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본 무협지의 추억/천신폭풍탑(天神暴風塔)'에 해당되는 글 58건

  1. 2020.07.18 [천신폭풍탑] 제 35장 고검장의 봄 (완결)
  2. 2020.07.17 [천신폭풍탑] 제 34장 뱀의 뱃속으로 들어간 두꺼비 2
  3. 2020.07.16 [천신폭풍탑] 제 34장 뱀의 뱃속으로 들어간 두꺼비 1
  4. 2020.07.14 [천신폭풍탑] 제 33장 출세! 은세정검회 2
  5. 2020.07.13 [천신폭풍탑] 제 33장 출세! 은세정검회 1
  6. 2020.07.12 [천신폭풍탑] 제 32장 마지막 고리를 풀다 2
  7. 2020.07.11 [천신폭풍탑] 제 32장 마지막 고리를 풀다 1
  8. 2020.07.10 [천신폭풍탑] 제 31장 토사구팽 2
  9. 2020.07.08 [천신폭풍탑] 제 31장 토사구팽 1
  10. 2020.07.07 [천신폭풍탑] 제 30장 수라장이 된 무림대회 2
  11. 2020.07.06 [천신폭풍탑] 제 30장 수라장이 된 무림대회 1
  12. 2020.07.05 [천신폭풍탑] 제 29장 귀산의 무림대회 3
  13. 2020.07.04 [천신폭풍탑] 제 29장 귀산의 무림대회 2
  14. 2020.07.03 [천신폭풍탑] 제 29장 귀산의 무림대회 1
  15. 2020.07.02 [천신폭풍탑] 제 28장 거지 소굴을 찾아온 미녀들
  16. 2020.07.01 [천신폭풍탑] 제 27장 붓속에 숨겨진 재산 2
  17. 2020.06.30 [천신폭풍탑] 제 27장 붓 속에 숨겨진 재산 1
  18. 2020.06.29 [천신폭풍탑] 제 26장 강상봉적
  19. 2020.06.28 [천신폭풍탑] 제 25장 백검보의 방문객 2
  20. 2020.06.26 [천신폭풍탑] 제 25장 백검보의 방문객 1
  21. 2020.06.25 [천신폭풍탑] 제 24장 고수척살대
  22. 2020.06.23 [천신폭풍탑] 제 23장 혈포단객 2
  23. 2020.06.22 [천신폭풍탑] 제 23장 혈포단객 1
  24. 2020.06.20 [천신폭풍탑] 제 22장 사람을 찾습니다 2
  25. 2020.06.19 [천신폭풍탑] 제 22장 사람을 찾습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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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十五 章

 

        古劒莊의 봄

 

 

 

 

 

무당산 고검장,

봄나비가 꽃을 찾아날아드는 어느날,

무형도객은 노인 한 사람을 데리고 고검장으로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장인어른!”

석두공은 폐허가 된 고검장을 고치느라고 지붕에 올라가 있던 중에 그를 맞았다.

[이사람은 누굽니까?]

석두공은 조금 모잘라 보이는 노인을 바라보면서 무형도객에게 물었다.

무형도객이 웃으며 말했다.

[좀 모자란 것 같지가 않은가?]

[그렇게 보입니다.]

[몇 년 전의 자네같지 않은가?]

[하하하하...]

석두공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좀 비슷한 데가 있군요. 하지만 저보다 중증인 것같습니다.]

[그럴 수 밖에, 자네와 같은 곳에서 생산됐으니까.]

무형도객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안에서 백란이 뛰어나오며 무형도객에게 인사했다.

[아버님!]

석두공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손뼉을 치고 웃었다.

[하하하! 독왕동의 갈영감님이 손을 거친 모양이군요. 대체 누굽니까? ]

[해천월일세.]

무형도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마디 던지고 딸을 따라 들어가버렸다.

석두공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의 앞에서 해천월이 입을 헤벌리고 웃고 있었다.

배가 남산만하게 부른 황자봉이 뒤뚱거리며 걸어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신분이 아주 높은 하인을 부리게 되었군요.]

[나...난 부리지 않겠소. 조부님이나 사부님께 보내 버리시오.]

석두공은 질린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뺑소니를 쳤다.

[이놈아! 내가 젊은 너를 두고 왜 늙은 하인을 부리겠느냐? 나도 하지 않겠다.]

고검문주 섭군천이 버럭 소리쳤다.

석두공은 달아나면서 말했다.

[그럼 사부님께서 하시던가!]

[난 아직 젊다.]

폭풍무존은 정원을 손질하다가 말했다.

[다들 이상하군요. 하인을 왜 마다하세요? 그럼 저 하인은 제것이니 아무도 손대지 말아요.]

장지연이 빨래감을 들고 나오다가 말했다.

그녀는 빨래통을 놓고 해천월을 불러 명령했다.

[이봐! 이것을 들고 저쪽 우물에 가서 빨아와! 늦으면 혼날 줄 알아!]

섭군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집에서 용기있는 사람은 셋째 뿐인 모양이다.]

그때 무형도객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갔던 백란의 앙칼진 음성이 터져 나왔다.

[뭐라구요? 아버진 하인이 생겼으면 제게 주실 일이지 다른 사람을 줘요? 딸을 조금도 중히 여기지 않는군요. 씩씩... 아버진 늙지도 않을 줄 아세요? 아들도 없으면서...]

섭군천은 입을 다물고 무너진 전각을 돌아가버렸다.

딸의 성깔에 당황한 무형도객의 귓전으로 폭풍무존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내가 딸보다 오래 사는 방법을 전해주겠네.]

[차라리 구박받다가 일찍 죽겠습니다.]

일파의 종주였던 하인이 고검장에 들어오면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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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4장

 

           뱀의 뱃속으로 들어간 두꺼비 (2)

 

 

 

마중천의 원형광장,

석두공과 금사종을 위시하여 무형도객과 백란을 비롯한 은세정검회의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무형도객이 중얼거렸다.

[입구에 적힌 그말에 독존패왕궁의 궁주가 조금이라도 심력을 소모했으면 좋으련만...]

[그들이 이곳까지 왔을 땐 육천 명 중에서 반이 남지 않았을 거예요. 이곳의 기관들은 모두 통천조사께서 오늘을 대비하여 직접 설계하신 거니까요.]

[그래도 삼천명과 이천 명의 대결이다. 쉽지 않다.]

[죽도록 싸워봐야겠죠.]

백란이 말했다.

석두공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했다.

[독존패왕궁의 궁주는 제가 상대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궁주를 제거할 때까지 공격하기보다는 주로 방어만 하십시오. 엄중히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궁주만 죽고 나면 나머지는 지리멸렬하게 될 것입니다.]

쿵! 쿵!

쿠쿵!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가 원형광장으로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오늘의 일전에 자신들의 생사는 물론이고 무림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검을 닦고 도를 점검했다.

석두공은 중앙에 있는 폭풍무존의 상을 보았다. 그것은 폭풍무존의 웅지를 꺾은데 대한 죄책감에서 폭풍무존의 사부인 통천조사께서 세운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나는 그녀를 과연 죽일 수 있을까?)

석두공은 석상앞에서 치루었던 자봉과의 사랑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마음을 어떻게 정할 수가 없었다.

비록 그의 마음에 한자락에 백란이 있고 동복신과 동적선이 점지해놓은 장지연이 있기는 했지만 진정 그의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봉이었다.

그 와중에도,

쿵쿵쿵!

기관이 파괴되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이천 오백여 수하들이 기관에 의해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아직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흐흐흐! 놈들이 이런 함정을 팔 줄이야! 상관없다. 안으로 들어간 놈들은 모두 이천여 명, 반만 들어가도 우리의 승리는 필연적이다.]

은일의 보고에 금포노인은 분노하면서도 다가올 승리를 생각하며 화를 억눌렀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황자강이 완전히 길을 열었습니다. 광장에서 은세정검회 놈들과 혈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은이! 즉시 그를 지원해라. 모두 황자강이 간 길로 해서 들어간다.]

금포노인은 혈옥교에서 소리쳤다.

교자꾼들과 앞에선 심제을과 잔혼살객은 길게 난 석로를 따라서 달려갔다.

한데 마중천의 기관은 가공하기 그지 없었다. 입구에서부터 다시 기관들은 차단되어 오면서 뒤늦게 들어온 자들을 살상하고 있었다.

금포노인은 광장으로 나왔을때 은일로 부터 수하들의 수는 삼천으로 줄었다는 보고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기관은 다시 완전히 폐쇄되어 버렸다.

금포노인은 초조함은 분노로써 폭발했다.

광장에는 은세정검회의 고수들이 석상을 둘러싸고 원진을 치고 있었으며 독존패왕궁의 고수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수적으로는 삼대이의 우세,

그러나 독존패왕궁의 고수들은 죽음의 기관을 뚫고 오느라고 상처를 입은 자들이 적지 않았다.

금포노인이 소리쳤다.

[은세정검회의 천주는 누구냐?]

[천주는 이곳에 오지 않았소. 본인은 천주대리인일 뿐이오.]

석두공이 나서며 말했다.

[뭣이!]

금포노인이 벼락같은 일갈을 했다.

[크윽! 큭!]

양측의 고수들 중에서 수십 명이 피를 토하며 죽었다. 나머지 고수들도 내상을 입거나 했으며 영향을 받지 않은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크하하하! 좋다 네놈들을 모두 죽인다면 천주가 제발로 본좌를 찾아오겠지.]

갑자기 금포노인은 광소를 터뜨렸다.

석두공은 그의 광소가 또다시 은세정검회의 고수들을 상하게 할 것이 염려되어 고함쳤다.

[멈추시오!]

동시에 그는 천왕저를 뽑아들며 선공을 취했다.

[애송이놈!]

금포노인은 혈옥교에서 나오지 않고 소리쳤다.

석두공은 몸으로 폭풍같은 강기가 뿜어내며 혈옥교를 향해 달려 갔다.

[천신폭풍보!]

 

× × ×

 

[안되겠어요. 기계인간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어요.]

백란이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석두공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석두공은 천신폭풍보를 펼쳐서 금포노인을 상대하고 있지만 그의 천신폭풍보는 아직도 완전한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는지 금포노인의 괴이한 무공에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천신폭풍보의 강기를 흩트리며 파고드는 기이한 기운을 막아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은세정검회측의 완전한 열세였다.

금사종이 발군의 실력으로 독존패왕궁의 고수들을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다른 고수들은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열개의 기계인간들의 끔찍한 공격은 개개인이 고수들인 은세정검회의 사람들 마저도 끊임없이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은세정검회의 전멸은 불을 보듯이 빤해 보였다.

단혼검을 번득이며 황자강의 무공을 막아내는 금사종! 이 혈전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입을 열어 말할 틈은 없었다.

황자강의 무공은 금사종과 막상막하의 경지, 온정신을 그에게만 모으지 않을 수 없었다.

석두공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음공을 사용하시오!]

그가 버럭 외쳤다.

기계인간들의 약점은 소리와 진동에 약하다는 것을 독왕동주 갈천상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 석두공이다. 그것이 이렇게 사용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쿵!

그 말을 내뱉는 댓가로 석두공의 몸은 실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석벽에 박혀버렸다.

[아악!]

백란이 비명을 질렀다.

[크하하하... ]

금포노인이 광소를 터뜨렸다.

그때였다.

[형님! 형님이 독존패왕궁의 궁주였을 줄은 몰랐습니다.]

갑자기 은세정검회의 고수들 틈에서 만박노조가 나오며 말했다.

금포노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형님이 숨겨진 힘을 가지고 계신 줄은 알았지만 설마 독존패왕궁일 줄은...]

[은일!]

금포노인은 은일을 소리쳐 불렀다.

[왜 만박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보고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은일은 조용했다. 항상 그가 말하면 어디선가 답하던 은일은 대답이 없었다.

그때였다.

그그긍!

광장의 여러 석문 중의 하나가 열렸다.

[은일과 은이등은 모두 제가 죽였어요.]

흑봉, 아니 자봉이 걸어나오면서 말했다.

[네 네가... ]

[제가 조금 늦었군요. 할아버지!]

자봉은 금포노인의 말을 무시하고 황자강에게 말했다.

황자강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마중천은 의사들은 독존패왕궁을 공격하라!]

황자강의 울부짖는 듯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크아아악! 크아!

 

함성이 터져 나오며 마중천의 고수들이 검을 돌려 독존패왕궁의 고수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명이 터져 나오고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버렸다.

기계인간들은 백란이 옥퉁소로 펼친 음공에 파괴되어버렸고 금포노인은 만박과 자봉을 번갈아 보면서 분노에 떨었다.

[네 네가... 이 년...]

[난 오늘을 위해 심장에 화살을 꽂고 이기소혼곡에 던져졌던 거예요. 나를 원망하지 말아요.]

자봉은 금포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죽어라!]

금포노인이 일갈하며 그녀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미 심력이 흩어지고 정신이 산만해진 상태라 그의 공격은 석두공을 상대할 때만큼 예리하지 못했다.

자봉은 금포노인과 똑같은 무공을 사용했다.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기에 선택되어 마굴로 던져졌던 그녀의 무공은 석두공과 버금갈 정도로 뛰어났다.

금포노인을 맞아 열세이기는 하지만 쉽게 패하지 않았다.

금포노인은 상처입은 야수처럼 길길이 뛰었지만 자봉을 금방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황자강과 금사종이 금포노인을 합공했다.

무형도객과 분노한 백란이 가세했다.

그러나 금포노인도 그들을 쉽게 죽일 수 없는 반면에 그들도 금포노인을 상하게 할 수가 없었다.

돌연 자봉의 손에 은빛 화살이 쥐어지고, 손에서 커다란 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나타났을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한데 그 찰라적인 순간에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은빛 화살, 은세추혼전이 사라졌다.

은세추혼전은 어느새 금포노인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가 있었다.

[크아악!]

금포노인의 몸이 충격으로 석벽까지 튕겨갔다.

[크윽!]

하지만 그는 피를 흘리면서 은세추혼전을 뽑아서 꺾어버렸다.

그때였다.

펑!

갑자기 그의 뒤쪽에 있던 석벽이 터지면서 거무튀튀한 방망이가 그의 머리를 쳤다.

석두공의 천왕저였다.

퍽!

금포노인의 두개골이 수박처럼 깨어져 버렸다. 비명도 없이 그의 머리없는 몸이 떨어져 내렸다.

우두둑!

석두공이 벽을 뚫고 나왔다. 피에 젖은 얼굴이었지만 천신같은 기도가 흐르고 있었다.

“....!”

“....!”

사방에 고요가 찾아들었다.

금포노인이 죽자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했다.

만박노조가 독존패왕궁의 궁주의 시신을 수습했다.

[형님... ]

만인의 지탄을 받는 독존패왕궁의 궁주이지만 그에게는 하나뿐인 친형이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난장이 같은 그를 성심으로 돌봐준 단 한사람이었다.

은세정검회의 고수들과 마중천의 고수들은 석상 아래의 비밀통로를 통해서 하나둘 빠져나갔다.

마중천과 자봉은 독존패왕궁이라는 뱀을 죽이기 위해 배속으로 들어갔던 두꺼비였던 것이다.

오랜 기간을 두고 공작해온 은세정검회의 회심작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석두공은 부러져 있는 은세추혼전을 보면서 착찹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세추혼전을 가진 여인을 죽여라!

 

은세정검회의 천주인 황불식의 음성이 귓전에 맴돌고 있었다.

설마 그가 죽이라는 여인이 자봉일 줄은 몰랐다.

석두공은 자봉에게로 다가갔다.

자봉이 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석두공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은빛화살이 쥐어졌다. 황불식이 준 것이었다.

[난 못하겠소. 천주 차라리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석두공은 나직히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비볐다.

푸스스스!

은빛화살이 그의 손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잔혼살객과 부운청풍객이 처참한 모습으로 혈도가 찍힌 채 끌려나가고 있었다.

석두공은 자봉의 손에 입을 맞춘후 비밀통로로 달려갔다.

어떤 사연이 있어 황불식이 자봉을 죽이라고 했는지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머리 속을 꽉 채웠다.

그는 황불식이 자신의 딸이 마굴(魔窟)에서 분명히 치욕을 당했으리라 생각하고 취했던 결정이 그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 또한 황불식의 몇 안되는 실수 중의 하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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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十四 章

 

          뱀의 뱃속으로 들어간 두꺼비 (1)

 

 

 

부르르...

금포노인의 불끈 움켜쥔 주먹이 떨렸다.

[드디어... 드디어 그들이 나타났다.]

그의 눈은 횃불처럼 빛을 발했으며,

음성은 격동으로 감정이 넘치고 있었다.

그가 소리쳤다.

[그들이 움직이는 곳으로 모두 따라가라. 은밀히... 그들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들의 뒤만 따르라. 그들은 한곳으로 모일 것이다. 구대문파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은세정검회만... 그들만 멸망시키면 된다. ]

[존명!]

허공의 일각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금포노인은 다시 소리쳤다.

[흑봉! 흑봉은 어디 있느냐?]

스스슷!

순간 그의 눈앞에서 흑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 그러면서도 천향국색의 미태는 얼음으로 빚은 꽃을 연상시켰다.

[검종맹으로 가라! 불일간에 검종맹은 무너진다. 그때 두 놈의 종을 구해서 내게로 데려오너라.]

[존명!]

흑봉이 포권을 한 후에 사라졌다.

금포노인의 흥분을 억제하기위해 다문 이빨 사이로 괴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흐흐흐... ]

그리고 마침내,

[으하하하하하하... ]

대전이 무너질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 * *

 

부운청풍객 심제을은 불안한 마음을 주저앉히기 위해 검종맹의 검종헌(劒宗軒)에서 소요하고 있었다.

(왜 이리 불안한가? 고립무원(孤立無援)인듯한 이 기분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나는 이미 천하를 손에 넣었는데... )

심제을은 불안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숨통이 막힐것 같은 고요가 그의 주변에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처럼 천하는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주인을 바꾸고 있었다.

얼음위에 선 심제을은 흐르는 물을 느낄 수가 없다.

그때 청의를 입은 검객이 심제을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잔혼각주께서 막무가내로 맹주님을 뵙겠다고 합니다.]

그의 호위무사들 중의 하나였다.

[잔혼살객이? 그는 어디에 있는가? ]

[검교에서 속하들이 막고 있습니다만 벌써 십 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심제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때였다.

파아아아!

검은 인영이 검종헌으로 쇄도해들며 소리쳤다.

[심맹주! 큰일났소.]

심제을은 차갑게 응수했다.

[멈춰라. 이 무슨 무례한 짓인가? 잔혼각주!]

그의 싸늘한 일갈에도 불구하고 달려온 잔혼살객은 마주 소리쳤다.

[빨리 피해야하오. 본인의 잔혼각은 이미 끝장났소. 주춧돌 하나 남지 못했소.]

잔혼살객의 전신에는 자신의 피와 타인의 피가 얼룩져있었다.

[겨우 나혼자 빠져나왔을 뿐이오. 그들이 이곳까지 추적... ]

심제을의 표정이 굳어졌다.

[적은 누구요?]

[구대문파... 그리고 또 다른 자들... ]

[구대문파!]

심제을이 경악하며 외쳤다.

그때였다.

휘이익!

그의 호위무사가 달려들어오면서 말했다.

[맹주! 피하십시오. 적이 침입... 윽!]

그자는 돌연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그의 등에서 가슴으로 삐죽이 화살이 관통해있었다.

심제을은 넋이 나간듯 중얼거렸다.

[소리없이 이곳까지 적이들어오다니... ]

검종헌은 검종맹에서도 중지(重地)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곳까지 적이 들어왔다는 것은 검종맹 전체가 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심제을은 불끈 화를 내며 소리쳤다.

[왜 전서구를 띄우지 않았소?]

[맹주는 지금 같으면 전서구를 띄울 수 있겠소?]

잔혼살객이 마주 소리쳤다.

화르르르!

갑자기 하늘이 환해졌다.

검종맹의 건물들이 외곽에서 부터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은 이내 검종헌을 둘러싸고 환(環)을 이룬 채 밀려들었다.

불길이 지나온 뒤에는 구대문파의 고수들이 구름처럼 따라오면서 안에서 뛰쳐 나오는 검종맹의 수하들을 속속들이 붙잡았다.

저항이 심한 자는 죽였으며 저항을 포기하는 자는 혈도를 찍어 한곳으로 가져갔다.

검종헌의 지붕 위에 올라가 상황을 살펴본 부운청풍객 심제을은 자신이 오만가지 음모와 배신으로 일으켜 세운 검종맹이 너무도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망연자실했다.

망연자실,

능력에 비해 욕심만 많은 자가 능력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취하는 표정, 심제을은 망연자실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마다 자신의 한계를 음모와 배신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뛰어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배신과 음모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같았다.

“....!”

언제부터인가 달빛 아래에 두둥실 떠있는 백의청년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공에서 그처럼 오래동안 체공(滯空)할 수 있는 경공만 하더라도 심제을이 미칠 수 있는 고수는 아니었다.

잔혼살객이 서서히 심제을의 뒤로 접근했다.

그는 패군(敗軍)의 부중(府中)에서 흔히 있곤하는 그런 일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스스로 장수의 목을 베어 적군에 갖다 바침으로써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잔혼각도 검종맹도 사상누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달천하를 끝으로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심제을의 목만 벤다면 후일을 기약할 수도...)

잔혼살객의 헐렁한 소매가 흔들리는 순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의미한 짓을 하지마라. 이곳엔 비밀통로가 있다.]

심제을의 허탈한 듯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잔혼살객은 흠칫하며 물러섰다.

확실히 심제을의 그보다 한수 위였다.

심제을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한 우리가 살아날 길은 없다. 비밀통로가 있어도 살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의 눈길을 쫓아서 잔혼살객의 눈이 하늘을 향했다.

달아래에서 달을 머리에 인듯이 허공에 둥실 떠있는 백의청년이 보였다.

우화등선하는 신선의 모습처럼 신비하며 세상의 모든 추악함을 벗어던진듯 탈속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잔혼살객의 그모습에서 오히려 죽음을 느꼈다. 그것은 전문적인 살수로서 훈련을 거쳤으며 삼마경 중의 살마경을 익힌 인물로서의 본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잔혼살객은 달빛이 살기가 되어 자신의 몸에 꽂히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꾸오오오...

꾸워어어...

하늘에서 괴이한 새울음이 들리며 검은 구름조각같은 것이 검종헌을 향해서 떨어졌다.

묵령신조...

만금(萬禽)의 왕이라는 마중천의 신물 묵령신조였다. 그 위에는 얼음으로 빚어깎은 듯한 빙기옥골의 여인이 타고 있었다.

“이 짐승이...!”

“물러가랏!”

놀란 잔혼살객과 부운청풍객 심제을은 혼신의 힘을 다해 묵령신조를 공격했다.

스파파팟!

극성에 이른 구가천마검법과 극성에 이른 혈월단천의 가공할 살공이 묵령신조를 향해 뻗어갔다.

하지만 묵령신조 위에 선녀처럼 우뚝 서있는 여인이 쌍장을 휘두르는 순간,

퍼퍼펑!

“커억!”

“크윽!”

그들은 칠공으로 피를 뿌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묵령신조가 그들의 밑을 스치고 가면서 날개위로 받쳐 올렸다.

꾸오오오...

묵령신조가 날아올랐다.

“....!”

선녀같은 여인의 눈동자가 잠시 허공에 떠있는 석두공에게 머물렀다.

묵령신조는 까마득히 솟구치며 사라져버렸다.

구우우우!

묵령신조가 나타나면서 울었던 울음소리와 날아오르면서 낸 울음소리가 마치 달아서 우는 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묵령신조... 자봉... ]

석두공의 두눈에 아련한 아픔이 스치고 지나갔다.

막으려고 했으면 막지 못할 것도 없었건만 그는 자봉이 부모의 원수를 구해가는 것을 보면서도 막지 않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과 열정적이었던 그녀와의 사랑을 떠올리며 석두공은 땅위로 내려갔다.

 

-묵령신조다! 묵령신조!

-묵령신조가 나타났다!

 

엄중한 규율속에서 생활해온 구대문파의 제자들도 만금지왕 묵령신조의 돌연한 등장에는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치고 있었다.

 

× × ×

 

[은세정검회의 위치가 파악됐습니다.]

허공의 일각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금포노인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그러리라도 예상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검종맹을 멸망시킨 후 구대문파는 각파로 돌아갔지만 일단의 인물들이 대파산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본궁의 모든 수하들이 거리를 두고 은밀히 뒤쫓고 있습니다.]

금포노인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본궁의 문을 열어라. 혈옥교(血玉轎)를 준비하라! 한명도 남김없이 대파산으로 간다.]

 

* * *

 

구화산의 이기소혼곡!

쿠쿠쿠쿠!

그곳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으며 계곡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기소혼곡을 내려다보고있던 금포노인이 중얼거렸다.

[다시는 이 저주받을 계곡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천하를 얻지 못하면 본좌가 천하를 버리겠다. 본좌가 있는 곳이 곧 독존패왕궁이다. 무림의 모든 곳이 독존패왕궁이 될 것이다.]

피처럼 붉은 혈옥교가 네명의 거한들에 의해서 들리워졌다.

그리고 혈옥교의 앞에는 놀랍게도 부운청풍객과 잔혼살객이 앞장서고 있었다. 천하를 웅패했던 그 호기는 그들의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금포노인은 일시나마 천하를 장악했던 그들을 종으로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혈옥교가 떠나가고 그 뒤를 몇 명의 인물들이 조용히 뒤따랐다.

저주받은 계곡 이기소혼곡에 웅크리고 있던 독존패왕궁은 이제 사라지고 천년을 기다려운 웅지를 펴기위해 모든 궁도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최고의 숙적이자 최후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은세정검회를 치기위해 대파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천하는 대파란 속에서 비틀거림을 보였다.

 

× × ×

 

대파산 용음곡(龍音谷),

길고 깊은 골짜기를 돌아부는 바람이 마치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해서 용음곡이라고 이름지워진 곳이다.

골짜기 깊숙한 곳 절벽의 중턱은 마치 깎아낸 듯 튀어나와 넓은 터를 만들어놓고 있다.

그리고 수천 명의 인물들이 그 주위에 포진해 있었다.

절벽으로 뚫어진 괴물의 입같은 동굴은 공같은 둥근 바위로 막혀져 있는데 그 위에 쓰여져 있는 글씨는 이러했다.

 

<마중천(魔重天)>

 

마중천!

놀랍게도 석구에는 사라졌던 마의 하늘이라는 마중천이 새겨져 있었다. 한때는 천하를 독패하다 시피했었던 마중천이...

또한 마중천이라는 큰 글자 아래로 작은 글씨들이 적혀있었다.

 

<마중천은 불멸이다.

누가 있어 마중천을 멸할 수 있으랴?

그렇게 자부했었건만 마중천을 붕괴할 수 있는 힘은 있었다.

외부에 적이 없으면 그때부터는 자기자신이 적이 된다는 사실을 조금만 일찍 알았어도 마중천이 이처럼 자중지란으로 멸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하나 마중천의 모든 것은 힘, 힘이야 말로 마중천의 모든 것,

힘은 여전히 존재하도다.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사용되는 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마중천의 힘이 천하를 질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야망이 있는자,

용기가 있는자,

또한 지혜가 있는자는 마중천으로 들라.

그대에게 천하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주리라.>

 

서명도 없으며 언제 썼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는 문구들, 그 앞에는 혈옥교가 놓여있고, 혈옥교 안에서 금포노인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황자강을 불러라! 마중천주 황자강을 불러라!]

[속하 황자강 대령했사옵니다.]

은발은염에 태양처럼 빛나는 얼굴을 가진 미염공 노인이 혈옥교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황자강! 본좌는 네가 마중천의 천주임을 생각하여 섭섭치 않은 대우를 해주었다. 마중천의 수하들은 독존패왕궁에 머물렀지만 너는 자유롭게 천하를 유람하며 지냈다. 한데, 황자강!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테냐? 설마하니 마중천이 은세정검회에 마도의 혼을 팔기라도 했단 말이냐? 이곳에 마중천이 있음을 어째서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어째서 은세정검회의 놈들이 이곳으로 들어갔단 말이냐?]

혈옥교 안의 음성은 호통이었다.

황자강이 머리를 조아리며 분개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에 우리 마중천의 뿌리가 이옷에 있을 줄은 속하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현명하신 궁주께서는 속하의 충정을 헤아려주십시오. 속하 역시 저 석구에 적힌 글을 보고 놀랐습니다만 우리 마중천의 역사는 불과 오백년입니다. 저 글은 적게 잡아도 천년은 되었습니다. 속하의 마중천은 후에 재 창건된 것이옵고, 그 뿌리는 이곳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은세정검회의 무리들이 마중천 선조들의 유산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하니 속하의 피가 끓어넘칩니다.]

[은일(隱一)! 황자강의 말이 사실이냐?]

혈옥교안의 음성이 물었다.

허공의 일각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 이곳은 천년이나 된 곳입니다. 황자강의 마중천과는 상관이 없는 것같습니다.]

[음... 좋다. 황자강!]

[속하 명을기다리오이다.]

[네가 앞장서서 길을 열어 충성을 보이도록 해라. 너의 결백을 믿어보겠다.]

[궁주를 위해서라면 속하의 늙은 목숨 개같이 버리겠소이다.]

쿵!

황자강은 이마를 땅에 찧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즉시 일어나서 석구에 쌍장을 갖다댔다.

두두두두...

황자강의 옷자락이 부풀어올랐다.

두두두!

그에 따라서 주변의 땅이 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석구는 밀리지 않고 그 충격으로 주위의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혈옥교에서 금포노인이 말했다.

[기관이 설치됐군. 황자강! 둥근 물건이니 돌려보도록 하라.]

[명을 받듭니다.]

황자강은 소리친 후 석구를 비스듬히 밀면서 조금씩 돌렸다.

그그그긍!

거대한 석구가 제자리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석두공은 더욱 힘을 가해서 석구를 돌렸다.

그그그긍!

석구에 새겨졌던 글자는 완전히 옆으로 말려 들어가 버렸다.

한데 그 순간에 다른 쪽에서 작은 틈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커졌다. 그것은 석구에 뚫어져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문을 막은 석구에 또다른 입구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입구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크기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이와 넓이였다.

그리고 석구의 다른 부분에 마치 정으로 파낸듯이 매끈하게 여인의 모양을 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황자강은 갑자기 강기를 발하여 석구의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서 여인이 만든 구멍마저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두개의 입구가 합쳐지며 제법 넓은 입구가 되었다.

황자강의 엄청난 공력에 독존패왕궁의 수하들도 혀를 내둘렀다.

황자강이 이마에 땀을 소매로 훔치며서 말했다.

[속하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황자강이 몸을 날려 들어가자 마중천에 속한 부하들이 뒤따라 들어갔다.

그들의 표정은 모두 비장한 신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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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장

 

             출세! 은세정검회 (2)

 

 

 

금사종과 장지연은 무당산으로 떠났다.

그들은 독비신검객 부부의 유골을 고검장으로 가지고 간 것이다.

석두공은 백란과 무형도객과 함께 백란의 스승을 만나기 위해 서쪽으로 갔다.

 

× × ×

 

태백산(太白山),

침엽수림의 바다가 펼쳐진 안쪽 깊숙한 곳에 한채의 석옥(石屋)이 자리잡고 있다.

무형도객과 백란은 석두공을 석옥 안으로 인도했다.

석옥의 안은 꽤 넓었으나 아무 것도 있지 않은 썰렁한 곳이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백란은 석두공을 입구쪽에 세워 둔 후에 석옥의 안쪽으로 들어가 벽에 일장을 가했다.

펑!

벽에는 아무 손상도 없고 오직 텅빈 공간을 울리는 진동음만이 터져 나왔다.

순간,

스르르르...

석두공과 무형도객이 서있던 바닥이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백란이 재빨리 돌아와 석두공의 곁에 섰다.

[여기가 은세정검회예요. 말에 조심해 주세요.]

석두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후좌우를 둘러보았다.

그가 서있는 바닥은 벌써 이십여 장 가까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사방 벽에는 커다란 검이 음각되어 있으며 그 검의 옆에는 각기 조그맣게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다.

무슨 검법의 초식인 것같았다.

바닥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석두공의 눈앞에 열려진 문이 보였다.

석두공은 문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자신이 그 내부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천정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형광의 운무가 떠있으며 하나의 도시처럼 형성되어 있는 지하의 건축...

석두공이 물었다.

[마중천과 이곳은 대체 어떤 관계요? ]

백란이 빠르게 말했다.

[마중천도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조금 후에 사부님께서 다 말씀해 주실 거예요.]

은세정검회도 마중천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석두공은 석상이 새워져 있는 원형의 광장에 이르기까지 불과 스무명 남짓한 사람을 보았을 뿐이다.

그 사람들도 대부분이 광장 근처에 몰려 있었다.

이곳의 건축은 마중천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원형 광장의 가운데에 서있는 석상이 마중천에서와 다를 뿐이었다.

마중천에는 이상하게도 폭풍무존의 석상이 서있었다.

그러나 이곳 은세정검회에는 키가 자그마한 노인의 석상이 세워져있었다.

또한 노인의 손에는 폭풍무존의 석상이 들고 있었던 별이 없었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본 은세정검회를 창설하신 시조이시네.]

[벽천검왕(劈天劍王)이신 모양이지요?]

[그렇네.]

무형도객은 원형광장에 달려있는 하나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 × ×

 

석두공은 침상에 누워있는 창백한 중년인의 눈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같았다.

중년인은 그를 보다가 가볍게 탄식했다.

[계산이 틀렸구나. 내 계산도 틀렸고 통천(通天) 사조님의 계산도 틀렸다. 사람의 재주로 하늘이 하는 것을 예측한다는 것은 이렇게 불가능하구나. 비슷하기는 하지만 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니... ]

[천주! 고정하십시오. 건강을 생각하셔야합니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병색이 완연한 중년인은 전설속의 정의수호세력인 은세정검회의 천주였다.

그의 이름은 황불식(黃不息)이며 무형도객의 사형이기도 했다.

그가 말했다.

[통천사조께서는 폭풍무존께서 생존해 계시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고, 나는 이 소협이 천신폭풍탑의 진전을 이엇으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네. 내 계산으로는 이 소협은 이미 죽은 것으로 나타났었지. 한데 이렇게 살아있을 줄이야.]

황불식은 석두공에게 말했다.

