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1

 

                    쫓기는 여인들

 

 

틀림없습니다. 이자는 십자단맥검(十字斷脈劒)에 죽었습니다.”

이마 부분에 <()>자가 적힌 복면을 쓴 자가 한 구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복면인이 내려다보고 있는 시체는 온몸이 무성한 털로 덮인 거구의 사내인데 심장 부분에 열십자로 갈라진 상처가 나있다.

특이하게도 그 열십자의 상처는 피부가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있다.

끊어진 경맥들이 오그라들면서 피부가 안쪽으로 말려들어갔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십자검존의 독문검법 십자단맥검에 당한 흔적이다.”

또 한명의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쓰고 있는 복면 이마 부분에는 <()>자가 적혀있다.

각주(閣主)님이 보시기에 이 작자를 죽인 범인이 바로...”

먼저 말한 복면인이 <()>자가 적힌 복면을 쓴 자를 돌아보았다. 복면에 난 구멍으로 보이는 그자의 두 눈은 감출 수 없는 흥분으로 물들어 있다.

철사자 고창룡이 죽으면서 십자단맥검을 구사할 수 있는 자는 네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그중 셋의 행적은 확인되었다.”

각주라 불린 복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 곰같은 놈을 죽인 건 십칠 년 전 돌연 행방을 감춘 당혜선(唐惠善)일 수밖에 없다.”

각주라는 자는 시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날수비연(辣手飛燕) 당혜선! 역시 그년 짓이었습니다.”

드디어 사신검 중 복마신검(伏魔神劒)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생겼습니다.”

경하드립니다 각주님!”

시체 주변에 모여 있던 복면인들이 흥분을 주체 못하며 각주라는 자에게 포권을 했다. 그자들이 쓰고 있는 복면에는 예외없이 <()>자가 적혀 있다.

진정해라. 이제 겨우 당가 년이 기련산(祁蓮山) 근처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냈을 뿐이다.”

각주라는 자가 손을 들어 다른 복면인들의 말을 막았다.

이번 일에 우리 사신각(死神閣)의 명예가 걸려있다. 기련산의 골골을 다 뒤져서라도 당가 년을 찾아내라!”

존명!”

맡겨주십시오 각주님!”

복면인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외쳤다.

휘익! !

이어 그자들은 사방으로 새처럼 날아올랐다.

당혜선... 당혜선... 드디어 네년이 꼬리를 드러냈구나.”

사방으로 흩어져 멀어지는 수하들을 보며 각주라는 자는 음산하게 웃었다.

감히 본좌를 기만하고 복마신검을 빼돌린 대가를 몸으로 치르게 해줄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사신각의 각주라 불린 복면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악의에 찬 웃음소리는 한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 * *

 

-기련산맥(祁蓮山脈)!

 

감숙성과 청해성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으로 곤륜산맥의 동쪽 지맥이기도 하다.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이천여리의 산줄기는 험준하기 이를 데 없다.

기련산맥의 최고봉인 기련산은 높이가 무려 이만여척(6,000미터)에 이르러 정상부가 늘 만년설에 덮여있다.

기련산의 서북쪽에는 서역과 중원의 관문인 그 유명한 옥문관(玉門關)이 자리하고 있다.

 

계절은 싱그러운 초여름이다.

기련산 남쪽 산록에는 녹색의 물결을 일으키는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비스듬히 경사진 초원 여기저기에는 구름송이 같은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또 초원에는 듬성듬성 키 큰 나무들이 서있어서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완성한다.

초원에 서있는 나무들 중 가장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느릅나무 아래에는 소년이 한 명 앉아있다.

나이는 십육칠 세쯤 되었을까?

걸친 옷은 허름하고 살갗은 햇볕에 그을려 가뭇하다.

기련산 근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양치기 소년이다.

하지만 소년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맑아서 보는 이의 이목을 잡아끈다.

어느 명문가의 귀한 핏줄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외모를 양치기 소년이 지니고 있다.

소년은 느릅나무 밑동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소년이 읽고 있는 책은 제법 두껍고 글씨도 작아서 가벼운 내용은 아닌 듯 했다.

“...!”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던 소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앞쪽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느낀 때문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던 소년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

한 명의 여인이 바로 앞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의 모습은 매우 특이했다.

