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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청구단서!

 

 

 

석 달의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드디어 정월 대보름날이 되었다.

비록 정월 대보름이 되긴 했지만 날씨는 그리 춥지 않고 한 달 새 눈도 내리지 않았다.

막비강은 삼경이 조금 안된 시간에 영롱탑이 보이는 경지하 변에 도착했다. 다행히 경지하 일대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막비강은 마음을 놓았다.

헌데 영롱탑 주위를 살피던 막비강은 지난번에 들렀었던 조씨부인의 농가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깜짝 놀라 농가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비록 짧은 석 달간의 시간이었지만 그의 무공은 석 달 전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 눈 깜짝할 사이에 농가가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불에 탄 집의 잔해만 가득 쌓여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집의 일가족이 흉사들에게 변을 당한 것일까? 아니면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해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것일까?)

불탄 폐허를 돌아보는 막비강의 마음은 몹시 착잡해졌다. 조씨부인의 집이 타버린 것이 아무래도 자신 때문일 것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잠시 넋을 잃고 서 있던 막비강은 유해(遺骸)나마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잔해를 들쳐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저 깨진 항아리와 불탄 가재도구들만 발견될 뿐 사람의 유골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헌데 그가 신녀비로 잔해의 여기 저기를 찔러 보고 있을 때였다.

반짝!

갑자기 한 줄기 금광이 번뜩했다.

막비강이 얼른 흙을 파보니 자신이 이 집을 떠날 때 장연아에게 맡겼던 호로와 강장이 나왔다. 이 물건들의 발견만으로 막비강은 큰 위안을 얻었다.

(유해가 없는 것을 보니 그들은 모두 무사히 피한 모양이다. 여길 떠나면서 호로와 강장은 사람의 눈에 쉽게 띄므로 여기 묻어 두고 갔을 것이다.)

 

막비강은 곧 강변으로 달려가 강장에 묻은 흙을 깨끗이 씻었다.

이어 호로에 묻은 흙도 닦으려는데 마침 달을 가렸던 구름이 지나가며 밝은 달빛이 호로에 비치었다. 그러자 돌연 호로 표면에 무지개가 피어오르며 희미하게 한 폭의 산경(山景)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막비강은 호로의 그 문양이 청구단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이 일대의 경치와 매우 흡사함을 알았다. 다만 영롱탑의 위치가 거꾸로 그려져 있었다. 탑이 하늘을 향해 서있는 것이 아니라 물 속에 잠겨있는 것이다.

막비강은 다시 주위의 경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것은 영롱탑이 아리나 영롱탑의 그림자를 그린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호로를 다시 찾았기에 천만다행이지 일년이 걸려도 헛수고를 할 뻔했구나.]

그는 기뻐하며 호로 안에 든 찌꺼기를 모두 쏟았다. 그러자 호로 속에서 찌꺼기들과 함께 종이쪽지 한 장이 떨어졌다.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쪽지를 집어들고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임은 갔구나! 임 가신 곳은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베갯머리에 엎드려 무사함을 믿고 이불을 끌어안은 채 다시 만나길 기도했지만 천첩의 뜻이 아직도 통하지 않았구나.>

 

파리 머리보다 작게 쓴 글씨는 여자의 필적임이 분명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굴까? 장연아라면 이제 겨우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조숙하게 임이니 천첩이니 하는 글을 쓸 까닭이 없는데....)

막비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모친 조씨부인이 썼을 가능성이 많은데, 왜 이 호로 속에 이런 걸 넣어 두었을까?)

막비강은 한동안 생각을 굴려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이 글이 자기와 무관하다고 느꼈지만 일단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호로에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허리에 찬 뒤 영롱탑 아래쪽의 경지하로 달려갔다.

