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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피로 물들다 (3)

 

 

상청관(上靑館) 연무장은 일백년 래 가장 많은 제자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들도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그 흔한 잔기침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쇠사슬로 온 몸을 결박당한 창허진인이 이대제자들에게 이끌려 나왔다.

상투는 풀어지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광화도장은 창허진인을 취조하겠다고 큰 소리로 말한 후에 물었다.

[창허야!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함은 너를 해하고자 하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서 장차 네가 이 무당의 천년 위업을 이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너는 오직 진실로 이 사부의 물음에 답해주기 바란다.]

광화도장의 말은 누가 들어도 가슴 속에 뭔가 꽉 힌 것이 있는 사람의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창허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체념하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사부! 말씀하십시오. 사부께서 물으시는 것이라면 제자 창허는 어떤 것이든 다 대답하겠습니다.]

광화도장은 격동하는 듯했고 운집한 제자들이 잠시 술렁거렸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네가 본파의 제자가 된 지 이제 칠년이다. 그 동안 나와 네 사숙들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우리 무당에서 천하제일고수가 탄생할 것임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 부족합니다.]

광화도장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네 자질도 범상치 않을 뿐 아니라 열성으로 배워 나와 네 사숙들을 일찍이 능가했으니 아마도 무공으로 놓고 본다면 천하에 너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너는 이미 본파의 시조이신 삼봉진인에 못지않으니...]

원로들의 머리가 애석한 듯 숙여진다.

무당 최고의 인재가 애꿎은 구설수에 오른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소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어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네게 대한 두 가지의 소문 중 어느 것도 이 사부는 믿기 어렵다. 너는 말해주겠느냐?]

창허가 묵묵히 있다가 물었다.

[어떤 소문입니까?]

광화도장이 말했다.

[첫째는 네가 신선이라는 소문이다.]

모여든 제자들이 모두 놀란다.

사문에 반도가 생겨 처단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왔는데 아주 엉뚱한 소리였던 것이다.

광화도장이 말했다.

[칠년 전에 네가 나를 찾아 왔을 때도 너는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세월이 너를 잊어버린 것처럼 너는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구나. 혹시 예전에 주안과(朱顔果) 같은 과일을 먹은 적이라도 있느냐?]

창허가 말했다.

[주안과를 먹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 사부께서 지난 칠년동안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모두 말씀 드리겠습니다.]

창허가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순간, 촤르르릉! 소리가 나면서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벗겨졌다.

옆에 있던 이대제자들이 놀라며 다시 결박하려 했지만 광화도장이 저지시켰다.

창허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에게 검을 빌려주시게 하면 말하기가 훨씬 수월하겠습니다.]

다시 술렁거렸다.

그의 손에 검이 들어간다는 것은 호랑이에게 날개가 돋히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광화도장이 자기의 검을 뽑아서 창허에게 건네주었다.

옆에서 원로들도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끼고 만류했지만 광화도장은 개의치 않았다.

[그만들 하라! 창허가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면 굳이 검을 쓸 필요도 없다.]

창허는 두손으로 검을 받아들며 말했다.

[제자 오직 무당산에는 사부님만이 참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광화도장은 미소를 지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

창허가 받았던 검으로 자기 심장을 찔러버린 것이다.

광화도장이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창허는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피해버렸다.

광화도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너는... 자결하려느냐? 이 이만한 시련도 못참고...]

광화도장의 보검은 창허의 심장을 꿰뚫고 등뒤로 가시처럼 솟아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심장이 식는 것같은 싸늘함을 느꼈다.

창허가 고개를 저었다.

[제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편안합니다.]

놀랍게도 창허의 음성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으며 죽음의 기운도 풍기지 않았다.

광화도장은 말문이 막히고 맥이 탁 풀려서 도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앞에서 천하의 기문(奇聞)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는 이런 상태를 일컬어 신선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선이 죽지 않는, 또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면 제자가 바로 신선입니다.]

쿠웅!

그 순간 상청관 안에는 바늘만 떨어져도 굉음으로 들렸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자가 죽지 않는 존재라니...

창허는 자기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심장에 꽂았던 검을 옆으로 밀었다.

검날이 갈비뼈를 자르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창허는 조금 얼굴을 찌푸렸을 뿐 피한방울 흐르지 않았다.

광화도장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는... 너는 정말 신선이었구나. 그럼 이 질문에도 대답해다오. 장경각의 마공을 익혔는지.]

그는 무당파의 장문인이다. 상황이 어떻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큼은 해야한다.

두 번째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이미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 자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창허가 말했다.

[익혔습니다.]

[? 무엇 때문에 익혔느냐?]

창허가 대답했다.

[본파의 무공은 탈속(脫俗)합니다. 그 뜻과 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동작 하나에도 탈속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제자가 생각할 때 다른 도가의 문파들도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광화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본파는 그런 점을 중시한다. 공동파나 아미파도 마찬가지니라.]

창허가 말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원래 속된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오욕과 칠정을 가지고 나는데 어찌 그것을 모두 버리고 속되지 않은 것만 취할 수 있습니까? 이는 뿌리를 버리고 꽃이나 열매만을 좋아함과 마찬가지입니다.]