[소협은 아마도 네 군데서 인연을 맺어 무공을 완성했을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석두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협에게로 이어진 인연은 사실 이미 천년 전에 예정된 것이었네. 통천조사께서 대제자이신 폭풍무존께 명하시어 천신폭풍탑을 세우게 했고, 둘째 제자이신 섭홍장(葉弘壯)께는 고검문을 창설하시도록 하시었으며, 셋째 제자이신 동파로(董破露)께는 무림의 모든 절학을 연구하도록 하시었네. 그 셋째 제자분의 후손이 바로 동호천... 그분이시네. 또한 소림사에 정심신주를 전하여 소협에게 이어지게 했네.]

황불식의 말은 모두가 놀라울 뿐이었다.

천년을 내다보고 이루어 놓은 안배, 이 모든 것은 석두공을 위해서가 아닌, 궁극적으로는 독존패왕궁이란 가공할 세력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황불식이 말했다.

[당금 강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후에는 독존패왕궁(獨尊覇王宮)이 있네. 그들은 무림의 혈겁을 조성하여 난세로 몰고 감으로써 본 은세정검회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서로의 힘은 백중지세, 먼저 움직이는 쪽이 당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빤하네. 하지만, 본 은세정검회로서는 그것을 알면서도 이제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일세. 사람으로서 해야할 도리는 모두 끝냈으니 이제 결과를 하늘에 맞기고 나설 수 밖에 없네.]

[...!]

[...!]

석두공등은 놀라 말을 잊었다.

[안타까운 것은 본회에서는 독존패왕궁의 궁주를 상대할 만한 고수가 없다는 것일세. 원래 내가 그를 상대하게끔 되어있었지만 이렇게 내 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네. 백란 저 아이가 약간의 무공을 전수받기는 했지만 지극히 미미할 따름이고... ]

[제가 독존패왕궁의 궁주를 상대하겠습니다.]

석두공이 말했다.

황불식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주리라 믿었네. 하지만 직접 듣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는군. 그럼 부천주와 란이는 나가도록 해라. 따로 석소협에게 할 말이 있다.]

무형도객과 백란이 인사하고 나갔다.

그가 나가자 황불식이 말했다.

[지금까지는 공적인 부탁이었고, 이제 내 사적인 부탁을 하나 하고 싶네. 들어주겠는가? 아니 꼭 들어주어야만 하네.]

석두공은 황불식은 눈을 바라보았다.

(저 눈빛을 보아하니 어떤 부탁이든 간에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황불식의 눈은 간절한 애원같은 것을 담고 있었다.

[어떤 것입니까?]

석두공이 물었다.

황불식은 슬픈 듯 기쁜 듯 모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침상에 딸린 작은 서랍에서 은빛화살을 꺼냈다.

[이것은 은세추혼전(隱世追魂箭)이라고 하네. 머지않아 이 은세추혼전과 똑같은 것을 가진 여인을 만나게 될 것일세. 그때...]

[...!]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냥 그 여인을 죽여주게. 이것으로 죽인다면 그 여인도 피하지 않을 것일세.]

석두공은 황불식은 목소리가 떨린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은 더욱 떨린다고 생각했다.

한기(寒氣)가 폐부깊숙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은세추혼전을 가진 여자를 죽여라!

 

이것은 지상명령처럼 그의 가슴에 못박혔다.

 

***

 

무림이 아주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무림인들이 긴장했다.

천하를 장악하고 있는 검종맹과 잔혼각도 혈겁을 멈추고 잠잠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은밀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은 고요한 가운데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은 한 사람에 의해 발해진 두 가지의 명령에 의해서였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먼저 무림에서 은인자중하던 잠자던 사자(獅子)들...

소림과 무당을 비롯한 구대문파의 은밀한 움직임은 장문인들이 한장의 서찰을 받아들면서 시작되었다.

 

<...

약속을 이행받고자 합니다.

고수들을 거느리고 각기 영역 안에 있는 검종맹과 잔혼각의 분타들을 괴멸시켜주십시오.

잔혼각의 총단을 붕괴시키고 검종맹으로 모이십시오.

... >

 

누가 보냈는지 서명도 되어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실상 구대문파를 빼놓고 무림을 논한다는 것이 우스운 노릇이다.

구대문파는 무리의 발상지며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구대문파의 웅크렸던 거력은 거센 폭포수처럼 그러나 아주 은밀하게 혈세무림을 향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검종맹도 잔혼각도, 무엇인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설마 자신들의 분타가 소리없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둘째로 중원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 갑자기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을걷이를 잘하던 농부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는가 하면 가게의 늙은 주인이 문득 사라지기도 했다.

기루에서 술을 따르던 기녀가 갑자기 사라졌으며, 길거리에서 사기점을 쳐주던 봉사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사라져감에 따라서 검종맹과 잔혼각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밑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지게 만든 것도 단 하나의 명령이 적혀있는 첩지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

검종맹과 잔혼각의 세력을 제거하라.

가까이 있는 곳부터 은밀하게 손을 써라.

먼저 잔혼각의 총단을 멸하고 검종맹으로 향하라.

... >

 

 

첩지의 끝에는 단지 검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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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十三 章

 

      出世! 隱世正劒會! (1) 

 

 

 

 

-단혼곡(斷魂谷)!

 

천연의 요새인 이곳은 단 한 사람이 지킨다 하더라도 만 명의 적을 막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계곡을 들어서면 우선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짙은 운무가 가로막는다.

바닥 곳곳에는 깊은 틈이 있었으며, 또한 칼날같은 바위들이 천연의 진세를 이루어 사람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게다가 단혼곡에서 설치한 기관진식들로 말미암아 이곳은 천군만마도 침입할 수 없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단혼곡의 이러한 지형과 사파에 치우친 문파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몇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다.

단혼곡의 제자들 역시 밖으로 좀 체 나오지 않았다.

단혼장(斷魂掌)과 단혼검(斷魂劒)은 이곳 단혼곡의 이대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혼장은 남아있지만 단혼검은 하삼풍의 아들이 실종되면서 함께 사라져 버렸다.

만약 하삼풍의 손에 단혼검이 쥐어지기만 한다면 그의 무공은 면모를 달리하게 될 것이다.

한데 천하의 금지(禁地)라고 할 수 있는 이곳 단혼곡 입구에 이십 여 명의 검객들과 한대의 가마가 나타났다.

화려한 치장을 한 가마는 단혼곡 입구에 멈추어섰다.

가마 안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해남검파의 진우백이 일전의 약속대로 하곡주를 뵙고자 찾아왔소. ]

그의 음성은 비록 낮았지만 내공이 충만해 있어 단혼곡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 진우백은 다시 외쳤다.

[하곡주를 뵙고자 진우백이 찾아왔소.]

스으으으!

문득 안개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피풍의를 어깨에 걸친 하삼풍이었다.

[진문주 어서 오시오.]

그는 직접 진우백을 맞았다. 안개 속에는 보이진 않으나 그의 제자들이 서있는 것같았다.

진우백이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물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소이까?]

[진문주까지 해서 모두 육천 명 정도가 왔소. 그들 중에는 일파의 주인들도 상당수 있소. 이정도면 패권을 꿈꿔볼 수도 있지 않겠소?]

하삼풍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진우백은 하삼풍의 안내를 받아 단혼곡 안으로 들어갔다.

안개의 바다를 지나서 들어가니 그들의 눈앞에 별천지가 나타났다.

산중에 어찌 이런 초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넓다란 초지가 있고 초지의 한쪽에 웅장한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단혼곡 안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척살객과 검종맹, 그리고 잔혼각 등의 손을 피해 이곳 단혼곡으로 숨어들은 자들이었다.

단혼곡주 하삼풍의 살명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은 이곳 단혼곡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삼풍은 적에겐 가혹하지만 부하들에겐 관대하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하나둘 모여들은 자들이 이제는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진문주, 우린 무림인이니 복잡하게 말할 것없이 간단하게 결정지읍시다.]

하삼풍이 말했다.

진우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오.]

[우리가 욕심을 조금만 줄인다면 우린 천하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오. 우리가 서로 뜻을 합쳐서 한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면, 아무도 우릴 넘볼 수 없을 것이오. 힘을 합칩시다.]

검성의 백검보도 무너졌다.

구대문파를 제외하고는 무림에서 명맥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만약 해남검파와 단혼곡이 힘을 합친다면, 어쩌면 검종맹과 잔혼각과 천하를 삼분할 충분한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사실을 잔혼각과 검종맹에서 모르고 있다면 더욱 그 가능성은 크질 것이다.

진우백은 염두를 굴렸다.

무엇보다도 구미가 당기는 것은 하삼풍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진우백도 젊다고 말할 수 없는 나이이지만 하삼풍보다는 늙지 않았다.

더구나 도산검림을 걷는 무림인으로서 어찌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삼풍이 죽기만 하면 그 세력은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굴러들어올 것이다.

(죽지 않는다면 죽여야지.)

속으로 말한 진우백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로써 깨어지기 위한 또하나의 동맹이 탄생한 것이다.

 

***

 

송죽곡(松竹谷) 안의 정경은 섭웅평, 즉 석두공이 기억하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불타 허물어진 작은 집은 빛바랜 수풀로 무성하고, 그가 물장난하며 놀았던 작은 연못엔 물풀이 우거져 있었다.

댜행히 석두공은 집의 잔해 속에서 어머니의 유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체가 던져졌다는 서쪽 절벽의 중간에서 나무가지에 걸린 해골을 찾았다.

독비신검객의 시체는 풍우에 살이 다 섞어서 사라지고 햇빛받아 갈라진 뽀얀 백골뿐이었다.

석두공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을 상자에 넣어서 대별산을 떠났다.

그가 떠날 때 독왕동주 갈천상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단혼검을 주었다.

[이것은 원래 네가 나를 찾아왔을 때 주기로 했었던 물건이다. 천하에 검이 많다고 하지만 이 단혼검을 능가할 보검은 많지 않다. 단혼곡의 보물이지만 어쩌다가 손에 넣게 되었다. 강적을 만났을 때 네게 힘을 더해줄 것이다.]

단혼검은 두자정도 길이의 짧은 검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뻗치는 검기는 공력이 없는 사람이 휘둘러도 다른 사람을 상하기에 족했고, 검의 날카로움은 도검과 강기를 무 베듯 할 수 있었다.

석두공은 검을 사용하기 보다는 병기를 사용해야 할 때 주로 천왕저를 사용하므로 단혼검을 금사종에게 주었다.

[형님께서 파혼검이란 외호도 쓰신 적 있으니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석두공은 웃으며 말했다.

금사종은 검을 뽑아 휘둘러 본 후에 말했다.

[이름때문에 이같은 보물을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도 종종 외호를 바꿔야겠네. 다음엔 막사, 어장, 용천 등의 이름도 사용해보아야 겠군.]

 

* * *

 

그로부터 오일 후, 석두공과 금사종은 정주(鄭州)에 도착했다.

한데 정주에 들어서자마자 만난 한 거지가 석두공을 자꾸 훔쳐보며 따라오는 것이었다.

석두공은 무림첩을 돌릴 때 개방의 힘을 빌린 적이 있는지라 거지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소?]

거지는 석두공을 유심히 보더니 물었다.

[혹시 석공자님이 아니신지요?]

석두공이 그렇다고 하자 거지는 환호성을 지르며 석두공에게 절했다.

[공자님은 우리 개방의 은인이십니다요. 어서 저와 함께 가시지요.]

이게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인가?

석두공이 만나본 바로는 개방의 방주인 낙천부개 필요금은 자신에게 유감이 있으면 있었지 은인이라고 생각할 위인은 결코 아니었다.

무림첩의 발송일을 부탁할 때 그는 제자들이 굶어죽는다면서 석두공에게 오십만냥의 거금을 울궈내 간적이 있다.

 

거지는 석두공을 떠밀다시피하여 주택가로 데려갔다.

금사종과 석두공을 데리고 커다란 저택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으로 들어선 거지는 거침없이 한 저택의 문안으로 들어갔다.

[석두공 공자님을 찾았습니다요. 석두공 공자님을요!]

그는 들어서자마자 고함쳤다.

석두공은 괜히 머슥해지는 기분이었다.

저택의 넓은 마당을 지나고 안채의 문을 통과하여 거지의 목소리가 울러펴지고 있었다.

[꼼짝 못하게 붙잡고 있어요.]

갑자기 낭랑한 소녀의 호통소리가 안으로 부터 들려와 석두공을 당황하게 했다.

쐐애액!

작은 홍영(紅影)이 지붕을 뛰어 넘으며 석두공에게로 날아들었다.

석두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홍영은 장지연이 아닌가?

또한 그녀의 뒤를 이어 낯익은 얼굴이 석두공과 금사종 앞에 나타났다.

무형도객이었다.

 

× × ×

 

무형도객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돈의 힘이 세기는 세군 그래. 이렇게 금방 자네를 찾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

[뭐가 뭔지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석두공이 물었다.

무형도객은 장지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를 찾아다닌 사람이지. 또한 자네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기도 하고... ]

[장소저는 알고 있는 사이입니다.]

[이봐요 숯덩어리,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요?]

장지연은 입을 샐쭉하며 투덜거렸다.

석두공이 말했다.

[괜한 억지 쓰지 마시오. 내가 뭘 속였다는 것이오?]

[왜 내게는 당신 이름이 석두공이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말만 해주었어도 쓸데없는 고생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장소저는 묻지도 않은 사람에게 이름을 말해주시오? 나를 숯덩어리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궂이 이름을 가르쳐줄 이유가 뭐있겠소?]

[흥, 가르쳐줄 이유가 없다구요? 이것을 보고도 그런말이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장지연이 뾰족하게 소리쳤다. 이어 그녀는 왼주먹을 불쑥 내밀어 석두공의 코앞에 놓았다.

석두공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것으로 부족한가요? 그럼 이건 어때요?]

촤락!

장지연은 품에서 혈죽선을 꺼내 펼치며 말했다.

그것들은 무주(無酒) 동복신과 무보(無寶) 동적선의 신물들이었다.

장지연은 석두공에 대한 소유를 선포했다.

[당신은 두분 사부님이 제게 물러주신 유산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석두공이나 금사종, 그리고 무형도객은 아무래도 말이 뒤바뀐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물려진 유산인지는 천천히 판단하기로 하고, 석두공 자네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또 있다네. 만나 볼 텐가?]

석두공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왔으니 만나겠다는 사람은 다 만나야겠지요. 어떤 분이십니까?]

[소령이라는 소녀인데 자네를 꼭 만나야 겠다고 하는군.]

[소령이 이곳에 있습니까? 어디 있습니까?]

석두공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자신에게 그토록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던 신비한 소녀 소령에 대한 생각은 줄곧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던 것 중의 하나였다.

그때 휘장이 걷히며 흑의면사녀가 들어왔다.

[저는 여기 있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군요.]

마치 방울소리가 울리듯 맑고 고운 음성으로 그녀가 말했다.

석두공은 덥썩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뇌주탄에선 대체 어디로 사라졌었소?]

[제게 산공독을 먹여서 바다에 던진 사람이 당신은 아니었던 모양이지요?]

소령이 말했다.

석두공은 그녀의 한마디에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진우백은 그에게 소령이 자신을 도와 적룡혈운도를 철저히 쳐부수라고 한 후에 떠났다고 했다.

[너구리같은 늙은이!]

석두공이 내뱉었다.

[어쨌든 무사해서 천만다행이오.]

[염려해 주시니 고맙군요. 하지만 당신이 내 본모습을 보고도 과연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을 지 모르겠어요.]

[하하하하! 당신이 추팔괴라고 해도 난 놀라지 않을 것이오. 당신의 도움이 적지 않았는데 무엇을 탓하겠소? 오히려 사례를 해도 모자랄 지경인데.]

석두공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면사를 벗어버림에 따라 그의 표정은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당신... 이었구려! 아주 딴 사람같았는데...]

[여자가 마음먹어 바꾸지 못할게 뭐가 있어요? 당신을 만난 후 사부님께서 엄한 문책을 하셨어요.]

면사를 벗어버린 소령, 그녀는 바로 백란이었다.

숭산의 무저동 입구에서 폭풍마존을 기다리다가 대신 석두공을 만났던...!

석두공은 설마 그녀일 줄은 생각지 못했기에 할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당돌하고 제멋대로이던 백란, 그녀가 어떻게 그토록 세심하면서도 석두공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그런 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진정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무형도객은 말했다.

[란이는 내 딸일세. 하지만 이 아이가 자네에게 잘하고 못했는가를 따지자는 말은 아니네. 바른대로 말하면 이 아이는... ]

[아버지, 제가 직접 말하겠어요.]

백란이 말했다.

그녀는 표정이 굳어있는 석두공에게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전 사부님의 명령을 받고 당신을 데려가기 위해 무림에 나왔어요. 당신이 진정 무림의 평화를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제게 대한 감정은 어떻든지 간에 저를 따라가 주세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혹시 은세정검회와 관련이 있소?]

석두공이 물었다.

순간 무형도객과 백란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백란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앞으로 그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랬군! 사람이 바뀌었어. 정검령은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겠지?]

[네.]

백란은 대답했다.

석두공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난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오. 당신이 찾는 분은 내 사부요. 그분을 모셔 가도록 하시오. 그분이야말로 은세정검회와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계시오.]

장지연이 물었다.

[제게 검법을 전수해 주신 그분 말이에요?]

석두공이 끄덕였다.

무형도객과 백란은 사람이 바뀌었다는 석두공의 말에 어쩔 바를 모르는 것같았다.

그때 장지연이 말했다.

[하지만 그분은 이미 세상을 등지고 유유자적하시는데 누가 움직일 수 있겠어요? 만약 그분을 무공때문에 찾는 것이라면 당신이라도 충분하지 않겠어요?]

[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모든 게 제 불찰인 것같아요. 그래도 저를 따라가 주시겠어요?]

백란이 간절한 눈빛을 석두공에게 보냈다.

석두공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께서 해야 할 일이라면 나라도 맡아야 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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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장

 

           마지막 고리를 풀다 (2)

 

 

 

단촐하게 꾸며진 석실(石室),

나무로 만든 탁자를 사이에 두고 갈천상과 석두공, 그리고 금사종이 앉았다.

갈천상이 물었다.

[이곳이 기억나느냐?]

[예...]

석두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갈천상이 동호천으로 부터 협박을 받았을 때 화가 나서 눌렀던 탁자는 여전히 다리가 돌바닥에 파고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으으으... 끄윽! 크륵... ]

탁자 옆쪽에는 여전히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며 해천월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금사종이 물었다.

[해천월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음... 십 년 전 이놈을 살린 뒤부터 쭉 연구해 온 게 있는데 그걸 한번 실험해 볼 생각이네.]

갈천상이 대답했다.

[그럼 죽기 전에 해야 할 게 아닙니까?]

석두공이 물었다.

갈천상은 고개를 저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지고 갔다.

[저 늙은이는 내공이 강해서 잘 죽지 않아. 차 한 잔 마실 시간은 충분하지.]

차를 마시고 난 후에야 그는 석두공과 금사종에게 말했다.

[나를 좀 거들어 주게나. 이제 일을 시작해야지. 해천월을 들고 따라오게.]

그는 석실의 한쪽 벽으로 다가가 양손으로 밀었다.

그그긍!

갑자기 벽이 빙글 돌면서 그의 몸이 석벽안으로 사라졌다.

석두공은 십년 전 이곳에서 정신을 차렸기 때문에 석벽 안의 상황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가 갈천상을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소림사의 만배선사로부터 전수받은 정심신공의 효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석두공과 금사종은 교묘한 석벽의 장치에 신기해 하면서 그를 따라 들어갔다.

석벽 안은 어두침침한 동굴이었다. 자연석동(自然石洞)을 약간 개조한 듯, 여기저기 깎여진 바위들이 보였다.

그렇지만 동굴의 낮은 천정은 허리를 숙이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약간 가다보니 향기로운 냄새가 동굴속에서 부터 풍겨져 왔다. 폐부를 시원하게 해주는 맑은 향기였다.

석두공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영약을 기르시는 모양이군요.]

[좋은 약이지. 먹기만 먹으면 네 녀석은 십년 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완전한 돌대가리로...]

갈천상이 앞에서 대꾸했다.

금사종이 물었다.

[무슨 약이기에 그렇습니까?]

[백송(白松)에서 채취한 망아독균(忘我毒菌)이네. 이 향기는 망아독균에서 나오는 것이고.]

갈천상이 말했다.

석두공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향기에 독은 없는 것같습니다.]

[그게 망아독균을 내가 기르는 이유이지. 망아독균은 그 자체로서는 독이라고 할 수도 없지. 하지만 복용하여 사람이나 짐승의 배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때부터 무서운 독이 되는 것이야.]

[한데 어째서 망아독균입니까?]

석두공이 물었다.

갈천상은 동굴의 두갈래로 갈라진 부분에 이르러 우측의 동굴로 들어가며 말했다.

[기가 막히는군. 이곳에 나 이외에 들어온 사람은 네 스승형제들 뿐인데 제자라는 놈들도 똑같은 질문만 하니... 아마도 십년 전에 그들도 똑같이 물었던 것같은데... ]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상궤(常軌)를 벗어나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의문도 똑같이 일어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금사종이 말했다.

갈천상은 듣기 싫은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네가 유식한 척하는 것은 산위에서 실컷 들었으니 더이상 말하지 말게. 독에 관해서는 노부가 세상에서 가장 유식한 사람이니까.]

그는 금사종을 머슥하게 한 후에 다시 말했다.

“망아독균을 먹는 순간부터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자신을 잊는 것은 물론이고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심지어 움직이는 것조차 잊어버리니, 한마디로 그것을 먹는 순간부터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거지.”

우측 동굴의 안쪽은 커다란 석문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그긍!

그 석문은 갈천상이 동굴 천정의 한곳을 지풍으로 누르자 부드럽게 열렸다.

석두공은 갈천상의 말에 기겁하며 물었다.

[그럼 해독할 수도 없습니까?]

[방법은 있지.]

[무엇입니까?]

[피를 몽땅 뽑아서 바꾸는 거다. 그렇게 한다면 정신을 차릴 수 있다.]

[그냥 죽으라는 말이군요.]

[생각은 편한 대로 하는게 편하지.]

갈천상은 믿거나 말거나는 식으로 말하고 문이 열려진 안으로 들어갔다.

가운데는 석대(石臺)가 놓여있고 사면 벽에는 선반들이 얹혀져 있는데 그 위에는 수백, 수천개에 달할 것같은 병들이 놓여 있다.

또한 선반의 아래쪽에는 괴이한 기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책들과 함께 놓여 있었다.

갈래진 두 동굴 중에서 다른 하나는 독물을 기르는 곳이고 이곳은 갈천상이 무공과 독을 연구하는 장소였다.

갈천상은 석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해천월을 저기에 놓아라.]

석두공은 해천월은 석대 위에 펴놓았다.

해천월의 몸은 형체를 거의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놓는 대로 축 쳐졌다.

쪼르르...

갈천상은 구리그릇에 약물을 붓고는 손을 씻었다.

그리고 말했다.

[옷을 모두 제거해라.]

금사종이 손으로 해천월의 옷자락을 베어냈다.

붉게 물든 옷자락은 그의 터진 살에 드러붙어있었다. 옷자락이 제거되자 그 상처에서 다시 피가 베어나와 석대를 타고 흘렀다.

혈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어 석두공과 금사종의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갈천상은 손가락으로 해천월의 몸을 쿡쿡 눌렀다.

그의 손가락은 해천월의 몸이 마치 두부나 되는 것처럼 파고들었다.

툭! 투툭!

해천월의 몸이 기형적으로 꿈틀거렸다. 그 꿈틀거림 뒤에는 뼈와 근육이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뼈는 여전히 부러진 상태였고 근육도 잘려진 상태였다.

갈천상은 예리한 비수를 꺼내 그의 살을 가르고 혈관을 건드리지 않은 채 근육을 잘라냈다.

교묘한 솜씨였다.

다리의 근육이 잘려졌고 팔의 근육이 잘려졌다.

해천월은 갈천상의 손에서 해부되고 있었다.

끊어진 혈관은 갈천상의 손에 의해 꿰매졌으며 잘라낸 근육들에는 약을 바른 후 제자리에 놓여졌다. 근육이 때로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석두공은 문득 기계인간이 생각나서 말했다.

[뼈나 근육을 잘라내고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습니까?]

[어느 정도 가능하지. 하지만 늘 몸의 부조화로 고통받아야 하기 때문에 마약을 먹이거나 감각을 없애버려야 할 걸?]

[특이한 종류의 공력을 익혀서 감각을 통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럴 수 있을 것같군. 하지만 누가 그런 신공까지 익히면서 괴물이 되려고 할까?]

갈천상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석두공이 말했다.

[그런 괴물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뭐? 그게 정말인가? 누가 그런 자들을 만들었단 말인가?]

갈천상이 놀라며 물었다.

석두공은 형산에서 기계인간들을 파괴한 일에 대하여 간단히 말했다.

[행동의 기괴함이 인간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결국 다 부수긴 했지만 그때 놀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간담이 서늘합니다.]

갈천상은 해천월의 배를 가르면서 말했다.

[다음에 그런 괴물을 보게 되거든 이리로 하나만 가지고 오게.]

[생포하기는 쉽지 않을 것같습니다.]

[어렵지도 않아. 어떻게 만들든지 간에 완벽하게 몸과 이물질이 조화를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니까. 음공을 이용하면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거네. 내부의 조화를 깨뜨리면 절로 드러누워 버릴 거야.]

대수롭지 않은듯 말하며 갈천상은 해천월의 터진 내장을 바늘로 꿰맸다.

더운 김을 내면서 내장이 꿈틀거렸다.

석두공과 금사종은 내장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갈천상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며 슬금슬금 물러섰다.

해천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숨쉬고 있었다.

[껄껄껄... 노부가 네놈을 살릴 때는 심장에 구멍을 뚫고 다섯 가지 독물을 넣었다. 이 까짓게 뭐 대단하다고 불알찬 놈들이 비위상해 하느냐? ]

갈천상은 웃으며 말했다.

금사종은 말했다.

[편작도 수술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사람이 배를 가르고 수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배에 칼 맞고도 죽지 않는 놈이 있는데 조심해서 배를 갈랐는데도 죽는다면 그게 이상하지 않은가? 원기의 소모야 많겠지만 깨어나고 나서 독이랑 영약이랑 먹여서 원기를 보충시킨다면 아무것도 아니지.]

갈천상은 해천월의 폐에 난 상처에서 피를 뽑아내고 실로 묶었다.

그리고 또 말했다.

[한데 공기 중에 어떤 기운이 있어서 사람의 배를 열어놓은 지 반각이 지나지 않아서 사람을 죽게 한단 말이야. 노부가 독물로서 그러한 기운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시원치 않아.]

한데 해천월의 폐가 꿰매지자 그의 목에서 크럭거리는 소리가 잠시 멎었다가 왈칵 핏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갈천상은 재빨리 그릇으로 핏덩어리를 받아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

해천월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허... 으으... ]

흐느낌 같기도 하고 웃음같기도 했다.

갈천상이 말했다.

[이제 이놈이 조금 살만한 모양이군. 대체 이 대가리 속에는 무슨 나쁜 짓으로 가득 차있는지 살펴볼까?]

[그것 참 좋겠습니다. 검종맹이나 잔혼각에 대한 이야기라도 나온다면 꽤 쓸만하겠지요.]

석두공은 갈천상이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지 궁금해하며 말했다.

갈천상은 해천월의 배를 빠른 솜씨로 기웠다.

그리고 선반에 있는 약병들 중의 하나를 꺼내서 해천월의 입에 부었다.

노르스름한 물이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입으로 흘러들어갔다.

[무슨 약입니까?]

[망아독균에다가 노부가 다른 것을 조금 섞은 것이다.]

[아니 그럼 백치가 되어버릴 텐데 무슨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금사종이 재빨리 물었다.

갈천상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독에 대해서 문외한인 자네가 아는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을것 같은가? 아무 걱정말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해천월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 주이... 으... ]

그렇지만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만큼 분명하지 않은 소리였다.

근육은 해부되어 꿈틀거리고 전신은 피에 젖어있는 고깃덩어리가 입을 여는 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시 심제을... 심... 죽일 놈... ]

해천월은 점차 운이 있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갈천상이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잘 봐두게. 속에 있는 것을 몽땅 다 털어놓고 백치가 되는 것을... 다시는 못볼 구경일 거야. 그것도 마음에 맺혀이는 중요한 것부터 털어놓는 것을... ]

[혹시 저도 저렇게 한게 아닙니까?]

석두공이 미심쩍다는 듯이 갈천상을 바라보았다.

갈천상이 정색을 했다.

[그랬다면 노부는 이미 저승에서 네 스승에게 앙갚음 하려고 달려들었겠지. 동영감이 호랑이 눈을 뜨고 보는데 내가 무슨 수작을 부려?]

석두공과 금사종이 빙그레 웃었다.

해천월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으으... 안돼! 용서해줘... 독비신검객! 자네 아들을 죽인 건 잔혼살객 그놈이지 내가 아니야. 자네 부인을 죽인 건 심제을이고... 난 단지 시녀를 죽인 죄밖엔 없네.]

갈천상이 석두공과 금사종에게 눈을 끔벅해보이고는 짐짓 엄한 어조로 말했다.

[이 나쁜 놈 해천월! 왜 나를 죽였느냐? 그리고 아들을 죽인 게 어째서 잔혼살객이란 말이냐? 내 두 눈으로 네놈이 검으로 찔러 죽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

[아니다. 섭영소. 네가 잘못 보았다. 너의 아들은 잔혼살객 그놈이 고목나무 속에 집어넣고 눈으로 눌러 죽였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그곳이 어디냐?]

갑자기 갈천상이 크게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대별산이다. 네 아들도 부인도 그리고 너도 대별산에서 죽었지 않느냐?]

해천월은 완강하게 자신의 죄를 부인하며 말했다.

갈천상이 빠르게 석두공의 표정을 살폈다.

“....!”

그때 석두공의 표정은 애매모호했다.

해천월의 소리가 점점 그를 어떤 환상속으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갈천상은 금사종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절대로 그 아이를 건드리지 말게.]

금사종도 석두공이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천상은 다시 해천월에게 말했다.

[내 시체는 어디에 있느냐?]

[심제을이 서쪽 절벽에서 던져버렸다. 아마 그 아래 계곡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내 아내의 시체는?]

[그녀는 네 집과 함께 불태워졌다. 이 모든 게 그 악마같은 심제을 그놈 짓이다.]

해천월은 힘없이 말했다.

죄책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같았다.

갈천상이 물었다.

[내 집은 어디에 있지?]

[송죽곡(松竹谷) 안에 있지 않았느냐?]

송죽곡은 갈천상이 있는 독왕동의 완전히 맞은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산 저쪽인 것이다.

갈천상은 대별산에서 자랐고 그 후에도 죽 대별산에서 살아왔다.

그러나송죽곡은 대충 위치만 알고 있을 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갈천상이 물었다.

[왜 나를 죽이고 가족마저 죽였느냐?]

[네가 애초부터 삼마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잘못이었다. 네가 삼마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몰랐어도 난 적룡혈운도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을... ]

해천월은 원망스린 어조로 말했다.

[아!]

갑자기 석두공의 다리가 후들거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금사종이 부축하려고 손을 내밀다가 갈천상의 눈빛을 받고 거둬들였다.

석두공의 전신이 부덜부덜 떨리기 시작했다.

덜덜덜...

마치 학질에 걸리기라도 한듯이 그의 몸은 심하게 떨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과 얼굴이 얼기라도 하는 듯이 새파랗게 변했다.

웅크리고 앉은 그의 눈빛은 망연하여 별빛같이 초롱하던 석두공의 눈이 아니었다.

자신의 속을 들여다 보는 눈빛이지 밖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석두공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격렬하게 떨었다.

돌연,

스으으으스스스...

그의 몸에서 가공할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금사종은 심장이 멎어버릴 것같은 충격을 느끼며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쿵쿵쿵!

그의 앞에 뚜렷한 발자국이 새겨졌다.

갈천상은 이미 공력을 일으켜 석두공의 살기를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끝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석두공의 살기는 십년 전의 어렸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무공이 이미 극에 다다른 지금 그의 몸에서 살기는 폭풍같은 기세로 일어나고 있었다.

해천월의 심장이 멎어버렸다.

갈천상은 석대 뒤로 피했으며 금사종은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한발 한발 물러섰다.

펑!펑!펑!

선반위에 있던 병들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약물과 독가루가 가득 흩날렸다.

펑펑펑펑...

제법 단단하던 병들도 깨어져 나가고 서가가 삐거덕 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물건에 귀신이라도 붙은 것같았다.

이때,

[으아아아아!]

갑자기 석두공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두두두두!

실내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렸다.

갈천상은 쓰러져 칠공으로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고 있었고 금사종은 왁칵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으으으... ]

갈천상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금사종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석두공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같았다.

모든 것이 그림을 보듯이 선명해져왔다.

그의 몸에서 폭풍같던 살기는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팔이 하나뿐인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놀던 때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머니가 머리를 감겨주며 울지 않는다고 착하구나 하던 기억도 떠올랐다.

어머니가 갑자기 나타난 푸른 옷의 사나이에게 일검을 맞고 쓰러지던 기억도, 집이 불타고 아버지가 자신을 안고 도망치던 생각도 났다.

아버지를 협공하던 세사람의 얼굴이 눈앞에서 잡힐 듯 떠올랐다.

[아버지가 외팔이만 아니었어도... 내가 짐만 되지 않았어도....]

석두공은 자신도 모르게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그의 두 볼로 눈물이 주르르 타고 흘렀다.

그때 갈천상이 파리해진 안색으로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너를 찾게 되었구나. 너무 슬프하지 말아라. 세상의 일은 사람이 다 하는 것같아도 실상 하늘의 정한바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느니라.]

석두공은 그의 위로를 받자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 울먹였다.

풀리지 않던 기억의 고리가 해천월으로 인해 풀렸던 것이다.

갈천상이 그의 어깨를 안으며 말했다.

[너를 처음 보았을 때도 천년에 한번 볼까말까한 무골인지라 훌륭한 무가의 자손일 줄 알았다. 과연 독비신검객같은 훌륭한 사람을 아버지로 두었구나.]

이미 죽었던 아이, 자신의 손으로 끔직한 방법을 동원하여 살렸던 아이...

그러나 정신적인 불구가 되어 버렸던 그 아이가 이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품에 안겼다.

