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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2)

 

 

대안탑은 총 칠층이다.

각층의 높이는 삼장(三丈;9미터)이나 되어 천장이 까마득히 높게 느껴진다.

임청우는 난간을 잡고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수십 번의 힘든 걸음이 위쪽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더 이상 계단이 없는 것을 느끼고서야 임청우는 자신이 이층으로 올라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다시 계단을 찾아 올라갔다.

눈이 어둠에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어딘가로 빛이 흘러들어오는 것인지 삼층에 이르자 희미하게나마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층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삼층에는 수많은 서가(書架)들이 열을 지어 서있었다.

임청우는 불경은 구경해본 적도 없는지라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어느 서가를 살펴보고 더듬어 보아도 단 한권의 책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던 불경들은 모두 어딘가로 옮겨지고 먼지 쌓인 서가들만 남아있는 것이었다.

더 구경할 것도 없었다.

임청우는 다시 사층으로 올라갔다.

사층이라고 해서 삼층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역시 텅 빈 서가들만이 근 백 여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휘유! 저 많은 서가에 불경이 가득 꽂혀 있었다면... 대체 몇 권이나 됐을까?”

임청우는 서가에 꽂혀있었을 불경들의 숫자를 생각하며 감탄했다.

하지만 대안탑에 자기가 볼 것이라고는 빈 서가들뿐인가 싶어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승려들이 불경 번역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사방 벽에 하나씩 나있는 창문은 모두 벽돌로 막혀있다.

아늑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마치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오층을 지나고 육층으로 올라올수록 점점 더 밝아졌고, 마지막 칠층에 올라섰을 때는 밖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밝기가 되었다.

천장을 올려다 본 임청우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안탑의 천장은 삼각형의 판자를 여러 장 엇갈리게 기대놓은 형태였다. 뾰족한 윗부분은 단단히 맞물려 있지만 아래쪽은 상당히 넓게 벌어져 있어서 사람 한명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천장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비와 눈은 들어올 수 없지만 바람과 빛은 그대로 통과한다.

위로 올라올수록 밝아진 이유는 바로 그같은 천장의 구조 때문이었다.

임청우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기진한 몸을 이끌고 칠층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다.

그 사이에 해는 졌고 대신 달이 떠올라 창백한 달빛이 지붕에 나있는 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한데 달빛 덕분에 자세히 볼 수 있는 칠층의 구조는 다른 층들과 달랐다.

서가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대신 네 좌의 불상이 동서남북 방향으로 놓여있으며 가운데에는 임청우의 키만큼 큰 청동으로 만들어진 향로(香爐)가 세 발로 버티고 서있었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불상은 석가여래불(釋迦如來佛)이었으며,

서쪽에 있는 것은 왼손을 든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고,

남쪽에 있는 것은 두 손을 가슴에 붙인 비로자나여래(毘盧蔗那如來)이며,

북쪽에 있는 것은 두 손을 나누어 들고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였다.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청동향로의 아랫부분에는 황동을 입혀서 만든 연화(蓮花)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로 말미암아 연꽃무늬는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다.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 대안탑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이 정도였다.

임청우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선선한 밤바람을 맞으며 투덜거렸다.

“하다못해 현장법사께서 쓰셨던 의자라도 구경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겨우 불상 넷과 향로 하나가 전부라니...”

실망하자 허기가 더욱 심하게 밀려왔다.

서있을 힘조차 없어진 임청우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바로 그때 천장에 난 틈으로 스며들어온 달빛이 비로자나여래의 이마를 비추었다.

그러자 비로자나여래의 백호(白毫:불상의 미간에 박혀있는 보석)가 빛을 발하며 향로의 한 부분을 비추었다.

헌데 백호를 통해 달빛이 반사된 향로 표면에는 물결이 일렁이듯 희미하게 글씨가 나타났다.

“어!”

임청우는 그 신비한 광경에 벌떡 일어섰다.

 

<관표(觀表)>

 

향로로 다가가 살펴보니 단 두자인 글씨는 이러했다.

“관표? 겉을 보다? 이게 무슨 뜻이지?”

