이 부드러웠다.

[취아, 무사히 돌아왔구나.]

그녀는 기쁨과 함께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이때, 남포장삼을 입은 중년인은 위엄서린 표정으로 하후염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후당주. 어떻게 당주께서 취아를 데리고 왔소이까?]

하후염은 공손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문주님, 그것은 모두 이분 공자덕분이었습니다.]

그는 한옆에 우뚝 서 있는 기검룡을 가리켰다.

문주(門主)라면...?

! 그렇다면 남포장삼인 그가 바로 사해신룡 능천위란 말인가?

그렇다. 그는 바로 사해선문의 문주 사해신룡 능천위였다.

하후염의 말에 사해신룡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하후염이 모든 사정을 얘기할 때 기검룡을 쌍기(雙奇)의 제자라고 밝힌 점에 대해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기검룡을 주시했다.

기검룡은 선뜻 그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소생 기검룡 두분 숙부님과 숙모님을 뵙습니다.]

그의 깍듯한 태도에 사해신룡 부부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사해신룡이 안색을 부드럽게 풀며 말했다.

[쌍기 두분 노선배님의 제자라면 강호에서 높은 배분이지만 그냥 네게 용아(龍兒)라고 부르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물론입니다. 숙보님. 용아는 오히려 그러기를 더욱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외로운 몸이었다.

절해고도에서 천강마존과 낙척문사 두 사람밖에 모르던 그러서는 오랜만에 가진 사람들과의 접촉이 무척 기뻐던 것이다.

이때, 능소취가 문득 기검룡의 손을 잡아끌었다.

[용오빠, 날따라 와봐. 이곳엔 구경할게 많으니까.]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이끄는데로 따라갔다.

그들이 수채 안으로 사라지자 사해신룡은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해룡방의 동태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군.]

하후염 역시 안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비록 천해비동(天海秘洞)의 위치를 모르나 대강 추측은 한 듯 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아가씨를 노린 것이 분명합니다. 아가씨를 인적으로 삼아 천해비동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한 것입니다.]

사해신룡은 하후염을 바라보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내일이 천해비동으로 입동(立洞)할 수 있는 자오절(子午節)이오. 아무쪼록 기밀이 유지되도록 당주께서 힘써주시오.]

하후염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X X X

 

어둠. 깊은 어둠이 흐르고 있었다.

기검룡은 사해선문 안의 깊은 대전에 속한 한 칸의 방에 들어 있었다.

침상___ 그는 지금 편안히 침상에 누워있었다.

허나 잠은 오지 않았다.

웬지 머리 속에 자꾸만 무인도에서 발견한 비급의 구결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허나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일어나 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름모를 불완전한 장공(掌功)이었다.

기검룡은 머리 속의 기억을 따라 천천히 운공했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가 익힌 천강신공(天罡神功)의 진기를 운용하여 장공의 구결을 따라 기류를 운행하는 순간,

[!]

그는 잠시에 전신을 부르르 떨며 고통의 비명을 발했다.

전신의 진기가 폭풍처럼 소용돌이치며 마구 요동치는 것이 아닌가?

[아악...! ___ 으윽...!]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연신 비명을 터뜨렸다.

마침내, ___!

그는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허나 그 순간, 노도같은 경기가 갑자기 기경팔맥(奇經八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기검룡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기검룡은 무거운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순간, 그는 만면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당했다. 헌데 나는 죽지 않았단 말인가?)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기이하게도 아무런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상, 기검룡은 하마터면 주화입마(走火入魔)를 당할 뻔했다.

각기 성질이 틀린 두 가지 무공을 잘못 융합한 탓이었다.

허나 무인도에서 먹은 금빛복숭아로 인해 오히려 극적으로 진기를 융합, 그것이 사지(四脂)로 퍼지면서 내공마저 배이상 급증한 것이었다.

허나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기검룡은 의혹의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내가 이 장공(掌功)의 연마에 성공했단 말인가?]

그는 앉은 채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탁 쳤다.

순간, 그의 몸이 그대로 부웅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 연대좌불(蓮台坐佛)의 경공이 펼쳐지다니...!]

기검룡은 희열의 탄성을 발하며 빙글 몸을 회전하여 그대로 창밖으로 날아갔다.

___연대좌불(蓮台坐佛).

그는 낙척문사가 그에게 전수한 개세의 경공이었다.

허나 기검룡은 여태까지 내공이 약해 그것을 떨치지 못햇던 것이다.

기검룡의 기쁨은 실로 컸다.

그는 한 인공야산의 바위 앞에 우뚝 서 있었다.

[!]