 

***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정월 대보름날 밤 삼경이다. 한 겨울이라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탓에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막비강은 물 가 높은 바위에 서서 물 속에 비친 영롱탑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는 곧 영롱탑의 그림자 끝 부분이 가르키는 곳이 물 속 깊은 곳에 놓인 하나의 거석(巨石)임을 발견했다. 집채만한 크기인 그 바위는 물 속 아주 깊은 곳에 놓여있었지만 경지하의 물이 워낙 맑아 물 밖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호로에서 떠오른 산수화에 영롱탑의 위치가 거꾸로 새겨져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비급은 영롱탑 꼭대기가 아니라 영롱탑의 그림자가 비친 물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청구상인이 후세 사람들을 농락할 의도가 없다면 청구단서는 영롱탑의 그림자가 비치는 곳에 자리한 물 속 거석 밑에 숨겨져 있음이 분명했다.

풍덩!

자신의 추측이 맞음을 확신한 막비강은 즉시 물 속으로 뛰어들어 거석이 있는 곳으로 잠수했다.

거석이 놓인 곳의 수심은 매우 깊었다. 거의 십여 장을 잠수하여 귀가 멍멍해지고 고막이 터지는 듯한 통증을 느낄 무렵 막비강은 가까스로 거석에 도착했다. 만일 막비강이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남달리 튼튼한 몸을 지니지 못했다면 거석이 놓인 곳까지 잠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석은 마치 강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단단히 박혀있었다. 막비강이 전력을 다해 흔들어 보았지만 거석은 꼼짝하지 않았다.

한동안 거석을 흔들어 보던 막비강은 숨이 막혀 하는 수 없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허어!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물놀이를 하는 사람이 다 있군!]

막비강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막 숨을 몰아쉬었을 때 물가 바위 위에서 누군가 조소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가 나처럼 비밀을 알아내고 기다렸던 게 아닐까?)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진력이 충만함을 느낀 막비강은 움찔 놀라며 바위 위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그 음성은 막비강이 전에 들은 적이 있는 오봉도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막비강이 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닦고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상대방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바로 천하오기 중 오봉도인이었다.

이에 막비강은 다시 급히 물 속으로 잠수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거석을 흔들어 보았다.

우두둑!

그러자 그의 마음이 통했는지 거석이 약간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는 또 다시 숨이 목 아래까지 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막비강은 별 수 없이 또 수면으로 부상했다.

오봉도인은 재차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막비강을 보더니 껄껄 웃었다.

[너는 과연 거기서 비급을 찾고 있었구나. 빈도는 너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 청구단서를 찾으면 즉시 갖고 나오너라. 함께 연구하면 서로에게 유익할 것이다.]

그자는 자신이 물 속으로 들어가 비급을 찾는 수고를 덜기 위해 좋은 말로 막비강에게 제안했다.

오봉도인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막비강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요사한 도사야! 내가 그런 수작에 걸려들 것 같으냐? 청구단서를 찾지 못한다면 몰라도 찾아낸다면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멀리 헤엄쳐 가 숨어버리겠다!)

하지만 막비강은 오봉도인의 무공 실력을 잘 아는지라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좋은 말씀입니다. 청구단서는 도가(道家)의 비급이라 배움이 얕은 후배로서는 얻어봤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도장께서 지도해 주신다니 저에게는 홍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봉도인은 막비강이 순진하여 자신이 말에 속아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정말 총명하고 영리하여 천면신룡이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구나. 네가 비급만 찾아 나오면 빈도는 최선을 다해 널 지도해 주겠다.]

[알았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막비강은 힘차게 대답하고는 다시 물 속으로 잠수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사력을 다해 거석을 밀어보았다.

쏴아!

다음 순간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거석이 벌렁 뒤집혀졌다. 헌데 거석이 넘어진 자리에는 커다란 수직동굴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 동굴은 물이 없는 빈 동굴이었다. 그래서 그 동굴을 막고 있던 거석은 물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무거웠던 것이다.

콰아아아!

거석이 뒤집히자 텅 비어있던 동굴 속으로 물이 와락 밀려들어간다. 삽시에 근처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겼고 막비강의 몸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혼비백산한 막비강은 비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다급히 호흡을 멈추어 물을 들이키지 않으려 했다.

그 상태로 막비강은 소용돌이치는 물길에 휘말린 채 아래로 떨어졌다.

