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에 해당되는 글 106건

  1. 2020.04.25 [천세무림기보] 제 1장 천세문의 붕괴 3
  2. 2020.04.25 [자객일지] 제 31장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
  3. 2020.04.25 [지백천년] 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1
  4. 2020.04.24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4 1
  5. 2020.04.24 [환골탈태] 제 18장 살성의 귀향 1
  6. 2020.04.24 [천세무림기보] 서장
  7. 2020.04.24 [자객일지] 제 30장 절망의 관문
  8. 2020.04.24 [천세무림기보(千世武林奇譜)] 연재합니다.
  9. 2020.04.23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3
  10. 2020.04.23 [환골탈태] 제 17장 아아 ! 청구단서!
  11. 2020.04.23 [자객일지] 제 29장 혼천경의 전설
  12. 2020.04.22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2 1
  13. 2020.04.22 [환골탈태] 제 16장 의부의 죽음
  14. 2020.04.22 [자객일지] 제 28장 독룡곡과 신녀문
  15. 2020.04.21 [지백천년] 제 6장 나는 가까이 있느나 먼 곳에서 왔느니 1
  16. 2020.04.21 [환골탈태] 제 15장 인간쟁탈전
  17. 2020.04.21 [자객일지] 제 27장 지옥십관
  18. 2020.04.20 [자객일지] 제 26장 팔려온 아이들 1
  19. 2020.04.20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4
  20. 2020.04.20 [환골탈태] 제 14장 어머니를 닮은 여인
  21. 2020.04.19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3
  22. 2020.04.19 [환골탈태] 제 13장 구원의 손길
  23. 2020.04.19 [자객일지] 제 25장 술법
  24. 2020.04.18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2
  25. 2020.04.18 [환골탈태] 제 12장 마두속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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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一 章

 

           千世門崩壞

 

 

 

동천목산(東天目山).

기이절륜한 형상의 군봉들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눈앞의 손가락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어둠이었다.

스스스

돌연, 대지를 짓누른 암천(暗天)으로 한 줄기 검은 그림자가 날아갔다.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의 그림자였다.

이 깊고도 험한 천목(天目)에 웬 야행인인가?

휘르르!

! 한 명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또다시 검은 인영들이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십명... 이십명... 백명... 오백...

!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영들, 마치 소리없이 밀려드는 조수(潮水)와 같았다.

수천 명의 인영이 움직인다.

헌데, 놀라운 것은 그 많은 인영들이 움직이는 데에도 조그만 소성하나 일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뭇가지 하나 꺾이지 않고 조각들 하나 구르지 않았다.

이를 보아 야행인들이 모두 최상승이 내공을 지닌 인물들 임을 알 수 있었다.

휘익!

문득, 선두의 야행인이 높직한 바위 위로 날아올라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널직한 곡구였다.

헌데 허둠 속에서도 곡구전체가 부연 안개에 휩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안개 사이사이로 수많은 돌무더기들이 보인다.

언뜻 보기에는 자연히 쌓인 돌무더기로 보일 정도로 무질서하다.

하지만, 기문진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즉시 돌무더기들이 오묘한 현기를 내포한 진을 이루고 있음을 알 것이다.

스스스

그대 십여 명의 몽면인이 앞으로 나와 조심조심 곡구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반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돌연, 곡구에 깔렸던 현무가 소리없이 사라졌다.

휘익!

그와 함께 선두의 야행인이 곡구로 날아들어갔다.

스스슥스슥!

뒤이어 수천의 고수들이 곡구로 날아들어갔다.

이미 진식(陣式)은 그 힘을 잃은 듯, 야행인들의 전진에 장애가 되질 못했다.

"...!"

"...!"

곡구를 빠져나온 야행인들은 발길을 멈추었다.

휘이잉!

한 줄기 밤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야행인들 앞에 방대한 분지가 어둠에 잠긴 채로 나타났다.

헌데, 수만 장이나 되는 분지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고루거각들이 장엄하게 벌려있지 않은가?

깊디 깊은 천목산중(天目山中)에 이런 거창한 고루거각들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한 일이다.

야행인들의 시선이 긴장으로 번뜩였다.

"시작하랏!"

야행인 중 한 명이 나직이 소리쳤다.

휘익휘익!

그러자 백여 명의 야행인들이 허공으로 날았다.

그들은 각기 커다란 뭉치를 안고 분지를 둘러싼 절벽 위를 달려갔다.

이를 본 중인들은 즉시 무엇인가를 입안에 털어넣었다.

뒤이어, 분지의 사방절벽에서 흐릿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연기들은 기이하게도 불어오는 산풍에 흩날리지 않고 분지로 깔려들어갔다.

삽시에, 분지는 흐릿한 연기로 가득 채워졌다.

그 연기들은 마치 악마의 손길같이 전혀 흩어지지 않으며 스물스물 분지의 곳곳으로 스며든 것이다.

"...!"

"...!"

중인들은 연기가 분지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보며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이윽고, 다시 반각 정도가 지났다.

그때는 점차 연기도 사라지고 있었다.

"가랏!"

선두의 야행인이 나직이 외치며 분지로 날아들었다.

스슥스스슥!

그 뒤로 수천의 야행인들이 소리없이 분지로 뛰어들었다.

"누구냣?"

우렁찬 폭갈이 터졌다.

야행인들이 분지에 내려서는 순간 사방이 대낮같이 환해졌다.

여기저기서 많은 횃불들이 일어났다.

"쳐랏!"

한 소리 일갈과 함게 야행인들은 전면으로 덮쳐들었다.

"와아"

"적이닷! 적의 내습이닷!"

창창!

"크아악"

"아악!"

삽시에, 조용하기만 하던 분지는 아수라지옥으로 변해갔다.

수천의 야행인들은 질풍노도같이 휩쓸어 나갔다.

"크흑... 이럴 수가... ... 독이..."

분지를 지키던 인물들이 눈을 부릅뜨며 쓰러져갔다.

이미 자기도 모르게 중독당한 분지 내의 고수들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쓰러져 갔다.

그 무렵, 곡구부위의 절벽에는 한 명의 백포인이 나타났다.

전신에 하얀 백포를 걸친 그 인물은 초로에 접어든 중년인이었다.

그는 이미 공력이 초극에 이른 듯이 눈에서 신광이 사라져 있었다.

"천세문(千世門)... 안되었지만 그대들의 이천 년 기업은 이것으로 끝이다."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아 천세문(千世門)!

분지의 대장원이 바로 천세문(千世門)이란 말인가?

이천 년 동안 신비 속에 싸여있던 천하제일비문(天下第一秘門).

구류만상경(九流萬象經)을 만들었다는 신비대파!

지금, 그 신비의 대파가 무너지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말이다.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나 별 수 없다. 천하제패를 위해서는 필히 무너뜨려야 할 장애물이니까... 그리고 본교가 겪은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천세문에는 안된 일이지만 그들의 이천 년 정화가 모인 천세광무결(千世廣武訣)이 필요하다."

배포인은 중얼거렸다.

효웅(梟雄)으로서의 갈등이 그자의 얼굴에 떠올랐다.

휘익한 줄기 인영이 백포인의 앞으로 날아내렸다.

그자는 문사차림의 중년인이었다.

심기가 깊게 생긴 모습의 인물이다.

그자는 즉시 백포인에게 한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

"제자, 교주님을 뵙습니다."

백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인, 상황은 어떤가?"

중년유사가 공손히 대답했다.

"구대전주(九大殿主)라는 늙은이들과 그들의 직속 정예들이 제법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그자들도 모두 단명미심향(斷命迷心香)에 중독 되어있는지라, 오래 저항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천세비동(千世秘洞)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수석진주인 기전주(奇殿主)만이 천세비동을 열 수 있습니다."

"좋다. 본 교주가 친히 가보겠다."

백포인은 몸을 날렸다.

스스스곧 중년유사도 그 뒤를 다랐다.

 

쾅콰르릉!

"크아악"

검광이 번뜩이며 혈화가 허공을 수놓았다.

수천의 군웅들은 질풍노도같이 밀려들어갔다.

외곽의 일진(一陣) 전각군들이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크아악"

촉망중에 대항하던 천세문도들은 허공을 거머쥐며 쓰러져 갔다.

이미 중독된 상태인지라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다.

"!"

군웅들은 단번에 최초의 방어선을 돌파, 곧장 오십여 장의 뒤쪽으로 서 있는 전각군들을 향하여 밀려갔다.

그들이 오십여 장 넓이의 공지를 가로지를 때였다.

슉슈슉

"으아악!"

갑자기 지면으로부터 수많은 강전(强箭)들이 튕겨졌다.

지면에 함정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때문에 군웅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단번에 수백의 고수가 쓰러져 갔다.

그러나, 공지가 시신으로 뒤덮이자 강전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천세문의 용사들이여! 죽음으로 자기 위치를 고수하라."

한 마디 창노한 일갈이 터졌다.

뒤이어 한 명의 백발동안의 노인이 날아오며 소매를 휘둘렀다.

촤르르

수백 송이 화광(火光)이 노인의 소매에서 떨쳐졌다.

"아악"

단번에 군웅들의 전열이 무너졌다.

"그자가 천세문 기전주요. 하지만 그자도 중독된 상태이니 두려워할 것 없오."

중인들 사이에서 음교한 일갈이 터졌다.

"와아"

주춤 하던 군웅들이 벌떼처럼 밀려들었다.

"!"

그러나 비록 중독된 상태라 하여도 기전주라는 노인의 공력은 무서웠다.

"케엑"

수십 줄기 강기가 노인의 소매에서 튕겨지며 군웅들이 무더기로 쓰러져 갔다.

"수석전주! 저희들이 왔습니다."

기전주가 군웅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데 두 줄기 인영이 날아들었다.

칙칙한 회인과 섬칫한 혈의를 걸친 노인들이었다.

"마전주(魔殿主), 사전주(邪殿主), 다른 곳의 상황은 어떻소?"

기전주가 쌍장을 휘두르며 두 노인에게 물었다.

"어협!"

마전주가 기합을 지르며 군웅들을 휩쓸어가 기전주는 사전주와 뒤로 물러섰다.

"사태가 심각합니다. 유전(儒殿) 휘하 백팔유사(百八儒士)와 불전(佛殿)휘하 칠십이금강(七十二金剛)은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나머지 칠개 전 휘하의 정예들은 폐사림(廢死林)에 최후의 저지선을 펴고 있읍니다만... 아무래도 폐관중이신 문주님을 출관하시도록 하여야할 것 같습니다."

기전주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주모님과 아가씨는 어찌하고 계시오?"

[, 두 분께선 사대신파와 소녀위대(少女衛隊)의 호위를 받아 비로(秘路)로 곡을 빠져 나가셨습니다."

", 다행이구려. !"

말을 하던 기전주의 안색이 홱 변했다.

어느틈엔가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세 사람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종의 진을 이루고 있는데 그 진세가 심상치 않았다.

"! 억겁파라진(破羅陣)!"

마전주의 인상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와함께 기전주와 사전주도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억겁파라진(破羅陣).

 

이는 마교(魔敎) 최대의 걸진이다.

소림의 백팔나한진과 버금간다고 이야기될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그러나, 이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실전되었던 진식이었다.

실전된 줄 알았던 마교 최대의 절진이 이곳에서 재현되었던 것이다.

"... 역시 본문을 친 것은 마교였군."

사전주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반면 마전주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누구보다도 억겁파라진의 위력을 잘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길보다 흉함이 많겠소. 수석전주께서는 곧 천세비동으로 가서 문주님을 출관시켜야 하겠습니다. 이 상태라면 천세비동(千世秘洞)마저 위험합니다."

마전주가 침중히 말했다.

"알겠오. 허나 억겁파라진을 뚫고 나가기가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오."

기전주의 말에 마전주의 눈에 한 줄기 결연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활로는 제가 열겠습니다. 그 뒤는 사전주가 막아주십시오."

기전주는 흠칫했다.

"설마, 마전주께선 최후인..."

마전주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헛허...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면 죽어야할 때에 죽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마전주의 말에 기전주는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위잉위잉!

그무렵 삼인을 포위한 억겁파라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삼인은 무형의 압력에 몸을 떨었다.

"수석전주 가십시오! 사전주 뒤를 부탁하오."

마전주가 이를 악물고 전면으로 뛰쳐나갔다.

"마전주!"

기전주가 처연히 불렀다.

"핫하... 내세에서나 보십시다."

마전주가 우렁차게 웃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와함께 억겁파라진의 신형이 일시에 마전주를 무찔러갔다.

"크하하핫! 옥쇄마혼(玉碎魔魂)!"

마전주의 폭갈이 터졌다.

그리고

콰르릉파우웅 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크아악"

삽시에 억겁파라진의 일부가 허물어지며 허공으로부터 뜨거운 선혈이 쏟아져 내렸다.

"마전주!"

기전주는 침통히 부르짖으면서도 무너진 억겁파라진세 사이로 몸을 날렸다.

그의 노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우우웅

그러나, 주춤 하던 억겁파라진이 다시 이어지려 했다.

"이곳은 제게 맡기시고 어서 가십시오."

사전주가 홱 돌아서며 외쳤다.

"사전주, 미안하오! 살아 남는다면 다시"

기전주가 분루를 흘리며 진세로 부딪혀갔다.

"크하핫! 사혼광멸(邪魂狂滅)!"

사전주가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콰르릉

끔찍한 사기(邪氣)를 띄운 기류가 억겁파라진을 휩쓸었다.

"크으윽!"

단번에 십여 명의 마존이 즉사했다.

휘이익

그사이로 기전주는 쾌첩하게 전면으로 쏘아나갔다.

제 이전각군을 빠져나가면 빽빽이 들어찬 고사림(枯死林)이 나타난다.

지금 그 고사림에서 처절한 난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일곱 무더기의 무사들이 자신들보다 수십 배나 많은 군웅들을 맞아 분전하고 있었다.

휘익!

기전주는 그 모습을 부면서도 이를 지그시 물며 앞으로 나갔다.

"저자가 기전주입니다."

문득, 두 명의 인물이 폐사림 앞에 내려섰다.

그들은 폐사림을 날아넘는 기전주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교주라는 자와 모용인이라는 중년유사였다.

"저 늙은이는 아마 문주를 불러내기 위해 가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 좋다. 네가 가서 저자를 속여 비동(秘洞)의 금제를 열도록 하라."

"!"

중년유사는 쾌첩하게 쏘아나갔다.

그뒤로 교주라는 자도 신속히 따라나갔다.

 

기전주는 거대한 철문 앞에 섰다.

이곳이 천세문 이천 년 역사가 비장된 천세비동이다.

"누구냣?"

막 철문으로 다가서던 기전주는 홱 돌아섰다.

"수석전주, 접니다."

한 명의 중년유사가 기전주 앞으로 날아 내렸다.

기전주의 안면에서 긴장의 빛이 사라졌다.

", 유전주였구려. 마침 잘왔소. 빨리 비동으로 들어가 문주님을 출관시키겠오."

"걱정마십시오."

기전주는 돌아서서 문고리를 이리저리 돌렸다.

찰칵

이어 그는 자기 오른손에 낀 지환(指環)을 철문의 흠에 끼워넣었다.

쿠르릉

둔중한 굉음이 일며 문이 열렸다.

그들 앞에는 야명주로 환하게 밝힌 깊은 동굴이 나타났다.

"유전주, 부탁윽!"

기전주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유전주가 돌연 기전주의 등에 일장을 후려친 것이다.

"모용인... ... 네놈이..."

기전주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이를 갈았다.

"흐흐흐... 수석전주, 본인은 배신한 것이 아니오. 본인은 마교 팔대마령(八大魔靈) 중 일인일 뿐이오."

"... 네놈이 마교의 첩자..."

기전주가 실색을 하였다.

"크흐흐... 문주도 뒤따라 갈터이니 늙은이 먼저 지옥에 가 기다리시구려!"

유전주는 일장을 후려쳤다.

기전주는 속수무책으로 날아오는 장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퍼엉!

"크악!"

가슴에 일장을 맞은 기전주는 붕 떠올랐다가 모질게 나뒹굴었다.

"흐흐..."

유전주는 음악하게 웃은 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십여 장을 들어가니 또 다른 철문이 나타났다.

끼이익

그곳에는 별반 금제가 없는 듯 철문은 둔중하게 열렸다.

"으음"

모용인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그곳부터는 완전히 만년한철로 주조한 길 통로였다.

사방의 벽이 모두 철벽으로 되어 있어 어떤 압력에도 견딜 수 있게 되어있다.

"흐흐... 고맙게도 금제가 모두 해체 되어있군!"

모용인은 눈알을 굴리며 긴 통로를 빠져나갔다.

곧 그는 넓은 광장에 이르렀다.

헌데, 그곳에는 두 개의 웅덩이가 있었다.

일 장 넓이의 웅덩이는 맑디맑은 옥수가 고여있고 십 장 넓이의 웅덩이에는 푸르스름한 물이 고여 있었다.

모용인은 푸르스름한 물이 극히 두려운 듯이 조심조심 그곳을 빠져나갔다.

광장 맞은편에는 또 다른 석문이 있었다.

끼익!

석문이 열리자 종이냄새가 확 끼쳤다.

그곳은 방대한 서고(書庫)였다.

족히 수백만 권은 될 듯한 분량의 서적들이 삼 장 높이의 수백 개 서가에 가득히 꽂혀 있었다.

모용인은 수백만 권의 장서에 일별도 주지않고 앞으로 나갔다.

곧 그는 또 다른 석문에 이르렀다.

그다음에 나타난 석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석실 중앙에 높은 석대가 놓여 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 십단 높이의 서가가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서가를 훑어본 모용인의 눈에 탐욕의 빛이 번뜩였다.

서가는 하나같이 천하를 울리던 인물들의 신공비급들로 가득차 있었다.

"아니 유전주, 어쩐 일로 예까지 왔는가?"

문득 맞은편 석벽이 갈라지며 한 명의 중년인이 걸어나왔다.

매우 청수한 모습의 인물이다.

모용인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사태가 위급하여 대죄를 무릅쓰고 비동에 들어왔아옵니다."

중년인, 즉 천세문주의 얼굴에 가벼운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아니, 무슨 일이 있기에 사태가 급하다는 얘기인가?"

", 본문의 전 제자들이 암중에 중독된 상태에서 마교를 중심으로한 수천의 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아옵니다."

천세문주는 경악의 빛을 띄웠다.

", 알겠다. 곧 금제를 발동시키고 나가보자!"

천세문주는 급히 마지막 밀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그리 넓지 않은 석실이었다.

중앙에 작은 석탁이 하나 덩그라니 놓여있었다.

끼이익

천세문주는 벽에 난 벽장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는 두 권의 비급이 나타났다.

천세문주는 비급들을 한쪽으로 밀쳤다.

그러자 벽장 뒷면에 두 개의 홈이 드러났다.

천세문주는 자신의 손목에 걸린 청홍쌍환(靑紅雙環)을 그 홈에 끼우고 지그시 눌렀다.

쌍환이 반즘 들어갔을 때였다.

슈슈슈

"!"

천세문주는 골수까지 에이는 살기에 기겁을 하며 돌아섰다.

동시에 그의 우장에서 시뻘건 혈기(血氣)가 폭사되었다.

"으악!"

"흐읍!"

선혈이 튀었다.

유전주와 천세문주는 똑같이 튕겨져나갔다.

천세문주의 가슴에는 어느사이엔가 손바닥만한 륜()이 박혀있었다.

"탈명비륜(奪命飛輪)! 네놈이 감히 본문을 배신하고..."

천세문주는 중상을 입었으면서도 대갈을 터뜨렸다.

위잉!

무지막지한 강기가 쓰러진 유전주는 박살낼 듯이 쏟아졌다.

콰릉!

간일발의 차이로 모용인은 천세문주의 일장을 피했다.

!

그자는 이어 민첩하게 두 번째 석실로 달아났다.

"능지처참하리라!"

천세문준가 이를 갈며 쫓아갔다.

위이잉!

천세문주의 장력이 두 번째 석실을 빠져나가려는 모용인의 등으로 밀려갔다.

쾅콰르릉!

다음 순간. 또 다른 장력이 밀려와 천세문주의 장력과 충돌하였다.

"으윽!"

천세문주는 둔중한 신음을 토하며 비칠비칠 물러섰다.

그의 가슴에선 끊이지 않고 선혈이 흘러내렸다.

스스스

어느사이엔가 교주라는 자가 석실에 들어와 있었다.

"미친 수작 말아라!"

천세문주는 대갈했다.

그러나 내심으로 그는 오싹한 한기가 끼침을 금치 못했다.

마교주는 결코 자기보다 하수가 아니다.

게다가 자신은 치명적인 암습을 받지 않았는가?

(어떻게 하든 마지막 금제를 발동시켜야 한다.)

천세문주는 속으로는 얼음장같이 냉정해지고 있으나 겉으로는 대노한 것같이 보였다.

"받아랏!"

한 줄기 담담한 향기를 띄운 강기가 폭사되어 갔다.

마교주도 지체않고 마주 일장을 쳐내었다.

콰르릉

석실이 뒤흔들렸다.

중앙의 석대가 박살이 나며 서가에 곶힌 비급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읏강하다.)

양인은 동시에 휘청하였다.

천세문주는 마음이 급해졌다.

"타핫! 굉천참살강(轟天斬殺罡)!"

천세문주의 쌍장에서 시퍼런 강기가 폭음을 내며 쏟아졌다.

"! 천마혈인(天魔血印)!"

마교주도 지체않고 쌍장을 쳐들었다.

콰릉파앙!

석실바닥이 움푹 패여 날아갔다.

삽시에 오십여초가 지났다.

"와아"

양인이 대치하고 있는데 수십 명의 군웅들이 밀려들어 왔다.

"! 이것은 무림천년기전(武林千年奇典)! 낙일산화경(落日散花經)이닷!"

한 무림인이 바닥에서 한 권의 비급을 줏어들고 외쳤다.

"끄악"

다음 순간 그자는 피곤죽이 되어 즉사했다.

수십 줄기 장경이 그자를 후려친 것이다.

단번에 석실을 아수라지옥으로 변했다.

무림인들은 서가를 마구 뒤지고 무림천년기전 중의 비급을 탈취하려고 서로를 죽였다.

"괘씸한 놈들!"

천세문주는 대노했다.

콰르릉!

"아악!"

막 태령진해를 집어들던 자가 가슴이 뽀개져 즉사했다.

그러나, 고수들 사이의 사움에서 한눈을 파는 것은 승패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

"으흑!"

천세문주는 마교주의 일장을 가슴에 맞았다.

!

그는 그대로 마지막 석실로 튕겨져 들어갔다.

휘익!

그러나 천세문주는 사력을 다해 몸을 뒤집으며 반쯤 박힌 쌍환을 힘껏 눌렀다.

우르릉!

그러자 비동이 금시라도 무너질 듯이 뒤흔들렸다.

쉬이잉

백포인은 다급하게 천세문주의 등으로 일장을 후려쳐내었다.

퍼엉!

"크윽!"

천세문주가 다급히 막았으나 그의 왼팔이 으스러져 나갔다.

"실례하오!"

마교주는 급히 허공섭물의 공력으로 두 권의 비급을 끌어당겼다.

"어림없다!"

천세문주는 사력을 다해 오른팔을 휘둘렀다.

쩡쩡

거의 고형화된 검은 강기가 폭사되었다.

콰릉

"으음!"

마교주는 쌍장이 뽀재기는 듯한 통증에 비칠비칠 물러섰다.

천세문주도 가슴이 으스러져 쓰러졌다.

우르릉

그러나, 금제가 거의 발동한지라 마교주는 다급히 석실을 빠져나갔다.

콰릉콰르릉!

천지개벽.

천세문이 서 있던 분지 전체가 뒤흔들렸다.

콰릉쩌적

기어코 지면이 갈라지고 땅이 뒤집혔다.

휘익!

그사이로 수십 줄기 인영이 암천을 가르며 분지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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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단정관이로구나!> <지옥십관의 마지막 관문이 단정관인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 공포에 질리고.

<우리가 살려면 가엾은 난향이의 몸에서 살점을 발라 내야하는데...> <...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들 곁눈질로 난향이를 보며 갈등. 난향이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면서 울고 있고. 그때

청풍; [모두 내 질문에 대답해라.] 청풍이 입을 열고

아이들이 모두 돌아보고

청풍; [너희들은 자신이 인간이라 생각하느냐?]

정정; [당연한 걸 왜 물어?] + 철두; [물론 난 인간이다.]

다른 아이들도 끄덕이고

지자급1; (이청풍, 저 놈 설마...) 복면 속에서 눈 번뜩이고

청풍; [너희들은 자신이 인간이라는데 모두 동의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결코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는 법이다.]

청풍; [대가를 받고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할 수 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빼앗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청풍; [하지만 상대가 정을 준 대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정을 끊어버린다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 아이들 결연한 표정이 되어 고개 끄덕이고

청풍;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쨍그랑! 들고 있던 비수와 접시중 접시를 바닥에 내던져 깨트리고

난향; [!] 안도와 감격

청풍;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죽을 것이다.] 비수를 들고 복면인들 쪽으로 나서고.

지자급1; [이청풍! 오늘 여기서 죽겠다는 것이냐?]

청풍;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을 운명!] [빠르고 늦은 차이가 있을 뿐인데 무에 두렵겠소?] 비수로 지자급1을 겨누고.

정정; (저 벽창호...) 청풍의 뒷모습 노려보며 갈등하고

정정; (제멋대로 객기를 부리는 바람에 나까지 덤으로 인생 종치게 생겼잖아.) (잘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속으로 궁시렁 댈 때.

지자급1; [네놈들도 이청풍과 생각이 같은 것이냐?] 다른을 아이들 돌아보며 눈 부라릴 때

쨍그랑! 파삭! 아이들이 대답대신 접시를 바닥에 내던져 박살낸다.

정정; (어쩔 수가 없네.) 파삭! 역시 접시를 떨어트려 깨트리고. 옆에서 철두도 접시를 던져 깨트린다.

지자급1; [이 새끼들이...] 분노

청풍의 뒤로 모이며 비수로 방어자세 취하는 아아들

지자급1; [아깝지만 어쩔 수 없군,] [전부 말살해라.] 인자급 복면인들에게 외치고

! ! 일제히 칼을 뽑으며 다가오는 복면인들. 청풍 일행을 완전히 포위한 채

청풍; (여기까지겠군.) 비수를 든 채 침통한 표정

청풍; (무공이 딸릴 뿐 아니라 여긴 살인상단의 심장부다.)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은 버려야만 한다.)

청풍; (진진이와 어머니의 안위를 확인하지 못하고 죽는 게 유일한 유감이다.) 웃고

지자급1; [쳐라!] 복면인들에게 명령하고

복면인들이 청풍과 아이들을 공격하려하고. 그때

[멈춰라!] 외치는 소리에 일제히 멈추며 돌아보는 청풍과 아이들과 복면인들

파면살주; [무기를 거둬라.]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파면살주. 파면살주 뒤로 소수마녀와 귀파파, 천살로등이 따라 들어온다.

소수마녀의 모습 크로즈 업. 전과 달리 머리에 꽃핀을 하나 꽂고 있다. 그 꽃핀은 단지회가 빈민가에 있는 청풍의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 중 하나

청풍; (저 계집이 나타났다.) 눈 부릅. 그때

[단주님!] [단주님을 뵙습니다.] 복면인들이 급히 소수마녀에게 인사한다.

청풍; (단주!) 경악하고

<저 계집의 신분이 범상치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천하삼대 살수조직중 하나인 살인상단의 단주였을 줄이야.> 소수마녀가 앞으로 나서는 모습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파면살주는 멈춰서고. 그 뒤에서 귀파파와 천살로는 문을 닫고 있다.

소수마녀; [이청풍!] [너는 내게 맹세를 했었다.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내 요구 한 가지를 무조건 들어주겠다고!] 청풍과 5미터쯤 거리 두고 멈춰서며

정정; [뭐야? 청풍이 너 저 여자와 아는 사이였어?] 놀라 청풍에게 속삭이고

청풍; [하고 싶은 말이 뭐요?] + (어쩌면 저 계집이 나타난 게 천재일우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소수마녀; [내 요구는 네가 자객이 되어 날 위해 일하는 것이다.]

청풍; [당신을 위해 뭔가를 해줄 수는 있소.]

청풍; [하지만 나로 하여금 마귀가 되라고 요구하진 마시오.]

소수마녀; [끝내 날 거역하면 죽일 수밖에 없다.]

소수마녀; [물론 널 따르는 아이들까지!] 차갑게 웃고.

청풍; [죽일 수 있으면...] ! 외치며 갑자기 비수를 천장에 달려있는 등들 중 하나에 강하게 던지고.

지자급1; [무슨 짓을...] 놀라며 허리에 찬 칼을 잡고

[!] [!] 귀파파등도 놀랄 때

! 등이 하나 청풍이 던진 비수에 맞아 꺼지고

청풍; [죽여보시오!] 파팟! 정정등 다른 아이들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아 연달아 던진다

! 파삭! 나머지 세 개의 등이 역시 비수에 맞아 깨지며 실내가 확 어두워진다.

파면살주; [조심하게 단주!] 외치며 어둠 속에서 소수마녀를 덮쳐오고. 귀파파와 천살로는 입구쪽에 서있어 반응이 늦었다. 하지만

[멈춰라!] 어둠 속에서 외침이 들려 눈 치뜨며 급정거하는 파면살주.

[움직이면 이 여자가 죽는다!] 다시 들리는 음성. 직후

귀파파; [무슨 일이냐?] 덜컹! 외치며 닫혀있던 문을 다시 연다. 문 밖은 복도지만 등이 걸려 있어 환하고.

[!] [!] 복도의 불빛이 흘러들어 실내가 다시 밝아지자 경악하는 사람들

! 청풍이 소수마녀의 뒤에 달라붙어 비수를 소수마녀의 목에 대고 있다. 소수마녀는 전혀 움직이지 않은 모습이고. 파면살주는 놀라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고

[단주님!] [! 저놈이 단주님을...] [... 멈춰라!] 복면인들 기겁하고

[!] [역시 청풍이다!] [잘 했어!] 환호하는 아이들. 하지만

정정; (찜찜하네.) 찡그리고

정정; (청풍이의 움직임이 기민했다고는 해도 살인상단의 단주쯤 되는 여자가 저렇게 쉽게 제압당하다니...)

청풍; [부단주! 여러 말 하지 않겠소.] 비수를 소수마녀 목에 바짝 댄 채 파면살주에게 말하고

청풍; [이 여자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우리가 여길 무사히 떠날 수 있게 해주시오.]

파면살주; [이청풍! 이곳은 우리 살인상단의 심장부다.] 무뚝뚝

파면살주; [겨우 반년 익힌 무공으로 탈주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느냐?]

청풍; [물론 우릴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당신들도 시체 한구를 더 얻게 될 것이오.] ! 소수마녀의 목에 비수를 바짝 들이밀고.

주르르! 그 바람에 비수 날이 소수마녀의 목에 조금 파고 들며 피가 비치고

귀파파; [... 조심해라!] 비명 지르지만

소수마녀; [이청풍!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차갑게 말하고

청풍; [과연 그럴지 두고 보면 알 거요.]

소수마녀; [네가 날 절대 죽이지 못한다는 증거를 원한다면 보여주마.] [내가 머리에 꽂고 있는 장식이 바로 그것이다.]

귀파파; (그러고 보니..) 놀라고. 천살로도 흠칫! 하고

<장신구를 일체 착용하지 않는 단주가 머리에 장식을 달고 있다.> 소수마녀의 머리에 꽂힌 머리핀 크로즈 업

청풍; [머리 장식 따위가 무슨 증거라고...] + [!] 말하며 소수마녀의 머리에 꽂힌 머리핀을 보다가 경악하고

청풍; (... 저 머리 장식은...) 경악하고.

<내가 진진이에게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다!> 자신이 그 머리 장식을 이진진의 머리에 꽂아주던 장면 떠올린다. 이진진은 집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수줍어하고

소수마녀; [이제 네가 왜 날 죽일 수 없는지 알았겠지?] ! 자기 목에 대어진 청풍의 비수를 손가락으로 잡아 떼어내고

청풍; [진진... 진진이를 어떻게 한 거요?] 저항하지 않고 소수마녀의 목에서 비수를 떼며 눈 부릅뜨고

소수마녀; [네 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 청풍의 손목을 잡고

소수마녀; [내게 무례한 대가부터 치러라.] 빠지직! 청풍의 손목을 잡은 소수마녀의 손아귀에서 벼락이 일어나고

빠지지직! 감전되어 온몸이 뻣뻣해지며 퍼덕이는 청풍

[... 청풍아!] [안돼!] 정정과 아이들 비명

파면살주; (왜 초보 자객에게 간단히 제압당했는가 했더니 이유가 있었군.) 고개 끄덕. 안도하고. 그때

[끄으...] 온몸이 벼락에 휘감겨 기절하는 청풍

소수마녀; [버르장머리 없는 놈!] ! 바닥에 청풍을 패대기치고

소수마녀; [끌고 오세요. 다른 것들은 뇌옥에 가둬두고...] 입구로 간다.

파면살주; [그리함세.] 고개 좀 숙이고

소수마녀; (이청풍!) 차갑게 웃고

<넌 결코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귀파파, 천살로와 함께 나가는 소수마녀의 뒷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그 뒤에서 파면살주가 청풍의 팔을 잡고 일으키고. 지자급1과 복면인들이 아이들 손에서 비수를 뺏고 있다.

 

#146>

살인상단의 비밀 거점 외부 모습. 저녁 무렵.

입구 근처의 높은 절벽. 그 중간쯤에 창문이 나있다. 원형의 창문인데 유리와 쇠창살로 이루어져 있다.

 

절벽 안쪽의 복도.

복도 끝의 문. 도마녀와 검마녀가 지키고 있고

문 안쪽은 넓고 화려한 침실. 침실 한쪽에 직경이 2미터쯤인 원형의 창문이 있다. 밖에서 보이던 그 창문. 침실은 전형적인 여자의 침실. 가구와 화장대, 탁자와 의자, 여성스러운 그림등이 있다. 그림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한 쌍 남녀의 초상화다. 소수마녀를 닮은 서른살 가량의 미녀가 의자에 앉아있고 잘 생긴 사십살 정도의 중년인이 그 뒤에 서서 웃고 있는 초상화. 이 초상화의 남녀는 소수마녀의 부모들이다. 헌데

초상화를 크로즈 업

창가에 놓인 큰 침대에 청풍이 눈 감고 누워있다. 가운형의 잠옷 차림인데 가슴까지 이불을 덮고 있고.

근처 탁자에는 머리핀이 놓여있고

움찔! 하는 청풍.

쏴아! 물소리가 들리고

청풍; (물소리...) 천천히 눈을 뜨고

가만히 누워 상황을 살피는 청풍.

청풍; (향기로운 냄새도 그렇고... 여긴 여자의 침실이다.) 생각할 때

덜컥! 한쪽의 문이 열리며 누가 나온다.

돌아보는 청풍.

소수마녀; [지금쯤 정신 차릴 거라 생각했다.] 문 안쪽은 욕실. 욕실에서 가운을 입고 나오는 소수마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면서

소수마녀; [잠시만 기다려라.] [너를 보려고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먼지투성이가 되어서 목욕부터 해야만 했다.] 화장대로 가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청풍. 이불을 젖히고. 알몸에 가운 차림이다.

화장대에 앉아서 거울을 보며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 소수마녀. 가운 아랫자락이 벌어지며 미끈한 다리가 드러난다.

청풍이 탁자로 가는 게 거울에 보이고

탁자에 얹혀진 머리핀을 집어드는 청풍.

소수마녀; [네가 도축장에서 처음 일하던 해 누이에게 생일선물로 사준 것이라 들었다.] + (기절해있을 때 최면술을 써서 알아낸 사실이지만...)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말하고. 거울을 통해서 청풍을 보며

청풍; [진진이는... 무사한 거요?] 머리핀을 보며 말이 잘 안나오고

소수마녀; [위험한 상황을 겪긴 했다.]

소수마녀; [네 어머니는 단양에서 배를 타고 경항운하를 따라 태산쪽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청풍의 뇌리에 떠오르는 이산하의 말. #119>의 장면

 

이산하; [서둘러서... 단양으로 가라.]

청풍; [단양...]

청풍; [어머니가 단양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이산하; [그렇... .] [네 어머니의 최종 목적지는... 무림맹이 있는 태산인데...] 목소리가 흐려진다.

이산하; [단양에서 배를 타고 경항운하(京杭運河;북경과 항주를 잇는 대운하)를 따라 태산으로 갈 계획이었다.]

회상 끝

 

소수마녀; [배를 타려고 한 건 물론 현명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걸 미리 짐작하고 포구에서 기다리던 단지회의 파락호들에게 잡히고 말았지.]

소수마녀; [거기서 끔찍한 일을 당할 뻔 했지만 다행히 내가 도착하는 게 늦지 않아서 구할 수 있었다.]

청풍; [당신이 어머니와 진진이를 구했다는 거요?]

소수마녀; [네게 은혜를 한 번 더 입힐 생각으로 한 일이니 고마워할 건 없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서 묶으며

청풍; [어머니와 진진이는 지금 어디 있소?]

소수마녀; [안심해라. 연금 상태이긴 하지만 잘 대접받고 있다.] 머리를 수건으로 싸매는 걸 마무리 짓고

청풍; [내게 뭘 원하는 거요?] 탁자 앞의 의자에 앉고

소수마녀; [말했지 않느냐? 날 위해 자객이 되라고...] 돌아앉고

청풍; [먼저 어머니와 진진이를 만나게 해주시오.]

소수마녀; [가족을 만나고 싶으면 날 위해 열명의 인간을 죽여라.]

거리를 두고 앉아서 서로를 노려보는 청풍과 소수마녀. 이윽고

청풍; [솜씨 좋은 자객이라면... 당신네 살인상단에도 넘치도록 많지 않소?]

소수마녀; (바짝 날이 서있더니 조금은 수그러들었네.) + [물론 우리 살인상단의 자객들 중에는 대단한 실력자들이 많지.]

소수마녀; [문제는 내가 노리는 표적들도 그걸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방비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청풍; [그래서 허를 찔러 오히려 초보에 자객답지 않은 날 보내서 죽이려는 거요?]

소수마녀; [지금의 너는 약하다. 무공도 보잘 것 없고!]

소수마녀; [일정 경지 이상에 오른 고수들이라면 한눈에 그걸 알아볼 것이고...] [자연스럽게 방심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소수마녀; [그 틈을 이용하면 그자들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청풍; [열명... 열명만 죽이면 어머니와 진진이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시오.] 어쩔 수 없이 타협

소수마녀; [약속하마.] + (실랑이가 겨우 끝났네.) 내심 안도. 표정에는 변화가 없고

청풍; [내가 죽여주기를 원하는 자들은 누구요?]

소수마녀; [그자들이 누군지 알려주기 전에 내가 누군지부터 알려주겠다.] ! 의자에서 일어나고

이어 부부의 초상화로 걸어가고

소수마녀; [이분들이 누굴 것 같으냐?] 초상화를 보면서

소수마녀를 닮은 여자 크로즈 업

청풍; (부부중 아내쪽이 저 여자와 판박이다.) + [단주의 부모님인 것 같소이다만...] 넘겨짚고

소수마녀; [그렇다. 이분들이 내 부모님들이다.] 초상화를 쓰다듬고

소수마녀; [아버지는 전대 살인상단의 단주셨던 살인대작(殺人大爵)이셨다.] 부부중 남자쪽을 보며

청풍; (그래서 나이도 실력도 파면살주나 천자급 자객들에게 뒤지면서도 살인상단의 단주가 되었구나.)

소수마녀;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살인상단은 마교 소속이다.]

청풍; [그렇습니까?] 놀라고

소수마녀; [정확히 말하자면 살인상단은 마교를 이루는 사대마가중 암흑마가에 속한다.] 초상화를 보며

소수마녀; [그리고 어머니는 암흑마가의 전대 가주셨던 암흑수라(暗黑修羅)라는 분의 두 딸중 장녀셨다.] 초상화 속의 여자를 보며

청풍; (저 여자가 암흑마가 가주의 핏줄이었다니...) (생각보다 더 대단한 거물이었구나!) 놀라고

소수마녀; [하지만 외조부, 암흑수라님은 삼십여 년 전 마교가 멸망할 때 무림맹주 섭장천과 싸우다 입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돌아서고

소수마녀; [문제는 외조부님에게 아들이 없으셨다는 점이었다.] 탁자로 오고

소수마녀; [그래서 두 명의 사위중 한명이 대를 이어야 했고...] [당연히 큰 사위인 아버지가 암흑마가의 가주가 되셨어야 했다.] 청풍의 건너편 의자에 앉고

청풍; [영친 신변에 불상사가 생긴 거요?]

소수마녀; [암흑마가의 가주로 취임하신 직후 아버지는 의문의 실종을 당하셨다.] 고개 끄덕이고

소수마녀; [이에 둘째 사위... 내게는 이모부가 되는 기절초괴(奇絶超怪) 패륵(覇勒)이란 인물이 암흑마가의 가주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청풍; (어쩐지 저 여자의 아버지가 실종된 데에는 음모가 개입되어 있는 것 같다.)

소수마녀; [아버지가 실종되시자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도 곧 세상을 등지셨는데...] [그때 내 나이 겨우 다섯 살이었다.)

청풍; (의외로 저 여자 나이가 많구나. 거의 어머니 또래일 것이다.)

소수마녀; [본론으로 들어가서...] [네가 죽여주어야할 자들은 암흑마가의 적들이다.] 탁자 건너편의 청풍을 지긋이 보고

청풍; [무림맹의 고수들을 죽여 달라는 거요?] 긴장

소수마녀; [물론 네가 죽여야할 열명 중에는 무림맹 소속도 있다.] 끄덕

소수마녀; [하지만 대부분은 마교를 멸망으로 이끈 배신자들이다.]

청풍; [배신자라면 사대마가중 다른 가문의 인간들이겠소,]

소수마녀; [삼십여 년 전 당시 마교의 교주셨던 분은 구천마(九天魔尊) 용백(龍伯)이란 분이셨다.]

 

<사대마가중 천마세가(天魔世家)의 가주이기도 하셨던 구천마존님의 무공은 무림맹주 섭장천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인상을 풍기는 노인이 철면무제 섭장천과 맞서 웃고 있는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마귀같은 인상의 노인이 구천마존 용백. <신마유희>의 구천마존 용백 캐릭터를 그냥 써도 됨

<오히려 본교의 중시조이신 천마께서 남긴 최강의 마병 천마묵장(天魔墨掌)까지 쓸 수 있었다면 섭장천을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인티니티 워>에 나온 타노스의 건틀렛 같은 장갑이 세워져 있는 것을 을 배경으로 나레이션. 다만 이 장갑은 검은 색이다.

 

청풍; [무림맹주와의 싸움에서 천마묵장을 쓰지 못했다는 말로 들립니다.]

소수마녀; [천마묵장은 그 마력이 실로 가공해서 보통사람은 보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린다.]

소수마녀; [그래서 평소에는 천마뢰(天魔牢)라는 곳에 밀봉해서 보관해왔다.]

청풍; (얼마나 무시무시한 병기이기에 쓰지 않을 때는 밀봉을 해두어야 한단 말인가?) 놀라고

소수마녀; [천마뢰에는 천마께서 술법으로 펼친 금제가 걸려있다. 그 때문에 힘으로는 절대 열 수가 없고...]

소수마녀; [두개의 열쇠가 있어야 천마뢰를 열고 천마묵장을 꺼낼 수 있다.]

청풍; [혹시 배신이라는 것이...] 놀라고

소수마녀; [두개의 열쇠는 광명륜(光明輪)이란 팔찌와 생사교(生死橋)라는 칼이다.]

청풍; (광명륜과 생사교!) 두근! 심장이 뛰고

청풍; (오늘 처음 듣는 이름들인데 어째서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는 건가?)

소수마녀; [광명륜과 생사교는 그 자체로도 강력한 힘을 지닌 무기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는 천마뢰의 금제를 해제하는 열쇠라는 점이다.]

청풍; [누군가... 광명륜과 생사교를 빼돌렸겠습니다.] [그 때문에 구천마존은 무림맹주와의 결전에서 천마묵장을 쓰지 못했을 테고...]

소수마녀; [문일지십(聞一知十;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안다.)이라더니...] 조금 웃으며 청풍을 보고

좀 멋쩍은 표정 짓는 청풍

소수마녀; (순진하기도 하지) + [섭장천이 마교로 쳐들어오기 직전, 천마묵장과 함께 천마삼보(天魔三寶)로도 불리는 두 개의 열쇠중 생사교가 사라졌었다.]

소수마녀; [결국 구천마존께서는 천마묵장 없이 섭장천과 싸우게 되셨고...]

 

<원래의 구천마존님 실력이라면 섭장천을 이기진 못해도 지진 않으셨겠지만 생사교의 도난 건으로 심란해진 상태라 그만 패사(敗死) 하시고 말았다.> 쓰러진 구천마존을 보며 합장하는 섭장천. 섭장천도 온몸이 피투성이고. 주변에서는 쌍뇌신로, 사신장을 포함한 무림맹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다.

 

청풍; [결국 결전 직전에 생사교를 빼돌린 자가 마교를 멸망시킨 원흉인 셈이군요.] 끄덕이고

소수마녀; [우리 암흑마가의 짓은 아니다.] 고개 젓고

소수마녀; [외조부 암흑수라께서는 비록 마교도이긴 해도 잔꾀와 편법을 혐오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청풍; [다른 두 가문에 혐의가 있겠습니다.]

소수마녀; [번뇌마가(煩惱魔家)와 혈전마가(血戰魔家)는 무림맹과의 결전에 주력을 참전시키지 않았다.]

소수마녀; [덕분에 두 가문은 여전히 세력을 온존시키고 있다.] [이게 무얼 의미하겠느냐?] 강렬한 눈빛

청풍; [생사교의 도난은 두 가문의 소행일 가능성이 짙군요.] 끄덕

소수마녀; [번뇌마가와 혈전마가는 무림맹과의 충돌을 꺼려하여 암중에서 암약하고 있다.] 심각

소수마녀; [그래도 무림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몇 명의 전위(前衛)를 세상에 뿌려놓고 있다.] 살기 어린 눈빛

청풍; [단주가 날 이용해서 죽이려는 자들이...]

소수마녀; [바로 마교를 배신한 번뇌마가와 혈전마가의 악귀들이다.] 강렬한 표정으로 말하고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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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1)

 

 

 

동쪽 절벽은 아주 높고 컸다.

