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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화 속의 비밀

 

 

 

(방주라고?)

막비강은 들려온 함성만으로도 이번에 나타난 인물의 내공이 매우 정순함을 깨닫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새로 등장한 인물 역시 전신에 누더기 옷을 걸친 거지였는데 눈이 부리부리하고 구렛나루가 양쪽 뺨을 덮고 있어 아주 위맹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인이었다.

비록 이 인물의 나이가 금릉삼로보다 이삼십 살 가량 적어 보였으나 일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삼로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삼엄했다.

이 중년거지는 어깨에 여덟 개의 자루를 메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개방의 방주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당금 강남개방의 방주인 호면개(虎面丐) 도금(都金)이로구나!)

막비강은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고 내심 긴장했다.

위맹한 인상의 중년거지가 바로 개방의 정통을 이어받은 강남개방의 방주 호면개 도금이었다.

호면개 도금은 강남개방의 제일대 방주였던 적족신개(赤足神丐)의 제자였다. 적족신개는 궁가방의 개파조사인 궁신 여불초의 사제였다. 그러면서도 개방의 방주로 지명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하지만 적족신개는 이십 년 전 의문의 실종을 당해 버렸다. 그 때문에 구결(口訣)로만 전해지던 개방의 숱한 진산절기가 실전되어 개방이 당금의 처지로 조락하는 이유가 되었다.

상대가 개방 방주임을 알아본 막비강은 암암리에 일신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악전고투에 대비했다.

그때 호면개 도금도 두 눈에서 살벌한 광망을 발산하며 막비강을 훑어보았다.

[철 호법, 당신들은 무슨 일로 싸움을 하게 되었소?]

이어 그는 한쪽 옆에 시립해있는 철 호법에게 물었다.

[이 소악적이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방주님!]

철 호법은 타구봉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굽히는 자세로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개방 방주 도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막비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의 어리고 무지한 점을 생각해 놓아줄 테니 돌아가거라!]

과연 일방의 방주다운 도량이다. 전후 사정을 들은 호면개 도금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쓸데 없는 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내심 감탄한 막비강은 손을 맞잡아 도금에게 공수의 예를 올렸다.

[방주님의 넓으신 아량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어 그는 곡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그때 도금이 막비강을 불러 세웠다.

[본 방주가 한마디 분부해 두겠는데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 만약 다시 찾아오면 네놈의 다리뼈를 분질러 놓겠다!]

[!]

막비강은 차가운 코웃음만 날리고 곡구 밖으로 나갔다.

그는 청구단서를 취득하여 절세의 무공을 연성해야 하므로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보통 희세기진(稀世奇珍)은 심산유곡에 숨겨져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 청구단서는 거대한 비석 밑에 숨겨져 있고 또 거대한 비석은 개방의 분타 소재지가 된 것이다.

개방은 그들의 소굴 지하에 이런 비급이 숨겨져 있는 줄을 모른다. 그리고 막비강은 비록 알고 있지만 어느 구석에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막비강 혼자 힘으로 거지 떼들을 모두 내쫓고 자세히 수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곡을 나선 막비강은 높이 솟아있는 석촉대(石燭臺)를 바라보며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는 무슨 영감이 떠올랐는지 빙긋이 웃었다.

(그래! 그 수법을 써야겠다.)

곧 그의 모습은 대석비곡 입구에서 사라졌다.

 

***

 

막비강은 금릉의 시장통에서 남루한 의삼과 자루, 향촉(香燭), 지전(紙錢) 등을 샀다. 그리고는 새벽무렵의 어둠을 틈타 금릉성에서 나와 황량한 공동묘지로 향했다.

공동묘지에 도착한 그는 남산의성 악불령의 역용환을 사용하여 전신의 피부색을 바꾸고 머리도 흐트려 지저분하게 분장했다.

그리고 약물을 먹어 목소리까지 변하게 한 뒤에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새로 만든 무덤 앞에 강장, 신녀비, 호로, 진주, 은자 등을 옷에 싸서 깊이 파묻었다.

