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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첫 번째 살인

 

 

 

“그럼 그렇지!”

“역시 대주님이시다.”

잠시 마음을 졸였던 철위사들은 안도하며 환호했다.

그자들이 보기에도 강유의 공격은 실로 맹렬했던 것이다.

반면 진상파의 얼굴은 점점 초조한 기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녀가 제왕성으로 끌려가지 않을 유일한 가능성은 강유가 사우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유는 전력으로 공격하는 것같은 데도 사우를 직경 다섯 자쯤의 원 안에서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비참해질 운명인 것같구나.)

진상파가 체념하며 소리없이 한숨을 쉴 때였다.

“크왓!”

강유가 벼락같이 기합을 토해내었다.

가가강! 슈학!

그와 함께 강유의 검이 파도치듯 너울거리는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며 사우를 쓸어갔다. 붕정검법의 초식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이고 현란한 대붕전시(大鵬展翅)가 펼쳐진 것이다.

사우도 이번에는 표정을 굳히며 검을 휘둘러 순간적으로 열 번을 베고 다섯 번을 찔렀다.

카카캉! 빠카캉!

서로의 검이 섞이면서 요란한 금속성이 터지고 시퍼런 불꽃이 작렬했다.

강유가 일으킨 수많은 검의 그림자는 베어지거나 튕겨졌다.

콰드득!

하지만 사우 역시 상당한 압박을 받은 듯 두 발이 뒤로 밀려서 하마터면 원 밖으로 나갈 뻔했다.

“방금 것이 제십 초! 이제 네놈이 살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부악!

밀려나던 몸을 멈춘 사우가 폭발적인 기세로 강유에게 쇄도하며 비스듬히 검을 내리쳤다.

강유가 방금 전에 펼쳤던 대붕전시가 사우가 양보한 십초의 공격중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쩍!

강유를 향해 비스듬히 내려치는 사우의 검 끝에서 시퍼런 검기가 내뻗힌다,

헌데 그 검기의 형태가 특이했다. 직선으로 내리쳐지던 검기의 끝 부분이 돌연 홱 꺾이며 강유를 베어온 것이다.

(위험...)

흡사 낫을 연상케 하는 사우의 검기가 날아들자 강유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스팟!

강유는 사력을 다해 뒤로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러 방어하려고 했다.

캉! 쩌억!

하지만 사우의 검기는 강유의 검에 막히는 순간 다시 홱 방향을 틀며 목으로 파고들었다.

낫의 형태를 한 검기가 거듭 궤적을 바꾸니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다.

“!”

패액!

거의 동시에 강유는 어떤 영감을 느끼고 몸을 홱 틀었다.

서걱!

강유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 사우의 검기 끝이 강유의 목 대신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푸학!

강유는 불에 덴 듯 화끈한 감각과 함께 가슴에서 피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목이 잘리는 것은 면했지만 가슴에 상당히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악!”

보고 있던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달마독명안 덕분에 살았다!)

휘릭!

강유는 단번에 삼장 밖으로 물러나며 몸서리를 쳤다.

사우의 이번 공격에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은 수박 겉핥기로 깨우친 달마독명안 덕분이었다.

위기의 순간 달마독명안의 예지력(豫知力)이 발동하여 가장 가벼운 피해를 입는 쪽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꼴좋다 강가야!”

“제왕성에 맞선 것을 후회하며 죽어라.”

철위사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

반면 비명을 질렀던 진상파는 두 손을 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끼이...

사람들과 함께 관전하고 있던 섬전초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시 자기 꼬리 다듬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물인 그놈이 보기에도 강유와 사우의 대결은 결말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놈! 운이 좋았구나! 하지만 그 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두고보자.”

사우는 강유에게 흐르듯 다가서며 검을 휘두르고 그었다.

쩌억! 부악!

그때마다 사우의 검에서 끝이 낫처럼 휘어진 검기가 내뻗혀 강유를 베어왔다.

캉! 카캉!

강유는 소요보법을 극한까지 펼치면서 검을 휘둘러 사우의 공격을 막았다.

푸학! 서걱!

치명상은 어찌어찌 피하지만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긴다. 어설픈 달마독명안으로는 사우의 변화막측한 검법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삽시에 강유의 몸은 피로 물들었다.

