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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첫 번째 실전

 

 

 

이곳은 주점에서 오리 쯤 떨어진 숲속의 공터다.

“...”

진상파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숙인 채 공터 중앙에 서있었다.

진상파에게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는 섬전초가 앉아서 몸통 길이만한 탐스러운 꼬리를 앞발과 혀로 다듬고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여전히 도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진상파를 십여 명의 사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물론 그자들은 철위사대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와 그의 수하 철위사들이었다.

진상파는 주점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사우 일행에게 따라잡힌 것이다.

그녀에게 사우 일행을 안내한 놈은 한쪽에 앉아서 얄밉게 털을 고르고 있는 섬전초다.

무공 방면에서는 그다지 성취가 없는 진상파인지라 행적이 노출된 이상 섬전초와 사우 일행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진소저! 아무쪼록 우리가 무례를 범하지 않게 해주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셔오라는 명을 받은 터라 끝내 동행을 거부하시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소이다.”

사우가 포권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심기는 불편하지만 자신들의 안주인이 될 여자에게 무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돌아가세요.”

진상파가 옆으로 조금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세우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가서 당신들의 소성주에게 전하세요. 내가 왜 제왕성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날 밤 일신재에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진상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혐오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된 거였군.)

(소성주님이 내총관과 내연관계인 걸 알아버렸구나.)

사우와 그의 수하들은 진상파가 혼례식 전날에 갑자기 달아난 이유를 깨닫고 낭패한 심정이 되었다.

“죄송하지만 그 분부는 따를 수가 없소이다. 우리가 받은 명은 단 하나! 소저를 제왕성으로 모셔오라는 것뿐이었소이다.”

사우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

진상파는 미간을 조금 찡그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사냥개에 불과한 사우와 말을 섞어봐야 바뀌는 것은 없음을 아는 때문이다.

“더 시간 끌 거 없다. 진소저를 성으로 모시고 간다.”

사우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했다.

“예 대주님!”

“결례하겠소이다 진소저.”

그 즉시 두 명의 철위사가 좌우에서 진상파에게 다가섰다.

(여기까지인가?)

철위사들이 자신의 팔을 잡으려는 것을 보며 진상파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제왕성으로 끌려가면 모용준과 결혼할 수밖에 없다.

천박하고 음탕한 모용준과 부부가 될 경우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치욕을 당하는 것은 둘째 치고 황금성의 재산을 노린 탕부탕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진상파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같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바로 그때였다.

“그만들 하시오.”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음성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치떠졌다.

끼이...

탐스런 꼬리를 앞발로 다듬고 있던 섬전초도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그분 소저께서 귀하들과 함께 가는 걸 원하지 않고 있지 않소?”

공터로 들어서며 말하는 인물은 강유였다. 사우 일행의 뒤를 밟은 그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저놈은...”

“주점에서 대주님에게 죽을 뻔했던 애송이 아닌가?”

강유를 알아본 철위사들은 실소를 터트렸다.

다만 사우의 얼굴은 불쾌하게 찡그려 지고 있었다.

(저 사람이 또...)

숲에서 나와 공터로 들어서는 강유를 본 진상파는 반갑다기보다는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무공을 모르는 주점 주인을 혼내는 것과 사우 일행을 상대하는 것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진상파도 제왕성의 위사들이 얼마나 흉포하고 강한지 잘 알고 있다.

강유라는 이름의 청년은 의협심 때문에 자신을 도우려고 나섰겠지만 그 결과는 비극적일 것이다.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그것도 여럿이 아녀자 하나를 핍박하는 것은 무림인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오.”

공터 외곽에 멈춰선 강유는 사우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이거 참...”

사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 없는 네놈의 피를 본 부담도 있고 해서 좋은 말로 하마. 내일 해를 다시 보고 싶다면 모른 척 하고 갈 길 가라.”

사우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진상파의 마음은 복잡했다.

강유가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면서도 그가 변을 당하기 전에 알아서 물러갔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스릉!

진상파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강유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아버지 강조가 마련해준 그 검은 비록 보검은 아니지만 상당히 예리하다.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한다면 지금까지 애써 무공을 수련한 의미가 없소. 끝내 그 소저를 보내드리지 않겠다면 나부터 상대해야할 거요.”

“그 새끼 참 분위기 파악 못하네.”

