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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괄량이의 가출

 

 

단숨에 주워 삼키는 에센의 분석은 정확했다.

(확실히 평범한 인재는 아니다. 말만 좀 가려서 할 줄 알고 겸손하기만 하다면 미루와 짝을 지어주어도 손색이 없었을 텐데...)

강진남이 에센을 아쉬운 표정으로 볼 때였다.

... 장주님! 큰일... 큰일 났어요!”

숨이 턱에 차서 문루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여자가 있었다. 후덕한 인상의 그 중년여인은 강미루의 유모 최씨였다.

미루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허둥대며 문루로 올라오는 유모 최씨를 본 강진남은 미간을 찡그렸다.

강진남의 둘째 딸 강미루는 조신한 성품인 첫째 딸 강미조(姜美藻)와 딴판으로 지나치게 활달하여 쉴 새 없이 문제를 일으켜 왔다.

... 작은 아가씨가 감쪽같이 사라지셨습니다요.”

헐떡이며 문루로 올라선 유모가 울상을 짓는다.

미루가 사라지다니? 어디로?”

강진남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뿔난 망아지같은 둘째 딸이 말썽을 부리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꽤 오래 안 보이시기 계실만한 곳을 다 뒤져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아무래도... 방금 전에 출진한 애들 속에 묻어서 본장을 빠져나가신 것 같사옵니다.”

그 녀석 참...”

울먹이는 유모와 달리 강진남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혀를 찰 뿐이었다.

... 당장 파발을 보내 돌아오라고 분부하셔요. 바깥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도 모르는 철부지 아니옵니까?”

그럴 거 없네. 제 녀석도 오죽 답답했으면 가출을 했겠는가?”

유모의 애원에도 강진남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혼자도 아니고 대려장의 정예들과 함께 집을 나간 것이니 딱히 걱정할 일도 아니다.

물론 강미루가 핏덩이일 때부터 키워온 유모의 심정은 달랐다.

... 장주님! 작은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시려고 그런 매정한 말씀을...”

서운해 하는 유모의 말에 강진남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바람 좀 쐬고 돌아오겠지. 정 걱정되면 그 녀석 형부에게 가서 부탁해보게나.”

... 그리 합지요.”

강진남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선 유모는 서둘러 문루를 달려 내려갔다. 강미루의 형부, 즉 강진남의 사위를 찾아가 부탁하는 쪽이 빠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미루사매도 이제 제법 여자 태가 나겠습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에센이 히죽 히죽 웃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소성주는 내 딸을 전에 본 적이 있겠군.”

강진남은 자신의 둘째 딸과 이 오이라트의 떠버리 후계자가 구면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게 삼 년 전이었지요. 사모님이 사부님을 뵈러 왔을 때 데리고 왔었으니까요.”

안하무인이던 방금 전과 달리 에센은 강진남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말했다.

에센의 사부와 강미루가 사부로 모신 여기인은 부부지간이다.

그 때문에 에센은 강미루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물론 에센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 강미루는 아직 철없는 어린 소녀였었다.

이실직고 하자면 제가 이번에 밀사를 자처한 이유 중 하나도 미루사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지요.”

에센이 다시 강진남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강진남의 둘째 딸이 절세미녀라는 소문이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린지는 이미 오래다.

대려장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있고 해서 무림의 수많은 청년들이 강미루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누구보다 혈기방장한 에센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만 강미루가 사모의 제자이기도 해서 무례하게 수작을 붙여볼 엄두는 내지 못해왔었다.

모든 일에 거리낌이 없는 에센이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가 바로 사모다.

그러던 중 아버지 토곤이 대려장으로 밀사를 보낸다고 하자 냉큼 자원을 했었다. 님도 보고 뽕도 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하지만 에센의 기대는 강진남의 한 마디 말에 와르르 무너졌다.

소성주의 사부... 검왕(劍王)과 관련된 염문은 요즘도 심심치 않게 내 귀에 들리더군.”

바람둥이를 사부로 둔 너도 똑같은 인간 아니냐는 뜻이다.

