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12

 

            마두속출

 

 

 

(이게 어찌된 일이지? 저 지독한 거지들이 귀신을 본 듯이 놀라 달아나다니...!)

막비강은 어리둥절하여 나타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인물은 백색 장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헌데 야위기가 가죽이 뼈만 감싼 것 같았으며 움푹 들어간 눈에선 전광(電光) 같은 광망(光茫)이 번뜩였다. 흡사 무덤에서 방금 뛰쳐나온 강시와도 같은 형상이었다.

(... 사악한 무공을 익힌 자다!)

막비강은 비록 이 사람 덕분에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절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백포노인은 막비강을 노려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흐흐흐! 어린 녀석아, 아까 네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냐?]

막비강은 비록 사실대로 말해도 상대방이 금방 찾아낼 수는 없다 여기고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목숨을 구해 주어 고맙습니다 선배님. 방금 전에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좋다. 그럼 우리는 보물을 찾으러 가자!]

[그곳은 개방의 총단인데...!]

[흐흐흐! 그깟 거지 떼 따위가 무슨 장애가 되겠느냐?]

파팟!

백포노인은 음침한 웃음을 터뜨리며 막비강의 팔을 움켜잡더니 쏜살같이 대석비곡 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편, 다섯 거지는 얼마 도주하지 못했을 때 뒤쪽에서 세찬 파공성이 들려오자 깜짝 놀랐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보니 백포노인이 막비강을 팔을 잡아끌고 이미 삼 장 밖에까지 쫓아와 있었다.

호면개 도금은 타구봉을 휘둘러 나머지 네 노개와 동시에 걸음을 멈춘 후 물었다.

[추명염왕(追命閻王) () 선배님은 무슨 일로 저희들을 추격하십니까?]

(이자가 흑도팔흉(黑道八凶) 중의 추명염왕!)

백의괴인에게 손목이 잡혀 있던 막비강은 깜짝 놀랐다.

 

추명염왕 곽여해(郭餘海)!

 

그자는 흑도에서도 악명이 높은 살인마들인 팔흉(八凶) 중 한 명이었다.

팔흉은 육요(六妖), 칠절(七絶)에게는 다소 손색이 있으나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염라대왕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비록 호면개 도금이 개방 방주라 하지만 추명염왕 같은 거마에게는 발끝에도 못 미치는 형편이었다.

[흐흐! 본좌가 쫓아온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느냐?]

추명염왕은 음산하게 내뱉음과 동시에 일장을 격출했다.

다섯 명의 거지도 고함을 지르며 일제히 타구봉을 휘둘러 반격했다.

[!]

추명염왕은 재차 일장을 뻗어냈다. 그러자 다섯 명의 거지는 비틀거리며 각자 세 걸음씩 후퇴했다.

하지만 그들은 호면개 도금의 함성을 신호로 다섯 사람은 전력을 다해 또 타구봉을 휘둘렀다.

[네놈들은 죽음을 자초하고 있구나!]

추명염왕은 막비강을 내려놓고 쌍장을 동시에 휘둘러 냈다.

퍼펑!

[으악!]

[커억!]

다음 순간 다섯 명의 거지는 줄이 끊어진 연처럼 사방으로 날아가 떨어지더니 꼼짝하지 않았다. 한 때 천하제일의 대방이라 불리던 개방의 수뇌 다섯이 추명염왕의 일초를 받지도 못하고 몰살당한 것이다.

(... 무서운 자다!)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흘흘흘! 독하다, 독해! 과연 추명염왕이란 명호가 부끄럽지 않구나!]

난데없이 뇌성 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막비강이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난쟁이가 한 쪽에 서 있었다. 키는 채 넉 자가 못되지만 양팔이 땅까지 늘어져 있고 눈빛이 아주 음침한 노인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사악하고 음독한 인상이었다.

막비강은 그자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 본능적으로 옆으로 물러섰다.

추명염왕은 몸을 돌리며 음랭하게 웃었다.

[흐흐흐! () 난쟁아, 너도 이 일에 끼여들 생각이냐?]

[청구단서는 무림의 지보(至寶)인데 얻으려는 사람이 노부 한 명뿐인 줄 아느냐?]