이매봉은 한시간이나 벽호공(壁虎功)을 펼쳐 절벽을 탄 후에야 천산삼로의 노이가 말한 그 동굴로 짐작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천산삼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일매향의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괜한 짓을 했군. 녀석은 대체 어디 숨은 거야? 한가하게 그녀석을 쫓아다닐 시간이 없는데...]

천산삼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매봉은 동굴 입구의 바위턱에 걸터앉았다.

파란 하늘 아래 먹이를 찾아 날고 있는 매 한 쌍이 보인다.

눈에 덮힌 산등성이 주름진 여름 이불자락같고, 높이 솟은 소나무들은 눈으로 치장하고도 푸른 가시창날같다.

바람은 절벽을 만나 하늘로 올라가려 하고, 한 참 올라와버린 해는 겨울날의 미미한 자기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말해준다.

갑자기 허탈해졌다.

텅빈 속 때문인지 아니면 지난 밤에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천산삼로 중 둘째의 말 한마디에 이곳까지 와본 자기가 한심하기도 했다.

어쩌면 벌써 현천록은 바람을 타고 멀리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괘심한 마음이 든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주욱 같이 있게 될 것같은 기분이었는데, 단지 몇 시간 만이 주욱이란 기분인가 싶다.

이매봉은 품에서 물소뿔 모양의 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뿌우우우...

 

소리가 아주 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이매봉이 다시 한 번 나팔을 불었을 때 절벽 위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까마귀처럼 깃털은 새까맣고 매처럼 날렵한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을 지녔으며 머리는 닭과 비슷했다.

괴조(怪鳥)는 이매봉을 발견하고 동굴 앞으로 천천히 미끌어지듯이 내려왔다.

이매봉은 훌쩍 날아 괴조의 등에 올라 목 뒤의 깃털 속에 몸을 묻었다.

깃털 하나가 파초잎 만하다.

괴조의 체온이 이매봉의 몸을 훈훈하게 한다.

이매봉은 괴조의 등을 두드려주듯 손바닥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서안(西安)으로 가자.]

괴조는 한 번의 날개짓으로 높이 솟구쳐 올라가더니 순식간에 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자금산 정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지는 괴조를 힐끗 본 후에 절벽으로 뛰어내려왔다.

수 십장의 절벽을 떨어져 내리던 그 사람의 몸은 마치 허깨비처럼 허공에서 둥실 멈추더니 동굴에 내려섰다.

황색가사를 걸치고 회색바라를 진 포두화상이었다.

나한상처럼 둥글고 납작한 얼굴에는 해픈 웃음이 걸려있지만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포두화상은 동굴 입구를 살펴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음의 새 환우마조(寰宇魔鳥)가 나타났다는 건 환우회의 회주가 왔었다는 이야기인데... 환우회마저 옥황빙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단 말인가?]

포두화상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렸다.

[환우회의 회주가 여기에 왔었다면 이 화상도 들어가보지 않을 수가 없지.]

포두화상의 몸이 구름을 밟는 듯 기우뚱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후, 세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치달려 올라와 동굴로 들어갔다.

비슷하게 생긴 천산삼로였다.

 

***

 

현천록은 생각했다.

(동굴을 되돌아 간다면 입구가 막혔으니 뚫고 나가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우같은 진양진인이 여기서 사라졌으니 그곳 말고도 출구는 있다. 물이 흐르고 있으니 물을 거슬러간다면 장강에 이를 수도 있을 테고, 이 동굴은 지하세계처럼 넓고 거대하니까 또 다른 출구도 있을 가능성이 많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막힌 곳을 뚫고 나가고 그 전에는 다른데를 찾아보자.)

암흑 속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것들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현천록은 들어온 곳과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체중이 없는 그의 몸이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흘렀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동굴 속 바람을 따라 얼마동안 갔을 때, 앞이 점점 밝아졌다.

그가 가는 앞쪽 어딘가에 불이 있었다.

일렁이는 것으로 봐서 횃불인 것 같았다.

현천록은 그와 진양진인이 아닌 또 다른 사람이 동굴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출구가 또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현천록은 불을 향해서 다가갔다.

한데, 불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아니 백개도 넘을 것같은 횃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어른거리는 그림자들도 보였다.

두런 거리며 주고 받는 말소리도 들린다.

[난 이번일만 끝내고 나면 정말 무림을 떠날 생각이네.]

[뭘 할 텐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농사를 지으며 살겠어.]

[! 신궁(神弓) 오무한(吳武漢)이 사냥도 아니고 농사를 짓겠다고?]

나직한 탄식이 섞인 소리로 먼저 말한 자가 말했다.

[더 이상 죽이기가 지겨워졌네.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냥 좋은 일을 하고 싶어. 기르고 보살피는...]

[한심한 소릴 하는군. 이십년 동안 자네 활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와서 그런 소린가? 우리한테 다른 길은 없네. 그냥 살아왔던 그대로 살아가는 것뿐.]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옳은 이야기야. 지금 다르게 살아봤자 아무도 우리를 곱게 보지 않아.]

신궁 오무한이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심한 소리라는 건 아네. 하지만 이제 죽이고 빼앗는 건 너무 질렸어. 누구의 용서를 바라거나 동정을 기대하고 하는 건 아니라네.]

끼어든 목소리가 코웃음을 쳤다.

[답답한 소리군. 자네 활이 정말 신궁인지 의심이 다가는군. 자네는 가만히 숨어살고 싶겠지만 자네 원수들도 그냥있을까? 아마 끝까지 찾아가서 죽이려 들걸세.]

[난 이번 일로 패혼기(覇魂旗)에 진 빛을 다 갚게 되네. 살아난다면 말이지.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죽고 싶네.]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기주(旗主)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게. 비록 여기엔 패혼기에 얽매인 사람들만 들어왔다 하지만 조심하는게 좋을걸세.]

[이렇게 큰 동굴에 그자가 숨었다면 스스로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찾지 못할거네. 어쩌면 기주에겐 다른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지.]

바로 그때였다.

쿠쿵!

어디선가 굉음이 들리며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동굴 천장에서 돌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굉음이 동굴 속의 두런거리던 소리들을 모두 삼켜버린 듯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입구 쪽이다!]

누군가가 소리치며 횃불을 팽개치고 달려갔다.

가지런히 움직이던 횃불들이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어떤 것은 몰려들고 어떤 것들은 멀어져갔다.

하지만 대체로 횃불들은 현천록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

다시 굉음이 들렸다.

이번엔 다른 쪽이었다.

현천록은 근처에 떨어진 횃불을 하나 집어들었다.

입구 쪽으로 달려가지 않고 머뭇거리던 불빛은 겨우 두세개 밖에 없었다.

현천록도 횃불을 들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동굴속이라 불이 있어도 얼굴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다.

옆에 있는 사람이 치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주가... 기주가 우리 모두를 죽이려하고 있어. 동굴 속에 생매장하려고... 나쁜 노옴!]

다른 사람이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틀렸어. 기주는 우리가 다 덤벼도 이기지 못하는 자야. 우릴 죽이려 마음 먹은 이상 다 죽게 되겠지.]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우린 모두 칠십명이다. 각기 지닌 재주가 다르니까 어쩌면 다른 출구를 찾아 나갈 수도 있어.]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는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네. 다만...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걸 알지 못했을 뿐.]

신궁 오무한의 목소리였다.

한 사람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럼 기주가 온 산을 다뒤져 진양진인을 찾으라고 한 것도 결국 우릴 여기에 들여보내 죽이려고 꾸민 일이란 말인가?]

[현무호에서 죽은 사람만해도 삼백 명이 넘네.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십중 팔구는 우리처럼 패혼기에 복종하고 왔을 걸세.]

오무한의 목소리는 아주 침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말했다.

[산을 뚫고 나갈 수는 없을까?]

바로 그때 아주 길고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그곳에 있던 사람은 아무도 그처럼 처절한 비명소릴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리고 그 소리는 시작이었다.

연이어 지옥의 아비규환을 연상시키는 끔찍한 비명들이 공포가 되어 동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주다! 기주도 동굴에 들어와 있었다.]

휘익! 픽픽!

다른 사람들이 재빨리 자기들의 횃불을 꺼버리는 것을 보면서 현천록도 양의신공을 입으로 불어내 꺼버렸다.

[저렇게 빨리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오직 기주뿐이다.]

다른 사람도 말했다.

하지만 모두 혼란에 빠져버렸다.

기주도 동굴에 들어와있다면 대체 누가 입구를 파괴했단 말인가?

모두 호흡을 멈추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비명에 이어서 마지막 비명이 들리는 것까지는 정말 찰라지간이었다.

꺼지지 않은 횃불들 중 어떤 것은 시체위에 떨어져 살을 태우는 지독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그 불빛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양 손에 각기 하나씩의 검을 들었으며 검날을 타고 피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마터면 현천록은 입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로 장군묵이었다.

두 손에 낭아봉 대신 검을 들었지만 틀림없는 장군묵이었다.

장군묵의 눈은 맹수처럼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장군묵은 검으로 현천록을 가리켰다.

밝은 곳에서도 어둠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신궁 오무한이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기주가 아니군. 젊은이! 자네는 왜 그들을 살해했는가?]

장군묵이 씨익 웃었다.

젊은이란 말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전음으로 오무한에게 주의를 주었다.

[기주는 아니지만 그 못지 않은 고술세. 움직일 때는 함께 하세.]

전음은 현천록의 귀에도 들렸다.

장군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신궁 오무한과 동료 세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뒤로 물러섰다. 장군묵이 그들 앞 세자 거리에서 갑자기 나타난 때문이다.

쉬이이이익!

검광이 어둠을 양단했다.

신궁 오무한과 동료들은 폭포수같은 검광 앞에서 막을 생각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져 버렸다.

죽음이 멀리 있을 때는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바로 앞에 있을 때는 압도당해서 공포조차 느끼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죽음이다.

 

---치지지직! !

 

찬물에 달군 쇠를 집어넣을 때 나는 소리가 오무한과 동료들을 깨웠다.

검과 검이 서로 부딪혔다가 미끌어지며 파란 불꽃을 튕겼다.

[후후후... 이번에도 태극혜검인가? 내가 낭아봉대신 검을 들었을 때는 당신한테 검술을 한 수 가르치려는 뜻이 있다는 걸 알았을텐데...]

장군묵이 쌍검 중 하나는 등 뒤로 돌리고 하나는 앞에 세우며 말했다.

현천록은 자기가 진양진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혈을 제압해놓은 것은 금방 풀렸었지만 모습을 바꾼 것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장군묵이 믿고 안 믿고는 차후에 생각해볼 일이고 일단 말부터 꺼냈다.

[일곱째! 진양진인은 벌써 빠져나갔을 것입니다.]

장군묵이 어리둥절했고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장군묵은 자기가 일곱째라는 걸 진양진인이 어떻게 아는가 싶어서 였고, 현천록은 아혈이 풀렸기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늙수구레한 진양진인의 목소리가 나와서였다.

붉으스름한 장군묵의 눈이 현천록을 노려보았다. 안개같은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현천록의 뒤에 섰던 네 사람은 본능적인 공포에 비칠비칠 물러섰다.

장군묵이 말했다.

[역시 당신은 뭔가 있어. 후후후... 그 이상한 행동에 이어... 내가 일곱째라는 것을 안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단 말인가?]

현천록은 당황했다. 이러다간 정말 진양진인의 의도대로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단났구나! 이사람은 나를 정말 진양진인으로 단정하고 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밖에 생각지 않겠구나.)

항상 여유를 갖고 즐겁게 지내려는 그의 정신상태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마음 속을 기쁨이 아닌 다른 침울한 것으로 채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뒤에서 신궁 오무한이 물었다.

[당신은 정말 진양진인이오?]

현천록이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아니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거냐? 개똥같은 도사놈아!]

먼저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네놈 목소리는 금방 알아듣는다.]

현천록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 설상가상이구나! 한 사람도 모자라서 두 명 세명이 이 가짜 진양진인한테 볼일을 보려하다니.)

그의 머리가 아주 오랜만에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여차했다간 정말 재수없는 상황을 맞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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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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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4)

 

 

진양진인이 말했다.

[가장 뛰어난 검법인 태극혜검이다.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고는 입문할 엄두도 못내는 절학이지. 할 수 있겠느냐?]

현천록이 말했다.

[동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럼 구결을 외우게. 구결에 따라 내력을 운용하며 펼친다면 이보다 더 나은 내가검법(內家劍法)이 있을 수 없네.]

무당파 최고의 절학이라는 태극혜검의 구결은 두 가지로 천결과 지결로 나뉘어 있었다.

천결(天訣)은 태극혜검을 펼치기 위해서 각 초식마다 양의신공을 따로 운용하는 특이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지결(地訣)은 각 초식이 어떤 상황에서 펼쳐질 것인지에 대한 것이며 그 효능을 분명히 해주는 비결이다.

태극혜검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의신공을 익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마음을 두가지로 나누어 사용하지 못하면 천결과 지결 역시 동시에 운용할 수 없고 위력은 크게 떨어지고 만다.

양의신공에 포함되어 있는 양심공으로 공력을 안팎으로 함께 운용해야 되는 것이니 만큼 태극혜검은 아주 특이하고도 그 위력을 직접 보기 전에는 실감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의 지도에 따라 태극혜검을 모두 익혔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배가 아주 고팠다.

현천록이 건져올린 물고기를 진양진인이 삼매진화로 구웠다.

현천록은 시쳇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두 가지의 절기를 지닌 고수가 되었고 그를 고수로 변모시킨 진양진인은 오히려 자기가 꿈을 꾸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현천록은 백금퉁소로 검을 대신해서 태극혜검을 연습했고, 그를 보며 진양진인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자세에 너무 치중하고 있군. 자세를 잃지는 않아야하지만 보이지 않는 상대를 염두에 두어야 하네.]

진양진인은 보검으로 현천록을 가볍게 내질렀다.

태극혜검의 첫 번째 수법인 지일고승(指日高升)이었다.

현천록은 여섯 번째 수법인 고월침강(孤月沈江)을 펼쳐 보검을 걷어냈다.

진양진인은 즉시 수법을 바꾸어 우밀휘진(羽密揮塵)의 맹렬한 수법을 사용했다.

현천록은 비홍횡강(飛鴻橫江)을 써서 진양진인의 머리를 노렸다.

진양진인은 벽죽소영(碧竹掃影)을 사용했다.

지일고승이나 고월침강, 우밀휘진, 비홍횡강, 그리고 벽죽소영에서 볼 수 있듯이 태극혜검의 열 두 초식은 모두 수비와 공격을 함께 포함하고 있었다.

진양진인은 처음에 열두초식을 펼쳐 초식만으로 일곱 번 현천록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세 번만이 현천록의 초식을 뚫을 수 있었고,

세 번째에는 두 번의 기회를 가졌으며, 세 번째에는 아예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네 번째에 이르자 현천록의 태극혜검은 완벽에 가까워지면 마치 다른 검법처럼 보였다.

전체가 하나의 초식처럼도 사용되고 두 초식이 하나가 되기도 하며 한 초식이 나누어져 세 초식이 되기도 했다.

진양진인은 이런 변화에 깜짝 놀랐다.

현천록을 연습을 통해 단련시킨다는 목적이었을 뿐이었는데 태극혜검을 자기보다 더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번쩍 하는 순간에 진양진인은 화석처럼 굳어졌다.

찬바람이 이마에 몰려왔다.

그보다 먼저 현천록의 퉁소가 한치 앞에 멈춰있다.

지일고승! 진양진인이 제일 먼저 펼쳤던 수법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속에서 서로가 대결했으나 이미 초상감각을 터득한 두 사람은 보지 않아도 거의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진양진인은 심장이 터질 듯 급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보검을 휘둘러 용도천문(龍到天門)과 한망충소(寒茫沖宵)를 잇달아 펼쳤다.

그러나 현천록의 소경심매(掃徑尋梅)는 말 그대로 길을 헤치고 매화를 찾듯이 용도천문과 한망충소를 뚫고 진양진인의 목젖에 다다랐다.

진양진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마음 속에는 왈칵 두려움이 일었다. 가르치면 가르치는 족족 자기를 능가해버리는 현천록에게 경이를 넘어 공포까지 느껴 지는 것이었다.

진양진인이 음성을 떨면서 물었다.

[자넨... 자넨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자넨 정말 사람이 아닐세.]

현천록이 말했다.

[제게 남이 갖지 못한 재주가 한가지 있을 뿐입니다.]

[어떤 재주인가? 자넨... 사제(師弟)의 예를 행하진 않았지만 내게 태극혜검을 배웠으니 그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겠나?]

진양진인이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현천록이 말했다.

[사람과 물건을 볼 줄 아는 재주입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 무엇이 적합한지가 즉시 떠오르고 물건을 보면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금방 아는 재주지요.]

진양진인이 물었다.

[그럼 검을 보면 검법이 떠오르고 퉁소를 보면 부는 법이 저절로 떠오른단 말인가?]

현천록이 말했다.

[비슷합니다.]

진양진인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자넨... 생지지자(生知之者)로군! 전생에 아마 절세고수였던 모양일세.]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리는 없습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현천록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귓속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

현천록은 서있던 곳에서 두 번이나 굴러서 눅눅한 바위에 떨어졌다.

[생지지자도 강호의 험난함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진양진인이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양의신공을 익혔다 해도 아직 부족한 화후로는 소천성(小天星)의 중수법을 견뎌낼 수가 없네. 무림에선 항상 가까이 있는 자를 경계해야하거늘 다음에 태어나거든 그때는 좀더 현명해지도록 하게.]

현천록은 잠시 충격을 받았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는 구장심조를 익혀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상태에 있는데 다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진양진인의 말은 그가 신화병기점에 있을 때 여러 무림인들로에게 듣곤 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소천성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현천록은 정신을 잃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진양진인이 그토록 공을 들여 자기를 가르치고 이제와서는 또 왜 해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백 수십 살이나 먹은 신선같은 노인이 하는 짓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인데...

진양진인은 현천록을 안아서 자기가 누웠었던 편평한 장소에 내려 놓으며 말했다.

[자네한테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아네. 하지만 노도는 아직 죽을 수 없고 자네는 세상에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사람이네. 오히려 자네같은 사람이 마음을 한 번 잘못 먹고 나면 세상을 크게 해치지. 어느 누구도 자네를 막을 수 없을 테니 그 위험이야 오히려 더 크지 않겠나?]

현천록은 겨우 그런 이유로 자기를 해치는가 싶었다.

하지만 자기를 해치고 나서 진양진인은 일곱째인 장군묵의 손아귀를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지도 궁금했다.

진양진인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자네가 뭘 궁금하게 여겼는지 대충은 짐작하네. 자네를 죽게 만드는 마당에 노도가 뭘 숨기겠는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말해주겠네. 듣고 말고는 자네 문제일세.]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노도는... 먼곳에서 왔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가고싶어 혈안이 되어 있는 곳이네. 바로 옥황신전(玉皇神殿)일세.]

현천록은 자기의 얼굴이 진흙처럼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진양진인은 말을 하면서도 특이한 수법으로 현천록의 얼굴을 바꾸고 있는 중이었다.

[노도가 옥황빙서(玉皇聘書)를 전달하는 옥황사자(玉皇使者)가 된 건 칠십 년 전이네. 그 이후 삼년 마다 한 장씩의 옥황빙서를 각각 주인을 찾아서 전달했네.]

진양진인은 자기의 수염을 떼서 현천록의 얼굴에 심었다.

말 그대로 진흙처럼 물러진 그의 얼굴에 수염을 하나하나 심은 것이다.

[옥황사자가 되어 옥황신전의 무공을 익히고 노도는 새로 눈을 떴었지. 하늘 밖에 존재하는 진정한 하늘에 대해서...]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머리카락마저 하얗게 만들었다.

[노도를 노리는 자들은 생각밖에 많다네. 특히 철인련맹은 유일하게 옥황신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곳이지. 그들은 옥황신전에 노골적으로 반항하며 항상 노도를 죽이려고 했네. 포두화상 그 도우가 철인련맹에 속해있네. 아마도 내가 옥황빙서를 가졌다는 소문을 낸 것도 철인련맹일 것일세.]

그가 중얼거리며 현천록을 주물럭거리는 동안에 현천록의 모습은 완전히 진양진인으로 변하고 있었다.

피부는 계수나무 껍질처럼 검버섯이 피었고 골격마저 노인의 골격으로 바뀌어버렸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하지만 여러 원인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모르겠네. 첫째는 왜 창허진인이 나를 쫓는가 하는 문제고, 둘째는 자네같은 기재들이 무엇 때문에 태어나는가 하는 거네. 세상에는 조금 뛰어난 인재가 필요하지 귀재(鬼才)는 오히려 해롭다네. 수십년 동안 고수들을 만나고 옥황신전으로 초빙하는 사자의 역할을 하며 이런 저런 사람들을 알게 되었지만 모두가 이해될 만한 사람들이었지. 하여간 자네는 죽게 되겠지만 내가 만난 최고의 인재라는 의미에서 옥황빙서를 주겠네. 이걸로 삼년 안에는 어느 누구도 옥황빙서를 얻지 못하게 됐네.]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화려한 옷을 벗기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여벌의 옷을 현천록에게 입혔다.

품에는 옥황빙서와 현천록의 소지품을 넣어주고 옷은 흐르는 물에 던져버렸다.

그런 후에 몇 개의 혈도를 찍었다.

현천록은 그 혈도들이 아혈(啞穴)과 비슷한 성질의 것으로 누르기만 하면 아무 소리도 입밖에 내지 못하는 혈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퍼퍼퍽!

가슴과 배에 세 번의 장력이 떨어졌다.

기혈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소천성의 장력이었지만 그다지 강하게 친 것 같지는 않았다.

 

현천록은 비로소 진양진인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 확연하게 깨달았다.

진짜 진양진인은 가버렸지만 가짜 진양진인은 남아있다.

양의신공과 태극혜검까지 익히고 있는 가짜 진양진인이.

진양진인은 아마도 이런 상태까지는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천록이 어설픈 흉내라도 내다가 일곱째 장군묵에게 죽으면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천록에게 양의신공을 가르친 건 자기의 내공을 촉발시킬 수 있는 조력자로 만들기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리고 태극혜검을 가르치게 된 것은 현천록이 양의신공을 익히는데 놀라운 소질을 보였기에 내친 김에 더 완벽하게 해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정말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양의신공을 그처럼 빠르게 터득하는데 태극혜검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현천록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런 방법을 썼더라도 진양진인이 장군묵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면 아무런 할말이 없다.

내기는 이겨야 주장할 수 있으니까.

현천록은 몸을 일으켰다.

늙은이로 변해있었지만 속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마를 만져보니 천잠사로 만든 머리띠가 그대로 있다.

용의주도한 진양진인도 긴장했던지 머리띠를 벗기는 건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초상감각을 발휘해 현천록은 물에 떠내려가다가 바위에 걸려 있는 자기의 옷을 다시 찾았다.

진양진인은 벌써 멀리 갔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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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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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살성의 귀향

 

 

그날부터 막비강은 칠흑같이 어두운 우혈의 밀실 안에서 청구단서에 수록된 절예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청구상인의 무공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치우강기(蚩尤罡氣)라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상고시대에 치우(蚩尤)는 황제(黃帝) 헌원씨와 세상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던 전설 속의 초인이다.

중원에서도 전신(戰神)으로 추앙받는 치우는 동방 청구에서는 상고시대 그들 종족이 모셨던 제왕의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청구상인의 무공 중 가장 중요한 강기신공(罡氣神功)에 치우의 이름이 붙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치우강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천하무적의 파괴력을 발휘하지만 다른 무공과 초식에도 쉽게 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무리 평범한 무공이라도 이 치우강기가 실리면 가공할 파괴력을 발휘한다.

청구절학의 고하(高下)는 바로 치우강기의 화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막비강은 식음도 잊고 신공수련에 몰입했다.

그와 함께 매일 한 뿌리씩의 하수오와 단호 한 병 분량의 영천석유가 사라져 갔다.

그렇게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어느 날 문득 공력을 돋우어 보니 전신이 후끈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기를 운용하는 대로 석벽에서 웅웅 울리는 소리가 일어났고, 호흡을 할 때마다 몸이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치우강기가 구체적으로 발현(發現)되는 수준인 오성(五成)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막비강은 자기의 공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한천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꽈르릉!

그러자 굵은 물기둥이 공중으로 수십 장이나 치솟아 오르는 것이 아닌가?

막비강은 그제서야 비로소 자기가 광세절학(曠世絶學)을 연성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막비강은 자신이 치우강기를 십 성(十成) 수준까지 올리려면 앞으로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성의 치우강기로도 천하무적(天下無敵)은 장담할 수 없어도 충분히 강호를 호령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막비강은 청구절학의 수련을 중단하고 출도할 결심을 하였다.

사실 그때는 이미 대부분의 하수오가 사라져 석벽이 드러난 상태였다.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청구단서를 얻은 후 불과 일 년 여의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러나 막비강에게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생겼다.

치기가 가시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어느덧 건장하고 영준한 청년으로 변했으며 무공도 일류 중의 일류고수가 되어 천하오기도 능가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마지막 한 뿌리의 하수오와 마지막 한 모금의 영천석유를 마신 그는 선사(先師) 청구상인의 유명(遺命)에 따라 비급을 옥합 속에 넣어 한천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진기를 한 모금 끌어올려 단숨에 우혈 위의 동굴에 올라섰다.

 

* * *

 

막비강은 우혈에서 나온 즉시 경신술을 전개하여 영롱탑이 있는 경지하 변에 도착했다.

때는 새벽무렵이다. 당연히 영롱탑 근처에도 인적이 없다.

막비강은 조씨부인 일가의 집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시 그곳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지난 일 년 사이 집터에 잡초만 무성해져서 한 층 더 을씨년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조씨부인의 집터에서 서성이며 막비강은 여러 가지 생각을 굴렸다.

(복수를 먼저 할까, 아니면 신세를 먼저 조사할까? 참! 염라철장께서 말씀하신 전포(田袍)라는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

그러다가 그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 나의 무예로 막고천을 격살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니 직접 혈검산장으로 찾아가자! 막가 악적을 생포하여 심문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테니 전포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지.)

그는 직접 막고천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스악!

결심을 한 막비강은 즉시 허공으로 몸을 뽑아올렸다.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새벽의 어둠 속으로 유령같이 사라져 버렸다.

 

* * *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물들었을 무렵, 종남산 자락에 자리한 혈검산장 정문 앞에 한 명의 영준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의 나는 듯한 걸음걸이는 곧장 문을 박차고 뛰어들 것만 같았다.

[멈춰라!]

정문을 지키고 있던 네 명의 장한이 급히 청년의 앞을 가로 막았다.

네 명의 장한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눈이 부리부리한 장한이 청년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본장을 찾아왔느냐?]

청년이 검미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서평(徐平), 너는 어찌 나를 몰라보느냐?]

서평이라 불린 건장한 장한은 어리둥절하여 청년을 아래 위로 훑어보다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제 보니 둘째 도련님이시군요. 삼년 동안 만나지 못한 사이에 이렇게 건장한 청년이 되셨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서평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곧 정문 안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둘째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 둘째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

그의 고함 소리를 들은 정문 안쪽의 사람들이 황급히 후당(後堂)으로 달려가 이 소식을 전했다.

막비강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통보할 필요 없다. 내가 직접 안으로 들어가 어른들을 만나겠다.]

그러자 서평이 난색을 지었다.

[둘째 도련님, 지금의 본장은 지난날과 크게 달라 어느 누구도 무단히 출입할 수가 없습니다.]

막비강은 이마를 찌푸렸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그럼 장주님이라도 산장을 들고 날 때는 누군가에게 통보를 해야 한단 말이냐?]

막비강의 말에 서평은 말문이 막혀 대꾸를 못했다.

그때 문 안쪽에서 여러 사람이 이리 저리 부산히 움직이더니 몇 사람이 나는 듯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자들 중 우두머리는 살이 없는 강팍한 얼굴에 눈빛이 얼음같이 차가운 초로의 장한이었다.

그가 바로 혈검산장의 총관인 혈적수(血滴手) 원인초(元人初)란 인물이다.

원인초는 그 지닌 바 실력이 육요, 칠절에 필적한다고 알려진 흑도의 거효(巨梟)인데 막고천의 초청을 받아 혈검산장의 총관일을 맡고 있었다.

[이(二)소장주께서 드디어 돌아오셨구려. 신태비범해지신 것을 보니 이미 청구단서상의 절학을 연성하신 모양이외다. 경하드리오!]

혈적수 원인초가 손을 모으며 말했다.

공손하게 말하는 원인초를 보는 순간 막비강은 절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삼 년 전 혈검산장을 떠나기 전까지 혈검산장의 수하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막비강을 멸시하고 천대했던 자가 바로 총관인 원인초였기 때문이다.

원인초로부터 받은 온갖 수모와 능멸이 떠오르자 막비강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하지만 막비강은 웃음을 머금으며 마주 포권을 했다.

아직 막고천의 상판도 못 봤는데 그의 졸개인 원인초와 시비를 붙을 수는 없는 일이다.

[원총관! 내게 너무 공손하실 필요 없소. 그보다 장주께선 지금 안에 계시오?]

원인초는 얄팍한 입가에 교활한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이미 통보했으니 장주께선 곧 영접하러 나오실 것이외다.]

[내가 직접 들어가서 만나면 안 되오?]

[소장주는 외인이라 자처하고 부친을 장주라 불렀으니 부자의 정이 끊어졌음이 분명하오. 그러므로 장주의 분부 없이는 장원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소.]

막비강은 원인초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장원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비록 큰 소리는 나지 않지만 급히 서두르는 발자국 소리와 나직 나직한 호령소리들이 들린다.

갑작스런 막비강의 귀향에 혈검산장의 인물들이 놀라 대응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혈검산장 안에서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고수들을 총 동원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때 대문 안에서 이십 삼, 사세쯤 된 건장한 청년이 달려나오며 외쳤다.

[둘째! 아버지께선 너를 명륜당(明倫堂)에서 만나시겠다고 하셨다.]

그 청년이 바로 막고천의 장남인 막불계(莫不戒)로 막비강보다는 네 살이 위였다.

[알겠소!]

막비강은 응답을 한 후 막불계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명륜당은 혈검산장에서 중대한 사건을 처리하는 일종의 형당(形堂)이다.

이 무렵 명륜당 주위에는 백여명의 무사들이 병기를 든 채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막비강이 막불계를 따라 명륜당 안으로 들어가니 낯 익은 얼굴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혈검산장의 장주인 금사혈검 막고천은 상좌에 놓인 호피를 깐 태사의에 거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삼년전과 별로 변한 것이 없는 막고천의 모습을 본 순간 막비강은 가슴 속에서 살기가 불끈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구박한 것을 그렇다 쳐도 가엾은 어머니를 창녀처럼 다루던 그자의 만행이 떠오른 때문이다.

막비강은 필사적으로 살기를 억누르며 명륜당에 모인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우선은 어머니 한경파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리고 한 차례 명륜당 안을 둘러본 그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만하게 앉아있는 막고천 뒤에는 하나같이 천하절색인 중년미부 여섯 명이 시립하고 있다.

삼십대 중반에서 사십대 후반까지의 나이인 이 미녀들이 바로 막고천의 일처오첩(一妻五妾)이다.

막고천의 여섯 아내 뒤쪽에는 다시 여섯 명의 젊은 여자들이 서있다.

막고천의 아내들이 낳은 딸들이다.

그들 중 둘은 본처 소생이고 넷은 첩들의 자식이다.

헌데 막고천의 여섯 아내 중 한 명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흐느끼고 있다.

연약한 몸매에 파리한 안색을 한 그 중년미부가 바로 막비강의 생모인 한경파였다.

(어머니!)

한경파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막비강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구해 혈검산장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막고천과 그의 부인들 앞쪽에는 수십명의 인물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하고 기세가 사나워 한 지역의 패주로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자들!

그들이 바로 강호에 악명이 자자한 혈검산장의 십악구흉(十惡九兇)과 칠열팔준(七烈八駿)이다.

이 서른 네 명의 고수들이야말로 혈검산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막고천 외에 의자에 앉아있는 인물은 단 둘이다.

막고천 좌측에는 선풍도골의 풍모를 지닌 고희를 넘긴 노인 두 명이 앉아 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 노인들은 장내에 있는 누구보다고 강한 실력의 소유자들로 보인다.

막비강은 두 노인은 처음 본다.

아마도 그가 혈검산장을 떠난 후 막고천이 초청한 강호의 기인들인 모양이다.

[흥!]

명륜당을 한 바퀴 돌아본 막비강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막고천은 막비강이 안하무인격으로 굴자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불효자식 같으니! 빨리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막비강은 고개를 쳐들고 오만하게 대꾸했다.

[막고천! 너는 그래도 내 아버지 행세를 할 생각이냐? 오늘 나는 네놈의 목숨을 뺏으러 왔다.]

그러자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던 한경파가 고개를 번쩍 들며 막비강을 꾸짖었다.

[강아! 너 미쳤느냐? 아버지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빨리 무릎을 꿇어라!]

낳아준 어머니가 호통을 치자 막비강은 하는 수 없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아직도 이 어미를 기억하고 있다니, 너는 역시 착한 아이구나.]

한경파는 막비강이 순순히 자기 말을 따르자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만 두시오 삼(三)부인!]

그 순간 막고천이 한경파의 팔을 거칠게 잡아채며 고함을 질렀다.

[저런 불효막심한 자식에게 당신은 아직도 사랑을 베풀 생각이오?]

어머니의 가냘픈 몸이 막고천의 손에 잡혀 비틀거리는 것을 본 막비강은 분기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며 눈을 부라렸다.

[노적! 너는 왜 나의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강제로 빼앗았느냐?]

이 말이 떨어지자 막고천 뿐 아니라 한경파도 온몸을 세차게 떨었다.

그리고 막고천의 다섯 부인들도 모두 안색이 일변했다.

하지만 한경파는 곧 격동을 가라앉히며 막비강을 꾸짖었다.

[강아! 이 무슨 무례한 언동이냐? 네 부친께서 네 아버지로부터 강제로 나를 빼앗았다니! 누가 네게 그런 헛소리를 하더냐?]

막비강은 굳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럼 어머니는 자진해서 저자에게 시집을 왔단 말입니까?]

막비강이 막고천을 가리키며 말하자 한경파의 가녀린 교구에 다시 한 번 세찬 경련이 스쳤다. 그녀의 얼굴은 보기에도 안쓰럽게 파리해졌다. 지극히 심한 충격을 받았고 심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이같은 반응을 본 막비강은 자신의 의심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해서 이를 악물며 생모를 몰아붙였다.

[말씀해보십시오! 어머니는 저자와 자의로 결합했습니까?]

그러자 잠시 파르르 떨던 한경파는 대답은 못하고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그녀는 두려움이 실린 표정으로 연신 막고천의 눈치를 살핀다.

막비강은 어머니가 본심을 숨기고 막고천을 지아비라고 인정하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는 얼굴을 분노의 빛으로 물들이며 코웃음을 날렸다.

[흥! 그럼 어머니에게는 남편이 모두 몇 명이나 됩니까?]

[저... 저런 패륜무도한...!]

막비강의 이 무엄한 말에 장내의 인물들은 분노의 노성을 질렀다.

한경파도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가냘픈 교구는 애처롭게 떨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처연하게 말했다.

[하나의 안장은 수만 마리의 말 등에 올릴 수 있지만 한 마리 말은 동시에 두 개의 안장을 올릴 수 없다. 이 어미의 남편은 네 아버지 한 분뿐인데 어찌 다른 남편이 있을 수 있겠느냐?]

막비강은 눈에서 차가운 안광을 토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진짜 나의 부친은 누굽니까?]

그러자 한경파는 서럽게 흐느끼며 대답했다.

[강아! 지난 몇 년 동안 너는 도대체 무얼 잘못 배웠기에 어미에게 그런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느냐? 너의 진짜 부친은 네 면전에 계시는 장주님이시다.]

하지만 막비강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럼 염라철장이란 분은 누굽니까?]

한경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염라철장이라니? 어미는 그런 사람 모른다.]

다른 처첩들도 웅성대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때 막고천이 격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불효막심한 놈! 빨리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 않고 무엇 하느냐? 네놈이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염라철장에게 속았음이 분명하구나.]

막비강은 냉소를 날렸다.

[흥! 나는 신분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 만약 내가 너의 자식이라는 것을 네가 증명한다면 나는 즉시 자진을 해서 무례한 행위에 대한 사죄를 하겠다.]

막고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더니 치를 바르르 떨었다.

[불효막심한 놈이 말 하는 꼴이 갈수록 가관이구나. 네 어미가 나와 결혼하여 너를 낳았음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무슨 증명이 필요하단 말이냐?]

막비강은 검미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나의 모친이 너와 결혼한 것은 사실이고 네가 나를 양육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 네 자식이 아니다.]

[당치 않은 소릴 계속 지껄일 테냐?]

[내 말은 절대 당치 않은 소리가 아니다.]

막고천의 노갈에 막비강도지지 않고 마주 외쳤다.

[나는 형제자매들 중에서도 유달리 냉대를 받았다. 너는 내게 무예도 가르치지 않았고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귀여워해 주지도 않았다. 네가 정말 나의 부친이 틀림없다면 중인들 앞에서 피를 섞어 시험해볼 용기가 있느냐?]

막고천은 피를 뽑아 시험하자는 말을 듣더니 안색이 일변했다.

본래 피를 나눈 부모 자식간의 피는 무리없이 섞이지만 서로 다른 피는 완전히 혼합되지 않는 법이다.

막비강은 남산의성으로부터 이같은 이치를 배워 알고 있었다.

[이 패륜무도한 놈이 이젠 반란을 일으키려는구나!]

막고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막비강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혼혈(混血)하여 혈친 관계를 시험하자니! 삼부인! 이놈은 당신이 낳았으니 당신이 직접 사로잡으시오!]

막고천의 그 말에 한경파는 안색이 일변하여 막비강에게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강아! 너는 스스로 포박을 받지 않고 어미로 하여금 손을 쓰게 만들려느냐?]

막비강은 검미를 치켜 올리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는 나는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막고천은 징그러운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좋다! 혼혈친인(混血親認)의 시험을 하고 싶다면 해주겠다. 그 시험으로 사실이 밝혀지면 네놈이 또 무슨 말을 하는지 두고 보겠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비녀들에게 명령했다.

[물을 한 그릇 떠와라!]

명륜당에 운집한 사람들은 모두 긴장한 채 부자가 피를 섞어 친자 여부를 증명하는 시험을 지켜보았다.

비녀가 물을 대야에 떠오자 막고천은 한경파에게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먼저 피를 떨구시오!]

한경파는 전전긍긍하며 품속에서 비수를 뽑아 왼손 약지 끝을 찔러 선혈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붉은 피는 대야의 물 속에 떨어지자 붉은 구름처럼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막고천도 한경파에게서 비수를 받아 중지 끝을 찔러 핏방울을 물그릇에 떨구었다.

물 속에서 만난 부부의 피는 완만하게 섞이기 시작했다.

[불효막심한 놈아! 너도 와서 핏방울을 떨구어라!]

[흥!]

막비강은 코웃음을 날리더니 허리춤에서 강장을 꺼내 들며 빠르게 어머니와 막고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는 두 사람의 얼굴 표정에서 약간의 실마리나마 찾아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한경파는 시종 고개를 숙인 채 계속 혼합이 진행되는 피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막고천이 또 흉흉하게 외쳤다.

[이놈! 빨리 피를 떨구지 않고 무엇 하느냐?]

막비강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흥! 정말 가증스런 한 쌍의 간부음부(奸夫淫婦)군.)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이 들고 있는 강장을 보지 않는 것과 막고천이 빨리 손을 쓰라고 재촉하는 것을 본 막비강은 어머니가 본래의 남편을 배반하고 막고천과 재혼했다고 단정했다.

자연히 어머니 한경파에 대해 심한 반감이 일어났다.

그는 분노에 떨면서 강장의 날카로운 손톱 부분으로 왼손 약지를 살짝 찔렀다.

일순, 한 줄기 선혈이 흘러 그릇 속에 떨어지더니 막고천 부부의 피와 혼합되어 신속하게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피가 잘 혼합되는 것은 막고천과 막비강이 친혈육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막비강은 이 광경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막고천은 득의의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불효막심한 놈! 그래도 할말이 있느냐?]

막고천은 고함을 치며 막비강에게 강력한 일장을 후려쳤다.

펑!

두 사람의 거리는 석 자도 되지 않았고 막비강은 또 조금도 방비하지 않고 있던 터라 막고천의 일장에 그대로 가슴을 얻어맞았다.

사패천 중 서패천 혈검산장의 장주인 금사혈검은 육요 칠절을 능가하는 고수다.

그런 그자의 일장을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고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쿵! 쿵!

막비강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연달아 다섯 걸음이나 후퇴했으며 입가로는 한 줄기 피가 흘렀다.

만일 그가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몸이 무쇠처럼 단단해지지 않았다면 막고천의 이 독랄한 일장에 즉사했거나 죽지 않았다고 해도 회복 불능이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내 자식을 때리지 마세요!]

막고천의 일장에 가슴을 얻어맞은 막비강이 피를 흘리며 물러서는 것을 본 한경파가 울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두 팔을 활짝 벌려 막비강 앞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막고천은 다시 막비강을 공격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고 얼어붙어 있었다.

(저놈이 죽지 않다니...!)

전력을 기울인 자신의 일장을 정통으로 얻어맏고도 그저 몇 걸음 물러섰을 뿐인 막비강의 모습이 막고천에게는 괴물처럼 보인다.

막비강은 비록 불의의 일격을 당했지만 심한 타격은 입지 않았다.

그저 일시에 기혈이 흔들여 역류했을 뿐이다.

헌데 우연히 옆으로 시선을 돌리던 막비강은 막고천의 첩 중 한 명이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바로 막고천의 다섯째 부인 냉상영(冷祥英)이었다.

냉상영은 웬일인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소생인 딸 막영란(莫英蘭)에게 부축되어 몸을 떨고 있었다.

막영란은 막비강보다 두 살 어린 열 일곱 살이다.

이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막비강이 막고천에게 맞았는데 왜 다섯째 부인인 냉상영이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일까?

막비강은 비록 이상하다고 느껴졌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비키시오!]

펑!

정신을 수습한 막고천이 한경파를 거칠게 밀어내고는 또 다시 일장을 날려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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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무림기보 소개>

 

1983년 5월 경에 전 5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박스본은 전권을 박스 하나에 포장하여 만화방에 대여용으로 출간한 형태를 말합니다.

무려 37년 전의 작품입니다.

문장은 거칠고 구성은 허술하며 이야기 전개는 고루한 면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이런 작품도 있었지 하는 마음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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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기정무협소설

        천세무림기보(千世武林奇譜)

 

 

序 章

 

 

 

 

 

강호무림에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세 가지 기서(奇書)에 대할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름하여 삼대기서(三代奇書)라 불리는 이 삼종의 비급은 수천 년 무림사에 있어 가장 많이 인구에 희자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경총요(武經總要)>

 

삼백 년 전, 한 명의 절대기재(絶代奇才)가 있었다.

그는 한 번 본 무공은 절대 잊지않는 재주를 지녔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아무리 난해한 무공초식이라도 즉시 시전해 보일 수 있으며 또한 완벽해 보이는 무공이라도 단번에 파해하는 비상한 재주를 지닌 기인이었다.

 

-천안귀재(天眼鬼才) 공손무기(公孫武奇).

 

그의 이름이다.

그에게는 적이 없었다. 아니 누구도 그와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와 겨룬다는 것은 곧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공손무기는 고독했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천하제일기재(天下第一奇才), 이런 명칭조차도 그를 외롭게 만들었다.

누구 하나 그와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년에 그는 한 권의 책자를 만들었다. 자신의 모든 지혜를 짜넣은 기서를!

그것이 바로 무경총요(武經總要)였다. 삼대기서 중에서도 제일의 위치에 있는.

무림인들은 무경총요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무경총요를 얻으면 천하제일의 기재가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림천년기전(武林千年奇典)>

 

천 이백 년 전, 검군자(劍君子)라는 인물이 있었다.

검에 관한한 그는 무적이었다. 당시에 검군자의 십검(十劍)을 받은 인물이 전무할 정도로 그의 검술은 신인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

그는 당시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었다.

천하제일로 군림하기 삼십 년, 그는 명예로운 봉검(封劍)을 선언하였다.

아울러, 무도를 진작시킬 숭고한 뜻을 무림에 알렸다.

 

<천하제일인의 보좌를 잇는 인물에게 본인의 검학이 담긴 신검경(神劍經)을 주겠노라.>

 

무림은 들끓었다.

보통사람들은 천하제일의 검학을 얻기 위해 날뛰었다.

그와함께 사해구주에 은거해 있던 기인이사들은 천하제일의 명예를 차지하려고 녹슨 무기를 닦았다.

무림인들은 태산(泰山)에 숭무전(崇武殿)을 세우고 그곳에서 천하제일을 가렸다.

결국, 두 번째 천하제일인이 나왔다.

곤천신필(崑天神筆)이라는 필법(筆法)의 명인이 바로 그였다.

약속대로 전대의 천하제일인 검군자는 곤천신필에게 자신의 절학이 담긴 신검경을 주었다.

그러나 곤천신필은 신검경을 한 번 본뒤에 검군자에게 정중히 반환하였다.

그 자신도 만인이 공인한 천하제일인. 검군자의 절기가 아무리 뒤어나다고 해도 그것을 익히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감탄한 검군자는 신검경과 자신의 병기인 천인검(天刃劍)을 숭무전에 기탁하였다.

그후 세월이 흘러 곤천신필도 명예로운 은퇴를 하였다.

그 역시 자기의 병기인 한 쌍의 옥령신필(玉靈神筆)과 곤천필보(崑天筆譜)를 숭무전에 남겼다.

이것이 전통이 되었다. 숭무전에 자신의 무공을 남기는 것이 무림인들에게 최대의 영광이 되었다.

그후 오백 년, 즉 지금부터 칠백 년 전까지 모두 열 명의 천하고수가 숭무전에 무공을 남겼다.

제 삼대 승천마도(昇天魔刀),

그는 폭혈참신도보(爆血斬新刀譜)와 승천마도(昇天魔刀)를 남겼다.

 

제 사대 낙일도룡(落日屠龍),

그는 낙일산화경(落日散花經)을 남겼다.

 

제 오대 혈천사객(血天邪客),

사도제일인(邪道第一人)이던 그의 혈천사종보(血天邪宗譜)가 숭무전에 올랐다.

