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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인간쟁탈전

 

 

 

[이놈아! 너는 누구냐?]

삼촌정이 당혹한 표정으로 물었다.

헌데 막비강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추명염왕이 뒤따라 도착하며 고함을 질렀다.

[애송아! 너는 감히 막비강, 곡능천, 능곡천이 아니라고 말할 테냐?]

막비강은 그자가 단숨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자 내심 뜨끔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되물었다.

[노인장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통 못 알아듣겠소.]

뒤어어 도착한 소면호도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 수작 부리지 마라! 노부가 네놈의 몸을 수색해 보겠다!]

막비강은 한 걸음 물러서며 이마를 찌푸렸다.

[내 몸에서 무엇을 수색하겠다는 거요?]

!

하지만 소면호는 대꾸하지 않고 지풍을 날려 막비강의 혈도를 찍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수색하여 무협제원의 유물인 신녀비를 찾아냈다.

[교활한 놈! 이래도 시치미를 뗄 테냐! 이건 무협제원의 신녀비가 아니냐?]

소면호는 비수를 막비강의 목에 들이대었다. 그는 이미 막비강이 무협제원의 무공을 익혔음을 알고 있었다.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말하지 않으면 당장 멱을 따버리겠다.]

소면호는 금방이라도 신녀비로 목을 찌를 듯이 위협하며 말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비급이 숨겨진 장소라니요?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소. 생사람 잡지말고 빨리 혈도나 풀어주시오! 그 단검은 허리춤에 붉은 빛이 도는 호로를 찬 내 또래의 소년이 준 것이오.]

막비강의 말에 마두들은 흠칫했다.

하지만 소면호는 끝내 의심을 풀지 않고 물었다.

[그 놈이 무엇 때문에 이런 절세보검을 네게 주었느냐?]

막비강은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어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둘러댔다.

[그는 내게 우혈(牛穴)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소. 그래서 알려 주었더니 고맙다면서 그 단검을 내게 주었소.]

빈틈없는 막비강의 대답에 세 마두는 반신반의하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삼촌정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의 말을 잠시 믿어주겠다. 하지만 네가 말한 그놈이 보이지 않으면 네놈을 대신 우혈 속에 던져 버리겠다.]

삼촌정은 즉시 막비강을 옆구리에 끼고는 경신술을 펼쳐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행은 곧 경지하 변에 높이 솟아있는 절벽 앞에 이르렀다. 그 절벽 아래에는 커다란 동굴이 하나 뚫려 있었는데 때때로 안쪽에서 소가 우는 듯한 괴성이 들려 우혈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막비강은 소흥부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경지하 변에 우혈이란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기억하고 있다가 세 마두에게 둘러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과 세 마두가 우혈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누가 있을 리 없다. 그저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컴컴한 동굴만 뻥 뚫려 있을 뿐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어른을 속여? 네놈부터 먼저 죽이겠다.]

소면호는 우혈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살기 어린 노성을 질렀다.

막비강은 깜짝 놀라는 척하며 다급히 말했다.

[당신들은 비급을 취득하러 왔다고 말했지 않소? 그럼 그 소년이 먼저 우혈 안으로 비급을 찾으러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추명염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놈 말에도 일리가 있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안을 살펴보자.]

삼촌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막비강을 옆구리에 낀 채 우혈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그때 소면호가 삼촌정에게서 막비강을 낚아채며 말했다.

[난쟁아! 너는 몸집이 작아서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아보기에 적합하다. 이놈은 내가 업고 뒤따라 들어가고 염왕을 내 뒤에서 보호하게 하자.]

삼촌정과 추명염왕은 소면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막비강도 속으로 탈출할 계획을 생각하며 소면호의 등에 업힌 채 음침하기 짝이 없는 우혈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가량 들어가자 동굴은 점점 좁아졌다. 그와 함께 발 밑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동굴의 바닥을 이루는 바위의 아래쪽에는 지하수맥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물의 수위가 변하며 간간이 소 울음소리 같은 괴성을 내는 것이다.

