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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겁난(劫難) 중의 인연 (2)

 

 

한동안 미친 듯이 사방을 뒤지던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다시 모옥 앞으로 왔다.

그들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처리하도록 하게.”

철선동시가 말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는 마면혈도가 주섬주섬 바지를 끼워 입고 모옥에 불을 질렀다.

곧 불꽃이 일렁이며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투타탁! 투탁!

불속에서 뭔가가 불에 타면서 튀는 소리가 들린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뒤통수에 대고 음산한 어조로 내뱉었다.

이곳도 결국 안전한 곳이 못되는군.”

그래, 모두 내 탓이다. 내 탓...”

마면혈도는 화난 목소리로 버럭 소리치며 계곡의 입구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마면혈도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철선동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섬뜩하게 웃었다.

말대가리... 아직 멀었다. 네놈의 심력(心力)은 좀 더 소모되어야 한다. 흐흐흐... 몽선도(夢仙圖)의 주인은 나 혼자로 족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마황이 뭐 무서울 것이 있겠는가?”

몽선도...!

몽선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기에 그것을 얻기만 하면 그토록 무서워하던 마황도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지금 철선동시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는 욕심과 음모의 근원은 몽선도란 것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불측한 의도를 품고 있는 철선동시도 걸음을 옮겨 비련곡을 빠져 나갔다.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자가 혹시 불빛을 보고 찾아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만사휴의다.

철선동시는 불타는 모옥이 만든 자신의 긴 그림자를 밟고 곡구에 다다랐다.

화를 내며 먼저 갔던 마면혈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징검다리처럼 줄지어 있는 바위섬들을 밟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는구나.”

임청우는 불꽃을 보면서 꿈결인 듯 중얼거렸다.

악귀에게 유린당한 어머니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고, 집은 불타고 있으며, 이제 자신은 농산을 떠나야한다.

임청우 모자가 이곳에서 살았던 흔적은 모옥 앞 초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과 약초들뿐이다.

애잔한 아쉬움이 임청우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지만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슬프지 않은 것은 이미 그녀와의 정이 오래전에 끊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세속에서 말하는 정 같은 것은 원래부터 임청우에게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임청우는 고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 그의 귓속으로 마치 천둥이 울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불은 네가 질렀느냐?”

임청우는 이같은 음성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크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

그러나 위엄으로 가득 차있으며 은연중에 사람을 압도해 버리는 음성이었다.

한 번 듣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멍하니 서있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불은 네가 놓았느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와서야 임청우는 엇!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앞에 육척이 넘는 장대한 체구를 지닌 노인이 서있었다. 머리는 반백이고 네모 난 얼굴에는 짧게 깎은 수염이 은빛을 발한다.

으악!”

노인의 눈을 보는 순간 임청우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고 말았다. 노인의 눈은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강렬한 광채를 뿜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노인의 전신에서 풍기는 위엄은 절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기에 족했다. 노인의 어깨에 걸려있는 장검조차도 주인의 위풍에 의해 있는 둥 마는 둥하다.

노인은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으로 비틀거리는 임청우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따뜻한 기운이 노인의 커다란 손에서 흘러나와 임청우의 손목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임청우는 떨리던 몸과 마음이 함께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러나 감히 노인의 눈을 다시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한데 임청우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노인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놈...!)

노인은 마음속의 커다란 놀라움을 다스리지 못하고 급히 다른 손으로 임청우의 어깨를 만져보았다.

(천골(天骨)이로다!)

임청우의 골격을 만져보는 노인의 눈에 놀라움과 흥분의 빛이 떠올랐다.

임청우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골격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강호를 주유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보아온 노인조차 임청우만한 골격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게다가 임청우의 몸에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다.

말 그대로 갈지 않은 원석인 셈이다.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왔지만 내가 아주 복이 없지는 않구나.)

임청우의 골격을 어루만지고 몸을 살펴보면서 노인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생각지도 않게 기막힌 보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때 임청우가 용기를 내어 노인을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노야(老爺)께서는 낮에 길게 소리쳤던 그분이십니까?”

길게 소리를 쳐? !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말이로군.”

검주 유소기요?”

허허허. 무림칠절(武林七絶)의 우두머리인 뛰어난 인물이지!”

노인은 진심으로 찬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고 노부는 노부다. 노부는 그렇게 큰소리를 지르진 않아. 실상 지르지도 못하지만...!”

노인은 웃으면서 임청우의 손을 놓고 절벽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임청우는 마치 자석에 끌리기라도 한 듯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는 네 집이냐?”

노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노인의 음성은 마치 사방의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 아니면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듯하다고 생각하며 임청우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노인은 멀리 어둠 속에 보이는 산봉과 그 위의 하늘을 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곳이군. 이곳에 이름이 있느냐?”

