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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루(血淚)의 일막

 

 

"...!"

고검추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머니가 너무도 무참한 만행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검추가 느낀 충격과 분노는 시작에 불과했다.

흐흐흐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보자!”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본격적으로 당혜선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 죽여라!"

사신각주의 마수에 고문당하며 당혜선은 악에 바쳐 외쳤다.

멀지 않은 곳에 고검추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흐흐흐! 걱정마라. 확실하게 죽여줄 테니..."

사신각주는 히죽거리며 당혜선을 농락했다.

...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복수하고 말겠다.”

당혜선은 수치심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다. 살고 싶으면 복마신검이 어디 있는지 실토해라!”

사신각주는 그런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눈을 희번덕였다.

파르르!

복마신검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애원하던 당혜선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사신각주가 자신을 고문하고 협박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새삼 깨달은 때문이다.

무슨 짓을 당한다 해도 사신각주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다.

!”

당혜선은 대답 대신 사신각주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물론 사신각주는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에 직접 당혜선의 침이 닿지는 못했다.

흐흐흐 이게 네년의 대답이라 이거지?”

당혜선의 침 세례를 받은 사신각주의 눈빛이 흉포해졌다.

그럼 네년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사신각주는 잔인하게 웃으며 당혜선의 몸에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

"아악!"

다음 순간 당혜선의 입에서 단말마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몸은 마치 독침을 맞은 나비처럼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르르!

고검추의 몸에도 세찬 경련이 치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광경이 도무지 현실의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으로 고검추는 반쯤 실신하고 말았다.

"이상하군!"

당혜선을 본격적으로 고문하며 사신각주는 의혹을 느꼈다.

그자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당혜선에게는 아들이 있다.

헌데 당혜선의 몸은 어떻게 봐도 처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사신각주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흐흐흐... 네년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구나.”

그자는 광기에 사로잡혀 당혜선을 고문하는데 빠져 들어갔다.

"... 네놈을... 죽어 원귀가 되어서라도 저주하겠다."

그자는 당혜선의 악에 바친 저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원히 계속 될 것같던 끔찍한 고문도 결국 끝이 났다.

"흐흐흐! 오늘 이후로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 본 각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주마."

!

그 자는 쓰고 있는 복면 아랫부분을 들어서 얼굴을 당혜선에게 보여주었다.

사신각주는 고검추에게는 등을 돌린 자세인지라 고검추는 그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흐윽!"

하지만 고문당한 자세로 누워있던 당혜선의 입에서는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경악으로 물든 표정이 되어 복면 아래에서 드러난 사신각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 당신이... 사신각주라니...!"

당혜선은 온몸을 벌벌 떨며 비명같은 신음을 토했다.

사신각주는 그녀가 익히 아는 자였던 것이다.

"... 그렇다면... 고사형의... 참사도 바로 당신의 수작..."

당혜선은 분노와 절망에 찬 표정이 되어 사신각주를 노려보았다.

"크크크... 그렇다. 고가놈은 배은망덕하게도 복마신검을 얻고도 본좌에게 바치지 않았다. 그 대가를 치룬 것이지."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복면을 다시 내렸다.

"... 이 짐승만도... 못한..."

당혜선이 분노와 경악으로 치를 떨 때였다.

사신각주가 품속에서 한 자루의 초혼전을 꺼내들었다.

"본좌의 비밀을 알았으니 안됐지만 죽어 주어야겠다."

그 자는 냉혹하게 말하며 초혼전을 쳐들었다.

(... 안돼!)

고검추는 전율하며 내심 부르짖었다.

바로 지척에서 어머니가 살해당하려는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자신은 짚인 혈도가 아직 풀리지 않은지라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다.

고검추는 활활 타는 불구덩이에 떨어진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어머니를 구하는 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아악!"

단말마같은 짤막한 비명이 터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

사신각주가 내리꽂은 초혼전이 당혜선의 하복부로 깊이 박힌 것이다.

부르르!

한 차례 격렬하게 떨리던 당혜선의 몸은 이내 축 늘어졌다.

"흐흐흐... 감히 본좌의 뜻을 거스른 대가다."

사신각주는 그런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화락!

이어 그 자는 검붉은 장포자락을 휘날리며 날아올랐다.

"으하하하! 나 사신각주이 얼굴을 본 자는 모두 죽는다."

한 줄기 광소와 함께 사신각주의 모습은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적막...

다시 사위는 죽음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진 장내에는 하복부에 초혼전이 박힌 당혜선만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초혼전이 박힌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당혜선이 누워있는 바닥을 흥건히 물들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저녁노을도 스러지고 어둠이 스물 스물 번지고 있었다.

"크흑... 어머니...!"

문득 비통한 울부짖음과 함께 석벽 아래 동굴에서 고검추가 달려나왔다.

마침내 막혔던 혈도가 풀린 것이다.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어머니... 제발."

달려온 고검추는 당혜선을 끌어안고 오열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고문당하고 죽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아무것도 못한 자신의 무능이 저주스럽다.

사신각주! 하늘에 맹세코 네놈을 반드시 찢어죽이고 말겠다!”

고검추는 어머니의 알몸을 부여안고 몸부림치며 악을 썼다.

헌데 그때였다.

두근 두근

고검추의 귓전으로 미약하지만 심장 박동소리가 들렸다.

(... 설마!)

오열하던 고검추는 눈을 부릅뜨며 급히 귀를 당혜선의 왼쪽 젖가슴에 대었었다.

두근 두근

그런 고검추의 귀에 확실히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 아직 살아계시다.)

당혜선의 숨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한 고검추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고검추의 뇌리로 신비한 은발의 여인 옥여상의 음성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조만간 이것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설삼신단!)

내심 부르짖은 고검추는 안고 있던 당혜선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뉘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옥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옥여상이 준 그 옥병에는 만년설삼으로 만든 두 알의 설삼신단이 들어 있었다.

설삼신단은 기사회생(起死回生)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한 알만 복용해도 백년 수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효능을 지녔다.

(그 분은 이런 상황을 예견하시고 설삼신단을 내게 주었구나.)

고검추는 옥병에 들어있는 설삼신단을 보며 경이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새삼 옥여상이란 여인이 신비하게 느껴진다.

설삼신단을 꺼낸 고검추는 당혜선의 하복부에 박혀있는 초혼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 초혼전을 제거해 드리자.)

고검추는 설삼신단이 든 옥병을 내려놓고 당혜선의 아랫배에 박혀있는 초혼전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고검추의 손은 멈칫 멈춰졌다.

(초혼전에는 백일취가 묻어있을 테니 직접 만지면 안된다.)

초혼전에 백일취라는 약물이 묻어있다는 당혜선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고검추는 당혜선의 찢어진 옷으로 추혼전을 감싸쥐었다.

스윽!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초혼전을 뽑았다.

후두둑!

선혈이 분수같이 뿜어지며 초혼전이 당혜선의 아랫배에서 뽑혀졌다.

초혼전을 집어던진 고검추는 급히 두 손으로 상처를 눌러 지혈을 했다.

그런 후 어느 정도 피가 멎자 손을 떼고 옥병에서 설삼신단을 두 알 모두 꺼냈다.

고검추는 설삼신단 두 알을 모두 당혜선의 입에 넣어주었다.

설삼신단은 당혜선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아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제 운명은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설삼신단을 먹여준 고검추는 초조와 긴장으로 물든 시선으로 당혜선의 상태를 주시했다.

잠시 후 당혜선의 밀랍같이 창백하던 옥용에 서서히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초혼전이 박혔던 하복부의 상처도 급속히 아무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혜선은 세상에 보기 드문 영약인 설삼신단을 한 알도 아닌 두 알씩이나 한꺼번에 복용했다.

설령 더 심각한 상태였어도 되살아났을 것이다.

당혜선은 상처가 치료되었을 뿐 아니라 삼갑자 이상의 내공까지 얻었다. 게다가 강력한 극음기공까지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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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찾아온 마두들 (2)

 

 

정말 묘한 곳이야. 여기라면 유가 놈도 우릴 쉽게 찾아내지는 못하겠지.”

마면혈도가 감탄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자의 눈에 절벽 가에 서있는 두 개의 대나무가 들어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 대나무의 위쪽, 달이 만든 절벽 그림자에 가려져있는 임청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마면혈도의 얼굴은 더욱 말같이 보여 공포스럽다.