그는 육성(六成)의 공력을 사용하여 장력을 내뻗었다. 허나,

[...!]

기검룡은 놀람을 금치못했다.

장력은 소리는 물론 아무런 형체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바위에는 장력이 부딪친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어째서 아무런 위력도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가 무심코 바위를 발로 툭 찼다.

순간, 우수수...!

놀랍게도 바위는 완전히 부서져 가루로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껍질부분만 남고 바위의 속부분이 다 부서졌다는 점이었다.

[...!]

기검룡은 두눈을 크게 뜨며 경악의 환성을 발했다.

이어 문득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정말 이 장법은 악독하기 그지없구나. 검은 멀쩡하나 속은 완전히 부서졌으니... 더구나 무형중에 날아가니 피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는 잠시 묵상에 잠겼다.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겠군. 헌데 이 장법의 이름을 모르니...

허나 그 순간 그의 두눈이 번쩍 빛났다.

[그래. 이것을 극영쇄심인(克影碎心印)이라 부르자!]

그는 스스로 장법에 이름을 붙인 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소금(少琴),

기검룡은 방으로 돌아와 무인도에서 가져온 일곱 치 길이의 소금을 만지고 있었다.

그는 소금의 외줄을 장난삼아 당겨보았다.

허나,

[?]

소금의 외줄은 조금도 당겨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공력을 끌어올려 다시 줄을 당겼다.

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검룡은 은근히 오기가 솟았다.

[어디... 얼마나 단단한가 보자!]

그는 전 공력을 끌어모아 손가락으로 힘껏 소금의 줄을 당겼다.

그 순간, !

한 줄기 청아한 금음이 울려퍼졌다.

이어, 콰르릉...!

가공할 천둥소리와 함께 무형의 강기(罡氣)가 사방으로 폭사하는 것이 아닌가?

와르르... 우릉...!

그와 동시에 방의 사방벽이 무섭게 무너져 내렸다.

[... ...!]

기검룡은 일순 당황하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용아! 무슨 일이냐? 이 소리는?]

사해신룡과 그의 부인 능부인, 또한 능소취 마저 놀란 표정으로 기검룡의 방으로 달려왔다.

그들을 보자 기검룡은 쑥스럽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만 심심풀이 무공을 연마하다가...]

그이 멋적어하는 태도에 사해신룡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무공이길래 방이 이 모양으로 변했단 말이냐?]

허나 기검룡은 무인도 얘기를 꺼내기가 웬지 망설여졌다.

문득 그는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 그것은과거 벽력문(霹靂門)의 절기 풍천벽력장(風天霹靂掌)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사해신룡은 두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벽력문이라고?]

그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___벽력문(霹靂門).

이는 삼백 년(三百年) 전 대막혈궁(大漠血宮)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멸문(滅門)한 막강한 문파였다.

그들의 무학 중 벽력진해(霹靂眞解)는 그야말로 무림일절이었다.

 

사해신룡은 기검룡을 바라보며 문득 침음성을 발했다.

[... ... 벽력문의 절기를 네가 익혔다니...]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나 곧 그는 돌아섰다.

[이제 그만 자거라.]

사해신룡은 방을 나갔다. 이때, 능소취가 얼른 그의 등뒤에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취아는 용오빠하고 자겠어요!]

그말에 사해신룡은 흠치했다.

허나 문득 그는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무나.]

그가 방을 나가자 능부인이 황급히 그를 뒤따르며 말했다.

[아니 여보! 어쩌자고 한방에... 저들이 아무리 어리다지만...]

그녀는 자못 염려스러운 듯 사해신룡을 바라보았다.

허나 사해신룡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쁠 것 뭐가 있소? 당신은 저 두 아이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지 않소?]

[... 그건 그렇사오나...]

[하하... 내게 다 생각이 있소]

그제서야 능부인은 문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오빠. 그 풍천벽력장(風天霹靂掌)인가 하는 것을 한 번 취아에게 보여줄 수 있어?]

능소취는 기검룡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며 간청했다.

기검룡은 향긋한 소녀의 체취에 문득 당황한 마음이 되었다.

[... 여기선 안돼. 잘못하면 옮긴 이 방도 무너진다.]

그는 조금 전에 들었던 방의 벽이 다 무너져버린 탓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그의 말에 능소취는 안색을 활짝 퍼며 말했다.

[! 혹아저씨, 나 용오빠하고 바닷가에 잠깐 다녀올께요.]

그녀의 말에 철담흑객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두 분만 보낼 수는 없습니다. 가시려면 소인과 같이 가셔야 합니다.]

능소취는 쾌히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같이 가요.]