갈천상은 석두공에 대해 부모와 같은 정을 지니고 있었던지라 그 감회가 남달랐다.

석두공,

그는 바로 고검문의 문주인 섭군천의 손자이며, 오객 중의 한 사람인 독비신검객 섭영소의 아들인 섭웅평(葉雄枰)이었다.

그가 섭군천을 처음 만났을 때 남다른 친밀감을 가졌던 것은 서로가 혈친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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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十二 章

 

        마지막 고리를 풀다 (1)

 

 

 

숲에서 해천월이 미친 듯이 눈을 까뒤집고 두 팔을 들어올린 채 하소연 하듯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삼십 여 명의 척살객이 원을 그리고 둘러서서 그의 기행(奇行)을 구경하고 있었다.

해천월은 한 명의 척살객에게로 상처투성이의 몸을 끌고 다가가서 말했다.

[제발 믿어주게. 내가 아니네. 심제을이란 놈의 짓이네.]

[낄낄낄... 그래 믿어주지. 믿어주지.]

척살객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해천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고맙네.]

그는 감격한 듯이 눈물을 닦고 다른 척살객에게로 다가갔다.

[심제을이 한 짓이네. 자네도 잘 알고 있잖은가? 응? 믿어주게...]

[우하하하하... ]

척살객들이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해천월은 진지한 태도로 척살객에게 하소연했다.

철썩!

척살객이 뺨을 때리고 말했다.

[믿어주지.]

[고맙네. 고마워... ]

다시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는 해천월의 입에서 두 개의 이빨이 튀어나왔다.

 

현장에 도착한 석두공과 금사종은 아연했다.

독비신검객 섭영소로 보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혈인이 된 해천월이 미쳐서 맴도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일파의 종주가 저런 최후를 맞게 되니... 적룡혈운도에 있었더라면 제자들과 손자들의 재롱이나 보면서 자적할 터인데... ]

금사종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때 척살객들이 석두공과 금사종을 발견했다.

[백호! 이 배신자!]

쐐애액!

한명이 검을 뽑아들며 금사종을 덥쳐왔다.

금사종은 파혼검이라는 자로 위장하여 척살대에 들어갔었다.

척살대 안에서 그는 백호로 불리웠었다.

번쩍!

순간 금사종의 소매속에서 장검이 튀어나왔다.

그는 간단하게 척살객의 공격을 막아내고 말했다.

[이십일호! 신의를 따지는 자가 어찌 정의를 따지지 않는가?]

[닥쳐라! 너를 죽이고 말겠다.]

이십일호는 자신의 구가천마검법을 금사종이 간단히 막아내자 분기탱천하여 고함쳤다.

하지만 금사종은 삼마경을 익히면서 그 수법들을 숙달시키기 보다는 깨는 방법에 대해서 더 골몰했었던 사람이다.

더구나 무치무요를 통해 익힌 해박한 그의 무공은 그러한 것이 어렵지 않게 만들었다.

금사종은 여유있게 검을 휘둘러 이십일호의 공격을 막아내며 말했다.

[악인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 악인이 되고자 하는 어리석은 자. 해천월의 말로를 눈앞에 두고서도 뉘우치는 것이 없는가? ]

금사종은 원래 명호를 혼장서생이라고 했다.

그만큼 그의 학문에 대한 지식은 해박하고 말 또한 조리가 있으며 고금의 명구들에 대해 정통하고 있었다.

[용슬지이안(容膝之易安)이라 했거늘 헛되이 세상에 망령된 마음을 먹는단 말인가? 금비시작비시(今非是昨非示)하니 세세토록 일섭(日涉)하고 기오(寄傲)하기는 틀렸도다.]

용슬지이안이란 말은 무릎을 겨우 넣을 만한 좁은 장소에서도 편안하다는 의미이며 금비시작비시라는 말은 오늘도 틀렸고 어제도 틀렸다는 말이다.

또한 일섭한다는 것은 날마다 한가로이 산책한다는 말이며, 기오하다는 것은 거리낌 없이 자유로이 산다는 뜻이다.

금사종은 훈계한다는 생각에 거침없이 문자(文字)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똑똑한 무림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석두공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척살객들이 욕을 하며 달려들었다.

[개소리!]

석두공이 금사종을 도우려했다.

[지금은 나서지 말게. 한놈도 빠짐없이 모였을 때 몰살시켜버리도록! 혹시 자네를 알아보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얼굴을 숨기게.]

그때 금사종의 전음이 빠르게 그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문자를 써가면서 말을 하는 데에는 시간을 끌어 나머지 척살객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해천월은 멍하니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입을 헤 벌리고 있고 척살객들은 검과도를 뽑아들고 금사종을 향해 공격했다.

번쩍!

파파팟!

금사종은 오연히 서서 그들을 오른손의 검으로 구가천마검법인것도 같으면서도 아닌 것도 같은 기이한 검법을 펼쳤다.

또한 그 성격이 시시때때로 변하며 팔황지옥도법과 유사한 것이 되기도 했다.

한데 그 검법과 도법들은 기묘하게도 구가천마도법과 팔황지옥도법의 빈틈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

[놈의 무공이 이렇게 강했다니... ]

동시에 네 명의 척살객이 격퇴되었다.

금사종의 검은 검법과 도법을 섞어서 펼쳐냈고 그것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척살객들이 번갈아 공객했지만 깨뜨릴 수 없었다.

척살객들은 금사종을 금방 제압할 수 없자 석두공에게 공격했다.

[먼저 이놈부터 죽여 버리자.]

[어림없다!]

금사종이 소리치며 석두공을 보호했다.

하마터면 그의 팔이 날아갈 뻔 했다.

석두공은 금사종의 당부가 있는 지라 그의 뒤로 피하며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펑펑펑!

번쩍! 번쩍!

콰콰콰쾅!

금사종과 척살객들의 결투는 점점 치열해져 갔다.

척살객들은 더욱 심하게 날뛰었고 금사종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하지만 금사종은 여전히 기력이 충만한 상태에서 삼십여 명의 척살객들을 상대해내고 있었다.

진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네 명의 척살객이 더 당도했다.

그들도 가세했지만 금사종은 여전히 그들의 공격을 다 막아내며 이따금 반격도 해냈다.

척살객 중의 하나가 소리쳤다.

[백호는 구가천마검법과 팔황지옥도의 극성이 되는 검법을 펼치고 있다. 초식으로서는 이길 수 없다. 내공을 쏟아 부어라!]

사실이 그러했다.

금사종은 구가천마검법과 팔황지옥도법의 각 초식들을 면밀히 분석하여 그 초식들만을 전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초식들을 무치무요에서 찾아냈었다.

그런 후 그것들을 결합하여 한가지의 도법과 한가지의 검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척살객이 소리친 후로 다른 자들의 공격방식이 변했다.

그들은 초식을 버리고 무거운 중수법으로 열을 지어 금사종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금사종은 이미 동호천이 장담한 대로 천하제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천하제이에 버금갈만한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 터였다.

그는 상대방의 힘이 자신에게 미치기 전에 흩어버릴 줄 알고 있었다.

척살객들의 고심어린 공격도 그에겐 아무 소용없었다.

석두공이 칭찬했다.

[형님! 대단합니다. 오년 전에 비해 백배도 더 발전한 것같습니다.]

[발전은 자네가 했지. 무공이 말고 머리말일세.]

금사종의 농담에 석두공은 웃고 말았다.

한데 석두공의 한쪽 손바닥은 은밀하게 금사종의 명문혈에 닿아있었다.

금사종의 지칠 줄 모르는 가공할 내공의 비밀은 실상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다시 네 명의 척살객이 당도한 후로 한 시진 가까이 흘렀지만 더 이상 오는 자가 없었다.

금사종을 공격하는 척살객들은 난공불락같은 금사종의 무공에 자신들이 지쳐버릴 지경이었다.

[더 이상 올 자가 없을 것같군.]

금사종이 말했다.

석두공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섰다.

여전히 도검이 빗발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숲의 한쪽에서는 언젠가부터 한 노인이 나무위에 앉아서 석두공과 금사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군 이상해! 어째서 이렇게 혼동이 일어날까? 닮기는 분명이 저놈이 닮았는데 정작 무공을 펼치는 놈은 또 저놈이니...]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노인의 대머리가 석양을 받아 빛났다.

 

파파팟!

퍼퍼펑!

검기와 도광이 석두공의 몸을 작열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금사종의 석두공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훌쩍 물러서면서 전장(戰場)을 피해버렸다.

나무위에서 지켜보던 노인이 눈을 비볐다.

[저럴 수가...]

휘루루룽!

석두공의 몸에서 폭풍같은 강기가 뿜어 나오며 그의 몸으로 날아들던 검기와 도광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콰르르르...

석두공의 몸이 폭풍이 되어 움직였다.

그의 몸 주위에 다다른 것은 무엇이나 가루가 되어 날렸다.

바위가 여력에 의해서 날아가고 나무들이 뿌리채 뽑혀 날아갔다.

콰드드드드!

척살객들은 피도 뿌리지 못하고 허공중에서 가루가 되어 그의 그림자처럼 폭풍에 휘말려 맴돌았다.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척살객도 그들이 입었던 옷도 그들이 들었던 검과 도도 모래처럼 분해되어 사라져버렸다.

석두공이 단 한차례 십장방원을 돌았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천신폭풍보-!

천신폭풍보의 위력을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금사종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님에도 넋이 반쯤 빠져버렸다.

그러한 사정은 나무위에서 숨어보던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연신 눈을 비비고 다시보고, 다시 비비고 보고 했다.

천하를 공포속으로 몰아넣었던 척살객들은 눈깜짝 할 사이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짝짝짝!

멍하니 앉아있던 해천월이 박수를 쳤다.

쿠우웅!

그러더니 그의 몸이 서서히 뒤로 쓰러졌다.

석두공은 사십 여 명의 인명을 한순간에 살해해 버린 뒤에 찾아오는 허무를 뼈속까지 느끼면서 묵묵히 있었다.

갑자기 금사종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며 차갑게 소리쳤다.

[당장 나오지 않으면 벌집이 될 것이다.]

대머리 노인은 넋을 잃고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는 금사종의 자세를 보고 소리치며 뛰쳐나갔다.

[유성단천(流星斷天)은 노부를 죽이기 위해 만든 것인 줄 아느냐?]

금사종은 눈앞에 내려선 노인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유성단천의 수법을 알아보는 사람은 강호에 나온 이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석두공은 노인을 유심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갈할아버지?]

[어랍소? 돌머리가 맞긴 맞는 모양인데 어떻게 나를 알아보지?]

노인이 석두공을 올려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석두공이 넙죽 업드리며 절하고 말했다.

[맞습니다. 갈할아버지께서 살려주신 저 돌대가리 석두공입니다.]

그 노인은 독왕동주 갈천상이었다.

[흠흠...]

그는 석두공의 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오독패혼공의 흔적이 있으니 틀림없이 맞기는 맞는데... 그럼 노부의 말이 틀린 게 되지 않나? 한데 이 젊은이는 누구인가?]

[제 의형이십니다.]

금사종이 포권하며 말했다.

[복우파의 금사종입니다.]

[한데 어떻게 동선배의 무공을 알고 있지? 이놈이 돌대가리라서 동선배가 그만 자네에게 무공을 가르쳤나?]

갈천상이 물었다.

석두공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비슷합니다.]

석두공으로부터 자세한 말을 전해들은 갈천상은 파안대소했다.

[푸하하하...!]

하지만 그의 눈가로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대별산중의 독왕동에 은거하고 있던 그는 동호천의 사망소식도 그제서야 들었던 것이다.

[날도 어두웠으니 내집으로 가자.]

갈천상은 아직도 숨이 크륵거리는 해천월의 몸을 집어들고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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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1장

 

             토사구팽 (2)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는 대별산으로 오르는 두 사람의 젊은이가 있었다.

한사람은 죽립을 썼으며 죽립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삼십여세 정도로 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십이 채 되지 않은 청년으로 머리카락이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자라있었다.

이들은 석두공과 금사종이었다.

[놈들의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사십 명이 넘는 자들이 천하 곳곳으로 돌아다니며 살인을 일삼으니 그것을 어떻게 찾는단 말입니까? 벌써 열흘이 지났지만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잖습니까?]

석두공이 금사종에게 말했다.

석두공은 누적된 피로가 회복된 후에 금사종과 함께 척살대를 찾아서 천하를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척살대가 척살대라고 이마에 써붙히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수만 명이 숨어도 감쪽같이 숨어버릴 수 있는 넓은 중원 땅에서 겨우 사십여 명의 인물들을 찾아낸다는 것은 바다에서 바늘 찾기보다야 쉽겠지만 어려운 일임은 분명했다.

[나도 척살객이네. 그들의 행동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네.]

금사종이 말했다.

석두공이 물었다.

[그들이 대별산에 모이기라도 한답니까?]

[바로 그렇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미 남양(南洋)에서 그들의 표기를 발견했었네. 표기가 가리키는 곳은 줄곳 이곳 대별산이었네.]

석두공의 이마가 좁혀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살겁도 목격하지 못했는데... ]

[곧 보게 되겠지.]

금사종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문득 석두공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님 말이 맞군요. 곧 보게 될 것같습니다.]

슈아아앙...

석두공은 갑자기 육지비행술을 펼쳐 산위로 달려갔다.

금사종의 귀에도 장력이 부딪히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봉우리의 중간 부분에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그 절벽의 앞쪽에는 제법 넓은 암반이 있었다.

[이 이놈들... 네놈들 마저 나를 배신하다니!]

해천월은 치를 떨면서 분노했다.

그의 전신은 이미 수십 개의 검상과 도상, 그리고 여러가지 괴이한 수법에 의해 만신창이 되어있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들은 스무 명 남짓, 그들은 모두 신호를 보고 모여든 척살객들이었다.

척살객 중의 한 자가 말했다.

[후후후! 우리에게 금제를 한계 당신들 실수야. 당신들 세 사람의 영패가 동시에 모여지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우리를 통제할 수 없어.]

[네놈들은 잔혼살객의 명령을 받지 않았느냐?]

해천월이 고함쳤다.

다른 척살객이 키들키들 웃으며 말했다.

[우린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다니까. 잔혼살객의 명령을 들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이 그의 말과 우연히 일치했을 뿐이지. 자 그럼 이제 팔황지옥도법의 원본을 내 놓으실까? 뭔가 빠져있는 불완전한 비급을 익히는 건 위험한 일이거든...]

[네 네놈들... ]

해천월이 검을 움켜잡았으나 손에 힘은 들어가지 않고 핏물만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척살객이 말했다.

[우리 열명의 합공을 당신은 견디지 못했어. 흐흐흐... 그렇다면 잔혼살객이나 부운청풍객도 비슷할 것 아닌가? 으하하하... 삼마경의 진본(眞本)을 모두 빼앗아 연성하게 된다면 천하에 우리를 당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으하하하하... ]

척살객들은 마치 자신들의 세상이 도래하기라도 한 듯이 웃어 제꼈다.

해천월은 내심 탄식했다.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히고 기르던 개에게 물린다고 하더니..... 내가 심제을에게 배신당한 데 이어 이놈들에게까지 당하다니.... )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있었다.

거듭된 척살객들의 공격으로 그의 몸은 회복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다.

부하들은 모조리 죽거나 흩어졌으며 지금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문득 해천월의 눈에 척살객 들의 뒤에 있는 굵은 나무가 들어왔다.

사람 허리어림에서 동강이 난 거대한 소나무인데 얼마나 굵은지 장정 몇 사람이 안아도 다 못 안을 정도였다.

나무 둥치 옆에는 썩어가고 있는 거대한 소나무의 잔해가 누워있다.

“허억!”

그 소나무를 본 순간 해천월은 혼비백산했다.

(이...이곳이 바로 그곳이었구나. 그의 혼령이 있어 복수라도 하는 모양이구나!)

척살객이 손을 내밀었다.

[자 어서 내놓으시지.]

해천월은 눈을 부릅떴다.

마치 십년 전의 상황이 그의 눈앞에서 재현되는 듯했다.

아니 실제로 그는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십년 전의 그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도 바로 이 장소였다.

해천월은 중얼거렸다.

[똑같다. 저렇게 내미는 손까지... 똑같다. 그가 독비신검객(獨臂神劒客)의 망령이 저들에게 붙었구나.]

그는 어디서 무슨 힘이 생겼는지 버럭 고함쳤다.

[너를 죽인 것은 심제을이다! 왜 그에게 직접 복수하지 않고 나를 괴롭히느냐? ]

그의 눈은 기이한 광기가 번들거리고 이미 눈앞을 보고 있는 것같지가 않았다.

손을 내밀었던 척살객이 놀란듯 눈이 둥그레졌다가 비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지은 죄가 많아서 미쳐버렸군.]

[푸하하하... ]

척살객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난.... 난 죽지 않을 테다. 비켜라!]

쐐애액!

해천월이 갑자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토록 만신창이 된 몸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였다.

척살객들은 성급하게 잡으려고 하지도 않고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것이니 금방 지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목표가 해천월이었군. 해천월이 심제을 등에 의해서 제거되었다는 말이 사실이었어.]

스스스!

척살객들이 달려가는 뒤로 석두공과 금사종이 나타났다.

[잘하면 몽땅 다 한군데 몰아서 죽일 수도 있겠군요.]

[아마도 살아있는 자들은 다 모일 것같군. 후후후... 한데 그들의 말을 들었겠지.]

금사종이 웃고 말했다.

석두공이 씽긋 웃으며 말했다.

[가당찮은 꿈을 꾸고 있더군요. 명년 오늘이 제사날인 줄 모르고...]

[가만 두어도 죽을 놈들이지. 내가 저놈들에게 납과 수은을 먹였지. 아마 한 두 달 내에 다 죽게 될 거야.]

금사종은 자신이 영단에 납과 수은을 넣어 먹인 사실을 이야기했다.

석두공과 금사종은 해천월의 생사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시간이 좀더 지나서 척살객들이 더 많이 모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해천월과 척살객이 달려간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금사종의 이야기를 들은 석두공이 물었다.

[흑백쌍사는 살려주었습니까?]

[반만 살려주었네.]

[...?]

의아한 표정을 짓는 석두공에게 금사종은 싱긋 웃어보이며 말햇다.

[그자들은 도저히 교화할 수 없는 자들이었지. 그렇다고 평생 데리고 있을 수도 없고... 해서 그자들의 경락의 끝을 모두 잘라버렸네. 내공은 가득해도 사용할 수가 없게 된 것이지.]

[그것 참 좋은 방법입니다. 맞을 때는 힘을 쓸 수 있지만 때릴 때는 힘을 쓰지 못할 테니까요.]

석두공은 그 같은 수법에 박수를 치면서 환영했다.

얼마를 더 걸어가다가 그가 말했다.

[몇 명이 더 늘었습니다. 이제 해천월이 죽을 때인 모양입니다.]

해천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비신검객(獨臂神劒客) 섭영소! 노부가 아니다. 나를 막지마라! 모든 일을 꾸민건 심제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난 우연히 알게 되어 말려들었을 뿐이다.]

[흐흐흐... 이 영감이 독비신검객까지 죽인 모양이군. 어쩐지 지난 십여년간 독비신검객이 소식이 없다 했지.]

다른 음성도 들려왔다.

석두공과 금사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섭영소(攝瑩宵)!

 

고검문주 섭군천의 막내아들이며 그의 유일한 희망이라던 그가 아닌가?

섭군천은 섭영소가 우연히 얻었던 삼마경이 부운청풍객 등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사실만으로 섭영소가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한데 지금 해천월이 독비신검객이 섭영소라고 부르면서 뭔가 변명하고 있지 않은가?

쐐애액!

서로를 마주 본 석두공과 금사종은 빛살처럼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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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十一 章

 

      兎死狗烹 (1)

 

 

 

지리멸렬(支離滅裂),

귀산의 무림대회에 모였던 무림인들은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어버렸다.

극소수에 불과한 척살대들은 지난 열흘 동안 팔천 명이 넘는 무림인들을 살해했으며, 그들의 사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살아남은 무림인들은 그들의 살수를 피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으며 어떤 자들은 아예 검종맹이나 잔혼각, 적룡혈운도로 투신하여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기도 했다.

무림은 오십 명이 채 되지 않는 척살대로 인하여 혈풍에 잠겨버렸고 부운청풍객등 삼인의 세력은 그것을 기화로 무림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오직 웅크리고 있는 구대문파와 단혼곡, 그리고 해남도등의 세력 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위용을 자랑하던 백검보도 귀산의 무림대회에서 멸망해버렸고, 보주인 검성 당이정과 만박노조는 어디론가 잠적해버렸다.

명실공히 검종맹과 잔혼각, 그리고 적룡혈운도의 수중으로 천하는 떨어져 버렸다.

그들의 만행이 각지에서 자행되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이 야망의 세계...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삼인은 서로를 노리기 시작했는데 일시 잠잠해지는가 싶었던 천하는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은사(隱四)가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금포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본좌가 직접 키운 은사가 죽었단 말이지? 고검문준가 하는 놈에게...]

[...!]

허공의 한 자락에선 침묵을 지켰고 금포노인은 살기를 꾹 억누르는 듯이 보였다.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은사의 무공을 너와 비교하면 어떠하냐?]

[오백초는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자에 대해서 다른 할 말은 없는가?]

[무림에 대해 한이 많습니다. 은오(隱五)의 전서에 의하면 무림을 멸망시킬 생각까지 갖고 있습니다.]

금포노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를 건드리지 마라. 야망이 없는 자를 야망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우를 범할 순 없다. 그가 강하고 약하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은육(隱六)을 만박에게 보내라. 만박을 죽이려는 자는 먼저 죽여라. 그를 철저히 보호하라. 단, 지금처럼 자유를 보장한 상태에서...]

금포노인은 이상하리만큼 만박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존명!”

허공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침묵이 실내에 흘렀다.

[화와 복은 서로 멀리 있지 않고, 기회와 위험은 항상 같이 한다! 은세정검회의 꼬리가 드러난 지금 고검문주가 나타나고 또 석두공이라는 애송이가 날뛴다. 하지만... 은세정검회만 부순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본좌가 직접 상대할 터이니... 또한 기계인간이 있지 않은가?]

노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발작적으로 외쳤다.

[미사! 울어라!]

[...?]

미사는 금포노인의 엉뚱한 요구에 어리둥절했으나 즉시 그의 명령에 따랐다.

[흑흑흑... 엉엉... 흑흑흑... ]

그녀는 금포노인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해 큰소리로, 그리고 정말 슬픔이 복받쳐 오르는 듯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요염하게 보이기 위해 몸을 비틀고 비통하게 몸부림쳤다.

노인은 다시 외쳤다.

[묘선(猫仙)! 웃어라!]

묘선이라는 여인은 귀여운 암코양이 같아 보였다.

어딘지 연약해보이면서도 앙칼진 데가 있었다. 또한 오밀조밀하면서도 색정을 풍겨내는 듯한 작은 둔부를 지닌, 그야말로 암코양이 같은 여자였다.

[깔깔깔깔... 호호호호...]

그녀는 코가 둘러빠질 듯이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엉엉... 흑흑흑...]

[깔깔깔... 까르르르... 호호호... ]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묘한 부조화를 이루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노인이 눈에서 기이한 광채를 띠며 명령했다.

[환사! 묘선의 둔부를 때려라. 욕을 하면서 때려라.]

[장희(薔姬), 미사를 개처럼 물어뜯어라.]

노인은 괴이한 요구를 마구 늘어놓았고, 여인들은 그의 명령을 한치도 어김없이 이행했다.

울음소리와 눈물이 배어나올 듯한 웃음소리, 그리고 욕소리와 개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함께 터져 나왔다.

미친 짓이었다.

침상위의 여인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노인은 음악을 감사하듯이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울고 웃고, 개처럼 짓고 물어뜯고 때리고 욕하고...

광란의 도가니 속에서 노인은 참선하는 듯이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번쩍!

노인이 감았던 눈을 떴다.

[한 달... 앞으로 한 달, 늦어도 한달 보름이면 모든 것은 끝난다. 더 빠를 수도 있다. ]

낮게 중얼거린 노인이 큰소리로 말했다.

[전 제자들을 무림으로 내보내라. 앞으로 한달 이내의 무림 동정에 대해서는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주시해라. 은세정검회가 움직일 것이다. 그들의 본거지를 찾아야 한다.]

[존명!]

허공의 일각에서 소리가 들렸다. 약간 흥분한 듯한 음성이었다.

여인들도 모두 미친 짓을 그만두고 가만히 있었다.

금포노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정말 움추려야 할 때다. 은세정검회를 멸망시키기 위해... 본궁의 천년을 기다려온 소망이 눈앞에 다다랐다.]

스으으으!

노인의 몸이 구름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그는 놀랍게도 그동안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침상을 떠나 문을 나서고 있었다.

여인들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궁...궁주님... ]

[궁주님... ]

순간 침상에서 새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르르르...

지옥의 마화같은 푸른 불꽃은 침상과 그 위의 여인들까지도 동시에 재로 만들어버렸다.

푸른 불꽃 속에서 여인들이 몸부림치다가 재로 변해갔다.

침상도 여인들도 모두 재로 변하고 났을 때 불꽃은 절로 사그라졌다.

그동안에 수 없이 벌어졌던 육체의 향연이 펼쳐졌던 흔적은 이 세상에서 모두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문이 열리고 네 명의 미소년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빗자루로 재들을 쓸어담아 밖으로 가져가 버렸다.

궁주의 유일한 여인이고 싶었던 미사의 꿈도 한갓 푸른 불꽃 속에 재로서 사그라져 버렸고, 청춘과 인생의 참된 모습을 느껴보지 못하고 오직 왜곡된 정사의 도구로 살아왔던 가련한 젊음도 그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피를 먹고 영웅은 자라고, 남자의 야망은 여자의 한을 먹고 이루어진다.

오직 한 사람의 야망을 위하여,

그 야망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졌던 여인들...

그녀들의 숨결은 독존패왕궁에 연기가 되어 흘러들어갔을 것이건만...

 

× × ×

 

[크하하하하... ]

적룡혈운도주 해천월은 비분강개한 광소를 터뜨렸다.

잔혼살객과 부운청풍객 심제을이 그의 앞에 우뚝 서있었다.

[크흐흐흐... 잔혼살객! 다음 번엔 네 차례다. 심제을 저 위선자가 너를 내버려 둘 것같은가?]

해천월이 잔혼살객을 노려보며 이를 갈앗다.

[천하는 혼자서 다스리기엔 너무 넓지. 부운청풍객은 물론 나를 죽이고 싶겠지만 일인천하는 결코 오래갈 수가 없지. 통제력이 약해져서 금방 무너지고 말테니까. 후후후... ]

잔혼살객이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심제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셋이 나눠 갖기는 너무 좁지.]

[크하하하! 심제을 기억하느냐? 오년전에도 너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느냐? 천하는 열이 갖기는 너무 좁다고... 잔혼살객, 이래도 심제을을 믿는가?]

해천월의 말에 잔혼살객은 히죽 웃었다.

[물론 믿지 않지. 후후후후! 하지만 나를 죽일 수 없지. 왜냐하면 그에겐 너를 죽일 때처럼 그를 도와서 나를 죽일 인물이 없거든. 비록, 몇 수 앞선다고 하지만 나를 죽이자면 그도 피해를 감수해야 할테니... ]

[좋다. 꼭 나를 죽여야 한다면 죽여라. 하지만 네놈들도 얼마가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고수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해천월은 포기한듯이 가슴을 내밀며 소리쳤다.

피이잉!

잔혼살객의 헐렁한 소매가 흔들리며 붉은 빛이 번쩍했다.

[당연히...]

퍼억!

해천월의 이마에 붉은 못이 박혔다.

그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너무 간단하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번쩍!

갑자기 심제을의 장검이 빛을 발했다.

잔혼살객이 벼락같이 물러서며 소리쳤다.

[나마저 죽일 생각이오?]

[천만에... 일인자이면 족하지 궂이 천하를 다 거머쥐어야만 할 필요는 없지.]

철컥!

심제을이 장검을 다시 꽂았다.

죽어있는 해천월의 얼굴 가운데로 가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심제을의 장검이 만든 흔적이었다.

쩌억!

한데 해천월의 얼굴에 그어진 가는 선이 갑자기 양쪽으로 돌돌 말리는 것이 아닌가?

드러난 얼굴은 해천월이 아닌 전혀 엉뚱한 자였다.

[제기랄! 놈이 기미를 알아채고 도망쳤군.]

잔혼살객이 그자의 머리를 밟았다.

퍽!

두개골이 깨어지며 뇌수가 흘러나왔다.

[늙은 여우가 수작을 부렸어. 이놈은 부도주인 능특서(凌特瑞)라는 놈이오. 깨끗이 당했군.]

심제을이 돌아서며 말했다.

해천월은 미리 심제을의 생각을 예측하고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모든 세력이 파괴되었으니 다른 생각은 못할 거요.]

[안심하진 못하겠군. 난 그자를 뒤쫓아야 겠소.]

[좋도록 하시오.]

스으으으!

잔혼살객은 허공을 밟고 걸어가더니 잠시 후에 모습을 감추었다.

심제을이 중얼거렸다.

[너는 내 방패이지 방패... 나를 죽이려는 자는 아마도 내 수족을 자른답시고 너부터 죽이게 될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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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장

 

               수라장이 된 무림대회 (2)

 

 

 

휘이이익!

사사사삭!

만박노조와 검성은 수십리를 펼쳐진 푸른 갈대밭을 이를 악물고 달렸다.

척살대에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무슨 수가 있더라도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

설사 후일을 기약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값없는 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다.

만박노조가 달려가면서 허공에 대고 물었다.

[섬쾌(閃快)! 그들은 얼마나 쫓아왔는가?]

허공에서 섬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이미 앞쪽이 막혔습니다.]

검성이 놀라며 만박노조를 바라보았다.

만박노조가 물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하느냐?]

[북쪽으로 가십시오.]

파앗!

만박노조는 주저하지 않고 북으로 방향을 바꾸어 갈대밭을 벗어났다.

갈대밭 밖은 은신할 곳도 마땅치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섬쾌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한데 그들이 사라진 직후였다.,

휘익!

그 자리에 갑자기 한사람이 나타났다.

척살대의 이십칠호 척살객!

[후후후... 어느 누구도 우리 손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자는 냉소하며 말했다.

그의 눈은 만박노조와 검성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헌데 그때였다.

[예외는 항상 있는 법이다.]

갑자기 그의 앞쪽에 흐릿한 몽영이 생기면서 말했다.

파앗!

이십칠호는 순간적으로 팔황지옥도를 펼쳐냈다.

상대가 누구든 일단 베고 볼 일이었다.

[팔황지옥도... 본좌는 이미 이십 년 전에 그것을 익힌 바 있지.]

몽영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음성이 이십칠호의 뒤에서 들려왔다.

[누구냐?]

이십칠호가 당황하며 물었다.

몽영이 차갑게 내뱉었다.

[만박노조를 쫓지 마라. 그는 너 따위가 쫓을 하찮은 분이 아니시다.]

[개소리!]

촤아아아!

이십칠호가 번개처럼 팔황지옥도를 펼쳐냈다.

도기가 하늘까지 뻗칠것 같았다.

하지만,

[어리석은 놈!]

몽영의 입에서 싸늘한 외침이 터져 나오더니 붉은 손바닥이 허공에 떠오르며 이십칠호의 가슴에 가서 부딪혔다.

퍼엉!

이십칠호의 몸이 기우뚱 하며 쓰러졌다. 몸에는 아무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굳어진 얼굴에 경악한 표정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말했거늘...]

스스스!

몽영은 나직한 소리를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한데 그 음성은 만박노조의 비밀호위 중의 한사람인 환사(幻死)의 음성이 아닌가?

만박노조가 상대하기 어려운 척살대의 인물을 이렇듯 가볍게 죽이는 그의 비밀호위 환사...

그리고 그가 말하는 만박노조의 신분은 대체 무엇인가?

 

***

 

북쪽!

만박노조와 검성이 달려가는 방향이다.

하지만 만박노조의 충실한 수하인 섬쾌는 방향을 잘못 잡았다.

이쪽으로는 금사종이 석두공을 안고 달려가는 바람에 그를 뒤쫓는 척살대의 인물들이 삼십 여 인이나 달려가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불과 이십리도 달리지 않아서 만박노조와 검성이 알게 되었다.

그들의 앞쪽에서 네 명의 척살객이 금사종의 흔적을 찾으며 땅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성과 만박이다. 죽이자!]

척살객 중의 한 사람이 그들을 발견하고 말했다.

[삐이익!]

휘파람 소리가 퍼져나가고 다시 세명의 척살객이 더 나타났다.

스르릉!

검성은 주저없이 검을 뽑았다.

[이제 죽어야할 때인 모양이오. 하나라도 죽여서 무림에 보탬이 됩시다.]

만박노조의 얼굴에도 비장한 빛이 감돌았다.

[허허허허...]

그의 입에서 괴이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슴을 후벼파는 듯 내장을 도려내는듯 아픔이 서려있는 웃음소리였다.

그에따라 주변 숲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허무살소(虛無殺笑)!

만박의 절기들 중의 한가지였다.

척살객들이 허무살소의 기습에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그때였다.

[일검만검(一劒萬劒)! 섬전사일(閃電射日)!]

검성이 벼락같이 날아들며 소리쳤다.

그의 검은 갑자기 수백 개로 변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일곱 명의 척살객을 무찔러갔다.

“허억!”

“이런....!”

척살객들이 대경실색하며 물러섰다.

그 순간 수백 개의 검들이 다시 하나로 모이면서 그들 중의 한명의 허리를 베어버렸다.

파앗!

척살객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상체가 날아올랐다.

베어진 허리로 피와 내장이 쏟아졌다.

검성으로서는 평생의 진력을 모두 그 한초식에 담은 것이었다.

[이런 개같은!]

다른 척살객이 분노하여 소리치며 검성을 공격했다.

[구가천마검법!]

한사람이 고함치며 검을 들어 검성을 가리켰다.

검성은 팽이처럼 몸을 돌리며 옆으로 이장이나 물러섰다.

하지만,

파앗!

어느새 가공할 검기가 그의 소매자락을 베고 지나갔다.

검성은 이를 악물고 반격을 개시했다.

[파벽뇌(破壁磊)!]

구가천마검법이 빠르기와 강함을 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검성이었다.

도저히 그 빠르기와 강함으로서 구가천마검법을 상대할 수는 없다.

