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에 해당되는 글 106건

  1. 2020.04.18 [자객일지] 제 24장 거래 1
  2. 2020.04.17 [지백천년] 제 5장 피로 물들다. 1
  3. 2020.04.17 [환골탈태] 제 11장 벽화 속의 비밀
  4. 2020.04.17 [자객일지] 제 23장 희생
  5. 2020.04.16 [지백천년] 제 4장 천록여의 3 1
  6. 2020.04.16 [환골탈태] 제 10장 가짜 의성이 준 기연
  7. 2020.04.15 [지백천년] 제 4장 천록여의 2 1
  8. 2020.04.15 [환골탈태] 제 9장 동분서주
  9. 2020.04.15 [자객일지] 제 22장 추적
  10. 2020.04.14 [지백천년] 제 4장 천록여의 1
  11. 2020.04.14 [환골탈태] 제 8장 무덤에서의 하룻밤 1
  12. 2020.04.14 [자객일지] 제 21장 첫 살인
  13. 2020.04.13 [지백천년] 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3
  14. 2020.04.13 [자객일지] 제 20장 구출
  15. 2020.04.12 [지백천년] 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2
  16. 2020.04.12 [자객일지] 제 19장 잡혀간 소녀
  17. 2020.04.11 [공지] 판무림을 방문하시면 더 많은 와룡강의 작품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18. 2020.04.11 [지백천년] 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1
  19. 2020.04.11 [환골탈태] 제 7장 석관 속에서 벌어진 일 2
  20. 2020.04.10 [지백천년] 제 2장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얼굴 검은 미녀가 살고 있고 2
  21. 2020.04.10 [지백천년] 제 2장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얼굴 검은 미녀가 살고 있고 1
  22. 2020.04.10 [환골탈태] 제 6장 암호랑이라 불리는 여인
  23. 2020.04.10 [자객일지] 제 18장 청부 2
  24. 2020.04.09 [지백천년] 제 1장 목숨을 거래하다 2
  25. 2020.04.09 [지백천년] 제 1장 목숨을 거래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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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이산하가 고문당하는 현장.

정필; [이놈을 재주껏 깨워봐라.] 칼로 이산하의 뺨을 툭툭 치며

정필; [회주님의 손속이 거칠어서 곧 삼도천을 건널 놈이지만 그 전에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내야한다.]

[맡겨주십시오.] [저희들의 무공이야 보잘 것 없지만 고문 솜씨는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산 채로 포를 떠서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겠습니다.] 건달들 단도를 뽑거나 칼을 뽑으며 잔인하게 웃고. 그 사이에 청풍이 가까이 오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정필; [최대한 오래 숨이 붙어있게 해야 한다. 우릴 엿 먹인 대가도 치러야 하니...] 웃으며 물러서고. 바로 그때

화악! 뒤에서 정필을 덮치는 청풍

정필; [! 네놈은...] 경악하며 다급히 몸을 돌려 피하려 하지만

정필; [이청풍!] + [!] 외치다가 경악. 그자의 바로 앞으로 내밀어지는 칼

! 청풍의 칼에 뛰어든 꼴이 되어 칼에 배가 궤뚫리는 정필

 

소수마녀;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예상하고 칼을 내밀었다.) 놀라고

 

[!] [총관님!] [네놈이 왜 총관님을...] 다른 놈들 기겁하며 돌아볼 때

촤악! 정필의 배에서 칼을 뽑으며 돌아서는 청풍. 칼이 배에서 뽑히며 휘청하는 정필. 즉사는 아니다. 배에서 피가 뿜어지고. 주변의 다섯 건달은 놀라고 분노하며 칼을 뽑으려는 모습이고

스악! 칼을 뽑아 덤비려는 두 놈 사이로 뛰어드는 청풍.

건달들; (안돼!) (잘못하면 동료를 베게 된다.) 기겁하며 좌우로 물러서려는 두 놈. 동료가 다칠까봐 칼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스악! ! 좌우로 칼을 휘둘러 그 두 놈을 베는 청풍. [크악!] [!] 피를 뿌리며 쓰러지려는 두 놈. 정필은 그때서야 배를 끌어안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고

 

소수마녀; (간격이 좁은 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 놈들은 동료가 다칠까봐 공격을 망설였고 그 틈에 두 놈을 베어버렸다.) 또 놀라고

 

뭐라 악을 쓰며 일자로 청풍에게 덤비는 세 놈. 칼을 휘두르면서

! 몸을 굴려 그놈들 발치로 굴러들어가는 청풍.

세 놈의 칼질은 청풍의 몸 위로 스치고

구르는 자세로 칼을 휘둘러 세 놈의 다리를 베는 청풍

[크악!] [!] [... 다리가...] 두 놈은 다리가 하나씩 잘려 쓰러지려 하고 한 놈은 다리에 상처를 입고 펄쩍 뛰며 물러선다.

털썩! 퍼억! 다리가 하나씩 잘린 놈들은 나뒹굴고. 그놈들은 신경 쓰지 않고 굴렸던 몸으로 다리를 다쳐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세 번째 놈을 덮치는 청풍

[지랄...] 스악! 다리 다친 놈이 악을 쓰며 칼질을 하지만

! 피하지 않고 마주 칼질을 하는 청풍

서걱! 청풍의 어깨를 훑고 지나가는 세 번째 놈의 칼. 옷과 살이 베어져서 피가 튀고. 하지만

! 청풍의 칼은 그자의 가슴을 반쯤 가르고 지나간다

 

소수마녀; (육참골단(肉斬骨斷)!) (살을 베이는 대신 뼈를 갈라 적의 목숨을 빼앗았다.) 다시 감탄

소수마녀; (냉철한 판단으로 자기보다 강한 적을 베어버렸다.) 감탄

 

<저 놈은 의심의 여지도 없는 최강의 살수(殺手) 재목이다!> 가슴이 갈라져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세 번째 놈과 그 앞에서 칼을 휘두른 자세로 비틀거리는 청풍.

퍼억! 나뒹구는 세 번째 놈의 시체.

! 청풍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칼로 바닥을 짚고. 그때

[으으으!] [히이익!] 다리가 잘린 두 놈이 공포에 질려 기어가고

돌아보며 일어나는 청풍

기어가다가 기겁하는 두 놈

청풍이 핏발 선 눈으로 다가온다. 손에는 피 묻은 칼을 든 채

[... 살려다오!] [제발 목숨만은...] 돌아보며 애원하는 두 놈. 하지만

! 서걱! 냉정하게 두 놈에게 칼질을 하는 청풍

 

소수마녀; (저항능력이 있는 적을 먼저 처리하고 약해진 자들은 나중에 제거한다.)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실로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청풍이 다리 다친 놈들에게 칼질하는 장면을 보며 눈 번뜩

소수마녀; (저 정도 재능이 있는 놈이 무공을 배우고 자객수련을 거친다면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가 되겠구나.) 흥분하고

소수마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놈을 우리 살인상단(殺人商團)으로 영입을 해야 한다.) 결심하고.

 

다시 마차 근처의 살육의 현장

털썩! 퍼억! 얼굴 바닥에 처박고 죽는 다리 잘린 두 놈

그놈들을 등지고 정필에게로 가는 청풍. 정필은 배에 구멍이 나서 배를 움켜쥔 채 기어가고 있다. 그러다가

청풍을 돌아보는 정필. 청풍이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흘리며 다가온다. 눈이 백열되어 있고

정필; [... 살려다오 이청풍!] [... 난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기어가던 자세로 돌아보며

청풍; [시키는 대로 했다?] ! 칼을 정필의 목에 대고

정필; [이세창... 황금전장의 총관 이세창이 시켰다.] 필사적으로 애원

[!] 눈 부릅뜨는 청풍의 뇌리에 이세창의 비열한 얼굴 떠오르고

정필; [... 이유는 모른다.] [이세창은... 네 누이를 사창가에 팔아버리는 대가로 천냥을 주었다.]

청풍; (그년이 이세창을 사주했겠지.) 이를 악물며 떠올리는 장면. #87>에서 감옥을 찾아온 벽소소가 웃던 장면이다.

 

벽소소; [네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은 사창가에 끌려갔어.] [어쩌면 지금쯤 사내놈들에게 몸을 팔고 있을지도 몰라.]

회상 끝

 

정필; [... 다행히 네 누이가 사창가로 팔려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이쯤 해두고...] + [!] 말하다가 눈 부릅. ! 그자의 등을 찌르는 청풍

정필; [끄륵...] 고개 쳐들며 피를 토하고

 

소수마녀; (이청풍!) 눈 번뜩이고

소수마녀; (이제 보니 저놈이 바로 그저께 새벽에 사우와 드잡이질을 했던 그놈이었구나.) 깨닫고. 청풍은 정필을 난도질하고 있다.

소수마녀; (무림맹 소맹주와 혼담이 오가는 벽소소의 추문을 막으려고 황금전장에서 저 놈과 저 놈 가족을 해꼬지 하려 했겠지.)

소수마녀; (이 사실을 잘만 이용하면 이청풍, 저놈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을 할 수가...) + [!] 생각하다가 무언가 깨닫고

[!] 스스스! 사라지는 소수마녀. 직후

화악! ! 돌풍과 함께 근처로 나타나는 두 명의 인물. 얼굴에 가면을 쓴 황금수라들이다.

두 명 황금수라의 시점. 청풍이 달리 잘린 정필을 난도질 하고 있는 장면이 보이고

청풍의 마귀같은 얼굴

<찾았다!> 가면 속에서 눈 번뜩이는 황금수라들

 

털썩! 고개 떨구며 죽는 정필.

따당! 칼을 정필 옆의 바닥에 던지며 마차로 가는 청풍.

뒤집힌 마차 바닥에 두 손이 박힌 채 매달려 있는 이산하.

! 이를 악물며 이산하의 손에 박혀 있는 칼 하나를 뽑는 청풍

팔과 그쪽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쓰러지는 이산하.

이산하의 몸을 안아서 부축하고

! 다른쪽 손바닥에 박힌 칼도 뽑는 청풍

칼을 던져버리고

이산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누이는 청풍. 그러자

천천히 눈을 뜨는 이산하.

청풍; [아버지...] 옆에 무릎을 꿇고

이산하; [이상하구먼. 아직 이승인 것 같은데... 청풍이 네 얼굴이 보이다니...] 청풍을 보며 죽어가는 눈의 초점을 맞추려 애쓰고

청풍; [죄송합니다.] [제가 오는 게 늦었습니다.] 무릎 꿇은 채 고개 조아리고

이산하; [아니... 늦지 않았다. 늦지 않았어.] 웃고

이산하; [죽기 전에... 널 만났으니 결코 늦은 게 아니야.]

말없이 우는 청풍.

이산하; [서둘러서... 단양으로 가라.]

청풍; [단양...]

청풍; [어머니가 단양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이산하; [그렇... .] [네 어머니의 최종 목적지는... 무림맹이 있는 태산인데...] 목소리가 흐려진다.

이산하; [단양에서 배를 타고 경항운하(京杭運河;북경과 항주를 잇는 대운하)를 따라 태산으로 갈 계획이었다.]

청풍; [어머니는 무림맹에 연고가 있는지요?]