[... 큰일날 뻔했구나!]

문득 앞장서서 들어가던 삼촌정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동굴 바닥이 끝나며 수직 동굴이 나타난 때문이다. 자칫 했으면 삼촌정은 그대로 수직동굴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 했다.

이 수직 동굴은 얼마나 깊은 지 알 수가 없다. 삼촌정이 품 속에서 천리화(千里火)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아래쪽을 비추어 보았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직 동굴 아래쪽에서는 세차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차가운 냉기(冷氣)가 올라와 뼛속까지 스며든다.

길이 끊긴 것을 확인한 삼촌정은 고개를 홱 돌려 막비강을 노려보았다.

[죽일 놈! 여기 어디에 사람이 있느냐? 이 수직갱 속에는 물이 흐르고 있고 너무 깊어 일단 뛰어내려가면 올라올 수도 없다. 설마 막비강이란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단 말이냐?]

하지만 막비강은 태연히 대꾸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오. 나라도 절세비급을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했을 거요.]

헌데 바로 그 직후였다.

! !

[으악!]

[고금! 네놈이... 으아아아!]

갑자기 두 차례 둔탁한 폭음이 일어나고 처절한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풍덩! 풍덩!

그와 함께 두 개의 인영이 그대로 수직갱 아래의 물 속으로 떨어졌다.

이어 어둠 속에서 소면호가 득의의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너희 두 노적은 비급 때문에 지금까지 나와 다투었지만 이제는 황천에 가서 염라대왕과 다투어라!]

수직갱 속으로 추락한 것은 바로 추명염왕과 삼촌정이었다. 소면호가 방심하고 있는 그들을 장력으로 급습하여 수직갱에 밀어버린 것이다.

막비강은 짐짓 겁에 질린 척하며 벌벌 떨었다.

[... 살려 주세요!]

[흐흐흐! 어린 녀석아, 무서워할 것 없다.]

소면호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두 노적은 오래 전에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넌 죽이지 않을 테니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바른 대로 말해라!]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내가 어떻게 압니까?]

막비강이 시치미를 떼었으나 소면호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내 앞에선 어리석은 수작 부리지 마라. 끝까지 곡능천이 아니라고 고집부린다면 네놈도 저 속에 던져 버리겠다.]

[난 오진강(吳振綱)이라는 소흥부 사람입니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 집으로 데려가 물어 보면 알게 될 텐데 왜 나를 곡능천이라 하는 거요?]

[주둥아리 닥쳐라!]

소면호는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외쳤다.

[아무리 교활해도 사람에겐 실수가 있는 법이다. 그저 길을 가르쳐 주었을 뿐인데 절세보검을 기증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그리고 노부는 네놈의 허리띠가 원래의 그 허리띠임을 알아보았다. 설마 곡능천이 허리띠까지 네게 주진 않았겠지?]

막비강은 더 이상 시치미를 떼어봐야 소용없음을 깨닫고 자신이 천면신룡 곡능천임을 인정했다.

[확실히 당신은 죽은 두 인간보다 세심하군. 이렇게 잡혔으니 더 이상 할말이 없다. 비급을 얻고 싶으면 경지하로 돌아가자.]

소면호는 막비강을 달래기 위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만약 청구단서를 얻게 되면 노부는 청구상인의 무공과 노부의 일신 절예를 모두 네게 전수하여 제자로 삼아주겠다.]

그자의 말에 막비강은 속으로 냉소했다.

(! 만약 네가 무공을 가르쳐 준다면 나는 그 무공으로 네놈부터 없애버리겠다.)

막비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소면호가 또 웃으며 물었다.

[! 그러니 어서 말해봐라. 네가 파손한 석벽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었느냐?]

막비강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한 수의 시구가 새겨져 있었소.]

막비강은 이어 시구를 읽어 주었다. 하지만 다른 구절은 석벽에 새겨진 대로 말해 주었으나 가득 찬 달밤 삼경에 탑 그림자가 드리워져... 라는 구절은 가득 찬 달밤 삼경에 북두(北斗)의 손잡이가 이동하여로 고쳐 말했다.