임청우는 나직하게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마치 화두를 받은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면서 글씨는 사라져 버렸다.

(비로자나불의 백호에서 비친 빛이 글씨를 만들었다면 다른 불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임청우는 흥미가 일었다.

(다음번에는 달빛이 아미타여래를 비출 것이다. 그때 무슨 글씨가 나타나는지 봐야겠다. 아마 관표에 이어지는 글일 것이다.)

그는 기대에 차서 달이 움직여 아미타여래를 비추기만을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달빛이 마침내 아미타여래를 비추었다.

임청우는 침을 삼키며 청동향로를 응시했다.

달빛은 아미타여래의 백호에 반사되어 청동향로에 비춰졌다.

그리고 임청우의 짐작대로 두자의 글씨가 물결이 일렁이듯이 나타났다.

 

<망피(望皮)>

 

나타난 글자는 이러했다.

임청우는 먼저 나타났던 <관표>와 함께 읽어 보았다.

“관표망피(觀表望皮)? 겉을 보는 것은 껍질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지금까지 내가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을 지켜보고 적어놓은 듯한 글이로군.”

임청우는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순서상 달빛이 다음으로 비출 대상은 약사여래였다.

임청우는 끈기를 갖고 달빛이 약사여래를 비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삼경이 넘어가도 달빛은 약사여래를 비추지 않았다.

심지어 달빛은 약사여래뿐 아니라 석가여래도 비껴갔다.

“계절에 따라서 달이 움직이는 길도 조금씩 달라진다는데 지금은 약사여래와 석가여래에게 달빛이 닿지 않는 때인 모양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확인한 임청우는 실망했다.

지치고 낙담한 임청우는 청동향로의 세 다리 중 하나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더 이상 신경을 쓸 대상이 없어지자 허기가 극심하게 느껴졌다.

(관표망피... 관표망피...)

임청우는 허기를 잊을 목적으로 향로에 나타났던 글씨들에 정신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임청우의 머릿속으로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겉을 보는 것은 껍질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대구(對句)는 <속을 보는 것은 알맹이를 보는 것이다!>가 아니겠는가?)

임청우는 벌떡 일어났다.

(진짜 알맹이를 보려면 속을 보라는 뜻이다!)

임청우는 흥분하며 청동향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설마하니 보라는 속이 불상의 속은 아닐 테고... 이 향로의 속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노자(老子)도 좋은 책은 명산(名山)에 수장(收藏)한다고 했듯이 옛사람들은 책을 숨기기 좋아했다. 어쩌면 현장법사께서는 이 향로 속에 가장 귀중한 책을 숨겨놓았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자기의 짐작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없는 힘을 쥐어짜 자기 키만한 향로 위로 기어 올라갔다.

향로의 둥그런 배 부분의 직경은 여섯 자가 넘지만 입구는 상당히 좁아서 직경이 채 두자가 안된다.

향로 입구에 올라앉은 임청우는 속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둥근 항아리 형태인 향로 안쪽은 너무 어두워서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이렇게 큰 향로에 향불을 피우는 것은 거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임청우는 향로의 바닥을 살펴보기 위해 기웃거리며 생각했다.

이 향로는 너무 커서 향을 태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어둡고 깊은 향로 속은 마치 어머니 뱃속 같다.

위에서 들여다보아서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들어가서 살펴보자.)

향로 입구에 웅크리고 있던 임청우는 몸을 일으켰다.

향로가 깊긴 하지만 자기키보다는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휙!

임청우는 주저 없이 향로 속으로 뛰어 내렸다.

헌데 그는 향로의 입구가 상당히 좁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캉!

왼손에 들고 있던 우협 장백승의 청강검이 향로 주둥이에 가로로 걸려버렸다.

“억!”

뛰어내린 기세와 체중에 의해 홱 채여지면서 왼팔이 어깨로부터 쑥 빠져버렸다.

어깨와 팔꿈치가 시큰둥해지면서 힘이 하나도 없어졌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바보같이...!”

향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에게 화를 내며 오른손으로 왼팔을 주무를 때였다.

빡!

향로 주둥이에 걸려있던 청강검이 떨어지면서 임청우의 머리 꼭대기 백회혈(百會穴)을 강타했다.