검성은 느리고 둔중하지만 결코 피하기가 쉽지 않으며 부딪히게 된다면 무엇이든 깨뜨려버리는 무거운 중검(重劒)의 수법을 펼쳤다.

펑!

[헛! 이늙은이가... ]

구가천마검법을 펼쳤던 척살객이 놀라며 물러섰다.

그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검성의 내공에 정면으로 부딪혀 오히려 손해를 본 것이었다.

쐐애액!

만박노조가 단검을 뽑아들고 한명의 척살객을 향해 돌진했다.

쩌어어엉!

척살객의 도가 번득이며 그를 향해 떨어졌다. 팔황지옥도법이었다.

만박노조는 다시 번개처럼 물러났다.

스파앗!

그러나 척살객의 잔인한 도는 그를 따라붙으며 머리를 쪼개오고 있었다.

만박노조가 몸을 낮추고 빙글 돌았다.

도가 그의 이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만박노조의 단검이 그자의 다리를 베었다.

파앗!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자는 고통도 모르는 듯이 다시 만박노조의 목을 베고 있었다.

(헉! 피할 수 없다!)

만박노조의 머리 속으로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이었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헌데 그때였다.

띵!

갑자기 그의 목을 베던 척살객의 도가 옆으로 튕겨나 허공을 베었다.

[...!]

[...!]

두 사람 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빨리 죽여버려!]

그때 다른 척살객들이 소리치며 만박노조와 검성에게 달려들었다.

각기 두 사람씩 더 검성과 만박에게로 달려들었다.

혼자서도 상대하기 어려운 척살객, 한꺼번에 세사람 씩 상대해야 할 경우가 되었으니 죽음은 그들의 목전에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파아아앗!

한줄기의 백광(白光)이 긴선을 그리며 숲에서 날아와 검성과 만박의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피... 피해라!]

“어...어검술!”

척살객들이 경악하며 훌쩍 뒤로 물러섰다.

휘이이이!

백광은 다시 숲쪽으로 날아갔다.

이어 숲속에서 마치 신선같은 노인이 걸어 나오며 백광을 받아들었다.

백광은 한자루의 검이었다.

노인의 눈에서는 횃불같은 광채가 번득이고 몸에서 풍겨나는 기도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사람을 압박하고 있었다.

검성이나 만박노조 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수였다.

이때 노인을 바라보는 검성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털썩!

그는 눈앞의 척살객들을 버려둔 채 무릎을 꿇었다.

[정녕... 사존(師尊)이십니까?]

[아직도 노부를 스승으로 생각하느냐?]

노인이 그의 앞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

검성이 두려움에 떨면서 말했다.

[제자가 어찌 사부님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만박노조와 척살객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있었다.

검성만 하더라도 십대고수의 일인이며 당금 무림의 원로이다.

한데 그의 스승이 나타나다니...

만박노조는 검성이 고검문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눈앞에 말로만 전해지던 고검문의 문주가 서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검성의 스승인 고검문주 섭군천이 차가운 음성으로 내뱉었다.

[노부는 네게 검법을 가르쳤다. 한데 너는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 검법을 갈고 닦음으로써 무림의 정기를 수호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얄팍한 지혜에 의지하는 무인(武人)답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검성은 머리를 땅에 찧으며 말했다.

[제자 부족합니다. 부디 스승님께서 이끌어 주십시오.]

[지혜에 의지하면서도 너는 사제인 심제을의 간계에 빠져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무인으로 가르쳤건만 무인답지도 못하고, 지혜도 참다운 지혜를 따르지 못했으니 이래도 내 제자라고 할 수 있느냐?]

섭군천의 준엄한 말이었다.

만박노조가 허리를 깊히 숙이며 말했다.

[당노제가 그렇게 된 데에는 전적으로 후배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검성을 그릇되게 했습니다.]

섭군천이 차갑게 말했다.

[감히 노부 앞에서 검성을 운운하는가?]

[...!]

검성과 만박노조는 섭군천의 위세에 눌러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같았다.

여섯 명의 척살객들도 달아날 생각도 못하고 멈칫멈칫하고 있었다.

싸우지 않아도 섭군천의 무공은 그들을 몇 초 이내에 죽여버릴 능력이 있음을 그들은 느끼고있었던 것이다.

섭군천이 두 사람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년 칠월까지다. 칠월이 되기 전에 심제을의 목을 내 앞에 갖다놓지 않는다면... 먼저 너희들부터 죽이겠다. 너희들을 시작으로 무림에서 칼든 자와 주먹쥔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버리겠다.]

엄청난 살기!

초목이 벌벌 떨릴 것같은 살기였다.

검성을 비롯한 자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섭군천의 눈이 척살객들에게로 향해졌다.

부르르...

척살객들이 벼락을 맞은듯 떨었다.

섭군천이 일갈했다.

[떠나라! 내 적이 아니기에 죽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부의 일을 방해한다면 모조리 찢어 죽이겠다.]

휘휘휙!

척살객들은 부리나케 달아나 버렸다.

자존심이 강한 무림인들이 달아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인데, 그것도 능력이 엇비슷한 자들끼리의 이야기다.

고검문주 섭군천 앞에서 무공으로 맞서려는 것은 당랑거철(螳螂拒輟)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이 사라지자 섭군천은 돌아섰다. 허공의 일각에서 기이한 움직임이 있었다.

순간,

[요망한 것!]

섭군천의 호통소리가 터져 나오며 백광이 긴선을 그렸다.

파악!

허공의 일각에서 피분수가 솟구치더니 두 토막이 난 시체가 땅으로 떨어졌다.

[크윽! 이 이럴 수... 궁주께 이 사실... ]

[섬쾌!]

만박노조가 소리쳤다.

섬쾌는 눈을 까뒤집고 죽어버렸다.

그 사이에 섭군천의 모습은 그 순간에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만박노조가 원망스런듯이 말했다.

[벌써 육십 년... 그동안 섬쾌는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도 없었거늘... 왜 섬쾌를... ]

푸르르르!

그러나 그 순간 숲에서 한마리의 전서구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전서구가 매달고 가는 서찰에는 암호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

고검문주가 드디어 나타났...

가공할 무공... 은사(隱四)가 일초에 당했...

주의요합...

은세정검회의 인물로 사료되는 두 소녀가 귀산에서 모습을 드러냈...

앞으로 은세정검회의 전모가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

은오(隱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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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十 章

 

            修羅場이 된 武林大會 (1)

 

 

 

군웅들은 저자가 석두공이구나 하면서도 내심 못미더워했다. 그렇게 고수같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형도객이 반색하며 그를 맞았다.

[이제 왔는가? 수고했네. 정말 애썼네.]

하지만 석두공의 그의 말을 듣지 못하는 듯 말했다.

[빨리 이곳을 피해야합니다. 척살대가... 척살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무형도객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들이 벌써 나왔단 말인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소이다. 전멸당하지 않으려면 모두 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석두공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을 만났는가?]

[그들을 목격하진 못했지만 의형인 일초진천수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석두공은 말을 하면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부상을 당했는가?]

[아닙니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을 뿐입니다. 어서 저들을 피신시켜야 합니다. 척살대는 모두 삼마경을 익혔습니다.]

석두공은 양주를 떠난 이후 단 한번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무형도객은 북위로 뛰어올라가 소리쳤다.

[여러분들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돌아가도록 하시오. 어서!]

그의 말에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갑자기 돌아가라니 무슨 말이오? 영문을 말하시오!]

[적들의 척살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소. 빨리 피해야하오.]

[물은 제방을 쌓아서 막고 적은 적은 병사로써 응한다고 했소. 적이 온다면 맞서 싸워야지 그 무슨 말씀이시오?]

군웅들이 아우성을 쳐대었다.

[말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소이다.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무형도객이 다시 외쳤다.

웅성웅성...

광장은 질서를 잃고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소리 높여 무형도객을 욕하는 자들도 있었고 무슨 영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슬금슬금 내빼기 시작하는 자들도 있었다.

석두공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 × ×

 

장강으로 흘러드는 한수(漢水)의 푸른 물결,

그 푸른 물결위로 새처럼 낮게 날아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쉬이이이이!

쉬이이이잉!

수효는 일백,

그들은 한무더기의 구름처럼 날아서 귀산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검과 도, 또는 다른 기이한 병기를 가지고 있는 자들...

그들은 바로 척살대였다.

삼인이 무림의 모든 고수들을 제거하기 위해 삼마경으로 연성시킨 그들이 무림대회의 장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귀산의 광장은 척살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혼란에 빠져버렸다.

질서를 잃은 군중들이 어지러운 물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고함치며 서로 삿대질 하는 자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더욱 고함치는 자들로 귀산의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무림인들은 척살대의 무서움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석두공을 부르며 소리쳤다.

[석두공 소협은 뭘 하시오? 그들이 온다면 물리쳐야 할 게 아니오?]

[우리가 힘을 모았는데 누가 우릴 공격할 수 있단 말이오?]

의기가 충천하는가 아니면 소란이 극심해 질뿐인가?

군웅들의 아우성으로 인해 어떤 말도 주고받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때였다.

슈아아앙-!

갑자기 전망대의 왼쪽에서 일백 여 명의 인물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늦었다.]

석두공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어서 도망치시오. 척살대요.]

무형도객이 소리쳤으나 군웅들은 오히려 병기를 뽑아들었다.

창차차차차!

병기가 뽑히는 금속성이 한동안 귀산을 메아리쳤다.

슈슈슈슈...

일백 여 명의 척살대가 양떼들에 덮쳐드는 늑대들처럼 날아들었다.

[차앗!]

쐐애액!

석두공이 극심한 피로를 무릅쓰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값을 못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철사보주 맹호산도 버럭 소리치며 날아올랐다.

[이놈들! 죽어라!]

파파팟!

그는 한 쌍의 판관필로 잇달아 여덟 개의 초식을 펼치며 척살대를 막아섰다.

[와아아아!]

군중들이 그의 멋들어진 모습을 보고 환호했다.

석두공은 척살대의 선두에 돌입하며 고함쳤다.

[회천마벽(廻天魔劈)!]

고오오오!

석두공의 몸 주위의 공기가 소용돌이치면서 척살대를 부딪혀갔다.

차차차창!

하지만 척살대의 인물들 중의 일부가 검을 떨치는 순간 석두공이 일으킨 회천마벽은 종이짝처럼 찢어지며 흩어져 버렸다.

그때 맹호산의 초식도 척살대에 다다랐다.

한데 척살대는 그의 초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빠른 기세로 그를 지나쳐 버렸다.

맹호산은 크게 당황했다.

쏴아아!

벌떼처럼 날아든 척살대는 이제 석두공의 몸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고오오!

석두공의 몸에서 호신강기가 펼쳐졌다.

파파팟! 촤아악!

거의 동시에 맹호산의 몸이 수백 점의 고기조각으로 변하며 허공에 피를 뿜었다.

[으아아악!]

그의 비명이 귀산을 울렸다.

척살대가 지나치면서 이미 그의 몸은 난도질당한 후였던 것이다.

퍼퍽!

석두공의 호신강기가 깨어지면서 그의 몸에서도 군데군데서 피가 솟았다.

군웅들은 척살대의 가공할 힘에 전율했다.

십대고수의 한사람인 철사보주 맹호산이 저항도 한번 못해보고 죽었다!

이것은 척살대가 무림대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모두 흩어지시오!]

무형도객의 소리가 다시 광장을 뒤흔들었다.

쩌어어엉!

이미 척살대를 맞아가는 그의 전신에서 백색의 도광이 쏟아져 나왔다.

[으와와와...! ]

군웅들이 비명을 지르며 귀산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제히 경신술을 펼치며 날아오르는 그들은 메뚜기 떼를 방불케했다.

파파팡!

무형도객의 백색도광은 척살객들 중 세 명이 동시에 펼쳐낸 팔황지옥도에 가로막혔다.

“가요 백언니!”

장지연과 백란이 날아올라 무형도객과 쓰러진 석두공을 향해 쏘아갔다.

검성과 만박노조도 척살대를 공격해갔다.

그러나 해남검파의 진우백과 그 제자들은 소리없이 광장에서 빠져나갔고,

단혼곡주 하삼풍도 그의 제자들을 데리고 군중들 틈으로 달아나 버렸다.

극히 몇 사람 만이 척살대를 가로막았고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만박노조가 고함쳤다.

[천강검진을 펼쳐라!]

백검보의 검객들이 비장한 신색으로 천강검진을 펼쳤다.

그리고 검성과 무형도객, 만박노조와 호표장주 설곽 및 삼노장의 세 노인이 연계하여 척살대를 가로막았다.

척살대의 하나하나의 무공으로 따지자면 검성을 능가할 자는 없는 것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수효는 일백, 뭉쳐진 그들의 힘은 진정 가공했다.

석두공이 비칠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주변으로 장지연과 백란이 호위하듯 둘러서서 연검과 옥퉁소를 사용하여 척살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연검은 살아있는 빛이 되어 사장방원을 뒤덮었으며,

삘리리리...

옥퉁소에서 흘러나온 음은 척살대의 인물들이 정신을 혼돈하게 만들고 또한 은연중에 공력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

또한 백란의 무공은 기이하도록 고강하여 옥퉁소를 불면서도 연신 그녀의 발은 풍차처럼 움직이며 발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무공은 아버지인 무형도객에 비해 오히려 뛰어나 보였다.

척살대도 두 소녀의 필사적인 대항에 주춤하며 그녀들의 곁으로는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백검보의 천강검진은 깨어지고 다른 사람들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다.

검성도 무형도객도 다 부상을 입었다.

호표장주 설곽의 오호단혼도가 무서운 기세로 척살대에 대항했다.

하지만 그의 오호단혼도 역시 척살대가 펼치는 팔황지옥도를 당해낼 수 없었다.

겨우 일어선 석두공의 귓전으로 예리한 전음이 파고들었다.

[아우! 왜 아직 도망가지 않았나? 이들은 모두 시한부의 생명이라 몇 달만 지나면 모두 시체가 되고 말텐데... 내가 도울 테니 어서 이들을 데리고 떠나게. 자넨 너무 지쳤어 빨리 가게. 천추의 한을 남기지 말고... ]

금사종의 급박한 전음이었다.

석두공은 돌연 이를 악물고 뇌성벽력같은 소리를 냈다.

[천신폭풍보!]

쿠아아아아앙!

그의 몸에서 엄청난 강기가 뿜어지며 양쪽에 섰던 장지연과 백란이 퉁겨나갔다.

그리고 그의 몸은 강기속에 묻히며 척살대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콰아아아아...

그가 스치는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날아올랐다.

바위도 검도 도도 시체조차 상관 없었다.

그의 천신폭풍보의 위력이 미치는 것은 모조리 가루가 되어 버렸다.

[크아아아아!]

척살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신폭풍보의 엄청난, 상식을 벗어난 가공한 위력 앞에선 그들도 발악 속에 가루가 되어갔다.

검성 등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든 것이 단 한 순간에 일어났다.

한데 척살대의 반수 이상이 가루로 변해버렸을 때 천신폭풍보의 기세가 약해지며 석두공이 뚝 떨어져 내렸다.

척살대의 인물들이 석두공을 향해 덮쳐들었다.

[아악!]

장지연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때 석두공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척살대 중의 한 인물이 갑자기 석두공을 안아들고 다른 척살대를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파아아앗!

그의 소매 속에서 한자루이 장검이 쏘아나오며 동시에 두 사람의 척살대를 베었다.

[크아악!]

번개를 방불케하는 쾌검이었다.

슈아아앙!

척살대를 벤 자는 파혼검이었다.

쐐애액!

그는 석두공을 안아들고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쳤다.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이 펼쳐지면서 그의 몸은 빛살처럼 빠르게 산아래로 달려갔다.

[배신이다!]

척살대의 인물들이 소리치며 파혼검을 뒤따랐다.

무형도객 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화라락!

그들은 어떻게 돌아가는 사정인지는 잘 몰랐지만 척살대가 달려가는 반대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크아아악!]

[으악!]

비명이 꼬리를 물고 들려오고 있었다.

척살대의 인물들은 파혼검, 즉 금사종을 뒤쫓는 과정에서 마주 치는 모든 무림인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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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장

 

             귀산의 무림대회 (3)

 

 

누군가가 소리쳐 물었다.

[석두공이 누구요?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오. 돌대가리라는 그 말이 이름이오 아니면 외호요?]

[와하하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설곽이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말했다.

[이름이오. 조금 남다른 이름이긴 하지만 이곳에서 무공으로 그를 능가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오. 만약...]

[...!]

[...!]

설곽이 잠시 말을 끊자 장내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모여들엇다.

[이 자리에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노부는 자천을 해서 다른 분들과 비무하도록 하겠소. 사실대로 말하자면 노부는 석두공 소협 이외에 지금 추천된 어느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소.]

웅웅웅...

내공이 엄청나게 깃든 그의 음성은 소용돌이 치듯이 귀산을 울렸다.

군웅들의 안색이 변했다.

또한 설곽의 무공을 잘 모르던 하삼풍 등도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곽의 공력은 그들에 비해서 손색이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삼노장의 팽덕이 일어나서 말했다.

[노부의 생각도 근본적으로 설문주와 같소이다. 석두공 소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노부도 다른 분들과 비무를 해볼 생각이오.]

석두공... 석두공...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너도 나도 석두공하는가?

그만 없다면 검성이고 십대고수고 간에 나서서 맹주의 자리를 노려보겠다고 말하는 고수들이 잇달아 나오지 않는가?

군웅들의 관심은 온통 석두공이라는 사람에게로 쏠렸다.

그때 무형도객이 말했다.

[사실 본인도 석두공 소협을 추천할 생각이었소. 그는 작고하신 천하제일인이신 무치 동호천 노선배의 직전제자이시오.]

술렁술렁...

동호천의 제자라는 말에 군중들은 앞뒤를 돌아보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림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오년 전, 동호천이 작고하면서 부터였음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살아있을 때는 풍진기인으로 천하를 유람하며 지냈던 그였지만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던가 하는 것을 모든 무림인들은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치 동호천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천하는 여전히 태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동호천의 제자가 이번 무림대회를 주관했으며 고수들이 추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워 할 뿐이었다.

동호천의 제자, 무치 동호천은 제자를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검성이 조용히 일어서며 말했다.

[무형도객의 말이나 호표문의 설문주의 말이나 삼노장의 팽장주 말이나 모두 옳소이다. 노부는 단언하건데 이 자리에 석두공 소협보다 무공이 더 강한 분은 없으리라 생각하오.]

[노부의 의견도 검성과 같소이다.]

만박노조도 검성의 말에 찬동했다.

군웅들은 더욱 술렁거렸다.

누군가가 소리쳐 물었다.

[그럼 그 석두공 소협은 지금 어디 계시오? 어째서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소?]

군웅들 모두의 궁금함이었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우리가 이곳 귀산에서 무림대회를 연다는 것은 천하에 널리 알려진 일이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도들께선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검종맹이나 잔혼각, 적룡혈운도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을 것이오.]

[그렇소.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군. 나도 집에서 나올 때 검을 갈아서 나왔는데 오는 중에 한번도 써보지 못했소.]

누군가가 소리쳤다.

무형도객의 말이 이어졌다.

[석두공 소협은 여러분들이 이곳에 무사히 당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검종맹과 잔혼각, 그리고 적룡혈운도의 총단을 단신으로 공격했었소. 그들은 그 피해로 인해 이곳으로 올 여력이 없었던 것이오.]

군웅들 중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다.

[혼자서 세 곳의 총단을 공격했단 말이오? 그가 신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농간이다. 석두공이란 자에게 우리를 고스란히 바치려는 농간이다.]

누군가 술병을 던지며 농간이라고 고함쳤다.

순간,

취릿!

은색검광이 허공을 가르며 던져진 허공을 휘감았다.

한 소녀가 가늘고 긴 연검을 뻗쳐들고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허공에서 순식간에 열여덟 번의 자세를 바꾸며 옆으로 움직여갔다. 마치 선녀가 하늘을 나는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술병이 던져진 곳을 정확하게 찾아내서 내려섰다.

그녀는 장지연이었다.

화가 잔뜩 난 듯한 그녀가 털보장한의 목에 연검을 겨누면서 소리쳤다.

[뭐가 농간이라는 것이냐? 농간이라면 그것을 증명해라. 그렇지 못한다면 즉시 목을 베어버리겠다.]

검이 살짝 흔들리자 연검에 매달렸던 술병이 소리없이 베어져 떨어졌다.

털보장한은 싸늘한 감촉이 목으로 전해지자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인간의 무공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농간이라고 생각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것을 증명이라고 하느냐?]

장지연이 서릿발같이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인간의 무공이 그렇게 강하면 안되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때였다.

[어린 계집애가 검을 너무 함부로 쓰는 구나. 본 곡주가 버릇을 가르쳐 주겠다.]

하삼풍이 둥실 떠오르면서 나직하게 소리쳤다.

장지연이 차갑게 내뱉었다.

[이제 보니 저 능구렁이를 추천한 자였군. 아마도 능구렁이의 제자중 하나겠지?]

[다... 닥쳐라! 난 하곡주님을 모른다.]

털보장한이 당황하여 외쳤다.

[흥!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맹주로 추천해? 웃기는 일이군!]

털보장한의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그때 하삼풍이 그녀의 뒤로 이르며 소리쳤다.

[버릇을 고쳐주마!]

그의 손에서 백광이 번쩍였다.

[장매! 조심해 단혼장(斷魂掌)이야!]

백란이 고함치며 몸을 날렸다.

스읏!

순간 장지연의 연검이 살아있는 듯이 백광을 뿌리며 뒤로 향했다. 손은 여전히 앞을 향한 그대로인데 연검만이 휘어지며 하삼풍을 공격해나간 것이었다.

연검의 빠름은 실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어검술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파파팍!

하삼풍은 손을 거두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장지연은 그의 단혼장을 깨끗하게 막아낸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폭풍무존에게 배운 검법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라라락!

중인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그녀의 위기를 보고 몸을 날렸던 백란이 그녀의 곁으로 내려섰다.

[아주 훌륭한 검법이야! 장매!]

장지연은 생긋웃고 말했다.

[이건 내가 석두공 소협으로부터 배운 거예요. 만약 그가 직접 펼쳤더라면 하곡주께선 이미 지옥을 구경하고 게실 걸요?]

그녀는 비웃음을 던지고 백란과 함께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

하삼풍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더 싸우게 된다면 그가 패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초에서 그녀에게 밀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휘이익!

한줄기 흰 그림자가 포물선을 그리며 광장의 중간으로 떨어져 내렸다.

후줄근하게 보이는 백의는 핏물로 얼룩져 있었으며 짧고 노르스름한 머리는 귀에도 닿지 않을 듯하고 그러면서도 호수같이 심원한 눈빛을 가진 미청년이 거무튀튀한 방망이를 들고 서있었다.

얼굴에는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몇 사람이 벌떡 일어섰고 장지연과 백란이 동시에 소리쳤다.

[석두공!]

군웅들은 저자가 석두공이구나 하면서도 내심 못미더워했다. 

그렇게 고수같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형도객이 반색하며 그를 맞았다.

[이제 왔는가? 수고했네. 정말 애썼네.]

하지만 석두공의 그의 말을 듣지 못하는 듯 말했다.

[빨리 이곳을 피해야합니다. 척살대가... 척살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무형도객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들이 벌써 나왔단 말인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소이다. 전멸당하지 않으려면 모두 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석두공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을 만났는가?]

[그들을 목격하진 못했지만 의형인 일초진천수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석두공은 말을 하면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부상을 당했는가?]

[아닙니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을 뿐입니다. 어서 저들을 피신시켜야 합니다. 척살대는 모두 삼마경을 익혔습니다.]

석두공은 양주를 떠난 이후 단 한번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무형도객은 북위로 뛰어올라가 소리쳤다.

[여러분들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돌아가도록 하시오. 어서!]

그의 말에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갑자기 돌아가라니 무슨 말이오? 영문을 말하시오!]

[적들의 척살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소. 빨리 피해야하오.]

[물은 제방을 쌓아서 막고 적은 적은 병사로써 응한다고 했소. 적이 온다면 맞서 싸워야지 그 무슨 말씀이시오?]

군웅들이 아우성을 쳐대었다.

[말씨름하고 있을 시간이 없소이다.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무형도객이 다시 외쳤다.

웅성웅성...

광장은 질서를 잃고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소리 높여 무형도객을 욕하는 자들도 있었고 무슨 영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슬금슬금 내빼기 시작하는 자들도 있었다.

석두공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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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장

 

            귀산의 무림대회 (2)

 

 

 

광장에 쳐져 있는 천막들에는 각기 사람들이 나누어 들어가 있었다.

음주가효가 펼쳐져 있으며 벌써부터 얼굴이 벌건 사람들도 있었다.

하삼풍은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한쪽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흠칫했다.

검성과 만박노조, 그리고 백검보의 전 고수들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 숙연한 표정은 주변의 공기를 가라앉히는 것같았다.

하삼풍이 포권하고 말했다.

[이정께서 먼저 와 계실 줄은 몰랐소이다. 그동안 안녕하시었소?]

만박노조와 검성이 고개만 끄덕여 인사했다.

하삼풍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검성등이 있는 천막의 맞은편으로 갔다.

[초상집같은 분위기로군. 백검보의 오만한 태도가 어딘지 달라진 것같은데...]

무심코 던진 듯한 그의 한마디가 검성과 만박노조의 귀에까지 들렸다.

“휴우....!”

검성이 탄식을 했다.

자신의 부덕함이 이에 이르렀다 싶으니 부끄러워 숨고만 싶었다.

진우백의 해남검파는 이미 쳐져 있는 천막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상하는 용(龍)이 그려진 천막을 빈터에 세우고 들어갔다.

여전히 그들의 그같은 행동에 부러움과 찬탄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진우백은 가마 속에서 결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오가 조금 지났다.

군웅들은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주최자들을 기다리며 웅성거렸다.

[무형도객은 어디 있는가? 그리고 석두공이라는 자는 어떤 자야?]

[어째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지?]

 

검성의 천막과 하삼풍의 천막, 양쪽에서 비슷한 거리에 있는 천막에 있는 군웅들 사이에 아리따운 두 소녀가 앉아있었다.

그들은 장지연과 백란이었다.

장지연이 소곤거렸다.

[그가 과연 어디서 나올까요? 이틀 전부터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는데... 혹시 구대문파를 이곳에 부르기 위해 간게 아닐까요?]

[그렇진 않을 거야. 구대문파에 대해선 내가 단정할 수 없지만 염려하지 않아도 될거야. 그는 아마 또다른 무슨 준비를 하고 있을거야.]

백란이 대답했다.

장지연이 말했다.

[난 아직도 그 숯덩어리가 석두공이라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아요. 그는 무치 동호천 그분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부로 모시고 있었는데... ]

[그가 누군지는 도무지 모르겠어. 세상에 그처럼 무공이 강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어쨌든 난 그를 찾아서 빨리 데려가야만 해. 뇌주탄의 일만 끝나고 나면 함께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백란이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였다.

둥󰠏󰠏둥󰠏󰠏둥-󰠏󰠏!

누군가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큰 북으로 달려가 두드리기 시작했다.

북소리가 번져감에 따라 좌중의 소요는 가라앉고 군웅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였다.

백란의 눈에 반가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북을 두드리던 사람이 북채를 던져버리며 북위로 날아올라갔다.

헌앙한 풍모의 백의중년인, 바로 무형도객이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단지 이름만 들어본 사람이 더 많았다.

무형도객은 내공이 충일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까지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무림동도 여러분, 정말 고맙소이다. 본인은 무형도객이란 허명을 얻고 있는 사람이외다.]

 

󰠏󰠏와아!

 

뭇 군웅들이 환호로써 그의 인사에 답했다.

무형도객의 말이 이어졌다.

[당금 무림은 검종맹과 잔혼각, 그리고 적룡혈운도로 말미암아 혼란스럽기 그지없소이다. 정기는 이미 땅에 떨어졌고 도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소. 능력이 있는 자는 나서려하지 않고 뜻이 있는자는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오.

본인이 전해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들 삼인은 무림의 모든 고수들을 제거해버릴 전문적인 척살대(刺殺隊)를 훈련시키고 있다고 하오. 백만 무림 동도가 힘을 합치지 않고는 이 무림의 존망이 걸린 난국을 타개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외다.]

[...!]

[...!]

찬물을 끼얹은 듯 군웅들은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무형도객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 백만 동도가 힘을 합친다면 그들이 제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어쩔 수 없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무림에 그릇된 야욕을 품은 자는 기필코 멸망하고 만다는 교훈을 후세에 전해줄 수도 있을 것이오. 이 모든 것에 무림동도 여러분의 정의를 수호하려는 붉은 의지가 필요하오.]

[그렇소이다! 더 이상 그들의 발호를 묵과해서는 아니되오. 그들이 다른 문파를 공격할 때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방관해 온 것이 급기야는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소. 그들이 점차 세력을 키워가면 마침내는 모두가 그들의 종이 되거나 죽게될 것이오.]

군웅들 중에서 한 노인이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는 커다란 도를 등에 맸으며 오른팔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으나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무형도객이 포권하며 말했다.

[호표장의 장주이신 오호단혼도 설곽대협이시군요. 설대협의 그같은 의기를 후배는 높이 존경합니다.]

[마땅히 해야할 말을 했을 뿐이오.]

호표장주 설곽은 포권을 한 후에 앉았다.

무림과는 거의 관계를 맺지 않고 지냈지만 호표장주 설곽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군웅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까지 무림대회에 나오자 술렁이며 지금이 어려운 때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또 한사람의 노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노부는 작약을 캐서 먹고 사는 삼노장의 팽덕이란 늙은이요. 설장주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요. 그들의 검은 손은 노부가 있는 시골까지도 뻗치고 있소. 이곳에 오신 분들 중에서도 그들에게 협박을 받거나 하신 분이 적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오. 이래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권각을 배우고 도검을 휘두를 줄 안다고 하지만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소?]

그러자 한 중년부인이 일어서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항주 장보장(藏寶莊)의 며느리로 무림의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룡혈운도와 잔혼각 등을 쳐부수기 위한 무림대회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항주 장보장이라고 하면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끼인다는 갑부 무혁해의 장원임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데 그의 며느리가 무림대회에 불쑥 나타났다는 것은 아주 뜻밖의 일이었다.

또한 장보장이 얼마 전에 의문의 혈겁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다.

사람들의 웅성임 속에 부인의 음성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무형도객이 웅혼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부인께서는 내공을 지니지 않으셨으니 동도여러분께선 모두 조용히 해주시기 바라오.]

그의 음성은 크지는 않았지만 구석구석 또릿하게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금방 광장은 조용해졌고 부인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제가 친정에서 돌아왔을 때, 집은 불에 탔으며 가족들은 물론이고 하인들도 모두 처참하게 죽어있었습니다. 호위무사들의 시체들은 모두 목이 잘려 널려있었습니다. 어린 아들도 딸도 허리가 반으로 잘려서 죽어있었고, 남편의 시체는 반쯤 불에 타 있었습니다!]

중년 부인의 음성은 슬픔마저 초월한 듯 담담했다.

하지만 그녀의 음성을 듣는 군웅들의 가슴에서는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말이 격하게 흘러나왔다.

[저희 집은 무림에 속해있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 집을 멸문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은 강도의 무리입니다.

저는 관(官)에 이 사실을 알리고 이 땅의 주인이신 황제페하께도 진언할 생각입니다. 무림인들을 관에서 간여하지 않는 대신에 무림인들은 황제의 백성인 우리들을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황제께 무림을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진언할 것입니다.]

[...!]

[...!]

무부인은 스스로 격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황제에게 무림에 대한 개입을 요청한다!

 

황실과 무림은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깨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서운 말이었다.

여인의 한이 깊어지면 능히 그럴 수도 있다.

군웅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이내 그것은 장보장을 멸망시킨 것으로 알려진 적룡혈운도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강호의 근본적인 도의마저 무너뜨린 그들을 용서해서는 안되오!]

누군가가 분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옳소! 그들을 영원히 제명시켜야하오.]

누군가 소리치자 군웅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그들을 죽이자!

󰠏그들을 죽여야한다.

󰠏무림인의 터전을 없애는 그들을 죽여야한다!

 

검광과 도광이 하늘을 찌를 듯 번득거리고 군웅들의 함성이 귀산을 무너뜨릴 듯 터져 나왔다.

무부인은 군웅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다.

장지연이 초조한 듯이 물었다.

[그는, 그는 어째서 아직까지 보이지 않을까요?]

[기다려봐, 이제 곧 이곳의 분위기는 무림맹을 결성하고 맹주를 추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될 테니까. 어쩌면 그는 맹주가 되기 위해 나설 준비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 무형도객께서 지원해준다면 그로서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니까.]

백란이 군웅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면서 말했다.

장지연이 놀란 듯이 말했다.

[맹주라고요?]

[짐작일 뿐이야.]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는거죠?]

백란이 미소를 지었다.

[저분은 나와 가장 가까운 분이시거든... ]

[...?]

[우리 아버지야.]

[세상에...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

장지연이 그녀의 말에 입을 짝 벌렸다.

한데 백란, 그녀가 바로 무형도객의 딸이었단 말인가?

 

어쨌든 광장의 분위기는 백란 그녀가 말한 방향으로 이끌려가고 있었다.

맹주를 선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뭉쳐서 삼인에 대항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에 따라 맹주감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먼저 맹주를 추대해야 하오.]

[그렇소, 맹주로 하여금 조직을 정비하고 삼인을 맞아 싸울 체계를 갖추도록 해야하오.]

[맹주를 추대합시다!]

군중들은 너도 나도 한마디씩 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무형도객이 소리쳤다.

[한분씩 말씀하도록 하시오. 이래서는 아무 의논도 되지 않소이다.]

다시 술렁임이 가라앉자 누군가가 일어서서 말했다.

[이곳에는 지금 무림의 대표적인 고수들도 몇 분 계십니다. 그리고, 이름을 숨기고 은인자중하시던 고수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분들 중에서 맹주의 대임을 맡으실 분이 나오리라 생각되기에 두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싶소이다.]

[빨리 말해보시오.]

[어떤 방법이오?]

군웅들이 소리쳤다.

그 사람이 말을 이었다.

[타천과 자천의 방법입니다. 추천을 받으신 분과 스스로 맹주의 대임을 맡아보시겠다고 나서시는 분 모두 맹주의 자격이 있는 것으로 합니다. 그리하여 그분들 끼리 비무를 하여 최후의 승자가 맹주가 되는 것입니다.]

