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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교 구대마왕(九大魔王)의 등장

 

 

안탕산 일대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저녁 무렵처럼 어둑하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무겁게 깔린 먹장구름으로 뒤덮여있기 때문이다.

!

문득 한 줄기 기화(旗火), 즉 불꽃 신호가 안탕산의 깊은 산중에서 허공으로 치솟았다.

기화가 쏘아진 곳은 물이 마른 계곡이다.

그곳에 제왕성의 철위사 다섯 명이 모여 있다.

철위사들은 모두 긴장된 표정인데 두 명은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살피고 있으며 두 명은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마지막 한 명의 철위사는 빈 금속통을 든 채 허공을 보고 있다.

방금 전에 기화를 쏘아올린 것은 바로 그자였다.

허공에서는 어느덧 불꽃이 흩어지고 있다.

기화를 쏘아 올린 게 너희들이냐?”

휘익!

외침과 함께 누군가 계곡으로 날아 내려 철위사들은 급히 돌아보았다.

여기서도 일이 벌어진 것이냐?”

계곡에 내려서는 인물은 바로 제왕성의 외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휘익! !

궁무독과 함께 두 명의 동위사들도 현장에 내려섰다.

총관님!”

어서 오십시오 총관님.”

궁무독을 본 철위사들은 비로소 안도한 표정이 되며 급히 포권을 했다.

형제들이 또 흉수에게 변을 당했습니다.”

철위사들이 급히 옆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

궁무독은 이마를 찡그리며 철위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두 명의 철위사가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데 사인은 가슴에 난 사발만한 구멍이 었다.

마검칠식!”

이번에도 마검칠식에 당했습니다.”

궁무독을 따라온 두 명의 동위사가 급히 시체로 다가가며 이를 갈았다.

궁무독은 동위사들이 시체의 사인을 살피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틀림없습니다 총관님! 이 형제들을 죽인 무공은 천마의 구대절기중 마검칠식입니다.”

안탕산에 접어든 이래 벌써 스물세 명이나 당했습니다. 마검칠식을 쓰는 놈들이 우리 제왕성의 안탕산 진입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철위사들의 사인을 확인한 동위사들이 이를 갈며 분노했다.

이제 소요신군 강조가 십팔 년 전 참사의 원흉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요신군이나 그자의 수하들이 본성에 적대하는 건 그렇게 밖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단정하지 마라. 진짜 범인이 소요신군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벌이는 짓일 수도 있으니...”

궁무독은 냉정한 어조로 철위사와 동위사들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소요신군의 아들놈도 마검칠식을 구사하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동위사 중 한명이 오만상을 쓰며 이의를 제기했다.

누명을 썼든 어쨌든 소요신군 강조가 십팔 년 전의 참사와 관련이 있다는 건 분명...”

불만을 토로하던 그자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궁무독이 한손을 들어 자신의 말을 막으며 다른 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무독이 보고 있는 쪽에는 철쭉이나 찔레같은 키 작은 관목들이 우거져 있는데 거리는 십장 남짓이었다.

(총관님이 왜 저러시지?)

(저곳에 무엇이 있다는 건가?)

(아무런 기척도 없는데...)

철위사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관목 숲을 보았다.

찌릿! 찌릿!

하지만 동위사들은 몸을 마비시키는 것같은 살기를 느끼고 숨을 멈췄다.

! 스릉!

동위사들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뽑아들었다.

!

그때 궁무독은 오른발을 관목 숲 쪽으로 내딛으며 오른손으로는 왼쪽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 스릉!

궁무독은 내민 오른발로 세차게 발을 구르며 발검을 했다.

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왔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흔한 검기조차 궁무독의 검에서는 내뻗치지 않았다.

스악!

궁무독은 발검한 검으로 앞쪽을 수평으로 그어내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검기도 내뻗치지 않는 궁무독의 이 일초는 무공을 모르는 무지렁이가 허세를 부리는 칼부림처럼 느껴졌다.

(뭘 하신 거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철위사들은 발검 했던 검을 거둬들인 궁무독이 다시 두 발을 모으며 서는 것을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헌데 그 직후였다.

서걱!

관목 숲이 일제히 같은 높이에서 잘려 나갔다.

좌우로 이장(二丈;6미터), 앞뒤로 일장(一丈)쯤인 반달형으로 관목 숲이 매끈하게 잘린 것이다.

!”

!”

동위사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철위사들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철위사들은 자신들의 외총관인 궁무독이 무공을 쓰는 것을 오늘 처음 보는 것이다.

퍼억! 푸스스!

그때 똑같은 높이로 갈라진 관목들의 잘려진 부분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 가공!)

(족히 십장은 되는 거리를 두고 관목 숲을 무형의 검기로 베어버렸다.)

(과연 우리 제왕성의 총관다운 솜씨다.)

철위사들은 감탄과 흠모의 표정으로 궁무독을 보았다.

독검마유 궁무독은 몇 대째 제왕성을 섬겨온 충신 가문 출신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궁무독이 가문과 출신을 배경으로 제왕성의 총관이 되었다 여겨왔다.

하지만 사실 궁무독은 은위사나 금위사들에 못지않은 무공의 소유자였다.

방금 전 소리없이 관목 숲을 베어버린 일격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

그러나 검을 거둔 궁무독의 이마는 심각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동위사들 역시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들 저러시지?)

(총관님 뿐 아니라 동위사들도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잖은가?)

철위사들이 어리둥절할 때였다.

놀랍군. 마교의 몰영만안대법(沒影瞞眼大法)을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자가 당대에 존재할 줄이야.”

궁무독이 앞쪽을 노려보며 누군가에게 말했다.

(몰영만안대법!)

(그건 빛을 반사하거나 흘려보내서 상대방의 눈에 모습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마교의 은신술 아닌가?)

(저곳에 누가 있단 말인가?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철위사들은 관목 숲이 반달형으로 갈라진 곳을 보며 놀라워했다.

 

<흐흐흐! 역시 만만치 않아!>

 

그때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젊은 사내의 음성인데 어디서 들리는지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다.

 

<독검마유 궁무독! 당신이 제왕성에서 총관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게 단지 운이 좋았거나 출신 배경 덕분이 아니라는 걸 방금 전의 일격으로 알게 되었다.>

 

츠으! 지이!

말소리와 함께 반달형으로 잘려나간 관목 숲 뒤쪽의 허공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아지랑이같은 그 현상은 곧 사람의 모습을 갖춰갔다.

... 저기에 사람이 있다.”

무언가 움직인다.”

! 차창!

철위사들도 비로소 알아차리고 다급히 무기를 뽑아들며 뒷걸음질을 쳤다.

 

<늦었다!>

 

!

음산한 외침과 함께 섬뜩한 섬광이 철위사 한명에게 날아들었다

!”

표적이 된 철위사는 다급히 칼을 들어 그 섬광을 막으려 했다.

콰창!

하지만 날아든 섬광에 닿는 순간 철위사의 칼은 유리처럼 깨졌다.

그 섬광은 마검칠식으로 발휘된 검기였던 것이다.

가강!

일거에 검을 깨트린 섬광은 철위사의 가슴으로 독사처럼 파고들었다.

(죽었다!)

철위사는 자기 가슴으로 파고 드는 차가운 섬광을 내려다보며 절망했다.

!

절체절명의 순간 옆에서 불쑥 내밀어진 누군가의 검이 철위사의 가슴으로 파고들던 섬광을 쳐냈다.

그 검의 주인은 물론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 감사합니다 총관님!”

스팟!

구사일생한 철위사는 뒤로 휙 날아 피하며 외쳤다.

스악!

철위사를 구한 궁무독은 몸을 홱 돌리며 허공에 대고 다시 검을 그었다.

이번에도 검에서 검기가 내뻗치는 흔적은 없었다.

 

<멸적살검(滅跡殺劍)!>

 

!

하지만 누군가의 긴장한 외침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후두둑!

뒤이어 허공에서 피가 한줄기 확 뿌려졌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어떤 자가 궁무독이 발휘한 기척 없는 검기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베었다!”

그렇지!”

보고 있던 철위사들이 안도하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휘청!

허공에서 사람의 흐릿한 형상이 휘청하고 있는데 그 형상의 어깨 쪽에서 피가 뿜어지고 있다.

스악! !

철위사들이 환호할 때 동위사들은 이미 소리없이 쇄도하여 그 사람 형상에게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아주 빠르고 격렬한 공격이다.

카캉! !

그들의 무기는 보이지 않는 무엇과 충돌하며 시퍼런 불꽃을 일으켰다.

파캉! !

하지만 그 직후 동위사들의 무기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혀 그대로 부러져버렸다.

역시 마검칠식에 당한 것이다.

“...!”

“...!”

스팟! 휘익!

무기가 부러진 동위사들은 벼락같이 뒤로 물러섰다.

스악!

물러서는 동위사들 뒤에서 궁무독이 다시 소리없이 검을 그어냈다.

다만 이번에는 수평으로 긋는 게 아니라 수직으로 그었는데 역시 아무런 기척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크!>

 

!

아지랑이 같은 사람의 형상이 피를 허공에 뿌리면서 차가운 섬광을 아래에서 비스듬히 위로 그어 올렸다.

빠캉! 카앙!

궁무독이 발휘한 보이지 않는 검기가 그 섬광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

궁무독은 이마를 찡그리면서 검을 거둬들였다.

그만 합시다 궁총관! 오늘은 내가 진 것으로 할 테니...”

츠츠츠!

그 직후 젊은 사내의 음성과 함께 궁무독의 오장쯤 앞쪽에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모습을 드러내는 자는 일신에 은박처럼 번쩍이는 옷을 입고 있다.

머리에도 은박 재질에 눈 부위에만 구멍이 나있는 자루 모양의 복면을 쓰고 있다.

양손에는 같은 재질의 장갑을 끼었으며 발에 신은 신발도 같은 은박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자의 일신을 뒤덮고 있는 그 은박 재질의 천이 사람 눈에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해주는 효과를 발휘한 듯 했다.

무림에 나온 이래 본좌의 몸에 상처를 낸 건 궁총관이 처음이었소.”

말하는 복면인의 오른쪽 어깨에는 제법 길게 갈라진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다.

궁무독이 두 번째로 그어낸 무형의 검기에 베어진 것이다.

마교의 인간이냐?”

철컥!

궁무독은 검을 다시 칼집에 꽂으며 복면인에게 다가갔다.

그렇소이다. 본좌는 마교 구대마왕(九大魔王)의 막내인 검마(劍魔) 비무강(非无姜)이라고 하외다.”

복면인이 과장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마교!)

(구대마왕은 대대로 마교가 세상에 내보내는 최강의 고수들 호칭 아닌가?)

(목소리로 보아 아직 젊은 저자가 구대마왕의 일인이었구나.)

철위사들과 동위사들은 아연긴장하며 복면인, 검마를 노려보았다.

마교가 소요신군 강조를 비호하는 이유를 들어볼까?”

검마 비무강에게 걸어서 다가가는 궁무독의 두 눈이 차갑게 갈아 앉았다.

유감이지만 오늘은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소이다. 궁총관과 더 교분을 나누고 싶어도 혹시 정들까봐 겁이 나니...”

스스스!

검마 비무강의 모습이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누구든 내 앞에서 마음대로 오고가지는 못한다.”

! !

거의 동시에 궁무독은 칼집에 꽂았던 검을 다시 발검하여 허공을 종횡으로 긋고 갈랐다.

콰쾅! 투쾅!

그러자 검마가 서있던 곳 뒤쪽에서 두 번의 폭발이 일어난다. 궁무독이 발휘한 무형의 검기가 그 부분의 바닥을 박살낸 것이다.

 

<첫인사 치고는 대접을 제대로 받았소이다. 기억해두리다. 흐흐흐!>

 

하지만 어디선가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검마 비무강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놓쳤구나.)

동위사와 철위사들은 상황을 깨닫고 분노하여 이를 갈았다.

궁무독은 말없이 검을 다시 칼집에 꽂으며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오늘 진 피 빚은 가급적 빨리 갚아드릴 테니 기대하시구려. 흐흐흐!>

 

검마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죽일 놈!”

서라!”

! 휘익!

분노한 동위사들이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날아올랐다.

쫓지 마라.”

궁무독이 그런 그들을 저지했다.

총관님!”

하지만 저놈 손에 스무명이 넘는 형제들이 당했는데...”

! 휘익!

동위사들은 분개하면서도 궁무독의 명령에 따라 도로 날아내렸다.

저자가 정말 구대마왕중 한명이라면 섣불리 상대해선 안된다.”

궁무독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형제들에게도 연락해서 반드시 네 명 이상이 조를 짜서 움직이라고 전하라. 일단 놈과 조우하면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귀로 찾아내도록 시도하라 전하고...”

존명!”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 !

동위사들은 복창한 후 왔던 길로 도로 날아갔다.

(마교의 최고 고수들인 구대마왕중 한 놈이 안탕산에 진을 치고 있다 이거지?)

날아가는 동위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궁무독의 두 눈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소요신군 강조! 점점 더 당신의 정체가 궁금해지는군.)

궁무독의 얼굴에는 어느덧 서릿발같은 살의가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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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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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대충 고른 게 신검(神劍)

 

 

간장과 막야는 춘추전국시대에 살았던 부부 장인의 이름이다.

()나라 왕 합려(闔閭)는 당대 최고의 장인들인 그들 부부에게 보검을 만들게 한 후 다른 사람에게 더 뛰어난 보검을 만들어 줄까봐 남편인 간장을 살해했었다.

다행히 아내인 막야는 구사일생했으며 아들인 미간척(眉間尺)으로 하여금 복수를 하게 했다는 야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두 부부는 마지막으로 만든 한 쌍의 보검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였었다.

자웅쌍검(雌雄雙劍)으로 불리는 두 자루의 보검 중 웅검(雄劍), 즉 남편 검이 간장이다.

 

검을 뽑아서 살펴보세요.”

그럼 실례를...”

스릉!

진상파의 권유에 강유는 천천히 간장을 칼집에서 뽑았다.

!

그러자 푸르스름한 빛과 함께 유리처럼 반짝이는 검신(劍身)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신 가운데에는 옛날 글자들이 문양처럼 길게 새겨져 있다.

끼이!

간장의 검신이 칼집에서 빠져나오자 섬전초가 겁에 질려 웅크렸다.

간장은 날카로울 뿐 아니라 척사(斥邪)의 힘까지 지니고 있어서 영물인 섬전초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예기(銳氣)! 검신이 칼집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다.)

스릉!

강유는 극도로 긴장하며 간장의 검신을 완전히 칼집에서 뽑았다.

간장의 검신이 드러나자 밀실 전체가 푸르스름한 빛에 휩싸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검광(劍光)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혼절할 것이다.

그만큼 간장이 뿜어내는 검기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간장은 지금은 잊혀진 고대(古代)의 비법으로 만들어진 신검이랍니다. 그 때문인지 만들어진 후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지요.”

진상파는 두려움에 떠는 섬전초를 다시 품에 안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강유는 칼집에서 완전히 뽑아낸 간장의 검신을 얼굴 앞에 세운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유리같은 검신을 들여다보는 강유의 얼굴은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한번 시험해보세요.”

진상파가 한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강유가 돌아보니 그곳에는 무기를 정비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다.

강철제 탁자 위에 무기를 고치는 데 쓰는 도구들과 수리중인 병장기들이 놓여있다.

탁자 옆에는 커다란 모루도 하나 놓여있다. 강철제인 그 모루는 높이가 네 자 가량이나 되고 길이는 다섯 자가 넘는다.

(저 모루가 시험 대상으로 적당하겠군.)

모루로 다가간 강유는 두 손으로 쥔 간장을 가볍게 내리그었다.

성둥!

그러자 마치 오이가 잘리듯 모루의 앞 부분이 간단히 잘라졌다.

!

잘려진 모루 앞부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 경이로운 예리함이로군요. 슬쩍 그은 것만으로도 강철로 만들어진 모루를 잘라버리다니...”

강유는 매끈하게 잘린 강철모루의 단면을 보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

간장의 날카로움에는 어떤 호신강기라도 종이처럼 베어진답니다. 제왕성의 추격을 뿌리치는 데 유용할 테니 사용하도록 하세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스릉!

진상파가 권유했지만 강유는 간장을 다시 칼집에 꽂았다.

춘추오대신검중 하나인 간장은 선물로 받기에는 너무 과한 보물입니다. 소저의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강유는 칼집에 꽂은 간장을 원래 위치에 걸었다.

(둔한 사람...)

강유가 간장을 원위치 시키는 걸 보며 진상파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염치와 분수를 아는 강유의 심성을 확인해서 기쁘기도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어쩔 수가 없다.

자웅쌍검인 간장과 막야는 부부의 금슬과 인연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금릉의 황금성에는 자검(雌劍), 즉 아내쪽의 검인 막야가 있다.

진상파는 비록 검법을 익히진 않았지만 막야를 가까이 두고 아껴왔었다.

간장과 막야의 전설에 감명을 받는 그녀는 언제고 자신의 짝이 될 사람을 만나면 웅검인 간장을 줄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간장을 줄만한 상대를 만난 것인데...

눈치 없는 그 인간은 간장을 거절했다.

간장이 부담되신다면 다른 검으로 하나 가져가세요.”

진상파는 서운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이 곳에 있는 검들은 모두 전설적인 보검들인데...”

강유는 난감해졌다. 그게 어떤 검이든 황금성의 무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호신을 위해서라도 검이 필요할 테니 사양하지 마세요.”

진상파가 새침한 표정이 되어 재차 권했다.

강유는 진상파가 왜 마음이 상했는지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끝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염치없지만...”

강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가치가 떨어지는 검으로 한 자루 고를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간장에 의해 잘려진 모루 옆의 강철제 탁자였다.

탁자 위에는 수선 도구들과 함께 망가지거나 낡은 병장기들이 쌓여있다.

(망가진 도검 중 하나를 가져가면 그나마 부담이 덜하겠군.)

강유는 탁자로 다가갔다.

(혹시...)

철문 밖에서 보고 있던 철관음의 눈이 번뜩 이채로 빛났다.

“...!”

섬전초를 품에 안고 있는 진상파도 유심히 강유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쓸만한 물건이 있으면 좋겠는데...)

철컹! 철컹!

두 여자가 심상치 않은 눈길로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강유는 탁자 위의 병장기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 , , 도끼, 극등의 병장기들은 열 자루가 넘는데 대부분 녹이 슬었거나 일부가 훼손된 상태였다.

(사용해본 적이 없는 무기들은 제외하고...)

강유는 무기들 중 창, 도끼, 극등은 옆으로 치워 버렸다.

그러자 대여섯 자루의 칼과 검들만 남았다.

(이것들 중에서 한 자루를 가져가면 되겠지.)

강유는 분류된 칼과 검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을 먼저 집어 들었다.

금은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칼집에 들어있는 검인데 손잡이에도 몇 개의 보석이 박혀있다.

푸스스!

하지만 검신을 칼집에서 뽑는 순간 검붉은 녹이 함께 빠져나와 흩어진다.

(이건 도저히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로군.)

검붉게 녹이 쓸었을 뿐 아니라 이빨까지 빠진 검신을 확인한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화려한 꾸밈으로 보아 역사적으로는 이름이 높았겠지만 실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검은 아니었을 것이다.

화려한 보검을 내려놓은 강유는 다른 도검들을 살펴보았다.

나머지 칼과 검들도 대부분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다. 도저히 실전에서는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 도검들에게는 수선 대상이 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헌데 난감해하던 강유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꾸밈새가 화려한 칼과 검들 사이에 칼집도 없는 검이 한 자루 섞여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검의 형태를 한 쇳덩이였다.

손잡이와 칼날이 일체형인 모습인데 먹칠을 한 듯 검은 색이고 표면도 우둘투둘하다.

(이 검...)

덜커덕!

강유는 다른 칼과 검들 사이에서 그 검은색의 검, 쇳덩이를 집어 들었다.

“...!”

“...!”

순간 섬전초를 안은 진상파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철관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강유는 두 여자의 심상치 않은 반응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겁다.)

쇳덩이같은 검을 집어든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믿어지지 않게도 길이가 네 자 남짓인 그 검의 무게는 무려 열관(38kg) 이상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고 다니는 것조차 불가능한 엄청난 무게인 것이다.

(대체 재질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무겁단 말인가? 같은 분량의 납보다도 몇 배 더 무거운 것같은데...)

강유는 놀라면서도 두 손으로 검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전체가 한 덩이로 되어있는 형태의 이 검은 만들다 만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끝은 뾰족하고 손잡이 위의 호수(護手), 즉 검격(劍格)까지 삐져나와 있어서 일단 검의 모습은 갖추고 있다.

다만 검의 날이 아주 투박해서 무엇을 베거나 자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것으로 하시겠어요?”

쇳덩이같은 검을 살펴보는 강유에게 진상파가 말을 건넸다.

이 검... 아니 쇳덩이에도 사연이 있겠습니다.”

강유는 두 손으로 검을 든 채 살펴보며 물었다.

이름은 극맹인데... 극맹(劇猛;몹시 사나움)으로도 쓰고 극맹(劇孟;전설 속의 협객)으로도 쓴답니다.”

진상파는 대답하며 탁자로 가서 그곳에 쌓여있는 여러 권의 낡은 책들 중 한 권을 집어들었다.

극맹(劇猛)과 극맹(劇孟)... 둘 다 무서운 이름이로군요.”

미완의 검이며 완성시켜줄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이기도 하지요.”

진상파는 낡은 책을 들고 다시 강유에게 돌아왔다.

완성되지 않은 탓에 제 몫을 못하므로 불출검(不出劍)이라고도 불리는 그 검에 대한 내력은 이 책에 적혀있어요. 시간 나실 때 읽어보도록 하세요.”

진상파는 탁자에서 가져온 낡은 책을 강유에게 내밀었다.

책 표지에는 <劒經>이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고맙습니다.”

강유는 불출검 극맹을 왼손에 든 채 오른손으로 검경(劍經)이라는 제목의 그 책을 받았다.

이제 불출검 극맹의 주인은 강소협이에요. 아무쪼록 귀하게 대해주시기 바라겠어요.”

책을 건네준 진상파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불출검 극맹... 아무래도 난 지나치게 중요한 물건을 선물로 받은 것같구나.)

진상파의 사뭇 진지한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는 강유였다.

 

* * *

 

밤은 더 깊어졌다.

밤늦도록 소란스럽던 황금성 개봉분점 주변의 번화가도 이제는 한산해져 있다.

고독모모는 장원의 중앙에 자리한 인공호수 가의 정자에 앉아있었다.

흔들!

문득 고독모모가 올려다보고 있는 하늘 전체가 한번 휘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기가 어지럽구먼.)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고독모모의의 미간이 모아졌다.

(깊은 사연과 은원이 서린 물건이 이곳을 떠나려 한다.)

고독모모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물건이 세상으로 나가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뒤바꿀 것처럼 격한 요동을 한 번 일어나겠지.)

늙었어도 곱던 고독모모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 * *

 

진상파와 철관음은 복도 끝의 철문 앞에 서있었다.

철문 안쪽은 다듬지 않은 비밀통로인데 지금까지의 복도와 달리 불빛이 전혀 없다.

그 밀로를 십리쯤 가면 개봉성에서 상당히 떨어진 산 속의 낡은 사당이 나올 것이다.

어둠 속으로 멀어지던 강유가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손을 흔든다.

강유는 튼튼한 칼집에 넣은 불출검 극맹을 등에 짊어지고 있다. 너무 무거워서 허리에 차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상파와 철관음은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강유는 곧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가 두 여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버렸네.)

진상파는 섬전초를 품에 안은 채 어둠 속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불과 사흘 남짓 함께 있었을 뿐인데 저 사람이 안 보이자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다.)

소리없는 한숨이 진상파의 입가로 흘렀다.

끼이...

영물답게 주인의 상심한 마음을 알아차린 섬전초가 올려다보며 위로한다.

그만 닫아.”

섬전초에게 들킨 마음을 숨기려고 진상파는 짐짓 차갑게 철관음에게 지시했다.

예 아가씨!”

철컹! 그그긍!

철관음은 육중한 철문을 서둘러 닫았다.

(지금까지의 나는 황금성의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고 백만 명이 넘는 식솔들을 보살피기 위해 철저하게 이성적이 되도록 교육을 받아왔다.)

진상파는 철관음에 의해 닫히는 철문을 보면서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그 결과 여자로서의 감정은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심마(心魔)가 스며든 것같구나.)

강유를 떠올리자 저절로 얼굴에 열이 오르는 진상파였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요?”

철컹!

그 사이에 철문을 완전히 닫은 철관음이 진상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불출검 극맹의 비밀이 밝혀지면 세상이 피바람에 잠길 우려도 있는데... 유출될 것을 대비하여 일부러 망가진 병기들에 섞어 방치한 그것을 용케 찾아낼 줄은 몰랐어요.”

무공을 익혀야겠어.”

철관음의 우려 섞인 말에 진상파는 엉뚱한 대답을 하며 돌아섰다.

... 무공을 말인가요?”

철관음은 흥분에 휩싸인 표정이 되어 진상파를 따라갔다.

지금까지는 황금성을 경영하기 위해 필요한 수리(數理)와 학문을 배우느라 무공을 수련할 여유가 없었어. 그 때문에 지난 며칠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고...”

저희들 백팔금차가 무능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진상파의 말에 철관음은 송구한 표정이 되었다.

언니가 미안해할 거 없어. 몸 하나 스스로 지킬 능력을 기르지 못한 내 탓도 있으니...”

아가씨께서 무공을 익히시면 무림의 역사가 새로 쓰여질 것입니다. 자질과 지혜로는 천하제일이시고 태어나신 직후 벌모세수(伐貌洗髓)를 받으셔서 생사현관(生死玄關)이 타통되어 있으시기까지 하잖아요.”

흥분한 철관음이 평소와 달리 수다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진상파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영약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내공은 단시일 내에 극한까지 쌓으실 수 있으며 본성이 사들인 무공비급 중에는 절세적인 것도 부지기수... 늦어도 몇 달 안에 아가씨는 신주이십팔숙중 어지간한 인간들은 간단히 이길 수 있는 고수가 되실 거예요.”

기왕 무공을 익힐 거라면 만인부당(萬人不當)의 경지를 노려야겠지.”

진상파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렴요! 머잖아 우리 황금성은 부()뿐 아니라 무()로도 천하제일 소리를 듣게 되겠어요.”

철관음은 자기 일인 듯 기뻐했다.

진상파가 무공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자질로는 세상에 둘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철관음이다.

지금까지는 학문을 닦는 데만 열중하던 진상파가 무공을 수련하면 무림의 정세는 일거에 뒤집힐 것이다.

(언니는 몰라. 내가 무공을 본격적으로 배우려는 진짜 이유를...)

진상파는 철관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난 두 번 다시 그 사람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거야.)

강유를 떠올리며 가슴이 거칠게 뛰어노는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진상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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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영약(靈藥)을 물처럼 마시다.

 

 

원래 강유의 내공은 이십 년 정도 수위였다.

그리 대단하지 않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이십 년 수위의 내공도 강유의 나이를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십 년 동안 쉬지 않고 면벽수련을 해야 쌓을 수 있는 정도의 내공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림에서는 일갑자(一甲子) 이상의 내공을 지닌 내가고수는 그리 많지 않다.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고 오직 면벽수련만 육십 년을 할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에는 몇 갑자의 내공을 지닌 고수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게 가능한 것은 세 가지 경우다

 

첫째, 누군가에게서 개정대법(開頂大法)으로 내공을 이전 받는 것이다.

대개의 명문대파에서는 전대고수가 죽음이나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필생 내공을 후손들에게 전수해준다.

다만 개정대법은 효율이 낮아서 전수해주는 내공중 열에 하나도 흡수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선대가 이전해주는 약간의 내공이나마 후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명문대파들이 대대로 세력을 유지해올 수 있는 이유중 하나가 개정대법의 존재다.

 

두 번째는 내공의 증진을 비약적으로 빠르게 만들어주는 무공을 수련하는 방법이 있다.

특별한 무공을 수련하면 남들보다 몇 배, 심하면 몇 십 배 빠르게 내공이 늘어날 수 있다.

무림인들이 신공절기를 얻기 위해 목을 매는 이유다.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영약(靈藥)의 힘을 비는 것이다.

공청석유(空靑石乳), 자부현청(紫府玄淸), 인형삼왕(人形蔘王),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 화리내단(火鯉內丹), 금구내단(金龜內丹), 이무기와 용의 쓸개나 내단, 골수...

대자연의 기운과 세월의 힘이 만들어낸 이런 영약들을 복용하면 내공이 비약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단순히 내공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체질을 완전히 바꾸는 환골탈태도 가능하다.

물론 이런 영약을 얻는 것은 기연(奇緣)을 만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강유는 어렸을 때부터 타복과 함께 안탕산을 누비고 다녔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인가 산삼이나 오래 묵은 하수오등을 캐서 먹을 수 있었다.

아직 스무 살도 안된 강유의 내공이 이십 년 수위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헌데 강유의 현재 내공 수위는 일갑자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단 시간 내에 어떻게 내공이 세 배 이상으로 증진할 수 있었을까?

원인은 강유의 옆에 놓여있는 주전자였다.

은으로 만들어진 그 주전자는 술이나 물 한 되 남짓 들어갈 수 있는 정도로 그리 크지 않다.

주전자에는 우윳빛의 액체가 가득 들어있었다.

진상파는 강유에게 그 주전자를 주며 상처 치료에 도움이 되니 마시라고 했었다.

목도 마르고 해서 강유는 별 생각없이 주전자의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었다.

강유가 우윳빛의 액체를 물처럼 마시고 나자 진상파가 미소 지으면서 말했었다.

사실 그 주전자에 담겨있던 것은 공청석유였답니다.”

 

* * *

 

황금성 개봉분점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칠 층짜리 탑이다.

장원의 정 중앙에 자리한 그 탑의 용도는 주변을 감시하는 것이다.

칠층탑의 맨 꼭대기 층에는 네 명의 백팔금차가 각 방향의 창가에 서서 장원 안팍을 관찰하고 있었다.

수고한다.”

계단을 통해서 철관음이 칠층으로 올라오며 말했다.

단장님...”

네 방향을 감시하고 있던 백팔금차들이 고개만 옆으로 돌려 철관음에게 인사를 했다.

어떤 상황이냐?”

철관음은 장원의 정문쪽을 감시하고 있는 백팔금차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예상하신 대로 제왕성의 인간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바글거리고 있습니다.”

석부용(石芙蓉)이라는 별호를 지닌 백팔금차가 시선을 장원 밖에 둔 채 대답했다.

철관음은 석부용 옆에 서서 장원의 정문 밖을 살펴보았다.

황금성 개봉분점은 번화가에 자리한 탓에 밤이 깊었음에도 주변이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다.

헌데 상점가의 골목골목마다 숨듯이 서서 장원쪽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다.

물론 그자들은 제왕성 개봉분타 소속의 무사들이다.

간간히 철위사와 동위사들도 그자들 사이에 섞여있는 게 눈에 띈다.

중상을 입었던 독두태보까지 잠깐 얼굴을 비춘 후 다시 모습을 숨겼습니다.”

석부용이 장원 정면의 객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독두태보는 분을 참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 객잔에 나타났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강공자가 제왕성 인간들의 이목에 감지되지 않고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철관음은 석부용이 가리키는 객잔을 보며 물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하지 않을런지요?”

석부용이 철관음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철관음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두태보는 제왕성으로 지원을 요청했을 게 분명하다. 은위사나 금위사들까지 몰려오면 태상호법님이 계신다 해도 끝까지 강공자를 지켜줄 수는 없다.)

철관음의 미간이 모아졌다.

가능한 빨리 강유를 개봉지점 밖으로 탈출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 * *

 

후우...”

강유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공청석유를 마신 후 거푸 삼주천(三周天) 운기조식을 한 후였다.

(실로 대단하구나.)

정신을 차린 강유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내상과 외상이 말끔히 나은 것은 물론이고 내공이 일갑자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증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몸속의 경맥과 혈도에는 미처 내공으로 전환시키지 못한 막대한 잠경(潛勁)이 도사리고 있다.

한 되나 되는 공천석유를 물처럼 마신 결과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공청석유를 한 모금만 마시면 되살아난다.

무림인이라면 십 년 동안 면벽수련 해야 쌓을 수 있는 내공을 얻을 수 있다.

헌데 그 귀한 공청석유를 강유는 한 되 가량이나 물 마시듯 마셔버렸었다.

은으로 만든 주전자에 가득 들어있던 것이 공청석유라는 걸 알았다면 감히 그런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금릉의 본점 뿐 아니라 황금성의 중요한 분점에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절세의 영약들을 상비해두고 있다.

강유가 마신 공청석유도 황금성이 어마어마한 거금을 들여 구한 것이었다.

(돈이라면 구하지 못하는 게 없다더니만...)

새삼 황금의 힘에 놀라는 강유였다.

강유는 엉겁결에 마신 공청석유의 약효를 극히 일부만 내공으로 만든 상태다.

공청석유의 약효는 꾸준히 내공으로 전환될 것이다.

내공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강유의 몸은 어지간한 독에는 해를 입지 않게 되었다.

그 외에도 공청석유의 약효는 무궁무진하다.

(어쨌거나 이제부터는 내공이 모자라서 패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강유는 후유증이 심한 마검칠식도 무리없이 펼칠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공이 심후해진 데다가 경맥도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튼튼해졌기 때문이다.

(황금성의 성주를 구해준 대가를 좀 과하게 받은 느낌이 든다.)

강유가 쓴웃음을 지을 때였다.

 

<들어가도 되겠는지요.>

 

연공관의 문 밖에서 누군가의 들리는 음성이 들렸다.

(진상파!)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린 강유는 급히 만년한옥의 탁자에서 내려섰다.

! 들어오십시오.”

강유는 서둘러 책상 위에 준비되어 있는 새 옷을 상체에 걸치며 대답했다.

실례하겠어요.”

덜컹!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연공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백팔금차의 수령인 철관음이 열어주는 철문 밖에는 진상파가 섬전초를 품에 안은 채 서있었다.

카아!

진상파의 품에 안긴 섬전초가 가자미눈으로 강유를 흘겨보며 이빨을 드러낸다.

밧줄 대신 보석이 박힌 화려한 목걸이를 차고 있는 그놈은 여전히 강유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마터면 강유에 의해 산 채로 불에 구워져 야식이 될 뻔 했었다.

영물이니만큼 원한도 쉽게 잊지 않는 것이다.

몸 상태는 어떠신지요?”

했던 말과 달리 진상파는 연공관으로 들어올 생각은 않고 철문 밖에 서서 물었다.

귀한 영약을 주신 덕분에 내상이 완치되었을 뿐 아니라 내공까지 몇 배로 증진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강소협에게 입은 은혜에 비하면 만분지일도 안되는 것이었으니 과례(過禮)는 거두어주세요.”

강유가 포권으로 사례(謝禮)하자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겸양했다.

같이 가시면서 말씀 나누도록 하지요.”

이어 진상파는 옆으로 물러서며 함께 가기를 청했다.

...”

강유는 대답하며 연공관을 나섰다.

 

연공관 밖은 일정한 간격으로 유등(油燈)이 밝혀져 있는 복도다.

지하에 나 있는 그 복도를 진상파가 앞장서서 걷고 강유가 따라갔다.

뒤쪽에서는 철관음이 철문을 닫은 후 따라온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희 개봉분점은 제왕성에 의해 물샐 틈 없이 포위된 상태예요.”

섬전초를 품에 안은 진상파가 조신하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강유는 제왕성의 인간들이 황금성과 척을 지면서까지 개봉분점을 포위하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느덧 제왕성의 목표는 진상파가 아니라 강유 자신이 되어버렸다.

무후 영청공주를 죽인 범인과 관련이 있는 자신을 반드시 잡으려 드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제가 폐를 끼치게 되었군요.”

폐라고 하실 것도 없어요. 비록 제왕성의 무력이 대단하긴 해도 대놓고 저희 황금성을 적대하진 못하니까요.”

강유가 미안해했지만 진상파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돈의 힘보다 무서운 건 세상에 없지.)

강유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진상파가 결혼식 전날 밤에 야반도주하면서 혼담은 깨어졌다.

제왕성으로서는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지만 그렇다고 황금성을 핍박하진 못한다.

비록 제왕성이 강호 무림의 주인이라 해도 대륙의 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황금성과 원수가 되면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제왕성의 진짜 고수들이 도착하면 힘으로 밀고 들어와서 강소협의 신병을 확보하려들 가능성은 있어요. 강소협께서 서둘러 포위망을 빠져나가셔야만 하는 이유랍니다.”

혹시 이 밀로(密路)...?”

유사시에 개봉성 밖으로 탈출하기 위해 지하 깊은 곳에 만들어놓은 비밀통로랍니다.”

 

황금성이 개봉분점으로 삼고 있는 장원은 송나라, 정확히는 북송(北宋) 시절에 지어졌다.

한족(漢族)이 세운 그 어느 왕조보다 허약했던 북송은 수시로 외침(外侵)을 당했었다.

먼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시달렸고 뒤이어 흥기한 여진족의 금()나라에게는 황제가 잡혀가는 수모까지 당했었다.

나라의 힘을 믿을 수 없게 된 유력자들은 스스로 보신책을 마련하는데 골몰했다.

지하 깊은 곳에 오랫동안 숨어 지낼 수 있는 대피시설을 마련하거나 개봉이 포위당할 경우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통로를 만든 것이다.

강유가 상처를 치료한 연공관과 지금 지나고 있는 복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비밀통로일 뿐 아니라 이곳은 값나가는 물건들을 보관해두는 수장고(守藏庫)이기도 해요.”

진상파는 복도에 일정 간격으로 달려있는 철문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내상을 치료하던 연공관에는 무공비급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마 저 철문들 안쪽에는 황금성이 벌어들인 재물들이 쌓여있을 것이다.)

강유가 그 철문들을 보며 생각할 때였다.

여기에 잠깐 들렸다 가도록 해요. 강소협께 드릴 게 있어요.”

진상파는 어떤 철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철관음이 서둘러 다가와 철문을 열었다.

철문에는 <武庫>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무고(武庫)... 병기고인가?)

덜컹!

강유가 생각할 때 철관음에 의해 철문이 열렸다.

연공관의 경우처럼 철문 안쪽은 그리 어둡지 않다.

(역시...)

진상파를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서던 강유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족히 백 평은 됨직한 넓은 밀실에는 수많은 병장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 , , 철퇴, , 활 등등 각가지 형태의 무기들 뿐 아니라 갑옷과 투구, 방패등 호신구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양이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견문이 그리 넓다고 할 수 없는 강유가 보기에도 이 밀실에 보관되어 있는 무기들 중 평범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짐작하셨겠지만 이곳에 수장되어 있는 병장기들은 무림인이라면 꿈에라도 얻기를 원하는 신병이기들이랍니다.”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는 시렁들 사이를 지나며 진상파가 말했다.

고대 이래로 화북(華北) 지방에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화북 지방에서는 수많은 병장기들이 만들어지거나 유입되었다.

그 병장기들 중에서 골동품으로 가치가 있거나 위력이 뛰어난 것들은 대부분 황금성으로 흘러들어왔다.

신병이기들의 값을 제대로 쳐주는 곳은 황금성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봉 뿐 아니라 낙양(洛陽), 서안(西安)등 오래 된 도시에 자리한 황금성 분점들은 대량의 신병이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보관하고 있는 신병이기들의 양과 질에서는 화북지방의 분점들이 금릉에 자리한 황금성 본점을 압도한다.

소협의 검은 독두태보와 싸우는 과정에서 훼손되어 버렸지요?”

이윽고 진상파는 무고의 맨 안쪽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독두태보의 장력이 대단하기도 했지만 제가 사용한 검법이 검에 무리를 준 탓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 검을 대신할 무기를 드리고 싶으니 골라보세요.”

진상파가 옆으로 물러서며 권했다.

진상파와 강유의 앞쪽에는 무고 내에서도 특별해 보이는 장소가 있었다.

습기를 막기 위해 숯과 소금을 채워 넣은 두꺼운 벽체가 삼면의 벽뿐 아니라 바닥과 천장에도 설치되어 있다.

그 안쪽 벽에는 백여 자루의 무기들이 걸려있다.

또 벽 앞쪽에는 철제 탁자가 놓여있는데 그 위에는 낡은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한눈에 봐도 무공비급들이다.

여기에 진열되어 있는 무기들은 특히 귀한 신병이기들이겠습니다.”

강유는 벽에 걸려있는 무기들을 살펴보았다.

잘 보셨어요.”