 

제 육대 공령천존(空靈天尊),

고금제일의 신투였던 그는 자신의 절기가 실린 공령비경(空靈秘經)을 숭무전에 바쳤다.

 

제 칠대 천하제일인은 태령자(太靈子),

그를 주목하자! 그는 지금까지의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도가제일인(道家第一人)이었다.

그예로 제 오대 천하제일인 혈천사객이 태령자의 손에 삼십초를 못견디고 패했다.

하여튼, 그도 자신의 무공을 승무전에 남겼다.

태령진경(太靈眞經)이 그것이다.

 

제 팔대 천음자(天音子),

음률의 대가로 특히 고금(古琴)을 잘 다루었다. 그의 무공은 균천악보(龜天樂譜)로 대표된다.

 

제 구대 인물은 제왕수(帝王手),

그는 천하제일의 신공이라는 제왕신공(帝王神功)이 실린 제왕경(帝王經)을 남겼다.

 

제 십대 음혼우사(陰魂羽士),

그의 무공은 음혼빙백경(音魂氷魄經)에 실려있다.

 

제 십일대 신풍무영(神風無影),

경공의 대가로 그의 신품무영보(神風無影步)는 천하오대경공(天下五大輕功)의 하나이다.

 

마지막 제 십이대 인물은 신륜천왕(神輪天王)이라는 고수다.

그의 파천마륜(破天魔輪)은 가히 게세무적이었다.

 

이상의 십이인이 숭무전에 남긴 비급을 통틀어 무림천년기전이라고 한다.

헌데, 신륜천왕을 끝으로 숭무전은 폐허화 되었다.

숭무전이 신비의 집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초토로 변한 것이다.

그와함께 무림천년기전은 경원히 무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삼대기서 중 마지막은 한 권의 책자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실로 방대하기 이를데 없는 비급들의 총칭일 따름이다.

 

<구류만상경(九流萬象經)>

 

삼대기서중 제일 마지막에 위치하지만 그것은 구류만상경에 대하여 별달리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천세문(千世門)이라는 신비방파의 이천 년 심원이 깃든 서술서다.

천세문이 이천 년 동안 무림에서 명멸해간 수많은 기인이사와 문파들의 무공을 수집하였다.

그래서 그것은 불(). (), (), (), (), (), (), ()의 구류(九流)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구류만상경(九流萬象經)인 것이다.

 

이상이 삼대기서에 대한 전설이다.

헌데, 무림천년기전이 단절된지 칠백여 년 세월이 흐른 당금, 뜻하지 않게도 구류만상경으로 인해 거대한 혈운이 중원천지를 뒤덮게 되었으니...

이천 년 중원무림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혈풍이 한바탕 중원을 뒤흔들어 놓게된다.

구류만상경이 발단이 된 이 혈풍, 누가 있어 이 끔찍한 피바람을 멎게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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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긴 복도. 천장 중간 중간에 빛이 나는 구슬이 박혀 있어 밝다. 구슬들은 천장 안쪽 흠에 박혀있어서 아래쪽으로 덮개가 닫히면 빛이 사라지는 구조. 요즘의 매입 조명 같은 형태. 전체 길이는 30미터 정도. 양쪽 끝에 문이 있는데 한쪽 문은 열려있다. 천장과 벽과 바닥에 가는 선들이 수없이 나있다. 그 선들 중 일부에는 칼날들이 숨겨져 있다.

한쪽 복도 끝, 열린 문 밖에 모여 있는 청풍과 같은 조 아이들. 무기는 지니고 있지 않다. 청풍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복도를 보고 있고. 청풍의 뒤로는 정정과 철두, 다른 아이들이 있다. 여자는 정정을 포함해서 네명인데 모두 긴장한 모습. 하지만 눈빛이 강하고 자신감이 차있는 표정들이다.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평범한 복도. 하지만

손바닥을 바닥에 대고 있는 청풍.

! ! 청풍의 손바닥이 약간씩 진동하고.

[...] 뭔가 생각하며 손바닥을 복도 바닥에서 떼는 청풍

정정; [어때?]

청풍; [좌우의 벽과 천장 뿐 아니라 바닥에도 기관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정정; [그럼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칼날에 맞아 죽을 수도 있네.] 휘이! 휘파람 불고. 놀라지만 두려워하진 않는 표정이고

철두; [천장, 양쪽 벽, 바닥등 네 방향에서 동시에 칼날이 튀어나오면 정신없겠는걸.] 휘파람을 불고

청풍; [그동안 매영보법을 집중적으로 익힌 보람을 느껴볼 때가 되었다.] 돌아서서 아이들을 돌아보고

끄덕이는 아이들

청풍; [매영보법의 특징은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무게를 분산시켜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도에 설치 된 기관장치들은 바닥을 누르는 무게에 의해 가동된다.] 건너편을 보며

청풍; [, 바닥을 밟을 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무게를 가하지 않으면 기관장치는 발동하지 않는 것이다.]

정정; [제구관, 잔관(殘關)을 통과하기에는 매영보법이 최적이네.]

청풍; [그런 셈이다.] 끄덕

정정; [이번 관문에서 가장 불리한 건 철두 너겠어.] [아무리 매영보법을 펼친다 해도 남보다는 더 무게를 가하게 될 테니까.]

철두; [남 걱정 말고 정정 너나 몸에 흠집 안나도록 조심해라.] 코웃음

철두; [요즘 보니 너 살찐 것 같더라.] 곁눈질로 정정의 몸매 훑어보며 히죽

정정; [이게 감히 여자의 치명적인 비밀을...] ! 철두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치며 눈 부라리고. + 철두; [어디를 모기가 무나?] 꿈쩍도 않고 히죽거리는 철두

정정; [오냐! 어디 모기한테 실컷 물려봐라!] 퍼퍽! 연달아 철두를 때리고. 그때

청풍; [건너편까지의 거리는 십장 정도, 대략 열 걸음 정도 걸릴 것이다.] 건너편을 보며 말하고.

철두와 투닥 대던 정정도 돌아보고

청풍; [그리고 내 예상인데 건너는 도중 천장에 박혀있는 야광주(夜光珠)가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 천장에 매입 형태로 박혀서 빛을 내는 구슬들을 보고

정정; [... 어둠 속에서 기관장치과 발동하면 피하기 힘들 텐데...] 침 꼴깍! 다른 아이들도 긴장하고

청풍; [그렇다고 너무 겁먹을 거 없다.] [우린 지금까지 매일 매일 죽을 고비를 넘겨오지 않았느냐?] 겁먹은 아이들을 격려하고

철두; [청풍이 말이 맞다.] [지금의 우리는 어디라도 숨어 들어갈 수 있고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 청풍의 말에 맞장구치고

그러자 겁먹었던 아이들 얼굴이 펴지고 끄덕이고

청풍; [내가 먼저 건너겠다.] 앞으로 조금 나가고.

청풍; [열 걸음으로 건널 테니 내가 어디를 딛고 그때 기관장치가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지 기억해둬라.] ! 몸을 나리고

! 넓이 뛰기 하듯 한쪽 발로 바닥을 찍고. 순간.

스악! ! 천장, 바닥, 좌의 벽에서 휘어진 얇고 긴 칼날들이 벼락같이 튀어나와 청풍의 몸을 벤다

[!] [!] 정정과 아이들 아연긴장 할 때

! ! 몸을 순간적으로 틀고 걸음을 자잘하게 해서 칼날들을 피하는 청풍

! 다시 도약해서

! 또 한 발로 바닥을 찍는 청풍, 공격했던 칼날들은 다시 벽으로 들어가고 있고

스악! ! 이번에도 또 칼날들이 튀어나오는데 처음과 방향이나 각도가 다르다

휘익! 물론 이번에도 피하는 청풍

정정; [칼날이 공격하는 방향과 각도를 잘 기억해둬라!] 외치며 자신도 눈을 치뜨며 보고

! ! 연달아 건너 뛰어가는 청풍. 그때마다 여기저기서 벽에서 칼날들이 튀어나와 청풍을 공공격한다.

정정; (청풍이라면 바닥을 거의 누르지 않고 매영보법을 펼칠 수 있다.) 긴장해서 보며 생각하고

<하지만 일부러 바닥을 강하게 찍으며 건너가고 있다. 우리들에게 기관장치가 어떻게 공격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난무하는 칼날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몸을 날리는 청풍을 배경으로 정정의 생각.

정정; (역시 청풍이에게 빌붙은 게 탁월한 선택이었어!) 배시시 웃고. 그때

! 휘익! 마지막 한 걸음으로 도약해서 건너편 문 앞에 이르는 청풍. 헌데

스악! ! 문에서도 칼날이 튀어나와 청풍을 공격하고

정정; [조심...] 자기도 모르게 외치고. 철두와 아이들도 기겁하지만

! 자연스럽게 피하며 문을 손바닥으로 치는 청풍.

그긍! 문이 좌우로 열리며 또 다른 복도가 나타난다.

[!] [휴우!] [그러면 그렇지!] 안도하는 정정과 아이들. 그때

청풍; [내가 건너는 동안에는 조명이 꺼지지 않았다.] 열린 문 앞에서 돌아서며 건너편을 보며 말하고

흠칫! 하는 아이들

청풍; [하지만 언제 조명이 꺼질지 모르니 조심해서 건너와라.]

정정; [!] 손을 들며 외치고

정정; [그럼 이 언니가 먼저 건넌다. 잘 봐라.] 뒤쪽의 여자 아이들에게 말하고.

세명의 여자 아이들 끄덕이고

정정; [차핫!] ! 과장되게 날아오르고.

! 청풍이 처음 발을 디딘 곳을 밟는 정정

똑같이 칼날들이 튀어나오고.

휘익! 청풍이 했던 대로 피하며 다시 날아오르고

여자 아이들과 철두가 긴장하며 보고

! ! 연달아 건너뛰는 정정. 사방에서 칼날들이 난무하지만 요리조리 피하며 건너뛰고.

손에 땀을 쥐며 보는 여자 아이들. 헌데

! 정정이 중간쯤에 이르러 바닥을 찍었을 때

스악! 야광주가 박혀있는 구멍들 하단에서 가림막이 일제히 튀어나와 구슬들을 가려버린다. 단번에 깜깜해지고

[조명이 사라진다!] [조심해!]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외치고

[!] ! 놀라면서도 몸을 날리는 정정

[제발...] [... 어떻게 된 거지?] 철두와 아이들 어둠 속에서 긴장할 때

스륵! ! 조명을 가렸던 막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며 밝아진다.

건너편에는 정정이 서서 휘청거리고 있고. 청풍이 정정의 팔을 잡아 부축한다.

[!] [무사히 건너갔다!] 안도하고

청풍이 정정의 팔을 잡아 뒤로 끌고 있고. 정정은 옆구리를 잡고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세우고 있다. 옆구리 부분의 옷이 갈라져 있고 피가 좀 비친다

철두; [다쳤냐?] 걱정되어서 외치고

정정; [괜잖아. 그냥 좀 긁힌 것뿐이야.] 돌아보며 외치고

[!] [!] 안도하는 아이들. 이어

철두; [사내놈들부터 건너라. 난 맨 나중에 건너겠다.] 돌아보며 말하고

[그러자.] [내가 먼저 간다.] ! 나서는 사내 아이들. 그중 한놈이 먼저 건너뛰고

칼날이 난무하지만 잘 피한다.

연달아 건너뛰는 아이들. 한 번에 여럿이 건너간다. 이번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143>

위의 장면이 비치는 모니터.

의자에 앉아서 보고 있는 소수마녀. 소수마녀 앞쪽에는 조종장치가 죽 달린 길쭉한 탁자가 있고 그 건너편 벽에 여러 장의 얇은 수정판이 붙어있다. 수정판에는 비밀거점의 여기저기가 비치는데 그 중 하나가 청풍 일행을 비추고 있다. 소수마녀 뒤에는 파면살주, 귀파파, 천살로, 독검사랑등이 서서 보고 있다.

파면살주; [지금 본 것 같은 과정이 지난 반년 간 반복되었네.] 소수마녀의 뒤에서 말하고

파면살주; [이청풍은 자신이 먼저 깨우치고 알아내서 시범을 보이는 방식으로 동료들을 이끌어왔어.] [그 덕분에 무조에서는 낙오자가 한명도 생기지 않았지.]

귀파파; [그에 반해 다른 조의 놈들은 영도자도 없고 화합도 이루어지 않았네.] [그 때문에 절반, 혹은 그 이상이 죽거나 심하게 다쳐서 수련을 중단했어.]

천살로;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이청풍이 자신들 조원들이 약을 복용하는 것을 막았다는 사실이야.]

천살로; [단기간에 내공을 증진시켜주는 그 약들에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안 때문일 텐데...]

천살로; [약의 도움을 받지 않고 불과 반년만에 저 정도 성취를 보인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귀파파; [어쩌면 우린 살인상단 역사상 최강의 자객이 탄생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지도 몰라요.] 천살로에게 동의

소수마녀; [하지만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어요.]

소수마녀; [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지옥십관의 최후 관문인 단정관(斷情關)을 통과하지 못하면 자객으로서는 실격이에요.]

파면살주; [그렇긴 하지.] 끄덕. 다른 사람들도 끄덕이고

파면살주; [과연 이청풍에게 자객의 자질이 있는지 여부가 곧 결정 나겠지요.] 무표정하게 말하고

독검사랑; (내가 우려했던 바다.) 맨 뒤에 서서 끄덕이고

독검사랑; (자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암살 실력도 뭐도 아니고 냉혹비정한 성격이다.)

독검사랑; (단정관은 바로 자객으로서의 그 자질을 증명해야하는 관문이다.) (만일 단정관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독검사랑; (자객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되어 제거될 것이다.) (화근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음산하게 웃고

 

#144>

어느 복도. 그 복도 끝의 문 앞에 모여있는 청풍과 동료들. 문 앞에는 <>자가 적힌 복면을 쓴 사내 두 명이 서있다. 이자들은 물론 지자급 자객이다.

지자급1; [이곳이 지옥십관의 마지막 관문인 단정관이다.] 지자급 중 한명이 말하고

지자급1; [단정관을 통과하면 너희들은 한명의 어엿한 자객으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지자급1; [우리 살인상단의 자객이 되면 처음에는 무()자급의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무자급이라 해도 매달 백냥의 기본 급료와 함께 실적에 따른 포상을 받게 된다.]

<한 달 급료가 최소 백냥!> <어마어마하네.> <백냥이면 우리 가족이 일년을 먹고 살 수 있는 거금인데...> 흥분하는 아이들. 청풍과 정정과 철두는 표정의 변화가 없고

지자급1; [()자급이 되면 기본 급료가 월 오백냥으로 오르고 우리들 지()자급은 천냥을 받는다.] [물론 성과급은 별도다.]

<한 달에 오백냥, 천냥이 기본적으로 들어온다니...> <역시 자객이 되길 잘 했어.> <다른 일 해서는 결코 만질 수 없는 거금을 벌 수 있겠다.> 아이들 흥분하지만

청풍; (의도가 있는 발언이다.) 말없이 듣고 있고

청풍; (저자는 자객이 되면 받을 수 있는 엄청난 대우를 거론해서 우리들을 흥분시키려 하고 있다.) 무어라 말하는 지자급1을 노려보고

청풍; (단정관에서 시험 받을 때 망설임을 없애기 위해서일 텐데...)

청풍; (과연 어떤 관문을 준비해놨기에 사전에 밑밥까지 깔아놓는 것일까?) 찡그리며 생각할 때

지자급1; [마지막 관문, 단정관만 통과하면 너희들은 어엿한 자객이다.] [자신에게 살인상단 자객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느냐?]

[그렇습니다.] [물론입니다.] 청풍과 정정과 철두를 제외한 아이들 일제히 대답하고

지자급1; [그럼 지옥십관의 제십관 단정관으로 들어가라!] 기깅! 끼이! 동료와 함께 문을 안쪽으로 밀어 열면서 말하고

청풍이 선두에 서서 그 문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145>

[!] [!] 문 안쪽으로 들어서다가 흠칫! 하는 청풍과 아이들. 그 뒤에서 지자급들이 따라 들어오며 문을 닫고 있고

! 청풍 일행이 들어선 곳은 상당히 넓은 밀실. 천장에 네 개의 상당히 큰 등이 걸려있어 빛을 내고 있고. 헌데 사방의 벽을 등지고 이십여 명의 복면인들이 칼을 들고 서있다. 복면인들은 이마에 <>자가 적힌 인자급 자객들이다. 그리고 밀실 중앙에는 긴 탁자가 놓여있는데 탁자에는 비수 한 자루가 얹혀진 접시 이십여 개가 죽 놓여있다.

청풍; (인자급 자객들이 우릴 포위하고 있다.) 지자급1을 따라 탁자쪽으로 가며 밀실 벽을 따라 죽 늘어서 있는 인자급들을 곁눈질하고, 다른 아이들도 초긴장하고.

청풍; (만일 반발하거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우린 저자들에게 척살당할 것이다.) 생각하는 사이에 긴 탁자 앞에 이르는 지자급1

지자급1; [각자 접시와 비수를 하나씩 챙겨라.] [그것이 너희들이 치러야할 마지막 시험의 준비물이다.] 탁자 한쪽 끝에 서서 말하고

청풍; (비수와 접시...)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드는 조합이다.) 생각하면서도 중앙에 놓인 비수와 접시를 집어든다.

다른 아이들도 긴장한 채 비수와 접시를 집어들고

지자급1; [준비가 되었으면 이제 과제물을 보여주겠다.] ! 손가락을 튕기고. 그러자

덜컹! 탁자 건너편 바닥이 좌우로 갈라져 아래로 젖혀진다. 2미터, 너비 1미터쯤인 직사각형의 틈새가 나타나고. 이어

끼리릭! 기관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여자의 머리가 그 틈새로부터 올라온다. 직후

[!] [!] 경악하는 청풍과 아이들

! 바닥에서 올라오는 것은 치부만 겨우 가린 발가벗겨진 여자다. 십자가 형태의 틀에 두 팔을 벌린 채 묶여있다. 목과 발목과 허리도 십자가 형태의 틀에 묶여 단단히 고정되어 있고. 헌데

그 여자는 바로 지옥십관의 통과를 포기한 난향이라는 소녀다. 공포에 질린 표정이고

[... 난향아!] [흐윽!] [... 난향이가 왜...] 청풍과 정정과 철두를 제외한 아이들 비명 지르고. 특히 여자 아이들은 자지러지고

[으으으!] 난향은 공포에 질려 눈물 콧물 흘리며 벌벌 떤다. 사타구니로도 오줌이 흘러내리고. 그러자

청풍; [지금 뭐하자는 거요?] 버럭 지자급1에게 고함 지르고. 다른 아이들도 지자급1을 돌아보고

지자급1; [이청풍! 네가 상상하는 바로 그것이다.] 웃으며 난향에게 다가가고

지자급1; [이 계집의 부모는 거금 천냥에 딸을 팔았다.] 난향의 팔을 쓰다듬고. 겁에 질려 진저리를 치는 난향

지자급1; [우리도 이 계집이 제법 자질이 있어 보여서 거금을 주고 사들였는데...] [아쉽게도 이 계집은 심약해서 지옥십관의 수련을 거부했다.]

지자급1; [어쩔 수 없이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이 계집을 지옥십관의 마지막 관문인 단정관의 제물로 쓰게 되었다.]

정정; [그 아이... 난향을 우리 보고 죽이라는 건가요?] 노려보고

지자급1; [단순히 죽이면 단정관이 아니지.] 웃으며 고개 젓고

지자급1; [너희들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동고동락해서 이 계집과 제법 정이 쌓였을 것이다.] 난향의 몸을 쓰다듬으며 말하고. 달달 떠는 난향

지자급1; [아주 깊지는 않다고 해도 그 정을 단호히 끊을 수 있어야만 너희들은 한 명의 자객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난향의 얼굴 뒤에서 아이들을 보며 속삭이고

지자급1; [지금부터 너희들은 자신이 정을 끊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한다.] 난향에게서 떨어지고

지자급1; [지급받은 비수를 써서 이 계집의 몸에서 손바닥만한 살점 열점씩을 베어내라.] 음산한 눈빛으로

[흐윽!] [... 안돼!] 여자들 비명. 사내아이들도 사색이 되고

난향; [... 살려주세요!] 비명

지자급1; [, 마지막 사람이 살점을 다 발라낼 때까지 이 계집이 살아 있어야한다.]

지나급1; [만일 도중에 이 계집이 죽어버리거나 살점 베어내는 것을 거부하는 놈이 생기면...] 밀실의 사방 벽을 등지고 빙 둘러서있는 복면인들을 둘러보고

그자들이 일제히 칼 손잡이를 잡는다

지자급1; [불량품으로 판단하고 모두 처분해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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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세무림기보(千世武林奇譜)

 

 

1983년 5월 경에 전 5권 박스본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박스본은 전권을 박스 하나에 포장하여 만화방에 대여용으로 출간한 형태를 말합니다.

무려 37년 전의 작품입니다.

문장은 거칠고 구성은 허술하며 이야기 전개는 고루한 면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이런 작품도 있었지 하는 마음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2020년 4월 24일 와룡강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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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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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3)

 

 

이매봉은 일백수십 살씩이나 먹은 노인들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아주 징그럽게 느껴졌다.

꼭 걸어 다니는 시체를 본 것같은 기분이다.

정나미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왜 왔는지를 물었다.

노삼이 말했다.

[옥황빙서를 얻을 목적으로 왔다. 설마 너도 옥황빙서를 노리는 것은 아니겠지?]

이매봉이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 세상은 옥황빙서로 완전히 뒤집어졌군요. 은거했던 사람들도 다시 뛰쳐나와서 죽기나 하고...]

노이가 말했다.

[우리는 다르다. 다른 놈들은 진양진인을 이기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그를 이길 수 있다. 반드시 그에게서 옥황빙서를 빼앗을 것이다.]

이매봉은 말을 돌렸다.

[한데 당신들은 형제예요? 어쩜 그렇게 닮았죠?]

노대는 코웃음을 쳤고 노삼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는 사람보는 눈이 있구나. 우리는 형제는 아니지만 꼭 닮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땐 정말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았었다. 우리 사부도 우리와 꼭 닮았었지.]

이매봉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핏줄도 섞이지 않았는데 사부나 제자들이 모두 닮다니... 믿을 수 없군요.]

노이가 말했다.

[넌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부는 자기와 닮은 우리를 찾기 위해 꽤 고생을 했으니까.]

이매봉은 황당해하며 물었다.

[당신들 사부는 왜 그렇게 했죠?]

노삼이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이 버릇없는 것아! 지금까지 잘 대답했더니 별 시시콜콜한 걸 다 묻는구나! 이렇게까지 묻는다면 우리가 언제 너를 죽이겠느냐?]

이매봉은 슬그머니 웃었다.

바보는 바보라도 뭔가 규칙이 있는 바보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만 대답해 주세요.]

이매봉이 간절하게 말하자 노삼이 뿌르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가르치고 키우는게 어디 쉬운 일이냐? 자기와 얼굴이라도 닮아야 정도 빨리 들고 사랑스러운 게 당연하지. 제자들도 사부와 얼굴이 닮았으니 아버지처럼 따르기도 쉬운 노릇이고.]

[호호호호!]

이매봉은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보니 너무 단순한 이유다.

벼란간 노삼이 이매봉에게 덥쳐들면서 소리쳤다.

[! 그럼 이만 죽어라!]

노삼의 손가락이 갈구리처럼 변해서 이매봉의 목을 죄여왔다.

이매봉은 바람처럼 물러서면서 비명을 질렀다.

[잠깐만 기다려요! 한가지만 더! 한가지만 더 물을께요.]

[에잇!]

노삼이 손을 중간에서 거둬들이고 화난다는 듯이 발로 눈을 걷어찼다.

노대가 얼굴을 굳히고 부채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매봉은 재빨리 말했다.

[이 근처에 동굴이 있다고 하셨죠? 그 동굴은 어디에 있죠?]

노이가 말했다.

[동쪽에 있는 절벽 중간에 있다.]

이매봉이 말했다.

[진양진인의 냄새가 동쪽에서 나는 것 같지 않아요?]

노이와 노삼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노대가 눈을 번쩍 치켜뜨고 물었다.

[너는 진양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단 말이냐?]

이매봉이 말했다.

[매화향기 같기도 하고 포도향기 같기도 한 냄새가 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은 걸요.]

이매봉은 소매 속에서 일매향이 들어있는 작은 병의 마개를 살짝 열어서 동쪽으로 은밀히 쏘았다.

이매봉이 동쪽을 등지고 섰기 때문에 일매향 병이 날아가는 모습은 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노대!]

노삼이 크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노대는 벌써 동쪽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

이매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애와 스무고개 놀이를 지겹게 하고난 것같네.]

한데, 이매봉의 앞으로 새까만 검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노이가 검으로 그녀를 찌르고 있었다.

이매봉은 깜짝 놀라며 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에 두 자루의 장검이 쥐어지며 노이의 검을 튕겨냈다.

타탕!

치이익!

노이의 검에 닿은 장검이 기묘한 소리를 냈다.

이매봉의 왼쪽 소매자락이 조금 베어지며 색이 바랬다.

역한 냄새가 풍긴다.

노이의 검은 독검(毒劒)이다.

노이는 이미 그녀를 죽이기로 작정한 듯 아무소리없이 검으로 순식간에 서른 여섯 번을 베어왔다.

눈앞이 온통 노이의 독검으로 시꺼멓게 되는 것 같았다.

이매봉은 서른 다섯 번을 막아내고 서른 여섯 번째는 검의 힘이 말린 듯이 뒤로 날아가 버렸다.

[아아앗!]

노이가 독검을 거두고 동쪽 절벽가에 우뚝 섰다.

이매봉이 푸른 나뭇잎처럼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이는 노대를 부르며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이매봉은 벼랑 위로 뛰어올라왔다.

돌아보니 그녀의 겉옷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고 있다.

이매봉이 두 손으로 어깨를 감싸며 투덜거렸다.

[엉망이야! 젠장! 앞으론 금선탈각(金蟬脫殼)은 절대 쓰지 말아야지. 도무지 숙녀가 쓸 수법이 아니야.]

경장 차림이 된 이매봉은 동쪽 절벽을 천천히 내려가며 동굴을 찾기 시작했다.

코가 개보다 더 예민한 노대는 이매봉이 던진 일매향 병을 찾아갔을 것이다.

먼저 동굴을 찾아야 한다.

현천록을 진양진인인줄 알고 뒤쫓는 귀찮은 늙은이들과 또 마주친다는 건 일단은 짜증나는 일이다.

만나고 나면 조금 그 상황을 즐길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x x x

 

[내가 얼마나 잤는가?]

진양진인은 가만히 눈을 뜨고 물었다.

현천록은 지하를 흐르는 강에서 물고기를 두 마리 건져올려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두시간 정도 됐을겁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럼 이제 시작하지. 자네의 양의신공으로 내 막힌 혈도를 뚫어주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네.]

현천록은 누워있는 진양진인의 단중에 오른손 장심을 붙였다.

그리고 진양진인이 말하는대로 진기를 움직였다.

현천록의 오른손을 통해서 순수한 선천지기가 진양진인의 단전으로 흘러들어갔다.

진양진인은 배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급히 그 기운을 끌어들여 기해혈을 바로잡았다.

이각 정도 걸려서 기해혈을 바로 잡고 났을 때 현천록이 맥이 팍 풀려버렸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직은 공력이 부족해서 그렇네. 하지만 아주 큰 일을 했네. 허허허! 기해혈을 바로 잡자면 스무날을 걸릴 것이라 생각했건만... 양의신공을 일으켜 몸을 보호하게.]

현천록이 물었다.

[도장이나 내가 똑같은 양의신공을 익혔는데도 왜 내 공력이 바위를 뚫고 가는 것 처럼 힘들게 도장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길이 뒤집어졌기 때문일세. 하지만 이제 근본이 바로 잡혔으니 나머지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자네가 도와주면 금방 바로 잡을 수도 있네.]

현천록이 양의신공을 운용하고 있는 사이에 진양진인도 구슬 땀을 흘리며 자기의 몸을 치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진양진인이 현천록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아예 진기요상(眞氣療傷)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중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해혈이 회복된 이상 더디긴 해도 조금씩 노력하면 공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더구나 현천록의 순수하기 그지없는 선천지기를 일부 받아들였으니 내력이 더 높아질 것이 틀림없다.

진양진인은 이 고비를 잘 넘기면 자기가 성큼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현천록은 힘을 보충하고나서 다시 진양진인을 도와주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그 힘이 배는 강했다.

진양진인은 자기의 회복된 힘과 현천록의 힘을 합하여 단숨에 열 일곱 개의 대혈을 회복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써서 한 시간이 지났을 때는 삼백육십여 혈을 완전히 바로잡았다.

현천록도 진양진인도 완전히 땀으로 흠벅 젖어버렸다.

진양진인은 온 몸이 솜뭉치처럼 축 쳐져 다시 깜빡 잠이 들었다.

현천록은 완전히 탈진했지만 오히려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몸 안은 텅비어버린 것 같은 데 전신의 모공을 통해서 아주 가늘고 부드러운 기운이 스며들어 오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청량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몸이 두둥실 뜨는 것 같은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 기운들은 모공으로 들어와 길을 찾고 모여드는 것처럼 현천록의 기해혈로 응집되었다.

현천록은 기해혈이 뿌듯해옴을 느꼈다.

전신이 힘으로 가득찬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가득 든 것 같기도 하며 불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신도 맑아지고 피로는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현천록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무엇이든지 간에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허리 춤에 찌르고 있던 백금퉁소를 입으로 가져갔다.

어둠 속에서도 백금퉁소에 새겨진 용이 희미하게 빛난다.

현천록은 지그시 눈을 감고 퉁소를 불었다.

맑고 그윽한 음율이 암흑의 동굴 속으로 퍼져나갔다.

구슬픈 가락의 애상곡이었지만 슬픈 느낌은 하나도 없고 오직 생동하고 기운차는 느낌만 가득했다.

애상곡은 세 번을 연거푸 연주되었지만 그때마다 그 느낌이 달랐다.

처음에는 생동하고 기운차는 느낌이었고 두 번째는 웅장하고 엄숙했으며 세 번째는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세 번의 연주 모두 원래의 애상곡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마치 아기를 달려는 듯하군.]

세 번째 애상곡을 들으면서 다시 정신을 차린 진양진인이 말했다.

[애상곡은 언제 배웠는가?]

[도장이 부는 걸 보고 흉내를 내봤을 뿐입니다.]

현천록은 퉁소에서 입을 떼면서 말했다.

진양진인이 실소했다.

[음율을 단번에 익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당년의 왕산악이라 해도 마찬가질 걸세.]

진양진인의 음성은 이제 기운이 있었다.

현천록은 그 음성 만으로 이제 그가 몸을 다 치유했다는 것을 알았다.

현천록이 말했다.

[애상곡 외에 다른 곡은 없습니까?]

진양진인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배울 수 있다면 한 번 배워보게. 아예 이소곡(離騷曲)이나 광릉산(廣陵散)을 가르쳐줌세.]

진양진인은 말을 마치자 마자 자기의 퉁소를 꺼내서 불었다.

이소곡이었다.

현천록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진양진인의 곡이 끝나자마자 퉁소에 입을 대었다.

진양진인이 부른 곡과 똑같은 곡이 흘러나왔다.

완급과 호흡마저 완전히 동일했다.

진양진인은 한방 맞은 듯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힘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진양진인은 이소곡을 부르며 음이 아주 높은 세 소절은 빼고 부르지 않았다.

현천록이 그전부터 이소곡을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빼고 부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천록은 완전히 자기와 똑같이 연주하고 있었다.

아니, 음이 오히려 더 고아한 것 같다.

현천록의 곡이 끝나자 진양진인은 다시 퉁소를 입에 대고 광릉산을 불었다.

광릉산은 위진(魏晋)시대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분인 완적(阮籍)이 만든 것으로 그 이후에 곡이 끊어 졌다고 알려져 있다.

진양진인은 젊었을 때 남쪽에 갔다가 어느 낡은 도관의 천장에 광릉산의 악보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배웠다.

광릉산이야말로 당금의 세상에서는 오직 자기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진양진인이었다.

광릉산의 곡은 길기도 길거니와 온갖 현란한 기교와 은밀한 수법이 들어있어 십년을 배운다 해도 이루기가 힘들 정도로 어렵다.

그가 지금의 중임을 담당하게 된 것도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광릉산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진양진인은 자기가 연주하지 않은 광릉산을 듣는 홍복을 누리게 되었다.

현천록은 너무 자연스럽게 누에가 실을 뽑는 것처럼 퉁소로 광릉산을 뽑아내고 있었다.

곡이 끝나자 진양진인은 자기의 퉁소를 꺾어버렸다.

파각!

진양진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무공으로는 천하제일이 못됐지만 퉁소로는 천하제일을 자부했더니... 허허... 말짱 헛된 오만이었구나.]

현천록이 말했다.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곡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광릉산은 아주 좋은 곡이군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마 다시는 듣지 못할 걸세. 자네같은 사람이 또 있기도 어렵고 노도는 결코 연주하지 않을 테니까. 광릉산을 알아주는 사람은 또 한 분이 있네만 이제 그분도 더 듣지는 못하게 돼군.]

진양진인은 화난 듯이 말했다.

[자넨 귀재(鬼才)네 귀재. 내가 평생 처음 만나는 기재일세.]

번쩍!

진양진인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검은 눈깜짝할 사이에 현천록의 목에 닿아있었다.

현천록은 퉁소를 든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금석을 무베듯 하던 시퍼런 장검이 목을 시리게 한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네같은 기재가 무공을 익힌다면 십 년 래에 천하의 고수들이 모두 자네 발밑에 무릎을 꿇어야 할 걸세. 아마 다른 고수들이 자넬 발견한다면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걸세. 죽여서 싹을 제거하든가 제자로 키워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 하겠지.]

현천록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도장께선 어느 쪽입니까?]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어느 쪽은 어느 쪽이겠나? 그냥 자네와 난 서로 내기를 하고 있는 중일세. ! 이 검은 줄 수 없으니 그 퉁소로 따라하게.]

진양진인은 훌쩍 물러나며 검을 춤을 추듯이 휘둘렀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검광이 폭발하듯 일어난다.

현천록의 눈에 진양진인은 콧베기도 보이지 않고, 다만 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 질 뿐이었다.

착각!

삽시간에 검광이 사라지고 다시 칠흑같은 어둠이 되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다 보았으면 어디 한 번 해보게.]

현천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두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아직 제 느낌으로는 확연하게 다 잡지 못했으니 한 번만 더 보여주십시오.]

진양진인이 싸늘하게 웃고 다시 검을 뽑아들었다.

검광이 순식간에 눈을 부시게 한다.

현천록은 눈을 감고 진양진인의 움직임을 느끼려 했다.

처음보다 훨씬 확연하게 진양진인이 느껴졌다.

베고 찌르고, 걷는가 하면 치고 찍는 모두 동작이 하나의 선을 이룬 듯 끊임없이 이어졌다.

열 두가지의 수법이 마치 하나로 이어진 듯한 것이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알겠는가?]

현천록이 말했다.

[이제 하나 하나 따로 보여주십시오.]

진양진인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현천록의 말대로 열 두가지 동작을 따로 따로 펼쳐보였다.

현천록은 느낀 대로 머리 속에서 열 두 개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들은 머리와 꼬리가 없었다.

어떤 것이든 머리가 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꼬리가 될 수 있었다.

현천록은 머리 속으로 곰곰히 더듬어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소리쳤다.

[대단한 검법이군요. 이런 검법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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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아! 청구단서!

 

 

 

석 달의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드디어 정월 대보름날이 되었다.

비록 정월 대보름이 되긴 했지만 날씨는 그리 춥지 않고 한 달 새 눈도 내리지 않았다.

막비강은 삼경이 조금 안된 시간에 영롱탑이 보이는 경지하 변에 도착했다. 다행히 경지하 일대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막비강은 마음을 놓았다.

헌데 영롱탑 주위를 살피던 막비강은 지난번에 들렀었던 조씨부인의 농가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깜짝 놀라 농가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비록 짧은 석 달간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무공은 석 달 전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 눈 깜짝할 사이에 농가가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불에 탄 집의 잔해만 가득 쌓여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집의 일가족이 흉사들에게 변을 당한 것일까? 아니면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것일까?)

불탄 폐허를 돌아보는 막비강의 마음은 몹시 착잡해졌다. 조씨부인의 집이 타버린 것이 아무래도 자신 때문일 것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잠시 넋을 잃고 서 있던 막비강은 유해(遺骸)나마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잔해를 들쳐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저 깨진 항아리와 불탄 가재도구들만 발견될 뿐 사람의 유골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헌데 그가 신녀비로 잔해의 여기 저기를 찔러 보고 있을 때였다.

반짝!

갑자기 한 줄기 금광이 번뜩했다.

막비강이 얼른 흙을 파보니 자신이 이 집을 떠날 때 장연아에게 맡겼던 호로와 강장이 나왔다. 이 물건들의 발견만으로 막비강은 큰 위안을 얻었다.

(유해가 없는 것을 보니 그들은 모두 무사히 피한 모양이다. 여길 떠나면서 호로와 강장은 사람의 눈에 쉽게 띄므로 여기 묻어 두고 갔을 것이다.)

 

막비강은 곧 강변으로 달려가 강장에 묻은 흙을 깨끗이 씻었다.

이어 호로에 묻은 흙도 닦으려는데 마침 달을 가렸던 구름이 지나가며 밝은 달빛이 호로에 비치었다. 그러자 돌연 호로 표면에 무지개가 피어오르며 희미하게 한 폭의 산경(山景)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막비강은 호로의 그 문양이 청구단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이 일대의 경치와 매우 흡사함을 알았다. 다만 영롱탑의 위치가 거꾸로 그려져 있었다. 탑이 하늘을 향해 서있는 것이 아니라 물 속에 잠겨있는 것이다.

막비강은 다시 주위의 경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것은 영롱탑이 아리나 영롱탑의 그림자를 그린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호로를 다시 찾았기에 천만다행이지 일년이 걸려도 헛수고를 할 뻔했구나.]

그는 기뻐하며 호로 안에 든 찌꺼기를 모두 쏟았다. 그러자 호로 속에서 찌꺼기들과 함께 종이쪽지 한 장이 떨어졌다.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쪽지를 집어들고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임은 갔구나! 임 가신 곳은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베갯머리에 엎드려 무사함을 믿고 이불을 끌어안은 채 다시 만나길 기도했지만 천첩의 뜻이 아직도 통하지 않았구나.>

 

파리 머리보다 작게 쓴 글씨는 여자의 필적임이 분명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굴까? 장연아라면 이제 겨우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조숙하게 임이니 천첩이니 하는 글을 쓸 까닭이 없는데....)

막비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모친 조씨부인이 썼을 가능성이 많은데, 왜 이 호로 속에 이런 걸 넣어 두었을까?)

막비강은 한동안 생각을 굴려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이 글이 자기와 무관하다고 느꼈지만 일단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호로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허리에 찬 뒤 영롱탑 아래쪽의 경지하로 달려갔다.

 

***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정월 대보름날 밤 삼경이다. 한 겨울이라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탓에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막비강은 물 가 높은 바위에 서서 물 속에 비친 영롱탑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는 곧 영롱탑의 그림자 끝 부분이 가르키는 곳이 물 속 깊은 곳에 놓인 하나의 거석(巨石)임을 발견했다. 집채만한 크기인 그 바위는 물 속 아주 깊은 곳에 놓여있었지만 경지하의 물이 워낙 맑아 물 밖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호로에서 떠오른 산수화에 영롱탑의 위치가 거꾸로 새겨져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비급은 영롱탑 꼭대기가 아니라 영롱탑의 그림자가 비친 물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청구상인이 후세 사람들을 농락할 의도가 없다면 청구단서는 영롱탑의 그림자가 비치는 곳에 자리한 물 속 거석 밑에 숨겨져 있음이 분명했다.

풍덩!

자신의 추측이 맞음을 확신한 막비강은 즉시 물 속으로 뛰어들어 거석이 있는 곳으로 잠수했다.

거석이 놓인 곳의 수심은 매우 깊었다. 거의 십여 장을 잠수하여 귀가 멍멍해지고 고막이 터지는 듯한 통증을 느낄 무렵 막비강은 가까스로 거석에 도착했다. 만일 막비강이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남달리 튼튼한 몸을 지니지 못했다면 거석이 놓인 곳까지 잠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석은 마치 강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단단히 박혀있었다. 막비강이 전력을 다해 흔들어 보았지만 거석은 꼼짝하지 않았다.

한동안 거석을 흔들어 보던 막비강은 숨이 막혀 하는 수 없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허어!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물놀이를 하는 사람이 다 있군!]

막비강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막 숨을 몰아쉬었을 때 물가 바위 위에서 누군가 조소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가 나처럼 비밀을 알아내고 기다렸던 게 아닐까?)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진력이 충만함을 느낀 막비강은 움찔 놀라며 바위 위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그 음성은 막비강이 전에 들은 적이 있는 오봉도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막비강이 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닦고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상대방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바로 천하오기 중 오봉도인이었다.

이에 막비강은 다시 급히 물 속으로 잠수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거석을 흔들어 보았다.

우두둑!

그러자 그의 마음이 통했는지 거석이 약간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는 또 다시 숨이 목 아래까지 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막비강은 별 수 없이 또 수면으로 부상했다.

오봉도인은 재차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막비강을 보더니 껄껄 웃었다.

[너는 과연 거기서 비급을 찾고 있었구나. 빈도는 너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 청구단서를 찾으면 즉시 갖고 나오너라. 함께 연구하면 서로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자는 자신이 물 속으로 들어가 비급을 찾는 수고를 덜기 위해 좋은 말로 막비강에게 제안했다.

오봉도인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막비강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요사한 도사야! 내가 그런 수작에 걸려들 것 같으냐? 청구단서를 찾지 못한다면 몰라도 찾아낸다면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멀리 헤엄쳐 가 숨어버리겠다!)

하지만 막비강은 오봉도인의 무공 실력을 잘 아는지라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입니다. 청구단서는 도가(道家)의 비급이라 배움이 얕은 후배로서는 얻어봤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도장께서 지도해 주신다니 저에게는 홍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봉도인은 막비강이 순진하여 자신이 말에 속아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정말 총명하고 영리하여 천면신룡이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구나. 네가 비급만 찾아 나오면 빈도는 최선을 다해 널 지도해 주겠다.]

[알았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막비강은 힘차게 대답하고는 다시 물 속으로 잠수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사력을 다해 거석을 밀어보았다.

쏴아!

다음 순간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거석이 벌렁 뒤집혀졌다. 헌데 거석이 넘어진 자리에는 커다란 수직동굴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 동굴은 물이 없는 빈 동굴이었다. 그래서 그 동굴을 막고 있던 거석은 물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무거웠던 것이다.

콰아아아!

거석이 뒤집히자 텅 비어있던 동굴 속으로 물이 와락 밀려들어간다. 삽시에 근처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겼고 막비강의 몸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혼비백산한 막비강은 비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다급히 호흡을 멈추어 물을 들이키지 않으려 했다.

그 상태로 막비강은 소용돌이치는 물길에 휘말린 채 아래로 떨어졌다.

 

***

 

소용돌이치는 물결은 처음에는 그를 아래로 하락시키더니 다시 옆으로 백 장 가량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죽으라는 운명은 아니었는지 막비강은 미끄러운 이끼가 가득 낀 거석(巨石) 아래쪽에 도착하게 했다. 그는 얼른 거석을 붙잡고 일 장 가량 기어올라갔다. 그러자 마침내 그의 머리가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막비강이 나온 곳은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이었다.

(요행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이제 어떻게 밖으로 다시 나가지?)

그는 깜깜한 주위를 둘러보며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주저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막비강은 억지로 기운을 내서 동굴 안쪽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 손으로 바닥을 더듬으면서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 동굴 바닥은 고른 편이었다. 조그만 돌 조각을 사람 손으로 이어 붙여 마치 비늘같이 만들어졌는데 끝없이 길게 뻗어있어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어갔을까? 돌연 앞쪽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했지만 막비강은 기쁘기보단 긴장이 앞섰다.

(저것은 밖에서 흘러드는 빛일까? 아니면 어떤 짐승의 눈빛일까?)

그는 긴장하여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한동안 그 빛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빛은 아무런 동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막비강은 용기를 내어 빛이 비치는 곳으로 기어갔다.

가까이 가보니 석벽(石壁)에 하나의 옥합(玉盒)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막비강이 어둠 속에서 본 빛은 그 미끄러운 옥합의 표면에서 번져 나오는 것이었다.

츠으으!

막비강이 석벽에 박힌 옥합을 조심스럽게 파내자 갑자기 빛이 증가되어 주위를 백주(白晝)처럼 환하게 밝혔다. 놀랍게도 이 옥합은 야광옥(夜光玉)이라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보옥을 깍아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옥합 뚜껑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야광옥합(夜光玉盒) 속에 동이족의 무학비전인 청구단서가 들어 있으니 인연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으리라.>

 

[! 이것이 바로 청구단서구나!]

막비강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옥합을 바닥 위에 내려놓고 큰절을 올렸다.

이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과연 한 통의 편지와 붉은 표지를 지닌 세 권의 책자가 들어 있었다. 세 권의 책자 겉면에는 각각 신공결(神功訣), 연형결(鍊形訣), 초혼결(招魂訣)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막비강은 비급들 보다 먼저 편지를 펼쳐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빈도는 본시 동방(東方) 청구(靑丘) 출신이다. 우리 동이족이 잃어버린 창세삼보(創世三寶)를 찾으려 중원으로 들어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역만리 타향에서 명을 마치게 되었도다. 하지만 창세삼보를 찾는 일은 동방국인(東方國人)이 할 일이므로 중원인인 그대와는 일절 관계가 없다. 이에 그 내막을 여기에는 자세히 적지 않는다.

보물을 얻은 사람은 우혈한천(牛穴寒泉) 위로 올라가 최소 일 년 이상 일체의 중단없이 청구절학을 연마하라. 일단 연공을 시작하면 기초가 잡힐 때까지 쉬지 말아야 성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혈 근처에는 대지의 정기가 모여 형성된 영천석유(靈泉石乳)와 일 년 동안 충분히 먹을 양식이 있다. 또 야광주는 비급을 읽을 수 있게 빛을 발산해줄 것이니 무공을 연마하기에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으면 비급을 다시 야광옥합 속에 넣어 한천에 던져 후세의 인연을 기다려라.>

 

막비강은 야광옥합에 적힌 글을 읽고 크게 기뻐했다.

