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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2)

 

 

정신 차려! 이봐, 정신 차려!”

찰싹! 찰싹!

심주은은 임청우를 나무위로 끌어올려 놓고 뺨을 연신 때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떨어지면서 큰 충격을 받은데다가 늪 속에 잠겨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한 임청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저 미약하게나마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직 그가 살아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심주은은 손가락으로 임청우의 입과 코와 귀를 판 후에 가슴을 눌렀다.

몇 번 누르자 임청우의 입과 코로 진흙이 쿨럭쿨럭 흘러나왔다.

그러나 임청우는 여전히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힘겹게 뛰고 있던 맥박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심주은은 죽은 듯이 누워있는 임청우를 착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임청우와는 만난 지 채 하루도 안된,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사이다.

하지만 충동적이긴 해도 혼례를 올렸으니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이윽고 결심을 한 심주은은 임청우의 몸 위로 허리를 굽혔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코를 입으로 물고 세게 빨아 당겼다.

그러자 임청우의 콧속에 들어차있던 진흙이 그녀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

입안에 든 진흙을 뱉어내고 다시 임청우의 콧속에 든 진흙을 빨아내기를 몇 번 반복하자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심주은은 임청우의 콧속으로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자신이 임청우의 코를 물고 있긴 하지만 입맞춤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 사실에 심주은의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외간 사내와 살갗도 닿아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코를 물고 숨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이런 게 인연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몇 차례를 반복하자 차갑게 식어가던 임청우의 몸에 따스한 온기가 돌아오는 것같았다.

콧속으로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누르길 얼마 후 푸! 소리와 함께 임청우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임청우는 살아났지만 녹초가 되어버린 심주은은 진흙투성이의 몸으로 임청우에게 기댄 채 잠이 들고 말았다.

 

***

 

임청우는 가만히 눈을 떴다.

방문이 없는 방 속에 누워있는 듯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하늘은 뿌옇게 보이기는 했지만 달도 없고 별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죽은 것인가? 여기는 지옥인가 아니면 극락인가?)

임청우는 늪으로 떨어지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황의소녀 심주은을 생각하며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당돌한 행동을 생각해볼 때 자기보다 좋은 곳으로 갔을 것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임청우는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뭔가가 자기의 가슴에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따뜻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심주은이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온몸은 진흙투성이지만 그래도 얼굴의 진흙은 깨끗이 닦아낸 모습이었다.

임청우는 한쪽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척포를 발견하고서야 자기가 죽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계집애가 날 살렸겠구나.)

전후의 상황을 파악한 임청우는 감격하여 심주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입술 주변의 진흙이 떨어져 나가며 드러난 새하얀 볼...

새근새근 쉬는 듯 마는 듯 부드러운 숨결...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심주은의 입술로 가져갔다.

호흡이 가빠오고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심주은의 입술을 만져보려고 하니 자기의 손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다.

도저히 그런 손으로는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을 만질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만지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얼굴을 심주은의 얼굴 앞으로 살며시 가져갔다.

심주은의 숨결이 볼을 스치면서 달콤하게 느껴졌다.

(... 안돼!)

심주은의 숨결이 뚜렷하게 느껴지자 임청우는 오히려 화들짝 놀랐다.

(임청우야! 임청우야! 네가 색마가 되려느냐?)

자신의 망령된 행위를 자책하며 임청우는 정좌를 하고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분명 자기의 마음과 몸임에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심주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고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이해하지 못할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

임청우는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속으로 생각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생사는 인간의 중대사이지만 그 생사도 성인(聖人) 왕태(王駘)를 변하게 하지는 못하며, 또 비록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꺼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를 파멸의 동반자로 만드는 잃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풍랑을 만났을 때는 옛 성현의 말씀을 길잡이로 삼아야만 한다.

(왕태라는 분은 표면의 인상을 초월한 진실의 이치를 밝게 알아 사물의 변화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없었다고 했다. 모든 사물의 변화를 천명에 따른 것이라 여기고 변화의 근본에 있는 부동의 도에 몸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같은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장자(莊子) 내편(內篇) 중 덕충부(德充符)에는 여러 명의 불구자가 등장하는데 임청우가 생각하고 있는 왕태라는 사람도 발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사람이다.

그 당시에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발꿈치를 잘라서 걸을 수 없게 하는 월()이란 형벌이 있었다.

왕태라는 인물도 월형을 받은 죄인이었지만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공자와 함께 노나라를 양분할 정도였다.

왕태는 서있을 때도 특별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고, 앉아 있을 때도 특별한 논의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텅 빈 머리로 왕태를 찾아갔던 사람이라도 충실한 마음을 갖고 돌아오곤 했다.

이러한 사실을 이상하게 여긴 공자의 제자 상계(常季)가 왕태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성인이다. 나도 한 번 뵙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그만 기회를 놓치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나라고 해도 스승으로 공경하고 싶을 정도이니 하물며 나보다 못한 사람이 그를 따르는 것은 당연할 테지.

단지 노나라뿐만이 아니다. 나는 천하의 사람들을 이끌고서 함께 그의 제자가 되고 싶을 정도다.>

 

또 말하기를,

 

<사물을 차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같은 몸속에 있는 간과 쓸개의 사이라도 초나라와 월나라만큼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모든 걸 같다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곧 하나이다.