진상파는 섬전초를 탁자에 내려놓고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검 한 자루를 벽에서 떼어냈다. 칠보(七寶)로 장식된 화려한 칼집에 들어있는 그 검은 한눈에 보기에도 보검이다.

이 검의 이름은 소협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진상파는 보검을 강유에게 내밀었다.

칼집 못지않게 화려하게 꾸며진 보검의 손잡이에는 옛날 글씨체로 <干將>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 간장(干將)!”

보검의 손잡이, 즉 검병(劍柄)에 새겨진 그 글을 판독한 강유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 혹시 이 검이...”

보검을 받아든 강유의 두 손이 흥분으로 벌벌 떨렸다.

검법을 익힌 처지다 보니 뛰어난 보검을 만나면 자제하기가 힘든 것이다.

춘추오대신검(春秋五大神劍)중 하나이며 또 다른 보검 막야(莫耶)와는 부부지간이기도 한 간장이랍니다.”

강유가 만난 이래 처음으로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자 진상파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설 속의 간장, 막야가 실제로 존재했군요.”

강유는 좀체 흥분을 갈아 앉히지 못하며 보검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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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각성(覺醒)

 

 

개봉성 동문에서 삼십여 장쯤 떨어진 관도 중앙에는 두 명의 고수가 대치하고 있었다.

물론 강유와 독두태보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생긴 공터 주변에는 오가던 사람들과 철위사들이 빙 둘러서서 관전을 하고 있었다.

독두태보는 오른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온몸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져 나오고 있다.

강유의 상태는 손 하나만 다친 독두태보와 비교할 수 없다.

입과 코로는 피를 줄줄 흘리고 있으며 가슴 부분은 늑골이 드러날 정도로 살갗이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그러나 처참한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강유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 유유히 걷고 있었다.

독두태보를 가운데 둔 채 휘적휘적 걷고 있는 강유의 오른손에는 짧은 비수가 거꾸로 쥐어져 있다.

누가 봐도 강유는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두태보는 노려보기만 할 뿐 선뜻 공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왜들 저래?”

낸들 아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 싸우더니 이제는 눈싸움만 하고 있구만.”

싸울 생각이 있기나 하는 걸까?”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자기키보다도 큰 강철 지팡이를 든 노파가 한 명 서있다.

곱게 늙은 백발의 그 노파는 황금성의 태상호법인 고독모모였다.

철관음과 백팔금차들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한 그녀는 강유와 독두태보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이구먼. 성격이 불같기로 소문난 독두태보로 하여금 선뜻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독두태보가 강유의 움직임을 따라 몸을 돌리기만 할 뿐 공격으로 나서지는 못하는 것을 보며 고독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에는 한가하게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유는 어떤 상황에도 즉각적인 반응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강유는 마검칠식을 익히고 있다.

독두태보의 몸은 금강불괴에 필적할 정도로 단단하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합으로 증명되었듯이 독두태보의 몸이 제 아무리 단단해도 마검칠식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급소를 찔린다면 냉혈철심 사우처럼 비명횡사할 수밖에 없다.

그걸 알기에 독두태보는 섣불리 강유를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중이다.

 

<이일대로(以逸代勞)... 한가로움으로 수고로움을 대신한다. 이것이 소요보법의 요체다.>

 

독두태보를 가운데 두고 걸음을 옮기면서 강유는 아버지 소요신군의 말을 떠올렸다.

(이일대로... 소요보법의 요체가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시선을 독두태보에게서 떼지 않으며 걷고 있지만 강유의 가슴은 벅찬 흥분으로 뛰놀고 있었다.

목숨이 오가는 실전을 겪으면서 지금까지는 머리로만 이해했던 무공 비결들이 비로소 체화(體化)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다고 남보다 멀리 갈 수 있는 게 아니며 서두른다고 늘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길을 잘못 든 채 빠르게만 가면 돌아올 때 힘들고 서두르면 반드시 허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강유는 각성(覺醒)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강유는 소요보법을 그냥 배운 대로 구사했었다.

헌데 불현 듯 소요보법에 숨겨져 있는 현묘한 이치가 봇물 터지듯 강유의 뇌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 며칠 간 달마독명안의 이치를 깨우치려 노력해온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요보법의 요체를 깨우쳤을 뿐 아니라 저 늙은 대머리가 어떻게 공격을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어떤 허점을 드러낼지도 눈에 들어온다.)

강유는 흥분을 갈아 앉히려 애쓰며 독두태보를 자세히 보았다.

독두태보는 부상당한 오른손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왼손에 공력을 집중시킨 채 강유의 움직임을 따라 제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오른손을 다친 탓에 독두태보의 몸의 균형은 자기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쏠려 있다. 오른쪽을 치는 척해서 균형을 더 흐트려 놓은 후 왼쪽을 공격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강유는 몸을 조금 숙이고 좌우로 흔들면서 독두태보에게 접근했다.

직접 다가가는 것은 아니고 독두태보를 가운데 둔 채 원형을 그리던 행로의 폭을 점점 좁히는 방식이었다.

(선제공격... 아니 유인인가?)

그걸 알아본 고독모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파앗!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강유는 돌연 폭발적으로 쇄도하며 독두태보의 오른쪽 가슴을 비수로 찔러갔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분노한 독두태보가 몸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왼손으로 장력을 날렸다.

!

독두태보의 왼손에 응축될 대로 응축되어 있던 내공이 일거에 해방되면서 강맹한 역도가 강유에게 밀려갔다.

!

순간 강유는 급정거했다가 돌진 방향을 독두태보의 왼쪽으로 틀어버렸다.

부악!

직진하던 강유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독두태보의 왼손에서 터져 나온 장력은 강유의 왼쪽 귓전을 스쳐지나갔다.

그와 함께 독두태보의 왼쪽 허리가 그대로 강유에게 노출되었다. 오른쪽 가슴을 노리는 강유에게 반격하기 위해 무리하게 몸을 오른쪽으로 튼 결과다.

옳거니!”

고독모모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이겼다!)

!

강유는 자세가 무너져 휘청거리는 독두태보의 왼쪽으로 파고들며 그자의 허리를 비수로 강하게 그었다.

대주님!”

젊은 친구가 이겼다.”

관전하고 있던 철위사들과 사람들이 놀라고 환호했다.

(그렇게 간단히 승부가 날 리가 있나?)

오직 한 사람 고독모모만은 하얀 눈썹을 조금 찡그렸을 뿐이다.

그리고 강유도 비수로 독두태보의 허리를 벤 직후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강유의 비수가 베는 순간 독두태보의 허리에서 쇳소리가 난 것이다.

(아차!)

독두태보의 몸이 강철처럼 단단하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강유는 다급히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

오른쪽으로 몸의 균형이 무너졌던 독두태보가 기왕에 돌아간 몸을 더 빨리 돌리며 다친 오른손으로 강유의 가슴을 때린 것이다.

!”

수도(手刀)로 날린 독도태보의 오른손에 가슴을 맞은 강유는 피를 토하며 튕겨져 나갔다.

이미 다쳤던 가슴에 다시 충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숨이 콱 막힌다.

저런...”

그렇지!”

강유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는 반면 철위사들은 안도하며 환호했다.

퍼억!

이장쯤 날아간 강유의 몸이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쿨럭!”

나뒹군 강유는 고개를 들며 대량의 피를 왈칵 토해냈다.

늑골이 몇 개 부러지고 심장이 일시적으로 정지하여 몸을 움직이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독두태보의 오른손에 제대로 공력이 주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강유의 검이 깨진 파편이 여럿 박혔었기 때문이다.

만일 독두태보의 내공이 모두 주입된 수도에 맞았다면 강유의 몸은 동강 났을 것이다.

(... 자만했다!)

강유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애쓰며 자책했다.

독두태보의 반응과 약점은 정확히 간파했다.

문제는 독두태보의 몸에 도검이 불침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약점을 파악했어도 공격이 먹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상대를 얕보는 경적(輕敵)과 자기중심적인 예단(豫斷)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강유는 또 몸으로 터득하게 된 것이다.

(죽는 줄 알았군!)

독두태보도 식은땀을 흘리며 강유쪽으로 몸을 돌렸다.

만일 강유의 비수가 마검칠식으로 휘둘러졌다면 독두태보는 허리가 끊어져 죽었을 것이다.

독두태보로서는 천만다행인 게 강유의 몸은 마검칠식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노는 것은 여기까지다!”

화악!

독두태보는 더 이상의 변수를 방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강유의 목을 움켜쥐어왔다.

(이런...)

엉거주춤 일어서던 강유는 독두태보의 왼손이 벼락같이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일시적으로 멎은 탓에 빠른 반응을 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강유는 여지없이 독두태보의 손아귀에 목이 틀어잡힐 위기에 처했다.

덜컥!

하지만 그 직후 강유의 목을 움켜쥐려던 독두태보의 몸이 갑자기 굳어졌다.

끄윽...”

강유의 목을 움켜쥐려던 자세 그대로 벌벌 떠는 독두태보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강유는 놀라면서도 급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와 함께 강유는 비로소 독두태보가 공격을 멈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언제였는지 백발의 곱게 늙은 노파가 나타나 강철 지팡이 끝을 독두태보의 등에 대고 있었다.

백발노파는 물론 고독모모다.

지지지!

고독모모의 강철 지팡이 끝에서 일어난 벼락이 독두태보의 몸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절세고수다! 흑백신귀에 못지않은...)

강유는 한눈에 고독모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을 지닌 고수임을 알아보았다.

이번에 제왕성은 우리 황금성에 너무 큰 무례를 범했다. 살려줄 테니 돌아가서 혈가람에게 전해라.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라고...”

지지지!

준엄하게 말하는 고독모모의 강철 지팡이에서 일어나는 벼락이 강해졌다.

끄윽!”

퍼억!

독두태보는 눈을 까뒤집고 나뒹굴었다.

기절한 것이다.

성주가 신세를 졌구먼. 노신은 황금성에서 태상호법 노릇을 하고 있는 고독모모라고 하네.”

독두태보의 몸에서 강철 지팡이를 뗀 고독모모가 강유를 돌아보았다.

(황금성의 태상호법!)

소협 덕분에 본성의 명예를 지킬 수가 있었어. 은혜 있지 않음세.”

놀라는 강유에게 고독모모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별 말씀을...”

당황하며 마주 포권하던 강유는 옆을 돌아보았다.

섬전초를 품에 안은 진상파가 다가오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며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원만하게 수습이 되었다.)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다가오는 진상파를 보며 강유는 비로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잠시 멈췄던 심장도 진상파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 * *

 

(다행히 내가 직접 나서서 강유를 구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귀면지존은 안도 아닌 안도를 했다.

그는 지금 개봉성 내에 자리한 어느 절의 칠층탑 꼭대기에 서있었다.

그 탑으로부터 수백 장 떨어진 개봉성 밖의 강유와 진상파 일행이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강유는 여자면서도 키가 그와 비슷한 백팔금차 두 명의 부축을 받으며 개봉성 동문쪽으로 오고 있었다.

(고독모모 덕분에 강유 놈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이 찜찜한 기분은 어째서인가?)

강유를 노려보는 귀면지존의 미간이 귀신 가면 속에서 찌푸려졌다.

(강유 놈의 실력으로는 제왕성의 철위사를 겨우 상대할 수 있어야 정상이다. 헌데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의 몸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칼질까지 했었다.)

강유가 독두태보를 하마터면 죽일 뻔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귀면지존이었다.

(무공이라는 건 점수(漸修;점진적 수행)로 발전하는 것이지 저놈의 경우처럼 돈오(頓悟;별안간 깨달음)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귀면지존의 가슴 속에서는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강유 놈의 무공은 상궤를 벗어나 갑자기 몇 단계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다. 그 원인이 뭔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한다.)

가면 속에서 귀면지존의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

(강유 놈이 고불선사에게서 받은 물건의 안전을 위해 뒤를 밟다가 생각지도 않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발견이 과연 화로 진행될지 복으로 변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구나.)

스스스!

귀면지존의 모습은 곧 탑 위에서 사라졌다

 

***

 

밤이 깊어가고 있다.

삼경(三更)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지만 개봉의 번화가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늦도록 인파가 끊이지 않는 번화가에 자리한 황금성 개봉분점은 이장(二丈)이 넘는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웅장하면서도 고색창연한 황금성 개봉분점은 송나라 시절 어떤 왕족이 막대한 재물을 투입해서 만든 장원이다.

수만 평 넓이인 장원 안에는 별세계가 꾸며져 있다.

여러 개의 정원뿐 아니라 상당히 큰 인공 호수까지 품고 있어 왕궁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화려하다.

그 황금성 개봉지점 깊은 곳에는 돌과 강철로 지어진 육중한 건물이 한 채 서있다.

몇 명의 백팔금차가 지키고 있는 이 건물은 보물창고 겸 연공관이다.

 

* * *

 

연공관으로 사용되는 밀실은 어둑하다.

천장에 몇 개의 야명주(夜明珠)가 박혀있을 뿐 불은 켜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책은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밝기다.

밀실 사면의 벽에는 책과 죽간들로 채워진 책꽂이가 빼곡하게 세워져 있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과 죽간들은 하나같이 세상에 나가면 피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무공비급들이다.

무공비급으로 가득 찬 책꽂이 외에도 밀실에는 책상과 함께 의자도 몇 개 있다.

하지만 밀실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는 중앙에 놓인 넓직한 돌 탁자다.

우윳빛의 새하얀 돌 탁자는 사실 만년한옥(萬年寒玉)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년한옥은 천고의 보물로써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병이 치유되고 내공이 증진된다.

그 때문에 만년한옥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비싸게 거래된다.

헌데 이 밀실에는 폭 네 자에 길이 일곱 자, 두께는 한자나 되는 거대한 만년한옥으로 만든 탁자가 있다.

가히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보물이다.

“...”

만년한옥의 탁자 위에는 강유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슈우우! 슈우!

하의만 걸치고 상체는 벌거벗은 강유의 온몸에서는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땀으로 범벅이 된 강유의 몸에는 놀랍게도 상처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냉혈철심 사우, 독두태보와 거푸 싸우면서 입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은 이제 약간의 흉터로만 남아있다.

불과 몇 시진 만에 강유는 모든 내, 외상에서 완치된 것이다.

단순히 상처가 치유된 정도가 아니다.

강유는 내공도 비약적으로 증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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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강행돌파

 

 

대주님! 심상치가 않습니다.”

저희도 마차들을 저지하는데 가세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독두태보의 뒤에 서서 보고 있던 동위사들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기하라!”

하지만 독두태보는 손을 들어 수하들을 진정시키면서 폭주하는 마차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마부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헌데 그중 한 대의 마차를 모는 늙은 마부는 오히려 연신 고삐를 내리쳐 말들을 재촉하고 있는 게 독두태보의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

독두태보는 눈을 부릅뜨며 몸을 날렸다.

대주님!”

왜 그러십니까?”

독두태보의 뒤에 서있던 동위사들도 깜짝 놀랄 때였다.

뒤에서 네 번째 마차에 진상파가 타고 있다.”

독두태보가 쏘아진 화살같이 날아가면서 외쳤다.

역시 대주님!”

단박에 표적을 찾아내셨다.”

두 명의 동위사들도 즉시 독두태보의 뒤를 따라 날아올랐다.

 

마부석에 전노인과 나란히 앉아 있던 강유는 언덕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독두태보가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자신들이 탄 마차로 날아오는 게 들어왔다.

(과연 동위사대의 대주답구나. 단번에 이 마차를 골라내다니...)

강유는 눈을 번뜩이며 마부석에서 일어섰다.

... 공자! 일어서시면 위험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노인장께서는 개봉성 동문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가십시오.”

휘익!

기겁하는 전노인에게 말하며 강유는 마차의 지붕으로 가볍게 뛰어올라갔다.

그 사이에 독두태보는 어느덧 마차에서 오장(五丈;15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독두태보의 오장쯤 뒤에는 두 명의 동위사들도 날아오고 있다.

도중에 멈추면 절대 안됩니다!”

!

전노인에게 외치면서 강유는 추격해오는 독두태보를 향해 몸을 날렸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으면서...

이랴!”

철썩! 철썩!

강유의 지시를 받은 전노인은 전력으로 고삐를 흔들어 말들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두두두!

히히힝! 푸르르!

주인의 재촉을 받은 두 필의 말은 거품을 물며 앞으로 달려간다.

 

날아오던 독두태보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이 추격하던 마차의 지붕 위로 죽립을 쓴 자가 뛰어오르더니 다음 순간 발검을 하며 자신을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다.

강유!”

독두태보의 입에서 분노에 찬 노성이 터졌다. 맹렬히 날아오르는 바람에 죽립이 벗겨지며 강유의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우의 수하들의 진술을 토대로 그린 용모파기와 일치하는 얼굴이다.

!

그 사이에 독두태보와의 거리를 단번에 일장 안쪽으로 좁힌 강유가 벼락같이 검을 내질렀다.

앞으로 내질러지는 강유의 검이 나선형으로 홱 뒤틀린다.

마검칠식!”

강유가 펼치는 검법의 정체를 알아본 독두태보는 경악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워 피할 틈은 없었다.

독두태보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을 후려쳐서 강유의 검을 막으려 했다.

!

나선형으로 뒤틀린 강유의 검과 강철처럼 변한 독두태보의 손바닥이 접촉하며 벼락이 근처에 떨어진 듯한 굉음이 일어났다.

(당했다!)

직후 독두태보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강유가 내지른 검의 검극(劍極)에서 막는 게 불가능한 파괴력이 손바닥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강유의 검을 막은 독두태보의 손바닥은 강철보다도 더 굳세다.

하지만 강유의 검극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힘은 독두태보의 그 손바닥을 두부처럼 짓뭉개려 한다.

헌데 바로 그 직후였다.

빠캉! !

독두태보의 손바닥을 으스러트리려던 강유의 검이 돌연 유리처럼 깨지며 흩어졌다. 거푸 펼쳐진 마검칠식의 파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검이 깨져버린 것이다.

검이 깨지면서 마검칠식의 파괴력도 안개같이 흩어진다.

크아!”

독두태보는 으스러지는 것을 면한 손바닥으로 독문의 장공(掌功)인 철장진살(鐵掌振煞)을 쏟아내었다.

!

집채만한 바위도 간단히 으스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 강유의 가슴에 작렬했다.

!”

후두둑!

가슴이 뭉개진 강유는 입과 코로 피를 뿜어내며 뒤로 날아갔다.

콰당탕!

독두태보의 장력에 가슴을 강타당한 강유의 몸뚱이가 이장 쯤 날아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

독두태보 역시 허공에서 휘청하다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비틀거리며 내려서는 독두태보의 오른손에는 유리처럼 깨진 검의 파편이 여러 개 박혀있었다.

대주님!”

날아오던 동위사들이 그걸 보고 기겁을 했다.

(... 검이 견디지 못하고 깨졌다.)

바닥에 나뒹굴었던 강유는 입과 코로 피를 게워내며 일어나려 애썼다. 그의 손에는 손잡이만 남은 검의 잔해가 들려있었다.

죽일 놈!”

크아!”

! 스악!

두 명의 동위사가 강유에게 쇄도하며 장력을 날리고 검을 휘둘렀다.

그들이 발휘하는 장력은 천둥같고 검기는 번개같았다.

동위사들 개개인은 냉혈철심 사우보다 강하지 않다.

그렇다고 실력이 현격하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니다. 약간 약한 정도다.

그런 동위사 둘의 협공인지라 사우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흉험했다.

꽈앙! 쩍쩍!

장풍이 바닥을 박살내고 검기가 지면을 길게 가르며 골을 판다.

휘릭!

하지만 강유는 피를 토하면서도 이미 몇 장 밖으로 훌쩍 날아갔다가 내려서고 있었다.

소요보법!”

정말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놈이었구나.”

동위사들은 강유의 앞쪽으로 내려서며 이를 갈았다.

그들도 마침내 강유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죽인다!”

()대주의 복수를 해주마.”

동위사들이 살기를 뿜어내며 강유에게 다가섰다.

그자들 개개인의 실력이 사우보다 아주 아래는 아님을 알아본 강유는 긴장하며 물러섰다.

하물며 강유 자신은 온전한 몸 상태가 아니다.

마검칠식을 펼친 후유증으로 경맥들이 뒤틀린 상태에서 독두태보의 강맹한 장력에 맞았다.

내상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놈은 내게 맡기고 너희들은 진상파의 신병을 확보하라.”

독두태보가 손바닥에 박힌 검의 파편을 뽑아내면서 다가왔다.

강유를 공격하려던 동위사들이 독두태보를 돌아보았다.

진상파가 개봉성에 들어가면 시끄러워진다. 그 전에 따라잡아야한다.”

존명!”

분부 받들겠소이다.”

휘익! !

독두태보의 지시를 받은 동위사들은 새처럼 날아올라 폭주하는 마차들을 추격해갔다.

어느덧 십여 대의 마차들은 개봉성 동문에 거의 이르러 있었다.

(진소저 말 대로 아슬아슬하구나. 일단 개봉성 안으로 들어가기만 해도 제왕성의 인간들이 진소저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텐데...)

강유는 성문을 지키던 관병들이 당황하며 마차들 앞에서 비켜서는 걸 곁눈질했다.

흐흐흐! 본좌가 실로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되었구나. 무후님을 시해한 원수를 잡을 수 있는 단서를 확보하게 되었으니...”

독두태보는 극도로 흥분한 표정이 되어 강유를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요? 무후를 시해한 원수의 단서라니...”

강유는 소요보법을 펼쳐서 산책하듯 걸으며 독두태보에게 물었다.

십팔 년 전, 우리 제왕성의 안주인이시며 당금 황제의 고모 되시는 무후 영청공주께서 마검칠식에 변을 당하셨었다.”

마검칠식?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독두태보의 말에 대꾸하던 강유는 입을 다물었다.

 

<끄윽! 네놈... 네놈이 어떻게 마교의 마검칠식(魔劍七式)...>

 

가슴에 구멍이 난 사우가 죽어가며 내뱉은 말이 떠오른 것이다.

(아버지가 필살일초라며 가르쳐주신 검법이 사실은 마교의 마공이었다. 게다가 제왕성의 안주인은 마검칠식에 죽었었고...)

어찌 된 내막인지 깨달은 강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소요신군 강조는 어떤 노인을 구해준 대가로 필살일초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헌데 알고 보니 필살일초가 바로 마교의 저주받은 검법 마교칠식이었다.

자칫하다가는 강씨 집안이 제왕성과 철천지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흐흐흐! 무후님을 시해한 흉수와 관련 있는 네놈을 잡아가면 성주님께서 큰 상을 내리시겠지.”

독두태보의 얼굴이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강유가 마검칠식을 어떻게 익히게 되었는지 설명해도 통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는데...

(상대는 지금의 내 실력으로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고수... 아무래도 오늘 좋게 끝나긴 힘들겠구나.)

독두태보와 대치한 강유의 얼굴이 굳어졌다.

 

* * *

 

두두두!

십여 대의 마차가 개봉성 동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성문 주변의 관병들과 사람들은 당황하며 급히 피했다.

끼럇!”

철석! 철썩!

전노인은 고삐를 연신 흔들어 말을 몰아붙였다.

앞선 마차들은 이미 성문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다.

진상파를 태운 전노인의 마차도 성문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되었다!)

전노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실 때였다.

화악! !

돌연 마차의 앞뒤로 두 명의 사내가 날아 내렸다. 독두태보의 지시를 받고 추격해온 동위사들이다.

으헉!”

! !

전노인이 기겁할 때 마차 앞쪽에 내려선 동위사는 양손으로 두 마리 말의 고삐를 하나씩 틀어쥐었다.

히히힝! 히힝!

콰드드!

엄청난 힘에 고삐가 잡힌 두 마리 말은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했다.

크왓!”

마차 뒤로 내려선 동위사는 양손으로 마차 후면의 기둥들을 움켜잡으며 버텼다.

콰드드! 드드드!

그 바람에 마차도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으으으!”

동위사들이 달리던 말과 마차를 어렵지 않게 멈춰 세우자 전노인은 와들와들 떨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인생인지라 무림인들에게 죄를 지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잘 아는 때문이다.

(간발의 차이였다. 마차가 성문 안으로 들어갔으면 관할과 규정에 까다로운 관병들이 개입해서 귀찮게 했을 것이다.)

앞쪽에서 말들의 고삐를 틀어쥔 동위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차는 개봉성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수십 명의 관병들이 성문과 성문 위의 성루에서 지켜보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제 아무리 제왕성이 강호 무림의 주인이라 해도 황실과 각을 세울 수는 없다.

하물며 황실에 대한 영향력은 황금성이 제왕성보다 한 참 앞선다.

만일 진상파가 개봉성 안으로 들어갔다면 잡아가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말고삐를 잡은 자가 안도할 때 뒤쪽에서 마차를 잡아 세웠던 동위사가 마차의 문쪽으로 다가갔다.

실례하겠소 진소저.”

덜컹!

그자는 거칠게 마차의 문을 열었다.

창문이 닫혀있어서 어둑한 마차 안에는 진상파가 흐트러짐이 일체 보이지 않는 도도한 자태로 앉아있었다.

카아!

진상파 대신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섬전초가 이빨을 드러내며 앙칼지게 동위사를 노려보았다

순순히 나오시겠소? 아니면 험한 대우를 받으시겠소?”

동위사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할 때였다.

죽이지는 마.”

진상파가 누군가에게 차갑게 말했다.

뭐요?”

!

동위사가 어리둥절할 때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그자의 목을 뒤에서 움켜잡았다.

너무도 빠르고 또 강해서 동위사는 그 손을 피할 엄두도 벗어날 노력도 할 수가 없었다.

끄윽!”

우둑!

자신의 목뼈가 부러지려는 소리를 내는 것을 느끼며 동위사는 그대로 기절했다.

언제였는지 동위사 뒤에는 키가 무려 칠척이나 되는 거구의 여자가 나타나 그자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이 거구의 미녀는 물론 백팔금차의 수령인 철관음이었다.

그녀가 마침내 진상파의 몸에서 풍기는 백리향의 냄새를 추적하여 개봉에 도착한 것이다.

죽일 놈! 감히 황금성의 성주님께 무례를 해? 아가씨의 분부가 아니었다면 모가지를 부러트렸을 것이다.”

퍼억!

철관음은 기절한 동위사의 몸뚱이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철관음! 네년이 어떻게 여기에...!”

말고삐를 잡고 있던 동위사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경악할 때였다.

! 콰직!

벼락 치듯 내리쳐진 철퇴(鐵槌)와 쇠몽둥이가 그자의 양쪽 어깨뼈를 박살내 버렸다.

크아아악!”

양쪽 어깨뼈가 자끈동 부러진 동위사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 콰직!

그런 그자의 등을 한 쌍의 발이 세차게 내리밟았다.

황금성에 죄를 짓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성주님께 무례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

각기 철퇴와 철장(鐵杖)을 든 육척 장신의 여자무사들이 좌우에서 동위사의 등을 밟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황금색의 갑주로 무장한 그녀들은 물론 백팔금차들이다.

화악! 휘익!

뒤이어 십여 명의 백팔금차들이 허공에서 질풍같이 날아내려 마차를 에워쌌다.

... 백팔금차!”

양쪽 어깨뼈가 부러진 채 바닥에 처박힌 동위사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백팔금차 개개인의 능력은 제왕성의 은위사에 못지않다.

그 백팔금차들이 열명 넘게 나타난 것이다.

아주 늦지는 않았네.”

진상파가 마차 안의 의자에 단정하게 앉은 채 차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왕성의 방해가 있어서 길을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철관음이 고개를 숙였다.

고독할머니는?”

저희보다 먼저 도착하셔서 아가씨의 동행을 살피고 계십니다.”

애써 침착한 척 묻는 진상파의 질문에 철관음은 마차가 달려온 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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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장

 

                    마지막 고비

 

 

문은 물론 창문까지 굳게 닫혀있어서 마차 안은 어둑했다.

강유와 진상파는 마차 안에 설치 된 의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양산을 떠난 두 사람은 제왕성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산길로만 이동하여 마두집에 이르렀었다.

하지만 마두집에서 개봉까지는 평지라 마땅히 몸을 숨기며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부득불 두 사람은 마두집에서 마차를 대절하여 개봉까지 온 것이다.

“시간상 곧 개봉에 도착할 거예요.”

마차의 앞쪽을 보는 위치에 앉아있는 진상파가 말했다.

그녀의 품에는 섬전초가 몸통 길이만한 꼬리를 동그랗게 만 채 잠들어 있다.

강유에게 사로잡힌 후 이틀 밖에 안 지났건만 섬전초는 마치 오래전부터 길들여진 것처럼 진상파를 따르고 있다.

수백 년을 산 영물이라 진상파의 남 다른 점을 알아차린 듯 했다.

“개봉은 오대십국(五代十國) 이래 여러 왕조의 도읍이었을 뿐 아니라 수운(水運)의 중심지이기도 해요. 그 때문에 개봉의 분점은 저희 황금성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답니다.”

“개봉분점에만 무사히 진입하면 제왕성의 추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최소한 모용준의 심복들이 허튼 짓을 시도하진 못하겠지요.”

“그렇겠습니다.”

진상파의 말에 강유도 동감을 표했다.

“그나저나 저 때문에 안탕산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제법 멀리 돌아가시게 되었군요.”

진상파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가친이 맡긴 일은 완수하고 돌아가던 길이었으니...”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사실 강유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우와의 대결 과정에서 강유 자신의 정체가 제왕성에 노출되었었다.

제왕성의 보복이 있을지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안탕산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경고를 해야만 한다.

“달마독명안의 비결은 완전히 외우셨습니까?”

초조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강유는 화제를 돌렸다.

“외우기는 했는데... 소림사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제가 달마독명안을 수련해도 되는 것인지요?”

진상파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림에서 다른 문파의 절기를 허락 없이 익히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그리고 강유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달마독명안을 만든 인물은 소림사의 고승 고불선사다.

소림사가 자신들의 절기가 유출되는 것을 병적으로 꺼려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물며 달마독명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까지 하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과거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은 무림인인 저보다 황금성을 이끌어가야 하는 소저에게 더 필요한 능력일 것입니다.”

강유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사실 그는 충동적으로 진상파에게 달마독명안을 가르쳐주었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어쩐지 달마독명안이 진상파를 위해 만들어진 절기인 듯이 느껴진 때문이다.

“물론 수많은 인간을 상대해야하는 제게 정말 유용한 재주이긴 하지만...”

진상파는 석연찮은 기색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했다.

달마독명안이 소림사 출신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곱씹어볼수록 너무도 대단한 비술인 게 느껴져서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다.

“고불선사께서도 당신이 고심하여 만든 절기가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다 여기고 흡족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강유가 안심을 시키자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고불선사님께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니 그분의 딸을 찾는 데 저희 황금성의 능력을 총동원하도록 하겠어요.”

“그래 주시면 제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강유가 대답할 때였다.

덜컹!

느리지만 천천히 가고 있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끼이...

그 바람에 강유와 진상파가 움찔했을 뿐 아니라 잠 들어있던 섬전초도 깨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강유의 자기 뒤쪽의 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벽 뒤가 마부석이다.

 

<밖... 밖에 좀 나와 보셔야겠습니다요 손님.>

 

마부석 쪽에서 전노인의 겁에 질린 음성이 들려왔다.

(문제가 생겼구나.)

직감적으로 변고를 알아차린 강유는 마차 문을 조금 열고 밖을 살펴보았다.

백여 장 쯤 앞쪽에 개봉성의 동문이 보이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려던 우마차들과 사람들이 멈춰 서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성문 앞에 일단의 무사들이 진을 친 채 검문을 하고 있었다.

그자들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마차는 내부를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통과시키고 있다.

그 때문에 심각한 정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관병(官兵)들은 아닌데... 어떤 자들이 관도를 막고 검문 중입니다요.”

전노인이 겁에 질려서 앞쪽을 살펴보며 말했다.

(제왕성의 인간들이다!)

강유는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검문을 하고 있는 자들은 제왕성의 위사들인데 철(鐵)위사 뿐 아니라 그 윗 서열인 동(銅)위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십여 명의 철위사들이 직접 검문을 하고 있으며 길가의 조금 높은 곳에는 세 명의 동위사들이 서서 길 전체를 감시하고 있다.

세 명의 동위사들중 한명은 바로 동위사대의 대주인 독두태보였다.

외총관 궁무독의 판단에 따라 은(銀)위사대 대주 백월사신은 금릉 방향을 수색 중이고 개봉쪽은 독두태보가 담당한 것이다.

이곳 동문 뿐 아니라 개봉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제왕성의 고수들이 통제하고 있는 중이다.

(전체 인원이 오백 명 정도인 동위사들은 개개인이 철위사대 대주였던 냉혈철심 사우에 필적하는 고수들이라던가?)

강유는 조금 연 문을 통해 성문쪽을 살피며 심각해졌다.

하마터면 자신을 죽일 뻔했던 사우에 못지않은 고수가 최소한 세 명이나 더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아마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 뇌종횡(雷縱橫)일 것이다.)

강유는 두 명의 동위사를 거느린 채 눈을 부라리면서 사람들과 마차들을 노려보는 독두태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독두태보는 그 독특한 외양 때문에 멀리서도 알아볼 수가 있다.

(상대가 동위사대 대주라면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필살일초를 쓴다 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데...)

강유가 난감해 할 때였다.

“제왕성의 인간들인가요?”

뒤에서 진상파의 음성이 들렸다.

“제왕성 측에서도 소저를 개봉에 들여보내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철위사들 뿐 아니라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가 직접 나서서 검문을 하고 있군요.”

마차의 문을 닫은 강유는 다시 진상파와 마주 앉았다.

“아슬아슬하네요.”

진상파는 아미를 조금 모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개봉이 바로 목전인데...”

“개봉까지의 거리도 있지만... 사실 저를 도와줄 분이 조만간 이곳에 도착할 거예요.”

“그렇습니까?”

진상파의 말에 강유는 흠칫 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저의 몸에서는 백리향(百里香)이 배어있답니다.”

진상파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옅은 홍조를 띤 그녀의 두 볼이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강유였다.

“백리향이라면 백 리밖에 까지 향기가 퍼진다는 꽃 아닌지요?.”

“백리까지는 아니고... 훈련받은 사람이라면 십 리 밖에서도 백리향의 출처를 가늠할 수 있어요.”

“그럼 소저의 몸에서 나던 은은한 향수같은 게...”

“저는 유괴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갓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음식에 백리향을 섞어서 먹어야만 했어요. 덕분에 저의 몸에는 백리향이 깊이 배어있어서 어디를 가든 흔적이 남는답니다.”

진상파는 애잔한 표정이 되었다.

귀하고 부유하게 태어난 인생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철이 든 이래 진상파는 늘 독살과 유괴의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소저를 호위하는 분들이 백리향을 맡으며 접근하고 있겠습니다.”

“아마 거의 접근해왔을 텐데... 자칫 제왕성의 인간들에게 먼저 발견될 수도 있겠어요.”

“그럼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봐야겠지요.”

덜컥!

강유는 웃으며 다시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무얼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음이 간다.)

진상파는 강유가 마차에서 나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며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문이 닫히고 이제 마차 안에는 진상파 혼자 남게 되었다.

(이제껏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해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하나뿐인 핏줄인 나를 강하게 훈육하신 덕분인데... 어제 이후로는 강유, 저 사람에게 저절로 의지하게 되었다.)

닫힌 문을 보며 진상파의 얼굴이 도화 빛으로 물들었다.

강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평안해지고 몸은 더워진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상상을 못했던 변화다.

“언니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 모양이구나 초아야.”

진상파는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가르릉!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섬전초도 꼬리를 흔들며 고양이처럼 골골 거렸다.

 

“올라가겠습니다.”

마차에서 나온 강유는 고개를 숙인 채 마부석으로 올라갔다.

“공자! 안에 계시지 않고...”

마부 전노인은 옆으로 물러앉아 강유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죽립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요.”

마부석에 앉은 강유는 전노인이 건네준 죽립을 머리에 썼다. 제왕성의 무리들로부터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냉혈철심 사우를 죽인 강유의 용모파기는 이미 널리 배포되었을 것이다.

“답답해서 나오셨는지요?”

“그렇기도 하지만... 이걸 받아주십시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강유는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를 전노인 손에 쥐어주었다.

“삯이라면 이미 과하게 주셨는데...”

전노인은 돈주머니를 두 손으로 받으며 입이 귀에 걸렸다.

“삯을 더 드리는 건 제가 하자는 대로 해주셨으면 해서입니다.”

돈주머니를 챙기던 전노인은 강유의 낮지만 심각한 목소리에 침을 꿀꺽 삼켜야했다.

 

* * *

 

독두태보는 언덕 위에 서서 관도를 오가는 사람들과 우마차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법 높은 이 언덕은 개봉 성문과 오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있다.

독두태보 뒤에는 동위사 두 명이 서서 관도의 좌측과 우측을 따로 감시하고 있었다.

(총관 말대로 진상파는 개봉으로 행로를 바꿨을 가능성이 크다. 황금성 본점이 있는 금릉까지는 너무 멀어서 우리 제왕성의 이목에 걸리지 않고 갈 자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두태보는 언덕 아래를 지나 개봉의 동문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우마차들을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다.

철위사들이 사람들은 물론이고 모든 우마차의 문을 열어서 꼼꼼하게 검문을 하는 게 그의 눈에 들어온다.

(진상파가 황금성 개봉분점으로 피신할 생각이라면 오늘쯤 모습을 드러낼 게 분명하다. 진상파와 동행하고 있는 소요신군의 아들 놈 역시...)

독두태보가 기필코 진상파와 강유를 포획하고 말겠다는 결의를 다질 때였다.

진상파와 강유를 태운 마차가 마침내 철위사들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 * *

 

두 명의 철위사가 진상파와 강유가 탄 마차로 다가왔다.

앞쪽에는 검문을 통과한 마차들이 개봉의 동문을 향해 가고 있으며 좌우에는 몇 대의 마차가 멈춰 서서 검문을 받고 있었다.

“이 마차에는 몇 명이 타고 있소?”

철위사 중 한명이 마부석에 나란히 앉은 강유와 마부를 예리한 눈으로 살펴보며 물었다.

그자의 동료는 마차의 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그게...”

전노인은 긴장해서 더듬거릴 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죽립을 깊이 눌러쓴 강유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실례하겠소.”

마차로 다가간 철위사가 마차의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팅!

팔짱을 낀 자세인 강유가 손 안에 숨기고 있던 동전 하나를 나란히 서있는 다른 마차의 말에게 은밀히 튕겼다.

퍽!

동전은 말의 엉덩이에 깊이 꽂혔다.

히히힝!

순간 말이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번쩍 쳐들고 날뛰었다.

“헉!”

“이놈의 말이 왜 갑자기...”

그 마차를 검문하던 철위사들은 기겁하며 물러섰고 마부는 당황하여 급히 말고삐를 당겼다.

두두두!

하지만 동전이 엉덩이에 깊이 박힌 탓에 고통과 공포에 휩싸인 말은 마차를 끌고 미친 듯이 앞으로 돌진했다.

앞서가던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기겁하며 길가로 피했다.

“잡아라!”

“저 마차가 수상하다.”

휘익! 휙!

철위사들 몇 명이 미쳐 날뛰는 말이 끄는 마차를 따라 몸을 날렸다.

언덕 위의 독두태보와 두 명의 동위사도 눈을 번뜩이며 그 마차를 주시했다.

팅! 티팅!

그 사이에 강유는 동전들을 연달아 좌우에 서있는 말들에게 튕겨 보냈다.

퍽! 퍼퍽!

강유가 날린 동전들은 여지없이 말들의 엉덩이에 깊이 박혔으며,.

히히힝! 히히힝!

두두두! 콰드드!

동전에 맞은 말들은 미친 듯이 날뛰거나 앞으로 돌진했다.

“헉! 이게 무슨...”

“말들이 미쳐 날뛴다.”

“조심해라!”

검문을 하던 철위사들이 당황하여 이리저리 피한다.

“지금입니다.”

주변의 다른 마차들이 치달리는 것을 확인한 강유가 전노인에게 짧게 말했다.

촤락! 철썩!

그 즉시 전노인은 고삐를 세차게 흔들어 말들의 엉덩이를 때렸다.

히히힝! 히힝!

두두두!

주인이 흔든 고삐에 세차게 얻어맞은 두필의 말이 맹렬히 앞으로 돌진했다.

“흑!”

그 바람에 마차 안의 진상파는 하마터면 바닥에 나뒹굴 뻔 했다.

끼이!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섬전초가 깜짝 놀라며 품으로 파고 들었다.

두두두! 두두!

