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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분서주

 

 

 

헌원여호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막비강은 다시 비석을 찾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부지런히 각지로 비석을 찾아다니면서도 틈틈이 헌원여호의 십팔초 도법도 수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비강이 하남성 동쪽 끝에 자리한 청양(淸陽)이란 지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청양현 교외의 관도를 지나다가 꼬불꼬불한 오솔길 끝에 큰 무덤이 하나 있음을 발견하였다.

명문가의 무덤인지 주위로 수천평의 묘역(墓域)이 잘 가꾸어진 무덤이다. 무덤을 에워싼 동백나무 숲의 동백나무들 하나 하나가 아람드리인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이 아주 오래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백나무 숲을 지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무덤 앞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높이가 무려 삼 장이 넘고 넓이는 여덟 자 가량이나 되었다. 그것은 막비강이 지금껏 본 그 어떤 비석보다도 컸다.

(! 정말 큰 비석이구나!)

막비강이 내심 기뻐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비석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황원현고위무대장군봉만호남궁공지묘(皇元顯考威武大將軍封萬戶南宮公之墓)>

 

무덤의 주인은 낭궁(南宮)성을 지닌 이 지방 출신 고위무장의 것이었다.

막비강은 이 비석 밑이야말로 무예비급을 숨기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라 단정하고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늘 갖고 다니던 곡괭이로 비석 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숱한 비석을 파헤치며 그의 땅 파는 재주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비석 밑을 완전히 파헤쳐 비석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비석 밑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를 않았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또 석 자 가량 더 팠지만 여전히 낡은 종이 한 장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무수한 비석을 보았지만 이 비석이 제일 큰데... 이것말고도 더 큰 비석이 어딘가에 있단 말인가?)

그는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한 자만 더 파볼 요량으로 다시 또 비석 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이 간악한 도적놈!]

꽈릉!

등뒤에서 난데없이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등 뒤에서 한 줄기 경풍이 노도처럼 엄습했다.

돌연한 기습에 막비강은 깜짝 놀라면서도 본능적으로 허리를 비틀어 일 장 가량 피했다.

퍼펑!

순간 우렁찬 굉음이 울리며 비석이 세워졌던 자리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누구요?]

위기를 모면한 막비강은 급히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붉은 얼굴에 흰 수염을 기르고 아주 위맹하게 생긴 노인이 눈에서 분노의 안광을 발산하며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붉은 얼굴의 노인은 자신의 일장이 빗나가자 더욱 더 노하여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노려보고 있었다.

[애송이 도적놈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누가 감히 너더러 우리 선조의 묘비를 훔쳐오라고 시키더냐?]

막비강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노인장, 고정하십시오. 저는 결코 묘비를 훔치는 도둑이 아닙니다.]

[노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도 시치미를 떼려 하느냐? 훔칠 생각이 없다면 왜 묘비를 쓰러뜨렸느냐?]

[... 그것은 소문에 거대한 비석 밑에는 육령지(肉靈芝) 같은 것이 자라고 있다기에 이런 짓을 했으니 노인장께선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 육령지가 어째?]

붉은 얼굴의 노인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그러다, 그는 문득 정광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막비강을 주시하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하하하! 이제 보니 바로 네놈이었구나! 혈검산장에서 아비의 보물을 훔쳐 도망친 망나니 녀석! 네놈을 잡아 혈검산장으로 끌고 가겠다.]

막비강은 노인이 한 눈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흠칫 놀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노인에게 손을 모아 보였다.

[노인장께선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비석을 쓰러뜨린 건 사실이니 원래대로 복구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 혈검산장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 왜 혈검산장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시는지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대담하게 이름을 바꾸어 노부를 속이려 들어?]

막비강의 변명에도 노인은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네 아비가 무림의 여러 문파에 너의 용모파기(容貌疤記)를 두루 보내 체포를 부탁했다! 용모파기에 적힌 대로라면 네놈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그 단호(丹壺;붉은 호리병)가 네놈이 바로 막비강이란 패륜아인 증거다.]