이와 같이 만물제동(萬物諸同)의 입장에 있는 자는 눈귀의 듣고 보는 쾌락에도 마음이 이끌리는 일 없이 자기의 마음을 그 덕에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경지, 모두가 하나인 세계에서 놀게 하는 것이다.

왕태와 같은 인물이 만물을 볼 경우에는 그 동일한 본질만을 보고 개개의 사물이 상실되어가는 현상에 얽매이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발이 잘린 것쯤은 마치 흙덩이를 털어 버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미추(美醜)를 구분한다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뜻한다.)

옛 성현의 말씀을 떠올린 임청우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

(만물제동이라는 진리를 잊지 않는다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억지로 하려고 할 것은 아니지만 만물을 볼 경우에 동일한 본질만을 보고 그것의 세상에 융화하려는 점을 파악함으로써 만물제동의 이치에 이르도록 노력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자 속이 후련해졌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눈을 뜨고 심주은을 보니 이젠 그녀가 아름답게 보이기는 하지만 다른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임청우는 만물제동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로 굳게 결심하면서 가만히 앉아 심주은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척포가 돌아와 그의 품속에 있는 몽선도 속으로 찾아들어갔다.

한데 피로에 지친 심주은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임청우는 계곡을 솥발처럼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봉우리를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이라 비록 희미하게 보였지만 마치 가지를 옆으로 벌리고 우뚝 서있는 전나무처럼 보이는 봉우리가 틀림없었다.

세 개의 봉우리는 그 배치의 절묘함으로 인해서 번갈아가면서 계곡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계곡에는 하늘이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무모양으로 보이는 봉우리의 그림자 두개가 합해지면 하늘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임청우는 그 신기한 자연의 조화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바로 여기였구나.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엉뚱한 곳만 찾았으니...”

감격한 듯한 심주은의 음성이 들렸다.

심주은은 깨어나자마자 임청우의 시선을 쫓다가 나무모양의 산봉우리를 발견하고 이곳이 바로 자기가 찾으려던 그 장소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

 

임청우와 심주은은 진창에 빠진 생쥐같은 몰골로 암벽 앞에 섰다.

암벽에는 관음보살을 연상시키는 절세가인이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그림이 음각되어 있었다.

심주은은 버드나무 가지가 가리키는 곳에 있는 바위를 옆으로 밀쳤다.

그러자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열리며 원형의 고리가 나타났다.

이게 바로 문고리야. 하지만 함부로 밀면 이렇게 되고 말지.”

심주은이 두 손바닥을 붙여 꼭 누르며 말했다. 납작하게 되어 버릴 것이라는 소리였다.

임청우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함부로 잡아당기면 어떻게 되는데?”

그건...”

심주은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도 이 문고리의 작동원리를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싶으면 직접 당겨보면 되잖아!”

대답이 궁해진 심주은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난 여기에 볼 일이 없어.”

임청우는 고개를 살래 저었다.

심주은은 그의 능청에 화가 꼭지 끝까지 치밀었지만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단지 매섭게 도끼눈을 뜨고 한번 쏘아본 후에 천잠사의 한 쪽 끝을 고리에 묶었다.

(어디 내게 까불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싶어? 한 번 혼나 보라구.)

심주은은 고리에 천잠사를 묶고 멀찍이 물러서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기 있으면 다쳐. 이리와!”

이어 심주은이 손짓하며 부르자 임청우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헌데 임청우가 막 그녀에게서 한팔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을 때였다.

!

심주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잠사를 힘껏 잡아당겼다.

원형의 고리가 앞으로 재껴지는 순간 신녀문의 상징이라는 환상신녀의 모습이 그려진 암벽 전체가 마치 벼락 치는 듯한 기세로 앞쪽을 향해 넘어졌다.

!

굉음과 함께 일어난 강한 바람이 임청우를 덮었다.

암벽은 임청우의 뒷머리를 거의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간격을 두고 떨어졌다.

임청우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듯한 느낌에 전신이 경직되었다.

화악!

폭풍같은 바람이 등을 떠밀어 임청우를 심주은의 품에 안기게 한 후, 더욱 강하게 떠밀어 두 사람을 함께 일장여 거리까지 날려버렸다.

너무나 창졸간의 일이고 예상치 못한 결과였는지라 심주은은 꼼짝 못하고 임청우를 안은 채 돌밭에 나뒹굴었다.

아야!”

임청우의 몸에 깔린 심주은이 비명을 질렀다. 돌멩이가 등을 찌를 뿐 만 아니라 임청우의 몸이 내리누르니 견딜 수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높이 떴다가 떨어지는 충격 때문에 임청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눌러버렸다.

!”

서로의 입술이 맞닿아 짓눌리자 심주은은 심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형언하지 못할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가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했다.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리고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숨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왔다.

임청우 역시 어떤 열기에 휩싸여 얼굴이 벌겋게 된 채 몸을 일으켰다.

내려다 보니 심주은은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새근거리고 있었다.

임청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

심주은은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아쉬운 표정을 짓고 일어났다.

두 사람 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임청우가 암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 환상신녀의 모습이 새겨져 있던 곳에는 월동문 모양을 한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검주 유소기 등도 환상신녀의 형상이 남아있는 암벽 근처에 신녀문의 성지가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 암벽 바로 뒤에 입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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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려 보낸 여살성

 

 

한 바탕의 혈우성풍(血雨腥風)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오이라트부의 무사들 중 생존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다만 철목풍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자는 수하들이 이검한의 손에 몰살당하는 틈을 타 사력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다.