이산하; [있지. 있고 말고...] 웃고

이산하; [왜냐하면... 너는 바로... 무림맹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눈빛도 잦아들고

청풍; [저도 무림맹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급히 묻지만

이산하; [서둘러서... 네 엄마와 진진이를 따라가서...] 말하다가

! 고개 떨구며 죽는 이산하

이산하의 목을 만져보는 청풍

청풍; (운명하셨다.) 이산하의 목에서 손을 떼고

청풍; (내가 무능해서... 아버지조차 지켜드리지 못했구나.) 절하며 울고. 그때

[애통한 심정은 알겠지만 우릴 너무 기다리게 하지는 마라.] 뒤에서 들리는 음성

[소장주님이 널 보자고 하신다.] [같이 가줘야겠다!] ! 청풍의 뒤에 서있는 두 명의 황금수라들. 하지만

말없이 이산하의 시체를 안아드는 청풍.

황금수라들; [이놈이..] [가자는 말 안들리냐?] 눈 부라리지만

이산하의 시체를 안고 비틀비틀 걸음 옮기는 청풍

[말이 말 같지 않냐?] ! 황금수라중 한 놈이 청풍의 뒤쪽 허리를 발로 차고

콰당탕! 이산하의 시체와 함께 바닥에 나뒹구는 청풍

황금수라들; [번거롭게 했다 이거지?] [소장주님은 네놈을 굳이 살려서 데려오라고 하진 않으셨다.] ! 칼을 뽑으며 다가오는 두 놈

청풍은 일어나며 주변에 떨어져 있는 칼을 집어들고

황금수라들; [허튼 희망은 버려라. 우린 네 손에 죽은 파락호들과는 다른 존재들이다.] [도검이 불침하는 우리에게 네놈의 어설픈 칼질 따위는 이빨도 먹히지 않는다.] 비웃으며 청풍에게 다가서고.

[!] 칼을 그자들에게 겨누다가 움찔! 하는 청풍

스윽! 황금수라들의 뒤로 유령처럼 나타나는 소수마녀.

황금수라들; [지금이라도 칼을 버리고 우릴 따라간다면 죽이진 않겠...] + [!] 말하다가 눈 부릅뜨며 놀라는 두 놈

청풍의 조금 놀란 표정

<우리 뒤에 무언가 나타났다!> ! 홰액! 벼락같이 돌아서며 칼을 휘두르려는 두 놈. 하지만

! ! 두 놈의 가슴에 박히는 하얀 손바닥 자국

황금수라들; [! 이 무공은...] [... 소수인!] 피를 토하며 뒤로 비틀 물러서고

화악! 그런 두 놈에게 마녀처럼 덮치며 양손을 휘두르는 소수마녀

! ! 황금수라들의 이마를 치는 소수마녀의 새하얀 손

빠직! 빠각! 가면이 박살나고 가면 주변으로 피가 팍 터진다. 머리가 깨진 모습이고

[끄윽!] [지랄...] 피를 뿌리며 넘어지는 두 놈

퍼억! 털썩! 나뒹구는 황금수라들

스슥! 그 앞에 내려서는 소수마녀

퍼석! ! 황금수라들의 몸이 그제야 석고처럼 변해서 부서지고

청풍; (시체가 석고처럼 변해서 부서진다.) 조금 놀라고

소수마녀; [황금수라... 확실히 황금전장이 자랑하는 고수들답구나.] [소수인을 한번 써서는 죽이지 못한 걸 보면...] 부서지는 황금수라들의 시체를 보며 끄덕이고.

청풍;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다. 금강불괴나 마찬가지라는 황금수라들을 간단히 죽인 걸 보면...) + [뉘신지 모르지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포권하고

소수마녀; [네가 원한 바는 아니겠지만 나로부터 구명지은을 입은 사실은 인정하겠지?] 차가운 표정으로

청풍; [인정합니다.]

소수마녀; [그렇다니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겠구나. 은혜를 입은 보답을 하라고...] 서늘하게 웃고

청풍;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굳어지는 표정

소수마녀; [맹세만 한 가지 하면 된다.] [내가 하는 요구를 한 가지 들어주겠다고!] 강렬한 눈빛

청풍; [그 요구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소수마녀; [맹세부터 해라! 구명지은에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차갑게 말하고

청풍; (막무가내인 여자다.) 찡그리고

청풍; (하지만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 [보은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포권하고

소수마녀; [지금의 그 맹세, 잊지 마라.] ! 손을 하나 내밀어 펴고.

검은 옷을 배경으로 새하얀 손이 펴지고

청풍; (손이 너무 희어 똑바로 볼 수가 없다.) 이마를 찡그리는데

화악! 소수마녀의 손이 커지면서 청풍의 시야를 다 가리고

청풍; (... 당했다!) ! 현기증을 느끼는 표정이 되고

<정신을 잃으면 안되는데... 어머니와 진진이를 구하러 가야하는데...>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청풍의 모습. 주변이 모두 하얗게 변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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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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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피로 물들다. (1)

 

 

 

이매봉은 양피지로 묶인 얇은 비급을 넘겨보았다.

겨우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글씨가 작기는 하지만 한번 읽으면서 그녀는 비급 속에 들어 있는 모든 내용을 다 기억했다.

[휴우! 그럼 그렇지! 역시 별 것 아니었어! 금강불괴를 깨뜨리는 것보다도 훨씬 쉽잖아.]

이매봉은 어깨에 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심하려면 한 번 쯤은 실험을 해봐야겠지.]

이매봉은 동의를 구하는 듯 고개를 숙여 한 사람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정말 키가 작은 소인(小人)이 무릎을 꿇고 않아있었다.

얼핏보아서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정교한 밀랍인형 처럼 보였다.

앉아있는 키는 한자가 조금 안되니 선다한들 한 자 반이나 될까말까할 정도다.

그러나 여타 난쟁이들과는 확연하게 달란다.

어느 하나가 기형적으로 크거나 작지 않고 사지는 비례를 잘 이루고 있었으며 오관이 반듯하여 멀쩡한 사람이 그대로 작게 비쳐보이는 것 같과 마찬가지였다.

얼굴로 짐작해볼 때 소인의 나이는 스물 다섯 쯤 된 것 같다.

이매봉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상관숭(上官崇)! 그렇지 않아?]

소인이 말했다.

[속하 상관숭은 오직 명에 따를 뿐 어떤 판단도 하지 못합니다.]

이매봉이 깔깔 웃었다.

[멍청이! 그럼 조용히 따라와.]

상관숭은 나직히 존명을 외쳤다.

키가 보통사람과 똑같다면 상당한 미남자 소릴 들었을 얼굴이다.

이매봉이 창밖으로 날아가며 말했다.

[일단 그녀석을 찾아야겠어.]

 

x x x

 

인시(寅時)가 지나면서 현무호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 둘씩 은밀히 호변에 모여들던 사람들은 묘시(卯時)가 되면서는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살기를 속으로 갈무리하며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계명사를 힐끗힐끗 살피는가 하면 어떤 자는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수공을 펼치기도 했다.

동녘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호수 면에 어리는 물안개는 현무호를 용왕의 수정궁(水晶宮)처럼 보이게 했다.

땅은 아직 어둡지만 하늘이 먼저 밝아 온다.

그리고 부지런한 잡새들이 모이를 찾아 나는 소리가 들린다.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도 어언 삼백 여를 헤아릴 정도가 되었다.

한데 어느 순간,

 

--- 파앙!

 

어디서 터져나온 소리 때문인지 대기(大氣)가 문풍지처럼 진동했다.

아주 먼곳에서 들려온 폭죽소리 같기도 하고 바로 곁에서 터져나온 큰 소리 같기도 했다.

 

---파앙!

 

이미 경직되어버린 고막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저기닷!]

누군가가 소리치며 몸을 솟구쳤다.

 

---으하하하하하하!

 

미친듯한 웃음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 곳에서 신기루처럼 한 채의 누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활몽루!

사라졌던 활몽루가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휘휘휙!

휙휙!

군웅들이 병기를 뽑아들고 활몽루를 향해서 날아갔다.

번득이는 검광과 살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다.

번쩍! 번쩍!

활몽루에서 한 거인이 허공을 밟고 걸어나왔다.

[미천한 것들!]

활몽루와 함께 사라졌던 일곱째 장군묵이었다.

[목을 바쳐라!]

장군묵은 고함치며 검을 휘두르는 자의 머리를 낭아봉으로 날려버렸다.

퍼억!

그자의 머리는 산산조각나서 흩어졌다.

[옥황빙서(玉皇聘書)를 내놔라!]

한 노인이 장군묵의 등에 일장을 내려치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벌써 장군묵의 왼손에 있는 낭아봉은 노인의 배와 가슴을 찢어발기고 있는 중이었다.

[으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소리를 끝으로 노인의 시체는 현무호로 떨어져 버렸다.

장군묵은 평지를 밟듯이 허공을 밟으며 걸어갔고, 다시 옥황빙서를 외치는 자가 창으로 장군묵의 목을 찔렀다.

장군묵은 사방은 물론이고 아래 위까지 몰려드는 군웅들로 인해 포위당했다.

[버러지같은 놈들!]

장군묵의 얼굴에 잔인한 웃음이 걸렸다.

창으로 그를 찔렀던 자는 두 개의 낭아봉에 찢어져 형체도 남기지 못했다.

참혹한 모습에 군웅들은 치를 떨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장군묵을 공격했다.

장풍과 검광이 풍우처럼 몰아쳤다.

그러나 장군묵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장군묵은 한줄기 바람처럼 군웅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아아!

 

사람들의 찢어진 살점들을 가득 물고 있는 낭아봉이 춤을 추고, 그가 스쳐간 곳에는 찢어져 버린 시체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낭아봉에 죽는 자들은 공포 외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고, 비명은 아직 살아있는 자들이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장군묵을 보고 질렀다.

죽은 자들의 피를 뒤집어쓴 거인 장군묵은 그 자체로 지옥에서 도망쳐나온 악귀같았다.

살신(殺神)이었다.

공포가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옥황빙서를 외치며 달려들던 자들은 콩튀듯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군묵은 이미 그들 모두를 죽이기로 작정한 듯 달아나는 자들부터 쫓아가 몸을 짓이겨 죽였다.

! !

[으아아아아!]

도망치면서 공포에 질려 고함치는 자들, 하지만 그 고함소리가 끝나는 순간에 그들의 목숨도 끝나고 있었다.

일각도 채 지나기 전에 현무호는 생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삼백여 시체들이 호수와 호변에 흩어져 있고 호수 물은 그들의 붉은 피가 흘러들고 있었다.

 

x x x

 

[소협은 능히 자기를 지킬 만한 무공을 지녔는가?]

진양진인이 속을 뻔히 짐작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없습니다.]

다시 진양진인이 말했다.

[바람보다 빨리 달아날 수는 있는가?]

현천록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진양진인이 빙그레 웃었다.

[소협은 오늘 정오가 지나기 전에 죽을 것이네.]

진양진인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현천록이 흥미진진한 듯 눈을 반짝이며 쳐다본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활몽루를 보았다면 노도가 궁여지책으로 그곳에 가둔 마왕(魔王)도 봤을 것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창허진인은 도장의 윗 어른이 아닌가요?]

진양진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노부 나이가 일백하고도 서른 두 살이네. 무당에 노도보다 더한 선배가 어디있단 말인가?]

현천록이 말했다.

[그럼 신선이 된 장삼봉 진인은 도장의 후배입니까?]

진양진인은 일순 말이 막혔다.

(이놈이 정말 만만찮구나. 은근히 내 욕을 하다니.)

진양진인은 다시 한 번 웃고 말했다.

