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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버리 기재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은 동북(東北)의 제갈량이라 불린다.

병법과 진법으로 강진남과 겨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철령보의 보주 독안룡 이탁뿐이다.

강진남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임기응변 능력을 바탕으로 요동의 군소문파중 하나였던 대려장을 동이족 세력들의 맹주로 키워냈다.

당금의 무림에서 강진남의 이름을 모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당대에 쌓아올린 눈부신 업적과 달리 강진남은 자식 복이 별로 없는 편이다. 본처와 여러 첩들에게서 겨우 두 명의 딸을 얻었을 뿐인 것이다.

독안룡 이탁이란 벽에 막혀 요서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는 것과 대를 이어줄 아들을 얻지 못한 것이 강진남을 번민하게 만드는 두 가지 큰 근심이다.

 

***

 

아이 참, 왜 이렇게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잖아.”

강미루(姜美樓)는 잠옷 차림인 채로 하품을 하며 침실에서 거실로 나왔다.

히히힝! 푸르르!

몇 개의 담장 너머에 있는 마당에서 수많은 말들이 흥분하여 투레질을 하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아가씨도 깨셨군요.”

창가에 서서 밖을 살피던 유모 최씨가 돌아보며 말했다.

유모가 조금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마당 쪽이 대낮같이 환한 게 보인다.

한밤중에 마구간에서 끌려나온 말들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는 소리와 그 말들에게 마구(馬具)를 채우는 마부들의 호통소리가 요란하다.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잖아. 한밤중에 왜 저 난리래?”

무군자 강진남의 둘째딸인 강미루는 유모와 함께 창가에 서서 마당 쪽으로 목을 빼들었다.

쇤네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철령보쪽으로 급히 출동할 일이 생겼다네요.”

유모는 이리저리 일렁이는 횃불의 불빛들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철령보의 잡것들이 또 시비를 걸어온 거야?”

강미루는 도끼눈으로 마당 쪽을 흘겨보았다.

강미루는 대려장의 그 누구보다도 철령보를 미워한다. 아버지 강진남이 철령보에 막혀서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당직 서는 아이들 말로는 이각(二刻;30) 전쯤에 본장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해요. 그 손님이 가져온 급보를 접한 장주님이 철령보쪽으로 출동을 명령하셨다는 거예요.”

유모는 자신이 아는 대로 대려장의 둘째 아가씨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철령보 쪽으로 출동한단 말이지?”

유모의 설명을 들은 강미루의 눈에서 잠기운이 사라지며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

 

백남빈은 다섯 가지 색의 금반지, 오채금환을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며 대청을 나섰다. 반지는 워낙 커서 가운데 손가락 마디 하나를 거의 감싼다.

완안진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오채금환은 귀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백남빈은 오채금환을 무황성에 가져가는 도중 분실할 수도 있어서 손가락에 낀 것이다.

오채금환 외에도 백남빈은 기름종이로 만든 두툼한 봉투를 상의 속에 품고 있다. 밀봉된 그 봉투에는 신랑성주 토곤이 대려장주 강진남에게 보내는 밀서와 함께 이탁의 보고서가 들어있다.

또 백남빈의 허리춤에는 길이가 한자 반쯤 되는 단검이 끼워져 있다. 손잡이에 푸른 늑대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그 단검 역시 토곤이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이었던 것같다.

청랑검(靑狼劍)으로 이름 붙인 그 단검은 강철도 어렵지 않게 자를 정도로 날카롭다.

대청을 나서니 총관인 사해검객 종리완이 행장이 준비 된 말의 고삐를 잡고 서있다.

이틀 전부터 한숨도 못 잤는데 괜잖겠는가?”

다가오는 백남빈을 보며 사해검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며칠 더 밤을 새도 끄덕없을 나이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남빈은 사해검객 앞에 멈춰서며 포권을 했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아버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나 종리완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주님을 보필할 테니 이곳 걱정은 말고 다녀오시게.”