물론 그자가 이검한의 추격을 뿌리칠 가능성은 없다.

(이런...)

하지만 철목풍을 추격하려던 이검한은 급히 멈춰서야만 했다. 나유라의 육체를 정복했던 첫 번째 청년의 시체를 밀어내고 또 다른 청년이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인 때문이다.

이검한으로서는 그 청년들이 나유라가 기른 심복들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다. 단지 달단여왕으로 보이는 여인을 능욕하는 색마들로 보일 뿐이다.

감히....”

쩌어어엉!

분노한 이검한의 손이 휘둘러지는 순간 낭아검에서 시퍼런 검강이 쭉 내뻗어 네 청년의 몸뚱이를 휩쓸어버렸다.

퍼퍼퍽! 후두둑!

검강이 스치는 순간 네 명의 청년은 비명도 못 지르고 몸이 동강나 사방으로 쓰러져 버렸다.

흑혈맹호단의 청년들로서는 영문도 모르고 당한 그 죽음이 차라리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제 정신이 돌아왔다면 자신들의 여왕을 능욕했다는 죄책감에 미쳐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 “....!”

갑자기 장내는 쥐죽은 듯한 적막에 휩싸였다.

이제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은 이검한과 하후진진, 그리고 다섯 청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목욕을 한 달단여왕 나유라 뿐이었다.

이검한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지옥의 한가운데 우뚝 선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끔찍하구나!)

주변을 둘러보면 저절로 진저리가 쳐진다.

이검한으로서는 이것이 두번째 살인이다.

첫 번째 살인에서 십여 명을 죽였는데 두 번째 살인에서는 무려 오십여 명이나 몰살시켜 버린 것이다.

이검한은 격렬한 분노를 견디지 못해 최근에 연마해낸 낭아검법과 화염마강을 전력을 다해 시전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철목풍의 수하들이 몰살당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토록 태연하게 살인을 하다니... 이러다가 나란 놈은 전대미문의 살인귀가 되는 게 아닐까?))

이검한은 참을 수 없는 죄책감과 혐오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죽어랏!”

!

독살스러운 외침과 함께 한 자루 비수가 벼락같이 이검한의 등을 찔렀다.

독수를 쓴 것은 물론 하후진진이었다.

하후진진은 처음에는 이검한의 무서운 신위에 압도당해 온몸이 얼어붙었었다.

그러다가 이검한이 갑자기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자 하후진진의 가슴 속에서 독랄한 살기가 꿈틀거렸다.

그래서 극독이 발려진 비수로 이검한의 등을 찌른 것이다.

(죽였다!)

하후진진은 비수 끝에 닿는 묵직한 느낌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독비(毒匕)는 이검한의 등에 위치한 사혈(死穴)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하지만 하후진진의 얼굴에 떠올랐던 회심의 미소는 나타날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자신의 독비가 이검한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조차 뚫지 못한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하후진진으로서는 이검한이 걸친 적룡풍이 도검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희세지보라는 것을 알 리 없다.

이검한은 적룡풍 덕분에 독비에 찔리고도 그저 움찔 몸을 떨었을 뿐이었다.

... 이럴 수가!”

하후진진은 얼굴을 경악과 불신으로 물들이며 비칠 물러섰다.

이검한은 그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부르르!

돌아서는 이검한의 시선과 마주친 하후진진은 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쩌엉!

분노로 이글거리는 이검한의 눈빛을 접하는 순간 불에 달궈진 시뻘건 부젓가락으로 머리 속이 휘저어지는 것같은 전율을 느낀 것이다.

사갈(蛇蝎)같은 심보를 지녔구나! 나이도 어린 계집이...!”

이검한은 무서운 눈으로 하후진진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흐윽...!”

이검한의 일갈에 하후진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이 낯선 소년이 내뱉은 한마디가 잘 벼려진 비수처럼 방심을 파고든 것이다.

인생이 가엾어서 죽이지는 않겠다! 대신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대가로 혼은 좀 나야한다!”

이검한은 준엄하게 일갈하며 유령같이 하후진진 앞으로 다가왔다.

!

다음 순간 하후진진은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호되게 뺨을 얻어맞았다.

!”

퍼억!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군 하후진진의 왼쪽 뺨이 삽시에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꺼져라! 다시 내 눈에 띄면 그때는 네년의 그 악독한 심장을 뽑아내 으스러트려버릴 것이다!”

이검한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하후진진을 내려다보며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하후진진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두 볼로 뜨거운 눈물이 똑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수치심과 굴욕감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냐! 오늘은 그냥 물러가겠다!”

하후진진은 이검한을 노려보며 바득 이를 갈았다. 그런 그녀의 두 눈은 독기로 물들어 있다.

하지만 내 이름은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더러운 사내놈아! 오늘 나 하후진진에게 모욕을 준 대가는 언제고 갚고 말테니까!”

하후진진은 한 서린 저주가 실린 독설을 이검한에게 내뱉았다.

그리고는 비칠비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검한은 하후진진이 퍼붓는 저주를 듣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에 이검한에게 저주를 퍼부은 하후진진의 모습은 아침 햇살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무래도 장차 세상을 피로 씻을 여살성(女殺星)을 살려준 느낌이 든다!)

