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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독수리를 타고

 

 

이검한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그것은 오리 알만한 구슬이었다. 전체가 타는 듯 붉은 그 구슬에서는 은은한 주황빛 화기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내단(內丹)이다!”

이검한은 자기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 붉은 구슬은 다름 아닌 적린화룡의 내단이었던 것이다.

적린화룡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깊은 땅 속을 흐르는 용암의 기운을 흡수해 왔다.

그 용암의 화기가 응결된 것이 바로 내단이었다.

 

-화룡단정(火龍丹精)!

 

내단의 이름인데 만일 사내가 복용하면 십처백첩(十妻百妾)을 어렵지 않게 거느릴 수 있는 절륜무쌍의 양정(陽精)을 지니게 된다.

만일 무공을 연마한 자가 복용하면 몇 갑자의 내공과 함께 강력한 화염강살(火焰罡煞)을 얻을 수 있다.

“내단이라는 것이 정말 있었구나.”

이검한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적린화룡의 시체에서 화룡단정을 집어 들었다.

구우우! 화아악!

그 사이에 철익신응이 허공에서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이검한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그놈은 앉은키만 해도 무려 이장(二丈;6미터) 이상이나 되었다.

철익신응이 날아 내리자 이검한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이것은 네 것이었지...!”

이검한은 들고 있던 화룡단정을 철익신응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적린화룡을 죽인 것은 철익신응이니 화룡단정도 철익신응의 소유인 것이다.

꾸루룩!

하지만 철익신응은 낮게 울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걸 내게 양보하겠단 말이냐?”

철익신응의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이검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람에게 하듯 물었다.

구우우!

철익신응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울음소리를 토했다.

“고맙다 신응!”

철익신응의 그같은 모습에 이검한은 표정이 활짝 펴졌다.

(잘 되었다. 근래 할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 듯하신데 이 화룡단정을 드시면 다시 정정해지실 것이다!)

그는 화룡단정을 고독마야에게 갖다 줄 작정을 한 것이다.

사실 고독마야는 중환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십사 년 전, 그는 자칫 방심하다가 독천존 서래음이 살포한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당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형지독에 중독당한 이상 반나절 내에 온몸이 녹아 죽고 만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달랐다. 그는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덕분에 무형지독에 중독되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

고독마야는 무형지독의 독기를 내공의 힘으로 한곳의 혈도로 몰아넣은 상태였다.

그러나 무형지독이 워낙 독성이 지독한 극독인지라 그 독기가 조금씩 내장을 썩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고독마야는 매일매일 내장이 녹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한 번도 그 고통을 내색한 적이 없었다. 본래 고독한 성격의 고독마야인지라 어떤 경우든 남에게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검한은 그런 고독마야에게 화룡단정을 갖다 줄 작정을 한 것이다.

헌데 이검한이 기쁨에 들떠 있을 때였다.

구우우우!

철익신응이 낮게 울며 몸을 숙여서 이검한에게 등을 보였다.

“나를 태워주겠단 말이냐?”

철익신응의 예사롭지 않은 태도에 이검한은 흠칫하며 물었다.

그러자 철익신응은 낮게 울부짖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검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하하! 좋다! 나도 한 번쯤 곤륜산을 허공에서 관람했으면 했으니까!”

휘익!

이검한은 훌쩍 몸을 날려 철익신응의 등 위로 올라탔다. 워낙 거구인지라 철익신응의 등판은 어른 열 명이 족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직했다.

(목에 사슬을 걸고 있다!)

철익신응의 목덜미 쪽에 걸터앉던 이검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깃털에 묻혀 잘 안보였지만 철익신응의 목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둘러져 있음을 발견한 때문이다.

엄지손가락 굵기인 그 사슬은 길이가 넉넉해서 이검한 자신의 몸에 한 바퀴 두를 수 있을 정도였다.

(사슬을 두르고 있다는 건 이 영물이 전에도 누군가를 태우고 다녔었다는 건데...)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목에 걸려있는 황금 사슬을 자신의 몸에 한 바퀴 둘러 고정시키며 내심 놀랐다. 하늘의 지배자인 이 거대한 독수리에게 주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문이다.

구우우! 스윽!

이검한이 자기 목덜미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철익신응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기왕이면 해가 뜨는 쪽으로 가다오. 그쪽에 내 집이 있으니...!”

이검한은 고독애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철익신응의 등을 다독였다.

구워어억! 화아악!

철익신응은 웅혼한 울음을 토하며 거대한 날개를 퍼득였다.

쏴아아아!

직후 철익신응의 거대한 몸은 이검한을 등에 태운 채 선풍같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우와앗!"

이검한의 입에서 절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곤륜산의 웅장한 산봉들이 발 아래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몇 번 날개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철익신응은 이미 지상에서 수백 장 높이로 날아올라 있었다.

“이야아! 정말 장관이로구나!”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날개 아래쪽으로 휙휙 지나가는 곤륜산의 무수한 산봉우리들을 내려다보며 흥분하여 외쳤다.

그러다가 그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봐! 방향이 틀리잖아!”

그렇다. 지금 철익신응은 고독애가 있는 동쪽이 아니라 반대방향인 북서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쏴아아아!

이검한이 다급히 소리쳤으나 철익신응은 들은 척도 않고 북서쪽을 향해 질풍같이 날아갔다.

“야 임마! 안돼! 저녁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이모한테 혼난단 말이야!”