얼굴은 명장이 정성을 다해 빚은 듯 아름다운 반면 머리카락은 눈처럼 새하얀 은발(銀髮)이다.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만 보자면 여인의 나이는 이십 대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새하얀 머릿결 때문에 아주 나이가 많은 노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은발여인은 눈같이 흰 피부와 은발과는 대조적인 흑의(黑衣)를 걸치고 있다.

헌데 여인이 걸치고 있는 검은 옷은 섬뜩하게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피 칠갑이 되긴 했어도 검은 옷은 전혀 찢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옷을 물들이고 있는 피는 은발여인이 흘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것인 듯했다.

유령처럼 나타난 은발여인을 본 소년은 두 눈을 조금 치떴을 뿐 딱히 놀란 표정은 짓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게 담력이 큰 아이로구나.)

은발여인의 옥용에 언뜻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무슨 책인데 그리 재미있게 읽고 있었느냐?”

은발여인은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목소리다.)

소년은 은발여인의 청아한 음성에 감탄하며 말없이 책의 표지를 보여주었다. 표지에는 <죽서기년(竹書紀年)>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죽서기년... 흥미로운 책이로구나."

적잖이 놀란 듯 은발여인의 아미가 살짝 올라갔다.

외진 산골의 양치기 소년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설령 글을 읽을 줄 안다 해도 흥밋거리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패설(稗說;소설) 따위일 것으로 지레짐작했었다.

헌데 소년이 읽고 있었던 건 상당히 난해한 사서(史書;역사책)였다.

괜잖다면 죽서기년을 읽은 감상을 들어볼까?”

은발여인의 말에 소년은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귀엽네.)

소년의 순진하고도 해맑은 미소를 접한 은발여인은 주책맞게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겉보기에는 젊지만 사실 은발여인은 소년에게 어머니뻘인 중년의 나이다.

그만큼 소년에게는 보는 사람, 특히 여자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었다.

"죽서기년이 어떤 책인지는 알고 계신 듯하네요."

드물고 진귀한 책이지만 아줌마도 읽어본 적이 있단다.”

은발여인은 소년의 음성이 맑은 샘물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용모가 수려할 뿐 아니라 음성도 해맑아서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죽서기년은 전국시대에 지어졌으나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모조리 유실되었었다. 그러다가 서진(西晉) 시절 도굴당한 무덤에서 다시 발견되었으며, 죽간에 쓰여진 사서라 죽서기년이라는 이름이 붙었지.”

은발여인은 죽서기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말했다.

죽서기년의 내용은 정사로 믿어지는 좌전(左傳)이나 사기(史記)와 사뭇 다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많이 다르지요. 성군으로 알려진 순()이 사실은 요()를 죽이고 제위를 빼앗았다거나 그 순을 또 우()가 쳐서 죽였다던지...”

은발여인의 물음에 소년은 죽서기년을 보며 대답했다.

죽서기년의 그같은 내용을 믿느냐?”

믿는다 안 믿는다 단언하기에는 저의 공부가 너무 빈약하군요.”

소년의 대답이 은발여인을 탄복시켰다. 한창 혈기 방장할 나이임에도 소년은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죽서기년의 연원을 아시는 걸 보니 아주머니도 독서를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소년이 아이답지 않게 진지한 눈으로 은발여인을 올려다보았다.

"몰론이다. 나도 한때는 독서로 식음을 전폐하던 때가 있었단다."

은발여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책을 많이 갖고 계시겠군요?"

소년은 부러운 눈빛을 지었다.

소년의 그 모습에 은발여인은 자신의 처지도 잊고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호호호! 물론이다. 이 아주머니의 서고에는 줄잡아 십만서(十萬書) 정도는 있단다."

"!"

소년은 정말 부러운 표정을 지으며 탄성을 발했다.

그때였다.

삐익!

멀리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

순간 은발여인의 부드럽던 눈빛이 파랗게 번뜩였다.

(이 분... 쫓기고 있구나!)

표정을 차갑게 일변시키며 호각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는 은발여인의 모습에서 소년은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담세황(潭世皇)!"

은발여인은 이를 바득 갈며 싸늘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를 추격하는 자의 이름이 담세황인 듯 했다.

"이 주위는 탁 트인 초원이라 은신하실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습니다만..."

소년은 은발여인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건넸다.

은발여인은 흠칫하며 소년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 위는 녹음이 짙어 방해받지 않고 쉬실만하실 것입니다."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기대앉은 나무의 위쪽을 가리켰다.

은발여인은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해보자꾸나."