(그냥 거짓말로 추명염왕 등을 속인 것이었는데 우혈이 정말 청구단서와 관련이 있었을 줄이야!)

막비강은 비록 우혈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이 동굴이 우혈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청구상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비급을 품속에 넣은 후 옥합을 들고 야광주의 광망을 이용하여 앞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

 

얼마 가량 걸었을까? 전면에서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보니 네놈이구나 천면신룡!]

막비강은 이런 지하에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깜짝 놀라 하마터면 뒤로 벌렁 자빠질 뻔했다.

차가운 한기가 솟구치는 연못가에 서있던 그 사람은 야광옥합을 손에 든 막비강을 발견하고는 다가서며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네놈이 여기까지 오다니... 괴상한 야광옥합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청구단서를 취득한 모양이구나. 당장 그걸 내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막비강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야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추명염왕! 저자가 죽지를 않았구나!)

야광옥합의 빛을 빌어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상대방은 추명염왕이었다.

헌데 석달 사이 그자의 얼굴은 아주 추악하고 섬뜩하게 변해 있었다. 전신에 누런 털이 길게 자란데다 눈에서는 연신 녹광(綠光)이 번뜩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오싹 끼치게 한다.

그러나 막비강은 지난 석달 간 자신의 무공도 장족의 발전을 보였음을 떠올리고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이건 빈 옥합일 뿐인데 무엇이 볼 게 있다고 그러느냐?]

[빈 옥합이라고? 네놈이 감히 노부를 속이려 드느냐?]

[이런 마당에서 당신을 속일 필요가 뭐 있느냐?]

추명염왕이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그럼 청구단서는 어디 있느냐?]

막비강은 술술 말을 이었다.

[소면호가 탈취해 갔다. 그자는 청구단서 세 권을 모두 자기가 갖고 내게는 이 빈 옥합만 주더니 발길질로 나를 물 속에 처넣었다. 당신은 내 몸에 아직도 물기가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막비강의 말을 곧이 들은 추명염왕은 이를 부득 갈았다.

[소면호! 이 괘씸한 놈 같으니! 노부가 여기서 빠져 나가기만 하면 가장 먼저 네놈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가 만약 청구단서의 절학을 연성한다면 당신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 노부는 그놈을 때려 죽일 자신이 있다. 그러나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막비강은 뻔히 알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신은 어디로 여길 들어왔느냐?]

추명염왕이 어리둥절하며 반문했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막비강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자 추명염왕은 자기 이마를 쳤다.

[아차! 그 어린 녀석이 알고 있지.]

[어린 녀석이라니?]

[그런 질문은 하지 말고 지금은 도대체 몇 일이냐?]

[정월 보름날 아니면 정월 열엿새 아침일 것이다.]

추명염왕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라고? 그럼 내가 여기 들어온 지 석 달이 넘었단 말이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여기 들어온 지 석 달이 넘었다면 당신은 그동안 무엇을 먹었느냐?]

막비강의 물음에 추명염왕은 히죽 웃었다.

[사람 고기를 먹고 살았다.]

막비강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 사람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단 말이냐?]

추명염왕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배가 고프면 무엇인들 못 먹겠느냐? 얼마 후 노부는 너도 잡아먹을 것이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농담이라고?]

추명염왕은 으스스한 표정으로 웃었다.

[석 달 전 나이가 너와 비슷한 녀석이 소면호와 삼촌정, 그리고 노부를 데리고 네놈을 찾는다면서 이곳 우혈에 왔었다. 그런데 소면호가 방심한 노부와 삼촌정을 갑자기 공격하여 이 수직갱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물 속에 떨어져 죽음은 면했다.]

막비강은 즉시 소리를 높여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정 선배님도 이곳에 계시겠군요.]

그러자 추명염왕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은 이간질하려고 그를 선배님이라 부르는데 그런다고 그가 너를 구해 줄 것 같으냐? 사실대로 말해 주겠는데 그는 이미 내게 잡아먹혔다.]

막비강은 흠칫 놀랐으나 곧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내가 믿을 줄 아느냐?]

[엉터리 같은 말이라고? 노부가 너를 잡아먹을 때가 되면 너도 내가 한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추명염왕은 날카로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세상이치다. 그러니 내가 몇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별로 놀랄 일이 못된다.]

그자는 자랑하듯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얼음같이 차가운 한천이 있는데 시체를 그 한천에 담가 두면 상하지 않는다. 원래 한천에는 발을 헛디뎌 빠져 죽은 시체가 여러 구 보존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 두 사람이 그걸 사이좋게 나누어 먹다가 나중엔 그 마저도 떨어지자 서로 다투게 되었다.]

추명염왕은 막비강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삼촌정이 버릇없이 굴기에 노부는 그놈을 죽여 지금까지 굶지 않고 살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먹을 것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놈이 나타났구나.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아 살려 두겠지만....]

막비강은 추명염왕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 죽어라!]

추명염왕의 말을 듣던 막비강은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갑자기 일장을 격출했다. 그는 끔찍하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하여 이 일장에 전신의 공력을 주입시켰다.

[! 네놈이!]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감히 먼저 공격해올 줄은 몰랐다. 또한 그의 공력이 이렇게 심후해졌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다급한 가운데 일장을 맞받아 냈다.

!

[커헉!]

순간 우렁찬 굉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추명염왕은 우반신이 마비됨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후퇴했다.

[받아랏!]

막비강은 일초가 성공하자 자신이 생겨 옥합을 바닥에 던져놓고 쌍장을 교차하여 쉴새없이 연달아 강맹한 장력을 발출했다.

퍼펑!

추명염왕은 몇 장을 맞받아 낸 후 상대방의 공력이 자기보다 훨씬 심후함을 느끼고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 손을 멈추어라!]

막비강은 호기가 격발하여 장력을 발출하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 잠깐은 무슨 잠깐이냐? 나는 오늘 금릉 개방의 네 분 노개와 삼촌정의 원수를 갚아 주어야겠다.]

퍼펑!

막비강은 고함과 함께 쌍장을 동시에 앞으로 뻗어냈다.

[아이쿠!]

첨벙!

추명염왕은 연달아 몇 바퀴 곤두박질하더니 그대로 차가운 한천(寒泉)에 빠져 버렸다.

막비강은 득의의 웃음을 머금었다.

[너는 염왕이니 황천에 가야 마땅하다. 그래도 나를 잡아먹을 테냐?]

그는 추명염왕이 밖으로 나올 것이 염려되어 한천 끝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하지만 추명염왕의 추악한 시체는 수면에서 몇 바퀴 맴돌더니 천천히 물 속으로 잠겼다.

막비강은 자기가 십 성의 공력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추명염왕이 당해내지 못하고 한천에 빠져 죽자 의외였다. 추명염왕이 일장에 네 명의 노개를 격살했던 일로 미루어 자기의 무예는 이미 일류고수에 못지 않음을 알았다.

[잘 하면 지금 실력으로 막고천도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자를 일장에 죽이는 것은 너무 자비로운 일이지.]

막비강은 비록 자신이 추명염왕은 간단히 죽일 수 있었지만 천하오기에 비하면 아직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오기 중의 누구라도 원수 막고천을 도우면 원수를 갚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복수는 청구절학을 연마한 후로 미루기로 작정하고 다시 옥합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청구상인이 말한 양식이 있다는 장소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는 한 쪽 벽에 사람이 겨우 기어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석혈(石穴)이 뚫려 있음을 발견하여 안으로 기어 들어가 보았다.

구멍 안쪽은 넓이가 여덟 자 가량 되는 자그마한 석실이었다. 하지만 이 석실에는 식량은커녕 돌 조각 하나도 없었다. 단지 밀실 한 곁에 우윳빛의 액체가 조금 고인 샘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청구상인이 말한 영천석유였다.

그러나 그것뿐, 석실 안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막비강은 본래 여러 가지 약재를 알고 있는지라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혹시 그 식량이란 것이....)

그는 즉시 한천의 맞은편 벽쪽으로 가서 야명주로 비춰 보았다. 과연 흙이 엉겨붙은 그곳에는 희세의 영약인 하수오(河首烏)가 수없이 자라고 있었다.

(! 이런 희세의 영약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니...!)

그는 청구상인이 말한 식량의 정체를 알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곳에 나 있는 하수오들은 모두 수백 년 묵은 것들이었다. 바깥세상에서는 천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희세의 영약들인 것이다. 대충 양을 따져보니 일 년 동안은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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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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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신녀문의 폐허. 달빛 아래 신비롭고

북쪽의 높은 절벽 쪽으로 가는 세 여자. 운신장이 앞장서는데 호리병을 들고 있다. 호리병이 밝게 빛나서 주변을 환하게 비춘다. 그 뒤를 이진진과 진삼낭이 따라간다. 진삼낭이 이진진의 팔을 잡아 부축하고

진삼낭; (기회를 봐서 진진이에게 내 본명과 청풍이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줘야한다.) 곁눈질로 이진진을 보며 생각하고

진삼낭; (지금도 무림맹은 나와 청풍이를 찾고 있을 게 분명하니...) 생각할 때

운신장; [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우리 신녀문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인물은 천마(天魔)란다.] 절벽 쪽으로 가며 주변의 폐허를 돌아보고

이진진; [술법의 종가로 알려진 신녀문을 이렇게 만들다니...] [천마라는 인물은 정말 대단한 고수였던 모양이에요.]

운신장; [대단했지. 대단하고 말고...]

운신장; [마교의 중시조(中始祖)인 천마는 고금제일마로 불리는 인물로 그의 적수는 오직 두분뿐이었단다.]

운신장; [무성동(武聖洞)이란 문파의 시조 천지무성(天地武聖)과 우리 신녀문의 문주셨던 던 무산신녀(巫山神女)가 그분들이었다.]

운신장; [하지만 천지무성과 무산신녀님은 천마보다 한 세대 전의 인물들이라 직접적인 위협이 되진 않았다.]

운신장; [대신 우리 신녀문에 전해지는 한 가지 보물은 언제든지 천마와 그의 후손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운신장; [그래서 천마는 그 보물을 없애려 했지만...] [고금제일마라는 그자의 능력으로도 그 보물을 훼손할 수가 없었다.]

운신장; [어쩔 수 없이 천마는 그 보물을 빼앗아 금제를 걸어버렸다.] [신녀문의 후손이 결코 손에 넣지 못하도록...]

이진진; [대체 어떤 보물이기에 고금제일마인 천마조차 두려워한 건가요?]

운신장; [혼천경(混天鏡)이라는 보패(寶牌;영적인 힘을 지닌 보물)란다.]

이진진; [혼천경...]

운신장; [혼천경은 인간의 혼백을 담을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래서 우리 신녀문의 역대 문주님들께서는 세상을 떠나기 전 당신의 평생 수련의 결과를 혼천경에 옮겨놓곤 하셨다.]

이진진; [평생 수련의 결과를 옮겨 놓으셨다면...] 놀라고

운신장; [후손들은 언제든지 그 능력을 혼천경에서 꺼내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일초무학이었더라도 단번에 천마에 필적하는 고수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돌아보며 웃고

이진진; [과연 천마가 두려워할만 했어요.]

운신장; [그래서 천마는 혼천경을 빼앗아 이곳에 가둬버렸단다.] 멈춰서며 앞을 보고. 앞에는 절벽이 있는데 절벽 아래에 커다란 동굴이 있다. 헌데

츠츠츠! 동굴 입구가 칙칙한 빛의 장벽으로 막혀있다. 동굴 전체를 빛이 꽉 메우고 있는 모습.

이진진; [동굴... 동굴이 질감이 느껴지는 빛으로 가득 차있어요.] 놀라고

운신장; [천마의 술법인 금천마장(禁天魔障)이란 것이 펼쳐지며 나타나는 현상이란다.] [가까이 와봐라.]

이진진; [...] 다가가고

운신장;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거라.] 츠으! 호리병을 들어서 그 빛으로 동굴 안쪽을 비추고. 직후

[!] 눈 치뜨며 놀라는 이진진. 진삼낭도 뒤에서 놀라고

! 동굴 안쪽, 마치 젤리같은 것으로 들어차 있는 상태인데 그 젤리같은 것들 속에 여러 명의 여자들이 떠있다. 운신장과 복장이 비슷한 여자들인데 수영을 하거나 무중력 상태에 떠있는 것같은데 물론 움직이지는 않는다. 모두 안쪽으로 날아 들어가는 자세다.

이진진; [동굴 안쪽에... 선녀같은 분들이 여럿 떠있어요.]

운신장; [금천마장을 뚫고 들어가 혼천경을 꺼내오려다가 실패한 본문의 선조들이시란다.] 한숨 쉬고

[!] 눈 치뜨는 이진진

멀리 동굴 안쪽에서 무언가 빛을 발한다.

이진진; [동굴 깊은 곳에 빛을 내는 무언가가 있어요.] 손을 이마에 대고 보고

운신장; [잘 보렴! 저것이 혼천경이란다.] ! 호리병으로 빛을 더 강하게 내어 동굴 안쪽을 비추고. 그러자

크로즈 업 되는 그 물체. 돌로 깎아 만든 단상이 있고 그 위에 거울이 하나 떠있다. 직경이 20센티 정도되는 구리거울인데 표면이 아주 매끈해서 빛이 난다.

이진진; (저게 혼천경...) 흥분하고

운신장; [혼천경은 우리 신녀문의 모든 것이란다.] [혼천경에 본문의 모든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따로 비급을 만들거나 하지 않지 않았었지.]

운신장; [그러다가 혼천경이 천마가 펼친 술법에 갇혀버리자 대부분의 절기가 절전되고 말았다.] 한숨

이진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운신장; [겨우 구전(口傳)으로 몇 가지 술법과 무공이 전해졌었지만...]

<그나마도 역대 문주님들께서 혼천경을 꺼내려고 금천마장에 뛰어들었다가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절전되고 말았지.> 동굴 안쪽에 떠있는 여자들을 배경으로 운신장의 말

운신장; [자연스럽게 제자들도 줄어들고...] [나의 대에 이르러서는 신녀문의 제자는 통틀어도 백 명이 채 안되게 되었단다.]

운신장; [그 적은 숫자로는 신녀문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헤어졌으며...]

운신장; [문주 격인 나도 무림맹에 의탁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진삼낭; (그래서 이 넓은 신녀문이 폐허처럼 버려졌구나.)

운신장; [오늘 밤 너를 찾아왔던 분은 아마도 저 안에 갇혀계신 전대 문주님들 중 한분이셨을 게다.] 동굴 안쪽의 여자들을 보고

이진진; [혼천경을 어떻게 해야 꺼낼 수 있는 것인지요?] 진지하게

진삼낭; (진진이 너 설마...) 걱정

운신장; [무공으로는 절대 금천마장을 뚫고 들어갈 수 없단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혼백에 가해지는 압력이 급증하기 때문이란다.]

운신장; [오직 천마의 혼백에 필적하는 지순한 혼백과 정기를 지닌 사람만이 금천마장의 압력을 견딜 수가 있단다.] 이진진을 지긋이 보며

이진진; [혹시 제가...]

운신장; [너는 몸이 약한 대신 정기가 강력한 신약정강(身弱精强)의 체질이란다.] 끄덕

운신장; [내가 아는 한 오직 너만이 금천마장의 금제를 깨트릴 수가 있단다.] 이진진의 어깨를 한손으로 잡고 지듯이 바라보고

[!] 침 꿀꺽 삼키는 이진진. 그 뒤에서 진삼낭은 걱정스럽게 보고 있고

 

#140>

<-태산(泰山)> 웅장한 산. 그 산중턱에 자리한 성채

<-무림맹(武林盟)> 그 성채를 크로즈 업. <신마유희>등 다른 작품의 무림맹 형상. 때는 낮이고

무림맹과 좀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계곡.

그리 깊지 않은 계곡 안쪽에는 정원이 가꿔져 있다. 잘 가꿔진 정원에는 건물 한 채와 정자 한 채가 있고.

정자 안에는 여러 명이 있다. 안락의자에 앉은 섭장천. 많이 늙었다. 섭장천의 손목을 잡고 진맥하는 늙은 의원. <신마유희>에 나온 진무륜 캐릭터. 두 사람 앞쪽에는 장세명이 앉아서 보고를 하는 중이다. 한쪽에는 쌍뇌신로가 앉아서 부채를 부치고 있다. 쌍뇌신로도 많이 늙었고

섭장천; [삼월 삼짓날이라...] 중얼거리는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주 섭장천>

장세명; [절기상 화기(和氣)가 맹동(萌動)하는 계절이니 화촉(華燭)을 밝히기에는 적당한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섭장천; [택일은 잘 했네만...] [무려 일곱 달이나 기다리라고 하는 걸 보면 벽장주가 딸을 어지간히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먼.]

장세명; [벽장주로서도 처음 자식을 품에서 놓아 보내는 것이니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고

섭장천; [그 심정 이해가 가네.] 한숨 쉬고

쌍뇌신로; (벽초천이 딸의 출가를 늦추는 게 과연 아쉬움 때문일지...) 부채를 부치며 생각하고

쌍뇌신로; (이런 저런 경로로 들리는 벽소소에 대한 안좋은 소문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맹주의 집안일이니 노부가 뭐라 할 수도 없는 일...)

쌍뇌신로; (그저 벽소소라는 계집이 소문만큼 막 되어 먹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장세명과 섭장천이 뭔가 얘기를 나누는 걸 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쉬고. 그때

! 섭장천 손목에서 손을 떼는 진무륜

섭장천; [어떤가 진의원?] 웃으며 진무륜을 돌아보고

섭장천; [근래 상태가 더 안 좋아졌겠지?] 웃으며 소매를 내리고

진무륜; [탕제에 기력을 보충하는 약을 더 첨가해야겠습니다.] 손을 소매로 닦고. 배경으로 나레이션. <-섭장천 전담의원 진무륜>

섭장천; [부질없는 일일세. 말라가는 고목에 비료 많이 준다고 꽃이 피는 건 아니니...] 허탈하게 웃고

섭장천; [이미 팔순을 넘긴 나이야.] [살만큼 살기도 했으니 애써 수명을 늘리고 싶진 않구먼.]

진무륜; [하늘이 내린 목숨이니 살 수 있을 만큼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좀 무뚝뚝하게 말하고

진무륜; [게다가 춘삼월이 오면 손주며느리도 보셔야하니 기운을 차리셔야합니다.]

섭장천; [손주며느리...]

섭장천; [하긴 죽을 때 죽더라도 노부의 대가 이어지는 걸 보고 죽어야겠지.]

진무륜; [사람은... 특히 노인은 죽는다는 말을 입에 올리면 안되는 법입니다.]

섭장천; [허허 주의함세.]

쌍뇌신로; (진의원도 대단한 인물이긴 하다.)

쌍뇌신뢰; (비록 친 딸은 아니더라도 양녀가 악인에게 납치되어 무참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걸 보면...)

쌍뇌신로; (저 정도 자제력을 지녔으니 황제의 어의 역할도 감당할 수 있었겠지.) 생각하는데

[조부님!]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일제히 돌아보는 사람들

위진천; [황금전장에서 택일(擇日)을 받아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활발하게 걸어오는 청년. 아주 화려한 복장에 보검을 허리에 찼다. 다른 작품의 위진천 캐릭터. 이 작품에서는 삽장천의 조카손자.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 소맹주 신검공자(神劍公子) 위진천(威振天)>

장세명; [어서 오시오 소맹주.] 일어나며 포권하고. 진무륜과 쌍뇌신로는 앉은 채로 고개만 좀 까닥인다.

위진천; [원로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총관!] 마주 포권하며 정자로 들어오고

장세명; [노고랄 게 있겠소이까?] [오랜만에 태산을 떠나 느긋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지요.] 자기가 앉았던 의자를 권하며

위진천; [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의자에 앉으며 웃고

위진천; [기분은 어떠십니까 조부님?]

섭장천; [기분은 매우 좋구나. 드디어 네 혼처와 혼례 날짜가 정해져서...] 웃고

위진천; [소손이 오랜만에 효도를 한 것같아 기쁩니다.] 웃고. 이어

위진천; [그래 신부 댁에서는 언제로 택일을 해서 보냈습니까?] 옆에 서있는 장세명에게 묻고

장세명; [내년 삼월삼짓날을 원하고 있습니다.]

위진천; [삼월삼짓날...] [반년도 넘게 남았군요.]

장세명; [벽소저의 미모를 하루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으시겠습니다.] 웃고

위진천; [그것도 있지만... 조부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드리는 것 같아 조급해집니다.] 다시 섭장천을 보고

섭장천; [그러고 보면 진천이만큼 노부를 챙기는 사람도 없구먼.] 흐뭇하게 웃고

위진천;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겸손하게 웃고

그런 위진천을 지긋이 보는 쌍뇌신로

쌍뇌신로; (천하제일행운아!) (이것이 무림인들이 소맹주 위진천을 질시해서 부르는 말이다.) 생각하고

쌍뇌신로; (맹주의 유일한 혈육이던 섭아연은 마교의 소교주 용무린과 정분이 나서 무림맹을 등졌다.)

쌍뇌신로; (섭아연은 용무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낳았지만 실종되었고... 섭아연 자신은 미쳐버렸다.)

쌍뇌신로; (어쩔 수 없이 맹주는 조카딸의 아들, 즉 무()태상 섭패천의 외손자인 위진천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게 되었다.)

쌍뇌신로; (맹주 집안의 불행 덕분으로 곧 무림맹의 주인이 될 행운아...) 섭장천에게 뭐라 말하며 웃는 위진천을 보며 생각하고

<늘 밝은 표정이지만 언뜻 언뜻 엿보이는 어두운 그늘이 마음이 걸린다.> 야릇한 표정으로 웃으며 곁눈질로 쌍뇌신로를 보는 위진천을 배경으로 나레이션

쌍뇌신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늘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노부의 노파심 때문일까?)

<아무쪼록 노부의 근심이 헛된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정자의 모습 배경으로 쌍뇌신로의 생각 나레이션

 

#141>

<-반년후> 살인상단의 비밀거점. 늪지로 둘러싸인

동굴 입구. 여러 명이 나와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파면살주, 귀파파, 천살로, 독검사랑, 몇 명의 복면인등이다.

삐이! 늪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너머에서 피리 소리가 들리고. 그러자

귀파파; [도착하셨구먼.] 눈 번뜩이고. 이어

철컹! 벽에 붙은 레버를 하나 급히 위로 올리는 복면인. 그러자

촤아! 늪지 속에 숨어있던 철교가 올라오고. 그 철교 위를 뱀장어같은 것들이 꿈틀대며 기어 다니다가

첨벙! 첨벙! 꿈틀대며 다시 늪으로 뛰어드는 뱀장어같은 것들. 이어

휘익! 안개를 뚫고 철교 위를 걸어오는 세 여자. 소수마녀와 도마녀, 검마녀다. 세 여자가 나타나자.

[단주!] [어서 오시게.] [단주님을 뵙습니다.] 일제히 인사하는 사람들. 파면살주와 귀파파, 천살로는 고개만 좀 숙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포권한다.

소수마녀; [부단주님! 귀파파! 천살로!] 다가오며 대충 포권하고

소수마녀; [그동안 노고가 많으셨어요.] 철교를 완전히 건너와서 동굴 입구에 멈춰서고. 도마녀, 검마녀도 멈춰서고

끼릭! 레버를 다시 내리는 복면인

촤아! 쿠쿠쿠! 철교가 다시 늪 아래로 사라지고

파면살주; [노고랄 게 있겠는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소수마녀.; [제가 맡긴 자의 성취가 놀랍다지요?] 동굴 안으로 앞장서서 들어가며

파면살주; [천명 가까운 자객을 길러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 소수마녀와 함께 동굴을 지나면서 대화. 소수마녀의 뒤로는 귀파파와 천살로가 따르고 그 뒤를 독검사랑, 도마녀, 검마녀가 따라온다.

파면살주; [그놈은 불과 반년 만에 지옥십관을 거의 다 통과했는데...] [심지어 같은 조의 놈들까지 단 한명의 낙오자도 생기지 않게 이끌고 있어.]

소수마녀; [제법이로군요.]

파면살주; [만일 혼자였다면 한 두 달 전에 지옥십관을 돌파했을 걸세.]

소수마녀; [지금은 어느 관문에 도전중인가요?]

파면살주; [단주에게 연락을 한 사이에 두 개의 관문을 더 돌파해서 현재 제구관(第九關)에 이르렀네.]

소수마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군요.]

파면살주; [천경실(千鏡室)로 가세.] 앞장서고. 앞쪽에 동굴이 끝나고 있다. 그곳을 지키던 복면인들이 인사하고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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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2

 

휘익!

노대가 바위를 날아 넘어 이매봉 앞에 내려섰다.

[! 숨을 죽인다고 냄새까지 없앨 수 있을 줄 알았나?]

[노대! 진양이오?]

노이와 노삼이 뒤이어 날아왔다.

이매봉은 그들이 하는 짓이 총명한 것 같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찾던 사람이나 잘 찾아봐요. 난 웬 놈도 아니고 도사도 아니니 나를 찾진 않았을 거잖아요.]

노삼이 말했다.

[그건 그렇다. 하지만 넌 우리 이야기를 다 들은 모양이니 죽어야겠다.]

이매봉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이야기를 다 들었으면 죽어야 하는가요? 난 몰랐어요. 미리 알았으면 귀를 막고 듣지 않는건데...]

노대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우릴 놀릴 셈이냐? 어린 계집애가 앙큼하구나.]

이매봉은 여전히 생글거리며 말했다.

[뭐가요?]

노대가 말했다.

[이른 아침에 산정에 왔다는 것도 놀라운데 흥! 이 근처의 눈 위에 네 발자국이 없다는 건 뭘 말하느냐? 적어도 설상비(雪上飛)보다 뛰어난 경신술을 쓸 줄 안다는 얘긴데 순진한 척 시치미를 떼려하다니.]

이매봉이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거참! 하는 수 없군요. 적당히 넘어가고 싶었는데... 하지만 당신들은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들이겠죠?]

노삼이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 요즘 나 다니는 강호의 시러배 잡놈들과는 다르다.]

[호호호호!]

이매봉이 깔깔 웃고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확실히 좀 달라 보여요.]

노삼이 칭찬을 듣고 우쭐하는 표정을 지었다.

노대가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물었다.

[너는 누구냐? 무엇 때문에 여기 있었는지 솔직하게 말해라.]

이매봉이 말했다.

[말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노대가 말했다.

[고통없이 죽여주마. 시체도 손상시키지 않겠다.]

노삼이 말했다.

[만약 말하지 않으면 먼저 두 눈을 파내고 배에다 구멍을 낸 후에 사지를 자르고 송곳을 귀속에 넣어 두개골을 휘저어 죽이겠다.]

노이가 말했다.

[거짓말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휴~ 무서워라.]

이매봉은 정말 겁내는 것처럼 몸을 움추렸다.

노대가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갑자기 이매봉이 울먹울먹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으왕!]

노삼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노대! 울어버리는군요. 우는 아이는 어떻게 달래야하죠? 당장 죽여버릴까요? ]

노이가 말했다.

[우는 아이는 엉덩이를 까서 볼기짝을 두들겨 주는 법이야. 나도 어릴 적에 아버지한테 그렇게 맞았네.]

이매봉이 울면서 말했다.

[난 이제 죽게 되는군요. 흑흑! 너무 슬퍼요. 얼마 살지도 못했는데 죽게 되다니...흑흑! 이건 너무 억울해요.]

노삼이 말했다.

[노대, 이 아이가 억울하다는 군요.]

노대가 말했다.

[죽을 땐 누구나 다 억울한 법이야.]

노삼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죽인 놈들 중에선 억울하다고 한 놈이 하나도 없었는데...]

노삼은 아주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마라! 그렇게 슬퍼할 것 없다. 노부가 직접 죽이면 너도 다른 놈들처럼 억울하지 않고 잘 죽을거다.]

이매봉이 말했다.

[왜 억울하지 않겠어요? 엉엉! 난 억울해요. 정말 억울해요. 당신들 말 다 들었으면 죽어야 된다고 해놓고 다 듣지도 못한 나를 죽이려면 어떻게 해요. 엉엉, 다 들었으면 죽어도 억울하지 않는건데... 엉엉.]

노삼이 아주 당황했다.

[그건... ... 노부가 그렇게 말했었군. 으음... 노부 일백사십 평생에 처음하는 실수다.]

노대가 소리쳤다.

[노삼! 입 다물어라!]

노삼이 말했다.

[하지만 노대, 이 문제는 아무래도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

노삼은 노대의 살벌한 눈초리를 대하고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노대가 말했다.

[너는 누구냐?]

이매봉은 눈물을 닦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소녀의 이름은 아무에게나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노대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네 아비나 사부의 이름은 뭐냐?]

이매봉이 말했다.

[그 또한 아랫사람이 허락없이 함부로 들먹일 수 있는 함자가 못되는군요.]

[방자한 것!]

노대는 섭선을 모아서 찌르는 시늉을 했다.

순간 섭선의 끝에서 칼날같이 예리한 바람소리가 났다.

쉬익!

이매봉은 깜짝 놀랐다.

(무형강기(無形罡氣)!)

몸속의 내공을 뭉쳐서 밖으로 발출하되 그것이 형체는 없으면서도 칼날처럼 예리하고 단단하다면 무형강기라고 부른다.

무형강기를 발할 수 있는 고수는 천하를 통틀어도 몇 명이 나올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드물다.

피하지 않으면 금강불괴라 해도 온전하기가 힘들다.

이매봉은 즉시 옆으로 두걸음 비켜섰다.

한데, 검은 그림자가 눈앞에서 번득하더니 어느새엔가 노삼이 그의 앞을 막아서 있었다.

!

무형강기는 노삼의 가슴에 격중했다.

[!]

노삼이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노대가 버럭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죽고 싶어 환장했어?]

노삼이 말했다.

[노대! 생각해보니 이 아이가 억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소. 게다가 이 아이가 억울하면 우리가 우리 얼굴에 똥칠한 꼴이 되지 않겠소. 죽일 때 죽이더라도 듣고 싶은 말은 다 듣게해줍시다.]

노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삼 말이 옳은 것 같소. 노대 그렇게 합시다. 그래야 죽는 저 아이는 편안하게 죽을 거고 우리도 신용을 지키지 않겠소?]

노대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너희 둘은 완전한 바보 멍청이들이야. 그런다고 죽는 사람이 억울하지 않을 것 같나?]

이매봉이 소리쳤다.

[그럴 것 같아요.]

노이와 노삼이 그것보라는 듯이 노대를 본다.

노대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우린 여기에 있지만 먼곳에서 왔다. 이런 바보같은 짓거리를 하러 온게 아니란 걸 명심해라.]

이매봉이 말했다.

[어디서 왔는데요?]

노대가 말했다.

[바보짓을 하려면 천산(天山)도 족하지. 그 먼곳에서 여기까지 와서 바보짓을 할 건 뭐란 말이냐?]

노삼이 물었다.

[노대! 우리가 정말 바보짓을 한 거요? 억울함을 풀어주고 신용을 지켜 명예를 보전하려 했을 뿐인데...]

이매봉이 맞장구를 쳤다.

[옳아요!]

노대가 이매봉을 흘겨보았다.

이매봉은 슬그머니 노삼의 등뒤에 숨었다.

그녀는 노삼의 몸이 호리호리하긴 하지만 무형강기를 정통으로 맞고도 상처를 입지 않을 정도로 금강불괴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노대가 말했다.

[강호가 험난 한 건 이래서 험난하다. 노인을 조심해야 하고, 어린아이를 조심해야 하고, 특히 이런 젊은 여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얼굴이 예쁘면 더욱 조심해야되지. 내가 너희들을 데리고 강호로 잘 나오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매봉이 말했다.

[당신은 예쁜 여자한테 속은 적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예쁜 여자를 나쁘게 말하겠어요? 세상 사람들은 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데.]

노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대는 절대로 남에게 속지 않는다. 노대도 우리같은 바본 줄 알면 안돼.]

노삼이 말했다.

[맞다. 노대는 바보가 아니지. 우리와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정말 똑똑해. 물론 우리한테 화를 잘 내고 짜증부리지만.]

이매봉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세 사람이 작당해서 나 하나를 괴롭히려 하는군요. 남자가 치사하지도 않아요? 비겁하게 여자 하나를 괴롭히려 하다니. !]

노삼이 머리를 긁으면 어쩔 줄 몰라했다.

[정말 야단났군. 이건 어른이 아이를 괴롭한다는 말에도 해당되고 남자가 여자를 괴롭힌다는 말에도 해당되는군. 역시 노대말씀이 옳아. 여자를 상대하는 건 머리가 아파.]

이매봉이 다그쳐 물었다.

[말해봐요. 당신들은 누구죠? 난 당신들 같은 사람이 있다는 소릴 못들었어요.]

노이가 이매봉을 상대하기로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린 천산삼로(天山三老). 좋은 사람이라곤 할 수 없지만 딱히 나쁜 사람이랄 수도 없다.]

이매봉은 생각했다.

(천산삼로라? 덜 떨어진 것 같은 이들이 천산삼로라구? 세상에나... 멀쩡한 사람들은 다 뭘하고 이 사람들이 천산삼로야? 어쩐지 무형강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고 했더니...)

천산삼로는 오래 전부터 천산에 출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이름이 알려져 왔다.

천산일대의 녹림을 장악하고 있을 뿐아니라 개개인의 무공이 아주 특이하고 고강하여 천산에 갈 때는 항상 그들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해진다.

중원의 유명한 고수들 중에서도 그들에게 낭패를 보거나 살해당한 인물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구십년 전쯤에 무당의 탁월한 고수인 진양진인이 그들의 우두머리와 싸워 이겼다는 말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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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의부의 죽음

 

 

 

사람들이 사색이 되어 물러서는 것을 보며 우주도철은 광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부는 백년을 넘게 살았으나 자식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다. 헌데 이 아이는 정사 양파의 무학을 지녀 정파도 아니고 사파도 아닌 노부와 뜻이 같으니 노부에게 양보해라.]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는 장내로 걸어 들어왔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우주도철도 사람 쟁탈전에 가담하려 하자 내심 크게 놀랐다. 그는 막비강을 힐끗 돌아본 후 우주도철을 향해 포권의 예를 올렸다.

[() 선배님께 그런 마음이 있으시다면 이 아이의 홍복입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가 좋다고 할지 모르겠군요.]

남산의성의 그 마지막 말은 막비강에게 승낙하지 말라는 암시였다.

그러나 막비강은 악불령이 우주도철을 선배님이라 칭하자 얼른 다른 생각이 떠올라 웃으며 말했다.

[이 선배님과 호 선배님 모두 나를 양자로 삼으시려 하니 어느 쪽을 선택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두 분께선 먼저 실력을 겨루어 보십시오.]

백독서생 이량이 대노하여 고함을 질렀다.

[네놈이 감히 이간책을 쓰려 하다니...!]

하지만 우주도철은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으핫하하! 이것은 가장 현명한 방법인데 어찌 이간책이라 하느냐?]

백독서생 이량은 화가 치밀어 얼굴빛이 푸르락붉으락하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누가 너 따위 미친 진사(進士)를 무서워할 줄 아느냐!]

이어 왼손을 확 휘둘렀다.

쏴아아!

그러자 마치 연기 같은 독장(毒瘴)이 그의 소매 속에서 쏟아져 나와 우주도철을 덮어씌워 갔다.

중인들은 이량이 독을 쓰자 분분히 장내에서 멀어졌다. 그 독연기는 피부에 슬쩍 닿기만 해도 온몸이 썩어드는 무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크크! 이런 잔재주는 애들에게나 써먹어라!]

하지만 우주도철은 만면에 경멸의 빛을 가득 머금은 채 입김을 확 불었다.

콰아아아!

그러자 갑자기 한차례 광풍이 일어나 백독서생 이량의 독장을 모두 되날려 버렸다.

[대단하다!]

막비강이 우주도철의 신공에 경탄할 때, 백독서생 이량도 흠칫 놀라더니 곧 십 성의 공력을 돋우어 연달아 장력을 발출했다.

퍼퍼펑! 치치칙!

장풍이 난무하는 가운데 연무독장(煙霧毒瘴)도 그의 소맷자락 속에서 함께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우주도철이 아무렇게나 양팔을 휘젓자 백독서생 이량이 발출한 연무독장은 마치 무형의 담벼락에 부딪힌 것처럼 공중으로 상승했다. 그러다가 이내 모두 백독서생 이량의 머리 뒤로 떨어졌다.

백독서생은 흠칫 놀라다가 재차 독분을 날려 우주도철을 공격했다.

막비강은 두 절정고수의 대결을 보며 내심 곤혹을 금치 못했다.

(우주도철의 공은 백독서생보다 훨씬 고강한 것 같은데 왜 공세를 취하지 않을까?)

그는 우주도철이 여유 만만하게 상대방의 흉맹한 공세를 파해하는 것으로 보아 백독서생 이량을 죽이려면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임을 알았다. 하지만 우주도철이 수비만 하고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무림에서 보기 드문 격전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을 때였다.

스팟!

[!]

막비강은 갑자기 뒤통수로 한 줄기 강맹무비한 경풍이 엄습해 옴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날렸다.

[쥐새끼 같은 놈!]

동시에 우주도철이 고함을 버럭 지르며 전광석화같이 일지를 퉁겼다.

[크아악!]

다음 순간 한 줄기 경풍이 막비강의 몸 옆을 스쳐 지나가며 외마디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바닥에 쓰러졌다. 막비강이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소면호가 양다리를 허벅지에서 잘린 채 선혈을 샘물같이 쏟아내고 있었다.

우주도철이 경멸의 냉소를 날렸다.

[! 너 같은 피라미가 감히 노부 앞에서 기습을 가하다니. 만약 노부의 지난날 성격 같았으면 네놈은 뼈도 찾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소면호도 절정고수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우주도철의 무공을 채 일초도 받아내지 못하자 구경하던 군호들의 등골로 식은땀이 흘렀다.

(죽어 마땅한 영감 같으니...!)

막비강은 소면호가 자신을 암산하려 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는 소면호가 참변을 당하자 마음이 약해졌다. 비록 그것이 음모가 숨겨진 가르침이었지만 어쨌든 소면호는 지난 이십여 일간 자신에게 무예를 전수해 준 정이 있지를 않은가?

해서 막비강은 급히 우주도철 앞으로 달려가 포권하며 말했다.

[노선배님에게 상세를 치료하는 약이 있습니까?]

우주도철이 어리둥절하며 반문했다.

[너는 저자를 살릴 생각이냐?]

[다리가 잘린 징벌만으로도 충분하니 목숨만은 살려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좋다. 너의 체면을 봐서 그에게 만령단(萬靈丹)을 한 알 주겠다.]

우주도철은 말을 끝낸 후 주머니 속에서 단약을 한 알 꺼내어 막비강에게 건네주며 사용 방법도 말해 주었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의 착한 마음을 보고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군호들이 막비강이 소면호의 상세를 치료하는 장면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

문득 한 명의 흑의노도(黑衣老道)가 영롱탑의 상층부에서 사뿐히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마치 유령처럼 소리 없이 군호들의 후면에 도착했다. 그자는 바로 천하오대기인 중의 또 다른 한 명인 오봉도인이었다.

그사이에 막비강은 소면호의 치료를 끝냈다.

헌데 치료가 끝나는 순간 소면호는 갑자기 쌍장으로 땅바닥을 짚어 몸을 굴려 사도 인물들 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비급을 얻고 싶으면 저 어린 녀석을 놓치지 마라! 저놈이 천면신룡이다!]

[뭐라고?]

[천면신룡이 저 애송이라고?]

장내는 삽시에 벌집을 쑤셔놓은 격이 되었다.

막비강은 신분을 간파당하는 순간 안색이 일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파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정파 인물들도 자기를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면호가 배은망덕하게 고함을 지르자 급히 몸을 솟구쳐 장권 밖으로 질주했다.

바로 그때였다.

[섰거라!]

갑자기 인영이 번쩍하더니 한 명의 흑의노도가 그의 면전을 막아섰다. 그와 함께 한 줄기 경풍이 막비강의 가슴을 향해 뻗어 왔다.

막비강은 본능적으로 일장을 격출하여 반탄력을 이용하여 옆으로 피하려 했다.

퍼펑!

[!]

하지만 상대방의 장력이 너무 강맹하여 막비강은 연달아 다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간신히 몸을 가눈 막비강은 상대방이 바로 천하오기 중 한 명인 오봉도인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어 그는 급히 방향을 바꿔 사력을 다해 도주하려 했다.

[아이야, 겁먹을 것 없다!]

화라라락!

그때 말소리와 함께 우주도철이 날아와 막비강을 옆으로 끌어당겼다. 이어 그는 오봉도인을 바라보며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이 잡()도사야! 감히 노부의 양자를 괴롭히려 하다니....]

오봉도인도 음산한 눈을 빛내며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다른 사람은 너 늙은 도철을 무서워하겠지만 빈도는 안목에도 두지 않는다.]

[잡도사! 감히 노부에게 덤빌 생각이냐?]

[네가 무엇이 두려워 덤비지 못한단 말이냐?]

막비강은 강적에게 포위당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우주도철에게 의지해야 무사히 빠져 나갈 희망이 있음을 알았다. 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불렀다.

[의부(義父)! 우리는 빨리 여길 떠납시다.]

그의 의부라는 말에 우주도철은 크게 기뻐하며 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 아이야, 조금만 기다려라. 우리가 가지 않아도 이제는 아무도 감히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오봉도인이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장내로 걸어 들어왔다.

[으핫하하! 늙은 도철아! 너무 큰소리치지 마라! 그 어린 녀석을 데려가려면 우선 빈도의 승낙부터 받아야 한다.]

우주도철은 백미를 치켜 올리며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가 지옥에 가고 싶다면 그건 매우 쉬운 일이다.]

오봉도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주위의 군호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수고스럽지만 여러분은 증인이 되어 주시오.]

이때 우주도철도 막비강에게 나직이 말했다.

[얘야, 내가 이 잡도사를 황천으로 보내 버릴 테니 뒤로 물러서거라.]

군호들은 천하오대기인에 속하는 두 인물이 싸움을 시작하면 치열하기 짝이 없을 것임을 알고 급히 뒤로 물러섰다.

비록 강적이 면전에 버티고 있지만 우주도철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오봉도인을 보며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

[잡도사! 노부는 네게 삼 초를 먼저 양보하겠다.]

오봉도인은 화가 치밀어 눈에서 분노의 화염을 발산했다.

[늙은 도철아, 양보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는 노갈을 터뜨리며 일장을 격출했다.

콰르르르!

그의 이 일장은 보기에는 조금도 힘이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장경이 다가들자 광풍이 노도같이 휘몰아치고 주위 십 장 이내는 온통 차가운 냉기로 가득 찼다.

우주도철은 몸을 뽑아 올려 상대방의 머리 위를 뛰어넘더니 오 장 뒤에 내려선 후 웃으며 말했다.

[잡도사야, 너는 삼십 년간 열심히 공력을 연마했는데도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 같구나.]

오봉도인은 우주도철이 머리 위로 뛰어넘는 것을 보고 재차 장력을 발출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신법이 너무 쾌속하여 격중되지 않았다. 그는 우주도철의 이런 행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몸을 돌림과 동시에 오른팔을 휘둘렀다.

!

한 줄기 광염이 모래먼지를 공중으로 높이 솟구치게 하여 십여 장 밖에 서 있던 군호들의 의삼까지도 날려온 모래먼지에 맞아 무수한 구멍이 뚫렸다.

우주도철은 막 바닥에 내려섰을 때 오봉도인의 장경이 노도같이 휘말려 오자 할 수 없이 재차 몸을 뽑아 올려 강맹한 장풍을 발 밑으로 스쳐 가게 했다.

오봉도인은 교묘한 초식으로 상대방의 신법을 둔화시킨 후 즉시 절예를 전개하여 쌍장으로 쉴새없이 맹공을 가했다.

우주도철도 더 이상 상대방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공중으로 오르내리며 장세를 예측하기 어려운 각도에서 발출했는데 이상한 것은 그가 발출하는 장력은 바람도 일지 않고 경력도 없어 오봉도인의 강맹한 강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두 고수는 눈 깜빡할 사이에 한 덩어리가 되어 누가 누군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막비강은 전신의 공력을 눈에 모아서야 간신히 두 사람을 분별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한편 기뻐하며 또 한편 내심 우려를 금치 못했다.

이때 소면호가 갑자기 또 고함을 질렀다.

[누구든지 청구단서를 취득하려면 먼저 저 어린 녀석부터 생포하여....]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독서생 이량 등 사파의 인물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막비강에게로 덮쳐 왔다.

[멈추시오!]

남산의성 악불령이 급히 고함을 지르며 분분히 장력을 발출하여 그들의 행동을 제지시키려 했다.

[낄낄낄....]

헌데 갑자기 음산한 괴소 소리와 함께 흑영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콰쾅!

[으악!]

[크아악!]

이어 몇 차례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군호들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보니 막비강을 포위 공격하던 사람 중 네 명이 상체가 박살이 나 죽어 있었다.

[으하하하! 내 아들은 노부가 데려간다!]

쏴아아!

막비강은 이미 우주도철에게 구출되어 질풍같이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서랏, 미친 늙은이야!]

오봉도인은 화가 치밀어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한 채 우주도철을 추격했다.

오대기인 중의 두 고인은 삽시에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은 그저 그들이 사라진 곳을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우주도철은 오봉도인이 틀림없이 추격해올 것을 알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는 주로 울창한 수림과 계곡 등 적이 쉽게 따라오지 못하는 장소만 골라 질주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오봉도인을 떨쳐 버렸다.

어느덧 달이 서산으로 기울고 동녘에는 일출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우주도철은 밤을 새워 질주했는지라 비록 천하오기 중의 한사람이지만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만 쉬었다 가자!]

이윽고 그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곧 자신이 어느덧 천대산(天臺山)에 도착했음을 알고 비로소 막비강을 내려놓고는 땀을 씻었다.

[노부는 가까스로 너를 구출했구나. 그러나 정사 양파의 인물들은 청구단서를 취득하기 위해 불원천리 여기까지 추격해 올지도 모른다.]

우주도철의 안색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엄숙해졌다.

[노부는 천하를 수십 년간 종횡하여 이제 죽을 날도 머지 않았으니 청구단서 따위에는 관심 없다. 그러니 너는 행여 내가 나쁜 마음을...!]

헌데 우주도철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낄낄낄...!]

갑자기 수림 속에서 소름을 오싹 끼치게 하는 괴소 소리가 들리지를 않는가?

