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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장춘곡의 남녀

 

 

초가집 내부는 단촐하고 검박(儉朴)했다.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나무로 깎아 만든 소박한 가구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다.

방 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큼직한 탁자가 놓여 있는데 그 탁자 앞에는 특이한 외모를 지닌 여인이 앉아 있다.

먼저 여인의 체격이 확 눈에 뛴다.

그녀는 무려 칠척이나 되는 거구를 지녀서 의자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은키가 보통 사람의 선 키 만하다.

팔 하나가 어지간한 장정의 허벅지같이 우람하고 청동으로 빚은 듯 강인한 인상을 풍겨 마치 전쟁의 여신이 강림한 듯하다.

그러면서도 여인은 결코 우락부락하거나 추하지가 않다. 비록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긴 하지만 단정한 선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 얼굴은 경국지색이란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어마어마하게 큰 체구 역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넉넉한 저고리에 감싸인 젖가슴은 숨이 막힐 정도로 크지만 허리는 확실히 들어갔고 비록 엄청나게 굵기는 해도 두 다리 역시 늘씬하여 절로 시선을 잡아끈다.

이런 특이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은 하늘 아래 단 한 명뿐일 것이다.

 

-전모 냉약빙!

 

바로 그녀였다.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 연남천을 오라비로 두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여인인...

십사 년의 세월이 흘러 냉약빙의 나이도 어느덧 삼십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십사 년 전 그대로였다.

얼굴뿐 아니라 몸매도 거의 변화가 없다. 아이를 낳은 적도 없고 또 내공이 정심한 덕분에 그녀는 여전히 이십대 초반의 젊은 처자로 보인다.

잔혹한 세월의 흐름도 전쟁의 여신같은 그녀의 모습에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어. 석련(石蓮)의 잎사귀!”

질풍같이 초가집 안으로 들어선 단삼의 소년은 약간 숨이 거칠어진 채 연꽃 잎사귀 하나를 냉약빙에게 내밀었다.

소년이 내미는 것은 석련이라는 바위에 피는 희귀한 연꽃의 잎사귀였다.

석련은 곤륜산의 특산으로 이곳 장춘곡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석룡벽(石龍壁)이라는 곳에서만 자생한다.

헌데 단삼소년은 일다경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 왕복 육십여 리나 되는 그 석룡벽까지 달려가서 연꽃잎을 따온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빠르기의 경공이 아닐 수 없었다.

“쯧쯧! 겨우 육십 리를 왕복한 정도로 호흡이 거칠어지다니... 제대로 전궁만리비의 경공을 시전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하지만 냉약빙은 단삼소년을 바라보며 준엄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좀 봐줘 누나. 다음에는 잘 할게!”

단삼소년은 혀를 낼름 내밀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소년의 그런 모습은 티 없이 맑고 순진무구해 보인다. 그것은 소년에게 냉약빙은 이 세상에서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이리 와 봐라! 빗물이 묻었는지 보자.”

냉약빙은 소년을 손가락을 까닥거려 불렀다.

“만일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묻었다면 앞으로 삼 일 간 면벽폐관 해야만 한다.”

냉약빙의 엄한 음성에 소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오... 오늘은 그냥 넘어가면 안돼?”

소년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비실비실 뒷걸음질 쳤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달려왔는데 빗방울이 몸에 묻었는지를 조사하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사실 경신술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 빠른 속도 때문에 몸 주위에 진공의 막이 생겨 빗물이 침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같은 경지에 이른 경신술의 대가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냉약빙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설마 냉약빙은 아직 어린 소년에게 자신과 같은 수준의 경신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꾀를 부려도 소용없다.”

스윽!

냉약빙은 준엄하게 말하며 천천히 거구를 일으켰다. 비록 단삼 소년이 육척에 가까운 키를 지녔지만 냉약빙이 몸을 일으키자 어린 아이처럼 작게 느껴진다.

“아이쿠!”

피잉!

단삼소년은 냉약빙이 자신을 잡으려고 하자 비명을 지르며 맹렬하게 초가집 밖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어딜!”

콱!

하지만 냉약빙의 차가운 교갈이 일며 소년의 오른쪽 손목이 마치 솥뚜껑같이 큼직한 손에 움켜쥐어졌다. 비록 소년의 몸놀림이 경이적으로 빠르긴 했지만 아직은 천하에서 가장 빠르다는 냉약빙을 능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에이! 잡히고 말았네!”

소년은 냉약빙의 커다란 손에 손목을 잡힌 채 입을 삐죽거렸다.

“네 녀석이 뛰어봤자 벼룩이지!”

스슥!

눈을 흘기는 냉약빙의 큼직한 손이 빛살같이 빠르게 소년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행여 소년의 몸에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튀었을까 조사하는 것이었다.

헌데 냉약빙의 손이 막 소년의 사타구니 부분을 쓰다듬고 지나갈 때였다.

(아이쿠!)

소년은 얼굴이 화끈 붉어지며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사내아이가 십대 후반의 나이라면 한창 양기가 충천할 때다. 솥뚜껑같이 큼직하지만 어쨌든 보드라운 여자의 손이 사타구니를 더듬자 자신도 모르게 하체 일부가 불끈 곤두선 것이었다.

“...!”

한 겹의 얇은 옷 사이로 느껴지는 큼직하고 단단한 불기둥의 느낌에 냉약빙도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움찔했다.