!

이어 그녀는 소리없이 나무 위쪽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은발여인의 유령같은 경신법에 소년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다시 죽서기년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년은 다시 사람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언제 나타났는지 소년 앞에는 한 명의 장한이 서 있었다.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인데 눈에 번쩍 뜨일 정도로 영준한 용모를 지녔다.

또 육척 가까운 훤칠한 몸에는 화려한 금포(錦袍)가 걸쳐져 있다.

여자라면 이 금포장한을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금포장한의 눈빛이 음침하고 스산하여 결코 좋은 심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주변에서 은발의 여자를 보지 못했느냐?"

금포장한은 음산한 표정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못 봤어요."

소년은 살래 고개를 저었다.

설령 누가 주위를 지나갔다 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예요. 독서 중에는 바로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모르는 성격인지라...”

"그래?"

금포장한은 스산하게 말하며 소년을 노려보았다.

(마치 독사같은 눈빛이다.)

금포장한의 시선을 접한 소년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금포장한을 마주 바라보았다.

“...!”

“...!”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놈은 정말 옥여상(玉如霜) 그년을 못 본 것 같다.)

금포장한의 미간이 모아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에서 추호의 동요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다면 저렇게 태연할 수는 없지.)

금포장한은 내심 중얼거리며 돌아서려 했다.

번쩍!

헌데 돌아서려던 그 자의 눈가로 한광이 스쳤다.

(저 놈, 놀라운 근골(筋骨)을 지녔다.)

금포장한은 비로소 소년이 근골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비록 심성은 올바르지 못해도 금포장한은 탁월한 자질과 안목을 지니고 있다.

덕분에 그자는 양치기 소년의 근골이 무공을 연마하기에 더 할 수 없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무애지신(無碍之身)! 어쩌면 전설 속의 무애지신일지도 모른다.)

금포장한의 눈가로 불꽃이 튀었다.

 

무애지신은 이름 그대로 아무런 장애가 없는 몸을 말한다.

정확히는 몸속의 모든 경맥이 막힘없이 뚫려있는 특이하고도 진귀한 체질을 뜻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모든 경맥이 열려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경맥은 굳어지고 노폐물이 쌓여 진기의 유통에 장애가 생긴다.

그 때문에 내공이 일정 경지에 이르면 더 이상 증진되지 못한다.

진기의 유통도 차질을 빚어 내공을 구사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생기기도 한다.

생사현관(生死玄關)이라고도 불리는 임독이맥(任督二脈)의 타통이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임독이맥이 뚫린 자는 진기의 흐름에 막힘이 없어 내공을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게 된다.

무애지신은 그 임독이맥을 비롯한 모든 경맥이 뚫려있는 보기 드문 체질이다.

헌데 일개 양치기 소년의 몸이 무애지신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금포장한이 소스라치게 놀란 이유다.

 

(저놈이 정말 무애지신의 소유자라면 장차 나 담세황이 대업(大業)을 이루는 데 치명적인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금포장한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소년에게서는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포장한은 소년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일단 소년이 무공을 익히면 단 시일 내에 금포장한 자신을 뛰어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둑!

금포장한의 움켜쥔 두 손에 불끈 힘이 가해졌다. 소년의 뛰어난 근골을 알아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살심이 일어난 것이다.

“...”

소년은 금포장한의 그같은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죽서기년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근은 미리 미리 제거해두는 게 최선이다.)

금포장한의 입가로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절체절명!

금포장한의 손이 한 차례 휘둘러지기만 해도 소년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루주(樓主)! 여기 계셨구려.”

휘익!

걸걸한 외침과 함께 금포장한 뒤로 한명의 장한이 날아 내렸다. 굶주린 늑대처럼 흉포하고 음침한 인상의 중년인인데 한쪽 눈이 먼 애꾸다.

무슨 일이오 독안랑(獨眼狼)?”

막 소년에게 살수를 쓰려던 금포장한은 오른손에 모았던 공력을 풀어버리며 돌아보았다.

죽서기년을 읽고 있던 소년도 고개를 들어 애꾸눈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사신각의 인간백정들이 근처에서 다수 발견되었소이다.”

왼쪽 눈에 안대를 댄, 독안랑이란 중년인이 포권하며 말했다.

사신각? 그 살인귀들이 무슨 일로 기련산에 몰려온 거요?”

독안랑의 보고를 받은 금포장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