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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괴수대전

 

 

한 차례 기세 좋게 쏟아지던 폭우는 언제였냐는 듯 거짓말처럼 멎었고 구름 사이로 눈부신 태양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야호!”

쐐애액!

비가 온 후라 더욱 강렬해진 햇살 속에서 한 줄기 인영이 낭랑한 외침과 함께 깎아지른 절벽 아래쪽에서 솟구쳐 올랐다.

쏴아아!

천야만야한 절벽을 평지처럼 차고 올라온 그 인영은 곤륜의 험봉들 위로 바람같이 날아갔다.

사자의 갈기같이 휘날리는 탐스러운 머릿결과 건강하고 탄력 있는 구리빛 피부를 지닌 소년!

물론 그는 이검한이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절로 잡아끄는 그의 잘 생기고 호쾌한 인상의 얼굴에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이검한은 장춘곡에서 삼백 리 이상 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높고 험한 곤륜산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몇 년이 가도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 이검한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사저인 냉약빙과 사부인 고독마야가 극진히 사랑해 주기는 하지만 이검한의 외로움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못했다.

겉보기에는 쾌활하고 활달했으나 정작 이검한의 마음은 늘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고독마야를 아주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신세인 이검한의 유일한 취미는 달리는 것이었다. 곤륜산의 장대한 산줄기를 따라 질풍처럼 달리다보면 어느덧 가슴 저미던 외로움도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군!”

이검한은 스쳐지나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천산과 함께 세상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곤륜산은 광활하기 이를 데 없다. 곤륜산의 곳곳을 달려본 이검한이지만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이검한은 자신이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달고 다시 고독애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구워어어억!

어디선가 한소리 괴성이 들려왔다.

(새의 울음소리인데...!)

갑자기 들려온 그 소리에 이검한은 흠칫했다. 방금 들린 날카로운 괴성은 어떤 거조(巨鳥)가 지른 것임이 분명했다.

(가 보자!)

스파앗!

다음 순간 이검한은 거의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새의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날아갔다.

 

***

 

크아아! 키아아악!

나무 한 그루 나있지 않은 황량한 계곡 끝에서 두 마리의 짐승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무대로 무시무시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놈들은 거대한 독수리와 기괴한 모습의 구렁이였다.

두 괴물 중 독수리는 온몸이 칠흑같이 검은 깃털로 덮여 있는데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무려 육장(五丈;18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다.

 

-철익신응(鐵翼神鷹)!

 

곤륜산맥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날개 달린 짐승들의 제왕이다.

철익신응은 천 년 이전부터 곤륜산 일대에서 꾸준히 목격되어왔다.

즉, 적어도 천 년 이상을 살아왔을 게 분명한 이 하늘의 제왕에게 대적할만한 적은 딱히 없다.

강철같은 발톱은 바위를 두부처럼 으깰 수 있으며 강력한 날개의 힘은 코끼리를 낚아 채 날아오를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곤륜산맥의 제왕으로 인정받아온 철익신응이건만 오늘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강적과 조우한 상태였다.

철익신응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이무기나 용이라고 해야 어울릴 거대한 구렁이였다.

몸통의 굵기가 한 아름이 넘고 길이는 무려 십여 장에 이르는 대망(大蟒;큰 구렁이. 이무기)인데 배 부분에는 체구에 비해 작기는 하지만 여섯 개의 발까지 달려 있었다.

어느 정도 수련만 더 쌓으면 실제로 용이 되어 승천할 수도 있는 이 괴물의 몸뚱이는 강철인 듯 번들거리는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적린화룡(赤鱗火龍)!

 

용이 아님에도 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영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적린화룡은 땅 속 깊은 곳을 흐르는 화맥(火脈)의 열기를 흡수하며 승천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수천 년의 세월동안 화맥의 화기를 흡수해온 덕분에 적린화룡의 몸 속에는 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엄청난 열이 고여 있다.

그 때문에 적린화룡이 내뿜는 숨결에 섞여있는 열독(熱毒)은 무쇠를 얼음처럼 녹여버릴 정도로 뜨겁다.

무시무시한 열독을 지녔을 뿐 아니라 적린화룡의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은 강철보다 더 단단해서 도검이 불침한다. 화맥을 찾아 땅 속을 누비고 다니기 위해 무엇에도 손상을 입지 않는 강인한 비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단단한 비늘 때문에 적린화룡은 불사화망(不死火蟒)이라 불리기도 한다.

카아앙!

적린화룡은 섬뜩한 괴성을 내지르며 허공에 떠있는 철익신응을 향해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쩌어엉! 촤아아아!

그놈이 커다란 입을 벌려 숨을 토해내자 불그스름한 기운이 수십 장까지 확 내뻗쳤다. 적린화룡이 몸속에 품고 있는 열독이 숨결을 따라 분사되는 것이다.

무쇠를 녹일 정도로 뜨거운 그 열독에 정통으로 휩쓸린다면 제 아무리 곤륜산맥의 제왕이라는 철익신응이라 해도 숯덩이가 되고 말 것이다.

카아악! 화악!

도리 없이 철익신응은 다급히 날개 짓을 해서 적린화룡이 뿜어내는 열독을 피해냈다.

하지만 철익신응의 깃털은 이미 상당 분량이 열독에 스쳐 시커멓게 그슬려져 있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곤륜산의 하늘을 지배해온 제왕답지 않게 낭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지경이 되었으면서도 철익신응은 호시탐탐 적린화룡을 노리며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저 괴물들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계곡 한쪽의 절벽 위에 멈춰 선 이검한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검한은 냉약빙이 구해다 준 고서들을 통해 적린화룡에 대해 알고 있었다.

