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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싹 트는 연정(戀情)

 

 

푸른 색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의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과 거의 맞닿아 있다.

지난 밤 흑왕이 떨어진 절벽인데 윗부분이 앞쪽으로 비스듬하게 나와 있어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절벽 아래쪽과 연못 사이의 넓지 않은 바닥에는 동물들의 뼈가 흩어져 있었다. 강미루와 흑왕처럼 길을 잘못 들어 절벽에서 떨어진 놈들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절벽의 수십 장 위쪽에는 집채만한 바위가 하늘을 향해 돌출해있다.

어젯밤 가파른 경사를 미끄러져 내리던 흑왕이 뛰어넘었던 그 바위다.

만일 흑왕이 그 바위를 뛰어넘기 위해 도약하여 멀리 뛰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바위에 부딪혀서 즉사했거나 절벽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서 피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강미루는 아찔해졌다.

흑왕의 도약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연못에 빠지지 못하고 절벽 아래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럼 강미루 자신과 흑왕도 저 이름 모를 짐승들의 백골처럼 되어서, 혹시 살아남은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비스듬히 앞쪽으로 기울어진 절벽의 중간 부분에 낀 이끼가 마치 글자의 모양을 이루고 있는 듯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창평곡(蒼平谷)>이라고 읽혔다.

(이 분지의 이름이 창평곡이었군.)

(전에 누군가 여기에서 살았었네.)

백남빈과 강미루는 하나하나가 사람보다도 더 큰 창평곡이라는 글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누군가 절벽에 깊이 글을 새겨놓았었는데 그늘이 져서 서늘한 그곳에만 이끼가 잘 자라 글씨를 푸르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살았었던 흔적을 발견한 두 사람은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창평곡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빠져나갈만한 길은 없었다. 창평곡 전체가 수백 길의 절벽으로 둘러싸여있는 항아리 같은 구조였기 때문이다.

모험을 하면 절벽을 올라가지 못할 갈 것도 아니지만 그럴 경우 목숨을 걸어야한다.

하물며 왼쪽 다리에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백남빈으로서는 수백 길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창평곡 내에 과일이 많아서 굶어 죽을 염려는 없다는 점이었다.

 

창평곡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백남빈은 속이 타들어갔다.

자신은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대대적인 중원 침공이 임박했다는 증거들을 무황성에 전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을 띠고 있다.

헌데 이 괴상한 골짜기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전서구라도 무황성에 잘 도착했을까?)

답답한 생각에 앞쪽에 앉아있는 강미루에게 집적거렸다.

"소저! 혹시 철령보에서 무황성으로 날린 전서구들도 모두 붙잡은 거요?"

그러나 강미루는 무슨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백남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소저!”

백남빈은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해있는 강미루의 손목을 잡아 주의를 환기시켰다.

... 왜 이래요?”

손목이 잡힌 강미루는 백남빈이 혹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당황했다. 아랫도리를 사실상 발가벗은 채 바로 앞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백남빈이 이성을 잃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걸 방해했다면 미안하오. 소저에게 물어볼 게 좀 있소.”

... 물어보세요.”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신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 안심과 동시에 아쉬움을 느꼈다.

"혹시 우리가 무황성으로 날려 보낸 전서구들을 전부 잡았소?"

백남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려장은 해동청(海東靑)을 비롯한 많은 매를 길들여 부리고 있다. 그 매들을 모두 동원했다면 철령보의 전서구들은 전멸했을 수도 있다.

다행히 강미루는 고개를 저었다.

"전서구를 모두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우린 철령보에서 나오는 전령들을 집중적으로 노렸어요."

강미루의 말에 백남빈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전서구들이 전멸하지만 않았다면 무황성과 명나라 황실에서도 신랑성의 동향에 어느 정도는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직접 증거를 제출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났다.

 

"허벅지의 상처는 어때요?"

강미루가 백남빈을 돌아보며 미안한 듯이 물었다.

"썩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붓고 열이 나오."

"당신의 그 신기한 반지로도 치료할 수 없는 건가요?"

강미루가 근심스럽게 다시 물었고 백남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소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시험해 봤지만 이 반지는 독을 제거하는 효능만 있는 것 같소"

강미루는 고개를 계속 뒤로 돌리고 이야기하기가 거북하고 힘이 들었다.

!

그래서 별 생각없이 백남빈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 바람에 풀로 만든 치마가 흔들리며 상아같이 희고 매끄러운 속살이 보일 듯 말 듯하여 백남빈의 눈을 어지럽혔다.

상체에 걸친 헐렁한 남색상의 사이로도 탐스러운 젖가슴이 다 가려지지 못하고 살짝살짝 엿보였다.

백남빈은 눈앞이 아롱거려 주위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깊은 가을인데도 여기는 참 따뜻하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흑왕의 등에 마주 보고 앉은 백남빈과 강미루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이 샘솟았다.

두 사람은 어느덧 황홀경에 빠져들어 자기들이 앉아있는 곳이 말등인지 소등이지도 잊어버렸다.

서로에 대해 묻고 대답하며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인 상대라는 사실 때문인지 강미루는 백남빈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좋게 보였다.

그가 자기 집안과 원수지간인 철령보의 소보주라는 사실도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백남빈 역시 여자와 이토록 가까이, 이토록 오랫동안 있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지금의 상황이 무작정 좋기만 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대려장 장주의 둘째 딸과 깊이 마음을 나누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무황성에 대한 근심이 감해지기까지 해서 백남빈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이 순간만이 시간의 전부를 차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남빈은 무심코 말했다. 깊은 정이 깊이 배인 말이다.