난쟁이는 말하며 옆의 바위를 흘깃 바라보았다.

[흐하하하! 과연 천이통(天耳通) 삼촌정(三寸釘)의 이목은 놀랍소!]

화라락!

다음 순간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명 노인이 바위 뒤에서 날아 나왔다. 그자는 도포를 의젓하게 걸치고 등에 불진을 짊어진 노인이었다. 차림은 분명 출가인이지만 그 얄팍한 입술과 족제비 같은 눈빛은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 누군가 했더니 소면호(笑面虎) 고금(古今) 영감이었군!]

그자를 본 추명염왕이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내심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두 분은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오. 나 고()가도 이번 일에 한몫 껴야겠소.]

소면호 고금이라 불린 도인은 포권을 하며 능글맞게 말했다.

 

삼촌정 정발(丁發)!

소면호 고금(古今)!

 

그자들도 모두 추명염왕과 함께 흑도팔흉에 드는 거마들이었다.

소면호가 끼여들자 추명염왕은 얼굴을 굳히며 괴소를 터뜨렸다.

[낄낄! 고 영감, 아마 너는 이 일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에 소면호의 웃던 얼굴이 일변하여 음침하게 변했다.

[추명염왕, 너는 이제 염라대왕(閻羅大王)이라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나는 우선 정 난쟁이와 합세하여 너부터 황천으로 보낸 다음 대책을 강구하겠다.]

추명염왕은 상대방이 연합하여 덤비겠다고 말하자 흠칫 놀랐다.

[이리 와라!]

그는 즉시 몸을 솟구쳐 막비강을 잡아갔다.

[어딜!]

소면호가 날카롭게 외치며 재빨리 덮쳐 와 추명염왕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추명염왕은 도리 없이 전력을 다해 뒤로 일 장 가량 후퇴했다.

[소면호! 너는 정말 노부와 싸울 생각이냐?]

[그것을 말이라고 묻느냐?]

이때 난쟁이가 옆에서 말을 받았다.

[고 영감의 말이 옳다. 우리는 합세하여 먼저 그를 수습한 다음 다시 대책을 강구하자.]

막비강은 그들이 다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비급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싸움질부터 먼저 하다니... 이 틈에 빨리 도주해야지.)

화라라락!

그는 세 사람이 서로 대치해 있는 틈을 이용하여 몸을 솟구쳐 전력을 다해 도주했다.

[게 섰거라!]

추명염왕은 막비강이 도주하자 날카롭게 외치며 몸을 솟구쳤다.

이때 난쟁이 삼촌정이 또 일장을 격출하여 추명염왕을 제지시켰다.

추명염왕은 추격을 제지당하자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난쟁아, 너의 이 행위는 무슨 뜻이냐?]

난쟁이 삼촌정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가 저 어린 녀석과 함께 비급을 찾으러 가려는 것을 모르는 줄 아느냐?]

[비급이 어디 있다고 그러느냐?]

[어디 있긴 어디 있어. 대비석 밑에 있다.]

난쟁이 삼촌정의 말에 추명염왕은 체념의 표정을 지었다.

[너도 이미 알고 있었군. 그럼 우리는 먼저 대비석이 있는 곳으로 가서 비급부터 찾아낸 다음 누구의 소유가 될지 결정짓자.]

[그건 일리 있는 말이군.]

[그러려면 어린 녀석을 잡아야 한다. 비급이 숨겨진 정확한 장소를 아는 사람은 저 어린 녀석뿐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빨리 추격하자.]

합의를 본 세 마두는 일제히 몸을 날렸다.

 

막비강은 사오십 장 가량 달리다 고개를 돌려보니 세 개의 인영이 쏜살같이 추격해 오고 있음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를 잡으려는 목적이 정확한 장소로 안내해 달라기 위함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비급을 찾지 못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할 게 뻔했다.

초조해진 막비강은 마침 길옆에 울창한 도림(桃林)이 있는 것을 보고 급히 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추명염왕은 도림 근처까지 추격하여 걸음을 멈추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어린 녀석아, 좋게 말할 때 나오지 않으면 나는 이 도림을 몽땅 태워 버리...!]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파라락!