사우의 검기에 베어져 생기는 상처에서 피를 뿜어대는 강유의 모습은 끔찍한 것이었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고통만 길어질 뿐이다. 포기하고 목을 늘어트려라.”

스악! 쩍!

사우는 냉혹하게 웃으면서 검을 휘둘러 강유를 몰아붙였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겨우 겨우 사우의 공격을 막고 피하면서 강유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아직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출혈이 과다하다는 게 문제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급격히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결국 사우의 검에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른 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인 건가?)

공포와 절망이 강유의 온몸을 휘감았다.

헌데 절체절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강유의 뇌리에 섬전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 검법의 이름은 아비도 모른다. 그래서 임의로 필살일초(必殺一招)라고 명명했다.>

<일단 펼쳐지면 반드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고 마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써선 안된다.>

 

바로 안탕산을 떠날 때 아버지 강조가 자신에게 필살일초라는 검법을 전수하며 하던 장면이었다.

(바로 지금이다! 아버지가 구명(救命)의 절초(絶招)로 가르쳐주신 그 검법을 사용할 때가...!)

부악! 휘익!

강유는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러 사우의 공격을 막은 후 훌쩍 물러섰다.

이번에도 사우의 검기를 완전히 막지 못해서 왼쪽 뺨에 반 뼘 가량의 상처가 생겼다.

하마터면 얼굴에 치명상을 입을 뻔 했지만 그 대가로 강유는 사우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어떠냐? 슬슬 네 운명이 어찌 될지 실감이 가겠지?”

사우는 얼굴까지 피로 물들인 채 비틀거리는 강유를 보면서 음산하게 웃었다.

“저는 상관하지 말고 떠나세요.”

보다 못한 진상파가 외쳤다. 무공 방면에는 그리 정통하지 않은 그녀가 보기에도 이 승부의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퇴로를 차단하자!”

“네놈은 살아서 여길 떠나진 못한다!”

스슥! 슥!

진상파의 안타까운 마음을 비웃듯 철위사들은 강유의 뒤쪽으로 이동하며 퇴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이어진 강유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달아나거나 피하려는 시도 대신 오히려 사우에게 검을 겨누며 다가간 것이다.

“...”

그걸 본 사우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저 애송이놈이...”

“달아나려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투지 하나는 감탄스러운 놈이로군.”

철위사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강유의 행동에 진상파의 미간도 모아졌다.

징!

그때 사우를 향해 내밀어진 강유의 검이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최후의 발악인 것이냐?”

사우는 자신에게 다가서는 강유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네놈이 어떤 한 수를 숨기고 있는지 견식해 보도록 하자.”

비록 웃고 있긴 하지만 사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착 갈아 앉은 강유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불길함이 느껴진 때문이다.

사우는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크아!”

그 직후 사나운 기합과 함께 강유가 벼락같이 검을 내뻗었다.

쩌엉!

사우를 향해 내뻗치는 강유의 검 검신(劍身)이 나선형으로 홱 꼬인다.

(이 검법은 설마...)

소스라치게 놀란 사우는 전력을 기울여 검을 휘둘렀다.

쩌억! 가앙!

사우의 검에서 몇 가닥의 검기가 확 내뻗혀 강유를 찍어갔다.

한 가닥도 아니고 여러 가닥의 검기가 날아드니 강유가 피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보였다.

“흑!”

그걸 알아차린 진상파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벌어졌다.

투쾅! 텅!

나선형으로 꼬이면서 내질러지는 강유의 검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잠경(潛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사우의 검기들을 간단히 튕겨버린 것이다.

사우 자신의 공격은 허무하게 무산되고 강유의 검은 벼락같이 가슴으로 날아든다.

사우는 반사적으로 검을 가슴 앞에 세워서 강유의 검을 막으려 했다.

쩍!

검신이 나선형으로 뒤틀린 강유의 검극(劍極), 즉 검의 끝 부분이 사우의 검날과 접촉했다.

빠캉!

다음 순간 사우의 검은 그대로 유리처럼 깨져 흩어졌다.

“헉!”

명검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자신의 검이 허무하게 깨지자 사우는 기겁하며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늦었다.

사우의 검을 간단히 깨트리고 다가선 강유의 검 검극은 이미 사우의 가슴에 닿아있었다.

화악!

뒤틀리는 강유의 검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파괴력이 사우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결과는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펑!