어느덧 진상파와 강유가 탄 마차를 포함한 십여 대의 마차들이 경주하듯이 개봉의 동문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했다

“전부 잡아라!”

“마차를 멈추게 하라.”

“저 마차들 중 하나에 진상파가 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휘익! 쐐액!

철위사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마차들을 따라왔다.

팅! 팅!

달리는 마차의 마부석에 앉은 강유는 쥐고 있던 동전들을 모두 좌우로 날려 보냈다.

퍼퍽! 퍽!

그 동전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날아가 주변의 말과 소들의 몸뚱이로 파고들었다.

상처를 입은 말과 소들은 예외없이 미쳐 날뛰었다.

“조... 조심해라!”

“위험하다. 피해라!”

마차들을 쫓던 철위사들이 기겁했다. 다친 말과 소들이 부리는 난동에 휘말려 버린 때문이다.

두두두! 두두!

추격하려던 철위사들이 허둥대는 사이에 십여 대로 불어난 마차들은 개봉을 향해 돌진해갔다. 마치 마차 경주라도 하듯이...

앞서 가던 우마차와 사람들은 길가로 피했고 맨 처음에 달려간 마차를 추격하던 철위사들도 다급히 몸을 날려 관도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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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운명을 읽는 눈

 

 

(황금성에 갇혀있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수한 곤경과 상심을 겪겠지만 오늘 밤의 이 따뜻하고 유쾌한 기억이 그때마다 큰 위안과 힘이 될 것이다.)

섬전초를 품에 안은 진상파의 가슴 깊은 곳에서 따스한 감정이 번져 올랐다.

(강유, 저 사내가 아니었다면 결코 할 수 없었던 특별한 경험...)

고개를 들며 강유를 훔쳐보려던 진상파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언제부터인지 강유는 고개를 돌려서 오른쪽 절벽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상파를 긴장시킨 것은 강유가 단순히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강유는 한쪽 무릎을 꿇어서 언제든지 위로 뛰어오를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왼손으로는 바닥에 놓여있던 검을 끌어당겨 움켜잡고 있다.

(강소협의 온몸에서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진상파는 숨을 멈추며 강유의 모습을 주시했다.

섬전초도 무언가 느낀 듯 우는 소리를 내지 않고 강유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뭘까?)

긴장한 진상파는 강유가 보고 있는 오른 쪽 절벽 위를 함께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진상파의 이목에는 감지되는 것이 없었다.

내공이 그리 심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강유가 지닌 특별한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스으...

진상파와 달리 강유의 이목에는 무언가 절벽 위에서 사라지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산짐승이었을까?)

강유는 절벽 위를 노려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이제 더 이상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산짐승은 아니다. 방금 전까지 날 지켜보던 시선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다.)

강유는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되었다.

고불선사가 묵장진언을 연구하여 만든 달마독명안을 수련한 덕분에 강유는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보다 몇 배 더 민감해진 강유의 감각은 방금 전까지 오른쪽 절벽 위에 누군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등봉현부터 날 따라다닌 시선의 주인일 텐데... 대체 어떤 자이기에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는 것인가? 고불선사님을 이용하고 시해한 귀면지존과 관련 있는 자일까?)

덜컥!

강유는 움켜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팽팽하던 긴장도 풀었다.

(상황이 끝났네.)

그제야 진상파도 소리없이 안도의 한숨 내쉬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저곳에 무언가 있었군요.”

진상파는 절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마 지나가던 산짐승이었을 것입니다.”

강유는 웃으며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깊은 산중이니 오가는 짐승도 많겠지요.”

진상파는 강유가 자신이 걱정할까봐 둘러대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이래저래 쉽게 잠들기는 틀린 것같습니다.”

“저도 잠이 다 달아나버렸네요.”

진상파는 품에 안겨 골골 거리는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잠도 오지 않고 하니 한 가지 재미있는 재주를 배워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 그녀에게 강유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르쳐주신다면 저야 고맙지요. 그래 제게 가르쳐주실 재미있는 재주라는 게 무언가요?”

 

<달마독명안이라는 비술입니다.>

 

진상파의 물음에 강유는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대답했다.

전음술(傳音術)이라고도 불리는 전음입밀은 내공을 이용하여 특정 대상에게만 말을 건넬 수 있는 기술이다.

(갑자기 전음술로 말하다니... 달마독명안이라는 게 남이 알면 안되는 재주인 모양이네.)

 

<맞습니다.>

 

진상파가 생각할 때 강유가 다시 전음술로 말했다.

(내 생각을 읽었다?)

진상파의 눈이 놀라 동그랗게 치떠졌다.

 

<저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달마독명안을 온전히 구사할 수 있게 되면 상대방의 운명(運命)까지 읽을(讀) 수 있습니다.>

 

(세상에나...)

강유의 설명을 들으며 진상파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율을 느꼈다.

 

* * *

 

스윽!

강유와 진상파가 있는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 위로 소리 없이 나타나는 인물이 있었다.

얼굴에 섬뜩한 형상의 귀신 가면을 쓴 인물!

바로 마교의 당대 교주로 알려진 귀면지존이었다.

등봉현부터 끈질기게 강유를 따라다닌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귀면지존이었던 것이다.

“...!”

산봉우리에 내려선 귀면지존은 무언가 생각하며 멀리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작은 불빛이 어둠 속에 보인다. 강유와 진상파가 있는 계곡에 피워진 모닥불의 불빛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같은 상황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된다.)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찡그려졌다.

(방금 전에도 저놈은 내 존재를 확실하게 알아차렸었다.)

귀면지존은 강유가 갑자기 자신이 서있던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장면을 떠올리며 가슴이 섬뜩해졌다.

강유는 정말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당금 무림에서 마음먹고 은신한 날 탐지해낼 수 있는 인간은 철면제왕 섭장천을 포함하여 다섯 명 안팍에 불과하다. 헌데 저놈은 번번이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다.)

귀면지존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는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인물이다. 천하를 통틀어도 자신의 윗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철면제왕 섭장천뿐이라 확신해왔다.

당연히 강유 정도의 애송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강유는 수시로 귀면지존이 숨어있는 곳을 돌아보곤 했다.

한 두 번 반복 된 일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강유는 귀면지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불암을 떠난 걸 확인한 후 다시 등봉현에서 발견될 때까지 저놈의 종적을 잠깐 놓쳤었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공백 동안 저놈에게 무언가 기연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강유와 진상파가 머물고 있는 계곡을 노려보는 귀면지존의 눈으로 냉혹한 살기가 번개 치듯 지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강유를 잡아족쳐 마음속의 의혹을 해소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귀면지존에게는 강유를 이용하여 추진중인 원대한 계획이 있다.

찜찜한 기분을 해소하려고 오랜 세월 공 들여온 노력을 무산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저놈의 주변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겠다. 들키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겠지만...)

휘익!

귀신 가면 속에서 스산한 눈빛을 흘리며 귀면지존은 산봉우리를 날아 내려갔다.

 

* * *

 

밤은 깊을 대로 깊어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냉혈철심 사우의 시체가 안치 되어 있는 제왕성의 분타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제왕성 분타의 그 누구도 밤 새 잠들지 못했다.

 

“소요신군의 아들놈은 진소저와 함께 금릉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소이다.”

사우의 수하들이 자신들의 대주가 안치 된 관에 뚜껑을 고정시키는 것을 보며 궁무독이 말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오?”

동위사대 대주 독두태보가 고리같은 눈을 희번덕이며 물었다.

반면 은위사대 대주인 백월사신은 뭔가 알아차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우를 살해한 이후 금릉으로 향하는 길 어디에서도 둘의 종적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도 있소이다만...”

궁무독은 생각에 잠긴 백월사신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진소저 입장에서는 굳이 황금성 본점이 있는 금릉으로 가지 않아도 안전을 확보할 방도가 있기 때문이오.”

“개봉!”

쾅!

비로소 깨달은 독두태보가 주먹으로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사우의 관에 뚜껑을 닫고 있던 철위사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진소저는 금릉이 아니라 여기서 멀지 않은 개봉의 황금성 분점으로 향할 수도 있겠소!“

독두태보가 초조한 표정이 되어 이를 부득 갈았다.

“황금성 개봉 분점의 경호능력은 금릉의 본점에 못지 않소. 일단 진소저가 개봉 분점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로서도 손을 쓸 방도가 없다고 봐야만 하오.”

궁무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저도 진소저지만 강유라는 놈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오! 십팔 년 전 비극의 열쇠를 쥐고 있는 놈이니...”

독두태보의 대머리로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중년 이상의 나이인 제왕성 무사들 중 십팔 년 전의 비극을 떠올리고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 자는 없다.

자신들의 주모인 무후 영청공주는 천마구절기중 마검칠식에 시해 당했었다.

그리고 냉혈철심 사우 역시 그 마검칠식에 죽임을 당했다.

진상파를 제왕성으로 데려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검칠식을 구사한 강유를 놓칠 수는 없다.

“강유란 놈의 추적은 노부들이 맡을 테니 사대주의 운구는 총관께서 맡아주시오.”

침묵하고 있던 백월사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두 분 대주께서 수고해주시오.”

궁무독은 백월사신과 독두태보에게 포권을 했다.

“맡겨주시오!”

“수시로 연락드리겠소!”

휙! 휙!

백월사신과 독두태보도 궁무독에게 포권을 한 후 대청에서 달려 나갔다.

(십팔 년... 십팔 년만에 소성주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었다.)

직속 수하들과 함께 분타를 빠져나가는 백월사신과 독두태보의 뒷모습을 보며 궁무독의 눈이 숨길 수 없는 흥분으로 물들었다.

(마검칠식을 사용한 자가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이라는 게 의외이긴 하지만 드디어 혈가람 패거리들에게 반격할 기회가 온 것이다.)

궁무독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섭무궁(葉無窮)! 우리 제왕성의 진정한 후계자인 섭무궁공자만 찾아내면 혈가람과 마교의 세력을 제왕성에서 일거에 뽑아버릴 수 있다!)

 

궁무독은 대대로 섭씨일족을 섬겨온 가신(家臣) 집안 출신이다.

반면 혈가람등 제왕성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근래에 영입된 자들이다.

혈가람이 대표격인 신흥세력은 모용준이 섭장천의 후계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때문에 전대부터 섭씨일족을 섬겨온 충신들은 제왕성 내에서 급격히 입지를 상실하고 있다.

궁무독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원래 제왕성에는 총관이 궁무독 한명이었다.

헌데 부성주인 혈가람등은 총관 자리를 둘로 늘렸으며 새로 신설된 내(內)총관 자리에 모용준의 유모 출신인 구미호리 구숙정을 앉혔다.

자연히 궁무독의 역활은 제왕성의 대외적인 업무만 담담하는 외(外)총관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그 결과 제왕성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궁무독도 자세히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흥세력들 중에는 마교와 연줄이 닿는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이 다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자들은 어느덧 제왕성의 요직을 차지해가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제왕성이 마교에 의해 장악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궁무독이 느끼고 있는 이 절박한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다.

귀면지존에 의해 납치당한 소성주 섭무궁을 찾아내는 게 바로 그것이다.

섭무궁이 제왕성으로 돌아온다면 모용준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모용준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려온 혈가람 일파도 간단히 일소해버릴 수 있다.

제왕성에 침투한 마교의 무리들에게도 철퇴를 내릴 수 있을 테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섭무궁 소성주의 행방을 알아내야만 한다.)

궁무독은 결의를 다지며 대청 안을 둘러보았다.

사우가 안치 된 관의 뚜껑을 고정시킨 철위사들이 관을 둘러싼 채 비통해하고 있다.

“네놈들...!”

궁무독은 사우의 수하들에게 준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철위사들이 깜짝 놀라며 궁무독을 돌아본다.

“어이없이 죽은 너희 대주를 위해 복수할 결의가 되어 있느냐?”

“하명만 하십시오 총관님!”

“기꺼이 섭을 지고 불속에라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궁무독의 말에 철위사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결의라니 좋다. 네놈들에게 마음껏 분풀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마.”

독검마유 궁무독의 얼굴에 음산한 웃음이 번졌다.

 

* * *

 

변경(汴京)이라고도 불리는 개봉(開封)은 송(宋)나라를 비롯한 여러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던 유서 깊은 고도(古都)다.

때는 해가 지기 직전인 저녁 무렵이다.

개봉의 동문(東門)으로 이어진 넓은 관도는 오가는 사람들과 우마차들로 북적이고 있다.

“오늘 따라 길이 왜 이리 막히누?”

전(全)씨 성의 늙은 마부는 쓰고 있는 죽립 끝을 쳐들며 앞쪽을 살펴보았다.

개봉으로 들어가는 길은 엄청난 정체를 빚고 있었다.

개봉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나 우마차의 행렬은 순조로운데 들어가는 길만 막히고 있는 것이다.

“해 지기 전에는 성문에 닿아야하는데...”

마음이 급해진 전노인은 연신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앞쪽의 상황을 살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해가 지면 성문을 닫는다.

그리고 일단 닫힌 성문은 다음날 해가 떠야만 열린다.

도적이나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인데 일몰 이후에는 특권층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오늘 안으로 개봉에 들어가려면 해가 지기 전에 성문에 도착해야만 하는 이유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손님들과 함께 노숙을 하게 생겼구먼.)

전노인은 혀를 차며 자신이 몰고 있는 마차를 돌아보았다.

전노인의 집은 개봉에서 동북쪽으로 백여 리쯤 떨어진 마두집(碼頭集)이란 마을에 있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두 마리의 말과 마차 한 대로 열 명이 넘는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온 늙은 마부가 전노인이다.

오늘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한 쌍의 남녀가 전노인의 집을 찾아와 마차를 대절(貸切)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개봉으로 데려다달라면서 무려 백 냥의 거금을 내놓은 것이다.

백 냥은 전노인이 몇 달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거금이다.

오늘 안으로 개봉까지 데려다달라는 주문이 조금 벅차긴 했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잘 아는 길이기도 해서 힘껏 달린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개봉 근처에 이를 수가 있었다.

헌데 정작 개봉에 거의 다 와서 길이 막히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날도 저녁 무렵에는 막히긴 하지만 이렇게 심하게 막힌 적은 없는데...)

전노인은 고개를 학처럼 빼며 개봉의 성문쪽을 살폈다.

그런 전노인의 시야로 전에는 보지 못한 특이한 상황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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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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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장

 

              영물을 잡는 법

 

 

“제가 상처를 잘못 건드렸는가요?”

강유의 등에 약을 발라주던 진상파가 놀라서 물었다.

“아닙니다.”

강유는 고개를 조금 저으며 앞쪽을 살펴보는데 집중했다.

(왜 이러지?)

진상파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들어서 강유와 함께 모닥불 너머의 어둠 속을 보았다.

반짝!

순간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을 띤 한 쌍의 빛이 반짝이는 게 진상파의 눈에도 들어왔다.

“흑...”

진상파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질렀을 때였다.

슥!

그 한 쌍의 붉은 빛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쪽 어둠 속에... 뭔가 있군요.”

진상파는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여자라 사람보다는 짐승이 더 무섭다.

“귀찮은 놈이 따라붙었습니다.”

강유는 한숨을 쉬며 누더기가 된 웃옷을 입기 시작했다.

“섬전초라는 그 담비인가요?”

진상파도 비로소 사라진 불빛이 유별나게 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낮에 겁을 주었던 게 별로 효과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강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옷을 조심스럽게 걸쳤다.

“그런 것같군요.”

진상파는 강유가 옷을 입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조금 뒤로 물러앉았다.

“저놈을 방치하면 우리가 어디로 가든 제왕성 측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상의를 걸친 강유는 허리띠를 매면서 일어났다.

“그럼...”

“잡아서 혼을 좀 내줘야겠지요. 더 이상 따라다니지 못하도록...”

강유는 싱긋 웃으며 일어났다.

모닥불 옆에는 밤새 불을 지피기 위해 강유가 주변에서 모아온 마른 나뭇가지들이 제법 많이 쌓여있었다.

강유는 그것들 중에서 가는 것만 한 아름을 추려내었다.

쿡! 쿡!

그리고는 그 나뭇가지들을 모닥불 앞쪽의 공터에 박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걸까?)

진상파는 모닥불 뒤에 무릎 꿇고 앉아서 강유가 나뭇가지들을 바닥에 줄 지어 꽂는 것을 지켜보았다.

(번개같이 빨라서 섬전초라는 이름까지 붙은 그 영물을 나뭇가지 몇 개 꽂은 것으로 잡을 수 있다는 걸까?)

진상파가 의아해할 때였다.

“대충 완성되었습니다.”

이윽고 강유가 숙였던 허리를 펴며 웃었다.

어느덧 바닥에는 나뭇가지들이 깔때기 형태로 박혀있었다.

바깥쪽은 넓고 모닥불과 동굴 쪽은 좁아서 마치 물고기 잡는 통발 같이 보이는 울짱(담장)이다.

나뭇가지를 꽂아 설치한 그 울짱의 넓은 쪽의 폭은 이장 정도고 모닥불 앞의 좁은 쪽은 불과 한자 남짓이다.

또 울짱을 형성하는 나뭇가지들은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섬전초가 위로 튀어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구조다.

“특이한 형태의 함정이로군요. 마치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하는 어살(魚箭)같기도 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기다리던 진상파가 울짱을 살피면서 말했다.

“어릴 적에 저는 안탕산의 험한 산속을 누비며 산토끼들을 잡으러 다녔었습니다.”

모닥불 앞으로 돌아온 강유는 자신의 물건들 중 명주실을 꼬아 만든 가느다란 밧줄을 집어들며 말했다.

“하지만 산토끼란 놈은 워낙 빠르고 기민한 탓에 무작정 쫓아다녀서는 잡을 수가 없었지요.”

강유는 그 가느다란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게 이런 올가미였습니다.”

강유는 만든 올가미를 들고 통발 형태로 꽂아놓은 나뭇가지 울짱의 가장 좁은 곳에 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섬전초를 함정 안쪽으로 몰아와서 그 올가미로 잡으실 계획이시군요.”

진상파의 눈이 반짝 빛났다.

“토끼나 사슴처럼 빠르게 달리는 게 장기인 짐승들은 부상당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합니다. 그래서 늘 다니던 길로만 다니고 장애물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습성이 있지요.”

강유는 올가미와 연결된 밧줄 끝을 바닥에 깊이 꽂아놓은 굵은 나뭇가지에 묶었다.

“어떤 짐승보다 빨리 달리는 섬전초 역시 비슷한 습성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유는 올가미를 원형으로 펴서 좌우의 나뭇가지에 살짝 걸쳐놓았다.

“섬전초도 일단 함정 안으로 들어오면 울짱을 뛰어넘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겠군요.”

“비록 급조한 함정이긴 해도 효과는 있을 겁니다.”

웃으며 일어나는 강유의 손에는 방책을 만들고 남은 두 개의 나뭇가지를 들고 있다.

“이제 그놈을 이 울짱 안쪽으로 몰아넣기만 하면 됩니다.”

강유는 나뭇가지를 양손에 나눠들고 어둠 속을 향해 돌아섰다.

“그럼 숨바꼭질을 시작해볼까?”

딱! 딱!

이어 강유는 나뭇가지들을 부딪혀 소리를 내며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재미있어하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늠름한 어른처럼 보이지만 아직 순진한 소년의 면모도 지니고 있는 사내야.)

강유에게 한층 더 호감이 생기는 진상파였다.

 

계곡 입구 쪽의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섬전초는 움찔했다

딱! 딱!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느낀 섬전초는 숨어있던 바위 위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역시 떠나지 않고 근처에 머물러 있었구나.”

딱! 딱!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 두개를 부딪혀 소리를 내며 강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유는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섬전초의 붉은 눈을 단번에 찾아낸 것이다.

카아!

휘릭!

섬전초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숨어있던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내가 내는 소리에 호기심을 참지 못해 숨어있던 곳에서 머리를 내밀어 들키기도 하고... 짐승은 어쩔 수 없는 짐승이로구나.”

강유는 웃으며 섬전초쪽으로 다가왔다.

끼이! 팟!

섬전초는 재빨리 튀어 올라서 계곡 입구쪽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어림없다.”

동시에 강유가 나뭇가지 하나를 강하게 던졌다.

패앵!

나뭇가지는 풍차처럼 돌면서 섬전초를 노리고 날아갔다.

스팟!

앞으로 달려가던 섬전초는 몸을 옆으로 홱 틀어서 그 나뭇가지를 피했다.

빠각!

섬전초를 스쳐 지나간 나뭇가지는 앞쪽의 바위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휘익!

나뭇가지를 피한 섬전초는 방향을 틀어 바람같이 달려갔다.

그 때문에 이제 놈이 달려가는 쪽은 계곡 입구가 아니라 계곡 안쪽이었다.

“서라 이놈아!”

강유는 짐짓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려 섬전초를 따라갔다.

휘익!

섬전초는 절벽 아래쪽을 따라 한줄기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놈의 앞쪽 이십여 장 쯤에 모닥불이 타고 있고 강유가 급조해놓은 울짱도 보인다.

진상파는 모닥불 뒤쪽에 앉아있어서 그 모습이 섬전초에게는 안보였다.

하지만 섬전초가 달리는 방향은 절벽 바로 아래쪽이라 울짱 안으로는 들어갈 것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맞아랏!”

그때 섬전초를 쫓아오던 강유가 두 번째 나뭇가지를 던졌다.

파캉!

이번에도 빠르고 강하게 회전하며 날아간 나뭇가지는 섬전초가 달려가는 앞쪽 절벽에 부딪혀서 박살난다.

팟!

그러자 섬전초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어서 부러진 나뭇가지 파편을 피했다.

휘릭!

그리고 그놈이 다시 바닥에 내려섰을 때는 어느덧 강유가 설치한 울짱의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대단하네.)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본 진상파의 눈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나뭇가지 두 개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짐승이라는 섬전초를 함정으로 몰아넣었어.)

감탄하는 진상파의 눈에 건너편 어둠 속에서 섬전초가 나타나 울짱 안으로 뛰어드는 게 보인다.

그리고 그 놈 뒤에서 따라오는 강유의 모습도 흐릿하게 보였다.

쐐애액!

울짱 안쪽으로 들어선 섬전초는 좌우는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날 듯이 달려왔다.

울짱의 좁은 끝 부분이 섬전초 앞으로 확 다가왔다.

그곳에 올가미가 설치되어 있지만 물론 섬전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촤악!

그리하여 나뭇가지로 만든 울짱 밖으로 튀어나가려던 섬전초의 목에 올가미가 확 걸렸다

“캥!”

팽!

올가미가 목에 걸린 섬전초의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홱 뒤집어졌다.

(걸렸네.)

진상파가 눈을 치뜰 때였다.

퍼억!

허공으로 튕겨졌던 섬전초의 몸이 바닥에 세차게 패대기쳐졌다.

달려온 속도가 빨라서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것도 아주 세찼다

“맛이 어떠냐 이놈아?”

휙!

강유가 껄껄 웃으며 섬전초 옆으로 내려섰다.

팟!

동시에 바닥에 패대기쳐졌던 섬전초의 몸이 용수철 튀듯이 일어났다.

까득!

이어 그놈은 자기 목을 묶은 올가미와 연결된 밧줄을 입으로 물어뜯고 앞발로 눌렀다.

“그렇게는 안되지.”

콱!

강유는 재빨리 섬전초의 목을 뒤에서 움켜쥐었다.

“카악!”

목이 강유의 강철같은 손아귀에 조여지자 섬전초는 비명을 지르며 입을 벌렸다.

자연스럽게 그놈은 물고 있던 밧줄도 토해내게 되었다.

“못된 말썽장이 같으니... 다시는 허튼 짓을 못하게 만들어주마.”

휘릭! 휙!

강유는 오른손으로 섬전초의 목을 움켜쥔 채 왼손으로는 밧줄을 재빨리 움직여서 그놈의 네 발을 하나로 묶어버렸다.

섬전초는 칵칵 거리며 몸부림쳤지만 꼼짝 못하고 네 개의 발목이 하나로 묶여버렸다.

그 때문에 그놈의 긴 허리가 활처럼 아래로 휘어졌다.

“분명 경고를 했는데 따라와서 알짱거린 대가를...”

말하던 강유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콱!

섬전초가 고개를 필사적으로 뒤로 돌려서 자기 목을 쥐고 있는 강유의 팔뚝을 물어버린 것이다.

다만 목을 억지로 돌려서 문 탓에 그리 깊이 물지는 못했으며 입의 한쪽으로만 문 상태였다.

그래도 섬전초의 날카로운 이빨이 강유의 팔뚝에 상처를 내서 피가 배어나온다.

“흑!”

그걸 본 진상파가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르르!

섬전초는 강유의 팔뚝을 문 채 물지 않은 쪽의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다.

하지만 그 직후 섬전초의 눈이 위로 흡 떠졌다. 눈을 부라리며 내려다보는 강유의 표정이 아주 살벌했기 때문이다

끼이...

주눅이 든 섬전초는 곁눈질로 강유의 눈치를 살폈다. 입으로는 여전히 강유의 팔뚝을 문 채...

“날 물었다 이거지? 대충 혼내주고 풀어줄 생각이었다만 마음이 바뀌었다.”

강유는 자기 팔을 물고 있는 섬전초를 들고 모닥불로 다가갔다.

카아!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가까워지자 섬전초는 깜짝 놀라 강유의 팔뚝을 물고 있던 이빨을 뽑았다.

“강소협! 설마...”

진상파도 깜짝 놀랄 때였다.

“살려두면 사람을 해칠 놈입니다. 마침 출출하기도 하니 이놈을 구워서 야식으로 먹어야겠습니다”

강유는 냉혹하게 웃으며 섬전초를 모닥불 위쪽에 드리웠다.

까아! 까아!

섬전초는 등쪽이 모닥불 위로 드리워지며 겁에 질려 몸부림쳤다.

치치치!

끼잉! 낑!

등쪽 털이 모닥불의 열기에 그슬려지기 시작하자 섬전초는 강유를 돌아보며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애원해봤자 늦었다 이놈아. 마침 배도 고프던 참이니 맛있게 먹어주마.”

강유는 섬전초의 애원을 무시하며 입맛까지 쩝쩝 다셨다.

끼이이!

강유의 그 표정을 본 섬전초는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구워볼까?”

강유는 히죽 웃으며 섬전초를 모닥불에 더 가까이 내려 보냈다.

치치치!

그러자 섬전초의 털이 더 많이 그슬려졌고..

카아! 카!

섬전초는 겁에 질려 몸부림치며 울어대었다.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

강유가 그런 섬전초를 보며 또 입맛을 다실 때였다.

“그만 하세요!”

팟!

보고 있던 진상파가 급히 일어나 강유의 손에서 섬전초를 낚아챘다.

“조금 귀찮게 굴었다고 태워죽일 것까지는 없잖아요.”

진상파는 털이 제법 많이 그슬린 섬전초를 품에 안고 다시 바닥에 앉으며 눈을 흘겼다.

끼이!

구사일생(?)한 섬전초는 애처롭게 울면서 진상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소저, 조심하시오. 언제 표변해서 물지 모르는 사나운 놈이오.”

“걱정해주실 거 없어요.”

강유의 경고에 진상파는 섬전초를 보듬어 안은 채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 해도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법이 어디 있...”

강유에게 화를 내던 진상파는 흠칫했다. 그제서야 강유가 실실 웃고 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진상파는 비로소 강유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요 녀석을 순치(馴致;짐승을 길들임)시키려고 구워 먹을 것처럼 겁을 줬던 거야.)

진상파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안고 있는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불쌍한 것! 많이 놀랐지?”

이어 그녀는 섬전초의 네 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주었다.

다만 만일을 대비해서 목에 걸린 올가미는 풀어주지 않았다.

끼잉! 끼잉!

함께 묶여있던 네 개의 발이 풀리자 섬전초는 겁에 질려 진상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본능적으로 자길 보호해줄 수 있는 존재가 나뿐이라는 걸 알고 안겨드네.)

진상파는 미소를 지으며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이거 참 아쉽구만.”

강유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진상파 건너편에 책상 다리를 하며 주저앉았다.

“그놈을 노릇노릇 구워서 뜯어먹으면 아주 맛났을 텐데 말이야.”

그리고는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들쑤셔서 불길이 확 일어나게 만들었다.

불길이 세차게 치솟자 섬전초는 기함을 했다.

낑! 낑!

그놈은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면서 필사적으로 진상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적당히 하세요.”

진상파는 모닥불을 위협적으로 들쑤시는 강유에게 눈을 흘기면서 웃었다.

“이 애도 이제 소협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깨달았을 거예요. 그렇지?”

그녀는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끼잉!

섬전초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엾기도 하지. 언니 말만 잘 들으면 별일 없을 테니 안심하렴.”

어느덧 섬전초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진상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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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마검칠식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깊은 밤중이지만 강변에 자리한 한 채의 장원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장원 안팍에는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이 장원은 제왕성의 분타중 한 곳이다.

불야성을 방불케 하는 장원 중에서도 대청 일대가 가장 환하다.

여러 개의 등이 밝혀진 대청 안에는 관이 하나 놓여있다.

뚜껑이 열려있는 관 속에는 수의를 걸친 냉혈철심 사우의 시체가 누워있다.

사우의 시체가 걸치고 있는 수의의 가슴 부분은 피로 물들어 있다.

관의 뒤쪽에는 사우가 죽임을 당할 때 현장에 있었던 십여 명의 철위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철위사들은 고개를 떨 군 채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자신들의 대주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휘익!

갑자기 세찬 바람이 대청 안으로 들이쳤다.

철위사들이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틈엔지 대청 안에는 세 명의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뚜껑이 열려 있는 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세 사람 중 한명은 제왕성의 외(外)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그가 급보를 받고 수백 리 길을 반나절 만에 달려온 것이다.

궁무독과 동행한 인물들은 대조적인 모습의 노인들이었다.

한 명은 깡마르고 훤칠한 체격의 백발노인인데 옷자락에는 <銀>자와 수놓아져 있으며 양쪽 소매에는 세 개의 줄이 은실(銀絲)로 새겨져 있다.

이 백발노인이 제왕성 사대무력집단 중 은위사대(銀衛士隊)의 대주인 백월사신(白月死神)이다.

다른 노인은 백월사신과 여러모로 대조적인 모습의 소유자다.

체격이 장대하고 대머리인데 옷자락에는 <銅>자가 수놓아져 있으며 양쪽 소매에는 세 개의 푸른 줄이 새겨져 있다.

청동으로 빚어진 듯한 인상의 이 대머리 노인이 동위사대(銅衛士隊) 대주인 독두태보(禿頭太保)다.

“총... 총관님!”

“분합니다 총관님!”

궁무독 일행을 본 십여 명의 철위사들은 분루를 흘리며 엎드렸다.

“속하들도 대주님을 따라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원수가 누구인지 보고하기 위해 치욕스럽게 살아 돌아왔습니다.”

“대주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속하들을 죽여주십시오.”

쿵! 쿵!

철위사들은 바닥에 이마를 찍으며 오열했다.

그들의 이마가 삽시에 피로 물들었다.

“닥쳐라!”

쾅!

하지만 궁무독은 발을 구르며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드드드!

궁무독의 내공이 실린 진각(振脚)과 고함으로 인해 대청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내공의 심후함만으로도 궁무독이 사우를 간단히 능가하는 고수임을 알 수 있다.

대청 밖에서 경비를 서던 철위사들이 돌아보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대청 안의 철위사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울음을 삼켰다.

“계집처럼 질질 짜지 마라. 너희들의 대주를 위한다면 복수를 위해 가슴 속에 칼을 갈아야하지 않느냐?”

궁무독은 살기 어린 눈으로 철위사들을 노려보았다.

철위사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 떨군 채 울음을 삼킬 뿐이었다.

“못난 인간 같으니... 이름도 없는 놈에게 죽임을 당해서 제왕성의 이름에 먹칠을 해?”

궁무독은 관속에 누워있는 사우를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사우가 남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로 인해 제왕성의 위명이 실추되었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노부가 사(査)대주의 사인을 살펴보겠소이다.”

그때 은위사대 대주인 백월사신이 관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수고해주시오 백(白)대주.”

궁무독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물러섰다.

“다른 외상은 없고...”

백월사신은 관 속에 누워있는 사우의 시체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 사우가 걸친 수의의 가슴 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게 들어왔다

“가슴에 당한 일격이 치명상이었군.”

슥!

백월사신은 사우가 걸친 수의의 가슴 부분을 젖혀 보았다.

그러자 드러나는 사우의 가슴에는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등까지 뚫려있었다.

“이건!”

“헉!”

사우의 가슴에 나있는 구멍을 보는 순간 백월사신뿐 아니라 독두태보와 궁무동의 입에서도 비명같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사... 사대주의 등까지 뚫려있는 상처의 측면이 나선형으로 파여 있군. 그렇다는 건...”

백월사신은 덜덜 떨며 손으로 상처의 측면을 만져보았다.

특이하게도 사우의 가슴에 나있는 상처의 측면은 나선형의 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검칠식! 천마가 세상에 남겼다는 천마구절기(天魔九絶技)중 마검칠식이오.”

궁무독이 전율하며 말했다.

“마... 마검칠식이라면 십팔 년 전에...”

독두태보는 너무 놀라 헉헉 대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맞네. 무후님... 영창공주님을 시해한 흉수가 쓴 무공도 마검칠식이었지.”

백월사신이 이를 부득 갈며 내뱉었다.

(맙소사! 역시 대주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검법은 마검칠식이었구나.)

(십팔 년 전 주모님이 시해 당하신 것과 같은...)

무릎을 꿇고 있던 철위사들도 전율했다.

 

십팔 년 전, 마교 교주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훔치기 위해 제왕성에 잠입했었다.

그리고 달마묵장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 직후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지키던 흑백신귀에게 종적이 발견되어 쫓기게 되었다.

무사히 제왕성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없게 되자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안주인인 무후 주영창, 즉 영창공주의 거처로 들이닥쳤었다.

그곳에서 귀면지존은 갓 돌을 맞은 제왕성의 소성주 섭무궁을 인질로 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영창공주를 살해했었다.

영창공주는 귀면지존의 검에 찔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는 끔찍한 상처를 입고 절명했었다.

그리고 십팔 년 만에 영창공주를 죽게 만든 마공, 마검칠식의 흔적이 냉혈철심 사우의 시신에서 발견된 것이다.

 

“마... 마검칠식은 마교에서도 오래 전에 실전(失傳)되었다고 알려진 악랄하고 치명적인 검법인데...”

“총관! 드디어 십팔 년 전 무후님을 시해한 원수에 대한 단서를 잡은 것 같소.”

독두태보와 백월사신이 극도의 흥분으로 떨며 궁무독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의 대주를 살해한 자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라.”

궁무독은 두 노인에게 대답하는 대신 무릎을 꿇고 있는 철위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놈은 약관도 안된 애송이었는데...”

강유와 대결했다가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철위사 장흔이 일행을 대표하여 보고했다.

“살아계실 때 대주님이 하신 말씀에 의하면 놈이 사용한 다른 무공은 칠절 중 소요신군 강조의 것이었습니다.”

“소요신군 강조!”

궁무독과 백월사신, 독두태보는 전율하며 눈을 부릅떴다.

 

* * *

 

산중의 밤은 더욱 어둡다.

휘익!

섬전초는 칠흑같은 어둠 속을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급히 속도를 줄이는 그놈 앞쪽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섬전초는 절벽 끝으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절벽 끝에 이르러 내려다보는 섬전초의 눈에 불빛이 들어왔다.

아래쪽은 삼면이 높은 절벽으로 막혀있는 계곡인데 그 끝에서 흐릿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끼이...

섬전초의 등이 긴장으로 활처럼 굽어졌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떨면서도 섬전초는 소리없이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계곡 막다른 곳의 절벽 아래쪽에는 동굴이 하나 입을 벌리고 있다.

그 동굴 입구에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피운 모닥불이 타고 있다.

모닥불에는 물기가 있는 쑥대가 얹혀져 있어 자욱한 연기를 만들어낸다. 극성스러운 모기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피운 모깃불인 것이다.

강유는 동굴을 등지고 모닥불을 앞에 둔 위치에 앉아있다.

상의를 벗은 상태인 강유는 사우와 싸우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다.

납작한 도자기 용기에 들어 있는 고약을 손가락으로 떠낸 강유는 상당히 깊게 갈라진 상처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그 고약은 어머니 냉상영이 비상약으로 챙겨준 금창약(金瘡藥)이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강유 옆에는 검 외에도 여러 가지 물건이 놓여있다.

단도 한 자루와 몇 개의 약병, 갈아입을 속옷과 먹다 남은 건량, 명주실을 꼬아 만든 한 다발의 가느다란 밧줄등이 그것이다.

모두 강유가 짊어지고 다니던 봇짐에 들어있던 물건들이다.

정작 봇짐을 싼 보자기는 보이지 않는다.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그 물건들 외에 고불선사에게서 받은 봉투도 함께 놓여있다.

 

강유와 진상파가 머물고 있는 곳은 개봉(開封)의 동북방 삼백여리 쯤에 자리한 양산(梁山)이라는 곳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을 기준으로 삼으면 황금성이 있는 금릉과는 오히려 백여 리쯤 멀어진 상태다.

제왕성의 인간들은 당연히 진상파가 금릉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고 그쪽으로 추격대의 주력을 보냈을 것이다.

이를 예상한 진상파는 목적지를 금릉과 반대쪽인 개봉으로 바꿨다.

천년고도인 개봉에도 황금성의 분점(分店)이 있다.

그것도 보통 분점이 아니라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거대한 분점이다.

금릉의 황금성 정도는 아니더라도 개봉의 분점에 들어가기만 하면 제왕성의 추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진상파는 금릉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서 개봉을 목적지로 삼은 것이다.

다만 강유의 상처가 가볍지 않고 진상파 자신도 밤눈이 어두운 것을 감안하여 오늘 밤은 양산의 깊은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강유가 등지고 앉아있는 동굴은 그리 깊지 않다. 입구에서 오장쯤 들어가면 막다른 곳이 나온다.

동굴 끝의 바닥에는 마른 풀잎과 나뭇잎이 푹신하게 깔려있고 그 위에 진상파가 반듯하게 누워있다.

고개를 돌리면 동굴 입구를 볼 수 있도록 가로로 누워있는 그녀의 몸에는 강유의 봇짐을 쌌던 천이 덮여 있다.

밤이 깊었지만 진상파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고는 있으나 두 사내의 모습이 번갈아 뇌리에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두 사내는 물론 강유와 모용준이다.

(같은 인간이고 사내인데 어찌 그렇게 다를까?)

진상파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누구는 오직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했던 데 반면 또 다른 사내는 생면부지인 나를 구해주려고 목숨을 도외시했었다.)

진상파는 모용준이 유모인 구숙정과 짐승처럼 뒤엉키던 장면을 떠올리고 새삼 혐오감에 치를 떨었다.

(똑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것에 담긴 영혼에는 천양지차가 날 수 있구나.)

감았던 눈을 뜬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돌려 동굴 입구를 보았다.

그곳에는 강유가 진상파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앉아서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다.

강유의 몸에 가려서 모닥불의 불빛은 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칠절의 첫째인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 강유...)

상의를 벗고 있는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처녀인 나를 배려해서 동굴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을 대비하여 입구를 지키고 있다.)

진상파는 시선이 자꾸만 강유에게 끌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협객이며 대장부... 어쩌면 나는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맨살을 드러낸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는 자신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살인을 했다.)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는 강유의 얼굴에서는 그늘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필살일초에 당해 죽어가며 눈을 부릅뜨던 냉혈철심 사우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비록 나를 죽이려고 했던 적이었지만 한 인간의 목숨을 내손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그에게도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과 비탄에 잠길 가족이 있을 텐데...)

상처에 고약을 바르는 강유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몸에 묻었던 그자의 피는 씻어버렸으나 내 영혼에는 살인의 기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게 될 테지.)

깊은 한숨이 강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림인으로 살아가려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살인을 경험하자 후회와 자책의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나란 놈은 너무 심약해서 무림인으로서의 거친 삶을 견디지 못할 것만 같구나.)

강유가 우울하게 한숨을 쉴 때였다.

사박!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진상파가 덮고 있던 보자기를 어깨에 두른 채 입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저... 밤이 이미 깊었는데 주무시지 않고 계셨습니까?”

강유는 멋쩍어져서 벗어놓았던 상의를 집어 앞을 가렸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던 탓인지 쉽게 잠 들 수가 없군요.”

진상파가 강유 뒤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내일 또 강행군을 해야 하니 억지로라도 주무셔야...”

말하던 강유는 움찔했다. 진상파의 손이 강유가 왼손에 들고 있는 고약 통을 잡았기 때문이다.

