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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천록여의 (3)

 

 

 

삼경이 넘은 시각에 계명사는 초파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향유가 든 연화등(蓮花燈)들이 줄지어 밝혀져 불야성을 이루었다.

승려들은 활몽루가 사라진 앞에서 무릎이 얼어터지는 줄도 모르고 한 여름철 개구리떼가 왕왕 거리는 것처럼 불경을 목청 껏 읊어댄다.

그리고 개구리 울음 소리 속에 섞여 들려오는 찌르레기 소리처럼 가날픈 퉁소소리가 현무호 호반에 흐른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계명사 상공에서 푸른빛이 번득이더니 천둥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노오옴!!!

 

중들이 놀라 목탁을 집어던지고 엎드린다.

[부처님께서 노하셨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그러나 이내 빛도 사라지고 고함소리도 정적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푸른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가 포물선을 그리며 호수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중들도 보고 행여 부처님을 볼세라 밤늦게 달려왔던 열성신도들도 눈을 말똥말똥하며 보았다.

늙은 도사는 개구쟁이가 던진 돌멩이처럼 날아가 호수에 약간 큰 퐁당소리를 내며 빼지고 말았다.

중생들의 시선과 늙고 젊은 중들의 시선이 계명사 주지 과우(寡雨)대사에게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

과우대사는 억지로 뚱뚱한 몸을 비틀거리며 쓰러지며 한마디 했다.

[! 불조께서 임하신 이 뜻을 누가 감히 알리오!]

제자들이 달려들어 팔다리를 주무르고 입가로 찬물을 흘려 넣어 준다.

과우대사는 속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제자들이나 신도들은 무슨 징조냐고 자기에게 물으면 그만이지만 자기는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석가모니는 입이 없었다고 적혀있지 않으니 말할 수 있었겠지만 대웅전 법당속의 부처는 만들 때 잘못 만들었는지 칠십 년 동안 지켜봤지만 한 번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과우대사는 내심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동정하기도 하지만 이럴 땐 난감하기만 하다.

금도금을 입혀놨으니 아무리 말 잘하던 입이었다 해도 어디 벙긋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욕을 해도 그만 절을 해도 그만 그저 한결같이 억지 미소만 짓고 있을 도리밖에.

 

***

 

계명사의 요란하던 벼락 법회는 연화등이 하나하나 꺼져가면서 조용히 끝나고 있었다.

삘릴리...!

호반에 흐르는 퉁소소리가 야반 삼경의 그윽한 정취를 더하고, 물가로 밀려온 달이 하늘 비좁음을 아쉬워한다.

호수 가운데 있는 섬에 있는 정자에는 자기 그림자를 물에 비추며 흰옷을 입은 소년이 백룡이 아로새겨진 백금퉁소를 입에 물었고, 백금퉁소는 뼈마디가 시큰거리는 애절한 곡을 꼬리에 달고 있다.

추웃!

진양진인은 정자 앞의 물가에서 일어났다.

옷이 흠뻑 젖었다.

몹시 지치고 피곤한 듯 두 손을 휘저으며 겨우 정자로 걸어갔다.

오장육부가 다 뒤집혀 버렸는지 진기가 안정되지 않고 우왕좌왕한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동서남북도 거의 가릴 수가 없다.

진양진인은 귀에 익숙한 퉁소소리에 이끌려 정자까지 와서는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

퉁소소리가 그치고 진양진인의 머리 옆에 한 사람의 발이 나타났다.

진양진인은 지쳐버려 누군지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아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제발 노도를 그냥 내버려두게. 제발... ]

[하하하! 도장(道長)은 내 소리에 걸려든 물고기입니다.]

웃음기 섞인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진양진인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보통사람이라면 몇 번 죽었을 중상을 입고 차가운 호수 물속에 한 참이나 있었으니 그의 노구가 견뎌내지 못한 것이었다.

무당파의 비전절학(秘傳絶學)인 양의신공(兩儀神功)을 익히고 있었기에 그나마 숨이라도 끊이지 않고 쉴 수 있는 형편이다.

진양진인은 실오라기만큼만 진기를 모아도 방해자를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기해혈은 텅빈 표주박같아서 어떤 기운도 끌어올릴 수가 없다.

눈앞이 캄캄한데 몸이 공중에 들렸다.

(노도의 질긴 목숨이 기어코 오늘의 액겁을 피하지 못하고 죽는구나!)

진양진인은 왠지 개운한 것 같으면서도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그를 두 손으로 안아든 백의소년이 정자 밖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도장께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우화등선(羽化登仙)하시고 싶더라도 잠시 참아주십시오.]

