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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다!

 

 

(누군가의 시선이 줄곧 날 따라오고 있는 것같다.)

금릉으로 향하는 관도를 가고 있는 강유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숭산에서 안탕산으로 가려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강유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동쪽으로 멀리 우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끈적한 시선이 등봉현의 객잔을 떠난 직후부터 집요하게 따라붙고 있었던 것이다.

(고불참회기를 읽은 후로 내가 너무 예민해진 것일까?)

강유는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살펴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그가 가고 있는 관도에는 제법 행인이 많다. 강유처럼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마차나 말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 딱히 의심 가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단순히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으로 돌리기에는 느껴지는 시선이 너무도 집요하고 확실하다.)

이마를 찡그리는 강유의 백보 쯤 앞쪽에 주점이 하나 보였다.

경치 좋은 강가에 위치해서인지 제법 많은 손님들이 주점을 드나들고 있었다.

(분명 날 감시하는 자가 있다. 다만 내 능력으로는 탐지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어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이고...)

강유는 생각에 잠겨 주점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쌍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게 느껴진다.

(어쩌면 달마독명안을 외운 덕분에 감각이 예민해져서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저 시선을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불선사는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암기한 후 태워버리라고 고불참회기에 적어놓았었다.

고불선사의 당부에 따르기 위해 강유는 밤새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을 외웠었다.

그 과정에서 강유는 달마독명안의 이치를 일부 깨닫게 되었다.

달마독명안은 육신통에 필적하는 경이적인 능력이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자 강유의 감각은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눈과 귀가 몇 배나 밝아진 것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던 것까지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유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맛보기도 이 정도인데 달마독명안을 온전히 구사하게 되면 정말 신통력을 발휘하는 셈이 되겠구나.)

강유가 달마독명안의 힘에 새삼 감탄하며 주점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냐?”

갑자기 주점에서 터져 나온 고함 소리에 관도를 오가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지나치려던 강유도 걸음을 멈추며 문이 열려 있는 주점 안쪽을 돌아보았다.

누굴 눈 뜬 장님으로 아는 거냐? 이 따위 유리조각으로 사기를 치려하고?”

주점 입구의 계산대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누군가에게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그자의 왼손에는 자두 씨만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들려 있고 오른손에는 식칼이 쥐어져 있다.

탐욕스러운 인상의 주점 주인과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서있는 인물은 늘씬한 체형의 여자였다.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들었지만 별 장식이 없는 수수한 옷을 입은 그 여자는 바로 황금성의 성주인 진상파였다.

 

지난 밤 진상파는 들키지 않고 황금성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었던 것이다.

태어난 이래 돈을 주고 뭔가를 사본 적이 없는 진상파다.

당연히 돈을 갖고 다닐 이유와 필요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날이 밝고 허기가 지면서 진상파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어려움에 처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제왕성이 자리한 태산에서 황금성이 있는 금릉까지 가려면 열흘 가까이 걸린다.

그동안 먹고 자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현실적인 해결 방법은 가까운 황금성의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제왕성의 인간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황금성 지점에 들렸다가는 간단히 사로잡혀 제왕성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결국 진상파는 황금성 지점을 찾아가는 건 포기하고 무작정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었다.

그러다가 허기를 참지 못하고 이 주점에 들어와 국수를 한 그릇 사먹게 되었다.

지닌 돈은 없지만 끼고 있는 반지로 값을 치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끼고 있던 반지가 도저히 진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뭐 이게 금강석(金剛石)이라고? 개 풀 뜯는 소리 하지 마라.”

주인은 왼손으로 쥔 반지를 진상파 얼굴에 들이밀며 눈을 부라렸다.

진상파는 그자의 무례함에 극도로 불쾌해졌지만 즉각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점원들 뿐 아니라 주점 안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느껴져 숨이 턱 막힌 탓이다.

이런 수모와 난감한 상황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진상파였다.

이만한 크기의 금강석이면 비옥한 땅 수만 평을 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길바닥 장사치인 나도 안다. 헌데 겨우 국수 한 그릇 먹은 값을 이걸로 치르겠다고?”

탕탕!

주인은 식칼로 계산대를 연신 내리쳐서 흠집을 내며 진상파를 윽박질렀다.