[옳소! 맹주는 무엇보다도 무공이 강해야하오. 무림인이 무공으로 가리지 않으면 무엇으로 고하를 나누겠소?]

 

--옳소! 옳소!

 

군웅들이 산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다른 한 사람이 일어나서 말했다.

[비무는 단지 승부만 갈라야지 서로 죽이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무림의 대적을 상대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소이다. 그러면 이제 후보를 추천하도록 합시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산동 권문의 팽전이 백검보의 보주이신 검성을 추천하외다.]

한 사람의 중년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이라면 능히 맹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같았다.

그때 다른 사람이 일어서며 또 말했다.

[해남검파의 장문인이신 진우백 문주를 추천합니다.]

진우백은 요즘 혜성처럼 부각되고 있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환호로써 답했다.

또 다른 사람이 일어서며 말했다.

[이 대회를 주관하신 분은 바로 무형도객이십니다. 무공으로 보나 그 출중한 협기로 보나 마땅히 맹주가 되실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옳소!]

[옳소!]

무형도객의 이름이 거론되자 군웅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때 냉막한 인상의 노인이 일어서서 하삼풍을 추천했다.

[이 자리는 무공으로 맹주를 뽑는 자리라고 제위들께서 말하셨소. 무공으로 말하자면 단혼곡의 하삼풍 곡주께서도 어느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라 믿소.]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삼풍의 살명이 높기는 하지만 그의 무공이 강한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또 다른 사람이 만박노조를 추천했다.

누군가가 철사보주 맹호산도 추천했다.

그래서 이곳에 온 십대고수는 모두 추천된 것같았다.

그 이후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는지 잠시 거론되는 사람이 없었다.

장지연이 초조한 듯이 말했다.

[언니, 어째서 그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을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자천할 수 있는 기회도 있잖아.]

[난 그를 맹주로 만들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예요. 그가 아직까지 나오지 않으니까 염려스러워서... ]

그때 호표장의 장주인 설곽이 일어났다.

“노부는 다른 분들과 달리 한분의 젊은 영웅을 추천하고 싶소이다.”

웅혼한 내공이 실린 음성이었다.

군웅들은 호표장주 설곽의 공력이 그렇게 뛰어났던가 하고 놀라워했다.

[그 젊은 영웅께서 아직 이곳에 당도했는지는 모르지만 먼저 추천하도록 하겠소이다. 그는 무형도객과 함께 이 대회를 주관한 석두공, 석두공 소협이외다.]

석두공...

모든 무림첩에 적혀있던 얼굴없던 이름이 결국 거론되었다.

하지만 고수들 중에서 그를 모르는 자들은 없었다.

검성과 만박노조등은 고개를 떨구었고 가마속의 진우백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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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九 章

 

            龜山의 武林大會 (1)

 

 

 

 

[무림대회가 개최된다고? 흠... 일이 점점 재미있어 가는군.]

금포노인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그의 앞에 환요가 찻잔을 받쳐들고 꿇어앉아 있었다.

금포노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슬금슬금 스며들었다.

금포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림대회가 펼쳐질 무창으로 가는 무림인들을 아무도 막지 못하게 해라. 세 종놈들에겐 귀산에 모든 자들이 모였을 때 공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인식시키도록... 그 자리가 무림의 무덤이 될 수 있도록 말이야.]

[존명!]

허공의 어디쯤에선가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포노인은 입가에 미소를 피워 올렸다.

지극히 만족스러운 듯했다.

딱딱!

그가 손뼉을 쳤다.

스르르르...

그러자 천정에서 줄이 내려오며 둥근 침상의 주위에 있는 고리에 걸렸다.

줄이 당겨 올라가면서 침상이 천정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간 쯤에 멈춰진 침상의 주변에도 줄들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수십 명의 미소년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다섯 만 남고 물러가라.]

제일 앞쪽의 다섯 명이 남고 나머지는 물이 빠지듯이 나가버렸다.

[올라오라!]

다섯 명의 미소년들은 삼장 높이나 되는 침상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금포노인은 미소년들을 향해서 손을 들어올렸다.

미소년들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슬쩍!

금포노인의 손이 흔들렸다.

파아아아...

순간 다섯 명의 미소년들의 옷이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미소년들의 몸에는 아무 상처도 없었다.

마치 옷이 저절로 분해되어 가루가 된 것같았다.

미소년들은 알몸이 된 채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들의 몸은 예쁘장한 얼굴과는 달리 우람한 근육질이었다.

[초훼! 일어서라.]

금포노인은 그의 뒤쪽에 있는 초훼를 불렀다.

초훼가 일어섰다.

푸스스스!

순간 그녀의 옷도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네가 만족스럽게 저들 다섯을 상대해 낸다면 네게 자유를 주겠다.]

금포노인의 말이 느긋하게 흘러나왔다.

초훼의 어깨가 순간 가늘게 떨렸다.

만족스럽게 상대해 내지 못한다면, 그 댓가로 그녀에게 주어질 것은 죽음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녀는 때때로 주어지는 이같은 시험 속에서 빠져나가 자유로이 살 수 있을 것이다.

“노야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초훼는 금포노인에게 날아갈 듯이 절했다.

그녀의 백옥같은 나신이 움직이자 다섯 미소년의 남성들이 우뚝 치솟아올랐다.

“...!”

“...!”

다른 여인들이 눈이 그들의 하체에 머물렀다.

초훼는 미소년들에게로 걸어갔다.

움직일 때마다 수밀도 같은 가슴이 출렁이고 옥기둥같은 두다리 사이의 검은 삼각주가 잘게 물결치는 듯했다.

초훼는 미소년 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곧 진득한 앳굥의 향연이 벌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초훼의 몸이  허물어졌다.

결국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혼절해버린 것이었다.

소년들의 눈이 일제히 금포노인을 향했다.

금포노인은 여전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잘 했다! ]

금포노인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노인의 입가에 싸늘한 빛이 띄워졌다.

소년들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스읏!

금포노인이 손이 흔들렸다.

스스스슷!

순간 소년들의 몸이 모래처럼 부서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엔 어떤 고통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놀라움과 두려움만이 피어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것조차도 모래처럼 부서지며 허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초훼! 넌 자유다. 영원히 이곳의 일은 잊도록 해라!]

금포노인의 손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초훼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마도 초훼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모양이었다.

초훼가 흐릿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짝짝짝!

금포노인이 손뼉을 쳤다.

그리고 그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저 여인을 내보내라. 이곳에서의 기억은 모두 사라졌다.]

[존명!]

허공에서 소리가 들리고 이내 초훼의 몸이 사라졌다.

다른 여인들의 눈에 부려움이 가득했다.

[귀산에 모여드는 자들... 그들에게 주어질 것도 죽음 뿐... 혼란이 가득하면 은세정검회는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겠지... 흐흐흐흐흐... ]

금포노인이 음산하게 웃었다.

놀랍게도 그는 여인들과의 정사 속에서 무림의 모든 일들에 대해 입안하고 있었다.

 

           ***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던가?

무창에는 두개의 명산이 있다.

하나는 황학루(黃鶴樓)가 서있는 사산(蛇山)이며, 다른 하나는 이 사산에 마주 보고 있는 귀산(龜山)이다.

전설에 의하면 하왕조의 시조 우(禹)는 홍수(洪水)를 다스린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무창에 와서 장강(長江)의 치수를 실시하려고 했을 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부근에 사는 물의 정(精)이 방해하여 몇 년 씩이나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지만 완성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령스러운 거북이 하늘에서 물의 정(精)을 잡아서 우의 치수는 성공하였다.

그 후 공사가 완료된 뒤에 신령스런 거북은 산으로 모습을 바꾸어 장강의 흐름을 계속 지켜본다고 하는데 그 산이 바로 귀산(龜山)인 것이다.

이 귀산은 서쪽 끝의 돌계단으로 올라가게 된다.

계단을 다 올라가보면 끝에는 넓은 광장이 있고, 또 그 뒤에로 완만히 뻗은 좁은 길에는 무창에서 제일가는 전망대가 있다.

왼쪽에는 장강으로 흘러드는 최대의 지류인 한수(漢水), 오른쪽에는 장강(長江), 그리고 정면으로는 무창의 강남쪽이 보이게 된다.

한데 귀산의 전망대에 오르기 전에 있는 넓은 광장에는 수백 개의 천막이 들어차 있고 오색의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귀산을 오르고 있었다.

인산인해(人山人海),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같이 병기를 휴대한 무림인들이었다.

천하의 무림인의 태반은 이곳에 모여든 것같았다.

검과 도를 든 자들,

노인들, 그리고 여인들,

심지어는 어린 소년들과 도적처럼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홀홀단신 무림의 낭인들도 있었으며, 가족이 함께온 무가(武家)도 있었고 제자들을 데리고 문파 전체가 온 곳도 있었다.

 

이날은 구월구일, 명절인 중양절이기도 했다.

그리고 귀산, 이곳은 무림대회가 열리는 곳이니...

엄청난 돈을 풀어서 귀산에는 수만 명이 숙식을 할 수 있도록 가건물들이 지어져 있었다.

극히 짧은 시간에 귀산의 풍물을 변경시켜 버린 힘, 그것은 바로 돈이었다.

광장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는 몇 걸음 간격으로 안내하는 자들이 검정무림(劒正武林)이란 글자가 씌여진 두건을 머리에 쓰고 안내를 했다.

크게 소리치는 사람도 없건만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온 산을 울려 서로의 대화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수는 더욱 많아졌다.

배들이 속속 귀산 아래에 당도했으며 그때마다 한 무리의 무림인들이 나와 귀산을 올라갔다.

군웅들의 이같은 호응만 보아도 검종맹과 잔혼각 등의 발호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으왓! 비켜라!]

[단혼곡이다!]

갑자기 돌계단의 한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면서 사람들이 물살처럼 갈라졌다.

단혼곡주 하삼풍을 필두로 그의 다섯 제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하삼풍의 잔혹한 성격은 무림에 널리 알려져 있는지라 어느 누구도 그들과 부딪히려 하지 않았다.

하삼풍은 차디찬 표정을 지으며 광장으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뿌아앙!

바다에서나 다니는 범선이 무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귀산이 가까워지자 뿔 나팔을 울리는 범선, 해남도의 깃발이 선수(船首)에서 펄럭였다.

[흥!]

하삼풍이 코웃음을 치고 천막들 사이로 사라졌다.

[와아!해남검파다!]

[해남검파도 참석하기 위해 왔다.]

[와와아! 진우백!]

군웅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진우백이 단 한척의 배만 가지고 적룡혈운도의 이백여 척의 대 선단을 깨뜨린 것은 신화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던 중이었다.

대부분의 군웅들은 진우백이야말로 삼인에 대적할 수 있는 진정한 고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군웅들 중에서 나란히 서있던 두 소녀 중 하나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군웅들을 비웃는 것인지 아니면 해남검파를 비웃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양쪽 다 비웃는 것인지...

어쨌거나, 군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남도의 범선에서는 작은 배들이 십여 척이나 내려지면서 뭍으로까지 부교를 만들었다.

부교위로 화려한 옷을 입은 해남검파의 무사 열두명이 보치도 당당히 걸어 나와 도열했다.

그리고 다시 청의를 입은 해남검파의 무사들이 두줄로 서서 부교위로 나오더니 양쪽으로 나누어 마주보며 섰다.

척척척!

그 가운데로 마치 훈련된 병사들처럼 해남도의 무사들이 삼열로 나란히 서서 걸어 나왔다.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나온 후 명의 건장한 무사들이 받쳐든 가마 한대가 부교위로 나왔다.

가마에는 화려한 금장식과 은장식을 붙였으며 가마를 들고 있는 무사들의 옷도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군웅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남검파의 등장은 마치 황궁의 황제같은 복잡한 격식과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는 것같았다.

누군가 말했다.

[마치 황제의 행차같군.]

또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해남검파의 진우백 문주라면 그럴 만도 하지! 혼자서 적룡혈운도의 대선단을 쳐부순 위용이니...]

군웅들의 의견이 분분해지며 수군거림이 큰 소란이 되어 주위를 스산하게 했다.

진우백이 탄 것으로 짐작되는 마차의 앞으로는 열두명의 무사들이 길을 열었고 그 뒤로는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호위하듯 뒤따랐다.

무림인들로서는 좀처럼 볼 수없는 광경이었다.

요란하게 등장한 진우백의 가마도 돌계단을 올라가 광장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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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八 章

 

             거지 소굴을 찾아온 미녀들

 

 

 

-개봉(開封)!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丐幇)의 총단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한마디로 개봉은 거지들의 천국이라는 말이다.

물론 거지들을 먹여살리는 사람들이 더욱 많기는 하겠지만...

개봉은 서안(西安), 낙양(洛陽)과 더불어 삼대 고도(古都)의 하나인데 서주(西周) 문왕(文王)의 아들 필공(畢公)에 의해 성이 세워졌다.

그 이후 전국시대의 우, 오대시대의 양, 진, 한 , 주, 북송, 금의 칠대 왕조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거지들이란 원래 사람이 많은 곳에 살아야만 굶어죽지 않는다.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의 총단이 이곳 개봉에 있는 것은 이처럼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데 그러한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의 총단이 있는 곳은 역설적으로 용정(龍亭)이라고 하는 곳이다.

용정이 어떤 곳인가 하면 예전에는 궁전이 있던 곳으로 개봉의 중심지다.

거대한 토대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언젠가부터 거지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용정 앞에 있는 두개의 큰 연못은 거지들의 우물이기도 하고 목욕을 하는 곳이기도 한 다목적 적인 장소가 되었다.

 

햇살이 아직 퍼지지도 않은 이른 아침, 아리따운 두 소녀가 용정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곤 했다.

거지들의 소굴로 찾아가는 두 소녀의 모습은 도저히 거지들과 어떤 상관이 있을 것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지들은 그녀들이 오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여름이기에 그들은 연못가에서 아무렇게나 엎드려 자기도 하고 웃통을 훌떡 벗고 입을 헤 벌리고 자는 자들도 있었다.

또 어떤 자는 엉금엉금 기어서 일어나 아무데나 바지춤을 내리고 오줌을 누었다.

별빛 같은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개판이군. 거지들은 이렇게 질서가 없나?]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래도 거지들이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아요.]

다른 소녀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말한 소녀가 콧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장매가 거지들을 어떻게 잘 알지?]

[저와 조금은 관계가 있지요.]

다른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였다.

[우리 거지들이 질서가 없다니 그 말은 인정하지 못하겠구려.]

두 소녀가 지나치는 옆쪽에 있던 거지가 몸을 뒤척여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러자 그 옆의 거지가 말을 받았다.

[나라의 어려운 때 가진 것이 없으니 목숨으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충을 행한다 할 것이고 비럭질을 하더라도 부모를 갖다버리지 않으니 불효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것을 탐하지 않고 비럭질해온 것은 나눠먹으니 의리가 있으며 불쌍한 자를 보면 거지의 수법을 전수하기 망설이지 않으니 인(仁)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소녀들은 그들의 조리있는 말에 내심 감탄했다.

(이 거지들은 아주 학식이 있는 거지들이구나. 개방에 숨은 인재가 많다는 말이 헛된 소문이 아니었구나.)

먼저 말한 거지가 다시 말을 받았다.

[분수를 지켜 감히 왕좌를 넘보지 않으니 임금과 백성 간에 벼리가 있다할 것이고 비럭질 한 것도 부모에게 먼저 드리니 그 또한 벼리가 있고 처가 감히 남편의 일을 다투지 않으니 부부간에도 벼리가 있다할 것이 아닌가? 삼강(三綱)을 진실로 행하는 자가 우리 거지들 외에 또 어디 있던가?]

[삼강을 몸소 행하는 우리 거지가 오륜(五倫)은 어디 지키지 못하겠는가? 삼강과 오륜은 도의의 기본인데 이것을 지키는 우리에게 질서가 없다는 말이 과연 타당하기나 한가?]

거지를 욕했던 소녀가 졌다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좋아요. 좋아요. 제가 잘못했다고 하죠. 아니 잘못했어요. 두 분께선 명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껄껄껄... 우린 늙은 거지들일 뿐이오. 방주를 만나러 왔다면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시오.]

거지가 누운 채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들의 허리에는 팔결의 마디가 걸려있었다.

매듭의 수로써 신분의 고하를 따지는 개방에서 팔결이라고 하면 장로(長老)의 신분이다.

개방의 장로는 모두 열셋, 중원의 십삼성(十三省)의 수와 맞춘 것이다.

장로라는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제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자는 것이었다.

[장로님들을 알아 뵙지 못했군요. 실례하겠어요.]

다른 소녀가 포권을 하고 용정의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릉! 드릉!]

그녀들의 뒤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있자 그게 어디 있더라? 여기 였던가 저기였던가?]

사십대의 풍채가 아주 당당한 거지가 허둥대며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거지치고는 너무 잘먹었는가? 혈색도 붉그스레하고 풍채도 마치 부호처럼 당당했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원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가 없다.

때가 많이 묻어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천조각을 이어 붙여서 손바닥보다 큰 조각이 없는 알록달록한 옷이었기 때문이다.

그 거지는 낡은 서랍을 뒤져보기도 하고 먼지가 풀썩 나는 방석을 들어보기도 하고 선반을 올려다보기도 하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때 문이 덜컹 열리며 한 거지가 말했다.

[방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또 어떤 놈들이 좀도둑질을 했나? 그놈을 혼낸다고 말하고 잘 타일러 보내게.]

중년거지가 신경질이 나는지 상자를 내려 바닥에 와르르 쏟으며 말했다.

한데 방주라니...,

중년거지는 개방의 방주인 낙천부개(樂天富丐) 필요금(畢堯錦)이었던 것이다.

문 옆에 선 거지가 다시 말했다.

[방주님을 꼭 만나야겠다고 하십니다.]

[아무 소리말고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 나같은 거지를 만나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낙천부개 필요금은 상자에서 쏟아낸 물건들을 뒤적이며 말했다.

[필방주님! 너무하시는군요. 전에는 제게 한번 놀러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문밖에서 여인의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낙천부개 필요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들어본 음성인데...?]

[보기도 본 사람일걸요?]

문으로 한소녀가 들어서면서 말했다.

낙천부개 필요금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아니 장소저 아니신가? 아니지, 아니지 이제는 장장주이신가? 무슨 바람이 불어 이 거지를 다찾아 왔는가? 아무튼 잘 왔네 잘 왔어. 그렇잖아도 뭘 찾느라고 골머리를 썩히던 중이었는데.]

[필방주님을 뵙습니다.]

장소저라고 불린 소녀의 곁에선 다른 소녀가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필요금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 소저는 누구신가? 어찌 인사를 하면서 자신은 밝히지 않는단 말인가?]

방금 전의 호들갑을 떠는 것같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무게가 있었다.

[그녀는 백언니라고 하는데 신분은 말할 수 없데요. 하지만 맹세코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제가 보증하죠.]

이렇게 말하는 소녀는 장지연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백언니는 백란이었다.

필요금은 굳었던 얼굴을 풀면서 웃었다.

[거지는 거울과 같은 사람들이오. 더 이상 내려갈 때가 없는 밑바닥 인생이고 보니 때로는 행한 대로 돌려 비치기도 한다오.]

[괜찮습니다.]

백란은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거지들의 세상이 뭐 이리 복잡느냐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에서 가장 방대한 조직이라는 개방이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복잡성이 자유분방함 속에 적절히 어울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개방은 무림에서도 대방파이고 개방의 방주라면 또한 그 신분에 있어서 소림사의 장문인에 전혀 못지않은 것이다.

필요금은 백란과 장지연에게 자리를 권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 이곳 개봉을 구경하고 싶어서는 아닐 텐데?]

[사람을 찾아주세요.]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런 일이라면 우리 개방을 능가할 곳이 없지. 아무 걱정말고 누군지나 말해보시게.]

[석두공! 석두공이라는 사람이에요. 나이는 십칠팔세 정도, 이십 일 전 쯤에 황산 백검보에 나타난 이후 흔적을 찾을 수 없어요.]

[석두공? 그를 찾는단 말인가? 에잉! 쯧쯔!]

[...?]

[...?]

필요금이 혀를 차자 장지연과 백란은 괜스레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되었다.

[대체 그는 뭣하러 찾는단 말인가?]

필요금이 오만상을 쓰면서 물었다.

백란이 재차 물었다.

[그를 아세요?]

[알다마다. 어쩌다보니 알게 되어가지고 골치만 아프게 되었지. 불과 며칠 전에 여기 왔다갔지.]

필요금은 입맛을 쩍쩍 다셨다.

석두공을 생각하기만 해도 영 쓴맛이 나는 모양이었다.

[여기를 왔었다고요?!]

“정말요?”

백란과 장지연이 동시에 소리쳤다.

필요금이 말했다.

[덕분에 지금 팔십만이 넘는 내 제자들이 발바닥에 불이 나케 돌아다니고 있지. 밥도 제대로 못빌어먹고 말이야.]

[...?]

[...?]

두 여인은 어리둥절해졌다.

[아무튼 거지들을 괴롭히는 건 오직 정의니 의리니 뭐니 하고 들고 나오는 협객들 밖에 없단 말이야. 나쁜 놈들은 정작 건드리지도 못하는 게 우리 거지들인데...]

필요금이 투덜거렸다.

장지연이 물었다.

[그는 어디로 갔어요?]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몰라도 어디로 올지는 알고 있지.]

필요금의 대답에 두 소녀는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것을 보면 알수 있을 것이네.]

그는 품속에 넣어두었던 꼬깃꼬깃한 종이를 하나 꺼내 밀었다.

원래는 네모나게 접혀진 붉은 종이였다.

겉에는 굵고 강인한 필치로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무림첩(武林帖)>

 

무창의 귀산(龜山)에서 구월구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해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무림첩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무형도객의 이름과 함께 석두공의 성명이 적혀있었다.

[보름도 남지 않았군요.]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서 내 제자들만 죽어날 지경이지.]

[빨리 가야겠어요.]

장지연이 백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때였다.

[잠깐!]

필요금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문을 가로막았다.

[...?]

[마침 이곳까지 왔으니 내 어려움을 하나만 해소해주고 가시게. 제발...]

필요금이 장지연에게 아첨하듯이 손을 비볐다.

장지연이 풋! 소리를 내며 웃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내 차림새를 보게, 뭔가 빠진 것같지 않나?]

필요금이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그리고 보니 매듭이 보이지 않는군요.]

[총명한 장소저... 아니 장장주... 과연 그렇다오. 분명히 이 방안 어디에 있었는데 찾을 수가 없으니... 제자들에게 말하기엔 체면도 서지 않고... ]

필요금은 우스광스런 표정을 지었다.

장지연과 백란은 그가 일파의 지존으로서 조금도 흉허물이 없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과연 개방같은 대 방파의 주인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장지연이 물었다.

[매듭을 마지막 본 게 언제였어요?]

[어젯밤 술시경... 그때부터 이 방안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신세지.]

[그 이후에 뭘 했어요?]

[그냥 제자들이 비럭질해온 술찌끼미를 걸려 한잔 마시고 장로들과 둘러앉아 한바탕 입씨름이나 하고 잤지 뭐. 다른 건 한 것도 없다네.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내 죽결이 없어져 버렸지 않은가?]

[저 깨진 독에 술찌끼미가 있었어요?]

백란이 물었다.

필요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은 어디서 마셨어요?]

[여기서 이렇게... ]

필요금은 한쪽에 앉으며 말했다.

장지연이 웃으며 물었다.

[또 술독을 껴안고 마셨겠죠?]

[그렇지, 그렇게 마시지 않으면 술맛이 나질 않으니까...]

[술독의 오른쪽 뒤에 보세요.]

백란이 말했다.

[없다네. 내가 이미 다... 어? ]

필요금은 술독의 뒤쪽에서 죽결을 발견하고 줏어들었다.

그리고 신기하다는 듯이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여기 있는줄 알았지?]

[필방주님이 허리띠를 푸는 건 아마 두 가지 경우 뿐일 걸요? 하나는 측간갈 때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마 술 마실 때겠죠. 하지만 측간에서 잃어버릴 리는 없을 테고 당연히 술 마시느라고 허리띠를 풀다가 한쪽에 흘렀겠죠. 그게 술독을 밀어젖히면서 그 뒤로 밀려가지 않았다면 찾지 못할 이유가 없겠죠. 설마하니 술독 뒤에 있으랴 싶어서 술독은 차마 못 치웠을 것이고... ]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은 파안대소를 했다.

[하하하하... 과연 그렇구나. 백소저 또한 장소저 못지않게 지혜롭구만 하하하... 거지 두목이랬자 아무 소용이 없어. 거지보다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없어. 와하하하하... ]

그는 허리에 죽결을 매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답례로 오늘은 내가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지. 따라오시게나.]

[방주님이 무슨 돈이 있어 요리를 대접한다는 거예요?]

장지연이 뒤따라 가면서 물었다.

필요금이 웃고 말했다.

[그런 말 말게. 우리 개방의 하루 수입으로 따지자면 장장주의 하루수입보다 적지는 않을 걸? 팔십만 거지가 쌀 한 홉 씩만 얻어도 그게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되는가? 또 석두공 그 친구가 내게 푼돈을 주고 가더구만.]

[푼돈?]

[한 오십만냥 정도 되더군.]

백란은 입이 딱 벌어졌다.

오십만냥!

거지 주제에 오십만냥을 푼돈이라고 말하는 낙천부개 필요금...

[음... 그럼 제게 빚을 조금 갚아도 되겠군요. ]

장지연이 말했다.

필요금이 일순 표정을 싹 바꾸면서 말했다.

[거지한테 돈을 꿔줄 때는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그것도 왕거지한테는... 리어배면(鯉魚焙麵) 한 접시 사줄 테니 다른 말은 꺼내지도 말게.]

리어배면은 황하에서 잡은 잉어를 매콤달콤하게 맛을 낸 뒤, 바싹 튀긴 메밀국수에 곁들여 내는 것으로 개봉에서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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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장

 

            붓 속에 숨겨진 재산 (2)

 

 

 

석두공이 객방으로 들어가자 무형도객이 무림첩을 적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글 써줄 서생들은 구했는가?]

[요즘엔 서생들이 글을 써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형도객은 기대했다가 낙심한 듯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하는 수 없이 손목이 빠지도록 적어야겠군.]

[한데...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지 않습니까? 부릴 귀신은 있는데 돈이 없습니다.]

[자네... 무슨 수단을 찾은 모양이군. 어서 말해보게.]

무형도객이 희색이 만면하며 말했다.

석두공이 요즘은 그런 글은 직접 적는 것이 아니라 인장처럼 찍어낸다고 하니까 무형도객이 무릎을 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책들도 그렇게 나오는 것들이 적지 않은데...]

[그건 그렇고 곧 은자를 받으러 올 텐데 무슨 방법으로 거금을 마련합니까?]

[함께 가세.]

무형도객이 일어났다.

[...?]

[돈을 마련해야지.]

 

***

 

무형도객은 석두공을 데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로 나섰다.

[강도라도 할 생각입니까?]

[무림을 위한 일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무형도객은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석두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형도객이 강도를 할 사람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림을 위해서 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을 것같기도 했다.

석두공이 말했다.

[그럼 부잣집을 골라서 하도록 하지요. 그 정도 돈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지금 가고 있는 중일세.]

무형도객의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가 천지의 소음을 모두 쓸어가버렸다.

무형도객은 문이 닫힌 점포들 중 한곳으로 가서 두드렸다.

쿵쿵쿵!

잠시 후에 쪼글쪼글한 노파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무슨 일이오?]

[검을 팔러 왔소이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노파가 물었다.

[우린 검을 사지 않소. 여긴 골동품을 취급하는 곳이라오.]

탁!

노파가 문을 닫았다.

석두공이 물었다.

[정말 검을 파실 생각이십니까?]

무형도객이 그의 발을 쿡 밟으며 가만히 있으란 신호를 했다.

무형도객은 닫힌 문에 대고 말했다.

[내 검은 세우면 하늘에 닿고 눕히면 땅을 다 쓸 수 있으며 거두면 손바닥 안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오.]

(세상에 그런 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선배께서도 거짓말이 상당하구나. )

석두공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에 닫혔던 문이 열리며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서 흥정해봅시다.]

[...!]

석두공은 무형도객을 보았다.

무형도객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골동품 점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훨씬 깨끗하고 넓었다.

더구나 손님이 편안히 앉아서 이야기 할 수 있는 큰의자가 차탁 앞에 놓여있었다.

주인 노파는 칠십이 넘어보였지만 온화한 얼굴에 어떤 기품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노파는 가운데 의자에 앉으면서 무형도객과 석두공에게 자리를 권했다.

[손님이 오셨으니 차를 가지고 오너라!]

노파는 안쪽을 향해서 말했다.

그리고 무형도객과 석두공이 앉자 탁자위에 좁고 긴 나무상자를 하나 올리면서 말했다.

[손님이 팔겠다는 검은 이 검과 비교해서 어떻습니까?]

노파가 나무상자의 덮개를 열었다.

순간 나무상자에서는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는 한 자루의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보기(寶氣)가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막야(莫耶)가 뛰어난 명검임에는 틀림없지만 어찌 내가 가진 검에 비하겠소?]

무형도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노파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노파는 보검을 탁자 아래로 쓸어내려 버렸다.

그리고,

[그럼 이 검은 어떻소?]

다시 한 자루의 둔중해 보이는 기형 철검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그 검은 검날의 두께만도 한치가 되고 날의 넓이는 반자나 되었다. 무게가 적어도 오십 근은 넘을 것 같은 데 노파는 종이장 들듯이 가볍게 다루었다.

[붕산검마(崩山劍魔)가 백오십 년을 연마하여 만들었다는 붕산검(崩山劒)이구려. 하지만 내 검에는 미치지 못하오.]

노파가 검을 내려놓으며 손을 내밀었다.

[보여주시오.]

무형도객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빈손이잖아? 그럼 그렇지...)

석두공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데 무형도객의 손바닥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손바닥 위에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손가락만큼 작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진기를 모아 응축시켜 만든 것이었다.

석두공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 작은 검의 모습을 그는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검령...]

석두공이 나직막한 소리로 내뱉었다.

무형도객과 노파가 눈을 부릅뜨며 석두공을 노려보았다.

노파의 손바닥에도 작은 검이 떠오르고 있었다.

무형도객이 딱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정검령을 아는가?]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누가 내 앞에서 그걸 보이며 복종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무시하고 그냥 와버렸습니다.]

[...!]

[...!]

무형도객과 노파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심부름하는 소녀가 차를 다려왔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 무형도객이 노파에게 말했다.

[당장 오백냥의 은이 필요하오.]

[이것을 가지고 가시오.]

노파가 한장의 전표를 주면서 말했다.

[천냥짜리니 여유가 있을 거요.]

 

***

 

(무림에는 드러나지 않은 조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양이다. 무림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두개나 그런 조직을 목격했으니...)

객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석두공은 생각했다.

(소령이 속해있는 조직의 힘도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같았는데, 무형도객이 속해있는 조직도 전혀 그에 못지않을 것같구나. 그 노파의 무공도 놀라울 정도였다. 무형도객 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깊은 공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무림은 피상에 불과할 지도 모르고 진정한 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같았다.

이런 느낌도 벌써 두번 째다.

부운청풍객 심제을과 잔혼살객 등이 삼마경을 익혀 극히 고강하다고 하지만 그보다 강한 사람도 석두공은 여럿 알고 있다.

드러난 모든 것이 피상일 것만 같았다.

무형도객이 석두공에게 부탁했다.

[정검령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하게. 함부로 말하게 되면 사마의 세력을 돕는 것이 될 것일세.]

석두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응락하자 무형도객은 근심을 털어버린듯 껄껄 웃었다.

 

객점에 들어서자 탁자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무림첩들을 한곳으로 쓰윽 밀어버리며 석두공이 소리쳤다.

[이제 손이 해방되었군요.]

며칠 동안 무림첩을 적는 고생을 하느라고 얼마나 질렸는지 모른다.

석두공은 막힌 속이 탁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붓도 이젠 안녕을 고해야겠지요.]

뚝!

석두공은 자신이 사용했던 붓을 꺾어버렸다.

한데,

[어? 이게 뭐야?]

꺾어진 붓 속에서 돌돌말린 종이가 구겨져 있었다.

[...?]

무형도객도 그의 옆으로 왔다.

쫘라라락!

석두공 종이를 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갑자기 파안대소를 했다.

[으하하하하... ]

[와하하하... ]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문서였다.

무혁해의 재산 중의 한 가지에 대한 소유를 증명하는 문서였다.

뚝!뚝!

석두공은 다른 붓도 부러뜨렸다.

부러진 붓마다 한 장씩의 문서가 나왔다.

무혁해의 재산은 고스란히 붓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천하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든다는 갑부 무혁해...,

그는 기묘한 방법으로 재산을 감추고 도망치고자 했으나 결국 해천월의 손에 죽고 말았다.

헌데 그의 재산은 엉뚱하게도 석두공의 손으로 굴러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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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七 章

 

               붓 속에 숨겨진 財産 (1)

 

 

 

-소흥(紹興)!

 

하(夏)왕조 시대에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치수를 한 우(禹)의 무덤인 우릉(禹陵)이 있다.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이 직접 이곳을 방문했다고 전해지는 만큼 이 우릉에는 시인묵객과 영웅호걸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맞이하기 위한 객점과 주루들도 근처에 적지 않게 있다.

소흥은 또 술을 장 빚는 고장으로 유명하다.

소흥주(紹興酒)가 명주임은 주당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우르릉!

우르릉! 쿠쾅!

아침부터 찌푸렸던 하늘이 기어코 무너지며 시퍼런 번개불을 토해냈다.

번쩍!

콰쾅!

오후가 조금 지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은 어둑어둑해지고 공기가 무거웠다.

콰󰠏󰠏! 쏴아아아!

우르릉... 쿠쾅!

번개불이 갈라놓은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장대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릉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서둘러서 주위의 객점이나 주루로 피해 들어갔다.

 

[에이 기분 나빠! 하필이면 비가 쏟아질게 뭐람. 조금만 빨랐어도 괜찮았을 텐데... ]

장지연은 흠뻑 젖은 옷을 공력을 돋구어 말리며 객점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몸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객점 안에는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로 빈자리가 없었다.

그녀가 망설이며 두리번거리자 점소이가 달려와서 한쪽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그곳도 빈자리는 아니었다.