갑자기 뒤쪽에서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추명염왕이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난쟁이 삼촌정과 소면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전면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놈들도 비급이 대비석 밑에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다. 아마 비석을 산산조각 내서라도 찾아내려 할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추명염왕은 더 이상 막비강을 잡으려 하지 않고 즉시 삼촌정과 소면호의 뒤를 쫓아갔다.

 

막비강은 도림 안에서 이 광경을 보고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위험천만이었구나!)

그는 비록 목숨은 구했지만 비급을 탐내는 흉도들의 무공이 점차 고강한 인물들만 나타나는지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일년 이상을 고생하여 가까스로 대비석의 소재지를 알아냈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하려 하니... 게다가 나 때문에 개방의 다섯 고인들이 개죽음을 당하게 되었구나!)

자책하던 막비강의 뇌리로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의 시신을 수습해주다가 그들의 절학이 담긴 비급을 얻었던 일이다.

(만약 천하의 기문절학을 모두 수집한다면 내 스스로 절세무공을 창안하지 못할 것도 없다. 타구봉법은 비록 천하무적의 절예는 아니지만 독특한 면이 있는 무공이다. 게다가 개방의 다섯 거지는 나 때문에 죽었으니 시체라도 안장해 주어야겠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티구봉법이 적힌 비급을 얻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막비강은 곧 도림 밖으로 나가 다섯 거지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어 그들을 차례로 살펴보니 금릉삼로 중 청풍개 범개선은 아직 체온이 식지 않았고 맥박이 뛰고 있었다.

(잘 하면 살릴 수 있겠다!)

막비강은 남산의성 악불령에게서 배운 응급치료법을 이용하여 범개선의 전신 혈도를 안마해 주었다.

약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범개선은 호흡이 점차 정상으로 회복되고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범개선은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이 막비강임을 알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고맙네. 수고스럽지만 내 주머니 속에서 약을 좀 꺼내 주게.]

막비강은 상대방의 주머니를 뒤져 몇 가지 환약을 꺼내어 범개선으로 하여금 스스로 약을 골라 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안마를 계속했다.

또 일각 가량 지나자 범개선은 간신히 일어나 앉더니 자기의 동문들이 모두 죽었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네 말대로 우리 개방은 결국 참화를 입었구나. 그런데 그 마두는 어딜 갔느냐?]

[그들은 대비석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범개선은 땅이 꺼질 듯한 장탄식을 했다.

[그 악랄한 마두가 달려갔다면 이제 우리 개방은 완전히 끝장났구나.]

그는 여기까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막비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넌 방금 그들이라고 말했는데 그럼 추명염왕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느냐?]

막비강은 지금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말해 주었다.

범개선은 그의 말을 듣더니 만면에 희색을 가득 머금었다.

[그 세 명의 마두가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야 될 텐데... 아이야, 방주의 몸에 우리 개방의 절기인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과 타구봉법의 비급이 있다. 노부가 방주를 대신하여 네게 기증할 테니 장래에 우리 개방의 원수를 갚아다오.]

하지만 막비강은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범개선이 살아있는 마당에 낼름 개방의 비급을 받기가 염치없었기 때문이다.

[저는 귀방의 제자가 아니니 개방의 절학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범개선은 막비강이 개방 절기가 실린 비급들을 사양하자 한층 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네가 개방의 제자든 아니든 상관없다. 노부는 어차피 추명염왕의 독장(毒掌)을 맞아 앞으로 이삼 일밖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

막비강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얼른 호면개 도금의 시체 곁으로 가서 항룡십팔장과 타구봉법을 꺼내고 허리춤에서 방주의 신물(信物)을 끌러 범개선 옆으로 돌아왔다.

[이삼 일의 시간이면 충분하니 선배님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범개선은 만면에 곤혹의 빛을 가득 머금었다.

[네게 영지옥액(靈芝玉液)이라도 있단 말이냐?]

[아닙니다. 후배에게는 백독을 쫓을 수 있는 천오주가 있습니다.]

범개선은 눈을 번뜩 뜨며 급히 물었다.

[어디 있느냐?]

[후배가 선배님을 업고 천오주가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막비강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범개선을 등에 업은 후 곧장 소지품을 숨겨 두었던 무덤으로 달려갔다.