그 웃음소리를 들은 우주도철은 안색이 일변했다.

[어서 받아라! 강적이 가까이 왔다!]

그는 품속에서 조그만 보따리를 꺼내어 급히 막비강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내가 저자와 싸움을 시작하면 너는 숲 속으로 숨어야 한다.]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막비강도 사태의 엄중함을 깨달았다. 그는 보따리를 받아 품속에 넣으며 급히 물었다.

[의부께선 함께 가시면 안 됩니까?]

[저자는 나와 함께 천하오기 중에 드는 절정고수다. 평시였다면 두렵지 않지만...!]

우주도철은 말을 하다 말고 청색 인영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일으키며 웃음을 머금었다.

[귀화상(鬼和尙)!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소?]

막비강도 고개를 들어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자는 대머리가 마치 거울처럼 번뜩이는 화상이었다. 몸은 마른 대나무같이 야위었으며 청색 승포를 입었는데 움푹 들어간 눈동자에서 형형한 녹광(綠光)이 발산했다.

스스스!

[킬킬킬!]

그 사람은 몸을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미 면전에 도착했다. 그는 우주도철의 일 장 전면에서 걸음을 멈추고 막비강을 힐끗 돌아본 다음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형은 현명한 사람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사실 빈승도 이 어린아이 때문에 찾아왔소. 하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직 상의할 여지가 있소.]

우주도철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귀화상! 당신은 무엇을 상의하려는지 말해 보시오.]

[빈승은 당신이 이 아이를 양자로 맞이했음을 알고 있으니 뺏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소. 그러나 잠시 빌려주시오. 비급만 취득하면 곧 당신에게 돌려주겠소.]

[만약 노부가 빌려주지 않겠다면?]

[빈승의 말은 절대 신용이 있으니 빌려주지 않을 리 없지요.]

[미안하지만 노부는 빌려주지 못하겠소.]

[당신은 이 아이를 업고 밤새도록 달렸는데 빈승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소?]

그 사람의 이 말은 우주도철의 약점을 바로 찌른 것이었다. 그러나 우주도철은 천하오기 중의 한사람인지라 쉽게 굴복할 리 만무했다.

[! 기껏해야 두 사람 모두 패하고 부상을 입을 것이오.]

[좋소. 정 그렇다면 빈승은 당신을 저승으로 먼저 보내 주겠소.]

[받아라!]

우주도철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함을 지르며 일장을 격출했다.

꽈르르릉!

그는 비록 밤이 새도록 달렸지만 역시 오기 중의 인물은 비범하여 이 일장에 돌 조각이 날고 세찬 강풍이 일어났다.

귀화상은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옆으로 삼 장 가량 미끄러져 우주도철의 강맹한 일장을 피한 후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흐하하하! 노형의 일신의 음유(陰柔)한 무학이 강맹한 장세로 바꼈군. 이것은 여력이 다했다는 증거이니 빈승도 물에 빠진 개에게 돌을 던지고 싶지 않소.]

파앗!

그자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번개같이 몸을 날려 막비강의 손목을 향해 잡아갔다.

막비강은 귀화상의 신법이 이렇게 쾌첩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눈앞에서 인영이 번뜩함을 느끼는 순간 이미 상대방에게 왼쪽 완맥을 붙잡혔음을 깨달았다.

퍼펑!

그러나 막비강은 진기를 한 모금 들이켜 전력을 다해 일장을 격출했다.

[놓아라!]

동시에 우주도철도 고함을 지르며 덮쳐 와 귀화상의 배심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

귀화상은 막비강의 의지가 이렇게 강한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해 앞가슴에 일장을 맞고 말았다. 또 우주도철의 일장이 배심을 향해 엄습해 오자 할 수 없이 몸을 솟구쳐 옆으로 피했다.

[! 함부로 날뛴 벌이다!]

우둑!

하지만 그자는 몸을 솟구치면서 막비강의 손목을 힘껏 비틀었고 그 바람에 막비강의 손목뼈가 그대로 빠졌다.

[아얏!]

콰당!

막비강은 격렬한 통증을 참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기절했다.

[이 악랄한 땡추!]

우주도철은 대로하여 필생의 공력을 다해 공격을 가했다.

귀화상은 막비강을 끌며 싸우려니 행동하기가 불편했던지 막비강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오냐! 살고 싶지 않다면 빈승은 살수를 펼쳐내는 도리밖에 없다.]

콰콰쾅!

우주도철은 상대방을 쫓아 버리고 막비강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쉬지 않고 맹공을 계속 가했다. 그리하여 오대기인 중의 두 사람은 깊은 산속에서 생사존망의 치열한 혈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동쪽 하늘에서 둥근 해가 떠오르고 아침 안개를 깨끗이 쓸어 갔다.

[! !]

[으음!]

천하오기의 두 고인은 기진맥진하여 강호의 일반 무사들보다 더욱 무력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손을 멈추지 않고 천천히 초식을 주고받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막비강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지만 왼쪽 손목에서 전신으로 퍼지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얏!]

그의 비명 소리에 혈전을 벌이던 두 고수는 정신을 번뜩 차렸다.

[받아랏!]

[죽어랏!]

퍼펑!

두 사람 중 한 명은 막비강을 탈취하기 위하여, 다른 한 명은 막비강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서로 상반된 심리 상태에서 동시에 고함을 지르며 각각 여력을 다한 일장을 발출했다.

퍼펑!

[으아아악!]

[!]

우렁찬 폭음과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두 개의 인영이 각자 뒤로 굴러 나갔다. 그중 하나는 그대로 뒤쪽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버렸고 다른 하나는 막비강의 곁으로 굴러와 그의 몸에 부딪혀 비로소 멈추었다.

[와악!]

굴러온 인물은 검은 피를 한 모금 토하더니 더 이상 꼼짝하지 않았다.

[의부!]

막비강은 통증을 참고 고개를 돌려보다가 깜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곁으로 굴러온 사람은 바로 우주도철이었다. 그리고 절벽으로 떨어진 자는 귀화상이었다.

막비강은 주위에 귀화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우주도철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러나 우주도철의 맥박은 완전히 멎었으며 가슴을 만져보니 심맥(心脈)도 이미 끊어져 있었다.

[크흐흑! 의부! 저 때문에 돌아가시다니...!]

막비강은 우주도철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비록 만난 지 반나절밖에 안 되었으나 우주도철은 진심으로 그를 위해 주었고, 결국 그를 지키기 위해 강적과 동귀어진한 것이다.

한동안 서럽게 울던 막비강은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귀화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혹시 부상을 입고 도주한 것이 아닐까? 만약 상대방이 상세를 치료하고 되돌아온다면 나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비강은 눈물을 거두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손목뼈가 부러진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빠진 것임을 알았다. 이에 그는 입술을 깨문 채 골절을 원상대로 끼워 맞췄다.

그리고 땅을 파서 일대기인 우주도철의 시체를 매장한 후 공손히 절을 한 다음 수림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우주도철의 조그만 보따리 속에는 한 권의 연무비록(練武秘綠)과 몇 알의 만령환이 들어 있었다.

막비강은 백약에 정통한지라 만령이라는 두 글자를 보는 순간 곧 독을 제거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성약(聖藥)임을 알고 한 알을 복용했다. 그러자 잠시 후 손목의 통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상처가 치료되자 막비강은 연무비록을 펼쳐보았다.

우주도철의 연무비록에는 기공(氣功), 경공(勁功), 장공(掌功) 등 각가지 정묘한 절예가 기재되어 있었다. 도철식혼장(饕餮食魂掌), 우주일기공(宇宙一氣功), 일지참교룡(一指斬蛟龍)등의 절기는 하나 하나가 그 방면에서 짝을 찾아보기 힘든 빼어난 것들이다.

막비강이 이제껏 익힌 염라철장, 무협제원, 헌원여호, 남산의성등의 무공도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는 뛰어난 절기들이다. 하지만 우주도철의 무공을 접한 막비강은 염라철장 등의 무공이 너무도 초라해보였다.

(과연 하늘밖에 하늘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로구나!)

지금까지 익힌 무공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절기들은 막비강을 흠뻑 매료시켰다.

우주도철의 여러 무공들 중에서 막비강의 시선을 가장 잡아끈 것은 경신공부인 팔보간섬(八步間閃)이었다. 벼락 한 번 번쩍일 동안(間閃) 여덟 걸음(八步)을 간다는 이 경신술은 빠르고도 신묘했다. 막비강은 우주도철이 이 경신술로 같이 천하오기에 드는 오봉도인을 자유자재로 농락하던 일을 떠올렸다.

막비강은 비록을 한 차례 훑어보고 덮은 뒤 생각에 잠겼다.

(우주도철은 고귀한 생명을 희생해 가며 나를 구해 주었고 또 이런 절기들까지 남겼으니 그가 정파이든 사파이든 내게 베푼 은혜는 하해와 같다. 나는 기필코 그분의 피맺힌 원수를 갚고 말겠다.)

그는 귀화상이 이미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막비강은 다시 청구단서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같이 고수가 구름처럼 몰려 있는 경지하 강변에서 청구단서를 취득하기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비급이 숨겨진 곳을 찾을 수 있는 날이 정월 대 보름날 밤이냐, 아니면 팔월 중추절 밤 삼경이냐 하는 것이었다.

만약 중추절 삼경이라면 어젯밤에 많은 고수들이 경지하 물 속을 샅샅이 뒤졌을 테니 청구단서는 이미 어떤 고수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또 만약 정월 대보름이라면 아직도 석 달이 남았으니 그동안 우주도철의 절학을 연마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생각에 생각을 굴린 끝에 지금 경지하에 가 보았자 아무 소용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그는 근처 산 속에 한 채의 모옥(茅屋)을 짓고 그곳에 거주하며 우주도철의 절학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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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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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종남산(終南山)> 아주 깊고 험한 산. 산중에서 연기가 치솟는다

산중의 어느 계곡. 지면에서 타원형으로 푹 들어간 직경 1키로쯤의 계곡인데 안쪽에서 연기가 치솟는다. 마치 화산같고.

계곡 위 절벽에 비석이 서있는데 <毒龍谷 亡入者死>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문득

[우우우!] 계곡 안쪽에서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화악! ! 연기를 뚫고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치솟는 인물. 무림맹 사신장 중 용신장인데. 옆구리에는 호신장이 끼워져 있다. 두 사람 모두 코 아래를 가리는 방독면 같은 것을 얼굴에 쓰고 있고.

화악! 포물선을 그리며 까마득히 치솟는 용신장. 하지만

휘청! 하는 용신장. 이어

쿨럭! 피를 토하고

쐐액! 추락하는 용신장. 절벽쪽이다.

확 다가오는 절벽 윗부분

눈 부릅뜨는 용신장

휘릭! 허공에서 몸을 뒤집고

콰당탕! 몸을 뒤집은 덕분에 충격을 완화하며 나뒹구는 용신장. 그 바람에 허리춤에 끼고 있던 호신장을 놓치고

털썩! 나뒹구는 두 사람

용신장; [... 제기랄...] ! 얼굴에 쓰고 있던 방독면 같은 것을 뜯어내며 일어난다. 입가로 피가 흐른다. 용신장의 얼굴은 18 년전보다 주름이 조금 늘고 반백이 된 것 외에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배경으로 나레이션 <-무림맹 사신장의 일인 용신장(龍神將)>

용신장; [()의원이 마련해준 방독면도 독룡곡(毒龍谷)의 지독한 독기에는 소용이 없었다.] 헉헉 대며 호신장에게 기어가고

! 호신장이 얼굴에 쓰고 있던 방독면도 뜯어내고.

드러나는 호신장의 얼굴. 입과 코로 피를 흘리며 기절했다. 호신장의 얼굴 역시 18년 전에 비해 크게 변하진 않았고 흰머리가 많아졌다. 그 배경으로 나레이션. <-사신장중 호신장(虎神將)>

용신장; [제발 이 해독약은 효과가 있어야할 텐데...]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유리병을 하나 꺼내고. 유리병에는 걸죽한 액체가 들어있다.

! 약병 뚜껑을 따고

호신장의 코를 한손으로 잡는 용신장

벌어지는 호신장의 입

쪼르르! 그 입에 약을 부어주는 용신장

절반쯤 부어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마시는 용신장. 이어

용신장; [허억!] 털썩! 호신장 옆에 쓰러지고.

파삭! 용신장이 놓쳐서 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은 깨지고

용신장; (현기증이 급격히 사라지는 걸 보면 진의원이 만든 해독약은 효험이 있는 것 같다.) 헐떡이며 안도하고

[으으으!] 호신장이 신음하고. 돌아보는 용신장

호신장; [허억! !]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뜨고

용신장; [정신이 드는가?] 억지로 일어나 앉고

호신장; [... 독룡곡은 빠져나온 건가?] 헐떡이며 하늘을 보고

용신장; [진의원의 방독면이 독기의 상당 부분을 정화시켜준 덕분이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방복면을 보고

용신장; [그렇긴 해도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나 역시 자네처럼 정신을 잃었을 걸세.] [그럼 독심귀의(毒心鬼醫)에게 사로잡혀서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신세가 되었겠지.]

호신장; [악귀같은 늙은이...] 이를 부득

호신장; [천대받던 제 놈을 맹주님께서 그토록 아끼고 우대해주었거늘... 은혜를 원수로 갚기나 하고...] [이래서 사마외도와는 상종을 하면 안되는 거야.]

용신장; [그 늙은이에 대한 소문은 무림맹의 형당 당주로 영입되기 전부터 안 좋긴 했네.] 쓴웃음

용신장; [자신이 만든 독을 시험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생체실험을 한다는 말도 돌았으니 말일세.]

용신장; [하지만 마교의 악랄한 독공에 대처할 수 있는 실력자는 그 늙은이 외엔 없었지.] [그래서 맹주님도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중용하신 것이고...]

호신장; [그러다가 어의(御醫) 출신인 진무륜(陳無崙) 노사가 맹주님의 전담 의원으로 영입되자 배신을 때린 거지.] 억지로 일어나 앉고

용신장; [독심귀의 딴에는 맹주님의 병환을 다스릴 수 있는 건 자신 밖에 없고, 당연히 위세를 부려도 된다고 생각했을 걸세.] 비틀거리며 일어나 절벽 아래를 보고

용신장; [하지만 진의원이 맹주님의 병환을 돌보게 되자 그같은 자신감이 배신감으로 돌변한 게야.] 절벽 아래를 살피지만 연기가 짙어서 잘 안보인다. 다만 연기 속에 건물 같은 형상이 흐릿하게 보이고

호신장; [배배꼬인 성격의 그 늙은이는 결국 본맹이 보관하고 있는 마교의 보물과 함께 상파(祥芭)를 납치해서 독룡곡으로 숨어들어갔지.] 억지로 일어서고

용신장; [그 옛날 만년 묵은 독룡(毒龍)이 신라 출신의 신선 김가기(金可紀)에게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독룡곡...] 호신장과 함께 서서 독룡곡을 내려다보고

용신장; [독룡곡의 독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은 당금 무림에서 독심귀의 밖에 없을 걸세.] [그걸 알기에 독심귀의는 독룡곡으로 숨어들어갔을 테고...]

호신장; [진의원 말대로라면 마교에 전해지는 피독주(避毒珠)만이 독룡의 독을 해독할 수 있다던데...]

용신장; [피독주는 마교가 멸망할 때 종적이 묘연해졌으니 기대할 수 없고...]

용신장; [더 늦기 전에 상파를 구해야할 텐데 난감하군.]

호신장; [상파는 독심귀의, 그 악귀가 원수로 여기는 진의원의 양녀...] [무사하길 바라긴 어렵겠지?] 눈치 보며

용신장;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인 건 분명하네.] [그저 죽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지.] 끄덕이며 한숨

호신장; [진의원이 양녀를 구해달라며 만들어준 방독면과 해독약도 소용이 없으니 큰일이로구만.]

용신장; [이제 신녀문 출신인 운신장의 술법을 기대해볼 수밖에는 없게 되었네.] [술법의 종가인 신녀문의 술법이라면 공간을 도약한다든지 해서 뭔가 방법이 있을 테니...] 심각한 표정

호신장; [하지만 운신장은 현재 중원에 없지 않는가?]

용신장; [무산에 급한 볼일이 있다는 전갈을 남기고 종적이 사라졌다는군.]

호신장; [무산에 있는 신녀문은 오래전에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되었는데...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용신장; [남의 사문 일이니 자세히 물어볼 수도 없는 일...] [그저 운신장이 빨리 일을 마치고 무산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네.] 독룡곡을 내려다보고. 헌데

 

#135>

짙은 연기에 덮여있는 독룡곡 내부. 상당히 큰 연못이 있고 그 연목 가운데에 정자 같은 건물이 한 채 서있다. 3층 건물인데 그 건물 일대만 연기가 없다. 연기가 뭔가에 밀려나는 모습. 독룡곡 내부는 황량하지만 연못 주변에는 각가지 풀과 꽃이 피어있다.

삼층 건물의 삼층 창가에 망원경을 세워놓고 위를 보고 있는 노인. 독심귀의다. 처음 나왔을 때보다 더 늙고 추악하게 변해있다.

망원경에 보이는 화면. 연기 너머로 절벽 위쪽이 보이는데 그곳에 용신장과 호신장이 서서 내려다보고 있다.

독심귀의; [클클! 닭 쫓던 개꼴이라는 게 네놈들의 지금 꼬락서니를 일컫는 것이겠지.]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웃고

독심귀의; [사신장이 아니라 섭장천 본인이 온다고 해도 절대 여기까지 이르진 못한다.]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독심귀의; [결국 시간은 노부 독심귀의 편인 것이다.] 돌아보고

독심귀의; [진무륜의 양녀인 저년을 통해 천약탈태술(千藥奪胎術)에 성공하기만 하면 노부는 천하무적이 될 테니까.] 건물 안쪽을 보고

! 건물 내부는 실험실 분위기. 중앙에 하얀 돌로 만든 침대가 있고 그곳에 잠옷 차림인 절세미녀가 누워있다. 목과 팔 다리에 족쇄가 채워져 돌침대와 한 몸이 된 그 여자는 바로 진상파다. 헌데 침대 주변에는 수 십개의 사람 키만안 쇠막대들이 서있고 쇠막대마다 링겔 병같은 것이 걸려있으며 그 병에 든 액체들이 가는 관을 통해서 진상파의 몸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136>

<-무산> . 신녀문의 폐허. 하늘에는 달

<-신녀문> 신녀문 폐허의 어느 건물. 아담하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았다.

건물 내부의 침실. 두 개의 침대. 이진진과 진삼낭이 자고 있고

[으으...] 가위에 눌리는 이진진. 식은땀을 흘리고.

단양의 포구에서 단지회 건달들에게 포위당한 상황을 꿈으로 꾸고 있는 이진진

이진진; (안돼... 안돼!) 비지땀을 흘리는데

! 투명한 여자의 손이 이진진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이진진; [... 엄마?] 헐떡이며 눈을 뜨고

! 이진진의 이마를 쓰다듬던 투명한 손이 물러나고

눈을 뜨며 옆을 보는 이진진.

옆 침대에는 진삼낭이 곤하게 자고 있고.

이진진; (... 어떻게 된 거지? 어머니는 곤히 주무시고 계시는데...) 잠든 진삼낭을 보며 의아해하고

이진진; (방금 전에 누가 내 이마를 쓰다듬은 걸까?) 헐떡이며 생각하고

이진진; (꿈이라고 하기에는 손길이 너무도 생생했는데...) 생각하며 주변 둘러보고. 직후

! 이진진의 침대 옆에 서있는 어떤 여자. 운신장을 닮았는데 몸 전체가 반투명하여 형상이 뚜렷하지는 않다. 선녀같은 옷을 입었고 눈이 빛난다.

이진진; (...유령!) + [으으으...] 달달 떨고

스윽! 고개를 숙여서 무어라 말을 하려는 유령

이진진; [아아아악!] 자기도 모르게 비명 지르며 이불을 끌어안고

진삼낭; [진진아!] 깜짝 놀라 깨어나고

 

#137>

[!] 신녀문 폐허 위로 날아오다가 놀라는 여자. 운신장이다. <아아아악!> 멀리서 이진진의 비명이 들리고

 

#138>

다시 이진진과 진삼낭이 자는 건물

이진진; [엄마!] 비명 지르며 진삼낭의 침대로 도망쳐오고

진삼낭; [왜 그래? 무슨 일이니?] 일어나서 이진진을 끌어안고

이진진; [저기... 저기 유령이...] 진삼낭의 품에 안겨 자기 침대쪽을 손가락질하며 달달 떨고. 하지만

이진진의 침대 쪽에는 아무것도 없다.

진삼낭; [유령이라니... 아무것도 없는데...] 기웃

이진진; [아니에요! 분명 저기 무언가 있었어요.] [어떤 여자가 제 이마를 쓰다듬었다구요.] 달달 떨면서 울고

진삼낭; [진정하거라. 아마 가위에 눌려서 헛것을 본 겔 게다.]

이진진; [그렇지 않아요. 저 가위 눌린 게 아니에요.] 고개 젓고

이진진; [여자같은 유령이 제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구요.] 울고. 바로 그때

[따님 말이 맞아요. 가위에 눌린 게 아니랍니다.] 달칵! 문이 열리며 어떤 여자가 방안으로 들어온다. 물론 운신장이다

이진진; [!] 비명 지르며 진삼낭의 품에 얼굴 묻고. + 진삼낭; [!] 역시 놀라며 이진진을 끌어안는데

운신장; [저희 신녀문의 선조중 한분께서 진진이를 어여삐 여기신 것 같군요.] 방안으로 들어서며 웃으며 말하고.

진삼낭; [... 소저는 뉘신데...] + [!] 묻다가 기겁하고

<무림맹 사신장 중의 운신장!> 다가오는 운신장의 모습 배경으로 경악. 운신장은 18년 전과 모습이 변하지 않아서 진삼낭이 한눈에 알아봤다. 대신 진삼낭은 어린 소녀였다가 아줌마가 되어서 운신장은 진삼낭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다.

진삼낭; (저 여자가 어떻게 여기에...) 긴장하며 덜덜 떨 때. + 이진진; [!] 흠칫! 하며 그런 진삼낭의 품에서 고개 들고

운신장; [내가 찾아오는 게 늦었지?] [내가 있던 곳에서 이곳까지는 오천여리가 넘어서 힘껏 달려왔는데도 열흘이나 걸렸단다.]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운신장

이진진; [... 선녀님?] 운신장을 알아보고 눈 치뜨고. 진삼낭은 운신장에게 정면 얼굴 보여주지 않으려 하며 곁눈질하고

운신장; [그래 나란다.] ! 미소 지으며 이진진이 누웠던 침대에 앉고

진삼낭; (운신장의 얼굴은 주안술 덕분인지 십팔 년전과 똑같다.) + [선녀님이시라면 혹시...] 모르는 척 묻고

이진진; [어머니! 이분이 바로 제게 몽운연형호를 주신 선녀님이세요.] 안도하며 진삼낭에게서 떨어져 일어나며 진삼낭에게 운신장을 소개하고

진삼낭; (반면 아줌마가 된 지금의 내게서 열일곱 살 때의 모습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쇤네, 은인께 인사 올리옵니다.] 일어나며 고개 조아리고

운신장; (이 여자가 진진이의 어머니일 텐데...) + [과례는 거두세요.] 목례하고

운신장;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다.) + [저도 진진이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서 몽운연형호를 준 것뿐이랍니다.] 다가온 이진진의 손을 잡으며 말하고

이진진; [제가 선녀님께 도움이 될 일이 있는지요?]

운신장; [있고말고!] 미소

운신장; [당금의 천하에서 진진이 너 아니면 해줄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단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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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는 가까이 있으나 먼 곳에서 왔느니

 

 

 

진양진인은 현천록이 초상감각에 아주 빨리 눈 뜨는 것을 보고 충분히 가르칠 만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천록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어 버렸다.

양의신공의 구결을 진양진인이 풀어주기 시작하자마자 즉시 그 의미를 해득해버린 것이다.

양의신공같은 상승무공은 연공도 연공이지만 깨달음이 주가 된다.

특히 양의신공은 그 속에 여러 가지 무공의 비결을 담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양의신공에는 마음을 두 개로 나누어 사용하는 양심공이 포함되어 있다.

무당에서 원로들 중에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없다.

그러나 양의신공 속에 있는 양심공의 구결이나 그 밖의 묘용들을 깨달아 익히는 자 또한 극히 드물다.

현천록이 양의신공의 구결을 완벽하게 암송해낼 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선천지기(先天之氣)를 이끌어내 양의신공의 바탕으로 만드는데는 진양진인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자넨... 정말 신비하군. 마치 물을 담는 그릇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넨 양의신공을 배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네.]

현천록은 내공을 쌓기 위해서 흔히 하는 토납(吐納)과 축기(蓄氣)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보통 내공을 닦을 때는 천지의 기운을 몸속에 받아들여 쌓고 키워 나가며 더욱 정화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처음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있는 선천지기를 이끌어내게 되면 그 순수함을 바탕으로 크지는 않아도 아주 뛰어난 내공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진양진인도 그런 경우가 있다는 것을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다.

현천록이 양의신공의 구결을 해득하면서 선천지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되는 것을 보는 그의 감회는 아주 특별했다.

양의신공은 도가의 무공이니 선천지기를 중시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진양진인은 어쩌면 양의신공을 다른 무공을 배운 후에 익혔기 때문에 선천지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천록이야 말로 진짜 양의신공을 익히게 되는 것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진양진인은 양의신공의 구결을 모두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양의신공은 이미 현천록의 무공이 되어 있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내력을 손으로 모아서 바위를 쳐보게.]

현천록의 손이 바위에 닿자 밀가루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

가볍게 돌가루가 날린다.

현천록이 말했다.

[이정도면 얼마나 배운거죠?]

진양진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주 잘했네. 아마도 전설 속의 그 창허진인도 자네보다는 못했을걸세. 세상에 기재는 따로 있었네 그려. 그 정도면 다른 사람의 삼십년 공력에 못지않네.]

현천록은 빙그레 웃었다.

진양진인이 무슨 생각에서 무당파의 최고 신공인 양의신공을 가르쳐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기를 몸 속에 지니게 됐다는 사실이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이제 자네가 내 몸에 양의신공을 조금 주입해서 막힌 혈도를 뚫어주게. 현기와 명문, 좌협, 천중, 선기, 협곡이네. 아니아니! 자네는 혈도를 아직 모르겠군. 총명하니 금방 배우게 될걸세.]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도장께선 우리가 내기했다는 걸 잊기라도 한 것 같군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잊을 리가 있겠나? 하지만 자네가 지게 될걸세. 일단 내말에 따르기로 했으니 내가 시키는대로 따르게.]

현천록은 진양진인이 자기의 몸을 일일이 짚어가며 혈도의 정확한 위치와 묘용을 가르쳐 주는 것을 들었다.

[이제 자네 손으로 직접 자네 혈도들을 확인해보게.]

진양진인이 아주 지친 듯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현천록은 자기의 몸이 마치 거미줄에 휘감긴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손으로 혈도를 확인해나가는 곳마다 온 몸을 거미줄같은 것이 휘감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삼백육십개의 혈도를 다 확인하고 났을 때는 마치 몸밖에서 몸을 보는 것처럼 자기의 몸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미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씩 끊어지기도 하고 신음도 섞여있다.

장군묵의 손에 중상을 입고 현천록에게 양의신공을 전수하느라 지칠때로 지쳐버린 진양진인의 숨소리다.

현천록은 양의신공을 다시 연습하면서 그가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렸다.

무공을 배우는 일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들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X X X

 

하얀 눈으로 뒤덮힌 자금산에 태양이 떠올랐다.

눈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부시게 한다.

[! 얼굴까지 새까맣게 타겠군. 겨울에도 나다니려면 몽면을 하든지 해야지 원.]

이매봉은 투덜거리면서 황금빛 일출을 맞았다.

날이 밝을 때까지 코를 끙끙거리면서 눈밭을 헤맸지만 결국 희미해져버린 현천록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매봉은 손수건을 깔고 앉았지만 엉덩이가 몹시 시려왔다.

어지간히 지치기도 지쳤다.

[어휴~ 그녀석! 부처님 손바닥에 있는 손오공 정도로 생각했더니 나한테서 도망을 쳐? 어디 찾기만 해봐라 그냥...]

이매봉은 눈앞에 현천록이 있으면 치기라도 할 듯이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지만 슬그머니 다시 내렸다. 햇살이 이렇게 찬란한데 주먹질을 해대는 건 어울리지 않을 성 싶어서다.

엉덩이는 찬바위를 닮아가며 싸늘하지만 얼굴은 햇빛을 받아 따스하다.

반이나마 온화함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세상사는 낙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지만 이매봉의 드문 감상은 세 사람이 산정으로 다가오면서 끝나고 말았다.

세사람은 흑의(黑衣)를 입었는데 눈 위를 걸어오는 모습이 말 그대로 검은 점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린다.

이매봉은 마주쳐봤자 귀찮은 일만 있을 것 같아 적당한 바위를 찾아 몸을 숨겼다.

세 사람 모두 수염이 허옇게 센 노인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인상이나 눈빛이 모두 바르게 살아온 사람같지는 않다.

친형제지간인지 모두 비슷한 얼굴이기도 하다.

한 사람은 검을 들었고, 또 한사람은 한겨울인데도 합죽선(合竹扇)을 들었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손안에서 호두 두 알을 굴리면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호두를 굴리는 사람이 말했다.

[노대(老大)! 진양진인 그 늙은이가 머리를 좀 쓴 것 같소. 헤헤... 물론 노대에겐 못미치겠지만 말이오.]

합죽선을 든 사람이 어깨를 한 번 우쭐하며 웃는다.

검을 든 사람이 말했다.

[노대! 노삼(老三) 말이 맞소. 그 늙은이가 함정을 파놨을 거라는 짐작이 여지없이 맞아떨어졌소. 겁없이 날뛰던 놈들은 현무호에서 모조리 죽었소.]

촤락!

합죽선을 든 사람이 한 번 펼쳐서 얼굴을 부치며 말했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노이(老二)! 너도 한번 생각해봐라. 진양진인과 포두화상은 절친하다고는 못해도 옛날부터 친구지간이었지. 한데 뜬금없이 현무호에서 만나 싸운다는 게 말이나 되나?]

호두알을 굴리는 노삼이 말했다.

[하지만 노대, 진양진인이 옥황빙서를 가졌다면 포두화상이 싸움을 걸 수도 있지 않겠소?]

노대가 말했다.

[옥황빙서? ! 다들 미쳐서 날뛰는 옥황빙서 말이지? 진양진인이 가졌다고 들었는데 글쎄... 현무호에서는 진양진인은 콧베기도 보이지 않고 괴물같은 놈이 나왔지. 모두 그 괴물같은 놈에게 옥황빙서를 내놓으라고 달려들었는데 어떻게 됐나? 모두 죽었어. 그 괴물같은 작자는 옥황빙서에 대해서 가타부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노이가 말했다.

[그럼 노대는...]

노대가 말했다.

[잘 생각해야돼. 괴물같은 놈과 진양진인을 혼동하면 절대로 안되지. 진양진인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무공도 뛰어나지만 항상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이용하곤하지. 철저하게 계산적인 머리를 지닌 사람이지. 괴물같은 놈도 진양진인에게 이용당했을 거야. 옥황빙서는 진양진인이 가지고 있을거야. 우린 무조건 진양진인만 찾아서 죽이면 돼.]

노삼이 감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노대는 진양진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그려.]

노대가 화를 벌컥 내면서 말했다.

[너는 내가 진양진인에게 패했던 걸 비웃는거냐?]

노삼이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난 노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오. 석년에 노대가 그와 싸워 이기지 못한 것도 실상 노대의 삼음장(三陰掌)을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소? 지금 노대는 삼음장을 대성했으니 진양진인도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 확실하오.]

노대가 코웃음을 쳤다.

[! 알랑방귀 따윈 집어치워라. 진양진인이 왜 진양진인이겠나? 소양지(小陽指)의 공력을 지니고 있는데 내 삼음장인들 무슨 위세를 부릴까? 하지만 흥! 내겐 비장의 수법이 있지.]

그때 노이가 불쑥 물었다.

[노대, 진양진인은 누구한테서 옥황빙서를 얻었소? 그리고 대체 옥황빙서가 뭐요?]

노대는 한심하다는 듯이 노이를 보고 나서 말했다.

[옥황빙서는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옥황빙서에는 어떤 곳을 가리키는 지도가 그려져 있고 다른 쪽에는 천상의 무공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옥황빙서를 얻는다면 첫째는 무공을 익히고 둘째는 지도에 적힌 곳을 찾아가는 것이 순서다.]

노이가 물었다.

[옥황빙서에 대한 이야기는 어렸을 때 사부님께 얼핏 들은 적이 있소. 대체 옥황빙서는 얼마나 오래된 것이오?]

노대가 말했다.

[그것도 아는 사람이 없다. 수백년, 어쩌면 수천년이 됐는지도 모르지.]

노삼이 물었다.

[노대, 우리가 만약 옥황빙서를 얻게 된다면... 무공은 함께 익힐 수 있겠지만 그 어떤 곳을 찾아가는 것도 함께 할 수 있소? 혹시 한 사람만 갈 수 있다면...]

노대가 차갑게 쏘아부쳤다.

[별 걱정을 다하는군. 쓸데없는 걱정말고 진양진인이나 찾아봐! 틀림없이 자금산 중에 있을 테니까.]

노삼이 입이 쑥 들어갔다.

노대가 말했다.

[현무호에서 자금산 쪽으로 묘한 냄새가 이어졌단 말이야. 매화향기 같기도 하고 포도냄새같기도 한 냄새지. 미약한 것 같으면서도 잘 흩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묘한 냄새야. 어쩌면 옥황빙서에서 나는 냄새일 수도 있고 진양진인이 가진 다른 물건 냄샐 수도 있지. 어쨌든 이 근처가 틀림없어.]

이매봉은 노대라는 자가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늙은 생강이네. 우리가 쓰는 일매향(逸梅香)은 어지간해서는 알아차릴 수도 없는데... 완전 개코다! 한데 일매향은 현천록한테서 나는 냄새잖아. 진양진인이라니 당신들은 짚어도 한 참 잘못짚었어.)

이매봉은 바위 뒤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중얼거렸다.

[나도 못찾은 녀석 당신들이 찾아주면 고맙지.]

그때 노이가 말했다.

[노대! 산 동쪽으로 가면 동굴이 하나 있소. 절벽 중간에 있는데 혹시 그곳에 숨은 건 아닌지 모르겠소.]

갑자기 노대가 버럭 소리쳤다.

[웬놈이냐!]

이매봉은 그 소리가 자기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고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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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인간쟁탈전

 

 

 

[이놈아! 너는 누구냐?]

삼촌정이 당혹한 표정으로 물었다.

헌데 막비강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추명염왕이 뒤따라 도착하며 고함을 질렀다.

[애송아! 너는 감히 막비강, 곡능천, 능곡천이 아니라고 말할 테냐?]

막비강은 그자가 단숨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자 내심 뜨끔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되물었다.

[노인장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통 못 알아듣겠소.]

뒤어어 도착한 소면호도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 수작 부리지 마라! 노부가 네놈의 몸을 수색해 보겠다!]

막비강은 한 걸음 물러서며 이마를 찌푸렸다.

[내 몸에서 무엇을 수색하겠다는 거요?]

!

하지만 소면호는 대꾸하지 않고 지풍을 날려 막비강의 혈도를 찍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수색하여 무협제원의 유물인 신녀비를 찾아냈다.

[교활한 놈! 이래도 시치미를 뗄 테냐! 이건 무협제원의 신녀비가 아니냐?]

소면호는 비수를 막비강의 목에 들이대었다. 그는 이미 막비강이 무협제원의 무공을 익혔음을 알고 있었다.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말하지 않으면 당장 멱을 따버리겠다.]

소면호는 금방이라도 신녀비로 목을 찌를 듯이 위협하며 말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비급이 숨겨진 장소라니요?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소. 생사람 잡지말고 빨리 혈도나 풀어주시오! 그 단검은 허리춤에 붉은 빛이 도는 호로를 찬 내 또래의 소년이 준 것이오.]

막비강의 말에 마두들은 흠칫했다.

하지만 소면호는 끝내 의심을 풀지 않고 물었다.

[그 놈이 무엇 때문에 이런 절세보검을 네게 주었느냐?]

막비강은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어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둘러댔다.

[그는 내게 우혈(牛穴)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소. 그래서 알려 주었더니 고맙다면서 그 단검을 내게 주었소.]

빈틈없는 막비강의 대답에 세 마두는 반신반의하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삼촌정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의 말을 잠시 믿어주겠다. 하지만 네가 말한 그놈이 보이지 않으면 네놈을 대신 우혈 속에 던져 버리겠다.]

삼촌정은 즉시 막비강을 옆구리에 끼고는 경신술을 펼쳐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행은 곧 경지하 변에 높이 솟아있는 절벽 앞에 이르렀다. 그 절벽 아래에는 커다란 동굴이 하나 뚫려 있었는데 때때로 안쪽에서 소가 우는 듯한 괴성이 들려 우혈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막비강은 소흥부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경지하 변에 우혈이란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기억하고 있다가 세 마두에게 둘러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과 세 마두가 우혈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누가 있을 리 없다. 그저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컴컴한 동굴만 뻥 뚫려 있을 뿐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어른을 속여? 네놈부터 먼저 죽이겠다.]

소면호는 우혈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살기 어린 노성을 질렀다.

막비강은 깜짝 놀라는 척하며 다급히 말했다.

[당신들은 비급을 취득하러 왔다고 말했지 않소? 그럼 그 소년이 먼저 우혈 안으로 비급을 찾으러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추명염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놈 말에도 일리가 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안을 살펴보자.]

삼촌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막비강을 옆구리에 낀 채 우혈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그때 소면호가 삼촌정에게서 막비강을 낚아채며 말했다.

[난쟁아! 너는 몸집이 작아서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아보기에 적합하다. 이놈은 내가 업고 뒤따라 들어가고 염왕을 내 뒤에서 보호하게 하자.]

삼촌정과 추명염왕은 소면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막비강도 속으로 탈출할 계획을 생각하며 소면호의 등에 업힌 채 음침하기 짝이 없는 우혈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량 들어가자 동굴은 점점 좁아졌다. 그와 함께 발 밑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동굴의 바닥을 이루는 바위의 아래쪽에는 지하수맥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물의 수위가 변하며 간간이 소 울음소리 같은 괴성을 내는 것이다.

[... 큰일날 뻔했구나!]

문득 앞장서서 들어가던 삼촌정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동굴 바닥이 끝나며 수직 동굴이 나타난 때문이다. 자칫 했으면 삼촌정은 그대로 수직동굴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 했다.

이 수직 동굴은 얼마나 깊은 지 알 수가 없다. 삼촌정이 품 속에서 천리화(千里火)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아래쪽을 비추어 보았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직 동굴 아래쪽에서는 세차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차가운 냉기(冷氣)가 올라와 뼛속까지 스며든다.

길이 끊긴 것을 확인한 삼촌정은 고개를 홱 돌려 막비강을 노려보았다.

[죽일 놈! 여기 어디에 사람이 있느냐? 이 수직갱 속에는 물이 흐르고 있고 너무 깊어 일단 뛰어내려가면 올라올 수도 없다. 설마 막비강이란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단 말이냐?]

하지만 막비강은 태연히 대꾸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오. 나라도 절세비급을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했을 거요.]

헌데 바로 그 직후였다.

! !

[으악!]

[고금! 네놈이... 으아아아!]

갑자기 두 차례 둔탁한 폭음이 일어나고 처절한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풍덩! 풍덩!

그와 함께 두 개의 인영이 그대로 수직갱 아래의 물 속으로 떨어졌다.

이어 어둠 속에서 소면호가 득의의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너희 두 노적은 비급 때문에 지금까지 나와 다투었지만 이제는 황천에 가서 염라대왕과 다투어라!]

수직갱 속으로 추락한 것은 바로 추명염왕과 삼촌정이었다. 소면호가 방심하고 있는 그들을 장력으로 급습하여 수직갱에 밀어버린 것이다.

막비강은 짐짓 겁에 질린 척하며 벌벌 떨었다.

[... 살려 주세요!]

[흐흐흐! 어린 녀석아, 무서워할 것 없다.]

소면호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두 노적은 오래 전에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넌 죽이지 않을 테니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바른 대로 말해라!]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내가 어떻게 압니까?]

막비강이 시치미를 떼었으나 소면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 앞에선 어리석은 수작 부리지 마라. 끝까지 곡능천이 아니라고 고집부린다면 네놈도 저 속에 던져 버리겠다.]

[난 오진강(吳振綱)이라는 소흥부 사람입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 집으로 데려가 물어 보면 알게 될 텐데 왜 나를 곡능천이라 하는 거요?]

[주둥아리 닥쳐라!]

소면호는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외쳤다.

[아무리 교활해도 사람에겐 실수가 있는 법이다. 그저 길을 가르쳐 주었을 뿐인데 절세보검을 기증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그리고 노부는 네놈의 허리띠가 원래의 그 허리띠임을 알아보았다. 설마 곡능천이 허리띠까지 네게 주진 않았겠지?]

막비강은 더 이상 시치미를 떼어봐야 소용없음을 깨닫고 자신이 천면신룡 곡능천임을 인정했다.

[확실히 당신은 죽은 두 인간보다 세심하군. 이렇게 잡혔으니 더 이상 할말이 없다. 비급을 얻고 싶으면 경지하로 돌아가자.]

소면호는 막비강을 달래기 위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만약 청구단서를 얻게 되면 노부는 청구상인의 무공과 노부의 일신 절예를 모두 네게 전수하여 제자로 삼아주겠다.]

그자의 말에 막비강은 속으로 냉소했다.

(! 만약 네가 무공을 가르쳐 준다면 나는 그 무공으로 네놈부터 없애버리겠다.)

막비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소면호가 또 웃으며 물었다.

[! 그러니 어서 말해봐라. 네가 파손한 석벽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었느냐?]

막비강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한 수의 시구가 새겨져 있었소.]

막비강은 이어 시구를 읽어 주었다. 하지만 다른 구절은 석벽에 새겨진 대로 말해 주었으나 가득 찬 달밤 삼경에 탑 그림자가 드리워져... 라는 구절은 가득 찬 달밤 삼경에 북두(北斗)의 손잡이가 이동하여로 고쳐 말했다.

소면호는 막비강이 말한 시구를 한 동안 음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구는 과연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알리는 관건이구나.]

[그렇소. 이 시구의 뜻으로 보아 달 밝은 밤에 경지하 강변에 가면 틀림없이 청구단서를 취득할 수 있을 것이오.]

소면호는 막비강이 시원하게 비급의 행방을 말하자 내심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 보니 너는 정말 총명하고 시세를 아는 아이구나. 노부는 설사 그 비급을 찾지 못한다 해도 노부의 절기를 모두 네게 전수해 주겠다.]

[아직 비급도 찾지 못했고 또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는데....]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절기를 전수받은 후 노부를 기억해주기만 해도 만족한다. 그럼 우리 그만 영롱탑 근처로 가서 삼경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막비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모르는군요. 그 시구의 내용으로 보아 보름 달밤이라야 하며 그것도 팔월 중추절 밤의 삼경을 가리키는 것일 거요. 오늘은 스무날이니 앞으로 스무닷새가 더 지나야만 보름달이 옵니다.]

소면호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막비강의 총명함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자기보다 어린 소년의 계략에 걸려들고 있는 사실을 꿈에도 께닫지 못했다.

 

* * *

 

이십오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어느덧 둥글게 찬 달이 구름 속으로 숨었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대지는 은가루를 뿌려 대낮같이 밝았다.

막비강은 지난 이십오 일간 소면호를 따라다니며 많은 무학비결을 배웠다.

그리고 이날 소면호와 함께 영롱탑이 보이는 경지하 강변에 이르렀다.

[와아!]

[크아아악!]

챙채앵! 퍼퍼펑!

하지만 이 무렵 경지하 강변에는 무수한 인영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죽고 죽이며 토해내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막비강은 내심 조소를 머금는 동시애 우려를 금치 못했다.

(저들도 청구단서 때문에 여기에 온 모양이구나. 그런데 그들은 지금 이 시간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소면호도 내심 의혹을 금치 못하고 막비강에게 나직이 말했다.

[혹시 그들도 대석비곡에 가서 그 석벽의 글자를 본 것이 아니냐?]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가 석벽의 글들을 긁어내긴 했지만 글이 적혀있었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만일 공력이 심후한 자라면 원래의 글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면호는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지워진 시구를 다시 판독했다 해도 저자들 역시 나처럼 그 안의 뜻을 절반밖에는 풀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절반만 풀이했다면 이렇게 공교롭게 시간을 맞추어 도착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막비강은 이렇게 대꾸한 후 영롱탑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영롱탑 안은 칠흑같이 어두워 귀화가 나타난다는 장몽아의 말과는 부합하지 않았다.

이어 그는 혈전을 벌이고 있는 무림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들 중에는 남산의성 악불령 등 막비강도 눈에 익은 무림 고수들이 끼여 있었다.

하지만 오봉도인과 조씨부인 일가, 그리고 날수선랑 조손(祖孫)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날수선랑과 조씨부인 일가는 집안에 숨어 동정을 살피고 있다 하더라도 오봉도인은 대석비곡까지 왔었는데 비급 탈취 전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악() 노인과 먼저 고하를 가늠하고 싶소.]

그때 많은 인파 중에서 서생 차림의 중년인이 외치며 걸어나왔다. 그자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반면 두 눈에서는 새파란 남광이 번뜩여 사이하고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이었다.

[저자가 육요(六妖)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백독서생(百毒書生) 이량(李良)이다!]

소면호가 설명해 주었다.

(백독서생 이량!)

막비강도 일찍이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유심히 그자를 지켜보았다.

별호 그대로 백가지 극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백독서생 이량은 자타가 공인하는 용독(用毒)의 천하제일인이다. 그 때문에 어떤 고수라도 백독서생 이량을 상대하길 꺼려한다.

[하하하! 그동안 이 서생의 용독술이 제법 성취가 있었던 모양이군! 노부에게 가르침을 내리겠다니...!]

군중들 속에 한차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약초 캐는 호미를 든 노인이 중인들을 헤치고 나갔다. 이 노인은 바로 남산의성 악불령이었다. 백독서생 이량이 용독으로 천하제일이라면 남산의성 악불령을 용약(用藥)으로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다.

막비강은 남산의성을 보는 순간 마음이 조급해졌다.