 

***

 

강진남과 에센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탁은 백남빈에게 무황성을 향해 직진하지 말고 남쪽으로 내려가 요서 일대에서 가장 큰 항구인 진황도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가라고 지시했었다.

거리로 따지자면 배 이상 멀리 돌아가는 길이지만 신랑성과 대려장의 추격을 따돌릴 가능성이 높은 행로다.

다만 같은 생각을 강진남도 했다는 게 문제다.

대려장주가 동북의 제갈량이라는 평판이 과장된 건 아니로군.”

백남빈은 남쪽으로 말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십여 리쯤 뒤쪽에서 흙먼지가 구름같이 일어나고 있는 게 보인다. 적게 잡아도 일백이 넘는 숫자의 기마대가 백남빈 자신을 추격해오고 있는 중이다.

대려장에서 쏟아져 나온 기마대는 수백기였지만 도중에 철령보의 기마대와 격돌하는 바람에 대 부분 발이 묶여 버렸다.

그래도 특히 발이 빠른 일단의 기마대는 철령보의 저지를 뚫고 남진하여 백남빈을 추격하는 중이다.

물론 백남빈이 대려장의 기마대에 따라잡힐 위험은 거의 없다. 사해검객이 준비해준 말이 철령보에서 으뜸가는 준마이기 때문이다.

십여 리나 간격이 있으니 진황도까지는 따라잡히지 않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꼬리를 달고 진황도에 도착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천진으로 가는 배를 수배하는 동안 대려장의 고수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을 리 없다.

(진황도에 도착하기 전에 대려장의 인간들을 따돌려야한다.)

백남빈은 진행방향의 우측, 즉 서쪽을 돌아보았다.

철령평야에서 발해만을 향해 비스듬히 뻗은 험준한 산맥이 오른쪽에 보인다. 요서주랑(遼西走廊)이라 불리는 장대한 협곡의 서쪽 면을 이루는 당산산맥(唐山山脈)이다.

일망무제한 평원에서 갑자기 솟구쳐 오른 탓에 당산산맥의 봉우리들은 실제 높이보다 훨씬 더 높고 험준하게 보인다.

(길은 좀 험하겠지만 요서주랑을 타는 대신 당산산맥을 횡단해서 진황도로 가자. 그 과정에서 귀찮은 파리들을 떨쳐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으니...)

두두두!

결심 한 즉시 백남빈은 말머리를 서쪽, 당산산맥을 향해 돌렸다.

대략 삼십여 리쯤을 달리면 당산산맥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 저 놈이 진로를 바꿨다.”

당산산맥으로 들어가서 우릴 따돌릴 생각이다.”

백남빈을 추격하던 대려장의 기마대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갑자기 백남빈이 서쪽으로 방향을 튼 것을 본 때문이다.

백남빈이 달려가는 서쪽에는 지는 해를 머리에 인 당산산맥이 그 거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곧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될 것이다.

만일 백남빈이 이대로 당산산맥으로 들어가 버리면 따라잡을 희망이 거의 없다.

박차를 가해라!”

저놈이 당산산맥의 산그늘에 들어가기 전에 따라붙어야한다!”

두두두! 히히힝!

대려장의 무사들은 아우성을 치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전력을 기울여 말을 몰아붙여도 십여 리쯤 되는 백남빈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만큼 백남빈이 타고 있는 말의 달리는 속도가 빠른 것이다.

... 이러다가 놓치고 말겠다!”

젠장! 저놈이 타고 가는 말이 우리들의 말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낭패한 심정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백남빈이 당산산맥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때였다.

에잇! 답답해서 더는 못 봐주겠다!”

대려장 기마대의 후미에서 갑자기 높고 날카로운 여자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해되니까 비켜!”

어이쿠!” “!”

히히힝! 두두두!

앙칼진 외침에 이어 무사들의 비명과 당황한 말들의 울부짖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기겁하며 돌아보는 선두의 무사들 눈에 칠흑같이 시커먼 그림자가 와락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놈은 먹물을 뒤집어쓴 듯 시커먼 흑마(黑馬)였다.

