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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1)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청우는 검댕을 얼굴에 잔뜩 바르고 비련곡을 빠져나왔다.

검댕을 묻혀 시꺼멓게 변한 임청우의 얼굴에서는 볼만한 구석이 없었다. 그저 별빛같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만 눈에 띨 뿐이었다.

사실 얼굴에 검댕을 바르는 건 임청우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임청우의 얼굴만 보면 화를 내고 죽이려 들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얼굴이 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철이 든 이래 임청우는 수시로 얼굴에 검댕을 바르고 잘 씻지 않았다. 검댕을 묻히면 어머니가 자신의 얼굴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해서였다.

목욕은 자주 했지만 얼굴을 정성껏 씻은 기억은 거의 없는 임청우였다.

물론 얼굴에 검댕을 바른다고 해서 어머니의 학대가 줄어들지는 않았었다.

 

농산의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는 임청우인지라 가장 은밀한 길만 골라서 빠져 나왔다.

그 덕분인지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만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농산을 벗어난 임청우는 서안(西安)을 목적지로 삼았다.

농산 근처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가 서안이다.

그 서안에 가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농산 밖의 세상은 벌써 몇 달 째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임청우는 관도(官途)로 서안까지 갈 수가 없었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져 음식은 물론이고 마실 물조차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기갈이 심할 때에는 황하의 탁한 물을 들이키고 배가 고플 때는 강물이 줄어들면서 생긴 웅덩이 속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잡아 구워먹었다.

무작정 황하가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걸어서 보름이 지났을 때 중원 제일의 고도(古都)인 서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삼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서안은 한(漢)대에는 장안(長安)으로 불렸고 당(唐)대에는 양귀비와 현종의 전설이 살아 숨 쉬었던 곳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로 중국을 일통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을 향한 집념이 피어올랐던 곳이기도 하다.

지독한 가뭄의 고통은 서안 곳곳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수천 년을 버텨온 고도 서안은 그 역사의 힘으로 자연의 시련마저 견디는 듯했다.

여전히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물자는 끊이지 않는다.

임청우는 옛 건물들로 가득 찬 서안의 풍광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인적 드문 산속 깊은 곳에 살다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처에 나오니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하기만 한 구경거리들이다.

물론 서안은 임청우에 대해서 결코 감탄하지 않았다. 그의 몰골은 거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몰골뿐 아니라 형편도 거지보다 못했다.

거지는 구걸이라도 해서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임청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구걸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거지 역시 직업인만큼 강한 직업의식이 있어야 한다.

배가 고프다고 아무나 바가지 들고 나서서 될 수 있는 게 거지가 아니라는 것을 임청우는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도둑질을 할 수도 없었다.

민심이 흉흉한 때인 만큼 도둑질하다가 잡히는 날에는 몰매 맞아 죽기 십상이다.

실제로 임청우는 그같은 경우를 몇 번이나 목격했었다.

이처럼 임청우의 배는 하루에 한번 채워지기가 어려웠던 반면에 척포는 언제나 규칙적인 식사를 했다.

게다가 놈의 식성은 까다롭기까지 하다.

그놈은 어디서든지 아침이 되면 호리병 속에서 기어 나와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꼬리를 흔들어 댄다.

그러면 불과 일각도 되기 전에 임청우 주변에는 수백 수천 마리의 뱀들이 몰려와 구더기처럼 북적거리기 시작하고 척포란 놈은 오만하게 황금빛 뿔이 달린 대가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뱀들 사이로 들어간다.

몰려온 뱀들은 가지각색의 기기묘묘한 모양과 색깔을 갖춘 독사들이었지만 척포가 가까이 가면 모두 <날 잡아 잡슈!> 하고 대가리를 바닥에 납작 붙이고 꼼짝도 않는다.

척포는 그 뱀들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와 길이가 같은 놈을 물색한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는 수백 마리의 뱀을 걸러 보낸 후 자기와 길이가 꼭 같고 굵기도 꼭 같은 독사를 발견하면 한 바퀴 빙 돌면서 원을 그린 후에 아가리를 쫙 벌려 독사의 머리부터 삼켜버린다.

임청우는 몰려왔던 뱀들이 모두 음식으로 보였지만 그 음식에 손댈 수가 없었다.

한두 마리라면 잡아서 배를 채우련만, 수백 수천 마리가 되고 보니 한 마리 먹겠다고 덤비다간 되려 먹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물과 물고기로만 배를 채웠다.

그래도 굶어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랄 수 있었다.

배가 고프면 정신에서 양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임청우는 농산을 떠나면서 두 권의 책을 가져오길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고플 때엔 눈을 빨갛게 하고 있지도 않는 음식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책속에 몰입하여 배고픔을 잊어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

 

***

 

일옹청풍일지를 펼쳐들고 중얼중얼 읽으면서 임청우는 역사의 현장인 자은사(慈恩寺)로 갔다.

그저께 저녁부터 아무 것도 구경하지 못한 배는 아예 등가죽에 붙어서 꼬르륵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그래도 서안에 왔으니 자은사와 대안탑(大雁塔)을 보지 않을 수 없지.”

우협 장백승으로부터 받은 후 한 번도 손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는 청강검이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자은사를 향하는 그의 발걸음에는 씩씩한 힘이 실려 있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로 알려진 당대(唐代)의 고승 현장(玄獎)은 직접 천축으로 가서 경전을 가져와 번역했었다.