“등 쪽 상처에는 손이 닿지 않으실 테니 제가 약을 발라드릴게요.”

강유의 뒤쪽에 무릎을 꿇은 진상파가 고약 통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신세를 지겠습니다.”

강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등을 진상파에게 맡겼다.

진상파는 매끄러운 손가락으로 떠낸 금창약을 강유의 등 쪽에 난 상처에 발라주었다.

그녀가 아버지 이외의 사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난생 처음이다.

진상파의 손가락이 살에 닿자 강유의 몸에 움찔 경련이 치달렸다.

(이런 느낌이로구나.)

강유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주는 진상파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 그것도 남자의 몸을 만지는 느낌은 이토록 흥분되면서도 경이로운 것이었어.)

진상파는 가빠지는 숨결을 강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강유 역시 심장이 거칠게 뛰노는 것을 행여나 진상파가 눈치챌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분이 외의 여자가 내 몸을 만지는 건 이토록 긴장되고 떨리는 경험이로구나.)

입 안이 바짝 바짝 말라 들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강유였다.

(만일 분이가 이런 장면을 본다면 난리가 나겠지?)

그 와중에도 분이의 화난 표정이 떠올라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헌데 그 직후의 일이었다.

반짝!

모닥불 건너편의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붉은 빛이 반짝이는 것이 강유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강유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그 빛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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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첫 번째 살인

 

 

 

“그럼 그렇지!”

“역시 대주님이시다.”

잠시 마음을 졸였던 철위사들은 안도하며 환호했다.

그자들이 보기에도 강유의 공격은 실로 맹렬했던 것이다.

반면 진상파의 얼굴은 점점 초조한 기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녀가 제왕성으로 끌려가지 않을 유일한 가능성은 강유가 사우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유는 전력으로 공격하는 것같은 데도 사우를 직경 다섯 자쯤의 원 안에서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비참해질 운명인 것같구나.)

진상파가 체념하며 소리없이 한숨을 쉴 때였다.

“크왓!”

강유가 벼락같이 기합을 토해내었다.

가가강! 슈학!

그와 함께 강유의 검이 파도치듯 너울거리는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며 사우를 쓸어갔다. 붕정검법의 초식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이고 현란한 대붕전시(大鵬展翅)가 펼쳐진 것이다.

사우도 이번에는 표정을 굳히며 검을 휘둘러 순간적으로 열 번을 베고 다섯 번을 찔렀다.

카카캉! 빠카캉!

서로의 검이 섞이면서 요란한 금속성이 터지고 시퍼런 불꽃이 작렬했다.

강유가 일으킨 수많은 검의 그림자는 베어지거나 튕겨졌다.

콰드득!

하지만 사우 역시 상당한 압박을 받은 듯 두 발이 뒤로 밀려서 하마터면 원 밖으로 나갈 뻔했다.

“방금 것이 제십 초! 이제 네놈이 살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부악!

밀려나던 몸을 멈춘 사우가 폭발적인 기세로 강유에게 쇄도하며 비스듬히 검을 내리쳤다.

강유가 방금 전에 펼쳤던 대붕전시가 사우가 양보한 십초의 공격중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쩍!

강유를 향해 비스듬히 내려치는 사우의 검 끝에서 시퍼런 검기가 내뻗힌다,

헌데 그 검기의 형태가 특이했다. 직선으로 내리쳐지던 검기의 끝 부분이 돌연 홱 꺾이며 강유를 베어온 것이다.

(위험...)

흡사 낫을 연상케 하는 사우의 검기가 날아들자 강유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스팟!

강유는 사력을 다해 뒤로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러 방어하려고 했다.

캉! 쩌억!

하지만 사우의 검기는 강유의 검에 막히는 순간 다시 홱 방향을 틀며 목으로 파고들었다.

낫의 형태를 한 검기가 거듭 궤적을 바꾸니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다.

“!”

패액!

거의 동시에 강유는 어떤 영감을 느끼고 몸을 홱 틀었다.

서걱!

강유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 사우의 검기 끝이 강유의 목 대신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푸학!

강유는 불에 덴 듯 화끈한 감각과 함께 가슴에서 피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목이 잘리는 것은 면했지만 가슴에 상당히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악!”

보고 있던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달마독명안 덕분에 살았다!)

휘릭!

강유는 단번에 삼장 밖으로 물러나며 몸서리를 쳤다.

사우의 이번 공격에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은 수박 겉핥기로 깨우친 달마독명안 덕분이었다.

위기의 순간 달마독명안의 예지력(豫知力)이 발동하여 가장 가벼운 피해를 입는 쪽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꼴좋다 강가야!”

“제왕성에 맞선 것을 후회하며 죽어라.”

철위사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

반면 비명을 질렀던 진상파는 두 손을 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끼이...

사람들과 함께 관전하고 있던 섬전초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시 자기 꼬리 다듬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물인 그놈이 보기에도 강유와 사우의 대결은 결말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놈! 운이 좋았구나! 하지만 그 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두고보자.”

사우는 강유에게 흐르듯 다가서며 검을 휘두르고 그었다.

쩌억! 부악!

그때마다 사우의 검에서 끝이 낫처럼 휘어진 검기가 내뻗혀 강유를 베어왔다.

캉! 카캉!

강유는 소요보법을 극한까지 펼치면서 검을 휘둘러 사우의 공격을 막았다.

푸학! 서걱!

치명상은 어찌어찌 피하지만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긴다. 어설픈 달마독명안으로는 사우의 변화막측한 검법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삽시에 강유의 몸은 피로 물들었다.

사우의 검기에 베어져 생기는 상처에서 피를 뿜어대는 강유의 모습은 끔찍한 것이었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고통만 길어질 뿐이다. 포기하고 목을 늘어트려라.”

스악! 쩍!

사우는 냉혹하게 웃으면서 검을 휘둘러 강유를 몰아붙였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겨우 겨우 사우의 공격을 막고 피하면서 강유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아직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출혈이 과다하다는 게 문제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급격히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결국 사우의 검에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른 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인 건가?)

공포와 절망이 강유의 온몸을 휘감았다.

헌데 절체절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강유의 뇌리에 섬전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 검법의 이름은 아비도 모른다. 그래서 임의로 필살일초(必殺一招)라고 명명했다.>

<일단 펼쳐지면 반드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고 마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써선 안된다.>

 

바로 안탕산을 떠날 때 아버지 강조가 자신에게 필살일초라는 검법을 전수하며 하던 장면이었다.

(바로 지금이다! 아버지가 구명(救命)의 절초(絶招)로 가르쳐주신 그 검법을 사용할 때가...!)

부악! 휘익!

강유는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러 사우의 공격을 막은 후 훌쩍 물러섰다.

이번에도 사우의 검기를 완전히 막지 못해서 왼쪽 뺨에 반 뼘 가량의 상처가 생겼다.

하마터면 얼굴에 치명상을 입을 뻔 했지만 그 대가로 강유는 사우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어떠냐? 슬슬 네 운명이 어찌 될지 실감이 가겠지?”

사우는 얼굴까지 피로 물들인 채 비틀거리는 강유를 보면서 음산하게 웃었다.

“저는 상관하지 말고 떠나세요.”

보다 못한 진상파가 외쳤다. 무공 방면에는 그리 정통하지 않은 그녀가 보기에도 이 승부의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퇴로를 차단하자!”

“네놈은 살아서 여길 떠나진 못한다!”

스슥! 슥!

진상파의 안타까운 마음을 비웃듯 철위사들은 강유의 뒤쪽으로 이동하며 퇴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이어진 강유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달아나거나 피하려는 시도 대신 오히려 사우에게 검을 겨누며 다가간 것이다.

“...”

그걸 본 사우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저 애송이놈이...”

“달아나려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투지 하나는 감탄스러운 놈이로군.”

철위사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강유의 행동에 진상파의 미간도 모아졌다.

징!

그때 사우를 향해 내밀어진 강유의 검이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최후의 발악인 것이냐?”

사우는 자신에게 다가서는 강유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네놈이 어떤 한 수를 숨기고 있는지 견식해 보도록 하자.”

비록 웃고 있긴 하지만 사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착 갈아 앉은 강유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불길함이 느껴진 때문이다.

사우는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크아!”

그 직후 사나운 기합과 함께 강유가 벼락같이 검을 내뻗었다.

쩌엉!

사우를 향해 내뻗치는 강유의 검 검신(劍身)이 나선형으로 홱 꼬인다.

(이 검법은 설마...)

소스라치게 놀란 사우는 전력을 기울여 검을 휘둘렀다.

쩌억! 가앙!

사우의 검에서 몇 가닥의 검기가 확 내뻗혀 강유를 찍어갔다.

한 가닥도 아니고 여러 가닥의 검기가 날아드니 강유가 피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보였다.

“흑!”

그걸 알아차린 진상파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벌어졌다.

투쾅! 텅!

나선형으로 꼬이면서 내질러지는 강유의 검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잠경(潛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사우의 검기들을 간단히 튕겨버린 것이다.

사우 자신의 공격은 허무하게 무산되고 강유의 검은 벼락같이 가슴으로 날아든다.

사우는 반사적으로 검을 가슴 앞에 세워서 강유의 검을 막으려 했다.

쩍!

검신이 나선형으로 뒤틀린 강유의 검극(劍極), 즉 검의 끝 부분이 사우의 검날과 접촉했다.

빠캉!

다음 순간 사우의 검은 그대로 유리처럼 깨져 흩어졌다.

“헉!”

명검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자신의 검이 허무하게 깨지자 사우는 기겁하며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늦었다.

사우의 검을 간단히 깨트리고 다가선 강유의 검 검극은 이미 사우의 가슴에 닿아있었다.

화악!

뒤틀리는 강유의 검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파괴력이 사우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결과는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펑!

폭발과 함께 사우의 가슴과 등으로 이어지는 구멍이 났다.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몸통의 앞뒤로 매끈하게 나버린 것이다.

푸학!

사우의 등쪽으로 난 구멍을 통해서 잘게 다져진 살과 뼈와 장기들이 확 터져 나갔다.

“...!”

“...!”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놀라 숨이 멎었고 꼬리를 다듬고 있던 섬전초도 온몸을 덮고 있는 황금색 털을 고추 세우며 굳어졌다.

너무도 충격적인 결말이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컥!”

털썩!

강유는 피를 왈칵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에 구멍이 난 사우는 비틀거리며 서있는데 정작 사우에게 치명상을 입힌 강유가 먼저 주저앉은 것이다.

(경... 경맥이 뒤틀려서 끊어지려 한다.)

강유는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인의 손이 몸 전체를 움켜잡고 젖은 수건에서 물을 짜듯 비틀어대는 기분이다.

필살일초는 단전에서부터 진기를 나선형으로 비틀며 끌어올리는 운기법을 포함하고 있다.

내공의 근원으로부터 비틀리며 발휘되는 힘이기에 부딪히는 건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신 구사하는 쪽도 경맥이 뒤틀려서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된다.

자칫 일신의 경맥이 모두 터지거나 끊어져서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게 필살일초였다.

“끄륵! 네놈... 네놈이 어떻게 마교의 마검칠식(魔劍七式)을...”

주저앉은 강유를 노려보는 사우의 입과 코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마교의 마검칠식?)

강유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끄윽... 무후님을 시해한 게 네놈 아비...”

비틀거리던 사우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퍼억!

하늘을 보는 자세로 나뒹군 사우의 몸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절명한 것이다.

“대... 대주님!”

“안돼!”

너무도 충격적인 결과에 넋이 나가 있던 철위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죽일 놈!”

“감히 대주님을 시해하다니...”

“다 함께 공격해서 죽이자!”

철위사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강유를 공격하려 했다.

“잘 생각하시오.”

슥!

강유는 입과 코에서 흘러내린 피를 왼쪽 소매로 닦으며 일어났다.

사우에게 당한 상처도 상처지만 온몸의 경맥이 뒤틀려있는 상태에서 움직이자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하지만 강유는 내색하지 않고 검으로 앞쪽의 철위사들을 겨누었다.

“당신네 대주도 간단히 죽인 내 공격을 받아낼 자신이 있다면 덤벼도 좋소.”

쿠오오오

강유의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음산한 살기는 철위사들의 피를 싸늘하게 식혀버렸다.

자신들이 하늘같이 여기던 대주조차 간단히 죽인 상대다.

철위사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사우를 향해 돌아갔다.

가슴에 사발만한 구멍이 난 채 죽어있는 사우의 시신은 철위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으으...”

“으으...”

철위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더 이상 강유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됐다!)

자신의 협박이 통한 것을 확인한 강유는 내심 안도했다.

지금의 강유는 내, 외상이 심각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상태였다. 만일 철위사들이 일제히 덤빈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진소저! 그만 갑시다.”

강유는 검으로 무사들을 겨누며 진상파에게 말했다.

“그러지요.”

퍼뜩 정신을 차린 진상파는 도도한 자태로 걸음을 옮겨 공터 밖으로 향했다.

강유는 철위사들을 감시하며 진상파를 따라갔다.

다행히 철위사들은 제 자리에 얼어붙은 채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끼이...

다만 섬전초는 눈을 번뜩이며 진상파와 강유를 따라오려고 했다.

“네놈도 잘 생각해라.”

강유는 걸음을 멈추며 섬전초를 노려보았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산 채로 가죽을 홀라당 벗겨버릴 것이다.”

끼이!

강유의 서늘한 눈빛을 접한 섬전초는 등을 활처럼 구부리며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수백 년을 산 영물답게 강유의 말이 결코 헛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영특한 놈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기색이다.)

겁에 질린 섬전초를 돌아보며 강유는 진상파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터를 떠나는 강유의 발걸음은 그러나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사우와의 악전고투로 가볍지 않은 내상과 외상을 입은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유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진짜 원인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었다.

비록 살기 위해서라지만 한 인간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끝냈다는 사실은 강유의 마음을 납덩이처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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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첫 번째 실전

 

 

 

이곳은 주점에서 오리 쯤 떨어진 숲속의 공터다.

“...”

진상파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숙인 채 공터 중앙에 서있었다.

진상파에게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는 섬전초가 앉아서 몸통 길이만한 탐스러운 꼬리를 앞발과 혀로 다듬고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여전히 도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진상파를 십여 명의 사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물론 그자들은 철위사대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와 그의 수하 철위사들이었다.

진상파는 주점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사우 일행에게 따라잡힌 것이다.

그녀에게 사우 일행을 안내한 놈은 한쪽에 앉아서 얄밉게 털을 고르고 있는 섬전초다.

무공 방면에서는 그다지 성취가 없는 진상파인지라 행적이 노출된 이상 섬전초와 사우 일행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진소저! 아무쪼록 우리가 무례를 범하지 않게 해주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셔오라는 명을 받은 터라 끝내 동행을 거부하시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소이다.”

사우가 포권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심기는 불편하지만 자신들의 안주인이 될 여자에게 무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돌아가세요.”

진상파가 옆으로 조금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세우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가서 당신들의 소성주에게 전하세요. 내가 왜 제왕성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날 밤 일신재에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진상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혐오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된 거였군.)

(소성주님이 내총관과 내연관계인 걸 알아버렸구나.)

사우와 그의 수하들은 진상파가 혼례식 전날에 갑자기 달아난 이유를 깨닫고 낭패한 심정이 되었다.

“죄송하지만 그 분부는 따를 수가 없소이다. 우리가 받은 명은 단 하나! 소저를 제왕성으로 모셔오라는 것뿐이었소이다.”

사우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

진상파는 미간을 조금 찡그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사냥개에 불과한 사우와 말을 섞어봐야 바뀌는 것은 없음을 아는 때문이다.

“더 시간 끌 거 없다. 진소저를 성으로 모시고 간다.”

사우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했다.

“예 대주님!”

“결례하겠소이다 진소저.”

그 즉시 두 명의 철위사가 좌우에서 진상파에게 다가섰다.

(여기까지인가?)

철위사들이 자신의 팔을 잡으려는 것을 보며 진상파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제왕성으로 끌려가면 모용준과 결혼할 수밖에 없다.

천박하고 음탕한 모용준과 부부가 될 경우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치욕을 당하는 것은 둘째 치고 황금성의 재산을 노린 탕부탕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진상파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같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바로 그때였다.

“그만들 하시오.”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음성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치떠졌다.

끼이...

탐스런 꼬리를 앞발로 다듬고 있던 섬전초도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그분 소저께서 귀하들과 함께 가는 걸 원하지 않고 있지 않소?”

공터로 들어서며 말하는 인물은 강유였다. 사우 일행의 뒤를 밟은 그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저놈은...”

“주점에서 대주님에게 죽을 뻔했던 애송이 아닌가?”

강유를 알아본 철위사들은 실소를 터트렸다.

다만 사우의 얼굴은 불쾌하게 찡그려 지고 있었다.

(저 사람이 또...)

숲에서 나와 공터로 들어서는 강유를 본 진상파는 반갑다기보다는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무공을 모르는 주점 주인을 혼내는 것과 사우 일행을 상대하는 것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진상파도 제왕성의 위사들이 얼마나 흉포하고 강한지 잘 알고 있다.

강유라는 이름의 청년은 의협심 때문에 자신을 도우려고 나섰겠지만 그 결과는 비극적일 것이다.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그것도 여럿이 아녀자 하나를 핍박하는 것은 무림인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오.”

공터 외곽에 멈춰선 강유는 사우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이거 참...”

사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 없는 네놈의 피를 본 부담도 있고 해서 좋은 말로 하마. 내일 해를 다시 보고 싶다면 모른 척 하고 갈 길 가라.”

사우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진상파의 마음은 복잡했다.

강유가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면서도 그가 변을 당하기 전에 알아서 물러갔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스릉!

진상파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강유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아버지 강조가 마련해준 그 검은 비록 보검은 아니지만 상당히 예리하다.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한다면 지금까지 애써 무공을 수련한 의미가 없소. 끝내 그 소저를 보내드리지 않겠다면 나부터 상대해야할 거요.”

“그 새끼 참 분위기 파악 못하네.”

강유의 진지한 말을 들은 사우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평소의 사우라면 당장 살수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제왕성의 안주인이 될 진상파가 보고 있는 자리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속하에게 맡겨주십시오 대주님! 능력도 안되면서 객기를 부리면 어찌 되는지 교훈을 내려주겠습니다.”

사우가 난감해할 때 철위사중 한명이 칼을 뽑으며 나섰다. 장흔(張欣)이라는 이름의 그자는 사우가 대동한 철위사들 중 가장 연장자다.

“교훈만 내려주고 죽이지는 마라. 진소저가 보는 앞이니...”

사우는 장흔에게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대주님 말씀 들었지? 네놈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팔 다리 하나쯤 날아가겠지만 죽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사우의 허락을 받은 장흔은 칼끝을 이리저리 돌려서 강유를 희롱하며 다가섰다.

“같은 말을 귀하에게 해드리겠소.”

강유는 냉소하며 마주 다가갔다.

“나 역시 저분 소저가 보는 앞이라 귀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물론 피를 보긴 하겠지만...”

“이 새끼가...”

강유의 비아냥을 들은 장흔의 얼굴이 분노로 이지러졌다.

“알아서 매를 버는구나.”

부악! 쩍!

다음 순간 장흔은 강유를 향해 빗발치듯 칼질을 했다.

칼을 쓰는 속도는 전광석화같고 노리는 부위는 하나같이 치명적이다.

장흔이 구사하는 이 도법은 허초(虛招)와 실초(實招)가 뒤섞여있기도 해서 상대하기가 실로 까다롭다.

비록 제왕성 사대무력집단의 최하위 집단에 속해있긴 하지만 철위사 개개인이 일류고수라는 무림의 평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스슥!

하지만 강유는 산보하듯 걸어서 장흔의 칼질을 피해내었다. 소요신군을 칠절의 첫째로 만들어준 소요보법이 펼쳐진 것이다.

(저 보법!)

한가로운 듯이 보이지만 장흔의 공격을 바람처럼 물처럼 흘려보내고 있는 강유의 보법을 보며 사우의 눈이 번뜩였다.

철위사대의 대주답게 사우는 무림에서 사대보법중 하나로 불리는 소요보법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크아!”

치칫! 쉬학!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악에 바친 장흔의 공격이 더 빠르고 신랄해졌다.

(명불허전... 제왕성 위사들중 최하등급인 철위사임에도 타복에 필적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

장흔의 격렬해진 공격을 피하면서 강유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찌익! 서걱!

빨라진 그자의 칼끝이 스치면서 강유의 옷이 여기저기 베어지고 있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지 보자!”

칼끝이 강유의 몸에 닿기 시작하자 장흔은 기세가 올라 더욱 사납게 칼질을 했다.

(소요보법으로도 피하는 게 한계가 있다.)

캉!

어쩔 수 없이 강유는 검을 휘둘러 장흔의 칼질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왔어야지!”

장흔이 살벌하게 웃으면서 빗발치듯 칼질을 했다.

쩍!

강유는 장흔의 칼질 안쪽으로 성큼 들어서며 빠르게 검을 찔렀다. 그런 강유의 뒤로 독수리가 날개 짓을 하는 듯한 형상이 떠올랐다.

(붕정검법까지...!)

강유가 구사하는 검법을 알아본 사우가 눈을 부릅뜰 때였다.

카캉! 빠카앙!

찌르는 강유의 검과 그어대는 장흔의 칼질이 엇갈리며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큭!”

장흔은 왼쪽 어깨에서 피를 뿜어내며 휘청거렸다. 강유가 찌른 검이 그자의 어깨를 관통한 것이다.

스팟!

일격을 성공한 강유는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리며 가슴 부위를 내려다보았다. 옷이 한 뼘 쯤 갈라져 있으며 피부에도 깊진 않지만 상처가 나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

“아니다. 장형쪽의 상처가 비교할 수 없이 깊다.”

관전하고 있던 철위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한 눈에 봐도 승패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강유는 옅은 자상을 입은 반면 장흔은 어깨가 앞뒤로 관통당하는 상처를 입어 삽시에 상체가 피로 물들고 있었다.

(철위사를 상대해서 이겼네.)

강유도 상처를 입긴 했지만 대단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이 새끼...”

장흔은 관통상을 입은 왼쪽 팔을 축 늘어뜨리며 강유를 노려보았다.

그자는 수치심과 분노로 치를 떨면서도 왼쪽 어깨의 상처가 가볍지 않아서 경거망동하지는 못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이번에는 내가 상대해주겠다.”

창!

또 한명의 철위사가 이를 갈며 칼을 뽑았다.

“그만 둬라.”

그자가 강유를 공격하려는데 사우가 저지했다.

“대주님! 하지만...”

“최윤, 네가 나서봤자 결과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몇 명이 협공 하지 않는 한 쓸데없이 피만 볼 뿐이니 물러서도록 하라.”

“예...”

사우가 나서자 최윤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철위사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물러섰다.

“네놈, 소요신군 강조와 무슨 관계냐?”

사우는 수하들 대신 강유와 마주 서며 물었다.

“무슨 소리요?”

강유는 내심 움찔하며 부인하려고 했다. 자신의 정체가 밝혀져 봐야 좋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발뺌해봤자 소용없다. 방금 전 네놈이 사용한 무공이 소요신군의 절기인 소요보법과 붕정검법이라는 걸 알아봤으니...”

사우는 음산하게 웃으며 강유는 노려보았다.

“소요보법과 붕정검법!”

“그건 칠절의 첫째인 소요신군 강조의 독문절기 아닌가?”

다른 철위사들도 비로소 장흔이 패한 이유를 깨닫고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일이 커져버렸다. 자칫하다가는 우리 집안이 제왕성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강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기왕에 정체가 들통 난 마당에 발뺌을 할 수도 없다.

“과연 제왕성 철위사대 대주의 안목은 비범하구려. 짐작하시는 대로 소요신군이란 분은 본인의 가친이시오.”

“소요신군의 아들!”

“어쩐지 평범하지 않다 했더니...”

강유의 시인에 철위사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상대가 칠절중 한명의 아들이라면 경솔하게 상대할 수는 없다.

“...”

강유의 정체를 안 진상파의 눈에도 이채가 반짝였다.

“소요신군 강조가 제법 빼어난 아들을 두었군.”

사우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아비의 얼굴을 봐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도록 하마.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물러난다면 네놈이 오늘 우리 제왕성에 죄를 지은 일은 없도록 하겠다.”

“유감스럽게도 대주의 호의는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사우의 말에 강유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이...”

“냉혈철심이라는 별호를 지니신 대주님께서 파격적으로 호의를 베풀고 계시거늘...”

철위사들은 분노하여 강유를 노려보았다.

사우도 불쾌한 표정으로 이마를 찡그렸다.

“만일 저분 소저와 함께라면 떠날 수도 있겠소이다만...”

강유는 진상파를 돌아보며 말했다.

“흐흐흐! 좋다 좋아. 네놈이 본좌로 하여금 소요신군과 원수지간이 되게 만드는구나.”

스릉!

사우가 음산하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하지만 철위사대 대주가 되어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을 핍박했다는 뒷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먼저 십초를 공격할 기회를 주겠다. 물론 본좌는 오직 방어만 할 것이고...”

치직!

사우가 검을 한 바퀴 휘두르자 그자를 중심으로 직경 다섯 자 쯤의 원이 그려졌다.

(검기(劍氣)...)

강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사우의 검에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뻗어 나와 바닥에 원을 그린 것을 알아본 때문이다.

검기라 불리는 그 기운은 직접 닿지 않아도 표적을 살상하는 힘을 지녔다.

당연히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검법이 검기를 구사할 수 있는 정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냉혈철심 사우가 그중 한명인 것이다.

강유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십초 안에 본좌로 하여금 이 원 밖으로 밀려나게 만들거나 네놈의 검이 옷자락에라도 닿으면 진소저를 데리고 떠나도 좋다.”

검기로 바닥에 원을 그린 사우가 비웃는 표정으로 강유를 보았다.

강유는 사우가 자신은 얕보고 있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자존심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우는 자신의 아버지 소요신군에 필적하는 고수다.

“지금 그 말 잊지 마시오.”

슈학!

강유는 일갈과 함께 벼락같이 검을 찔러갔다. 그의 이 일초는 아주 빠르고 강력해서 철위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제일초!”

캉!

철위사들의 걱정과 달리 사우는 강유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냈다.

캉! 카캉!

강유가 붕정검법으로 맹렬히 공격을 이어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우는 강유의 일방적인 공격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냉혈철심이라는 자신의 별호가 그저 모질고 독한 성격 때문에 붙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목숨이 오가는 대결에서도 그의 평정심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반응은 전광석화 같았다.

강유가 어떤 식으로 공격해도 사우는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반응했다.

사우가 철위사대의 대주가 된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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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앙큼한 추격자

 

 

 

(심상치 않은 사연과 배경이 있는 여자임에 분명하다. 어쩐지 조만간에 다시 만날 것같은 예감이 들기도 하고...)

멀어지는 진상파를 보며 강유는 점원이 안내하는 자리로 갔다.

(확실히 값이 나가는 물건은 아니다.)

안내받은 창가의 자리로 가서 앉은 강유는 진상파가 주고 간 쌍룡환을 살펴보았다.

반지의 재질은 은이고 두 마리 용의 눈 부위에 박혀있는 보석들은 질 낮은 홍옥이다.

시장에 내다팔면 아마 은자 몇 냥 받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쩐지 정감이 가는 반지다. 마치 언젠가 전에 이 반지를 보거나 만진 적이 있었던 것처럼...)

강유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홀린 듯이 쌍룡환을 살펴보았다.

(이런 게 기시감(旣視感)이라는 것일 텐데... 비록 싸구려로 보이지만 뭔가 사연이 있는 반지임에 틀림없다.)

강유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꺄악!”

“엄마야!”

“으헉!”

갑자기 주점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서 강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을 가던 사람들과 말들이 화들짝 놀라 피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사람과 말들이 물살처럼 갈라지는 사이로 한 마리의 짐승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몸길이가 세 자쯤인 담비인데 온몸이 황금색 털로 덮여있고 한 쌍의 눈은 타는 듯이 붉다.

그놈은 바로 구미호리 구숙정이 진상파를 추적하라고 풀어놓은 영물 담비 섬전초였다.

(별일이 다 있구나. 어떤 짐승보다 조심성이 많고 사람을 싫어하는 담비가 백주 대낮에 관도를 활보하다니...)

강유가 놀라며 섬전초를 보고 있을 때였다.

섬전초는 주점 입구에 이르러 급정거했다.

킁킁!

그리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주점 입구로 방향을 틀었다.

“저 짐승 새끼가...”

“들어오지 마!”

“엄마야!”

주인과 점원들은 기겁하여 외치고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동행한 사내들에게 달라붙었다.

담비는 비록 체구는 작아도 아주 날래고 사나워서 늑대에 못지않은 맹수로 통한다.

대부분의 경우 담비가 알아서 사람을 피한다.

하지만 담비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속수무책으로 물릴 수밖에 없다. 너무 날래서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담비를 두려워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끼이...

그러거나 말거나 섬전초는 코를 벌름거리며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저리가 이놈아! 나가!”

“꺼져라 이 못된 짐승!”

휙휙!

주인과 점원들은 빗자루를 휘둘러 섬전초를 주점 밖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휘익!

하지만 섬전초는 바람처럼 움직여 빗자루질을 피하며 주점 안쪽으로 달려 들어왔다.

“꺄악! 엄마야!”

“오... 오지마라!”

주점 안은 삽시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안기며 비명을 지르고 남자들 중에서도 겁이 많은 자는 의자나 탁자 위로 뛰어올라가 피했다.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강유를 비롯한 몇 몇 무림인들뿐이었다.

(볼수록 맹랑한 놈이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다니...)

강유는 자신 쪽으로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오는 섬전초를 보며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담비가 날래고 사납다는 건 산속에서 살아온 강유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금모적안의 희귀한 담비인 섬전초의 모습에는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면이 있었다.

강유가 신기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섬전초를 보고 있을 때였다.

섬전초의 새빨간 눈이 무언가 발견한 듯 번뜩였다.

카아!

이어 그놈은 강유의 탁자 옆에 이르러 강유를 올려다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야 임마! 언제 봤다고 나한테 시비냐?”

강유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카아!

하지만 등을 활처럼 굽힌 섬전초는 한층 더 흉포한 표정을 지으며 강유를 노려보았다.

“조... 조심하시오 젊은이. 담비는 작다고 깔보면 안되는 위험한 짐승이오.”

“옛말에도 범 잡는 담비라는 말이 있지 않소? 몇 마리만 모이면 호랑이도 사냥한다는 무서운 놈이오.”

주변 사람들이 강유를 향해 외치며 걱정을 해주었다.

“이거 참...”

강유는 한숨을 쉬었다.

“초면인데 그렇게 까칠하게 구는 거 아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빨 감춰라.”

강유가 섬전초에게 눈을 부라릴 때였다.

“이쪽이다.”

“섬전초가 주점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살기 어린 외침이 들려 강유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휘익! 휙!

섬전초가 온 쪽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바람같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옷자락에 <鐵>자가 새겨진 무림인들이었다.

“저... 저자들은...!”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중 철위사대의 철위사들이다.”

“저 흉악한 것들이 무슨 일로 이런 곳에...”

달려오는 무사들을 본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겁에 질리고 긴장하는 표정이 되었다.

무림인들에게 제왕성의 위사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시비가 붙을 경우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칫 객기를 부리거나 분을 참지 못해서 제왕성 위사들과 싸우게 되면 뒷감당이 안된다.

제왕성의 무시무시한 보복에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저들이 제왕성의 철위사...)

강유도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어서 적잖게 놀랐다.

소요신군 강조는 안탕산을 떠나는 강유에게 제왕성의 위사들과는 절대 충돌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었다.

섬전초를 따라온 자들은 물론 철위사대 대주 냉혈철심 사우와 철위사들이었다.

강유가 보고 있을 때 사우 일행이 주점으로 들어섰다.

주점으로 들어온 그자들은 곧 섬전초를 발견하고 강유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섬전초는 그때까지 강유 옆에서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네놈, 진상파와 무슨 관계냐?”

다가온 사우가 음산한 눈초리로 강유의 아래위를 살피며 물었다.

강유는 한눈에 사우가 일행의 우두머리임을 알아보았다.

“진상파? 금시초문인 이름이오만...”

강유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저 새끼가 건방지게 대주님 말씀에 대꾸를...”

사우 뒤에 서있던 철위사 한 놈이 눈을 부라리며 칼을 뽑으려 하였다.

“진상파를 모른단 말이냐?”

사우는 손을 들어 그자를 자제시키며 다시 강유에게 물었다.

“그렇소. 나는 진상파라는 이름을 귀하를 통해 오늘 처음 들었소.”

강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 직후였다.

쩍!

강유의 목에는 날카로운 검의 날이 닿아있었다.

사우가 발검하여 검을 강유의 목에 댄 것이다.

“헉!”

“저... 저런...”

주변 사람들. 특히 무림인들은 기겁하는 표정이 되었다. 사우의 발검이 너무나 빨라 눈에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주르르!

사우의 검이 강유의 목으로 조금 파고들면서 피가 배어나왔다.

(대단한 쾌검! 검을 뽑는 게 보이지도 않았다.)

강유의 표정도 조금 굳어졌다.

사우는 강유가 강호에 나와 처음 상대해보는 일류고수였다.

실제로 철위사대의 대주인 사우의 실력은 강유의 아버지이며 칠절의 으뜸인 소요신군 강조와 비교해도 그리 아래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네놈 진상파와 무슨 관계냐?”

검을 강유의 목에 댄 채 사우가 음산한 어조로 물었다.

“나도 물읍시다.”

강유는 목에 검이 닿아있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우를 올려다보았다.

“뭐라?”

“저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보고 있던 철위사들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유는 무뚝뚝한 어조로 사우에게 말했다.

“귀하는 내가 왜 진상파라는 여인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요?”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다. 영물중의 영물인 섬전초는 희미하게 남아있는 진상파의 냄새만 맡고도 삼백여리를 달려왔으니...”

사우는 스산한 냉기가 느껴지는 눈초리로 강유를 노려보았다.

(그 여자의 이름이 진상파였군.)

강유는 비로소 자신에게 쌍룡환을 주고 간 여자의 이름이 진상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대륙의 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황금성의 성주라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내게서 진상파란 여자의 냄새가 난다는 거요?”

강유는 동요하지 않고 물었다.

“그렇다. 네놈은 어떤 식으로든 진상파와 관련이 있...”

거기까지 말하던 사우는 멈칫 하며 강유의 뒤를 보았다.

끼기! 끼!

섬전초가 다른 좌석으로 가서 기웃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그 좌석에서 국수를 먹었었다.

“히익!”

“저... 저리 가!”

섬전초가 살피고 있는 자리 근처의 사람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지른다.

“저놈이 왜 저러지?”

“저 자리에서도 진소저의 냄새가 나는 건가?”

다른 좌석에 코를 대고 킁킁 거리는 섬전초를 보며 사우와 철위사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소... 소인은 이 가게의 주인 장씨입니다요.”

그때 주인이 용기를 내서 나섰다.

“어떤 소저가 얼마 전 저희 가게에 들렸다 갔는데 저 담비 놈이 그 냄새를 맡고 들어온 듯합니다요.”

주인은 비지땀을 흘리며 섬전초를 가리켰다.

“그럼 섬전초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건가?”

“주점 안에 남아있는 진소저의 냄새를 오인해서 들어왔구나.”

상황을 파악한 사우와 철위사들이 난감해할 때였다.

끼이!

진상파가 앉아있던 자리 여기저기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던 섬전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휘익!

코를 허공에 대고 벌름거리던 그놈은 바람같이 주점 입구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급히 피해주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주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젠장! 헛걸음 했다.”

“저놈이 엉뚱한 짓을 했군.”

“가자!”

철위사들은 섬전초를 따라 급히 주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사우도 강유의 목에서 검을 떼었다.

“바짝 따라붙어라. 또 놓치면 안된다.”

철컹!

사우는 검을 칼집에 꽂으며 먼저 주점을 빠져나가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귀하의 이름이나 압시다.”

강유는 목의 상처에서 나는 피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수하들을 따라 주점에서 나가려던 사우는 멈칫 하며 돌아보았다.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강유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좌에게 앙심이라도 품었다는 거냐?”

사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강유는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고 말없이 그자를 바라보았다.

(안... 안돼!)

(상대는 제왕성의 철위사야!)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사우와 강유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제왕성과 척을 지고도 무사할 수 없는 게 당금 무림의 현실이다.

(저 벽창호가... 가게 안에서 칼부림이 나면 장사에 지장이 있을까봐 힘들게 무마시켰건만...)

주점의 주인 역시 원망스런 표정으로 강유를 흘겨볼 때였다.

“어린놈의 용기가 가상해서 본좌가 누군지 알려주마. 본좌는 제왕성 철위사대의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다!”

사우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냉... 냉혈철심 사우!)

(맙소사! 평범한 철위사가 아니라 철위사대의 수령이었구나.)

(구대문파 장문인들도 저자와 싸우면 이긴다고 자신하지 못한다는데...)

사우의 정체를 안 무림인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냉혈철심이라는 별호답게 사우는 적을 대함에 있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다.

일단 시비가 붙으면 기어코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 때문에 설령 사우보다 무공이 높은 고수라도 사우와 싸우는 것은 꺼려한다.

“피를 본 게 억울하면 언제든지 본좌를 찾아와라. 상대해 줄 테니...”

사우는 음산하게 웃으며 주점에서 나갔다.

휘익!

그리고는 앞서 주점을 나간 수하들의 뒤를 따라 날아갔다.

“에휴! 십년 감수했구만.”

“하여간 좋게 끝나서 다행이다.”

주점 안의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하며 참았던 숨을 토해내었다.

“하여간 요즘 제왕성의 인간들은 호환마마보다 무서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와 이유를 불문하고 도륙한다잖아.”

“마교와 혈교를 절멸시켜 세상을 구한 제왕성이 저렇게 패도적인 세력으로 변질될 줄 누가 알았겠나?”

“십팔 년 전부터는 제왕성에 밉보이고 무사한 인간이나 문파가 없잖아.”

“진짜 문제는 제왕성의 폭압을 견제할 세력이 없다는 점이야.”

“하긴 황실도 제왕성의 눈치를 본다더만...”

제왕성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을 쏟아내던 사람들은 흠칫했다.

강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때문이다

“이보게 젊은이, 화가 나더라도 참게나.”

“냉혈철심 사우를 만나고도 그 정도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야.”

“사우가 인간백정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라고...”

손님들, 그중에서도 특히 무림인들이 입구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강유에게 충고를 했다.

(진상파라고 했지?)

하지만 강유는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서둘러 주점을 나섰다.

(그 여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왕성의 표적이 되었다. 잠깐이나마 인연이 있었던 여자인데 위험에 빠진 걸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휘익!

주점을 나온 강유는 사우 일행이 간 쪽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저 어린 친구가 혈기를 못 참고 일을 저지르려는 모양이구만.”

“안됐어. 제왕성에 죄를 짓고도 살아난 사람이 없는데...”

삽시에 멀어지는 강유를 보며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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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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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만나다!

 

 

(누군가의 시선이 줄곧 날 따라오고 있는 것같다.)

금릉으로 향하는 관도를 가고 있는 강유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숭산에서 안탕산으로 가려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강유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동쪽으로 멀리 우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끈적한 시선이 등봉현의 객잔을 떠난 직후부터 집요하게 따라붙고 있었던 것이다.

(고불참회기를 읽은 후로 내가 너무 예민해진 것일까?)

강유는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살펴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그가 가고 있는 관도에는 제법 행인이 많다. 강유처럼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마차나 말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 딱히 의심 가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단순히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으로 돌리기에는 느껴지는 시선이 너무도 집요하고 확실하다.)

이마를 찡그리는 강유의 백보 쯤 앞쪽에 주점이 하나 보였다.

경치 좋은 강가에 위치해서인지 제법 많은 손님들이 주점을 드나들고 있었다.

(분명 날 감시하는 자가 있다. 다만 내 능력으로는 탐지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어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이고...)

강유는 생각에 잠겨 주점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쌍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게 느껴진다.

(어쩌면 달마독명안을 외운 덕분에 감각이 예민해져서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저 시선을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불선사는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암기한 후 태워버리라고 고불참회기에 적어놓았었다.

고불선사의 당부에 따르기 위해 강유는 밤새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을 외웠었다.

그 과정에서 강유는 달마독명안의 이치를 일부 깨닫게 되었다.

달마독명안은 육신통에 필적하는 경이적인 능력이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자 강유의 감각은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눈과 귀가 몇 배나 밝아진 것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던 것까지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유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맛보기도 이 정도인데 달마독명안을 온전히 구사하게 되면 정말 신통력을 발휘하는 셈이 되겠구나.)