단순히 털만 검은 게 아니다.

흑마는 덩치가 보통의 말보다 배는 됨직하다.

낙타보다도 더 커 보이는 그 거대한 흑마의 등에는 날씬한 몸에 타는 듯 붉은 옷을 걸치고 죽립을 깊이 눌러쓴 기사(騎士)가 타고 있다.

흑마의 엄청난 체구에 비해 타고 있는 기사는 대려장의 다른 무사들보다 몸이 작고 가냘프다.

그 때문에 마치 고목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보이는 그 기사의 등에는 수십 자루의 화살을 공작의 꼬리처럼 펼쳐서 꽂은 화살통이 짊어져 있다.

또 기사는 허리에 단검에 가까운 짧은 검을 차고 있으며 말 안장 좌우에는 강철로 만든 철궁(鐵弓)과 긴 창이 한 자루씩 걸려 있다.

방해하지 말고 길이나 터!”

!

작고 날씬한 체구의 기사는 그때까지 깊이 눌러 쓰고 있던 죽립을 벗어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죽립을 벗자 드러나는 것은 두 뺨이 복숭아같이 발그레한 어여쁜 소녀의 얼굴이다.

... 작은 아가씨!”

... 이제 보니 저놈은 작은 아가씨의 애마 흑왕(黑王)이었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놀라면서도 환호성을 터트렸다.

 

갑자기 대열의 뒤쪽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흑마 위의 소녀는 바로 강진남의 둘째 딸 강미루였다.

유모 최씨의 추측대로 강미루는 새벽에 대려장을 빠져나온 기마대에 섞여 가출을 한 것이다.

강미루의 별호는 홍의창(紅衣槍)이다.

붉은 옷을 즐겨 입고 창술이 뛰어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성격이 타오르는 불같이 활달해서 붙여진 별호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인 강미루는 제법 오래 외출을 못해 답답하던 차에 원수같은 철령보에 대한 공격이 시도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기도 철령보의 공격에 참가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해봤자 들어주실 리 없다.

그래서 강미루는 죽립을 눌러쓴 채 몰래 기마대에 끼어든 것이다.

 

저 새끼는 내가 잡아버리겠어! 걸리적거리니까 전부 비켜!”

정체를 드러낸 강미루는 흑마에게 박차를 가하며 외쳤다.

히히힝! 화악!

거대한 흑마도 사납게 울부짖으며 질풍같이 앞으로 빠져나갔다.

대려장의 기마대는 물살처럼 갈라져 흑마에게 길을 내주었다.

낙타보다도 큰 이 거대한 흑마의 이름은 흑왕(黑王)이다.

흑왕은 요동평야의 모든 야생마들을 지배하던 말들의 왕이었는데 강진남의 사위가 사흘 밤낮을 추격한 끝에 사로잡아 길을 들였었다.

그 어떤 말보다도 천리마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흑왕의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물살처럼 갈라지는 대려장의 다른 말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흑왕은 한 줄기 검은 선으로 변해 당산산맥의 산그늘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덧 해가 당산산맥 너머로 지고 있다.

그와 함께 백남빈도 산그늘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십여 리만 더 달리면 당산산맥의 험준한 산중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럭저럭 대려장의 추격은 떨쳐버릴 수 있겠구나.)

백남빈은 가까워지는 당산산맥의 산봉우리들을 보며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숨을 곳이 없는 평야와 달리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당산산맥에서는 은신처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오싹!

백남빈은 냉수를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확 돋는 것을 느꼈다.

(위험...)

!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는 동시에 화살 하나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히히힝!

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도 거의 동시였다. 몸을 앞으로 확 숙인 백남빈의 머리 위로 지나간 화살이 말의 목 옆을 스치며 가볍지 않은 상처를 냈다.

만일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백남빈은 그 화살에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백남빈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신명안이라는 남다른 능력이 미리 살기를 감지해준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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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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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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