이검한은 사라지는 하후진진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하후진진을 쫓아가 목숨을 끊어놓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 악독한 계집이 오늘 내 손에 죽지 않은 것도 정해진 운명이겠지.)

쓴웃음을 지은 이검한은 쓰러져 있는 나유라에게 다가갔다.

헌데 나유라에게 다가가던 이검한은 움찔하며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나유라의 지금 모습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몸이 된 채 혼절해 있는 나유라의 풍만한 육체는 흑혈맹호단 청년들의 시신에서 뿜어진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한 걸음 늦었구나!)

가까이 다가가 나유라의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던 이검한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몸에 유린당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유라의 무참한 자태를 본 이검한은 격렬한 분노와 함께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한걸음 늦게 도착한 바람에 일국의 여왕인 나유라의 고귀한 육체가 유린당한 것이다.

(이 비밀은 영원히 지켜져야만 한다!)

이검한은 침통한 표정으로 다짐했다.

달단부의 결속 따위는 그가 알 바 아니다. 다만 한 여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영원히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만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유라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몸을 더럽히기 직전에 혼절하여 그 뒤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을 모른다.

(가엾은 여자다.)

이검한은 한숨을 쉬며 찢긴 옷가지를 주어모아 나유라의 몸에 칠갑이 되어 있는 피를 대충 닦아주었다.

피를 닦아주는 그의 손길에 나유라의 풍만한 알몸이 부드럽게 출렁인다.

하지만 이검한은 아무런 충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피에 젖은 그녀의 무참한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크!)

그러다가 이검한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움찔했다. 멀리 남동쪽 지평선으로 작은 점이 나타나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그 점은 아마도 철산산과 포대붕일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린 이검한은 마음이 급해졌다.

(우선 이 자리를 피하자. 생모의 이런 무참한 모습을 보면 산산공주가 큰 충격을 받을 테니...!)

파천마도를 회수한 이검한은 적룡풍을 벗어 나유라의 나신을 감쌌다.

스읏!

그리고는 적룡풍에 싸인 나유라의 알몸을 두 팔로 안아들고 서쪽으로 질풍같이 몸을 날렸다.

삽시에 이검한의 모습은 장내에서 멀어졌다.

지옥같은 참극이 벌어진 장내에도 어느덧 눈부신 아침 햇살이 번지기 시작했다.

 

* * *

 

녹원(綠園;오아시스)-!

망망한 사막 가운데 아담한 녹원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를 도는 데 차 한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을 작은 녹원이다.

녹원 가운데에는 맑은 물이 고인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연못이라는 말이 어울릴 작은 크기의 호수다.

스으! 스으!

호수의 수면 위에서 피어오르는 실같은 아침 안개가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다.

찰박! 찰박!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물소리와 함께 능어같은 여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를 지닌 풍만한 여체다.

조심조심 호숫물로 몸을 씻고 있는 여인의 머리카락은 황금빛이다. 아침 햇살이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카락 덕분에 여인은 한층 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풍긴다.

달단여왕 나유라!

호수에 가슴까지 몸을 담근 채 몸을 씻고 있는 금발의 여인은 물론 나유라였다.

(철목풍!)

찰박! 찰박!

나유라는 섬섬옥수로 풍만한 몸을 씻으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순진하던 진진이를 저토록 악독하게 만들다니... 네놈의 죄는 열 번 죽어도 부족하다!)

나유라는 하후진진에게 지독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딱히 원망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핏덩이일 때부터 보아온 탓인지 하후진진이 그녀 자신의 친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철목풍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철목풍은 끔찍한 일을 겪은 하후진진을 위로하고 달래주기는커녕 복수심을 부추켜 사갈독심을 지닌 독한 아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정말 신비한 아이다!)

철목풍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던 나유라는 흘깃 한쪽을 돌아보았다.

한쪽 호숫가에는 이검한이 나유라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이 녹원으로 나유라를 데려와 그녀로 하여금 목욕을 하게 해준 것이다.

(나이가 많아봐야 산산이 보다 두 세살 위인 것 같은데 나는 물론이고 철목풍 조차 능가하는 내공을 지녔다니...!)

나유라는 이검한의 늠름한 뒷모습을 주시하며 숨결이 약간 더워졌다.

자신은 이검한에게 가장 부끄러운 곳까지 적나라하게 보였었다. 아들뻘인 어린 소년에게 속살을 보였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야릇한 설레임이 생기기도 했다.

사실 나유라는 십 년 넘게 사내와 관계해 본적이 없었다.

철산산을 낳은 후 그녀는 산후조리를 잘못 해서 상당히 살이 쪘었다. 거의 백오십 근이나 나가 어지간한 사내들보다도 무거운 체중을 지녔었다.

원래 살집이 있고 키가 큰 데다가 살까지 디룩디룩 쪄버리자 남편인 철고륜은 질색하며 그녀 곁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하긴 젊고 날씬한 여자들도 많은데 굳이 돼지처럼 살이 찐 그녀를 본처라는 이유만으로 상대해주긴 힘들었을 것이다.

철고륜이 여전히 매력적이고 날씬한 하후란에게 빠져 버린 데에는 나유라가 한 때 비만한 뚱보였었다는 사연도 있었다.

그후 나유라는 무공 연마에 정진하여 다시 원래의 체형을 되찾았었다.