 

***

 

그러나 막비강이 무덤에 도착하여 파헤쳐 보니 소지품을 싼 보따리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막비강은 놀람과 조급함을 금치 못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느 좀도둑의 소행이지? 잡히기만 하면 다리뼈를 분질러 놓고 말겠다.]

그가 막 말을 끝냈을 때였다.

[? 좀도둑이 어째?]

휘릭!

돌연 앙칼진 외침과 함께 무덤 옆의 소나무 위에서 누군가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그 사람은 열 여섯 살 가량 된 귀여운 얼굴의 소녀였다.

소녀는 왼손에 조그만 보따리를 든 채 오른손으로 막비강을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

[지저분한 녀석아, 너의 낡아빠진 물건들 여기 모두 있다. 나는 네가 어떻게 내 다리뼈를 분질러 놓는지 두고 보겠다.]

막비강은 상대방이 자기보다 어린 소녀인지라 웃으며 사정했다.

[착한 누님, 빨리 사람을 살려야 하니 구슬을 주시오. 나는 좀도둑의 소행인 줄만 알았지 누님이 장난으로 그랬는지 모르고 실언을 했소.]

소녀는 막비강이 누님이라 부르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너의 이런 물건은 귀신이나 가지려 할 것이다. 나는 빨리 가서 싸움 구경을 해야겠다.]

보따리를 막비강의 발 앞에 던져 준 소녀는 길게 땋아 내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나는 듯이 뛰어갔다.

막비강이 잠시 멍청히 서 있다 정신을 번뜩 차리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을 땐 상대방은 이미 사오십 장 밖에 나가 있었다.

(이상한 아이로군!)

막비강은 가벼운 탄식을 하고 보따리에서 천오주를 꺼내어 범개선의 심장 위에 올려 독을 뽑았다.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범개선은 체내의 독이 완전히 제거되어 천오주를 막비강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너는 이런 보주가 있으면서 왜 휴대해 다니지 않느냐?]

막비강은 비급을 찾으려 개방에 들어가 신분이 탄로날 것이 염려되어 이곳에 숨겨 두고 역용 변장한 경과를 말해 주었다.

범개선은 이 말을 듣고 그의 총명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막비강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또 다른 모습으로 변장한 후 말했다.

[아까 그 여자아이는 싸움을 구경한다면서 대석비곡 있는 방향으로 달려간 것으로 보아 정말 흉마들끼리 싸움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우리도 빨리 가서 결과를 알아봅시다.]

[그럼세!]

범개선은 즉시 막비강과 함께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석비곡을 향해 질주했다.

 

[... 이럴 수가!]

얼마후 대석비곡에 도착한 범개선과 막비강은 놀라움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넓은 석비곡 안은 개방 제자들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골통이 박살나 형상조차 구별할 수 없었고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은 고통의 신음을 발출하고 있었다.

범개선은 지니고 있는 약물로 이삼십 명의 제자를 죽음 직전에서 구제하여 물어 본 결과 추명염왕과 다른 두 사람의 소행임을 알았다.

그 다음 추명염왕 등 세 사람이 서로 혈전을 벌였는데 최후에 어떤 노부인이 나타나 그들을 쫓아 버렸다고 했다.

막비강이 개방 제자에게 급히 물었다.

[그들은 혹시 비석 밑에서 무슨 물건을 가져가지 않았소?]

개방 제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더니 모두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범개선은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죽은 제자들을 매장하게 하고 자기는 막비강과 함께 비석 근처를 구석구석 조사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막비강의 시선은 가장 석실의 석벽에 새겨진 한 수의 시구(詩句)에 꽂혔다. 그것은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된 시였다.

 

<가득 찬 달밤 삼경에 탑 그림자가 드리워져 경지하(傾脂河) 강변의 깨진 비석을 쓰다듬는구나. 영롱한 모습은 신산의 교묘함을 빼앗으니 계수나무 아래서 늦음을 후회 마라!>

 

막비강은 입 속으로 이 시를 몇 번이고 읽더니 돌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혹시 어디엔가 경지하라 불리는 강이 있는 게 아닐까?]

범개선이 옆에서 말을 받았다.