사해검객도 마주 포권을 하며 웃었다.

헌데 그런 사해검객의 모습이 낯설고 모호하게 느껴져 백남빈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이분을 다시 보지 못할 것같은 예감이 든다.)

백남빈은 사해검객에게서 말의 고삐를 넘겨받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속내를 들킬지도 몰라서...

사해검객만이 아니었다.

말고삐를 잡고 둘러보니 주변에 서있는 철령보의 무사들, 심지어 철령보의 건물들까지도 꿈속인 듯 흐릿하게 느껴진다.

(머지않은 장래에 철령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불안한 감정이 백남빈의 가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철령보에 남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신랑성과 대려장이 손을 잡은 사실은 촌각을 다퉈 무황성에 보고해야만 한다.

(아무쪼록 소자가 무황성에 다녀올 때까지 존체보중하십시오.)

백남빈은 양부 이탁이 있는 대청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힘차게 말에 올라탔다.

두두두!

곧 백남빈은 사해검객과 철령보 무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철령보를 달려 나갔다.

 

홀로 대청 안에 앉아있는 이탁의 귀에도 백남빈을 태운 말의 발굽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린다.

백남빈과 달리 이탁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그리 근심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남빈이가 우리 부부의 품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이탁은 근심 대신 아쉬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간단치 않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겠지만 형님의 핏줄이니 결국 극복해낼 테지.)

이탁은 백남빈의 아버지이며 자신에게는 손위 동서가 되는 백무염을 떠올렸다. 백무염은 이탁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며 또 두려워하는 존재다.

백남빈은 여러모로 생부인 백무염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한다.

백무염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백남빈이 누구의 핏줄인지 알아볼 것이다.

인간들 중에서 이탁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백남빈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백남빈에게 백무염처럼 근본(根本)을 알아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신명안(神明眼)이라 불리는 그 힘을 지닌 덕분에 어떤 위장이나 눈속임도 백남빈을 미혹시키지 못한다.

백남빈이 불과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등천제에서 우승 할 수 있었던 것도 상대가 구사하는 무공의 실체와 노리는 바를 정확히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탁은 가끔 양아들이 자신의 하나뿐인 눈 속에 감춰진 깊은 어둠을 이미 다 들여다 본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남빈이가 무황성까지 가는 길에 치명적인 위험은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해야한다.)

이탁은 백무염과 백남빈 부자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끊고 사해검객을 불렀다.

"가용 가능한 전력을 모두 대려장과의 접경으로 이동시켜라. 요하를 건너는 대려장의 인마는 무조건 주살한다."

이탁의 명령을 받은 사해검객은 곧 수하들을 이끌고 철령보를 빠져나갔다.

바야흐로 철령보와 대려장 사이에 전에 없던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려는 것이다.

 

***

 

요하 건너 대려장에도 어느덧 어둠이 밀려나고 있었다.

철령보에서 나가는 것은 새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신랑성의 밀사가 본장에 도착한 것을 무황성이 알게 해선 안된다!”

두두두! 히히힝!

흥분에 찬 호통과 긴장어린 고함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우레처럼 터져 나온다.

활짝 열린 대려장의 정문을 통해 수백기의 기마대가 노도처럼 쏟아져 나가고 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시간이지만 대려장의 기마대는 거침없이 요하쪽으로 몰려갔다. 요하에는 이미 수백 척의 배를 이어 만든 배다리, 즉 주교(舟橋)가 가설되어 있었다.

 

대려장의 정문에 설치 된 높은 문루(門樓) 위에 서서 검은 물결인 듯 서쪽으로 몰려가는 기마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풍채가 좋은 초로의 인물이고 다른 한명은 키가 훤칠하며 차림새가 격식을 갖추지 않아 분방하게 보이는 청년이다.

소성주(少城主)가 직접 밀사로 올 줄은 몰랐네.”

초로의 인물은 대려장을 빠져나가는 기마대를 내려다보며 청년에게 말했다. 그가 바로 동북의 제갈량이라 불리는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이다.