강유가 달마독명안의 힘에 새삼 감탄하며 주점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냐?”

갑자기 주점에서 터져 나온 고함 소리에 관도를 오가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지나치려던 강유도 걸음을 멈추며 문이 열려 있는 주점 안쪽을 돌아보았다.

누굴 눈 뜬 장님으로 아는 거냐? 이 따위 유리조각으로 사기를 치려하고?”

주점 입구의 계산대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누군가에게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그자의 왼손에는 자두 씨만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들려 있고 오른손에는 식칼이 쥐어져 있다.

탐욕스러운 인상의 주점 주인과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서있는 인물은 늘씬한 체형의 여자였다.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들었지만 별 장식이 없는 수수한 옷을 입은 그 여자는 바로 황금성의 성주인 진상파였다.

 

지난 밤 진상파는 들키지 않고 황금성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었던 것이다.

태어난 이래 돈을 주고 뭔가를 사본 적이 없는 진상파다.

당연히 돈을 갖고 다닐 이유와 필요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날이 밝고 허기가 지면서 진상파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어려움에 처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제왕성이 자리한 태산에서 황금성이 있는 금릉까지 가려면 열흘 가까이 걸린다.

그동안 먹고 자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현실적인 해결 방법은 가까운 황금성의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제왕성의 인간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황금성 지점에 들렸다가는 간단히 사로잡혀 제왕성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결국 진상파는 황금성 지점을 찾아가는 건 포기하고 무작정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었다.

그러다가 허기를 참지 못하고 이 주점에 들어와 국수를 한 그릇 사먹게 되었다.

지닌 돈은 없지만 끼고 있는 반지로 값을 치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끼고 있던 반지가 도저히 진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뭐 이게 금강석(金剛石)이라고? 개 풀 뜯는 소리 하지 마라.”

주인은 왼손으로 쥔 반지를 진상파 얼굴에 들이밀며 눈을 부라렸다.

진상파는 그자의 무례함에 극도로 불쾌해졌지만 즉각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점원들 뿐 아니라 주점 안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느껴져 숨이 턱 막힌 탓이다.

이런 수모와 난감한 상황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진상파였다.

이만한 크기의 금강석이면 비옥한 땅 수만 평을 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길바닥 장사치인 나도 안다. 헌데 겨우 국수 한 그릇 먹은 값을 이걸로 치르겠다고?”

탕탕!

주인은 식칼로 계산대를 연신 내리쳐서 흠집을 내며 진상파를 윽박질렀다.

(귀티 나 보이는 여자인데 돈 없이 국수 한 그릇 먹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흥미가 생긴 강유는 걸음을 멈춘 채 일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의 성격상 타인의 곤경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한다.

하물며 수모를 당하고 있는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하게 자란 태가 난다.

강유는 그 여자에게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사이에 주점 주인의 패악질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돈이 없다고 말했으면 그깟 국수 한 그릇 그냥 말아줄 수도 있었어. 그런데 뻔뻔하게 사기를 치려고 해서 날 열 받게 해?”

주인은 눈을 부라리며 식칼을 진상파의 면전에 대고 흔들었다.

... 저런...”

주인이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군.”

저러다 사고치지.”

보고 있던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눈치 빠른 손님들은 주인이 진상파를 지나칠 정도로 거칠게 대하는 이유를 짐작하고 혀를 찼다.

진상파를 협박하면서도 주인의 툭 튀어나온 눈알이 수시로 진상파의 몸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난생 처음 보는 절세미녀인 진상파에게 엉큼한 속셈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요. 그게 금강석이 아니라고 쳐요.”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와 살기를 억지로 누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지의 고리를 이루는 금의 무게만도 두 돈이 넘으니 국수 한 그릇 값으로는 충분하고도 넘칠 거예요.”

진상파는 주인이 쳐든 반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도도하게 말했다.

주인도 장사치인지라 반지의 고리가 금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상파에게 엉큼한 마음을 먹고 있는 터라 기세를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 보자보자 하니까 이젠 구리를 금이라고 속이려 들어?”

그자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식칼을 쳐들어 진상파를 내려칠 듯이 위협했다.

진상파를 겁에 질리게 만들어서 자신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게 할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다.

하지만 그자의 의도와 달리 진상파는 미간은 찡그리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대신 보고 있던 주점 안의 손님들 일부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오냐! 네년이 언제까지 뻣뻣하게 굴 수 있는지 보자!)

주인이 독이 올라 식칼을 진상파의 목에 대려고 할 때였다.

!

그자의 칼 든 손목을 움켜잡는 강철 족쇄같은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뭐야?”

주인은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오만상을 쓰며 돌아보았다.

진상파도 흠칫 하며 주인의 손목을 틀어쥔 인물을 돌아보았다.

그만하시오 주인장. 분풀이치고는 도가 지나치지 않소?”

칼 든 주인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엄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은 강유였다.

그가 보다 못해 개입한 것이다.

당신 누군데... 어흑!”

강유에게 눈을 부라리며 잡힌 손목을 뽑아내려던 주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둑!

강유가 주인의 손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가한 것이다.

(... 무림인!)

주인은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와락 겁에 질렸다.

눈치 빠른 장사치답게 그자는 강유가 범상치 않은 무공을 지닌 무림인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분 소저께서 드신 음식 값은 내가 대신 내겠소. 그러니 그냥 보내드리시오.”

강유는 주인의 손을 놔주며 말했다.

이봐요! 귀하가 끼어들 일이 아니에요.”

보고 있던 진상파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남에게 신세를 져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진상파인지라 강유의 개입이 고맙기보다는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도 마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니 이걸로 이분 소저의 식대를 함께 계산하시오.”

찰랑!

강유는 진상파의 말은 무시하고 몇 개의 동전을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 그렇게 합죠. 식사는 뭘로 준비해드릴깝쇼?”

촤락!

주인은 급히 동전 쓸어서 챙기며 강유의 눈치를 보았다.

길을 서둘러야하니 가장 빨리 되는 것으로 준비해주시오.”

강유는 고개를 돌려 주점 안의 빈자리를 찾으며 말했다.

일이 원만히 해결될 기미를 보이자 마음 졸이고 있던 손님들은 다시 먹고 마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요.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요.”

찰랑!

주인은 강유가 준 동전을 불룩한 아랫배에 찬 전대에 넣으며 돌아서려 했다.

!

그런 주인의 어깨를 강유의 손이 움켜잡았다.

...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

주인은 겁에 질려 강유의 눈치를 보며 돌아보았다.

이분 소저에게 돌려드릴 게 있지 않소?”

강유는 웃으면서 주인이 그때까지 왼손으로 들고 있던 반지를 보았다.

아이쿠 이런!”

주인은 짐짓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마빡을 쳤다.

국수 값은 받았으니 이 반지는 돌려드리겠소.”

그리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반지를 진상파에게 내밀었다.

강유 옆에 서있던 진상파는 불쾌한 표정으로 반지를 낚아챘다.

(아깝구만. 유리조각인지는 몰라도 예쁘장해서 마누라에게 주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주인은 입맛을 다시며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

받아요.”

진상파는 점원의 안내를 따라 빈자리로 가려는 강유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물 한 모금 얻어 마셨어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라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어요.”

소저! 나는...”

인정이니 선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요. 난 기필코 당신에게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니까요.”

진상파는 난감해하는 강유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저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국수 한 그릇 대접한 대가로 수만 냥짜리 반지를 받을 수는 없군요.”

강유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반지를 보았다.

귀하는 이 반지의 보석이...”

진상파는 눈썹 끝을 조금 올리며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강유를 보았다.

진품의 금강석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강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들어볼까요?”

강유에게 흥미가 생긴 진상파의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진상파는 지금껏 숱한 미남자와 귀공자들을 보아왔다.

그 때문에 느닷없이 끼어든 이 청년의 인상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키가 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해서 사내답게 느껴진다는 정도였었다.

그랬는데 강유의 말을 듣다 보니 점점 더 호기심이 생긴다.

소저 자체가 귀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진 강유의 그 말이 진상파의 고요하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내...)

진상파는 자신의 심장이 움찔하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보옥(寶玉)같은 귀인께서 한갓 유리조각 따위로 자신의 존엄을 흠집 내실 리가 있겠습니까?”

강유는 진상파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인물이다. 탁월한 지인지감(知人之鑑;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강유의 말을 들으며 진상파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영친께서 엄히 가르치셨다는 것은 알지만 소생의 사정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반지를 받게 되면 자칫 협기(俠氣)를 부리는 척 해서 이익을 챙겼다는 오해를 사지 않겠습니까?”

말씀하시는 뜻은 알지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고 고개를 숙이던 진상파의 눈에 자신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두 마리 용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반지인 쌍룡환(雙龍環)이다.

그 쌍룡환은 황실에서 나온 것이라며 구숙정이 가져다주었던 패물함을 뒤적이던 중 저절로 진상파의 손가락에 끼워졌었다.

(이거라면...)

진상파는 별 생각없이 오른손 중지에서 쌍룡환을 뽑았다.

원래 그녀는 쌍룡환으로 국수 값을 치르려 했었다.

하지만 제왕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쌍룡환은 좀처럼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았었다.

어쩔 수없이 왼손 중지에 끼고 있던 금강석 반지를 뽑아서 국수 한 그릇 값을 치르려다가 봉변을 당했었다.

!

헌데 이번에는 혹시 하며 뽑자 쌍룡환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손가락에서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조화람! 지금까지는 그렇게 안 빠지더니만...)

진상파는 의아해하면서 쌍룡환을 강유에게 내밀었다.

대신 이걸 드리겠어요.”

소저!”

우연히 갖고 있게 된 반지인데 보다시피 조악하여 그다지 값이 나가는 물건은 아니에요. 이것마저 거절하면 화내겠어요.”

진상파는 난감해하는 강유의 손에 쌍룡환을 억지로 쥐어주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라도 이 반지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절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강유는 어쩔 수 없이 쌍룡환을 받았다. 한 눈에 봐도 그리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이라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고명(高名)...?”

쌍룡환을 건네 준 진상파는 강유의 얼굴을 기억해두려는 듯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강유라고 합니다. 안탕산에 살고 있지요.”

진상파의 시선이 심상치 않게 느껴져서 강유는 얼굴이 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생각이 강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머니 냉상영이나 분이도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들이지만 눈앞의 이 도도한 인상의 여인에 비하면 처지는 면이 있다.

안탕산의 강유소협... 언제고 한번 안탕산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어요.”

강유의 이름을 되뇌이며 진상파는 주점을 나갔다.

살펴가십시오.”

강유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진상파는 관도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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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달아난 신부

 

 

 

(천한 계집?)

숨어서 듣고 있던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철이 든 이래 남에게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모욕적인 말을 들은 때문이다.

모두 물러가라. 소성주는 내가 달래서 화를 풀게 할 테니...”

진상파가 분노에 치를 떨 때 일신재 입구에 이른 구숙정은 사우 일행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존명!”

사우는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철수한다!”

이어 그자는 앞장서서 일신재 앞을 떠났다.

사우의 뒤를 따라 일신재를 에워싸고 있던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전부 자리를 비워도 되나 몰라?”

그러게 말일세.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는 법인데...”

관목 앞을 지나가는 철위사들의 우려 섞인 속삭임이 진상파의 귀에 들렸다.

이 친구들 참, 눈치 없긴... 내총관께서 우리 보고 물러가라고 한 이유를 정말 모르겠나?”

철위사중 한명이 수군대는 동료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럼 혹시...”

설마 소성주님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걸 방해받지 않으려고...”

우려를 표하던 자들도 비로소 깨달았는지 안도의 표정이 되었다.

이럴 때 방해하지 말고 자리를 피해주는 게 아랫것들의 도리야.”

흐흐흐... 아무렴 그렇고 말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철위사들은 모두 일신재 앞을 떠났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인가? 뜨거운 시간을 보낸다니...)

숨어서 듣고 있던 진상파는 불길하고도 끔찍한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고개 돌려 일신재 쪽 보니 구숙정이 주변을 살피며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문을 닫기 직전 구숙정의 얼굴에 떠오르는 야릇한 미소가 진상파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저 천한 년이 이 밤중에 모용준의 거처를 찾아온 이유가...)

생각하기도 싫은 혐오스러운 상상으로 진상파의 온몸이 벌벌 떨렸다.

(만일... 만일 내 생각이 맞다면...)

진상파는 치를 떨며 관목 뒤에서 나와 일신재 쪽으로 다가갔다.

(제왕성이고 뭐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진상파는 제멋대로 떨리고 후들 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일신재의 창문으로 접근했다.

그런 그녀가 확인한 것은 끔찍하고도 절망적인 사실이었다.

 

어쩜... 어쩜 이렇게 늠름해지셨을까? 그 귀엽던 아기가...”

... 숙정 당신이 잘 먹이고 잘 키워준 덕분이지 뭐.”

창문을 통해 들리는 난잡한 대화가 진상파의 귀에 천둥처럼 들렸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리는 모용준과 구숙정의 대화를 통해 진상파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숙정은 원래부터 제왕성 소속은 아니었다.

모용세가 출신인 그녀는 모용준의 유모였으며 둘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은밀한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었다.

모용준은 섭장천의 양자가 되어 제왕성으로 들어올 때 내연관계인 구숙정을 데리고 와서 내총관으로 앉혔던 것이다.

어떻게... 절 어떻게 하실 거예요 도련님?”

...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 내일부터 진가년이 도련님의 공식적인 마누라잖아요. 그럼... 나이 들고 볼품없어진 저같은 년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겠지요?”

... 그럴 일 없어. 명목상으로는 진상파 그년이 내 본처라 해도... 제왕성의 실질적인 안주인은 숙정 당신이야. 난 절대 당신을 홀대하거나 버리지 않아.”

... 고마워요 도련님! 고마워요!”

... 진가년이 필요한 건 내 자식을 낳을 때까지야. ... 자식이 생겨서 황금성을 공식적으로 집어삼킬 수 있게 되면 그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 아비 곁으로 보내버릴 계획이야.”

... 도련님 말씀을 들으니 진가년이 불쌍하게까지 느껴지네요.”

... 진가년 생각은 그만하고 가능한 빨리 내 아이를... 내 자식을 낳아줘. ... 그럼 그 아이로 제왕성의 후계자를 삼을 테니까.”

... 노력해볼게요 도련님.”

 

너무나도 엄청난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현실감이 없어졌다.

진상파는 지금 자신이 듣고 경험하는 게 꿈속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짐승들!)

진상파는 이를 갈며 뒷걸음질로 일신재의 창문에서 떨어졌다.

(날 이용만 하고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이거지? 하지만 너희 년놈들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황금성의 동전 한 푼도 제왕성의 것이 되지 않을 테고...)

진상파는 꿈속을 걷는 듯 허우적거리는 걸음으로 일신재에서 멀어졌다.

모용준과 구숙정은 자신들이 방금 전 치명적인 재앙을 야기했음을 알 리 없었다.

 

* * *

 

밤이 아주 깊어 제왕성에 불이 켜진 건물이 드물다.

하지만 제왕성의 정문 일대는 여전히 대낮같이 환했다. 손님들을 태우고 왔던 마차들이 줄줄이 정문을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일 있을 혼례식을 위해 무려 만 명이 넘는 하객이 제왕성을 찾아왔다.

제왕성이 아무리 규모가 커도 그 많은 하객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찾아온 하객들은 돌아갔다가 아침에 다시 오도록 권유받았다.

진상파는 제왕성을 빠져나가는 마차들 중 하나에 몸을 싣고 있었다.

마차의 주인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부유한 상인이어서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두고 보자! 두고 보자!)

혈도가 짚여 기절한 마차 주인 옆에 쪼그려 앉은 채 진상파는 가슴 속의 칼날을 벼리고 또 벼렸다.

얼마 전 일신재에서 엿들어 알게 된 추악한 비밀은 설령 죽어 재가 된다 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모용준이 황금성의 재물을 노리고 자신과 결혼을 하려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

(가능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그나마 제왕성의 폭압으로부터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곳은 집뿐이니...)

금릉(金陵)에 자리한 황금성까지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진상파였다.

(모용준! 구숙정! 나 진상파를 적으로 돌린 게 얼마나 끔찍한 실수인지 알게 해줄 것이다.)

진상파는 초조한 마음을 살의와 분노로 다스리려 애썼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차는 천천히 제왕성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 * *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제왕성은 발칵 뒤집혔다.

사대무력집단을 포함한 제왕성의 모든 무사들이 나서서 제왕성의 내외를 수색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일찍 깨어난 하객들에게는 거처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는 살벌한 경고가 떨어졌다.

 

* * *

 

지금 그걸 말이라고 씨부리는 것이냐?”

혈가람의 화등잔만한 눈에서 불이 뿜어졌다.

오늘 혼례를 올리기로 되어있는 신부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이유와 사정을 아는 놈이 한명도 없다는 게 말이 돼?”

혈가람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이유는 진상파가 사라진 사실을 보고 받은 때문이다.

대청 안에는 외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을 비롯해서 여러 명의 나이 든 무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모용준은 오만상을 쓰며 상좌에 앉아있고 그의 뒤에는 구숙정이 병아리를 지키는 암탉같은 모습으로 서있다.

고정하십시오 부성주님. 살천인조께서 본성의 사대무력집단 전부를 동원하여 수색에 나서셨으니 곧 상황 파악이 될 것입니다.”

궁무독이 혈가람의 격노를 갈아 앉히려 애쓰며 말했다.

듣기 싫다.”

혈가람은 솥뚜껑만한 손을 거칠게 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자존심이 상한 궁무독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찡그려졌다.

일이 터진 후에 수습하면 뭘 해? 이런 일이 애초에 벌어지지 않게 했어야지! 궁무독 너는 외총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누가 제왕성을 들고 나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냐?”

면목이 없습니다 부성주님.”

궁무독은 치미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게 대체 무슨 개망신이냐 말이다. 제왕성이 소성주의 신부될 계집 하나 지키지 못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냐?”

혈가람의 질타에 할 말이 없는 궁무독과 무사들은 고개 떨군 채 듣고만 있었다.

당장 진상파, 그 년을 찾아내서 끌고 와라! 그년을 찾지 못하면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올 생각 말고!”

혈가람은 이를 바득 바득 갈면서 손을 저었다.

존명!”

진소저를 반드시 찾아서 데려오겠습니다.”

궁무독과 무사들은 일제히 포권을 한 후 대청을 빠져나갔다.

이제 대청에는 혈가람과 모용준, 구숙등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밥 버러지같은 놈들! 제왕성의 이름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대청 밖으로 멀어지는 궁무독 일행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혈가람은 성난 황소처럼 씨근거렸다.

상심이 되겠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진가년을 붙잡아 와서 소성주의 품에 안겨줄 테니...”

그러다가 모용준을 돌아보는 혈가람의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그걸 보며 모용준은 사람의 표정이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야 대사님만 믿을 따름입니다.”

모용준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저 머저리들은 도무지 믿음이 안가. 노납이 직접 성을 나가서 진가년을 찾아보도록 하겠네.”

혈가람이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셨다.

살천인조께서 나서셨는데 대사까지 수고하실 것까지야...”

곧 좋은 소식 갖고 돌아오도록 하겠네.”

휘익!

모용준의 만류에도 혈가람은 바람같이 대청 밖으로 날아나갔다.

저 땡중이 도련님께 잘 보이려고 갖은 재롱을 다 부리는군요.”

그 모습을 본 구숙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준걸(俊傑)인 게야.”

모용준도 비웃음을 흘렸다.

준걸이라뇨? 중놈 주제에 살인을 밥 먹듯 하고 술과 계집에 환장하는 저 땡중이?”

옛말에 시세(時勢)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고 했잖아. 저 땡중은 다음 대 천하의 주인이 나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거야.”

옳거니! 준걸이라는 게 그런 뜻이었군요

황금성의 인간들은 뭐하고 있어?”

진가년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우리보다 더 자지러지게 놀라더군요.”

그렇다는 건 진상파를 황금성의 인간들이 빼돌린 건 아니라는 건데...”

모용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고독모모를 비롯해서 진가년의 호위들인 백팔금차 전원은 이미 본성을 빠져나가 수색을 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지금은 황금성의 몇몇 늙은이들과 아랫것들만 성중에 남아있는 상태구요.”

혹시 고독모모나 백팔금차가 진가년을 먼저 찾아내는 거 아니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모용준의 우려 섞인 말에 대답하면서 구숙정은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반짝!

그러자 천장 구석에서 짐승의 눈 한 쌍이 반짝이며 나타났다.

휘익!

이어 천장에서 아래로 날듯이 뛰어내린 것은 한 마리의 담비였다.

특이하게도 온몸이 황금빛 털로 덮인 그 담비는 한 쌍의 눈은 붉은 핏빛이다.

그놈은...!”

담비를 본 모용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본교(本敎)의 영물인 섬전초(閃電貂)예요.”

구숙정은 금모적안(金毛赤眼)의 담비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끼이! !

그러자 섬전초라 불린 담비는 가볍게 튀어올라 구숙정의 품에 안겼다.

원래 담비는 체격은 작아도 날래고 사납기 이를 데 없는 짐승이다.

호랑이 잡는 담비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 담비들 중에서 우연히 천고영약을 먹어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이 섬전초다.

그놈은 호랑이도 어렵지 않게 잡아 죽이는 흉포함과 함께 빠르기가 번개같아서 섬전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혹시 몰라서 이놈을 데리고 왔는데 유용하게 써먹게 되는군요.”

구숙정은 자신의 품에 안긴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여간 유모의 준비성은 알아줘야한다니까.”

이 아이는 빠르기가 번갯불 같을 뿐 아니라 후각이 사냥개들보다 몇 배 더 민감해요. 진가년의 냄새가 밴 물건만 있으면 그년이 어디에 있든 안내해줄 거예요.”

구속정은 말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모용준이 따라서 돌아보니 철위사대의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가 대청 옆에 달린 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져왔습니다 외총관님.”

다가와서 모용준에게 인사하는 사우의 두 손에는 몇 벌의 여자 옷이 들려있다.

그 옷가지들은?”

진가년이 입던 옷들이에요. ()대주가 손을 써서 구해왔군요.”

구숙정은 섬전초의 얼굴을 사우가 내미는 옷가지에 대어주었다.

휘익!

코를 벌름거리며 옷가지에 배린 냄새를 맡던 섬전초는 이내 눈을 빛내며 구숙정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려선 섬전초는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휘익! 끼이!

그러다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빠르기로 대청에서 달려나갔다.

발이 특히 빠른 자들을 데리고 섬전초를 따라가라. 진가년에게 안내해줄 것이다.”

구숙정이 재빨리 사우에게 지시했다.

험하게 다뤄도 상관없으니 다른 인간들 보다 먼저 진가년을 찾아내서 끌고 와라. 소성주님께 드리기 전에 내 손으로 단단히 교육을 시켜야하니까.”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냉혈철심 사우는 대답과 함께 대청에서 날아갔다.

대청 밖에는 십여 명의 무사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철위사들인데 경신술이 특기인 자들이다.

따라와라!”

사우는 이미 상당히 멀리 간 섬전초를 따라서 날아가며 외쳤다.

예 대주님.”

가자!”

철위사들도 바람같이 몸을 날려 사우를 따라갔다.

곧 섬전초와 사우 일행은 제왕성을 빠져나갔다.

혼례를 앞두고 달아난 신부를 찾아내기 위한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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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혼례식 전야

 

 

 

하늘같은 남편이 될 소성주를 중인환시리에 개망신 시키다니... 아무리 속 좁은 계집의 소행이라 해도 그냥은 못 넘어가겠소.”

혈가람이 솥뚜껑만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펑펑 치며 말했다.

소성주님을 위해 격분하시는 부성주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혼례를 목전에 둔 지금 진소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자제해야하지 않을런지요?”

신중하게 입을 연 중년인은 제왕성의 외()총관 독검마유(毒劍魔儒) 궁무독(宮無獨)이다.

제왕성의 외총관은 다른 문파들과의 관계를 전담한다.

궁무독은 심기가 깊고 꾀가 많아 외총관의 역할을 능란하게 수행해오고 있다.

외총관님의 말씀이 맞아요. 일단 내일의 혼례를 원만히 치르는 데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것은 모여 있는 네 사람 중 유일한 여자인 내총관 구숙정이다.

황금성의 진소저가 제 아무리 당찬 성격이라도 일단 소성주의 여자가 되고나면 고분고분해지지 않겠어요?”

구숙정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겠지. 어쨌든 진소저도 여자는 여자이니...”

무엇보다 혼례를 무사히 치르는 게 중요하긴 해.”

구숙정의 말에 살천인조는 물론이고 혈가람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쯧쯧! 그나저나 보지 않아도 뻔하구먼. 소성주는 분을 참지 못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을 게야.”

살천인조가 혀를 끌끌 찼다. 전설적인 자객답게 살천인조는 모용준의 됨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소성주는 제가 가서 달래볼 테니 부성주님들께서는 귀빈들의 접대에 전념해주세요.”

구숙정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 *

 

네가 모용준을 만나고 왔다는 얘기는 들었다.”

고독모모(孤獨母母)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새하얀 백발에 곱게 늙은 노파인 고독모모는 황금성의 태상호법이다.

출신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독모모가 절세적인 무공의 소유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황금성의 제일고수이기도 한 고독모모는 어린 성주를 경호하기 위해 제왕성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래 모용준을 직접 만나본 소감이 어떠냐?”

고독모모는 진상파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나요?”

물론이다.”

진상파의 새침한 말에 고독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 보고받은 대로 경박하고 탐욕스러운데다가 소심하기까지 하더군요.”

진상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멸의 표정이 떠올랐다.

저런...”

고독모모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지금껏 만나본 사내들 중에서도 평균 이하라고 할 수 있어요.”

모용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상파의 얼굴은 저절로 찌푸려졌다.

노신을 비롯하여 황금성의 모든 식솔들은 상파 너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모용준이 정 마음에 들지 않고 성에 차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파혼을 선언하고 돌아가자.”

고독모모가 연민의 표정으로 말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병으로 잃은 진상파를 사실상 길러온 것이 고독모모다.

고독모모에게는 진상파가 주인이라기보다는 딸같은 존재인 것이다.

아뇨! 내일 있을 혼례는 예정대로 진행시키도록 하세요.”

진상파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파야!”

여자로서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제게는 황금성 성주로서의 책임이 더 무거워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독모모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물론 모용준은 모든 면에서 제 배필이 되기에 모자란 사내예요. 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배경... 제왕성의 강력한 힘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군요.”

진상파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황금성의 안위를 위해 네 행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아니요. 저는 여자로서도 행복해질 거예요. 모용준을 제가 원하는 기준에 맞는 사내로 변모시키면 되니까요.”

진상파의 단호한 말을 들으며 고독모모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백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고독모모인지라 성인이 된 인간의 성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당사자인 네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할미로서도 더는 할 말이 없구나.”

고독모모는 강철로 만든 지팡이를 쥐고 일어났다.

다만 소인배는 한번 품은 원한이나 원망은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고독모모는 배웅하려고 일어나는 진상파를 만류하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파는 누구보다 똑똑한 아이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이 얼마나 각박하고 인간은 또 어디까지 추잡해질 수 있는지는 모르고 있다.)

진상파의 방을 나서며 고독모모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파가 제 아무리 노력해 봐야 모용준의 천박한 성품은 변함이 없을 테고... 결국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걸 깨닫고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고독모모는 문 밖을 지키고 있던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의 인사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쏘아진 화살이니 그저 모용준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괜찮은 인간이길 바랄 뿐이다.)

한숨을 쉬는 고독모모의 미간에 전에 없던 주름이 깊이 파였다.

 

* * *

 

밤이 깊었다.

(다 큰 사내의 성품을 고치려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진상파는 잠자리에 들 생각은 않은 채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지속될 악전고투일 수도 있겠으나...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진상파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모용준의 경박하고도 비열한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속에 납덩이가 들어있는 기분이 되는 진상파였다.

(지혜를 다 동원하고 인내심을 극한까지 발휘해서라도 모용준을 번듯한 사내로 변모시켜야만 한다.)

진상파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결의를 다졌다.

 

<다만 소인배는 한번 품은 원한이나 원망은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고독모모가 방을 나가면서 남긴 말이 쟁쟁하다.

그와 함께 분을 참지 못하고 악을 쓰며 집기들을 때려 부수던 모용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까 그 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있을 것이다. 내일 대사를 치러야하니 이 밤이 가기 전에 찾아가서 좀 다독여줄 필요가 있다.)

덜컹!

진상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방을 나서자 경비를 서고 있던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이 놀라서 돌아본다.

밤이 깊었습니다. 어인 일로 나오셨는지요?”

철관음이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 전에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

진상파는 철관음을 지나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거 없어. 혼자 생각할 것도 좀 있으니까 아무도 따라오지 마.”

진상파는 철관음을 뿌리치고 영빈관을 떠났다.

괜찮을런지요 단장님?”

백팔금차 중 한명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제왕성의 내원(內院)은 세상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이니 별일 없을 것이다.”

철관음은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진상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몰래 경호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불벼락이 내릴 것이다. 제왕성의 치안상태를 믿고 기다려보자.”

...”

철관음의 말에 백팔금차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심란하시겠지. 평생 같이 살아야할 사내의 천박한 실체를 알아버렸으니...)

철관음은 진상파가 사라진 쪽을 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새석숭님만 급사하지 않으셨어도 인중(人中)의 봉황(鳳凰)인 아가씨가 모용준같이 비루한 인간을 배필로 맞은 일은 없었을 텐데...)

새삼 자신의 전 주인이 비명에 간 것이 아쉬운 철관음이었다.

 

* * *

 

제왕성에는 고수들이 구름같이 많다.

대체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제왕성의 녹을 먹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두 명의 부성주와 오래전에 제왕성을 나간 태상호법 흑백신귀가 신주이십팔숙중 섭장천을 제외한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명의 부성주와 두 명의 태상호법 외에도 제왕성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수들이 존재한다.

강호에 알려진 제왕성의 대표적인 전력은 사대무력집단(四大武力集團)이다.

금위사대(金衛士隊), 은위사대(銀衛士隊), 동위사대(銅衛士隊), 철위사대(鐵衛士隊)가 바로 그들이다.

제왕성은 소속 무사들에게 황실을 본 따 위사(衛士)라는 직함을 부여해온 것이다.

 

사대무력집단중 가장 낮은 등급은 철위사대다.

하지만 철위사대 소속 철위사(鐵衛士)들은 강호에 나가면 일류고수 소리를 듣고도 남는 실력자들이다.

그 철위사들의 숫자가 무려 천 명이다.

제왕성에는 위사등급을 받지 못한 무사들이 수만 명 존재한다.

그들이 치열하게 경쟁하여 선발되는 것이 철위사다.

 

동위사(銅衛士)의 숫자는 오백 명으로 각대문파 장로들에 필적하는 고수들이다.

 

은위사(銀衛士)의 숫자는 삼백 명이며 각대문파 장문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금위사(金衛士)의 숫자는 불과 백 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주이십팔숙에 이름을 올려도 무리가 없는 절세고수들이다.

, 제왕성에는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라는 신주이십팔숙이 무려 백 명이나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왕성에 금위사들에게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고수들의 집단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원로원(元老院)이 바로 그것이다.

은퇴한 전대고수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원로원이다.

숫자 미상인 원로원의 원로들은 제왕성의 대소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왕성에 심각한 도전이나 위기가 찾아오면 발 벗고 나선다.

원로원의 전력만으로도 마도 무림의 종가인 마교나 사파 무림의 주인이었던 혈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무림의 평판이다.

 

이처럼 백여 년 간 축적되어온 제왕성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설령 전설 속의 천마가 부활한다 해도 제왕성에 맞서지는 못할 것이다.

 

* * *

 

일신재는 제왕성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대 제왕성 성주가 될 후계자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일신재의 경비가 삼엄한 것은 당연하다.

낮에는 등급을 받지 못한 무사들, 무등위(無等位) 위사들이 경비를 선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면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일신재를 물 샐틈 없이 에워싼 채 지킨다.

 

진상파는 일신재가 보이는 곳에 자라고 있는 울창한 관목들 사이에 숨듯이 서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리 옷자락에 <>자가 수놓아진 무사들이 일신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철위사대 소속의 철위사들이다.

(제왕성 후계자의 거처답게 경비가 삼엄하구나.)

진상파의 미간이 모아졌다.

그녀도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무공 방면에는 그다지 성취가 없는 진상파다.

철위사 한명도 상대할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다.

(자존심이 상해서 토라져 있을 모용준을 다독여줄까 하고 찾아왔는데... 이래서는 몰래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삼엄한 일신재의 경비를 확인한 진상파는 난감해졌다.

물론 정체를 드러내면 무리없에 일신재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밤 깊은 시간에 자신이 모용준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

마치 진상파 자신이 먼저 모용준에게 숙이고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돌아가야 하나?)

관목 사이에 숨은 진상파가 철위사들을 훔쳐보며 갈등 할 때였다.

“...!”

“...!”

무엇을 발견했는지 돌연 철위사들이 긴장하는 것이 진상파의 눈에 들어왔다.

(들킨 것일까?)

철위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진상파는 몸을 좀 더 숙였다.

!

그 직후 누군가 관목 옆을 지나 일신재로 다가갔다.

(저 계집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일신재로 다가가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의 눈이 치떠졌다.

여자인 진상파가 보기에도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그 여자는 바로 제왕성의 내총관인 구미호리 구숙정이었다.

철위사들은 구숙정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긴장했던 것이다.

(이 야심한 중에 저 천박한 계집이 무슨 일로 모용준의 거처를 찾아온 것일까?)

진상파가 일신재로 다가가는 구숙정의 뒷모습을 노려볼 때였다.

휘익!

건물 뒤편에서 날듯이 달려오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철위사 복장을 한 중년인인데 다른 철위사들과 다른 점은 소매에 세 가닥의 검은 색 줄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 세 가닥의 줄은 중년인이 철위사대의 수령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을 지닌 그자가 철위사대의 대주(隊主)인 냉혈철심(冷血鐵心) 사우(査愚).

내총관님!”

서둘러 달려온 냉혈철심 사우가 포권을 하며 구숙정을 맞이했다.

소성주님은?”

구숙정은 사우에게 물으면서도 일신재 쪽으로 향하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심기가 불편하신지 주무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우는 구숙정의 눈치를 보며 따라갔다.

사우가 비록 철위사대의 대주이긴 해도 총관인 구숙정보다는 한참 직급이 낮다.

게다가 구숙정에게는 부성주들이라 해도 무시하지 못하는 막강한 배경이 있는데...

그럴만도 하지. 평생 부모님에게도 싫은 소리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 우리 소성주가 천한 계집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구숙정은 코웃음을 치며 일신재의 입구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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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파국(破局)의 전조(前兆)

 

 

 

일신재(日新齋)는 제왕성 소성주 모용준의 거처다.

섭장천은 양자로 삼은 종매의 손자 모용준이 제왕성 성주에 걸맞는 인재가 되길 원하는 마음에 일신재라는 당호(堂號)를 지어주었다.

섭장천도 경박하고 호색한 모용준의 인성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섭씨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들 중에서만 후계자를 고르다보니 모용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신재라는 당호에는 어쩔 수 없이 모용준을 양자로 삼아야만 했던 섭장천의 고뇌와 기대가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호호호 아이 공자님도...!”

어머나 엉큼하셔라.”

띠리리링! 띠링!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당호가 무색하게 일신재에서는 풍악소리와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질탕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가 아직 남아있을 때부터 시작된 농탕질은 밤이 되면서 그 정도가 걷잡을 수 없이 짙어지고 있었다.

무얼 보았는지 일신재를 드나들며 술과 음식을 나르는 하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혐오로 물들어있었다.

소성주님 거처에서 나오는 년들마다 가자미눈이 되는군.”

일신재 주변을 지키던 제왕성 무사들 중 한명이 혀를 찼다.

그럴 만도 하지. 내일 장가 갈 새신랑이 갈보들을 끼고 질펀하게 노는 걸 봤을 테니 배알이 꼬이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

다른 무사가 이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후환이 없을지 모르겠구만. 황금성의 진소저도 한 성깔 한다는 소문이던데...”

처음 말을 꺼낸 무사가 혀를 찼다.

계집 성깔이 대단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일단 한 남자의 마누라가 되면 끈 떨어진 갓 꼴이 되는 건데...”

입조심하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잖아.”

듣고 있던 동료무사가 급히 두 사람에게 주의를 주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돌아보는 쪽에서 크고 작은 두 명의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앞장 선 여자는 보통보다 조금 더 큰 키지만 뒤따르는 여자는 칠척 가까운 거구의 소유자다.

진상파와 철관음이다.

황금성의 암호랑이께서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군.”

이거 뭔 일 나도 나겠는걸.”

내가 안에 들어가 기별함세.”

무사들 중 한 명이 급히 일신재 안쪽에 통보하려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자의 발걸음은 진상파가 내뱉은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자리에서 꼼짝 마라.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될 테니...”

무사들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되어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리 크지 않고 듣기 좋은 음색이지만 진상파의 말에는 잘 벼린 칼날같은 삼엄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 띠딩!

호호호! 하하하!

일신재로 다가온 진상파의 귀에 풍악소리와 함께 남녀가 수작을 벌이는 낮 뜨거운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짐승같은 것들...)

진상파는 치를 떨었다.

철관음의 보고를 들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고 찾아왔었다.

하지만 직접 귀로 들어 확인하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놀아나고 있는지 내 눈으로 봐주겠다.)

진상파는 이를 갈며 일신재 입구로 다가갔다.

(일 났구만!)

(저 암호랑이가 들이닥친 걸 알리지 못한 우리에게도 불똥이 튀겠어.)

곁눈질로 진상파를 훔쳐보는 무사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 * *

 

일신재 안에서는 진상파가 생각하는 대로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가운데 열 명이 넘는 남녀가 발정난 짐승처럼 뒤엉키고 있었다.

사내는 다섯 명이고 여자는 그 배가 넘는 열 명 이상이다.

다섯 명의 사내들은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여자들을 끼고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밤 새자! 오늘은 갈 때까지 가보는 거다.”

방문 정면의 주안상을 앞에 두고 앉은 모용준은 흥에 겨워 웃었다.

상의를 풀어헤쳐 맨살을 드러낸 모용준 좌우에는 옷을 입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기녀 두 명이 달라붙어 교태를 부리고 있다

이 밤만 지나면 슬프게도 난 더 이상 총각이 아닌 거다. 불쌍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네놈들이 더 화끈하게 놀아야한다.”

모용준은 술잔을 쳐들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얼굴은 멀끔하게 생겼지만 행동거지나 말하는 본새는 영락없는 시정의 파락호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비로소 인생의 진미를 알게 되는 건데...”

주안상 사이에 기녀를 눕히고 희롱하고 있던 자가 모용준을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장가를 가야 인생의 진미를 알게 된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모용준도 마주 눈을 흘기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먼저 장가 간 형님의 말씀이니 잘 새겨들어 임마. 마누라가 있어야 제대로 된 오입질을 할 수 있는 거다.”

사내가 다시 하던 짓에 집중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개소리의 근거를 말해보라니까.”

!

모용준은 짐짓 거칠게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눈을 부라렸다.

준이 넌 풍류한량을 자처하는 놈이 일도(一盜), 이비(二卑), 삼기(三妓), 사첩(四妾), 오처(五妻)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

옳거니!”

모용준은 그제야 악우(惡友)의 말뜻을 깨닫고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자고로 계집은 훔쳐 먹는 게 가장 맛나고 하녀와 창녀, 첩이 그 다음 순서인 거다.”

물론 가장 재미없는 건 마누라야. 마누라와 동침하는 건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니까.”

맞아. 맞아. 대를 이을 새끼를 만들어야하는 게 아니라면 마누라하고는 살도 맞대기 싫지.”

다른 놈들도 낄낄 대며 친구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마누라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이거야. 눈 부라리며 감시하는 마누라가 있어야 몰래 훔쳐 먹거나 사먹는 게 맛나거든...”

여자를 눕히고 희롱하는 놈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뭐냐? 제대로 된 오입질은 마누라 눈을 속이면서 하는 것이다?”

모용준은 피식 웃었다.

마누라 몰래 다른 여자 건드리는 게 얼마나 흥미진하고 살 떨리는 경험인지 준이 너도 곧 알게 될 게다.”

모용준 옆에서 두 명의 기녀를 함께 희롱하고 있던 다른 놈이 웃으며 말했다.

네놈들 말을 들으니 낙담 대신 기대가 되는구나. 나도 내일 부터는 제대로 된 바람을 피워볼 수가 있게 될 테니 말이다.”