[장삼봉조사께선 승천하시고 속세를 계시지 않으니 선배라고 할 수도 없네. 하여간 그자는 마왕이랄 수 있네. 여러 곳의 무공을 훔쳐 배웠으며 또한 나이를 짐작할 수없지. 더구나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쯤으로 아는 자네.]

현천록이 미소를 지었다.

진양진인이 계속 말했다.

[그는 앞으로 한 두 시간만 지나면 내가 만든 결계를 깨뜨리고 다시 뛰쳐나올 것이네. 집요하게 노부를 찾아올텐데 자네를 그냥 둘 리가 없지. 노부와 함께 낭아봉에 찢겨 죽고 말걸세.]

그는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자네가 노도를 낚았으나 먹고싶은 어떤 요리도 하기 전에 우린 함께 죽는단 말이네. 노도야 살 만큼 살았으니 죽는게 뭐가 아쉽겠나만 자네는 허허허... 조금 억울하겠군.]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억울할 수도 있겠지요.]

진양진인이 얼굴을 굳히면서 말했다.

[결국 자네가 노도를 데려온 건 실수였네. 무슨 목적이 있었던 간에 결과는 이처럼 끔찍하게 나타날 테니까.]

현천록이 모닥불에 장작을 하나 더 던져 넣었다. 진양진인의 말에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진양진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네. 지금부터 서두른다면 우린 완전히 그 마왕의 손을 벗어날 수도 있네. 자네가 노도한테 묻고 싶은 건 그 후에 다시 의논하면 되지.]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 그럼 내기를 하나 하도록 합시다.]

진양진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 녀석은 역시 어리다. 상황을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철없는 소리만 하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노도가 너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들어주마.)

진양진인은 한심하다는 듯이 탄식하며 말했다.

[어떤 내기인가? 우린 시간이 없네.]

현천록이 말했다.

[먼저 도장이 생각한 방법대로 한 번 해봅시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으로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데 걸겠습니다.]

진양진인은 껄껄 웃었다.

[노도가 이만큼 살았지만 자네처럼 명랑한 소년은 처음이네. 하지만 자네는 노도를 너무 모르고 있군. 노도는 계책을 생각해서 아직까지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세.]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실패하고나면 그때는 내 방법을 쓰도록 하지요.]

진양진인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조건은 어떤지 한 번 들어보세.]

현천록이 웃으며 물었다.

[분명히 자신있겠지요?]

진양진인이 껄껄 웃고 말했다.

[노도가 입밖에 낸 건 모두 자신있는 것들 뿐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이길 경우에는 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도장이 나을때까지 돌봐주겠습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네가 이길 경우에는?]

[내가 묻는 말이 어떤 것이든간에 무조건 대답해주십시오.]

진양진인의 얼굴이 미미하게 실룩거렸다.

현천록이 말했다.

[어쩌면 도장의 금기(禁忌)를 깨야하는 대답도 있을 것입니다.]

현천록의 눈이 그래도 과연 내기를 하겠느냐는 듯이 바라본다.

진양진인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법도 없군. 노도는 오직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으니 좋네.]

[맹세하십시오.]

현천록이 말했다.

진양진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노도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다 맹세일세.]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도장의 계책을 말해보십시오.]

진양진인이 자기 옆에 끌려져 있는 장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일은 단순하지 않네. 자네가 내 지시에 아주 잘 따라 주어야 하네.]

현천록이 말했다.

[필요하다면 따라야겠지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럼 저 입구부터 무너뜨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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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벽화 속의 비밀

 

 

 

(방주라고?)

막비강은 들려온 함성만으로도 이번에 나타난 인물의 내공이 매우 정순함을 깨닫고 자세히 바라보았다.

새로 등장한 인물 역시 전신에 누더기 옷을 걸친 거지였는데 눈이 부리부리하고 구렛나루가 양쪽 뺨을 덮고 있어 아주 위맹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인이었다.

비록 이 인물의 나이가 금릉삼로보다 이삼십 살 가량 적어 보였으나 일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삼로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삼엄했다.

이 중년거지는 어깨에 여덟 개의 자루를 메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개방의 방주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당금 강남개방의 방주인 호면개(虎面丐) 도금(都金)이로구나!)

막비강은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고 내심 긴장했다.

위맹한 인상의 중년거지가 바로 개방의 정통을 이어받은 강남개방의 방주 호면개 도금이었다.

호면개 도금은 강남개방의 제일대 방주였던 적족신개(赤足神丐)의 제자였다. 적족신개는 궁가방의 개파조사인 궁신 여불초의 사제였다. 그러면서도 개방의 방주로 지명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하지만 적족신개는 이십 년 전 의문의 실종을 당해 버렸다. 그 때문에 구결(口訣)로만 전해지던 개방의 숱한 진산절기가 실전되어 개방이 당금의 처지로 조락하는 이유가 되었다.

상대가 개방 방주임을 알아본 막비강은 암암리에 일신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악전고투에 대비했다.

그때 호면개 도금도 두 눈에서 살벌한 광망을 발산하며 막비강을 훑어보았다.

[철 호법, 당신들은 무슨 일로 싸움을 하게 되었소?]

이어 그는 한쪽 옆에 시립해있는 철 호법에게 물었다.

[이 소악적이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방주님!]

철 호법은 타구봉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굽히는 자세로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개방 방주 도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막비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의 어리고 무지한 점을 생각해 놓아줄 테니 돌아가거라!]

과연 일방의 방주다운 도량이다. 전후 사정을 들은 호면개 도금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쓸데 없는 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내심 감탄한 막비강은 손을 맞잡아 도금에게 공수의 예를 올렸다.

[방주님의 넓으신 아량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어 그는 곡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그때 도금이 막비강을 불러 세웠다.

[본 방주가 한마디 분부해 두겠는데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라! 만약 다시 찾아오면 네놈의 다리뼈를 분질러 놓겠다!]

[!]

막비강은 차가운 코웃음만 날리고 곡구 밖으로 나갔다.

그는 청구단서를 취득하여 절세의 무공을 연성해야 하므로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보통 희세기진(稀世奇珍)은 심산유곡에 숨겨져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 청구단서는 거대한 비석 밑에 숨겨져 있고 또 거대한 비석은 개방의 분타 소재지가 된 것이다.

개방은 그들의 소굴 지하에 이런 비급이 숨겨져 있는 줄을 모른다. 그리고 막비강은 비록 알고 있지만 어느 구석에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막비강 혼자 힘으로 거지 떼들을 모두 내쫓고 자세히 수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곡을 나선 막비강은 높이 솟아있는 석촉대(石燭臺)를 바라보며 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는 무슨 영감이 떠올랐는지 빙긋이 웃었다.

(그래! 그 수법을 써야겠다.)

곧 그의 모습은 대석비곡 입구에서 사라졌다.

 

***

 

막비강은 금릉의 시장통에서 남루한 의삼과 자루, 향촉(香燭), 지전(紙錢) 등을 샀다. 그리고는 새벽무렵의 어둠을 틈타 금릉성에서 나와 황량한 공동묘지로 향했다.

공동묘지에 도착한 그는 남산의성 악불령의 역용환을 사용하여 전신의 피부색을 바꾸고 머리도 흐트려 지저분하게 분장했다.

그리고 약물을 먹어 목소리까지 변하게 한 뒤에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새로 만든 무덤 앞에 강장, 신녀비, 호로, 진주, 은자 등을 옷에 싸서 깊이 파묻었다.

아침이 되자 막비강은 다른 사람의 의심을 방지하기 위해 그 무덤 앞에 향촉에 불을 붙이고 지전을 태우며 한동안 우는 척했다. 그런 후에 해가 중천에 뜨자 무덤을 떠나 몹시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묘화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라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거지보다 더 더럽게 분장한 막비강은 어떤 부호가 사는 집 대문 옆에 깨진 그릇을 들고 서있었다. 영락없이 하인들이 보고 불쌍히 여겨 먹다 남은 찬밥이라도 주길 기다리는 거지의 행색이었다.

헌데 오래지 않아 그의 등뒤에서 음침한 일갈이 들렸다.

[어린 녀석아, 누가 너더러 이곳에서 걸식을 하라더냐?]

막비강이 고개를 돌려보니 말을 한 사람은 중년거지였다.

그는 거지들의 규칙을 잘 알면서도 고의로 모른 체했다.

[집안에 갑자기 변고가 생겨 며칠씩이나 밥을 굶었소. 당장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누가 시켜야지 걸식을 하겠습니까?]

그의 말에 중년거지는 이마를 찡그렸다.

[사정이 딱하게 되었군! 그래, 향주(香主)에게 인사는 했느냐?]

[향주가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향주에게 인사하지 않았으면 밥을 얻으러 다니지 못한다.]

중년 거지의 말에 막비강은 눈을 부라리며 항의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놈이 어디 대고 토악질이냐?]

중년거지가 눈을 부라리며 막비강의 뺨을 후려쳤다.

막비강은 따귀를 한 대 얻어맞자 즉시 울음을 터뜨리며 떠들었다.

[내가 내 밥을 얻어먹는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사람을 때립니까?]

그러자 약이 오른 중년거지는 세게 발길질을 하여 막비강을 바닥에 넘어지게 한 후 욕설을 퍼부었다.

[네놈을 때려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고맙다고 절을 해라.]

두 사람이 울고 욕지거리를 하자 길 가던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했다.

중년거지가 만면에 노기를 띤 채 또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땅바닥에 누워 죽은 시늉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나와 함께 향주에게 가자.]

[매를 맞으러 가잔 말이냐? 구경하는 여러분이 평을 해보십시오. 나는....]

!

막비강은 또 중년거지의 발길에 엉덩이를 차였다.

비록 이것은 그가 자초한 고육지계(苦肉之計)이지만 중년거지가 지나치게 흉악하여 막비강은 화가 치밀었다. 분노한 그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중년거지를 노려보았다.

중년거지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 네놈은 그래도 순순히 따라가지 않겠느냐?]

[왜 너를 따라간단 말이냐?]

[이놈이 끝내 기어올라! 오냐! 내 네놈을 때려죽이고 말겠다.]

중년거지가 주먹을 휘두를 때 막비강도 지지 않고 머리로 힘껏 상대방을 받아 갔다.

곧 두 사람은 한데 얽혀 싸움질을 했다. 물론 내공을 사용하는 무림고수들과 달리 그저 주먹질 발길질만 하는 저자거리의 치졸한 싸움질이었다.

막비강의 머리에 들이받힌 중년거지는 독이 올라 두 주먹으로 그의 등을 마치 북 치듯이 마구 두들겼다. 그때였다.

[멈추어라!]

갑자기 외마디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중년거지는 그 목소리를 듣더니 흠칫 놀랐다. 한 명의 풍채 좋은 늙은 거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것을 본 때문이다.

[이거나 먹어라!]

막비강은 그 틈을 이용하여 머리로 중년거지를 받아 쓰러뜨리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중년거지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일어나더니 나타난 노개를 향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제자가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그놈이 난폭해서... 보셨겠지만 그놈은 제자를 이런 꼴로 만들었습니다.]

노개가 차가운 코웃음을 날리고 냉랭히 말했다.

[! 홍삼(洪三), 너는 가는 곳마다 일을 저지르는구나. 빨리 분타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노개는 홍삼을 쫓아 보낸 후 곧 막비강의 뒤를 따라 달려왔다. 노개의 발걸음은 늙은이 답지 않게 날렵했다.

[아이야, 잠시 걸음을 멈추어라!]

노개가 따라붙으며 말하자 막비강은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내 뒤를 쫓아오는 겁니까?]

