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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름이 새겨지다.

 

 

안개의 벽속에는 여전히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괴한 형상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진법에 의해 만들어진 환각일 거라고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들은 너무나 생생하고 섬뜩해서 식은땀이 흐르는 임청우였다.

기괴한 형상들은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는 임청우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임청우는 의식적으로 그것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바닥에 찍혀있는 광점만 보고 걸어갔다.

그렇게 안개의 벽을 절반 쯤 지났을 때였다.

“...!”

임청우는 오싹 소름이 끼쳐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기괴한 형상들의 모호한 시선이 아니다.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같이 강렬한 시선이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 뭐지?)

임청우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수많은 기괴한 형상들 속에 어떤 인물이 뒷짐을 지고 서서 임청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얼굴은 모호해서 알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옷!

건장한 몸에 걸쳐진 화려한 비단옷은 무채색인 기괴한 형상들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렬하게 부각된다.

(비단 옷을 입은 누군가가 진법 속에 있다.)

임청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듯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인물을 자세히 보려고 했다.

부르르!

바로 그때 허리춤에서 경련이 느껴졌다.

호리병이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뱀 중의 왕인 이놈이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임청우는 호리병 속의 금관혈린사가 잠에서 깨어나 떨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영물이라 보지 않고도 느꼈다는 건가? 그렇다면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가 저곳에 있다는 건데...)

호리병에 잠깐 시선을 돌렸던 임청우는 다시 안개 속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없었다.

기괴한 형상의 존재들만이 배회하고 있을 뿐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인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임청우는 자신이 혹시 헛것을 보고 착각한 게 아닌가 속으로 반문해보았다.

(나 혼자 잘못 본 것이라면 영통한 이놈까지 두려움에 떨 리가 없다.)

호리병 속의 금관혈린사가 아직도 떨고 있는 것을 확인한 임청우는 자신이 결코 착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그 인물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확인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 빨리 여길 빠져나가자.)

임청우는 겁에 질려 안개의 벽 밖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뒷덜미를 홱 낚아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

 

훼손된 북두무랑으로 들어서는 인물이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다.

임청우가 안개의 벽 속에서 보았던 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

북두무랑으로 들어선 인물은 입구 바로 안쪽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참하게 훼손된 북두무랑의 참상이 그 인물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임청우조차 분노했던 만행을 보면서도 그 인물의 표정에는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잠시 서있던 그 인물은 다시 걸음을 옮겨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사사사!

그 인물이 지나가는 것에 맞추어 훼손되었던 북두무랑의 양쪽 벽이 매끈하게 갈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매끈해진 벽면에는 수많은 글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 글들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던 무학비결들이었다.

북두무랑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 인물은 천상열차분야도가 새겨진 흑옥의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칠흑같이 검고 깊은 벽 속에서 북두칠성은 흐릿하게 빛나고 있고 북극성 자리에는 북두홀이 끼워져 있다.

달칵!

그 인물이 손을 대자 북두홀은 간단하게 흑옥의 벽에서 분리되었다.

“...”

벽에서 떼어낸 북두홀을 어루만지는 그 인물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희미한 한숨이 일자로 굳게 닫혀있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이다.

 

그 인물은 오른쪽의 월동문으로 나왔다.

북두무랑을 나온 그 인물은 월동문 옆에 새겨져 있는 서명을 확인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 인물은 벽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파파팟!

그러자 불꽃과 돌가루가 튀며 새로운 이름이 서명에 추가되었다.

서명의 맨 아랫줄에 새겨진 이름은 <林靑牛>였다.

 

***

 

농산 깊은 곳에 자리한 천류폭포(天流瀑布)는 높이가 오십 장이 넘는다.

높을 뿐 아니라 수량도 엄청난 폭포다. 혹시 세상이 너무 좁아서 천류폭포가 쏟아내는 물로 인해 잠겨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자아내게 할 정도다.

말의 귀처럼 뾰족하게 솟아있는 두개의 봉우리 사이로 흘러내린 폭포수는 호수처럼 넓게 퍼졌다가 다시 급해지고 가늘어지면서 황하(黃河)로 흘러간다.

물이 퍼지면서 만들어진 호수에는 작은 바위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줄을 서서 왼쪽 봉우리로 이어진다.

그 왼쪽 봉우리 아래쪽에는 진짜 말의 귀인 것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말의 귓구멍 같은 부분은 아래위로 좁게 갈라진 틈새다.

폭은 좁고 높이는 높은 그 틈새 안쪽에는 한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계곡이 숨겨져 있다.

 

별들 사이로 반달이 얼굴을 내밀고 물위에는 별들이 아가들의 눈동자처럼 깜빡이며 빛을 발한다.

어둠이 농산에 무게를 주어 만물을 침묵하게 했다.

오직 특권을 허락받은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이 이따금 밤의 적막을 깰 뿐이다.

첨벙! 첨벙!

문득 물소리가 들리며 키가 껑충하게 큰 괴물이 폭포 아래쪽의 호수에 나타났다.

반달을 등지고 나타난 괴물의 다리는 두 개뿐인데 아주 가늘면서 길이는 무려 이장(二丈;6미터)이 넘는다.

괴물의 몸뚱이는 그 긴 다리의 사분의 일 정도에 불과하다.

다리에 비해 기형적으로 작은 몸뚱이의 허리 어림에는 대가리인 듯한 것이 매달려 앞뒤로 흔들거리고 있다.

첨벙! 첨벙!