죽이려다가 죽이지 못하고 갔으니, 발각되기만 하면 자신은 두 토막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철선동시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풍(寒風)이 불어나온다는 건 안쪽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뒤쪽마저 막혀 있다면 금상첨화고...”

캇캇캇!”

마면혈도는 뭐가 그리 좋은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래도 히히힝! 하고 웃지는 않는군.)

임청우는 마면혈도의 웃음이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말울음 소리가 아니라는 걸 오히려 신기해했다.

그 마면혈도가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봐! 얼어 죽은 놈! 도망쳐 다니는 것도 질렸으니 그만 이곳에 자리를 잡도록 하자.”

글쎄... 그래도 좋겠지만 바람 속에 사람냄새가 묻어있어. 골짜기 안에 사람이 있는 게 틀림없는데...”

철선동시가 철선을 흔들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을 마면혈도에게 보냈다.

그자의 말에 임청우는 자신이 발각된 줄 알고 깜짝 놀라 하마터면 죽마에서 떨어질 뻔 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죽여야지.”

휘익!

마면혈도가 등에서 혈도를 꺼내들고 앞장서서 비련곡 안으로 사라졌다.

철선동시는 느긋한 웃음을 흘리면서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는 마면혈도를 따라갔다.

임청우는 두 괴물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죽마에서 내려왔다.

죽마를 절벽 그늘진 곳에 숨겨놓은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냐!”

좁고 긴 계곡 입구를 빠져나왔을 때 모옥 쪽에서 앙칼지게 외치는 어머니 임단심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즉시 바닥에 엎드렸다.

싱싱한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크하하핫! 늙은 암고양이가 살고있을 줄은 몰랐는걸.”

즐거운 듯 웃는 마면혈도의 웃음소리가 임단심의 음성에 이어 들려온다.

바닥에 엎드린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등이 보이는 곳까지 기어갔다.

!

그 직후 모옥의 문을 부수고 어머니 임단심이 날아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가 빼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임청우도 전부터 알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문을 부수고 날아 나와 선녀처럼 옷깃을 나부끼며 내려서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놀라 눈이 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다.

철선동시는 한쪽으로 슬쩍 비키면서 웃고 말했다.

이같은 경계에 이인(異人)이 살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지. 한데 신법을 보아하니 우리와 동류(同類)인 듯하군.”

... 당신은!”

임단심은 시뻘건 칼을 들고 서있는 괴물같은 마면혈도의 모습에 헛바람을 삼켰다.

마면혈도...!”

그녀는 주춤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내뱉았다.

크캇캇캇! 본좌를 알고 있다니... 그럼 저 친구도 알아보겠는가?”

마면혈도가 광소를 터뜨리고 철선동시를 가리켰다.

(마면혈도와 철선동시...!)

임단심은 철선동시 역시 알아보고 파리한 얼굴에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흉포하기로 유명한 삼괴(三怪) 중 두 놈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삼괴...!

일왕(一王) 일협(一俠) 다음으로 거론되는 이자들은 사파(邪派)를 대표하는 고수들로서 독선적이고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무리들이었다.

삼괴의 첫째는 무비옹(無比翁)이라 불리는 늙은이인데 외호를 스스로 지은 자다.

무비(無比)라는 말은 견줄 곳이 없다는 뜻이니 그런 이름을 지은 것만 보아도 얼마나 오만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무비옹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직 삼괴의 둘째인 마면혈도와 세째인 철선동시가 매우 두려워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무비옹의 무공이 두 사람에 비해 월등할 뿐만 아니라 흉폭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비옹을 본 사람도 거의 없고 그의 무공을 본 사람은 더더욱 없다.

대신 이따금씩 발견되는 사지가 찢어지고 몸통은 새까맣게 타버린 시체가 발견되면 그것이 무비옹의 짓이라고 사람들은 공공연히 말하곤 한다.

그 흉악 잔인함은 이름 그대로 무비, 견줄 곳이 없는 인물이 무비옹이다.

삼괴의 둘째 마면혈도는 살인과 방화, 강간을 밥 먹듯이 하는 자다.

삼괴의 셋째이며 강시(疆屍)같은 몰골을 한 철선동시는 교활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냉혈한이다. 심지어 자신의 부모나 형제마저도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자가 철선동시인 것이다.

 

(오늘밤 어쩌면 나 혈관음(血觀音) 임단심의 모진 목숨이 끝날지도 모르겠구나.)

임청우의 어머니, 혈관음 임단심은 푸른빛이 감도는 파리한 입술을 깨물었다.

(그나마 삼괴의 우두머리인 무비옹이 함께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삼괴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로 알려진 인물들이다.

비록 첫째인 무비옹이 함께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머지 두 사람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임단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면혈도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흐흐흐! 약간 늙기는 했지만 아직도 팽팽할 것 같군. 이 나으리를 즐겁게 해주기엔 부족함이 없겠어.”

그자의 주먹덩이 같은 눈동자가 음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임단심은 흠칫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마면혈도가 기분이 내키는 대로 살인과 강간을 저지른다는 말은 익히 들었었다.

그러나 임단심은 이내 차가운 눈빛을 내쏘며 분노에 저민 말을 내뱉었다.

미친놈... 네놈 따위가 감히...”

번쩍!

순간 한줄기 혈광이 그녀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위험하다!)

임단심은 날카로운 도기를 느끼며 몸을 흔들었다.

그녀의 몸이 안개처럼 흔들리며 옆으로 두 걸음 이동했다.

스악!

그러나 혈광은 허공에서 빙글 방향을 돌리더니 임단심의 면전에 다시 나타났다.

싸늘한 한기가 전신을 엄습하는 순간 그녀는 마치 거미줄에 얽히기라도 한 듯이 꼼짝할 수 없었다.

흐흐흐...”

혈도 끝을 임단심의 가슴에 댄 마면혈도가 음탕한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삼보면천(三步免天)! 세 걸음이면 하늘의 그물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보법이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겨우 사성(四成) 수준의 삼보면천으로는 이 나으리의 혈도를 피할 수 없지. 자 순순히 옷을 벗어라.”

사삭!

마면혈도가 칼끝을 약간 아래로 내리자 임단심의 앞가슴 옷이 예리하게 베어지며 흰 속살이 드러났다.

임단심의 얼굴은 경악과 분노와 수치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녀린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삼보면천이라고?”

그때 한쪽에 서있던 철선동시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임단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해라! 삼보면천을 누구에게 배웠느냐?”

! 그렇지. 대형께서 삼보면천을 사용하는 자를 보면 즉시 잡아두라고 하셨지!”

마면혈도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놈들이 설마 내 신분을 알아차린 것일까?)

임단심의 안색이 확 변했다.

 

(저 괴물들이 어머니를 죽이려는 모양이다.)

기화요초가 무성한 초지에 엎드려서 보고 있던 임청우는 다급해졌다.

그 바람에 척포라고 이름 지어준 금관혈린사가 호리병에서 스르르 빠져나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마면혈도가 혈도로 어머니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 게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이에 그는 급한 대로 근처에 있는 주먹만한 돌을 주워 있는 힘을 다해 던졌다.

!

돌은 포물선을 그리며 마면혈도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갔다.

?”

바람소리를 들은 마면혈도는 뜻밖이라는 듯 몸을 빙글 돌리며 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돌을 낚아챘다.

누구냐?”

철선동시도 벼락같이 소리치며 임청우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화악!

날아오며 휘두르는 그자의 철선에서 뼛속까지 얼려버릴 것같은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들켰다!)

휘리릭!

임청우는 다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의 몸에 깔린 화초와 약초들이 땅에 납작하게 눌려졌다.

쩌저적!

임청우가 누워있던 곳의 기화요초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철선동시가 휘두른 철선에서 뿜어진 지독한 냉기 때문이다.

재빨리 몸을 굴렸지만 임청우도 그 냉기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털썩!

머릿속에서 쨍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정신이 아득해져 기화요초 사이에 널부러졌다.

암고양이뿐 아니라 쥐새끼도 숨어있었구나!”

철선동시가 까마귀같은 음성으로 웃으며 임청우를 덮쳐왔다. 그자는 아직 임청우가 표운봉에서 만났던 소년임은 알아보지 못한 상태였다.

헌데 철선동시가 막 임청우를 낚아채려 할 때였다.

쉬쉬쉭!

돌연 미미한 소음과 함께 무언가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크윽!”