소면호는 막비강이 말한 시구를 한 동안 음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구는 과연 비급이 숨겨진 장소를 알리는 관건이구나.]

[그렇소. 이 시구의 뜻으로 보아 달 밝은 밤에 경지하 강변에 가면 틀림없이 청구단서를 취득할 수 있을 것이오.]

소면호는 막비강이 시원하게 비급의 행방을 말하자 내심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 보니 너는 정말 총명하고 시세를 아는 아이구나. 노부는 설사 그 비급을 찾지 못한다 해도 노부의 절기를 모두 네게 전수해 주겠다.]

[아직 비급도 찾지 못했고 또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는데....]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절기를 전수받은 후 노부를 기억해주기만 해도 만족한다. 그럼 우리 그만 영롱탑 근처로 가서 삼경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막비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모르는군요. 그 시구의 내용으로 보아 보름 달밤이라야 하며 그것도 팔월 중추절 밤의 삼경을 가리키는 것일 거요. 오늘은 스무날이니 앞으로 스무닷새가 더 지나야만 보름달이 옵니다.]

소면호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막비강의 총명함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자기보다 어린 소년의 계략에 걸려들고 있는 사실을 꿈에도 께닫지 못했다.

 

* * *

 

이십오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어느덧 둥글게 찬 달이 구름 속으로 숨었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대지는 은가루를 뿌려 대낮같이 밝았다.

막비강은 지난 이십오 일간 소면호를 따라다니며 많은 무학비결을 배웠다.

그리고 이날 소면호와 함께 영롱탑이 보이는 경지하 강변에 이르렀다.

[와아!]

[크아아악!]

챙채앵! 퍼퍼펑!

하지만 이 무렵 경지하 강변에는 무수한 인영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죽고 죽이며 토해내는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있었다.

막비강은 내심 조소를 머금는 동시애 우려를 금치 못했다.

(저들도 청구단서 때문에 여기에 온 모양이구나. 그런데 그들은 지금 이 시간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소면호도 내심 의혹을 금치 못하고 막비강에게 나직이 말했다.

[혹시 그들도 대석비곡에 가서 그 석벽의 글자를 본 것이 아니냐?]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가 석벽의 글들을 긁어내긴 했지만 글이 적혀있었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만일 공력이 심후한 자라면 원래의 글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소면호는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지워진 시구를 다시 판독했다 해도 저자들 역시 나처럼 그 안의 뜻을 절반밖에는 풀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절반만 풀이했다면 이렇게 공교롭게 시간을 맞추어 도착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막비강은 이렇게 대꾸한 후 영롱탑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영롱탑 안은 칠흑같이 어두워 귀화가 나타난다는 장몽아의 말과는 부합하지 않았다.

이어 그는 혈전을 벌이고 있는 무림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들 중에는 남산의성 악불령 등 막비강도 눈에 익은 무림 고수들이 끼여 있었다.

하지만 오봉도인과 조씨부인 일가, 그리고 날수선랑 조손(祖孫)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날수선랑과 조씨부인 일가는 집안에 숨어 동정을 살피고 있다 하더라도 오봉도인은 대석비곡까지 왔었는데 비급 탈취 전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악() 노인과 먼저 고하를 가늠하고 싶소.]

그때 많은 인파 중에서 서생 차림의 중년인이 외치며 걸어나왔다. 그자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한 반면 두 눈에서는 새파란 남광이 번뜩여 사이하고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이었다.

[저자가 육요(六妖)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백독서생(百毒書生) 이량(李良)이다!]

소면호가 설명해 주었다.

(백독서생 이량!)

막비강도 일찍이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유심히 그자를 지켜보았다.

별호 그대로 백가지 극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백독서생 이량은 자타가 공인하는 용독(用毒)의 천하제일인이다. 그 때문에 어떤 고수라도 백독서생 이량을 상대하길 꺼려한다.