(귀티 나 보이는 여자인데 돈 없이 국수 한 그릇 먹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흥미가 생긴 강유는 걸음을 멈춘 채 일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의 성격상 타인의 곤경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한다.

하물며 수모를 당하고 있는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하게 자란 태가 난다.

강유는 그 여자에게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사이에 주점 주인의 패악질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돈이 없다고 말했으면 그깟 국수 한 그릇 그냥 말아줄 수도 있었어. 그런데 뻔뻔하게 사기를 치려고 해서 날 열 받게 해?”

주인은 눈을 부라리며 식칼을 진상파의 면전에 대고 흔들었다.

... 저런...”

주인이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군.”

저러다 사고치지.”

보고 있던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눈치 빠른 손님들은 주인이 진상파를 지나칠 정도로 거칠게 대하는 이유를 짐작하고 혀를 찼다.

진상파를 협박하면서도 주인의 툭 튀어나온 눈알이 수시로 진상파의 몸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난생 처음 보는 절세미녀인 진상파에게 엉큼한 속셈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요. 그게 금강석이 아니라고 쳐요.”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와 살기를 억지로 누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지의 고리를 이루는 금의 무게만도 두 돈이 넘으니 국수 한 그릇 값으로는 충분하고도 넘칠 거예요.”

진상파는 주인이 쳐든 반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도도하게 말했다.

주인도 장사치인지라 반지의 고리가 금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상파에게 엉큼한 마음을 먹고 있는 터라 기세를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 보자보자 하니까 이젠 구리를 금이라고 속이려 들어?”

그자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식칼을 쳐들어 진상파를 내려칠 듯이 위협했다.

진상파를 겁에 질리게 만들어서 자신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게 할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다.

하지만 그자의 의도와 달리 진상파는 미간은 찡그리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대신 보고 있던 주점 안의 손님들 일부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오냐! 네년이 언제까지 뻣뻣하게 굴 수 있는지 보자!)

주인이 독이 올라 식칼을 진상파의 목에 대려고 할 때였다.

!

그자의 칼 든 손목을 움켜잡는 강철 족쇄같은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뭐야?”

주인은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오만상을 쓰며 돌아보았다.

진상파도 흠칫 하며 주인의 손목을 틀어쥔 인물을 돌아보았다.

그만하시오 주인장. 분풀이치고는 도가 지나치지 않소?”

칼 든 주인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엄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은 강유였다.

그가 보다 못해 개입한 것이다.

당신 누군데... 어흑!”

강유에게 눈을 부라리며 잡힌 손목을 뽑아내려던 주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둑!

강유가 주인의 손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가한 것이다.

(... 무림인!)

주인은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와락 겁에 질렸다.

눈치 빠른 장사치답게 그자는 강유가 범상치 않은 무공을 지닌 무림인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분 소저께서 드신 음식 값은 내가 대신 내겠소. 그러니 그냥 보내드리시오.”

강유는 주인의 손을 놔주며 말했다.

이봐요! 귀하가 끼어들 일이 아니에요.”

보고 있던 진상파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남에게 신세를 져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진상파인지라 강유의 개입이 고맙기보다는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도 마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니 이걸로 이분 소저의 식대를 함께 계산하시오.”

찰랑!

강유는 진상파의 말은 무시하고 몇 개의 동전을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 그렇게 합죠. 식사는 뭘로 준비해드릴깝쇼?”

촤락!

주인은 급히 동전 쓸어서 챙기며 강유의 눈치를 보았다.

길을 서둘러야하니 가장 빨리 되는 것으로 준비해주시오.”

강유는 고개를 돌려 주점 안의 빈자리를 찾으며 말했다.

일이 원만히 해결될 기미를 보이자 마음 졸이고 있던 손님들은 다시 먹고 마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요.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요.”

찰랑!

주인은 강유가 준 동전을 불룩한 아랫배에 찬 전대에 넣으며 돌아서려 했다.

!

그런 주인의 어깨를 강유의 손이 움켜잡았다.

...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

주인은 겁에 질려 강유의 눈치를 보며 돌아보았다.

이분 소저에게 돌려드릴 게 있지 않소?”