아침이 되자 막비강은 다른 사람의 의심을 방지하기 위해 그 무덤 앞에 향촉에 불을 붙이고 지전을 태우며 한동안 우는 척했다. 그런 후에 해가 중천에 뜨자 무덤을 떠나 몹시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묘화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라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거지보다 더 더럽게 분장한 막비강은 어떤 부호가 사는 집 대문 옆에 깨진 그릇을 들고 서있었다. 영락없이 하인들이 보고 불쌍히 여겨 먹다 남은 찬밥이라도 주길 기다리는 거지의 행색이었다.

헌데 오래지 않아 그의 등뒤에서 음침한 일갈이 들렸다.

[어린 녀석아, 누가 너더러 이곳에서 걸식을 하라더냐?]

막비강이 고개를 돌려보니 말을 한 사람은 중년거지였다.

그는 거지들의 규칙을 잘 알면서도 고의로 모른 체했다.

[집안에 갑자기 변고가 생겨 며칠씩이나 밥을 굶었소. 당장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누가 시켜야지 걸식을 하겠습니까?]

그의 말에 중년거지는 이마를 찡그렸다.

[사정이 딱하게 되었군! 그래, 향주(香主)에게 인사는 했느냐?]

[향주가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향주에게 인사하지 않았으면 밥을 얻으러 다니지 못한다.]

중년 거지의 말에 막비강은 눈을 부라리며 항의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놈이 어디 대고 토악질이냐?]

중년거지가 눈을 부라리며 막비강의 뺨을 후려쳤다.

막비강은 따귀를 한 대 얻어맞자 즉시 울음을 터뜨리며 떠들었다.

[내가 내 밥을 얻어먹는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사람을 때립니까?]

그러자 약이 오른 중년거지는 세게 발길질을 하여 막비강을 바닥에 넘어지게 한 후 욕설을 퍼부었다.

[네놈을 때려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절을 해라.]

두 사람이 울고 욕지거리를 하자 길 가던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했다.

중년거지가 만면에 노기를 띤 채 또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땅바닥에 누워 죽은 시늉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나와 함께 향주에게 가자.]

[매를 맞으러 가잔 말이냐? 구경하는 여러분이 평을 해보십시오. 나는....]

!

막비강은 또 중년거지의 발길에 엉덩이를 차였다.

비록 이것은 그가 자초한 고육지계(苦肉之計)이지만 중년거지가 지나치게 흉악하여 막비강은 화가 치밀었다. 분노한 그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중년거지를 노려보았다.

중년거지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은 그래도 순순히 따라가지 않겠느냐?]

[왜 너를 따라간단 말이냐?]

[이놈이 끝내 기어올라! 오냐! 내 네놈을 때려죽이고 말겠다.]

중년거지가 주먹을 휘두를 때 막비강도 지지 않고 머리로 힘껏 상대방을 받아 갔다.

곧 두 사람은 한데 얽혀 싸움질을 했다. 물론 내공을 사용하는 무림고수들과 달리 그저 주먹질 발길질만 하는 저자거리의 치졸한 싸움질이었다.

막비강의 머리에 들이받힌 중년거지는 독이 올라 두 주먹으로 그의 등을 마치 북 치듯이 마구 두들겼다. 그때였다.

[멈추어라!]

갑자기 외마디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중년거지는 그 목소리를 듣더니 흠칫 놀랐다. 한 명의 풍채 좋은 늙은 거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것을 본 때문이다.

[이거나 먹어라!]

막비강은 그 틈을 이용하여 머리로 중년거지를 받아 쓰러뜨리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중년거지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일어나더니 나타난 노개를 향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제자가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그놈이 난폭해서... 보셨겠지만 그놈은 제자를 이런 꼴로 만들었습니다.]

노개가 차가운 코웃음을 날리고 냉랭히 말했다.

[! 홍삼(洪三), 너는 가는 곳마다 일을 저지르는구나. 빨리 분타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노개는 홍삼을 쫓아 보낸 후 곧 막비강의 뒤를 따라 달려왔다. 노개의 발걸음은 늙은이 답지 않게 날렵했다.

[아이야, 잠시 걸음을 멈추어라!]

