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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억지 혼례식(婚禮式) (1)

 

 

일각 정도 걸었을 때 임청우는 멀리 보이던 불빛을 십장 밖에 두고 있었다.

불빛은 화전을 일구어 살아가는 화전민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초가집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의 뒤를 따라 숲을 헤맬 때 이 집을 보았었다.

초가집으로 다가가니 안쪽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사람의 말소리인데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이상한 일이었다.

임청우는 초가집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말소리는 여전히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남자의 음성인지 여자의 음성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말소리는 임청우가 가까이 가는 만큼 작아지고 있었다.

(이상하다. 마치 내가 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 같다.)

임청우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당연히 황의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성미 나쁜 계집애가 삐쳐서 어디론가 샜나 보다 생각하면서 임청우는 뒷걸음질로 초가집에서 물러섰다.

그에 따라 들려오던 말소리가 점점 커졌다.

오장 정도 물러나도 여전히 크게 들려왔다.

다만 웅웅 거려서 무슨 말인지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가? 가까이 가면 작아지고 물러서면 커지는 말소리라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쭈뼛해졌다.

하지만 용기를 낸 임청우는 발을 힘차게 내딛으며 다시 초가집을 향해 다가갔다.

주인장 계십니까? 지나던 사람입니다.”

초가집 문 앞에 이른 임청우는 무게 있는 음성으로 외쳤다.

“...”

갑자기 문안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뚝 그쳤다.

실례하겠습니다.”

임청우는 다시 한 번 말하고는 문을 밀었다.

덜컹!

문이 열리는 순간 초가집 안은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불이 꺼져버린 것이다.

긴장한 임청우는 쓸 줄도 모르는 청강사자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집 안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도 이 순간에는 그쳐버렸다.

어둠 속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있다.

그러나 임청우는 그것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임청우는 중심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을 끌듯이 미끄러뜨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발에 느껴지는 거친 바닥이 자기가 살았던 농산의 모옥과 비슷했다.

임청우는 발끝으로 앞을 더듬으며 살쾡이처럼 소리없이 나아갔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 마다 긴장은 실이 당겨지듯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몸은 자신의 무게를 잊어버렸다.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있는 것이다.

!

임청우의 발이 각목을 더듬어 냈다.

방 가운데에 놓인 탁자의 다리라 생각하며 옆으로 돌았다.

그때였다.

슈우우!

갑자기 임청우를 둘러싸고 사방에서 푸른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어둠속에서 나타난 그 푸른 그림자들은 흐느적거리며 날아올라 임청우를 향해 빠른 속도로 덮쳐들었다.

카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비단 폭을 찢는 듯한, 유부의 악귀가 울부짖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번쩍!

임청우는 검을 뽑아 앞에 있는 푸른 그림자를 향해 휘둘렀다.

파앗!

청광이 일면서 푸른 그림자가 두 조각이 되었다.

위위위윙!

동시에 그것들은 임청우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아!”

악귀의 울부짖음은 같은 괴성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푸른 그림자들은 다시 배로 늘어났다.

눈앞이 팽팽 돌며 괴상한 소리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푸른 그림자들에 갑자기 눈과 입이 생겼다.

크아아!”

임청우가 놀라는 순간에 그것들은 임청우를 향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으합!”

임청우는 검을 내동댕이치며 양손으로 푸른 그림자들을 움켜잡았다.

찌이익!

비단폭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푸른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유황냄새가 났다.

불이 켜진 것이다.

환하게 밝아진 실내는 검소한 거실인데 임청우는 그 가운데에 조각조각 찢어진 푸른 천 조각을 움켜쥐고 서있었다.

장난 그만 치고 나오시오.”

임청우는 내동댕이쳤던 검을 주워 칼집에 집어넣고 웃으며 말했다.

! 사람도 아니군. 하긴 이 정도는 돼야 함께 일할 수 있겠지만.”

임청우가 들어온 문의 반대쪽에 있는 방문이 열리면서 황의소녀가 거실로 나왔다.

이 집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소?”

임청우는 그녀를 응시하고 물었다.

갑자기 황의소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 말투 제발 좀 쓰지 않을 수 없어? 속이 니글거리지도 않아? 이제 초면도 아니니까 그만 서로 편한 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

“...”

내게 감히 존대말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해. 대신...”

“...”

억울하면 너도 나처럼 편하게 말해.”

황의소녀는 빠르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양보를 해도 크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임청우는 피식 웃었다.

오만하고 까칠한 계집애가 이 정도만 해도 많이 수그러졌다고 생각했다.

황의소녀가 자신과 무슨 일을 도모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그녀가 싫지는 않다.

임청우도 딱딱한 말보다는 부드러운 말을 주고받고 싶다.

미인에게는 딱딱하게 대하기도 어려운 법이 아니던가?

임청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황의소녀가 열어놓은 방문에서 농사꾼 차림의 늙은 부부가 나왔다.

비록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할아버지는 신체가 건장하고 온화해보였으며 할머니는 작은 키에 정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주 착한 아이구나. 훗날 큰일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저 아이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야.”

임청우는 우물쭈물 어쩔 줄을 몰랐다.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황의소녀가 얼굴을 붉힌 채 외면하고 있었다.

과묵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흩어져 있는 천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잡고 탁자로 끌어다 앉히며 말했다.

저건 우리 부부의 이불이지. 마련한지 이십 년이 넘었으니 이제 바꿀 때도 되었어. 그러니 미안해 할 건 하나도 없단다.”

임청우는 문득 그 할머니가 자기가 만난 적이 있는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닮은 사람이 누군지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미 저 아이에게 다 들었단다. 네 얼굴이 검기는 하지만 마음씨가 올바르고 기상이 훌륭하니 용모에 그렇게 구애될 것은 없단다. 대장부는 그 행동으로 말하지 얼굴을 파는 것은 기생오라비나 하는 짓이란다.”

임청우는 어리둥절했다.

자기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검다고는 할 수 없다. 씻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임청우는 자신의 얼굴에 묻어있던 검댕이 이미 우협 장백승에 의해 깨끗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얼굴에 황의소녀가 검게 변하는 약을 다시 발랐다는 사실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할머니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며 황의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의소녀는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다독거리며 또 말했다.

효자는 부모의 그릇된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란다. 비록 한때는 불효소리를 듣더라도 훗날 협으로 명성을 떨치고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된다면 그게 바로 효란다.”

임청우는 이야기가 잘못됐다는 것을 확연히 알았다.

할머니, 대체 무슨...”

흠흠...”

임청우가 말을 하려는 순간 황의소녀가 헛기침을 하면서 막았다.

부끄러워할 것 없단다 얘야. 우리도 너와 같은 나이에 혼인을 했단다. 아무 말 말고 오늘 밤 여기서 혼례를 올리도록 해라.”

(혼례를 올려?)

임청우는 어리벙벙한 심정이 되어 황의소녀를 바라보았다.

황의소녀는 할아버지가 주워 모은 푸른 천들을 받아서 한쪽에 있는 아궁이로 가져가고 있었다.

영감! 오늘이 길일이 맞죠?”

그렇소.”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할머니가 임청우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혼례준비를 할 테니 너희들은 잠시 방으로 들어가 있거라.”

황의소녀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임청우는 그녀에게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따라 들어갔다.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노부부의 침실은 자그만 했다. 하나의 침상과 밖의 것보다 약간 작은 탁자가 하나 있으며, 벽쪽으로는 낡은 옷장이 붙어있다.

황의소녀는 침상에 걸터앉으며 오만하게 팔짱을 꼈다.

임청우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며 음성을 낮추고 말했다.

왜 이같은 일을 꾸민 것이지.”

내가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었지.”

“...”

지금 하도록 하겠어.”

황의소녀는 입술을 달짝거리며 전음으로 말했다.

임청우는 다만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우롱 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황의소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전음으로 말했다.

큰일을 한번 해보고 싶지 않아?”

큰일!

임청우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눈이 빛나자 황의소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우협의 제자, 그리고 난... 음 지금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며 어떤 일이든지 해낼 수 있어. 네가 얼마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몰라도 내가 볼 때는 아직 서투르기 짝이 없어. 우협의 제자가 아니라면 넌 이미 죽어도 몇 번은 죽은 목숨일 거야.”