구처기(丘處機), 즉 장춘진인(長春眞人)이 징기스칸께 진언하기를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했소이다.”

강진남의 말에 청년은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훤칠한 체격과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 많은 청년이다.

하지만 나 에센은 아직 천하를 얻지 못했으니 말에서 내릴 수 없는 처지! 가야만 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직접 달려갈 각오가 되어 있소이다.”

청년은 제 흥에 겨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청년이 바로 신랑성의 소성주 에센이다.

오이라트의 족장이기도 한 신랑성주 토곤의 장남인 그가 직접 아비의 밀서를 들고 대려장을 찾아온 것이다.

에센은 토곤이 보낸 밀사인 동시에 볼모인 셈이다.

(영걸 소리를 듣는 제 아비보다도 몇 배 더 혈기방장(血氣方壯)한 놈이다.)

강진남은 쓴웃음을 지었다.

에센이 대려장에 들어온 것은 불과 한 시진 남짓 전이었지만 강진남이 지난 한 달 동안 들은 것보다 더 많은 말을 쏟아냈다.

말이 많은 것은 에센의 성격이 수다스러워서라기보다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다.

혈기가 넘치는데다가 몽고초원을 지배하는 오이라트의 후계자라는 넘치는 자신감이 에센의 혀를 자제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일단 시작하면 듣는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최소한 뭔가를 숨기고 음모를 꾸미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은 높이 사줄만 하다.)

강진남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센은 팔짱을 낀 채 말을 잇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얀을 대동한 부성주는 어제 오후에 귀장에 도착해야만 했소. 부성주 정도 되는 인물이 연락조차 보내오지 못한다는 것은 철령보에 의해 죽거나 잡혔다는 뜻이오. 사실 부성주는 여진족 출신이라 본성 내에 적이 많소. 그 중 어떤 버러지가 부성주의 종적을 극품당과 철령보에 누설했을 것이오.”

다 알고 있고 짐작하는 내용이지만 강진남은 끈기를 갖고 에센의 수다를 들어주었다.

강진남의 인내심이 남달라서이기도 하지만 에센이 쏟아내는 말 중에는 유용한 정보도 다수 섞여 있기 때문이다.

부성주에게는 완안준(完顔俊), 완안극(完顔極)이라는 두 명의 동생이 있소. 본성의 문상(文相)과 무상(武相)을 맡고 있는 그 둘과 부성주를 합쳐서 완안삼절(完顔三絶)이라 부르는데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철풍사(鐵風社)라는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소. 철풍사는 극품당에 패해 망명한 여진족 무사들로 이루어진 문파이며... !”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던 에센이 몸을 조금 문루 밖으로 내밀며 멀리를 내다보았다.

밝아오는 여명 속에 대려장을 빠져나간 기마의 선발대는 이미 십여 리 밖에 있는 요하를 건너고 있다.

거리가 거리다 보니 기마대는 마치 개미떼처럼 작고 까맣게 보인다.

헌데 배다리를 건넌 개미떼같은 기마대는 철령보가 자리한 서쪽으로 가지 않고 요하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장주의 수하들이 남쪽으로 직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에센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기마대의 행렬을 보며 말했다.

어째서일 것 같은가?”

강진남이 웃으며 되물었다.

나 에센을 시험하시는구려.”

에센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는 강진남에게 다시 말의 홍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철령보에서 무황성으로 가는 최단거리는 서남진(西南進)하는 것이오. 하지만 우리 신랑성에서도 만일 대비하여 그쪽으로 요격할 준비를 하고 있소. 이를 모를 리 없는 독안룡 이탁은 전령(傳令)을 남쪽으로 보내 진황도(秦皇島)에서 배편으로 천진(天津)까지 가게 했을 것이오. 천진에서 북경 근처 무황성까지는 지척지간이니... 이에 장주께서도 철령보쪽이 아니라 진황도 방면으로 추격하라 명령하셨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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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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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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