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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혀()와 검()의 합작

 

 

끼끼끼!

어디선가 미미한 금속성이 들렸다.

츠으으! 스스스!

그러자 아름드리 물푸레나무와 수양버들이 주변을 가리고 있는 연못이 짙은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녁 짓는 연기처럼 피어오른 그 안개는 삽시에 연못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그긍! 촤아아!

뒤이어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연못 속에서 석탑(石塔) 하나가 용이 승천하는 듯한 기세로 솟아올랐다.

보천검문 후원에 자리한 고룡지(古龍池)라는 이름의 이 연못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다.

고룡지는 보천검문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항간에는 오래 된 용이 산다고 전해진다.

그 고룡지의 수면 위로 치솟은 석탑은 나선형으로 뒤틀려 있어서 산양의 뿔을 연상케 한다.

높이 오장(五丈;15미터) 정도인 석탑은 아래위로 분리된 두 개의 큰 바위를 겹쳐서 만든 것이었다.

그그긍!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석탑의 윗부분이 맷돌처럼 한 바퀴 돌아갔다.

그러자 석탑의 아래 부분에 건장한 사람이 서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 크기의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휘익!

연못가에 서있던 보천검객 양시우가 먼저 몸을 날렸다.

스윽!

장광유설 주대곤도 발끝으로 땅을 찍고 가볍게 날아올랐다. 경신술의 달인이라는 무림의 평판대로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주대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양시우의 등에 닿을 듯 말듯 바짝 따라붙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끼끼끼!

주대곤의 뒤쪽에서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동굴 입구가 사라져 버렸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동굴 안은 먹물 속인 듯 깜깜하여 눈앞에 댄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두렵지 않은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양시우가 교묘하게 손을 놀려 주대곤의 맥문(脈門)을 잡았다.

손목에 자리한 맥문은 주요한 사혈(死穴)중 하나다. 약하게 누르면 사지가 마비되는 정도지만 강하게 누르면 명줄이 끊어진다.

맥문을 잡힌 순간 주대곤은 흠칫했으나 이내 태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입만 조심하면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소이다.”

완전히 밀폐된 이곳에서는 빠른 발도 소용없다.

마음만 먹으면 양시우가 주대곤을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쉽다.

그러나 주대곤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양시우도 그를 죽여 보았자 아무 이득이 없다.

주대곤이야말로 화()는 입에서 나온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

슬그머니 주대곤의 맥문을 놓아준 양시우가 화섭자로 불을 켰다.

불이 밝혀지자 드러난 것은 넓이가 두 평도 채 되지 않는 정방형의 작은 석실이었다.

한데 석실 벽에는 거칠고 투박한 솜씨로 검무(劒舞)를 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선이 굵고 거칠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강렬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사면에 각기 하나씩 그려져서 네 가지의 모습으로 검무를 추는 사람은 짙은 검미가 치켜 올라간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검술의 비결(秘訣)이다!)

검술을 익힌 바는 없지만 주대곤은 석벽의 그림들이 세상에 보기 드문 절세적인 검법의 이치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주대곤은 자신도 모르게 힐끗 양시우를 쳐다보았다.

양시우는 주대곤의 눈치를 알아차리고는 코웃음을 쳤다.

이 그림들은 내 보천검법(補天劒法)의 모체가 되는 것일세. 노부는 수십 년을 연구하고도 겨우 십육 식의 보천검법을 만들어낸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네. 자네가 보고 알 수 있을 것같으면 보아도 무방하네.”

너 따위는 아무리 보아도 그림 속에 숨은 깊은 뜻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대곤은 등골에 찬바람이 이는 것을 느꼈다.

양시우가 자신의 무공의 연원이 되는 곳으로 데려와 검법의 도해(圖解)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제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양시우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들인 일왕일협삼괴칠절(一王一俠三怪七絶)에는 속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이십사 세의 젊은 나이에 보천검문을 세웠을 뿐 아니라, 보천검법이라는 검법을 창안하여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양시우의 무공이 일왕(一王), 일협(一俠)에게는 미치지 못해도 삼괴(三怪), 칠절(七絶)과 비교하면 그리 기울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다.