임청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더구나 소녀가 큰일을 해보자는 대는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바로 어제 저녁에 그가 결심한 것이 역사에 길이 남을 큰일을 해보겠다는 것이었지 않은가?

황의소녀가 말을 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쫓기고 있어. 그들은 아버지의 부하들인데 나를 잡아서 아버지에게로 데려가고 말거야. 한데, 난 무림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일이야?”

임청우가 물었다.

황의소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뱉었다.

한 여자를 찾아서 죽이는 거야. 그 여자를 죽이기 전에는 결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게 네가 말하는 큰일인가?”

임청우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래는 그 여자만 죽일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몇 달 동안 무림을 돌아본 바로는 능력 있는 몇 사람만 모을 수 있다면 능히 무림을 제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첫번째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너야.”

임청우는 어이가 없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계집아이가 누구의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무림을 제패할 뜻을 품고 있다.

무림이란 것의 실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임청우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기인이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무림을 제패할 뜻을 품다니...

그것도 어린 계집아이가...

황의소녀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내가 하지 못할 것 같아?”

임청우는 야심으로 타오르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만 같은 눈이다.

한데 그 일과 혼례가 무슨 상관이 있나? 왜 그런 일로 사람을 우롱하려는 거야?”

임청우가 말머리를 돌렸다.

황의소녀가 피식 웃었다.

그건 거짓말은 약간 했지만 장난은 아니야. 어차피 여자는 시집을 가야해. 그렇다면 적당한 상대를 발견했을 때 혼인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야.”

대체 그 말은 누구에게 들었나?”

임청우가 기가 막혀서 물었다.

황의소녀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하녀들에게.”

임청우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넌 아직 어린애야.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는데 그렇게 쉽게 결정하고 쉽게 할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다니. 난 너의 장난에 놀아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혼인을 하든 뭘 하든 네 맘대로 해라.”

황의소녀는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 ...!”

그때 할머니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벌써 부부싸움을 하느냐? 하지만 그건 침실에서 소리를 낮추고 해야지 방밖으로 가지고 나오면 안되는 것이란다.”

임청우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할머니, 우리가 혼인을 한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 소저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혼인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갑자기 할머니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말다툼 한번 했다고 여자를 버리고 떠날 셈이냐? 이 할머니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할머니는 손을 갈쿠리처럼 오무리고 임청우의 손목을 잡으려 들었다.

콰득!

너무도 신속하고 재빠른 솜씨에 임청우는 꼼짝 못하고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손목을 뿌리치려고 하는 순간 벌써 할머니가 몇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임청우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오며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얼굴을 풀고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어리니까 잘 몰라서 그랬겠지만, 결코 그런 게 아니란다. 다시는 여자를 버리겠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

그녀는 임청우의 혈도를 다시 풀어줄 기세였다.

그때 황의소녀가 소리쳤다.

할머니, 풀어주지 말아요. 도망가고 말거예요.”

걱정 말거라. 우리 부부의 손에서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단다.”

하지만 그는 우협의 제자란 말예요.”

!”

황의소녀의 외침에 할머니는 놀란 듯이 임청우를 다시 보았다.

임청우의 왼손에 들려있는 고색창연한 보검, 얼핏 보기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는 그 검을 보는 순간 할머니의 안색이 변했다.

정말 우협의 제자였구나. 우협께선 안녕하시냐? 만나거든 개방의 종가(宗家)부부가 안부하더라고 전해라.”

혈도를 풀어주면 절 버리고 도망 가버릴 거예요.”

황의소녀가 얼굴을 가리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애야, 네 사부께선 우리 개방의 은인이니 내가 너를 함부로 대해선 안되겠지만... 어쩔 수 없구나. 일단 혼례를 치르고 나면 풀어주고 사죄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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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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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하룻강아지의 용기

 

 

"흐흐흐 그렇다! 내가 바로 천면음마다.."

등천하는 두 눈을 광기로 번들거리며 말했다.

자신이 악명 높은 색마 천면음마임을 자인한 것이다.

... 그런...”

짐작은 했지만 자신을 납치해온 자가 천면음마라는 사실에 자운 비구니는 사색이 되었다.

호천무맹에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는 천면음마에게 사로잡혔으니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 짐작이 간 것이다.

본좌는 호천무맹에 속한 문파의 계집들이라면 노소를 불문하고 해치워온 건 네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등천하, 즉 천면음마는 자운 비구니의 젖가슴을 희롱하며 음험하게 웃었다.

실제로 그자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강간하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

네년에게도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줄 테니 기대해도 좋다.“

천면음마는 자운 비구니의 가슴을 터트릴 듯 움켜쥐며 낄낄거렸다.

"... 아미타불! 시주는 정녕 신불(神佛)의 심판이 두렵지 않나요?"

자운 비구니는 고통과 분노에 치를 떨며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흐흐흐... 본좌가 아니라 네년 자신의 처지나 걱정해라."

천면음마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운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승복의 저고리를 움켜쥐었다.

"... 안돼요 악!"

자운 비구니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천면음마가 그녀의 승복 저고리를 거침없이 찢어냈기 때문이다.

"흐흐흐... 기막힌 젖가슴이로군!"

저고리가 찢어지며 드러난 자운 비구니의 젖가슴을 본 천면음마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그럼 아랫도리도 구경해볼까?”

이어 그자는 자운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승복 치마로 손을 옮겼다.

"... 아미타불! 시주...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저는 부처님을 모시는 비구니랍니다."

천면음마의 두 손이 자신의 치마 고름을 푸는 것을 느낀 자운 비구니는 사색이 되어 애원했다.

어리석구나! 네년이 비구니라 날 더 미치게 한다는 걸 모르느냐?”

천면음마는 그녀의 애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치마를 벗겨 내렸다.

!”

자운 비구니는 아랫도리가 허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절망에 찬 비명을 터트렸다.

 

(죽일 놈!)

천면음마가 자운 비구니를 농락하는 것을 본 고검추는 치미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양모 당혜선이 사신각주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본 이래 그는 여자를 강제로 농락하는 자들에게 격렬한 살의를 품게 되었다.

헌데 바로 지척에서 보통 여자도 아니고 비구니가 유린당하고 있다.

당장 뛰쳐나가 천면음마를 쳐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고검추는 잘 알고 있었다.

고검추 자신은 겨우 한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하룻강아지인 것이다.

그에 비해 천면음마는 숱한 문파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여자들을 겁탈해온 희대의 색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고검추 자신은 천면음마의 상대가 못 된다.

무작정 뛰쳐나가 공격해봐야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천면음마가 자운 비구니를 겁탈하는 데 온 신경을 쏟을 때를...

 

"흐흐흐 비구니는 제법 오랜만이군."

천면음마는 두 눈이 벌개진 채 자운 비구니의 몸에 올라갔다.

한데 그자가 막 자운 비구니를 욕보이려는 순간이었다.

"죽일 놈!"

돌연 천면음마의 귓전으로 사나운 폭갈이 들려왔다.

콰창! 파앗!

동시에 토지묘의 신상이 부서지며 그 뒤에서 한 줄기 인영이 득달같이 뛰쳐나와 천면음마를 덮쳤다.

그 인영은 물론 고검추였다.

기회를 엿보던 그가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천면음마를 덮친 것이다.

고검추는 은발마희 옥여상에게서 구성의 태을강기를 전수받았으나 아직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련산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연마한 혈전삼식의 제일식 분뢰개벽으로 천면음마를 공격했다.

꽈르르릉!

후려치는 고검추의 장심에서 은은한 우뢰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한줄기 역도가 일어나 천면음마를 후려쳐갔다.

"!"

!

막 자운 비구니를 유린하려던 천면음마는 기겁하면서도 재빨리 옆으로 몸을 굴렸다.

고검추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신속한 반응이었다.

사실 단순히 경신술만이라면 천면음마는 사신각주나 옥면마성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콰직!

그 때문에 고검추가 날린 회심의 일격은 재빨리 옆으로 구른 천면음마의 몸 위를 지나쳐 토지며 입구쪽의 바닥을 박살냈다.

웬놈이냐?”

스팟!

