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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그릇 깎는 미녀

 

 

사자검은 보면 볼수록 백남빈의 마음을 끌어 당겼다.

백남빈은 사자검을 어깨에 메고 이리저리 어린아이처럼 왔다갔다하며 좋아했다.

조금 가다가 휙 뽑아서 흔들어 본 후 집어넣고, 그러다가 다시 한 번 뽑아서 재주를 넘으며 찌르고 하여 강미루로 하여금 입을 가리고 웃게 만들었다.

나이답지 않게 진지하여 어른들도 어려워하던 철령보의 소보주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애들 장난같던 백남빈의 검무(劍舞)는 점점 격식을 갖추면서 정교해져 갔다.

양부 이탁에게서 배운 삼재검법이 누에가 실을 뽑듯이 펼쳐졌다.

지금까지 수천 번, 수만 번 펼쳐봤던 삼재검법이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웅! 웅!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배 이상 증진된 내공으로 인해 백남빈이 휘두르는 사자검은 웅혼한 바람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쿠오오! 파파팟!

사자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자 그 궤적을 따라 강한 바람이 일어나 주변의 작은 돌들과 흙을 휘감아 튕겨 내었다.

자신의 내공이 이 정도로 증진되어있을 줄은 백남빈도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힘을 쓰면 쓸수록 늘어나 펄펄 날 것만 같아서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백남빈은 이내 자신이 아는 유일한 검법인 삼재검법만으로는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힘을 도저히 다 뿜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갑함을 느낀 백남빈은 격식에서 벗어나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사자검을 움직였다.

쿠쿠쿠! 쩌저적!

강맹한 바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연달아 번쩍이는 검광(劍光)에 가려 백남빈의 모습은 강미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뭔... 뭔가 일어나려 하고 있어!)

강미루는 돌풍과 검광에 가려진 백남빈 쪽을 보며 숨도 제대로 크게 쉬지 못했다.

강미루의 놀란 심정을 알 리 없는 백남빈은 자신의 몸속에서 폭발을 기다리는 용암처럼 들끓는 힘을 분출할 수 있는 검로(劍路)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위... 위험해!)

백남빈의 몸에서 폭풍처럼 터져 나오는 검광과 검풍(劍風)을 보며 위기감을 느낀 강미루는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십장 이상 물러섰음에도 강맹한 바람은 그녀의 몸을 단숨에 하늘 밖으로 날려 버릴 듯 했고 작렬하는 검광은 그녀를 당장이라도 갈가리 난도질해버릴 것만 같았다.

"으야압!"

그러던 어느 순간 백남빈은 천둥치는 듯한 폭갈을 터뜨리며 온 힘을 다해 사자검을 휘둘렀다.

크와앙!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자검에서 한 무더기의 기운이 쏘아져 나가 녹지의 표면을 강타했다.

퍼엉!

수십 장 넓이의 녹지가 둘로 쩍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백남빈은 바닥에 팍 엎어졌다. 몸속에서 들끓던 강대한 기운이 일거에 밖으로 쏟아져 나가 기진맥진해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백남빈은 강미루가 경악하면서"검기(劍氣)"하고 외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몸에 기운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어렵다.

그러나 답답하게 꽉 막혀있던 가슴이 확 트인 듯하여 시원하고도 통쾌해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서 불쑥 치솟아 전중혈(田中穴)을 지나 검으로 빠져나갔었다.

그 기운이 어떻게 움직였고 어떻게 해서 수십 장 넓이의 녹지를 순간적으로 갈라버렸는지 백남빈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탈진해서 몸은 나른하지만 반대로 마음은 아주 후련해져서 눈도 뜨기 싫었다.

“공자님!”

강미루가 뛰어와 그의 머리를 안아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으며 놀란 가슴을 달랬다.

"무서워 혼났어요. 하지만 정말 축하해요."

백남빈은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가 일으켰던 거센 돌개바람은 아직도 작은 회오리들을 만들며 완전히 사그라 들지 않고 있었다.

잠시 아늑한 기분을 만끽하던 백남빈이 눈을 감은 채 잠결처럼 물었다.

"미루, 내가 대체 뭘 한 거요?"

"미친 듯이 검무를 추었잖아요. 가까이 있었더라면 나도 살아있지 못했을 거예요."

강미루는 자신이 본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춤을 추기 시작하자 힘이 마구 들끓었었소. 주체할 수가 없어서 미칠 것같았는데 갑자기 속이 후련해지더군."

백남빈도 자신이 느꼈던 감각을 최대한 자세히 강미루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은 이제 검으로 검기를 발출하게 된 거예요. 우리 형부도 검기를 발출할 수 있는데 멀리서 검을 휘둘러 바위를 깨뜨리고 나무를 베어 버리더라구요."

강미루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전에 형부와 언니가 뭘 하는지 보기 위해 형부 집에 숨어들어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형부가 검을 들고 있다가 저를 보지도 않고 갑자기 휘둘렀어요. 그런데 그 바람에 오장이나 떨어져 있던 내 머리에 쓴 모자가 잘려버리지 않았겠어요? 나도 깜짝 놀랐지만 형부도 어쩔 줄을 몰라 쩔쩔 맸다고요"

백남빈이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무림에 고수는 많지만 검기를 마음대로 발출해 낼 수 있는 고수는 드물다고 들었는데 그대의 자랑스러운 형부는 검신(劍神)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인 모양이오."

백남빈의 말에 강미루가 핏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이제 당신도 검기를 발출하게 됐으면서... 자화자찬(自畵自讚)하지 마셔요."

백남빈이 빙그레 웃자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후로 형부에게 그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매번 졸랐지만 나는 내공이 부족해서 배울 수 없다면서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 대신 궁술과 창법을 가르쳐 주더군요."

