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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천하제일인

 

 

유성신검황 혁련휘의 오른쪽에는 음산한 인상을 지닌 중년 장한이 서 있었다.

세 사람 중 가장 젊은 이 인물은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장포를 걸치고 있으며 그 검은색 장포 위에는 박쥐의 날개 형상을 본뜬 검은색 피풍의(避風衣)를 두르고 있다.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자는 제법 준수한 용모를 지녔다.

그러나 안색이 지나치게 희고 창백하여 차갑고 섬뜩한 인상을 풍긴다. 너무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하기까지 보이는 얼굴 탓에 마치 무덤에서 뛰쳐나온 시체같이 보이는 인물이다.

 

-유령마제(幽靈魔帝) 구양수(九陽秀)!

 

신마풍운록 서열 오위(五位)인 그는 얼마 전 북망산(北邙山) 유령궁(幽靈宮)의 새로운 궁주가 된 인물이다.

음유하고 악독한 마공을 연마하여 소리 없이 적을 죽이는 암수(暗手)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난 유령마제 구양수가 무림패권의 야심을 지니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성신검황 혁련휘-!

독천존 서래음-!

유령마제 구양수-!

 

신마풍운록의 서열 삼, , 오위를 차지하고 있는 절정고수들이 고독애에 운집한 군웅들의 사실상 통솔자였다.

이들 세 사람과 신마풍운록 서열 육위인 태양신협 이청천을 합쳐 무림인들은 사방무신(四方武神)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혁련검호각, 독성부, 유령궁, 태양곡 등의 네 문파는 신주사패천(神州四覇天)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현재 고독애에는 그 사방무신과 신주사패천 중 태양신협 이청천과 태양곡만이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상 전 무림의 정영들이 이 비좁은 고독애에 모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하는 거요 서(西)부주?”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령마제 구양수였다. 그자는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독천존 서래음을 돌아보았다.

()노괴는 이미 서부주의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당한 데다가 오백여 명의 고수들을 해치운 대가로 심각한 내상까지 입은 상태요. 그렇거늘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이오?”

유령마제가 음침한 음성으로 다그치듯 말했다.

물론 노부의 무형지독은 제법 쓸만 하지!”

독천존은 곰방대를 입에 문 채로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렸다.

아무리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연남천이라 해도 무형지독을 이겨내지는 못할걸?”

그 말을 들은 유령마제가 다시 재촉했다.

그걸 잘 알면서 왜 망설이는 것이오? 당장 쳐들어갑시다!”

그러자 독천존의 가늘게 뜬 두 눈에 언 듯 비웃음이 어렸다.

끌끌, 구양궁주는 혈마대장경에 눈이 멀어서 우리의 상대가 누군지 잊고 있는 듯하구만!”

독천존의 그 말에 유령마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독천존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상대는 다름 아닌 천하의 고독마야 연남천이야. 그래서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고...”

“...!”

독천존의 말에 모멸감을 느낀 듯 유령마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어쨌든 독천존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눈앞의 자그마한 석옥에 도사리고 있는 인물은 유령마제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포를 느끼는 대상인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고독마야와 맞대결해서 십초(十招) 이상을 버틸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인물은 당금 강호에 아무도 없다.

클클, 우리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게야. 연노괴가 무형지독의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질 때까지...!”

독천존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휴우...!)

독천존의 말에 유성신검황 혁련휘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령마제나 독천존과 달리 광명정대한 성품을 지닌 그는 비록 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중독되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는 비겁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감히 앞장서서 석옥으로 쳐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는 그 자신이 평생 동안 극복해보려고 절치부심해온 고독마야 연남천이다.

괜한 객기를 부려 단기돌입(單騎突入)했다가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의 손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내 한 몸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유성신검황은 내심 탄식하며 독천존과 유령마제를 돌아보았다.

진심으로 그는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 그가 필부지용으로 고독마야와 맞서 싸우다 죽음을 당한다면 독천존과 유령마제만 이롭게 만들 뿐이다.

독천존의 독성부와 유령마제의 유령궁이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망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세력이 바로 유성신검황 자신의 혁련검호각이 아닌가?

(치욕스러운 일이나... 이 방문좌도(榜門左道)의 무리들과 행동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유성신검황은 소리없이 탄식하며 석옥쪽을 주시했다.

 

석옥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있는 군웅들의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는 마의(麻衣)노인 한 명이 무심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술도... 이것이 마지막이로군!”

!

마의노인은 빈 술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공허하게 웃었다.

육척 가까운 훤칠한 체격에 희끗희끗한 머리... 얼굴은 비록 주름으로 뒤덮여 있으나 두 눈만은 여전히 형형한 한망(寒茫)을 뿜어내고 있는 노인이다.

이 마의노인의 분위기는 아주 독특했다.

온통 허무함과 공허함으로 젖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잘 벼린 칼로 가슴이 저며지는 듯한 서늘한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고독마야 연남천!