 

***

 

소용돌이치는 물결은 처음에는 그를 아래로 하락시키더니 다시 옆으로 백 장 가량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죽으라는 운명은 아니었는지 막비강은 미끄러운 이끼가 가득 낀 거석(巨石) 아래쪽에 도착하게 했다. 그는 얼른 거석을 붙잡고 일 장 가량 기어올라갔다. 그러자 마침내 그의 머리가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막비강이 나온 곳은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이었다.

(요행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이제 어떻게 밖으로 다시 나가지?)

그는 깜깜한 주위를 둘러보며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주저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막비강은 억지로 기운을 내서 동굴 안쪽으로 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 손으로 바닥을 더듬으면서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 동굴 바닥은 고른 편이었다. 조그만 돌 조각을 사람 손으로 이어 붙여 마치 비늘같이 만들어졌는데 끝없이 길게 뻗어있어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어갔을까? 돌연 앞쪽에서 한 줄기 빛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했지만 막비강은 기쁘기보단 긴장이 앞섰다.

(저것은 밖에서 흘러드는 빛일까? 아니면 어떤 짐승의 눈빛일까?)

그는 긴장하여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한동안 그 빛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빛은 아무런 동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막비강은 용기를 내어 빛이 비치는 곳으로 기어갔다.

가까이 가보니 석벽(石壁)에 하나의 옥합(玉盒)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막비강이 어둠 속에서 본 빛은 그 미끄러운 옥합의 표면에서 번져 나오는 것이었다.

츠으으!

막비강이 석벽에 박힌 옥합을 조심스럽게 파내자 갑자기 빛이 증가되어 주위를 백주(白晝)처럼 환하게 밝혔다. 놀랍게도 이 옥합은 야광옥(夜光玉)이라는 스스로 빛을 내는 보옥을 깍아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옥합 뚜껑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야광옥합(夜光玉盒) 속에 동이족의 무학비전인 청구단서가 들어 있으니 인연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으리라.>

 

[! 이것이 바로 청구단서구나!]

막비강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옥합을 바닥 위에 내려놓고 큰절을 올렸다.

이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보니 그 속에는 과연 한 통의 편지와 붉은 표지를 지닌 세 권의 책자가 들어 있었다. 세 권의 책자 겉면에는 각각 신공결(神功訣), 연형결(鍊形訣), 초혼결(招魂訣)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막비강은 비급들 보다 먼저 편지를 펼쳐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빈도는 본시 동방(東方) 청구(靑丘) 출신이다. 우리 동이족이 잃어버린 창세삼보(創世三寶)를 찾으려 중원으로 들어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역만리 타향에서 명을 마치게 되었도다. 하지만 창세삼보를 찾는 일은 동방국인(東方國人)이 할 일이므로 중원인인 그대와는 일절 관계가 없다. 이에 그 내막을 여기에는 자세히 적지 않는다.

보물을 얻은 사람은 우혈한천(牛穴寒泉) 위로 올라가 최소 일 년 이상 일체의 중단없이 청구절학을 연마하라. 일단 연공을 시작하면 기초가 잡힐 때까지 쉬지 말아야 성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혈 근처에는 대지의 정기가 모여 형성된 영천석유(靈泉石乳)와 일 년 동안 충분히 먹을 양식이 있다. 또 야광주는 비급을 읽을 수 있게 빛을 발산해줄 것이니 무공을 연마하기에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으면 비급을 다시 야광옥합 속에 넣어 한천에 던져 후세의 인연을 기다려라.>

 

막비강은 야광옥합에 적힌 글을 읽고 크게 기뻐했다.

(그냥 거짓말로 추명염왕 등을 속인 것이었는데 우혈이 정말 청구단서와 관련이 있었을 줄이야!)

막비강은 비록 우혈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이 동굴이 우혈과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청구상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비급을 품속에 넣은 후 옥합을 들고 야광주의 광망을 이용하여 앞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

 

얼마 가량 걸었을까? 전면에서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보니 네놈이구나 천면신룡!]

막비강은 이런 지하에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깜짝 놀라 하마터면 뒤로 벌렁 자빠질 뻔했다.

