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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요동치는 정세

 

 

강미루의 부축을 받으며 오두막으로 돌아온 백남빈은 그녀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강미루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강미루는 다시 입을 맞추려고 내미는 백남빈의 입에 불쑥 과일을 갖다 대었다.

백남빈이 말없이 웃으며 과일을 받아먹었다.

상큼한 즙과 함께 과육이 녹듯이 넘어가 버렸다.

(잘 익은 감과 비슷한 맛이로구나.)

백남빈은 과일을 하나 더 집어 입에 가져갔다. 왕성한 식욕이 그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말해준다.

게걸스럽게 과일을 먹던 백남빈은 과일 하나를 집어 그때까지 미소를 띤 채 보고만 있는 강미루에게 건네주었다.

강미루도 그제야 과일을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두 사람의 상처는 놀라울 만치 회복이 빨랐다.

백남빈의 허벅지 상처는 온천에서 나왔을 무렵에 벌써 아물고 있었고, 강미루의 상처도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

 

백남빈과 강미루가 창평곡에서 청춘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신랑성의 도발은 시작되고 있었다.

토곤이 신랑성으로 하여금 오이라트 기마군단의 남침을 위한 통로의 개척을 명령한 것이다.

대규모의 기마군단이 만리장성을 넘으려면 장애물의 제거가 선결되어야만 한다.

신랑성의 고수들은 하북(河北)과 산서(山西)의 몇 군데 요충지를 목표로 쇄도해왔다.

만리장성 일대를 지키고 있던 명나라 군대가 저지에 나섰지만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인 신랑성의 정예들을 막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명나라 군부는 무황성에 지원을 요청했다.

무황성이 북경 북쪽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였으며 지금까지는 매번 몽고의 침공을 저지하는데 성공해왔었다.

하지만 지금의 무황성은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황성의 당대 성주 주진충은 오래전부터 무황성 깊은 곳에 은거한 채 무림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다.

대신 주진충의 두 번째 부인인 국조미랑 왕소군이 무황성을 관장해오고 있다.

하지만 왕소군은 무황성 상하(上下)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인지라 대국적인 안목이 없는데다가 측근들만 중용하고 방탕하여 무황성의 화합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실정으로 인해 무황성의 강대한 힘은 결집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신랑성으로서는 더 할 나위없는 좋은 기회였다.

토곤이 전면적인 중원 침공을 시도하게 된 데에는 무황성의 쇠락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무황성으로서는 명나라 군부의 지원요청을 받았으니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능력과 상관없이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를 듯한 왕소군은 신랑성과의 일전불사를 외치며 각처의 분타에 명령을 내렸다.

이에 하북과 산서성의 각지에서 신랑성과 무황성의 고수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격화되면서 왕소군은 은거 중인 남편 주진충을 찾아가 대책을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한마디만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그대가 알아서 하라."

 

***

 

-유우겸(劉盂兼)!

 

육순에 접어든 그는 진정한 의인(義人)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국조미랑 왕소군의 지도력 부재와 방탕으로 인해 무너지려는 무황성을 애써 지탱하고 있는 것이 의열전(義烈殿)의 전주인 유우겸이었다.

의열전은 중원 밖의 세력들을 상대하기 위해 설치된 무황성의 가장 강력한 조직이다. 철령보도 공식적으로는 의열전에 속해 있을 정도다.

왕소군은 그 철령보로부터 날아든 전서구의 내용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의열전을 맡고 있는 유우겸은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독안룡 이탁의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자신의 권한 내에서 하북과 산서 일대의 분타에 경계령을 발동했다.

그 덕분에 만리장성을 뚫고 내려온 신랑성의 세력을 하북과 산서의 분타들이 제 때 요격할 수 있었다.

비록 의열전주 유우겸의 힘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무황성의 대세를 주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무황성에서 중원 내부를 관장하는 조직인 군림전(君臨殿)의 전주 예운림(睿雲林)이란 자가 야욕을 품고 왕소군을 방조하고 있는 때문이다.

 

근래 들어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유우겸은 의열전의 태사의에 깊이 몸을 묻고 있었다.

몸이 묻힌 만큼이나 그의 고심의 깊이도 깊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신랑성과 정면으로 맞선다면 우리 무황성은 기필코 패배하고 만다."

유우겸이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였다.

스으!

그의 뒤로 백의의 문사 차림인 중년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유전주, 꼭 그렇지 만도 않소이다."

갑작스런 백의문사의 등장이지만 유우겸은 알고 있었다는 듯 태사의에 더욱 깊이 몸을 묻었다.

"남궁대협(南宮大俠)! 군림전주 예운림의 숨겨진 힘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오?"

유우겸의 말에 남궁대협이라 불린 백의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무황성의 쟁쟁한 인물들치고 자기 세력을 암암리에 키워 오지 않은 자가 없지 않소이까?"

백의문사의 말을 들은 유우겸은 탄식했다.

"세상에 알려진 무황성의 힘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노부가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외세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그 누가 앞장서서 자신의 힘을 소비하려 들겠소?"

"사실이 그렇긴 하오. 그래도 무황이 검을 높이 들기만 하면 무황성의 모든 힘이 다시 결집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역시 무황과 그의 후처인 국조미랑 왕소군이오."

백의문사의 말을 받아 유우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남궁대협. 노부의 집안은 대대로 무황성에 충성을 바쳐왔소. 노부는 감히 성주와 주모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소이다."

"무황성의 충신인 유전주의 입장은 이해하오."

백의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우겸은 자세를 바로 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방도를 강구하지 않을 수는 없소. 남궁대협께서 노부를 도와주기만 하신다면 토곤의 야심을 꺾을 가능성은 충분하오."