그와 함께 마면혈도의 쥐어짜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마면혈도의 비명소리에 임청우를 낚아채려던 철선동시는 급히 허공에서 빙글 돌아 솟구쳐 올랐다.

우욱!”

직후 철선동시 역시 허벅지에 예리한 흉기가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몸이 기우뚱했다.

철선이 뿜어낸 냉기에 피가 얼어붙어서 널부러졌던 임청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휘리릭!

정신이 돌아오자 임청우는 다시 사력을 다해 몸을 옆으로 굴렸다.

얼어붙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구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절벽 쪽으로 굴러가는 임청우의 눈에 얼핏 어머니가 무언가를 던진 자세로 훌쩍 물러서는 것이 들어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임청우의 몸은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몇 번 구른 사이에 절벽에 이르렀던 것이다.

 

크윽!”

마면혈도는 목을 움켜잡고 비틀거렸다. 그런 그자의 목에서는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길이 한 뼘쯤 되는 쇠못이 목에 박힌 것이다.

하지만 그 쇠못은 피부를 뚫고 들어왔을 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피가 심하게 뿜어지는 것은 목을 지나는 혈관중 하나가 찢어진 때문이다.

쿨럭! 쿨럭!”

임단심도 연신 기침을 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이 가랭이를 찢어 죽일 년!”

마면혈도는 목에 박힌 쇠못을 확 잡아 뽑아 멀리 집어던지면서 짐승같이 고함쳤다.

쉬쉭!

흐윽!”

직후 혈도가 빛을 발하고 혈광이 어지럽게 번득이는가 싶더니 임단심이 걸친 옷이 조각조각 나서 허공으로 흩날렸다.

이이이... 천한 것이 감히...”

삽시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알몸이 되어버린 임단심은 급히 치부를 가리면서 분노와 수치를 이기지 못해 부르르 떨었다.

입가에 가득한 선혈과 살기어린 그녀의 눈빛에 마면혈도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마면혈도는 목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가슴을 적시자 다시금 강한 분노와 함께 음욕이 들끓어 올랐다.

임단심은 마면혈도가 날아온 돌을 잡느라 뒤를 돌아보고, 철선동시가 임청우를 향해 몸을 날린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매 속에 숨기고 있던 세 대의 쇠못을 발출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상이 발작하여 기혈이 막혀버렸다.

그 때문에 공력의 상당부분이 흩어지면서 쇠못의 겨냥도 약간 비틀어져 버렸다.

바로 코앞에 있던 마면혈도의 목을 겨냥했던 쇠못은 요혈을 조금 비켜서 박혀버렸다.

철선동시의 등을 노렸던 나머지 두 대의 쇠못 중 하나는 그자가 피해버리고 겨우 한 대 만이 허벅지에 격중 되었을 뿐이었다.

(... 틀렸나?)

아득한 절망감이 임단심을 휩쓸었다.

흐흐흐... 두 번 다시 뻗대지 못하게 해주마.”

마면혈도가 음욕을 참지 못하는 웃음을 흘리며 칼을 흔들었다.

흐윽!”

붉은 빛이 눈앞에서 다시 한 번 번득이는 순간 임단심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어스름 달빛 아래 혈도가 봉쇄되어 쓰러진 그녀의 나신이 파랗게 빛났다.

흐흐흐...”

마면혈도는 칼을 집어넣고 자신의 바지를 벗었다.

임단심의 얼굴은 서른을 넘긴 나이와 오랜 투병생활에 초췌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내를 뇌쇄시킬 만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면혈도는 우악스런 손길로 임단심의 알몸을 화초들 위로 집어던지고, 그 위로 숨을 씩씩거리며 덮쳐갔다.

내상이 도져 정신이 혼미해진 임단심은 배추 속같이 새하얀 두 팔을 양쪽으로 힘없이 떨군 채 널브러져 있었다.

헌데 그런 그녀의 왼쪽 팔뚝에는 작고 붉은 점 하나가 찍혀있는 것이 아닌가?

수궁사(守宮沙)!

그것은 바로 처녀(處女)의 상징이라는 수궁사였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이 어떻게 아직까지 처녀의 상징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물론 그토록 고이 지켜온 처녀성이 지금 색마의 손길아래 무참히 짓밟히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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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례식 전야

 

 

 

하늘같은 남편이 될 소성주를 중인환시리에 개망신 시키다니... 아무리 속 좁은 계집의 소행이라 해도 그냥은 못 넘어가겠소.”

혈가람이 솥뚜껑만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펑펑 치며 말했다.

소성주님을 위해 격분하시는 부성주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혼례를 목전에 둔 지금 진소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자제해야하지 않을런지요?”

신중하게 입을 연 중년인은 제왕성의 외()총관 독검마유(毒劍魔儒) 궁무독(宮無獨)이다.

제왕성의 외총관은 다른 문파들과의 관계를 전담한다.

궁무독은 심기가 깊고 꾀가 많아 외총관의 역할을 능란하게 수행해오고 있다.

외총관님의 말씀이 맞아요. 일단 내일의 혼례를 원만히 치르는 데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것은 모여 있는 네 사람 중 유일한 여자인 내총관 구숙정이다.

황금성의 진소저가 제 아무리 당찬 성격이라도 일단 소성주의 여자가 되고나면 고분고분해지지 않겠어요?”

구숙정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겠지. 어쨌든 진소저도 여자는 여자이니...”

무엇보다 혼례를 무사히 치르는 게 중요하긴 해.”

구숙정의 말에 살천인조는 물론이고 혈가람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쯧쯧! 그나저나 보지 않아도 뻔하구먼. 소성주는 분을 참지 못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을 게야.”

살천인조가 혀를 끌끌 찼다. 전설적인 자객답게 살천인조는 모용준의 됨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소성주는 제가 가서 달래볼 테니 부성주님들께서는 귀빈들의 접대에 전념해주세요.”

구숙정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 *

 

네가 모용준을 만나고 왔다는 얘기는 들었다.”

고독모모(孤獨母母)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새하얀 백발에 곱게 늙은 노파인 고독모모는 황금성의 태상호법이다.

출신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독모모가 절세적인 무공의 소유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황금성의 제일고수이기도 한 고독모모는 어린 성주를 경호하기 위해 제왕성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래 모용준을 직접 만나본 소감이 어떠냐?”

고독모모는 진상파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나요?”

물론이다.”

진상파의 새침한 말에 고독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 보고받은 대로 경박하고 탐욕스러운데다가 소심하기까지 하더군요.”

진상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멸의 표정이 떠올랐다.

저런...”

고독모모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지금껏 만나본 사내들 중에서도 평균 이하라고 할 수 있어요.”

모용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상파의 얼굴은 저절로 찌푸려졌다.

노신을 비롯하여 황금성의 모든 식솔들은 상파 너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모용준이 정 마음에 들지 않고 성에 차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파혼을 선언하고 돌아가자.”

고독모모가 연민의 표정으로 말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병으로 잃은 진상파를 사실상 길러온 것이 고독모모다.

고독모모에게는 진상파가 주인이라기보다는 딸같은 존재인 것이다.

아뇨! 내일 있을 혼례는 예정대로 진행시키도록 하세요.”

진상파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파야!”

여자로서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제게는 황금성 성주로서의 책임이 더 무거워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독모모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물론 모용준은 모든 면에서 제 배필이 되기에 모자란 사내예요. 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배경... 제왕성의 강력한 힘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군요.”

진상파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황금성의 안위를 위해 네 행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아니요. 저는 여자로서도 행복해질 거예요. 모용준을 제가 원하는 기준에 맞는 사내로 변모시키면 되니까요.”

진상파의 단호한 말을 들으며 고독모모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백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고독모모인지라 성인이 된 인간의 성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당사자인 네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할미로서도 더는 할 말이 없구나.”

고독모모는 강철로 만든 지팡이를 쥐고 일어났다.

다만 소인배는 한번 품은 원한이나 원망은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고독모모는 배웅하려고 일어나는 진상파를 만류하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파는 누구보다 똑똑한 아이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이 얼마나 각박하고 인간은 또 어디까지 추잡해질 수 있는지는 모르고 있다.)

진상파의 방을 나서며 고독모모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파가 제 아무리 노력해 봐야 모용준의 천박한 성품은 변함이 없을 테고... 결국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걸 깨닫고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고독모모는 문 밖을 지키고 있던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의 인사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쏘아진 화살이니 그저 모용준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괜찮은 인간이길 바랄 뿐이다.)