고검추의 기습을 흘려보낸 천면음마는 바닥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가 내려섰다.

"!"

헌데 토지묘 입구쪽에 내려서던 천면음마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기습한 자가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크크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였군."

고검추를 일별한 천면음마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공격을 늦추면 안된다!)

!

일격이 실패했지만 고검추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천면음마에게 돌진해갔다.

반격의 기회를 주면 자신이 패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꽈르릉!

쇄도하며 후려치는 고검추의 장심에서 다시 우레성이 일어났다.

다시 한 번 분뢰개벽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천면음마에게 같은 수법이 두 번 씩이나 통할 리 없었다.

"크크크 귀여운 놈이로군!"

천면음마는 고검추가 덮쳐오는 것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

순간 그 자의 모습이 꺼지듯이 고검추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공격 대상을 놓친 고검추는 기겁했다.

!

직후 고검추의 등판으로 강렬한 충격이 가해졌다.

이미 뒤로 돌아간 천면음마가 고검추의 등에 강력한 일장을 가한 것이다.

! 콰쾅!

헌데 맞은 것은 한번인데 충격이 연달아 두 번 더 고검추의 몸을 흔들었다.

"!"

고검추는 척주가 끊어지는 듯한 충격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퍼엉!

그와 함께 고검추의 몸은 토지묘 밖으로 튕겨나갔다.

철퍽!

토지묘 밖으로 튕겨져 나간 고검추의 몸은 빗물이 고여 있는 바닥에 팽개쳐갔다.

부르르!

세차게 나뒹군 고검추는 한 차례 몸을 떨고는 축 늘어져 인사불성이 되었다.

"... 시주!"

자운 비구니의 입에서 비통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혼절했다가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그녀는 고검추가 자신을 구하려다가 천면음마의 반격을 받고 토지묘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걸을 보았던 것이다.

"흐흐흐! 도룡삼첩장(屠龍三捷掌)에 맞았으니 척추가 박살나 뒈졌겠지."

천면음마는 빗속에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는 고검추를 내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자가 고검추를 친 장법은 일격으로 세 번의 충격을 반복해서 가하는 도룡곡 비전의 절기다.

내공을 순차적으로 토해내서 표적을 때리고 돌아오는 힘을 다시 돌려보내기를 반복하는 장법인 것이다.

그 때문에 가격당한 상대는 연이어 삼장을 얻어맞는 셈이 된다.

능력도 안되면서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낸 대가이니 날 원망하지 마라.”

천면음마는 방금 전의 일격으로 고검추를 죽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다시 자운 비구니를 향해 돌아섰다.

... 죽여라!”

자운 비구니는 자신의 알몸이 완전히 드러나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며 악을 섰다.

이년아. 죽여줄 테니 너무 재촉하지는 마라.”

천면음마는 음험하게 웃으며 자운 비구니에게 다가왔다.

곧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천벌을 받을 것이다.”

자운 비구니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해버렸다.

정말... 정말 아깝구나. 이렇게 기막힌 계집을 한 번 즐기고 버려야 하다니...”

천면음마는 혼절한 자운 비구니를 본격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바로 그때였다.

"... ... !”

천면음마의 등 뒤에서 천동치는 듯한 여인의 노갈이 들려왔다.

쩌억!

그와 함께 무시무시한 검기가 천면음마의 등으로 날아들었다.

"!"

!

자운 비구니의 몸 위에 엎드려있던 천면음마는 대경실색하면서도 벼락같이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 자의 이같은 반응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쩌억!

바닥을 구르는 천면음마의 몸 위로 새파란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

!

간발의 차이로 일격을 피한 천면음마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상대가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 토지묘를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

헌데 놀랍게도 스치고 지나갔던 검기가 낫같이 홱 휘어지며 천면음마에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 참마회선검강(斬魔廻旋劒罡)!"

천면음마의 입에서 경악에 찬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악!"

퍼억! 후두둑!

직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선혈이 확 솟구쳤다.

천면음마는 궤적을 바꾼 검기를 피하지 못해서 왼쪽 허벅지에 깊은 자상(刺傷)을 입은 것이다.

콰당탕!

하마터면 허벅지의 뼈까지 베일 뻔한 깊은 상처를 입은 천면음마는 균형을 잃고 나뒹굴었다.

화라락!

동시에 토지묘 안으로 날렵한 인영이 날아들었다.

그 인영은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인데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이 흑의여인의 미모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대단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명공이 빚은 듯 단아하여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만 같다.

말 그대로 경국지색이라 할 만한 미모를 지녔지만 흑의여인에게서 풍겨지는 분위기는 도도하고 오연하기 이를 데 없다.

조각같은 여인의 얼굴에는 서릿발같은 위엄이 깔려있어서 간담이 작은 사내라면 감히 마주 바라볼 엄두도 못 낼 것이다.

헌데 아름다운 외모와 고고한 분위기에 비해 여인의 차림새는 질박할 정도로 평범하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질끈 묵었으며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다.

걸치고 있는 검은 색 옷은 상당히 오래 입었는지 빛이 바래있다.

여인은 어떤 치장도 하지 않고 있다.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오른손에 비껴들고 있는 석 자 네 치의 투박해 보이는 장검뿐이다.

마치 전쟁의 여신이 인간 세상에 하강한 듯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이다.

헌데 세차게 퍼붓는 폭우 속을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몸은 전혀 젖지 않은 상태였다.

여인의 몸에서 무형의 강기가 흘러나와 빗물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인의 내공은 막강한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인 흑의여인이 나타나는 순간 토지묘가 갑자기 비좁아진 느낌이 들었다.

"... 철봉황(鐵鳳凰)!"

흑의여인을 본 천면음마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헌데 철봉황이라면 고검추가 호천무맹을 찾아가서 만나려던 여인이 아닌가?

흑의여인, 즉 철봉황은 자운 비구니를 구하기 위해 천면음마를 추적해 왔을 것이다.

빠직!

토지묘 안에 내려서던 철봉황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광이 폭사되었다.

자운 비구니가 발가벗은 채 혼절해 있는 발견한 때문이다.

"오늘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겠다."

철봉황은 천면음마를 돌아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천면음마는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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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최초의 살인

 

 

(허억!)

막 철산산의 애처로운 육체를 유린하려던 철목풍은 질겁하며 일어났다.

... 네놈은...?”

이어 황급히 바지를 추스리며 돌아보던 철목풍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언제였을까?

한 명의 소년이 대과벽의 깎아지른 절벽 끝을 밟고 표연히 서있었다.

마치 유령같이 나타난 그 소년은 영준하면서도 호방한 인상을 지녔다.

특이하게도 이 소년의 머리카락은 아주 짧다. 빡빡 밀었다가 다시 나는 듯한 소년의 짧은 머리카락은 은은히 붉은 빛을 띄고 있어 이채롭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타는 듯 붉은 색의 바람막이, 즉 피풍의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파라라락!

그 피풍의가 밤바람에 세차게 펄럭인다.

그러자 드러나는 소년의 양쪽 허리춤에는 각기 칼과 검 한 자루씩이 꽂혀있다. 폭이 얇은 칼과 반대로 폭이 넓은 검이 그것이다.

칼의 이름은 파천마도(破天魔刀)고 검의 이름은 낭아신검(狼牙神劍)이다.

이검한-!

그렇다. 소년은 바로 이검한이었다.

 

이검한은 대과벽 중간쯤에 숨겨져 있는 현음동천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그를 이곳까지 태워다준 철익신응이 어디론가 가버렸기 때문이다.

철익신응이 태워다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걸어서 곤륜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과벽에서 곤륜산 남쪽에 자리한 장춘곡까지는 무려 삼천여 리나 된다.

가려면 못갈 것도 없지만 열사의 사막을 가로질러 삼천여 리나 걸어갈 생각을 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검한은 생각 끝에 현음동천에 머물면서 서역사천왕의 무공을 연마하며 철익신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지난 오늘 밤 현음동천 위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 올라와 본 것이다.

 

(저 애송이가 언제 나타났지?)

이검한을 발견한 철목풍은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철목풍 역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검한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일 이검한이 암습을 할 작정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철목풍은 절로 가슴이 오싹해졌다.