[손님, 여기 앉으십시오. 이분은 일행이 없으니 괜찮을 겁니다.]

점소이가 권한 그 자리엔 장지연과 비슷하거나 한살 많아 보이는 소녀가 앉아있었다.

보석같이 초랑한 눈망울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로 얇은 흑의를 입었고 허리춤에는 백옥퉁소가 끼워져 있었다.

얼핏 보아도 예사로운 소녀같지는 않았다.

장지연은 자리에 앉아서 음식을 시켰다.

그녀 앞의 흑의소녀는 이미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장지연은 침을 꼴깍 삼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화상같은 석두공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사라지려면 영영 사라져버리든가 할 것이지 사람을 이렇게 고생만 시키다니...)

한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소녀도 하필이면 그 순간에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석두공! 그는 어떻게 됐을까? 뇌주탄에서의 해전은 그가 벌인 것이 틀림없을 텐데 진우백의 이름만이 무림에 진동하고... 빨리 그를 찾아야 하는데... )

이 흑의소녀는 바로 백란(白蘭)이 아닌가?

석두공이 무저갱(無底坑)에서 올라오자마자 만났던, 그리고 석두공을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포기해버렸던 그 소녀 백란인 것이다.

백란도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를 빨리 찾아야 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은데... 두발 달린 짐승이니 묶어둘 수 도 없고... )

맞은편에서 장지연도 생각하고 있다.

(이러다가 꽃같은 내 청춘이 그 얼간인가 하는 석두공 찾아다니다가 다 지나버리는 건 아닌 지 모르겠네. 만나기만 한다면 개목걸이라도 채우겠는데...)

백란의 생각은 이렇게 번져가고 있었다.

(만난다면 먼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할까? 휴...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

장지연의 머릿속도 분주했다.

(한데 참, 그 숯덩어리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보니 그 생각은 또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때 백란은 젓가락을 튀긴 닭고기로 가져가며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진 내가 그를 만났는데도 데려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면 때려죽이려 들거야. 빨리 뇌주탄에서 이후의 행방을 찾아야돼. 내키지는 않지만 해남도의 그 늙은이 진우백에게라도 물어봐야겠어.)

장지연이 생각했다.

(쳇 그 숯덩어린 무슨 새끼방울인가 소령인가 하는 계집애를 찾아다니고 있겠지. 에이 기분...)

백란이 생각했다.

(정검령(正劒令)을 사용하여 그를 찾는 것도 한계가 있어. 아주 발이 넓은 조직이 있다면 좋을 텐데... 발이 넓은 조직?)

장지연이 생각에 몰두하여 백란의 음식으로 젓가락을 가져갔다.

하지만 백란도 그런 사정이라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지연은 속으로 석두공을 욕했다.

(무정한 자식! 내 마음을 빤히 알면서도 모른척 했겠다. 그리고서도 뭐 소령인가 그 계집애를 찾아? 나쁜 놈... 정말 나쁜 놈... 석두공보다 더 나빠.)

백란은 자기의 말에 스스로 반문하고 있었다.

(발이 넓은 조직...? 그럼 무림에서 개방을 능가할 세력이 없잖아?)

장지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쁜 놈... 하지만 어쨌든 석두공부터 찾아야 돼. 이제는 지쳐버렸어. 개방에라도 손을 벌리는 수 밖에... )

[그래! 개방이다.]

[개방!]

갑자기 백란과 장지연이 동시에 내뱉었다.

[...!]

[...!]

서로가 눈이 뚱그레져서 바라보았다.

서로의 젓가락이 음식물의 경계를 침범하고 있었다.

 

× × ×

 

쏴아아아...

콰르르릉... 쏴아아아...

[소식이 빠르기로는 개방을 능가할 곳이 없지. 하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손이 빠르기로써 서생(書生)들을 능가할 사람이 없겠지.]

무형도객이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석두공이 붓을 집어던졌다.

[정말이지 서생들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쓰더라도 다 못할 것같습니다.]

그의 앞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첩지들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같았다.

석두공과 무형도객이 팔이 부러질 정도로 힘들게 적은 무림첩들이었다.

[제가 근처의 학당을 알아보고 글쓸 사람을 구해오겠습니다.]

석두공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무형도객이 말했다.

[서문가(西門街)로 가면 대통학당(大通學堂)이라는 곳이 있네. 거기 가서 알아보게.]

석두공은 객점의 주인에게서 우산(雨傘)을 얻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진강(鎭江)가에 있는 양주(陽州)가 물에 잠겨버리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비는 많이 쏟아졌다.

쏴아아아아...

 

× × ×

 

[하하하하!]

광광광광!

학당의 새끼 서생들이 바닥을 치면서 웃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물었다.

[글을 읽는 분이 아니시죠?]

[그렇습니다.]

석두공은 얼굴이 붉어지며 대답했다.

책만 펴들면 잠들었던 기억이 있는 그였다.

서생들 중의 한 사람이 말했다.

[잘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요즘은 그렇게 똑같은 내용을 손으로 적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적포(書籍布)에 가셔서 한 번 알아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내용인지는 몰라도 불일간에 될 것입니다.]

석두공은 하례를 하고 나왔다.

그의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요즘도 저런 사람이 있다니... 하하하!]

석두공은 책을 만든다는 곳으로 찾아가면서 투덜거렸다.

[글을 사람이 쓰지 않고 인장(印章)처럼 찍는다니 참... 나중엔 검도 사람이 휘두르지 않고 다른 뭐가 어떻게 할 지 모르겠군. 나야 본래부터 좀 모자랐으니까 모른다고 치더라도, 무형도객 선배도 까막눈인가? 왜 이런 것도 몰라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까?]

 

***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서적포의 점원이 물었다.

[최소한 오만 장 정도... ]

점원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오만 장의 분량이면 웬만한 서적포에서 반년 동안 주문받는 량을 다 합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빨라도 보름이상은 걸립니다. 하지만 급한 것이라면 다른 집과 일을 나누어 더 빨리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시오.]

[하지만 그럴려면 돈이 조금 더...]

점원은 석두공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얼마가 필요하오?]

[요즘 종이값이 워낙 비싸서 헤헤... 은으로 오백냥은 주셔야겠습니다.]

점원이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석두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상객점(昶翔客店)에 와서 나를 찾으시오. 돈은 그때 주겠소.]

[그럼 찍어내야 할 내용을 여기에 적어주십시오.]

점원은 백지를 내밀었다.

석두공은 먹물을 흠뻑 적신 붓으로 써내려갔다.

 

<...

무림동도...

검종맹과 잔혼각, 그리고 적룡혈운도의 발호가 극에 달하여...

강호의 도의는 땅에 떨어지고...

이에 천하 무림의 정기를 회복하고자 십대 고수 중 오객의 한분이신 무형도객과 무림말학 석두공이 감히 기치를 잡았...

의열남아라면 주저없이 나서 악의 기운을 이땅에서 몰아내는데 힘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명월 중양절(重陽節)에 무창(武昌) 귀산(龜山)에서 무림대회를 개최하고자 하는 바이니 무림제위들께서는 아직도 정의가 건재함을 보여주시기 바라오.

무형도객, 석두공 서(書)>

 

[손님처럼 필적이 뛰어나신 분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판을 새기고 나서 이 글은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점원이 석두공의 필체에 감탄하며 물었다.

[좋을 대로 하시오.]

석두공은 질렸다는 듯이 붓을 던져놓고 객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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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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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六 章

 

       江上逢敵

 

 

 

[해천월!]

석두공은 뇌성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손가락을 쭉 뻗었다.

“으헉!”

해천월은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석두공의 손가락에서 흰빛이 하늘로 치솟는가 싶더니 그것은 수백개의 유성으로 변해서 해천월에게로 떨어지고 있었다.

유성단천(流星斷天),

동정호에서 동호천에 의해서 한번 펼쳐졌던 바 있던 바로 그 무공이었다.

당시 해천월과 심제을, 그리고 잔혼살객이 이 한수에 모두 중상을 입고 달아나야 했었다.

해천월의 손에 도가 쥐어졌다.

[팔황지옥도(八荒地獄刀)!]

해천월은 비명처럼 고함치며 팔황지옥도의 수법을 잇달아 펼쳐냈다.

휘루루룽!

파도가 도기를 따라 치솟으며 벽을 이루었다.

파파파파팟!

카캉!

광풍이 몰아치는 듯 무형도객 등이 탄 배는 물결의 여세에 밀려서 이십 여 장이나 멀어져 버렸다.

[헉!]

해천월은 어깨를 꿰뚫는 화끈한 통증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섰다. 유성단천의 수법에 그의 도가 부러지고 어깨가 꿰뚫려버린 것이다.

순간,

꾸륵꾸륵!

뿌르륵!

그의 쾌속선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해천월! 가라!]

꽈르르릉!

석두공의 그의 면전으로 떠오르며 얼굴로 일장을 가해왔다. 실로 기이하도록 빠른 몸놀림이고 빠른 장력이었다.

해천월은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들었다.

[지옥참렬(地獄斬裂)! 지옥혈우(地獄血雨)! 지옥멸천파(地獄滅天破)!]

그는 팔황지옥도의 최후절초들을 잇달아 세가지나 검으로 펼쳤다.

콰콰쾅!

그의 몸 주위에 푸른 검막이 생기고 이내 그 검막에서 새파란 도기가 줄기줄기 뻗어올랐다.

석두공은 그의 몸을 넘어 허공에서 멈춰섰다. 그가 펼쳤던 장법은 팔황지옥도에 의해 막혀버리고 이제는 가공할 도기가 그의 몸을 난도질해오고 있었다.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해지면서 두개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나뉘어진 그의 몸은 검막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푸앙!

갑자기 검막도 사라지고 도기도 사라졌으며 적룡혈운도주 해천월의 모습도 사라졌다.

오직 셋으로 나뉘어졌던 석두공의 몸이 천천히 합쳐지며 하나로 돌아오고 있었다.

강물 위에는 부서진 배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휘이익!

무풍도객이 석두공의 곁으로 날아내리며 물었다.

[해천월은 죽었는가?]

석두공은 고개를 저었다.

[팔황지옥도법... 악마의 도법이라고 할만합니다. 제 공격을 막아내고 그 짧은 시간에 물속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때였다.

[으악!]

푸하악!

갑자기 그들이 타고 있었던 배위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한사람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스팟!

석두공의 몸이 빛살처럼 쏘아져갔다.

촤아아!

그 직후 배의 선미에서 한 가닥 붉은 빛이 일렁이더니 금방 물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바로 해천월이었다. 그자가 석두공의 시선을 피해 배위로 올라와 살인을 하고 사라진 것이다.

석두공은 배위에 내려서며 발을 굴렀다.

[너구리같은 늙은이! 기필코 죽여버릴 테다!]

[으으으... ]

장사꾼들이 석두공의 살기에 오줌을 싸면서 덜덜 떨었다.

석두공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황급히 배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때 무형도객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사람의 머리를 받쳐들고 그의 곁으로 떨어졌다.

[누굽니까?]

[천하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든다는 갑부 무혁해(武赫懈)네. 항주의 장보장(藏寶莊)의 장주이기도 하지. 해천월은 이 사람을 노리고 있었던 모양일세.]

무형도객이 수급을 목없는 시체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무혁해는 결코 혼자 다니지 않는 사람인데 이렇게 홀홀단신으로 배를 탔다가 죽다니 영문을 알 수 없군.]

[해천월이 황금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석두공의 말에 무형도객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남해에선 지금 해천월의 선단이 해남도의 진우백에게 박살이 났다고 떠들썩 하니까. 아마도 새로운 선단을 만들 자금이 필요했던 게로군.]

그때 그들의 대화를 끊으면서 사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체를 그냥 배위에 두고 모두 절이라도 지내자는 거요? 함께 물속에 던져버리고 가도록 합시다.]

사공이 목이 떨어진 시체를 꺼림직해하면서도 배위에 두는 건 더욱 끔직한지라 물속으로 던져버리려고 했다.

석두공이 말했다.

[그만 두시오. 거적이나 하나 주면 내가 강북에 다다라서 묻어주겠소.]

[예예에...]

사공이 화들짝 놀라며 슬금슬금 선실로 들어갔다. 석두공과 무형도객이 마치 신선처럼 날아다니는 것을 본 후 인지라 그가 말을 거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같았다.

석두공은 사공에게서 거적을 받아서 피에 젓은 무혁해의 시신을 쌌다.

머리도 떨어지지 않게끔 잘 고정시켜 거적을 돌돌 말은 후에 아래위로 끈으로 묵었다. 끈이 풀어지지 않는 한 시체는 결코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의 초라한 죽음이라... 세상은 진정 알다가도 모르겠군.]

무형도객이 중얼거렸다.

석두공은 시체를 만 거적을 번쩍 들어올려 한쪽으로 가져갔다.

또르르...

그때 갑자기 그의 발에 뭔가 채였다.

황모필(黃毛筆),

아주 질 좋은 붓이었다.

그가 줏어들자 사공이 말했다.

[죽은 그 영감의 물건입니다. 붓장수지요. 저쪽에 있는 것이 모두 그의 것이지요.]

등에 질 수 있는 네모난 나무 상자 속에는 수백 개의 황모필이 담겨져 있었다.

석두공은 줏어들었던 붓을 상자 속에 넣었다.

 

× × ×

 

강을 건너 나루에 닿자마자 석두공은 거적을 들쳐들고 배를 내려갔다.

그때였다.

[무사님! 무사님!]

사공이 소리쳐 불렀다.

[이 물건은 꺼림직하니 무사님께서 가져가십시오.]

사공이 붓이 가득 든 상자를 들고 나와 석두공이 있는 쪽으로 내밀었다.

석두공을 뒤따라 내리던 무형도객이 그 상자를 받아들고 내려왔다.

[시체를 치워주는 댓가로 붓이라! 무혁해가 듣던만큼 노랭이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기왕이면 검이 더 나을 텐데... ]

무형도객이 말했다.

석두공이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지금 무림첩을 만들어야 할 텐데 이 붓이 꼭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그렇군! 내가 깜박했네.]

무형도객이 크게 웃었다.

석두공은 강가의 높은 언덕을 골라서 무혁해의 시체를 묻었다. 그리고 나무를 깎아 새워주며 말했다.

[가족이 살아있다면 연락해서 모셔가도록 하겠소. 하지만 해천월이 그들을 그냥 두었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군요.]

[이보게. 무림대회에 마땅한 장소가 없다면 이런 강가는 어떤가?]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던 무형도객이 석두공에게 물었다.

[괜찮겠군요. 어디 마땅한 데가 있습니까?]

[물론 있지. 객점에 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상의하도록 하세.]

무형도객은 석두공의 어깨를 툭쳤다.

석두공의 옷은 거적에서 배어나온 피로 검붉게 물들어있었다.

 

          ***

 

붉은 장갑을 낀 깜직하고 귀여운 모습의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석두공이란 사람이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음... 얼마 전에 말예요?]

[그런 사람은 온 적이 없소. 괜히 사람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가시오.]

백검보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번자검(飜刺劒) 표청(杓菁)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여자만 보면 마음이 흔들거려서 그것이 상대방에게 읽히기라도 할까 싶어 늘 여자에게만 퉁명스러운 남자다.

[온적이 없다구요? 그렇다면 있다가 오겠군요. 수고하셔요.]

이렇게 말하고 표청을 슬쩍 지나쳐 문안으로 들어가는 소녀는 장지연이었다. 그는 혈포단객으로부터 석두공이 백검보로 갔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응?]

표청은 장지연이 갑자기 문안으로 뛰쳐들어가자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멈추시오! 들어갈 수 없소.]

그는 장지연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빠르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장지연은 간발의 차이로 문안으로 달려들어가고 말았다.

삐이익!

표청은 호각을 불었다.

[멈춰라!]

장지연의 앞쪽으로 두 사람의 검객이 날아내리며 소리쳤다.

장지연이 뾰쪽하게 소리쳤다.

[무슨 손님대접이 이래요?]

파팍!

그녀의 귀신처럼 빠르게 두 검객의 사이를 돌파해버렸다.

휘이익!

휙휙!

이번에는 네명의 검객이 다짜고짜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쾌속하고도 정확한 솜씨, 백검보의 무사로서 손색이 없는 솜씨였다.

[정말 이럴 거예요? 난 사람을 찾으러 왔단 말이에요.]

장지연은 화난 목소리고 고함치며 손으로 검들을 쳐갔다.

검객들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깡깡! 까깡!

네자루의 장검은 그녀가 둥글게 휘두른 한 수에 부딪혀 모두 잘려져 나가 버렸다.

[헛! 혈천갑이다. 넌 혈포단객과 무슨 관계냐?]

검객 중의 한 사람이 소리쳐 물었다.

장지연은 화가나서 말했다.

[왜 진작 물어보지 않아요? 백검보가 무슨 용담호혈이나 된다고 들어오자 마자 다짜고짜 칼로 찌르고 야단이에요? 검성을 만나보고 좀 따져야겠어요. 그는 어디있죠?]

그때였다.

[노부가 바로 검성이다. 무슨 일로 나를 찾느냐?]

검성이 전각을 돌아나오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쳇!]

장지연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백검보는 들어오는 사람은 무조건 죽이기로 작정한 모양이죠? 그러고도 검성이 인의대협이라고 하겠어요?]

[무례한 점이 있었다면 사과하지, 한데 소저는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가?]

검성이 온화한 음성으로 물었다.

장지연이 말했다.

[난 석두공이라는 사람을 찾아왔어요. 혈포단객은 그가 이곳으로 갔다고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죠? 여기서 그를 기다려도 되겠어요?]

“...!”

순간 검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요? 안되요? 참 인색하군요. 이런 큰집을 가지고 있으면서...]

장지연이 그의 안색을 보고 즉시 말했다.

검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여기에 오지 않을 것이오.]

장지연의 예쁜 눈썹이 상큼 찌푸려졌다.

[어째서요? 혈포단객은 이리로 갔다고 했는데...]

검성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사흘 전에 이곳에 왔다 갔소. 진짜 석두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석두공이라고 했소.]

[대체 무슨 말씀이에요? 밖에 있는 사람은 오지도 않았다고 하던데... 그리고 무슨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단 말이에요? 그는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장지연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인즉슨 아래와 위의 말이 다르니 무슨 횡설수설이냐는 것이다.

검성은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변명할 만한 말이 없었다.

장지연은 검성이 입을 다물고 있자 다시 물었다.

[그럼 그는 어디로 갔어요?]

[모른다.]

검성은 고개를 저었고,

장지연은 벌컥 화를 냈다.

[대체 당신은 아는게 뭐예요? 들어서면서부터 부하들에게 칼질이나 하게하고...]

[무례하다!]

주위에 있던 무사들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장지연은 심통이 났는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말했다.

[부하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무슨 제왕이나 된 것같으세요? 세상에서 검성의 손님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모양이지요?]

[흥! 어찌 없겠느냐? 하지만 너같은 어린애는 아니다.]

갑자기 검성의 뒤에서 만박노조가 나오면서 차갑게 응수했다.

장지연은 그를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오호라! 세상에 모르는게 없다는 만박노조 할아버지시군요. 그럼 제가 누군지 맞춰보시겠어요?]

[넌 검성은 손님은 될 수없다.]

만박노조가 단호하게 말했다.

장지연이 입을 삐죽했다.

[그게 대답이에요? 만박노조란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평범하네요. 하지만 그러고도 틀렸어요.]

[허허허... 그렇다면 네가 검성의 손님이 될 수 있단 말이냐?]

만박노조가 실소하며 말했다.

장지연이 돌연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을 막하다니... 만박이란 이름이 부끄럽군요.]

만박노조가 눈을 부릅떴다.

장지연이 갑자기 검성을 향해서 주먹을 불숙 내밀며 말했다.

[이래도 내가 손님이 될 수 없어요?]

검성은 상당히 놀란 듯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검성에게로 쏠렸다.

검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저는 내 귀빈이오.]

그의 말투마저 정중하게 변해 있었다.

만박노조의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여전히 검성을 향해서 뻗어있는 장지연의 주먹은 혈천갑속에 쌓여있고 얇디얇은 혈천갑위에는 녹옥지환(祿玉指環)이 끼워져 있었다.

검성이 정중하게 물었다.

[그분께선 아직도 정정하신지?]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소식을 듣지 못했소. 그분께서도 결국 세월을 이기시지는 못했구려. 그럼 들어가서 이야기 합시다.]

검성이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며 말했다.

장지연은 손을 내리며 말했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단지 석두공, 그분에 대한 것만 아는 대로 말해주시면 돼요.]

주위의 검객들이 아연 긴장했고,

검성은 탄식하며 말했다.

[휴... 소저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소.]

[제 신분을 알고도 소저라고 부르세요?]

장지연이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검성은 흠칫하고 말했다.

[장주(莊主)께 실언했소이다. 하지만 그에 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소.]

[그는 왜 이곳에서 떠났죠? 혈포단객의 말로는 이곳에 있을 것같았는데... ]

[...!]

[...!]

모두들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장지연의 신분을 그들이 알 수는 없었지만 검성의 태도로 보아서 오히려 검성이 조심하는 듯하지 않은가?

그런 그녀의 질문이지만 석두공이 백검보에 찾아왔을 때의 상황을 말로 설명해주기는 난감하기 이를데 없다.

장지연의 안색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흥! 대충 알겠군요. 또 들어서자마자 칼질을 하고 난리를 피웠겠죠? 석두공이 제 사부님과 어떤 관계이신지 아시죠? 사부님께서 아시면 기분이 어떠하셨을까요?]

검성은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을 잃고 있었다.

장지연이 말했다.

[이점은 앞으로 분명히 고려하겠어요. 다시는 당보주님과 만나고 싶지 않군요.]

어린소녀지만 장지연은 아주 당찬데가 있었다. 그녀는 검성을 매섭게 쏘아본 후에 백검보를 걸어나가 버렸다.

검성은 망연히 하늘을 보다가 탄식을 거듭했다.

[노제... 저 소녀는 신분이 무엇인가?]

만박노조가 물었다.

검성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말년에 이르러 내 몰골이 초라하기 그지 없구려. 사흘이 멀다하고 후배들의 공박을 받으니 참으로 부끄럽소.]

[...!]

[게다가 그 말들이 모두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게 더욱 나를 괴롭게 하는구려. 그동안 내가 단지 검성이란 이름에 얽매여 얼마나 나태했는지...]

[...!]

검성은 초라한 어깨를 보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음성이 뒤에 남았다.

[경계를 풀어라. 죽어도 장부로서 죽어야겠다.]

그의 말은 만박노조의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혔다.

만박노조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당노제가 저렇게 된 것은 실상 내 책임이 크다. 장부... 과연 나는 장부로 살았는가? 열근도 되지 않을 머리를 믿고서 귀계로써만 살아오지 않았을까? 장부... 대장부... 어째서 지금까지 이것에 대해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인생에 있어서 남은 것이 허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 그 사람이 느끼는 허탈감을 무슨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만박노조는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열리는 것 같음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지나온 생이 무위로 돌아가는 그 허탈감에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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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장

 

                    백검보의 방문객 (2)

 

 

 

-남경(南京)!

 

장강을 건너 강북으로 가는 배위에 머리카락이 조금 이상한 미청년이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있다.

호수같이 심원한 눈빛에 굳게 다문 입가에 은은히 비치는 매력, 허리에 걸려있는 거무튀튀한 방망이까지도 그렇게 잘어울릴 수가 없는 미청년이었다.

그는 석두공이었다.

진정 임풍옥수(臨風玉樹)라는 말 그대로의 모습인지라 배위의 선객(船客)들이 너도 나도 그를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이정(二正)이 겨우 그런 정도의 인물이었다니! 좁쌀같은 자들...! 경우에 따라선 적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하거늘 동지마저 믿지 못하다니...]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파란 물결이 그의 발아래로 들어오는 것같았다.

그때였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졌기로서니 이정을 드러내놓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

갑자기 그의 뒤에서 웅혼한 음성이 들렸다.

석두공은 고개를 돌렸다.

백의문사(白衣文士)가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띠고 서있었다.

[무형도객! 무형도객이시군요.]

석두공이 반색을 하면서 덥썩 그의 손을 잡았다.

백의문사는 당황하며 말했다.

[난 자네를 모르네. 나를 아는가?]

[이런 멍청이!]

석두공은 자신의 머리를 쿡 쥐어박으며 소리쳤다.

전부터 인상이 좋았던 무형도객을 만나자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실수를 했던 것이다.

석두공이 포권을 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오년 전 동정호에서 제 사부님께서 임종하시는 것을 함께 지켜주셨지 않습니까?]

[그럼 자네는 그때 그 소년... 그러고 보니 닮았군 그래.]

무형도객은 석두공의 말을 금방 알아듣고 기뻐했다.

 

일렁이는 물결과 까마득한 수평선은 이곳 장강이 바다인지 강인지 모르게 한다.

“그 사람들을 너무 탓할 것도 없네.”

무형도객은 석두공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무공만이 능력이 될 수는 없네.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고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라 할 수 있네. 포용력이 없고 속이 좁다고 해서 원망할 수야 있는가? 그들의 그릇이 그것 뿐인 것을... 나도 일찌기 그들이 난세를 평정할 주역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저도 기대하고 갔다가 실망하여 도에 지나치게 화를 낸 듯합니다. 하지만 삼인이 만든 척살대가 무림에 나오기 전에 제거해야 할 텐데 여간 큰 일이 아니군요.]

석두공이 말했다.

무형도객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소림사에서 무림첩을 발하도록 하는 것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와 자네, 그리고 소림사의 이름으로 발송된다면 더욱 많은 무림인들의 힘을 규합할 수 있을 것이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바는 아닙니다만 오히려 걱정이 됩니다.]

석두공의 말에 무형도객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구대문파는 움직임이 없었으며 또한 삼인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림사에서 무림첩을 발송하고 무림대회를 연다면 그들이 구대문파를 경계하게 될 것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될 이유라도 있는가?]

무형도객이 물었다.

석두공이 머뭇머뭇하면서 말했다.

[사실 저와 저의 의형이신 일초진천수가 그동안 구대문파의 힘을 언제든지 빌릴 수 있는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그들은 최후의 순간에 사용할 생각으로...]

무형도객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돌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랬었군. 음... 그랬었군.]

[...?]

무형도객은 뜻모를 말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형도객 그도 구대문파의 힘을 규합하기 위해 움직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구대문파를 방문하면서 느낀 것은 그들의 힘이 무엇엔가 묶여 있는듯하다는 인상이었다.

그는 그 이유를 이제서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한데 석두공이 강상으로 달려오는 두척의 쾌속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배들을 알고 계십니까?]

[이 넓은 장강에서 불쑥 나타난 배를 내가 어찌 알겠나?]

무형도객이 고개를 저으며 반문했다.

[속도로 보아 부딪힐 수도 있겠습니다.]

석두공이 말했다.

그는 동정호에서 직접 배를 부렸던 사람이다. 물과 그 위로 달리는 배의 성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구 저저...]

[애그머니나! 저걸 어쩌나...]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젊은 부인이 달려드는 배를 발견하고 놀랐는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사공! 사공! 배가 부딪히겠소!]

누군가 소리치자 사공들 중의 한사람이 선실로 뛰어 들어갓다가 징을 들고 다시 뛰쳐나왔다.

지잉! 지잉!

[부딪히겠소. 부딪히겠소!]

그 사공은 징을 두드리며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쾌속선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석두공 등이 탄 배의 허리부분을 정확하게 노리고 있었다.

[으아악!]

성질 급한 사람들은 미리 비명을 질러댔고 사공도 놀라서 징을 던져버리고 배를 젓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려오는 배는 쾌속선이다.

사람과 하물을 많이 실은 도선(導船)과는 그 속도에서 비교할 수가 없다.

석두공이 말했다.

[수적(水賊)입니다.]

[단순한 수적은 아니네. 저것을 보게.]

무형도객이 손을들어 뒤쪽의 쾌속선을 가리켰다.

그 배에서는 막 깃발이 올라가고 있었다. 언듯 보아도 붉은 색인 것같았다.

[적룡혈운도(赤龍血雲島)!]

석두공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으아아!]

그 무렵 배에 탄 선객들이 소동을 일으켜 배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이러다간 충돌하기도 전에 가라앉고 말겠군.]

무형도객은 천근추의 공력을 운용하여 배의 중심을 잡았다.

[자네가 하나를 맞게. 내가 하나를 맞...]

무형도객은 말을 하다가 곁이 허전하여 돌아보았다.

석두공은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이미 한 마리의 비조처럼 강물위로 쏘아져 날아가고 있었다.

쾌속선과 그의 거리가 불과 오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촤아아아!

쾌속선이 갑자기 머리를 돌렸다. 달려오던 여파로 배가 완전히 돌아버렸다.

파도가 무형도객이 탄 배를 넘겨버릴 듯이 크게 떠올랐다.

콰르르르릉...

석두공의 손에서 우레 소리가 터져 나오며 다시 쌍장이 격출되었다.

꽝!

쾌속선의 허리가 벼락을 맞은 듯이 절단되어 버렸다.

[으악!]

풍덩풍덩!

살아남은 자들은 물속으로 뛰어들고 그와 동시에 배는 가라앉아 버렸다.

실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석두공은 물위를 밟고 나아가며 뒤쪽의 쾌속선으로 접근해갔다. 적룡혈운도의 깃발이 올라간 그 배였다.

촤아아아!

그가 지나감에 따라 물결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삼각파도를 이루었다.

갑자기,

[크하하하하... ]

쾌속선에서 광소가 터져 나오며 황의를 입은 노인이 갑판위에 나타났다. 등에는 도(刀)를 맸으며 왼쪽 허리에는 검을 매고 있었다.

적룡혈운도주 해천월-!

바로 그자였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석두공은 물론이고 무형도객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하니 그렇게 작은 배안에 도주인 해천월이 타고 있을 줄이야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 그를 발견한 석두공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아무리 천하의 해천월이라고 하지만 석두공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야말로 호굴에 뛰어든 토끼나 다름없는 신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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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五 章

 

               百劒堡의 訪問客 (1)

 

 

 

금포노인이 말했다.

[그놈들이 만든 척살대가 빨리 가동할 수 있도록 도와라. 일백 개의 마정단(魔精丹)을 심제을에게 보내라.]

(이 일백 개의 마종단을...! 한개에 각기 일백년의 공력을 얻을 수 있는 보물을... )

그의 근처에 있던 여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존명!]

스스슷!

금포노인의 앞에 서있던 흑봉(黑鳳)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보이고 사라졌다.

금포노인은 몸을 뒤로 젓히고 누워 눈을 감았다.

[흐흐흐! 척살대... 그놈들만 세상으로 뛰쳐나오면 몸을 도사리던 은세정검회도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흐흐흐! 그때가 천지가 뒤바뀌는 때...!]

금포노인이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말했다.

[누구냐?]

[십구은(十九隱)의 급보입니다. 척살대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자가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합니다.]

어디선가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금포노인의 이마가 좁혀졌다.

[제거해버릴까요?]

조심스러운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그만두어라. 척살대에 첩자가 있든 말든 상관없다. 척살대는 단지 은세정검회를 끌어내기만 하면된다. 사은(四隱)에게 명해서 백검보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라고 해라. 어쩌면 놈들은 백검보 주변에서 은밀히 서성일지도 모른다.]

[존명!]

그 목소리는 사라졌다.

금포노인은 중얼거렸다.

[은세정검회! 그들이나 본궁이나 힘은 백중지세! 먼저 움직이는 쪽이 필연적으로 멸망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처럼...!]

노인은 고개를 돌리고 미사를 바라보았다.

미사가 흠칫하면서도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벗고 올라와라!]

사라락!

미사의 옷이 요염한 율동에 따라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미끈한 알몸이 된 미사는 금포노인에게로 걸어가 그의 금포를 벗겼다.

노인의 남성이 꿈틀대며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거대한 남성, 미사는 그 위에 조심스럽게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았다.

그녀가 입을 야무지게 다물었다.

순간 그녀의 은밀한 곳이 마치 동굴처럼 넓어졌다. 특이한 방중술을 익힌 것이다.

노인의 무지막지한 남성은 아무 저항없이 그녀의 몸속으로 받아들여졌다.

노인은 엄지손가락으로 미사의 은밀한 부위의 앞쪽을 쓰다듬었다.

미사가 맷돌을 돌리듯이 둔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흥분이 고조되자 미사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봉사를 받는 노인의 눈빛은 고요했다.

그의 눈동자는 아무런 사심도 없는 수행자의 그것인 것같았다.

어느 순간 미사는 혼자 발버둥치다가 고개를 뒤로 젓히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흰자위로 드러나 있었다. 정사로 인해 가사상태에 빠진 것이다.

금포노인은 중얼거렸다.

[이젠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겠지. 움직여야만 할 상황이 만들어진 이상...]

 

× × ×

 

[본궁에서 보내온 영단이오. 이번에 본궁에 흡수된 약성문(藥聖門)에서 수 백년에 걸쳐 만든 것이라 하오.]

백사 마소악이 파혼검, 즉 신분을 감춘 금사종에게 말했다.

금사종이 물었다.

[모두 몇 개요? 어떤 효력을 지녔소?]

[정확하게 일백개요. 그리고 효력은 실로 놀랄만 하오. 일백년의 공력을 얻을 수 있소.]

백사 미소악 대신 흑사 우문추가 말했다.

순간 금사종의 눈이 크게 떠였다.

[일백년의 공력? 그렇다면 우리가 당장 무림에 나갈 수도 있겠군.]

[그것 때문에 파혼검 당신을 찾아온 것이오.]

백사 마소악이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

금사종의 눈에 차가운 한망이 스쳐지나갔다.

백사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주저주저 말을 이었다.

[우...우린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 뿐이라는 것을 알았소. 다른 자들은 그 속을 전혀 드러내지 않소.]

[백사, 말을 돌리지 말게!]

듣고 있던 흑사 우문추가 답답했는지 성을 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우리를 살려주시오. 약속만 한다면 당신의 종이라도 되겠소.”

흑사 우문추는 금사종 앞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햇다.

백사 미소악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함게 무릎을 꿇었다.

“....!”

금사종은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우문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볼때 파혼검 당신도 겨우 척살대의 일원으로 만족할 그런 사람은 아니오. 당신도 뜻을 펴고자 하면 우리같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오.]

탕!

금사종이 탁자를 치고 일어섰다.

[...!]

[...!]

흑백쌍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금사종을 올려다 보았다.

[좋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 말에 복종하라!]

금사종이 가공할 기도를 발하며 말했다.