한숨을 쉬는 고독모모의 미간에 전에 없던 주름이 깊이 파였다.

 

* * *

 

밤이 깊었다.

(다 큰 사내의 성품을 고치려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진상파는 잠자리에 들 생각은 않은 채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지속될 악전고투일 수도 있겠으나...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진상파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모용준의 경박하고도 비열한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속에 납덩이가 들어있는 기분이 되는 진상파였다.

(지혜를 다 동원하고 인내심을 극한까지 발휘해서라도 모용준을 번듯한 사내로 변모시켜야만 한다.)

진상파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결의를 다졌다.

 

<다만 소인배는 한번 품은 원한이나 원망은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고독모모가 방을 나가면서 남긴 말이 쟁쟁하다.

그와 함께 분을 참지 못하고 악을 쓰며 집기들을 때려 부수던 모용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까 그 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있을 것이다. 내일 대사를 치러야하니 이 밤이 가기 전에 찾아가서 좀 다독여줄 필요가 있다.)

덜컹!

진상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방을 나서자 경비를 서고 있던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이 놀라서 돌아본다.

밤이 깊었습니다. 어인 일로 나오셨는지요?”

철관음이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 전에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

진상파는 철관음을 지나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거 없어. 혼자 생각할 것도 좀 있으니까 아무도 따라오지 마.”

진상파는 철관음을 뿌리치고 영빈관을 떠났다.

괜찮을런지요 단장님?”

백팔금차 중 한명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제왕성의 내원(內院)은 세상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이니 별일 없을 것이다.”

철관음은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진상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몰래 경호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불벼락이 내릴 것이다. 제왕성의 치안상태를 믿고 기다려보자.”

...”

철관음의 말에 백팔금차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심란하시겠지. 평생 같이 살아야할 사내의 천박한 실체를 알아버렸으니...)

철관음은 진상파가 사라진 쪽을 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새석숭님만 급사하지 않으셨어도 인중(人中)의 봉황(鳳凰)인 아가씨가 모용준같이 비루한 인간을 배필로 맞은 일은 없었을 텐데...)

새삼 자신의 전 주인이 비명에 간 것이 아쉬운 철관음이었다.

 

* * *

 

제왕성에는 고수들이 구름같이 많다.

대체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제왕성의 녹을 먹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두 명의 부성주와 오래전에 제왕성을 나간 태상호법 흑백신귀가 신주이십팔숙중 섭장천을 제외한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명의 부성주와 두 명의 태상호법 외에도 제왕성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수들이 존재한다.

강호에 알려진 제왕성의 대표적인 전력은 사대무력집단(四大武力集團)이다.

금위사대(金衛士隊), 은위사대(銀衛士隊), 동위사대(銅衛士隊), 철위사대(鐵衛士隊)가 바로 그들이다.

제왕성은 소속 무사들에게 황실을 본 따 위사(衛士)라는 직함을 부여해온 것이다.

 

사대무력집단중 가장 낮은 등급은 철위사대다.

하지만 철위사대 소속 철위사(鐵衛士)들은 강호에 나가면 일류고수 소리를 듣고도 남는 실력자들이다.

그 철위사들의 숫자가 무려 천 명이다.

제왕성에는 위사등급을 받지 못한 무사들이 수만 명 존재한다.

그들이 치열하게 경쟁하여 선발되는 것이 철위사다.

 

동위사(銅衛士)의 숫자는 오백 명으로 각대문파 장로들에 필적하는 고수들이다.

 

은위사(銀衛士)의 숫자는 삼백 명이며 각대문파 장문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금위사(金衛士)의 숫자는 불과 백 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주이십팔숙에 이름을 올려도 무리가 없는 절세고수들이다.

, 제왕성에는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라는 신주이십팔숙이 무려 백 명이나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왕성에 금위사들에게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고수들의 집단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원로원(元老院)이 바로 그것이다.

은퇴한 전대고수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원로원이다.

숫자 미상인 원로원의 원로들은 제왕성의 대소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왕성에 심각한 도전이나 위기가 찾아오면 발 벗고 나선다.

원로원의 전력만으로도 마도 무림의 종가인 마교나 사파 무림의 주인이었던 혈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무림의 평판이다.

 

이처럼 백여 년 간 축적되어온 제왕성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설령 전설 속의 천마가 부활한다 해도 제왕성에 맞서지는 못할 것이다.

 

* * *

 

일신재는 제왕성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대 제왕성 성주가 될 후계자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일신재의 경비가 삼엄한 것은 당연하다.

낮에는 등급을 받지 못한 무사들, 무등위(無等位) 위사들이 경비를 선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면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일신재를 물 샐틈 없이 에워싼 채 지킨다.

 

진상파는 일신재가 보이는 곳에 자라고 있는 울창한 관목들 사이에 숨듯이 서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리 옷자락에 <>자가 수놓아진 무사들이 일신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철위사대 소속의 철위사들이다.

(제왕성 후계자의 거처답게 경비가 삼엄하구나.)

진상파의 미간이 모아졌다.

그녀도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무공 방면에는 그다지 성취가 없는 진상파다.

철위사 한명도 상대할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다.

(자존심이 상해서 토라져 있을 모용준을 다독여줄까 하고 찾아왔는데... 이래서는 몰래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삼엄한 일신재의 경비를 확인한 진상파는 난감해졌다.

물론 정체를 드러내면 무리없에 일신재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밤 깊은 시간에 자신이 모용준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

마치 진상파 자신이 먼저 모용준에게 숙이고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돌아가야 하나?)

관목 사이에 숨은 진상파가 철위사들을 훔쳐보며 갈등 할 때였다.

“...!”

“...!”

무엇을 발견했는지 돌연 철위사들이 긴장하는 것이 진상파의 눈에 들어왔다.

(들킨 것일까?)

철위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진상파는 몸을 좀 더 숙였다.

!

그 직후 누군가 관목 옆을 지나 일신재로 다가갔다.

(저 계집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일신재로 다가가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의 눈이 치떠졌다.

여자인 진상파가 보기에도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그 여자는 바로 제왕성의 내총관인 구미호리 구숙정이었다.

철위사들은 구숙정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긴장했던 것이다.

(이 야심한 중에 저 천박한 계집이 무슨 일로 모용준의 거처를 찾아온 것일까?)

진상파가 일신재로 다가가는 구숙정의 뒷모습을 노려볼 때였다.

휘익!

건물 뒤편에서 날듯이 달려오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철위사 복장을 한 중년인인데 다른 철위사들과 다른 점은 소매에 세 가닥의 검은 색 줄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 세 가닥의 줄은 중년인이 철위사대의 수령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을 지닌 그자가 철위사대의 대주(隊主)인 냉혈철심(冷血鐵心) 사우(査愚).

내총관님!”

서둘러 달려온 냉혈철심 사우가 포권을 하며 구숙정을 맞이했다.

소성주님은?”

구숙정은 사우에게 물으면서도 일신재 쪽으로 향하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심기가 불편하신지 주무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우는 구숙정의 눈치를 보며 따라갔다.

사우가 비록 철위사대의 대주이긴 해도 총관인 구숙정보다는 한참 직급이 낮다.

게다가 구숙정에게는 부성주들이라 해도 무시하지 못하는 막강한 배경이 있는데...

그럴만도 하지. 평생 부모님에게도 싫은 소리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 우리 소성주가 천한 계집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구숙정은 코웃음을 치며 일신재의 입구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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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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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단 둘만의 절지(絶地), 낙원(樂園)

 

 

... 죄송합니다 신()공자님!”

속하들이 무능하여 작은 아가씨를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백남빈의 말을 끌고 돌아간 몇 명을 제외하고 백여 명의 대려장 무사들 모두는 밤새 당산산맥을 달리며 강미루의 종적을 찾았다.

어두운 산속을 말로 달리다보니 몇 명인가는 낙마하여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강미루와 흑왕이 사라진 곳을 중심으로 백여 리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대들이 죄를 청할 일은 아니니 자책할 것도 없다.”

대려장 무사들 앞쪽에 뒷짐을 진 채 서있는 인물이 한숨을 쉬었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쯤인데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해서 시원시원한 인상을 풍긴다.

