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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1)

 

 

 

동쪽 절벽은 아주 높고 컸다.

이매봉은 한시간이나 벽호공(壁虎功)을 펼쳐 절벽을 탄 후에야 천산삼로의 노이가 말한 그 동굴로 짐작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천산삼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일매향의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괜한 짓을 했군. 녀석은 대체 어디 숨은 거야? 한가하게 그녀석을 쫓아다닐 시간이 없는데...]

천산삼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매봉은 동굴 입구의 바위턱에 걸터앉았다.

파란 하늘 아래 먹이를 찾아 날고 있는 매 한 쌍이 보인다.

눈에 덮힌 산등성이 주름진 여름 이불자락같고, 높이 솟은 소나무들은 눈으로 치장하고도 푸른 가시창날같다.

바람은 절벽을 만나 하늘로 올라가려 하고, 한 참 올라와버린 해는 겨울날의 미미한 자기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말해준다.

갑자기 허탈해졌다.

텅빈 속 때문인지 아니면 지난 밤에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천산삼로 중 둘째의 말 한마디에 이곳까지 와본 자기가 한심하기도 했다.

어쩌면 벌써 현천록은 바람을 타고 멀리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괘심한 마음이 든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주욱 같이 있게 될 것같은 기분이었는데, 단지 몇 시간 만이 주욱이란 기분인가 싶다.

이매봉은 품에서 물소뿔 모양의 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뿌우우우...

 

소리가 아주 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이매봉이 다시 한 번 나팔을 불었을 때 절벽 위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까마귀처럼 깃털은 새까맣고 매처럼 날렵한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을 지녔으며 머리는 닭과 비슷했다.

괴조(怪鳥)는 이매봉을 발견하고 동굴 앞으로 천천히 미끌어지듯이 내려왔다.

이매봉은 훌쩍 날아 괴조의 등에 올라 목 뒤의 깃털 속에 몸을 묻었다.

깃털 하나가 파초잎 만하다.

괴조의 체온이 이매봉의 몸을 훈훈하게 한다.

이매봉은 괴조의 등을 두드려주듯 손바닥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서안(西安)으로 가자.]

괴조는 한 번의 날개짓으로 높이 솟구쳐 올라가더니 순식간에 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자금산 정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지는 괴조를 힐끗 본 후에 절벽으로 뛰어내려왔다.

수 십장의 절벽을 떨어져 내리던 그 사람의 몸은 마치 허깨비처럼 허공에서 둥실 멈추더니 동굴에 내려섰다.

황색가사를 걸치고 회색바라를 진 포두화상이었다.

나한상처럼 둥글고 납작한 얼굴에는 해픈 웃음이 걸려있지만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포두화상은 동굴 입구를 살펴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음의 새 환우마조(寰宇魔鳥)가 나타났다는 건 환우회의 회주가 왔었다는 이야기인데... 환우회마저 옥황빙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단 말인가?]

포두화상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렸다.

[환우회의 회주가 여기에 왔었다면 이 화상도 들어가보지 않을 수가 없지.]

포두화상의 몸이 구름을 밟는 듯 기우뚱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후, 세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치달려 올라와 동굴로 들어갔다.

비슷하게 생긴 천산삼로였다.

 

***

 

현천록은 생각했다.

(동굴을 되돌아 간다면 입구가 막혔으니 뚫고 나가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우같은 진양진인이 여기서 사라졌으니 그곳 말고도 출구는 있다. 물이 흐르고 있으니 물을 거슬러간다면 장강에 이를 수도 있을 테고, 이 동굴은 지하세계처럼 넓고 거대하니까 또 다른 출구도 있을 가능성이 많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막힌 곳을 뚫고 나가고 그 전에는 다른데를 찾아보자.)

암흑 속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것들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현천록은 들어온 곳과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체중이 없는 그의 몸이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흘렀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동굴 속 바람을 따라 얼마동안 갔을 때, 앞이 점점 밝아졌다.

그가 가는 앞쪽 어딘가에 불이 있었다.

일렁이는 것으로 봐서 횃불인 것 같았다.

현천록은 그와 진양진인이 아닌 또 다른 사람이 동굴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출구가 또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현천록은 불을 향해서 다가갔다.