폭발과 함께 사우의 가슴과 등으로 이어지는 구멍이 났다.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몸통의 앞뒤로 매끈하게 나버린 것이다.

푸학!

사우의 등쪽으로 난 구멍을 통해서 잘게 다져진 살과 뼈와 장기들이 확 터져 나갔다.

“...!”

“...!”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놀라 숨이 멎었고 꼬리를 다듬고 있던 섬전초도 온몸을 덮고 있는 황금색 털을 고추 세우며 굳어졌다.

너무도 충격적인 결말이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컥!”

털썩!

강유는 피를 왈칵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에 구멍이 난 사우는 비틀거리며 서있는데 정작 사우에게 치명상을 입힌 강유가 먼저 주저앉은 것이다.

(경... 경맥이 뒤틀려서 끊어지려 한다.)

강유는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인의 손이 몸 전체를 움켜잡고 젖은 수건에서 물을 짜듯 비틀어대는 기분이다.

필살일초는 단전에서부터 진기를 나선형으로 비틀며 끌어올리는 운기법을 포함하고 있다.

내공의 근원으로부터 비틀리며 발휘되는 힘이기에 부딪히는 건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신 구사하는 쪽도 경맥이 뒤틀려서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된다.

자칫 일신의 경맥이 모두 터지거나 끊어져서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게 필살일초였다.

“끄륵! 네놈... 네놈이 어떻게 마교의 마검칠식(魔劍七式)을...”

주저앉은 강유를 노려보는 사우의 입과 코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마교의 마검칠식?)

강유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끄윽... 무후님을 시해한 게 네놈 아비...”

비틀거리던 사우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퍼억!

하늘을 보는 자세로 나뒹군 사우의 몸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절명한 것이다.

“대... 대주님!”

“안돼!”

너무도 충격적인 결과에 넋이 나가 있던 철위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죽일 놈!”

“감히 대주님을 시해하다니...”

“다 함께 공격해서 죽이자!”

철위사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강유를 공격하려 했다.

“잘 생각하시오.”

슥!

강유는 입과 코에서 흘러내린 피를 왼쪽 소매로 닦으며 일어났다.

사우에게 당한 상처도 상처지만 온몸의 경맥이 뒤틀려있는 상태에서 움직이자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하지만 강유는 내색하지 않고 검으로 앞쪽의 철위사들을 겨누었다.

“당신네 대주도 간단히 죽인 내 공격을 받아낼 자신이 있다면 덤벼도 좋소.”

쿠오오오

강유의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음산한 살기는 철위사들의 피를 싸늘하게 식혀버렸다.

자신들이 하늘같이 여기던 대주조차 간단히 죽인 상대다.

철위사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사우를 향해 돌아갔다.

가슴에 사발만한 구멍이 난 채 죽어있는 사우의 시신은 철위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으으...”

“으으...”

철위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더 이상 강유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됐다!)

자신의 협박이 통한 것을 확인한 강유는 내심 안도했다.

지금의 강유는 내, 외상이 심각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상태였다. 만일 철위사들이 일제히 덤빈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진소저! 그만 갑시다.”

강유는 검으로 무사들을 겨누며 진상파에게 말했다.

“그러지요.”

퍼뜩 정신을 차린 진상파는 도도한 자태로 걸음을 옮겨 공터 밖으로 향했다.

강유는 철위사들을 감시하며 진상파를 따라갔다.

다행히 철위사들은 제 자리에 얼어붙은 채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끼이...

다만 섬전초는 눈을 번뜩이며 진상파와 강유를 따라오려고 했다.

“네놈도 잘 생각해라.”

강유는 걸음을 멈추며 섬전초를 노려보았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산 채로 가죽을 홀라당 벗겨버릴 것이다.”

끼이!

강유의 서늘한 눈빛을 접한 섬전초는 등을 활처럼 구부리며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수백 년을 산 영물답게 강유의 말이 결코 헛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영특한 놈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기색이다.)

겁에 질린 섬전초를 돌아보며 강유는 진상파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터를 떠나는 강유의 발걸음은 그러나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사우와의 악전고투로 가볍지 않은 내상과 외상을 입은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유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진짜 원인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었다.

비록 살기 위해서라지만 한 인간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끝냈다는 사실은 강유의 마음을 납덩이처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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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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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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