"그렇다면 당신도 활과 창으로는 그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겠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당신이 어떻게 내손에서 살아날 수 있었겠어요? 단지 내 궁술과 창법이 치밀한 편이라 다른 사람을 상대로 싸울 수 있을 정도인데 그나마도 이젠 더 이상 늘지 않아요."

강미루가 백남빈의 볼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하는 말이었다.

백남빈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내공수련과 검기(劍技)가 부족한데 어째서 검기를 발출할 수 있었을까? 혹시 사자검이 부린 조화가 아닐까?"

강미루가 그럴 리 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되었지 당신이 쓰러질 때를 맞추어서 그렇게 될 리가 있겠어요? 당신이 어떤 기연을 얻은 모양이에요."

그녀는 말과 함께 손가락을 놀려 백남빈의 여기저기에 글로 적으며 의사표시를 해왔다.

다분히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럼 다시 한 번 더 해봐야겠어!"

백남빈은 옆에 떨구었던 사자검을 집어 들며 일어나려 했다.

강미루가 그런 그의 이마를 눌러 다시 눕히며 말했다.

"목이라도 축이고 다시 하셔요."

그녀는 물그릇(물론 백남빈의 가죽신이지만)을 가져와 백남빈에게 주었다.

미지근한 우유빛 물이 마치 유액(乳液) 같았다.

백남빈은 그 물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소매도 없는 팔로 쓱 닦았다.

폐부를 상쾌하게 해주는 신비의 물. 그것은 하늘 아래에서는 오직 이곳에만 있는 신령스러운 영약이지마나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시고 또 마셨다.

만일 다른 식수가 있었다면 마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몸속이 다시 힘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낀 백남빈은 강미루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스악!

정신을 검 끝에 모으고 기합과 함께 강하게 떨쳐내었다.

과연 기합소리와 동시에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그의 검 끝을 지나서 칙! 하는 소리를 내며 뻗어나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힘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연이어 몇 번을 휘두르자 검기는 실날같이 가늘게 뽑혀 나오며 그의 몸주위에 그물처럼 막으로 둘러싸기 시작했다.

강미루가 돌멩이를 주워 백남빈에게 던지자 돌은 검기에 부딪혀 소리도 없이 바스라져 버렸다.

진정 놀라운 경지였다.

그것은 백남빈에게 검술을 가르친 독안룡 이탁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였다.

 

***

 

백남빈은 새로운 검식을 만들기에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가 익힌 삼재검법은 검기를 펼치기에는 부적당한 것이기에 검과 검력에 알맞은 검식(劍式)을 고안해야만 했다.

가전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 다른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삼가야한다는 양부 이탁의 말은 이미 까맣게 잊은 후였다.

녹지에 다시 들어가 혹시 검식을 적은 검보(劍譜)가 있지 않나 찾아 봤다.

하지만 녹지의 바닥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

 

백남빈은 보름달이 떠올라 창평곡을 환하게 비출 때까지 검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강미루가 쪼그리고 앉아 달빛에 단검을 반짝이며 나루를 깎아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저녁 때 깎을 생각이었으나 백남빈이 검무를 추는 걸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미루었다가 이제야 깎는 것이다.

백남빈은 생각을 멈추고 묵묵히 그녀의 단검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일에 열중하여 전혀 백남빈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강미루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돌아보았다.

순간 강미루는 백남빈의 눈길이 닿은 곳이 자신의 단검임을 깨닫고 죄라도 진 듯이 황급히 손바닥 안에 단검을 감추었다.

그 단검으로 백남빈의 허벅지를 찔러 하마터면 죽게 만들 뻔한 기억 때문이다.

힐끗 보니 백남빈은 여전히 단검을 보고 있다.

핑!

강미루는 입술을 꼭 깨물며 녹지쪽으로 단검을 던져 버렸다.

퐁당! 하는 소리가 나며 단검은 녹지에 잠겨버렸다.

"아!"

그제야 백남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강미루가 깎는 둥근 나무그릇을 보면서 영감이 떠올라 깊은 생각에 잠겼던 것이다.

강미루가 깎는 나무 그릇은 원래 나무토막에 불과 했으나 그녀가 빙글빙글 돌리며 깎아나가자 점차 모양을 갖춰 동그란 나무그릇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검식도 저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백남빈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잡히지 않아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가 단검이 물속에 빠지는 퐁당 소리에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쉬릭! 쉭!

백남빈은 사자검을 들어 찌르는 것도 아니고 베는 것도 아닌,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선(螺旋)형으로 원을 그리면서 찌르는 것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으나 수십 차례 반복하자 뱀처럼 영활하게 검이 살아있는 듯이 뻗어 나갔다.

검이 뻗어나갈 때마다 검기로 형성되는 여러 개의 작은 원과 원이 서로 엉기면서 파도처럼 밀려가는데 정작 검에서는 바람소리 하나 일지 않았다.

오로지 한 초식뿐인 검법이지만 백남빈은 스스로 검법을 만든 것이다.

백남빈은 내심 기뻐하면서 강미루를 향해 씩 웃었다. 성취한 자의 여유가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당신, 내 단검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군요?"

강미루가 백남빈의 성취에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는 가슴을 쓰다듬어 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가슴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신의 단검을 보고 있자 불현듯 그의 허벅지를 찌른 것이 생각이 났었다.

비록 백남빈이 탓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애정을 품고 있는 지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강미루였다.

그래서 백남빈의 돌연한 태도에 비록 정이 든 단검이지만 물속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백남빈이 검초를 깨닫게 되었으니 하늘의 조화는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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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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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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