노개가 따라붙으며 말하자 막비강은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내 뒤를 쫓아오는 겁니까?]

[아이야,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노대(何老大)라 부릅니다.]

[너는 나의 문하가 되고 싶지 않느냐?]

[할아버지는 누구죠?]

[나는 개방의 금릉삼로 중 범개선(范開先)이라고 한다.]

노개는 바로 어제 막비강과 한바탕 드잡이질을 한 바 있는 금릉삼로 중 범씨 성의 늙은 거지였다. 그의 별호는 청풍개(淸風丐)로서 금릉삼로의 우두머리였다.

청풍개 범개선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노부를 사부로 모시겠다면 본방의 절기를 전수하여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해주겠다.]

이거야말로 막비강이 바라던 전개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할아버지를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는 즉시 청풍개 범개선 앞에 큰절을 올렸다.

범개선은 포대에서 만두를 꺼내어 막비강에게 나누어주며 신세와 집안사정을 자세히 물었다. 막비강이 적당히 둘러대자 범개선은 정말인 줄 알고 그를 대석비곡으로 데려갔다.

 

개방 방주 호면개 도금과 금릉삼로의 다른 두 노개는 범개선이 한 명의 어린 거지를 데리고 들어오자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런 다음 어린 거지의 근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는 양이(楊二)라 불리는 중년거지에게 막비강을 데려가 개방의 제반 의식과 규칙 등을 가르치게 했다.

막비강은 양이를 따라 방중의 선배 거지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는 도중 비석 아래의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폈다.

원래 이 대비석은 산봉의 암석을 깎아 만든 것이라 비석 밑 부분이 모두 암석이며 구멍은커녕 조그만 빈틈도 없었다. 이런 곳엔 도저히 비급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막비강은 청구단서가 틀림없이 비석 밑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구단서를 찾을 수 있는 열쇠인 종이쪽지가 단호의 뚜껑 속에 그토록 은밀히 숨겨져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는 양이에게 하루종일 개방의 제반 의식을 배웠다. 하지만 고의로 우둔한 사람처럼 이것을 배우면 저것을 잊고 저것을 배우면 이것을 잊은 척했다.

화가 치민 양이는 혼자 나직이 투덜거렸다.

[범 장로께선 크게 실망하시겠구나. 네놈은 근골만 좋았지 기억력은 형편없으니 이래 가지고 무슨 무예를 배우겠느냐?]

 

* * *

어느덧 밤이 되었다. 그러자 곡내의 거지들이 분분히 밖으로 나갔다.

막비강은 곤혹을 금치 못하고 양이에게 물었다.

[밤에도 동냥을 하러 나갑니까?]

[모르면 주둥아리 닥치고 얌전히 있어라. 그들은 밖으로 나가 자칭 곡능천이라는 어린 망종을 잡기 위해 매복해야 한다.]

양이가 핀잔을 주었다.

[방주님도 어제 이곳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운 애송이 놈이 혈검산장에서 용모파기를 돌려 찾고 있는 망나니 아들놈이라는 것을 뒤늦게 아시고 포박하라 명을 내리신 것이다!]

막비강은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너희들의 계획도 고명하지만 나의 계책은 더욱 고명하다.)

그는 양이가 나가자 큰 포대를 두 장 끌어다 이불 대신 덮고 대비석의 큰 구멍 구석에 웅크리고 자는 척했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 덮여 대석비곡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비석 밑의 석동도 비록 양면으로 맞뚫려 있지만 손을 내밀면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때가 되었군!)

막비강은 살며시 포대자루를 젖히고 일어나 전신의 공력을 눈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사물이 희미하여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주먹만한 돌을 주워 석벽과 지면을 가볍게 두드려 속이 빈 곳이 있는지 조사했다.

그는 한 칸의 석실을 모두 두드려 본 다음 석벽에 몸을 바짝 붙여 다른 석실에 가서 수색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가 석면을 거의 모두 두드려 보았지만 속이 빈 현상의 소리는 나지 않았다.

별수없이 그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자루를 뒤집어쓰고 자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곰곰이 비급이 숨겨져 있을 만한 장소를 생각해 보았다.