괴물은 기다란 다리로 한 번에 일장 넘게 움직여 호수를 가로질렀다.

징검다리처럼 깔려있는 바위섬들을 지난 괴물은 왼쪽 봉우리 가운데에 자리한 계곡 입구로 다가갔다.

말의 귓구멍인 듯 움푹 들어간 계곡 입구는 수면에서 일장 남짓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 이른 괴물의 몸뚱이가 마치 줄을 타는 거미처럼 다리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이윽고 계곡 입구에 내려선 그것은 괴물도 뭐도 아닌, 망태를 짊어진 소년이었다.

바로 해질 무렵 표운봉 아래의 계곡을 떠난 임청우였다.

임청우는 길이가 이장이 넘는 대나무로 만든 죽마(竹馬)를 사용하여 호수를 건너온 것이다.

두개의 대나무 죽마를 암벽에 기대어 놓은 임청우는 계곡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휘이잉!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틈새를 통해 끊임없이 찬바람이 불어나온다.

이곳은 농산의 다른 곳과 달리 한여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늘하다.

 

바위 사이의 좁고 긴 틈새가 끝나는 곳에는 한 채의 모옥(茅屋)이 서있다.

모옥 앞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초지가 있고, 모옥 옆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이다.

모옥은 절벽 위의 암반에 위태롭게 세워져 있는 것이다.

어머니! 저 돌아왔습니다.”

모옥 바로 앞에 서있는 늙은 팥배나무를 지나며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불 꺼진 모옥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혹시!)

임청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병이 깊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어머니!”

덜컹!

임청우는 급히 모옥의 문을 열었다.

쉬잇!

헌데 문이 왈칵 열린 순간 칠흑같이 어두운 모옥 안에서 새하얀 손이 나타나 임청우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짜악!

반사적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임청우의 오른쪽 뺨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

콰당탕!

임청우는 시리도록 새하얀 손에 얻어맞은 뺨을 감싸며 마당에 나뒹굴었다.

무고하셨군요.”

하지만 임청우는 벌겋게 부풀어 오른 볼을 문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응당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어야 할 임청우의 얼굴에는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별일 없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몇 시냐?”

모옥 안쪽에서 냉기가 풀풀 날리는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삼경(三更;11~새벽 1)에 막 접어든 것 같습니다.”

임청우는 밤하늘의 별 자리를 살피며 대답했다.

북쪽 하늘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국자가 왼쪽으로 많이 일어서 있다.

갑자기 피핏!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옥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병색이 완연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여인이 탁자 옆에 서서 기름등잔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임청우의 어머니 임단심이다.

반 시진(한 시간)만 지나면 오늘도 끝이다.”

기름등잔의 심지에 불을 붙인 임단심이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침에 경고한 대로 오늘 안에 여기를 떠나라. 일각이라도 시간을 지체한다면... 내손으로 네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임청우를 돌아보는 임단심의 눈이 새파란 빛을 흘린다.

어머니는 온통 저를 죽일 생각뿐이시군요.”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노상 당해온 냉대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쓰리다.

어쨌든 자정이 되기 전에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을 죽이려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네 놈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임단심은 표정을 굳히며 문을 닫으려 했다.

임청우는 그런 그녀에게 한마디 더 던졌다.

그럼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어머니 같지는 않겠군요.”

화악!

임청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으려던 임단심이 유령처럼 임청우를 덮쳐왔다.

!

약초가 담긴 망태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집 밖으로 뛰쳐나온 임단심이 벼락같이 손을 휘둘렀지만 그럴 줄 짐작하고 있었던 임청우는 망태를 들어 뺨을 가렸던 것이다.

임단심이 임청우가 서있던 곳에 내려섰을 때 임청우는 서쪽으로 다람쥐처럼 달려가 절벽 끝에 이르러 있었다.

놀란 모습도 아니고 두려워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늘상 있는 일이 다시 시작된 듯 약간은 권태로운 표정이었다.

어머닌 저를 죽일 수 없어요. 벌써 천번도 넘게 시도했지만 실패만 하지 않았어요?”

바보같은 놈!”

임단심이 살기어린 눈으로 임청우를 쏘아보며 내뱉었다.

지금까지 네 놈이 살아있는 것은 그 귀신같은 눈치도 눈치지만 내게 네 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과 살려두고 싶은 마음이 각기 반반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 것은 어째서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까?”

“...”

임청우의 말을 들은 임단심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하다.

그러나 임청우는 절벽가로 한걸음 더 물러섰을 뿐,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병이 깊어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께서 저를 괴롭히는 낙도 없다면 어떻게 하루인들 더 살 수 있겠어요? 그것이 저를 죽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닙니까?”

, 그렇다면 왜 절벽가로 도망치느냐? 죽지 않을 자신 있다면서...”

무엇이든 참는 것이 수양(修養)에는 더할 바 없이 좋은 것이라지만...”

임청우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통을 당한다는 건 왠지 사람답지 않은 것같아서입니다.”

임단심은 무서운 눈초리로 임청우를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덜컥!

닫혀진 방문 안쪽에서 그녀의 말이 흘러나왔다.

네놈은 사람이 아니다. 네놈의 아비도 마찬가지고...”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임청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의 살수(殺手)에 수시로 노출되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도 태연히 웃으며 응대하던 임청우였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단 한마디에 고소를 지으며 검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버지라는 말은 그에게 생소할 뿐만 아니라 저 하늘에 있는 작은 달보다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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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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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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