강유의 진지한 말을 들은 사우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평소의 사우라면 당장 살수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제왕성의 안주인이 될 진상파가 보고 있는 자리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속하에게 맡겨주십시오 대주님! 능력도 안되면서 객기를 부리면 어찌 되는지 교훈을 내려주겠습니다.”

사우가 난감해할 때 철위사중 한명이 칼을 뽑으며 나섰다. 장흔(張欣)이라는 이름의 그자는 사우가 대동한 철위사들 중 가장 연장자다.

“교훈만 내려주고 죽이지는 마라. 진소저가 보는 앞이니...”

사우는 장흔에게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대주님 말씀 들었지? 네놈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팔 다리 하나쯤 날아가겠지만 죽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사우의 허락을 받은 장흔은 칼끝을 이리저리 돌려서 강유를 희롱하며 다가섰다.

“같은 말을 귀하에게 해드리겠소.”

강유는 냉소하며 마주 다가갔다.

“나 역시 저분 소저가 보는 앞이라 귀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물론 피를 보긴 하겠지만...”

“이 새끼가...”

강유의 비아냥을 들은 장흔의 얼굴이 분노로 이지러졌다.

“알아서 매를 버는구나.”

부악! 쩍!

다음 순간 장흔은 강유를 향해 빗발치듯 칼질을 했다.

칼을 쓰는 속도는 전광석화같고 노리는 부위는 하나같이 치명적이다.

장흔이 구사하는 이 도법은 허초(虛招)와 실초(實招)가 뒤섞여있기도 해서 상대하기가 실로 까다롭다.

비록 제왕성 사대무력집단의 최하위 집단에 속해있긴 하지만 철위사 개개인이 일류고수라는 무림의 평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스슥!

하지만 강유는 산보하듯 걸어서 장흔의 칼질을 피해내었다. 소요신군을 칠절의 첫째로 만들어준 소요보법이 펼쳐진 것이다.

(저 보법!)

한가로운 듯이 보이지만 장흔의 공격을 바람처럼 물처럼 흘려보내고 있는 강유의 보법을 보며 사우의 눈이 번뜩였다.

철위사대의 대주답게 사우는 무림에서 사대보법중 하나로 불리는 소요보법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크아!”

치칫! 쉬학!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악에 바친 장흔의 공격이 더 빠르고 신랄해졌다.

(명불허전... 제왕성 위사들중 최하등급인 철위사임에도 타복에 필적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

장흔의 격렬해진 공격을 피하면서 강유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찌익! 서걱!

빨라진 그자의 칼끝이 스치면서 강유의 옷이 여기저기 베어지고 있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지 보자!”

칼끝이 강유의 몸에 닿기 시작하자 장흔은 기세가 올라 더욱 사납게 칼질을 했다.

(소요보법으로도 피하는 게 한계가 있다.)

캉!

어쩔 수 없이 강유는 검을 휘둘러 장흔의 칼질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왔어야지!”

장흔이 살벌하게 웃으면서 빗발치듯 칼질을 했다.

쩍!

강유는 장흔의 칼질 안쪽으로 성큼 들어서며 빠르게 검을 찔렀다. 그런 강유의 뒤로 독수리가 날개 짓을 하는 듯한 형상이 떠올랐다.

(붕정검법까지...!)

강유가 구사하는 검법을 알아본 사우가 눈을 부릅뜰 때였다.

카캉! 빠카앙!

찌르는 강유의 검과 그어대는 장흔의 칼질이 엇갈리며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큭!”

장흔은 왼쪽 어깨에서 피를 뿜어내며 휘청거렸다. 강유가 찌른 검이 그자의 어깨를 관통한 것이다.

스팟!

일격을 성공한 강유는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리며 가슴 부위를 내려다보았다. 옷이 한 뼘 쯤 갈라져 있으며 피부에도 깊진 않지만 상처가 나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

“아니다. 장형쪽의 상처가 비교할 수 없이 깊다.”

관전하고 있던 철위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한 눈에 봐도 승패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강유는 옅은 자상을 입은 반면 장흔은 어깨가 앞뒤로 관통당하는 상처를 입어 삽시에 상체가 피로 물들고 있었다.

(철위사를 상대해서 이겼네.)

강유도 상처를 입긴 했지만 대단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이 새끼...”

장흔은 관통상을 입은 왼쪽 팔을 축 늘어뜨리며 강유를 노려보았다.

그자는 수치심과 분노로 치를 떨면서도 왼쪽 어깨의 상처가 가볍지 않아서 경거망동하지는 못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이번에는 내가 상대해주겠다.”

창!