돌연, 그는 이 비석 중앙의 큰 석동 우측 벽에 한 폭의 거대한 벽화가 새겨져 있는 것이 생각났다.

그곳의 좌측 벽에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노인의 좌상(坐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노인의 눈은 맞은편 벽화에 새겨져 있는 둥근 달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고개를 숙여 지면만 조사하느라 벽화는 자세히 보지 않았다.

(청구비급이 혹시 그 벽화의 둥근 달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자기의 추리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져 급히 벽화가 새겨진 석동으로 갔다. 그리고는 맞은편 벽에 그려진 둥근 달 부분을 두드려 보았다.

한동안 벽을 두드린 그는 여전히 실망을 금치 못했다. 벽화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막비강은 실망하며 벽화에서 물러서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

난데없이 석동 밖에서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들리지를 않는가?

휘이잉!

막비강이 흠칫하는 순간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이 휘감아 왔다.

파파팟!

막비강은 내심 크게 놀라며 급히 몸을 비틀어 석동 밖으로 날아 나왔다. 이어 양발을 힘껏 굴러 비교적 작은 비석 위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애송이놈! 어디로 달아나느냐?]

콰아아아!

말소리와 함께 한 줄기 광풍이 휘감아 왔다.

막비강은 쌍장에 전신의 공력을 주입시켜 상대방의 장세를 봉쇄했다.

퍼펑!

순간 우렁찬 음향이 울려 퍼지며 맞은편 비석 뒤에서 한 명의 거지가 뒤로 주르르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자는 바로 철 호법이었다.

[어엇!]

철 호법은 막비강의 강맹한 장력에 진탕되어 뒤로 후퇴하다가 허공을 밟아 비석 아래로 떨어졌다.

화르르르! 쐐애액!

그때 또 몇 개의 인영이 쏜살같이 막비강 쪽으로 날아왔다.

막비강은 급히 몸을 솟구쳐 최상의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뒷산으로 질주해 갔다.

[어린 녀석아, 걸음을 멈추어라!]

헌데 막비강이 몸을 솟구쳤을 때 하나의 인영이 고함을 지르며 앞을 막아섰다.

[나를 막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

외마디 경악의 비명과 함께 그 사람은 삼 장 밖으로 날려 나갔다.

단 일장에 그 사람을 삼 장 밖으로 날려보낸 막비강은 곧장 뒷산을 향해 도주했다.

그러자 개방 방주 도금을 비롯한 금릉삼로, 철 호법 등 다섯 거지들은 일제히 그를 추격하며 고함을 질렀다.

[어린 녀석아, 너는 이제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으니 걸음을 멈추어라!]

그러나 막비강은 그들의 고함을 들은 체도 않고 계속 신법을 전개했다.

도금과 네 명의 노개들도 경공신법이 대단하고 또 이곳 지리를 잘 아는지라 쌍방의 거리가 점차 좁혀졌다.

(... 이런!)

막비강은 전력을 다해 도주하다 말고 갑자기 놀라며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원래 전면의 삼 장 거리는 높이가 백 장이 넘는 낭떠러지였던 것이다.

콰아아아!

그 절벽 아래로는 양자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흐하하하! 네놈은 독 안에 든 쥐다!]

막비강이 걸음을 멈추자 다섯 명의 노개는 눈 깜빡할 사이에 가까이 추격하여 그의 일 장 거리에서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삼로 중 고죽개 학검성이 수중의 타구봉을 휘두르며 노성을 질렀다.

[어린놈아, 나는 오늘 네놈을 양자강의 고기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막비강은 이런 상황에서 다섯 명의 노개를 당해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모든 내막을 사실대로 말해 우선 이들과의 충돌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급히 옆으로 피하며 고함을 질렀다.

[할말이 있으니 잠깐 손을 멈추시오!]

학검성은 자신의 일격이 빗나가자 재차 공격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청풍개 범개선이 얼른 나서 제지시켰다.

[우선 그가 누구며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봅시다.]

범개선은 막비강을 제자로 삼기로 마음을 먹었었고 또 다른 노개들보다 마음이 인자하여 막비강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학검성의 행동을 제지시킨 것이다.