(야단났구나! 천오주는 내가 가지고 있으니 저분은 무엇으로 백독서생을 대항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내가 대신 나가 백독서생을 상대해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막비강이 숨어 있던 수풀에서 나가려 하자 소면호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아끌어안았다.

[너는 왜 이렇게 마음이 착하냐? 우린 그들이 서로 싸워 죽을 때를 기다렸다 나가서 뒷수습만 하면 된다.]

[안 됩니다. 악 노인은 내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꼭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나는 너부터 먼저 죽여 버리겠다.]

막비강은 소면호와 함께 이십여 일을 같이 생활하며 상대방의 절학도 배웠다. 하지만 그의 비열한 행위와 독랄한 마음을 보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반감이 더했다.

[가지 말라면 가지 않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소면호로 하여금 팔을 놓게 했다.

[이얏!]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풀 숲에서 날아 나갔다.

[이놈이...! 거기 서지 못해?]

소면호가 노성을 지르며 뒤따라 몸을 솟구쳐 추격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생사현관까지 타통되어 근 일 갑자의 공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먼저 몸을 날렸다. 그 때문에 소면호의 경공신법이 아무리 쾌첩하다 해도 단번에 그를 추격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남산의성 악불령과 백독서생 이량은 몇 마디 형식적인 인사말을 나눈 후 막 싸움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 소리가 들리는지라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하나의 인영이 비조(飛鳥)처럼 날아오고 그 뒤에 또 다른 그림자가 쫓아오고 있지 않은가?

남산의성 악불령은 전면의 인영이 전개하는 신법에서 반년 전에 만났던 소년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걱정 마라, 아이야!]

그는 급히 달려가 막비강을 맞이한 다음 소면호에게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왜 어린 후배를 괴롭히는 거요?]

[비켜라!]

소면호가 노성을 지르며 일장을 격출했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상대방의 장풍이 강맹함을 느끼고 황급히 일장을 맞받아 냈다.

!

그러나 이 무렵 소면호는 전력을 다해 일장을 격출했는지라 남산의성 악불령은 팔이 마비됨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세 걸음이나 후퇴했다.

[누군가 했더니 고명이 쟁쟁하신 소면호 고 노인이셨군!]

악불령은 몸을 가눈 다음에야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는 즉시 오른손의 뇌강서로 둥근 흑광을 형성하여 질풍처럼 덮쳐 갔다.

소면호는 자기의 무예가 상대방에 비해 약간의 손색이 있음을 알고 처음부터 전신의 공력을 발출했었다. 헌데 상대방이 병기를 휘두르며 덮쳐 오자 더욱 두려움을 금치 못하고 급히 쌍구검(雙鉤劍)을 뽑아 평생의 절학을 다해 악불령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그사이에 막비강은 백독서생 이량 앞에 도착하여 포권의 예를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이 선배님의 독공이 천하제일이라는 소문을 오래 전부터 들었습니다. 후배 오진강이 가르침을 받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장내의 군중은 그의 그 같은 행위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대개가 강호에서 위명을 떨친 고수들이지만 백독서생 이량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헌데 갑자기 약관도 안된 어린 소년이 백독서생 이량에게 도전한 것이다.

군웅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막비강의 안위를 걱정했다.

백독서생 이량은 자기 소개를 하고 나온 자가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소년임을 보고 실소했다.

[애송아! 너의 담량은 대단하구나. 너는 누구의 자제이며 사부는 누구냐?]

[후배에겐 사부도 없고 부친도 없습니다.]

[무슨 잠꼬대 같은 말이냐? 사부가 없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부친이 없다면 너는 어디서 났단 말이냐?]

[물론 부친이야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자신도 내 부친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래서 부친이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전할 필요 없이 노부를 사부로 모셔라. 그럼 네게 독문(毒門)의 용독학(用毒學)을 전수해 주겠다.]

[독으로 사람을 해치는 잔재주 따위는 배우지 않겠습니다.]

독공이 잔재주라는 막비강의 말에 백독서생 이량의 눈에서 한 줄기 살기가 발산되었다.

[네놈을 때려죽여 버리겠다.]

[글쎄, 그게 쉽게 될지 의심스럽군요.]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량에게 도전하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서 뇌강서로 강맹한 일초를 공격한 다음 소면호를 버려 둔 채 질풍처럼 날아왔다.

[얘야,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는 이어 백독서생 이량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노부의 기명제자(記名弟子).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후배니 실례가 있었더라도 이해하시오!]

백독서생 이량은 어리둥절했다.

[이 녀석은 사부도 부친도 없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어찌 갑자기 당신의 기명제자라는 거요?]

바로 그때였다.

[그는 노부의 기명제자이기도 하오.]

소면호가 뒤따라 달려와 고함을 질렀다.

[뭐라고?]

[저 아이가 남산의성의 제자이며 또 소면호의 제자라고?]

장내의 군웅들은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정사(正邪) 양파의 무학을 동시에 배운다는 것은 너무 기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뿐 아니라 백독서생 이량 등도 어리둥절했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자기를 만나기 전에 이미 염라철장, 무협제원, 헌원여호등 세 사람의 무공을 배웠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지라 다시 소면호의 무공을 배운 것에 대해 조금도 이상히 생각지 않고 빙긋이 웃었다.

[고 노인, 당신은 스스로 자신을 추켜세우지 마라. 설령 당신이 저 아이에게 무학을 전수해 주었다 해도 기명제자라곤 말할 수 없다.]

소면호가 눈을 부릅뜨며 반박했다.

[그럼 너는 무슨 자격으로 그를 너의 기명제자라 말하느냐?]

[그가 나의 독문의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독문무학을 배웠다.]

백독서생 이량이 옆에서 웃으며 참견을 했다.

[당신들은 더 이상 다투지 마시오. 이 아이가 내게 도전해 왔으니 나는 그를 양자로 삼아야겠소.]

[핫하하하! 재미있구나! 정말 재미있어! 비급 쟁탈전이 이제 사람의 쟁탈전으로 변하다니...!]

문득 허공에서 누군가의 가가대소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화라라라!

처음 웃음소리는 분명 수마장 밖에서 들려 왔는데 다음 순간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장내로 날아 내렸다. 실로 대단한 경신술이 아닐 수 없었다.

쿠쿵쿵!

지축을 흔들며 날아 내린 인물은 한 명 산발한 노인이었다. 머리는 수세미처럼 산발을 했고, 얼굴의 절반은 지전분한 수염으로 덮여 있었다.

몸에 걸친 것은 다 낡아 해진 관복이었는데 발에는 아무것도 신지 않아 때로 찌든 커다란 발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일견하기에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광인(狂人)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미친 사람 형상의 노인이 나타나자 중인들은 안색이 변해서 급히 사방으로 물러섰다.

[우주도철(宇宙饕餮)! 우주도철이다!]

[천하오대기인(天下五大奇人) 중 한 명이 나타났다!]

 

우주도철!

 

그렇다. 그 광인이야말로 전대의 최절정고수들인 천하오대기인 중의 우주도철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한때 벼슬을 했던 적도 있어 늘 낡은 관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다.

도철(饕餮)이란 본래 탐욕스럽고 광폭하여 사람을 잘 잡아먹는다는 전설 속의 괴물이다.

별호에 그 도철이란 이름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이 인물의 성격이 어떠한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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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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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긴 동굴을 통과하는 마차. 앞쪽에는 열린 철문이 있고 철문 안쪽에서 빛이 흘러나온다.

열린 철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마차

마차가 들어선 곳은 넓은 광장. 수백 명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 넓이. 까마득한 위쪽이 뻥 뚫려 있어서 햇빛이 들어온다. 광장에는 이미 네 대의 마차가 서있다. 모양은 독검사랑이 몰고 온 마차와 똑같은데 문이 열려있다. 문 안쪽에는 아무도 없다. 모두 하차한 모습이고. 마부들이 말을 손질하다가 돌아본다.

[워워...] 마부가 말 고삐를 당겨서 마차를 세우고.

드드드 끼이... 마차가 멈춰서고

뛰어내리는 독검사랑

철컹! 마차의 옆에 나있는 문을 열고

문 안쪽에는 청풍과 소년 소녀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서 있다.

독검사랑; [도착했다. 모두 내려라.] 옆으로 물러서고

청풍을 선두로 마차에서 내리는 소년과 소녀들 20명이고. 계집애들은 다섯인데 정정과 난향 외의 세명은 평범한 용모의 소유자들이다. 이영자같은 체격의 여자 아이와 쌍둥이로 보이는 주근깨 소녀들.

독검사랑; [이청풍! 동료들을 인솔해서 저 문으로 들어가라.] 광장 입구 맞은편을 가리키고. 그곳에는 복면인들이 지키는 문이 있다. 복면인들은 이마에 <>자가 적힌 인자급 자객들이다.

청풍; [가자.] 독검사랑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고. 그 뒤를 정정, 철두등 아이들이 두 줄로 따라간다. 정정과 철두가 청풍의 바로 뒤를 따라간다.

독검사랑; (잠깐 사이에 일행을 휘어잡았다. 대단한 영도력이긴 한데...) 청풍을 보며 생각하고

독검사랑; (정 많은 그 성격이 네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음산하게 웃고

독검사랑; (물론 그 결점을 극복하면 단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최강의 살인병기가 될 수 있을 테지만...)

복면인들이 지키는 철문쪽으로 가는 청풍 일행.

철문을 좌우에서 지키다가 열어주려는 복면인들

정정; [살인상단의 자객들은 그 실력에 따라 천()자급, ()자급, ()자급, ()자급으로 나뉜데.] 청풍의 뒤를 따라가며 속삭이고

철두; [그럼 저자들이 인()자급이겠군.] 문을 열어주는 복면인들 보며

정정; [제삼등급이지만 무시하면 안돼.] [인자급도 혼자 구대문파 장문인을 죽이는 게 가능하다니까.]

철두; [... 그게 사실이라면 지자급과 천자급은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자들이겠구만.] 침 꿀꺽

정정; [우릴 여기로 데려온 독검사랑이란 자가 아마 지자급일 거야.] 뒤쪽에 서서 보고 있는 독검사랑을 곁눈질하고.

그 사이에 철문에 이르는 청풍 일행.

긴장하며 철문 안쪽으로 들어간다.

 

#132>

청풍 일행이 들어선 철문 안쪽은 천장이 막혀있는 또 다른 광장. 앞쪽의 광장보다는 작은데 스무명씩 네 개 조로 이루어진 소년 소녀들이 서있다가 돌아본다. 각각의 조 앞쪽에는 <> <> <> <> <>라는 글이 적힌 팻말이 서있다. 그 팻말들 앞쪽에는 단상이 있고 단상 뒤에는 닫힌 문이 있다.

청풍; ((), (), (), (), ()의 오개조로 이루어진 대략 백명이 자객 후보로군.) 가장 오른쪽의 <>자가 적힌 팻말쪽으로 가며 생각한다.

정정; [실력이나 자질로 갑, , , , 무로 나눈 건 아닐 거야.] 청풍의 뒤에 서며 작음 목소리로 말하고

철두; [그걸 어떻게 확신하냐?] 의심

정정; [왜냐하면 내가 무조에 속해있거든.] 자신만만하게 웃고. 바로 그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덜컹! 누군가의 말과 함께 단상 뒤의 문이 열린다.

파면살주; [, , , , 무로 조를 나눈 것은 편의상이 아니라 예비 심사의 성적순이다.] 얼굴의 절반이 화상을 입어 이지러진 사내가 나오며 말한다. 다른 작품의 파면살주와 같은 캐릭터. 살인상단의 부단주이지만 실질적인 단주. 파면살주 뒤로는 뚱뚱한 노파와 왜소한 노인이 나온다. 둘 다 얼굴에 복면을 썼는데 복면에는 <>자가 적혀있다. 이 두 노인은 살인상단 천자급 자객들인 귀파파와 천살로다. 둘 다 물른 가공할 고수들이다. 천살로는 허리춤에 곰방대를 하나 끼우고 있다.

<그럼 그렇지!> <번거롭게 다섯 개 조로 나눌 이유가 없잖아.> 정정을 비웃는 다른 조의 소년 소녀들

얼굴이 이지러지는 정정. 무조의 소년 소녀들은 좀 주눅이 들고

파면살주; [물론 예비심사의 성적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단상에 멈춰서며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파면살주; [지옥십관(地獄十關)을 누가 먼저 통과하는가가 너희들의 장래를 결정할 것이다.]

정정; [지옥십관...]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오싹 끼치네.] 침 꼴깍 삼키며 속삭이고

파면살주; [본좌가 살인상단의 부()단주인 파면살주(破面殺主).] 정정을 힐끔 보며 말하고

청풍; (저자가 살인상단의 이인자라면 단주는 누구인 걸까?)

청풍; (혹시 그녀가...) 소수마녀를 떠올리고. 하지만

청풍;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이내 고개 젓고

청풍; (한눈에 보기에도 파면살주라는 저 인물이 그 여자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약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파면살주; [너희들이 본좌를 다시 보는 것은 지옥십관을 통과한 후일 것이다.] [아무쪼록 가능한 많이 살아남아서 본좌를 다시 보길 바란다.] 돌아서는데

청풍; [지옥십관이 뭡니까?] 손을 들며 묻고

돌아서려다가 멈칫! 하며 돌아보는 파면살주

[!] 무언가 느끼는 눈빛이 되는 천살로. 이후로 천살로는 청풍을 지속적으로 보고 있다.

[무례한 놈!] [감히 허락없이 발언을 하다니...] 입구쪽의 복면인들이 눈을 부라리며 들어오려 하고

파면살주; [됐다.] 손 들어 복면인들을 막고.

고개 숙여 보이며 뒷걸음질로 원래 위치로 가는 복면인들

파면살주; [원래는 여기 계신 두 분의 천자급, 귀파파(鬼婆婆)와 천살로(天殺老)께서 지옥십관을 설명해주실 예정이었다.] 자기 뒤의 귀파파와 천살로를 소개하고. 고개 좀 끄덕이는 귀파파와 천살로

파면살주; [하지만 기왕 질문을 받았으니 본좌가 간략하게 설명해주겠다.]

파면살주; [지옥십관은 우리 살인상단이 최고의 자객을 육성하기 위해 만든 열 개의 관문이다.]

파면살주; [무공(武功), (), (), (), (), (), (), 미혼(迷魂), (), 단정(斷情)을 살아서 통과하면 죽이지 못할 인간이 없게 된다.]

청풍; (다른 관문들은 어떤 곳일지 대충 짐작이 간다.) (하지만 마지막 제십관 단정은 전혀 상상이 안된다. 불길하기도 하고...)

파면살주; [각 관문이 어떨지는 직접 몸으로 겪어보길 바란다.] 말하고 돌아서고

파면살주가 문으로 다시 들어가고. 귀파파와 천살로가 앞으로 나온다. 천살로는 청풍을 주시하고 있는 것 주의

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파면살주

귀파파; [너희들은 부모에게 팔려왔거나 스스로를 우리 살인상단에 판 놈이다.]

귀파파; [, 너희들의 목숨은 우리 살인상단의 것이라는 뜻이다.] 눈을 부라리며 단상 아래의 아이들을 돌아보고

긴장하고 겁에 질리는 아이들

귀파파; [네놈들이 지옥십관을 통과하다가 죽더라도 우리 살인상단에는 어떤 책임도 없다.]

귀파파; [대신 지옥십관의 수련을 포기할 기회를 한 번 주겠다.] [, 수련을 포기하면 자신의 몸값에 상응하는 일을 해서 변제해야한다는 건 감안해야한다.]

귀파파; [어떤 일을 해서 몸값을 변상하게 될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음산한 표정으로 말하고.

청풍; (몸값에 상응하는 일...) (아마 죽기보다 싫은 일을 해야할 것이다.)

귀파파; [열을 세겠다. 수련을 포기하고 싶은 놈은 그 안에 뒤로 빠져라.] [하나!] 숫자를 세기 시작하고.

서로 눈치를 보는 소년과 소녀들.

귀파파; [!] 다시 숫자를 세고. 그러자

[... 저는 포기하겠어요.] 청풍의 조에서 가장 어린 소녀가 한명 뒤로 물러나고. 자신을 난향이라고 소개한 소녀. 유순한 인상.

청풍; (난향이란 아이가 포기했군.) 곁눈질. 뒤이어

[... 저도 포기하겠습니다.] [다른 일을 해서 몸값을 변제하겠습니다.] 다른 조에서도 한두 명씩 물러나는 아이들이 생긴다. 대게 여자들인데 순하고 심약한 인상들이다. 사내아이들도 몇 끼어있고

쯧쯧! 그걸 보며 혀를 차는 천살로

[일곱!] [여덟...] 귀파파가 숫자를 세는 동안 뒤로 물러나는 아이들의 숫자는 대력 열명 정도다.

귀파파; [아홉!] 숫자를 세고.

남은 아이들은 갈등하지만

귀파파; [!] 마지막 열을 세는 귀파파. 더 이상 나가는 아이는 없다.

귀파파; [기회는 사라졌다.] [이제 너희들은 죽으나 사나 지옥십관을 통과해야만 한다.] 남은 아이들을 훑어보며

귀파파; [빠진 놈들은 왔던 문으로 나가고 나머지는 좌측의 문으로 간다.] [저 문 너머가 첫 번째 관문인 무공관(武功關)이다.] 광장 좌측의 문을 가리키고. 그쪽에도 철문이 하나 있는데

철컹! 안쪽에서 문이 열린다. 안쪽에 있던 복면인들이 문을 여는 것

귀파파; [조별로 이동한다!] [실시!] 호령하고

그러자 갑조부터 시작해서 문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물러난 아이들은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며 돌아본다.

난향; (미안해요!) 청풍 일행을 향해 고개 숙여 보이며 나가는 난향. 포기한 다른 아이들과 섞여서

청풍; (무슨 일을 해서 몸값을 변상할지 모르지만 난향이라는 저 아이를 위해서는 잘 된 일이다.) 흘깃 돌아보고. 정정이 손을 들어 보이고

청풍; (부모가 돈 욕심에 팔았겠지만 저 아이는 심약해서 사람 죽이는 인간백정은 결코 못 될 것이다.) 다른 조를 따라 좌측의 문으로 가며 생각하고. 정정과 철두등이 청풍의 뒤를 따라가고

 

#133>

아이들이 두리번거리며 들어선 곳은 일종의 도서관. 책들이 꽂힌 책꽂이가 수없이 많이 서있고. 무기들이 걸려있는 시렁들도 있고. 크고 작은 약병이 들어있는 찬장들도 있다. 그리고 벽쪽에 문이 다섯 개 달려있다. 각 문에는 <> <> <> <> <>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정정; [저게 다 무공비급이야.] 흥분하며 책꽂이들들 보고. 청풍과 철두 아이들도 책꽂이들을 보고

정정; [진본은 아니겠지만 하나같이 빼어난 무공이 수록된 비급들일 거야.]

귀파파; [네년 말이 맞다.] 맨 뒤에서 천살로와 함께 들어서며 말하고. 복면인들이 밖에서 문을 닫는다

모든 아이들이 돌아보고

귀파파; [무공관은 이름 그대로 무공을 수련하는 관문이다.] [지옥십관중 유일하게 지옥이 아닌 곳이지.] 아이들에게 다가오고.

천살로는 입구쪽에 놓인 의자에 앉의며 곰방대를 입에 문다. 복면 아랫부분을 들춰서 입만 드러내며

곰방대로 연기를 뿜어내며 청풍을 보는 천살로

귀파파; [무공관 안에는 구대문파를 비롯하여 무림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비급들이 갖춰져 있다.] 책꽂이로 가며 말하고. 아이들은 좌우로 물러서고

귀파파; [비급 뿐 아니라 수련에 필요한 무기와 영약들도 갖춰져 있다.] 약병들이 가득 차있는 찬장으로 가고

귀파파; [여기 있는 것은 단 시일 내에 내공을 비약적으로 증진시켜주는 영약들이다.] 찬장에 들어있는 약병들을 가리키며

귀파파; [, 이 약들은 약성이 지나치게 강하니 욕심을 부렸다가는 화를 부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라.]

청풍; (당연히 저 약들은 몸에 좋지 않은 성분일 것이다.)

청풍; (임무 중에 죽어도 아까울 게 없는 자객들에게 진짜 영약들을 줄 리 없다.) (가능하면 먹지 말아야한다.)

귀파파; [각 조별로 배정된 방에서 공동으로 무공을 수련해라.] 벽에 달려있는 문을 가리키고. 아이들도 그 문을 돌아보고

귀파파; [, 무공관에 머물 수 있는 정확히 백일이다.] [백일 후에는 다른 관문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청풍; (백일 안에 다른 관문을 통과할 능력을 갖춰야한다는 뜻이로군.)

귀파파; [천살로와 노신은 백일 간 이곳에서 너희들과 함께 생활할 것이다.] 문간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곰방대를 피우고 있는 천살로를 보며 말하고

귀파파; [무공 수련 중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라.]

귀파파; [그럼 조별로 어떤 무공을 익힐 것인지 결정하고 수련을 시작해라.] 가라고 손짓하고. 그러자

다른 조의 아이들은 우르르 비급이 꽂혀있는 책꽂이로 달려간다.

그리고는 무작위로 책을 뽑아 살피는 아이들. 하지만

청풍이 속한 무조는 움직이지 않고 청풍을 보고 있다.

청풍; [내가 무공을 선택하길 바라느냐?] 아이들에게

정정과 철두를 포함한 아이들 고개 끄덕이고

청풍; [알았다. 너희들은 먼저 우리 조에게 배정된 방으로 가서 기다려라.]

정정; [알았어. 수고해!] 손 흔들며 돌아서고

무조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방으로 가고. 청풍 혼자 책꽂이로 간다. 책꽂이에는 아이들이 무질서하게 책을 뽑아서 내용을 살피고 있다.

청풍; (나머지 아홉 관문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무공은 정해져 있다.) 책꽂이의 책들을 살피고

청풍; (독관(毒關)을 돌파하려면 독을 견딜 수 있는 독공(毒功)을 수련해야하고...) ! 책을 한권 뽑고

책의 제목은 <五毒眞經>이다.

청풍; (열관(熱關)과 빙관(氷關)의 열과 냉기를 견디려면 음기와 양기를 함께 기르는 무공을 익혀야만 하는데...) 책 제목들을 살피다가.

청풍; (찾았다.) 눈 번뜩이며 책을 한권 뽑는다.

비급의 제목은 <陰陽眞氣>.

청풍; (오독진경(五毒眞經)과 음양진기(陰陽眞氣)를 수련하면 일단 독, , 빙의 세 관문은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비급을 보며 생각하고

청풍; (마지막으로 몸을 가볍게 하는 무공을 추가해야한다.) 다시 책꽂이의 책들을 살피고. 그러다가.

청풍; (제목은 이게 가장 그럴듯하군.) ! 책을 뽑고

책의 제목은 <魅影步法>이다.

청풍; (매영보법(魅影步法)... 익히면 귀신처럼 움직이게 해준다는 건데...) 책을 보고

청풍; (아무쪼록 이름값을 하길 바랄 뿐이다.) 세권의 책을 들고 자신들 무조의 방으로 간다. 방문이 열려 있고 정정이 내다보고 있다. 주변에서는 다른 조의 아이들이 책을 한 아름씩 들고 자신들의 방으로 가고 있다.

청풍이 달랑 세권의 책을 들고 방으로 가는 걸 보며 눈 번뜩이는 귀파파.

귀파파; (이청풍이란 저놈...)

귀파파; (단주가 특별히 포함시킨 놈답게 확실히 다른 놈들과는 다르다.)

귀파파; (제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도 불과 백일 동안 익힐 수 있는 무공은 한계가 있다.) 한 아름씩 책을 들고 가는 다른 아이들 보며 생각하고

귀파파; (다른 관문을 통과하는데 필수적인 무공만 선택해서 익히는 게 정답이다.) 청풍이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생각하고. 정정이 밖을 힐끔거리며 문을 닫으려 한다

귀파파; (쓸데없이 이것저것 익히려고 욕심을 부리다가는 백일의 제한 시간을 허비하게 될 테고... 결국 치명적인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귀파파; (무공관이 지옥십관중 유일하게 지옥이 아니라고 했지만...) 음산하게 웃고

귀파파; (사실은 무공관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지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될 테니...) 웃는 귀파파. 그러다가

힐끔 천살로를 보는 귀파파

[...] 문간에 앉아서 곰방대를 피우며 무언가 생각하는 천살로. 시선은 청풍이 들어간 문쪽을 보고 있다

귀파파; [왜요?] 천살로에게 다가오고

귀파파; [뭔가 생각이 많은 표정이네요.]

천살로; [별일 아닐세.] 곰방대 입에서 빼며 고개 젓고

귀파파; (별일이 아닌 게 아닌 것같은데...) 눈 흘기며 다른 곳으로 가고

천살로; (이청풍이란 저놈...) 청풍이 들어간 방문을 보며 생각하고. 다시 곰방대를 복면 아래쪽으로 끼워 물면서

천살로; (처음 볼 때부터 눈에 익다 했더니...) 청풍을 떠올리고

천살로; (비참하게 돌아가신 소교주(少敎主)님을 닮았다.) (우리 마교의 원수인 철면무제 섭장천의 분위기도 엿보이고...)

천살로;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구나.) 복면 속에서 눈이 번뜩이고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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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단지회 총단> 단지회 건물. 건달들이 긴장한 채 경비 서고 있고

창고 같은 건물. 건달들이 지키고 있고

그곳으로 오는 소수마녀와 사우. 검마녀와 도마녀가 뒤따라온다.

건달들이 긴장하며 인사하고. 한 놈은 급히 문을 열어주고

안으로 들어가는 사우와 소수마녀. 검마녀와 도마녀는 입구에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건달들은 두 여자의 눈치를 보고

소수마녀가 사우를 따라 들어간 창고 건물 내부. 중앙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죽 진열되어 있다. 장롱, 주방용 그릇, , 반짓고리, 신발 등등. 바로 청풍의 집에 있던 물건들이다.

사우; [막내가 말한 대로 이청풍의 집 살림살이를 모두 옮겨놓았네.] 물건들이 진열된 중앙으로 가며 아부

소수마녀; [이게 전부인가요?]

사우; [얼마 안되지?]

사우; [워낙 궁핍하게 살던 인간들이라 갖고 있는 게 별로 없었어.]

소수마녀; [그렇군요.] 물건들을 살피고

사우; [그런데 궁금한 게 있네 막내.] 눈치 보며 말하고

소수마녀; [말해보세요.] 허리 숙여서 반짓고리 뚜껑을 열고

사우; [대체 이런 잡동사니를 왜 옮겨놓으라고 한 건가?] 소수마녀가 반짓고리 뚜껑을 여는 걸 보며

소수마녀; [왜일까요?] 반짓고리 안의 물건들 살피고. 바느질 도구와 함께 몇 가지 싸구려 패물이 들어있다. 반지, 목걸이, 비녀, 머리 장식등

사우; [종적이 사라진 이진진이란 년과 그 어미를 찾아낼 단서를 얻기 위해서?]

소수마녀; [틀렸어요.] ! 화려한 꽃 장식이 달려있는 머리 핀을 하나 집어들고

소수마녀; [이것들이 장차 우리 암흑마가를 천하의 주인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답니다.] 머리핀을 살펴보며 차갑게 웃고

 

#127>

험준한 산. 신비로운 무산과 달리 음침하다.

덜컹! 덜컹! 그 산속의 험한 길을 가고 있는 마차 한 대 두 마리씩 짝 지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인데 상당히 크고 전체가 강철로 만들어졌으며 창문은 없다. 좁으면서 옆으로 긴 환기창이 지붕 근처에 드문드문 나있고.

마부석에는 죽립을 눌러쓰고 망토를 두른 음침한 인상의 마부 두 명의 앉아있다. 마부들 중 한명은 <신마유희> 등에 나온 자객 독검사랑이다. 이 작품에서도 독검사랑. 검을 차고 있고. 고삐는 다른 인물이 잡고 있다.

 

#128>

흔들리는 마차 내부. 어둑한데 바닥에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죽 누워있다. 구석에 웅크린 채 앉아있는 사람도 있고. 남녀가 뒤섞여있는데 모두 20살 아래의 소년 소녀들이다. 여자들은 숫자가 적어서 5명 정도.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 중 한명 크로즈 업. 바로 청풍이다.

흔들리는 마차 바닥

[!] 무언가 느끼며 정신이 돌아오는 청풍. 하지만

청풍; [...]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고

청풍;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눈 감은 채 생각하고

청풍; (믿기지 않지만... 정신을 잃은 사이에 몸의 상처가 모두 나았다.) (누군가 대단한 효과를 지닌 영약을 먹여주었다는 건데...) 생각할 때

끼익! ! 드드드! 무언가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청풍; (바퀴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마차 안이겠구나.) 눈 감은 채 생각하고. 이어

청풍의; 뇌리에 떠오르는 기억. #113>에서 소수마녀가 말하던 장면들이다.

 

소수마녀; [맹세부터 해라! 구명지은에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차갑게 말하고

소수마녀; [지금의 그 맹세, 잊지 마라.] ! 손을 하나 내밀어 펴고.

검은 옷을 배경으로 새하얀 손이 펴지고

회상 끝

 

청풍; (그 여자로부터 맹세를 강요당한 후 기억을 잃었었다.)

청풍; (그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고 또 어머니와 진진이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 모른다.)

청풍; (만일 그 여자 때문에 어머니와 진진이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다면...) 이를 악물고

청풍;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바득!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고. 그러자

[자기는 정말 한이 많은 것같네.] [정신이 들자마자 이를 갈아대는 걸 보면...] 머리맡에서 누구의 말이 들리고.

청풍; (내 또래 계집의 목소리...) 눈을 뜨며 머리맡을 올려다보고. 직후

청풍; [!] 움찔! 놀라고

청풍의 머리맡. 마차의 벽에 기대 여자가 앉아있는데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있고. 그 바람에 청풍의 머리는 여자의 벌린 가랑이 사이에 위치해 있다. 치마를 입고 있긴 해도 아랫도리가 들여다보이고

청풍; (이런...) 급히 고개 돌리고

정정; [순진한 척 할 거 없어.] [살인상단(殺人商團)에 팔려올 정도의 인생이라면 닳고 닳아서 모르는 게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 웃는 정정의 얼굴 처음으로 보여주고. 직전 작품 <신마유희>에 나온 정정 캐릭터. 그때보다는 나이가 어리다. 18세로 청풍과 동갑이다. 마차 안이 어두워서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이년은 사대마가중 번뇌마가가 살인상단에 잠입시키려는 간세다.

청풍; [살인상단?] 놀라고

청풍; [누굴 죽이는 행위를 물건처럼 파는 장사치들이 있는 거냐?] 고개 조금 돌려 정정의 얼굴 보며 묻고.

정정; [이름만 듣고도 살인상단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차리네.] 웃고

정정; [맞아. 살인상단은 천하 삼대살수조직 중 하나야.] [돈을 받고 누군가를 대신 죽여주는 걸 업으로 삼는 조직이지.]

청풍; (청부살인조직이란 게 실제로 있었구나.) + [그런데 살인상단에 팔려왔다는 건 무슨 뜻이냐?]

정정;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거니?] 놀라는 표정.

더 말하지 않고 대답 기다리는 청풍

정정; [맙소사! 정말 모르는 표정이잖아.]

청풍; [모른다.] [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이 마차에 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정정; [납치를 당했다는 거야?]

청풍; [납치라면 납치겠지.] 말하며 #113>의 장면에서 소수마녀의 손이 하얗게 빛나자 정신을 잃던 장면 떠올리고

정정; [그건 좀 예외적인 상황이네.] [살인상단은 자객으로 키울 인간들을 돈 주고 사는 게 원칙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갸웃하고

청풍; [자객으로 키운다?] 놀라고

청풍; [그럼 이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개 돌려 둘러보고

정정; [살인상단이 자객으로 육성하기 위해 사들인 불쌍한 인생들이지.] 쓴웃음

정정; [대개는 부모가 돈 받고 팔지만 큰돈을 벌기 위해 자진해서 팔려오기도 해.]

청풍; (그러고 보니...) 깨닫고

<이 마차에 타고 있는 이십여 명은 모두 내 또래거나 더 어린 소년 소녀들이다.> 누워있거나 쪼그려 앉아있는 소년과 소녀들의 모습. 잠이 든 놈도 있지만 불안과 초조의 표정으로 깨어있는 아이들도 많다. 그중에는 특히 덩치가 큰 놈이 하나 있다.

정정;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들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어.] [평생 가난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 죽든지 인간백정이 되어서라도 풍족하게 살던지 결정해야하니까.]

정정; [나도 사창가로 흘러들어가서 몸을 파는 대신 자객이 되기로 결심 한 거야.]

청풍; (제법 강단이 있는 계집아이로구나.)

정정; [그렇다고 누구나 살인상단에 제 몸을 팔 수 있는 건 아니야.] [자객이 될만한 자질이 있는지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하기 때문이지.]

정정; [그런 면에서 우린 자부심을 갖어도 돼.] [백명이 지원하면 겨우 한두 명만이 살인상단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까.] 배시시 웃고.

철두; [젠장, 그만 좀 나불대라.]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다.] 구석에 누워있던 덩치 큰 청년이 궁시렁거린다. 키가 2미터가 넘고 근육질인 이놈의 이름은 철두. 곰같지만 외모와 달리 영악하다. 정정처럼 이놈도 다른 세력이 살인상단에 잠입시키려는 간세다. 이놈의 출신은 사대마가중 혈전마가다.

정정; [시끄러우면 귀 틀어막아.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고!] 눈 흘기고

철두; [뭐라고?] 벌떡! 일어나며 눈 부라리고. 주변에 누워있거나 앉아있던 청소년들 기겁하며 물러나고

철두; [한 주먹 감도 안되는 년이 누구에게 대드는 거냐?] 눈 부라리고

정정; [덩치만 크고 머리는 텅 빈 놈에게 대든다. ?] 표독하게 맞서고.

철두; [? 머리가 어쩌고 어째?] 주먹을 들어 휘두르려는 자세. 그때

청풍; [내 이름은 이청풍이다.] 일어나 앉으며 말하고

[!] [!] 일촉즉발이던 철두와 정정이 멈칫! 하며 돌아보고

청풍; [자객이 되려면 혹독한 수련을 거쳐야할 게 분명하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우리 대부분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고

철두와 정정, 다른 청소년들도 얼굴 굳어지고

청풍; [그래도 서로 돕고 협력하면 조금이나마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느냐?] 청소년들 돌아보고.

누워있던 청소년들도 진지한 표정이 되며 일어나 앉고

청풍; [다 함께 살아남도록 노력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다.] 둘러보자

정정; [맞는 말이야.]

정정; [내 이름은 정정(貞靜)이고 열여덟 살이야.] [자객이 되려는 이유는 여기 있는 다른 계집애들과 대동소이할 테니 생략할게.] 대여섯 명 있는 계집애들을 돌아보며

철두; [철두(鐵頭)!] [열 아홉살이다.] 무뚝뚝

정정; [쇠 대가리...] [이름 한번 제대로네.] !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노려보는 철두

정정; [다행인 점은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다는 거야.] 눈 흘기고

정정; [덩치가 산 만한 게 누나 누나 하고 따라다녔으면 부담스러웠을 테니까.]

철두; [둘러대긴...] 궁시렁 대면서도 얼굴 풀리고

[정칠이다. 열일곱살...] [포곡령이다. 열 여덟살...] 사내 아이들이 말하고

난향; [난향이라고 해요. 열여섯살이구요.] 가냘프고 소심해 보이는 소녀가 눈치 보며 자기 소개를 한다. 난향이라는 이 소녀는 나중에 역할이 있으니 잘 묘사.

청풍; (큰소리는 쳤지만... 과연 저 아이들 중 몇이나 살아서 다시 세상을 보게 될지...) 아이들이 자기소개 하는 걸 보며 생각하고

청풍; (그 여자...) 소수마녀를 떠올리는 청풍

청풍; (날 황금수라들 손에서 구해준 대가로 요구한 게 자객이 되라는 것일 테지.) 이를 악물고

청풍;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살아남겠다.) (진진이와 어머니가 잘못 되었으면 대가를 받아내야 하니...)

[...] 야릇한 표정으로 그런 청풍을 보는 정정. 정정에게는 다른 신분이 있다.

 

#129>

마부석에 앉은 마부와 독검사랑. 마차는 좌우로 깎아지른 절벽인 좁은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정칠이다. 열일곱살...> <포곡령이다. 열 여덟...> <난향이라고 해요. 열여섯살이구요.> 마차 안에서 자기소개 하는 아이들 음성이 두 사람의 귀에 들리고

마부; [이번 회차의 아이들은 남다른 것 같습니다 독검사랑(毒劍死狼)...] 웃으며 마차를 돌아보고

독검사랑; [두고 봐야지. 과연 지옥십관(地獄十關)을 몇 놈이나 살아서 통과할지...] 음산하게 웃고

마부; [하긴 누구나 다 살아서 통과할 수 있으면 지옥십관이 아니겠지요.]

마부; [대신 지옥십관만 통과하면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어엿한 자객이 되겠지요.] 마차를 몰며 말하고

<이청풍이란 아이를 주목하도록 하세요. 장차 우리 암흑마가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으니...> 소수마녀의 말을 떠올리는 독검사랑

독검사랑; (이청풍...)

<과연 그놈이 단주(團主)의 기대에 부흥할지는 두고 봐야겠지.> 생각하는 배경으로 마차가 가는 앞쪽에 갑자기 길이 뚝 끊기고. 늪이 나타난다. 안개가 자욱한 늪인데 그 때문에 건너편은 안보인다. 안개 덮인 늪에는 고사목들이 여기저기 음산하게 서있고. 길은 늪에 의해 끊겨있다.

마부; [워워!] 고삐를 당겨서 말들을 세우는 마부

드드드 늪 쪽을 향해 멈춰서는 마차.

마부가 품속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서

삐이! 입에 물고 피리를 부는 마부

삐이! ! 새 울음 소리같은 피리소리가 늪지로 퍼지고

츠츠츠 갑자기 늪지 아래에서 무언가 길게 움직이더니

촤아! 이윽고 늪지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쇠로 된 다리.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 넓이다. 헌데

푸드득! 푸득! 늪지 위로 올라오는 철교 위로 길이가 일 미터가 넘는 뱀장어같은 것들이 꿈틀거리며 기어다닌다. 전체 모양은 뱀장어인데 강철같은 갑옷으로 덮여있고. 길게 갈라진 입에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돋아나있다.

푸드득! 첨벙! 수면 위로 올라오는 철교 위에서 꿈틀대던 뱀장어 같은 것들은 급히 늪으로 뛰어들고. 그러자

마부; [이랴!] 다시 말고삐를 채고.

다각 다각 늪지를 가로질러 생긴 그 철교 위로 가는 마차

마차가 지나가는 철교 좌우의 늪 속. 뱀 같은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물론 수면 위로 올라온 철교 위에서 꿈틀대던 그 뱀장어같은 것들이다.

마부; (매번 지나갈 때마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구만.) 곁눈질로 그 뱀장어같은 것들을 보며 긴장하고

마부; (흡혈독만(吸血毒鰻)...) (고대로부터 살아남은 공포의 뱀장어...)

<강철도 물어뜯을 정도로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데다가 그 이빨에는 지독한 독까지 묻어있다. 그 때문에 저놈들에게 물리면 사림이건 짐승이건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빨 드러내며 걸죽한 늪속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뱀장어들

마부; (저 흡혈독만들이 지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살인상단의 비밀총단은 철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제 발로 살인상단에 죽으러 들어오는 인간은 없겠지만..> 따각 따각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마차. 그러자

촤아! 다시 철교는 늪지 속으로 갈아 앉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사라지는 철교. 철교가 있던 자리를 뱀장어들이 꿈틀대며 지나간다.

 

#130>

안개를 헤치고 철교를 통해 늪을 건너는 마차.

안개가 흩어지며 절벽이 나타나고. 그 절벽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다. 동굴 위에는 <殺人商團>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동굴 입구에는 얼굴에 <>자가 적힌 복면을 쓴 자들이 서서 절벽에 박혀있는 몇 개의 레버들을 조작하고 있다. 그 레버로 철교를 늪지에 갈아 앉혔다가 끌어올리는 것. 동굴 입구 조금 안쪽에는 아주 굵은 쇠창살로 루어진 문이 있는데 지금은 위로 올라가 있는 상태다.

[어서 오십시오 독검사랑님!] 복면에 <>자가 적힌 복면인중 한명이 다가오는 마차를 향해 고개 숙이고.

***살인상단의 자객들은 지도층을 제외하면 신분을 숨기기 위해 복면을 쓴다. 복면에는 계급 별로 <> <> <>이 적혀있고 가장 낮은 계급의 자객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복면을 쓴다. 독검사랑은 <>자급이다. 천자급은 몇 안되고***

독검사랑; [다른 조()들은 도착했나?]

[! 독검사랑님의 무()조가 마지막입니다.] 대답하는 복면인

독검사랑; [그렇군. 수고해라.] 마차를 타고 복면인들을 지나가고

레버를 조작하는 복면인들.

촤아! 그러자 철교가 완전히 늪지로 가라앉고

끼릭! 다른 레버를 내리는 복면인 한명. 그러자

그그긍! 위로 올라가있던 쇠창살문이 천천히 내려온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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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피로 물들다 (4)

 

 

 

현무호에 왔던 이매봉은 혀를 찼다.

[! 한 발 늦었어.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겠는걸.]

근처 바위 위에 서있던 상관숭이 시체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자는 이십년 전에 좌검우도(左劒右刀)로 이름을 날렸던 관부의 고수 황보전호(皇甫戰虎)군요.]

이매봉이 말했다.

[은거했다질 않았나?]

상관숭이 말했다.

[속하가 살펴본 스물일곱은 모두 강호에서 활동을 하지 않던 자들이었습니다. 뭣 때문에 다시 강호에 나와 죽임을 당했는지 알 수 없군요.]

이매봉이 말했다.

[옥황빙서 때문이야. 죽은 놈들이 외치는 소리도 못 들었어? 멀리까지 들리던데.]

상관숭이 이매봉 앞에 날아내리며 말했다.

[옥황빙서는 전설입니다. 아직 누구도 그걸 가졌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일곱째라는 자가 옥황빙서라는 걸 가졌겠군. 그러니까 그처럼 대단한 척하겠지.]

이매봉이 말했다.

[그 괴물을 잡아놓고 한 번 확인해보자구. 어때 너하고 한 번 붙어볼 만 하겠어?]

상관숭이 머리를 저었다.

[이백 초를 넘기지 못하고 찢어질 것입니다. 그자는 무공에 있어서 이미 일대종사(一代宗師)입니다. 어느 누구도 무공으로는 그의 앞에서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매봉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어. 살며시 접근해서 실험만 해보면 되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하고 말 걸?]

상관숭이 말했다.

[금은동철석의 오보(五寶)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매봉이 말했다.

[한 녀석이 사기치길래 그냥 줘버렸어. 한 삼년 있으면 다시 구하게 되겠지.]

상관숭이 아주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이매봉이 활달하게 말했다.

[이봐! 너희들 오신검(五神劍)은 지금도 충분히 강해. 그리고 삼년 뒤에 다시 오보가 준비될 테니 서두르지마!]

[알겠습니다.]

상관숭이 머리를 숙였다.

금은동철석, 이 다섯 가지의 정화는 상관숭이 속해있는 오신검(五神劍)의 검을 다시 녹여 보강할 중요한 재료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할 검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검이 된다.

상관숭은 머리를 숙였지만 지난 삼년을 기다렸는데 다시 삼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기분 좋을 리가 없다.

이매봉이 말했다.

[오보는 그 녀석을 찾는 중요한 단서다. 우리 물건들에는 특이한 향이 들어있다는 걸 녀석은 모르고 있어.]

상관숭이 불쑥 말했다.

[그를 좋아하는군요.]

순간 이매봉의 손이 춤을 추었다.

짜짜짜자작!

상관숭의 양쪽 뺨에 불이 튀었다.

그리고 이매봉의 발이 상관숭의 턱을 걷어찼다.

상관숭은 허공에서 뒤로 한 바퀴 까뒤집어진 후에 눈 위에 떨어졌다.

이매봉의 발이 상관숭의 머리를 밟았다.

상관숭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이매봉이 얼음장처럼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관숭! 본회주를 청루의 기녀쯤으로 아느냐?]

상관숭은 머리를 들래야 들 수도 없었다.

[속하의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이매봉이 소리쳤다.

[죽여 달라는 소리 대신 용서하라고?]

[죽여...주십시오.]

상관숭이 힘없이 말했다.

자기도 모르게 이매봉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살아나긴 틀렸다 싶었다.

이매봉은, 상관숭이 아는 이매봉은 죽이기로 마음먹었을 때 망설이거나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모두가 이매봉을 두려워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들이 있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면서도 거칠 것 없이 행동하고 거슬리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이매봉이었다.

상관숭도 그녀의 입에서 무시무시하고도 중대한 결정들이 장난처럼 이루어지는 것을 숱하게 봤었다.

이매봉이 말했다.

[본 회주를 빈정거리거나 억누르려는 어떤 시도도 용납할 수 없다. 상관숭! 여기서 머리를 박살내고 싶지만 바꿔 신을 신이 없어 그냥 둔다. 하지만 즉시 돌아가라. 돌아가서 형극(荊棘)의 방에서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라.]

형극의 방...

상관숭은 앞이 캄캄해왔다.

형극의 방에 들어간다면 죽어나오거나 미쳐 나오는 두가지 경우 밖에 없다.

약한 자는 모두 죽었고 강한 자는 미쳤다.

하지만 명이 떨어진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 회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상관숭이 다시 일어났을 때 이매봉은 사라지고 없었다.

상관숭은 바람처럼 달려갔다.

형극의 방에 들어가는 것도 늦는다면 그 뒤에 어떤 후환이 생길지 모른다.

회주 이매봉은 여자인 것이다.

여자의 앙심은 처음에 풀어놓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 보복을 당한다.

남자 보기를 소 닭 보듯 하는 이매봉에게 실언을 했으니 처음부터 그녀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못한다면,

상관숭은 오보가 새로 완성되기 전에 자기는 시체로 변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매봉은 다정다감한 듯 하면서도 서릿발 같은 여자다.

다정다감함에 잠시 경계를 늦추었던 것이 실수다.

더구나, 제멋대로 인듯하면서도 거대한 조직을 조금의 실수도 없이 이끌고 있다.

이매봉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

 

상관숭이 달려가는 방향은 서쪽이다.