어머니께서 비련곡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비련곡?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야. 자당(慈堂)은 아마도 한이 많으셨던 분인 모양이군.”

“...”

자당은 어디 계시는가?”

노인이 임청우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임청우는 말없이 절벽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노인은 흠칫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임청우도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있기만 했다.

노인 옆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임청우는 말로 형용하지 못할 기묘한 기쁨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폭염 중에 쏟아지는 소나기의 청량감 같기도 했다.

그렇게 반 시진 가량이 지나갔다.

시간은 어느덧 자시(子時)를 훨씬 넘어 인시(寅時)가 되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오연히 고개를 들고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노부는 우협(愚俠) 장백승(莊百勝)이라고 한다.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임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별호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리석은 협객이라니...

우협 장백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무림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느냐?”

이번에도 임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무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그인지라 이 노인이 저 일왕(一王) 금포염왕과 비견되는 일세고수 일협(一俠)임을 알 리 없었다.

무림의 은원 때문에 환난을 겪은 것 같거늘 무림을 모른다?”

장백승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함께 살 가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임청우가 대답했다.

노인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노부를 따라가지 않겠느냐?”

저는 노야가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사람의 대장부로서 남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그럼 노부의 제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느냐?”

대화가 여러 차례 오가게 되자 임청우는 느긋한 마음을 회복하고 웃으며 물었다.

노야께선 제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검술(劒術)이다.”

장백승이 짊어지고 있던 검을 풀어서 내리며 말했다.

무사들이 사용하는 그런 검술입니까?”

비슷하지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한번 보겠느냐?”

노야께 제가 검술을 배운다면 말대가리같이 생긴 자를 이길 수 있습니까?”

임청우는 혈도를 휘두르던 마면혈도의 공포스런 모습을 생각하며 물었다.

장백승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마면혈도를 만났구나! 그놈은 어디에 있느냐?”

얼마 전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노야께선 제 물음에 대답해 주십시오.”

장백승은 곡구를 힐끗 보다가 탄식하고 말했다.

마면혈도... 그놈의 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구나. 이번엔 반드시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건만...”

그는 임청우가 여전히 자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고 말을 이었다.

당금의 무림에는 최절정으로 꼽히는 열 두 명의 고수가 있지. 그들을 사람들은 일왕(一王) 일협(一俠) 삼괴(三怪) 칠절(七絶)이라 부른다.”

임청우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장백승의 말에 빨려 들어갔다.

네가 만난 마면혈도는 삼괴의 둘째로 무공이 극히 고강하다. 당금의 무림에서 그놈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열손가락에 꼽히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너는 노부의 검술을 배워서는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 노부라 하더라도 그놈을 이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

임청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장백승을 보았다.

무공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장백승의 기도는 마면혈도 따위가 비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장백승이 태양이라면 마면혈도는 반딧불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장백승이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니...

장백승은 이어서 말했다.

아니, 노부는 마면혈도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긴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노야께선 함자를 <백승(百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이런 경우를 들어서 허명(虛名)이라고 하는 것이지. 백승은 이름뿐이야. 젊었을 때 노부를 가르치신 은사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

임청우가 다시 물었다.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유림(儒林)이라고 하는 것처럼 무림이라는 것은 무()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까?”

장백승이 그렇다고 끄덕이자 임청우는 또 물었다.

노야께서는 그 무림에서의 위치가 어떻습니까?”

장백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허명은 여기에도 있지. 일왕 일협 중의 일협이 바로 우협, 이 바보 늙은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임청우는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일왕 다음에 일컬어지는 일협이라면 당연히 그 무공의 강함도 측량하기가 어려울 것이 아닌가?

헌데 아무도 이긴 적이 없고 이길 수도 없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로 보아 마면혈도를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구나. 만약에 노부의 제자가 될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이걸 증표로 종적을 물으면 노부에게 안내해주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장백승은 풀어서 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검을 임청우의 손에 쥐어주었다.

별 장식이 없는 평범한 청강검(靑鋼劒)인데 단지 손잡이 부분에 한 마리 포효하는 사자(獅子)가 투박하게 음각되어있는 것이 눈에 띌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노야!”

임청우가 장백승의 따스한 말에 감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우협 장백승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는 마치 신선처럼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장백승은 임청우가 빤히 지켜보고 있는 중에 홀홀히 밤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마치 백일몽(白日夢)을 꾼 것만 같았다. 손에 남겨져 있는 한 자루의 검이 아니라면 꿈을 꾼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리라.

그러나 장백승의 마치 천신(天神)같던 기도는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제 어디 가서 노야를 찾는단 말입니까.”

임청우는 장백승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물었다.

장백승이 사라진 밤하늘에는 별빛만이 더욱 초롱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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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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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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