개방 방주인 호면개 도금도 범개선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우선 이 어린 녀석의 신분부터 알아봅시다.]

호면개 도금은 막비강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어린 녀석아, 너는 도대체 누구냐?]

막비강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는데 나는 그제 귀방의 분타를 찾아갔었던 곡능천입니다.]

다섯 노개는 이 말을 듣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뭐라고? 네놈이 바로 곡능천, 아니 막비강이라고?]

[그렇습니다.]

[막비강은 얼굴이....]

막비강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것은 제가 역용술로 변장했기 때문입니다. , 보십시오.]

그가 손바닥에 양잿물 가루를 발라 얼굴을 문지르자 곧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섯 명의 노개는 막비강의 정교한 역용술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호면개 도금이 다시 물었다.

[네가 변장을 하여 본방의 본거지에 잠입한 의도는 무엇이냐?]

[그것은 청구상인께서 남기신 청구단서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섯 노개는 이 말을 듣고 경악과 격동의 빛을 금치 못했다.

[청구단서는 강호의 인물이면 누구나 얻고 싶어하는 무림기보인데 그것을 어찌하여 우리들 개방의 중지에 와서 찾느냐?]

[그 비급은 거대한 비석 밑에 있습니다. 거대한 비석이란 귀방의 분타가 위치한 그 비석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데도 거대한 비석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우리가 거주하는 분타의 비석 밑에 그런 비급이 숨겨져 있다고 단정했느냐?]

[방주께서도 소문을 들으셨겠지만 나는 이미 대강남북에 산재해 있는 비교적 큰 비석은 모두 파헤쳐 보았습니다. 하지만 청구단서는 고사하고 종이쪽지 한 장도 없었습니다.]

호면개 도금은 이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 그럼 근래 일어난 비석 도굴 사건이 모두 네 소행이었단 말이냐?]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점만 보아도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으므로 머지않아 이 소식이 강호에 퍼지고 그러면 귀방은 무서운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 테니 빨리 돌아가셔서 대책이나 상의하십시오.]

막비강의 말을 들은 호면개 도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죄가 없으나 구슬을 지닌 것이 죄가 된다더니... 이 일을 어떻게 하지?]

듣고 있던 학검성이 타구봉을 휘두르며 앞으로 뛰어나왔다.

[이놈! 쓸데없는 헛소문을 퍼뜨려 우리에게 화를 전가시키지 마라! 우리는 대석비곡에 수십 년을 거주했지만 비급따위는 보지 못했다.]

호면개 도금은 학검성의 이 말이 대석비곡의 안전을 위한 것임을 눈치챘다.

그 역시 막비강을 죽이진 않더라도 생포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타구봉을 휘두르며 막비강을 공격했다.

그러자 나머지 노개들도 공격에 가담했다. 범개선은 비록 마음이 비교적 자상했지만 방주가 출수한 이상 그도 자연히 수수방관을 할 수 없었다.

[이 염치없는 늙은이들이...!]

막비강은 다섯 거지가 합공을 가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노성을 지르며 쌍장으로 단숨에 십여 장을 격출했다. 격노한 나머지 출수했는지라 그의 장세의 강맹하기가 산악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개방의 타구봉법은 절묘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방주인 호면개 도금이 펼쳐내니 그 위력은 더욱 강맹하여 막비강으로서도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점차 막비강은 낭떠러지 쪽으로 밀려갔다. 낭떠러지의 높이는 백 장이 넘고 그 밑은 양자강물이 도도히 흐르며 괴석이 즐비하여 떨어지면 목숨이 열 개라도 뼈를 찾기 어려울 실정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손을 멈추어라!]

돌연 낭떠러지 옆에서 하나의 인영이 솟구치며 날카롭게 외쳤다.

쏴아아아!

외침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장풍이 다섯 명의 노개에게 휘감아 갔다.

[!]

[... 당신은...!]

다섯 명의 노개는 나타난 사람을 보더니 경악의 함성을 터트렸다.

이어 그들은 사력을 다해 왔던 길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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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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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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