또 한명의 철위사가 이를 갈며 칼을 뽑았다.

“그만 둬라.”

그자가 강유를 공격하려는데 사우가 저지했다.

“대주님! 하지만...”

“최윤, 네가 나서봤자 결과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몇 명이 협공 하지 않는 한 쓸데없이 피만 볼 뿐이니 물러서도록 하라.”

“예...”

사우가 나서자 최윤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철위사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물러섰다.

“네놈, 소요신군 강조와 무슨 관계냐?”

사우는 수하들 대신 강유와 마주 서며 물었다.

“무슨 소리요?”

강유는 내심 움찔하며 부인하려고 했다. 자신의 정체가 밝혀져 봐야 좋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발뺌해봤자 소용없다. 방금 전 네놈이 사용한 무공이 소요신군의 절기인 소요보법과 붕정검법이라는 걸 알아봤으니...”

사우는 음산하게 웃으며 강유는 노려보았다.

“소요보법과 붕정검법!”

“그건 칠절의 첫째인 소요신군 강조의 독문절기 아닌가?”

다른 철위사들도 비로소 장흔이 패한 이유를 깨닫고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일이 커져버렸다. 자칫하다가는 우리 집안이 제왕성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강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기왕에 정체가 들통 난 마당에 발뺌을 할 수도 없다.

“과연 제왕성 철위사대 대주의 안목은 비범하구려. 짐작하시는 대로 소요신군이란 분은 본인의 가친이시오.”

“소요신군의 아들!”

“어쩐지 평범하지 않다 했더니...”

강유의 시인에 철위사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상대가 칠절중 한명의 아들이라면 경솔하게 상대할 수는 없다.

“...”

강유의 정체를 안 진상파의 눈에도 이채가 반짝였다.

“소요신군 강조가 제법 빼어난 아들을 두었군.”

사우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아비의 얼굴을 봐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도록 하마.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물러난다면 네놈이 오늘 우리 제왕성에 죄를 지은 일은 없도록 하겠다.”

“유감스럽게도 대주의 호의는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사우의 말에 강유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이...”

“냉혈철심이라는 별호를 지니신 대주님께서 파격적으로 호의를 베풀고 계시거늘...”

철위사들은 분노하여 강유를 노려보았다.

사우도 불쾌한 표정으로 이마를 찡그렸다.

“만일 저분 소저와 함께라면 떠날 수도 있겠소이다만...”

강유는 진상파를 돌아보며 말했다.

“흐흐흐! 좋다 좋아. 네놈이 본좌로 하여금 소요신군과 원수지간이 되게 만드는구나.”

스릉!

사우가 음산하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하지만 철위사대 대주가 되어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을 핍박했다는 뒷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먼저 십초를 공격할 기회를 주겠다. 물론 본좌는 오직 방어만 할 것이고...”

치직!

사우가 검을 한 바퀴 휘두르자 그자를 중심으로 직경 다섯 자 쯤의 원이 그려졌다.

(검기(劍氣)...)

강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사우의 검에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뻗어 나와 바닥에 원을 그린 것을 알아본 때문이다.

검기라 불리는 그 기운은 직접 닿지 않아도 표적을 살상하는 힘을 지녔다.

당연히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검법이 검기를 구사할 수 있는 정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냉혈철심 사우가 그중 한명인 것이다.

강유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십초 안에 본좌로 하여금 이 원 밖으로 밀려나게 만들거나 네놈의 검이 옷자락에라도 닿으면 진소저를 데리고 떠나도 좋다.”

검기로 바닥에 원을 그린 사우가 비웃는 표정으로 강유를 보았다.

강유는 사우가 자신은 얕보고 있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자존심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우는 자신의 아버지 소요신군에 필적하는 고수다.

“지금 그 말 잊지 마시오.”

슈학!

강유는 일갈과 함께 벼락같이 검을 찔러갔다. 그의 이 일초는 아주 빠르고 강력해서 철위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제일초!”

캉!

철위사들의 걱정과 달리 사우는 강유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냈다.

캉! 카캉!

강유가 붕정검법으로 맹렬히 공격을 이어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우는 강유의 일방적인 공격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냉혈철심이라는 자신의 별호가 그저 모질고 독한 성격 때문에 붙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목숨이 오가는 대결에서도 그의 평정심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반응은 전광석화 같았다.

강유가 어떤 식으로 공격해도 사우는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반응했다.

사우가 철위사대의 대주가 된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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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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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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