그러면서도 철목풍은 아직 치기가 가시지 않은 이검한의 모습에 방심하게 되었다.

흐흐! 운이 나쁜 놈이로군! 하필이면 보면 안되는 장면을 보다니...!”

철목풍은 이검한에게 다가가며 음산하게 웃었다.

죽어랏!”

그리고는 일장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오른손으로 벼락같이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빠카카캉!

철목풍의 장심에서 주홍빛 노을이 확 일어나 이검한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잔양강살(殘陽罡煞)!”

마침 정신을 되찾은 포대붕이 그것을 보고 기겁하며 부르짖었다.

철목풍이 시전한 일장은 잔양강살이라 불리는 양강한 마공인데 스치기만 해도 심맥이 타들어가 죽고 만다.

콰아아앙!

철목풍이 날린 잔양강살이 피풍의를 두르고 있는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죽였다!)

철목풍은 자신의 일장이 이검한의 가슴을 강타하자 득의의 웃음을 머금었다.

... 저럴 수가...!”

하지만 그 자의 득의의 웃음은 떠오를 때보다 더 빨리 사라져야만 했다. 잔양강살에 격중된 이검한의 몸이 그저 움찔했을 뿐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목풍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검한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가 바로 화룡잠(火龍蠶)이란 천고의 보물로 짠 희세의 호신지보인 적룡풍(赤龍風)임을...

마화삼보의 하나인 적룡풍은 용암의 열기에도 견디어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화룡단정을 복용한 덕분에 지금 이검한의 내공은 철목풍보다 두 배 이상 심후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철목풍이 구사한 어줍잖은 잔양강살 따위는 이검한에게 전혀 타격을 입힐 수 없다.

... 죽여랏!”

철목풍은 부하들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은 뒤로 물러섰다. 이검한에게서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그자는 부하들을 방패삼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철목풍이 대동한 자들은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이다. 그자들이라면 최소한 몇 십 초는 이검한을 막아줄 것이다.

철목풍은 부하들이 이검한을 상대하는 동안 그의 무공을 저울질 해보고 자신의 능력으로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 판단되면 달아날 작정을 했다.

하지만 그같은 생각은 철목풍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와아!”

죽여라!”

십여 명의 장한들이 기세 좋게 함성을 지르며 이검한을 덮쳐간 것과,

퍼퍼퍽!

케에엑!” “크에엑!”

그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퉁겨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사방으로 퉁겨져 나뒹군 장한들의 몸뚱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으깨져있었다.

죽은 자들은 물론이고 철목풍과 포대붕도 이검한이 어떤 수법을 썼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부하들이 일거에 몰살당하자 철목풍은 경악과 불신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 달아나야 한다!)

철목풍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마치 발가벗은 채 사나운 맹수 앞에 선 기분이 이러할 것이다.

헌데 그자가 달아나야한다고 느낀 바로 그때였다.

스읏!

이검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철목풍과 포대붕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크에에엑!”

우두두둑!

그 직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엇인가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 두고 보자!”

피이이잉!

이어 공포에 질린 외침과 함께 철목풍의 몸은 질풍같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철목풍은 유령같이 다가선 이검한에게 속수무책으로 일장을 얻어맞아 늑골이 부러진 채 달아난 것이다.

이검한은 그자를 추격하여 격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이검한은 난생 처음 살인을 한 탓에 가슴이 덜컹해진 상태였다.

철목풍의 수하들이 달려들자 이검한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헌데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주먹을 흔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자들은 단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해버렸다.

이검한이 보기에 그자들은 너무 약했다.

게다가 마치 죽기를 원하는 것처럼 자신의 간단한 주먹질도 피하지를 않았다.

그자들이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하지 못한 것임을 이검한이 안 것은 우두머리인 철목풍을 상대해본 후였다.

철목풍조차 이검한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간단히 얻어맞아 늑골이 부러진 것이다.

(내가 살인을 하다니...!)

이검한은 주위에 널부러진 시신들을 둘러보며 치를 떨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이검한의 시야로 발가벗겨진 채 누워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철목풍에게 겁탈 당할 뻔한 그녀의 민망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이런 몹쓸 짓을 하다니...!”

이검한은 새삼 철목풍에 대해서 살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본의 아니게 철산산의 알몸을 본 때문이다.

(누란왕후나 현음마모님과는 또 다르구나!)

중심부에 소담스러운 황금색 춘초(春草)가 덮여있는 철산산의 아랫도리를 훔쳐보며 이검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여인들의 몸은 얼굴만큼이나 다양하여 똑같을 수 없다.

하물며 이검한이 본 누란왕후 흑요설이나 현음마모의 알몸은 난숙한 여인의 그것이었다.

반면 철산산은 아직 덜 성숙한 어린 소녀다.

황금색 솜털로 덮여있는 철산산의 중심부를 본 이검한은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물론 이검한이 여자의 알몸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이미 여자의 비밀을 속속들이 보았을 뿐 아니라 현음마모의 몸을 오랫동안 품어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녀가 알몸으로 누워있는 모습은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게 만든다.

(다행히 수혈이 짚혀 있어서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검한은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면서 조심스럽게 철산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알몸에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자신이 능욕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을 철산산이 모르게 해주려면 가능한 원래와 비슷하게 입혀주어야만 한다.

철목풍을 한주먹에 날려 보낸 이검한이건만 가녀린 소녀의 몸에 옷을 입혀주면서 식은땀을 비오듯 쏟아내야 했다.

포대붕은 이검한이 철산산의 알몸에 손을 대자 아연긴장했었다.

하지만 이검한이 자신의 어린 여주인의 알몸에 옷을 입혀주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포대붕이었다.

 

잠시 후, 대과벽 위에 하나의 작은 무덤이 생겨났다.

물론 포대붕의 아내인 교숙하의 무덤이었다. 철목풍에게 납치당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한 후 끝내 혀를 물어 자결한 비운의 여인인...

포대붕은 사랑하는 아내의 시신을 묻으며 닭 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부디 못난 속하를 벌하여 주십시오. 공주님!”

아내의 시신을 안장한 포대붕은 철산산 앞에 오체복지하며 회한과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내게 미안해 할 것 없어!”

수혈이 풀려 정신을 차린 철산산은 벽안을 반짝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니를 구하려고 한 짓이잖아? 포역사가 그만큼 부인을 사랑한 증거로 알고 나를 납치한 일은 불문에 부치겠어!”

철산산은 아버지뻘인 포대붕을 위로하며 의젓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힐끗 옆에 서 있는 이검한을 훔쳐보았다.

“...!”

이검한은 붉은 피풍으로 몸을 감싼 채 대과벽 끝에 서서 멀리 남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파라라락!

붉은 피풍을 밤바람에 펄럭이며 서 있는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늠름해보였다.

철산산은 그런 이검한의 모습을 은밀하게 훔쳐보며 뺨을 살짝 붉혔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저 무섭고 교활한 철목풍을 쫓아버렸다니...!)

그녀의 숨결이 자신도 모르게 가빠졌다.

몽고족의 거친 사내들만 보아온 그녀에게 영준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인상을 지닌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철산산은 이검한의 주위를 끌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하여간 오늘밤 일은 마음에 두지 말아. 감사하려면 이공자님께나 하면 돼!”

그녀의 말에 이검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주종을 돌아보았다.

감사는 무슨...!”

그러자 포대붕이 이검한을 향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공자님!”

고개를 숙인 포대붕은 굳은 결의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님은 소인과 달단왕부(韃靼王府)의 큰 은인이십니다. 앞으로 소인 포대붕, 분골쇄신으로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이검한은 포대붕의 단호한 태도에 내심 쓴 웃음을 지었다.

(부담스럽군!)

하지만 거절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포대붕의 태도로 보아 하늘이 무너져도 결심이 변할 것같지가 않다.

이검한은 포대붕과 철산산의 이목을 환기시키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달단여왕께서도 지척에 이르셨겠군!”

그의 말을 들은 포대붕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큰일 났습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포대붕의 모습에 철산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포역사?”

포대붕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부비며 말했다.

여왕님께서는 공주님을 구하시려고 호위도 대동하지 못하신 채 속하를 추적해 오시는 중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위는 이미 철목풍의 수하들에게 장악당한 상태니...!”