같은 시간 이매봉은 냄새를 쫓아서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매봉은 자금산을 향해서 달려갔다.

(현천록 그 녀석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현무호에 일어났던 혈풍도 녀석 때문인지도 몰라. 재미난 일이야. 녀석을 만나고부터 계속 이상한 일들이 생기니... 게다가 옥황빙서라니 후훗!)

머릿속에 현천록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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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어머니를 닮은 여인

 

 

 

오봉도인의 물음에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가리켰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이 어린 녀석에게 물어 보시오.]

오봉도인이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어찌하여 빈도더러 어린아이에게 물어 보라는 거요?]

삼촌정이 옆에서 급히 말을 받았다.

[곽 형의 말이 옳소. 도장은 저 어린 녀석에게 물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되오.]

[좋소. 그럼 빈도는 오늘 파격적인 일을 한 가지 하겠소.]

오봉도인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막비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이야, 너는 빈도와 인연이 많을 것 같구나. 도대체 무슨 일로 그들과 이런 싸움을 하느냐?]

막비강은 겉으로는 청수하게 보이는 이 노도사의 무서운 내력을 모르는지라 솔직히 대답했다.

[이 노적들이 제게 청구단서의 행방을 알려 달라기에 이곳의 대비석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했는데도 믿지 않고 공격했습니다. 다행히 저 분 할머니와 개방 사람들이 저를 도와 주었습니다.]

오봉도인은 무엇을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년 남짓 사이에 각처의 큰 비석이 모두 파헤쳐져 있기에 빈도는 여기의 큰 비석과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과연 내 추측이 맞았구나. 그래, 청구단서는 찾아냈느냐?]

추명염왕이 냉랭히 웃으며 말을 받았다.

[흐흐흐! 비급이 비석 밑에 있었다면 우리가 벌써 꺼냈지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렸을 것 같소?]

[그럼 비급은 지금 어디 있소?]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어린 녀석에게 있소.]

막비강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노마는 무슨 근거로 비급이 내 몸에 있다고 하는 거냐?]

추명염왕은 징그럽게 웃었다.

[노부는 네 놈이 석벽의 조각을 파괴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만약 그 가운데 비밀이 없었다면 넌 왜 그 조각을 파손시켰느냐?]

오봉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렇다면 당신들은 더 이상 다툴 필요 없소. 비급이 이 비석 밑에 없으면 개방과는 무관하니 이 아이를 빈도가....]

추명염왕이 앞으로 나서며 말을 받았다.

[당신은 이 어린 녀석을 데려갈 생각이오?]

[? 염왕은 내 행동을 제지할 작정이오?]

추명염왕은 소면호와 삼촌정에게 눈짓을 하더니 오봉도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셋이 한꺼번에 오봉도인을 상대할 속셈인 것이다.

오봉도인은 빙긋이 웃으며 막비강에게 말했다.

[너는 잠시 뒤로 물러서 있거라. 빈도는 그들을 수습한 다음 너와 함께 비급을 찾으러 가겠다.]

이때 소면호가 날카롭게 외쳤다.

[나 고금의 일장부터 먼저 받아랏!]

!

말소리와 함께 한 줄기 강맹무비한 장풍이 격출되었다.

오봉도인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막비강을 붙잡고 옆으로 슬쩍 피했다.

하지만 삼촌정이 구르듯이 추격하며 일장을 뻗어냈고 추명염왕과 소면호도 옆에서 각각 협공을 가했다.

오봉도인은 얼굴을 굳히더니 소매 속에서 우선(羽扇)을 꺼내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스스스!

그러자 세 명의 절정고수가 격출한 장풍은 거짓말처럼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의 침착한 태도와 오묘한 초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막비강은 오봉도인의 오 장 뒤로 물러선 후 내심 몹시 흠모했다.

(만약 이분 노도를 사부로 모신다면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강탈한 막가 악적을 충분히 죽일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날수선랑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어 막비강의 귓전으로 모깃소리 같은 작은 음성이 전해졌다.

[아이야, 빨리 여길 떠나라! 저 도인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막비강은 내심 흠칫 놀랐다. 날수선랑이 깨우쳐 주지 않았다면 오봉도인의 청수한 겉모습에 그대로 속아넘어갈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비강은 그런 속내를 내색하지 않고 박수를 치며 오봉도인을 응원했다.

[하하하! 정말 오묘한 초식이십니다!]

그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오봉도인을 치켜 올렸다.

파앗!

그러다가 쌍방의 격전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벼락같이 몸을 솟구쳤다.

[어엇! 저 애송이가!]

[거기 서랏!]

네 명의 마두가 실색했을 때 이미 막비강의 모습은 숲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

 

기지를 발휘하여 마두들의 추격을 따돌린 막비강은 곧 역용환으로 용모와 옷차림을 바꾼 후 소흥부(紹興府)로 향했다.

금릉에서 소흥부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무림인이라면 경신술을 펼쳐 하루 이틀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막비강은 무려 닷새나 걸려 겨우 소흥부에 도착했다. 혹시나 마두들에게 자신의 행적이 노출될까봐 경신술을 펼치지 못한 때문이다.

덕분에 막비강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소흥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흥부에 도착한 막비강은 길을 물어 약야계(約野溪) 부근의 경지하를 찾아갔다.

경지하를 찾아간 막비강은 높직한 강변 언덕 위에 한 채의 칠층보탑(七層寶塔)이 보고 내심 크게 기뻐했다. 칠층보탑이 있는 강변의 풍경이 대석비곡의 석실에서 본 산수화 조각과 완전히 일치한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탑이 바로 영롱탑이겠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더니 드디어 난 청구단서가 있는 곳을 찾아냈구나!)

헌데 그가 흥분하여 영롱탑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어머니! 저 보탑에서 밤이면 빛을 흘리는 게 요정(妖精)일까요 요귀(妖鬼)일까요?]

돌연 어디선가 은방울 소리 같은 소녀의 음성이 전해 왔다.

[세상에 요귀가 어디 있느냐? 그건 다 무림인들이 양민들로 하여금 겁을 먹고 접급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다.]

막비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두들이 여기까지 쫓아온 게 아닐까?)

막비강은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강변에 자리한 초가집의 대나무 울타리 뒤에 두 개의 크고 작은 인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모녀(母女)로 보이는 두 여인은 영롱탑을 응시하느라 막비강 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군! 두 여자가 다 눈에 익잖은가?)

막비강은 두 모녀의 옆얼굴을 보며 갸웃했다.

모녀 중 딸 쪽은 열 일곱 살 가량 되어 보이는데 바로 대석비곡에서 자신을 도와 준 연아란 소녀와 비슷한 생김새였다. 다만 다른 점은 연아가 활달한 편에 비해 이 소녀는 새침하고 쌀쌀맞아 보이는 것이 틀릴 뿐이었다.

(어머니를 닮았다!)

그리고 모녀 중 어머니 쪽을 본 막비강은 일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 여인은 바로 막비강의 생모인 한경파와 판에 박은 듯 흡사했던 것이다.

다만 이 여인은 농사일을 하는 탓인지 피부가 좀 검다. 그리고 날씬한 한경파와 달리 상당히 살이 쪄서 풍만해 보이는 점이 차이일 뿐이었다.

또 하나 다른 점이라면 막비강의 생모 한경파가 늘 어둡고 쌀쌀맞은 표정인데 반해 이 여인은 아주 푸근하고 자애스러운 표정을 지니고 있다.

여인은 막비강이 진정으로 원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여인이 어머니라면 자신의 어리광이나 투정도 다 받아줄 것만 같다.

막비강은 한동안 망연자실해서 생모를 닮은 그 촌부(村婦)를 바라보다가 곧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넓은 세상에 닮은 사람이 한둘인가?)

막비강은 고소를 지으며 영롱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가 막 대나무 울타리를 지나치려 할 때였다.

[어머니! 저 사람이 영롱탑 쪽으로 가고 있어요. 혹시 저 사람도 요귀들의 일당이 아닐까요?]

소녀가 막비강을 보며 말했다.

[그런 말 하는 게 아니다. 남의 집 귀한 도련님을 요귀의 일당이라니...!]

한경파를 닮은 촌부는 소녀를 꾸짖더니 곧 막비강에게 말을 건넸다.

[얘야! 너는 이 일대에 밤만 되면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도 못 들었느냐?]

막비강은 웃으며 포권을 했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소흥부에 처음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한 줄 몰랐습니다.]

[! 이 고장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런데 어린 네가 혼자 나돌아다니면 집안어른들께서 걱정하지 않느냐? 네 이름은 무엇이냐?]

막비강은 본명이나 곡능천이라는 새 이름을 말하기 뭣해 대충 둘러대었다.

[저의 성은 능()가고 이름은 곡천(曲天)이라 합니다.]

그러자 소녀가 코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 당신은 왜 곡능천이라고 하지 않죠?]

막비강은 잠시 당황하다가 말을 이었다.

[부모가 주신 성을 어떻게 마음대로 고칠 수 있소?]

소녀가 또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성은 고칠 수 없다고요? 그럼 왜 고쳤다가 또 고치곤 하세요?]

[내 이름은 진짜 능곡천이오. 낭자에게 이름을 속일 필요가 뭐 있소?]

자애로운 인상의 촌부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얘야, 우릴 속일 필요 없다. 너의 본명은 막비강이지만 어떤 사정 때문에 곡능천이라고 개명했다가 금릉에서 다시 능곡천로 고치고....]

소녀가 얼른 말을 가로챘다.

[다음에 만나면 천능곡(天凌曲)이라고 바꿀 거예요.]

막비강은 이 말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면전의 이 촌부의 얼굴이 생모를 빼닮은 탓에 왠지 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촌부는 온화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사실 너의 정체는 이미 천면신룡(千面神龍)이라는 이름으로 무림에 널리 알려져 있다. 더 이상 이름만 바꿔서는 남의 눈을 속이기 어려울 것이다.]

(내게 천면신룡이란 별호가 붙었구나!)

막비강은 비로소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이 생겼음을 알았다.

천면신룡이라는 별호는 제법 마음에 든 막비강은 웃으며 물었다.

[아주머니는 누구신데 저에 대해 그렇게 잘 아십니까?]

[내 성은 조()가다. 그리고 이 아이는 내 딸로 장몽아(張夢兒)라 한단다. 이 아이에게 장연아(張燕兒)라는 말괄량이 동생이 있는데 너는 이미 만나 보았을 것이다.]

막비강은 그제서야 내막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날수선랑 송 할머니께서 아주머니께 말씀해 주셨군요. 어쩐지 금릉에서 고친 이름까지 아주머니께서 알고 계시더라니....]

[네가 여기 온 건 비급을 찾는 일과 관련이 있겠지?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많은 무림인들이 이 근처에 출몰하고 저 낡아빠진 탑에서는 밤마다 불빛이 흘러나오더구나.]

막비강은 무림인들이 출몰한다는 조씨부인의 말을 듣고 안색이 일변했다.

[아주머니, 어떤 인물들이 이곳에 찾아왔습니까?]

조씨부인은 칠층보탑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선 우리 집에 들어와서 얘기를 나누자.]

조씨부인은 사립문을 열고 막비강을 맞아들였다.

 

조씨부인의 집은 대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진 여덟 칸짜리 초가집이었다.

비록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농가지만 뒤로는 악야계의 그림같은 봉우리들을 등지고 있고 앞쪽에는 천하절경인 경지하가 흐르고 있어 빼어난 운치를 풍겼다.

막비강이 조씨부인의 안내를 받아 초가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집 뒤에서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말한 그 바보가 왔으니 어서들 나가 봐라!]

이어 세 명의 소동들이 왁자하니 뛰어나왔다.

일곱 살에서 열 두어살까지인 이 개구쟁이들은 장연아와 장몽아를 닮아서 그녀들의 친 동생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막비강은 아이들에 둘러 쌓인 채 집 뒤쪽을 보며 웃었다.

[내가 바보라고 해둡시다. 헌데 낭자는 어떻게 내가 이곳으로 올 줄 알고 있었소?]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거라구요!]

집 뒤에서 장연아가 웃으며 나왔다. 새침 떠는 언니 장몽아와 달리 이 말괄량이의 얼굴에서는 생글생글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당신이 없어지자 마두들은 싸움을 멈추고 당신을 추격해 갔어요. 우리도 즉시 따라가려고 했는데 범개선이 할머니에게 당신이 경지하로 갈 거라 말해주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이리로 달려왔지요. 우연인지 당신이 찾아온 곳이 우리 집 근처였지 뭐예요.]

장연아가 말하는데 조씨부인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 얘기를 나누거라.]

막비강이 세 모녀를 따라 대청에 들어가니 십여 명의 남녀노소가 앉아 있었다.

날수선랑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마음씨 좋아 보이는 칠순 가량의 노부인이 일가친척으로 보이는 어른들에 둘러 쌓여 앉아있다.

조씨부인은 막비강에게 그들을 차례로 소개시켜 주었다.

막비강의 어머니 한경파를 닮은 촌부 조씨부인은 막비강이 생각했던 대로 날수선랑의 딸이었다.

, 장씨 집안과 날수선랑은 사돈간인 것이다.

장씨 집안은 지금은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지만 한 때 표국을 운영했던 무가(武家).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조씨부인의 남편 장대일(張大日)이 표행을 나갔다가 흑도의 흉사들과 시비가 붙어 크게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사고로 장씨 일족은 표국을 그만 두었고 장대일은 얼마 안 가 부상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등졌다. 즉 조씨부인은 현재 과부(寡婦)인 것이다.

조씨부인은 막비강의 생모인 한경파보다 한 살이 아래인 마흔 두살이다.

하지만 결혼은 한경파보다도 먼저 했다.

조씨부인은 불과 열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남편 장대일과 금슬이 아주 좋아서 무려 일곱명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다.

장연아 장몽아 자매 위로도 두 명의 아들이 있다.

장남은 장성대(張成大)라고 하며 벌써 스물 여섯 살이나 되었다. 조씨부인은 첫 아들을 겨우 열일곱살에 낳은 것이다.

둘째 아들 장성일(張成日)도 막비강보다 세살이 많은 스물 두 살이다.

두 아들은 이미 장성하여 집안일을 이끌어 가고 있다.

듬직한 두 아들을 낳은 후에도 조씨부인은 꾸준히 아이들을 가져서 이남삼녀를 더 낳았다.

장몽아, 장연아를 연년생으로 낳고 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은 것이다.

막내딸인 장상아(張翔娥)는 조씨부인의 남편 장대일이 변을 당했을 무렵 아직 그녀의 뱃속에 있었다.

[엄마! 젖줘!]

올해 네 살인 이 귀여운 소녀는 사람들이 보는 중에도 자꾸만 엄마의 품에 파고 들어 젖을 찾는다. 전형적인 막내딸인 장상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다.

조씨부인은 손님인 막비강이 있는 자리건만 별 거리낌 없이 저고리 고름을 풀어 가슴을 들어내고는 막내딸에게 젖을 물려주었다.

물론 젖이 나올 리가 없다.

그래도 장상아는 맛있다는 듯 엄마 젖을 빨며 한 손으로는 엄마의 다른 젖을 쥐고 조물락거린다. 아마도 아버지가 없이 자란 응석을 이런 식으로 부리는 모양이다.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한 얼굴과 달리 조씨부인의 젖가슴은 너무도 희고 곱다. 갓 쪄낸 백설기같이 하얀 그녀의 젖가슴은 또 아주 풍만하고 탐스럽다.

큼직한 수박만한 살덩이 두 개가 거친 삼베 저고리 사이에서 털렁 드러나 출렁거린다. 나이가 나이인데다가 또 무려 일곱명이나 되는 자식을 젖을 먹여 키운 탓인지 조씨부인의 유방은 좀 늘어진 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전히 상당한 탄력과 묵직한 중량감을 지녀 보기에 좋다.

막비강은 막내딸을 안고 젖을 물리고 있는 조씨부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 한경파가 너무 쌀쌀맞은 탓에 막비강은 일찍 젖을 떼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모성, 특히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고 있다.

자애스러운 표정으로 막내 딸을 안고 젖을 물리고 있는 조씨부인의 모습은 막비강이 늘 꿈꿔오던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하다.

딸에게 젖을 물리던 조씨부인은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이 딸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을 넋을 놓고 보는 막비강과 시선이 닿았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굳이 자기 젖가슴을 가리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 막비강은 장씨 집안의 사람들을 전부 소개받았다.

장신을 차린 막비강도 자신이 혈검산장을 뛰쳐나온 사정을 실토했다. 어머니를 닮은 조씨부인때문인지 장씨 집안의 사람들이 남같게 느껴지지 않은 때문이다.

[가엾기도 하지! 이젠 그만 고생하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살자구나.]

조씨부인에게 시어머니 되는 노파가 막비강의 손을 꼭 쥐며 인자하게 말했다.

막비강은 가슴이 뭉클해지고 콧날이 시큰거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푸근한 가족의 정을 느낀 때문이다.

[할머니! 말씀은 고맙지만...!]

헌데 막비강이 막 대답하려 할 때였다.

[우우우!]

돌연 멀리서 날카로운 여자의 장소성이 전해 왔다.

그 장소성을 들은 장씨 일족 어른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사돈어른이 또 그 마두들을 만난 모양이구나.]

조씨부인의 시어머니가 급히 지팡이를 들고 일어서려 했다. 비록 칠순은 넘었지만 젊은 사람처럼 정정한 것으로 보아 이 노파 역시 상당한 무공을 지닌 고수로 보인다.

하지만 막비강이 얼른 노파를 막았다.

[할머니께선 여기 계십시오. 마두들은 제가 다른 곳으로 유인하겠습니다.]

장연아가 얼른 끼어들었다.

[나도 함께 가겠어요.]

하지만 막비강은 얼굴을 굳히며 엄숙하게 말했다.

[안 되오. 나와 함께 나가면 이 집에까지 화가 미치게 되오.]

막비강의 말에 장연아는 입술만 삐쭉일 뿐 더 이상 우기지는 않았다.

[대신 이걸 좀 맡아주시오!]

막비강은 호로와 강장을 장연아에게 맡겨 두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

 

장씨 일족의 집을 나선 막비강은 외침 소리가 들려 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가 그의 눈에 추명염왕, 삼촌정, 그리고 소면호 등이 날수선랑을 포위 공격하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핫하하하!]

막비강은 마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큰소리로 광소를 터뜨리며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 저놈이 그놈이다!]

삼촌정은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에 날수선랑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는 쏜살같이 막비강 쪽으로 날아왔다.

[거기 서랏!]

추명염왕과 소면호는 삼촌정이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먼저 알 것이 염려되어 다투어 삼촌정의 뒤를 쫓았다.

날수선랑도 마두들을 유인해간 소년이 누군지 궁금하여 황급히 마두들을 추격했다.

 

막비강은 비록 일 갑자 가까운 내공을 심후한 지녔지만 이제까지 전심전력으로 무예를 연마할 시간이 없었다. 자연히 추명염왕같은 절정고수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십여리를 달렸을 때 마두들은 막비강의 바로 뒤에까지 따라붙었다. 이제 따라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다.

하지만 막비강은 나름대로 생각해둔 바가 있어 태연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당신들은 왜 나를 쫓아오는 거요?]

막비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추명염왕등을 돌아보며 물었다.

삼촌정이 맨 먼저 도착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에 서있는 소년의 얼굴은 처음 보는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막비강이 역용환을 이용하여 얼굴을 바꾼 것을 알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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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피로 물들다 (3)

 

 

상청관(上靑館) 연무장은 일백년 래 가장 많은 제자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들도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그 흔한 잔기침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쇠사슬로 온 몸을 결박당한 창허진인이 이대제자들에게 이끌려 나왔다.

상투는 풀어지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광화도장은 창허진인을 취조하겠다고 큰 소리로 말한 후에 물었다.

[창허야!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함은 너를 해하고자 하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서 장차 네가 이 무당의 천년 위업을 이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너는 오직 진실로 이 사부의 물음에 답해주기 바란다.]

광화도장의 말은 누가 들어도 가슴 속에 뭔가 꽉 힌 것이 있는 사람의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창허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체념하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사부! 말씀하십시오. 사부께서 물으시는 것이라면 제자 창허는 어떤 것이든 다 대답하겠습니다.]

광화도장은 격동하는 듯했고 운집한 제자들이 잠시 술렁거렸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네가 본파의 제자가 된 지 이제 칠년이다. 그 동안 나와 네 사숙들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우리 무당에서 천하제일고수가 탄생할 것임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 부족합니다.]

광화도장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네 자질도 범상치 않을 뿐 아니라 열성으로 배워 나와 네 사숙들을 일찍이 능가했으니 아마도 무공으로 놓고 본다면 천하에 너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너는 이미 본파의 시조이신 삼봉진인에 못지않으니...]

원로들의 머리가 애석한 듯 숙여진다.

무당 최고의 인재가 애꿎은 구설수에 오른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소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어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네게 대한 두 가지의 소문 중 어느 것도 이 사부는 믿기 어렵다. 너는 말해주겠느냐?]

창허가 묵묵히 있다가 물었다.

[어떤 소문입니까?]

광화도장이 말했다.

[첫째는 네가 신선이라는 소문이다.]

모여든 제자들이 모두 놀란다.

사문에 반도가 생겨 처단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왔는데 아주 엉뚱한 소리였던 것이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칠년 전에 네가 나를 찾아 왔을 때도 너는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세월이 너를 잊어버린 것처럼 너는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구나. 혹시 예전에 주안과(朱顔果) 같은 과일을 먹은 적이라도 있느냐?]

창허가 말했다.

[주안과를 먹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 사부께서 지난 칠년동안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모두 말씀 드리겠습니다.]

창허가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순간, 촤르르릉! 소리가 나면서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벗겨졌다.

옆에 있던 이대제자들이 놀라며 다시 결박하려 했지만 광화도장이 저지시켰다.

창허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에게 검을 빌려주시게 하면 말하기가 훨씬 수월하겠습니다.]

다시 술렁거렸다.

그의 손에 검이 들어간다는 것은 호랑이에게 날개가 돋히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광화도장이 자기의 검을 뽑아서 창허에게 건네주었다.

옆에서 원로들도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끼고 만류했지만 광화도장은 개의치 않았다.

[그만들 하라! 창허가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면 굳이 검을 쓸 필요도 없다.]

창허는 두손으로 검을 받아들며 말했다.

[제자 오직 무당산에는 사부님만이 참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광화도장은 미소를 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

창허가 받았던 검으로 자기 심장을 찔러버린 것이다.

광화도장이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창허는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피해버렸다.

광화도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너는... 자결하려느냐? 이 이만한 시련도 못참고...]

광화도장의 보검은 창허의 심장을 꿰뚫고 등뒤로 가시처럼 솟아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심장이 식는 것같은 싸늘함을 느꼈다.

창허가 고개를 저었다.

[제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편안합니다.]

놀랍게도 창허의 음성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으며 죽음의 기운도 풍기지 않았다.

광화도장은 말문이 막히고 맥이 탁 풀려서 도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앞에서 천하의 기문(奇聞)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는 이런 상태를 일컬어 신선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선이 죽지 않는, 또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면 제자가 바로 신선입니다.]

쿠웅!

그 순간 상청관 안에는 바늘만 떨어져도 굉음으로 들렸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자가 죽지 않는 존재라니...

창허는 자기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심장에 꽂았던 검을 옆으로 밀었다.

검날이 갈비뼈를 자르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창허는 조금 얼굴을 찌푸렸을 뿐 피한방울 흐르지 않았다.

광화도장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는... 너는 정말 신선이었구나. 그럼 이 질문에도 대답해다오. 장경각의 마공을 익혔는지.]

그는 무당파의 장문인이다. 상황이 어떻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큼은 해야한다.

두 번째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이미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 자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창허가 말했다.

[익혔습니다.]

[? 무엇 때문에 익혔느냐?]

창허가 대답했다.

[본파의 무공은 탈속(脫俗)합니다. 그 뜻과 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동작 하나에도 탈속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제자가 생각할 때 다른 도가의 문파들도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광화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본파는 그런 점을 중시한다. 공동파나 아미파도 마찬가지니라.]

창허가 말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원래 속된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오욕과 칠정을 가지고 나는데 어찌 그것을 모두 버리고 속되지 않은 것만 취할 수 있습니까? 이는 뿌리를 버리고 꽃이나 열매만을 좋아함과 마찬가지입니다.]

광화도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다. 도를 닦음은 먼저 몸을 청정케 하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다. 마침내 우화등선하는 것은 나중의 결과일 뿐이니라. 우리 도가의 청정케 할 몸은 진신(眞身)이니 몸과 정신이 분리된 것이 아니지.]

창허가 물었다.

[진신이 몸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것이듯이, 지금의 이 몸도 정신과 함께 있는 것인데 굳이 진신을 구해서 무엇합니까?]

광화도장이 말문이 막혔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가 마공을 익힌 이유는 바로 이같은 데 있습니다. 마공이란 원래 인간의 속성을 추종하여 창안된 것들이니 인간을 더욱 잘 알게 해줍니다. 제자도 인간인 이상 인간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찌 참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솔잎을 씹고 이슬을 받아 마신다고 해도 인간을 알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광화도장이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너는... 너는 정말 본파의 대기(大忌)를 범하는구나. 너를 파문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창허가 광화도장에게 검들 돌려주며 말했다.

[사부! 제자 창허는 오늘로 사라집니다. 무공을 쓰더라도 사부께 배운 검은 쓰지 않을 것이고, 무당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광화도장은 앞이 막막했다.

파문을 하려면 먼저 무공을 폐하는 게 순서지만 죽지도 않는 자에게 무공을 폐하려 한다는 것도 한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도 하나의 전례로 남을 것임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제자들에게 명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창허의 기해혈을 파괴하고 주근(主筋)을 자르게 했다.

그러나 창허에겐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피도 나지 않고 다만 칼이 지나갔다는 정도였다.

창허는 그제서야 무당에서의 일이 끝났다는 듯이 껄껄 웃고는 구름처럼 둥실 떠올라서 진짜 구름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무당의 아랫 제자들은 신선의 우화등선을 구경하고 절을 하고 야단법썩을 떨었다.

그 사이에 자기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일을 처리했던 광화도장은 앉은 채로 영혼만 우화등선하고 말았다.

제자들이 소란을 피울 때 그의 영혼도 창허와 함께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X X X

 

[자네는 노도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진양진인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선배들에게 이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었네. 그리고 가슴 깊이 새겨두었지. 남들이 노도를 삼백년 래 무당 최고수라고 하는 것도 사실 노도가 창허진인을 염두에 두고 수련을 했기 때문일 걸세. 한데... 허허... 노도는 그 전설 속의 창허진인을 만났네. 낭아봉을 쓴다는 것과 내가 모르는 무공들을 쓴다는 것 외에는 들었던 것과 똑같았네. 싸우고... 도망쳤지.]

진양진인이 자기가 전설속의 주인공인 창허진인과 싸웠다는 사실에 아주 흐뭇해하는 표정이었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의 보검으로 자른 돌들을 쌓아서 방을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방안과 밖에 따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믿기 어려울 걸세. 죽지 않는 불사신이라니... 더구나 우리를 찾는 자라는 사실이...]

현천록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원래 나와 만나기로 한 포두화상이 왔으면 이야기가 좀 달라졌을 것이네. 애상곡은 포두화상을 부르는 소리였는데 창허진인이 왔지.]

현천록이 말했다.

[포두화상은 도장보다 무공이 높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비슷하네. 하지만 그와 내가 손을 잡으면 최소한 패하지는 않을 걸세.]

[대단하군요.]

[포두화상은 소림사에 적을 두고 있는 중이지. 칠십이종 절기 중 서른 여덟 가지를 익혔으니 달마(達磨)와 육조(六祖) 이후로 최고수인 셈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무슨 수로 포두화상을 여기까지 불러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런 건 생각하지 말게. 나는 양의신공을 익혔으니 그 속에 포함된 양심공(兩心功)도 당연히 알고 있네.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괜찮네만, 자네는 심력을 아끼게. 당장 양의신공을 익혀야 하니까.]

현천록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진양진인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현천록은 자기가 바로 일곱째 진양진인과 똑같은 불사신이라고 말한다면 진양진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며 웃었다.

그는 느긋하게 마음먹고 진양진인이 하는 대로 따라갔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욕구를 신통하게도 잘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진양진인이 양의신공의 구결을 읊어주었다.

현천록은 그가 두 번째로 읊을 때 이미 구결은 완벽하게 암기해버렸다.

하지만 진양진인은 일곱 번이나 거듭 읊어주었다.

현천록은 그 사이에 양의신공의 내용을 해득하기 위해서 애쓰는 중이었다.

[첫째는 구결의 운율을 잘 들어놓아야 하네. 노랫가락처럼 운율부터 이해해야 외울 수가 있네. 외고 난 다음에는 앞에서부터 구결을 한구절씩 풀어서 실제로 연공을 해야하네.]

진양진인이 말했다.

[무당에서도 양의신공을 끝까지 익힌 사람은 불과 다섯을 넘지 않네.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고는 무당의 최고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태극혜검(太極慧劍)을 익힐 수도 없지.]

현천록이 물었다.

[태극혜검은 실전되지 않았습니까?]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쳤다.

[무림에서는 노도가 태극혜검을 다시 복원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 태극혜검이야말로 검술의 정화지. 창허진인도 태극혜검만큼은 나보다 못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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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구원의 손길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적수공권으로 다섯 명의 노개를 상대로 싸우는 것을 보고 무공이 대단하다고 느끼긴 했었다.

하지만 강장을 손에 끼고 발출하는 공세에 거의 일 갑자의 공력이 함유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흠칫 놀라며 급히 마주 일장을 뻗어냈다.

!

한차례 굉음이 울려 퍼지고 추명염왕은 몸을 약간 휘청했지만 막비강은 연달아 세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또 한 번 받아 봐라!]

그러나 막비강은 재차 여력을 돋우어 재차 일장을 발출했다.

추명염왕은 먼지가 자욱하여 상대방의 상황을 보지 못하고 있던 중 갑자기 또 한 줄기 강맹한 경기가 엄습해 오자 내심 깜짝 놀라며 급히 쌍장을 휘두르고 비석 뒤로 피했다.

헌데 그가 막 두 개의 크지 않은 비석으로 형성된 협도(夾道)까지 물러나갔을 때였다.

[차앗! 받아랏!]

돌연 머리 위에서 차가운 외침 소리와 함께 한 줄기 예리한 강풍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그것은 예의 소녀가 발사한 단전이었다.

[요 망할 계집년이...!]

추명염왕은 대로하여 어깨를 비틀어 단전을 피한 후 쏜살같이 몸을 솟구쳐 큰 비석 위에 내려섰다.

이때 하나의 조그만 인영이 작은 비석 뒤로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

콰르릉!

추명염왕은 부리나케 추격하여 노성과 함께 장력을 격출했다.

그러나 그 조그만 인영은 몹시 영활하여 경기가 엄습해 오자 허리를 비틀어 비석에 몸을 바짝 붙이며 손목을 뒤집어 한 줄기 경풍을 뻗어냈다.

추명염왕은 이 일장이 반드시 격중되리라 믿었었다. 헌데 의외로 소녀가 공중에서 허리를 비틀어 몸을 석벽에 붙이며 반격을 가하자 오히려 추명염왕 자신의 몸이 허공에 뜨는 결과가 되었다.

그는 상황이 다급해지자 어쩔 수 없이 한바퀴 곤두박질을 하여 오 장 밖으로 날아 나갔다.

추명염왕은 본래 성격이 흉악한데다 연달아 기습까지 받자 더욱 화가 치밀어 만면에 짙은 살기를 가득 머금었다.

하지만 그가 바닥에 내려선 후 주위를 살폈지만 이미 그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어린 계집년이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는구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중 비석 모퉁이에 조그만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하고 급히 덮쳐 갔다.

꽈르릉!

그러나 그자가 미처 비석 모퉁이에 도착하기도 전에 한 줄기 강맹무비한 장풍이 엄습해 왔다. 추명염왕은 깜짝 놀라 허리를 비틀어 옆으로 피했다.

다음 순간 그는 비석 모퉁이에서 기습을 가한 사람이 막비강임을 보고 괴소를 터뜨리며 재빨리 그의 퇴로를 차단했다.

[낄낄낄! 어린 녀석아, 너는 그래도 비급이 숨겨져 있는 장소를 말하지 않겠느냐?]

[!]

막비강은 차가운 코웃음만 날릴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추명염왕은 그를 일장에 격살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알아내야 하는지라 눈에서 흉망을 발산하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이놈아! 솔직히 내가 일장을 때리면 네놈은 뼈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비급이 숨겨진 장소만 말한다면 나는 너를 제자로 맞이하여...!]

헌데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킬킬, 헛소리 마라! 곽가야!]

돌연 한소리 음침한 일갈과 함께 막비강의 몸이 선 자세에서 갑자기 뒤로 확 끌려갔다. 어느 틈엔지 난쟁이 삼촌정이 나타나 막비강을 낚아챈 것이다.

[이 난쟁이놈이...!]

추명염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급히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달아나는 난쟁이를 추격했다.

 

삼촌정은 비록 무예가 고절하지만 옆구리에 사람을 끼고 있는지라 곡구까지 나와선 곧 추명염왕에게 추격 당했다.

삼촌정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네가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나는 이 어린 녀석부터 먼저 죽여 버리겠다.]

추명염왕은 어리둥절하더니 곧 뒤따라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죽일 테면 죽여라. 그러면 누구도 비급을 얻지 못하게 되겠지.]

바로 그때였다.

[으핫하하! 이 교활한 늙은이들 같으니! 너희들은 나를 그 할망구와 싸우게 하고는 여기 와서 어린 녀석을 붙잡아 보물의 행방을 추궁하고 있구나!]

거석 위에서 우렁찬 광소 소리와 함께 한 명 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바로 소면호 고금이었다.

[참가한 사람은 누구나 비급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 소문에 의하면 청구단서는 상, , 하 세 권으로 나뉘어졌다니 우리 세 사람이 각각 한 권씩 나누어 가지자.]

추명염왕은 혼자 삼킬 수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찬성이다. 난쟁아, 너는 우선 그 어린 녀석의 혈도를 풀어 주어라! 그래야만 비급의 행방을 물을 수 있을 게 아니냐.]

[알았다.]

삼촌정이 막비강의 허리 부위를 살짝 꼬집었다.

[죽엇!]

헌데 막비강은 혈도가 풀리기 무섭게 오른손에 낀 강장으로 삼촌정의 가슴을 공격했다. 동시에 왼손의 신녀비로는 추명염왕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삼촌정은 연마혈(軟痲穴)이 찍힌 상태에서 막비강이 반항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억!]

퍼펑!

쌍방의 거리가 너무 가깝고, 또 갑작스럽게 발생한 변고인지라 삼촌정은 막비강의 일장에 왼쪽 옆구리를 격중당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추명염왕도 막비강이 일초이식(一招二式)으로 자기를 공격할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해 한광이 번뜩하는 것을 보고서야 급히 뒤로 후퇴했다. 그러나 이미 신녀비 끝이 스쳐 장포 자락이 찢어졌을 뿐 아니라 허리띠까지 끊어져 급히 뒤로 일 장 가량 후퇴한 후 흘러내린 바지춤을 끌어올렸다.

화라라락!

막비강은 일초를 성공하자 수중의 신녀비로 검화를 형성한 채 급히 도주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핫하하하. 어린 녀석아, 도망칠 필요 없다.]

회색 인영이 번뜩하더니 한 노인이 막비강의 면전에 도착하여 일장을 격출하며 대소를 터뜨렸다. 바로 소면호 고금이었다.

막비강은 부득불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노부는 너와 아무런 원한이 없으니 비급이 숨겨진 장소만 말하면 노부는 책임지고 널 보호해 주겠다.]

소면호의 말에 막비강은 화가 치밀어 노성을 질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어 신녀비를 휘두르며 앞으로 덮쳐 나갔다.

[낄낄낄!]

소면호는 괴소를 터뜨리더니 눈에서 짙은 살염을 발산하며 번개같이 일장을 반격했다.

막비강은 상대방의 징그러운 표정에서 살수를 펼쳐내려는 것을 알고 급히 강장을 마주 뻗어냈다. 그러나 그가 강장으로 내친 기운을 뚫고 여전히 한 줄기 강맹무비한 잠경이 엄습해 왔다.

(이제 끝장이구나.)

막비강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소면호의 일장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의 표정이 되었다. 바로 그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꽈르릉!

돌연 옆에서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이 휘감아 나와 막비강을 일 장 밖으로 날려보냈다.

[고 영감, 너는 우리 일을 방해할 생각이냐?]

막비강이 막 몸을 가누었을 때 뒤에서 우렁찬 음향과 삼촌정의 음성이 전해 왔다. 난쟁이 삼촌정이 소면호를 급습한 것이었다.

난쟁이의 외침을 들으며 막비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놈도 사람 같은 놈이 없구나! 이 틈에 달아나자!)

생각을 굴린 막비강은 즉시 몸을 솟구쳐 날아 나갔다.

[핫하하하! 또 재주를 부리려느냐?]

하지만 추명염왕이 한차례 광소를 터뜨리더니 몸을 솟구쳐 그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이어 그는 양팔을 휘둘러 열 줄기 경풍으로 막비강의 전신요혈을 공격했다.

막비강은 일년 넘게 네 명 무림 고수의 무학을 연마했는지라 이미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즉시 구로략파(鷗鷺掠派) 초식을 펼쳐 옆으로 비스듬히 삼 장 가량 날아 나가 추명염왕의 십지구혼(十指句魂) 일초를 간신히 피해냈다.

바로 그때였다.

[늙은 것들이 정말 염치가 없구나!]

화라락!

한소리 날카로운 일갈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유성처럼 막비강의 면전에 내려섰다.

막비강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인영은 한 명의 백발노부인이었다.

 

나타난 백발의 노부인은 나이는 육순이 넘어 보이고 머리카락은 눈이 내린 듯 하얗다. 하지만 얼굴에는 주름이 거의 없으며 또 이목구비는 수려하기 이를 데 없다. 젊었을 때는 대단한 미인이었던 듯 여전히 미태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 할머니를 전에 어디서 봤을까?)

막비강은 이 아름다운 백발의 노부인 얼굴이 왠지 눈에 익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막비강이 알고 있는 누군가와 흡사했으나 일시적으로 그게 누구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이야! 노신 날수선랑(辣手仙娘)이 여기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노부인은 한 손에 괴장(拐杖;지팡이)을 들고 막비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수선랑! 이분이 바로 칠절 중의 한 분인...!)

막비강은 노부인의 이름을 듣고 흠칫 놀랐다.

 

날수선랑!

 

성이 송()씨라고만 알려진 그녀는 바로 백도의 고인들인 강호칠절 중 한 명이다. 성격이 불같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아 흑도와 사마외도의 무리들은 그녀를 야차나 나찰보다도 더 무서워했다.

막비강이 놀랄 때였다.

[너희들 세 사람의 나이를 합하면 이백 살도 넘거늘 아직 약관도 안된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

백발노파는 괴장으로 추명염왕을 가리키며 차갑게 외쳤다.

추명염왕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노파! 노부가 노파를 무서워할 줄 아느냐? 아까는 우리 세 사람이 오랫동안 싸움을 하여 허점을 보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틀리니 내가 독수를 펼쳐내도 무정하다고 탓하지 마라!]

삼촌정이 옆에서 웃으며 부채질을 했다.

[흐흐흐, 당신들은 한 명은 선랑(仙娘)이고 한 명은 염왕(閻王)이니 고하를 가름해야 옳지. 고 노인과 노부가 증인이 되어 주겠다.]

날수선랑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난쟁아, 노신는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이때 막비강이 얼른 말했다.

[노선배님! 그들의 간계에 걸려들지 마십시오. 염왕은 후배가 상대하겠습니다.]

[너는 그의 독장이 두렵지 않느냐?]

[후배는 백독이 불침하니 그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습니다.]

헌데 그때였다.

[! 허풍떨지 마! 나는 아까 네가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어.]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소녀가 범개선과 함께 장내에 도착하여 냉소를 날렸다.

방금 전 막비강은 추명염왕이 독장으로 개방 제자들을 살해할 것이 염려되어 비석 아래의 구멍에서 뛰어나갔었다. 소녀는 그것을 보고 막비강이 도주한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막비강은 그녀의 이 말에 검미를 치켜 올렸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두고 보아라!]

이어 한 걸음 나서며 강장을 낀 손으로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을 격출했다.

추명염왕은 이미 막비강과 싸운 적이 있는지라 막비강의 공력이 자기보다 별로 약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자기의 진력을 보존해 두기 위해 얼른 옆으로 피했다.

[송 노파! 너는 후배를 대신 죽게 만들 생각이냐?]

날수선랑은 냉랭히 쏘아붙였다.

[노마는 이 아이가 무서우면 빨리 꼬리를 감추고 도주해라!]

이어 그녀는 막비강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이야, 내가 여기 있는 이상 그는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할 테니 마음놓고 싸워라!]

막비강은 대답을 함과 동시에 검장(劍掌)을 동시에 발출했다. 그는 소녀 앞에서 실력을 과시하기로 결심했는지라 처음부터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의 절학을 펼쳐냈다. 순간 검풍이 세찬 파공성을 일으키고 장풍이 곧장 추명염왕에게로 쏘아져갔다.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추명염왕은 비록 이렇게 고함을 질렀지만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그는 즉시 쌍장을 비벼 손바닥을 암흑색으로 변하게 한 다음 장풍검영의 빈틈으로 초식을 뻗어냈다.

곧 두 노소는 치열하게 얽혀 돌아갔다.

소녀는 막비강이 추명염왕과 대등하게 싸우는 광경을 보고 만면에 부러운 빛을 띠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삼촌정과 소면호가 몇 마디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몸을 솟구쳤다.

[송 노파! 한가하게 구경만 하지 말고 같이 놀아보자!]

날수선랑은 얼굴을 굳히며 괴장을 휘둘렀다.

[연아(燕兒)! 빨리 후퇴해라!]

소면호와 삼촌정은 날수선랑의 실력을 잘 아는지라 뒤로 각각 한 걸음씩 후퇴하며 동시에 병기를 뽑아 들었다. 흑도팔흉의 실력은 아무래도 강호칠절보다 손색이 있는 것이다.

날수선랑은 상대방에게 기선을 제압당하면 손녀 연아를 보호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서 즉시 괴장을 휘두르며 상대방 두 사람에게 맹공을 가했다.

일순 편영(鞭影)이 난무하고 장풍(杖風)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세 사람은 한데 어울려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연아라 불린 소녀는 손에 길이가 한 자 가량 되는 소궁(小弓)을 들고 짧은 화살을 활줄에 걸어 소면호와 삼촌정을 겨냥했다. 하지만 세 고수가 워낙 빠르게 돌아가며 싸우는 바람에 발사하지는, 못했다.

!

그러자 연아는 갑자기 목표를 바꾸어 추명염왕에게로 화살을 발사했다.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생포하기 위해 허초만 발출한 탓에 별로 우세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위를 놓는 예리한 소리가 들리자 급히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짧은 화살이 세찬 바람을 대동한 채 간발의 차이로 그의 뱃가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막비강은 이 틈을 이용하여 강장으로 추명염왕의 왼쪽 어깨를 격중시켰다.

!

[크흑!]

순간 추명염왕은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일 장 가량 후퇴했다.

[요 쥐방울만한 놈이!]

일격을 당한 추명염왕은 독이 올라 한 자루 금륜(金輪)을 뽑아 들고 막비강을 향해 덮쳐 왔다.

막비강은 상대방이 금륜을 휘두르자 번뜩이는 금광과 함께 사면팔방에서 강맹한 장영이 눌러 옴을 느끼고 내심 깜짝 놀랐다.

(야단났구나!)

추명염왕은 맹공을 가하며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낄. 이놈아! 빨리 병기를 버리고 항복하지 않으면 이 전륜차(轉輪車)로 네놈의 몸뚱이를 걸레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노마! 아무리 협박해도 나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놈이 보통 고집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네놈을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 주마!]

헌데 추명염왕이 말을 막 끝냈을 때였다.

! !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단전(短箭)이 연달아 날아오더니 이어 하나의 조그만 인영이 번개같이 덮쳐 왔다.

원래 연아는 자기가 단전을 발사한 때문에 오히려 막비강이 궁지에 몰리자 다급해진 나머지 연달아 단전을 발산한 것이다.

[어린 계집년! 너부터 수습해야겠구나!]

추명염왕은 눈에서 무서운 살염을 발산하며 연아를 향해 흉험한 일장을 격출했다.

[!]

날수선랑은 이 광경을 보고 경악의 함성을 질렀다. 그녀는 급히 수중의 괴장으로 상대방을 후퇴시킨 후 연아 곁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이때 그녀보다 더욱 빠른 사람이 있었다.

[받아랏!]

위기일발의 순간 막비강이 함성을 지르며 전신의 진력을 뽑아 올려 추명염왕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던 것이다.

퍼펑!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막비강은 추명염왕과 일장을 주고받아 몸이 허공으로 날려 나갔다.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전륜차를 돌파하고 나와 연아를 구출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여 뒤로 세 걸음 가량 밀려났다. 다행히 연아는 부상을 입지 않고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연아! 너는 먼저 가거라!]

날수선랑은 공중에서 한바퀴 맴돌아 튕겨져 나온 막비강의 몸을 받은 후 급히 고함을 질렀다.

[크크! 가긴 어딜 가느냐?]

하지만 세 마두가 막비강 등 세 사람을 포위했다.

헌데 그 직후였다.

[개방 제자들은 모두 공격 준비를 갖추어라!]

범개선이 고함을 질러 상세가 완쾌된 십여 명의 개방 제자가 세 마두를 첩첩이 포위했다.

[!]

추명염왕은 경멸의 코웃음을 날리더니 날수선랑에게 냉랭히 말했다.

[송 노파! 몇 년 더 살고 싶거든 어린 녀석은 남겨놓고 손녀만 데리고 꺼져라!]

쌍방이 잠시 입씨름을 하며 휴식을 취하는 틈을 이용하여 막비강은 날수선랑의 품속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추명염왕을 향해 사정없이 살초를 발출했다.

날수선랑은 괴장을 휘두르며 삼촌정과 소면호를 공격했다.

연아 역시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어 범개선에게 손짓을 했다.

[당신들은 나의 할머니를 도우세요. 나는 저 어린 녀석을 도우겠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검끝으로 추명염왕의 등뒤 명문사혈(命門死穴)을 향해 찔러 갔다.