모용준은 술잔을 쳐들면서 음험하게 웃었다.

진정한 오입의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모용준!”

장래의 제왕성 성주가 오입장이라니 볼만하겠구먼.”

못된 친구놈들이 왁자지껄 웃을 때였다.

!

일신재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

뭐냐?”

꺄악!”

엄마야!”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내놈들과 기녀들은 기겁하며 문쪽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에 활짝 열린 문 밖에 진상파가 서있는 게 보였다.

의외로 진상파의 표정은 차분하다.

다만 눈빛만은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이크!”

... 진소저!”

엉겨 붙어 있던 사내놈들과 기녀들이 불 맞은 짐승들처럼 펄쩍 뛰며 떨어졌다.

... 진소저! 여긴 어쩐 일로...”

어서 오시오 진소저.”

사내놈들은 억지로 웃으며 급히 옷을 추스렸다.

기녀들도 겁에 질려 진상파의 눈치를 보며 사내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가요.”

진상파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

가라니... 어디를...”

무슨 말씀이신지...?”

사내들은 당황하여 진상파의 눈치를 살폈다.

모용준도 술잔 내려놓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당장 제왕성에서 사라지도록 해요. 만일 다시 내 눈에 띠는 인간이 있다면...”

진상파의 들끓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 인간과 그 인간의 집안을 완전한 알거지로 만들어버리고 말겠어요.”

진상파는 고저(高低)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내들은 진상파의 서늘한 눈가로 푸른 불꽃이 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용서하십시오 진소저.”

당장 사라지겠소이다.”

두 번 다시 제왕성에 얼씬 거리지 않겠소.”

사내들은 겁에 질려 좌우의 쪽문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진상파가 서있는 정문으로는 나갈 엄두를 못낸 것이다.

겁에 질린 기녀들도 벗어놓았던 옷가지를 끌어안고 사내들 뒤를 따랐다.

모용준의 친구들은 제법 사는 집안 출신들인지라 황금성에 죄를 지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쌀 한 톨 기름 한 방울 구할 수 없어 마침내 돈을 쌓아놓고도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황금성에 밉보이면서까지 거래를 하려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곧 일신재 안에는 모용준만이 남게 되었다.

진상파는 문 밖에 서서 모용준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젠장...)

진상파의 시선을 피하면서 모용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모멸감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친구들 앞에서 당한 수모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양부 섭장천이 추진한 이 혼사가 깨질 경우 자신이 제왕성의 주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 불쾌했다면 용서하시오 소저. 소꿉친구들과 기분을 내는 게 좀 지나쳤던 것같소. 내 사과하리다.”

모용준은 억지로 웃으며 포권을 했다.

진짜 대장부라면 목에 칼이 들어올지언정 자기 소행을 변명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하물며 무림의 주인인 제왕성의 후계자께서 남에게 머리를 숙일 일을 해서야 되겠어요?”

진상파가 여전히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모멸감으로 얼굴이 이지러지긴 했지만 모용준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시는...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길 바라겠어요.”

그 말을 남기고 진상파는 일신재를 떠났다.

(경고는 충분히 되었을 거야.)

철관음을 거느리고 일신재에서 멀어지며 진상파는 생각했다.

(몸에 밴 못된 버릇이 쉽사리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더 나빠지지 않게 통제할 수는 있다. 어쩔 수 없이 부부가 되어 살아야한다면 겉모습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갈 수밖에...)

진상파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와장창!

갑자기 뒤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

뒤이어 분을 못 참고 악을 쓰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저 졸장부가...)

진상파는 미간을 모으며 일신재 쪽을 돌아보았다.

주변의 무사와 하녀들도 겁에 질려 일신재를 보고 있었다.

와장창! 쨍그랑!

그 사이에도 일신재 안에서는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용준이 분을 참지 못하고 집기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가씨...”

걱정마. 나도 간단한 싸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까.”

난감해하는 철관음에게 말하며 진상파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속 좁고 천박한 인간!)

진상파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모용준에 대한 혐오와 실망이 진상파의 가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강요하지만 않았어도 저런 졸장부와 부부가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진상파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왕성에서 혼담이 들어왔을 때 진상파가 바로 응한 것은 아니다. 뒷조사를 통해서 모용준의 인성이 개차반이라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다.

망설이는 진상파에게 적극적으로 혼사를 권한 것은 그녀의 어머니, 정확하게는 의모(義母)였다.

이름이 조예(趙芮)인 진상파의 의모는 새석숭 진보륜이 늦으막이 거둔 후처였다.

비록 새석숭과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조예는 황금성의 가장 큰 어른이다.

의모의 강력한 권유도 있고 해서 진상파는 망설이던 마음을 접고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였었다.

 

(아버지가 피땀 흘려 키워온 황금성을 탐욕스러운 떨거지들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혼인을 물릴 수도 없다.)

진상파의 손이 핏줄이 드러나도록 강하게 쥐어졌다.

(결국 저 못난 인간을 길들이는 것 외에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진상파는 거푸 심호흡을 하여 참담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렸다.

 

* * *

 

밤이 깊어졌다.

하지만 제왕성은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었다.

내일 치러질 소성주의 혼례식에 참석하기 휘해 원근각지에서 몰려든 하객들 때문이다.

무림의 주인인 제왕성이 십팔 년 만에 맞이한 경사다.

무림의 거의 모든 방파와 가문의 수장들이 축하하기 위해 제왕성을 찾았다.

제왕성의 식솔들은 수천 명에 이르는 하객들을 대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도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모여 있는 네 명의 남녀가 있었다.

 

진소저가 기선을 제압했군!”

제왕성의 부()성주 중 한명인 살천인조(殺天忍祖)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제왕성에 부성주라는 직책은 없었다.

그러다가 십팔 년 전 처음으로 부성주 두 명이 세워졌다.

납치당한 아들을 찾는 데 전념하던 섭장천은 자신을 대신하여 제왕성의 대소사를 꾸려갈 인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성주라는 직책은 그렇게 생겼으며 그중 한명이 살천인조다.

인조(忍祖)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살천인조는 왜국(倭國) 출신의 전설적인 자객이다.

지금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지닌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지만 현역일 때의 살천인조가 노린 표적은 결코 죽음을 면치 못했었다.

비록 섭장천 때문에 신주이십팔숙에는 끼지 못하지만 살천인조는 섭장천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절세고수다.

웃을 일이 아니오 인조! 소성주가 느꼈을 수모와 모멸감을 생각해보시오.”

머리를 제외한 온몸이 붉은 빛 털로 뒤덮인 거구의 중이 화등잔같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불곰을 연상케 하는 육중한 체격을 자랑하는 노승의 별호는 혈가람(血伽藍)이다.

혈가람은 소림사 출신으로 소림사 당대 방장에게는 사숙 뻘이 된다.

하지만 혈가람은 성격이 급하고 살기가 넘쳐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는 일단 때려죽이고 보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천명이 넘는 목숨이 혈가람의 손에 희생되자 결국 소림사는 혈가람을 파문시켜버렸었다.

비록 소림사에서 쫓겨난 몸이지만 혈가람의 무공은 막강했다.

섭장천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패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진적이 없는 인물이 혈가람이다.

혈가람도 제왕성의 부성주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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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반지

 

 

 

제왕성에 경사가 생긴 것은 십팔 년 만이다.

소성주 모용준(慕容俊)이 배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제왕성 섭씨일족은 자손이 귀하다.

삼대(三代)가 거푸 외아들로 이어져 올 정도였다.

당대 성주인 철면제왕 섭장천도 자식 복이 없었다. 본처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첩을 뒀지만 후손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본처가 병으로 죽자 섭장천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후처를 들였었다.

섭장천의 두 번째 아내 주영청(朱永淸)은 황제의 누이였다.

주영청은 열여섯 살에 출가했다가 다음해 남편이 죽어 청상(靑孀)이 되었었다.

황제는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어 쓸쓸히 지내는 누이를 보다 못해 재가를 권유했다.

이에 주영청은 다른 좋은 혼처를 모두 마다하고 할아버지뻘인 섭장천에게 시집을 왔었다.

다행히 그녀는 시집 온 다음 해에 늙은 남편을 위해 아들을 낳아주었다.

하지만 그 귀한 아들 섭무궁(葉無窮)의 돌 잔칫날에 비극이 벌어졌다.

마교 교주 귀면지존이 달마묵장을 노리고 제왕성에 잠입했다가 주영청을 살해하고 섭무궁을 납치해간 것이다.

그날 이후 제왕성에서는 웃음이 끊겼다.

섭장천은 두문불출하며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성격도 모질고 괴팍해져서 눈에 거슬리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관대하고 정의롭던 제왕성이 포악한 패도(覇道)의 집단이 된 것도 십팔 년 전의 그 비극이 벌어진 이후부터였다.

백여 년의 세월동안 무림을 지배해온 제왕성은 어느덧 존경과 흠모의 대상에서 두려움과 증오의 악역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십여 년에 걸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면지존에게 납치당한 섭무궁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섭장천의 나이는 칠순을 넘어버렸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 후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섭장천은 양자를 들여 제왕성의 대를 이을 결단을 내렸다.

섭장천의 결단으로 덕을 본 행운아가 바로 모용준이다.

모용준은 하남성에 근거를 둔 모용세가(慕容世家)의 소가주였다.

모용세가는 하남성에서는 제법 기침 꽤나 하지만 무림 전체로 놓고 보면 딱히 특출 날 것도 없는 가문이다.

그래도 모용세가가 내세울만 자랑거리가 한 가지는 있었다.

전전대의 안주인이 철면제왕 섭장천의 먼 친척 누이였다는 게 그것이다.

섭장천은 생판 남보다는 그래도 약간의 피가 섞인 모용준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모용준은 핏줄 덕분에 그저 그런 가문의 후계자에서 일약 무림의 패자인 제왕성의 소성주가 된 것이다.

바로 그가 내일 혼례를 올릴 예정이다.

 

* * *

 

(이런 허접 쓰레기를 예물이라고 내놓다니...)

진상파(陳祥芭)는 치밀어 오르는 경멸의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

제왕성의 내()총관 구숙정(具淑貞)이 가져온 패물함의 내용물이 그녀를 기막히게 만든 것이다.

 

내일 모용준과 혼례를 올릴 예정인 진상파는 황금성(黃金城)의 성주다.

무림을 지배하는 것이 제왕성이라면 대륙의 상계(商界)는 황금성이 장악하고 있다.

황금성의 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황실조차도 황금성의 눈치를 본다고 할 정도다.

올해 나이 스무 살인 진상파는 바로 그 황금성의 성주다.

전대 성주였던 새석숭(賽石崇) 진보륜(陳寶輪)이 돌연사하면서 외동딸인 진상파가 대를 이었던 것이다.

전대 성주의 유일한 핏줄이라 황금성을 물려받긴 했으나 아무래도 여자라는 한계가 있다.

지난 일 년 간 진상파를 몰아내고 황금성을 차지하려는 음모와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수많은 친인척들이 호시탐탐 진상파의 자리를 노려왔다.

범인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암살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던 중 제왕성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제왕성의 무력이라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진상파는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였었다.

 

이 패물들이 황금성의 주인이신 소저 눈에는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을 거예요.”

제왕성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내총관 구숙정은 진상파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패물함의 패물들은 질과 양에서 민망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사연과 배경이 있는 물건들이랍니다. 영청공주(永淸公主)님께서 제왕성으로 시집오실 때 황실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이거든요.”

구숙정은 붙임성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삼십대 중반의 나이지만 구숙정은 여전히 화사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주도면밀한 성격이라 그녀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구숙정에게는 구미호리(九尾狐狸)라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별호가 붙어있다.

성주님께서 다음 대 제왕성의 안주인이 되실 소저에게 친히 내리신 것이니 소중하게 다뤄주시길 바라겠어요.”

구숙정은 패물함을 진상파쪽으로 조금 더 밀어주며 말했다.

그렇게 하지요. 성주님께는 총관이 나 대신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진상파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혼례를 치르기 위해 제왕성에 왔지만 진상파는 아직 성주인 섭장천을 접견하진 못했다.

소저의 말씀은 그대로 성주님께 전해드리지요. 내일 있을 혼례를 잘 치르기 위해서라도 오늘 밤 잠자리가 편하시기를 바라겠어요.”

구숙정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열려있는 문 밖에는 여자답지 않게 당당한 체격에 황금색 갑주로 무장한 여자 무사들이 방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거구의 여자들은 진상파의 전속 호위들인 백팔금차(百八金叉)들이다.

어려서부터 온갖 약물로 단련된 그녀들의 몸은 금강불괴나 다름없다.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백팔금차들의 충성심은 절대적이다.

단 한시도 신변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백팔금차들 덕분에 진상파는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당연히 백팔금자들은 구숙정의 일거수일투족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년...)

백팔금차들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영빈관(迎賓館)을 나서는 구숙정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진상파의 차갑고 오만한 태도가 구숙정의 배알을 뒤틀리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 지나면 그 상판에 눈물 마를 날이 없게 될 것이다. 제왕성의 진짜 안주인이 누군지 알게 될 테고...)

독기를 품고 영빈관을 떠나는 구숙정의 뒤에서 백팔금차들이 방문을 닫고 있었다.

 

문이 밖에서 닫히고 방안에는 진상파 혼자 남게 되었다

이 패물들이 내 눈에는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주제라도 아니 다행이네.”

진상파는 코웃음 치며 패물함의 내용물들을 흘겨보았다.

세공(細工)은 고리타분하고 보석의 질은 그다지 높지 않다. 게다가 관리 상태까지 엉망이고...”

진상파는 패물들을 건성으로 뒤적였다.

물론 패물함의 패물들이 값어치가 전혀 없는 쓰레기들은 아니다. 금과 은, 그리고 각종 진귀한 보석들로 만들어져 있어서 제법 값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최상의 품질을 지닌 보물들만 보며 자라온 진상파의 눈에는 한 없이 허접하게만 보였다.

황실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이면 뭐해? 이 패물들을 다 팔아봐야 내가 끼고 있는 반지 하나 값도 안 나올 텐데...”

패물들을 뒤적이는 진상파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는 잘 세공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다.

자두 씨만한 금강석이 박힌 그 반지를 팔면 수만 평의 옥토(沃土)를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왕성에서 보물로 취급하는 물건들이니 팔아치울 수는 없겠지만...”

냉소하던 진상파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패물을 뒤적이던 진상파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특이한 형태의 반지가 쑥 끼워졌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오른손을 들어 중지에 저절로 끼워진 그 반지를 살펴보았다.

용 두 마리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조각이 새겨진 반지인데 재질은 은이며 용의 눈 부위에는 콩알보다도 작은 붉은 색의 보석들이 박혀있다.

하다하다...”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진 그 반지를 보며 진상파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쌍룡패미(雙龍敗尾)! 두 마리 용이 서로의 꼬리를 삼키는 세공이라니... 황실에서 나온 물건이라면서 어쩜 이토록 조잡할 수가 있지?”

진상파는 기가 막혀서 오히려 흥미가 동했다.

재질은 은(), 용의 눈이라고 박아 넣은 건 질 낮은 홍옥(紅玉), 잘 춰줘야 은자 백냥 정도 나갈 이따위 싸구려 반지까지 패물이라고 내놓아? 황금성의 성주인 날 엿 먹여도 유분수지.”

진상파는 왼손으로 오른손 중지에 끼워진 그 반지를 뽑아내려했다.

헌데 반지는 의외로 꽉 끼어서 빠지지 않았다. 끼워질 때는 어째서 그리 쉽게 끼워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별개 다 속을 썩이네.”

오만상을 쓰며 반지를 뽑으려던 진상파의 손이 멈칫, 멈춰졌다.

말해!”

진상파는 왼손으로 반지를 만지면서 누군가에게 말했다.

 

<모용준은 저녁 무렵부터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

진상파의 뒤쪽으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나며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는 친구들이라는데 그다지 질은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개가 뭉치듯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건장한 체격의 여자였다.

여자는 키가 무려 칠척(七尺) 가까이 되는데 엄청난 거구면서도 완벽한 균형을 이룬 몸매를 지니고 있다.

얼굴 또한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미인 소리를 들을만한 이 거녀(巨女)의 이름은 철관음(鐵觀音)이다.

진상파의 수신 호위들인 백팔금차의 수령이 바로 그녀다.

백팔금차의 수령답게 철관음의 무공은 심후하여 신주이십팔숙중 오왕, 육패, 칠절에 필적할 정도다.

내일 혼례를 앞둔 인간이 악우(惡友)들과 어울리고 있다?”

철관음의 보고를 받은 진상파는 이를 바득 갈았다.

철관음은 진상파의 지시로 제왕성의 소성주 모용준의 동태를 살피고 온 것이다.

당연히 그 자리에 계집들도 있겠지?”

진상파는 철관음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게...”

철관음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진상파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대로 말해! 언니 잘못은 아니니까.”

!

진상파는 주먹을 쥔 오른손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 타당!

패물이 들어있던 패물함이 탁자 위로 펄쩍 튀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진상파는 황금성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수업에 매진해온 탓에 무공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진상파의 무공 수준은 거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미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파가 정색하고 화를 내면 단번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타고난 기질과 위엄이 남다른 탓이다.

... 환락가로 유명한 양주(揚州)에서 창기(娼妓)들을 여럿 불러와 놀고 있습니다.”

철관음은 식은땀을 흘리며 진상파의 눈치를 보았다.

 

장강과 대운하가 만나는 요충지 양주는 환락가로 유명하다.

대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북경과 금릉을 제외하면 창기로 이름난 네 고장이 있고 그중 한 곳이 양주다.

양주의 창기들은 양주수마(揚州瘦馬)라 불린다.

양주수마에 비견되는 유명한 창기들로는 대동파이(大同婆姨), 서호선낭(西湖仙娘), 태산고자(泰山姑子)가 있다.

양주는 태산에서 그리 멀지 않다.

모용준은 그래서 양주로부터 창기들을 조달해왔을 것이다.

제왕성이 자리한 태산에도 태산고자라는 이름의 특별한 창기들이 있다.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태산고자는 매춘을 하는 도고(道姑)들이다.

아무리 대담한 모용준이라 해도 음란한 도고들을 제왕성으로 불러들일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논다니들까지 끼고 농탕(弄蕩)을 치고 있다 이거지?”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와 혐오감에 이를 바득 갈았다.

진상파는 당연히 남편이 될 모용준의 뒷조사를 했다.

그녀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모용준은 섭씨일족의 피가 조금 흐른다는 이유로 운 좋게 제왕성의 후계자가 된 행운아일 뿐이다.

성격은 독선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무엇보다도 여색을 밝혔다.

그저 출신 배경이 남다르다는 것 외에 장점이라고는 찾기 힘든 사내가 모용준인 것이다.

모용준이 지금까지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는지 진상파는 자세히 알고 있다.

모용준의 악행과 엽색에 관한 보고서의 지면이 백장을 넘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파가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인 것은 황금성 성주로서의 지위가 나날이 위태로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모용준이 도덕군자이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결혼식을 앞둔 작자가 창기들까지 끌어들여 놀아나고 있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된다.

혼례를 앞둔 몸으로 제왕성 내의 계집들을 끼고 놀면 뒷말이 생길 것같으니까 밖에서 창기들을 조달한 듯합니다.”

찰관음은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이 되어 말했다.

앞장서! 그 인간이 있는 곳으로...”

진상파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상파는 거친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고 철관음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행실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감히 나와 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 창녀들을 집에 끌어들여?”

!

진상파는 거칠게 문을 열며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서 지키고 있던 백팔금차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앞날을 위해서라도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놔야만 해!)

진상파는 이를 부득 갈며 영빈관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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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달마와 천마의 비사

 

 

 

십칠 년 전의 일이었다.

소림사의 제자임에도 무공수련보다는 금석학(金石學)과 고전(古典)에 관심이 더 많았던 고불선사는 천하를 떠돌며 전대의 고승들이 남긴 유적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날도 고불선사는 천태산(天台山)에 남아있는 육조(六祖;선종의 육대 종사 혜능)의 유적을 연구하러 가던 길이었다.

비가 제법 거세게 쏟아지는 굳은 날씨였다.

하지만 머지않은 곳에 있다는 육조의 귀한 유적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고불선사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아아악!”

헌데 빗속을 뚫고 발길을 재촉하던 고불선사의 귀에 다급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불제자로서 위급한 처지의 중생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달려가 보니 산적들이 산속의 무덤가에서 젊은 여인을 겁탈하려는 중이었다.

고불선사는 산적들을 혼내 쫓아 보내고 여인을 구했다.

전삼낭(全三娘)이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사냥꾼의 아내였다고 했다.

하지만 사냥꾼이었던 남편은 사냥 도중에 변을 당해 죽었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를 근처 산채의 산적들이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겁탈당할 뻔 했던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차가운 가을비를 맞은 탓인지 전삼낭의 몸은 펄펄 끓고 있었다.

불제자로서 아녀자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를 방치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불선사는 전삼낭을 안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전삼낭을 보살피던 중 고불선사는 그만 파계를 하고 말았다.

무엇에 홀린 듯 전삼낭을 범하고 만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고불참회기를 읽으며 강유의 머릿속에서는 의혹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고불선사쯤 되는 고승이 그저 여자와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욕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혹시 그 여자가 함정을 파서 고불선사를 유혹한 것이 아닐까?)

강유는 가슴 속에서 불길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꿈같은 하루 밤낮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고불선사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절망했다.

금색계를 지켜야하는 불제자로서, 그것도 손녀뻘인 젊은 여인을 간음하는 크나큰 죄를 지은 것이다.

고불선사는 회한과 죄책감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전삼낭의 필사적인 애원에 고불선사는 자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삼낭은 부처님이 정말 계신다면 고불선사가 자신을 범한 것에도 우매한 인간들은 알 수 없는 섭리가 있을 것이라며 설득했던 것이다.

그렇게 전삼낭으로부터는 용서받았지만 고불선사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노리개를 전삼낭에게 증표로 주고 떠나며 언제든 소림사로 찾아와 죄의 대가를 받아가라는 말을 남겼다.

강유가 고불암에서 가져온 노리개는 예상과 달리 원래부터 고불선사의 것이었다.

 

전삼낭과 헤어져 소림사로 돌아온 고불선사는 토굴(土窟)에 스스로를 가두고 참회의 나날을 보냈다.

헌데 일 년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통의 밀봉된 편지가 고불선사가 참회하고 있던 토굴에 은밀히 전해졌다.

봉투 안에는 고불선사가 전삼낭에게 증표로 주었던 노리개와 함께 편지가 한 장 들어있었다. 자기를 보러 와달라는 전삼낭의 편지였다.

고불선사는 토굴을 나와 한달음에 전삼낭을 인연을 맺은 곳으로 달려갔고... 그곳에는 전삼낭이 갓난아기를 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일 년 전에 있었던 단 하룻밤의 인연으로 전삼낭은 고불선사의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불선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삼낭과 아기뿐만이 아니었다.

흉측한 귀신 가면을 쓴 자가 아기의 목에 칼을 댄 채 웃고 있었던 것이다.

고불선사는 비로소 일의 전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고불선사가 전삼낭을 만난 것도,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모두 마교의 당대 교주인 귀면지존이 꾸민 짓이었던 것이다.

 

(마교의 당대 교주 귀면지존!)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도 무림의 종가다.

동진(東晋) 시대에 결성 된 비밀결사 백련사(白蓮社)는 서역의 배화교(拜火敎)와 천축의 미륵(彌勒)사상을 받아들여 마침내 마교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마교는 오십 여 년 전 제왕성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세상에서 모습을 감춰버렸다.

(제왕성에 의해 뿌리가 뽑혔다고 알려진 마교가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암약하고 있었단 말인가? 헌데 마교의 교주 귀면지존은 무슨 목적으로 고불선사님을 파계시키는 함정을 판 것일까?)

강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불참회기를 읽었다.

 

전삼낭 모녀를 인질로 잡은 귀면지존은 몇 장의 종이를 고불선사에게 건네주며 해독(解讀)할 것을 요구했다.

그 종이들은 원통형의 물체 표면에 새겨져 있는 문양의 탁본(拓本)이었다.

노납은 탁본의 문양들이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고대(古代)의 범어(梵語)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 귀면지존은 그 고대 범어를 해독하기 위해 옛날 문자에 박학(博學)한 고불선사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었다.

비록 음모에 빠져서 관계를 맺은 결과이긴 하지만 고불선사는 전삼낭이 낳은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귀면지존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만 탁본에 새겨진 범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쓰이지 않은 것인 탓에 고불선사로서도 해독에 시간이 걸렸다.

그 사실을 말하자 귀면지존은 고불선사는 증표로 노리개를 요구했고 그것을 가져오는 자에게 탁본의 해독본(解讀本)을 건네주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노리개가 고불선사께서 귀면지존에게 건네준 증표라는 건데...)

강유는 탁자에 내려놓은 노리개를 만져보며 검미를 모았다.

(이게 어떻게 아버지의 수중에 들어간 것일까? 또 아버지는 어떤 경로로 고불선사께서 탁본을 해독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걸까?)

풀릴 길 없은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설마!)

어느 순간 강유의 눈이 부릅뗘졌다.

(아버지도 귀면지존에게 협박을 당하고 계신 게 아닐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를 대신 보내 탁본의 해독본을 받아오라고 하셨고?)

강유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어쩌면 아버지와 어머니도 귀면지존의 마수에 빠져있는 상태일지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확인해야만 한다.)

강유는 뜨거운 가마솥에 빠진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귀면지존이 고불선사님을 함정에 빠트려가면서까지 해독하라고 강요한 탁본의 내용은 무엇일까?)

강유는 타들어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다시 고불참회기를 집어들었다.

(전삼낭으로 하여금 고불선사님을 유혹하여 아이를 낳게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걸 보면 결코 평범한 내용은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강유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 맙소사!)

강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불참회기를 넘겼다.

 

<노납은 십여 년에 걸친 연구 끝에 마침내 탁본의 내용을 해독할 수가 있었는 바, 그 내용과 실체는 실로 놀라웠다. 귀면지존이 노납에게 맡긴 탁본은 바로 달마묵장에서 뜬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불참회기의 내용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나 다 아는 달마대사의 고사를 굳이 수기에 적어놓으신 이유가 있었구나.”

강유는 고불참회기가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된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견문이 일천한 강유는 모르고 있었지만 달마묵장은 무림에 전해지는 가장 귀한 보물들인 무림칠보(武林七寶)의 으뜸이다.

달마대사가 달마묵장에 숨겨둔 비밀스러운 힘을 얻으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고불선사에게 일어났던 일련의 음모는 바로 그 달마묵장으로 인해 벌어졌던 것이다.

(달마묵장이 마교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무림은 다시 한 번 마교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강유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한기는 느끼며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고불선사는 십년이 넘는 시간을 소모한 끝에 달마묵장의 탁본을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탁본에는 두 가지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었다.

첫 번째 비결은 삼백육십오 자로 이루어진 묵장진언(墨掌眞言)이라는 것이었다.

그리 많지 않은 글로 이루어진 묵장진언에는 그러나 천지(天地)와 고금(古今)의 이치가 모두 담겨 있었다.

문자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정수 중의 정수가 묵장진언인 것이다.

묵장진언을 이루고 있는 삼백육십오 개의 문자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무공과 술법이 만들어질 수 있다.

, 묵장진언에서 어떤 힘을 얻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소질과 기연에 달린 것이다.

달마가 달마묵장에 남긴 두 번째 비결은 아주 짧은 것이었다.

하지만 불과 열두 자로 이루어진 그 비결에는 묵장진언에 못지않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쌍혜합벽(雙鞋合壁), 묵장전지(墨掌展指), 천마심현(天魔心現)>

 

이것이 달마묵장에 숨겨져 있던 두 번째 비결이다.

그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한 쌍의 신발이 합쳐지면(雙鞋合壁)

검은 손바닥이 손가락을 펼 것이며(墨掌展指)

천마의 심장이 나타날 것이다(天魔心現)

 

한 쌍의 신발이라면 달마가 세상에 남겼다는 가죽신, 달마혜(達磨鞋)일 것이다.

달마는 가죽신 중 한 짝은 자신의 관 속에 남겼고 다른 한 짝은 지팡이에 매단 채 서쪽으로 가져갔었다.

달마가 한 쌍의 신발을 그렇게 멀리 떨어트려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 비결에 포함되어 있는 천마의 심장, 천마심(天魔心)이란 것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무림칠보의 서열이위(序列二位)이기도 한 천마심은 마교의 중흥조(中興祖)인 천마조종(天魔祖宗)의 심장, 정확히는 그의 내단(內丹)이다.

 

보통 천마(天魔)라 불리는 천마조종은 고금제일인을 거론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마교의 제칠대 교주였던 천마의 무공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마교는 오십여 년전까지만 해도 제왕성과 패권을 다퉜던 막강한 세력이다.

하지만 마교에 전해지는 것은 천마의 진정한 능력의 일할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천마에게 불운했던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달마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천마의 나이가 달마보다 일갑자(一甲子;60)쯤 많기는 했지만 두 절대고수의 생애는 상당 기간 겹쳐져 있었다.

마도와 정파를 대표하는 그들 간의 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천마의 패배였다.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천마는 달마와의 결투에서 지고 말았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천마는 스스로의 몸을 태워버렸으며 그의 모든 힘과 저주가 천마심으로 남았다고 한다.

무림에는 천마심을 얻는다면 제이(第二)의 천마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달마묵장은 달마의 비밀스러운 힘이 숨겨져 있는 보물일 뿐 아니라 천마의 저주, 천마심을 봉인하고 있는 법기(法器)인 것이다.

달마묵장은 무엇으로도 훼손이 불가능하다.

그 달마묵장이 손가락을 펴서 천마심을 드러내는 것은 단 한 가지 경우뿐이다.

바로 달마의 가죽신, 달마혜가 다시 합쳐지는 게 그것이다.

 

고불선사는 십여 년 만에 달마묵장의 탁본을 해독하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그 후 오 년 동안 삼백육십오자로 이루어진 묵장진언을 연구했다.

물론 귀면지존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유감스럽게도 고불선사는 묵장진언에서 어떤 무공비결도 얻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자질과 지식이 무공과는 인연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불선사는 묵장진언을 오 년 간 연구한 결과 무공 대신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을 만들어냈다.

 

-달마독명안(達磨讀命眼)

 

바로 이것이다.

달마독명안은 일종의 관법(灌法;진리를 살피는 법)이다.

이것을 온전히 수련해 내면 진짜와 가짜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게 되며 흘러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엿볼 수 있게 된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달마독명안에 대한 설명을 읽은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달마독명안은 어떤 무공보다도 오히려 더 무서운 신통력일 것이다. 불문에서 말하는 육신통(六神通)과 흡사한...)

육신통은 인간이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궁극의 여섯 가지 능력을 말한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모든 것을 궤뚫어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남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

나와 남의 운명을 알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누진통(漏盡通)!

 

달마독명안은 바로 이 육신통과 여러모로 통하는 능력이다.

(묵장진언을 불과 오 년 간 연구하여 육신통에 버금가는 달마독명안을 만들어내신 걸 보면 고불선사님도 결코 평범한 분은 아니셨다.)

강유는 새삼 고불선사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 적어놓은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갈 경우 그 폐해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런 즉 두 가지 비결을 외워 기억한 후 반드시 고불참회기를 태워 없애야할 것이다.>

 

고불참회기는 고불선사가 남긴 당부로 마무리 지어졌다.

 

<염치없지만 시주에게 소원이 한 가지 있다. 만약 인연이 닿는다면 전삼낭과 그녀의 딸을 귀면지존의 마수에서 구해주었으면 한다. 그리하면 그 은혜를 삼생(三生)에 걸쳐서라도 갚을 것이다.>

 

(스님의 근심하신 바를 기억해두겠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강유는 고불참회기와 노리개를 향해 합장을 했다.

그는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전삼낭 모녀를 찾아내어 보살펴주어야겠다 결심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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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들보 위의 비급(秘笈)

 

 

고불선사는 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문방사우는 한쪽으로 밀어두었고 책과 종이들은 반대쪽에 쌓아서 탁자의 가운데를 비게 만들었다.

덜컹!

문득 고불암의 문이 열리면서 귀면지존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소.”

하지만 고불선사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탁자 정리를 마무리했다.

귀면지존이 나타날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노납이 교주라 해도 흔적을 지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오.”

고불선사는 정리한 물건들 중 몇 장의 종이를 탁자 중앙에 놓으며 말했다.

하물며 이토록 중요한 탁본(拓本)이 유출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오.”

고불선사가 귀면지존 쪽으로 미는 종이들 위에는 무언가에 먹물을 묻혔다가 찍은 탁본이 새겨져 있다.

주먹을 쥔 사람 팔뚝에 종이를 대어 탁본을 뜬 형태인데 생생한 핏줄과 함께 수많은 문양(紋樣)이 새겨져 있다.

그 문양은 범어, 즉 고대 천축의 문자였다.

본좌가 선사에게 맡겼던 그 탁본의 정체를 알아낸 거요?”

귀면지존은 탁자 앞에 멈춰서며 음산하게 눈을 번뜩였다.

비록 파계(破戒)하긴 했지만 노납도 소림사의 제자요. 아무렴 달마조사(達磨祖師)께서 남기신 유물의 탁본을 못 알아보겠소?”

고불선사는 회한이 서린 표정으로 웃었다.

맞소! 역시 선사는 학식과 혜안으로는 소림제일이시오.”

귀면지존은 탁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스슥!

그러자 탁본을 뜬 종이들이 귀면지존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 귀면지존은 그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넘기며 확인했다.

유출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오.”

그 모습을 보며 고불선사가 말했다.

무궁무진한 화근이 될 수도 있는 달마묵장의 탁본을 세상에 내보내서 풍파를 일으킬만한 배짱이 노납에게는 없으니 말이오.”

선사께서 허언을 하지 않는 분이라는 걸 알기에 지금의 그 말씀은 믿어드리겠소. 하지만...”

화르르!

귀면지존 손이 달아오르면서 탁본을 뜬 종이들이 단번에 불타올랐다.

만에 하나 달마묵장에서 비롯된 무공을 쓰는 자가 발견된다면... 선사의 사랑스러운 따님은 여자로서 가장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귀면지존은 삼매진화로 탁본을 재로 만들며 음산하게 웃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고불선사는 합장하며 눈을 감았다.

교주의 암계(暗計)에 빠져 파계를 한 그날 이후로 노납에게 사바세계는 온전히 고해(苦海)일 뿐이었소. 어서 노납을 이 끔찍한 업장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구려.”

눈을 감은 고불선사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좌를 위해 큰 공을 세워주신 선사의 부탁이니 들어드리리다.”

귀면지존은 탁본을 태운 재를 털어낸 오른손으로 고불선사를 겨누었다.

지징!

그자의 오른손이 진동을 일으키며 달아올랐다.

(시주...)

귀면지존의 손바닥이 진동함에 따라 몸을 떨며 고불선사는 강유를 떠올렸다.

(부디 세존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빌겠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고불선사의 의식은 영원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해가 서쪽 산 너머로 떨어지면서 태실봉 일대도 붉은 노을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강유는 고불암이 자리한 태실봉 동쪽의 절벽 위에 서있었다.

태실봉을 내려갔던 강유는 숲이 울창하여 남의 눈에 띠지 않을만한 곳에서 방향을 돌려 고불암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불암은 절벽 중간에 자리하고 있어서 위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충 이각(二刻;30)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강유는 다양한 색상으로 물드는 서쪽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이각이면 내 걸음으로 오십 리는 충분히 갔다가 돌아올 시간이니 고불암으로 돌아가 봐도 되겠지.)

휘익!

생각을 마친 강유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절벽은 거의 수직인 데다가 높이가 백 장은 족히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험준하고 높은 절벽이다.

하지만 경신술로 일세를 풍미했던 소요신군의 아들 강유에게 이 정도 절벽을 내려가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다.

! 타탁!

강유는 마치 산양처럼 절벽을 이리저리 차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백여 장쯤 내려가자 절벽 중간의 돌출부에 세워진 고불암 지붕이 보였다.

휘릭!

강유는 만일을 대비하여 가급적 소리를 내지 않고 고불암 앞의 마당으로 내려섰다.

강유가 조금 가빠진 숨을 고르며 살펴보니 고불암의 문은 닫혀있다.

스님! 소생 돌아왔습니다.”

강유는 작게 말하며 고불암의 닫혀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암자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대신 강유는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고 얼굴이 굳어졌다.

(피비린내!)

그렇다.

흐릿하지만 고불암의 문틈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

덜컹!

급히 문을 열고 고불암으로 들어서던 강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고불암 내부는 강유가 떠날 때와 딱히 변한 게 없었다.

다만 암자 중앙에 놓인 탁자 건너편에 고불선사가 누워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천장을 보는 자세로 누워있는 고불선사의 입과 코, 양쪽 귀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으며 머리 주변 바닥은 피가 흥건했다.

스님!”

강유는 급히 고불선사 옆으로 다가가가 목 주변을 만져보았다.

하지만 진맥하는 강유의 손에 어떤 생명의 징후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적(入寂)하셨다.)

고불선사를 진맥해본 강유는 혼란에 휩싸였다.

(사인(死因)은 심장과 혈맥의 급작스런 파열... 내공을 잘못 운용하여 혈기(血氣)가 폭주한 듯한 모습이다.)

소요신군은 다 방면에 박식하여 강유에게 의술도 상당히 깊이 가르쳤다.

덕분에 강유는 어지간한 의원 못지않은 의술 지식을 갖고 있다.

(사인만 보면 전형적인 주화입마(走火入魔)의 현상인데...)

강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가 아는 범주 안에서 보자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고불선사는 자연사 한 모습이다.

하지만 강유는 고불선사의 죽음이 결코 자연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고불선사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신 것처럼 행동하셨다.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강유는 고불선사가 탁자에 찻물로 <五十里去後 回歸>라 쓰던 장면을 떠올렸다.

(틀림없다. 스님은 어떤 자에게 살해당하셨다.)

강유는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주화입마로 돌아가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괴한 마공에 당해 심장과 혈맥이 터져버린 것이다. 내게 오십 리 쯤 갔다가 돌아오라 하신 것은 당신을 해치려는 흉수가 나도 해코지 할까 우려하신 때문이었고...)

분노하던 강유는 고불선사가 말없이 대들보를 올려다보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혹시...)

휘익!

급히 일어난 강유는 대들보 쪽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대들보 근처까지 뛰어오른 강유의 눈에 책 한 권이 놓여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 두껍지 않고 최근에 새로 지은 듯 깨끗한 책이다.

(!)

!

강유는 놀라면서도 재빨리 손을 뻗어 책을 집어든 후 바닥으로 다시 내려왔다.

강유가 대들보에서 발견한 그 책에는 <古佛懺悔記>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고불참회기(古佛懺悔記)... 고불선사께서 당신이 살면서 지은 죄를 적어놓은 수기(手記)겠구나.)

강유는 책의 내용이 궁금하여 펼쳐 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

강유의 귀에 바람 소리같은 것이 들렸다.

(파공성(破空聲)이다!)

강유는 급히 문쪽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는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였다.

(누군가 고불암으로 빠르게 올라오고 있다. 문으로 나가면 마주칠 가능성도 있고...)

강유는 책을 품속에 넣으면서 암자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강유의 눈에 암자 입구 맞은편인 뒤쪽 벽에 작은 쪽문이 나있는 게 보였다.

(자칫 고불선사님을 시해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들키지 않고 여길 빠져나가야만 한다.)

서둘러 쪽문으로 가려고 고불선사의 시신 옆을 지나던 강유는 발길을 멈추었다.

고불선사의 허리 아래에 깔려 있는 노리개가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스님의 원수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으니 챙겨가자.)

강유가 몸을 숙여 노리개를 집어들 때였다.

휘익! !

옷자락 날리는 소리들이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서둘러야겠다.)

강유는 급히 입구 반대쪽의 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강유가 빠져나온 쪽문 밖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휘익

하지만 강유는 바람처럼 절벽의 측면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십여 장쯤 비스듬히 달린 강유의 앞쪽에 앞쪽으로 조금 돌출 된 모서리가 나타났다.

강유는 그 모서리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며 고불암을 내려다보았다.

휘익! !

그 직후 고불암으로 통하는 계단을 통해서 네 명의 인물이 날 듯이 달려 올라왔다.

네 명 모두 중인데 나이 든 초로의 승려 한 명과 젊은 승려 세 명이다.

(소림사의 승려들이 찾아왔다.)

강유는 승려들의 복장으로 그들이 고불선사와 동문임을 알아보았다.

!”