주대곤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비밀이 양시우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충족시킨다 하더라도 자신이 양시우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납득시키는데 실패한다면 돌아올 것은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주대곤이 지금 벌이고 있는 것은 목숨을 판돈으로 놓고 벌이는 한판의 도박인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나눠보세.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해서 타협을 해보도록 하세.”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하는 양시우의 말에 주대곤은 웃으며 대답했다.

문주께 이런 대범한 면이 있으시기에 소생이 굳이 삼괴도 칠절도 아닌 문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노부가 정말 듣고 싶어 하는 것만 이야기하게.”

양시우가 귀찮다는 듯이 주대곤의 말을 딱 잘랐다.

주대곤도 양시우와 마주 앉으며 표정을 진지하게 고쳤다.

문주께선 북두문(北斗門)이란 문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금시초문이네.”

양시우는 자신의 견문이 짧음을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는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이곳 고룡지에서 기연을 만나 수련에 매진해왔다.

보천검법을 창안하고 수련하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던 탓에 무림에 대한 양시우의 지식은 일천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주대곤이 거론한 북두문은 무림에서도 아는 사람이 드문 전설 속의 문파다.

양시우가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소생은 어렸을 때 은사(恩師)로부터 북두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중 대충 기억나는 건 이런 것들입니다.”

주대곤은 자신을 가르쳤던 사부 은일우사(隱逸羽士)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주대곤의 사부 은일우사는 무림에서 명망이 드높은 현자(賢者)였다.

주대곤이 거친 무림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사부인 은일우사의 음덕 덕분인지도 모른다.

은일우사는 주대곤이 팔구 세 정도 되었을 때 북두문이라는 문파와 관련된 고사를 이야기 해주었었다.

 

***

 

이백오십여 년 전, 황제(皇帝)의 신분을 버리고 서장(西藏) 포달랍궁(布達拉宮)으로 가서 승려가 된 인물이 있었다.

 

-석경당(石敬瑭)!

 

오대십국(五代十國)중 후진(後晉)의 시조인 석경당이 바로 그다.

후진을 세운 석경당은 재위 칠년 만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결심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형의 아들, 즉 조카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포달랍궁을 찾아가 출가했던 것이다.

그후 이십여 년 동안 석경당은 포달랍궁의 진산절예를 모두 익힌 후 중원으로 돌아왔다.

헌데 그는 중원으로 오기 전에 포달랍궁의 당시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수십 명의 사형제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들이 자신의 행보를 가로막을까봐 미리 손을 쓴 것이다.

석경당이 다시 중원 땅을 밟았을 때, 포달랍궁에는 고수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중원으로 돌아온 석경당은 황제였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에게 마승(魔僧)이라는 별호를 붙였다.

그리고는 중원을 대표하는 문파라고 할 수 있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비롯하여 열 두 개의 비밀문파와 열 네 개의 명문대파를 방문하여 모두 굴복시켰다.

후진의 고조(高祖) 석경당, 아니 마승 석경당이 벌인 그 일은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이백오십여 년 전 삼십육 개의 문파들이 겪은 수모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바가 있네.”

양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승 석경당이 일으켰던 풍파는 워낙 유명해서 견문이 얕은 양시우도 알고 있었다.

삼십육문파의 수뇌들은 숭산(崇山)에 모여 마승 석경당에게 무릎을 꿇고 문파의 보전을 빌어야만 했다지?”

그렇소이다. 마승 석경당은 숭산에 무림성궁(武林聖宮)을 짓고 무림황제(武林皇帝)가 되고자 했었소이다. 한데...”

주대곤의 말이 이어졌다.

 

삼십육문파 수뇌들의 무릎을 꿇려 기고만장하던 마승 석경당은 그 직후 갑자기 종적을 감춰버렸었다.

양시우가 알고 있는 고사는 거기까지다.