광화도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다. 도를 닦음은 먼저 몸을 청정케 하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다. 마침내 우화등선하는 것은 나중의 결과일 뿐이니라. 우리 도가의 청정케 할 몸은 진신(眞身)이니 몸과 정신이 분리된 것이 아니지.]

창허가 물었다.

[진신이 몸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것이듯이, 지금의 이 몸도 정신과 함께 있는 것인데 굳이 진신을 구해서 무엇합니까?]

광화도장이 말문이 막혔다.

창허가 말했다.

[제자가 마공을 익힌 이유는 바로 이같은 데 있습니다. 마공이란 원래 인간의 속성을 추종하여 창안된 것들이니 인간을 더욱 잘 알게 해줍니다. 제자도 인간인 이상 인간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찌 참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솔잎을 씹고 이슬을 받아 마신다고 해도 인간을 알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광화도장이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너는... 너는 정말 본파의 대기(大忌)를 범하는구나. 너를 파문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창허가 광화도장에게 검들 돌려주며 말했다.

[사부! 제자 창허는 오늘로 사라집니다. 무공을 쓰더라도 사부께 배운 검은 쓰지 않을 것이고, 무당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광화도장은 앞이 막막했다.

파문을 하려면 먼저 무공을 폐하는 게 순서지만 죽지도 않는 자에게 무공을 폐하려 한다는 것도 한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도 하나의 전례로 남을 것임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제자들에게 명하여 형식적으로나마 창허의 기해혈을 파괴하고 주근(主筋)을 자르게 했다.

그러나 창허에겐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피도 나지 않고 다만 칼이 지나갔다는 정도였다.

창허는 그제서야 무당에서의 일이 끝났다는 듯이 껄껄 웃고는 구름처럼 둥실 떠올라서 진짜 구름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무당의 아랫 제자들은 신선의 우화등선을 구경하고 절을 하고 야단법썩을 떨었다.

그 사이에 자기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일을 처리했던 광화도장은 앉은 채로 영혼만 우화등선하고 말았다.

제자들이 소란을 피울 때 그의 영혼도 창허와 함께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X X X

 

[자네는 노도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진양진인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선배들에게 이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었네. 그리고 가슴 깊이 새겨두었지. 남들이 노도를 삼백년 래 무당 최고수라고 하는 것도 사실 노도가 창허진인을 염두에 두고 수련을 했기 때문일 걸세. 한데... 허허... 노도는 그 전설 속의 창허진인을 만났네. 낭아봉을 쓴다는 것과 내가 모르는 무공들을 쓴다는 것 외에는 들었던 것과 똑같았네. 싸우고... 도망쳤지.]

진양진인이 자기가 전설속의 주인공인 창허진인과 싸웠다는 사실에 아주 흐뭇해하는 표정이었다.

현천록은 진양진인의 보검으로 자른 돌들을 쌓아서 방을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방안과 밖에 따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믿기 어려울 걸세. 죽지 않는 불사신이라니... 더구나 우리를 찾는 자라는 사실이...]

현천록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원래 나와 만나기로 한 포두화상이 왔으면 이야기가 좀 달라졌을 것이네. 애상곡은 포두화상을 부르는 소리였는데 창허진인이 왔지.]

현천록이 말했다.

[포두화상은 도장보다 무공이 높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비슷하네. 하지만 그와 내가 손을 잡으면 최소한 패하지는 않을 걸세.]

[대단하군요.]

[포두화상은 소림사에 적을 두고 있는 중이지. 칠십이종 절기 중 서른 여덟 가지를 익혔으니 달마(達磨)와 육조(六祖) 이후로 최고수인 셈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무슨 수로 포두화상을 여기까지 불러옵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런 건 생각하지 말게. 나는 양의신공을 익혔으니 그 속에 포함된 양심공(兩心功)도 당연히 알고 있네.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괜찮네만, 자네는 심력을 아끼게. 당장 양의신공을 익혀야 하니까.]

현천록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진양진인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현천록은 자기가 바로 일곱째 진양진인과 똑같은 불사신이라고 말한다면 진양진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하며 웃었다.

그는 느긋하게 마음먹고 진양진인이 하는 대로 따라갔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욕구를 신통하게도 잘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진양진인이 양의신공의 구결을 읊어주었다.

현천록은 그가 두 번째로 읊을 때 이미 구결은 완벽하게 암기해버렸다.

하지만 진양진인은 일곱 번이나 거듭 읊어주었다.

현천록은 그 사이에 양의신공의 내용을 해득하기 위해서 애쓰는 중이었다.

[첫째는 구결의 운율을 잘 들어놓아야 하네. 노랫가락처럼 운율부터 이해해야 외울 수가 있네. 외고 난 다음에는 앞에서부터 구결을 한구절씩 풀어서 실제로 연공을 해야하네.]

진양진인이 말했다.

[무당에서도 양의신공을 끝까지 익힌 사람은 불과 다섯을 넘지 않네.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고는 무당의 최고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태극혜검(太極慧劍)을 익힐 수도 없지.]

현천록이 물었다.

[태극혜검은 실전되지 않았습니까?]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쳤다.

[무림에서는 노도가 태극혜검을 다시 복원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 태극혜검이야말로 검술의 정화지. 창허진인도 태극혜검만큼은 나보다 못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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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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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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