막비강은 막고천이 자신의 용모파기를 무림에 뿌렸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하지만 그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노인장께서 믿지 않으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군요. 제 이름은 곡능천이며 이 호로는 가친께서 술을 사서 담아 오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노인장께선 단호라 말씀하시니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주둥아리 닥쳐라! 네놈은 혈검산장의 패륜아 막비강이 분명하다.]

[노인장은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곡능천이 막비강으로 변하고 호로가 단호로 변하다니 노인장께선 혹시 술을 많이 잡수신 것이 아닙니까?]

막비강의 비아냥에 노인은 화가 치밀어 그렇지 않아도 붉은 얼굴이 자색으로 변했다.

[네놈이 막비강이든 곡능천이든 상관없이 오늘 네놈을 때려죽이지 못하면 노부 남궁수방(南宮秀方)은 이곳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않겠다.]

(남궁수방!)

막비강은 노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 늙은이가 바로 오대세가(五大世家)중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셋째 가주인 적면화룡(赤面火龍) 남궁수방이었다니...!)

본래 무림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세가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오대세가다.

사천당문(四川唐門), 하북팽가(河北彭家), 진주언가(秦州諺家), 남천뢰가(南天雷家), 그리고 하남의 토호(土豪)인 남궁세가가 바로 오대세가다.

 

적면화룡 남궁수방!

 

이 인물이 바로 하남(河南) 남궁세가의 셋째 가주다.

그리고 막비강은 몰랐으나 그가 파헤친 비석은 바로 남궁일족 선조의 묘비였던 것이다. 남궁세가가 하남 일대의 큰 토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무덤의 주인이 일찌기 비옥한 하남 땅에 많은 땅을 사놓았던 덕분이다.

(! 재수 없게 걸렸군!)

막비강은 지금의 자기 실력으로는 절대 상대방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가 제일이지!)

화라락!

다음 순간 그는 재빨리 허리를 비틀어 묘역 밖을 향해 전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채 묘역을 벗어나지도 못했을 때였다.

[흐하하! 어디를 가느냐, 어린 도적놈아!]

맞은편에서 한 줄기 사나운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명 얼굴의 푸른 노인이 쏘아 왔다.

(저자는...!)

막비강은 다급한 가운데서도 그 푸른 얼굴의 인물이 남궁세가의 둘째 가주인 청면수라(靑面修羅) 남궁중방(南宮仲方)임을 알아보고 대경실색했다. 하여 급히 방향을 돌려 묘역을 에워싸고 있는 울창한 동백나무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동백나무 숲 속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핫하하! 이놈아, 너는 스스로 육임대진(六任大陣) 안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다.]

남궁수방의 우렁찬 웃음소리와 함께 눈앞이 캄캄해지고 경물이 사라지며 운무(雲霧)가 확 피어올랐다.

(아차! 진 속에 빠졌구나!)

막비강은 자신이 기문진에 빠졌음을 알고 실색했다. 이 동백나무 숲에는 도굴꾼들을 사로잡기 위해 진법이 설치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때 다시 남궁수방의 흉험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 네 아비 막고천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당장 때려죽였다. 노부는 네놈을 진식 속에서 배를 곯아 반쯤 죽도록 만든 다음 꽁꽁 묶어 네 아비에게 보내겠다.]

막비강은 동백나무 숲 속에서 방향을 분별할 수 없게 되자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부었다.

[이 늙어빠진 노적아!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남궁수방이 냉랭히 대꾸했다.

[어린 녀석이 어른도 몰라보다니, 노부는 우선 네놈을 채찍으로 죽지 않을 만큼 때려 두 번 다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만들겠다.]

막비강이 재차 욕설을 퍼부으려 할 때였다.

[아이야, 그와 말다툼하지 마라! 노부가 이곳에 있는 이상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 없다.]

돌연 귓전에 생소한 음성이 전해 왔다. 그 음성은 너무나 가늘어 모깃소리 같았지만 똑똑히 들렸다.

막비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근에 고인이 숨어 있음을 알고 내심 크게 기뻐하며 고의로 몹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남궁중방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셋째, 나를 보자 자진해서 진 속으로 뛰어든 그 어리석은 놈은 도대체 누구냐?]

