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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연못에서 건진 검(劍)

 

 

"그만 갑시다. 내일 또 찾아보기로 하고..."

어느 정도 땀이 식자 백남빈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녹지 옆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계곡이 넓지 않아서 동쪽 끝에서 천천히 걸어도 서쪽 끝까지 오는데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물그릇으로 사용하는 백남빈의 신발이 석탁 위에 놓여져 세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미루가 손가락을 검으로 살짝 베어서 피를 몇 방울 신발 속으로 떨어 뜨렸다.

그러자 신발속의 녹색물이 순식간에 유백색(乳白色)으로 변하며 짙은 향기를 내기 시작했다.

"드세요."

살짝 교태가 배어 있는 강미루의 음성은 듣기가 좋았다.

백남빈이 신발을 받으며 농을 걸었다.

"말솜씨가 많이 늘었군. 이대로 잘 배우고 연습하면 틀림없이 사랑받는 아내가 되겠어."

"부끄럽게 하지 마셔요. 누가 절... 음... 절 아내로..."

칭찬은 들었지만 그 다음 말은 너무 부끄러워 이을 수가 없었다.

“미워요.”

민망해진 강미루는 눈을 흘기며 백남빈의 손등을 꼬집었다.

백남빈이 큰소리로 글을 읽듯이 말했다.

"내가 멍청하다고 마음대로 꼬집는 거요?"

강미루가 그제야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생각해 내고는 백남빈에게 말했다.

"오늘은 나무그릇이라도 하나 깎아야겠어요."

"신발로 물을 마시자니 내 발 냄새가 나서?"

"아니라구요!"

백남빈이 들었던 신발을 놓으며 강미루에게 묻자 그녀는 백남빈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강미루와 백남빈이 나누는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적당한 애정행위를 동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창평곡에 갇히고 사흘째 되던 날 녹지의 신비를 일부나마 풀어 식수문제를 해결했다.

녹지의 물은 침에 닿으면 독이 되고 피에 닿으면 아주 향기로운 물이 되었다.

어떤 작용인지는 몰라도 우유빛으로 변한 물을 마신 후 두 사람은 자신들의 내외공이 함께 증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과 사흘 정도 마셨을 뿐인데 두 사람의 내공은 이미 전보다 배 이상 증진되어 있었다.

 

"잘 봐요. 내가 마술을 보여줄 테니..."

백남빈이 강미루를 보면서 말했다.

푸스스!

계란만한 돌을 손에 쥔 백남빈이 가볍게 힘을 주자 돌은 소리없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돌을 부수는 것은 웬만한 공력을 소유한 자라면 다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백남빈처럼 새알을 쥐듯이 부드럽게 잡아서 소리도 없이 가루로 만드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강미루도 배시시 웃으면서 역시 계란만한 돌 두 개를 손바닥에 올리더니 양손 손바닥으로 슬슬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가루가 팥고물처럼 떨어지고 강미루의 손바닥에는 이내 콩알같이 작고 매끄럽게 변한 돌멩이 두개만 남게 되었다.

강미루가"훅" 하고 입김을 불자 그 작은 돌들은 휙 하니 날아가서 녹지에 퐁당 빠져 버렸다.

그걸 본 백남빈이 손뼉을 쳐서 찬사를 보낸 후 말했다.

"이 녹지에는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으니 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봐야겠소."

 

풍덩!

백남빈은 짧은 속바지만 입고 뜨거운 녹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녹지의 물은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웠다.

게다가 아주 짙어서 한치 앞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백남빈은 조금씩 헤엄쳐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을 향해 내려갈수록 물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데 밖에서 강미루가 뭐라 외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금방 나오지 않자 불안해졌다.

"조심하셔요!"

큰소리로 외쳤지만 그녀의 조바심은 더욱 심해졌다.

"저도 들어가겠어요"

결국 그녀도 풍덩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잠수하던 백남빈은 강미루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소리가 난 쪽으로 헤엄쳐 올라가 자신을 따라 들어온 강미루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푸우!”

“하아!”

백남빈과 강미루는 손을 마주잡고 수면위로 올라와 숨을 들이쉬었다.

녹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서로의 머리에서 물을 털어 주었다.

"녹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것같소. 그 외에 딱히 위험은 없는 것 같으니 당신은 걱정말고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내 금방 들어갔다 나올 테니..."