... 이런...!”

고불암 앞의 마당에 올라서던 승려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고불암의 문이 열려있어서 고불선사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사숙!”

사숙조님!”

급히 고불암 안으로 뛰어 들어간 승려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불선사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 아미타불!”

사숙조께서 이렇게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다니...”

곧 고불암 안에서 승려들의 불호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극락왕생하십시오 스님.)

승려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강유는 노리개를 손에 든 채 합장했다.

(스님을 시해한 흉수는 반드시 제 손으로 찾아내 죄값을 치르도록 만들겠습니다.)

휘익!

강유는 맹세를 하며 절벽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강유의 모습은 이내 고불암에서 사라졌다.

 

* * *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達磨)께서는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독살당해 웅이산(熊耳山)에 묻히셨다.>

<삼 년 후,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송운(宋雲)이라는 인물이 총령(葱嶺;파미르고원)을 넘다가 달마조사를 만났다.>

<헌데 맨발인 채 서쪽으로 가고 계셨던 달마조사께서는 낡은 신발 한 짝을 주장자(拄杖子;승려들의 지팡이)에 매달고 있었다.>

<중원으로 돌아온 송운의 보고를 받은 황제가 달마조사의 무덤을 파헤쳐보니 과연 시신은 사라지고 낡은 신발 한 짝만이 관 속에 남아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구나.)

고불참회기를 읽으며 강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불선사께서는 어찌 하여 당신의 삶을 참회하기 위해 적은 수기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하신 것일까?)

태실봉을 내려온 강유는 숭산 아래 등봉현(登封縣)에 자리한 객잔에 투숙했다.

날도 어두워졌고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객실로 돌아온 강유는 서둘러 고불참회기를 꺼내 읽었다.

헌데 강유의 예상과 달리 고불참회기는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되고 있었다.

남천축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였던 보리달마가 어떻게 중원에 들어왔고 어떻게 살다가 누구에게 죽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고불선사가 남긴 고불참회기의 앞부분에는 바로 그 달마대사의 고사가 적혀있다.

(이럴 수가...)

처음에는 의아해 하던 강유의 얼굴은 이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고불참회기에는 세상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비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달마의 관에서 발견된 것은 가죽 신발 한 짝만이 아니었다.

검게 말라비틀어진 팔 한쪽도 가죽신과 함께 남아있었던 것이다.

주먹을 움켜쥔 형태의 그 팔뚝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지만 무엇으로도 손상시킬 수가 없었다.

칼날이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용광로의 쇳물에 넣었다 꺼내도 멀쩡했다.

황제는 달마가 남긴 그 단단한 검은 팔에 신통력이 있다 여겨 숨기고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그 때문에 세상에는 달마의 관에 오직 가죽신 한 짝만이 남겨져 있었다고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달마의 것으로 추측되는 검은 팔에 대한 소문은 은밀하게 세상에 퍼졌으며 마침내 달마묵장(達磨墨掌)이란 이름까지 붙게 되었다.

그와 함께 달마묵장의 비밀을 푸는 자는 절대무적(絶代無敵)이 된다는 소문도 퍼져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바가 되었다.

 

(달마묵장... 달마묵장...)

강유는 그 이름을 되뇌이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견문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강유는 달마묵장이라는 존재를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묵장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강유는 자신과 달마묵장이 운명적으로 엮여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하지만 강유가 느꼈던 기이한 감상은 이어진 고불참회기의 내용에 의해 흔적도 없이 흩어지게 되었다.

 

<노납 고불은 불제자로서 결코 지으면 안되는 죄를 범했다.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녀자를 간음했을 뿐 아니라 그 여인으로 하여금 아이까지 낳게 하였기 때문이다.>

 

달마묵장의 고사에 이어 그같은 고백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학승으로 이름 높은 고불선사께서 금색계(禁色戒)를 범했을 뿐 아니라 자식까지 두었다니...)

강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와 함께 강유는 고불암에서 자신이 노리개를 건네주었을 때 보였던 고불선사의 심상치 않았던 반응을 떠올렸다.

(이 노리개...)

강유는 고불암에서 가져온 볼품없는 노리개를 꺼내 살펴보았다.

(어쩌면 이건 고불선사가 범했던 여인의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노리개를 탁자에 내려놓은 강유는 복잡한 심정으로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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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십 리를 간 후 돌아오라.

 

 

숭산(崇山)이 유명한 것은 소림사(少林寺)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소실봉(少室峰) 역시 그 중턱에 소림사가 자리하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드문 명승이 되었다.

하지만 숭산에 소실봉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실봉(太室峰)과 준극봉(峻極峰)등 칠십이 개의 봉우리가 어우러져 숭산을 중악(中岳)이라 불리게 만들었다.

 

장강 변의 위가진을 떠난 강유는 닷새 만에 숭산에 도착했다.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며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한 결과다.

해가 한 뼘쯤 남은 오후에 강유는 태실봉을 올라갔다.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태실봉을 올라가던 강유는 중턱쯤에서 숨을 돌렸다.

산바람에 땀을 식히며 돌아보는 강유의 오른쪽에 태실봉보다 좀 낮지만 자락이 아주 넓은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 중턱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는데 숲속에 수많은 건물과 탑들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봉우리가 소실봉이고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사찰이 소림사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라는 말대로 무림에 퍼져 있는 무공들 중 대부분은 소림사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강유는 멀리 보이는 소림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비록 오랫동안 인재가 끊긴 탓에 무림에 끼치는 영향력은 초라해졌지만 소림사가 천하무림의 종가(宗家)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강유는 다시 걸음 옮겼다.

(그 소림사를 지척에 두고도 들르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심부름에 집중할 때다.)

강유는 아쉬움을 애써 떨치며 암벽의 중간에 나있는 산길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모퉁이를 돌자 암자 한 채가 보인다.

깎아지른 절벽 중간에 세워진 암자는 거리가 제법 멀고 또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성냥갑처럼 작게 보인다.

그 암자로 올라가는 수많은 계단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저 암자가 고불암이다.)

강유는 수많은 계단 위쪽으로 작게 보이는 암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는 동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고불암에 기거하는 분은 고불선사(古佛禪師)라는 고승이다.)

족히 천여 개는 되어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강유는 고불암에 대해 수소문 한 것을 되새겨보았다.

숭산에 자리한 암자에 기거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고불선사는 소림사 출신이다.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 출신이므로 고불선사는 당연히 무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고불선사는 무공보다는 학식(學識)으로 더 유명했다.

특히 고대(古代)의 범어(梵語;천축어)에 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불선사가 고불암에 홀로 기거하는 이유도 좋아하는 범어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버지는 대체 어떤 경로로 고대 범어의 권위자인 고불선사와 교류를 나누게 된 것일까?)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같은 계단을 올라가며 강유는 새삼 의문을 느꼈다.

 

* * *

 

고불암은 절벽 중간에 조금 튀어나온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암자가 자리한 그 돌출부의 위쪽으로나 아래쪽으로나 깎아지른 절벽이다.

그래도 고불암 앞쪽에는 제법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다.

 

(드디어 다 올라왔다.)

강유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암자 앞의 마당으로 올라섰다.

(비록 외지고 험해도 절경이긴 하다.)

강유는 주변을 둘러보며 암자로 다가갔다.

저 멀리로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이 보인다.

(세상 풍파와 온전히 단절된 곳이니 수행을 하거나 공부를 하기에는 최적이겠구나.)

강유는 소매로 땀을 닦으며 암자 문 앞에 이르렀다.

(암자 안에 인기척이 있다.)

암자의 닫혀진 문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잔기침 섞인 숨소리가 들려서 강유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청수(淸修)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스님.”

강유는 의관을 정제한 후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암자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스님께 맡겨둔 물건을 받아오라는 분부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다시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반응이 있었다.

아미타불! 들어오게나.”

암자 안에서 세월이 느껴지는 늙은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허락을 받은 강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암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넓지 않은 암자 내부는 책으로 가득 차있었다.

사방 벽에는 수많은 책들이 쌓여있고 바닥에도 책들이 쌓여있거나 이리저리 널려있다.

그 때문에 비좁을 대로 비좁아진 암자 중앙에는 앉은뱅이 탁자가 하나 있고 그 탁자 너머에는 한 명의 노승이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늙었지만 여전히 건장한 체격에 상당히 우락부락한 인상을 지닌 노승이었다.

노승이 앞에 두고 앉아있는 탁자에는 문방사우 뿐 아니라 주전자, 찻잔, 여러 권의 책등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저분이 고불선사...)

강유는 문을 닫으며 노승, 고불선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암자 안의 분위기는 예상한 대로지만 고불선사의 모습은 강유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왜소하고 꼬장꼬장한 늙은 선비같은 인상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풍채가 좋고 인상이 호방해서 도저히 학승(學僧)으로 보이지 않는다.)

강유는 글을 쓰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고불선사를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말학후진 강유가 선사께 인사 올립니다.”

강유는 탁자 앞에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했다.

강유라...”

고불선사는 중얼거리면서도 강유는 보지 않고 종이에 글만 쓰고 있었다.

원하는 걸 가져가려면 증표를 보여라.”

고불선사는 여전히 강유를 보지 않고 글을 쓰면서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딸칵!

강유는 품속에서 꺼낸 노리개를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그러자 그때까지 글을 쓰고 있던 고불선사의 손길이 멈춰졌다.

고불선사는 고개를 조금 들어서 탁자 위에 올려진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강유는 붓을 들고 있는 고불선사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랜 수행을 해온 노승이 격동하고 있다. 대체 저 볼품없는 노리개가 무엇이기에 불문 고승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인가?)

강유의 의아함을 느낄 때 붓을 내려놓은 고불선사가 노리개를 집어들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떨리는 손으로 노리개를 집어든 고불선사의 입에서 회한이 서린 불호가 흘러나왔다.

이 어리석은 비구(比丘)가 쌓은 업보가 구천(九天)에 이를 정도로구나.”

긴 한숨을 토해내는 고불선사의 주름진 눈가에 언뜻 물기가 어린다.

강유는 궁금증이 구름같이 일었지만 말없이 그런 고불선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건은 확실히 받았네.”

고불선사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강유를 보았다.

헌데 시주는 이 물건을 맡긴 인물과 어떤 사이인가?”

고불선사는 강유를 살펴보면서 노리개를 다시 탁자에 내려놓았다.

제게 중임을 맡기신 분은 가부입니다.”

가부라...”

강유의 대답을 들은 고불선사는 강유를 지긋이 보며 미간을 조금 모았다.

불가해(不可解)... 불가해로다. 그에게 시주같은 보배가 열매로 맺힐 복연(福緣)은 없어 보였거늘...”

(무슨 뜻인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분은 아버지와 교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강유가 의아해할 때였다.

사연과 내막이야 어찌 되었든 약속은 지켜야겠지.”

고불선사는 혼잣말을 하며 탁자 위에 쌓여있는 종이와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었군.”

이윽고 고불선사는 책 사이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크지는 않지만 상당히 두툼한 봉투였다.

패옥을 전해주라고 한 중생에게 이걸 가져다주면 될 걸세.”

고불선사는 봉투를 강유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스님.”

무릎 꿇고 있었던 강유는 상체를 세우며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스님의 청수를 어지럽힌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후학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봉투를 품속에 갈무리한 강유가 일어나려 할 때였다.

잠깐... 잠깐 기다리게.”

고불선사가 다시 탁자 위의 책들을 뒤지면서 말했다.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이 늙은 중의 작은 성의이니 가져가게나.”

곧 고불선사는 쌓여있던 책들 사이에서 얇은 책을 한권 꺼내 강유에게 내밀었다

헌데 그 책을 받으려던 강유는 깜짝 놀랐다.

책의 표지에는 탄지신통(彈指神通)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스님! 혹시 그 책은 혹시...”

강유는 내밀었던 손을 급히 거두며 굳어진 표정으로 고불선사를 바라보았다.

소림칠십이절기 중 탄지신통을 수련할 수 있는 비결일세. 진본은 아니고 노납이 심심할 때 적어놓은 필사본이지.”

고불선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맙소사!)

하지만 강유는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무림인이라면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를 수가 없다.

단 한 가지만 제대로 익혀도 강호를 독보할 수 있는 게 소림칠십이절기다.

고불선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절기에 속하는 탄지신통의 비급을 선물이라고 내놓은 것이다.

탄지신통을 익히면 십장 밖에 있는 한 치 두께의 철판도 궤뚫을 수 있다네. 무림인이라면 몽매에도 얻길 원하는 절세신공이라고 할 수 있지.”

고불선사는 강유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스님의 성의는 마음으로 받아두겠습니다.”

강유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가부의 명을 수행한 대가로 보상을 받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양하지 말게나. 노납의 성의이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불선사가 다시 권했지만 강유는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자기 사문의 무공을 임의로 유출할 생각도 하고... 여러모로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분이로구나.)

강유는 쓴웃음 지으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좋네 좋아. 더 이상 강권하진 않겠네.”

강유가 탄지신통의 비급을 사양하자 고불선사는 차가 반쯤 들어있는 찻잔에 오른손 검지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대신 노납의 인사는 받고 가시게나.”

결례를 했다면 용서를...”

문간에서 돌아서던 강유의 눈이 치떠졌다.

용서는 노납이 빌어야 하지 않겠는가?”

스윽!

고불선사가 찻잔에 담갔다가 뺀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찻물로 탁자에 글을 쓴다.)

강유는 고불선사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다시 탁자 앞으로 갔다.

다가가서 보니 탁자 위에는 찻물로 <五十里去後 回歸>라는 글이 적혀있다.

(오십리거후(五十里去後) 회귀(回歸)... 오십 리를 갔다가 다시 돌아오라?)

강유가 탁자에 찻물로 적힌 글을 읽고 놀랄 때였다.

산길이 험하니 조심해서 살펴 가시게나.”

!

강유가 글을 읽은 것을 확인한 고불선사는 찻물로 쓴 글을 소매로 쓸어 지워버렸다.

(이건 무슨 뜻인가? 이분은 설마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어서 감시하는 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찻물로 뜻을 전한 것인가?)

강유가 놀라고 당황할 때였다.

고불선사는 고개를 들어서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대들보를 왜...)

강유는 반사적으로 고불선사와 함께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아미타불! 인연이 있다면 우리는 곧 다시 보게 될 걸세.”

고불선사가 합장을 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저 역시 스님을 다시 뵐 수 있는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강유도 마주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불선사와 인사를 나눈 강유는 암자를 나갔다.

!

문이 닫히고 고불암에는 다시 고불선사 혼자만 남게 되었다.

선재(善哉)로다! 세존의 가호로다.”

고불선사는 닫힌 문을 보며 합장을 했다.

크나큰 죄를 안고 소리없이 지옥으로 들어가려 했거늘... 세존께서는 못난 제자가 세상에 뿌려놓을 업보를 거둘 인연을 마련해두셨구나.”

주르르!

합장한 고불선사의 주름 진 손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분명 뭔가 있다.)

강유는 마당 끝의 계단 입구로 가며 곁눈질로 고불암을 보았다.

(탄지신통의 비급을 주겠다고 한 것은 아마 나에 대한 시험이었을 것이다.)

고불선사가 왜 뜬금없이 소림칠십이절기 중 한 가지를 선물이라며 내놨는지 짐작이 가는 강유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옳다구나 하고 받았을 테지만... 그걸 거절한 덕분에 나는 고불선사님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겠지.)

강유는 온몸의 신경이 끊어질 듯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탁자에 찻물로 글을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게 분명하고... 일단 고불선사님의 지시대로 오십 리쯤 갔다가 다시 돌아와 보자.)

강유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유의 모습이 고불암 앞의 마당에서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스!

마당 가운데에 안개 같은 것이 서리더니 이윽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얼굴에 이빨을 드러낸 공포스러운 귀신 형상의 가면을 쓴 인물!

바로 안탕산 깊은 곳에 처참한 모습으로 갇혀있는 제갈륜을 협박했던 마교 교주 귀면지존이었다.

그자가 안탕산에서 이천여 리나 떨어진 숭산에 나타난 것이다.

“...”

마당 끝으로 간 귀면지존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유가 날렵한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것이 귀면지존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확인한 귀면지존은 고불암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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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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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인들의 제안

 

 

 

갈 길이 바빠서 그러니 가장 빨리 되는 음식으로 준비해주시오. 건량(乾糧;마른 음식)도 사흘치 정도 포장해주고...”

강유는 점소이에게 동전을 넉넉히 건네주며 말했다.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점소이는 두 손으로 동전을 받으며 굽신거렸다.

재빠른 셈으로 최소한 한 두 냥은 남는다는 걸 확인한 점소이의 입이 귀에 걸렸다.

점소이는 동전을 세면서 희희낙락 하며 주방쪽으로 갔다.

(장강을 건넜으니 여정의 절반쯤은 지난 셈이다.)

강유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봇짐을 벗어 옆의 의자에 내려놓았다.

안탕산을 떠난 게 사흘 전이다.

전에도 아버지를 따라 안탕산을 내려온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강유 혼자 세상으로 나온 것은 이번 여행이 처음이다.

(앞으로 사나흘만 부지런히 가면 숭산(崇山)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강유는 품속에 오른손을 넣으며 생각했다.

 

<숭산 태실봉(太室峰) 뒤쪽에 고불암(古佛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아버지 강조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품속에서 꺼낸 강유의 손에는 여자들이 옷고름에 다는 노리개가 하나 들려있었다.

네모 난 녹옥(綠玉)에 호박(琥珀)으로 만든 구슬이 몇 개 달려있는 노리개다.

 

<고불암에 기거하는 노승에게 이 노리개를 건네주면 대신 내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걸 가져오는 게 아비의 심부름이다.>

 

노리개를 들여다보면서 강유는 강조의 말을 떠올렸다.

강유가 심부름으로 다녀와야 하는 곳은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가 자리한 숭산이었다.

(오는 동안 몇 번이고 살펴봤지만 딱히 특별할 것도 패옥(佩玉)이다.)

강유는 노리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노리개의 재료인 녹옥과 호박은 그리 질이 높은 게 아니었다.

녹옥의 색은 탁하고 호박에는 이물질이 많이 섞여있다.

그렇다고 세공 솜씨가 정교한 것도 아니다.

네모 난 녹옥에는 봉황이 투각(透刻)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솜씨가 어설프고 조악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시장통에서 흔히 파는 싸구려 장신구일 뿐이다.

(단지 손을 탄 흔적이 뚜렷한 걸 보면 상당히 오래 된 물건인 것같긴 하다.)

강유는 반질반질한 녹옥의 모서리를 만져 보았다.

(제법 오래전에 만들어진 골동품이라는 것 외에는 값어치가 별로 안 나가 보이는 이 패옥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노리개에 얽힌 사연이 궁금한 강유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난 그저 아버지의 분부만 이행하면 되니까.)

강유는 생각을 그치며 노리개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아버지가 나에게 경험을 쌓게 하려고 혼자 강호에 보내신 것일지도...)

노리개를 챙기던 강유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의자에 피부가 검고 흰 두 명의 노인이 나란히 앉아서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물론 두 노인은 제왕성의 태상호법들인 흑백신귀였다.

(이 노인들... 멀쩡히 눈을 뜨고 있었으면서도 앞자리에 와 앉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강유는 내심 크게 놀랐지만 이마만 조금 찡긋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들이다.)

강유는 한 눈에 흑백신귀가 자신은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경지에 이른 고수들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두려워할 이유는 없는지라 묵묵히 흑백신귀를 바라보기만 했다.

흑백신귀도 그런 강유를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손님!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

국수 한 그릇을 얹은 쟁반을 들고 다가오던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유와 흑백신귀가 마주 앉아 말없이 서로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늙은이들이 언제 이 자리로 옮겨왔지?)

점소이는 당황하여 강유의 눈치를 살폈다.

... 어떻게 할까요 손님?”

놓고 가시오.”

강유는 자기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두 노인을 향한 채...

점소이는 흑백신귀의 눈치를 보면서 강유 앞에 국수 그릇을 내려놓았다.

두 분 노야, 식사는 하셨는지요?”

강유는 젓가락을 집어들며 두 노인에게 물었다.

주방 쪽으로 돌아가려던 점소이는 혹시나 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강유가 묻자 백귀는 끄덕이고 흑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두 노인의 시선은 여전히 강유를 살펴보고 있었다.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후배가 대접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간단히...”

강유의 권유에 흑신이 헤벌쭉 웃으며 입을 열었지만 백괴가 점소이에게 가라고 손짓을 해서 막았다.

... 건량은 포장해놓았으니 나가실 때 가져가시면 됩니다.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점소이는 두 노인의 눈치를 보며 강유에게 굽신거렸다.

(이상한 늙은이들이잖아.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자리에 합석이나 하고 말이야.)

점소이는 서둘러 주방 쪽으로 돌아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강유는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먹는 모습을 보이자니 좀 부담스럽군.)

강유는 쓴웃음 지으면서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세외기인들이고 내게 뭔가 용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겠지.)

후룩! 후루룩!

가능한 빨리 식사를 마칠 생각에 강유는 쉬지 않고 국수를 입으로 가져갔다.

 

<의심의 여지가 없구먼.>

<용골호체(龍骨虎體)! 무공을 익히기에는 최상의 골격이고 체질이야>

 

부지런히 국수를 먹는 강유를 보면서 흑백신귀는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성주님 못지않은 자질을 지녔어.>

<어떤 면에서는 성주님보다도 빼어날 정도야>

<이놈을 후계자로 삼으면 우리 신귀각(神鬼閣)이 제이(第二)의 제왕성이 될 수도 있겠어.>

<성주님께는 불충한 생각이지만 자네 생각에 동의함세.>

<어떻게 할까?>

<뭘 어떻게 해? 무조건 우리 신귀각의 후계자로 삼아야지.>

 

흑백신귀가 흥분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사이에 이윽고 강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던 국수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운 것이다.

후배는 가부(家父)의 명을 서둘러 수행해야만 하는 탓에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분부하실 일이 없으시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강유는 흑백신귀에게 포권을 하며 양해를 구했다.

이름이 뭐냐?”

몇 살이야?”

흑백신귀는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강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은 강유, 한 달 후면 열아홉 살이 됩니다.”

일어나려던 강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강씨였군.”

기초가 튼튼한 걸 보니 아비가 누군지 모르지만 제대로 가르쳤어.”

흑백신귀는 또 거의 동시에 말을 했다.

(두 사람이 시차 없이 말을 해대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강유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조금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당금 무림에 강씨 성을 지녔으면서 아들을 너 정도로 기를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구파일방과 삼문육가(三門六家)에도 강씨성을 쓰는 인간들이 제법 있지만 후손을 잘 둔 놈은 없고...”

흑백신귀는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무명지배가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는 건 상상하기 힘들지.”

결국 신주이십팔숙중 한명일 수밖에 없다는 건데...”

(볼수록 놀라운 인물들이다. 당금 무림의 최고 고수들인 신주이십팔숙중 한명이 내 아버지라는 것까지 단번에 추론 해내다니...)

흑백신귀의 분석을 들은 강유가 놀랄 때였다.

신주이십팔숙의 으뜸이신 일제(一帝) 철면제왕님은 당연히 강씨가 아니고...”

또 쌍비(雙秘)는 여자인 데다가 성이 뭔지는 아무도 모르지.”

삼기(三奇)와 사신(四神) 중에도 강씨가 둘 있지만 너무 늙었으니 제외...”

결국 오왕(五王), 육패(六覇), 칠절(七絶)중 한명이겠군.”

흑백신귀의 분석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졌다.

그러다가 흑백신귀는 동시에 강유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주시했다.

오왕, 육패, 칠절에 속하면서도 성이 강씨고 검법이 특기인 놈이라면...”

이제야 알겠도다!”

! !

흑백신귀는 이번에도 거의 동시에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네 아비는 칠절의 으뜸인 소요신군 강조겠구나.”

그렇지? 맞지?”

흑백신귀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흥분하여 말했다.

두 분 노야의 해박한 견문에는 후배, 그저 경탄을 금치 못할 뿐입니다.”

강유는 다시 흑백신귀에게 포권을 했다.

말씀하신 대로 소요신군이라 불리는 분이 후배의 가부입니다.”

역시 그랬어!”

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후기지수들 중 백미(白眉)라 불리던 소요신군의 자식이라면 납득이 가는군.”

흑백신귀는 동시에 무릎을 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가부를 높이 쳐주시니 자식 된 입장으로는 황송할 따름입니다. 헌데 두 분 노야께서는 후배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우리들의 제자가 되어라.”

그럼 십년 안에 널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주마.”

흑백신귀는 다시 동시에 말하면서 몸을 강유 쪽으로 숙였다.

후배를 제자로 삼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반면 강유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조금 젖혔다.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두 늙은이는 신주이십팔숙중 일제 철면제왕님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상좌를 양보하지 않는다.”

한창 때는 마교와 혈교의 교주들도 우리를 두려워했을 정도야.”

흑백신귀는 신이 나서 말했다.

(당금 무림에 철면제왕을 제외한 신주이십팔숙을 능가하는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인데...)

강유가 당혹스러워할 때였다.

노부들의 별호는 흑백신귀이며 노부가 그중 흑신이다.”

노부가 백귀다.”

우린 마교와 혈교에 못지않은 역사를 지닌 신귀각의 공동 문주들이다.”

사연이 있어서 남의 밑에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종의 신분은 아니다.”

흑백신귀의 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흑백신귀는 물론이고 신귀각이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강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호의 일을 모르는 게 없는 아버지 강조로부터도 흑백신귀라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다.

(신주이십팔숙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쌍비, 삼기에 필적하는 고수가 존재하고... 역시 세상은 넓구나.)

강유는 강호에 기인과 고수가 모래알같이 많다는 말을 실감하며 흑백신귀에게 다시 포권을 했다.

모자란 후배를 어여삐 보아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스승을 모시는 일은 실로 엄중한 대사인지라 후배 독단으로 결정할 수는 없으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일리가 있군.”

만일 네 아비 소요신군이 허락하면 노부들의 제자가 되겠느냐?”

가부가 허락하면 두 분 노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결정되었다.”

네 아비의 허락이 떨어지면 넌 우리 신귀각의 차기문주다.”

흑백신귀는 신이 나서 말했다. 강조가 당연히 아들을 자신들의 제자로 줄 것이라 믿는 눈치였다.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노친네들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일 수도 없고...)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의 가부가 있는 곳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 치고 우리 두 늙은이의 이목이 뻗어있지 않은 곳은 없다.”

흑백신귀는 동시에 고개 저어 강유의 말을 막았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강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시다니 후배는 안심하고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오냐! 일 봐라.”

우린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게다.”

흑백신귀는 동시에 한쪽 손을 들어 답례했다.

강유는 벗어놓았던 봇짐을 집어들고 자리를 떠났다.

객잔 입구로 간 강유는 점소이가 내미는 꾸러미를 받았다. 며칠간 먹을 건량이다.

건량 꾸러미를 건네받은 강유는 서둘러 객잔을 나갔다.

흑백신귀의 시선은 그런 강유에게서 촌각도 떨어지지 않았다.

몸을 쓰는 것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볼수록 기막힌 자질이야.”

흑신은 강유가 주점에서 나가는 걸 보며 새삼 감탄했다.

반면 백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본문의 오랜 숙원인 신귀합벽(神鬼合壁)을 저놈이라면 완성해낼 지도 모르겠어.”

흑신은 흥분해서 말하다가 흠칫 하며 입을 다물었다. 비로소 백귀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가?”

자네, 강유 저놈에게서 뭐 느낀 거 없는가?”

흑신의 물음에 백귀가 미간을 모으며 되물었다.

몸을 망칠 수도 있는 잘못된 무공을 익히고 있긴 하지만... 뭐 그 정도의 교정이야 우리에게는 일도 아니지 않는가?”

무공 얘기가 아닐세. 저 놈이 누구를 연상시키는지 떠올려 보게.”

흑신의 대답에 백귀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를 연상시킨다? 뜬금없이 저놈이 누구를 닮았다고...”

백귀의 말에 대꾸하던 흑신의 눈이 돌연 부릅떠졌다.

... 맙소사!”

얼마나 놀랐는지 흑신은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네.”

백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엿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뭔가 위화감이 들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놈이 성주와 흡사한 분위기를 지녀서 마음이 불편했던 걸세.”

그럼... 그럼 저놈이 혹시 십팔 년 전에 귀면지존이 납치해간...”

흑신은 극도의 흥분으로 숨이 턱에 차서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건 아닐 걸세.”

백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인간도 아니고 정인군자로 소문났으며 출신도 확실한 소요신군이 저놈 아비일세. 소요신군의 아들이 생사가 불명한 소성주일 리는 없어.”

그렇긴 하네만... 핏줄로 이어지지 않고는 저렇게 분위기가 흡사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니면 절대자(絶代者)의 운명을 타고 나서 성주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네.”

그럴 가능성도 있군.”

백귀의 말에 흑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급한 일을 처리하고 소요신군을 직접 만나보도록 하세.”

그놈을 만나보면 강유에게서 성주가 연상된 내막을 알 수 있겠지.”

우리 두 늙은이의 죄책감이 강유 저 아이를 소성주와 억지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네.”

그럴 수도 있겠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고기재를 후계자로 삼게 될 기대로 들떴던 두 노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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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필살일초(必殺一招)

 

 

따라오느라 고생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장강(長江)과 만나게 된다.”

강조가 손을 들어 멀리 북쪽을 가리켰다.

(이제 보니 안탕산을 종단해서 북쪽으로 왔구나.)

강유는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겹겹이 늘어선 북쪽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험한 길로 온 이유는 혹시나 끼어들지 모를 마()를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

강조는 근처에 서있는 나무의 가지를 하나 꺾었다. 길이 네 자 정도로 곁가지와 나뭇잎이 조금 붙어있지만 반듯한 나뭇가지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네게 한 가지 구명절초(求命絶招)를 가르쳐주기 위해서다.”

강조는 나뭇가지에서 곁가지들과 잎사귀를 떼어내며 말했다.

붕정검법에 소자가 익히지 않은 초식이 있는지요?”

강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가르쳐주려는 것은 붕정검법이 아니다.”

강조는 곁가지와 잎사귀를 떼어내어 나뭇가지를 고르게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비가 젊었을 때 어떤 노인을 구해준 대가로 전수받은 일초의 검법인데 그 위력이 지나치게 잔인하고 치명적인 탓에 사용한 적은 없다.”

강조는 낭창거리는 나뭇가지를 흔들어 보며 말했다.

대체 얼마나 잔인하고 치명적인 검법이기에...”

어느 정도인지는 네 눈으로 직접 봐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강조는 한쪽에 서있는 사람 키만한 바위 앞으로 걸어갔다.

이 검법의 이름은 아비도 모른다. 그래서 임의로 필살일초(必殺一招)라고 명명했다.”

강조는 나뭇가지로 바위를 겨누며 말했다.

필살일초... 이름만으로도 살기가 느껴집니다.”

강유는 긴장하며 강조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초식이 아니라 내공의 운용법이다.”

지잉!

강조가 바위를 겨눈 나뭇가지가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강유는 나뭇가지에 측량하기 어려운 강력한 힘이 운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인 내공의 운용에 변화를 주는 비결인데...”

투투툭! 드드드!

진동이 점점 강해지면서 나뭇가지는 나사처럼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발산되는 내공의 위력이 치명적으로 변한다.”

강조는 뒤틀리며 진동하는 나뭇가지로 바위를 찔렀다.

퍼억!

그러자 나뭇가지 끝이 두부를 찌른 것처럼 바위 속으로 푹 들어갔다.

! 퍼퍽!

뒤이어 바위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나뭇가지도 터져버렸다.

!”

강유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치뜨며 탄성을 토해냈다.

나뭇가지에 찔린 바위에 사발만한 구멍이 앞뒤로 뻥 뚫려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나뭇가지가 뒤틀림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긴 했지만 단단한 바위에 사발만한 구멍을 냈다.)

강유가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였다.

이것이 필살일초의 위력이다.”

!

강조는 손에 남아있던 한 자 가량의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일단 펼쳐지면 반드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무공이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사용해선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강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고개를 숙였다.

필살일초의 연공비결을 알려줄 테니 집중해서 듣도록 해라.”

이어 강조는 한 가지 내공심법의 비결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 가공하다!)

그 비결을 들으면서 강유는 등줄기로 오싹한 한기가 훑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말 그대로 상궤를 뛰어넘는 무공이다.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릴 때부터 뒤틀고 꼬아버리는 운공비결인데... 위력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심맥에 심각한 무리를 주게 된다.)

강유는 강조가 가르쳐주는 필살일초의 무시무시한 위력과 함께 치명적인 결함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상대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무공이다.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절대로 써선 안되겠구나.)

적을 죽이기 위해 내 몸을 망치는 무공!

그것이 바로 필살일초였다.

필살일초의 결함을 알아차린 강유는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도 집중해서 강조가 읊어주는 운공비결을 머릿속에 새겼다.

 

* * *

 

위가진(衛家津)은 그리 크지 않은 강가의 마을이다.

비록 마을은 작지만 장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제법 많다.

끼니때가 되어서인지 위가진의 유일한 객잔 위가반점(衛家飯店)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객잔의 가장 안쪽 구석진 자리 근처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두 노인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두 노인은 쌍둥이다.

체격과 이목구비가 같은 틀로 찍어낸 듯이 똑같다.

그러나 닮은 것은 체격과 얼굴뿐이다.

두 노인의 모발과 피부의 색은 극단적이다.

한 명은 먹물에 들어갔다 나온 듯 몸의 모든 부위가 새카맣다. 흰 것은 오직 눈의 흰자위뿐이다.

다른 한명은 정 반대로 모든 부위가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같이 하얗다. 심지어 눈동자조차 흰색에 가깝다.

두 노인은 몸의 색과는 정 반대 색상의 옷을 입고 있다.

검은 노인은 눈같이 흰 백의를 거치고 있다.

반면 흰 노인은 새카만 흑의를 걸치고 있다.

백귀(白鬼), 자네는 여전하구먼. 저승사자나 염라대왕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기니 사람들이 접근을 못하지.”

검은 얼굴의 노인이 술잔을 입에서 떼며 말했다.

남 말 하지 말게 흑신(黑神).”

백귀라 불린 하얀 얼굴의 노인이 술병을 집어들며 코웃음을 쳤다.

자네는 어디 살아있는 인간처럼 보이는 줄 아는가? 억지로 웃고 있는 얼굴이 인상 쓰고 있는 내 얼굴 보다 더 섬뜩한 거 알기나 해?”

쪼르르!

백귀는 궁시렁거리면서도 검은 얼굴의 노인, 흑신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십팔 년 전까지만 해도 억지로 웃는 얼굴이 아니었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참 세상은 살만 했었으니까.”

흑신은 한숨을 쉬며 술잔을 들었다.

지난 일 얘기해서 뭐하겠는가? 우리 두 늙은이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거늘...”

백귀는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채웠다.

두 노인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흑신과 백귀, 합쳐서 흑백신귀(黑白神鬼)라 불리는 그들은 제왕성의 태상호법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난 십팔 년 동안 태산(泰山)에 자리한 제왕성에는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다.

자신들의 과오로 벌어진 어떤 일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제왕성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때문이다.

얘기해보게!”

얘기해봐!”

! !

흑신과 백귀는 동시에 술잔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라 그런지 두 사람의 행동거지는 판박이다.

말이 서로 부딪히자 흑신과 백귀는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내가...”

내가 먼저...”

잠시 입을 다물었던 두 노인은 또 동시에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말이 부딪히자 노인들은 한숨을 쉬었다.

작년에는 자네가 먼저 말했으니 올해는 내가 얘기를 시작함세.”

흑신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세나.”

백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여간 우리끼리는 얘기 시작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

백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인 탓이니 어쩌겠는가?”

흑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일 년 간 자네는 성과가 좀 있었나?”

전혀 없었네.”

백신의 물음에 흑신은 고개를 저었다.

무려 일 년 동안이나 공쳤다는 건가?”

백귀는 새하얀 눈썹 사이의 미간을 모았다.

십팔 년 전, 무후(武后)님을 시해하고 소성주(少城主)를 납치해간 그놈... 귀면지존은 정말 교활하기 이를 데가 없네.”

흑신은 고개를 절래 저었다.

약간의 단서를 남겼다가도 추적을 시작하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잠적해버리니 말일세.”

지난 십팔 년간 끝없이 반복해온 숨바꼭질이지.”

백귀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백신귀가 태상호법으로 봉사하고 있는 제왕성이 세워진 것은 백여 년 전이다.

제왕성을 세운 것은 섭초천(葉超天)이라는 인물이다.

하지만 섭초천의 출신내력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느닷없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섭초천은 기이한 무공으로 기존 세력들을 가차없이 쓰러트렸었다.

당시의 강호를 호령하고 있던 어떤 세력이나 고수도 섭초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전통의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마도 무림의 종가인 마교, 사파 무림의 본산인 혈교(血敎)도 섭초천에게 무참한 패배를 당했다.

훗날 제왕노조(帝王老祖)라 불리게 된 섭초천은 자신의 무공 내력을 철저히 숨겼다.

그가 구사하는 무공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섭초천이 구사하는 경이적인 무공의 출처에 대해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달마묵장!

달마가 달마묵장에 남겼다는 비결만이 섭초천이 이룬 놀라운 성취를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섭초천과 그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무공이 달마묵장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인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인들은 제왕성이 달마묵장을 보유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왕성의 당대 성주는 철면제왕(鐵面帝王) 섭장천(葉長天)이란 인물이다.

신주이십팔숙의 으뜸인 일제(一帝)가 바로 철면제왕 섭장천이다.

제왕노조 섭초천의 손자인 철면제왕 섭장천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이다.

마교와 혈교의 잔당들을 비롯하여 숱한 고수들이 섭장천에게 도전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섭장천의 수하에서 십초를 버티지 못하고 죽거나 다쳤다.

삼대에 걸쳐 거푸 천하제일인을 배출한 제왕성의 성세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헌데 십팔 년 전, 제왕성에서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었다.

섭장천의 아내인 무후 주영청(朱永淸)이 살해당하고 한 살짜리 외아들 섭무궁(葉無窮)이 납치된 것이다.

범인은 제왕성 섭씨일족의 가전 보물을 훔치러 잠입한 도둑이었다.

도둑이 노린 가전 보물은 물론 달마묵장이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달마묵장은 제왕성 내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게다가 태상호법들인 흑백신귀가 근처에 늘 상주하며 지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은 용케 달마묵장을 훔쳐냈다.

도둑은 얼굴에 귀신 형상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훗날 밝혀진 정체는 마교의 신임 교주 귀면지존이었다.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훔친 직후 흑백신귀에게 포착되었었다.

흑백신귀는 함께 손을 쓰면 섭장천과도 호각을 이룰 수 있다는 절세고수들이다.

귀면지존이 범상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흑백신귀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후원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소성주인 섭무궁을 인질로 잡아버렸다.

그 과정에서 섭장천의 아내 무후 주영청은 어린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다가 귀면지존의 독수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삼 년 전부터 강북(江北) 육성(六省)에서는 놈의 종적이 뚝 끊겼네.”

흑신이 말을 이었다.

아마 강남(江南)으로 근거지를 옮겼거나 어딘가에 깊이 숨어서 못된 짓을 꾸미고 있는 때문일 걸세.”

내가 담당한 강남 칠성(七省) 쪽에서는 그래도 지난 일 년 간 서너 번 놈의 흔적이 포착되었었네.”

백귀가 흑귀의 말을 받았다.

흑백신귀는 주모인 주영청이 살해당하고 소성주 섭무궁이 납치된 것이 자신들의 잘못이라 자책했다.

그래서 귀면지존을 잡아 죽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맹세하고 제왕성을 떠났었다.

그 후 십팔 년의 세월 동안 흑백신귀는 강북과 강남을 나누어 귀면지존의 행방을 추적해왔다.

강북에서의 수색은 흑신이 맡았고 강남은 백귀가 뒤져온 것이다.

놈은 서너 달마다 한 번씩 대처(大處)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는데... 볼일만 보고는 재빨리 모습을 감추길 반복해왔네.”

어디 어디서 놈의 흔적이 발견되었는가?”

흑신이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백귀에게 대답을 채근했다.

무창(武昌), 소주(蘇州), 상해(上海), 마지막으로 두 달 전쯤 광릉(廣陵)에 모습을 드러냈었네.”

광릉이라...”

백귀의 말에 흑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광릉이라면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사가 서린 유서 깊은 고장인데... 근처에 숨을 만한 곳이 있는가?”

산이 깊기로는 안탕산(雁蕩山), 물길이 험하기로는 대택향(大澤鄕)이 있네만...”

