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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극한 정성

 

 

비록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지만 함께 잠자리를 만들자고 말하기 쑥스럽다.

그래서 백남빈은 혼자서라도 이슬을 피할만한 무언가를 마련해볼 생각으로 숲으로 갔다.

강미루는 영문도 모른 채 백남빈을 부축하고 따라갔다.

그러다가 숲으로 들어서자 그녀도 드디어 백남빈의 뜻을 알아차렸다.

몸도 편치 않으니 제게 맡기세요.”

강미루는 백남빈을 바위에 앉아있게 한 후 백남빈의 허벅지를 찔렀던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작은 나무들은 자르고 큰 나무들은 껍질을 벗겨 그것으로 줄로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나무들을 뗏목을 엮듯이 엮어 세우자 한쪽 벽이 될 수 있어 보였다.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미루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게 척척 잘해냈다.

"소저는 최고의 목수요."

구경하던 백남빈이 미안해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백남빈이 칭찬하는 말을 들은 강미루는 쌩긋 웃으며 나무줄기를 훑어 잎들을 백남빈을 향해 뿌렸다.

백남빈도 역시 나뭇잎들을 훑어 뿌렸다.

 

몇 차례의 장난질이 오가고 강미루는 다시 나무를 자르고 묶었다.

머잖아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서 백남빈도 아픈 다리를 끌면서 도왔다.

이날 그들은 자그마한 오두막 하나 짓는데도 그렇게 많은 나무가 든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백남빈은 따뜻한 온천 연못가에서 흑왕이 날라온 나무들로 집을 짜 맞추었다.

지붕에는 나뭇가지들을 얹고 진흙을 개어 발랐다.

따뜻한 창평곡의 기온 덕분에 지붕은 잘 말랐고 해가 질 무렵 오두막 하나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때쯤 두 사람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무리하게 몸을 쓴 탓에 아물어가던 강미루의 가슴과 백남빈의 허벅지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그 때문에 한 사람은 상체가 벌겋게 물들었고, 한 사람은 하체가 벌겋게 물들어 서로가 보기에 몹시도 처참하고 가련했다.

몇 개의 열매를 나눠먹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껴안은 채 지혈하는 것도 잊고 곯아 떨어졌다.

 

***

 

백남빈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다리의 통증이 그로 하여금 눈뜨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그의 품에는 강미루가 피곤에 지쳐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백남빈은 참기 힘든 통증에도 불구하고 행여 강미루를 깨울까봐 신음을 토하지 않았다.

퉁퉁 부은 왼쪽 다리는 그의 것이 아닌 양 고통 외엔 아무 감각이 없었다.

피도 많이 흘렸었다.

비록 급한 대로 상처를 싸매긴 했지만 그전에 말을 달리면서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그 때문인지 자꾸 눈앞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상처를 다시 치료해야겠구나)

백남빈은 청랑검을 꺼내 허벅지의 퉁퉁 부은 상처에 대고 그었다.

싸악! !

쇠도 자를 정도로 날카로운 청랑검의 날이 스치자 고름이 와락 쏟아지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누렇고 뻘건 고름은 보기에도 끔찍할 뿐 아니라 지독한 냄새까지 풍긴다.

계곡 밖이었다면 이토록 상처가 심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평곡의 따뜻한 기온이 그의 상처를 더욱 곪게 만든 것이다.

이를 악물고 고름을 짜내자니 식은땀이 팍팍 솟았다.

고름이 남지 않도록 빨아냈으면 좋겠는데 입이 상처에까지 닿지 않았다.

고름을 짜내면서 강미루의 가슴에 난 상처도 곪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약도 없는데 이러다가 우리 두 사람 모두 죽는 건 아닐까?)

백남빈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설마 숱한 사경을 경험한 내가 이런 정도의 상처에 죽기야 할려고...)

애써 위안해보았지만 크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여 죽는 일도 허다하므로 불안감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강미루가 깨어났다.

왜 그래요? !”

눈을 부비며 일어나던 강미루는 쩍 벌어진 백남빈의 상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백남빈의 왼쪽 허벅지는 퉁퉁 부어있는데다가 고름과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강미루는 자기가 낸 상처로 인해서 백남빈이 이토록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사실에 눈물을 쏟아냈다.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다물고 있던 백남빈이 숨을 몰아쉬며 그런 그녀를 위로했다.

"울지 마시오 미루. 당신이 내 다리를 찌른 것은 그때 상황으론 잘한 일인데 왜 운단 말이오? 나도 당신의 가슴에 구멍을 내지 않았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머리칼을 가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저 참을 수 있을 만큼만 아플 뿐이니 자책하지 마시오."

강미루는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는 백남빈의 손을 잡고 오열했다.

"제가 나빴어요. 앞으로 절대로 당신을 상하게 하지 않겠어요. 제발 저를 미워하지 말아 주셔요."

백남빈은 한숨을 내쉬며 강미루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설령 이 상처로 인해 죽는다 해도 당신을 절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것이오. 이 상처 덕분에 당신의 마음을 얻었는데 내가 어찌 당신을 탓할 수 있겠소?"

공자!”

다정한 말을 들은 강미루는 백남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강미루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백남빈이 다시 말했다.

"진심이오 미루, 이대로 죽는다 해도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가니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소."

백남빈은 강미루가 엉엉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열로 인해 기절해 버렸다.

그의 몸은 불덩어리를 방불케 할만큼 뜨거웠다.

 

백남빈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강미루는 그의 허벅지 상처에서 고름을 다 빨아낸 후였다.