한데, 불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아니 백개도 넘을 것같은 횃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어른거리는 그림자들도 보였다.

두런 거리며 주고 받는 말소리도 들린다.

[난 이번일만 끝내고 나면 정말 무림을 떠날 생각이네.]

[뭘 할 텐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농사를 지으며 살겠어.]

[! 신궁(神弓) 오무한(吳武漢)이 사냥도 아니고 농사를 짓겠다고?]

나직한 탄식이 섞인 소리로 먼저 말한 자가 말했다.

[더 이상 죽이기가 지겨워졌네.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냥 좋은 일을 하고 싶어. 기르고 보살피는...]

[한심한 소릴 하는군. 이십년 동안 자네 활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와서 그런 소린가? 우리한테 다른 길은 없네. 그냥 살아왔던 그대로 살아가는 것뿐.]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옳은 이야기야. 지금 다르게 살아봤자 아무도 우리를 곱게 보지 않아.]

신궁 오무한이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심한 소리라는 건 아네. 하지만 이제 죽이고 빼앗는 건 너무 질렸어. 누구의 용서를 바라거나 동정을 기대하고 하는 건 아니라네.]

끼어든 목소리가 코웃음을 쳤다.

[답답한 소리군. 자네 활이 정말 신궁인지 의심이 다가는군. 자네는 가만히 숨어살고 싶겠지만 자네 원수들도 그냥있을까? 아마 끝까지 찾아가서 죽이려 들걸세.]

[난 이번 일로 패혼기(覇魂旗)에 진 빛을 다 갚게 되네. 살아난다면 말이지.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죽고 싶네.]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기주(旗主)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게. 비록 여기엔 패혼기에 얽매인 사람들만 들어왔다 하지만 조심하는게 좋을걸세.]

[이렇게 큰 동굴에 그자가 숨었다면 스스로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찾지 못할거네. 어쩌면 기주에겐 다른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지.]

바로 그때였다.

쿠쿵!

어디선가 굉음이 들리며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동굴 천장에서 돌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굉음이 동굴 속의 두런거리던 소리들을 모두 삼켜버린 듯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입구 쪽이다!]

누군가가 소리치며 횃불을 팽개치고 달려갔다.

가지런히 움직이던 횃불들이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어떤 것은 몰려들고 어떤 것들은 멀어져갔다.

하지만 대체로 횃불들은 현천록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

다시 굉음이 들렸다.

이번엔 다른 쪽이었다.

현천록은 근처에 떨어진 횃불을 하나 집어들었다.

입구 쪽으로 달려가지 않고 머뭇거리던 불빛은 겨우 두세개 밖에 없었다.

현천록도 횃불을 들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동굴속이라 불이 있어도 얼굴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다.

옆에 있는 사람이 치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주가... 기주가 우리 모두를 죽이려하고 있어. 동굴 속에 생매장하려고... 나쁜 노옴!]

다른 사람이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틀렸어. 기주는 우리가 다 덤벼도 이기지 못하는 자야. 우릴 죽이려 마음 먹은 이상 다 죽게 되겠지.]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우린 모두 칠십명이다. 각기 지닌 재주가 다르니까 어쩌면 다른 출구를 찾아 나갈 수도 있어.]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는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네. 다만...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걸 알지 못했을 뿐.]

신궁 오무한의 목소리였다.

한 사람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럼 기주가 온 산을 다뒤져 진양진인을 찾으라고 한 것도 결국 우릴 여기에 들여보내 죽이려고 꾸민 일이란 말인가?]

[현무호에서 죽은 사람만해도 삼백 명이 넘네.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십중 팔구는 우리처럼 패혼기에 복종하고 왔을 걸세.]

오무한의 목소리는 아주 침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말했다.

[산을 뚫고 나갈 수는 없을까?]

바로 그때 아주 길고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그곳에 있던 사람은 아무도 그처럼 처절한 비명소릴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리고 그 소리는 시작이었다.

연이어 지옥의 아비규환을 연상시키는 끔찍한 비명들이 공포가 되어 동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주다! 기주도 동굴에 들어와 있었다.]

휘익! 픽픽!