포대붕의 말에 철산산의 안색도 홱 변했다.

정말 큰일이야! 철목풍이 엄마에게 어떤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듣고 있던 이검한이 포대붕에게 물었다.

여왕께서 오시는 방향은 어디요?”

저쪽입니다!”

포대붕은 서북쪽을 가리켰다.

내가 먼저 그쪽으로 가보겠으니 포역사는 공주님을 모시고 따라오시오!”

이검한은 침중한 표정으로 포대붕에게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포대붕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파앗!

이검한은 지면을 박 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느낀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서북쪽의 지평선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이검한의 그 신쾌한 경신술에 포대붕과 철산산은 절로 입을 벌렸다.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포대붕은 이검한이 사라지는 곳을 보며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정말 멋있는 분이야!)

근심에 젖은 포대붕과는 달리 철산산의 벽안은 흥분과 설레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좋아! 결정했어.)

천산산은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어 미소를 지었다.

(산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람의 신부가 될 거야!)

소녀의 은밀한 설레임 속에 서역의 밤은 깊을 대로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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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금릉 성내.

웅장한 장원. 화려한 대문으로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드나들고. 있다.

<-황금전장(黃金錢莊)> 웅장한 정문에 <黃金錢莊>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걸 배경으로 나레이션

어느 화려한 건물. 월동문이 있는 높은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건물 입구는 잘 차려입은 무사들이 지키고 있고. 그러다가

깜짝 놀라는 무사들

화가 나서 큰 걸음으로 뛰듯이 월동문으로 들어오는 절세미녀. 늘씬한 체격에 도도한 인상을 지녔다. 황금전장 장주 냉혈전호 벽초천의 큰딸인 벽소소. 이때 나이는 청풍과 동갑인 18세다.

[아가씨!] [큰 아가씨를 뵙습니다.] 급히 인사하는 무사들

벽소소;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켜!] 눈 치뜨며 다가오고. 급히 물러서는 무사들.

벽소소; [아버지!] ! 문이 부서져라 열어젖히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벽소소. 배경으로 나레이션. <-황금전장 장주의 큰 딸 벽소소(碧素素)>

벽소소; [날 무림맹 소맹주에게 시집보내시려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에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모습으로 들어서고

건물 안에서 대화하다가 돌아보는 세 사람. 상좌의 화려한 의자에 앉은 인물은 냉혈전호 벽초천이다. 나이는 50세 정도. 다른 작품의 냉혈전호 벽초천 캐릭터.

벽초천 앞쪽에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인물이 마주 앉아 있다가 돌아본다. 좌측 인물은 교활하고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 황금전장 총관인 이세창. <신마유희>등 다른 작품에 나온 이세창 캐릭터. 맞은편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20살 가량의 청년. 벽초천의 아들인 벽세황. 별호는 황금공자

벽세황; [어서 와라 소소야. 오랜만이다.] 어색하게 웃고. 이세창은 일어나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황금전장 소장주 황금공자(黃金公子) 벽세황(碧世皇)>

벽소소; [오빠한테는 볼일 없어!] 탁자 앞쪽에 버티고 서며 두 손을 허리에 대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양

벽소소; [말씀해보세요. 정말 절 무림맹의 소맹주에게 시집보내실 건가요?]

벽초천; [좋은 일인데 왜 화를 내는 것이냐?] 찡그리며 노려보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황금전장 장주 냉혈전호(冷血錢虎) 벽초천(碧超天)>

벽소소; [좋은 일이라구요?] 이를 바득 갈고

벽소소; [제 일생이 걸린 일인데 어떻게 제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시집을 보내시려는 건가요?] [제게 이러시면 안되죠!]

벽초천; [!] 불쾌한 듯 찡그리고. 그러자

이세창; [... 진정하십시오 큰 아가씨!] 벽초천의 눈치를 보며 억지 웃음. 벽세황 앞쪽에서 일어선 채. 배경으로 나레이션. <-황금전장 총관 이세창(李世昌)>

벽세소소; [진정?] 이세창을 노려보고

이세창; [알고 계시겠지만 무림맹은 황실조차 눈치를 보는 당금 무림의 지배자입니다.] 억지웃음 지으며 굽신

이세창; [그리고 무림맹의 소맹주인 위진천(威振天) 공자는 문무를 겸비했을 뿐 아니라 미남으로 소문난 분이지요.]

이세창; [무림의 모든 여협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위진천 공자께서 직접 큰 아가씨께 청혼을 한 것입니다.]

벽소소; [그래서 영광으로 알라는 거야 뭐야?] ! 발로 바닥을 구르고

이세창; [... 그게 아니라...] 당황

벽초천은 불쾌한 듯 찡그리고

벽소소; [내가 모를 줄 알아?] [무림맹이 청혼을 한 건 우리 황금전장의 재력이 탐나서라는 걸?] 이세창을 노려보고

벽소소; [그리고 아버지는 무림맹의 세력을 등에 없고 사업을 번성케 할 목적으로 날 무림맹에 시집보내시려는 걸 테구요!] 벽초천을 노려보고

찡그리며 대답하지 않는 벽초천

벽세황; (소소 저것이 아버지의 역린을 건드리기 전에 제어를 해야겠군.) + [그만해라 소소야!]

벽소소; [그마하라니? 뭘 그만해?]

벽소소; [내 일생이 걸린 문제인데 내가 왜 입 다물고 있어야하는데?]

벽세황; [이게 다 널 위해서 내린 결정이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감수해야한다.]

벽소소; [그렇게는 못해!] 바락

벽세황; [소소야!] 굳은 표정

벽소소; [더 이상 날 회유하려 하지마.] [오빠가 이번 혼사를 주도했다는 걸 내가 모를 것같아?]

찡그리며 입 다무는 벽세황

벽소소; [날 위진천인가 뭔가 하는 인간에게 시집보내면 오빠는 좋겠지.] [무림맹주의 제자인 오빠의 무림맹 내에서의 지위가 단번에 부동의 것이 될 테니까!] 냉소하고

벽세황; [내 이익을 위해 누이인 널 팔아넘겼다는 거냐?] 얼굴 굳어지고

벽소소; [양심이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지!] 비웃고

벽세황;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 눈 부릅뜰 때

벽초천; [그만!] ! 손바닥으로 탁자를 친다. 그러자

! 탁자가 그대로 박살이 난다. 움찔하며 몸을 뒤로 젖히는 벽세황과 물러서는 이세창

벽소소; [... 아버지!] 겁에 질려 주춤하고

벽초천; [소소 네 녀석은 삼종지도(三從之道)가 뭔지도 모르느냐?] 노려보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지고

벽소소; [... 그게...] 달달 떨고

벽세황; (역시 아버지다. 화를 내시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위압감이 느껴진다.) 침 꼴깍

벽초천; [출가 전에는 아비를 따르고 출가하면 남편에 순종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의지하는 것이 부도(婦道)!]

벽초천; [그리고 미혼인 네 혼처를 정한 것은 아비이니 거역은 용납지 않겠다!] 쿠오오! 온몸에서 뿜어지는 기운. 그러자

벽소소; [!!] 홱 돌아서고

벽소소; [좋아요!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타탁! 밖으로 뛰쳐나가며 악을 쓰고

벽소소; [내가 불행해지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마시라구요!] 악을 쓰며 건물 밖으로 달려나간다.

벽초천; [저 년이...] 분노하며 노려보고.

벽세황;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벽세황;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소소는 자기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혼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삐진 것뿐입니다.]

벽세황; [혼사가 착착 진행되고 또 위사제(威師弟)를 직접 만나 보면 마음이 바뀔 것입니다.]

벽세황; [위사제... 소맹주는 사내인 제가 보기에도 매력적인 기남자(奇男子)입니다. 소소도 마음을 빼앗길 게 분명합니다.]