(우리가 잘못 보지 않았다. 이자는 엄청나다.)

흑백쌍사는 무릎을 꿇은채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견...견마지로를 다하겠소이다.]

금사종은 그들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일단 단약을 이곳에 두고 나가라. 다른 자들이 눈치채면 안되니....!]

 

흑백쌍사는 단약이 들어있는 옥병을 놓고 나갔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금사종은 단약을 눈앞에 두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당장 이것들을 없애버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지 않은가? 저들은 이 단약이 없어도 앞으로 몇 개월만 지나면 무공을 거의 다 이루게 될 것인데... 그렇다고 이것을 그대로 저들에게 다 줄 수도 없다. 그랬다간 당장 무림에 혈풍이 휘몰아친다. 내 능력으로는 이미 삼마경을 어느 정도 터득한 저들을 다 죽일 수도 없고... )

이곳에 있는 자들의 무공은 모두가 흑백쌍사보다 강하다.

조금 강한 자들도 있지만 훨씬 강한 자들도 있다.

삼마경을 어느 정도 익혔는가에 따른 차이였다.

흑백쌍사는 삼마경을 보기는 했으되 익히지는 못했다.

익히자면 필연적으로 내공을 파괴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즉시 목이 달아나고 말 것이기에...!

무림인답지 않게 죽음을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흑백쌍사이기에 삼마경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금사종의 무공으로도 삼마경을 익히고 있는 그들은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아직 화후가 약해서 단신으로는 그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하지만 셋 넷만 모이면 금사종도 그들을 당할 수 없다.

금사종의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금사종은 한가지 결심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마경을 연성하자. 이 영단의 위력을 빌린다면 내공이 폐쇄되어도 금방 복원될 수 있다. 삼마경의 무공으로 삼마경의 무공을 제압하는 것이다.]

그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부운청풍객 등은 모두 하나의 마경만을 익혔다. 내가 삼마경을 모두 익힌다면 그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그들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금제를 받아서 그들에게 복종해야만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금사종은 자신의 방을 나가 흑백쌍사를 찾아갔다.

[납과 수은을 가지고 있소?]

[...?]

[있기는 합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백사가 물었다.

금사종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유는 묻지 마시오.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니...!]

 

금사종은 납과 수은을 가지고 돌아왔다.

옥병을 열어서 밀납속에 든 영단들을 모두 꺼낸 후 자신이 복용할 한알만을 따로 챙겼다.

그리고 바늘로 밀납에 작은 구멍을 뚫고 납과 수은을 혼합하여 나머지 영단들의 가운데로 흘러넣었다.

구십아홉개의 영단에 은밀하게 납과 수은이 들어갔다.

금사종은 옥병속으로 하나하나 다시 넣으며 중얼거렸다.

[영단을 주기는 해야겠지. 하지만 삼 개월 이내에 모두 몸이 썩어나갈 것이다. 단전에서 부터...]

 

× × ×

 

-황산(黃山) 백검보(百劍堡)!

 

부운청풍객등에게 패한 검성 당이정이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이곳은 석두공이 들어서면서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행여나 있을지도 모를 검종맹이나 잔혼각, 적룡혈운도의 공격에 대비하여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는데 석두공은 사십 여 명의 검객들이 둘러싸인 채 연무장에서 검성과 만박노조를 만났다.

[동호천 노선배의 제자라고? 소협이 말이오?]

태사의에 앉은 검성이 말했다.

만박노조는 석두공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석두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조금 이상하군. 자네는 닮기는 했지만 그는 아니네.]

만박노조가 말했다.

순간,

척!척척!척!

주위에 있는 검객들의 손이 일제히 검을 잡았다.

눈을 빛내는 그들의 검은 금방이라도 뽑혀나올 것만 같았다.

석두공이 물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노부는 오년 전 동정호에서 동호천 노선배와 그 제자를 만난 적이 있다. 너는 분명히 동호천 노선배의 제자이름은 알고 있다. 석두공, 바로 네가 말한 그 이름이지. 하지만, 진짜 석두공에겐 고질이 있어 자네처럼 똑똑할 수가 없네. 내가 보기에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는 듯이 보였지. 또한 노선배도 그렇게 말했고...]

[전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석두공은 만박노조의 눈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궂이 내가 나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는 돌아서서 나가려했다.

검성이 웅혼한 음성으로 외쳤다.

[멈추게.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지는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야 겨우 묻는군요. 혈포단객의 부탁을 받고 백검보에 찾아왔는데 정말 실망입니다. 말만 전해주고 가도록 하지요.]

석두공은 화를 억누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모든 검객들이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삼인이 척살대를 만들어 무림의 고수들을 모두 죽이려한다. 척살대가 뛰쳐나오기 전에 부운청풍객 등을 깨뜨려야 한다. 그러려면 무림첩을 뛰워 모든 무림인의 힘을 하나로 뭉쳐야 한다.> 대충 이런 말이었소.]

석두공은 시를 읊듯이 혈포단객의 말을 전한 후에 성큼 걸음을 옮겼다.

만박노조의 손이 기이한 신호를 만들었다.

순간,

휙! 휘휙!

무사들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석두공을 포위했다.

만박노조가 말했다.

[그것은 천강검진(天綱劒陣)이다. 만약 동호천 노선배의 제자가 분명하다면 그것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난 증명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소.]

석두공이 딱딱하게 말했다.

만박노조는 그의 말을 묵살하고 소리쳤다.

[공격해라!]

창! 차차차창!

삼십 육인의 검객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한데 그들이 뽑은 검은 뽑는 기세로 그들의 검끼리 부딪히며 파란 불꽃을 일으켰다. 눈이 부시게 할 정도였다.

석두공은 눈에 은은한 분노가 어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문을 향해 걸었다.

살기가, 그동안 억눌러 있던 살기가 폭발하듯이 그의 몸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동복신과 동적선마저 질리게 했던 그 가공할 살기가...

[헉!]

[저 저럴 수가... ]

천강검진을 형성했던 자들이 그의 걸음에 밀리기라도 하듯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숨이 막힐 듯한 살기였다.

검성 당이정도 벌떡 일어섰다.

그와 만박노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만박노조가 삼인을 상대하겠다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천강검진은 석두공 앞에서 공격한 번 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었다.

석두공은 벌써 연무장의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진저리치는 살기에 억눌러 그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석두공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살기어린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검성! 당세의 협객이라고? 스스로 적을 만드는 졸장부에 불과한 것을... 섭군천노선배가 불쌍하다. 저런 자를 제자라고 믿고 길렀다니...]

순간 검성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번쩍!

그는 한달음에 석두공의 앞으로 날아내리며 소리쳤다.

[네... 네가 사부님을 아느냐?]

석두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앞뒤도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 의심부터 하는 만박노조와 그를 방관하는 검성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던 것이다.

휘루루루룽!

갑자기 그의 몸 주위에 강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검성은 경악하며 물러섰다.

순간,

[으하하하... ]

석두공은 분노에 찬 광소를 터뜨리며 까마득히 사라져갔다.

[윽!]

[으윽!]

백검보의 검객들이 귀를 막으며 비틀거렸다.

석두공의 모습은 벌써 완전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석두공이 마지막 순간에 펼쳐보인 천신폭풍보는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인간의 무공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연무장에 죽음같은 침묵이 흘렀다. 모두 얼이 빠져 버린 듯했다.

한참 후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무공이 아니다! 오직 신만이 저런 무공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검성의 눈이 만박노조를 찾았다.

만박노조는 축 쳐진 어깨로 돌아서서 걸었다.

검성이 따라가며 물었다.

[어떤 무공이오? 동호천 선배의 무공이오?]

만박노조가 고개를 저었다.

[동호천 선배에게도 저같은 무공은 없었을 것이네. 인간의 무공이 아니야!]

[그럼 우리 고검문의 무공이란 말인가?]

검성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혼란스러웠다.

 

비둘기 한마리가 백검보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비둘기는 황산에서 멀지 않은 구화산쪽을 향하고 있었다.

 

× × ×

 

<동호천의 제자라는 자가 백검보를 찾아왔었음.

하지만 만박과 검성의 인정을 받지 못함.

척살대에 관한 말을 했음.

엄청난 무공을 소유, 만박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천강검진을 손 한번 쓰지않고 깨뜨렸음.

검성이 고검문의 제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음.

동호천의 제자라고 하는 자는 가공할 신위를 보이며 날아갔음. 인간의 무공이 아님. 오직 궁주님 만이 그를 이길 수 있을 것!

그자를 주시해야만 함.

사은(四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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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四 章

 

               高手刺殺隊

 

 

 

섬서성에서 발원되어 대별산맥을 따라 호북성으로 흘러드는 물이 있다.

한수(漢水)라고 불리는 이 강은 호북성에서 크게 돌아 흐르는데 그 바람에 물의 흐름이 느려져서 굴곡이 심한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산 줄기를 따라 흐르는 한수는 곳곳에 만(灣)을 이루고 있고 그러한 곳마다 대개 하나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이 밖에서 보아 쉽게 찾기 어렵기 때문에 바람을 피하기도 좋고 도적의 피해도 적기 때문이다.

또한 물살이 느리니 고기를 잡기도 좋은 강이 한수였다.

다른 곳에서는 어황이 좋지 않을 때가 있어도 이 한수는 늘 물고기가 풍족하다.

장마철이 되어 장강의 물이 역류하면 물고기들이 맑은 물을 따라서 한수로 거슬러 올라오기 때문이다.

올라올 때는 올라오지만 한수의 물은 완만하기에 그 고기들은 쉽게 장강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물살이 완만하고 굴곡이 심한 이 한수에서도 유독 한곳만은 배들이 근처에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다.

어찌나 빠른지 물이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것같이 느껴질 정도이다.

 

-흑성소(黑星沼),

 

맑은 물위에 있는 단 한 곳의 검은 점처럼 존재하는 곳이기에 어부들이 흑성소라고 부르는 곳...

이곳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흑성소를 지나서 있는 좁은 만은 바퀴처럼 휘어져 있으며 그속에는 무림에서 전설적인 악명을 날리고 있는 어떤 세력의 특별한 목적을 위한 시설이 있을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구우우우!

비둘기 한마리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흑성소 위를 지나 그 뒤쪽의 좁은 골짜기로 날아들어갔다.

 

× × ×

 

[오늘 또 한놈을 보낸다고 하는군.]

[그럼 마지막 놈이로군.]

[이번놈은 자질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

방금 전해진 전서를 탁자위로 휙 던져버리며 세모난 얼굴의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그의 맞은 편에 있는 새까만 얼굴에 흰수염이 가득하고 눈만 반짝이는 노인이 말했다.

[이곳에 오는 놈들 중에서 대단하지 않다는 놈들이 있기나 했나? 실제로는 모두 그저 그런 정도일 뿐이었지만... ]

[다르다니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하다 못해 물건이라도 말이야. 흐흐흐...]

세모난 얼굴이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끼익!

깜둥이 노인이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 보냈다고 했으니 며칠 후에야 도착하겠군. 난 놈들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나 살펴보겠네.]

 

밖에는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깜둥이 노인이 나온 그 집만이 제법 클 뿐, 그 아래로는 마당이 하나씩 달린 작은 집들이 백여 개나 늘어서 있었다.

그 아래쪽은 강물이 들어와 있었고...

한데 노인이 나온 집을 제외하곤 어느 집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또한 그 집들은 작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다.

모두가 불에 구운 기와를 얹었으며 역시 불에 구운 벽돌과 돌을 사용해서 벽을 만든 것들이었다.

바람도 직접 받지 않는 곳에 지어졌으니 수백 년, 또는 천년을 지난다 하더라도 허물어지지 않을 것같았다.

스으...

노인은 허깨비처럼 둥둥 날아서 한채의 집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치 나비가 그렇게 하듯이 그집의 울타리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쓰륵!쓰륵!

풀벌레 소리만이 이따금씩 들릴 뿐 사방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휘익!

노인은 울타리 밖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길고 가느다란 풀잎 하나가 그의 손으로 빨려들어왔다.

후우욱!

노인은 손바닥에 풀잎을 올리고 살그머니 불었다. 풀잎은 바람을 타고서 집으로 날아갔다.

한데 풀잎이 막 창을 넘어가는 순간,

파파팍!

백색도광이 솟구치며 풀잎이 수백조각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쌀알같은 크기로 변한 풀잎의 잔해들이 무서운 속도로 반탄되어 나왔다.

쇄애애액!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를 슬쩍 흔들었다.

스스스!

풀잎의 잔해들은 집을 찾아 날아드는 벌들처럼 그의 소매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검은 얼굴의 노인은 다시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여기가 연백곡(鍊魄谷)이오?]

갑자기 그의 삼장 앞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휘리리릭!

흑면노인은 허공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며 십여 장 밖으로 물러섰다.

[웬놈이냐?]

노인이 준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데 그가 단번에 십여 장을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앞 삼장 쯤에 검은 인영이 서있었다.

(이런....!)

노인은 다시 오장을 더 물러났다.

스읏!

그러나 검은 인영은 다시 똑같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아직 연락을 받지 않았소? 지금 쯤 연락이 됐으리라 생각했는데...]

[네... 네놈이 파혼검(破魂劒)이란 놈이냐?]

노인은 경악하며 물었다.

그 순간이다.

파앗!

그의 눈앞에서 은빛이 번득였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당신은 나를 놈이라고 할 자격이 없소.]

철컥!

검이 칼집을 찾아서 꽂히는 소리가 났다.

노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앞가슴 옷이 반으로 베어져 있었다.

(무... 무서운 놈이다.)

그는 식은 땀을 흘렸다.

[내가 있을 곳은 어디오?]

노인은 엉겁결에 제일 아래쪽, 그리고 구석진 곳에 있는 집을 가리켰다.

검은 인영이 흰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잘해봅시다.]

노인은 그제서야 검은 인영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각진 얼굴에 눈에서 턱까지 두 가닥의 검상이 있는 자였다.

검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파혼검은 터벅 터벅 자신이 배정받은 집으로 걸어갔다.

노인은 화석이 된듯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파혼검... 흑백쌍사(黑白雙邪)의 흑사(黑邪)인 나 우문추(于文秋)가 그의 단 일검을 피하지 못했다. 무서운 놈이다.)

 

-흑백쌍사(黑白雙邪),

 

이들은 백여 년 전 무림에서 활동했던 사파(邪派)의 절정고수들이었다.

석년의 그들은 지금의 십대 고수들에 비해서 그 성명에서 떨어지지 않던 인물들이었다.

흑사 우문추는 축쳐진 어깨로 제일 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파혼검(破魂劒),

 

그는 자기의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슴을 헤치고 무엇인가를 꺼냈다.

새까만 오죽패(烏竹牌)였다.

 

<검종(劒宗)>

 

오죽패에 홈을 파고 은(銀)을 먹여 만든 글씨, 그것은 검종맹의 신물이었다.

(후후! 석아우의 뜻과 달리 이곳까지 흘러들어오고 말았군. 하지만 오히려 잘 된 것일 수도...)

파혼검은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강함을 추구하는 자들...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마!]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 ×

 

 

[이것은 마지막 남은 필사본(筆寫本)이다. 얼마나 익히는가는 전적으로 네게 달렸다.]

세모난 얼굴을 가진 백사(白邪) 마소악(馬掃惡)이 세권의 얇은 책을 주며 말했다.

파혼검은 무심한 듯이 말했다.

[거기에 놓고 가시오.]

마소악의 눈이 새파란 살기를 뿜었다.

[네가 강하다는 말은 흑사로 부터 들었다. 하지만, 겨우 우리같은 늙은이 하나를 이길 수 있다고 해서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이곳엔 너 못지 않은 자들이 적지 않다. 경거망동은 하지않는게 좋을 거다.]

[나도 한마디 하겠소. 흑백쌍사가 악독하다는 말은 들었소. 하지만, 내 행동에 대해선 간섭하지 않는게 좋을 거요. 간밤에 이곳의 규칙을 읽어보니까 당신들은 쓸모없는 존재더군.]

파혼검이 냉소하며 말했다.

마소악이 살기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뜻이냐?]

[후후후! 당신들은 우리가 무공을 연성할때까지 뒷바라지나 하는 역할에 불과하더군.]

파혼검의 음산한 어조가 이어졌다.

[명목상의 지위야 그럴듯하지만... 아마도 우리의 무공이 연성되고 난 후엔 무용지물이 될 사람들이 당신들이지. 어쩌면 맹주는 당신들을 제거해 버릴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마소악은 흠칫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맹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린 거추장스러운 물건일 수도 있다. 맹주는 서로간의 약속에 의해 다른 무공들을 익힐 수 없지만 우리는 삼마경을 다 보았다. 훗날, 아니 훗날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지금의 공력을 폐하고 삼마경을 익히기만 한다면 그들을 능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맹주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파혼검이 그의 속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이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감시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는 게 좋을 거요. 더불어, 늙은 개같은 목숨이지만 살아서 나갈 궁리도 하는게 좋겠지.]

마소악은 간이 떨리는 것같았다.

그는 아무소리도 못하고 돌아서서 나갔다.

파혼검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속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이곳에서 무공을 익히고 있는 자들은 모두 세상에서 보기 드문 기재들이다.

또한 그들은 저주받은 악마의 무공이라는 삼마경을 익히고 있다.

삼마경을 익히기 위해서는 그때까지의 내공을 완전히 버리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직 초보적인 지금은 그렇게 강하다고 할 수 없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강해질 것이다.

검종맹주인 부운청풍객 심제을의 밀명을 받은 자가 있다면 마소악과 우문추, 두 껄끄러운 존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마소악의 마음속에는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었다.

 

파혼객은 삼마경을 펼치지 않았다.

그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가장 무서운 적은 삼마경이다. 어느 누구든 한번 빠지기만 하면 결코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악마의 무공... 이것을 익히기 보다는 파훼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만약, 이것을 익히기 위해 지금 공력을 폐한다면 어떤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무치무요를 익혔으니 다른사람보다 유혹에 잘 넘어가지는 않겠지만, 삼마경 앞에서는 나도 장담할 수없다.)

무치무요를 익혔다!

그렇다면 파혼검은 바로 금사종이란 말인가?

어쨌든 파혼검은 자신의 혈도를 스스로 눌렀다.

앞으로 세 시간 동안 그의 혈도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책장만 넘길 수 있게 된 그는 그제서야 삼마경 중 제일 위에 놓여있는 검마경(劒魔經)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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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장

 

           혈포단객 (2)

 

 

(읍!)

혈포단객은 이를 악물었다.

고통이,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그의 정신을 하얗게 표백시켜버렸다.

정말 지독한 악녀였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절세고수인 혈포단객은 그녀의 손에 의해 남성을 잃어버렸다.

[호호호호...]

청의여인은 잘라낸 것을 들고 잔혹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손은 피로서 범벅이 되어있었다.

[천천히 죽여주마!]

청의여인은 웃음을 뚝 그치며 사악한 음성을 내뱉었다.

혈포단객의 배가 길게 찢어졌다. 

풀위로 쏟아진 내장이 꿈틀거리며 더운 김을 뿜었다.

흑의인, 즉 절대칠살의 일살(一殺)이 그 내장을 불끈 밟았다.

[나도 네놈의 천근추에 배가 터져서 죽을 번 했지. 이건 공평한 복수다.]

혈포단객의 눈이 하얗게 까뒤집어졌다.

그러나 급격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은 아직도 그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청의여인은 그의 오른 팔을 잘라내며 말했다.

[본녀를 잘도 괴롭혔겠다. 하나하나 잘라내 나무기둥을 만들어주마.]

피가 그녀의 얼굴로 튀었다.

여인이 벌떡 일어섰다.

[도저히 이렇게 해서는 분이 풀리지 않겠어요.]

혈포단객의 왼팔이 비틀리며 어깨에서 뽑혀나왔다.

혈포단객은 입만 짝 벌렸을 뿐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크흐흐흐...]

일살이 즐거운듯이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청의여인이 혈포단객의 팔을 팽개치며 일살의 허리를 잡았다.

흥분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발갛게 달아있었다.

그녀는 피를 보면서 강렬한 성욕을 느낀 것이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토하며 일살의 바지를 까내렸다.

여인에게 기습을 당한 일살이 숨을 들이마셨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에서 낮 뜨거운 장면이 벌어졌다. 

[아아! 더 빨리! 더 세게!]

여인은 일살을 힘껏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황홀한 듯 벌어진 입으로는 몸안으로 무엇이 들어오는 만큼 묘한 음률이 흘러나왔다.

한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발로 툭 찼다.

[...?]

섬찟한 느낌에 고개를 들면서도 그녀는 허리를 움직였다.

이미 피어오른 욕구는 죽더라도 풀지 않을 수 없는 그녀였다.

퍽!

일살은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밟는 것을 느꼈다.

[윽!]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사람을 죽이고 이걸로 잔치라도 벌이겠다는 거야 뭐야? 정말 못 봐주겠어.]

돌연 소녀의 투정을 부리는 듯한 낭낭한 음성이 그들의 귓전을 두들겼다.

한몸이 되어 눌린 자세가 된 청의여인과 일살은 피가 싸늘히 식는 것같았다.

[누...누구냐?]

퍽!

소녀의 발의 번쩍 들리워졌다가 일살의 등에 찍혔다.

“...!”

일살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턱 막히고 등판이 으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물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닐 텐데? 이 아가씨가 묻는 대로 대답이나 하시지?]

여전히 한몸이 된 채 누워있는 두 남녀를 내려다보며 소녀는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가랑이를 벌린 자세로 사내에게 깔린 채 청의여인이 말했다.

[뭘 대답해라는 거냐?]

[이 짓이 재미있어?]

소녀가 세운 무릎에 팔을 걸치고 턱을 고이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있었다.

청의여인은 순간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애는 남녀간의 정사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처음 구경하는 모양이구나. 이런 풋나귀들은...!)

그녀는 입가에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호호! 직접 해보기 전에는 말로 설명해줘도 모를 걸? 골이 뻥 뚫리는 것같은 느낌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겠어?]

[그래? 그럼 기회가 닿는 대로 나도 해봐야겠군. 하지만 넌 누구야?]

소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청의여인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소녀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저건 누구의 시체지?]

[...!]

청의여인은 입이 얼어붙었다.

[말귀를 잘 못알아 듣는군. 골이 뻥 뚫려버려서 그런 모양이지?]

소녀는 돌아서서 혈포단객의 처참한 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데 혈포단객의 몸은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러고도 살아있다니... 대단한 생명력이다.)

그녀는 혈포단객의 무참한 잔해에 눈살을 찌푸리며 보다가 감탄했다.

그때 청의여인은 일살의 혈도를 풀어주며 소리없이 일어섰다.

일살의 복면속 눈알이 악독한 빛을 뿜었다.

소녀는 한쪽에 떨어진 혈포단객의 팔을 발견했다.

[이건 혈포단객의 혈천갑... ]

바로 그 순간이다.

번쩍!

일살의 검이 소리없이 그녀의 등으로 날아들었다.

파앗!

헌데 그 직후 갑자기 소녀의 허리에서 한줄기의 빛이 폭사되었다.

그것은 마치 은뱀처럼 일살의 허리를 쓸어버렸다.

그리고 그 빛은 더욱 멀리 뻗어나가 청의여인의 목을 꿰뚫어버렸다.

푸악!

일살의 허리가 그제서야 두동강이 나며 쓰러졌다.

바지도 입지 않은 하체가 흉칙한 모습으로 피속에 뒹굴었다.

그 악독하던 청의여인도 치마를 걷어올려 허연 하체를 고스란히 들어낸 부끄러운 자세로 숨이 끊어졌다.

추릿!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치켜드는 손목으로 연검이 휘감겨 들었다.

[허리보다 이게 좋을 것같군.]

그녀는 중얼거리며 혈포단객의 미심혈을 눌렀다.

혈포단객의 눈이 희미하나마 빛을 발했다.

[혈포단객이신가요? 안타깝지만 당신은 대라신선이 온다고 해도 살아날 수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고맙... 혈천갑... 백검보... 석두공에게... ]

혈포단객이 입술만을 달짝거렸다.

소녀는 다른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백검보와 석두공, 혈천갑, 이 말들은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석두공?!]

소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혈포단객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두공을 알고 있어요? 지금 어디에 있죠?]

소녀가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는... 백...]

혈포단객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가 떨어졌다.

죽은 것이다.

오객(五客) 중 한명으로 평생 다른 누구와도 상종하지 않고 외로운 늑대처럼 독행(獨行)하던 혈포단객의 어이없는 최후엿다.

소녀는 망연한 듯이 중얼거렸다.

[석두공... 석두공... 그가 살아있었어. 그렇게 찾아헤맸던 그가... 한데 왜 가슴이 이렇게 무겁고 답답할까?]

석두공을 찾아다니는 소녀, 그녀는 바로 장지연이었다.

석두공이 떠난 후 뒤따라 왔던 그녀였는데 숲에서 헤매다가 청의여인과 일살의 정사를 목격하고 다가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폭풍무존으로부터 배운 검법으로 절대칠살 중의 두 사람을 순식간에 처치해버렸다.

한데 석두공을 찾아다니면서 정작 석두공의 현재 얼굴은 알지 못하고 진짜 석두공을 만났으면서도 이름을 물어보지 않은 그녀는 혈포단객으로부터 석두공이라는 이름을 듣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뽀송뽀송한 머리털을 가진 석두공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으로 지나갔다.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장지연은 석두공이 살아있다는 말에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혈포단객을 묻어주고 곰곰히 생각했다.

(혈포단객이 <백>이라고 한 말은 아마도 백검보를 가리킬 것이다. 이미 백검보라는 말을 한번 한 적이 있으니까. 백검보... 석두공... 내키지는 않지만 찾아가지 않을 수 없구나. 사부님의 유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

스읏!

질끈 입술을 깨문 장지연은 빠른 속도로 숲속을 빠져나가 동쪽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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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三 章

 

          血袍單客 (1)

 

 

 

(틀림없이 그 여인이다. 소림사로 가던 중에 만났던...!)

석두공은 혈포단객의 뒤를 유유히 쫓아가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쐐애액!

혈포단객의 앞으로는 한사람의 여인과 네 명의 흑의인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 중 여인은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석두공은 자칫 그녀 때문에 죽을 뻔 한 적이 있는 것이다.

잔혼각(殘魂閣)의 절대칠살(絶代七殺)의 한명인 그녀는 그때 사내들에게 겁탈당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석두공의 평정심을 흔들어놓았었다.

난생 처음으로 보는 여체의 은밀한 구조, 게다가 사내의 흉칙한 물건이 그곳을 쑤셔대며 유린하는 장면을 보며 석두공은 그만 정신이 흐트러지고 말았고,

그 결과 잔혼살객의 사신겸(殘魂鎌)에 심장을 찔려 자칫 죽을 뻔 했었다.

헌데 그때 그 요사한 계집이 동료들과함께 혈포단객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그녀와 동행하고 있는 네명의 사내는 바로 절대칠살중 살아남은 네명이었다.

 

휘이익!

청의여인과 절대칠살의 생존자들은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혈포단객은 숲으로 들어간 적은 쫓지 않는다는 강호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달려들어갔다.

여름의 숲은 입과 가지를 무성하게 펼쳐놓았고 그 사이로 다섯 사람은 모래에 물이 스며들듯 사라져 버렸다.

“...!”

혈포단객은 형형한 눈초리로 사방을 살폈다.

숲으로 스며드는 붉은 저녁 노을에 나뭇잎들이 피로 물든 듯이 보였다.

스윽!

혈포단객은 소매를 걷어올렸다. 소매 속에서 드러난 손은 그의 옷이나 마찬가지로 피처럼 붉었다.

그것은 붉은 장갑이었다.

[혈천갑(血天匣)에 오랫만에 피를 먹이게 되었군.]

혈포단객은 살기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나무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의 힘찬 발걸음에서 강렬한 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은은한 강기의 막이 그의 몸을 공처럼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혈포단객의 무공도 전보다는 훨씬 강해진 것같군.)

석두공도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숲으로 스며들어갔다.

그의 청력으로도 다섯 사람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풀은 무릎까지 자라있었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이루는 빛과 그늘은 눈앞을 아롱지게 만들었다.

혈포단객은 눈으로 사방을 살피고 귀로는 팔방을 들으며 한발한발 걸어나갔다.

스윽!스윽!

그는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하지만 풀벌레 소리들 조차 갑자기 사라져버린, 오직 고요만이 깃든 숲속은 혈포단객 같은 고수에게도 심장이 조여드는 긴장을 주었다.

긴장의 도가 높아지고 신경이 팽팽이 당겨짐에 따라서 그의 발소리도 점점 사라져갔다.

그는 무릎까지 자란 풀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끝을 밟고 나아가고 있었다.

초상비(草上飛), 초상비의 경공술이었다.

숲 안에는 넓직한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의 한쪽에 수 백 년은 됐음직한 고목(古木)이 있었다.

“...!”

혈포단객의 눈에 번개불 같은 섬광이 비쳤다.

고목은 굵기는 수 아름이 되지만 크지는 않았다. 가지는 앙상하고 가운데는 썩어서 구멍이 파여있었다.

하지만 몇 개의 푸른 입은 아직도 그 나무가 고사목(枯死木)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번쩍!

갑자기 혈포단객의 발아래서 강렬한 백색 섬광이 한가닥 솟구쳐올랐다.

[흥!]

혈포단객은 미끄러지듯 옆으로 반보 물러서면서 왼발로 섬광을 차버렸다.

팍!

또한 그의 몸이 천근추(千斤錘)의 수법으로 뚝 떨어졌다.

푹!

[으악!]

그의 가경할 공력이 실려있는 그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하나!]

혈포단객은 웅혼하게 내뱉으며 고목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스스스슷!

풀 위를 낮게 날면서 흑의복면인이 검으로 그의 다리를 베어왔다.

바다위로 배가 지나간 듯이 풀들이 갈라졌다.

혈포단객은 오른손을 휘둘렀다.

파앗!

붉은 빛이 한순간 번쩍하고,

휘리리리!

흑의인은 풀위를 뒹굴어 혈포단객의 혈천갑에서 뿜어나온 강기를 피했다.

푸앗!

혈천갑의 강기에 격중된 풀들이 가루가 되어 날아올랐다.

쏴아아!

하지만 흑의인은 여전히 혈포단객을 향해 베어오고 있었다.

[제법....]

혈포단객은 살기어린 음성을 터뜨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핑!

깡!

흑의인의 검이 부러졌다.

스스스슷!

흑의인은 귀신처럼 빠르게 풀숲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고목 쪽으로 일부의 풀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람이 그쪽으로 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차앗!]

혈포단객은 한줄기 홍영(紅影)이 되어 고목나무를 향해서 쇄도해들었다.

그 순간에 흑의인은 고목나무의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으합!]

혈포단객이 무시무시한 고함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횡으로 그어졌다.

스파앗!

붉은 강기가 고목나무로 파고들었다.

그그그그... 쿵!

고목나무가 반듯하게 베어지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 뒤에 앞으로 고꾸라지는 흑의인의 등이 보였다.

 

석두공은 공터의 다른 나무 위에서 혈포단객의 모습을 바라고 있었다.

[저 한 수는 아주 멋지군. 나무를 벨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큰 나무를 베어 그 뒤에 있는 적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순간적으로 먹기는 어려울 것인데...]

한데 흑의인이 쓰러진 그곳엔 또 다른 시체가 있었다. 마른 풀과같은 빛의 청의를 입은 가날픈 몸매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 시체의 머리는 몸에서 두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청의여인, 석두공이 소림사로 갈 때 만났던 여인이며 또한, 석두공이 객점에서 부터 쫓아온 그 여인이었다.

[...?]

석두공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혈포단객의 손에 죽은 건 아니다. 그렇다면 동료가 죽였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천천히 날아올라 고목의 뒤로 돌아갔다.

한데,

[헛]

석두공은 무심코 눈을 돌리다가 숲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또 하나의 머리를 볼 수가 있었다. 젊은 여인의 머리였다.

하지만 그 여인의 몸은 보이지 않았다.

 

[셋인가?]

스읏!

혈포단객은 나직하게 내뱉으며 청의여인의 시체를 지나치고 있었다.

석두공은 크게 외쳤다.

[위험하오!]

그때였다.

파파팟!

혈포단객의 뒤에서 흑의인이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쐐애애액!

이미 그의 손에서 두자루의 비수(匕首)가 발출된 후였다.

혈포단객은 석두공의 외침과 흑의인의 기습에 흠칫했으나 콧웃음을 쳤다.

[가소로운... ]

카캉!

두자루의 비수가 그의 호신강기에 부딪히며 깨어졌다.

휙휙!

날아오른 흑의인은 다시 두자루의 비수를 던졌다.

혈포단객은 비수엔 신경도 쓰지않고 흑의인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와우우웅...

수 백 개의 손그림자가 생기면서 흑의인을 뒤덮었다.

흑의인은 몸을 팽이처럼 돌리며 회오리 바람처럼 움직여 허공에서 이동했다.

펑펑펑펑!

하지만 혈포단객의 손그림자는 그의 몸을 공처럼 두들겼다.

헌데 그때였다.

스팟! 찌이익!

두자루의 비수가 그의 호신강기를 찢으며 들어왔다.

혈포단객의 두눈이 부릅떠졌다.

[놈!]

그는 황급히 혈천갑을 휘둘려 비수를 쳐갔다.

퍼억!

하지만 비수는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비스듬히 틀어지며 그의 어깨에 박혔다.

그 비수는 호신강기마저 찢어버리는 특별한 병기였던 것인데 호신강기와 부딪히면서 방향이 틀어졌던 것이다.

팍!

혈포단객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붉은 그의 혈포가 더욱 검붉게 변했다.

나머지 하나의 비수는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쿵쿵!

혈포단객은 두걸음을 물러섰다.

그의 눈앞에는 자신의 혈천갑의 수공에 격중된 흑의인의 시체가 폭죽처럼 터져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하나 남았군.]

그는 어깨에 박힌 비수를 뽑았다.

헌데 바로 그 직후였다.

스읏!

그는 문득 자신의 뒤에서 무엇인가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옆으로 몸을 미끄러 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계산된 함정이었다.

펑!

흙더미가 눈앞에 치솟으며 그의 몸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에 혈포단객은 옆구리가 화끈해옴을 느꼈다.