 

바닷가.

밤의 바닷가는 깊고 짙은 어둠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거대한 암석으로 가로막힌 곳에 삼인(三人)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물론 기검룡과 능소취, 그리고 철담흑객이었다.

능소취는 두눈을 기대의 빛으로 반짝이며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여기선 마음을 놓아도 돼, 어서 한 번 해봐 용오빠.]

그녀의 재촉에 기검룡은 문득 눈썹을 꿈틀했다.

이어 그는 약 십 장(十丈) 거리에 있는 오 장(五丈) 높이의 한 암석을 노려보았다.

순간, 그의 가슴에는 불끈 투지가 끓어올랐다.

그는 내심 풍천벽력장의 구결을 외웠다. 이어,

[벽력진천(霹靂振天!]

우렁차고 낭랑한 일성과 함께 우수를 쭉 내뻗었다.

꽈르릉...!

그의 힘찬 우장(右掌)이 펼쳐지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벽력음이 터져올랐다.

[___ !]

능소취는 이 경악한 사태에 소리 높여 탄성을 발했다.

오 장 높이의 암석 중 한부분이 완전히 부서져 내린 것이었다.

허나, 쿠르릉___ 콰릉___!

기검룡은 연달아 장력을 내뻗었다.

 

풍천벽력장.

이는 모두 팔식(八式)으로 되어 있었다.

매초식마다 그 위력이 배로 증가하는 가공할 장법이었다.

꽈르릉___ ___ !

기검룡의 우장이 휘둘러질 때마다 엄청난 폭음이 잠시 숨을 돌렸다.

이윽고, 풍천벽력장의 팔식(八式)을 완전히 펼쳐낸 기검룡은 잠시 숨을 돌렸다.

헌데, 아 보라!

십 장 앞의 암석은 절반정도가 완전히 붕괴된 것이 아닌가?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허나, 기검룡은 빙그레 웃으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번엔 더 놀라운 것을 보여주마.]

이어 그는 입속으로 무엇인가를 중얼중얼 외웠다.

다음 순간,

[벽력패왕수(霹靂覇王手)!]

그는 섬전같이 손바닥을 쭉 뻗었다.

순간, 주황빛 경기가 노도처럼 밀어닥쳤다.

... 꽈르르릉___! ___!

천지개벽(天地開闢)의 가공할 굉음과 함께 전면의 암석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

능소취는 찬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다시 탄성을 질렀다.

허나 철담흑객은 그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기검룡의 안색은 약간 창백하게 변했다.

벽력패왕수.

이는 벽력진해 중에서도 최강에 속하는 무공이었다.

따라서 진기소모가 극심했던 것이다.

능소취는 그 모습에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용오빠.]

기검룡은 빙그레 웃었다.

[괜찮다. 잠깐 운공을 하면 되니까.]

이어 그는 곧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앉아 운공했다.

그는 빠르게 공력을 회복했다. 문득, 그는 일어서면서 입을 열었다.

[이 벽력패왕수는 실상 벽력천강(霹靂天罡)에 비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작은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

[...!]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그말에 그만 아연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말았다.

허나 곧 철담흑객이 그제서야 생각난 듯 말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두 분도 이제 그만 돌아가 주무셔야지요.]

기검룡과 능소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들 삼인(三人)은 돌아섰다.

헌데, 섬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기검룡은 문득 흠칫 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잠깐! 누군가 있어요.]

[...?]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의아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허나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모퉁이를 돌았다.

해변(海邊), 어둠 속의 한 그루 커다란 송목(松木) 아래 두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다.

허나 그는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얼굴을 볼수가 없었다.

또 다른 한 명은 회의(灰衣)를 입은 깡마른 노인이었다.

그는 백의인(白衣人)과 마주보고 서 있어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턱밑에 염소수염을 기른 자로 쭉 찢어진 뱁새눈에 음험한 인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선채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백의인이 문득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문주와 수석당주가 굳게 입을 봉하고 있기 때문에 천해비동(天海秘洞)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회의의 깡마른 노인은 낮고 음침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흐흐.. 상관없다. 천해비동의 빙죽도(氷竹島)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천해비보(天海秘寶)는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헌데 이때, 그들의 대화를 자세히 듣기위해 앞으로 고개를 내밀던 기검룡은 잘못하여 그만 발밑의 조약독을 건드리고 말았다.

...!

조용한 가운데 그 소리가 울리자 회의인(灰衣人)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누구냣!]

동시에 그의 소매가 번득 휘둘어지며 무수한 한망이 세 사람을 덮어씌웠다.

[... 들켰어.]