벽초천; [그랬으면 좋겠지만...] 난감

벽세황; [제가 모르는 문제가 있습니까?] 흠칫! 하고

벽초천; [총관! 자네가 말해주게. 내 입에 올리기는 민망하니...] 이세창에게 말하고

이세창; [예 장주님!] 고개 숙이고

이세창; <얼마 전 큰 아가씨가 갑자기 열병을 알아서 본장 전속의 의원이 진맥을 했었는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전음으로 말하고. 건물 밖의 무사들을 곁눈질로 보며

벽세황; (갑자기 전음으로 바꾸다니... 남이 들으면 안되는 내용이란 건가?) 흠칫! 할 때

이세창; <큰 아가씨 몸에서 수궁사(守宮沙)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고개를 벽세황 쪽으로 내밀며 전음으로 속삭이고. 순간

벽세황; <... 수궁사가 사라져?>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찍어두는 수궁사는 오직 처녀를 잃었을 때만 사라지는데...> 경악

벽세황; [아버지! 설마!] 벽초천을 돌아보고

벽초천; [네가 생각하는 대로다.] 침통하게 끄덕이고

벽초천; <소소 년이 어떤 놈과 통정을 해온 것 같다. 열병을 앓은 것도 그놈에게서 얻은 화류병(花柳病;성병) 때문이었고...> 전음으로 말하며 침통한 표정

벽세황; (맙소사!) 경악

 

#15>

역시 금릉. 번화한 거리.

사람들 사이를 걸어오는 청풍. 침통한 표정

<자네 혹시 요리를 배워볼 생각은 없는가?> 주대육이 하던 말을 떠올리는 청풍

 

주대육; [칼을 쓴다는 점에서 도축과 요리는 일맥상통하는 분야야.] [자네 정도의 감각이라면 어렵지 않게 요리를 배울 수 있을 걸세.]

주육대;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황금전장으로 날 찾아오게나.] 돌아서며 말하고

회상 끝

 

청풍; (지금으로서는 황금전장의 총주방장 주선생이 유일한 희망이다.)

청풍; (황금전장의 종이 되어서라도 돈을 융통해야한다. 진진이를 지키려면...) 비장하고. 그때

[꺄악!] [!] 두두두! 사람들 비명과 말 달리는 소리가 앞쪽에서 요란하게 들리고

흠칫! 하며 고개 드는 청풍. 길 저편에서 말 한필이 맹렬히 달려온다. 체구가 거대한 백마인데 등에는 늘씬한 여자가 타고 있다. 여자는 물론 벽소소다.

벽소소; [비켜! 말굽에 치어 죽고 싶지 않으면...] 착착! 악을 쓰며 채찍으로 연신 말의 엉덩이를 친다. 그 때문에 말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고. 사람들이 엎어지고 자빠지며 길가로 피하는 중이다.

 

#16>

길가 주점. 이층 창가에 앉아서 술을 마시다가 흠칫! 하며 밖을 돌아보는 사내. 무림맹 사신장중 풍신장이다. 탁자에는 간단한 안주 외에도 만두가 한 그릇 놓여있다.

번화가를 맹렬히 달려오는 벽소소의 말.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지고 있고. 그러자

풍신장; [역시 세상을 넓고 또라이들도 많아. 사람 붐비는 백주대로에 말을 몰고 달리는 년도 있고...] 웃고

 

#17>

두두두! 갈라지는 인파 사이로 맹렬히 달려오는 벽소소의 백마

[... 저 미친 년...] [백주대로에서 말을 달리다니...] [채찍질까지 하고 있어!] [꺄악!] [히익!] 사람들 비명 지르며 좌우로 달아나고.

청풍; (저 여자,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찡그리며 길가로 피하고. 그 사이에 말이 거의 청풍의 근처로 다가왔다. 헌데

5-6세쯤 된 어린 딸과 함께 다급히 길가로 피하려는 20대 중반쯤의 여자. 청풍에게서 멀지 않은 곳이다.

! 그 계집아이의 꽃신 신은 발이 돌부리에 걸리고

[엄마!] 철퍼덕! 앞으로 넘어지며 비명 지르는 계집아이. 그 바람에 엄마의 손을 놓치고. + 여자; [!] 돌아보며 비명. 여자는 이미 길가로 피한 상태지만 아이는 길 중간에 넘어졌고. 말은 아이에게 들이닥치고 있다.

[안돼!] [저런...] [아이가 밟히겠어!] 사람들 비명 지르지만 누구 하나 아이를 구하러 나서지 못하고

벽소소; [!] 말을 달리던 벽소소도 눈 부릅뜨지만 방법이 없다. 말 바로 앞에 아이가 쓰러져 있어서.

 

풍신장; [!] 혀를 차며 일어나고. 헌데 그 직후

 

! 허리춤에 끼운 단도를 칼집 채 뽑으며 몸을 날리는 청풍.

[! 저런...!] [저 청년, 죽으려고 작정했나?] [함께 밟히겠다.] 사람들 그걸 보며 비명

 

[!] 주점 이층 창가에서 일어나던 풍신장의 눈도 번뜩

 

휘익! 다이빙으로 아이를 덮쳐가며 눈을 말에게로 향하는 청풍

! 빛나는 청풍의 눈

스륵! ! 말의 발굽이 움직이는 게 슬로모션으로 보인다. 어디를 밟을지 청풍이 예측하는 모습이고.

청풍; (여기다!) ! 칼을 던진다. ! 회전하며 날아가는 칼

! 칼이 말의 발굽 위 관절에 맞고 튕겨지고

[!] 고통을 느끼고 눈 치뜨는 말

히히힝!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려는 말. 비수는 바닥에 튕겨 떨어지고. + 벽소소; [!] 기겁하며 말에서 뛰어오르려 하고

[!] [!] 길가로 비켜선 사람들 뒤로 죽립을 쓰고 망토를 두른 차림의 사내들 네 명이 움직이다가 흠칫! 하며 멈춰서고. 눌러쓴 죽립 아래 황금 가면을 쓰고 있는 게 보인다. 황금 가면에는 눈 부분에만 구멍이 나있고 그곳으로 드러나 보이는 눈빛이 날카로운 자들. 그자들은 벽소소가 말 타고 달려온 방향에서 함께 달려왔다. 황금전장의 비밀고수들인 황금수라들이다. <신마유희>에 나왔던 황금전장의 경호무사 황금수라들과 동일 캐릭터에 죽립만 씌운 모습이다. 원래는 죽립을 쓰지 않지만 지금은 벽소소를 비밀경호하기 위해 죽립을 쓰고 있다. 망토 속에 검을 차고 있다. 죽립을 쓰고 있을 때는 죽립인으로 표기

! 아이를 끌어안고 옆으로 뒹구는 청풍.

 

풍신장; [허어!] 밖으로 날아가려다가 감탄하며 멈춰서고

 

콰당탕! 히히힝! 말도 비명을 지르며 청풍의 반대편으로 나뒹굴고. 그 주변의 사람들 비명 지르며 도망치고. 벽소소는 말 등에서 튀어 오르고. 대단하진 않지만 벽소소도 무공을 익히고 있다.

[!] [!] 안도하며 멈춰서는 네명의 죽립인들.

청풍; (성공했다.) 휘릭! 아이를 안은 채 한쪽 무릎 꿇는 자세로 일어나고.