풍채 좋은 몸에는 도포(道袍)라는 이국적인 형태의 흰옷을 걸쳤으며 머리에는 검은색 당건(唐巾)을 썼다.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만 아니라면 무사가 아니라 유생(儒生)으로 보였을 이 인물이 무군자 강진남의 사위다.

강진남의 큰 딸 강미조의 남편인 그의 이름은 광평객(廣平客) 신가람(申伽藍)이다.

고려(高麗), 지금은 조선(朝鮮)으로 이름이 바뀐 압록강 너머 출신이라는 것 외에 신가람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강호의 물 좀 먹은 요동 일대의 늙은 무림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신가람을 대려장의 으뜸 가는 고수로 꼽고 있다.

강진남이라 해도 이 잘 생긴 사위보다 무공으로는 아래라는 것이 늙은 생강들의 일치 된 의견이다.

유모 최씨의 눈물 어린 애원을 거절할 수 없었던 신가람은 강미루를 대려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었다.

하지만 한 발 늦어서 강미루는 철령보를 빠져나온 전령과 싸우다가 당산산맥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수색 범위를 백리 밖으로 넓히되 말이 달릴 만한 지형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신가람의 지시에 대려장의 무사들은 봉명(奉命)을 외친 후 뿔뿔이 흩어졌다.

이 말썽쟁이를 찾아내면 볼기짝부터 쳐야겠구나.”

말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대려장 무사들을 보며 신가람은 한숨을 쉬었다.

 

***

 

강미루는 자신의 애마가 목을 핥는 것을 느끼며 깨어났다.

정신이 돌아오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강미루는 기가 막혔다. 걸치고 있던 모든 옷이 조각조각 잘려서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선머슴같은 말괄량이라지만 어제 처음 만난 사내에게 알몸을 홀딱 보이고 말았으니 부끄러워서 죽고만 싶다.

대려장의 둘째 공주로 살아오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강미루다.

그런 그녀이기에 자신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남빈을 죽이고 싶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백남빈을 죽이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고개를 들어 백남빈을 보면 풀이 죽어서 땅만 보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려 그럴 마음이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백남빈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강미루의 몸에 상처가 났는지 살펴보기 위해 그녀의 붉은 옷을 갈기갈기 잘라버렸었다.

원래 옷이 입을 수 없는 지경이 된 터라 강미루는 백남빈의 남색상의(藍色上衣)로 알몸을 가리고 있다.

자신을 위해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알몸이 된 백남빈의 상체가 당당하게 보여 강미루의 가슴이 울렁거린다.

날은 이미 밝았으나 강미루는 웅크리고 앉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상체는 백남빈의 헐렁한 웃옷으로 가리고 있지만 아랫도리는 여전히 발가벗은 상태라 일어서는 것은 고사하고 고쳐 앉을 수도 없다.

자칫하다가는 너무도 부끄러운 곳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면서 멀뚱거리고 있는데 뱃속에서는 드디어 꾸룩 꾸룩 비둘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날이 밝으면서 두 사람이 있는 분지의 형상이 전모를 드러냈다.

분지는 사면이 수백 길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있다. 마치 거대한 항아리같은 형태의 분지라 바닥에서는 하늘이 타원형으로 보인다.

분지의 바닥에는 직경이 수십 장인 타원형의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뜨거운 온천수가 고여 있는 그 연못을 에워싸고 절벽과 원시림과 풀밭이 펼쳐져 있다.

온천수의 열기 때문인지 바깥세상은 이미 깊은 가을이지만 분지 내부는 한 여름처럼 덥다.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연못물은 특이하게도 푸른빛을 띄고 있다.

녹색의 온천수가 고여 있는 연못은 주변의 풀, 나무, 바위들과 어울려 낙원을 연상하게 한다.

늘 한 여름인 이 분지는 진정 세상 밖의 세상이요 평화와 안락이 깃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별호가 홍의창(紅衣槍)이었던 강미루는 하룻밤 사이에 나신창(裸身槍)이 되어 버린 자신의 신세가 막막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려장의 원수인 철령보 소속의 사내에게 알몸을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나쁜 뜻으로 자신을 알몸으로 만든 것도 아니니 탓할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어찌 하나? 저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버지와 형부가 알면 저 사람을 살려둘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강미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처녀로서 알몸을 보였으면 상대에게 시집을 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 상대가 자신의 집안과 오랜 원수지간인 철령보 출신이라는 점이다.

과연 자신이 이 사내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와 형부가 허락을 하실지 미지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번민에 휩싸여 있었는지 모른다.

문득 옆에서", !" 하는 기척이 나서 강미루는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백남빈이 고개를 돌리고 먼 곳을 보는 시늉을 하면서 한손으로는 상당한 양의 풀 뭉치를 내밀고 있다.

그런 백남빈은 상체를 풀로 얼기설기 엮은 것을 도롱이처럼 걸치고 있다.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사이에 언제까지 맨살을 드러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풀로 몸을 가릴 것을 만든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내미는 것도 아마 비슷한 것이리라 생각하고 받아 들었다.

다리를 한껏 오무려 매무새를 바로하고 팔만 돌려서 받노라니 백남빈의 어깨 너머로 햇살이 눈부셨다.

나무의 속껍질과 긴 풀로 만들어진 풀옷은 백남빈을 무슨 요정전사(妖精戰士)처럼 보이게 했다.

준수한 백남빈의 옆모습이 햇살에 밝게 빛나 더 없이 보기 좋았다.

강미루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풀로 된 옷을 가슴에 안았다.

(나도 이 옷을 입으면 저 사람과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지?)

야릇한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들었던 것이다.

강미루가 풀 뭉치를 받자 백남빈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강미루에게는 그런 백남빈의 행동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딴에는 배려를 한다고 자리를 피했겠지만 어쩐지 볼일 다 본 후 버림받은 여자 취급을 받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강미루가 상의(上衣)라고 생각하며 받았던 풀 옷은 예상과는 달리 치마였다.

부드럽고 긴 풀들을 나무의 질긴 속껍질로 엮어서 마치 초가집의 이엉처럼 만들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꽤 정성을 들여 만든 풀 옷이었다. 남자의 거친 솜씨임에도 불구하고 풀이 흩어지지 않도록 나무의 속껍질로 여러 번 엮어 놓은 것이다.

풀 옷을 허리에 감고 일어서서 온천물에 모습을 비춰보니 우스운 모습을 한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위에는 헐렁한 남자의 상의를 걸쳤고 아래에는 풀로 된 치마를 입었으니 그보다 더 우스운 차림은 없을 것 같았다.

물도 녹색이고 그것에 비친 사람도 녹색이다.

문득 강미루와 정반대의 차림을 한 사내가 물에 비친 그녀의 모습 곁에 나타났다.

물론 백남빈이다.

그의 품에는 여러 개의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안겨져 있었다.

강미루는 조금 심술이 났다. 물에 비친 백남빈의 모습이 더 멋있어 보인 때문이다.

백남빈의 풀 옷 상의는 아주 잘 어울리는데 자기의 풀로 짠 치마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

코웃음을 치며 돌아선 강미루는 백남빈의 품에 있는 열매를 몽땅 집어들고 돌아앉아 버렸다.

토라진 계집아이같은 강미루의 짓거리에도 백남빈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연못을 향해 앉은 강미루는 백남빈이 따온 이름 모를 과일을 하나 먹었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과일이다.

하지만 신경이 온통 백남빈에게 향해있어 무슨 맛인지 음미할 수도 없다.

백남빈이 그런 강미루의 눈치를 살피며 바닥에 놓여진 과일을 하나 슬며시 집어든다.

강미루는 새침한 표정인 채 관심 없는 척 했다.

백남빈은 강미루의 눈치를 보면서 과일을 먹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봤지만 자신이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았다.

옷을 벗긴 것은 독을 치료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녀의 나신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본성의 발현이니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알몸을 보고 만졌던 어쨌든 자신은 강미루를 살리는데 성공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소녀한테 꿀려서 기를 못 편단 말인가)

백남빈은 내심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이성(異性)의 경험이 없는 백남빈으로서는 결코 모를 것이다. 그것이 애정에 기반을 둔 인간감정(人間感情)의 불합리성(不合理性)인 것을...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백남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빨리 이 분지를 빠져 나가야하는데... 타고 갈 말도 없고 다리마저 상처가 심상치 않다. 속은 타지만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며칠 머물러야만 한다.”