 

마의노인이 바로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이며 신마풍운록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지난 육십여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고독한 절대자인...!

고독마야가 한 자루 철검(鐵劍)을 짊어지고 무림에 나선 것은 약관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강호에 출도한 이후 그는 적수를 찾기 위해 중원뿐 아니라 새외(塞外)와 변황(邊荒)까지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고독마야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적수를 찾지 못했다.

적수는 고사하고 그의 수하에서 십초를 버티어낸 인물조차 없었다.

비록 세상이 한없이 넓고 그 안의 인간이 모래알같이 많을지라도 진정한 인걸(人傑)은 드문 법이다.

하물며 한 세대가 아니라 수십 세대에 걸쳐도 그 짝을 찾아보기 힘든 천부의 자질의 소유자인 고독마야 연남천이다.

그런 그를 감복시킬만한 인재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적수를 찾아 구주팔황을 헤맨 고독마야의 오십여 년에 걸친 여정은 실망으로 막을 내렸다.

긴긴 여정에서 고독마야가 확인한 것은 세상이 비상식적일 정도로 막강한 그 자신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같은 사실에 실망하고 인간들의 천박함에 좌절한 고독마야는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곤륜산의 깊은 곳에 들어와 석옥 한 채를 짓고 은거해버렸다.

고독마야는 곤륜산에서도 가장 깊고 험해 인적이 닿은 적이 없는 이곳을 고독애라 이름 짓고 거처로 마련한 석옥에 고독헌(孤獨軒)이라는 현판을 새겼던 것이다.

 

어리석은 것들! 이 모두가 강호 무림의 파멸을 노린 음모인 줄도 모르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불나방처럼 몰려든 꼬락서니들이라니...!”

! 퍼석!

고독마야 연남천은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빈 술병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자세히 보면 그의 안면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그것은 그가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극독에 중독되었다는 증거였다.

무형지독-!

색도 냄새도 없는 무색투명한 극독으로써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기에 누구라도 이 무형지독의 암산을 피해내지 못한다.

일단 무형지독에 중독되면 반각 이내에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 죽게 된다.

고독마야가 그 무서운 무형지독을 다량 흡입한 상태에서도 반나절 넘게 쓰러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의 내공이 신화경(神化境)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막강한 내공으로도 무형지독을 어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지독한 극독은 내공의 힘으로 태워버릴 수도 없다.

고독마야는 그저 무형지독이 발작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고독마야는 독천존 서래음의 장담대로 결국 무형지독의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허... 이곳 고독애가 나 연남천의 무덤이 되겠구나.)

고독마야는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여한은 없다. 이 혼탁하고 추악한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으니...!)

그의 주름진 눈꼬리로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신마풍운록이라는 못된 물건을 만들어 세상을 피로 물들게 만든 놈의 상판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고독마야는 눈길을 한쪽 옆 서탁으로 돌렸다.

그가 돌아보는 서탁 위에는 표지가 새것인 책자 한 권과 아주 낡아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한 세 권의 비단 책자가 놓여있었다.

 

-신마풍운록!

 

최근에 지어진 새 책자는 바로 신마풍운록이었다. 그것은 얼마 전 고독마야의 수중에 들어왔다.

 

-혈마대장경!

 

세 권의 낡은 비단 책자는 다름 아닌 전 무림인들로 하여금 고독마야를 합공하게 만든 원인인 혈마대장경이었다.

두 달 전, 고독마야는 약초를 구하러 천산(天山)에 갔다가 어느 빙곡(氷谷)의 빙동(氷洞)에서 우연히 혈마대장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독마야가 전대기인의 은거지였던 그 빙동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먼저 들어온 자가 있었다.

새북인마(塞北人魔)라는 그자는 신마풍운록 서열 삼십 위 안에 드는 대단한 고수였다.

물론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의 입장에서 본다면 새북인마란 작자는 그저 하루살이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고독마야는 새북인마가 먼저 전대기인의 유물을 발견한 사실을 인정하고 조용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새북인마는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그 자는 상대가 고독마야임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그저 약초나 캐러 다니는 평범한 심마니로 오인했다.

그래서 자신이 비급을 발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하고는 살인멸구 한답시고 고독마야에게 덤벼들었다.

물론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새북인마는 고독마야의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고 한 팔이 으깨진 채 거꾸러졌다.

새북인마는 그제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는 사색이 되어 고독마야 앞에 오체복지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굳이 새북인마의 목숨까지 뺏을 이유가 없었던 고독마야는 그자가 발견한 비급만 뺏고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렇게 고독마야가 새북인마에게서 빼앗은 비급이 바로 혈마대장경이었다.

고독마야는 새북인마가 허둥지둥 달아난 후에야 자신이 흡혈마조가 남긴 비급을 얻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혈마대장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미 그 자신의 무공이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이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에 다른 무공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북인마를 그냥 살려 보낸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새북인마는 고독마야에게 복수한답시고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을 지닌 사실을 여기저기 소문으로 퍼뜨리고 다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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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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