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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두 가지 선물

 

 

"담세황이란 놈이 내게서 노리고 있는 두 가지 보물이 무엇인지 아느냐?"

옥여상은 꼭 끌어안고 있던 고검추의 머리를 조금 풀어주며 물었다.

"세... 세이경청하겠습니다."

고개를 조금 든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부끄러운 변화를 옥여상에게 들켰음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보물 중 하나는 장보도(藏寶圖)란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고검추의 모습을 본 옥여상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장보도라면 어떤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그린 지도겠군요."

고검추는 흠칫 놀라며 옥여상을 내려다 보았다.

"십칠 년 전, 그다지 친분도 없던 어떤 인물이 인편으로 손수건 한 장을 보내왔었다. 그 손수건 위에는 복잡한 암호가 기재되어 있었는데... 십여 년이 흐른 후에야 그것이 한 자루의 신검을 감춘 장보도인 줄 알게 되었단다."

(신검을 감춘 장보도!)

고검추는 어떤 예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복마신검을 어디에 숨겨 놓았느냐?>

 

사신각주가 자신의 양모 당혜선을 다그치던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아... 아주머니께서 장보도를 보낸 분이 누구입니까?"

고검추는 떨리는 음성으로 옥여상에게 물었다.

옥여상은 야릇한 눈빛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 사내는 내가 장보도를 받은 직후 불미스러운 일로 자결했다고 한다. 정파백도의 차기 맹주로 손꼽히던 철사자 고창룡이 그 장본인이다."

"...!"

고검추의 몸이 다시 한 번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옥여상이 고검추에게 주겠다고 한 장보도는 사신검 중 복마신검을 감춘 장소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보도를 옥여상에게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고검추 자신의 부친인 철사자 고창룡이었다.

 

십칠 년 전, 고창룡은 친분도 별로 없는 옥여상에게 복마신검의 장보도를 보냈었다.

고창룡과 옥여상은 한두 번 얼굴 마주친 정도의 교분밖엔 없었다. 각자 걷는 길이 다른지라 흑백양도를 대표하는 기재들은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사귈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헌데 고창룡이 늙은 하인을 시켜 암호가 적힌 손수건을 옥여상에게 보냈다. 비록 가는 길은 다르나 옥여상이라면 믿을만 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옥여상이 손수건을 전해 받은 얼마 후 고창룡이 패륜아로 몰려 자결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고창룡의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옥여상의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고창룡이 죽음을 예견하고 암호가 적혀잇는 손수건을 보낸 듯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옥여상은 고창룡이 자신에게 손수건을 보낸 사실을 곧 잊어버렸다. 손수건에 적혀있는 암호는 난해해서 해독하기 어려웠으며 마천루의 제이대 루주가 된 직후라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옥여상은 마천루를 훌륭히 영도하여 마도 무림의 맹주라는 지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호천무맹이 봉문한 무림에서 마천루에 맞설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옥여상도 마도제일인을 넘어 중원제일인이라는 찬사까지 받게 되었다.

이룰 만큼 이루었고 큰 우환도 없어서 여유가 생긴 옥여상은 고창룡이 보낸 손수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몇 달에 걸친 연구 끝에 암호가 적혀있는 손수건이 사신검 중 하나를 감춘 장보도임을 알아내었다.

 

(아버지는 어째서 장보도를 전혀 남인 이 분께 보내셨을까? 어머니나 양모님은 물론이고 호천무맹의 원로들 중에서도 믿을만한 분이 계셨을 텐데...)

고검추는 옥여상의 풍만한 몸 위에 엎드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세상이 발칵 뒤집힐 일이로구나. 철사자 고창룡에게 아들이 있었다니...)

옥여상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검추의 경악하는 모습에서 그와 고창룡의 관계를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치 않고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담세황이 노리던 두 가지 보물을 네게 모두 줄 작정이다. 거절하지 않겠지?"

고검추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아니... 고모님!"

"고모..."

고모라는 고검추의 호칭에 옥여상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천애고아인 그녀로서는 누군가에게 친근한 호칭으로 불려진 건 오늘이 처음이다.

“무...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고검추는 옥여상의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 옥여상이 아버지의 지인인 것을 알고 별 생각없이 고모라 부른 것이다.