차가운 한기가 솟구치는 연못가에 서있던 그 사람은 야광옥합을 손에 든 막비강을 발견하고는 다가서며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네놈이 여기까지 오다니... 괴상한 야광옥합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청구단서를 취득한 모양이구나. 당장 그걸 내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막비강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야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추명염왕! 저자가 죽지를 않았구나!)

야광옥합의 빛을 빌어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상대방은 추명염왕이었다.

헌데 석달 사이 그자의 얼굴은 아주 추악하고 섬뜩하게 변해 있었다. 전신에 누런 털이 길게 자란데다 눈에서는 연신 녹광(綠光)이 번뜩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오싹 끼치게 한다.

그러나 막비강은 지난 석달 간 자신의 무공도 장족의 발전을 보였음을 떠올리고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이건 빈 옥합일 뿐인데 무엇이 볼 게 있다고 그러느냐?]

[빈 옥합이라고? 네놈이 감히 노부를 속이려 드느냐?]

[이런 마당에서 당신을 속일 필요가 뭐 있느냐?]

추명염왕이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그럼 청구단서는 어디 있느냐?]

막비강은 술술 말을 이었다.

[소면호가 탈취해 갔다. 그자는 청구단서 세 권을 모두 자기가 갖고 내게는 이 빈 옥합만 주더니 발길질로 나를 물 속에 처넣었다. 당신은 내 몸에 아직도 물기가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막비강의 말을 곧이 들은 추명염왕은 이를 부득 갈았다.

[소면호! 이 괘씸한 놈 같으니! 노부가 여기서 빠져 나가기만 하면 가장 먼저 네놈을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가 만약 청구단서의 절학을 연성한다면 당신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 노부는 그놈을 때려 죽일 자신이 있다. 그러나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막비강은 뻔히 알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신은 어디로 여길 들어왔느냐?]

추명염왕이 어리둥절하며 반문했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냐?]

막비강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자 추명염왕은 자기 이마를 쳤다.

[아차! 그 어린 녀석이 알고 있지.]

[어린 녀석이라니?]

[그런 질문은 하지 말고 지금은 도대체 몇 일이냐?]

[정월 보름날 아니면 정월 열엿새 아침일 것이다.]

추명염왕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라고? 그럼 내가 여기 들어온 지 석 달이 넘었단 말이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여기 들어온 지 석 달이 넘었다면 당신은 그동안 무엇을 먹었느냐?]

막비강의 물음에 추명염왕은 히죽 웃었다.

[사람 고기를 먹고 살았다.]

막비강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 사람 고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단 말이냐?]

추명염왕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배가 고프면 무엇인들 못 먹겠느냐? 얼마 후 노부는 너도 잡아먹을 것이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농담이라고?]

추명염왕은 으스스한 표정으로 웃었다.

[석 달 전 나이가 너와 비슷한 녀석이 소면호와 삼촌정, 그리고 노부를 데리고 네놈을 찾는다면서 이곳 우혈에 왔었다. 그런데 소면호가 방심한 노부와 삼촌정을 갑자기 공격하여 이 수직갱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물 속에 떨어져 죽음은 면했다.]

막비강은 즉시 소리를 높여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다면 정 선배님도 이곳에 계시겠군요.]

그러자 추명염왕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은 이간질하려고 그를 선배님이라 부르는데 그런다고 그가 너를 구해 줄 것 같으냐? 사실대로 말해 주겠는데 그는 이미 내게 잡아먹혔다.]

막비강은 흠칫 놀랐으나 곧 웃음을 머금었다.

[당신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내가 믿을 줄 아느냐?]

[엉터리 같은 말이라고? 노부가 너를 잡아먹을 때가 되면 너도 내가 한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추명염왕은 날카로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세상이치다. 그러니 내가 몇 사람을 잡아먹는 것도 별로 놀랄 일이 못된다.]

그자는 자랑하듯 말을 이었다.

[이곳에는 얼음같이 차가운 한천이 있는데 시체를 그 한천에 담가 두면 상하지 않는다. 원래 한천에는 발을 헛디뎌 빠져 죽은 시체가 여러 구 보존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 두 사람이 그걸 사이좋게 나누어 먹다가 나중엔 그 마저도 떨어지자 서로 다투게 되었다.]