숨을 고른 후 강미루를 안심시킨 백남빈은 다시 녹지로 들어가려고 일어섰다.

"부디 조심하셔야 해요!"

강미루는 그런 백남빈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아내같이 백남빈을 염려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백남빈은 백근 정도 되는 바위를 안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바위의 무게로 인해서 그의 몸은 처음보다 비교도 안되게 빨리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정말 깊고 뜨거운 곳이구나. 내 피부가 영약으로 변한 녹지의 물을 마시고 강인해지지 않았더라면 이미 종이처럼 녹아버렸을 것이다.)

백남빈은 엄청난 수압에 귀가 멍멍해졌다.

두 눈은 뜨거운 온천수에 의해 눈알이 익어버릴 것 같아서 질끈 감고 있었다.

(제법 큰 바위를 안았는데도 부력이 이토록 세니 바위만 놓으면 그대로 물위로 솟구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발에 무언가가 닿았다.

녹지의 바닥이었다.

(어떻게 연못의 바닥이 이렇게 매끄럽고 평평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어쩌면 서쪽 절벽에 창평곡이라고 새겨놓은 사람이 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절세적인 능력을 지닌 기인이 이 창평곡에 살았었다는 사실이다.)

천근추(千斤鎚)의 신법으로 몸을 무겁게 만든 백남빈은 바위를 안은 채 발로 더듬더듬 바닥을 밟으며 돌았다.

매끈한 바닥은 결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서쪽 절벽에 새겨진 창평곡이란 글 이외에 처음 만나는 인간의 흔적이다.

그 사이에 숨이 턱까지 찼다.

하지만 다시 내려오는 수고를 하긴 싫어서 꾹 참고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보려고 했다.

깊은 물속에서는 바위도 아주 가벼워서 마치 솜덩이 같이 느껴졌다.

그 때문에 백남빈의 몸도 한걸음 한걸음에 수초처럼 일렁거리며 나아갔다.

잠시 조사해 본 백남빈은 녹지가 마치 우물같은 형태임을 확인했다. 연못가에서 중심부를 향해 몇 장 들어간 쪽부터 거의 직각의 벽을 이루며 바닥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람의 손길이 닿아 만들어진 구조다.

하지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이었다.

직경이 수십 장에 이르는 거대한 우물 형태를 어떤 인간이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엄청난 수압과 뜨거운 열기를 견디면서...

그런데 그때까지 반반하던 바닥에 뭔가 뭉툭한 것이 백남빈의 발에 밟혔다.

몸을 숙여 손으로 쓰다듬어본 백남빈은 그것이 무엇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검(劍)! 장검이로구나.)

백남빈의 발에 밟힌 것은 검집에 들어있는 한 자루의 길쭉한 장검이었다.

백남빈은 그때까지 안고 있던 바위를 놓고 대신 장검을 쥔 채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화악!

뜨거운 물이 귓가로 스쳐지나가며 화끈거렸다.

 

“푸학!”

삽시에 수면으로 올라온 백남빈은 탁한 숨을 내뱉으며 연못가로 헤엄쳐갔다.

"괜찮아요?"

녹지 밖에서 가슴 조리고 있던 강미루가 뛰어와 백남빈이 내미는 장검을 받았다.

후딱 물 밖으로 뛰쳐나온 백남빈의 피부는 발갛게 익어 있었다.

"이 연못은 확실히 이상하오! 바닥에 편편한 돌을 깔아 놓은 게 사람이 일부러 그래놓은 것 같소."

백남빈이 머리를 흔들어 귓속의 물을 빼며 말했다.

"이제부터 여기 살았던 전대기인의 흔적을 찾아 봐야 할 것 같소."

"그럼 심심하지 않아서 좋겠네요"

강미루가 즐거운 듯이 맞장구 쳤다.

"물속에 이 검만 있던가요? 혹시 창은 없었어요?"

강미루는 백남빈에게서 받아든 검을 살펴보며 말했다. 별호가 홍의창인 만큼 그녀의 무기는 창이었다.

"욕심 많은 아가씨로구만. 창 같은 건 없었어."

“욕심쟁이라 미안하네요.”

백남빈의 우스개소리에 강미루가 샐쭉 토라져버렸다.

