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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마녀(魔女)의 연심

 

 

당혜선의 한 맺힌 얘기가 드디어 끝을 맺었다.

"...!"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고검추의 얼굴은 밀랍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주먹은 너무 세게 움켜쥐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였다.

(나의... 나의 아버지가 용서받지 못할 패륜아였다니...)

고검추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어머니나 다름없는 사모를 겁탈한 패륜아가 아버지인 것이다.

무슨 낯으로 세상 사람들을 본단 말인가?

주르르...

질끈 감은 고검추의 두 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추야...)

당혜선은 그런 고검추의 모습을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검추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낳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라고 했다.

누가 뭐라 해도 고검추는 당혜선 자신의 아들인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태연할 수 있는 어머니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괴로워 할 것 없다 추아야. 사형은 결코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니니...”

당혜선은 고검추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네 아버지는 어떤 사악한 자의 음모에 희생되신 것이란다."

그녀의 말에 고검추는 흠칫하며 두 눈을 번쩍 빛냈다.

"그... 그 사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 자는..."

당혜선의 눈 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또 다시 심각한 갈등을 겪는 듯했다.

그같은 태도로 미루어 보아 당혜선은 음모자가 누구인지 아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말하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인간이 음모자임을 아셨기 때문에 구차한 변명도 하지 않고 자결하셨을 것이다.)

고검추는 당혜선이 음모자가 누군지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어머니... 제발... 소자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아버지를 음해한 자가 누구인지를..."

고검추는 간절하게 애원했다.

하지만 당혜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미를 용서하거라.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가 없구나."

그녀는 처연한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녀곡을 떠날 때 네게 준 나무상자는 네 생모 대려군 언니가 남긴 것이니 소중하게 간직하도록 해라."

말을 마친 당혜선은 천천히 일어났다.

고검추는 당혜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

몸을 일으킨 당혜선은 물기 가득한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았다.

(사형을 위해 고이 지켜온 정조를 유린당한 마당에... 더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녀의 창백한 뺨으로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몸에 남아있는 사신각주의 흔적이 얼마 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실감나게 한다.

무엇보다도 당혜선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사신각주에게 고문당하며 보인 자신의 반응이었다.

그 장면을 양아들인 고검추에게 보였다는 사실이 당혜선을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사형... 이제 소매가 사형을 만나러 갈 테니 기다려주세요.)

당혜선의 입가로 한 줄기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추아야. 절대... 무슨 일을 겪어도 좌절해서는 안된다."

화락!

그 말을 남기고 당혜선은 돌연 청룡탄 아래로 몸을 던졌다.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고검추는 순간적으로 현실감각을 상실했다.

(어머니가 왜 절벽에서 뛰어내리신 것일까?)

고검추는 멍한 표정으로 당혜선이 뛰어내린 절벽만 바라보았다.

"어... 어머니...!"

그러다가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은 고검추는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청룡탄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어디에서도 당혜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콰아아!

그저 오십 장이 넘는 까마득히 높은 절벽 아래로 청룡탄의 격랑이 허연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으아아아!"

고검추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단애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 안됩니다 어머니!”

고검추는 절벽을 내려다보며 목 놓아 울부짖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도 당혜선을 따라 투신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만 본 자신에게 살아있을 자격은 없다.

하지만 고검추는 끝내 청룡탄으로 뛰어내리지는 못했다.

두렵거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복수... 복수해야만 한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고검추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

(아버지를 위해한 자...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신각주... 네놈들을 내 손으로 쳐죽이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니다.)

고검추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맹세하며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어머니를 따라 죽을 수 없는 것은 복수 때문이다.

자신마저 죽어버린다면 누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해주겠는가?

결의를 다지는 고검추의 뇌리로 문득 스쳐가는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음성의 주인은 그윽한 눈매에 새하얀 은발을 지닌 여인이었다.

(은발마희!)

고검추의 눈이 새파랗게 번득였다.

(어머니 말씀대로 그분이 그렇게 무서운 분이라면... 나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고검추의 눈에 바닥에 뒹굴고 있는 핏빛 화살이 들어왔다.

초혼전!

사신각주가 당혜선의 하복부에 꽂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고검추는 초혼전을 천 조각으로 감싸서 집어들었다. 초혼전에 묻어있다는 백일취가 피부에 닿으면 안된다.

(언제고... 이것으로 네놈의 심장을 쑤셔 주겠다.)

초혼전을 노려보며 맹세한 고검추는 몸을 돌려 어두워지는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자신을 지켜보는 외눈의 어떤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

 

밤이 되었다.

하지만 하늘에는 보름달에 가까워진 달이 떠있어 그리 어둡지는 않다.

팽가촌 남서쪽 삼십여 리 쯤에는 은밀한 협곡이 하나 있다.

무성한 잡초로 뒤덮인 협곡의 끝은 십여 장 높이의 석벽으로 막혀 있다.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른 그 석벽의 대부분은 수많은 등나무 넝쿨로 뒤덮여 있다.

"허억! 헉!"

탁! 타탁!

숨이 턱에 찬 채 그 협곡으로 달려 들어오는 소년이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나타난 소년은 고검추였다.

“허억 헉!”

고검추는 협곡 막다른 곳에 서있는 석벽 앞에 멈춰서며 가쁜 숨을 추스렸다.

서걱...

얼추 숨을 고른 고검추는 떨리는 손으로 석벽을 뒤덮고 있는 등나무 줄기들을 젖혔다.

무성한 등나무 줄기들이 헤쳐지자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허리를 숙이고야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동굴이다.