청의여인의 검이 그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

혈포단객의 눈이 부릅떠졋다. 청의여인은 분명 몸통과 머리가 분리된 채 쓰러져 있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혈포단객의 옆구리를 찔러오는 그녀의 몸은 온전했다. 머리만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몸과 머리가 따로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몸으로 생각했던 머리없는 여인의 시체는 여전히 누워있었고 청의여인의 목이 놓여있었던 곳에는 웅덩이가 파여있었다.

청의여인은 바로 그 웅덩이에 몸을 숨기고 목만 남은 시늉을 한 것이었다.

[속았구나.]

콰창!

혈포단객은 버럭 소리치며 혈천갑을 휘둘렀다.

순간 청의여인의 웃을듯 말듯하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미처 가라앉지도 않은 흙더미 속에서 또 한 자루의 검이 튀어나오며 혈포단객의 팔을 찔렀다.

[멈춰라!]

쐐액!

석두공은 벼락같이 소리치며 날아갔다. 그의 손바닥에서 파란 불꽃이 발출되었다.

순간 혈포단객은 발악하듯 소리쳤다.

[모조리 죽여주마!]

꽈르릉!

그의 혈천갑이 돌연 방향을 돌려 석두공을 쳐갔다.

“헛!”

석두공은 깜짝 놀라 자신의 상화장(翔華掌)을 거둬들이며 혈천갑을 피했다.

그리고 즉시 두가닥의 지풍을 날렸다.

핑핑!

탄지신통(彈指神通)이었다.

[욱!]

[크윽! 큭!]

세마디의 비명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혈포단객은 석두공이 자신을 공격하는 줄알고 전력을 다해서 그를 방비했다.

그리하여 흙더미 속에서 튀어나온 검을 막지 않았다. 그 검은 호신강기가 흩어진 순간적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팔에 뼈가 드러나도록 깊은 상처를 만들었다.

또한 청의여인은 그의 옆구리에 검을 더욱 깊이 찔렀다.

그러나 그를 공격했던 두 사람도 석두공의 탄지신통에 맞아 혈도가 제압당한 상태였다.

석두공은 혈포단객의 앞으로 날아내렸다.

퍽!

혈포단객의 혈천갑이 흑의인의 두개골을 깨뜨려버렸다.

그리고 엽구리를 찌르고 있는 검을 뚝 부러뜨려 뽑아낸 다음에 석두공에게 물었다.

[넌 누구냐?]

석두공의 머리카락은 정상이 아니다. 마치 갖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노르스름하면서도 뽀송뽀송하다. 아주 잘생긴 미청년이기는 하지만 이상해 보이기는 어쩔 수 없었다.

석두공이 말했다.

[석두공입니다. 오년전 동정호에서 만난 적이 있지요. 반갑습니다.]

순간 혈포단객도 놀랐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혈도가 제압되어 화석처럼 굳어있는 청의여인이었다.

부러진 검을 들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치 동호천 노선배의 제자 석두공인가?]

혈포단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석두공이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우선 몸을 돌보도록 하시지요.]

[어느 구석에 숨어있다가 이제서야 나왔는가?]

혈포단객은 스스로 혈도를 눌러 지혈시키며 물었다.

석두공이 청의여인을 보면서 대답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이 여인의 도움이 컸던 것같더군요.]

“...!”

청의여인은 파랗게 질린 채 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혈포단객의 표정이 확 변했다.

[무슨 뜻인가?]

[오해하지 마십시오. 전 이 여인에게 유인되어 잔혼살객과 부운청풍객에 의해 절벽에 떨어졌다가 간신히 살아나왔으니까요.]

석두공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혈포단객이 물었다.

[지금 천하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고 있겠지?]

[대충은... 그런데 어쩌다가 이자들을 만나게 됐습니까?]

[그렇지, 깜박 잊을 뻔 했군. 그 육시를 할 세놈들이 또 다시 힘을 합쳤네. 부하들 중에서 고수들을 뽑아서 척살대(刺殺隊)를 조직한다는군. 만리어옹(萬里漁翁)이 내게 그 말을 전해주고 이놈들에게 죽었어.]

혈포단객은 흉광을 발하면서 말했다.

만리어옹이라면 장강의 곳곳,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노인이다. 한 자루의 묵철간(墨鐵竿)을 병기로 사용하며 구구팔십일의 팔십일초 어룡간(魚龍竿)은 일절이라고 알려져 있다.

만리어옹은 우연히 잔혼각과 검종맹, 그리고 적룡혈운도가 연합하여 전문적으로 고수들만을 죽이는 척살대를 조직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잔혼각의 절대칠살에게 쫓기던 만리어옹은 혈포단객을 만나 그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리어옹은 결국 절대칠살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절명했다.

또한 절대칠살은 사실을 알고 있는 혈포단객마저 이중 삼중의 덫을 꾸며서 암살하려했던 것이다.

혈포단객이 말했다.

[무림이 단결해야만 하네. 그놈들은 악마의 무공이라는 삼마경(三魔經)을 익히고 있네. 무림첩(武林帖)이라도 띄워져야만 할 걸세.]

[척살대라면... 설마 무림에서 고수들은 다 죽여버리겠다는 그런....]

[그게 아니라면 척살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혈포단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만리어옹의 말로는 그들 척살대의 하나하나는 삼마경중에서 필요한 무공은 어떤 것이든 배울 것이라고 했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척살대란 자들이 삼마경을 익히는게 사실이라면 그자들에게 지목되고서도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혈포단객의 말이 이어졌다.

[그자들이 연공을 끝내고 나오기 전에 검종맹 등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천하는 영원히 그 마귀같은 세놈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 것일세.]

[...!]

석두공의 얼굴도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혈포단객이 두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천하제일인이셨던 무치 동호천 노선배의 유일한 제자. 만약에 자네가 무림첩을 뛰워서 무림인의 단결을 호소한다면 아마 거역할 사람이 그다지 없을 것일세.]

[...]

석두공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당장 백검보로 가게. 일초진천수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도 단독이기는 하지만 삼인에 대항하고 있네. 가능하면 그와도 힘을 합치는 것이 좋을 것일세.]

[일초진천수는 저의 의형인 금사종입니다.]

석두공의 말에 혈포단객은 희색을 띄었다.

[그래? 그렇다면 더욱 잘됐군. 어서 가보게.]

[한데 이 여인은...]

석두공이 청의여인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혈포단객이 말했다.

[작은 것에 매이지 말게. 이 계집은 내가 심문하겠네.]

혈포단객의 혈천갑을 낀 우수가 청의여인의 목을 잡아갔다.

석두공은 무언가 미진한 기분이 들엇다. 그의 비상한 본능이 어떤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혈포단객의 말이 워낙 완강한 지라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인사를 하고 그대로 떠났다.

백검보,

백검보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부운청풍객등이 만든다는 척살대가 무림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그들을 분쇄시켜야만 한다.

쐐애액!

석두공은 한줄기 빛살처럼 동쪽으로 날아갔다.

 

혈포단객의 손아귀에 목이 잡힌 청의여인의 다리가 땅에 떠서 바둥거렸다.

[잔혼각의 살수냐?]

혈포단객은 그녀의 목을 잡고 들어올린 채 물었다.

“...!”

청의여인은 눈알이 빨갛게 되어갔다.

뚜둑!

혈포단객은 손아귀에 힘을 더욱 가하며 물었다.

[잔혼각의 살수냐?]

청의여인은 숨도 재대로 쉬지 못하고 입술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혈포단객의 창백한 얼굴은 마치 저승사자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냉혈한이기라도 하듯 혈포단객은 더욱 손아귀에 힘을 주며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 했다.

[잔혼각의 살수냐?]

[끄륵 끄륵!]

여인의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혈포단객은 전혀 표정이 없었다. 그는 청의여인에게서 죽고싶은 의지마저 박탈해버릴 모양이었다.

그가 손을 흔들자 여인의 몸이 빨래줄에 걸린 빨래처럼 흐느적거렸다.

갑자기 혈포단객은 손을 풀어버렸다.

스르르...

청의여인은 뼈가 없는 사람처럼 무너져 내렸다. 눈빛은 망연하고 동자가 빛을 잃고 풀려있었다.

혈포단객의 음성이 유부(幽府)에서 흘러나오는 악마의 음성처럼 그녀의 귀로 파고들었다.

[척살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곳을 말해라.]

청의여인의 입술이 달짝거렸다.

혈포단객은 그녀의 혈도를 풀었다.

[처 척살... ]

청의여인은 완전히 이지를 잃어버리고 들릴 듯 말듯한 음성을 흘러냈다.

휘청!

한데 그 순간에 혈포단객의 몸이 갑자기 휘청했다.

[웃!]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 혈포단객은 흔들리는 몸을 바로 잡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푸른 풀밭이 그의 면전으로 다가왔다.

풀썩!

혈포단객은 몸이 물에 젖은 솜뭉치같이 무거워지면서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청의여인의 얼굴과 불과 세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쓰러져 있었다.

[척살대는... 운... ]

청의여인이 실성한 듯이 우물거린다.

[일곱째! 말할 필요없다.]

돌연 혈포단객이 쓰러진 곳에서 삼정정도 떨어진 곳에서 한 명의 흑의인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분명히 죽였는데... ]

혈포단객은 입밖으로 겨우 나오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흑의인이 일어난 곳은 혈포단객이 처음 암습을 받았던 그곳이었다.

혈포단객의 천근추(千斤錐)에 의하여 죽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물, 그는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듯했다. 그런 그의 손에는 뚜껑이 열려진 납작한 병이 들려져 있었다.

[혈포단객! 산공독(散功毒) 맛이 어떤가? 내 아우들을 죽인 후이니 더욱 맛이 있었을 거다.]

흑의인은 혈포단객에게로 걸어오며 말했다.

파앗!

그는 청의여인의 마혈을 풀어주고 비수를 뽑아들었다.

[크흐흐흐... 더욱 신나는 맛을 보여주마. ]

[휴우... 휘우... ]

청의여인은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조금 더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갑자기,

[으왕! ]

청의여인은 눈앞에 있는 혈포단객의 코를 물어뜯었다.

[크윽!]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 못하는 혈포단객의 코가 걸레처럼 뜯어졌다.

[퉤!]

여인은 입에든 코의 조각을 뱉어내며 새파란 살기를 발했다.

[개새끼! ×을 뽑아버리겠다.]

청의여인은 흑의인의 손에서 비수를 뺏어들며 소리쳤다.

쫘악!

혈포단객의 옷이 길게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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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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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장

 

                           사람을 찾습니다 (2)

 

 

까딱!까딱!

물살은 점점 느려지고 반대로 강의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강물에 담긴 파란 하늘에는 한점 두점 구름들이 떠가고 그 구름들 위로 조그마한 나룻배가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물결에 배가 까닥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 따라 노를 저어 배를 조종하는 사람이나 뱃머리에 앉아서 턱을 고이고 있는 사람이나 덩달아 까닥까닥하고 있었다.

한데 배를 젓는 사람은 뽀송뽀송한 솜털같은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준수한 미청년이었다.

또한 그의 앞쪽에 앉아서 턱받침을 하고 있는 사람은 깜찍한 소녀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배도 참 잘 움직이네요. 언제 이런 것까지 배웠어요? 아참참. 무공도 한번만 보면 다 할 줄 아는 사람인데 이런 걸 묻다니... 난 하는 수 없는 가봐.]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입을 톡톡 두드리는 소녀, 그녀는 장지연이었다.

석두공은 못들은 척 그저 물위로 흘러가는 구름그림자를 보면서 노를 흔들었다.

장지연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봐요. 구결도 없이 어떻게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거죠?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휴... 정말 당신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은 처음이오. 왜 날 그냥 좀 내버려 두지 못하오?]

석두공은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장지연이 피식 웃었다.

석두공은 한숨을 팍 내쉬었다.

[사부께서 당신에게 그 검법을 알 때까지 가르치라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그랬다면 벌써 도망쳤겠다는 말이군요.]

여전히 생글거리는 장지연이다.

[그렇소. 난 성가신 건 질색이오. 휴... 소령이 옆에 있을 땐 신경 쓸 일 하나 없었는데... ]

말하던 석두공은 무심코 소령을 생각해내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행동이 종잡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을 만큼 소령은 그를 잘 돌봐주었다.

잠자리에서 시작해서 세숫물까지 하나도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석두공은 그녀를 사랑하는지 않는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없다는 것은 아주 허전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비록 그의 마음은 단 한 번의 정사를 가진 자봉에게 모두 주어버렸다고 하지만...

이때 장지연은 눈에 기이한 열기를 담고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물었다.

[소령이 누구죠? 당신의 정혼녀인가요? ]

[그렇진 않소.]

[그럼 누이인가요?]

[아니오.]

석두공은 자꾸만 묻는 그녀가 성가셔서 딱 잘라 말했다.

장지연은 잠시 있다가 그에게 또 물었다.

[그럼 그녀는 당신에게 무엇이죠?]

[...!]

[같이 잠을 자기도 했나요?]

[...!]

석두공이 대답이 없자 장지연은 발딱 일어섰다.

[그래요. 나도 당신에게 관심 없어요. 나도 지금 정혼자를 찾아다니는 중이거든요. 그도 숯덩어리 당신처럼 무슨 무공이든 한번 보기만 하면 다 배워버리는 사람이죠. 너무 기고만장할 것 없어요.]

[정혼자를 찾아다닌다고? 정혼자가 장소저를 거들떠보기나 할지 모르겠군.]

석두공은 그녀가 정혼자를 찾아다닌다는 말에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장지연이 뾰족하게 소리쳤다.

[왜요? 무슨 악담을 그렇게 해요?]

[별로 상관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성가시게 하니 정혼자는 얼마나 괴롭히겠소? ]

석두공은 복수할 수 있는 기회다 싶었는지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흥!]

장지연은 콧웃음을 쳤으나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었다.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석두공은 그녀가 당연히 반박할 줄 알았다가 가만히 있자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사람들을 많이 사귀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소.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활달하면서도 붙임성있는 장소저를 아주 좋아할 지도 모르겠소.]

장지연은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냐는 듯이 고개를 팩 돌렸다.

[어서 그 검법의 구결이나 알려주세요.]

[이런 걸 구결이라 하는 지는 잘 모르겠소만, 펼치려면 이렇게 해야하오.]

석두공은 겸염쩍어져서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검의 끝을 진기로서만 움직이려면 먼저 몸속의 진기가 혈도마다 조금씩 달라야 하오. 또한 한편으로는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를 검끝까지 뻗쳐가게 한 후에 다른 한편으로는 몸 안에서 진기를 운용해야만 하는 것이오.

몸 안의 진기의 움직임이 단전으로 전해지고, 그것이 단전에서 뻗쳐나간 진기를 유동시켜 검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오. 이기어검의 요체는 오직 여기에 있을 뿐이오.

검이 손안에 있던 없던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소. 또한 몸 안에서의 진기 움직임은 조금만 연습해 보면 스스로 터득할 수 있소. 대저 무공이란 것이 걸음마와 같아서 방법만 알게 되면 어느 정도로 느는 것은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오.]

장지연의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온 정신을 집중해서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그것은 어떻게 해요? 검강의 발출 말예요? 검기만 해도 웬만한 고수는 흉내도 못내는 데 어떻게 검강을 발할 수 있죠?]

석두공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기어검도 마찬가지지만, 일단은 충실한 내공이 있어야하오. 그리고, 원래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위험하기는 하지만 힘을 여럿으로 나누었다가 어느 순간에 합치는 것이 최고요.

일부의 내공을 먼저 검에 주입하는 것이오. 그것도 검의 표면에. 그 다음에 나머지의 공력을 모두 검의 중앙으로 내쏘는 것이오. 두개의 공력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을 때 합쳐서 내밀게 되면 검강이 될 수 있소.]

장지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럼 순수하게 한 가지 내공만 익힌 사람은 검강이나 어검술을 펼칠 수 없단 말인가요?]

[그렇진 않소. 단지 그렇게까지 되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소요되오. 그렇기는 하지만 일단 그 정도가 되면 힘을 나누었다가 합치는 방법만 터득하면 몇 배의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오.]

장지연은 머리를 끄덕였다.

[정통검문에서 검강이나 어검술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드문 것은 그런 이유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짐작일 뿐이오.]

장지연이 또 물었다.

[초식이 필요없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가요?]

[그것은 느낀다는 것이오. 눈으로 보아서 알고 귀로 들어서 알고 직접 만져보아서 안다면 그것은 상승의 경지에 달하지 못한 것이오. 눈으로 보기 전에 귀로 듣기 전에 그리고 직접 만지기 전에 마음으로 느끼고 알아야 하는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초식이란 것은 소용이 없소.]

[...?]

장지연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고개만 끄덕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경지도 직접 느껴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남들의 생각으로 머리로 끄덕이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석두공은 그녀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하자 직접 예를 들었다.

[생각해보시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경우에 처할 수는 없는 것이오. 대개 초식이란 것은 천지에 도리에 합당하게 만든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면서 실상에 있어서는 격식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끼워놓은 것들도 적지가 않소.]

그 점에 대해서는 장지연도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석두공의 말이 계속되었다.

[만약에 열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검법이 있다면 그 검법 정화의 구할은 그 중의 하나에 담겨있을 것이오. 나머지 아홉이 일할의 정화를 나눠갖는 다고 볼 수 있을 것이오.]

장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손벽을 쳤다.

[과연 그렇겠군요. 보통 무공을 배울 때 한가지 초식만 익히고 나면 다른 것은 그 하나에서 발전 된 것이라 배우기가 쉬웠는데 그 때문이었군요.]

[또한, 중요한 것은 대개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것이오. 장황하게 말해야 한다면 그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니 귀를 막아버려도 괜찮은 것이오.

검법의 정화도 그렇소. 초식이란 것이 여러 가지 이유로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그 초식을 가장 적절한 상황에서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소.]

 

석두공의 말은 이러했다.

어떤 초식이든 간에 실제로 사람이 처한 그 상황에 가장 맞는 초식이란 없다.

각 상황마다 그것에 맞는 초식이 따로 있는 것이다.

물론 수십 만 가지의 초식이 있다면 아주 비슷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도로(徒勞)에 불과하다.

초식을 많이 익힌다고 해서 좋은 것이 결코 아니다.

초식을 많이 알게 되면 그만큼 초식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그 상황에 가장 알맞는 적절한 방법으로 검을 휘두르고 권각을 휘두르면 그뿐, 무슨 복잡한 초식을 그 순간에 벼락같이 떠올려 펼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에 볼과하다.

한마디로 손톱으로 눌러서 죽여야 할 이(蝨)가 있는가하면 껍질을 깨뜨려서 죽여야 하는 거북(龜)도 있다는 말이다.

 

장지연은 자세히는 알 수가 없었지만 무엇인가가 어렴풋이 잡히는 것같았다.

장강을 떠가는 배위에서 그녀는 깊은 묵상에 잠겨들었고 석두공은 노를 저어 배의 방향을 조정했다.

 

× × ×

 

강변의 어느 객점이다.

밖에는 어느덧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는데 한적한 객점 안에는 십여명의 손님이 앉아 배를 채우고 있다.

[난 벌써 삼년 째 그 사람을 찾아서 쇠신이 닳도록 천하를 헤맸어요. 하지만 아무데도 없더군요. 아마 죽었나봐요?]

장지연은 술을 홀짝거리며 말했다.

날이 저물자 뭍에 오른 그녀와 석두공은 때늦은 점심을 들고 있는 중이다.

창가 자리에는 네명의 흑의인이 말없이 앉아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그들은 아직 주문도 하고 있지 않다.

장지연은 반주 삼아 시킨 술을 홀짝이며 신세타령을 늘어놓는다.

마음이 여린 석두공인지라 그녀의 신세도 무척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소?]

장지연이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 사람? 나도 잘 몰라요. 한번도 만나질 못했으니까. 하지만 어렸을 때 머리를 다쳐 당신처럼 총명한 사람은 아니래요. 오히려 그 반대...]

[그럼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단 말이오?]

[초상화를 가지고 있어요. 한번 보여드릴까요?]

장지연이 가슴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으며 말했다.

석두공이 당황하여 손을 저었다.

[아...아니오 됐소.]

[왜요? 사실 당신을 조금 닮기도 했어요. 당신일 리는 없지만...]

장지연은 그의 말을 묵살하고 품속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냈다.

바로 그때였다.

펑!

갑자기 객점의 문이 날아가며 청의를 입은 여인이 놀란 사슴처럼 뛰어 들어왔다.

[발각됐어요. 여길 피해요!]

그녀가 소리치며 객점의 후문으로 달려갔다.

파팟! 쐐액!

그 즉시 창가에 앉아있던 네명의 흑의인도 몸을 날려 그녀를 뒤쫓았다.

“....!”

석두공의 시선은 청의를 입은 여인의 뒷모습에 못이 박혔다.

그녀를 어디선가 보았었음을 깨달은 때문이다.

(오년전의 그 여자다!)

석두공의 눈이 불을 뿜었다. 청의여인은 그에게 갚아야만 하는 빚이 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장지연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당신은 여자만 보면 눈을 못 떼는군요.]

그러나 석두공은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장지연은 그가 화가 난 줄 알고 흠칫하며 따라 일어났다.

그때였다.

휘이익!

붉은 그림자 하나가 객점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혈포단객(血袍單客)!]

장지연과 석두공의 입에서 그 붉은 그림자의 정체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그 붉은 그림자는 바로 혈포단객이었다.

오객(五客)중 한명으로서 언제나 혼자서 행동한다는 혈포단객...

“...!”

파앗!

혈포단객은 객점에 들어서자마자 즉시 주위를 한번 살펴보더니 그대로 객점의 뒷문으로 달려갔다.

[오객의 하나인 혈포단객이 이런 외진 곳에 나타났군요.]

장지연은 석두공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눈을 돌렸을 때 석두공은 이미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

장지연은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으나 석두공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탁자위에는 그녀가 꺼내놓은 소년의 초상화가 놓여있었다.

한데, 그 초상화는 바로 어린 시절의 석두공이 아닌가?

사람을 찾아다닌다는 장지연은 그를 찾고 있었단 말인가?

삼노에 의해서 귀빈으로 대우받던 장지연은 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석두공을 찾아다닌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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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二 章

 

                사람을 찾습니다. (1)

 

 

 

석두공은 속으로 생각했다.

(잔혼각은 처음부터 그들 삼인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수법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 왜 그들은 삼노장을 복속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아예 없애버리려 한 것일까? 혹시 그 삼노장에 와있다는 귀빈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석두공의 머리속으로 날아내리던 장아가씨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연검을 쓰는 품이 일품이었지.)

석두공은 그녀의 멋진 자태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아무도 안계셔요? 소녀 장지연이 찾아왔습니다.]

초옥의 밖에서 어떤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헉!)

석두공은 자신의 알몸을 보고 당황하여 허둥지둥했다.

급한 김에 그는 벗어던졌던 허물을 뒤집어쓰고 말했다.

[누구시오? 누구를 찾소?]

[여기에 흰옷을 입고 어깨가 넓은 서른 정도의 아저씨가 살고 계시지 않아요?]

석두공은 폭풍무존을 가리키는가 보다 생각하고 말했다.

[여기에 사시긴 하지만 지금은 계시지 않소. 잠시 기다리거나 나중에 오도록 하시오.]

[말하는 분은 누구시죠?]

[난 그분의 제자요.]

석두공은 그제서야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생각했던 그 소녀였던 것이다.

장지연이 얼기설기 만들어진 문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면 안될까요?]

꽝!

석두공은 문을 안에서 꽉잡아당겨 열리지 않게 하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기다리려면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절대 안으로 들어오지 마시오.]

[이봐요! 난 당신 사부님께서 초대한 손님이에요. 그런데 나를 이렇게 대접할 수 있어요?]

장지연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석두공은 난감해하며 말했다.

[정말 미안하오. 하지만 이 안으로는 절대 들어올 수 없소.]

[흥! 당신 사부님의 제자라면 행동도 그분을 닮아 의젓해야 할게 아니예요? 어째 졸장부같은 짓을 하고 있는거죠?]

화가 난 장지연은 물러서지 않고 소리쳤다.

석두공이 간청하듯이 말했다.

[사정이 있어 그러니 제발 밖에서 기다려 주시오. 사부님께선 곧 돌아오실 거요.]

[안돼요. 난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보아야겠어요.]

장지연은 약이 오를 데로 올랐다.

더구나 그녀는 호기심 많은 여자가 아닌가?

석두공은 애초부터 그녀의 호기심을 유발시킬만한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펑!

얼기설기 나무로 엮은 문이 그녀의 일장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후다닥!

석두공은 다른쪽 벽을 뚫고 뛰어나갔다.

[...?]

장지연이 방으로 들어섰을때 그녀는 석두공의 뒷모습만을 얼핏보았다.

하지만,

[흥! 어딜 도망치려고?]

그녀는 콧웃음을 치면서 석두공이 나간 구멍으로 따라갔다.

그러나 석두공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

장지연은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초옥을 한바퀴 돌았다.

하지만 석두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지붕위로 훌쩍 뛰어올라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석두공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디로 사라졌지? 금방 뒤쫓아 나왔는데... ]

그때였다.

[왜 지붕에 올라가 있는가?]

갑자기 밑에서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장지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뛰어내렸다.

폭풍무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언제 돌아오셨어요?]

[지금, 들어오너라.]

그는 깨어진 문을 보면서 눈을 찌푸렸다.

[성미가 보기보단 급하군.]

[저 제자분이... ]

장지연은 얼버무렸다.

폭풍무존은 방에 들어서서 다른 쪽 벽에도 구멍이 뚫어져 있는 것을 보고 영 기분이 상한 듯했다.

어쨌거나 그 초옥의 그가 만든 자기 집인데 만들어진지 하루만에 이처럼 부서졌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장지연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폭풍무존을 보았다.

하나 폭풍무존은 중얼거리며 바닥에 앉았다.

[네놈은 내가 만든 건 뭐든지 부수는구나. 전에는 천신폭풍탑을 부수더니...]

[...?]

장지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선가 웅웅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부님! 그게 아닙니다. 사실은 그 장소저가... ]

장지연은 소리가 나는 곳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며 고함쳤다.

[내가 언제 그랬어요? 저건 분명히 당신이 그랬는데.]

[당신이 갑자기 들어오지 않았다면 내가 그랬겠소?]

석두공은 마주 고함쳤다.

그 바람에 입에서 침이 튀었다.

[응?]

장지연은 자신의 얼굴에 떨어진 침방울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순간 석두공과 장지연의 눈이 마주쳤다.

두사람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앗!]

원래 석두공은 밖으로 나갔다가 재빨리 돌아서 문으로 들어와 천정에 매다린 것이었다.

석두공은 장지연이 자신을 발견하자 비명을 지르며 폭풍무존의 뒤로 숨었다.

몸에 걸쳤던 숯덩어리 같은 허물이 훌렁 날아가버렸다.

장지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왜 석두공이 그처럼 숨어있으려고 했는지 알았던 것이다.

(알몸이었어!)

폭풍무존은 가져왔던 옷을 뒤에있는 석두공에게 건네주었다.

[네놈의 알몸도 벌써 몇번이나 보는구나.]

그가 말하는 의도는 분명했다.

그는 마중천에서 자봉과 정사를 벌이는 석두공을 지켜보기도 했던 것이다.

 

폭풍무존이 말했다.

[이것은 지금은 사라진 어떤 문파의 비전절기(秘傳絶技) 중의 하나이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마 이것보다 뛰어난 절기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음성에는 짙은 향수(鄕愁)같은 것이 느껴졌다.

사연을 알고 있는 석두공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검을 다오.]

장지연이 폭풍무존에게 연검을 풀어서 주었다.

그녀의 연검은 여느 연검과는 달리 길이가 무려 사장이나 되었다.

[옛날에 내가 알고 있던 어떤 사람도 이처럼 긴 연검을 좋아했었지. 지금 내가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도 실상 그가 만든 검법인데 내가 약간 고친 것이야.]

피리리릭!

폭풍무존이 말하고 있는 사이에 검은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휘익!

검의 끝이 돌아가며 폭풍무존의 뒤쪽으로 찔러갔다.

그러나 폭풍무존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검을 잡고만 있는 중이었다.

뜻에 의해서 검을 움직이는 진정한 이기어검술(以氣馭劒術)이었다.

파파팟!

검은 살아있는 마음대로 움직였다. 검광이 사방으로 눈부시게 뻗어갔다.

돌연,

[물러서거라.]

폭풍무존이 나지막하게 외쳤다.

석두공과 장지연이 십여장 밖으로 물러났다.

칙! 칙!

갑자기 연검의 끝에서 백색강기가 쏘아져나갔다.

[검강이다! ]

장지연이 깜짝놀라 소리치며 더욱 물러섰다.

파파파팍!

연검의 끝이 가리킨 곳마다 바위들이 예리하게 베어져나갔다.

폭풍무존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검을 든 손을 들어올렸다.

휘리리릭!

연검이 그의 손목에 뱀처럼 휘감겼다.

[기로써 검을 움직이면서도 검강을 동시에 펼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검법의 뛰어난 점이지.]

폭풍무존은 연검을 장지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장지연이 물었다.

[원리는 그렇다 하고 초식은 어떻게 되는 거지요?]

[초식?]

폭풍무존이 오히려 반문했다.

[초식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그냥 편한 대로 펼치면 되는 거지.]

[...?]

장지연은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무공이 경지에 달하면 초식이 필요없다는 말을 그녀도 들은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진짜로 초식이 없다면 마구잡이 무술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어쨌거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초식따윈 없다고 하는 데야 도리가 없다.

[그럼 구결을 가르쳐 주세요.]

[내가 다 보여주었는데 구결은 또 무슨 구결?]

폭풍무존은 그녀의 질문에 속이 터지는지 버럭 화를 냈다.

장지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폭풍무존은 죽간을 들고 강으로 내려가며 말했다.

[어서 집이나 고쳐놓고 가버려라.]

 

장지연은 한쪽에 서있는 석두공에게 소리쳤다.

[이봐요! 당신 사부님은 항상 저래요? 당신이 이런 식으로 무공을 배웠어요? 뭐 이래요? 이게 무슨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거예요?]

그녀의 한꺼번에 퍼붓는 소리에 석두공은 귀를 막았다.

그리고 말했다.

[난 이렇게도 배우지 못했소. 이게 뭐 어떻다고 그러시오?]

장지연은 기가 막혔다.

스승이나 제자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두공은 숲으로 나무를 베러 들어가고 있었다.

집을 고쳐놓으라 했으니 고쳐야 할게 아닌가?

장지연은 놀림을 당한 것같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석두공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이봐요. 숯덩어리. 그럼 당신은 조금 전에 그 검법을 펼칠 수 있단 말이에요?]

[배웠는데 왜 못하겠소?]

[얼마나 연습해서 펼칠 수 있게 되었어요?]

장지연은 그에게 다가서며 붙임성있는 음성으로 물었다.

석두공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한 번도 연습하지 않았고 펼쳐보지도 않았소.]

[뭐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펼칠 수 있단 말이에요.]

장지연이 소리쳤다.

석두공도 화를 내며 말했다.

[이게 그것 아니오?]

쉬익! 쉭!

순간 그의 손에 들리웠던 나뭇가지가 활처럼 휘어졌다.

쉭!쉬쉭!

나뭇가지지만 폭풍무존이 펼쳤던 그 검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장지연은 깜짝 놀라 물러서며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언제 배운 거죠?]

휙!

석두공은 나뭇가지를 던져버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금 전에 같이 배웠잖소?]

장지연은 한쪽에 가만히 서서 입을 꼭 다물었다.

(이들 사제는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구나. 나도 무엇이든 쉽게 배워서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어왔지만 이사람들 앞에서는 입도 떼지 못하겠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들께서 말씀하시길, 절세적인 총명을 타고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펼치는 무공을 대충 보기만 해도 그 알맹이까지 꿰뚫고 헛점까지 보완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당금 무림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오직 둘 뿐이었는데, 한분은 돌아가셨으며 한 사람은 실종되었다고 했다. 한데, 이곳에서 또 그런 사람들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구나.)

장지연은 수도로 나무들을 베어서 들고가는 석두공의 뒷모습을 가슴 깊이 새겼다.

 

석두공은 자신이 부순 벽을 다시 떼우고 장지연이 부순 문도 새로 달았다.

그리고 어제 밤에 만들지 않았던 침상과 탁자, 그리고 의자도 만들어 방안에 갖다 놓았다.

초옥은 오직 네 개의 벽을 쌓고 지붕을 올린 것일 뿐이다.

부엌도 따로 없고 측간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폭풍무존은 집을 고쳐놓고 떠나라고 했다.

물론 그 말은 장지연에게 하는 것같았지만 석두공은 자신에게도 해당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입장이고 폭풍무존은 세상을 돌아다닐 낙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함께 가는 것도 함께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떠나기 전에 석두공은 조금이라도 폭풍무존이 생활하기 편하게 해놓고 가려는 것이었다.

그가 삼노장을 찾아갔던 것도 그러한 일념에서였다.

삼노장은 이 일대에서 가장 텃세가 강한 장원이다.

삼노장이 폭풍무존 근처에서 성가시게 굴지 않는다면 폭풍무존이 조용하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푹!푹!푹!

석두공은 측간과 부엌을 만든 후에 집 주위에 울타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장지연이 그를 도와 울타리로 쓸 나무들을 날라다 주었다.

그녀의 태도는 고분고분했다.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태양이 붉게 변했다. 벌써 저녁때가 된 것이다.

폭풍무존이 죽간(竹竿)을 들고 초옥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가는 소나무가지가 쥐어져 있고 그 소나무가지에는 그가 낚아올린 네 마리의 물고기가 꿰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물고기들은 하나같이 크기가 사람의 팔뚝만하고 굵기는 사람의 허벅지만한 잉어들이었다.

[아직도 안 갔느냐?]

그가 잉어들을 뒤로 감추며 말했다.

[...?]

장지연은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했고 석두공은 이마를 치면서 말했다.

[사부님! 잉어들을 낚은 게 아니라 건져올리셨군요.]

낚은 것과 건져 올린 것, 그 차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철사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폭풍무존은 어색하게 웃으며 들어갔다.

장지연이 잉어들을 받아들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건져 올린 것과 낚아 올린 것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폭풍무존은 한낮이 다 가도록 고기를 낚을 수가 없자 공력으로 잉어들을 건져 올려 가져온 것이었다.

물고기들의 입에는 바늘자국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잉어를 불에 그슬러서 밥 대신 먹고 났을 때 십여 명의 사람들이 초옥으로 찾아왔다.

삼노장의 삼노와 그들을 가마에 싣고 온 하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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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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