"내가 다음에 좋은 창을 하나 구해주겠소."

미안해진 백남빈은 강미루를 달랬다.

"그런데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새침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강미루는 검을 백남빈의 손에 들려주었다.

토라진 척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작은 말에도 감동을 받는 법이다.

 

백남빈의 손에 들린 검의 청동색 검집에는 <사자(獅子)>라는 검명(劍名)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 검명은 지금은 쓰지 않는 상고시대의 고전체(古篆體)여서 처음에는 장식을 위한 문양인 줄 알았다.

“당신 별호에 잘 어울리는 검이네요.”

백남빈과 함께 살펴보다가 사자라는 검명을 판독해낸 강미루의 눈이 반짝거렸다.

별호가 검사자(劍獅子)인 백남빈이 연못 바닥에서 건져 올린 검의 이름이 사자검(獅子劍)이라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진 것이다.

"재질이 청동은 아닌 것같은 데... 무슨 쇠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묵직할까?"

백남빈도 사자검을 두 손으로 든 채 살펴보며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사자검은 보통의 검보다 폭과 두께가 한 배 반쯤 된다.

하지만 무게는 같은 크기의 검보다 서너 배 이상 나가서 아주 묵직하다.

스르르릉!

검병(劍柄;검의 손잡이)을 잡아서 비틀어 당기자 역시 짙은 녹색인 검신(劍身)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왔다.

비록 번쩍이지는 않지만 녹옥(綠玉)같은 은은한 빛이 감도는 게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사자검의 녹색 검신을 본 백남빈과 강미루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로 보검이구나.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런 검이 있다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자검의 검신은 날이 서있지도 않고 예기를 흘리지도 않으며 맑고 담백하다.

검이라는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것이지만 사자검은 누가 봐도 보물이라 할 만했다.

검신과 검병은 하나로 돼 있었고 검집은 청동으로 만든 것 같았다.

무겁긴 하지만 손에 꼭 들어오는 것이 마치 원래부터 백남빈 자신의 소유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보검을 얻게 된 백남빈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보검이 손에 드니 절로 춤이 나오는구나. 백만 오랑캐도 두렵지 않고 십만 악마도 두렵지 않도다. 검이 이르는 곳에 악도의 피가 튀고 웃음이 이르는 곳에 만마가 도망치는도다."

백남빈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사자검을 내키는 대로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찌르고 하였다.

강미루도 덩달아 기뻐하며 손뼉을 치면서 그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천도(天道)를 이 사자의 검으로 밝히리라!”

백남빈은 사자검을 쭉 뻗어 하늘을 가르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순간 사자검에서 긴 무지개같은 기운이 허공으로 뻗혀나갔지만 흐릿하고 또 순간적인 일이라 백남빈은 물론이고 강미루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하하...!"

자신이 사자검으로 상서로운 기운을 하늘 높이 뻗어가게 한 것을 알 리 없는 백남빈의 낭낭한 웃음소리가 오랫동안 창평곡을 맴돌았다.

 

***

 

(검기(劍氣)...)

신가람은 눈을 빛내며 멀리를 바라보았다.

신가람은 미혼진에 이어 산백진을 뚫고 들어가며 진땀을 빼던 중 잠시 숨을 돌리려 하늘을 보았었다.

그런 신가람의 눈에 멀리 앞쪽 몇 개인가의 산봉우리 너머에서 긴 무지개같은 기운이 허공으로 치솟는 것이 들어왔다.

찰라지간 나타났다가 사라지긴 했지만 신가람은 그 기운이 검기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신가람 자신이 평생 검법을 수련해왔기에 그 검기를 발견하는 게 가능했다.

(저곳에서 방금 전 신검(神劍)이 세상에 나왔다.)

신가람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검법을 수련하는 자가 오매불망하는 것은 훌륭한 검을 얻는 것이다.

상서로운 검기로 하늘을 찌른 신검이 출현했다는 것은 신가람을 흥분시키면서 동시에 걱정하게 만들었다.

신검을 얻은 자와 말괄량이 처제가 연관되어 있는 것같은 예감이 든 때문이다.

(장인 어른께 면목이 서려면 한시라도 서둘러야겠구나.)

신가람은 다시 사방에서 달려드는 이매망량의 환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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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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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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