[형님은 놈이 막고천의 망나니 둘째 아들놈임을 모릅니까?]

[! 그놈이 바로 막비강이란 말이냐?]

[그 되먹지 않은 놈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거 참 이상하구나. 내가 듣기로 막고천의 둘째 아들은 본래 병약하여 병아리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다고 하던데 어떻게 무게가 삼천 근이 넘는 우리 조상님의 비석을 넘어뜨릴 수 있었느냐?]

[듣고 보니 이상하군요. 하지만 소제는 그 놈이 막비강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생김새나 지니고 있는 붉은 호리병이 막고천이 보내온 용모파기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선 사나흘 배를 곯려 놓은 뒤에 사로잡아 확인합시다.]

막비강이 상대방 두 사람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진다고 느꼈을 때였다.

[아이야, 내가 말하는 대로 걸음을 옮겨라. 앞으로 세 걸음... 우측으로 돌아 여덟 걸음... 좌측으로 돌아 한걸음... 앞으로 반걸음... 다시 좌측으로 돌아 열 걸음....]

귓전에 아까 그 모깃소리 같은 음성이 울려 왔다.

막비강은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문득 눈앞이 탁 트이며 이미 동백나무 숲 밖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면전에는 육순 남짓한 의원 차림의 노인이 오른손에 약초를 캐는 호미를 들고 막비강을 향해 빙긋이 웃고 서 있었다.

[! 빨리 나를 따라오너라!]

그는 막비강의 반응도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막비강은 미처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급히 그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의원 차림을 한 이 노인의 걸음걸이는 바람 같아 막비강은 달려야지만 간신히 따라갈 수 있었다.

약 반시간 가량 따라가자 노인은 녹음이 짙은 밀림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밀림 안에 들어서더니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히죽 웃었다.

[어린것이 제법 날래구나.]

막비강은 이 노인이 구출해 주지 않았다면 혈검산장으로 잡혀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임을 잘 아는지라 얼른 큰절을 했다.

[선배님께서 도와 주시지 않았으면 후배 곡능천은....]

노인이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을 가로챘다.

[아이야, 네 이름은 정말 곡능천이냐?]

막비강은 은인에게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급히 또 포권의 예를 올렸다.

[후배의 본명은 막비강입니다. 그러나 집안이 변고를 당해 곡능천이라 이름을 고쳐 강호를 유랑하고 있습니다.]

[그럼 너는 혈검산장 금사혈검 막고천의 자식이 틀림없구나.]

막비강은 어쩔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이 곤혹의 빛을 띠며 물었다.

[너희 집에 무슨 변고가 발생했느냐? 그리고 네 부친 막고천은 무엇 때문에 사면팔방으로 사람을 풀어 너의 행방을 수색케 하고 있느냐?]

[이 일은 관계가 너무 중대하므로 당돌한 요청입니다만 노선배님의 존함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노부의 성은 악()가고...!]

순간 막비강은 혈검산장의 무사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한 분 기인을 떠올리고 얼른 말을 받았다.

[혹시 남산의성(南山醫聖) 악불령(岳不靈) 노선배님이 아니십니까?]

막비강의 말에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어찌 감히 의성이라 칭할 수 있겠느냐. 다만 몇 가지 약초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다.]

 

남산의성 악불령!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최고의 신의(神醫). 그의 재주는 죽은 자를 살리고 백골에 살을 붙일 지경이라 소문이 나 있었다.

또한 그는 의술뿐만 아니라 기문둔갑의 재주와 무공 방면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강호칠절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다.

막비강은 급히 포권을 했다.

[후배가 미처 몰라 뵙고 실례했습니다. 사실 집안의 변고는 입을 열기 부끄럽습니다. 막고천은 후배의 생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집을 나온 것입니다.]

남산의성 악불령이 놀라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 너는 어디서 그런 소식을 들었느냐?]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눈물을 글썽이며 처연한 표정을 짓자 얼른 또 말을 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그만둬라! 노부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 묻겠는데 네가 남궁세가 조상의 묘비를 파헤친 의도는 무엇이냐?]