벽소소; [지랄...] 휘릭! 놀라고 화난 표정으로 내려서는 벽소소

청풍; (어떻게 가능한지 몰라도 난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동물들의 몸의 구조를 즉시 알아볼 수 있다.) 우는 아이를 다독여 달래고

청풍; (더 나아가 그런 몸 구조를 지닌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도 예측하는 게 가능하다.) 울면서 달려오는 아이 엄마를 보며 일어나려 하고

청풍; (덕분에 말의 발굽 위쪽 관절을 건드려 말의 균형을 잃게 만들 수 있었다.) 일어나는데. 직후

벽소소; [개 잡종아!] 짜악! 청풍의 등쪽에서 내리쳐지는 말 채찍. 물론 말 채찍을 내리친 것은 벽소소다. 하지만

! 몸을 조금 돌리면서 벽소소의 채찍을 피하는 청풍. 앞쪽에서는 아이 엄마가 달려오다가 깜짝 놀라 물러선다

 

풍신장; (말 채찍이 내리쳐지기도 전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 번득이며 내려다보고

풍신장; (설마 저놈 상대의 움직임이 미리 보인다는 건가?) 자리에 앉고

 

벽소소; [냄새나는 천한 버러지 주제에...!] 다시 말 채찍을 쳐들고

벽소소; [감히 내 애마를 다치게 해? 죽여 버리겠다!] 채찍을 휘두르려 하고. 그 뒤에서 말이 버둥대며 일어나고 있고

청풍; [당신은 사람보다 말의 안위가 더 중요한 거요?] 아이를 아이 엄마에게 건네주며 벽소소를 노려보고

벽소소; [당연한 걸 묻는 거냐?] 어이없다는 표정

벽소소; [내 애마는 유서 깊은 혈통의 말이다.] [몸값이 최소한 만 냥은 넘는데 그깟 가난뱅이네 딸년하고 비교가 되겠어?] 일어나 쩔뚝거리는 말을 돌아보며

청풍; [뭐요?] 어이없고

[허어 저런...] [사람 목숨 값이 말 새끼보다 못하다고?] [너무 뻔뻔해서 욕도 안나오는군.] 사람들 놀라고 어이없고

난감한 표정의 죽립인들

 

풍신장;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야.] [저 년, 진짜 미친년이었구만.] 웃으며 접시에 놓인 만두들 중 하나를 집어들고

 

벽소소; [하여간 너 오늘 잘못 걸렸다.] [마침 내 기분이 개 같던 참이니 네놈을 피곤죽으로 만들어야겠다.] 말 채찍으로 청풍을 겨누며 다가오는데

! 위쪽에서 날아온 만두가 벽소소의 머리를 때린다.

벽소소; [!] 만두에 머리를 맞고 비명 지르며 비틀하고.

[!] [!] 죽립인들 가면 속에서 눈 부릅뜨고.

 

주점 이층에서 숨듯이 서서 만두를 던진 자세로 웃는 풍신장

 

벽소소; [어떤 개잡종이야?] 머리에 묻은 만두 흔적을 터는 자세로 악을 쓰며 주위를 돌아보는데

! ! 사방에서 만두와 빵, 야채등이 날아온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던지고 있다.

벽소소; [이것들이...] ! 휘익! 급히 피하고 말 채찍으로 쳐내며 이를 갈고

[사람보다 말이 더 중요하다는 분께 드리는 선물이오.] [어이쿠! 말에게 던진다는 게 손이 미끄러졌네.] [많이 드시오 아가씨!] [말 새끼야 너도 많이 먹어라!] 사람들이 신나서 만두와 빵과 야채를 던진다

벽소소; [!] 피하고 막다가 다 피하지 못해서 만두나 야채에 맞고 비명 지르는 벽소소.

죽립인1; (죽일 놈들!) ! 죽립인 중 한명이 망토 속에 차고 있던 칼을 뽑으려 하고. 이를 갈며. 하지만

다른 죽립인이 그자의 손목을 잡으며 고개를 도리질하고.

죽립인1; <막지 말게! 아가씨가 다칠 수도 있어!> 칼을 뽑으려는 첫 번째 죽립인. 전음으로 말하지만

죽립인2; <그리 위험한 상황이 아니네. 그리고 우리 목적이 뭔지 잊으면 안되네.> 두 번째 죽립인이 역시 전음으로 말하며 고개를 젓고.

죽립인3; <아가씨를 미행해서 누굴 만나는지 확인하는 게 최우선 임무지!> + 죽립인4; <좀 지켜보자고.> 다른 두 명의 죽립인도 첫 번째 죽립인을 말리고. 그때

벽소소; [이 버러지들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 이를 갈며 날아올라서

휘릭! 말의 안장에 앉고. 이어

벽소소; [두고 보자!] 말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치며 악을 쓰고

히히힝! 두두두! 달려가는 말

[잘 가쇼!] [꼴좋구나!] [말하고 재미 많이 봐라 이년아!] 사람들 멀어지는 벽소소에게 외치며 비웃고.

죽립인들은 환호하는 사람들 뒤에서 움직이며 다시 벽소소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 쪽으로 달려가고

청풍; (세상인심이 아주 각박하진 않군.) 바닥에 떨어져있는 자기 칼로 다가가며 웃고

청풍; (분노해야할 상황에서 함께 분노해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걸 보면...) 바닥에서 자기 칼을 집어들고.

[고맙습니다 공자님! 고맙습니다.] 아기 엄마가 아기를 안은 채로 연신 꾸벅거리고

청풍; [애가 놀랐을 테니 잘 다독이십쇼.] 칼을 허리춤에 끼우며 웃고

청풍; [잘 가라 아가야!] 엄마 품에 안긴 계집아이에게 손을 흔들고

아이도 손을 흔들고

멀어지는 청풍.

 

#18>

풍신장; [총관을 경호하러 왔다가 좋은 구경을 했군.] 다시 자리에 앉아서 밖을 보며 웃고

풍신장; [그놈,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데도 움직임이 기막혔었다.] [임무 수행중만 아니었으면 낚아채서 제자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청풍이 아이를 구하던 장면 떠올리고

풍신장; [저런 수준의 재능은 혈통이 뒷받침 되어야 발현되는 것일 텐데...] + [!] 술 마시다가 눈 부릅

청풍의 얼굴 크로즈 업 되어 뇌리에 떠오르고

풍신장; [맙소사!] 벌떡! 일어나고

풍신장; [그놈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 했더니 용무린과 아연아가씨의 얼굴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스팟! 밖으로 날아가고

휘익! 청풍이 날아간 쪽으로 바람처럼 날아가는 풍신장. 너무 빨리 날아가서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날아가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빠르게 훑어보는 풍신장

하지만 어디에도 청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풍신장;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

풍신장; (나이도 그렇고... 그놈이 용무린의 아들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날아가며 굳어지는 얼굴

풍신장; (운신장을 만나 도움을 청해야겠다. 정말 금릉에 용무린의 아들이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르니...) 날아간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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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쫓기는 소녀 (2)

 

 

아람드리 나무가 즐비한 숲속을 황의소녀는 순식간에 십여 리나 달렸다.

숲속으로도 오솔길은 나있고, 두 갈래의 오솔길에 마주치게 되자 그녀는 멈추어 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황의소녀는 혈도를 짚은 채 겨드랑이에 끼고 왔던 임청우를 오른쪽 길 옆 숲으로 던지고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임청우는 장작처럼 뻣뻣하게 던져져 수풀 속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지만 이내 나무토막같이 뻣뻣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곁에 내려앉기도 했다.

잠시 후, 길게 바람을 끄는 소리가 들리며 기걸승 세 사람이 날아왔다.

그들 역시 갈림길에서 멈추었다.

거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벌써 며칠 째 종남산에서 술래잡이라니...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한 데 막상 잡을 순 없고...”

노파가 왼쪽 길을 가리켰다.

이쪽이다.”

거지가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뜻이냐?”

그쪽으로 가기는 아마 갔을 거요.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우린 역시 소저를 잡지 못할 거요. 아마도 소저에겐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소.”

노파가 코웃음을 쳤다.

소저는 어려서부터 장원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어. 깊고 깊은 심처에서 그녀가 어떤 재주를 배울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아무 재주도 없고 단지 우리에게 몇 가지 무공을 배운 것에 불과한 어린아이를 아직 우리가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소?”

거지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말했다.

노파가 잠시 침묵했다.

그렇군. 그건 이상해. 더구나 소저의 몸에선 끊임없이 만리향 냄새가 풍기는데 말이야.”

문득 중이 입을 열었다.

소저는 주인을 닮았소. 도무지 그 생각을 예측할 수 없질 않소.”

거지와 노파가 흠칫했다.

중이 계속 말했다.

우린 주인을 대하듯이 소저를 대해야 할 것 같소. 주인의 생각을 알려하지 않고 우리가 받은 명령만 충실히 수행하듯 소저의 생각을 예측할 필요 없이 무작정 쫓기만 하면 언젠가는 소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오. 발견하기만 하면...”

발견하기만 하면 절대로 자기들의 손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소리다.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쫓는다. 우린 아무리 생각한다 해도 주인이나 소저를 따라가지 못한다.”

노파와 중은 만리향의 냄새가 흐르고 있는 왼쪽길로 주저없이 달려갔다.