추명염왕은 막비강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입맛을 다셨다.

[삼촌정이 버릇없이 굴기에 노부는 그놈을 죽여 지금까지 굶지 않고 살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먹을 것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놈이 나타났구나.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아 살려 두겠지만....]

막비강은 추명염왕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 죽어라!]

추명염왕의 말을 듣던 막비강은 사납게 고함을 지르며 갑자기 일장을 격출했다. 그는 끔찍하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하여 이 일장에 전신의 공력을 주입시켰다.

[! 네놈이!]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감히 먼저 공격해올 줄은 몰랐다. 또한 그의 공력이 이렇게 심후해졌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다급한 가운데 일장을 맞받아 냈다.

!

[커헉!]

순간 우렁찬 굉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추명염왕은 우반신이 마비됨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후퇴했다.

[받아랏!]

막비강은 일초가 성공하자 자신이 생겨 옥합을 바닥에 던져놓고 쌍장을 교차하여 쉴새없이 연달아 강맹한 장력을 발출했다.

퍼펑!

추명염왕은 몇 장을 맞받아 낸 후 상대방의 공력이 자기보다 훨씬 심후함을 느끼고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 손을 멈추어라!]

막비강은 호기가 격발하여 장력을 발출하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핫하하, 잠깐은 무슨 잠깐이냐? 나는 오늘 금릉 개방의 네 분 노개와 삼촌정의 원수를 갚아 주어야겠다.]

퍼펑!

막비강은 고함과 함께 쌍장을 동시에 앞으로 뻗어냈다.

[아이쿠!]

첨벙!

추명염왕은 연달아 몇 바퀴 곤두박질하더니 그대로 차가운 한천(寒泉)에 빠져 버렸다.

막비강은 득의의 웃음을 머금었다.

[너는 염왕이니 황천에 가야 마땅하다. 그래도 나를 잡아먹을 테냐?]

그는 추명염왕이 밖으로 나올 것이 염려되어 한천 끝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하지만 추명염왕의 추악한 시체는 수면에서 몇 바퀴 맴돌더니 천천히 물 속으로 잠겼다.

막비강은 자기가 십 성의 공력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추명염왕이 당해내지 못하고 한천에 빠져 죽자 의외였다. 추명염왕이 일장에 네 명의 노개를 격살했던 일로 미루어 자기의 무예는 이미 일류고수에 못지 않음을 알았다.

[잘 하면 지금 실력으로 막고천도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자를 일장에 죽이는 것은 너무 자비로운 일이지.]

막비강은 비록 자신이 추명염왕은 간단히 죽일 수 있었지만 천하오기에 비하면 아직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오기 중의 누구라도 원수 막고천을 도우면 원수를 갚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복수는 청구절학을 연마한 후로 미루기로 작정하고 다시 옥합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청구상인이 말한 양식이 있다는 장소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는 한 쪽 벽에 사람이 겨우 기어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석혈(石穴)이 뚫려 있음을 발견하여 안으로 기어 들어가 보았다.

구멍 안쪽은 넓이가 여덟 자 가량 되는 자그마한 석실이었다. 하지만 이 석실에는 식량은커녕 돌 조각 하나도 없었다. 단지 밀실 한 곁에 우윳빛의 액체가 조금 고인 샘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청구상인이 말한 영천석유였다.

그러나 그것뿐, 석실 안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막비강은 본래 여러 가지 약재를 알고 있는지라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혹시 그 식량이란 것이....)

그는 즉시 한천의 맞은편 벽쪽으로 가서 야명주로 비춰 보았다. 과연 흙이 엉겨붙은 그곳에는 희세의 영약인 하수오(河首烏)가 수없이 자라고 있었다.

(! 이런 희세의 영약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니...!)

그는 청구상인이 말한 식량의 정체를 알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곳에 나 있는 하수오들은 모두 수백 년 묵은 것들이었다. 바깥세상에서는 천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희세의 영약들인 것이다. 대충 양을 따져보니 일 년 동안은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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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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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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