막비강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육령지를 찾아 공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악불령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이야, 너는 잘못 알고 있다. 육령지는 심산유곡에 들어가 찾아야지 어찌 남의 조상의 묘혈(墓穴)을 파헤쳐 얻으려 하느냐?]

악불령의 말에 막비강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악불령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하는 소문에 의하면 당년의 무성(武聖) 청구상인께서는 자신의 청구단서를 지기(地氣)가 서린 한곳 용혈(龍穴)에 묻어 두었다는구나.]

(이분은 내가 비석을 파헤치는 이유를 이미 알고 계시는구나!]

막비강이 부끄러워할 때 악불령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너의 무예로는 남궁세가의 세 가주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노부가 너를 도운다면 그들도 너를 어떻게 못할 테니 이 기회에 그것을 꺼내 오너라. 그러면 우리 두 사람에게 피차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막비강은 청구단서가 이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후배는 노선배님의 분부에만 따르겠습니다.]

[좋다. 그럼 노부는 우선 네게 몇 가지 진법과 내공의 입문공부를 가르쳐 주겠다. 그런 다음 보름 후 달 없는 밤에 다시 그곳에 가서 무덤을 파헤치자.]

막비강은 악불령이 내공심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자 황급히 큰절을 했다.

비록 막비강이 강호의 일류고수들인 염라철장과 무협제원등의 무공을 연마하긴 했지만 제대로 내공심법을 익히지 못해 그 위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었다. 초식과 달리 내공심법은 이끌어주는 스승이 없으면 큰 성취를 보기 어려운 것이다.

막비강이 절을 하려 하자 악불령은 담담히 웃으며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노부는 너를 제자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니 큰절까지 할 필요 없다.]

이어 그는 품속에서 두 권의 두껍고 얇은 책자와 환약이 든 봉투를 꺼내 막비강에게 주었다.

[노부가 보니 너의 자질이 뛰어난지라 내공심법 뿐만 아니라 특별히 노부의 진보약학(陣譜藥學)까지도 전수해 주겠다. 이 책자엔 노부가 연구하여 얻은 학문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보름 동안 빌려줄 테니 열심히 보도록 해라.]

두 권의 책을 건네준 악불령은 이어 여러 알의 환약이 든 봉투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그리고 이 약환은 역용환(易容丸)인데 각종 색깔이 모두 들어 있다. 한 알을 사용하면 약효가 보름간 지속된다. 사용할 땐 물 속에 풀어 피부에 발라라. 그리고 원래 면목을 회복하려면 양잿물에 씻으면 된다.]

막비강은 두 손으로 환약도 받아 품속에 넣고 물었다.

[노선배님께선 지금 어딜 가실 생각이십니까? 보름 후 후배는 어디서 노선배님을 기다릴까요?]

[여기서 기다려라. 그리고 그 책자들은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야....]

악불령의 말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 교활한 가짜놈 같으니...!]

난데없이 나직한 코웃음 소리가 전해 왔다.

[누구냐?]

갑자기 들려온 코웃음 소리를 들은 악불령은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이어 그는 벼락같이 몸을 뽑아 올려 십여 장 밖의 고목 위로 덮쳐 갔다.

와지직!

일순 무성한 나뭇가지가 강맹한 장력에 부러지고 앙상한 줄기만 남았으며 악불령은 나무줄기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과연 강호칠절 중 한 분답구나!)

막비강은 의성 악불령의 고절한 무공에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악불령은 상대방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한 듯 나무줄기 위에서 한바퀴 맴돌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막비강이 놀라고 있을 때 또 다른 방향에서 냉소 소리가 전해 왔다.

[! 남의 이름을 도용하는 노적 같으니...!]

악불령은 만면에 경악의 빛을 가득 머금은 채 날카롭게 외쳤다.

[어느 방면의 고인인지 모습을 나타내시오!]

그의 말이 막 끝났을 때,

[오냐! 원한다면 나타나 주마!]