[아이야,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노대(何老大)라 부릅니다.]

[너는 나의 문하가 되고 싶지 않느냐?]

[할아버지는 누구죠?]

[나는 개방의 금릉삼로 중 범개선(范開先)이라고 한다.]

노개는 바로 어제 막비강과 한바탕 드잡이질을 한 바 있는 금릉삼로 중 범씨 성의 늙은 거지였다. 그의 별호는 청풍개(淸風丐)로서 금릉삼로의 우두머리였다.

청풍개 범개선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노부를 사부로 모시겠다면 본방의 절기를 전수하여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해주겠다.]

이거야말로 막비강이 바라던 전개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할아버지를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는 즉시 청풍개 범개선 앞에 큰절을 올렸다.

범개선은 포대에서 만두를 꺼내어 막비강에게 나누어주며 신세와 집안사정을 자세히 물었다. 막비강이 적당히 둘러대자 범개선은 정말인 줄 알고 그를 대석비곡으로 데려갔다.

 

개방 방주 호면개 도금과 금릉삼로의 다른 두 노개는 범개선이 한 명의 어린 거지를 데리고 들어오자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런 다음 어린 거지의 근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는 양이(楊二)라 불리는 중년거지에게 막비강을 데려가 개방의 제반 의식과 규칙 등을 가르치게 했다.

막비강은 양이를 따라 방중의 선배 거지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는 도중 비석 아래의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폈다.

원래 이 대비석은 산봉의 암석을 깎아 만든 것이라 비석 밑 부분이 모두 암석이며 구멍은커녕 조그만 빈틈도 없었다. 이런 곳엔 도저히 비급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막비강은 청구단서가 틀림없이 비석 밑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청구단서를 찾을 수 있는 열쇠인 종이쪽지가 단호의 뚜껑 속에 그토록 은밀히 숨겨져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는 양이에게 하루종일 개방의 제반 의식을 배웠다. 하지만 고의로 우둔한 사람처럼 이것을 배우면 저것을 잊고 저것을 배우면 이것을 잊은 척했다.

화가 치민 양이는 혼자 나직이 투덜거렸다.

[범 장로께선 크게 실망하시겠구나. 네놈은 근골만 좋았지 기억력은 형편없으니 이래 가지고 무슨 무예를 배우겠느냐?]

 

* * *

어느덧 밤이 되었다. 그러자 곡내의 거지들이 분분히 밖으로 나갔다.

막비강은 곤혹을 금치 못하고 양이에게 물었다.

[밤에도 동냥을 하러 나갑니까?]

[모르면 주둥아리 닥치고 얌전히 있어라. 그들은 밖으로 나가 자칭 곡능천이라는 어린 망종을 잡기 위해 매복해야 한다.]

양이가 핀잔을 주었다.

[방주님도 어제 이곳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운 애송이 놈이 혈검산장에서 용모파기를 돌려 찾고 있는 망나니 아들놈이라는 것을 뒤늦게 아시고 포박하라 명을 내리신 것이다!]

막비강은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너희들의 계획도 고명하지만 나의 계책은 더욱 고명하다.)

그는 양이가 나가자 큰 포대를 두 장 끌어다 이불 대신 덮고 대비석의 큰 구멍 구석에 웅크리고 자는 척했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 덮여 대석비곡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비석 밑의 석동도 비록 양면으로 맞뚫려 있지만 손을 내밀면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때가 되었군!)

막비강은 살며시 포대자루를 젖히고 일어나 전신의 공력을 눈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사물이 희미하여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주먹만한 돌을 주워 석벽과 지면을 가볍게 두드려 속이 빈 곳이 있는지 조사했다.

그는 한 칸의 석실을 모두 두드려 본 다음 석벽에 몸을 바짝 붙여 다른 석실에 가서 수색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가 석면을 거의 모두 두드려 보았지만 속이 빈 현상의 소리는 나지 않았다.

별수없이 그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자루를 뒤집어쓰고 자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곰곰이 비급이 숨겨져 있을 만한 장소를 생각해 보았다.

돌연, 그는 이 비석 중앙의 큰 석동 우측 벽에 한 폭의 거대한 벽화가 새겨져 있는 것이 생각났다.

그곳의 좌측 벽에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노인의 좌상(坐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노인의 눈은 맞은편 벽화에 새겨져 있는 둥근 달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고개를 숙여 지면만 조사하느라 벽화는 자세히 보지 않았다.

(청구비급이 혹시 그 벽화의 둥근 달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자기의 추리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져 급히 벽화가 새겨진 석동으로 갔다. 그리고는 맞은편 벽에 그려진 둥근 달 부분을 두드려 보았다.

한동안 벽을 두드린 그는 여전히 실망을 금치 못했다. 벽화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막비강은 실망하며 벽화에서 물러서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

난데없이 석동 밖에서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들리지를 않는가?

휘이잉!

막비강이 흠칫하는 순간 한 줄기 강맹한 경풍이 휘감아 왔다.

파파팟!

막비강은 내심 크게 놀라며 급히 몸을 비틀어 석동 밖으로 날아 나왔다. 이어 양발을 힘껏 굴러 비교적 작은 비석 위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애송이놈! 어디로 달아나느냐?]

콰아아아!

말소리와 함께 한 줄기 광풍이 휘감아 왔다.

막비강은 쌍장에 전신의 공력을 주입시켜 상대방의 장세를 봉쇄했다.

퍼펑!

순간 우렁찬 음향이 울려 퍼지며 맞은편 비석 뒤에서 한 명의 거지가 뒤로 주르르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자는 바로 철 호법이었다.

[어엇!]

철 호법은 막비강의 강맹한 장력에 진탕되어 뒤로 후퇴하다가 허공을 밟아 비석 아래로 떨어졌다.

화르르르! 쐐애액!

그때 또 몇 개의 인영이 쏜살같이 막비강 쪽으로 날아왔다.

막비강은 급히 몸을 솟구쳐 최상의 경공신법을 전개하여 뒷산으로 질주해 갔다.

[어린 녀석아, 걸음을 멈추어라!]

헌데 막비강이 몸을 솟구쳤을 때 하나의 인영이 고함을 지르며 앞을 막아섰다.

[나를 막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

외마디 경악의 비명과 함께 그 사람은 삼 장 밖으로 날려 나갔다.

단 일장에 그 사람을 삼 장 밖으로 날려보낸 막비강은 곧장 뒷산을 향해 도주했다.

그러자 개방 방주 도금을 비롯한 금릉삼로, 철 호법 등 다섯 거지들은 일제히 그를 추격하며 고함을 질렀다.

[어린 녀석아, 너는 이제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으니 걸음을 멈추어라!]

그러나 막비강은 그들의 고함을 들은 체도 않고 계속 신법을 전개했다.

도금과 네 명의 노개들도 경공신법이 대단하고 또 이곳 지리를 잘 아는지라 쌍방의 거리가 점차 좁혀졌다.

(... 이런!)

막비강은 전력을 다해 도주하다 말고 갑자기 놀라며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 원래 전면의 삼 장 거리는 높이가 백 장이 넘는 낭떠러지였던 것이다.

콰아아아!

그 절벽 아래로는 양자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흐하하하! 네놈은 독 안에 든 쥐다!]

막비강이 걸음을 멈추자 다섯 명의 노개는 눈 깜빡할 사이에 가까이 추격하여 그의 일 장 거리에서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삼로 중 고죽개 학검성이 수중의 타구봉을 휘두르며 노성을 질렀다.

[어린놈아, 나는 오늘 네놈을 양자강의 고기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막비강은 이런 상황에서 다섯 명의 노개를 당해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에 모든 내막을 사실대로 말해 우선 이들과의 충돌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급히 옆으로 피하며 고함을 질렀다.

[할말이 있으니 잠깐 손을 멈추시오!]

학검성은 자신의 일격이 빗나가자 재차 공격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청풍개 범개선이 얼른 나서 제지시켰다.

[우선 그가 누구며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봅시다.]

범개선은 막비강을 제자로 삼기로 마음을 먹었었고 또 다른 노개들보다 마음이 인자하여 막비강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학검성의 행동을 제지시킨 것이다.

개방 방주인 호면개 도금도 범개선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는 우선 이 어린 녀석의 신분부터 알아봅시다.]

호면개 도금은 막비강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어린 녀석아, 너는 도대체 누구냐?]

막비강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는데 나는 그제 귀방의 분타를 찾아갔었던 곡능천입니다.]

다섯 노개는 이 말을 듣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 뭐라고? 네놈이 바로 곡능천, 아니 막비강이라고?]

[그렇습니다.]

[막비강은 얼굴이....]

막비강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것은 제가 역용술로 변장했기 때문입니다. , 보십시오.]

그가 손바닥에 양잿물 가루를 발라 얼굴을 문지르자 곧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섯 명의 노개는 막비강의 정교한 역용술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호면개 도금이 다시 물었다.

[네가 변장을 하여 본방의 본거지에 잠입한 의도는 무엇이냐?]

[그것은 청구상인께서 남기신 청구단서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섯 노개는 이 말을 듣고 경악과 격동의 빛을 금치 못했다.

[청구단서는 강호의 인물이면 누구나 얻고 싶어하는 무림기보인데 그것을 어찌하여 우리들 개방의 중지에 와서 찾느냐?]

[그 비급은 거대한 비석 밑에 있습니다. 거대한 비석이란 귀방의 분타가 위치한 그 비석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데도 거대한 비석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우리가 거주하는 분타의 비석 밑에 그런 비급이 숨겨져 있다고 단정했느냐?]

[방주께서도 소문을 들으셨겠지만 나는 이미 대강남북에 산재해 있는 비교적 큰 비석은 모두 파헤쳐 보았습니다. 하지만 청구단서는 고사하고 종이쪽지 한 장도 없었습니다.]

호면개 도금은 이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고? 그럼 근래 일어난 비석 도굴 사건이 모두 네 소행이었단 말이냐?]

막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점만 보아도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으므로 머지않아 이 소식이 강호에 퍼지고 그러면 귀방은 무서운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 테니 빨리 돌아가셔서 대책이나 상의하십시오.]

막비강의 말을 들은 호면개 도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은 죄가 없으나 구슬을 지닌 것이 죄가 된다더니... 이 일을 어떻게 하지?]

듣고 있던 학검성이 타구봉을 휘두르며 앞으로 뛰어나왔다.

[이놈! 쓸데없는 헛소문을 퍼뜨려 우리에게 화를 전가시키지 마라! 우리는 대석비곡에 수십 년을 거주했지만 비급따위는 보지 못했다.]

호면개 도금은 학검성의 이 말이 대석비곡의 안전을 위한 것임을 눈치챘다.

그 역시 막비강을 죽이진 않더라도 생포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타구봉을 휘두르며 막비강을 공격했다.

그러자 나머지 노개들도 공격에 가담했다. 범개선은 비록 마음이 비교적 자상했지만 방주가 출수한 이상 그도 자연히 수수방관을 할 수 없었다.

[이 염치없는 늙은이들이...!]

막비강은 다섯 거지가 합공을 가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노성을 지르며 쌍장으로 단숨에 십여 장을 격출했다. 격노한 나머지 출수했는지라 그의 장세의 강맹하기가 산악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개방의 타구봉법은 절묘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방주인 호면개 도금이 펼쳐내니 그 위력은 더욱 강맹하여 막비강으로서도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점차 막비강은 낭떠러지 쪽으로 밀려갔다. 낭떠러지의 높이는 백 장이 넘고 그 밑은 양자강물이 도도히 흐르며 괴석이 즐비하여 떨어지면 목숨이 열 개라도 뼈를 찾기 어려울 실정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손을 멈추어라!]