“무례는 무슨... 너같이 귀여운 조카가 생겨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옥여상은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감... 감사합니다.”

고검추는 꽃잎같이 부드러운 옥여상의 입술을 이마에 느끼며 안도했다.

"헌데 너는 사신검의 장보도 말고 다른 한 가지 보물이 무엇인지나 알고 감사하는 것이냐?"

옥여상은 야릇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팔 다리는 여전히 고검추를 휘감고 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자신이 옥여상의 품에 아기처럼 안겨 있는 것을 의식하며 고검추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옥여상이 옥용을 발그레 물들이며 대답했다.

"그건 바로... 고모의... 처녀(處女)다."

"예엣?"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아연실색했다.

옥여상이 고검추 자신에게 주겠다는 두 번째 보물이라는 게 처녀라니... 고검추로서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두 번째 것은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고모님과..."

고검추는 너무 놀라 말도 채 맺지 못하고 옥여상의 시선을 피했다.

비록 젊어 보이지만 옥여상은 고검추 자신에게 어머니뻘인 중년여인이다.

그런 그녀와 어떻게 교접을 한단 말인가?

"네가 왜 나의 두 번째 선물을 못받겠다고 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래도 반드시 받아 주어야만 한다. 그게 고모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옥여상은 옥용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처... 처녀를 제게 주시는 것이 고모님을 구하는 방법이라니... 무슨 뜻이신지요?"

고검추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었다.

"휴우... 이 모두가 담세황이라는 그 음흉한 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옥여상의 옥용이 분노와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다.

 

은발마희 옥여상에게는 한 명의 사제(師弟)가 있었다.

옥면마성 담세황-!

바로 그 자였다.

동문의 사형제이지만 옥여상과 담세황은 모자지간이라 해야 좋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난다. 옥여상은 마흔 세 살이고 담세황은 스물일곱 살인 것이다.

옥여상이 일찍 시집을 갔으면 담세황 또래의 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사형제면서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담세황은 마천루를 세운 구천마야(九天魔爺) 담백양(潭白楊)의 다소 먼 친척이다.

비록 친척이라 해도 구천마야는 담세황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마도 무림의 맹주인 마천루를 이끌어가려면 탁월한 무공과 영도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담세황의 집안이 역모에 연루되어 멸족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구천마야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담세황의 일가의 식솔 대부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때 구천마야가 유일하게 구해낸 것이 담세황이었으며 당시 여덟 살이었다.

원래 구천마야는 후계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옥여상 외에는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천애고아가 된 담세황이 가엾어서 제자로 받아들였다.

대신 구천마야는 마천루의 차기 루주는 대제자인 옥여상이라는 것을 수시로 천명했다. 옥여상의 위상과 정통성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스승의 그같은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옥여상은 담세황을 친동생인 듯 성심껏 돌보아 주었다.

다만 담세황이 지나치게 영악하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재주가 남다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모든 언행이 계산 끝에 나온 게 느껴져서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집안이 멸족당한 후유증이거니 생각하며 담세황의 행태를 이해하려 애썼다.

옥여상은 담세황을 돌봐주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 스승 역할까지 해야만 했다.

담세황을 제자로 맞아들일 당시 구천마야는 이미 팔순을 넘겨 사실상 은퇴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옥여상이 늙은 사부를 대신하여 담세황을 가르쳐야만 했다.

옥여상과 담세황은 사형제가 아니라 사실상 사제지간이었던 것이다.

최소한 옥여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헌데 삼 년 전 어느 날 사단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외출했다가 돌아온 담세황이 한 권의 오래 된 책을 옥여상에게 주었다. 그 고서는 상고시대의 절기가 실려있는 비급이었다.

 

-헌원태을경(軒轅太乙經)!

 

담세황은 그같은 이름의 비급을 천산(天山)의 어느 빙동(氷洞)에서 얻었다고 했다.

옥여상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헌원태을경이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남겼다고 알려진 비급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원태을경은 황제 헌원씨가 총애하던 소녀(素女)를 위해 지은 비급이다.

황제는 소녀가 헌원태을경을 익혀서 몸을 지키길 원했다. 그런 사연이 있어서 헌원태을경의 무공들은 수비와 보신에 특화되어 있다.