그러나 강미루는 자기 나름대로의 감정에 도취되어 있었기에 그 말을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다.

단지 백남빈의 중얼거림에 스며있는 애틋한 정만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천하의 여장부인 내가 그토록 경멸스러워하던 다른 여자들처럼 사내 앞에서 교태나 부리고 있다니...)

강미루는 차츰 혼란한 감정에서 벗어나며 한탄했다.

(미루야! 미루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지금 집에선 아버지와 형부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넌 원수인 철령보의 소보주에게 푹 빠져서 집에 돌아갈 생각마저도 않는구나.)

그렇게 자책을 하면서도 강미루는 이미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연정(戀情)이라는 피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치명적인 덫에...

 

***

 

이 앞쪽에서 실종된 동료들이 있단 말이지?”

신가람은 앞쪽에 펼쳐진 계곡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침 점호에 일곱 명의 형제가 빠져서 확인을 해봤더니... 흑왕의 것으로 보이는 발굽자국을 발견하고 이 계곡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대려장의 기마대를 이끌고 당산산맥까지 온 구철륵(具鐵勒)이란 중년의 무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곱 명중 세 명은 기진한 모습으로 계곡 안쪽에서 발견되었지만...”

구철륵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신가람과 구철륵에게서 멀지 않은 뒤쪽에 세 명의 사내가 동료들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그자들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십 년쯤 나이를 먹은 듯 탈진한 모습으로 누워있다.

나머지 네 명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구철륵은 다시 계곡 쪽을 보며 좀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미혼진(迷魂陣)이 설치되어 있군.”

신가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계곡 쪽을 보았다.

보기에는 그저 그런 계곡이다.

하지만 그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네 명은 실종되고 세 명은 반송장이 된 채 발견 되었다.

계곡 안쪽에 사람을 가두고 탈진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속하들도 그리 생각하고 깊이 진입은 하지 않았습니다.”

구철륵이 신가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잘 했다. 다시 돌아 나온 셋은 그나마 침착해서 들어갔던 길을 되짚어 빠져나왔지만 나머지는 공포에 사로잡혀 밤새 치달리다가 탈진해버렸을 것이다.”

신가람은 계곡 안쪽을 살피며 눈을 번뜩였다.

그는 무공이 강진남을 한참 능가할 뿐 아니라 기문진법의 재주도 장인에 못지 않다.

덕분에 계곡 안쪽에 흉험한 진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십 년 넘게 진법을 연구하고 공부해온 신가람으로서도 처음 접해보는 미지의 진법이다.

그 어떤 강적보다도 위험한 곳이다. 동료들에게 연락하여 누구도 이 계곡 근처로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신가람은 계곡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구철륵에게 말했다.

... 조심하십시오 공자님!”

구철륵과 대려장의 무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들을 등지고 천천히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며 신가람은 오랜만에 잠잠하던 몸 속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진법이 구축되어 있는지 확인해보자.)

계곡 일대에 설치 된 진법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과 승부욕이 신가람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

 

정말 못 말리는 것이 젊은이들의 벼락같은 사랑이다.

백남빈과 강미루의 감정적 연대는 짧은 시간이건만 더할 수 없이 깊어 갔다.

서로에 대한 연모의 감정에 취해 두 사람은 흑왕이 창평곡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왔을 때 백남빈과 강미루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강미루의 얼굴은 발그레하여 햇살 아래 더욱 붉었고 백남빈의 얼굴도 행복감에 도취되어 상기되어 있었다.

흑왕이 연못가에 와서 발을 멈추었을 때야 강미루가 활짝 웃으며 백남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헌데 뛰어내리는 순간 백남빈하지 않은 풀잎 치마가 위로 훌렁 올라가는 바람에 그녀의 눈부신 아랫도리가 고스란히 들어나 보였다.

잘 익은 복숭아같이 탐스러운 엉덩이가 펄럭이는 풀잎 치마 밖으로 언듯 들어났다가 숨어버린다.

강미루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백남빈은 차마 못 볼 것을 보고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뛰어내린 강미루가 말에서 내리려는 백남빈을 향해 팔을 벌렸다.

백남빈은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다리를 다친 상태에서 훌쩍 뛰어 내리는 것이 여의치 않아 강미루의 손에 몸을 맡겼다.

비록 소녀에 불과하지만 무공을 익힌 강미루의 완력은 대단하여 백남빈의 몸을 가볍게 받아 땅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이다.

하지만 항아리 형태인 깊은 골짜기에서 낮은 짧을 것이 불문가지다.

백남빈은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말을 꺼내기가 멋쩍었다.

<잠자리>라는 말이 잠은 자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남녀 간의 육체관계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하늘을 보았다가 숲을 보았다가 했다.

(저 사람이 어젯밤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백남빈이 갑자기 하늘을 보고 숲을 보고 하자 강미루는 덜컥 겁이 났다. 낮선 곳에서 밤에 홀로 남겨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몸서리 처지도록 경험했었다.

또 혼자 남겨질 수는 없다.

강미루는 백남빈을 부축하는 척하면서 그의 허리띠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어젯밤에도 나 혼자 도망치려고 했던 게 아닌데...)

백남빈은 강미루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지난밤 자신이 처했던 상황과 사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아야 한다면 언젠가 알 때가 있겠지.)

그것이 백남빈의 생각이었고 원래 성격이었다.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은 진지하게 성의를 다하지만 자신의 사정에 대해서는 무심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양부 독안룡 이탁의 성격을 닮지 않았으니 아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생부 백무염으로부터 물려받은 성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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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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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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