하지만 거지는 오른쪽 길이 못내 아쉬운지 몇 번이나 돌아보고서야 그들을 뒤쫓아 갔다.

임청우는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아니 그들의 대화가 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만 아들을 죽이려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도 딸을 죽이려 하는 건가? 내가 책에서 보고 배운 건 모두 세상이 아니고 환상이었단 말인가?)

임청우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듣기로는 노파 등의 주인이란 사람은 황의소녀의 아버지가 틀림없는 것 같았던 것이다.

사락!

갑자기 작고 보드라운 손이 임청우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임청우는 자신의 눈까풀이 무거워져 내려 감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혈도가 찍힌 것도 아니지만 그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임청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제 땅을 뒤덮고 있는 것은 숲이 아니라 어둠이다.

그리고, 그 땅을 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의 눈앞에는 영롱한 두 개의 별이 아롱거리고 있었다.

멍청이! 이제야 깨어났네.”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면서도 조롱하는 듯한 음성이 임청우의 귀에 들려왔다.

그의 눈앞에 있는 두 개의 영롱한 별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거듭했다.

임청우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의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푹 자고 난 덕분인지 몸이 아주 홀가분했다.

비록 미음 한 그릇 마신 것에 불과하지만 허기도 사라졌다.

몸이 편해진 탓인지 황의소녀에 대해 느끼고 있던 불쾌한 감정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려서 주위를 확인하며 임청우는 물었다.

? 나를 이리로 데려왔지?”

그건 네가 남을 잘 속이기 때문이야.”

황의소녀가 해실해실 웃으며 대답했다.

임청우는 그녀의 표정만 보고는 속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쓰륵쓰륵!

아래쪽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바람이 얼굴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며 대지가 기우뚱거린다.

그들이 있는 곳은 키가 이십 여장에 달하는 거목의 가지 위였다.

임청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속이 좁은 사람이나 여자와는 다툴 바가 못 된다 했다. 바람소리거니 생각하자.)

그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공간에 가득한 바람만 느껴질 뿐 땅은 보이지도 않는다.

가려고?”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 누우며 황의소녀가 맘대로 하라는 듯이 말을 던졌다.

임청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층층으로 얹혀진 가지들 중 하나를 내려왔을 때 위쪽에 있는 소녀가 또 던지듯이 말했다.

검주 유소기를 오랫동안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

내가 보기에 넌 유소기를 영원히 속일 수 있을 만큼 현명하지 못해. 또 유소기의 손아귀를 벗어날 만한 능력도 없고.”

휘익!

임청우가 손과 발을 멈추고 있는 앞으로 황의소녀가 나비가 날 듯 부드럽게 날아내려 왔다. 그녀가 내려선 가지가 조금도 휘청이지 않았다.

눈치 빠르게 황의소녀는 임청우에게서 망설임을 읽고 말했다.

나도 쫓기고 있지만 사실 기걸승 따윈 안중에도 없어. 그들은 감히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

그들은 나도 어떻게 하지 못했어.”

임청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황의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죽여 킥킥 웃었다.

하지만 다음순간, 그녀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면서 내뱉었다.

나도 너 정도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뭔가가 임청우의 양쪽 귀에 걸려있었다. 그의 발을 묶은 적이 있던 천잠사였다.

임청우의 눈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황의소녀가 돌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임청우는 우악스럽게 황의소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던 것이다.

난 죽을 고비라면 수백 번도 더 넘겼다. 우리 어머니조차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셨다. 그런 나를 죽고 사는 것으로 협박하려하다니...”

임청우의 손힘은 황의소녀로 하여금 눈물을 찔끔거리게 할 만큼이나 엄청났다.

그의 몸속에 있는 용조층층공의 공력이 밖으로는 뿜어낼 수 없다하지만 고강한 공력임에는 분명한 때문이다.

우협의 제자가 여자나 괴롭히는 사람이야?”

황의소녀가 작지만 뾰족하게 소리쳤다.

순간 임청우는 뱀에 물리기라도 하듯 화들짝 놀라며 황의소녀의 손목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임청우에게 있어 마음속의 사부인 우협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백번 죽는 것 보다 더 두려운 일인 것이다.

황의소녀의 손목을 풀어준 임청우는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며 가지에 걸터앉았다.

(여자는 항상 이렇게 교활하고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일까?)

임청우는 늘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발아래로 검은 바위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내려다보였다.

임청우는 황의소녀가 기걸승 세 사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높은 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만리향의 향기를 높은 나무 위에서 바람에 실어 날려버리는 것이다.

기걸승이 어느 정도 높이 까지 솟아오르지 않고는 냄새를 맡을 수가 없을 것이란 계산을 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안전한 장소가 되질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왜 이 근처에서만 맴도는 거지?”

임청우가 물었다.

네가 알 필요 없어.”

황의소녀는 화난 듯이 쏘아붙이며 나비처럼 날아서 나무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협의 제자인 것 같은 이 녀석은 어떤 면에선 전혀 우협을 닮지 않았다. 여자의 마음이나 상하게 하는 짓 따윈 진짜 우협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텐데...

임청우도 묵묵히 황의소녀를 따라 나무를 내려갔다.

잘 들어! 너나 나나 여기 계속 있다간 다 죽어.”

이윽고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황의소녀는 임청우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지금 난 뭔가를 찾고 있는 중이야. 잠자코 내 뒤만 따라와.”

임청우는 왜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황의소녀는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쁘게 눈망울을 굴리며 숲속으로 유연한 물뱀처럼 미끄러져 들어가는 중이었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의 뒤를 쫓아갔다.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다만 혼자 있는 것도 이상해서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일 것이다.

 

***

 

숲속을 헤맨 것도 두 시간 정도 지났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 그녀는 여전히 그 숲 일대를 벗어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눈을 빛내며 중요한 그 무엇을 찾고 있음은 틀림없는데...

마침내 임청우가 물었다.

대체 찾고 있는 게 뭐야?”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

황의소녀가 빠르게 말했다.

어두워서 쉽진 않겠지만 아무튼 그곳을 찾아야 돼. 그곳만 찾을 수 있다면 넌 유소기에게서, 난 기걸승으로부터 쫓기지 않아도 될 거야.”

임청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어떤 일은 아무리 이루려 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어떤 일은 전혀 이루려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기도 한다. 네가 찾고 있는 것이 뭐든 간에 이 두 가지 일 중 하나에 포함된다면 우린 전혀 찾을 필요가 없지.”

임청우의 말에 황의소녀는 멈칫했다.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임청우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거나 우린 여기서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어. 남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음을 당한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이고 나도 좋아하진 않아. 일단은 여기서 떠나야해. 설혹 여기에 그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대현(大賢)은 오히려 어리석은 것 같이 보인다고 했다.

크게 어리석은 것은 또한 아주 현명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크게 어리석은 것이나 아주 현명한 것이나 모두 일반에서 유리되어 있기에 추측할 수 없어 생기는 혼돈일 것이다.

이 순간에 황의소녀의 심정이 그랬다.

임청우가 어리석은 것인지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그녀의 판단이 마비되어 버렸다.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다면, 남의 견해에 무조건 따르게 되는 것이 고금에 걸친 불변의 진리 중 하나일 것이다.

 

쓰륵! 쓰륵!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임청우가 앞장을 서고 황의소녀가 뒤따른 채 어두운 숲속을 걸어갔다. 그는 황의소녀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황의소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그의 뒤를 따랐다.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갑자기 임청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는 아직 경신술을 배우지 못했었다. 물론 다른 무공도 마찬가지지만...

(바보같이... 경신법을 펼치면 금방 갈 텐데...)

황의소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비웃었다.

(아무 곳에서나 자면 되지 꼭 하늘 가린 곳이라야 돼? 허세는 혼자 다 부리면서...)

임청우가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는 이미 알았다.

그녀는 임청우가 잘 곳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임청우를 놀라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사삿!

갑자기 그녀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그것도 모른 채 그녀가 당연히 따라오겠거니 하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불빛을 향해 갔다.

비록 경신술을 익히지는 않았다 하더라고 그의 몸속에는 용조층층공이란 공력이 숨 쉬고 있기에 그 걸음은 놀랍도록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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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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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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