이리하여 싸움의 국면은 두 조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한 조는 막비강과 연아가 합세하여 추명염왕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고, 또 한 조는 날수선랑과 개방 제자들이 삼촌정과 소면호를 포위 공격하는 것이었다.

추명염왕은 비록 위력이 강맹무비한 전륜차를 지니고 있지만 소년 소녀가 절묘하게 배합을 이루어 공격하자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삼촌정과 소면호는 날수선랑 한 사람을 상대할 땐 약간 우세했었다. 하지만 범개선이 이끄는 개방 제자들이 측면과 배후에서 공격을 가하자 판도가 뒤바뀌어 간신히 자기들의 몸만 보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쌍방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화라라락!

문득 장내에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팔괘도포(八卦道袍)를 입은 노도사(老道師)가 나타났다. 이 노도사의 신법은 실로 유령 같아 장중의 고수들 누구도 그가 나타난 줄 모르고 있었다.

[...!]

그 노도인은 눈에서 형형한 광망을 발산하며 쌍방의 격전을 잠시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하, 여기서 여러 고인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소. 그런데 여러분은 무슨 일로 이렇게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소?]

(저자는...!)

날수선랑은 나타난 사람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오봉도인(五峯道人) 왕존일(王尊一)!)

(저 노마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니...!)

추명염왕 등 세 마두 역시 그 노도를 알아보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봉도인 왕존일!

 

그자는 오십 년 전부터 귀신이 보아도 두려워했다는 일대의 마두로 천하오대기인(天下五大奇人) 중에 드는 전설적인 고수였다.

오기(五奇)는 육요(六妖), 칠절(七絶), 팔흉(八凶)보다 한 배분 위의 고인들이었다. 비록 추명염왕 등이 알아주는 거마들이긴 하지만 오기 중의 한 명인 오봉도인의 잔인함에는 많이 부족함이 있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느 한쪽을 도우면 다른 한쪽이 참패를 면치 못할 것은 정해진 이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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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단양(丹陽)> . 거대한 강과 직선의 운하가 만나는 사거리 교차점에 자리한 도시. 많은 배가 운하와 강을 오가고 있고. 부두에는 배들이 정박해있다.

부두의 배들. 배에는 인부들이 짐을 싣거나 승객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부두에서 배에 잇댄 다리 비슷한 것을 통해 오르 내린다.

승객용의 어느 배. 그 배 입구에서 선원과 얘기중인 두 여자. 진삼낭과 이진진 모녀인데 죽립을 구해 쓰고 있다. 진삼낭이 선원에게 요금을 주는 중이다.

진삼낭; [제남 근처 임청(臨淸)까지 두 사람 요금은 이거면 되지요?] 몇 닢의 동전을 선원이 내민 두 손에 떨궈 주고

선원; [승선요금은 되었소.] [하지만 식사는 알아서 해결해야만 하오.] 음험한 인상이다.

진삼낭; [알겠어요.]

선원; [이제 배에 타셔도 좋소.] 옆으로 물러서고.

진삼낭; [가자.] 앞장서서 배로 올라가고. 이진진이 따라 올라가는데

두 모녀의 뒷모습 보며 히죽 웃는 선원. 사실 이자는 흑사회 소속이다.

배로 올라가는 두 모녀. 배에는 선실도 있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이 갑판에 앉아있다. 뱃전을 등지고. 헌데

먼저 배 안으로 내려서는 진삼낭.

뒤이어 배 안으로 들어오려는 이진진. 헌데

!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는 이진진

이진진; [!] 휘청하며 쓰러지려 하고

진삼낭; [조심해라!] 급히 이진진을 부축하고. 하지만

이진진; [흐윽!]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주변 사람들 힐끔거리고

진삼낭; [왜 그러니? 어디가 아픈 거야?] 이진진을 뱃전에 앉히며 걱정스럽게 묻고

이진진; (...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같은 고통이 느껴졌어.) (설마... 설마...) 주르르! 가슴을 쥐어짜며 고통스러워하면서 눈물 흘리고. 그러자

[!] 무언가 깨닫는 진삼낭

진삼낭; [혹시... 혹시 네... 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덜덜 떨며 말을 잇지 못하고

이진진; [어떻게 해요 어머니? 아버지 어떻게 해요?] 애절하게 울고

진삼낭; (정말이로구나.) 털썩! 충격 받아서 주저앉고

진삼낭; (진진이는 어려서부터 먼 곳에서 벌어진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아맞히곤 했다.) 주르르 눈물 흘리고.

진삼낭; (그 능력으로... 아버지인 그이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차린 것이다.) 울고. 이진진도 그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고

진삼낭; (예견하긴 했지만... 막상 닥치니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가슴을 누르며 울고.

진삼낭; (미안해요 여보! 당신 홀로 세상을 등지게 해서 죄송해요.) 필사적으로 울음 참으며 울고. 헌데 바로 그때

[절경이로구만! 절경이야!] ! ! 누군가 박수치며 웃는 소리가 들려 기겁하는 진삼낭과 이진진

사우; [딸년 쪽이 경국지색이라는 얘긴 들었지만 어미 쪽도 만개한 꽃 같을 줄은 몰랐어!] 선실 앞에 놓인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웃고 있는 사우. 그리고 배 안에는 이십여 명의 건달들이 서서 두 모녀를 포위하고 있다. 승객들은 겁에 질려 배에서 내리고 있고. 건달들이 쫓아내는 중이다.

그런 건달들의 손에 새끼손가락이 없는 것 크로즈 업.

진삼낭; [단지회!] ! 이를 갈며 급히 양쪽 소매 속에서 휘어진 칼을 뽑으며 일어난다. 이진진을 보호하는 자세로. 이제 배 안에는 두 모녀와 단지회 건달들만 남는다.

사우; [눈치도 참 빨라.] [하긴 그렇게 영악하니까 여기까지 도망쳐올 수 있었겠지.] 거만하게 앉아서 웃고

진삼낭; (함정!) 이를 갈며 배 밖을 보고.

배 밖에는 요금을 받았던 선원이 히죽 거리며 보고 있고

진삼낭; (단지회는 우리 모녀가 배를 타기 위해 포구로 올 걸 알고 있었다.) 사우를 보고. 이어

진삼낭; (그래서 조직원들을 포구에 배치해두었다가 우릴 이 배에 타게 한 것이다.) 절망의 표정으로 선원을 노려보고

사우; [제안을 한 가지 하마.]

돌아보는 진삼낭

사우; [순순히 내 수청을 들면 딸년은 사창가가 아니라 고관대작의 첩으로 팔아주겠다.] 입맛 다시며 진삼낭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

진삼낭; [개수작 말고 덤벼라.] 칼로 사우를 겨누며 이를 갈고

진삼낭; [오늘 여기서 누가 세상 하직할지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사우; [그년, 앙칼져서 더 회가 동하는군.] 히죽 웃고

사우; [그년 잡아서 내 앞에 눕혀라.] [목숨만 붙어있으면 되니까 난도질해도 상관없다.] 손짓하고

[존명!] [맡겨주십시오 사두!] 건달들이 사방에서 칼을 겨누며 진삼낭에게 다가오고

진삼낭; (여기까지로구나.) 처연한 미소

진삼낭; (진진이가 살아서 지옥을 경험하게 하지 않으려면 내 손으로 목숨을 거둬줘야할지도 모르겠다.) 비장한 표정으로 건달들을 노려보고. 그때

이진진; (달아날 수도 없게 되었다. 말 그대로 절체절명...) 절망하고. 그러다가

[!] 무언가 깨닫는 이진진

급히 자기 허리춤에 차고 있는 호리병을 돌아보고

이어 떠오르는 #47>의 장면

 

운신장; [몽운연형호(夢雲鍊形壺)라는 것이다.] [이름 그대로 구름같은 꿈을 이루어주는 힘을 지닌 호리병이지.]

이진진; [무척 귀한 것같은데... 왜 제게 주시는 것인지요?]

운신장; [나보다는 네게 더 유용할 것같아서 주는 것이란다.] [또 나와의 인연을 잇게 하기 위해서고...] 일어나고

이진진; [이 호리병에 어떤 쓰임이 있는지요?] 따라서 일어나고

운신장; [필요한 것이 있으면 뚜껑을 열고 간절히 원해 보거라. 그럼 몽운연형호가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슈우! 말하는 운신장의 몸이 구름에 덮이고

회상 끝

 

이진진; (몽운연형호!) 급히 허리띠에서 호리병을 끌러내고

이진진; (지금이 바로 이걸 쓸 때야.) ! 호리병의 마개를 열고. 이어

이진진; (도와주세요 선녀님!) 호리병을 잡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운신장을 떠올리면서

 

#121>

[!] 무언가 느끼는 운신장. 높고 험한 바위산 위에 서있었다. 산 아래로는 강가에 세워진 금릉의 전경이 펼쳐져 있다.

<도와주세요 선녀님!> 이진진이 애원하는 소리가 들리고

운신장; (그 아이가 위험에 처했구나!) 놀라며 두 손을 결을 지어 주문을 외우고

운신장; (구름의 주인이 명하노니... 몽운연형호는 그 힘을 드러내라!)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고

 

#122>

다시 단양의 부둣가

배 위에서 건달들이 포위망을 좁히며 다가오고. 두 자루 칼로 맞서려는 진삼낭의 절망적인 몸짓. 그때

[!] 사우 흠칫!

진삼낭의 뒤에 주저앉은 채 호리병을 두 손으로 쥐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보이고.

사우; (저 년, 뭐하는 건가?) 갸웃

사우; (천지신명에게 도와달라고 빌기라도 하는 건가?) 생각할 때

츠으! 이진진이 쥐고 있는 호리병이 빛을 발하고

사우; (호리병이 빛을 발한다!) 눈 부릅뜨고

사우;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고 한다.) + [그년들을 제압하라.] 다급히 외치고. 그러자

[치자!] [살고 싶으면 순순히 잡혀라!] 건달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진삼낭에게 덤비고. 진삼낭도 맞서 칼을 휘두르려 하고. 바로 그때

! 간절히 기도하는 이진진의 두 손에 들린 호리병이 빛을 발하더니

! 호리병에서 엄청난 구름이 폭발적으로 치솟고

[!] [으헉!] [이게 무슨...] 건달들 기겁. 진삼낭도 깜짝 놀라 돌아보고. 그들을 휘감는 대량의 구름

사우; [술법이로구나!] 벌떡 일어날 때

! 화악! 배 전체를 뒤덮는 엄청난 양의 구름

[! 저게 뭐지?] [구름이 갑자기 일어나 배를 뒤덮었다.] [히익!] 배에서 내린 승객들이나 다른 배를 오르내리던 짐꾼과 선원들 기겁하며 물러서고. 겁에 질려 도망치는 자들도 있고.

화악! 쿠오오! 사방으로 퍼지는 구름. 겁에 질려 강물로 뛰어드는 자들도 있고. 이윽고

휘이! 강 바람에 구름이 흩어지고

[!]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의자에서 일어나 있던 사우 눈 부릅.

! 배 안에서 진삼낭과 이진진 모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다. 건달들은 배에서 뛰어내렸거나 구석으로 물러서 겁에 질려 있고

사우; (계집들이 사라졌다.) 눈 부릅뜨고

사우; (어쩐지 건드리면 안되는 계집들을 건드린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구나.) 겁에 질린 표정.

 

#123>

다시 운신장이 있는 산 정상

지지지! 눈 감고 주문을 외우는 운신장의 몸 주위로 벼락이 흐르고. 그러다가

[!] 무언가 느끼는 운신장

운신장; [성공했구나.] 안도하며 눈을 뜨고

운신장; [그 아이가 몽운연형호의 힘을 제대로 깨워서 위기를 벗어났다.] 결을 지었던 손을 풀고

운신장; [역시 이진진이란 아이가 우리 신녀문을 천마의 족쇄에서 풀어줄 열쇠였던 것이다.] 만족하며 웃고

<아연아가씨의 아들은 찾지 못했지만 내 사문을 위해서는 큰 성과가 있었다.> 운신장의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124>

<-무산(巫山)> 깎아지른 바위산과 깊고 거친 계곡으로 이루어진 산

그 산 깊은 곳에 자리한 고대 유적같은 폐허. <아랑힐월>에 나온 신녀문의 폐허다.

그 폐허가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 서있는 서양풍의 정자.

화악! ! 갑자기 정자 안에서 구름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화악! 스스스! 흩어지는 구름 속에 두 여자의 실루엣이 보이고

! 드러나는 정자 안의 상황.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두 손으로 호리병을 쥐고 있는 이진진. 그 앞에서 양손에 칼을 든 손으로 앞으로 가리고 있는 진삼낭. 두 모녀 모두 눈을 감고 있다.

천천히 눈을 뜨는 진삼낭. 직후

[!] 경악하는 진삼낭

진삼낭의 시점. 눈 아래 펼펴진 광활한 신녀문의 폐허

진삼낭; [... 이럴 수가...] 놀라 비틀

이진진; [어머니!] 눈을 뜨고

이진진; [무사하세요?] 일어나려 하며 묻고

진삼낭; [... 난 괜잖다.] 돌아보고

진삼낭;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영 이해가 안되는구나.] 정자 밖을 보며 말하고

[!] 일어나서 역시 정자 밖을 보다가 놀라는 이진진

진삼낭; [대체 그 호리병이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이냐?] 이진진이 여전히 들고 있는 호리병을 보며

이진진; [저도 잘 모르겠어요.] 고개 저으며 호리병을 보고

이진진; [그냥 가장 안전한 곳으로 어머니와 저를 보내달라고 기원했는데...] [이 호리병의 판단으로는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던 것같아요.]

진삼낭; [대체 여기가 어디기에...] + [!] 말하며 정자 천장 쪽을 보다가 눈 치뜨고

<巫山 神女門>이란 글이 적힌 현판이 천장 끝 쪽에 걸려있다.

진삼낭; [... 무산 신녀문(神女門)!] 흥분하며 현판을 올려다보고. 이진진도 놀라서 올려다보고

진삼낭; [여긴... 여긴 아무래도 무산인 것같다. 무산신녀(巫山神女)의 전설이 서려 있는...] 흥분하며 다시 신녀문의 유적을 내려다보고

이진진; (이곳이 정말 무산이라면 금릉과는 오천 리 이상 떨어진 곳인데...)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손에 든 몽운연형호를 보고

이진진; (이 작은 호리병에 상상도 못할 힘이 숨겨져 있었구나.) 몽운연형호를 보며 생각하고

 

#125>

<-황금전장>

벽초천의 집무실. 황금수라들이 경비 서고 있고

이세창; [그후 사흘 동안 단양 일대를 철저히 수색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탁자에 앉아있는 벽초천에게 보고 하는 중이다. 탁자 건너편에 서있고. 벽초천의 앞쪽 옆에는 벽세황이 앉아있다.

이세창; [이청풍은 물론이고 그놈의 가족도 행방이 묘연합니다.]

이세창; [빈민가의 이청풍 집도 수색해봤는데 살림살이가 바늘 하나 남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누군가 손을 쓴 게 분명합니다.]

벽초천; [네 생각을 말해봐라.] 벽세황에게

벽세황; [아무래도 암흑마가가 개입한 것같습니다.] 조심스럽게

벽초천; [암흑마가라...]

벽세황; [삼십여 년 전 마교가 무림맹에 궤멸당하면서 마교를 이루는 마교사가는 지하로 잠적했었습니다.]

벽세황; [헌데 마교사가중 암흑마가가 암약하고 있는 정황이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벽초천; [암흑마가가 이청풍의 가족을 보호하고 있다?]

벽세황; [보호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번 일에 개입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청풍을 추적하던 황금수라들 중 두 명이 암흑마가의 마공 소수인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벽초천; [암흑마가가 왜 이청풍을 비호한다고 생각하느냐?] 이세창에게

이세창; [큰 아가씨가 무림맹 소맹주와 결혼을 한 후 추문을 퍼트리면 본장은 물론이고 무림맹도 심대한 타격을 입지 않을런지요?] 조심스럽게

벽초천; [일리가 있군.] 끄덕

벽세황; [이청풍의 생사가 확인될 때까지 소소의 결혼을 미루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눈치 보며

벽초천; [혼례는 예정대로 진행한다.] [대신...]

벽초천; [소소에 대한 온갖 추문과 비방을 퍼트리도록 해라.]

벽세황; [우리 측에서 오히려 추문을 살포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놀라고. 듣고 있던 이세창도 놀라고

벽초천; [소소와 위진천의 혼례가 발표된 후 동시다발적으로 추문과 비방이 난무하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벽세황; [그 혼례로 불이익을 받을 세력들이 시기 질투해서 험담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흥분하고

벽초천; [그후에 암흑마가가 이청풍을 이용해서 추문을 퍼트려봤자 전혀 주목을 끌지 못할 것이다.]

벽세황; [혼수모어(混手謀漁)!] [절묘한 물타기가 되겠습니다.] 흥분하고. 이세창도 동감하여 끄덕이고

벽초천; [한편으로는 암흑마가에 대한 추적을 지속해라.] [본장을 적대한 그놈들을 용납해서는 안되니...] 강렬한 표정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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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피로 물들다 (2)

 

--- 더 많이 알고 싶다.

 

이것은 현천록이 생사탄을 나오기 전에 보초에게 했던 말이다.

어쩌다보니 생사탄과 구장심조에 대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진양진인을 만나게 되었지만,

현천록은 그 의문들은 의문들이고 일단은 무엇이라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단은 배워야 뒤에 변신할 수 있다.

현천록은 머지않아 자신도 먼저 생사탄에 들게 되었던 사람들처럼 생사탄과 구장심조의 궁극적인 비밀을 캐기 위해서 세상을 떠돌게 될 것임을 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먼 곳의 일처럼 느껴지고, 당장은 인생이 회색으로 변하지 않게 마음 속에 즐거움을 유지하는 것이 더 급선무다.

진양진인이 시키는 대로 그의 장검을 가지고 현천록은 동굴 입구를 무너뜨려 막았다.

구장심조는 무공과 비슷한 것이기는 하지만 힘을 더해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보검의 힘을 빌리지 못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동굴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시간 정도 노력해서 동굴은 입구에서 삼장여 깊이까지 완전히 내려앉았다.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소리도 밖에서 생기는 어떤 소리도 그 깊이를 뚫고 오가지는 못한다.

입구가 막히고 모닥불이 꺼지자 동굴 속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자기 손가락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진양진인은 현천록에게 자기를 안고 동굴 안쪽으로 더 들어가도록 시켰다.

그들이 숨은 동굴은 금릉 현무호 동쪽의 자금산 이름모를 골짜기에 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은 동굴 속을 걷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무질서한 돌뿌리들과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바위들, 그리고 움푹꺼진 웅덩이와 벼랑들이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징그러운 벌레나 독충들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뒷발에 중심을 두고 앞발로 더듬게. 그리고 천천히 중심을 이동시키며 나아가야 하네.]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도 현천록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앞을 막은 바위를 가볍게 타고 넘었다.

진양진인의 말했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는데 자네는 몸이 아주 가볍군.]

현천록은 암흑 속에서 실풋 미소를 지었다.

진양진인이 가둔후에 도망쳐온 일곱째 장군묵과 현천록이 똑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기절초풍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몸이 가벼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게가 없다시피 한 것을.

현천록이 말했다.

[얼마나 더 들어가야 합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눈을 감게. 시각이란 참으로 번다한 것이네. 사람의 감각은 아주 특이해서 가장 분명한 것 같은 것이 실은 가장 둔한 것이라네.]

현천록은 그의 말에 어떤 현기(玄機)가 깃들어있음을 느꼈다.

즉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감으나 뜨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진양진인이 계속 말했다.

[눈보다는 귀가 더 정확하네, 귀보다는 코가 더 확실하고, 그보다 더 정확한 건 바로 감각을 넘어서서 느끼는 것이라네. 실상 속된 경지를 벗어나려면 오감에 의지하는 버릇부터 버려야 하는 것이지.]

진양진인은 노래를 읊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며,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지려 하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여 내 속에 받아들이네. 내가 나의 존재함을 껍질 밖에 알리니, 스스로 존재하는 것들도 모두 내게 그들이 있음을 알려오네.

 

현천록이 말했다.

[물 냄새가 나는군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주 총명하군. 그럼 이제 자네 코앞에 있는 튀어나온 바위를 조심하게.]

현천록은 진양진인을 안은 채 동굴 속에서 삼리는 족히 걸었다.

거리는 겨우 삼리정도지만 그 어려움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양진인이 말하는 대로 눈을 감고 그렇게 걷고 있는 동안, 현천록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였다.

암흑 속의 모든 상황이 마치 자기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명확하지 않지만 점점 감각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진양진인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한 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현천록은 물이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곳으로 암흑을 헤치며 걸어갔다.

감각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감각이 주위를 느낄 때마다 참기 힘든 미묘한 흥분이 일어난다.

그것은 기쁨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종류의 희열이었고 맺혀 있던 무엇이 풀어지는 해방감이기도 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속 벼랑을 뛰어 넘어 좀 더 아래로 내려간 현천록은 마침내 물가에 도착했다.

멈추어 섰지만 솔직하게 말해 더 걷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굴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두 팔에 들리운 상태에서 손가락 두 개로 현천록의 손등을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현천록은 물이 어둠보다는 밝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둠 속에서 물은 희게 보였다.

그리고, 자기가 선택해서 들어왔고 진양진인이 원해서 이곳까지 오게 된 그 동굴이 범상한 동굴이 아님을 알았다.

동굴 속에 있는 물은 물이지만 엄청나게 거대한 물이었다.

물은 작은 강을 이루고 소리없이 흐른다.

강의 폭은 이십 장 정도고 깊이는 짐작할 수가 없다.

아무 소리도 없는 중에 그 엄청난 물이 발 앞에서 흐른다는 사실이, 그것을 느낀다는 사실이 현천록에서 숨이 막히는 어떤 희열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소리가 없어서 장엄함이었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이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오로지 감각을 향수(享受)할 뿐이지만 마음은 무심에 가까워져 있고 발은 뿌리를 내린 듯이 굳건해져 있다.

 

소리없이 흐르는 지하의 강물처럼 시간도 조용히 흘러갔다.

현천록은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편평한 바위에 진양진인을 내려놓았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넨 자네 감각을 해방시켜주었네. 지금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곧 보이지 않는 감각이 확장됨을 느끼게 될 것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이건 무공인가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초상감각(超常感覺)이지. 상승무공을 익히는 기틀일 뿐이네.]

[초상감각...]

[이 감각을 얻는 자는 상승무공을 빨리 익힐 수 있으나 익히지 못하는 자는 백년을 수련해도 상승무공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지. 노도가 자네 자질을 잠시 시험해보려는 의도였는데... 자넨 아주 특이하군.]

현천록이 물었다.

[무엇이 그리 특이합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지금 자네가 달한 그 정도의 초상감각에 이르려 하면 자질이 뛰어난 사람도 삼년은 수양해야 도달할 수 있는 수준 정도일세. 그것도 무공을 상당히 지닌 상태에서! 한데 자네는 불과 한 시간 남짓 사이에 그런 경지에 달했으니... 아주 놀랍네.]

현천록이 웃었다.

[그렇게 칭찬할 것 없습니다. 도장과 내기를 했으니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 테니까요.]

진양진인은 빈말이 아니었지만 현천록이 그렇게 말하자 그게 아니라고 우기기도 뭣했다.

화제를 돌렸다.

[우리를 쫓는 그는 정말 무서운 인물이네. 동굴을 무너뜨렸다고 하지만 반드시 우리를 찾아내고 말 것일세.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현천록이 말했다.

[어떤 방법을 씁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노도는 그의 손에 중상을 입었네. 노도의 공력이 전적으로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이미 찢어발긴 시체가 되었겠지.]

얼굴에서 쓴 웃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양의신공에도 불구하고 이 상태로 노도가 살 수 있는 것은 스무날 남짓하네. 상처가 너무 엄중하기 때문에 스스로 치유할 수도 없고 오직 양의신공을 익힌 사람이 도와주어야만 하네.]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회복하는 것이 바로 그의 손을 벗어나는 방법인가요?]

진양진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멀쩡할 때도 하지 못했는데 이 몸으로 어떻게 그런 기적을 꿈꿀 수 있겠는가?]

현천록은 진양진인의 보검으로 근처에 있는 바위들을 벽돌처럼 재단하기 시작했다.

진양진인이 그의 뒤에서 말했다.

[노도는 원래 옛 친구와 활몽루에서 만나기로 했었네. 한데 그가 오지 않고 마왕같은 그가 왔었지.]

진양진인의 아주 오래전의 일을 회상하는 것같은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는 자네가 말한 대로 우리 무당파의 창허진인이었던 분이지. 이제 자네를 경계하지 않으니 그대로 말해주겠네. 창허진인은 본파에서만 전해오는 이름으로 강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

진양진인은 자기가 윗대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창허진인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창허진인이 무당파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옛날이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나이가 스물여섯이라고 했는데, 무공을 배우기에는 이미 근골이 굳어있어서 적당치가 않았다.

그러나 무당파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했고, 가장 기본적인 무공부터 배웠는데 배우는 속도가 놀랄만큼 빨랐다.

빨리 배웠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펼칠 수 있었고 타고난 신체적인 조건이 더해져 그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무당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은 모두 장삼봉 조사 이후로 최고의 인재가 등장했다는 것을 알았다.

창허진인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무당파의 모든 무공을 다 익히도록 했다.

창허진인은 존장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익히면 익힐수록 진전이 더욱 빨라졌다.

삼년이 지나지 않아서 당시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고수인 장문인의 무공을 뛰어 넘었고,

다시 이년이 지났을 때는 장문인을 삼초 이내에 패배시킬 정도의 무서운 고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이년 쯤 무당파내에서 제자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들이 나돌고 있었다.

첫 번째 소문은 좋은 소문으로 창허진인이 벌써 신선이 되었거나 아니면 이전부터 신선이었다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당에 들어온 지 오년이 지났는데도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무공을 그처럼 빨리 익힐 수 있었겠는가 하는 추측이 그 소문의 근거였다.

장문인이나 장로들도 이 말에는 관심을 보였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도 어쩌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나 두 번째 소문은 달랐다.

창허진인이 장경각(藏經閣)에 숨겨져 있던 마공(魔功)들을 익힌다는 소문이었다.

무당의 장경각에는 무당파의 고수들이 마두들을 제압했을 때 빼앗아 봉인해놓은 마공비급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무당의 제자로 무당의 무공을 자기에게 허용된 이상으로 익히는 것은 다만 징계를 받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마공을 익혔다는 것은 발견되는 즉시 죽임을 당한 후에 파문된다는 것을 말한다.

당시의 장문인은 무당의 이십칠대인 광화도장(光華道長)이었다.

의혹을 그대로 묻어둘 수 있는 단계를 지나버리자 광화도장은 먼저 강호에 흩어져 있던 모든 제자들을 구월구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해 무당산으로 소집했다.

광화도장은 창허진인을 전 제자들 앞에서 심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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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두속출

 

 

 

(이게 어찌된 일이지? 저 지독한 거지들이 귀신을 본 듯이 놀라 달아나다니...!)

막비강은 어리둥절하여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인물은 백색 장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헌데 야위기가 가죽이 뼈만 감싼 것 같았으며 움푹 들어간 눈에선 전광(電光) 같은 광망(光茫)이 번뜩였다. 흡사 무덤에서 방금 뛰쳐나온 강시와도 같은 형상이었다.

(... 사악한 무공을 익힌 자다!)

막비강은 비록 이 사람 덕분에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절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백포노인은 막비강을 노려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흐흐흐! 어린 녀석아, 아까 네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냐?]

막비강은 비록 사실대로 말해도 상대방이 금방 찾아낼 수는 없다 여기고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목숨을 구해 주어 고맙습니다 선배님. 방금 전에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좋다. 그럼 우리는 보물을 찾으러 가자!]

[그곳은 개방의 총단인데...!]

[흐흐흐! 그깟 거지 떼 따위가 무슨 장애가 되겠느냐?]

파팟!

백포노인은 음침한 웃음을 터뜨리며 막비강의 팔을 움켜잡더니 쏜살같이 대석비곡 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편, 다섯 거지는 얼마 도주하지 못했을 때 뒤쪽에서 세찬 파공성이 들려오자 깜짝 놀랐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보니 백포노인이 막비강을 팔을 잡아끌고 이미 삼 장 밖에까지 쫓아와 있었다.

호면개 도금은 타구봉을 휘둘러 나머지 네 노개와 동시에 걸음을 멈춘 후 물었다.

[추명염왕(追命閻王) () 선배님은 무슨 일로 저희들을 추격하십니까?]

(이자가 흑도팔흉(黑道八凶) 중의 추명염왕!)

백의괴인에게 손목이 잡혀 있던 막비강은 깜짝 놀랐다.

 

추명염왕 곽여해(郭餘海)!

 

그자는 흑도에서도 악명이 높은 살인마들인 팔흉(八凶) 중 한 명이었다.

팔흉은 육요(六妖), 칠절(七絶)에게는 다소 손색이 있으나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염라대왕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비록 호면개 도금이 개방 방주라 하지만 추명염왕 같은 거마에게는 발끝에도 못 미치는 형편이었다.

[흐흐! 본좌가 쫓아온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느냐?]

추명염왕은 음산하게 내뱉음과 동시에 일장을 격출했다.

다섯 명의 거지도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타구봉을 휘둘러 반격했다.

[!]

추명염왕은 재차 일장을 뻗어냈다. 그러자 다섯 명의 거지는 비틀거리며 각자 세 걸음씩 후퇴했다.

하지만 그들은 호면개 도금의 함성을 신호로 다섯 사람은 전력을 다해 또 타구봉을 휘둘렀다.

[네놈들은 죽음을 자초하고 있구나!]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내려놓고 쌍장을 동시에 휘둘러 냈다.

퍼펑!

[으악!]

[커억!]

다음 순간 다섯 명의 거지는 줄이 끊어진 연처럼 사방으로 날아가 떨어지더니 꼼짝하지 않았다. 한 때 천하제일의 대방이라 불리던 개방의 수뇌 다섯이 추명염왕의 일초를 받지도 못하고 몰살당한 것이다.

(... 무서운 자다!)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흘흘흘! 독하다, 독해! 과연 추명염왕이란 명호가 부끄럽지 않구나!]

난데없이 뇌성 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막비강이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난쟁이가 한 쪽에 서 있었다. 키는 채 넉 자가 못되지만 양팔이 땅까지 늘어져 있고 눈빛이 아주 음침한 노인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사악하고 음독한 인상이었다.

막비강은 그자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본능적으로 옆으로 물러섰다.

추명염왕은 몸을 돌리며 음랭하게 웃었다.

[흐흐흐! () 난쟁아, 너도 이 일에 끼여들 생각이냐?]

[청구단서는 무림의 지보(至寶)인데 얻으려는 사람이 노부 한 명뿐인 줄 아느냐?]

난쟁이는 말하며 옆의 바위를 흘깃 바라보았다.

[흐하하하! 과연 천이통(天耳通) 삼촌정(三寸釘)의 이목은 놀랍소!]

화라락!

다음 순간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명 노인이 바위 뒤에서 날아 나왔다. 그자는 도포를 의젓하게 걸치고 등에 불진을 짊어진 노인이었다. 차림은 분명 출가인이지만 그 얄팍한 입술과 족제비 같은 눈빛은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 누군가 했더니 소면호(笑面虎) 고금(古今) 영감이었군!]

그자를 본 추명염왕이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내심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두 분은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오. 나 고()가도 이번 일에 한몫 껴야겠소.]

소면호 고금이라 불린 도인은 포권을 하며 능글맞게 말했다.

 

삼촌정 정발(丁發)!

소면호 고금(古今)!

 

그자들도 모두 추명염왕과 함께 흑도팔흉에 드는 거마들이었다.

소면호가 끼여들자 추명염왕은 얼굴을 굳히며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 고 영감, 아마 너는 이 일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에 소면호의 웃던 얼굴이 일변하여 음침하게 변했다.

[추명염왕, 너는 이제 염라대왕(閻羅大王)이라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나는 우선 정 난쟁이와 합세하여 너부터 황천으로 보낸 다음 대책을 강구하겠다.]

추명염왕은 상대방이 연합하여 덤비겠다고 말하자 흠칫 놀랐다.

[이리 와라!]

그는 즉시 몸을 솟구쳐 막비강을 잡아갔다.

[어딜!]

소면호가 날카롭게 외치며 재빨리 덮쳐 와 추명염왕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추명염왕은 도리 없이 전력을 다해 뒤로 일 장 가량 후퇴했다.

[소면호! 너는 정말 노부와 싸울 생각이냐?]

[그것을 말이라고 묻느냐?]

이때 난쟁이가 옆에서 말을 받았다.

[고 영감의 말이 옳다. 우리는 합세하여 먼저 그를 수습한 다음 다시 대책을 강구하자.]

막비강은 그들이 다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비급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싸움질부터 먼저 하다니... 이 틈에 빨리 도주해야지.)

화라라락!

그는 세 사람이 서로 대치해 있는 틈을 이용하여 몸을 솟구쳐 전력을 다해 도주했다.

[게 섰거라!]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도주하자 날카롭게 외치며 몸을 솟구쳤다.

이때 난쟁이 삼촌정이 또 일장을 격출하여 추명염왕을 제지시켰다.

추명염왕은 추격을 제지당하자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난쟁아, 너의 이 행위는 무슨 뜻이냐?]

난쟁이 삼촌정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가 저 어린 녀석과 함께 비급을 찾으러 가려는 것을 모르는 줄 아느냐?]

[비급이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어디 있긴 어디 있어. 대비석 밑에 있다.]

난쟁이 삼촌정의 말에 추명염왕은 체념의 표정을 지었다.

[너도 이미 알고 있었군. 그럼 우리는 먼저 대비석이 있는 곳으로 가서 비급부터 찾아낸 다음 누구의 소유가 될지 결정짓자.]

[그건 일리 있는 말이군.]

[그러려면 어린 녀석을 잡아야 한다. 비급이 숨겨진 정확한 장소를 아는 사람은 저 어린 녀석뿐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빨리 추격하자.]

합의를 본 세 마두는 일제히 몸을 날렸다.

 

막비강은 사오십 장 가량 달리다 고개를 돌려보니 세 개의 인영이 쏜살같이 추격해 오고 있음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를 잡으려는 목적이 정확한 장소로 안내해 달라기 위함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비급을 찾지 못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할 게 뻔했다.

초조해진 막비강은 마침 길옆에 울창한 도림(桃林)이 있는 것을 보고 급히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추명염왕은 도림 근처까지 추격하여 걸음을 멈추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어린 녀석아, 좋게 말할 때 나오지 않으면 나는 이 도림을 몽땅 태워 버리...!]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파라락!

갑자기 뒤쪽에서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추명염왕이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난쟁이 삼촌정과 소면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전면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놈들도 비급이 대비석 밑에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다. 아마 비석을 산산조각 내서라도 찾아내려 할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추명염왕은 더 이상 막비강을 잡으려 하지 않고 즉시 삼촌정과 소면호의 뒤를 쫓아갔다.

 

막비강은 도림 안에서 이 광경을 보고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위험천만이었구나!)

그는 비록 목숨은 구했지만 비급을 탐내는 흉도들의 무공이 점차 고강한 인물들만 나타나는지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일년 이상을 고생하여 가까스로 대비석의 소재지를 알아냈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하려 하니... 게다가 나 때문에 개방의 다섯 고인들이 개죽음을 당하게 되었구나!)

자책하던 막비강의 뇌리로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의 시신을 수습해주다가 그들의 절학이 담긴 비급을 얻었던 일이다.

(만약 천하의 기문절학을 모두 수집한다면 내 스스로 절세무공을 창안하지 못할 것도 없다. 타구봉법은 비록 천하무적의 절예는 아니지만 독특한 면이 있는 무공이다. 게다가 개방의 다섯 거지는 나 때문에 죽었으니 시체라도 안장해 주어야겠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티구봉법이 적힌 비급을 얻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비강은 곧 도림 밖으로 나가 다섯 거지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어 그들을 차례로 살펴보니 금릉삼로 중 청풍개 범개선은 아직 체온이 식지 않았고 맥박이 뛰고 있었다.

(잘 하면 살릴 수 있겠다!)

막비강은 남산의성 악불령에게서 배운 응급치료법을 이용하여 범개선의 전신 혈도를 안마해 주었다.

약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범개선은 호흡이 점차 정상으로 회복되고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범개선은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이 막비강임을 알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고맙네. 수고스럽지만 내 주머니 속에서 약을 좀 꺼내 주게.]

막비강은 상대방의 주머니를 뒤져 몇 가지 환약을 꺼내어 범개선으로 하여금 스스로 약을 골라 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안마를 계속했다.

또 일각 가량 지나자 범개선은 간신히 일어나 앉더니 자기의 동문들이 모두 죽었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네 말대로 우리 개방은 결국 참화를 입었구나. 그런데 그 마두는 어딜 갔느냐?]

[그들은 대비석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범개선은 땅이 꺼질 듯한 장탄식을 했다.

[그 악랄한 마두가 달려갔다면 이제 우리 개방은 완전히 끝장났구나.]

그는 여기까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막비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넌 방금 그들이라고 말했는데 그럼 추명염왕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느냐?]

막비강은 지금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말해 주었다.

범개선은 그의 말을 듣더니 만면에 희색을 가득 머금었다.

[그 세 명의 마두가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야 될 텐데... 아이야, 방주의 몸에 우리 개방의 절기인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과 타구봉법의 비급이 있다. 노부가 방주를 대신하여 네게 기증할 테니 장래에 우리 개방의 원수를 갚아다오.]

하지만 막비강은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범개선이 살아있는 마당에 낼름 개방의 비급을 받기가 염치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귀방의 제자가 아니니 개방의 절학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범개선은 막비강이 개방 절기가 실린 비급들을 사양하자 한층 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네가 개방의 제자든 아니든 상관없다. 노부는 어차피 추명염왕의 독장(毒掌)을 맞아 앞으로 이삼 일밖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

막비강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얼른 호면개 도금의 시체 곁으로 가서 항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을 꺼내고 허리춤에서 방주의 신물(信物)을 끌러 범개선 옆으로 돌아왔다.

[이삼 일의 시간이면 충분하니 선배님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범개선은 만면에 곤혹의 빛을 가득 머금었다.

[네게 영지옥액(靈芝玉液)이라도 있단 말이냐?]

[아닙니다. 후배에게는 백독을 쫓을 수 있는 천오주가 있습니다.]

범개선은 눈을 번뜩 뜨며 급히 물었다.

[어디 있느냐?]

[후배가 선배님을 업고 천오주가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막비강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범개선을 등에 업은 후 곧장 소지품을 숨겨 두었던 무덤으로 달려갔다.

 

***

 

그러나 막비강이 무덤에 도착하여 파헤쳐 보니 소지품을 싼 보따리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막비강은 놀람과 조급함을 금치 못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느 좀도둑의 소행이지? 잡히기만 하면 다리뼈를 분질러 놓고 말겠다.]

그가 막 말을 끝냈을 때였다.

[? 좀도둑이 어째?]

휘릭!

돌연 앙칼진 외침과 함께 무덤 옆의 소나무 위에서 누군가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그 사람은 열 여섯 살 가량 된 귀여운 얼굴의 소녀였다.

소녀는 왼손에 조그만 보따리를 든 채 오른손으로 막비강을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

[지저분한 녀석아, 너의 낡아빠진 물건들 여기 모두 있다. 나는 네가 어떻게 내 다리뼈를 분질러 놓는지 두고 보겠다.]

막비강은 상대방이 자기보다 어린 소녀인지라 웃으며 사정했다.

[착한 누님, 빨리 사람을 살려야 하니 구슬을 주시오. 나는 좀도둑의 소행인 줄만 알았지 누님이 장난으로 그랬는지 모르고 실언을 했소.]

소녀는 막비강이 누님이라 부르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너의 이런 물건은 귀신이나 가지려 할 것이다. 나는 빨리 가서 싸움 구경을 해야겠다.]

보따리를 막비강의 발 앞에 던져 준 소녀는 길게 땋아 내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나는 듯이 뛰어갔다.

막비강이 잠시 멍청히 서 있다 정신을 번뜩 차리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을 땐 상대방은 이미 사오십 장 밖에 나가 있었다.

(이상한 아이로군!)

막비강은 가벼운 탄식을 하고 보따리에서 천오주를 꺼내어 범개선의 심장 위에 올려 독을 뽑았다.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범개선은 체내의 독이 완전히 제거되어 천오주를 막비강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너는 이런 보주가 있으면서 왜 휴대해 다니지 않느냐?]

막비강은 비급을 찾으려 개방에 들어가 신분이 탄로날 것이 염려되어 이곳에 숨겨 두고 역용 변장한 경과를 말해 주었다.

범개선은 이 말을 듣고 그의 총명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막비강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또 다른 모습으로 변장한 후 말했다.

[아까 그 여자아이는 싸움을 구경한다면서 대석비곡 있는 방향으로 달려간 것으로 보아 정말 흉마들끼리 싸움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우리도 빨리 가서 결과를 알아봅시다.]

[그럼세!]

범개선은 즉시 막비강과 함께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석비곡을 향해 질주했다.

 

[... 이럴 수가!]

얼마후 대석비곡에 도착한 범개선과 막비강은 놀라움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넓은 석비곡 안은 개방 제자들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골통이 박살나 형상조차 구별할 수 없었고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은 고통의 신음을 발출하고 있었다.

범개선은 지니고 있는 약물로 이삼십 명의 제자를 죽음 직전에서 구제하여 물어 본 결과 추명염왕과 다른 두 사람의 소행임을 알았다.

그 다음 추명염왕 등 세 사람이 서로 혈전을 벌였는데 최후에 어떤 노부인이 나타나 그들을 쫓아 버렸다고 했다.

막비강이 개방 제자에게 급히 물었다.

[그들은 혹시 비석 밑에서 무슨 물건을 가져가지 않았소?]

개방 제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더니 모두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범개선은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죽은 제자들을 매장하게 하고 자기는 막비강과 함께 비석 근처를 구석구석 조사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막비강의 시선은 가장 석실의 석벽에 새겨진 한 수의 시구(詩句)에 꽂혔다. 그것은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된 시였다.

 

<가득 찬 달밤 삼경에 탑 그림자가 드리워져 경지하(傾脂河) 강변의 깨진 비석을 쓰다듬는구나. 영롱한 모습은 신산의 교묘함을 빼앗으니 계수나무 아래서 늦음을 후회 마라!>

 

막비강은 입 속으로 이 시를 몇 번이고 읽더니 돌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혹시 어디엔가 경지하라 불리는 강이 있는 게 아닐까?]

범개선이 옆에서 말을 받았다.

[있네. 소흥부(紹興府) 남쪽 약야계(約野溪) 부근에 있는 강이라네. 전설에 의하면 서시(西施)가 목욕물을 그 강에 버려 강물에도 지분(脂粉) 향기를 풍긴다더군. 석벽의 이 조각은 경지하의 경치와 흡사하고 강변에 영롱탑(玲瓏塔)이라는 탑이 있는데, 그럼 이 시구에는 깊은 뜻이 내포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선배님께선 후배와 함께 비급을 찾으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범개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부는 보물을 획득할 의향이 없네. 그러나 자네가 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분신쇄골이 되어도 최선을 다해 도와 주겠네.]

[한 권의 비급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니 선배님께선 가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후배는 이 벽화를 없애 버리겠습니다.]

막비강은 신녀비와 강장을 꺼내어 조각의 그림을 긁어냈다.

헌데 그가 벽화를 절반 가량 긁어냈을 때였다.

[흐흐흐! 선인의 유적을 훼손하다니...! 대담하기 짝이 없는 놈이구나!]

밖에서 난데없이 차가운 고함 소리가 전해 왔다.

막비강이 손을 멈추고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추명염왕이 석실 입구에 서 있었다.

추명염왕은 절반 가량 파손된 벽화를 힐끗 쳐다보더니 막비강에게 시선을 돌리며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어린 녀석아, 비급은 어디에 숨겨져 있느냐?]

[나도 모른다.]

[노부도 네가 비급이 숨겨져 있는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너는 왜 이 조각을 파손하느냐?]

[남이야 조각을 파손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감히 본 염왕 앞에서 큰소리를 치다니, 네놈은 분근착골(分筋錯骨) 맛을 좀 보아야겠구나.]

막비강도 지지 않고 코웃음을 날렸다.

[! 노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왜 내게 비급의 행방을 묻느냐?]

막비강은 자신이 거지의 모습에서 원래의 용모로 돌아온 것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추명염왕은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흐흐흐! 노부는 불에 타 재가 되어도 네놈을 알아볼 수 있다. 하물며 네놈의 목소리는 낭떠러지 아래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기까지 하다. 그러니 헛수작 말고 순순히 노부의 물음에 대답해라!]

추명염왕은 흉흉한 표정으로 천천히 막비강에게 다가섰다.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받아랏, 노마!]

피유웅!

돌연 석실 밖에서 여자아이의 날카로운 외침 소리와 함께 짧은 단전(短箭) 하나가 세찬 파공성을 대동한 채 추명염왕을 향해 날아왔다.

막비강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강장을 뻗음과 동시에 신녀비를 휘둘러댔다.

[받아랏, 노마!]

범개선도 개방 제자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쌍장을 동시에 격출했다.

[이 연놈들이...!]

추명염왕은 비록 절학을 지녔지만 강장과 신녀비, 그리고 단전이 동시에 엄습해 오자 감히 소홀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는 양어깨를 비틀며 몸을 풍차처럼 한바퀴 돌렸다.

!

그러자 밖에서 날아온 단전이 막비강의 강장과 부딪쳐 요란한 음향을 발출했다.

막비강은 그 틈에 수중의 신녀비로 검기를 형성하여 추명염왕에게로 덮쳐 갔다.

하지만 추명염왕은 슬쩍 그의 공세를 피해낸 뒤 석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어린 녀석아, 우선 저 어린 계집년부터 수습한 후 다시 찾아오겠다.]

막비강은 석동 밖에서 들려 온 음성이 바로 자기의 물건을 훔쳤던 소녀의 목소리임을 알았다.

[어딜 가느냐 노마?]

그는 그 소녀의 무예가 아무리 고강해도 피독지보(避毒之寶)가 없는 한 추명염왕의 독장을 당해내지 못함을 알고 급히 고함을 질렀다.

위이잉!

그가 십 성의 공력을 돋우어 염라장법 중의 절초인 참호양망(斬虎揚茫) 초식을 펼쳐내었다. 그러자 한 줄기 강맹한 바람이 석동 안의 돌 조각을 휘날리며 밖으로 뻗어 나가 눈도 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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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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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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