또 체열을 조금이라도 식혀주기 위해 백남빈의 옷을 몽땅 벗겨놓고 커다란 나뭇잎을 모아 부채마냥 부치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강미루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데 그래도 백남빈이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기뻐서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청초한 백합같아서 백남빈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그러나 강미루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백남빈의 다리는 다시 부어오르고 있었다.

열도 금방 올라가서 목이 타는 듯 화끈거린다.

백남빈은 가물거리는 정신을 잡으려고 애쓰며 강미루의 손바닥에 몇 마디를 적었다.

 

<온천물 속에 나를 넣어 주시오. 중독은 반지로 치료할 수 있으니 입에다 반지를 물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백남빈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

 

(쉽지 않구나! 쉽지 않아.)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신가람은 한숨을 쉬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계곡 일대에 구축되어 있는 진법은 만만하지가 않다.

수시로 변화를 일으켜서 그때까지 구사한 파진법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백남빈은 삼재검법의 간단하지만 원론적인 이치에 의지하여 진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었다.

반면 신가람은 진법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많은 탓에 오히려 파진(破陣)이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진법이 일으키는 변화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일일이 대조하다 보니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결국은 뚫고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처제의 안위가 걱정이다.)

신가람은 조금씩 가슴이 타들어갔다.

정황상 말썽쟁이 처제가 이 진법에 빠진 건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이미 시간은 이틀이나 지났다.

말괄량이라 소문났지만 아직 어려 세상 물정 모르고 겁도 많은 강미루다.

어린 처제가 위험에 처해 두려워할 것을 생각하자 속이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신가람이었다.

(진법의 중심부가 어딘지만 알아도 파진이 좀 더 수월할 텐데...)

신가람은 한숨도 자지 못해 시린 눈을 문지르며 다시 진법의 변화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

 

강미루는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지금처럼 울지는 않았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느덧 대려장의 강인한 홍의창 강미루가 아닌 연약한 소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에 백남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임을 그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타액이 닿기만 하면 무시무시한 독으로 변하는 온천 속에 백남빈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는 지금 방치하는 것 보다는 낫을 것 같았다.

하물며 백남빈이 정신을 잃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한 부탁인 따라주어야 한다.

간병하느라 기진맥진한 강미루는 백남빈의 몸을 들지도 못하고 질질 끌며 연못으로 갔다.

연못가에 이르자 백남빈의 왼손에서 오채금환을 빼어 입에 물렸다.

하얀 이빨 사이에 물려진 오채금환이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렇게 아름다운 반지를 입에 문 채 백남빈이 죽어가는 중임을 떠올리니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끝없이 일었다.

오채금환을 물고 있는 백남빈의 벌거벗은 몸은 연못 속에 천천히 잠겨들어 머리만이 물위에 떠 있었다.

무릎까지 온천수에 다리를 담근 강미루는 물가 바위에 걸터앉은 채 백남빈의 머리가 물속으로 갈아 앉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얼굴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이 펄펄 끓는 온천수에 잠기자 백남빈의 머리는 뜨거운 찜통처럼 김을 내뿜고 있었다.

강미루도 연못의 열기와 백남빈의 열기로 인해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새파란 온천 속에 한 사람은 몸을 담그고 한 사람은 다리를 담근 채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까무라치기를 수십 번 하였다.

백남빈의 머리와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강미루의 몸도 몇 번을 땀으로 뒤집어썼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어느덧 해는 다시 뉘엿뉘엿 서쪽에 걸쳐져 있고, 천리마 흑왕만이 두 사람이 염려스러운지 다가와서 힐끔힐끔 보다가 가곤 했다.

 

***

 

지면 아래 깊은 분지인 창평곡에도 저녁이 되자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창평곡 밖에서 밀려든 그 서늘한 바람이 스치자 강미루가 먼저 정신이 들었다.

몸이 가뿐해져 있는 것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있던 중에도 백남빈의 머리만은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백남빈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에서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의 열이 많이 내린 것이다.

숨도 고르게 쉬고 있었다.

단지 너무 심한 고통을 겪고 나서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입에 물고 있는 반지는 이빨에 걸려 있었지만 긍방이라도 떨어질듯 말듯 위태로웠다.

강미루는 재빨리 손을 뻗쳐 반지를 잡은 후 백남빈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평온해진 백남빈의 숨결은 폭풍이 지나간 것을 알리는 듯 했다.

비로소 강미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틀림없이 나도 따라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도 내가 죽었다면 따라 죽을까?)

강미루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직은 자신의 생각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때문이다.

(내 가슴의 상처는 작은 흉터만 남고 다 아물어 버렸구나. 이 연못의 물이 정말 신통한데... 이 사람의 상처도 이제 거의 다 나았겠지?)

백남빈을 연못에서 좀 더 끌어내 허리 아래만 온천수에 잠기게 했다.

그리고 난 후 백남빈이 정신을 차릴 동안 과일이나 몇 개 따올 생각으로 근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흑왕을 불렀다.

몸이 나른하여 힘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흑왕의 등에 오를 수는 있었다.

흑왕이 달리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게 되자 몸에 생기가 차오른다.

강미루가 숲으로 가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향긋한 열매들을 따서 돌아 왔을 때 백남빈도 정신을 차리고 나른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땀을 푹 뺀 두 사람의 얼굴은 완전히 하얀색이 되어 있었다.

강미루는 알몸의 백남빈을 연못에서 끌어내어 풀잎 웃도리를 감아 주었다.

다시 태어난 것같은 기쁨에 두 사람은 부끄러움도 다 잊어버리고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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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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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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