돌연 낭떠러지 옆에서 하나의 인영이 솟구치며 날카롭게 외쳤다.

쏴아아아!

외침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장풍이 다섯 명의 노개에게 휘감아 갔다.

[!]

[... 당신은...!]

다섯 명의 노개는 나타난 사람을 보더니 경악의 함성을 터트렸다.

이어 그들은 사력을 다해 왔던 길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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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이진진; [무림맹주의 따님이 어머니에게 맡긴 임무란 게 무엇이었나요?]

진삼낭; [그건...] 말하려 할 때. + 이산하; <꽉 잡으시오.> 마부석 쪽에서 이산하의 말이 들리고

[!] [!] 놀라고 긴장하며 마차 안의 손잡이를 잡는 진삼낭과 이진진

 

#114>

안개 낀 강가의 길에 서성이고 있는 건달들. , , 검 등의 무기를 지녔다. 숫자는 네 명이고. 단지회 소속이 아니라 다른 조직이라 옷이 좀 다르다.

건달들; [젠장! 신 새벽부터 이게 무슨 개고생인가?] [지금쯤 춘향이 년을 끼고 단잠에 빠져있었어야 했는데...] 추워서 웅크린 채 궁시렁대는 건달들

건달들; [단지회 놈들이 급히 도움을 요청하니 생 깔 수도 없었어.] [공생하려면 그놈들이 아쉬운 소리 할 때 도와야만 해.] [상해가 거점인 우리 악어방(鰐魚幇)이 금릉에서 밀려나지 않고 있는 건 단지회의 도움 덕분이니...] 다른 놈들이 궁시렁 대는 놈들 설득하고.

건달들; [그런데 단지회에서 쫓고 있는 것들은 무슨 물건들이지?] [전서구까지 날려서 수색 요청을 한 걸 보면 짭짤하게 돈이 되는 물건들일 텐데...] 말하다가 흠칫하는 건달들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가 안개 속에서 들리고

건달들; [마차가 다가온다!] 일제히 돌아보는 건달들. 안개 속에서 말 한 마리가 끄는 마차가 천천히 다가온다. 무론 이산하가 모는 마차다

건달들; [멈춰라!] [이 새벽에 어디 가는 거냐?] 무기를 뽑으며 길을 막는 건달들

이산하; [왜들 이러시오?] 다가오는 마차 마부석에서 짐짓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하고. 마차를 몰고 오면서

건달들; [마차 안을 좀 보자.] [우리가 찾는 물건이 없으면 그냥 보내줄 테니 너무 겁먹진 마라.] 다가오고

이산하; [... 단양으로 아침 장사를 하러 가는 길이오.] [지체하면 안되니 제발 그냥 보내주시오.] 비굴하게 애원하고

건달들; [잠깐이면 된다.] [안을 한번만 살펴보고 가게 해주마!] 두 놈이 마차로 다가와 문을 열려 하고. 두 놈은 앞을 막고 있고. 바로 그 순간

이산하; [끼랴!] 철석! 말 엉덩이를 채찍으로 세차게 때리고. 그러자

히히힝! 비명 지르는 말

콰드드!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는 말

[!] [어이쿠!] 비명 지르며 나자빠지고 피하는 건달들. 마차 앞쪽에 서있던 놈들은 치일 뻔 했다

두두두! 나뒹굴었던 건달들이 보는 가운데 맹렬히 달려가는 마차.

[저 마차다!] [단지회에서 찾는 물건들이 저 마차를 타고 있다.] 급히 일어나는 건달들. 이어

삐익! ! 호각을 불며 마차를 따라 달려가는 건달들. 건달들은 무공이 대단하지 않아서 날아가는 게 아니라 그냥 달려간다.

 

#115>

두두두! 안개에 덮인 강가의 길을 맹렬히 달려가는 마차.

마차 안에서는 진삼낭과 이진진이 손잡이를 잡고 있지만 몸이 마구 흔들리고

삐익! ! 뒤에서 다급한 호각소리가 들리고

이진진; [... 엄마!] 겁에 질리고

진삼낭; (행적이 발각되었다.) 입술 깨물고.

진삼낭; (단지회의 파락호들이 전서구를 날려 다른 흑사회 조직들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진삼낭; (이대로 가면 단지회나 단지회에 협력하는 조직들에게 따라잡히고 만다.) 초조하고. 그때

<이야기 좀 합시다 진진엄마!> 마부석 쪽에서 들리는 이산하의 말

진삼낭; [말씀하세요.] 드륵! 마부석쪽으로 난 쪽문으로 다가가 열며 말하고

이산하; [행적이 들통 난 이상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요.] 마부석에서 마차 안을 들여다보며 말하고

진삼낭; [마차를... 버려야겠군요.] 입술 깨물고

이산하; [그것도 상책은 아니오.] 고개 젓고

이산하; [허약한 진진이에다가 다리가 불편한 나까지 마차를 버리면 오히려 더 쉽게 따라잡힐 거요.]

진삼낭; [혹시...] 무언가 깨닫고 눈 치뜨고

이산하; [내가 마차를 몰고 놈들을 유인하겠소.] [당신은 진진이를 데리고 다른 길로 가시오.] 끄덕. 비장한 표정

이진진; [안돼요 아버지!] 비명 지르고

이진진; [미끼가 되셨다간 금새 따라잡힐 거예요.] 애원하지만

이산하; [미안하구나 진진아. 아비가 미끼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구나.] 웃으며 고개 젓고

이진진; [아버지...] 눈물

진삼낭; [그렇게 해요.] 단호하게

이진진; [어머니!] 비명 지르며 돌아보고

진삼낭; [최대한 멀리 놈들을 유인하시되... 적당한 곳에서 당신도 마차를 버리고 몸을 숨기세요.] 목이 메어 말을 잘 못하고

이산하; [그리 하겠소.] 억지로 웃고

이진진; [안돼요 아버지! 생각해보면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마부석으로 다가앉으며 울지만

이산하; [엄마 말 잘 들어라 아가야.] 손으로 이진진의 뺨을 다독이며 웃고

이진진; [아버지...] 말을 잇지 못하며 울고

이산하; [그동안 미안했소.] [진진이를 잘 부탁하오.]

이진진; (작별... 작별 인사야!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으로 입 가리며 울고

진삼낭; [진진이는... 걱정 마시고... 부디 무리 하지 마세요.] 억지로 웃고

이산하; [명심하리다.] 다시 앞을 보려는데

진삼낭; [여보...] 다시 부르고

이산하; [말씀하시오.] 다시 돌아보고

진삼낭; [십팔 년 전 처음 만난 이래... 당신께는 은혜만 입었어요.] 무릎을 꿇고

이진진; (... 무슨 말씀이시지?) 놀라고

이진진; (십팔 년 전에 처음 만나셨는데 어떻게 열여덟 살이 넘은 아들이 있을 수가...) + [!] 생각하다가 깨닫고

이진진; (청풍오빠는 두 분의 소생이 아니었던 거야!) 경악할 때

진삼낭; [당신에게 진 빚은 다음 생에서 반드시 갚도록 하겠어요.] 절하고

이산하; [아니오. 아니오 부인!] 웃으며 고개 젓고. 눈시울이 붉어졌고

이산하; [빚이라면 내가 당신에게 진 것이 몇 배, 몇 십 배 더 많소.] [비천한 나를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준 것도 당신이었고...] 울며 웃고

이산하; [골백번 고쳐 태어나서라도 당신에게 입은 은혜를 갚도록 하겠소.]

말없이 우는 진삼낭. 이진진도 울고

이산하; [곧 앞쪽에 모퉁이가 나올 거요.] 앞을 보며 말하고

이산하; [속도를 줄일 테니 진진이와 함께 내리도록 하시오.] 두두두! 고삐를 당겨서 말의 달리는 속도를 줄이게 하고

마차를 밖에서 본 모습. 강변의 모퉁이길을 돌면서 속도를 줄이는 마차. 모퉁이 길 옆에는 관목이 무성하고

덜컹!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손으로는 마차의 문을 연 진삼낭이 다른쪽 팔로 이진진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무릎을 꿇고 있다.

이산하; [지금이오!] 모퉁이를 돌며 최대한 속도를 줄이고. 직후

! 이진진을 겨드랑이에 끼고 마차에서 밖으로 날아 나오는 진삼낭

콰직! 휘릭! 관목을 뚫고 내려서는 진삼낭

두두두! 멀어지는 마차

이진진; (아버지!) 관목 숲에 진삼낭과 함께 숨으며 멀어지는 마차 쪽으로 무릎을 꿇고

이진진; (부디 천지신명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빌겠어요.) 절하며 울고. 그 옆에 진삼낭도 무릎 꿇은 채 말없이 마차가 멀어진 쪽을 보고. 직후

타타타!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흠칫! 하며 몸을 숙이는 진삼낭

[젠장할! 잡히기만 해봐라!] [각을 떠버리겠다 개잡종아!] 헉헉 대며 길을 달려오는 네 명의 건달들. 삐익! ! 호각을 부는 놈들도 있고

타타탁! 진삼낭 모녀가 숨은 관목 숲을 지나 마차가 달려간 곳으로 달려가는 건달들

진삼낭; [가자!] 이진진의 팔을 잡고 일어나고

진삼낭; [가능한 길에서 멀리 떨어진 채 단양으로 접근해야한다. 힘들더라도 참거라.] 관목 숲을 헤치고 가며 말하고

이진진; [...] 따라가고

진삼낭; (걱정마세요 여보. 우리 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테니...) 이진진을 끌고 관목 숲으로 들어가는 진삼낭의 얼굴로 눈물이 흐른다.

 

#116>

아침. 해가 떴다. 강변의 길.

그곳으로 달려오는 다섯 명의 건달들. 맨 뒤에 청풍이 비틀거리며 달려온다.

청풍은 지칠 대로 지친 모습. 한손으로는 옆구리를 잡고 달린다.

옆구리를 잡은 손이 피로 물들었고.

옆구리뿐 아니라 입고 있는 옷에 여기저기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상처가 벌어져서 피가 나오는 것

[저 새끼 왜 저렇게 빌빌 거려?] 한 놈이 뒤를 돌아보며 오만상. 역시 지쳐서 숨이 턱에 찬 모습이다

건달들; [... 지칠만도 하지. 벌써 오십 여리를 쉬지 않고 달려왔잖아.] [니미 이게 대체 뭔 고생인지 원...]

건달들; [그런데 저 놈 못 보던 얼굴이구만.] [뭐 근래 우리 단지회에 가입한 신입이겠지.] [나이도 어려보이는 걸 보면 최근에 들어온 놈이 맞을 거야.]

건달들; [야 이 새끼야! 못 따라오면 두고 간다.] [흑사회에서 밥 벌어먹고 살려면 근성을 보여!] 외치며 달려가고

먼저 가라고 손짓하며 비틀거리며 달리는 청풍

건달들; [그래도 기특하구만. 주저앉지 않는 걸 보면...] [그 정도 근성 없으면 거칠고 험한 흑사회에서 버티지 못하지.] 다시 달리는 건달들.

청풍; (사우라는 자와의 싸움과 황금전장에서 당한 고문으로 생긴 상처가 벌어지고 있다.) 헉헉 숨이 턱에 닿고

청풍; (허기진 데다가 출혈까지 심해서 정신이 혼미해진다.) 비틀비틀

청풍; (하지만 주저앉으면 안된다. 어떻게든 어머니와 진진이의 안전을 확인해야하니...) 생각할 때

<끄아아악!> 앞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린다.