또 곤륜산맥의 뭇 짐승들을 지배하고 있는 철익신응이 날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몇 번 본 적도 있었다.

지금 그 두 영물이 이검한 자신의 눈앞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장내를 일별한 이검한은 철익신응이 불리한 싸움을 하면서도 이 계곡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검한이 서있는 곳과 맞은 편인 절벽 가운데에는 거대한 새둥지가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어지간한 초가집만한 그 둥지 안에는 보송보송한 솜털에 싸인 새끼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서 두 눈을 동그랗게 치뜬 채 장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록 어리다고는 하지만 크기가 송아지만한 그 새끼 독수리는 바로 철익신응의 새끼였다.

철익신응이 수백 년 만에 겨우 얻은 그 새끼를 적린화룡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땅속 화맥의 화기를 흡수하며 살아온 적린화룡이지만 가끔은 배를 채운 먹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적린화룡은 철익신응의 새끼를 노리고 둥지로 접근해 온 것이고 철익신응은 필사적으로 그놈을 저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적린화룡 쪽이 유리했다.

카아아! 화아악!

적린화룡은 연신 지독한 열독을 방사하여 철익신응을 위협하며 슬금슬금 둥지가 있는 절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오래지 않아 적린화룡은 둥지에 이르러 철익신응의 새끼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나쁜 놈이로군!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남의 귀한 자식을 잡아먹으려 들다니...!)

상황을 파악한 이검한은 분노가 치밀었다.

비록 약육강식이 자연의 철칙이라고는 하지만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의 새끼를 노리는 적린화룡의 만행은 두고 볼 수가 없다.

(철익신응을 도와주자!)

이검한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러나 상대는 도검불침의 괴물인 적린화룡이다. 어떻게 해야 놈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 적린화룡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이검한은 장내를 돌아보며 염두를 굴렸다.

(일단 적린화룡의 주의를 분산시켜보자. 그럼 철익신응이 그 틈에 공격을 해서 적린화룡은 물리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검한은 바닥에서 몇 개의 돌을 집어 들었다.

쐐액!

직후 이검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장내로 날아들고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이검한은 질풍같이 적린화룡의 옆을 스치며 그놈의 머리통을 노리고 돌을 던졌다.

터어엉!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이검한이 던진 돌이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정통으로 때렸다.

비록 그 일격이 큰 타격을 주지 못했으나 적린화룡의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카아아아! 화악!

돌 조각에 머리를 맞자 분노한 적린화룡은 자신의 옆을 질풍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검한을 향해 열독을 토해냈다.

물론 그것에 휩쓸릴 이검한이 아니었다.

“하하! 여기다 이 바보야!”

쐐액! 텅!

이검한은 유령같이 휘돌며 재차 돌을 던져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맞추었다.

크아아앙!

두 번이나 연달아 이검한에게 우롱당한 적린화룡은 사나운 괴성을 토하며 발광했다.

마침내 그놈은 공격 대상을 철익신응에서 이검한으로 바꾸었다.

촤촤촤! 쏴아아아!

적린화룡은 거구를 끌고 이검한을 뒤쫓으며 시뻘건 열독을 연신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잠시 영문을 몰라 하던 철익신응은 이내 이검한이 자신을 도와주려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쐐애애액!

다음 순간 철익신응은 이검한을 쫓아가느라 주의가 분산된 적린화룡은 향해 벼락같이 내리 꽃혔다.

적린화룡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콰드드득!

철익신응의 강철같은 발톱이 그대로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카오오오!

바위도 간단히 으깨버리는 철익신응의 무시무시한 발톱에 찍혀 두 눈이 으깨져버린 적린화룡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렸다.

그러나 저항해보기에는 이미 늦었다.

키아아악! 쏴아아아!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쥔 철익신응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머리통을 잡힌 이상 적린화룡의 열독도 더 이상 철익신응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순식간에 철익신응은 적린화룡의 거대한 몸뚱이를 움켜쥐고 수백 장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까마득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철익신응은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있던 발톱을 풀어 버렸다.

쾅!

잠시 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적린화룡의 거구는 계곡의 바닥에 팽개쳐졌다.

길이가 십여 장이나 되는 적린화룡의 몸뚱이가 처박힌 충격은 엄청났다.

우두두두!

지축이 뒤흔들리고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의 바닥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수백 장 높이에서 떨어진 적린화룡은 벌린 입으로 내장과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제 아무리 그놈의 몸뚱이가 도검불침이라 해도 까마득한 허공에서 떨어진 충격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워낙 껍질이 질기고 단단하여 겉보기엔 멀쩡했으나 적린화룡의 내장과 척추는 박살이 나 버린 상태였다.

“휴우, 정말 끔찍한 놈이로군!”

스스스!

이검한은 숨이 끊어진 적린화룡의 시체 옆으로 내려서며 혀를 내둘렀다.

죽어 널부러진 적린화룡의 몸뚱이는 굵기가 한 아름이 넘고 길이는 무려 십여 장에 달했다. 그 때문에 계곡 바닥에 작은 둔덕이 하나 새로 생겨난 듯이 보였다.

(저것은...!)

헌데 적린화룡의 시체를 살피던 이검한은 두 눈을 번득 빛냈다.

츠츠츠!

내장과 피를 토하고 죽은 적린화룡의 아가리 부분에서 무엇인가가 불그스름한 화광(火光)을 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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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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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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