 

무황성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유우겸과 백의문사의 밀담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헌데 남궁대협이라고 불린 백의문사는 대체 누구이기에 무황성의 기둥인 의열전 전주가 이토록 의지하고 있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

 

창평곡의 아침은 푸른색 온천수로 채워져 있는 연못 녹지(綠池)에 반사된 햇살에 서쪽 절벽이 아롱지며 시작된다.

흑왕은 언제 일어났는지 남쪽의 풀밭에서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었다.

백남빈은 나른한 몸을 일으키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맞은편 구석에는 강미루가 고개를 백남빈쪽으로 돌린 채 곤히 자고 있었다.

누추한 차림도 선녀같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하지는 못한다.

가슴이 뜨거워진 백남빈이 상아같은 뺨에 살짝 입술을 대자 강미루의 얼굴에 봄 햇살 같은 미소가 번진다.

그러면서도 피곤했는지 쉽사리 깨어나지는 못하는 강미루다.

 

"정말 세상 밖에 서야만 세상을 잊게 되는구나."

혼자 오두막 밖으로 나선 백남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창평곡의 아침은 세외선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화창한 날씨에 아름다운 계곡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속의 모든 욕심을 잊게 한다.

“아아아!”

기분이 고조된 백남빈은 크게 한소리를 외쳤다.

그러자 북쪽 숲에서는 새들이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고성에 놀라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

 

백남빈의 고함을 들은 것은 비단 새들만이 아니었다.

(내공의 바탕이 반석(盤石)같은 자다.)

신가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용의 울부짖음 같은 고함을 듣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거리가 먼 때문인지, 아니면 진법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방금 전의 장소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내공이 심후한 신가람을 제외하면 계곡 밖에 대기하고 있는 대려장 무사들 중 누구도 그 고함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록 소리는 작게 들렸지만 지축이 순간적으로 흔들 하는 것을 신가람은 감지했다.

마치 항아리같은 지형인 창평곡의 특성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신가람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고함 소리 한 번에 지축을 뒤흔드는 힘을 지닌 인간이 존재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사형(大師兄)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신가람은 오래 전부터 연락이 끊긴 한 인물을 떠올렸다.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그 인물이라면 방금 전에 느꼈던 것보다 몇 배 더 강력한 진동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직 치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젊은 놈의 장소성이었으니 대사형은 아니다.)

신가람은 고함이 들려온 쪽을 가늠하며 미간을 모았다.

철부지 처제가 실종된 근처에 젊은 사내놈이 함께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점이 신가람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신가람이 파진을 시도한 후로 이미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신가람은 미혼진을 칠할 넘게 파진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진법에 빠져 실종되었던 네 명의 대려장 무사들을 발견했다.

네 명중 둘은 탈진한 상태로 발견되었지만 두 명은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공포에 질려 들고 뛰다가 바위에 부딪히고 절벽에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방금 전의 고함 덕분에 진행 방향을 확인할 수 있어서 미혼진의 파진이 좀 더 쉽게 되었다.)

닷새 넘게 깎지 않은 수염으로 덥수룩해진 턱을 만지며 신가람은 걸음을 옮겼다.

백남빈이 지른 고함이 신가람에게는 지남철(指南鐵)의 역할을 해준 것이다.

 

그리하여 신가람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지난 닷새 동안 자신을 곤혹하게 만들었던 미혼진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미혼진을 벗어나자 전혀 다른 진법이 또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매망량(魑鬽魍魎)들이 사방에서 신가람을 위협하며 덮쳐들었다.

미혼진에 이어 산백진(散魄陣)이 신가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삐익!"

한 차례 고함을 지른 후 백남빈은 휘파람을 불어 흑왕을 불렀다.

그리고는 껑충거리며 다가온 흑왕을 타고 그리 넓지 않은 분지를 신바람 나게 몇 바퀴 돌았다.

흑왕과의 아침 산책은 상처가 완쾌된 이후로 매일같이 행하는 일과였다.

 

곤히 잠들었던 강미루도 백남빈의 고함소리에 깨어났다.

서둘러 녹지로 가서 세수를 한 그녀는 가지가지의 과일을 꺼내어 돌탁자 위에 놓았다.

때맞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오두막으로 들어온 백남빈이 탁자 앞에 앉았다.

이곳 창평곡은 아무래도 너무 따뜻해서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땀이 나곤했다.

"잘 잤어요 아름다운 아가씨?"

백남빈이 친근감을 표시하며 아침인사를 했다. 창평곡에 들어오기 전의 백남빈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능글맞은 수작이다.

"네! 공자님!"

하지만 강미루는 조금도 민망해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엿새간 두 사람은 부부처럼 지내왔다.

서로를 전적으로 의지했고 서로가 없으면 단 한시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렇긴 해도 두 사람은 마지막 일선만은 지켰다.

비록 한 지붕 아래 몸을 눕히는 사이가 되었지만 가벼운 애정표현 이상은 하지 않아온 것이다.

 

과일로 아침을 대신하고 두 사람은 동쪽절벽으로 갔다.

동쪽절벽은 백남빈이 내려왔던 곳이다.

당연히 나가는 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동안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었다.

하지만 끝내 길같은 것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곳에 출로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백남빈이었다.

한참 동안 바위들 사이로 이리저리 돌아보고 두드려 보고 하다가 지친 두 사람은 적당한 바위에 앉아 땀을 식혔다.

나무의 질긴 속껍질로 묶은 강미루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때마다 일렁거려서 그림자가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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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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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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