깜짝 놀라는 건달들과 청풍

<끄으윽!> 앞쪽은 한 굽이 도는 모퉁이이고 근처에는 제법 높은 산이 있다. 비명은 그 모퉁이 너머에서 들리고

청풍; (... 비명 소리가 귀에 익다. 설마...) 비틀거리며 달려가고. 건달들도 속도를 내서 달려가고 있고

곧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지는 건달들

[!] 헐떡이며 모퉁이를 돌던 청풍의 눈 부릅

! 모퉁이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만행. 마차가 길가에 옆으로 나뒹굴고 있고. 말도 죽어서 쓰러져 있다. 헌데 마차의 바닥에 어떤 사람이 두 팔이 벌린 채 무릎을 꿇고 있다. 벌린 두 팔의 손목에는 검이 박혀있다. 그 검에 의해 몸뚱이가 마차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그 사람은 바로 이산하. 고개 떨구고 있고. 상체의 옷은 갈갈이 찢겨 있는데 이미 고문을 심하게 당해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이산하의 앞에는 사우와 정필과 몇 명의 건달들이 서있다. 고문하는 것은 사우다. 칼로 이산하의 배를 찌르고 있다. 배가 갈라져 창자가 흘러내리고 있고

이산하의 모습 크로즈 업

청풍; (... 아버지!) 경악과 충격으로 비틀. 그 앞쪽에서는 청풍이 따라온 다섯 명의 건달들이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청풍

이산하의 처참한 모습

청풍; (... 안돼!) 이를 갈며 기어가려는 청풍.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설 수가 없다.

 

#117>

고문이 이루어지는 현장. 사우가 칼을 이산하의 배에 찌르고 휘젓고 있는 중이다

사우; [어떠냐? 쇠 맛이 느껴지지?] 웃고

사우; [입으로 먹어서 느끼는 쇠 맛보다 창자로 직접 느끼는 쇠 맛이 더 확실할 것이다.] 변태처럼 웃고

이산하; [끄윽...] 고통에 몸부림치고

사우; [마누라와 딸년을 어디로 빼돌렸는지만 말해라. 그럼 이 고통을 끝내줄 테니...] 칼을 돌리며 협박하지만

이산하; [... 수작... 마라!] ! 침을 뱉으며 헐떡이다가

! 고개 떨구며 기절하는 이산하

사우; [끈기가 없는 놈이로구만. 일각도 못 버티고 기절하다니...] ! 혀를 차며 칼을 이산하의 배에서 뽑고.

정필이 다가가서 이산하의 목을 만져보고

사우; [죽진 않았지?] 칼을 옆에 서있는 건달에게 건네주며 정필에게 묻고

정필; [. 아직 숨은 붙어있습니다.]

사우; [그럼 넌 여기 남아서 그놈 입을 열도록 노력해봐라.] 돌아서고

정필; [회주님은?]

사우; [그놈의 마누라와 딸년이 어디로 튈지 짐작이 가는 곳이 있다.] [본좌는 그쪽으로 가볼 테니 넌 여길 맡아라.] ! 날아가고

정필; [맡겨주십시오 회주님!] 포권하고

정필; [너희들도 회주님을 따라가라. 여긴 나와 저기 오는 놈들이 맡겠다.] 현장으로 달려오는 다섯 놈을 보며 함께 있던 놈들에게 말하고.

[예 총관님!] [가자!] 사우가 달려가는 곳으로 달려가는 현장에 있던 건달들

 

#118>

길가 산 위에 서서 현장을 보고 있는 여자. 소수마녀.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 서있어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띠지 않는데

소수마녀의 시점. 넘어진 마차 앞에 서있는 정필. 그놈에게 달려오며 굽신거리는 건달들

달려오는 건달들의 인사를 받으며 끄덕이는 정필. 정필 앞에는 만신창이가 된 이산하가 마차 바닥에 두 팔이 벌린 채 박혀있고

소수마녀; (결국 아비가 희생을 했구나.)

소수마녀; (자신이 진 도박 빚 때문에 사창가로 팔려갈 딸을 구하려다가 죽음을 맞이한 아비...) (통속적이지만 비장한 결말이로구나.)

소수마녀; (못난 아비였지만 마지막에는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한 셈인데...) (어떤 계집인지 모르지만 저런 아비를 둔 년이 부럽긴 하구나.) 돌아서고. 그러다가

[!] 흠칫! 하며 다시 돌아보는 소수마녀

마차 앞에서 부하들에게 뭔가를 말하는 정필. 굽신거리는 부하들. 그곳으로 다가오는 청풍. 비틀거리며 다가온다

소수마녀; (뒤에 쳐졌던 저 놈...) 눈 번뜩이고

<무공은 익히지 않은 것같은데 일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느껴진다.> 쿠오오! 비틀거리며 다가가는 청풍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치솟는 모습 배경으로 소수마녀의 생각 나레이션

소수마녀;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인간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지독한 살기다!) 오싹! 소름이 돋고 숨이 멎은 듯한 표정이 되는 소수마녀

소수마녀; (소름...) 자신의 떨리는 하얀 손을 보고

소수마녀; (가주님조차 날 이렇게 전율하게 만든 적이 없었다.)

소수마녀; (틀림없다!) 다시 현장을 돌아보고. 청풍은 이제 현장에 거의 다 도착했다.

<저 놈은 한 세대에 한 명만이 나온다는 천살성(天殺星)이다!> 칼을 뽑으며 현장으로 가는 청풍의 모습 배경으로 소수마녀의 생각 나레이션. 청풍의 눈을 출혈되어 있고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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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천록여의 (3)

 

 

 

삼경이 넘은 시각에 계명사는 초파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향유가 든 연화등(蓮花燈)들이 줄지어 밝혀져 불야성을 이루었다.

승려들은 활몽루가 사라진 앞에서 무릎이 얼어터지는 줄도 모르고 한 여름철 개구리떼가 왕왕 거리는 것처럼 불경을 목청 껏 읊어댄다.

그리고 개구리 울음 소리 속에 섞여 들려오는 찌르레기 소리처럼 가날픈 퉁소소리가 현무호 호반에 흐른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계명사 상공에서 푸른빛이 번득이더니 천둥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노오옴!!!

 

중들이 놀라 목탁을 집어던지고 엎드린다.

[부처님께서 노하셨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그러나 이내 빛도 사라지고 고함소리도 정적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푸른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가 포물선을 그리며 호수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중들도 보고 행여 부처님을 볼세라 밤늦게 달려왔던 열성신도들도 눈을 말똥말똥하며 보았다.

늙은 도사는 개구쟁이가 던진 돌멩이처럼 날아가 호수에 약간 큰 퐁당소리를 내며 빼지고 말았다.

중생들의 시선과 늙고 젊은 중들의 시선이 계명사 주지 과우(寡雨)대사에게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

과우대사는 억지로 뚱뚱한 몸을 비틀거리며 쓰러지며 한마디 했다.

[! 불조께서 임하신 이 뜻을 누가 감히 알리오!]

제자들이 달려들어 팔다리를 주무르고 입가로 찬물을 흘려 넣어 준다.

과우대사는 속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제자들이나 신도들은 무슨 징조냐고 자기에게 물으면 그만이지만 자기는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석가모니는 입이 없었다고 적혀있지 않으니 말할 수 있었겠지만 대웅전 법당속의 부처는 만들 때 잘못 만들었는지 칠십 년 동안 지켜봤지만 한 번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과우대사는 내심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라 동정하기도 하지만 이럴 땐 난감하기만 하다.

금도금을 입혀놨으니 아무리 말 잘하던 입이었다 해도 어디 벙긋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욕을 해도 그만 절을 해도 그만 그저 한결같이 억지 미소만 짓고 있을 도리밖에.

 

***

 

계명사의 요란하던 벼락 법회는 연화등이 하나하나 꺼져가면서 조용히 끝나고 있었다.

삘릴리...!

호반에 흐르는 퉁소소리가 야반 삼경의 그윽한 정취를 더하고, 물가로 밀려온 달이 하늘 비좁음을 아쉬워한다.

호수 가운데 있는 섬에 있는 정자에는 자기 그림자를 물에 비추며 흰옷을 입은 소년이 백룡이 아로새겨진 백금퉁소를 입에 물었고, 백금퉁소는 뼈마디가 시큰거리는 애절한 곡을 꼬리에 달고 있다.

추웃!

진양진인은 정자 앞의 물가에서 일어났다.

옷이 흠뻑 젖었다.

몹시 지치고 피곤한 듯 두 손을 휘저으며 겨우 정자로 걸어갔다.

오장육부가 다 뒤집혀 버렸는지 진기가 안정되지 않고 우왕좌왕한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동서남북도 거의 가릴 수가 없다.

진양진인은 귀에 익숙한 퉁소소리에 이끌려 정자까지 와서는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

퉁소소리가 그치고 진양진인의 머리 옆에 한 사람의 발이 나타났다.

진양진인은 지쳐버려 누군지 쳐다볼 엄두도 나지 않아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제발 노도를 그냥 내버려두게. 제발... ]

[하하하! 도장(道長)은 내 소리에 걸려든 물고기입니다.]

웃음기 섞인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진양진인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보통사람이라면 몇 번 죽었을 중상을 입고 차가운 호수 물속에 한 참이나 있었으니 그의 노구가 견뎌내지 못한 것이었다.

무당파의 비전절학(秘傳絶學)인 양의신공(兩儀神功)을 익히고 있었기에 그나마 숨이라도 끊이지 않고 쉴 수 있는 형편이다.

진양진인은 실오라기만큼만 진기를 모아도 방해자를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기해혈은 텅빈 표주박같아서 어떤 기운도 끌어올릴 수가 없다.

눈앞이 캄캄한데 몸이 공중에 들렸다.

(노도의 질긴 목숨이 기어코 오늘의 액겁을 피하지 못하고 죽는구나!)

진양진인은 왠지 개운한 것 같으면서도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그를 두 손으로 안아든 백의소년이 정자 밖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도장께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우화등선(羽化登仙)하시고 싶더라도 잠시 참아주십시오.]

진양진인은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노도는 매 매우 춥다네.]

[곧 불을 피워 드리겠습니다.]

진양진인은 의식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

 

---꼬끼오! 꼬끼오!

---왕왕왕! 왕왕왕!

 

새벽 닭 우는 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진양진인을 깨웠다.

타탁! 타탁!

장작 타는 소리와 매운 연기 내음이 함께 몰려온다.

눈은 떴지만 노곤하여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천장은 낮고 입구는 좁은 동굴 속이다.

연기가 앞으로 잘 빠져 나가는 것도 아닌데 모닥불이 꺼지지 않은 채 용케 타오른다.

진양진인은 공기가 뒤로 흐르는 것을 보고 그 동굴이 꽤 깊은 곳이라는 걸 알았다.

고른 숨소리가 모닥불 맞은 편에서 들린다.

진양진인은 암암리에 양의신공을 운용해 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전신의 혈맥을 개미가 물어뜯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혼자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고 만 것이다.

억지로 기혈을 통하게 하려다간 오히려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다.

진양진인은 모닥불 건너편의 숨소리를 다시 확인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를 잡아온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공력이 정심하지는 않구나. 범을 피했는가 했더니 겨우 개구리에 물려 죽을 지경이 되다니...)