냉랭한 일갈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예리한 파공성을 대동한 채 쏘아 왔다.

[! 당신은...!]

화라라락!

악불령은 안색이 일변하더니 황급히 숲 속으로 도주해 들어갔다. 그는 얼마나 급했던지 약초 캐는 호미까지 팽개쳐 두고 도망쳤다.

막비강은 잠시 머뭇거리다 허리를 굽혀 그 호미를 잡으려 했다.

바로 그때 늙으스레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이야, 잠깐 기다려라!]

화락!

말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막비강의 면전에 내려섰다. 그 사람은 고희의 나이에 인자한 용모를 지닌 갈포(葛布) 노인이었다.

노인은 막비강을 보고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야, 너는 속았다. 하지만 노부는 너를 원망하지 않겠다. 가짜 악불령은 어디로 도망쳤느냐?]

막비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노선배님께선 왜 그를 가짜라 하십니까?]

[그것은 노부가 바로 악불령이기 때문이다.]

[예에? 선배님이 남산의성이시라구요?]

막비강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자의 이름은 강용(江庸)이고 별명은 소리장도(笑裏藏刀). 한 달 전 노부가 출타 중인 틈을 이용하여 노부의 채약 도구인 뇌강서(雷鋼鋤)와 약물감별필록(藥物鑑別筆綠)을 사취해 갔다. 노부는 사방으로 그를 찾아 헤맸는데 여기서 또 놓치고 말았구나.]

나타난 노인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했다.

막비강은 강용이란 자가 도주할 때의 낭패한 모습으로 미루어 면전의 노인이 진짜 악불령이라 단정하고 강용이 주었던 물건들을 모두 꺼내 악불령에게 돌려주었다.

[악 선배님께서 잃어버리신 물건은 이것입니까?]

악불령은 두 권의 두껍고 얇은 책자를 받아 뒤적여 보더니 가벼운 탄식을 했다.

[너는 매우 정직하구나. 이 두꺼운 약전(藥典)은 노부의 물건이다. 그러나 이 기공입문법(氣功入門法)은 강용의 물건이다. 너와 내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노부는 여기서 보름만 머물며 네게 기공입문공부를 전수해 주겠다. 네 의사는 어떠냐?]

[불감청이언정 고소언일 따름입니다!]

막비강은 얼른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강용을 만나게 된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악불령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노부의 약초 캐는 호미를 사취해 간 것은 이제 보니 청구단서가 숨겨져 있다고 소문난 위왕묘(魏王墓)를 도굴하기 위해서였구나.]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위왕묘를 파는 데 왜 선배님의 약초 캐는 호미가 필요합니까? 다른 것으로는 파지 못합니까?]

[위왕묘는 사방이 한철(寒鐵)로 뒤덮여져 있기 때문에 보통의 도구로는 이가 먹히지 않는다! 오직 노부의 뇌강서만이 한철의 극성이라 도굴이 가능하지. 물론 간장(干將) 막야(莫耶)같은 보검으로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것으로는 많은 시간과 진력을 소모해야 한다. 위왕묘를 도굴하려면 노부의 뇌강서가 제일 적격이지. 하지만 위왕묘에 청구단서가 숨겨져 있다는 말은 믿지 못할 소문이다.]

[청구단서가 위왕묘 안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까?]

[어디에 숨겨져 있는진 노부도 모른다.]

악불령은 고개를 설레 저었다.

[너도 생각해 봐라. 청구상인이 죽은 지는 채 백년도 되지 않는다. 반면 위왕은 삼국시대의 효웅 조조(曹操)를 칭하는 게 아니냐? 두 사람의 시대가 천년 넘게 차이가 나는데 위왕묘 안에 청구단서가 있을 리 있겠느냐?]

[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막비강도 고개를 끄떡였다.

[강용이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인진 모르겠지만 기관이 거미줄처럼 설치되어 있는 위왕묘에 들어갔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막비강은 이 말을 듣고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그는 청구단서가 비석 밑에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이 비급은 그가 절예를 연성하고 피맺힌 원수를 갚는 데 중대한 관계가 있는지라 악불령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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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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