[하하하! 그동안 이 서생의 용독술이 제법 성취가 있었던 모양이군! 노부에게 가르침을 내리겠다니...!]

군중들 속에 한차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약초 캐는 호미를 든 노인이 중인들을 헤치고 나갔다. 이 노인은 바로 남산의성 악불령이었다. 백독서생 이량이 용독으로 천하제일이라면 남산의성 악불령을 용약(用藥)으로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다.

막비강은 남산의성을 보는 순간 마음이 조급해졌다.

(야단났구나! 천오주는 내가 가지고 있으니 저분은 무엇으로 백독서생을 대항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내가 대신 나가 백독서생을 상대해야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막비강이 숨어 있던 수풀에서 나가려 하자 소면호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아끌어안았다.

[너는 왜 이렇게 마음이 착하냐? 우린 그들이 서로 싸워 죽을 때를 기다렸다 나가서 뒷수습만 하면 된다.]

[안 됩니다. 악 노인은 내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꼭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나는 너부터 먼저 죽여 버리겠다.]

막비강은 소면호와 함께 이십여 일을 같이 생활하며 상대방의 절학도 배웠다. 하지만 그의 비열한 행위와 독랄한 마음을 보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반감이 더했다.

[가지 말라면 가지 않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소면호로 하여금 팔을 놓게 했다.

[이얏!]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풀 숲에서 날아 나갔다.

[이놈이...! 거기 서지 못해?]

소면호가 노성을 지르며 뒤따라 몸을 솟구쳐 추격했다.

하지만 막비강은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생사현관까지 타통되어 근 일 갑자의 공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먼저 몸을 날렸다. 그 때문에 소면호의 경공신법이 아무리 쾌첩하다 해도 단번에 그를 추격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남산의성 악불령과 백독서생 이량은 몇 마디 형식적인 인사말을 나눈 후 막 싸움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 소리가 들리는지라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하나의 인영이 비조(飛鳥)처럼 날아오고 그 뒤에 또 다른 그림자가 쫓아오고 있지 않은가?

남산의성 악불령은 전면의 인영이 전개하는 신법에서 반년 전에 만났던 소년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걱정 마라, 아이야!]

그는 급히 달려가 막비강을 맞이한 다음 소면호에게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왜 어린 후배를 괴롭히는 거요?]

[비켜라!]

소면호가 노성을 지르며 일장을 격출했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상대방의 장풍이 강맹함을 느끼고 황급히 일장을 맞받아 냈다.

!

그러나 이 무렵 소면호는 전력을 다해 일장을 격출했는지라 남산의성 악불령은 팔이 마비됨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세 걸음이나 후퇴했다.

[누군가 했더니 고명이 쟁쟁하신 소면호 고 노인이셨군!]

악불령은 몸을 가눈 다음에야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는 즉시 오른손의 뇌강서로 둥근 흑광을 형성하여 질풍처럼 덮쳐 갔다.

소면호는 자기의 무예가 상대방에 비해 약간의 손색이 있음을 알고 처음부터 전신의 공력을 발출했었다. 헌데 상대방이 병기를 휘두르며 덮쳐 오자 더욱 두려움을 금치 못하고 급히 쌍구검(雙鉤劍)을 뽑아 평생의 절학을 다해 악불령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그사이에 막비강은 백독서생 이량 앞에 도착하여 포권의 예를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이 선배님의 독공이 천하제일이라는 소문을 오래 전부터 들었습니다. 후배 오진강이 가르침을 받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장내의 군중은 그의 그 같은 행위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대개가 강호에서 위명을 떨친 고수들이지만 백독서생 이량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헌데 갑자기 약관도 안된 어린 소년이 백독서생 이량에게 도전한 것이다.

군웅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막비강의 안위를 걱정했다.

백독서생 이량은 자기 소개를 하고 나온 자가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소년임을 보고 실소했다.

[애송아! 너의 담량은 대단하구나. 너는 누구의 자제이며 사부는 누구냐?]