당황한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등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러나 철익신응은 방향을 틀기는커녕 점점 더 빨리 북쪽으로 날아갔다.

“뭐야? 너 지금 나 유괴하는 거냐?”

철컹!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목에 걸린 황금사슬을 잡아당기며 항의했다.

휘익! 휙!

그러거나 말거나 철익신응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북서쪽으로 꾸준히 날아갔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결국 이검한은 자포자기하여 벌렁 드러 누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서 수백 장 높이의 허공을 날고 있는 철익신응의 등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일이다.

부드러운 깃털로 덮인 철익신응의 등판은 아주 넓어 푹신한 침대같다. 게다가 몸을 쇠사슬로 한 바퀴 두른 상태라 안정감도 있었다.

“이모가 꽤나 걱정하겠는걸...!”

깍지 낀 두 손을 뒷덜미에 바친 채 철익신응의 넓은 등 위에서 드러누운 이검한은 흐르듯 뒤로 지나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검한은 더할 수 없이 안락한 기분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 * *

 

얼마나 잤을까?

쏴아아!

“어엇!”

이검한은 자신의 몸이 급격히 하강함을 느끼며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여, 여기는...!”

정신을 차리며 급히 몸을 일으키던 이검한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느 덧 시간은 흘러 황혼녘이 되었다. 철익신응이 날아가고 있는 주변 하늘은 온통 핏빛 노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피를 물에 풀어놓은 듯 온통 홍(紅) 일색으로 물든 하늘! 손으로 만지면 금방이라도 톡 터질 듯 가깝게 보이는 일몰 직전의 태양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붉은 비단휘장으로 뒤덮여 있는 듯한 저녁 하늘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검한은 그 화려한 장관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바다같이 막막한 일망무제의 사막(砂漠)뿐이었기 때문이다.

“서... 서역(西域)까지 왔구나!”

이검한의 입이 절로 쩍 벌어졌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던 것이다

 

-서역!

 

그렇다. 이곳은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사이에 자리한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 즉 서역인 것이다.

하토(鰕土)라고도 불리는 서역은 동서 일만 이천 여 리, 남북으로 육천여 리에 이르는 지상 최대의 분지다.

놀랍게도 철익신응은 곤륜산으로부터 서역까지 이검한을 태우고 날아온 것이다.

중원 사람들에게 옥문관 밖의 서역은 대부분의 땅이 모래로 뒤덮인 불모지대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역, 즉 탑리목분지의 곳곳에는 낙원같은 녹원(綠園;오아시스)과 사막의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가 지표로 용출하여 형성된 호수를 낀 비옥한 곡창지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그 때문에 고대이래로 서역 일대에는 수많은 군소 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해왔다.

특히 전한(前漢)시대 이래 서역은 머나먼 서쪽에 자리한 대진국(大秦國;고대 로마), 대식국(大食國;사라센제국)등과의 교역통로인 비단길로서 번영을 구가한 적도 있었다.

물론 서역의 곳곳에는 태고 이래로 인간의 발길을 거부해온 끔찍한 험지도 존재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유사지대(流砂地帶)와 맹독을 지닌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습지(濕地), 그리고 원시 아래로 인간의 손길을 거부해온 원시림 등등이 그곳이다.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곳!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환경이 집약된 곳이 바로 서역 탑리목분지인 것이다.

 

“반... 반나절도 안되어 서역까지 오다니...!”

이검한은 발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광활한 사막을 내려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독애가 자리한 곤륜산 남단에서 서역까지 오려면 적어도 이천여 리 이상을 주파해야만 한다.

헌데 철익신응이란 놈은 불과 반나절 만에 그 먼 거리를 날아온 것이다.

그와 함께 이검한의 가슴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냉약빙의 훈육 덕분에 고대사(古代史)에도 정통한 이검한의 뇌리로 비단길을 의지하여 흥망해간 전설적인 왕국들의 고사(古事)가 그림처럼 스쳐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모래폭풍에 휩쓸려 비극적인 종말을 고한 놉-노르, 즉 누란왕국(樓蘭王國)과 서역 역사상 최고의 미녀였다는 누란왕후(樓蘭王后)의 전설이다.

누란왕후-!

그녀는 그 뛰어난 미모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과 왕국을 잃었고 끝내는 여러 사내들의 품을 전전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그 외에도 서역 역사상 최강의 제국을 이루었던 서하(西夏)의 수도 흑수부(黑水府)의 애가(哀歌)와 북원(北元)의 후손으로써 여전히 중원정복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달단왕부(韃靼王府)의 전설이 주마등처럼 이검한의 뇌리로 스쳐갔다.

이국적인 전설과 몽환적인 신비를 품고 있는 서역 땅이 바로 지금 이검한의 눈 아래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헌데 이검한이 흥분에 몸을 떨 때였다.

구워어어억!

철익신응은 웅혼한 울음을 토하며 급격히 아래쪽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저것은...!”

이검한은 눈앞으로 확 다가오는 장대한 단층지대(斷層地帶)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치떴다.

갑자기 그의 앞쪽에 나타난 절벽은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얼마나 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지반의 남쪽이 어떤 이유로 침몰하여 이루어진 그 장대한 절벽의 모습은 마치 수많은 창(戈)을 꽃아 놓은 것같다.

“대, 대과벽(大戈壁)이다!”

이검한의 입에서 저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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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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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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