강유는 웃으면서 주인이 그때까지 왼손으로 들고 있던 반지를 보았다.

아이쿠 이런!”

주인은 짐짓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마빡을 쳤다.

국수 값은 받았으니 이 반지는 돌려드리겠소.”

그리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반지를 진상파에게 내밀었다.

강유 옆에 서있던 진상파는 불쾌한 표정으로 반지를 낚아챘다.

(아깝구만. 유리조각인지는 몰라도 예쁘장해서 마누라에게 주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주인은 입맛을 다시며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

받아요.”

진상파는 점원의 안내를 따라 빈자리로 가려는 강유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물 한 모금 얻어 마셨어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라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어요.”

소저! 나는...”

인정이니 선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요. 난 기필코 당신에게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니까요.”

진상파는 난감해하는 강유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저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국수 한 그릇 대접한 대가로 수만 냥짜리 반지를 받을 수는 없군요.”

강유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반지를 보았다.

귀하는 이 반지의 보석이...”

진상파는 눈썹 끝을 조금 올리며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강유를 보았다.

진품의 금강석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강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들어볼까요?”

강유에게 흥미가 생긴 진상파의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진상파는 지금껏 숱한 미남자와 귀공자들을 보아왔다.

그 때문에 느닷없이 끼어든 이 청년의 인상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키가 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해서 사내답게 느껴진다는 정도였었다.

그랬는데 강유의 말을 듣다 보니 점점 더 호기심이 생긴다.

소저 자체가 귀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진 강유의 그 말이 진상파의 고요하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내...)

진상파는 자신의 심장이 움찔하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보옥(寶玉)같은 귀인께서 한갓 유리조각 따위로 자신의 존엄을 흠집 내실 리가 있겠습니까?”

강유는 진상파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인물이다. 탁월한 지인지감(知人之鑑;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강유의 말을 들으며 진상파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영친께서 엄히 가르치셨다는 것은 알지만 소생의 사정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반지를 받게 되면 자칫 협기(俠氣)를 부리는 척 해서 이익을 챙겼다는 오해를 사지 않겠습니까?”

말씀하시는 뜻은 알지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고 고개를 숙이던 진상파의 눈에 자신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두 마리 용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반지인 쌍룡환(雙龍環)이다.

그 쌍룡환은 황실에서 나온 것이라며 구숙정이 가져다주었던 패물함을 뒤적이던 중 저절로 진상파의 손가락에 끼워졌었다.

(이거라면...)

진상파는 별 생각없이 오른손 중지에서 쌍룡환을 뽑았다.

원래 그녀는 쌍룡환으로 국수 값을 치르려 했었다.

하지만 제왕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쌍룡환은 좀처럼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았었다.

어쩔 수없이 왼손 중지에 끼고 있던 금강석 반지를 뽑아서 국수 한 그릇 값을 치르려다가 봉변을 당했었다.

!

헌데 이번에는 혹시 하며 뽑자 쌍룡환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손가락에서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조화람! 지금까지는 그렇게 안 빠지더니만...)

진상파는 의아해하면서 쌍룡환을 강유에게 내밀었다.

대신 이걸 드리겠어요.”

소저!”

우연히 갖고 있게 된 반지인데 보다시피 조악하여 그다지 값이 나가는 물건은 아니에요. 이것마저 거절하면 화내겠어요.”

진상파는 난감해하는 강유의 손에 쌍룡환을 억지로 쥐어주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라도 이 반지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절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강유는 어쩔 수 없이 쌍룡환을 받았다. 한 눈에 봐도 그리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이라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고명(高名)...?”

쌍룡환을 건네 준 진상파는 강유의 얼굴을 기억해두려는 듯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강유라고 합니다. 안탕산에 살고 있지요.”

진상파의 시선이 심상치 않게 느껴져서 강유는 얼굴이 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생각이 강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머니 냉상영이나 분이도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들이지만 눈앞의 이 도도한 인상의 여인에 비하면 처지는 면이 있다.

안탕산의 강유소협... 언제고 한번 안탕산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어요.”

강유의 이름을 되뇌이며 진상파는 주점을 나갔다.

살펴가십시오.”

강유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진상파는 관도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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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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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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