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제 9장

 

           겁난(劫難) 중의 인연 (1)

 

 

“쯧쯧! 하여간 계집만 보면 물건을 세운단 말이야!”

비틀거리며 초지에 내려선 철선동시는 혀를 찼다.

모옥 앞 꽃밭에서는 마면혈도가 임단심을 찍어 누른 채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저년이 대체 무슨 암기를 날렸기에 피할 수가 없었지?”

철선동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허벅지에 박힌 철정(鐵釘)을 뽑아들었다. 새파란 빛을 발하는 길쭉한 쇠못 형태의 암기였다.

“사망정(死亡釘)!”

그 쇠못을 본 순간 철선동시는 독사라도 만진 듯 놀람과 두려움이 뒤범벅된 음성으로 외쳤다.

사망정은 그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누군가의 신물(信物)이다.

비록 그 인물이 무림에서 활동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만 그의 공포스러운 무공과 잔혹한 술수를 떠올리자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철선동시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허벅지의 통증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철선동시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멍석을 말아간 듯이 화초들이 길게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그 흔적은 서쪽의 절벽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마면혈도에게 돌을 던진 것으로 보이는 소년은 찾을 수 없었다.

불안한 의혹을 가슴에 품고 두려움을 손끝에 간직한 채 철선동시는 모옥 앞으로 갔다.

임단심을 화초 위에 던져놓고 겁탈하는 마면혈도는 어느덧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마면혈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격렬하게 둔부를 들썩이고 있고 혈도가 제압당한 임단심은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유린당하고 있었다.

“지금이 한가하게 그 짓이나 할 때냐 말대가리야?”

팟!

철선동시는 버럭 외치며 마면혈도의 등덜미를 잡아당겼다.

마면혈도는 갑자기 임단심의 몸에서 떨어지게 되자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우라질 미친놈아! 마음이 있으면 이 형님이 먼저 즐긴 후에 즐길 것이지 도중에 방해를 해?”

마면혈도의 말의 그것처럼 거대한 남성에는 임단심을 유린한 흔적이 묻어있었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악다구니에 대꾸하는 대신 왼손을 불쑥 그자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철선동시의 손에는 사망정이라고 부르는 쇠못이 들려있었다.

“사... 사망정!”

순간 마면혈도의 성욕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찬물을 끼얹은 듯 변해버렸다.

그자는 이마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내뱉었다.

“설...설마 저 계집이 마황(魔皇)과 관계가 있다는 말...!”

마면혈도는 다시 한 번 자기가 강간하던 임단심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음탕한 눈빛이 아니라 두려움이 깃든 눈빛이었다.

철선동시가 무거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대형이 말한 삼보면천을 저 계집이 펼쳤다. 어쩌면 대형이 찾고 있는 자는 마황, 바로 그자인지도 모른다.”

마면혈도가 거듭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그건 안돼! 안돼! 대형의 무공이 강하기는 하지만 마황은 결코 당할 수 없다.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철선동시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말대가리, 그럼 마황과 관계가 있는 계집을 강간한 자넨 무슨 짓을 한 건가?”

“으으으..."

마면혈도의 손발이 덜덜 떨렸다.

마면혈도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에 속한다. 제 아무리 상대가 강하더라도 이같은 공포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헌데 마황이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마면혈도가 이름만 듣고도 공포에 떨게 되는 것인가?

정신이 아득해졌던 마면혈도가 갑자기 흉포한 눈빛을 발하며 소리쳤다.

“이 계집을 죽여서 수십, 아니 수백 수천 토막을 내고 기름에 태워서 재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버린다면... 제아무리 마황이라 하더라도 내가 한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마면혈도의 음성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배어있었다.

스르릉!

하지만 그자는 혈도를 뽑아들며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감히 마황에게 불경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철선동시는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황이 이번 일을 안다고 하더라도 직접 손을 쓴 것은 말대가리니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가 모르면 더욱 좋고...)

철선동시는 마면혈도가 내릴 결론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마면혈도로 하여금 손을 쓰게 하기 위해 말로써 그자를 자극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은 결코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교활한 심보가 깔려 있는 행동이었다.

사지를 활짝 벌리고 쓰러져 있는 임단심 앞으로 다가간 마면혈도는 눈을 질끈 감고 혈도를 내리쳤다.

번쩍!

혈도가 붉은 빛과 함께 싸늘한 한기를 내뿜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쉿!

한 가닥의 붉은 빛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와 마면혈도의 혈도를 가로막고 튕겨나갔다.

쨍! 하는 맑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칼도 붉은 빛이고 날아온 물건도 붉은 빛이었다.

“억!”

마면혈도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자의 혈도는 금옥(金玉)을 무우 베듯 할 수 있는 보도(寶刀)다.

그런데도 옆에서 날아온 붉은 빛은 튕겨져 나갔을 뿐 베어지지 않았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임단심을 없애려던 순간이었다.

그때에 맞춰서 자신의 행위를 방해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에 마면혈도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쉬쉭!

그 사이에 튕겨져 나갔던 붉은 빛이 방향을 바꿔 다시 마면혈도를 향해 날아들었다. 번개를 방불케 하는 속도로...

번쩍! 번쩍!

마면혈도도 이번에는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 혈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터텅! 쉬익!

붉은 빛은 혈도에 맞아 튕겨나갔다가 다시 빛살처럼 덤벼들 뿐이었다.

(대체 무슨 괴물이기에...)

마면혈도는 손아귀에서 진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철선동시는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기만 할 뿐 마면혈도를 위해 손을 쓰지는 않았다.