그리고 무림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 후의 내막은 이러했다.

마승 석경당이 무림황제로 등극하려는 현장에 그때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신비한 노인이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 신비노인은 단 일장(一掌)에 마승 석경당을 쓰러트렸다.

겨우 목숨을 건진 마승 석경당은 그대로 달아나 두 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삼십육문파의 수뇌들은 그 신비노인에게 북두호천패(北斗護天牌), <북두칠성이 하늘의 도리를 지켰다.>라는 뜻을 지닌 영패를 만들어 바치면서 한 가지 서약을 했소이다.”

주대곤은 여기까지 말하고 숨을 한번 들이켰다.

양시우도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북두호천패를 지닌 사람에게는 한 해에 단 한 번, 어떤 부탁이든지 들어주겠다고! 비록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문파가 멸문을 당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

양시우는 극도의 놀라움과 흥분으로 침묵했다.

강호 무림의 기둥인 삼십육문파에 대해 일 년에 단 한 차례일망정 생사여탈(生死與奪)과도 같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북두호천패...!

그것을 지닌다는 게 무림의 지존(至尊)이 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본 적도 없는 북두호천패가 양시우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마승 석경당을 물리치고 북두호천패를 얻었던 노인은 북두문이라는 문파의 당시 문주였던 북두노조(北斗老祖)였소이다.”

주대곤은 양시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현 무림에서 일왕(一王)으로 불리는 금포염왕 조천영은 바로 그 북두문의 당대문주이외다.”

“...!”

양시우는 가슴을 둔기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금포염왕이란 그 한마디가 귓가에 들려온 순간 양시우의 몸은 마치 돌처럼 굳어져 버리는 듯했다.

 

금포염왕...!

수십 년 간 무림을 굴러다니면서도 애써 그의 존재를 모른 척하고, 그와 부딪힐 만한 언행 하나조차 감히 범하지 못했던 양시우다.

자신이 무림칠절(武林七絶)이나 무림삼괴(武林三怪)에 비해 크게 뒤질 것이 없다고 자부하다가도 금포염왕에 생각이 이르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금포염왕의 일초를 받아낸 인물이 있었던가?

금포염왕의 손아래에서 목숨을 건진 자가 있었던가?

금포염왕과 맞섰다가 도망칠 수 있었던 자가 있었던가?

금포염왕이란 말에는 절대(絶對)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한 것이 아니던가?

그 금포염왕이 바로 북두문의 당대 문주였던 것이다. 무림황제를 꿈꿨던 마승 석경당을 단장(單掌)으로 물리친 북두노조의 후손인...

양시우는 금포염왕이라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더욱 더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일곱 층으로 쌓여있는 산, 바로 그 산에서 소생은 북두문의 표기를 발견했소이다. 북두문의 힘은 그 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소이다.”

주대곤이 조심스럽게 말을 마쳤다.

양시우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마승 석경당에게 무릎을 꿇은 것은 수치스런 일이라 삼십육문파 중 어느 누구도 자세한 내막을 발설하지는 않았을 터! 자네는 어떻게 해서 당시의 비사를 그처럼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인가?”

양시우의 눈이 칼날처럼 예리한 빛을 발했다.

스승으로부터 들었다지만 그것만으로 자네 말을 믿기가 어렵네. 자네는 원래 입으로 사는 사람이니...”

주대곤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소생의 은사이셨던 은일우사께서는 삼십육문파 중 문선곡(文仙谷)의 곡주였소이다.”

그랬군. 자네의 경신술이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라 기이하게 생각했었지.”

양시우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문선곡이라면 지금은 그 명맥(命脈)조차 흐릿해져 버렸지만 기관진식을 비롯하여 갖가지 기예의 달인들만이 살고 있던 특이한 문파였다.

양시우가 주대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손이 깊은 의미를 가지고 굳게 잡혔다.

()와 검(), 지혜와 힘의 합작이었다.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일기 시작한 풍운의 서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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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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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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