능소취는 겁먹은 음성으로 울상을 지었다.

허나, 기검룡은 추호도 당황함 없이 벌떡 일어서며 풍천벽력장(風天霹靂掌)을 후려쳤다.

우르릉...!

고막을 진동시키는 우뢰성이 이는 순간, 회의인이 발출한 암기는 일제히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흐흐흐... 제법이구나.]

회의인은 음험한 광망을 번득이며 휙 선형을 날렸다.

어느새 그의 신형은 기검룡의 머리 위에 이르러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의 벽락같이 장()을 후려쳤다. 허나,

[타앗!]

기검룡도 물러서지 않고 천왕탁탑(天王托塔)의 일식에 그의 장경이 맞섰다.

___! 하는 폭음과 함께,

[...!]

회의노인은 기혈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고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경악의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내려서 기검룡을 노려보았다.

이때,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백의인이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회의노인에게 말했다.

[그 꼬마가 쌍기(雙奇)의 손자라는 아이입니다. 어리지만 무서운 공력을 지녔으니 조심하십시오.]

회의노인은 두눈을 번쩍 빛내며 차갑게 말을 잘랐다.

[알았다. 그대는 빨리 돌아가라.]

순간, 백의인은 전면의 송림사이로 휙 신형을 날렸다.

[서랏!]

기검룡은 벼락같이 소리치며 그의 뒤를 쫓으려했다.

허나, 회의노인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가로막았다.

[흐흐... 꼬마야, 네 강대는 여기있다.]

동시에 그는 숨쉴틈 조차 주지않고 막강한 장력을 쏟아냈다.

기검령은 반사적으로 마주 일장을 쳐냈다.

콰르릉___!

두 사람의 장력이 격돌하자 요란한 폭음이 들썩 사위를 흔들었다.

회의노인은 신형을 휘청하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기검룡 역시 일순 몸이 흔들렸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회의노인은 내심 경악의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 역시... 어린 놈의 공력이 노부보다 뛰어나구나, 허나 어린 놈은 역시 어린 놈... 흐흐...)

그는 암중에 독계(毒計)를 품고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어린 놈! 죽어랏!]

그는 재차 일갈하며 장을 후려쳤다.

기검룡 역시 물러서지 않고 기쾌하게 일장을 내뱉았다.

허나,

[...!]

두 사람의 장력이 맞부딪친 순간, 그는 자신이 허공을 후려쳤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회의노인이 펼친 허초(虛招)에 속은 것이었다.

이때,

[흐흐... 죽어랏!]

회의노인이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번득 우수(右手)를 휘둘렀다.

헌데 그의 손에서 발출된 것은 한 무더기의 독침이 아닌가?

[!]

기검룡은 철판교의 수법으로 다급히 몸을 피했으나 몇 개의 독침들이 그의 다리에 적중되고 말았다.

[아주 가거랏!]

회의노인은 앞으로 쓰러지는 기검룡을 단번에 박살낼 듯 다시 장을 후려쳤다. 순간,

[... 용오빠___]

보고있던 능소취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허나 이때, 바닥에 나뒹굴던 기검룡의 몸이 돌연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어느새 그의 우수가 번득 청색고아망을 일으켰다. 찰나!

[___ !]

회의노인은 기혈을 토해내며 나뒹굴었다.

허나 그와 동시에, 그는 기검룡이 저지할 틈도없이 풍덩 바닷 속으로 뛰어들며 사라졌다.

[...]

기검룡은 일순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용오빠, 괜찮아요?]

능소취가 잔뜩 염려가 어린 표정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어디봅시다. 공자님. 방금 그자는 독수인마(毒手人魔)라는 자로 그자의 암기에 발린 독()은 극히 악랄하여 위험합니다.]

철담흑객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기검룡은 독침이 박힌 다리의 바지를 걷어올렸다.

그의 하얀 다리에는 서너군데 미세한 검은 점이 푸른빛을 띈 채 박혀있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 푸른 반점은 점차 조금씩 축소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철담흑객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공자님께서는 전에 무슨 영약을 복용한 적이 있으십니까? 독이 절로 소멸되고 있습니다.]

허나 기검룡 역시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별로 그런 기억은 없는데...]

이어 그는 장()을 독침이 박힌 부위에 대고 공력으로 독침을 빼내었다.

이윽고, 다리에 박힌 독침을 모두 빼낸 기검룡은 문득 침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외인(外人)과 내통한 그 백의인을 잡았어야 하는건데...]

능소취 역시 약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하옇든 돌아가 아버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그렇게하지.]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들 삼인(三人)은 사해선문의 총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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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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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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