백회혈은 인체의 급소중의 급소다.

또한 정강(精鋼)으로 만들어진 청강검의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악!”

백회혈에 불똥이 튀는 듯한 충격을 받은 임청우는 향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정신을 잃고 웅크린 그의 모습은 마치 어머니 배속에 든 태아와도 같아 보였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으으으! 정수리리가 뚫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임청우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엇갈린 구조의 지붕 틈 사이로 검은 하늘에 박혀있는 금싸라기 같은 별들이 보인다.

(아직 밤이로구나.)

임청우는 뜨뜨 미지근한 머리로 손을 가져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신을 잃었던 그 밤인지 아니면 하루나, 또는 그 이상을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들어 올리려던 왼팔이 시큰해지면서 하마터면 다시 졸도할 뻔 했다.

다쳤던 팔이 부어올라 소매가 팽팽해질 정도가 되어 있었다.

(큰일이다. 치료하지 않으면 팔을 잘라야 할지도 모르겠다.)

놀란 몸이 뜨거워지면서 열이 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때는 한 여름이다.

여름의 융성한 화기(火氣)는 열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이것은 겨울이 한기(寒氣)가 융성한 것과 마찬가지다.

혹자는 겨울이 추울수록 불이 자주 난다고 하는데 그것은 한기가 지나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려는 자연의 오묘한 법리라고 할 수 있다.

고열은 종종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열을 내리지 않으면 정신이 이상해져 버리거나 죽게 될 것이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농산의 깊은 산중에서 살아왔지만 어머니의 병 때문에 의서(醫書)도 여러 권 구해 읽었었다. 덕분에 의원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지간한 병증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다.

(침이라도 있으면 꽂아보련만...)

임청우는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들어갔다.

지금의 그에겐 흔한 쇠침 하나도 없었다.

열을 내릴 수단이나 방법이 전무한 것이다.

이 계절에 얼음을 구하는 것은 얼음 창고를 가지고 있는 황궁이나 고관대작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찬물로 몸을 식히기엔 가뭄이 너무 심하다. 마실 물도 구하기 어렵거늘 몸을 식힐 물이야 말해 무엇 하랴?

(큰일을 해보려고 했는데 겨우 향로 속에서 죽어 땅에 묻히지도 못하는 몸이 되는구나.)

임청우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누가 있어서 나 임청우가 세상에 존재했던 것을 알기나 할까?)

임청우는 한탄하면서 향로의 벽에 기댔다.

신열(身熱)이 머리까지 치밀어 올라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정신을 잃으면 안되는데...)

임청우는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불현 듯 머릿속으로 비련곡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임청우는 철선동시가 쇠 부채로 뿜어낸 한기를 뒤집어쓰고 하마터면 까무라칠 뻔 했었다.

하지만 북두무랑에서 본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리자 정신이 돌아왔었다.

(이번에도 그때 같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임청우는 멀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렸다.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고열 때문에 집중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청우는 점차 바닥도 없고 천장도 없으며 방향과 시간조차 없는 별의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멀리서 북두칠성이 그 국자같은 오묘한 형상을 뽐내고 있었다.

북극성 쪽으로 국자의 손잡이 끝을 향한 채 천천히 돌아가는 북두칠성을 보고 있자니 흐려졌던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흐릿하던 시야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비련곡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별의 바다를 한 차례 유영하자 정신이 맑아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정신은 회복되었지만 육신의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몸은 더 뜨거워져 불덩이 같고 어깨에서 빠진 왼쪽 팔에서는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통증 때문이 아니라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향로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태였다.

(내 인생도 여기까지로구나.)

임청우는 허탈해졌다.

어머니의 모진 학대와 살해위협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 깊은 향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다.

임청우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가능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죽음에 맞서 발버둥치기 보다는 조용하게 순응하고 싶었다.

“...?”

헌데 늘어뜨린 손바닥에 우둘투둘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그 감각은 마치 주물로 부어 놓은 활자(活字)를 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하면서 조금 더 더듬어 보았다.

만져지는 것은 정말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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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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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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