깊이 몰두하다 보니 백남빈의 생각은 중얼거림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강미루는 무슨 말인지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즉시 한마디 했다.

"이 분지를 빠져 나가기가 쉽지 않을 걸요?"

그러나 백남빈은 그녀가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묵묵히 속으로 궁리만 하고 있었다.

강미루는 왠지 이 아름다운 분지를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늘 아래에서 오직 이곳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아버린 저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일로 허기를 면한 백남빈은 아픈 다리를 끌면서 분지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강미루는 휘파람으로 흑왕을 불렀다. 흑왕도 온천 주변에서 풀을 뜯어 먹고 생생하게 기력을 회복한 후였다.

강미루는 다가온 흑왕의 등에 훌쩍 몸을 날려 올라탔다.

그러나 몸을 날릴 때의 시원한 아랫도리의 감촉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풀치마로 가려진 아랫도리가 자꾸 신경이 쓰여 눈이 아래를 보다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백남빈을 보다가 하면서 힐끔거리고 있었다.

백남빈 옆에 다다른 강미루가 손을 뻗자 백남빈은 사양할 수 없어 그녀의 뒤로 올라가 앉았다.

다시 두 사람이 함께 말에 타고 있자 어제 저녁의 그 치열했던 쟁투가 생각난다.

백남빈은 겸연쩍어 웃었고 강미루는 설레어 두 뺨이 발개졌다.

 

자세히 둘러보니 분지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작아서 기껏해야 만 평 정도일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지는 그야말로 세외선경 같다.

북쪽에는 그리 넓지는 않지만 울창한 원시림이 있고 서쪽에는 까마득한 바위절벽이 푸른 연못과 거의 맞닿아있으며, 남쪽 절벽 밑에는 풀밭이 드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물들은 이름 모를 새들을 제외하고는 토끼 한 마리도 눈에 뛰지 않았다.

동쪽의 절벽은 어제 밤에 백남빈이 내려온 곳인 듯한 데 한동안 맴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라가는 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가파른데다가 수백길이나 되는 그 절벽을 어떻게 내려왔는지 불가사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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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독한 천하제일인

 

 

유성신검황 혁련휘의 오른쪽에는 음산한 인상을 지닌 중년 장한이 서 있었다.

세 사람 중 가장 젊은 이 인물은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장포를 걸치고 있으며 그 검은색 장포 위에는 박쥐의 날개 형상을 본뜬 검은색 피풍의(避風衣)를 두르고 있다.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자는 제법 준수한 용모를 지녔다.

그러나 안색이 지나치게 희고 창백하여 차갑고 섬뜩한 인상을 풍긴다. 너무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하기까지 보이는 얼굴 탓에 마치 무덤에서 뛰쳐나온 시체같이 보이는 인물이다.

 

-유령마제(幽靈魔帝) 구양수(九陽秀)!

 

신마풍운록 서열 오위(五位)인 그는 얼마 전 북망산(北邙山) 유령궁(幽靈宮)의 새로운 궁주가 된 인물이다.

음유하고 악독한 마공을 연마하여 소리 없이 적을 죽이는 암수(暗手)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난 유령마제 구양수가 무림패권의 야심을 지니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성신검황 혁련휘-!

독천존 서래음-!

유령마제 구양수-!

 

신마풍운록의 서열 삼, , 오위를 차지하고 있는 절정고수들이 고독애에 운집한 군웅들의 사실상 통솔자였다.

이들 세 사람과 신마풍운록 서열 육위인 태양신협 이청천을 합쳐 무림인들은 사방무신(四方武神)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혁련검호각, 독성부, 유령궁, 태양곡 등의 네 문파는 신주사패천(神州四覇天)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현재 고독애에는 그 사방무신과 신주사패천 중 태양신협 이청천과 태양곡만이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상 전 무림의 정영들이 이 비좁은 고독애에 모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하는 거요 서(西)부주?”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령마제 구양수였다. 그자는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독천존 서래음을 돌아보았다.

()노괴는 이미 서부주의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당한 데다가 오백여 명의 고수들을 해치운 대가로 심각한 내상까지 입은 상태요. 그렇거늘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이오?”

유령마제가 음침한 음성으로 다그치듯 말했다.

물론 노부의 무형지독은 제법 쓸만 하지!”

독천존은 곰방대를 입에 문 채로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렸다.

아무리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연남천이라 해도 무형지독을 이겨내지는 못할걸?”

그 말을 들은 유령마제가 다시 재촉했다.

그걸 잘 알면서 왜 망설이는 것이오? 당장 쳐들어갑시다!”

그러자 독천존의 가늘게 뜬 두 눈에 언 듯 비웃음이 어렸다.

끌끌, 구양궁주는 혈마대장경에 눈이 멀어서 우리의 상대가 누군지 잊고 있는 듯하구만!”

독천존의 그 말에 유령마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독천존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상대는 다름 아닌 천하의 고독마야 연남천이야. 그래서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고...”

“...!”

독천존의 말에 모멸감을 느낀 듯 유령마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어쨌든 독천존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눈앞의 자그마한 석옥에 도사리고 있는 인물은 유령마제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포를 느끼는 대상인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고독마야와 맞대결해서 십초(十招) 이상을 버틸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인물은 당금 강호에 아무도 없다.

클클, 우리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게야. 연노괴가 무형지독의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질 때까지...!”

독천존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휴우...!)

독천존의 말에 유성신검황 혁련휘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령마제나 독천존과 달리 광명정대한 성품을 지닌 그는 비록 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중독되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는 비겁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감히 앞장서서 석옥으로 쳐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는 그 자신이 평생 동안 극복해보려고 절치부심해온 고독마야 연남천이다.

괜한 객기를 부려 단기돌입(單騎突入)했다가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의 손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내 한 몸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유성신검황은 내심 탄식하며 독천존과 유령마제를 돌아보았다.

진심으로 그는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 그가 필부지용으로 고독마야와 맞서 싸우다 죽음을 당한다면 독천존과 유령마제만 이롭게 만들 뿐이다.

독천존의 독성부와 유령마제의 유령궁이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망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세력이 바로 유성신검황 자신의 혁련검호각이 아닌가?

(치욕스러운 일이나... 이 방문좌도(榜門左道)의 무리들과 행동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유성신검황은 소리없이 탄식하며 석옥쪽을 주시했다.

 

석옥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있는 군웅들의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는 마의(麻衣)노인 한 명이 무심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술도... 이것이 마지막이로군!”

!

마의노인은 빈 술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공허하게 웃었다.

육척 가까운 훤칠한 체격에 희끗희끗한 머리... 얼굴은 비록 주름으로 뒤덮여 있으나 두 눈만은 여전히 형형한 한망(寒茫)을 뿜어내고 있는 노인이다.

이 마의노인의 분위기는 아주 독특했다.

온통 허무함과 공허함으로 젖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잘 벼린 칼로 가슴이 저며지는 듯한 서늘한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고독마야 연남천!

 

마의노인이 바로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이며 신마풍운록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지난 육십여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고독한 절대자인...!

고독마야가 한 자루 철검(鐵劍)을 짊어지고 무림에 나선 것은 약관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강호에 출도한 이후 그는 적수를 찾기 위해 중원뿐 아니라 새외(塞外)와 변황(邊荒)까지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고독마야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적수를 찾지 못했다.

적수는 고사하고 그의 수하에서 십초를 버티어낸 인물조차 없었다.

비록 세상이 한없이 넓고 그 안의 인간이 모래알같이 많을지라도 진정한 인걸(人傑)은 드문 법이다.

하물며 한 세대가 아니라 수십 세대에 걸쳐도 그 짝을 찾아보기 힘든 천부의 자질의 소유자인 고독마야 연남천이다.

그런 그를 감복시킬만한 인재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적수를 찾아 구주팔황을 헤맨 고독마야의 오십여 년에 걸친 여정은 실망으로 막을 내렸다.

긴긴 여정에서 고독마야가 확인한 것은 세상이 비상식적일 정도로 막강한 그 자신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같은 사실에 실망하고 인간들의 천박함에 좌절한 고독마야는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곤륜산의 깊은 곳에 들어와 석옥 한 채를 짓고 은거해버렸다.

고독마야는 곤륜산에서도 가장 깊고 험해 인적이 닿은 적이 없는 이곳을 고독애라 이름 짓고 거처로 마련한 석옥에 고독헌(孤獨軒)이라는 현판을 새겼던 것이다.