하지만 한번 떠난 남편의 애정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드세고 도도한 나유라의 성격상 남편의 애정을 되찾기 위해 애교를 부리거나 아양을 떠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여자로서의 욕구가 가장 왕성한 시절부터 독수공방을 해야만 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육체적인 본능을 억눌러 오긴 했으나 물론 그녀가 완전히 석녀(石女)가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내부에는 쌓이고 쌓인 욕정이 폭발 직전의 수위로 쌓여 있었다.

가끔 뜨거워진 몸을 스스로 달래보려고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자신의 손이나 이런 저런 민망한 도구를 이용한 부끄러운 시도는 오히려 갈증만 더 심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얄궂은 운명 때문에 자신의 부끄러운 곳을 이검한에게 모두 보이고 말았다.

그 때문일까?

왜곡된 욕망이 자신도 모르게 나유라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었다. 귀엽고도 늠름한 저 소년이라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몸을 열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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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의 만화시나리오] 카테고리에서 만화 시나리오를 연내중입니다.

황성 화실에서 출간한 [자객일지]의 시나리오입니다.

소설과는 다른 형식이라 어색하겠지만 읽어보시면 전개나 내용이 무협소설과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장면을 연상하시면서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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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해보니 만화 시나리오도 참 많이 썼군요.

현대물과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도 몇편 썼지만 무협극화 시나리오만 정리해봤습니다.

극화와 비교해서 보시면 제법 흥미로우실 것입니다.

 

<이재학>

 

철사자 (1993)

천마성 (1994)

전신 (1995 01)

무림악인전 (1995 07)

요마환술록 (1995 10)

 

<야설록>

 

남성북궁 (1995 12)

율궁협성 (1996 04)

제왕기행 (2001 10)

불사기행 (2001 11)

천마2 (2002 04)

사대세가 (2002 07)

천하무적 (2002 08)

오수맹 (2003 01)

무림왕 (2004 08)

귀면왕 (2004 10)

구룡왕 (2004 11)

옥면염라 (2005 04)

호색군자 (2005 07)

사자왕 (2005 12)

도룡계 (2006 04)

다정사신 (2006 08)

전신강림 (2007 01)

협골독심 (2007 05)

실명대협 (2008 04)

천애독행 (2013 10)

제왕본색 (2014 09)

대도독행 (2015 04)

악군자전 (2015 09)

마협독행 (2016 06)

살수대협 (2016 11)

 

<황성>

 

마검천자 (1995 04)

십왕지존 (1996 04)

혼돈마조 (1996 07)

백치룡 (1997 04)

장한검 (1997 07)

마인 (1998 05)

역천행 (2002 04)

구마경 (2002 10)

아수라 (2003 01)

낭왕일대기 (2003 04)

백면무적 (2003 09)

도부 (2003 11)

지옥도 (2004 03)

냉혈대협 (2004 07)

달마2 (2004 11)

백인천 (2005 02)

파죽지세 (2005 03)

태산북두 (2005 11)

생사탄 (2006 05)

남사여호 (2006 08)

무적의생 (2006 10)

천방지축 (2007 03)

일기당천 (2007 07)

사자불루 (2007 11)

질풍노도 (2008 04)

황금전장 (2008 08)

금포염왕 (2008 10)

요리지존 (2009 01)

혈로독행 (2009 07)

무림창세기 (2010 02)

오대무벌 (2010 04)

백마사원 (2010 06)

독행일지 (2010 08)

구중천 (2010 11)

고금제일인 (2011 03)

칠보하천하 (2011 06)

무명초인 (2011 11)

승풍파랑 (2012 01)

용맥백정 (2012 06)

마귀대협 (2012 10)

협기천추 (2013 03)

무제천추 (2013 06)

기인천추 (2013 10)

마면기정 (2014 03)

마왕유희 (2014 07)

건곤일척 (2015 02)

아랑힐월 (2015 10)

투천환일 (2016 06)

마고천장 (2017 02)

보보경천 (2017 04)

불멸무성 (2017 05)

퇴마신협 (2017 07)

마인총 (2017 10)

천지무쌍 (2017 12)

발검진천 (2018 01)

마왕강림 (2018 03)

신마유희 (2018 05)

자객일지 (2018 07)

무쌍일지 (2018 10)

신선부 (2018 12)

폭풍신마 (2019 04)

몽유강호 (2019 07)

견자전설 (202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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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금릉 성 밖의 빈민가. 청풍의 집이 있는 곳. 밤이 깊진 않지만 대부분 불이 꺼져 있다.

청풍의 집. 문이 닫혀있는데 불빛이 흘러나온다.

 

[!] [!] 안도하고 감격하는 진삼낭과 이진진. 이진진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고 있고

청풍; [지나간 일이니 더는 거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산하와 마주 앉아서 말하고. 이산하는 삭 죽어 고개 숙이고 있고. 부서지고 넘어졌던 가구들은 대충 정리되어있다.