[있네. 소흥부(紹興府) 남쪽 약야계(約野溪) 부근에 있는 강이라네. 전설에 의하면 서시(西施)가 목욕물을 그 강에 버려 강물에도 지분(脂粉) 향기를 풍긴다더군. 석벽의 이 조각은 경지하의 경치와 흡사하고 강변에 영롱탑(玲瓏塔)이라는 탑이 있는데, 그럼 이 시구에는 깊은 뜻이 내포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선배님께선 후배와 함께 비급을 찾으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범개선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부는 보물을 획득할 의향이 없네. 그러나 자네가 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분신쇄골이 되어도 최선을 다해 도와 주겠네.]

[한 권의 비급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니 선배님께선 가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후배는 이 벽화를 없애 버리겠습니다.]

막비강은 신녀비와 강장을 꺼내어 조각의 그림을 긁어냈다.

헌데 그가 벽화를 절반 가량 긁어냈을 때였다.

[흐흐흐! 선인의 유적을 훼손하다니...! 대담하기 짝이 없는 놈이구나!]

밖에서 난데없이 차가운 고함 소리가 전해 왔다.

막비강이 손을 멈추고 돌아보니 언제 나타났는지 추명염왕이 석실 입구에 서 있었다.

추명염왕은 절반 가량 파손된 벽화를 힐끗 쳐다보더니 막비강에게 시선을 돌리며 징그럽게 웃었다.

[낄낄낄. 어린 녀석아, 비급은 어디에 숨겨져 있느냐?]

[나도 모른다.]

[노부도 네가 비급이 숨겨져 있는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너는 왜 이 조각을 파손하느냐?]

[남이야 조각을 파손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감히 본 염왕 앞에서 큰소리를 치다니, 네놈은 분근착골(分筋錯骨) 맛을 좀 보아야겠구나.]

막비강도 지지 않고 코웃음을 날렸다.

[! 노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왜 내게 비급의 행방을 묻느냐?]

막비강은 자신이 거지의 모습에서 원래의 용모로 돌아온 것에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추명염왕은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흐흐흐! 노부는 불에 타 재가 되어도 네놈을 알아볼 수 있다. 하물며 네놈의 목소리는 낭떠러지 아래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기까지 하다. 그러니 헛수작 말고 순순히 노부의 물음에 대답해라!]

추명염왕은 흉흉한 표정으로 천천히 막비강에게 다가섰다.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받아랏, 노마!]

피유웅!

돌연 석실 밖에서 여자아이의 날카로운 외침 소리와 함께 짧은 단전(短箭) 하나가 세찬 파공성을 대동한 채 추명염왕을 향해 날아왔다.

막비강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강장을 뻗음과 동시에 신녀비를 휘둘러댔다.

[받아랏, 노마!]

범개선도 개방 제자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쌍장을 동시에 격출했다.

[이 연놈들이...!]

추명염왕은 비록 절학을 지녔지만 강장과 신녀비, 그리고 단전이 동시에 엄습해 오자 감히 소홀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는 양어깨를 비틀며 몸을 풍차처럼 한바퀴 돌렸다.

!

그러자 밖에서 날아온 단전이 막비강의 강장과 부딪쳐 요란한 음향을 발출했다.

막비강은 그 틈에 수중의 신녀비로 검기를 형성하여 추명염왕에게로 덮쳐 갔다.

하지만 추명염왕은 슬쩍 그의 공세를 피해낸 뒤 석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어린 녀석아, 우선 저 어린 계집년부터 수습한 후 다시 찾아오겠다.]

막비강은 석동 밖에서 들려 온 음성이 바로 자기의 물건을 훔쳤던 소녀의 목소리임을 알았다.

[어딜 가느냐 노마?]

그는 그 소녀의 무예가 아무리 고강해도 피독지보(避毒之寶)가 없는 한 추명염왕의 독장을 당해내지 못함을 알고 급히 고함을 질렀다.

위이잉!

그가 십 성의 공력을 돋우어 염라장법 중의 절초인 참호양망(斬虎揚茫) 초식을 펼쳐내었다. 그러자 한 줄기 강맹한 바람이 석동 안의 돌 조각을 휘날리며 밖으로 뻗어 나가 눈도 뜰 수 없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