하지만 동굴은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점 넓어져 이윽고 어른 남자가 서서 들어갈 정도의 넓이가 된다.

그러다 문득 동굴이 끝이 났다.

동굴의 막다른 곳에는 한 칸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석실 바닥에는 보드라운 마른 풀이 깔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석실 구석에는 몇 가지의 가재도구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고검추는 이 동굴을 우연히 발견하여 자신만의 비밀 장소로 꾸면 놓은 것이다.

(헉!)

헌데 막 석실로 들어서던 고검추는 깜짝 놀랐다.

석실 한쪽에 놓인 탁자 위에서는 황촉불이 흐릿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촛불도 고검추가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

헌데 마른 풀이 깔린 석실 바닥에는 한 명의 여인이 자는 듯 반듯이 누워 있었다.

마천루의 루주라는 은발마희 옥여상이었다.

그녀는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석실 바닥 가득히 흩어놓은 채 자는 듯 누워 있었다.

고검추가 놀란 것은 자신이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옥여상이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아주머니!"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옥여상이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검추는 급히 옥여상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옥여상에게서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 설마 내상이 도저서 타계하신 것일까.)

고검추는 떨리는 눈으로 옥여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와는 단 한번 만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런 그녀가 타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고검추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옥여상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그녀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동굴로 들어오기 전에 목욕을 했는지 옥여상의 검은 옷과 새하얀 살결을 물들이고 있던 피는 깨끗이 씻겨있다.

덕분에 역겨운 피 냄새 대신 향긋한 살 내음이 느껴진다.

그와 함께 고검추의 귓가로 뭉클한 육봉의 감촉이 느껴졌다.

헌데 고검추가 옥여상의 가슴에 귀를 댄 직후였다.

"호호호!"

옥여상은 까르르 웃으며 와락 고검추를 끌어안았다.

"읍!"

그 바람에 고검추의 얼굴은 옥여상의 육중한 젖가슴 사이에 파묻혀 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옥여상의 다리도 영사처럼 고검추를 휘감는 것이 아닌가?

몸 아래 느껴지는 더할 수 없이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소년의 피를 단번에 비등시켰다.

"노... 놓아 주십시오!"

당황한 고검추는 몸부림치며 옥여상의 젖가슴에서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호호호! 내가 죽은 줄 알고 겁이 난 모양이구나 겁쟁이 도련님!"

옥여상은 교소를 터뜨리며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팔 다리는 여전히 고검추를 휘감고 있었다. 비록 부드럽지만 엄청난 힘이 깃들어있는 옥여상의 팔 다리를 고검추가 뿌리칠 수는 없었다.

"장난이 지나치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옥여상의 몸에 올라탄 자세인 채로 퉁명하게 말했다.

"...!"

고검추의 말을 들은 옥여상의 봉목에 은은한 떨림이 일었다.

 

옥여상은 지금까지 냉혹하고 비정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철이 든 이래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윈 옥여상을 거둬준 스승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식이 없었던 스승은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 옥여상 외에도 여러 명의 소년과 소녀들을 제자로 받아들였었다. 옥여상같은 고아는 물론이고 자질이 뛰어난 아이는 납치해서라도 제자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끼리 경쟁을 시켰다. 수십 명의 제자들 중 오직 한 명만이 살아남아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이라 공언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스승이 평생을 걸쳐 세운 거대한 세력의 주인이 되기 위해 소년과 소녀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했다.

소년과 소녀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악귀 나찰이 되어 서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그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 옥여상이었다. 발군의 자질 뿐 아니라 냉철한 이성까지 갖춘 덕분이었다.

약속한 대로 스승은 옥여상을 후계자로 삼아 자신이 이룬 기업, 마천루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마천루의 루주가 되었다고 옥여상의 고단했던 삶이 편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시련과 고난은 마천루의 루주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마도 무림의 맹주라는 이름답게 마천루에 속한 인간들은 하나같이 거칠고 포악했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그런 자들을 통제하고 복종시키는 것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여상은 해내었다.

일 처리에 있어서 냉혹하고 가차 없으면서도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여 마천루 소속 마인들의 마음을 장악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심력의 소모로 머리가 백발이 되었지만...

여자의 몸으로 전 마도 무림을 호령하는 여종사가 된 것은 옥여상이 처음이었다.

마도 무림뿐 아니라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옥여상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그녀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러다가 고검추라는 이 어린 소년을 만나 처음으로 따뜻한 인간의 정을 느낀 것이다.

 

"정말... 나 때문에 놀랐느냐?"

옥여상은 확인하려는 듯 물으며 물기 어린 시선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물론입니다. 다시는 저를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고검추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옥여상의 눈 꼬리가 다시 미미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그녀의 망막이 뜨거운 물기로 덮였다.

"아아... 착한 것!"

옥여상은 치미는 감격을 참지 못하고 고검추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헉!)

고검추는 다시 옥여상의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얼굴에 짓눌려지는 부드러운 육질과 콧속으로 밀려드는 관능적인 살 냄새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아... 안돼!)

고검추는 추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옥여상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옥여상의 두 다리가 연체동물처럼 휘감고 있어서 옴쭉도 할 수 없었다.

(어려 보여도 충분히 사내 노릇을 할 수 있겠구나.)

아랫배에 느껴지는 어떤 용틀임에 옥여상의 옥용에는 노을 같은 홍조가 일었다.

(그렇다면 내가 주려는 선물을 무리없이 받을 수 있겠지.)

고검추의 상태를 확인한 옥여상은 어떤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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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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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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