청풍; [다만 한 가지는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청풍; [다시는 어머니 눈에서 눈물 나지 않게 해주십쇼.] 강렬한 표정으로 이산하를 노려보고

이산하; [... 명심하마.] 고개 들지 못하고 바닥만 보며

이산하; [네 어미와 진진이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할 바에야 혀를 물고 죽어버리고 말겠다.] 고개 조금 들어 청풍의 눈치를 보며

진삼낭; [빈말이라도 죽는다는 소리 입에 올리지 말아요.] 노려보고

이산하; [미안하네 임자.] 삭 죽어서 시선 피하고

청풍; [먼저 잠자리에 드십시오. 바람 좀 쐬고 들어오겠습니다.] 일어나고

진삼낭; [오냐! 밤공기 차니 너무 오래 있진 말거라.] 억지웃음

 

#30>

문을 열고 집을 나오는 청풍.

청풍;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문 닫고 심호흡

청풍; (아버지가 진진이를 담보로 돈을 빌려 도박을 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정말 환멸스러웠지만...) 집 앞을 떠나서

청풍; (전화위복이라고 황금전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근처 다른 집 앞에 놓여있는 낡은 의자에 앉는다.

청풍; (하지만 아주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도박이라는 게 끊고 싶다고 단칼에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청풍; (도박장 출입을 하지 못하게 감시해야겠지만 뭔가 소일거리를 만들어드려서 재미를 붙이게 해야 한다.) 품 속에 손을 넣고

청풍; (다행히 총주방장님의 배려로 오백냥의 여윳돈이 생겼다.) 품속을 더듬고

청풍; (오백냥이면 금릉 성내에 작은 가게 하나쯤 얻을 수가...) + [!] 생각하다가 흠칫! 하며 손을 꺼내고

다시 꺼낸 청풍의 손에는 머리핀이 들려있다. 벽옥령이 준 머리핀이다.

청풍의 뇌리에 떠오르는 장면. #26>의 장면

 

벽옥령; [받아주세요. 설아를 구해준 감사예요.] 머리핀을 내밀고

회상 끝

 

청풍; (장주의 둘째 딸 벽옥령...) 머리핀을 보며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고

청풍; (진진이 못지않게 예쁜데다가 유복하게 자라서인지 구김살이 전혀 없다.) 고양이를 끌어안고 해맑게 웃던 벽옥령을 떠올리고

청풍;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을 두었으니 장주는 복이 참 많구나.) 하늘 보며 생각하고. 그때

달칵! 청풍의 집의 문이 열리고. 움찔! 하며 돌아보는 청풍

문을 열고 나오는 진삼낭

청풍; [어머니!] 일어나고. 머리핀은 다시 품속에 넣으면서

진삼낭; [나도 바람 좀 쐬러 나왔다.] 다가오고.

청풍; [여기 앉으십시오.] 자기 자리 권하고

진삼낭; [고맙다.] 앉고

진삼낭; [이래 저래 오늘 밤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구나.]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면 빨리 자야하는데...] 의자에 앉아서 빈민가 집들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을 보고

청풍; [내일부터는 일하러 가려고 일찍 일어나실 필요 없습니다.] 진삼낭 옆에 서서 품속에 손을 넣고

청풍; [받으십시오.] 다시 꺼내 진삼낭에게 내미는 청풍의 손에는 묵직한 주머니가 들려있다.

진삼낭; [이게 뭐냐?] 놀라면서도 두 손으로 주머니를 받고

청풍; [아버지가 혹시 딴 생각하실까봐 아까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황금전장에서 선금으로 받은 건 오백냥이 아니라 천냥이었습니다.]

진삼낭; [... 그럼 이 안에...] 달달 떨며 주머니를 보고

청풍; [도박 빚 갚고 남은 오백냥입니다.] [당분간 일 쉬시면서 그걸로 할 수 있는 가게를 알아보십시오.]

진삼낭; [이런...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눈물 글썽

진삼낭; [역시 도련님은 뭐가 달라도...] + [!] 말하다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고

청풍; (도련님?) 흠칫! 할 때

진삼낭; [청풍이 너도 이제 다 컸으니 알아야할 게 있다.] 억지로 웃으며 화제 돌리고

청풍; [우리 집안에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습니까?] 의심

진삼낭; [네 아버지는 처음부터 절름발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젊어서는 표사(鏢士) 노릇을 할 정도로 건장했었다.]

청풍; [아버지가 표사 생할을 했었다니 뜻밖입니다.] 놀라고

청풍; [헌데 어쩌다가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되신 것입니까?]

진삼낭; [어미는 젊었을 때 못된 자들에게 걸려 험한 일을 당할 뻔 했었다.] [그걸 목격한 네 아버지가 의협심을 발휘해서 구해주었는데...]

진삼낭; [그 과정에서 다리 힘줄이 잘려 불구가 되었단다.] 한숨

청풍; (그래서 낮에 그런 말을 하셨구나.) 깨닫고

청풍의 뇌리에 떠오르는 #11>의 장면

 

이산하; [내가 다리병신 된 게 누구 때문인지 잊었어?] 삿대질하고

이산하; [네년과 청풍이 놈만 아니었어도 내 인생이 이런 꼬라지가 되진 않았다구!] 이를 갈며 손을 들어 진삼낭을 때리려 하고

회상 끝

 

청풍;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다.) 찡그리고

청풍; (다리를 다친 걸 어머니 탓을 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왜 나까지 탓하시는 건가?) 난감하고. 그러다가

청풍; (설마...) 놀라고

청풍; (당시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것인가? 그래서 아버지가 나까지 탓한 것이고...?) 충격

청풍; (그렇다면 아버지가 내 친 아버지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 당혹. 그때

진삼낭; [어미가 없는 살림에도 가끔 불공을 드리러 다닌다는 것을 알 것이다.] 밤하늘 보며 엉뚱한 소리하고

청풍; [금릉의 진산 자금산(紫禁山)에 있는 수덕사(修德寺)에 철마다 다녀오셨지요.] 고개 끄덕이고

진삼낭; [네 외조부의 위패가 수덕사 극락전(極樂殿)의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숨 쉬며

청풍; [외조부님의 신위(神位)가 수덕사에 안치되어 있었군요.] [함자가 어찌 되는지 알려주시면 저도 오며가며 문안 올리겠습니다.]