진양진인은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노도는 매 매우 춥다네.]

[곧 불을 피워 드리겠습니다.]

진양진인은 의식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

 

---꼬끼오! 꼬끼오!

---왕왕왕! 왕왕왕!

 

새벽 닭 우는 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진양진인을 깨웠다.

타탁! 타탁!

장작 타는 소리와 매운 연기 내음이 함께 몰려온다.

눈은 떴지만 노곤하여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천장은 낮고 입구는 좁은 동굴 속이다.

연기가 앞으로 잘 빠져 나가는 것도 아닌데 모닥불이 꺼지지 않은 채 용케 타오른다.

진양진인은 공기가 뒤로 흐르는 것을 보고 그 동굴이 꽤 깊은 곳이라는 걸 알았다.

고른 숨소리가 모닥불 맞은 편에서 들린다.

진양진인은 암암리에 양의신공을 운용해 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전신의 혈맥을 개미가 물어뜯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혼자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고 만 것이다.

억지로 기혈을 통하게 하려다간 오히려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다.

진양진인은 모닥불 건너편의 숨소리를 다시 확인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를 잡아온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공력이 정심하지는 않구나. 범을 피했는가 했더니 겨우 개구리에 물려 죽을 지경이 되다니...)

그는 마음으로 자기의 속을 들여다보면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곱아보기 시작했다.

열 개의 손가락이 다 곱혔다가 펼쳐진 후 다시 네 개가 곱혔다.

진양진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뒤엉킨 기혈을 뚫지 못한다면 남이 애써 죽이지 않더라도 앞으로 살 수 있는 건 스무 나흘에 불과하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도 동료를 찾아 도움을 받는 수 밖에 없는데, 그 또한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자가 깨어나면 상황이 또 어찌 변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양진인은 살아온 일백삼십여 년의 세월을 통해서 이럴 때일수록 상황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정말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얼핏 본 백의소년의 모습을 생각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시주는 철인련맹(哲人聯盟)에 속해있는가 아니면 환우회(寰宇會) 사람인가?]

잠든 줄 알았는데 즉시 대답이 들려왔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사람입니다.]

진양진인은 그가 누구든 간에 그 음성에 적의(敵意)가 없다는 걸 느꼈다.

다시 말했다.

[노도는 육십 년 전에 무림을 떠난 사람이니 아는 것이 별반 없네. 어떤 것을 물으려 하는가?]

모닥불 건너편에 있던 소년이 진양진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흰 비단옷을 입었고 붉은 색 띠를 둘러 머리를 묶은 소년이다.

소년이 말했다.

[저는 현무호에 놀러 나왔다가 도장께서 퉁소를 부는 것도 봤고 활몽루를 사라지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양진인은 말했다.

[퉁소는 소협도 불지 않았는가? 노도는 정신이 희미한 중에도 소협의 퉁소 소리에 이끌렸던 것으로 기억하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도장께선 제가 꾸민 천록여의(天祿如意)의 첫 번째 제물입니다.]

진양진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천록여의라... 뜻하는 대로의 행복이란 말인가 아니면 소협의 이름이 천록이고 뜻대로 되었다는 말인가?]

소년이 감탄하며 말했다.

[두번째 뜻이 맞습니다. 제 이름이 바로 현천록이고 도장께선 제 낚시에 걸려던 물고기지요.]

진양진인이 물었다.

[그 낚시가 퉁소고 미끼는 애상곡이었는가?]

진양진인은 의식이 거의 없었던 상태에서의 일이었지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저는 이제 도장의 애상곡은 흉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활몽루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군요.]

진양진인이 차분한 눈으로 현천록을 응시했다.

현천록의 눈은 맑고 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진양진인은 스스로 위엄을 갖추어 현천록을 압도하고자 했지만 현천록의 마음에는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었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을 보면 볼수록 혼란스러워 졌다.

처음에는 이런 짐작 저런 짐작 다해보았지만 정작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진양진인은 곰곰히 생각했다.

(이 아이는 내가 창허진인을 활몽루에 가두는 것을 보고도 오히려 퉁소로 내가 불던 애상곡을 부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내력을 쌓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철인련맹의 늙은이들이라면 내력을 감추거나 아예 처음부터 없는 자들도 있다지만 나이로 봐서 철인련맹의 철인(哲人)일 리도 없다. 환우회에서 무공이 없는 아이를 보낼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다. 내가 무당의 진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데 이렇듯 대하는 걸 보면 또...)

아무런 결론도 나오지 않는다.

무엇하나 확신할 수 조차 없다.

한데 그의 갑자기 머리 속으로 한줄기 섬광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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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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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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