“헤헷! 기회당!”

스팟!

소년은 장난스런 웃음소리와 함께 제압당한 손목을 미꾸라지처럼 냉약빙의 손에서 빼내며 문밖으로 날아갔다.

“검한(劒恨)아!”

냉약빙은 급히 달아나는 소년을 불렀다.

그러나 소년의 모습은 순식간에 퍼붓는 빗줄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헤헤! 할아버지에게 다녀올 게!”

멀리서 소년의 장난기 서린 음성만이 여운을 끌며 들려올 뿐이었다.

“휴!”

냉약빙은 고개를 저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감돌았다.

(검한이도 어느덧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냉약빙은 소년의 늠름한 실체를 만졌던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 튼튼하고 탄력 있는 감촉이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손바닥에 생생이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 삼 년 전부터는 혼자 목욕을 하겠다고 했었지!)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냉약빙은 직접 소년을 목욕시켜주곤 했었다.

소년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준 냉약빙이 몸을 닦아주는 걸 당연하게 여겼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쪼그려 앉아서 근육이 아직 붙지 않은 소년의 여린 몸을 닦아주는 게 냉약빙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비록 처녀의 몸이지만 소년을 통해서 육아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삼 년 전부터 소년은 냉약빙과 함께 목욕하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그 무렵 귀엽기만 하던 소년의 몸에 변화가 생겼었다. 목소리도 좀 굵어지고 맨숭맨숭하던 불두덩에 가뭇가뭇 어른의 흔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의 키가 어느덧 오척을 넘겼고 뼈대도 제법 굵어졌지만 냉약빙은 별 생각없이 씻겨주었었다.

그전까지는 냉약빙이 고추를 만지고 사타구니 구석구석을 닦아줘도 신경 쓰지 않던 녀석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소년은 냉약빙의 손길이 아랫도리 쪽으로 접근하면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며 몸을 배배 꼬곤 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삼 년 전부터 소년은 혼자 목욕하겠다고 선언했다.

냉약빙으로서도 소년의 성장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소년을 직접 목욕시켜주는 걸 그만 두었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난 지금 소년의 몸에서는 성인의 모습이 문득 문득 느껴졌다.

방금 전 사타구니를 더듬다가 만져본 소년의 몸 가락은 이미 더 이상 어린 아이의 귀여운 고추가 아니었다. 얼추 느끼기에도 한 뼘은 충분히 됨직한 튼실한 양물이었다.

(세월 한 번 빠르구나. 기련산에서 어린 검한이를 거둔 것이 벌써 십사 년 전의 일이라니...!)

소년의 양물의 감촉이 남아있는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냉약빙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초가집 밖으로 달아난 소년은 바로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었다.

고독마야는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소년에게 검한(劒恨)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도검(刀劍)에 운명을 건 자신의 지난 생애를 한스럽게 생각해온 고독마야로서는 소년이 무림인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사방무신 중 한명이었던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들인 이상 어쩔 수 없이 무림인으로 살아야만 한다.

그래서 고독마야는 소년에게 검(劒)을 한(恨)스러워한다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소년 이검한은 자신의 출신내력을 모른다. 기련산에서 변을 당할 때 나이가 서너 살에 불과했기도 했지만 당시 머리에 입은 부상 때문에 어렸을 때의 기억이 없는 것이다.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때로 이검한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속이 깊은 이검한은 굳이 고독마야와 냉약빙에게 부모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떼를 쓰진 않았다. 때가 되면 알려줄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이검한은 구김살 없이 자랐다. 냉약빙과 고독마야가 피붙이에 못지않은 따뜻한 관심과 애정으로 보살피고 양육을 해준 덕분이다.

이검한은 철이 들자마자 냉약빙과 고독마야에게서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냉약빙과 고독마야! 그들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최고의 스승이었다.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 고독마야!

경신술로 천하무적인 냉약빙!

그들의 지도하에 이검한은 이미 일류고수가 되어 있었다. 지금의 실력으로도 이검한은 능히 천하백대고수(天下百大高手) 안에 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검한 자신은 단 한 번도 남과 싸워보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검한은 고독마야의 제자다.

하지만 이검한이 알고 있는 무공의 대부분은 사저(師姐)뻘인 냉약빙이 전수해준 것이었다.

고독마야는 이검한에게 단 한 가지의 내공심법만을 전수해 주었을 뿐이다.

내공 외에 경신술 등 잡다한 무공을 전수하는 것은 모두 냉약빙의 몫이었다.

냉약빙은 이검한을 친 아들처럼 사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검한을 보살펴온지라 냉약빙은 종종 자신이 이검한을 낳은 생모인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검한이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결코 기뻐할 일만도 아니다.)

냉약빙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녀의 두 눈에는 애틋한 정감이 가득했다.

(검한이도 머지않아 자기를 낳아준 생모와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저 아이가 그때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냉약빙의 새하얀 뺨으로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옥수상아 우담혜가 음적들에게 유린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칼로 저미는 듯한 슬픔이 느껴지는 냉약빙이었다.

그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냉약빙이 이검한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부디 언제까지나 지금의 그 밝은 성품을 잃지 말거라. 검한아!)

냉약빙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이검한이 사라진 초가집 밖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장대같이 쏟아지던 폭우도 어느덧 가늘어져 가랑비로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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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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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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