진삼낭; [극락전에 안치된 신위중 용()씨 성은 단 한분뿐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의미심장하게

청풍; (이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 경악하고

청풍; (어머니의 성은 진()씨인데 외조부는 용씨라니...) 당혹해서 진삼낭을 보지만

진삼낭; [오늘따라 별이 많이 보이는구나.] 하늘 보며 딴 소리 하고

청풍; (화제를 돌리셨다. 물어도 말씀해주지 않으시겠다는 뜻이고...)

청풍; (어머니는 대체 어떤 비밀을 숨기고 계신 것일까?) 당혹하며 진삼낭을 보고. 진삼낭은 딴전을 부리고 있고

 

#31>

<-황금전장> 깊은 밤. 그래도 도처에 불이 켜져 있어 어둡지 않고

잘 가꿔진 정원. 그 정원 안에 있는 화려한 건물. 여자 무사들이 무기를 지닌 채 경비를 서고 있고. 불은 켜있지 않다.

달칵! 조심스럽게 어느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벽옥령. 잠옷 차림이고 품에 베개를 안고 있다.

야옹! 고양이가 앞장서서 방으로 들어가고

[?] 기둥과 천장이 있고 휘장이 쳐진 커다란 침대에서 말 소리가 들리고. 방에는 불리 켜져 있지 않지만 달빛이 창으로 흘러들어 아주 어둡지는 않다

온유향;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니?] 침대에 누워 돌아보는 여자. 30대 초반쯤의 절세미녀. 하지만 병약해 보인다. 애처로운 인상. 머리를 풀어내렸다. 몸에는 잠옷. 벽옥령의 엄마인 온유향이다. 배경으로 나레이션. <-벽초천의 후처 온유향(溫柔香)>

벽옥령; [그런 거 아니야.] 샐쭉거리며 문을 닫고

온유향; [그럼 엄마 품이 그리워서 찾아온 거니?] 웃으며 묻고. 돌아보기만 하고 일어나진 않는다

벽옥령; [옥령이가 뭐 어린애인가? 엄마 품이 그립게?] 샐쭉거리면서도 침대로 올라간다. 고양이는 침대 아래에서 하품을 하고

온유향; [그럼 대체 왜 아직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을까?] 이불을 들춰서 벽옥령이 옆에 오게 하고

벽옥령; [... 잠이 오지 않아.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려서...] 온유향의 품으로 파고 들며 얼굴 발개지고

온유향; [어머나!] 놀라고

온유향; [드디어 우리 딸에게도 운명의 상대가 나타난 모양이로구나.]

벽옥령; [그런 거 아니래두!] 얼굴 발개져 온유향의 품에 파고 들면서 어리광을 부리고

온유향; [좋은 사람이 생긴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다. 그러니 숨길 필요도 없어.] 벽옥령을 쓰다듬고

온유향; [마음을 지나치게 숨기다가는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게 된단다.] 한숨

온유향; (엄마처럼...) 한숨

벽옥령; [나중에... 정말 견딜 수 없으면 엄마에게 말해줄게.] 미소

온유향; [기대하며 기다릴게.] 벽옥령의 정수리에 키스하고

벽옥령; (아직 이유를 모르겠어.) (옥령이가 왜 청풍오빠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뛰는지...)

<좀 더 나이를 먹으면, 그래서 여자가 되면 알게 될까?> 두 모녀의 모습을 배경으로 벽옥령의 생각 나레이션

 

#32>

황금전장의 다른 곳. 벽세황의 거처. 황금수라들이 지키고 있고. 불은 켜있다.

이세창; [큰 아가씨가 어떻게 들키지 않고 바깥출입을 했는지 알아냈습니다.] 탁자에 커다란 지도를 펴놓고 벽세황에게 설명한다. 벽세황은 상좌에 앉아서 지도를 보고 있고. 방안에는 황금수라의 부단장인 귀견수가 서있다.

이세창; [이 설계도는 백오십 년 전 본장이 처음 지어질 때 그려진 것입니다.] [얼마 전 서고에서 이게 사라졌었는데... 큰 아가씨 거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벽세황; [유사시를 대비하여 만든 본장에서 외부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몇 곳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눈 번뜩

이세창; [큰 아가씨는 바로 그 비밀통로들을 이용하여 바깥출입을 해온 것입니다.]

벽세황; [못된 것같으니...]

이세창; [비밀통로 입구마다 황금수라들을 배치해두었습니다.] [만일 오늘밤에도 사내를 만나러 간다면 추적이 가능할 것입니다.]