비록 삼괴의 일원으로서 함께 이름을 날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철저한 앙숙이었다. 자기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 한 상대방을 도울 관계는 결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상대방을 죽일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원수에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붉은 물체가 언제 철선동시 자신을 향해 공격의 방향을 돌릴지 모르는 일이다.

철선동시는 붉은 물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마면혈도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때 뒤로 물러서던 마면혈도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금관혈린사! 금관혈린사다!”

그자를 공격했던 붉은 물체는 바로 척포였다.

임청우도 모르게 호리병에서 빠져나온 척포가 임단심을 죽이려는 마면혈도를 막아선 것이다. 천고의 영물답게 척포는 임단심과 임청우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금관혈린사!)

마면혈도의 외침에 철선동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독사만 먹고 산다는 금관혈린사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독을 가진 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연신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마면혈도를 공격하는 붉은 물체는 머리에 황금빛 뿔이 달려있으며 그리 크지 않은 몸은 타는 듯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는 뱀이었다.

뱀들의 제왕일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독물(毒物)들의 제왕이기도 한 금관혈린사의 모습이 틀림없다.

금관혈린사는 품고 있는 독이 지독할 뿐 아니라 도검이 불침하여 쉽사리 죽일 수도 없다.

번쩍! 텅! 텅!

그 사이에도 마면혈도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금관혈린사, 즉 척포의 공격을 막아내며 물러서고 있었다.

마면혈도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주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다.

만약 어리석은 인물이었다면 상승의 무공을 익혀 무림의 최절정 고수의 반열에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면혈도 역시 금관혈린사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금관혈린사의 독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금관혈린사가 독기를 내뿜으면 이장 밖에 있는 황소도 쓰러뜨린다.

한데 금관혈린사는 집요하게 마면혈도를 물려고 덤빌 뿐, 독기를 내뿜지는 않았다.

(저 놈이 왜 독기를 뿌리지 않는 건가?)

마면혈도는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자는 척포가 임단심에게 해가 갈까봐 독기는 뿜어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철선동시가 놀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계집이 없어졌다!”

“뭐?”

마면혈도는 당황하여 하마터면 척포에게 물릴 뻔 했다.

 

(어머니가 없어졌다고?)

다시 절벽위로 올라오려던 임청우는 깜짝 놀랐다.

임청우는 철선동시가 철선으로 내뿜은 냉기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머릿속으로 북두무랑에서 본 천상열차분야도가 떠올랐다.

상하 좌우로 경계가 없이 펼쳐진 별의 바다...

광막한 넓이와 깊이를 지닌 그 별의 바다에 비하면 자신의 피를 얼어붙게 만든 냉기는 실바람만도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몸에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주관하는 북두칠성이 깃들어있기까지 했다.

그것을 깨닫자 얼어붙었던 몸에 감각이 갑자기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자신을 움켜쥐려던 철선동시가 허공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감각은 돌아왔어도 아직 자유롭게 움직이지는 못하는 몸으로 절벽을 향해 굴러갔다.

철선동시의 시선을 피해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임청우는 동굴 입구의 돌출부에 떨어졌다.

그곳에 누워 몇 번인가 긴 호흡을 들이고 내쉬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벌벌 기어 동굴로 기어들어간 임청우는 떠나면서 남겨두었던 활과 화살을 챙겼다. 마귀같은 두 괴물에게 화살이 통할지 모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헌데 화살 통을 등에 짊어지고 활은 목에 건 채 다시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가려는데 철선동시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어머니가 없어졌다니...

어머니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절벽의 삐져나온 부분을 잡고 기어 올라간 임청우는 머리만 내밀고 모옥 쪽을 살펴보았다.

“말 대가리! 넌 계곡 입구 쪽을 살펴봐라!”

철선동시가 마면혈도에게 고함을 치며 모옥 앞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마면혈도는 여전히 척포에게 밀리며 계곡 입구 쪽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어머니 임단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밤바람이 작은 천 조각 하나를 임청우 앞으로 날려 보냈다.

그것을 본 순간 임청우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얼굴 앞을 스치고 절벽 밑으로 사라지는 천조각에는 어머니의 체향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임단심이 유린당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 임청우는 그녀의 옷이 마면혈도에 의해 갈가리 베어졌음을 알지 못했다.

단지 어떤 이해하지 못할 느낌에 머리끝이 쭈뼜해졌을 뿐이다.

 

펑펑!

전력을 다해 장력을 쏟아내어 척포를 날려버린 마면혈도는 모옥 앞에 망연하게 서있는 철선동시 곁으로 달려갔다.

임단심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척포는 더 이상 마면혈도를 공격하지 않았다.

모옥 앞에 심어져 있었던 화초들은 짓이겨져 있고 그 위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임단심이 당한 무참한 유린의 흔적이다.

철선동시는 냄새로 임단심의 종적을 찾으려 했지만 도무지 찾을 도리가 없다.

한마디로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분명히 네 곳의 마혈(痲穴)을 짚어놓았는데...”

다가온 마면혈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라진 여자가 보통 여자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황과 관련이 있는 여자인 것이다.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겁에 질려 모옥을 뒤지고 비련곡의 풀뿌리 하나까지 살펴보았다.

 

허둥대는 두 괴물을 숨어서 지켜보던 임청우는 너무 깊어서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사라졌다면,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음이 틀림없다.

“저 말대가리가 어머니를...!”

임청우는 나직하게 내뱉었다.

저 멀리서 마면혈도가 바지도 입지 않은 채 허둥대며 돌아다니고 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절벽으로 몸을 던진 것이 말대가리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감히 절벽 위로 올라갈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 죽고 싶지는 않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