백귀가 대답했다.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이목이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그물처럼 깔려있다는 걸 잘 알고 있네.”

흑신이 새카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만일 은신처를 마련한다면 가급적 인적이 드문 곳을 택하겠군.”

백귀도 무슨 말인지 깨닫고 눈을 치떴다.

앞으로는 외진 곳을 중점적으로 뒤져 봐야하는 이유일세.”

흑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놈의 종적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광릉 근처의 안탕산과 대택향을...”

말을 이어가려던 흑신은 미간을 찡그렸다.

백귀의 치떠진 눈이 자기 뒤쪽의 객잔 입구에 고정되어있음을 발견한 때문이다.

사람이 말을 하면 집중해야지 딴전을 피우면...”

백귀를 타박하며 뒤를 돌아보던 흑신 역시 눈을 치뜨며 입을 다물었다.

점소이의 안내를 받으며 객잔으로 들어오는 청년을 본 때문이다.

청년은 먼 길을 가는 듯 등에 봇짐을 비스듬히 짊어지고 있으며 허리에는 검을 한 자루 차고 있다.

(... 저놈...)

흑신은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천부(天賦)의 무골(武骨)이다!)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창가의 빈자리에 앉는 청년의 모습을 살펴보며 흑백신귀는 실로 오랜만에 온몸을 뒤흔드는 전율을 느꼈다.

청년의 빼어난 자질은 백 년 가까이 살아온 흑백신귀도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안탕산을 떠나온 강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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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호출도

 

 

! 카캉!

강유의 목검과 타복의 목도가 격렬하게 뒤엉켰다.

주로 타복의 목도가 공격하고 강유의 목검은 부드럽게 휘돌면서 타복의 공격을 막거나 휘감아서 방향을 틀게 만들었다.

카캉! 스악!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나 물러섬도 없이 점점 더 빠르고 격렬하게 공방을 펼쳤다.

(... 너무 빨라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보이질 않아.)

분이는 눈이 팽팽 돌아가는 기분이 되었다.

무공을 모르는 분이로서는 강유와 타복의 공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도련님도 아버지도 다치지 말아야하는데...)

분이는 그저 물통에 달린 줄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쥔 채 가슴만 조일 뿐이었다.

하여간 볼수록 놀라운 녀석이오. 나도 붕정검법을 자유자재로 펼치기까지는 십년이 넘게 걸렸는데...”

강조는 타복과 공방을 벌이는 강유를 보며 감탄하는 표정이 되었다.

“...”

반면 냉상영은 여전히 미간을 조금 모은 채 무언가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 사이에 강유와 타복의 대결은 정점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타복의 목도는 격렬하면서도 숱한 변화를 일으키며 강유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강유는 목검과 몸을 유연하게 움직여서 타복의 공격을 흘려보내거나 오히려 역습을 가했다.

임기응변도 자연스럽고... 이제는 나로서도 더 가르칠 게 없는 것같소.”

강유가 능숙하게 타복을 상대하는 걸 보며 강조의 머리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번쩍! 서걱!

그때 강유와 타복의 무기가 뒤엉키며 서로의 몸을 베었다.

목검과 목도에 묻은 먹물들이 두 사람이 걸친 흰 옷에 흔적을 남겼다.

일격을 주고받은 후 물러섰던 강유와 타복은 다시 서로에게 돌진하려고 했다.

그쳐라!”

그때 강조가 오른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강유와 타복은 즉시 거리를 벌리며 멈춰 섰다.

오호단문도 칠십이식이 일순(一巡)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강조가 쳐들었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타복은 순식간에 오호단문도의 모든 초식을 한 차례 구사했던 것이다.

헌데 멈춰서는 강유와 타복이 걸친 흰 옷 여기저기에는 먹물이 묻어있었다.

강유의 옷에는 주로 점이 찍혀있는 반면 타복의 옷에는 먹물 자국들이 길게 이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강유는 목검을 두 손으로 든 채 타복에게 포권을 했다.

별 말씀을...”

타복도 목도를 내리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서로 상대방의 옷에 찍힌 먹물 자국의 숫자를 확인해라.”

예 아버지!”

...”

강조의 말에 강유와 타복은 동시에 대답하며 서로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흰 옷을 입고 무기에 먹물을 묻혔던 것은 승패를 판독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타복의 몸에는 모두 열 세 곳에 먹물 자국이 나있습니다.”

강유가 먼저 강조에게 말했다.

강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타복을 보았다.

도련님의 몸에는 스물한 개의 자국이 났습니다.”

!”

타복의 말에 분이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번 대련에서는 타복이 이겼군.”

강조는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타복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실전에서라면 노복이 졌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가?”

강조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타복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왜 패배를 자인하는 걸까?)

분이도 의아해하며 타복을 바라보았다.

주인님께서도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노복이 도련님 몸에 남긴 먹물 자국은 그리 짙지도 길지도 않습니다.”

타복은 강유의 몸을 살펴보며 말했다.

, 실전이었다면 그냥 옷이 베어지거나 약간의 자상이 나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반면 노복의 몸에 난 먹물자국들은 대부분 짙고 길뿐 아니라 치명적인 요혈(要穴) 근처에 나있습니다.”

타복은 말하면서 자기 몸에 난 먹물 자국들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아비의 설명을 들은 분이의 얼굴이 흥분으로 발개졌다.

언제부터인가 분이는 아비의 안위보다는 작은 주인의 성취를 기뻐하고 있었다.

정확한 분석이네.”

강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육참골단(肉斬骨斷)! 살을 내주고 뼈를 자른다는 무도의 이치에도 부합하니 오늘 대련은 유가 이겼다.”

소자,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강조의 칭찬에 강유는 포권하며 고개를 저었다.

타복이 손에 사정을 봐주지 않았으면...”

그만해라.”

강조가 손을 들어 강유의 말을 저지했다.

겸양도 지나치면 상대에 대한 모욕이 되는 법이다.”

죄송합니다.”

강조의 지적에 강유는 머쓱해서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말씀이 맞아.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가 양보한 건 아니야.)

분이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타복의 실력은 당금의 무림을 통틀어 백대고수(百大高手) 안에 든다. 칠절의 한명으로 꼽히는 아비라 해도 타복을 쉽게 이기지는 못한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주인님.”

강조의 말에 타복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타복과 호각으로 싸웠으니 무림에 나갈 자격이 있다.”

하오면...”

강유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혈기왕성한 다른 젊은이들처럼 강유도 인적이 드물고 외진 산중에서의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아비의 심부름도 한 가지 할 겸, 안탕산을 내려갔다 오너라.”

강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강유는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어머니와 분이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본 때문이다.

 

* *

 

스윽! !

타복은 대련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당을 비로 쓸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온 신경은 강유의 침실이 있는 왼쪽 모옥을 향해 있었다.

그 모옥 앞에는 봇짐을 품에 안은 분이가 울상을 지은 채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려있는 모옥 안에서는 냉상영이 먼 길 떠날 차림인 강유의 옷을 매만져 주고 있는 중이다.

 

너 혼자 강호에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매사에 조심해야만 한다.”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지만 냉상영의 말에는 절절한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강유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갔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혼자 집을 떠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냉상영으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고 아버지의 심부름만 하고 바로 돌아오도록 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어찌 걱정이 안되겠느냐? 세상은... 특히 무림인들이 설치는 강호가 얼마나 험한 곳인데...”

냉상영은 강유의 상의를 매만져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늘 긴장을 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하고... 하여간 일을 보는 대로 지체없이 돌아와야만 한다.”

당부를 하며 냉상영은 곁눈질로 문 밖을 살폈다.

냉상영의 시야에는 분이만 보이고 타복과 강조의 모습은 들어오지 않는다.

(어머니가 지나치게 불안해하신다.)

강유가 바깥의 눈치를 살피는 냉상영의 모습을 낯설어할 때였다.

유야!”

곁눈질로 문 밖을 살피던 냉상영이 두 손으로 강유의 저고리를 잡고 몸을 바짝 접근시키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예 어머니...”

심상치 않은 냉상영의 태도에 강유도 긴장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사실 네 아버지는...”

!”

냉상영이 극도로 긴장한 채 강유에게 속삭이려는데 문 밖에서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 아니다.”

그러자 냉상영은 깜짝 놀라며 강유에게서 떨어졌다.

언제 나타났는지 문 밖에는 강조가 뒷짐을 짚은 채 서있다.

봇짐을 품에 안은 분이는 옆으로 비켜서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괜한 노파심이라 여기지 말고...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거라.”

냉상영은 억지로 웃으며 문밖의 강조를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오늘 따라 어머니가 좀 이상하시구나.)

강유의 가슴 속에서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심려 끼쳐드리지 않도록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그만 나가자.”

...”

냉상영이 앞장서서 방을 나갔다.

강유도 탁자에 올려놓은 검을 집어들고 그 뒤를 따랐다.

봇짐에 빠진 건 없지?”

밖으로 나온 냉상영은 남편 강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분이에게 물었다.

예 마님. 말씀하신 건 전부 챙겼어요.”

그럼 되었다. 뒷마무리는 분이 네가 하거라.”

냉상영은 쌀쌀맞은 표정으로 말하며 분이와 강조 앞을 지나간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소요유거 가운데에 자리한 가장 큰 모옥 쪽으로 걸어갔다.

(마님이 정말 심란하신 모양이네.)

분이가 돌아보는 사이에 냉상영은 모옥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긴 사랑하는 외아들이 난생 처음 혼자 세상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마님 속이 걱정으로 까맣게 타들어가겠지.)

가운데 모옥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분이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준비 되었습니다 아버지.”

방에서 나온 강유가 허리띠에 고정한 검을 만지며 강조에게 말했다.

그럼 가자. 관도(官途) 근처까지는 아비가 함께 가주마.”

강조는 분이가 건네주는 봇짐을 받는 아들에게 말하며 돌아섰다.

조심하세요 도련님.”

분이는 안고 있던 봇짐을 강유에게 건네주며 울상 지었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이 강호래요. 한시도 긴장을 늦추시면 안돼요.”

걱정마라. 내가 누구냐?”

강유는 봇짐을 등에 비스듬히 걸치면서 웃었다.

무공뿐 아니라 지혜로도 칠절중 으뜸이신 소요신군님의 아들 아니더냐? 눈치와 임기응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래도...”

강유가 어깨를 다독이며 안심을 시켰지만 분이는 여전히 울상을 지우지 못했다.

숭산(崇山)까지 다녀올 동안 어머니를 부탁하마. 외로워하지 않으시도록 자주 말 상대도 해드리고...”

집 걱정은 말고 도련님 몸이나 잘 챙기세요.”

강유의 당부에 분이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이 너만 믿는다.”

강유는 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돌아섰다.

그 사이에 마당을 가로질러 간 강조는 사립문 근처에 타복과 함께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오십시오 도련님.”

타복은 다가오는 강유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 없는 동안 고생 좀 해줘요 타복.”

강유는 타복에게 포권을 한 후 걸음을 옮기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곧 두 부자의 모습은 소요유거가 자리한 계곡 밖으로 사라졌다.

정말... 정말 별일 없겠죠 아버지?”

사립문쪽으로 나온 분이가 울상을 지으며 타복에게 물었다.

도련님은 복이 많은 분이다. 설령 어려움을 만난다 해도 전화위복이 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타복은 분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독였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따라가고 싶어. 도련님이 눈에서 보여야 안심이 될 테니...)

분이는 강유가 강조를 따라 사라진 계곡 입구를 보며 눈가의 물기를 훔쳤다.

(드디어 시작이로군.)

울먹이는 분이와 달리 타복의 눈빛은 스산해지고 있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타복의 입가로 음산한 미소까지 서렸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 * *

 

(좀 더... 좀 더 대범했어만 했다. 그 사람의 눈치 볼 것 없이...)

어둑한 방안을 서성이며 냉상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든 그 아이에게 진실을 말해줬어야 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그 아이가 알도록...)

뒤늦은 후회가 냉상영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강유는 그녀의 곁을 떠나버린 후였다.

(제발... 부디 무사히 돌아오너라. 네게 해줄 이야기가 너무도 많으니...)

이제 냉상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강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저 하늘의 가호가 그 아이와 함께 하기를 빌 뿐이다.)

눈을 감고 두 손을 꼭 모으는 냉상영의 눈가로 물기가 서리고 있었다.

 

* * *

 

안탕산은 절강성을 대표하는 명산이다.

명산으로 이름났다는 것은 그만큼 험하다는 뜻도 된다.

소요신군 강조는 그 험한 안탕산을 동네 뒷동산이라도 되는 듯 뒷짐을 쥔 채 여유롭게 걷고 있다.

천천히 걷는 것같지만 실제로 강조의 걸음은 흐르는 구름같다.

(역시 아버지의 경신술은 대단하구나.)

강유는 앞서가는 강조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쳐야만 했다.

(틈만 나면 안탕산을 누비고 다닌 덕분에 경신술은 나름대로 자부해왔지만... 산책하듯 걷는 아버지를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뒷짐을 짚고 유유자적 걸어가는 강조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강유는 숨이 턱에 닿도록 힘을 내야만 했다.

(아버지가 무림칠절 중에서도 첫째로 꼽히는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소요보법과 붕정검법만 완전히 익혀도 무림을 독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삼 자신의 아버지의 무공에 감탄하던 강유는 어느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관도까지 배웅해주시겠다더니 어째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강유는 점점 더 험해지는 주변의 산세를 곁눈질하며 의아해했다.

백여 리를 달려왔음에도 관도가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휘익!

강유가 의아해할 때 강조가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강유도 거친 숨을 고르며 강조의 뒤로 내려섰다.

두 부자가 멈춰선 곳은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험준한 바위 봉우리 위였다.

강조와 강유가 달려온 쪽만이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봉우리 위에는 그리 크지 않은 나무가 몇 그루 서있다.

(여긴 처음 와보는 곳인데...)

강조를 따라 봉우리 위로 올라선 강유는 자신이 낮선 곳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안탕산은 워낙 넓어 북()안탕산, ()안탕산, ()안탕산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철이 들 때부터 안탕산에서 살아온 강유도 못 가본 곳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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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절지(絶地)의 수인(囚人)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허튼 수작이시오 교주.”

잠시 동요하는 것같던 제갈륜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영(娥英)이를 내세워 협박 해봤자 통하지 않소. 혈왕아(血王牙)를 내놓는다 해도 아내와 아영이가 무사할 리 없는데 미쳤다고 교주에게 굴복하겠소?”

귀면지존이 오랜 세월 제갈륜을 이곳에 가둬두고 고문을 해온 목적은 혈왕아라는 보물을 얻기 위해서였다.

(역시 만만치 않군.)

제갈륜의 냉소를 들은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모아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오해는 하지 마라. 본좌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네 딸의 소식을 전해주려는 것뿐이다.”

그러시다니 눈물 나게 고맙구려. 물론 눈알이 뽑힌 이런 몰골이라 눈물을 흘릴 수도 없지만...”

귀면지존의 회유를 제갈륜은 냉소로 받아넘겼다.

네 딸 아영이도 어느덧 열일곱 살이 되어간다. 막 피어나려는 꽃 봉우리처럼 사랑스럽고 예쁜 나이지.”

귀면지존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딸이 다시 거론되자 제갈륜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웃음기가 사라졌다.

게다가 한때 천하오대미인(天下五大美人)중 한명으로 불렸던 어미의 미모를 물려받아 아영이는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미녀로 자랐다.”

어디 밭만 좋다 뿐이오? 그 밭에 뿌려진 씨도 절세미남의 것이니 예쁠 수밖에...”

귀면지존의 수작에 제갈륜은 냉소로 응대했다.

네가 별호에 옥룡(玉龍)이 들어갈만큼 대단한 미남이었던 것도 사실이지.”

귀면지존은 느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 두 달 후면 아영이도 열일곱 살이 된다. 여자로서 절정의 시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요?”

제갈륜은 눈알이 뽑혀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귀면지존을 노려보았다.

네가 짐작하는 대로다.”

귀면지존은 음험하게 웃었다.

부르르! 끼이!

제갈륜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어 쇠사슬로 하여금 쇳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아영이는 너무 어리고 애처로워서 두고 보기만 했으나... 열일곱 살을 넘기면 어엿한 여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귀면지존은 귀신 가면 속에서 야비하게 웃었다.

제갈륜은 그자가 무슨 짓을 하겠다고 암시하는지 모를 리 없다.

헌데 제갈륜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흐흐흐! 제발 그러시구려.”

뭐라?”

제갈륜이 보인 의외의 반응에 귀면지존의 눈이 곤혹으로 물들었다.

나는 복수할 능력이 없고, 또 당금의 하늘아래에는 당신으로 하여금 죗값을 치르게 해줄 수 있는 인간도 거의 없을 것이오.”

제갈륜은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저 하늘이 인간들을 대신해 당신에게 벌을 내려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중인데... 당신이 아영이까지 욕보이면 그 죄가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질 터! 당연히 하늘이 벌을 내리는 때도 가까워지지 않겠소?”

제갈륜의 어조가 점점 더 열기를 띠며 고조되어갔다.

반면 귀면지존의 눈빛은 차갑게 갈아 앉았다.

아영이가 어찌 되든 상관없소. 난 그저 내가 살아있을 때 당신이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오. 크크크!”

끼이! 끼이!

제갈륜은 자신의 몸을 묶은 쇠사슬을 흔들며 웃었다.

닥쳐라!”

!

그 직후 귀면지존은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제갈륜의 복부에 박아 넣었다.

치치치!

제갈륜의 복부에서 살이 타는 역한 냄새와 연기가 확 피어올랐다.

제갈륜의 뱃속으로 깊이 파고 든 귀면지존의 손가락들이 화로에서 꺼낸 부젓가락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있었기 때문이다.

끄으윽!”

모든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제갈륜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신음을 토해내었다.

어떠냐? 창자가 익어가는 게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치치치!

귀면지존은 벌겋게 달아오른 손가락을 제갈륜의 뱃속에 찔러 넣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잔인하게 웃었다.

... 고맙소 교주. 무료해서 지옥같던 참에 이런 여흥을 마련해주어서...”

제갈륜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키득키득 웃었다.

여흥?”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교주도 한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혼자 갇혀있어 보시오. 그럼... 무료함이 세상 그 어떤 고통보다도 끔찍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제갈륜의 그 말에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찡그려졌다.

교주가 자극을 해주니 내 몸뚱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구려.” “고맙고 고맙소이다.”

제갈륜은 내장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껄껄 웃었다.

개소리는 적당히 해라.”

!

귀면지존은 제갈륜의 복부에서 거칠게 손가락을 뽑아내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간다만... 다음번에는 좀 더 흥미진진한 여흥을 준비해서 찾아오겠다.”

배에 난 구멍으로 피를 줄줄 흘리는 제갈륜을 노려보며 귀면지존은 이를 갈았다.

사랑하는 딸년이 눈앞에서 유린당하고 찢겨죽는 데도 지금처럼 태연한 척, 대범한 척 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귀면지존은 음산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자의 모습은 곧 먹물을 뿌려놓은 듯한 어둠속으로 잠겨들었다.

허억! 또 한 번... 또 한 번 고비를 넘겼구나.”

귀면지존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제갈륜은 참고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어서... 더 늦기 전에 날 찾아와다오 아이야.”

내장이 익어버린 듯한 고통에 떨면서 제갈륜은 이각(二刻; 30) 전쯤에 보았던 소년을 떠올렸다.

제갈륜은 오랫동안 자신의 사념(思念)을 수용해줄 대상을 찾아왔었다.

하지만 깊은 산중이라 인적이 드문데다가 간혹 그의 사념을 감지했던 인간들은 놀라 까무라치는 바람에 생각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밤 마침내 제갈륜은 어떤 소년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가 있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다만 한()을 남기고 죽는 것이 두려울 뿐...”

끼이! 끼이!

원한에 사무친 제갈륜이 몸을 떠는 대로 쇠사슬들이 부딪히며 대신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 * *

 

강유의 아버지 강조의 별호는 소요신군(逍遙神君)이다.

보법과 검법으로 명성을 날린 그는 무림칠절의 일인으로 꼽힌다.

 

당금의 무림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신주이십팔숙(神州二十八宿)이란 인물들이다.

신주이십팔숙은 다시 일제(一帝), 이비(二秘), 삼기(三奇), 사신(四神), 오왕(五王), 육패(六覇), 칠절(七絶)로 구분된다.

소요신군 강조는 그중 칠절에 속한다.

가전의 절기인 소요보법(逍遙步法)과 삼십육식 붕정검법(鵬程劍法)을 구사하는 강조는 평생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덕분에 그는 젊은 나이에 소요신군이라는 비범한 별호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강조는 삼십 초반의 젊은 나이에 돌연 은퇴해버렸다.

사랑하는 아내 냉상영이 은원이 끊이지 않는 강호에서의 삶을 혐오한 탓도 있지만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제왕성(帝王城)!

 

백여 년 전부터 무림을 지배해온 최대 최강의 세력이다.

강조는 바로 그 제왕성과 갈등을 빚었었다.

갈등의 원인은 무림인들을 대하는 제왕성의 폭압적인 처사였다.

제왕성은 자신들에게 맞서거나 반대하는 세력, 인간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제왕성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멸문을 당한 문파나 가문의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불의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성격인 강조는 몇 번인가 제왕성과 충돌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강조 혼자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세력 제왕성과 맞서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결국 강조는 아내의 애원도 있고 해서 금분세수(金盆洗手;은퇴)를 하기에 이르렀다.

무림을 떠난 강조는 절강성(浙江省)의 명산인 안탕산(雁蕩山)의 깊은 곳에 소요유거(逍遙幽居)라는 띠집을 짓고 유유자적해왔다.

 

* * *

 

해가 제법 높이 솟았다.

소요유거의 마당에서는 강유와 타복이 대련을 하고 있다.

목검(木劒)과 목도(木刀)를 써서 대련하는 두 사람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있다.

소요유거를 이루고 있는 세 채의 건물 중 가장 큰 모옥 앞에는 일남일녀가 의자에 앉아서 강유와 타복의 대련을 보고 있다.

강조와 냉상영 부부다.

냉상영에게서 열 걸음 쯤 떨어진 곳에는 타복의 딸 분이가 서있다.

초조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작은 주인의 대련을 보고 있는 분이는 나무로 만든 물통을 하나 들고 있다.

대련이라고 하지만 타복이 일방적으로 강유를 공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빗발치듯 날아드는 타복의 목도를 강유는 보법을 펼쳐 피하고 있다.

마치 산책을 하는 듯 한가로워 보이는 그 보법이 강씨 집안의 비전절기인 소요보법이다.

스악! !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타복의 목도가 움직일 때마다 비단폭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일어난다.

타복은 곱사등이임에도 키가 육척에 이른다.

만일 등이 곧게 펴져있다면 칠척을 훌쩍 넘는 장신일 것이다.

타복의 몸은 불구답지 않게 건장하며 특히 양팔은 굵고 길다.

그 강인하고 긴 팔을 써서 휘둘러지는 타복의 목도는 진짜 칼에 못지않은 위력을 지니고 있다.

(... 조심하세요 도련님!)

물통에 달린 굵은 끈을 움켜쥔 분이의 양 손 손등에 핏줄이 생긴다.

종횡으로 긋고 찌르고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급소를 노리며 들이닥치는 타복의 목도는 무공을 모르는 분이가 보기에도 위협적이다.

여유롭게 산책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요보법으로 피하고 있지만 강유의 얼굴도 어느덧 땀으로 흠씬 젖어들고 있다.

몇 번인가는 타복의 목도가 강유의 몸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뻔했다.

(아버지도 좀 적당히 하시지...)

그걸 보며 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전인 듯 사정을 봐주지 않고 강유를 공격하는 타복이 못내 미운 분이였다.

부인이 보기에 유의 보법이 어떤 것같소?”

강조는 타복과 대련하는 강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옆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일초무학(一招無學)인 제게 무슨 의견이 있겠어요?”

냉상영은 냉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어울리게 냉상영은 정이 그리 많은 성격이 아니다.

하나뿐인 아들 강유에게조차 엄한 것을 넘어 매몰차게 대할 때가 많은 냉상영이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냉상영은 종의 딸인 분이는 살갑게 대해왔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강유가 아니라 분이를 냉상영의 자식으로 여길 정도다.

그래도 움직임은 제법 자연스러워 보이는군요. 억지로 꾸며서 보법을 펼치는 것같지는 않고...”

남편의 질문에 너무 성의 없게 대답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냉상영이 마지못해 평을 추가했다.

잘 보셨소. 우리 강씨가문의 절기인 소요보법은 소요(逍遙;여유롭게 거님)라는 이름 그대로 자연스러움이 생명이오.”

강조는 타복의 격렬한 공격을 여유있게 피하는 아들을 보며 말했다.

무림의 오대보법(五大步法)중 하나이기도 한 소요보법을 제대로 구사할 수만 있다면 어떤 공격이라도 피할 수가 있소. , 소요보법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유를 무림에 내보내도 걱정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오.”

“...”

남편의 말에도 냉상영은 미간을 조금 모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그때 강조가 오른손을 들며 말했다.

! 스슥!

그 즉시 강유와 타복은 거리를 벌리며 멈춰 섰다.

소요보법은 그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붕정검법으로 타복의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상대해봐라.”

!”

아버지의 말에 강유는 목검을 든 채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먹물을 준비해라.”

강조가 아내 옆쪽에 서있는 분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예 주인님.”

분이는 즉시 대답하며 강유와 타복에게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나무로 만든 물통을 두 손으로 든 채...

여기 있어요.”

분이가 강유와 타복에게 내미는 물통에는 먹물이 절반 정도 들어있다.

수고한다.”

첨벙!

강유는 목검 끝을 물통에 든 먹물에 담그며 분이를 향해 싱긋 웃었다.

... 별 말씀을요.”

강유의 미소를 접한 분이의 얼굴이 와락 달아올랐다.

그걸 보는 어른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강조는 보기 좋다는 듯 웃었지만 냉상영의 미간은 찡그려졌다.

타복도 미간을 조금 모으며 목도 끝을 물통에 든 먹물에 담그었다.

다시 꺼낸 타복의 목도는 끝 쪽이 한 뼘 정도로 검게 물들었다.

강유도 분이가 들고 있는 물통에서 목검을 뽑았는데 역시 앞쪽의 한 뼘 정도가 검게 변해있었다.

분이 넌 방해되지 않게 멀리 물러나 있어라.”

후두둑!

타복은 목도를 털어서 너무 많이 묻은 먹물을 바닥에 뿌리며 말했다.

...”

분이가 대답하며 물러서는 사이에 강유도 목검을 흔들어 먹물을 털어내었다.

준비를 마친 강유와 타복은 일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다시 대치했다.

강유는 옆으로 비스듬히 선 채 양팔을 거의 수평으로 벌려 새가 날개를 편 듯한 자세를 취했다.

반면 타복은 목도를 상단으로 겨누며 강유와 마주 섰다.

그럼 한 수 지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타복.”

양팔을 펼친 강유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운 몸짓으로 타복에게 다가섰다.

조심하십시오 도련님. 노복(奴僕)도 전력을 기울일 테니...”

타복도 상단으로 겨눈 목도를 강유에게 겨눈 채 흔들며 마주 다가섰다.

쩍적! !

다음 순간 타복은 호랑이가 앞발로 사냥감을 내려치듯 격렬하게 목도를 내리그었다.

방향과 각도를 각기 달리하며 순간적으로 십여 차례 그어지는 타복의 칼질은 상대가 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타복의 독문절기인 오호단문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다섯 호랑이가 모든 문을 막아선다는 이름에 어울리는 맹렬한 도법이다.

하지만 강유는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스악!

오히려 그는 앞으로 전진하면서 목검을 찌르고 걷어 올렸다.

경쾌한 보법과 함께 펼쳐지는 강유의 검법은 마치 독수리가 날고뛰는 것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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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이한 방문객

 

 

처음에는 가위에 눌린 것으로 생각했다.

새벽이 멀지 않은 깊은 밤중, 강유(姜諭)가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을 때 <그것>이 있었다.

츠으...

칠흑같이 어두운 천장 귀퉁이에 한 쌍의 푸른빛이 떠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눈...)

강유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푸른빛이 사람의 눈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슈욱!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할 때 한 쌍의 푸른빛은 천장 귀퉁이를 떠나 강유에게 내려왔다.

영락없이 사람의 눈을 닮은 그것들 뒤로 두 가닥의 푸른 띠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 정말 사람의 눈이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한 쌍의 푸른빛을 올려다보며 강유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것은 사람의 눈이었다!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뒤쪽으로 투명한 끈이 이어진 한 쌍의 눈은 강유의 얼굴 바로 위에 이르러 눈동자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유를 살펴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슈욱!

이윽고 탐색을 마친 한 쌍의 눈이 강유의 두 눈을 향해 내려왔다.

으아아악!”

푸른빛을 띤 그것들이 자신의 동공으로 파고드는 걸 느끼며 강유는 비명을 질렀다.

 

* * *

 

“...!”

강조(姜祚)의 눈이 번쩍 떠졌다.

 

<으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아들 강유의 비명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

벌떡 일어나는 강조 옆에서 아내 냉상영(冷霜英)도 놀라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려 한다.

염몽(厭夢;악몽)이라도 꾼 모양이오. 내가 가서 살펴볼 테니 당신은 더 자도록 하시오.”

강조는 아내를 안심시키며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 * *

 

<드디어 나 제갈륜(諸葛崙)과 영혼의 파장이 일치하는 인간을 찾아내었다.>

 

강유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제갈륜...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강유는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의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분명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더 이상 깊이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한 쌍의 눈이 동공으로 스며들자 벌겋게 달아오른 부젓가락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끄윽! !”

입에서는 죽어가는 짐승의 그것같은 신음이 흘러나오고 온몸의 근육은 제멋대로 펄떡거린다.

푸르면서 투명한 끈 같은 것들이 강유의 눈에서 빠져나와 천장 귀퉁이와 이어져 있었다.

 

* * *

 

강조는 옷을 대충 걸치며 문 밖으로 나섰다.

새벽이 멀지 않았지만 아직 사위는 칠흑같이 어둡다.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품()자형으로 서있는 세 채의 모옥(茅屋) 중 왼쪽 모옥 앞에 누군가 서있는 것이 강조의 시야에 들어왔다.

육척이 넘는 건장한 체격을 지녔지만 등이 곱사등이인 인물이다.

타복(駝僕)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곱사등이는 강조의 하인이다.

타복 역시 강유가 지른 비명을 듣고 잠이 깬 듯 했다.

주인님...”

타복은 허리띠를 매며 다가오는 강조에게 고개를 숙였다.

늘 하던 잠꼬대인가?”

강조는 아들의 침실 문을 보며 타복에게 물었다.

강유의 나이는 어느덧 열아홉 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요란하게 성장몽(成長夢)을 꾸곤 한다.

그렇다 생각했는데... 오늘 밤은 조금 다른 듯합니다.”

타복도 강유의 침실 문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래?”

강조는 눈을 조금 치뜨며 강유의 침실 문으로 다가갔다.

 

* * *

 

<드디어 우리가 만났구나. 덕분에 천의(天意)가 존재함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강유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천의 운운 하는 것이 강유에게는 생뚱맞게 느껴졌다.

끄윽... ...”

하지만 강유는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눈알이 후벼 파이는 것같아서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다.

 

<이제 너를 만났으니 나의 오랜 한도 풀릴 수가...>

 

유야!”

강유의 머릿속을 울리던 속삭임은 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의해 끊어졌다.

강유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몇 달 간 출타했다가 이틀 전에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다.

 

<방해꾼이 끼어들었군.>

 

무슨 일이냐? 괜찮은 것이냐?”

머릿속의 속삭임과 강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 아버지! 그게...”

강유가 꽉 막혀 있는 목구멍을 억지로 열어젖히며 말하려 할 때였다.

 

<명심해라. 네가 나와 접촉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된다.>

 

슈우...

속삭임과 함께 강유의 동공으로 스며들었던 한 쌍의 푸른 눈이 빠져나갔다.

!

단단하게 막혀있던 병마개가 뽑히는 듯한 소리가 강유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끄윽!”

한 쌍의 푸른 눈이 동공을 통해 빠져나가는 충격에 퍼덕이는 강유의 귀로 속삭임이 이어졌다.

 

<동북방(東北方) 오십여 리쯤에 깊은 계곡이 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라.>

 

스으!

그 속삭임을 끝으로 한 쌍의 푸른 눈은 다시 천장 귀퉁이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동북방 오십여 리쯤의 계곡...)

강유가 푸른 눈동자의 속삭임을 되새길 때였다.

들어가겠다.”

덜컹!

문이 열리면서 강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 아버지!”

강유는 나무토막같이 뻣뻣해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일어났다.

열린 문을 통해서 마당에 타복이 서있는 것이 강유의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방으로 들어온 강조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는 아들에게 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유는 푸른 눈동자가 한 말을 아버지에게 다 털어놓으면 안될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누구보다 지혜로운 분이라 온전히 속일 수는 없다.)

강유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가위눌림이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저곳에서 사람의 눈 같은 것이 나타났었습니다.”

강유는 천장 귀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의 눈 같은 것?”

강조의 시선이 아들이 가리키는 쪽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호한데...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나타나 한동안 소자를 살펴보다가 사라졌습니다.”

특기할만한 다른 현상은 없었고?”

강조는 천장 귀퉁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아들에게 물었다.

(눈 모양의 그 빛들이 말까지 건넸다는 얘긴 할 필요 없겠지.)

강유는 아버지를 속인다는 사실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

공자께서도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할 바가 못 된다고 하셨다. 아마 염몽을 꾼 영향으로 헛것을 본 듯하니 잊어버리도록 해라.”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본 강조는 문쪽으로 돌아섰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더 자도록 해라.”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여전히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선 강유는 방을 나서는 아버지에게 허리를 숙였다.

괜찮다.”

!

강조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아주었다.

(아버지가 눈치채실까봐 조마조마했다.)

다시 혼자가 된 강유는 가슴 쓸어내렸다.

(하지만 잘 한 건지 모르겠다. 그 괴상한 눈이 동북방 오십여 리쯤에 있는 계곡으로 찾아오라고 했다는 걸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털썩!

강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왠지 말씀드리면 안될 것같은 느낌이 든 때문인데... 나중에라도 자백하면 용서해주시겠지.)

눈을 감은 강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지금의 상황 자체가 꿈의 일부인 듯 느껴지는 강유였다.

 

* * *

 

도련님은 괜찮으신지요?”

아들 방의 문을 닫아주는 강조의 안색을 살피며 타복이 물었다.

다 큰 놈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가위에 눌린 모양이네.”

몸은 제법 자랐지만 아직 어른이라 할 수 없는 나이입니다. 험한 꿈을 꿨으면 놀랐을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타복은 작은 주인의 역성을 들었다.

그렇긴 하네만... 저 녀석이 염몽을 꾼 원인이 주변에 삿된 것이 있어서일 수도 있네. 잠이 깬 김에 한 바퀴 둘러보고 올 테니 자네는 들어가서 쉬도록 하게.”

타복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강조는 계곡 입구쪽으로 걸어갔다.

다녀오십시오.”

날이 새기 전에 돌아오겠네.”

휘익!

강조는 타복의 배웅을 받으며 몸을 날렸다.

경신술로도 이름을 떨쳤던 강조는 바람처럼 계곡 밖으로 날아갔다.

타복이 주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덜컹!

세 채의 모옥 중 오른쪽 모옥의 문이 열리며 졸음이 묻어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한밤중인데 왜 밖에 나와 계세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밖으로 나온 것은 열여섯, 일곱 살쯤 된 소녀였다.

잠옷 위에 겉옷 대신 담요를 두른 유순한 인상의 이 소녀는 타복의 딸이다.

이름이 분이인 타복의 딸은 갓 태어났을 때 어머니를 잃어 주인마님인 냉상영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 사연도 있어서 비록 주종지간이지만 강유와 분이는 친남매나 다름없는 사이다.

분이 너야말로 왜 이 밤중에 깨어났느냐?”

타복은 딸이 나온 모옥으로 다가갔다.

제가 잠귀 밝은 거 아시잖아요. 밖에서 두런두런 거리는데 잘 수가 있어야죠.”

분이는 쫑알거리며 담요의 앞자락을 끌어 모았다.

도련님이 가위에 눌리셨던 모양이다. 다시 잠자리에 드신 것같으니 그만 들어가자.”

타복은 딸이 나온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도 참, 나이가 몇인데 가위에 눌리신담.”

분이도 강유의 침실 쪽을 향해 눈을 흘기며 돌아섰다.

남 말하지 마라. 가끔 자지러지는 잠꼬대를 해서 아비를 놀라게 하는 주제에...”

저야 아직 한창 자라는 나이니까 그렇죠 뭐.”

타복의 타박에 분이는 샐쭉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처럼 내가 같이 자 주면 도련님이 가위에 눌릴 때마다 돌봐드릴 수 있는데 말이야.)

방문을 닫으며 곁눈질로 강유의 침실 쪽 보는 분이의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유와 분이는 종종 같은 침대에서 잤었다.

하지만 강유의 목젖이 도드라지면서 어른들은 둘이 함께 자는 것을 금지시켰었다.

어쩔 수 없이 내외를 하게 되었지만 분이의 꿈은 언제까지라도 강유와 함께 사는 것이다.

(물론 천한 종년 주제에 언감생심이지만...)

문을 닫는 분이의 입에서 아비 몰래 한숨이 새어나왔다.

 

* * *

 

새벽이 가까워졌지만 아직 어둠은 전부 걷히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한낮에도 햇빛이 닿지 못하는 깊고 깊은 계곡의 밑바닥이다.

마치 저승으로 내려가는 입구인 듯한 계곡 끝에는 동굴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다.

 

끼이! 끼이!

어둠 속에서 간헐적으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의 막다른 곳에 한명의 사내가 쇠사슬에 묶인 채 벽에 매달려 있다.

부러진 팔 다리는 썩어 문드러져 형체를 잃었고 눈알이 뽑혀 퀭한, 눈이 있던 자리에서는 누런 고름이 흘러나온다.

오랜 세월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온 사내의 육신은 푸줏간의 고깃덩이만도 못하다.

하지만 목숨은 실로 질긴 것이어서 사내는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다.

쌔액! 쌔액!

갈비뼈가 드러나 보이는 사내의 쇠약해진 가슴이 숨을 쉬기 위해 힘겹게 기복을 일으킨다.

끼이! 끼이!

그때마다 사내의 몸을 벽에 매달고 있는 쇠사슬이 조금씩 움직이며 쇳소리를 낸다.

이런 이런...”

문득 힘없이 떨구고 있던 사내의 고개가 조금 들려지며 입이었던 곳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사내를 고문해온 자는 그에게 들을 말이 있어서 혀는 자르지 않았다.

덕분에 사내는 손가락과 발가락, 심지어 양물까지 잘려나간 몸으로도 말은 할 수 있다.

존귀하신 마교(魔敎)의 교주(敎主)께서 오랜만에 친히 발걸음을 해주셨소이다 그려.”

사내는 눈알이 뽑혀서 시커먼 구멍이 된 눈으로 앞을 보며 웃었다.

“...!”

사내의 앞쪽 어둠 속에 누군가 서있다.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마귀 형상의 가면을 얼굴에 쓴 인물이다.

제갈륜(諸葛崙)... 너 요즘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이냐?”

어둠과 동화되어 서있던 마귀 가면의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눈을 번뜩였다.

꿍꿍이라...”

제갈륜이라 불린 사내는 자조어린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시오 귀면지존(鬼面至尊) 나으리! 십수 년 째 죽은 것보다도 못한 몰골로 갇혀있는 내가 무슨 꿍꿍이를 꾸밀 수 있단 말이오?”

무림칠절(武林七絶)중 한명이며 천고기재라 불리던 신안옥룡(神眼玉龍)께서 찍소리 한번 못 내보고 인생을 마감할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군.”

마귀 형상의 가면을 쓴 인물, 귀면지존이란 자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를 들어 무공이 아닌 술법(術法)을 쓴다든지...”

귀면지존의 눈이 마귀 가면 속에서 번득였다.

날 떠보려고 해도 소용없소이다 교주. 그래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제갈륜은 비웃음으로 귀면지존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 치고... 제법 오랜만에 만났으니 가족 소식을 전해주지.”

귀면지존은 화제를 바꿨다.

움찔!

그러자 제갈륜의 얼굴에 경련이 스치면서 웃음기도 사라졌다.

늙어가는 마누라야 관심 없겠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에 대해서는 독심장부인 너라 해도 완전히 무심할 수만은 없겠지?”

귀면지존이 쓰고 있는 가면 속에서 악의에 찬 웃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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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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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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