벽세황; [잘 했소 총관!] 끄덕

벽세황; [이번 기회에 어떤 놈과 만나왔는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하오!] 이를 부득. 강렬한 표정

 

#33>

황금전장의 다른 곳. 유달리 화려한 건물. 불이 켜져 있지만 건물 주변에 경비 서는 자들은 없다. 하지만

근처 다른 건물 지붕 그늘에 몇 명의 황금수라들이 은신한 채 건물을 보고 있다. 검은 천을 덮어서 그늘과 동화되어 있다.

 

벽소소; [백정?] 어이없는 표정. 잠옷 차림으로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있다. 침실이다. 화려하고 조잡하고 어지러운 침실이다. 장식이 지나치게 많고 도처에 꽃이 꽂힌 화병이 놓여있다.

여자무사1; [고기 다루는 데는 귀신이라고 하옵니다.] [총주방장님이 좋은 고기 구하기 위해 도축장에 갔다가 찾아낸 자라고 하옵니다.] 차가운 인상의 여자 무사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벽소소의 앞에 서서 보고 한다. 이년은 나중에 한 두 번 더 나온다.

벽소소; [주대육 이 인간, 아버지의 신임을 믿고 오만방자해져서 백정까지 주방에 끌어들이네.] 이을 바득 갈고

여자무사1; [이청풍의 출신은 백정이 아니라고 합니다.] 눈치 보며

여자무사1; [다만 생계 때문에 도축 일을 해왔고...] + 벽소서; [그게 그거지!] 여자무사1의 말 막고

벽소소; [소 돼지 잡는 일을 해왔으면 백정이야! 세상에서 가장 천한...]

여자무사1; [...] 어쩔 수 없이 수긍

벽소소; [이청풍, 그 버러지에 관해서 모을 수 있는 정보는 다 모아와.] [사소한 것 하나라도 빼먹지 말고!]

여자무사1; [그리 하겠습니다.] 고개 숙이고

돌아서서 나가는 여자무사1

벽소소; [이청풍! 이청풍!] [감히 백정 주제에 날 개망신 시켰다 이거지?] 사악하게 웃으며 이를 갈고

벽소소; [아주 생지옥을 경험하게 해주마!] 마녀처럼 웃고. 그러다가

벽소소; (기분이 좋아지니 사공자님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네.) 얼굴이 달아오르고. 할딱이면서 몸을 비꼬고

벽소소; (하지만 조심해야해. 아버지와 총관이 뭔가 낌새를 챈 느낌이니...)

벽소소;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빠져나가야한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감시도 그때쯤이면 느슨해질 테니...) 헐떡이는 벽소소의 모습.

 

#34>

새벽. 금릉 성 밖의 빈민가. 아직 어두운 시간.

청풍의 집.

삐걱!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밖으로 나오는 청풍. 허리춤에 비수와 수건을 끼우고 있다.

문을 닫기 전에 방안을 보는 청풍.

방안의 모습. 구석에 이산하가 등을 돌린 채 웅크린 모습으로 자고 있다. 근처에 목발도 있고. 그 옆에는 청풍이 누웠던 자리가 있고. 그 옆의 이불에는 진삼낭과 이진진 모녀가 자고 있다. 진삼낭 품에 이진진이 안긴 자세

청풍; (남루하지만 따뜻한 광경이다.) 미소

청풍; (억만금을 준다 해도 팔지 않을 행복인데...) 찡그리고

술렁!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방안의 광경

눈 감고 고개를 젓는 청풍

다시 방안을 보고.

여전히 잠들어 있는 가족들.

청풍; (마치 신기루인 듯... 바람에 흩어질 안개처럼 위태롭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찡그리며 문을 닫고

청풍; (마치 우리 가족을 휩쓸 진짜 풍파가 목전에 닥친 것같기도 하고...) 문을 완전히 닫는다.

청풍; (어제 하루 워낙 다사다난했던 탓에 생긴 노파심이겠지.) 돌아서고

청풍;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황금전장에서 일을 해야하니 정신을 가다듬자.) 찰싹! 두 손으로 뺨을 때리고

그러면서 떠올리는 #25>의 장면

 

주대육; [내일 아침에는 도축장에 들렸다가 오도록 하게. 추노대가 말한 좋은 소가 제대로 입하되었는지 확인하고...]

회상 끝

 

청풍; (오늘 쯤 고려산 흑우가 도축장에 입하된다고 했었지.)

청풍; (도축장에 가서 기다리다가 흑우가 도착하면 도축과 정형을 해서 황금전장으로 가져가야한다.) 걸어가고

청풍; (어제 그만 두었는데 오늘 바로 찾아가야하니 좀 민망하긴 하구나.) 아직 어둑한 빈민가의 거리를 걸어가는 청풍. 헌데

 

#35>

다시 청풍의 집.

어둑한 방안. 이진진을 안고 누워있는 진삼낭

천천히 눈을 뜨는 진삼낭

진삼낭;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진삼낭; (청풍... 도련님에게 당신의 진짜 신분을 알려줘야 할지 말아야할지를...)

진삼낭; (진짜 신분을 알게 되는 순간 도련님은 의지와 상관없이 아수라장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진삼낭; (무림맹과 마교, 어느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가 될 테고... 그 결말은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진삼낭; (주인님과 아연아가씨에게는 죄송하지만... 도련님은 지금처럼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사시는 게 옳다.)

진삼낭; (부귀와 명예를 누려도 그 결말이 어떤지는 주인님과 아연아가씨께서 보여주셨으니...) 한숨 쉬며 다시 눈을 감는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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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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