그는 마음으로 자기의 속을 들여다보면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곱아보기 시작했다.

열 개의 손가락이 다 곱혔다가 펼쳐진 후 다시 네 개가 곱혔다.

진양진인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뒤엉킨 기혈을 뚫지 못한다면 남이 애써 죽이지 않더라도 앞으로 살 수 있는 건 스무 나흘에 불과하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도 동료를 찾아 도움을 받는 수 밖에 없는데, 그 또한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자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자가 깨어나면 상황이 또 어찌 변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양진인은 살아온 일백삼십여 년의 세월을 통해서 이럴 때일수록 상황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정말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얼핏 본 백의소년의 모습을 생각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시주는 철인련맹(哲人聯盟)에 속해있는가 아니면 환우회(寰宇會) 사람인가?]

잠든 줄 알았는데 즉시 대답이 들려왔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사람입니다.]

진양진인은 그가 누구든 간에 그 음성에 적의(敵意)가 없다는 걸 느꼈다.

다시 말했다.

[노도는 육십 년 전에 무림을 떠난 사람이니 아는 것이 별반 없네. 어떤 것을 물으려 하는가?]

모닥불 건너편에 있던 소년이 진양진인의 옆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흰 비단옷을 입었고 붉은 색 띠를 둘러 머리를 묶은 소년이다.

소년이 말했다.

[저는 현무호에 놀러 나왔다가 도장께서 퉁소를 부는 것도 봤고 활몽루를 사라지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양진인은 말했다.

[퉁소는 소협도 불지 않았는가? 노도는 정신이 희미한 중에도 소협의 퉁소 소리에 이끌렸던 것으로 기억하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도장께선 제가 꾸민 천록여의(天祿如意)의 첫 번째 제물입니다.]

진양진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천록여의라... 뜻하는 대로의 행복이란 말인가 아니면 소협의 이름이 천록이고 뜻대로 되었다는 말인가?]

소년이 감탄하며 말했다.

[두번째 뜻이 맞습니다. 제 이름이 바로 현천록이고 도장께선 제 낚시에 걸려던 물고기지요.]

진양진인이 물었다.

[그 낚시가 퉁소고 미끼는 애상곡이었는가?]

진양진인은 의식이 거의 없었던 상태에서의 일이었지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저는 이제 도장의 애상곡은 흉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활몽루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군요.]

진양진인이 차분한 눈으로 현천록을 응시했다.

현천록의 눈은 맑고 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진양진인은 스스로 위엄을 갖추어 현천록을 압도하고자 했지만 현천록의 마음에는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었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을 보면 볼수록 혼란스러워 졌다.

처음에는 이런 짐작 저런 짐작 다해보았지만 정작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진양진인은 곰곰히 생각했다.

(이 아이는 내가 창허진인을 활몽루에 가두는 것을 보고도 오히려 퉁소로 내가 불던 애상곡을 부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내력을 쌓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철인련맹의 늙은이들이라면 내력을 감추거나 아예 처음부터 없는 자들도 있다지만 나이로 봐서 철인련맹의 철인(哲人)일 리도 없다. 환우회에서 무공이 없는 아이를 보낼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다. 내가 무당의 진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데 이렇듯 대하는 걸 보면 또...)

아무런 결론도 나오지 않는다.

무엇하나 확신할 수 조차 없다.

한데 그의 갑자기 머리 속으로 한줄기 섬광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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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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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가짜 의성(醫聖)이 준 기연

 

 

 

보름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그동안 막비강은 남산의성 악불령으로부터 제대로 된 운기토납법(運氣吐納法)을 전수 받아 내공의 기초를 튼튼하게 이루게 되었다. 역시 혼자 깨우치는 것과 좋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사실 소리장도 강용이 주고 간 기공입문법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태청정명운기법(太淸淨命運氣法)이 본래 명칭인데 이것은 도가에서 오래 전에 실전한 비전 중의 비전이다.

태청정명운기법을 깊이 깨우치면 모든 심마(心魔)를 물리치고 번뇌(煩惱)를 소멸하여 다른 무공의 습득을 몇 배 빠르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문도가의 비전이라 소리장도 강용같이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에게는 전혀 쓰임이 없다. 애초에 태청정명운기법의 이치를 깨우칠 바탕이 못 되기 때문이다.

강용은 이 절세의 비전을 오래 전에 얻어 지니고 있었음에도 거의 아무런 성취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강용은 막비강의 환심을 사려고 남산의성 악불령의 약전과 함께 준 것인데 이번에는 비급도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태청정명운기법을 깨우친 막비강은 시야가 확 트여 지금까지 깨우치지 못했던 무학의 이론을 단번에 깨닫게 된 것이다.

남산의성은 막비강이 예상보다 빨리 내공심법의 기초를 확립하자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각가지 의술과 해독술, 그리고 기문진법과 약물로 용모와 음성을 바꾸는 방법등도 가르쳐 주었다.

소리장도 강용이 막비강에게 주었던 역용환도 사실 남산의성의 것이었다. 그자는 훔친 것으로 생색을 내려고 했던 것이다.

 

막비강과 남산의성 악불령 사이에 사제지간의 명분은 없다.

하지만 악불령은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깨우치는 막비강의 빼어난 자질과 성취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강아! 지금까지의 네 무공도 보통 고수에게는 전혀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제 기연으로 태청정명운기법까지 깨우쳤으니 장래 너의 무공방면의 성취는 누구보다도 빠른 진보가 있을 것이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노부는 강용이 무덤을 도굴하다 죽는 것을 구경하러 가야겠으니 이만 헤어지자꾸나. 대신 네게 백독(白毒)을 피할 수 있는 천오주(天蜈珠)를 한 알 주겠다. 그럼 인연이 있으면 다음에 또 만나자.]

막비강은 헤어지는 것이 매우 섭섭했지만 자기 혼자 단독으로 청구단서를 찾아야 하므로 할 수 없이 남산의성 악불령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

 

다시 가을이 되었다. 막비강이 혈검산장을 본의 아니게 뛰쳐나와 강호를 돌아다니기를 어언 일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 일년 동안 막비강은 세상에 알려진 큰 묘비라면 거의 모두 찾아가 파헤쳤다. 심지어는 장안(長安) 대안탑(大雁塔) 옆의 고비(古碑), 낙양(洛陽) 망산(邙山)의 황릉(皇陵) 등 파헤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헛수고만 했으며 비급은커녕 비급 닮은 것도 없었다.

그는 내심 의혹을 느끼기 시작했다.

(혹시 큰 비석이란 어떤 곳의 지명이 아닐까?)

만약 큰 비석이란 것이 실제 비석이 아니라 어딘가의 지명이라면 막비강은 지난 일년의 세월을 괜히 무덤만 파헤치며 보낸 결과가 된다.

그나마 그는 일년 동안 쉬지 않고 무예를 연마하여 내공, 장력, 검법 등이 크게 증진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산간에서 지냈기 때문에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이 남긴 은자와 진주를 사용하지 않고 절약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

 

낙양에서 가장 큰 주루인 회빈루(會賓樓)는 오늘도 많은 주객들로 왁자하니 시끄러웠다.

이 회빈루의 한쪽 구석에는 아직 약관이 안된 미목이 청수하며 붉은 경장을 입은 소년이 홀로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들어 보시오! 나는 이번에 표물을 강남에 호송하고 오던 도중에 한 가지 기이한 소문을 들었소.]

문득 한쪽 자리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음성이 말했다.

[무슨 소식인지 말해 보시오.]

다른 사람이 재촉하자 처음에 말을 연 사람은 신이 나서 떠벌렸다.

[천하에 위명이 쟁쟁한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의 세 가주들이 얼마 전 갑자기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청구단서를 찾기 위해 조상의 묘를 파헤쳤다더군요.]

[그래, 비급은 찾았답니까?]

[찾았으면야 무슨 말이 있겠소? 그들은 조상의 유골까지 휘적이며 보름간 소란을 피웠는데 결국 어떤 노인이 나타나 무슨 말을 한마디하니 다시 무덤을 원상 복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더군요.]

[핫하하...!]

주객들은 이 말을 듣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 일이 비록 괴이하지만 근래 이 주위에서 발생한 일보다는 이상하지 않소.]

[이곳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소?]

[낙양에서 멀지 않은 북망산 일대에 있는 오래된 무덤의 묘비 중 비교적 큰 묘비는 모두 파헤쳐져 있었소.]

[묘비를 훔쳐 팔아 돈을 벌려는 좀도둑의 소행인가 보군.]

[아니오. 흔적으로 보아 그 묘비들은 넘어뜨렸다가 다시 원래대로 세워 두었소. 아마 그 사람은 미치광이가 틀림없을 것이오.]

[이건 정말 이상하군요.]

[만약 그것이 한 사람의 소행이라면 그 사람은 장사임이 분명하오. 고묘의 묘비는 무게가 적어도 이삼천 근이 되어 한 사람이 그것을 넘어뜨리기도 힘들 텐데 다시 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오.]

[혹시 그 사람은 무슨 물건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태평성대에 갑자기 이런 기이한 일이 발생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군.]

[큰 비석, 대묘비라! 그렇지! 금릉(金陵) 묘화문(妙化門) 밖의 대석비곡(大石碑谷)에 있는 비석은 무게가 십만 근도 넘는데 그자가 왜 그 비석은 파헤치지 않지요?]

순간 주루 구석 자리에 앉아 자작하던 소년이 갑자기 눈을 번뜩 떴다.

(오호라, 그런 곳에 또 큰 비석이 있었구나! 가르쳐 줘서 고맙소!)

그때 옆 좌석에 앉은 강호 인물 중 한사람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육 형(陸兄)은 허풍을 그만 떠시오! 세상에 그렇게 무거운 비석이 어디 있소?]

[나는 금릉 사람인데 왜 모르겠소?]

처음 말한 사람이 즉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 비석은 높이가 십 장이 넘고 넓이는 삼사 장이 되며 두께만도 일 장 가량이나 되오. 그 외에 석향로(石香爐)와 석촉대(石燭臺)도 있는데 그 높이가 이층집 가량이나 되오.]

[웃기지 마시오! 그런 큰 비석이 어디 있단 말이오!]

[못 믿겠으면 직접 가 보면 알 게 아니오. 전설에 의하면 큰 비석은 송나라 때 유백온(劉伯溫)이 우수선(宇手善)의 반란이 두려워 태조(太祖)에게 상소하여 비석으로 진압시켜 나라를 평온하게 하자고 했다더군요. 그런데 조각을 끝낸 후 그 비석이 너무 크고 무거워 옮길 수가 없어 지금도 묘화문과 기린문(麒鱗門) 사이의 계곡에 세워 두어 금릉의 고적(古蹟)이 된 것이오.]

(거짓말은 아닌 듯하구나!)

자작자음하고 있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막비강이었다.

그는 그토록 큰 비석이 있다는 얘기를 듣자 곧 계산을 하고 주루에서 나와 곧장 금릉으로 향했다.

 

***

 

열흘 후, 낙양을 떠난 막비강은 금릉에 도착하여 예의 거대한 비석이 있다는 대석비곡을 찾아갔다.

과연 그곳의 비석은 들은 바대로 거대하기 짝이 없었다. 높이가 무려 십 장이 넘는 그 비석은 밑 부분이 아직 땅속의 산석(山石)과 맞붙어 있는데 바위와 붙어있는 비석 아랫부분에는 몇 개의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는 구멍마다 남루한 행색의 거지 떼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개방(丐幇)의 화자(化子;거지)들이었다.