다른 사람들이 재빨리 자기들의 횃불을 꺼버리는 것을 보면서 현천록도 양의신공을 입으로 불어내 꺼버렸다.

[저렇게 빨리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오직 기주뿐이다.]

다른 사람도 말했다.

하지만 모두 혼란에 빠져버렸다.

기주도 동굴에 들어와있다면 대체 누가 입구를 파괴했단 말인가?

모두 호흡을 멈추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비명에 이어서 마지막 비명이 들리는 것까지는 정말 찰라지간이었다.

꺼지지 않은 횃불들 중 어떤 것은 시체위에 떨어져 살을 태우는 지독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그 불빛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양 손에 각기 하나씩의 검을 들었으며 검날을 타고 피가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마터면 현천록은 입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로 장군묵이었다.

두 손에 낭아봉 대신 검을 들었지만 틀림없는 장군묵이었다.

장군묵의 눈은 맹수처럼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장군묵은 검으로 현천록을 가리켰다.

밝은 곳에서도 어둠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신궁 오무한이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기주가 아니군. 젊은이! 자네는 왜 그들을 살해했는가?]

장군묵이 씨익 웃었다.

젊은이란 말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전음으로 오무한에게 주의를 주었다.

[기주는 아니지만 그 못지 않은 고술세. 움직일 때는 함께 하세.]

전음은 현천록의 귀에도 들렸다.

장군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신궁 오무한과 동료 세 사람은 혼신의 힘을 다해 뒤로 물러섰다. 장군묵이 그들 앞 세자 거리에서 갑자기 나타난 때문이다.

쉬이이이익!

검광이 어둠을 양단했다.

신궁 오무한과 동료들은 폭포수같은 검광 앞에서 막을 생각도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져 버렸다.

죽음이 멀리 있을 때는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바로 앞에 있을 때는 압도당해서 공포조차 느끼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죽음이다.

 

---치지지직! !

 

찬물에 달군 쇠를 집어넣을 때 나는 소리가 오무한과 동료들을 깨웠다.

검과 검이 서로 부딪혔다가 미끌어지며 파란 불꽃을 튕겼다.

[후후후... 이번에도 태극혜검인가? 내가 낭아봉대신 검을 들었을 때는 당신한테 검술을 한 수 가르치려는 뜻이 있다는 걸 알았을텐데...]

장군묵이 쌍검 중 하나는 등 뒤로 돌리고 하나는 앞에 세우며 말했다.

현천록은 자기가 진양진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아혈을 제압해놓은 것은 금방 풀렸었지만 모습을 바꾼 것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장군묵이 믿고 안 믿고는 차후에 생각해볼 일이고 일단 말부터 꺼냈다.

[일곱째! 진양진인은 벌써 빠져나갔을 것입니다.]

장군묵이 어리둥절했고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장군묵은 자기가 일곱째라는 걸 진양진인이 어떻게 아는가 싶어서 였고, 현천록은 아혈이 풀렸기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늙수구레한 진양진인의 목소리가 나와서였다.

붉으스름한 장군묵의 눈이 현천록을 노려보았다. 안개같은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현천록의 뒤에 섰던 네 사람은 본능적인 공포에 비칠비칠 물러섰다.

장군묵이 말했다.

[역시 당신은 뭔가 있어. 후후후... 그 이상한 행동에 이어... 내가 일곱째라는 것을 안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단 말인가?]

현천록은 당황했다. 이러다간 정말 진양진인의 의도대로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단났구나! 이사람은 나를 정말 진양진인으로 단정하고 있으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밖에 생각지 않겠구나.)

항상 여유를 갖고 즐겁게 지내려는 그의 정신상태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마음 속을 기쁨이 아닌 다른 침울한 것으로 채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뒤에서 신궁 오무한이 물었다.

[당신은 정말 진양진인이오?]

현천록이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아니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거냐? 개똥같은 도사놈아!]

먼저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나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네놈 목소리는 금방 알아듣는다.]

현천록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 설상가상이구나! 한 사람도 모자라서 두 명 세명이 이 가짜 진양진인한테 볼일을 보려하다니.)

그의 머리가 아주 오랜만에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여차했다간 정말 재수없는 상황을 맞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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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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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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