 

어리석은 것들! 이 모두가 강호 무림의 파멸을 노린 음모인 줄도 모르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불나방처럼 몰려든 꼬락서니들이라니...!”

! 퍼석!

고독마야 연남천은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빈 술병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자세히 보면 그의 안면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그것은 그가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극독에 중독되었다는 증거였다.

무형지독-!

색도 냄새도 없는 무색투명한 극독으로써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기에 누구라도 이 무형지독의 암산을 피해내지 못한다.

일단 무형지독에 중독되면 반각 이내에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 죽게 된다.

고독마야가 그 무서운 무형지독을 다량 흡입한 상태에서도 반나절 넘게 쓰러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의 내공이 신화경(神化境)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막강한 내공으로도 무형지독을 어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지독한 극독은 내공의 힘으로 태워버릴 수도 없다.

고독마야는 그저 무형지독이 발작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고독마야는 독천존 서래음의 장담대로 결국 무형지독의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허... 이곳 고독애가 나 연남천의 무덤이 되겠구나.)

고독마야는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여한은 없다. 이 혼탁하고 추악한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으니...!)

그의 주름진 눈꼬리로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신마풍운록이라는 못된 물건을 만들어 세상을 피로 물들게 만든 놈의 상판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고독마야는 눈길을 한쪽 옆 서탁으로 돌렸다.

그가 돌아보는 서탁 위에는 표지가 새것인 책자 한 권과 아주 낡아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한 세 권의 비단 책자가 놓여있었다.

 

-신마풍운록!

 

최근에 지어진 새 책자는 바로 신마풍운록이었다. 그것은 얼마 전 고독마야의 수중에 들어왔다.

 

-혈마대장경!

 

세 권의 낡은 비단 책자는 다름 아닌 전 무림인들로 하여금 고독마야를 합공하게 만든 원인인 혈마대장경이었다.

두 달 전, 고독마야는 약초를 구하러 천산(天山)에 갔다가 어느 빙곡(氷谷)의 빙동(氷洞)에서 우연히 혈마대장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독마야가 전대기인의 은거지였던 그 빙동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먼저 들어온 자가 있었다.

새북인마(塞北人魔)라는 그자는 신마풍운록 서열 삼십 위 안에 드는 대단한 고수였다.

물론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의 입장에서 본다면 새북인마란 작자는 그저 하루살이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고독마야는 새북인마가 먼저 전대기인의 유물을 발견한 사실을 인정하고 조용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새북인마는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그 자는 상대가 고독마야임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그저 약초나 캐러 다니는 평범한 심마니로 오인했다.

그래서 자신이 비급을 발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하고는 살인멸구 한답시고 고독마야에게 덤벼들었다.

물론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새북인마는 고독마야의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고 한 팔이 으깨진 채 거꾸러졌다.

새북인마는 그제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는 사색이 되어 고독마야 앞에 오체복지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굳이 새북인마의 목숨까지 뺏을 이유가 없었던 고독마야는 그자가 발견한 비급만 뺏고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렇게 고독마야가 새북인마에게서 빼앗은 비급이 바로 혈마대장경이었다.

고독마야는 새북인마가 허둥지둥 달아난 후에야 자신이 흡혈마조가 남긴 비급을 얻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혈마대장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미 그 자신의 무공이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이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에 다른 무공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북인마를 그냥 살려 보낸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새북인마는 고독마야에게 복수한답시고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을 지닌 사실을 여기저기 소문으로 퍼뜨리고 다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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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八 章

 

             天海秘譜

 

 

다급한 순간, 기검룡은 좌수로는 극영쇄심인을, 우수로는 참마제룡수를 펼쳐 상강일괴와 사공망을 동시에 방어했다.

꽈릉___ !

차차창___

폭음과 금속음이 어지럽게 짓터지는 순간,

[___ ___ !]

[___ !]

두마디의 서로 다른 비명이 잇따라 터졌다.

뒤이어,

[하하하... 용아 숙부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사해신룡이 호탕한 웃음을 트뜨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며 휘두른 일장에 상강일괴는 그대로 즉사했고 기검룡의 참세룡수에 의해 기식이 엄엄했다.

사해신룡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한쪽에서는 태산일수가 홍라선희에게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쪽에서는 능부인이 북망사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사해신룡은 능소취를 기검룡에게 맡기고 번쩍 북망사신에로 몸을 날렸다.

능소취는 기검룡과 함께 있게 되자 문득 뾰루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용오빠, 저 여자한데 입맞춤할거야?]

그녀는 홍라선희를 가리켰다.

기검룡은 일순 당황하여 안색이 붉어졌다.

[... 그럼 어떻게 해. 일방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약속을 해버렸으니...]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말에 능소취는 홱 토라졌다.

이때, 꽈르릉___!

장내에 다시 폭음이 터져올랐다.

사해신룡과 격돌한 북망사신이 순간 비틀 하며 물러섰다.

그 순간을 놓칠 능부인이 아니었다.

[빙음백주강(氷陰白柱罡)!]

그녀의 우장에서 얼음기둥같은 하얀기류가 쭉 뻗어나갔다.

파파팍___ ___!

엄청난 파열음에 이어,

[___ !]

북망사신은 왼팔이 산산이 부서져 날아갔다.

[두고보자.]

북망사신은 이를 갈며 황급히 몸을 날려 장내를 빠져나갔다.

거의 동시에, 홍라선희를 상대했던 태산일수가 물러가고 그것을 시작으로 군웅들은 삽시에 장내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해신룡은 침중한 신색으로 사방을 쓸어보았다.

칠십이도객의 절반이 죽음을 당했고 내삼당의 당주 역시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이때,

[호호호...]

홍라선희가 풍만한 둔부를 살래살래 흔들며 기검룡에게로 다가왔다.

[, 귀여운 공자님, 어서 이 누나의 뺨에 입을 맞춰주세요.]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고 상아빛 뺨을 내밀었다.

능소취는 이 광경에 그만 눈물을 글썽였다.

기검룡이 주저하자 홍라선희는 달콤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공자님, 장부라면 약속을 지키셔야죠.]

기검룡은 할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짧은 순간, 홍라선희의 상아빛 뺨은 도화빛으로 물들었고 그에반해 기검룡의 표정은 못할 짓을 한것처럼 떫뜨름하게 변했다.

이 모습에 능소취는 그만 얼굴을 가리고 능부인의 품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윽고 홍라선희는 교태로운 웃음이 어린 눈으로 기검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호... 공자님, 다시 만나기를 바래요.]

이어 그녀는 기검룡의 손에 무엇인가 살짝 쥐어주고 휙! 몸을 날려 계곡을 떠났다.

이때, 능소취는 눈물젖은 눈으로 기검룡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용오빠는 거짓말장이! 취아가 제일 좋다더니 그 여자가 더 좋은거지? 흑흑...]

기검룡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취아... 울지마라. 나는 취아가 누구보다 더 좋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능수취는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사해신룡은 문득 의미있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용아는 여복이 터졌구나. 벌써부터 저렇게 여자들 사이에서 고민하니 훗날에는 큰일나겠구나.]

기검룡은 머쓱하게 웃으며 문득 화제를 바꾸었다.

[참 숙부님! 하후할버지와 해룡방 식구들은 어찌되었을까요?]

그말에 사해신룡도 정색을 했다.

[부인! 이 옥함을 갖고 배로 돌아가 있으시오. 나는 용아와 함께 섬 뒤쪽으로 갔다가 가리다.]

능부인은 사해신룡으로부터 옥함을 건네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 용아 가자.]

, 기검룡과 사해신룡은 절벽을 날아올랐다.

그곳에 올라서니 해룡방과 사해선문이 치열한 호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룡방의 전선은 태반이 침몰되었고 해변가에서는 수백 명 사해선문의 수하들과 해룡방수하들이 뒤엉켜 어지러운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멈춰랏___!]

사해신룡은 그들을 향해 쩌렁쩌렁한 대갈을 터뜨렸다.

순간,

[___!]

사해선문의 진영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졌다.

사해신룡은 가볍게 그들에게 응수한 뒤 다시 소리쳤다.

[해룡왕(海龍王)! 수십 년간 걸친 양파의 분규는 그대와 본 문주와의 결투로 결말짓는 것이 어떤가?]

[좋다! 패하는 쪽이 영원히 동해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는 것이다.]