[후배에겐 사부도 없고 부친도 없습니다.]

[무슨 잠꼬대 같은 말이냐? 사부가 없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부친이 없다면 너는 어디서 났단 말이냐?]

[물론 부친이야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자신도 내 부친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래서 부친이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전할 필요 없이 노부를 사부로 모셔라. 그럼 네게 독문(毒門)의 용독학(用毒學)을 전수해 주겠다.]

[독으로 사람을 해치는 잔재주 따위는 배우지 않겠습니다.]

독공이 잔재주라는 막비강의 말에 백독서생 이량의 눈에서 한 줄기 살기가 발산되었다.

[네놈을 때려죽여 버리겠다.]

[글쎄, 그게 쉽게 될지 의심스럽군요.]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량에게 도전하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래서 뇌강서로 강맹한 일초를 공격한 다음 소면호를 버려 둔 채 질풍처럼 날아왔다.

[얘야,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는 이어 백독서생 이량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노부의 기명제자(記名弟子).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후배니 실례가 있었더라도 이해하시오!]

백독서생 이량은 어리둥절했다.

[이 녀석은 사부도 부친도 없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어찌 갑자기 당신의 기명제자라는 거요?]

바로 그때였다.

[그는 노부의 기명제자이기도 하오.]

소면호가 뒤따라 달려와 고함을 질렀다.

[뭐라고?]

[저 아이가 남산의성의 제자이며 또 소면호의 제자라고?]

장내의 군웅들은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정사(正邪) 양파의 무학을 동시에 배운다는 것은 너무 기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뿐 아니라 백독서생 이량 등도 어리둥절했다.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자기를 만나기 전에 이미 염라철장, 무협제원, 헌원여호등 세 사람의 무공을 배웠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지라 다시 소면호의 무공을 배운 것에 대해 조금도 이상히 생각지 않고 빙긋이 웃었다.

[고 노인, 당신은 스스로 자신을 추켜세우지 마라. 설령 당신이 저 아이에게 무학을 전수해 주었다 해도 기명제자라곤 말할 수 없다.]

소면호가 눈을 부릅뜨며 반박했다.

[그럼 너는 무슨 자격으로 그를 너의 기명제자라 말하느냐?]

[그가 나의 독문의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독문무학을 배웠다.]

백독서생 이량이 옆에서 웃으며 참견을 했다.

[당신들은 더 이상 다투지 마시오. 이 아이가 내게 도전해 왔으니 나는 그를 양자로 삼아야겠소.]

[핫하하하! 재미있구나! 정말 재미있어! 비급 쟁탈전이 이제 사람의 쟁탈전으로 변하다니...!]

문득 허공에서 누군가의 가가대소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화라라라!

처음 웃음소리는 분명 수마장 밖에서 들려 왔는데 다음 순간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장내로 날아 내렸다. 실로 대단한 경신술이 아닐 수 없었다.

쿠쿵쿵!

지축을 흔들며 날아 내린 인물은 한 명 산발한 노인이었다. 머리는 수세미처럼 산발을 했고, 얼굴의 절반은 지전분한 수염으로 덮여 있었다.

몸에 걸친 것은 다 낡아 해진 관복이었는데 발에는 아무것도 신지 않아 때로 찌든 커다란 발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일견하기에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광인(狂人)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미친 사람 형상의 노인이 나타나자 중인들은 안색이 변해서 급히 사방으로 물러섰다.

[우주도철(宇宙饕餮)! 우주도철이다!]

[천하오대기인(天下五大奇人) 중 한 명이 나타났다!]

 

우주도철!

 

그렇다. 그 광인이야말로 전대의 최절정고수들인 천하오대기인 중의 우주도철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한때 벼슬을 했던 적도 있어 늘 낡은 관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다.

도철(饕餮)이란 본래 탐욕스럽고 광폭하여 사람을 잘 잡아먹는다는 전설 속의 괴물이다.

별호에 그 도철이란 이름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이 인물의 성격이 어떠한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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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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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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