그리하여 현장은 범어로 씌여진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역경사업(譯經事業)에 있어서 구마라습(鳩摩羅什)과 함께 이대(二大) 역성(譯聖)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구마라습이 불경을 번역하던 곳은 백마사(白馬寺)인 반면 현장이 불경을 번역하던 곳은 바로 자은사 경내에 있는 대안탑이었다.

높이가 무려 이십일장(二十一丈;63미터)에 달하는 대안탑은 밑변이 정방형이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각뿔 형태의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불경을 번역하느라고 분주했을 대안탑이지만 이제는 폐쇄되고 인적이 끊어졌다.

오직 대안탑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자은사 승려들만이 근처를 배회할 뿐이었다.

 

길고 긴 여름 해가 질 무렵, 대안탑이 멀리 보이는 자은사 정문에서는 두 개의 그림자가 서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

“글쎄, 너 같은 거지는 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니까.”

지객승(知客僧)으로 보이는 젊은 중이 소년을 밀어내면서 소리쳤다.

소년은 왼손에 고색창연한 보검을 들고 있다.

하지만 얼굴은 검댕이 잔뜩 묻어서 눈만 반들거리고 있으며 입은 옷도 원래는 흰색이었지만 검은 색에 가깝게 변해있었다.

훤칠한 키와 손에 든 보검 외에는 거지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은 물론 임청우였다.

임청우는 밀어내려는 지객승의 손을 뿌리치며 무게 있게 말했다.

“나는 거지가 아니오. 단지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오.”

“하하하!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고? 그럼 형편이 좋은 거지도 있던가?”

지객승이 큰소리로 비웃으며 다시 임청우를 밀어내려 했다.

임청우는 그런 지객승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끔과 동시에 옆으로 슬쩍 비키며 발을 걸었다.

“어이쿠!”

지객승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엎어졌다.

“나는 스님께 구걸하지 않았소. 그런 나를 거지라고 할 수 있소? 나를 모욕한 댓가라 생각하시오.”

임청우는 빠르게 말하고 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지객승이 씩씩거리며 일어섰을 때 임청우의 모습은 이미 절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기 서라 거지새끼야!”

지객승은 발바닥에 부리나케 뒤쫓아 들어갔다.

 

일단 절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아무도 누구냐고, 왜 들어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지객승도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아니면 포기해 버렸는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임청우는 느긋한 걸음으로 천년 고찰 자은사의 웅장한 건축물들을 구경했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무설전(無說殿)과 비로전(毘盧殿)을 돌아본 후에 대안탑으로 향했다.

때마침 이십장이 넘는 웅장한 대안탑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을 등진 대안탑의 형상은 대지에 깊이 뿌리를 박은 바위산을 연상케 했다.

올려다보면 그늘이 져서 검게 보이는 대안탑이 하늘 끝까지 솟구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임청우는 그 장엄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속에서 어떤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집을 짓는다면 저같이 천년을 갈 집을 지어야 할 것이고, 사람으로 났으면 역사에 남을 일을 해야 하리라!”

지는 석양을 보면서 야망을 일깨운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임청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흥분에 몸을 떨며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결심에 사로잡혔다.

다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막연히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삼장법사 현장은 대안탑에서 불경을 번역하여 중국 불교의 뼈대를 세웠다.

삼론종(三論宗), 성실종(誠實宗), 열반종(涅槃宗), 찰론종(擦論宗), 지론종(持論宗)은 물론이고 화엄종(華嚴宗)과 법상종(法相宗)마저도 현장이 번역한 경전의 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청우의 독백처럼 현장이 세웠던 대안탑은 천년을 가는 집이었고, 현장이 행한 바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큰일을 하리라.)

임청우는 마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자객(刺客) 형가(荊苛)가 되기라도 한 듯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사숙! 혹시 어린 거지새끼 한 놈이 이리로 오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묻는 소리가 대안탑 근처에 있는 극락전(極樂殿) 쪽에서 들려왔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미 고약한 지객승이 마침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임청우는 황급히 숨을 곳을 찾았다.

하지만 대안탑 근처에는 몸을 숨길만한 나무나 건물이 없었다.

타타탁!

지객승이 다른 중으로부터 임청우가 있는 곳을 알아냈는지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임청우는 이내 지객승을 발견했지만 지객승은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석양이 만든 대안탑의 그림자가 임청우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상황이 급하게 되자 임청우는 출입을 금하는 붉은 줄이 쳐져있는 대안탑 안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갔다.

대안탑으로 들어온 즉시 문 옆의 벽에 바싹 등을 붙이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제기랄! 대체 어디로 꺼져버린 거야!”

대안탑 주변에서도 임청우를 찾지 못한 지객승은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임청우는 지객승을 속였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밖은 아직 훤한데도 대안탑 안은 칠흑같이 어둡다. 대안탑에는 사방에 하나씩 창문이 나있지만 벽돌을 쌓아 완전히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려던 임청우는 불쑥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가봤자 잘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차라리 이 대안탑에서 자고 가면 어떨까? 여기는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자고 간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임청우는 밖으로부터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아서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대안탑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도 그 옛날 언젠가는 등불로 대낮처럼 밝혀졌으며 수많은 고승들이 불경을 번역하느라고 밤을 하얗게 지새웠으리라.

과거로 흘러가버린 밝음이 사라진 곳을 향해 임청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발끝으로 더듬어 가노라니 난간이 만져졌다.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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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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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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