비천해응 하후염과 대치하고 있던 금포중년인이 문득 사해신룡의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한손에 분수자(分水子)를 움켜쥐고 있었다.

사해신룡과 해룡왕___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한 그들은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사해신룡은 손에 든 깃발을 힘껏 펄럭이며 쓸어갔다.

___ ___ !

해룡왕도 혼신의 힘으로 분수자를 휘둘렀다.

허나, 파파파팍___!

[으윽!]

분수자는 기폭에 부딪치는 순간 대여섯 조각으로 부서지고 해룡왕은 울컥 선혈을 토하며 네 걸음이나 물러섰다.

[... 졌다!]

그는 고통스럽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돌아가자.]

이어, ! ___!

그들 일행은 모두 몸을 날려 거선으로 돌아갔다.

사해신룡은 장내에 우뚝 선채 위엄있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형제들이 힘써준 덕분으로 일이 무사히 끝났소. 앞으로 십년(十年), 십년만 지나면 본 사해선문은 천하게 웅비할 수 있을 것이오. 모두 수고를 하셨소. 총단으로 돌아갑시다.]

[___!]

[문주님 만세___!]

사해선문의 수하들은 바다가 떠나갈 듯 힘찬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기검룡은 사해신룡과 함께 몸을 날리며 홍라선희가 주고간 물건을 꺼내보았다.

그것은 티하나 없는 백옥(白玉)으로 만들어진 둥근 옥패였다.

 

<봉황지존(鳳凰之尊).>

 

전면에는 고어로 위와 같은 네 자의 글이 씌어져 있었다.

또한 뒷면에는 몸이 자색이며 부리는 황금빛으로 된 한 마리의 봉황이 새겨져 있었다.

기검룡은 홍라선희가 무슨 까닭으로 영패를 자신에게 주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들은 곧 처음 타고온 거선에 이르렀다.

헌데 문득, 갑판의 한구석을 바라보던 사해신룡은 아미를 찌푸렸다.

백객 조인창___.

그가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사해신룡은 선실을 들어서자마자 능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백객은 어찌된 일이오?]

능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첩이 배에 오르기 직전 갑자기 암습을 가하는 바람에...]

그말에 사해신룡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결국 독수인마와 내통했던 자는 백객이었군.)

이어, 그는 한쪽 탁자 위에 놓여있는 백옥함을 집어들었다.

문득, 기검룡이 궁금한 눈빛으로 백옥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이 천해비동에 비장되어 있던 보물들인가요?]

사해신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손에 들고있던 기()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그렇다. 이 기()는 천해보기(天海寶旗)라는 상고시대의 기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공력을 주입하면 그것의 몇 배나 되는 경기를 발출하는 훌륭한 무기가 된다.]

기검룡은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빙죽도는 대대로 사해선문의 영지였다고 들었습니다. 어찌하여 이제서야 천해비동에 입동하셨습니까?]

[천해비종이 발견된 것은 오래 전이다. 허나 동굴 안은 너무도 한랭하여 인간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허나 최근에야 자오절이 되면 다소 한기가 사라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지.]

사해신룡은 이어 백옥함을 열었다.

그 속에는 또 다른 두 개의 작은 옥갑과 하나의 가죽주머니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옥갑 밑으로는 여러 권의 책자들이 들어있었다.

[이것들은 칠백 년 전의 기인이신 천해상인(天海上人)께서 남기신 것이다. 그분은 비단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평생 많은 기물과 무공비급들을 모으셨다. 이것이 모두 그분의 유물들이다.]

사해신룡은 먼저 가죽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하나의 붉은 구슬이 들어있었다.

이어 그는 이번에는 두 개의 옥갑 중 작은 쪽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폐부까지 시원하게 하는 향기를 풍기며 세 알의 작은 환약이 밀랍에 쌓인 채 드러났다.

그 속에는 한 장의 양피지가 함께 들어있었다.

 

<이 환약들은 천원신단(天元神丹)이라 한다. 이것을 복용하면 영지를 맑게하고 내공이 증강한다. 허나 그 효력은 극히 지속적이나 완전히 약효가 나타나려면 십년(十年) 이상을 지나야 한다. 그 연단법은...>

 

밑으로 깨알같은 연단법이 적혀있었으나 그것은 감히 구할 수 없는 영초들 인지라 사해신룡은 혀를 내둘렀다.

[과연 절세의 기약이다. 취아와 용아가 하나씩 복용해라. 너희같은 아이들이 복용하면 효과가 큰 것이다.]

능소취는 천원신단을 받았으나 기검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영약이 필요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임독양맥이 타통되어 있었던 것이 지금도 열려있으므로 내공도 보통사람보다 열 배는 빨리 연성할 수 있습니다.]

그말에 사해신룡과 능부인은 몹시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곧 사해신룡은 관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네 무공은 할아버지들의 도움을 받지않고 혼자 연성한 것이냐!]

[, 저는 세 살 때부터 내공입문에 들었어요.]

사해신룡은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후일 필요할지 모르니 지니고 있거라.]

그는 천원신단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허나 기검룡은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자 사해신룡은 천원신단을 거두고 용안(龍眼)만한 홍주(紅珠)를 피낭에 넣어 건네 주었다.

[그럼 이것이라도 갖도록해라. 이 홍주도 필시 내력이 있는 것일테니.]

기검룡은 그것까지 거절할 수가 없어 예를 표하며 받아넣었다.

이때 사해신룡은 두 번째의 옥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여인이 쓰던 것인 듯 화사한 무늬가 수놓여진 채대가 들어있었다.

채대 밑의 작은 양피지를 꺼내읽은 능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천해상인과 동시대의 여걸이었던 칠채무후(七彩武后)께서 사용하실 칠채금대(七彩金帶)로군요.]

[어머! 정말 예쁜 것이군요.]

능소취는 채대를 바라보며 탄성을 발했다.

사해신룡은 두 개의 옥갑을 들어낸 다음 수십 권의 얇은 비급들에 눈길을 돌렸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비봉무한 웅휘한 필체로 제목이 씌어진 약간 두툼한 책자였다.

 

<천해무량심경(天海無量心經).>

 

겉장을 넘기자 간단한 서언(序言)이 적혀있었다.

 

<빈도는 무공익히기를 세끼 밥먹기 보다 좋아하여평생 수없이 많은 무공을 섭렵했다. 이제 말년에 이르러 무엇인가 흔적을 남기고 싶어 이 글을 적는다. 빈도가 익히고창안한 신공절기들 중 후세에 남기고 싶은 것을 간추려 모두 서른 여섯 권의 비급을 만들었다. 이글을 읽는 후인은 부디 이 절기를 사용하여 천하를 평정하도록 노력하라.>

 

[, 보고싶은 것이 있으면 골라보도록 해라.]

그 말에 기검룡은 수권의 비급들을 뒤적이다가 문득 한 권의 얇은 비급을 꺼내들었다.

 

<천뢰도보(天雷刀譜).>

 

기검룡은 위와 같이 씌어진 책자에 기이하게 마음이 끌림을 느끼며 책장을 열었다.

 

<천지간에 가장 빠른 것은 낙뢰(落雷). 낙뢰의 속도를 따르려고 고심한지 백년(百年) 마침내 낙뢰의 빠르기를 능가하는 세 초식의 도법(刀法)을 창안했다.

___천뢰도광(天雷刀狂).>

 

기검룡은 서문을 읽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낙뢰의 빠르기를 능가하는 도법...!)

그는 즉시 그것의 구결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도식(刀式)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세 가지의 내공심법이었다.

 

___광극뢰(光極雷).

___심극뢰(心極雷).

___천극뢰(天極雷).

 

구결을 모두 읽고난 기검룡은 경악에 경악을 거듭했다.

그것은 실로 너무도 가공할 위력과 속도를 지닌 쾌도(快刀)의 극치였다.

그는 두세 번 읽어 구결을 암기한 다음 천뢰도보를 내려놓았다.

이때, 능소취는 문득 한 권의 책자를 집어들며 능부인을 바라보았다.

 

<무후진선경(武后振仙經).>

 

책의 끝장에는 그렇게 씌어 있었다.

능부인은 능소취를 바라보며 나직이 웃었다.

[우리 취아가 무척이나 칠채금대가 탐이나는 모양이지?]

능소취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무후진선경을 읽기 시작했다.

헌데 이때,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기검룡과 능소취는 호기심을 느끼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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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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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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