헌원태을경에 수록된 무공들의 정수는 태을강기(太乙罡氣)다.

태을(太乙)은 북극성(北極星)을 의미하며 북극성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한다.

그 태을이 이름에 들어간 태을강기를 완전히 수련하면 생사에 초연해질 수 있다. 온몸의 모공에서 늘 강기가 흘러나와 외부의 충격에 즉각 반응하기 때문이다.

태을강기를 깨트릴 수 있는 무공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을 정도다.

다만 태을강기에는 두 가지 심각한 약점이 있다.

먼저 수련하기가 극히 어렵다.

온몸의 모공으로 강기를 뿜어내려면 온몸의 경맥이 완전하게 뚫려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명이 채 안될 것이다.

즉, 태을강기의 수련 비결을 안다고 해서 누구나 태을강기를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번째 약점은 더욱 치명적이다.

태을강기는 팔만사천 개로 알려진 전신의 모공으로 발산과 수렴을 하는 까닭에 통제하기가 메우 어렵다. 십성에 이르기 전까지는 수련하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속을 제 멋대로 떠도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으니 남에게 빼앗기는 것도 막을 수 없다.

태을강기를 수련중인 인물을 제압하여 채음보양이나 채양보음의 사술을 쓰면 그때까지 축적해놓은 태을강기를 고스란히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담세황, 그 배은망덕한 놈은 내가 사신검의 장보도를 지니고 있는 걸 눈치 챈 것 같았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놈은 내게서 장보도를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온 게 분명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헌원태을경을 얻게 되었으며... 일석이조(一石二鳥)를 노리고 그걸 내게 준 것이다."

듣고 있던 고검추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스스로 태을강기를 익힐 자신이 없었던 그 자는 고모님으로 하여금 태을강기를 수련하게 한 후 갈취할 생각이었겠군요."

옥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 년 가량 수련한 결과 나의 태을강기는 구성(九成)을 넘겼다. 그걸 확인한 담세황은 방심하고 있던 나를 쇄심마장으로 암습했다. 지금으로부터 열하루 전의 일이다."

"도저히 용서 못할 말종이로군요."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분노를 금치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옥여상은 그런 그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나의 처녀가 왜 보물인지 알겠지?"

“예...”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옥여상이 중년을 넘긴 나이임에도 아직 처녀라는 사실과 태을강기를 이전받으려면 그녀와 관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때문이다.

구성 수준의 태을강기를 얻은 후 조금만 더 수련하면 십성에 이를 수 있다. 그럼 어떤 무공에도 다치지 않는 사실상의 불사지체가 된다.

"아...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고모님."

잠시 고민하던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옥여상의 호의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고모가 쉰 살을 바라보는 늙은 계집이라 싫은 것이냐?"

옥여상의 말에 고검추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난처한 듯 더듬거리던 고검추는 이윽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자꾸만 고모님이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어머니 같아서 도저히 무례할 수가 없습니다."

"...!"

고검추의 말을 들은 옥여상의 두 눈에 한 줄기 파문이 일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봉목 가득 뽀얗게 물기가 차올랐다.

"내게도 너같이 착한 아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옥여상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고검추를 꼬옥 끌어안았다.

"마녀라 불리는 나같은 계집을 그렇게 소중하게 대해주니 고맙구나."

"고모님..."

옥여상의 품에 안긴 고검추의 가슴도 뜨거워졌다.

"하지만 너는 반드시 고모의 처녀를 취해야만 한다. 그것이 고모와 천하무림을 위하는 길이란다."

옥여상은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옥여상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만년화리를 구하러 북해로 갈 작정이다. 하지만 만년화리를 잡아서 쇄심마장의 마기를 제거할 수 있을지, 그보다 담세황의 추적을 벗어날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옥여상은 그늘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나의 내공은 절반 이상이 쇄심마장의 마기를 억누르는데 소모되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담세황과 백초도 겨루지 못한다."

본래 옥여상은 담세황 정도는 삼십 초 안에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설마 담세황이 사실상의 사부인 자신을 기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그녀는 방심하다 암습당해서 담세황과 백초도 겨룰 수 없는 참담한 신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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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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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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