우글거리는 거지떼를 본 막비강은 난감해졌다.

(이래서야 뭘 찾고 어쩌고 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되는군!)

잠시 궁리를 하던 그는 곧 한 웅큼의 은자를 꺼내 들고 거지 떼에게로 다가갔다.

[이 은자를 당신들에게 줄 테니 이곳을 내게 사흘간만 빌려주시오.]

[뭐야? 꼭지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 와서 남의 기업을 가로채려느냐?]

그러자 돌연 거지들 중 인상이 험악한 놈이 구멍 속에서 뛰어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다짜고짜 욕이 날아오자 막비강도 불끈 화가 치밀었다.

[당신들을 강제로 쫓아내려는 게 아니오! 생각이 있으면 사흘간만 빌려주고 싫으면 그만이지 왜 욕을 하시오?]

하지만 흉악한 인상의 거지는 더욱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이 갈보 새끼야! 내가 네놈에게 욕을 해서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 여길 빌리고 싶으면 니 에미 구멍부터 먼저 나한테 빌려다오!]

그자의 원색적인 욕지거리에 다른 거지들이 왁자하니 웃는다.

순간 막비강은 왈칵 화가 치밀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아닌 다른 사내에게 납치 당해 몸을 더럽힌 것을 아는 그인지라 이같은 욕은 참을 수 없는 심한 것이었다.

[어디서 더러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막비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휘둘렀다.

철썩!

[어이쿠! 나 죽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거지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자의 뺨은 당장 시뻘겋게 부풀어 오르고 터진 입안에선 피와 부러진 이빨이 흘러나온다.

[저놈이 사람을 팬다!]

[치도곤을 내라!]

순간 구멍 속의 거지들이 일제히 뛰쳐나오며 아우성을 쳤다.

(! 귀찮게 되었군!)

막비강은 삽시에 수많은 거지 떼에게 에워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물론 그가 개방의 거지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었다.

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개방은 명실상부한 천하제일 방파였다. 하지만 오십 년 전, 개방은 내분으로 인해 남북(南北)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장문인 승계에 불만을 품은 궁신(窮神) 여불초(餘不草)라는 자가 개방의 무리 대부분을 이끌고 강북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궁가방(窮家幇)이란 방파를 연 것이다.

그후 강북의 궁가방은 나날이 성세가 불어나 지금은 지난 날의 개방을 대신하여 구파일방(九派一幇)의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다.

반면 강남에 남은 정통 개방은 날로 조락하여 이제는 하오문 잡배들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비참하게 몰락해 버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개방은 여전히 휘하에 수십만 명의 방도를 지닌 거대방파다. 그들과 원한을 맺어 버리면 두고두고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막비강이 꺼리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 이럴 때는 일단 토끼고 보는 거다!)

파앗!

막비강은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거지 떼의 머리 위를 지나쳤다.

[저 후레자식이 달아난다!]

[갈보 새끼를 잡아라!]

그런 막비강을 거지들이 아우성 치며 따라왔다.

하지만 그자들의 경공술로 막비강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막비강은 삽시에 거지 떼를 떨쳐 버리고 곡구(谷口)로 쏜살같이 질주했다.

헌데 그가 막 곡구 근처에 서있는 돌로 깍은 거대한 향로(香爐)를 지날 때였다.

[되돌아가라!]

돌연 향로 위에서 사나운 일갈이 터지며 하나의 흑영이 득달같이 막비강을 덮쳐 왔다.

막비강은 한 줄기 강맹한 잠경이 엄습해 옴을 느끼고 급히 일장을 마주쳤다.

퍼펑!

일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

급습한 자는 막비강의 강력한 장력에 의해 일 장 밖으로 날려 나가더니 허공에서 한바퀴 맴돈 후 바닥에 내려섰다.

그자 역시 거지였는데 중년의 나이에 눈이 가늘게 찢어진 것이 매우 음독하고 흉폭한 인상이었다. 허리에는 여섯 개의 마대를 차고 있어 그자의 개방에서의 지위가 호법(護法)임을 나타내고 있다.

중년 거지가 막비강을 막아선 사이에 수백명의 거지떼가 그의 뒤에 이르렀다.

[사문(四門)에 용호풍운진(龍虎風雲陣)을 펼쳐라!]

육결(六結)의 마대를 지닌 중년 거지는 뱁새눈을 부릅뜨며 막비강 뒤쪽의 거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거지떼들은 그 행색에 어울리지 않게 신속하게 움직여 막비강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포진이 끝나자 중년의 거지는 막비강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어린 녀석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본방의 총타(總舵)에 쳐들어 와 난동을 부리다니! 그렇게 자신 있으면 본 호법의 일초를 더 받아내어 보아라!]

막비강은 방금 전 비록 총망중이었지만 오성(五成) 가량의 공력을 사용했었다. 그런데도 상대방이 일 장 가량밖에 밀려나지 않자 상대방의 공력도 약하지 않음을 알았다.

게다가 굳이 개방과 적대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지라 막비강은 포권의 예를 올렸다.

[나는 개방과 아무런 원한이 없소. 다만 이 대석비곡을 빌려 몇 명의 친구를 만날 생각이었는데 이미 귀방의 분타가 되어 있더군요. 아까 귀방의 분이 먼저 욕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출수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니 귀하는 나를 너무 곤경에 빠뜨리지 마시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막비강이 정중하게 말하자 중년 거지도 안색을 다소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의 이름은 곡능천이라고 합니다.]

[곡능천? 이 이름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는데....]

중년 거지는 이마를 찡그리며 갸웃했다. 개방의 정보력은 아주 빼어나 어지간한 무림인의 신상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약관도 안된 나이에 개방의 호법인 자신을 물러나게 만들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지닌 젊은 고수의 이름은 언 듯 뇌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 거지가 얼른 말했다.

[() 호법! 아마도 이 애송이가 혈검산장에서 도망쳐 나온 개 망나니 막비강일 것입니다. 저 놈을 생포하여 막장주에게 인계하면 필시 후한 보상을 줄 것입니다.]

철 호법이라 불린 중년 거지는 막비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린 녀석아! 너는 사실 혈검산장의 둘째 아들 막비강인데 곡능천이라는 가명을 지어 남의 이목을 속이고 있지?]

철 호법의 말에 막비강은 찔리는 바가 있었지만 시침을 뚝 떼고 대답했다.

[내 성은 곡가요. 그리고 막비강이 누군지 전혀 모르오.]

철 호법이 의심의 눈초리로 다시 물었다.

[네 사부는 누구냐?]

[내게는 사부가 없소.]

[그럼 네 부친은 누구냐?]

그자의 질문에 막비강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지었다.

[그건 잘 모르겠소!]

[핫하하....]

거지 떼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한 놈이 조롱을 했다.

[이놈은 이제 보니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개잡종이었구나. 그렇다면 아까 내가 한 말이 맞았잖아! 아랫도리를 아무 놈한테나 내돌리는 갈보의 새끼였어!]

막비강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자는 바로 그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흉악한 인상의 거지였다.

그자가 또 자신의 어머니를 갈보 운운하자 막비강은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그 주둥이 닥치지 않으면 혀를 뽑아버리겠다!]

그러자 철 호법이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어린 녀석아, 여러 말 마라! 네가 본방이 포진한 용호풍운진을 뚫고 나간다면 순순히 놓아주겠다. 하지만 돌파하지 못한다면 타구봉(打狗棒)으로 백 대를 갈긴 다음 너의 부친에게 데려가겠다.]

[좋다. 얼마든지 덤벼 봐라!]

[야앗!]

철 호법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타구봉을 휘둘러 왔다. 그러자 사면팔방에서도 무수한 지팡이 그림자가 막비강을 공격해 왔다. 개방이 자랑하는 용호풍운진이 펼쳐진 것이다. 그 기세는 마치 용이 꿈틀거리고 호랑이가 달려드는 것만 같다.

하지만 막비강은 날아드는 타구봉들을 어렵지 않게 피했다. 비록 겉보기에는 진세가 화려하고 기세등등했지만 정작 타구봉을 휘두르는 자들의 공력은 보잘 것 없어 위협이 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휘익!

난무하는 타구봉들을 피해낸 막비강은 다음 순간 일학충천(一鶴沖天)의 기세로 몸을 쭉 뽑아 올려 옆에 선 거대한 석촉대(石燭臺)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그의 이같은 경신술에 거지떼들은 닭 쫓던 개꼴이 되었다.

[하하! 이걸로 진을 통과한 것으로 합시다.]

호탕하게 외친 막비강은 즉시 석촉대를 뛰어내려 곡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서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이없이 막비강을 놓친 철 호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를 부득 갈며 뒤쫓아왔다. 다른 거지들도 들개 떼처럼 아우성을 치며 그자의 뒤를 따라온다.

[! 개떼가 따로 없군!]

막비강은 냉소하며 곡구를 향해 줄달음쳤다.

헌데 그런 그의 눈에 막 세 명의 늙은 거지가 꾸부정한 몸을 이끌고 곡구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실례합니다!]

막비강은 급히 외치며 그 세 늙은 거지의 머리 위를 단숨에 뛰어넘으려 했다.

[쯧쯧! 버릇없는 아해로다! 존장의 머리를 타넘으려 들다니...!]

하지만 혀차는 소리가 들리며 한 줄기 인영이 선뜻 막비강 앞으로 날아올랐다.

[비키시오!]

막비강은 다급히 외치며 일장을 후려쳤고 그 인영도 즉시 마주 손을 내밀었다.

퍼펑!

요란한 폭음이 일며 막비강은 온몸이 진탕함을 느끼고 지면으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막비강을 저지한 것은 곡구로 들어서던 세 늙은 거지 중 가장 키가 크지만 대신 대나무처럼 삐쩍 마른 늙은 거지였다.

막비강을 막아선 세 늙은 거지들이 모두 일곱 개의 포대를 메고 있다.

막비강은 그들이 바로 개방의 장로급 거지들임을 알아보고는 내심 긴장했다.

[흘흘! 우리 금릉삼로(金陵三老)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면 젖먹던 힘까지 발휘해야 할 것이다, 애송아.]

막비강을 가로막은 깡마른 노개가 앞으로 나서며 싯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이 비루먹은 늙은이들이 금릉삼로라니...!)

금릉삼로라는 이름에 막비강은 흠칫했다. 그들이 강남개방의 최고원로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숫자만 많고 절정고수가 없는 개방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들 금릉삼로는 개방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은 노개들인 것이다.

상대방이 금릉삼로라는 사실에 내심 긴장했지만 막비강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은 자칭 삼로 중 한사람이라 하면서 차륜전(車輪戰)의 비열한 수단으로 어린 나를 제압할 생각이오?]

깡마른 거지는 어리둥절하더니 곧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하하, 나 고죽개(骷竹丐) 학검성(鶴劍城)은 그렇게 치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네가 스스로 찾아와 시비를 걸었으니 상황이 다르다. 대신 우리 세 노화자는 절대 네게 부상을 입히지 않을 테니 그 점에 대해선 염려하지 마라!]

고죽개 학검성이란 늙은 거지의 말에 막비강도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절대 당신을 해치지 않겠소.]

학검성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거만한 녀석이구나. 큰소리치지 말고 먼저 손을 써봐라! 노부 앞을 무사히 지나가면 노부가 진 걸로 하겠다!]

이에 막비강은 늙은 거지를 덮쳐 가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 하오.]

학검성은 상대방이 갑자기 교활한 수법을 사용하자 내심 흠칫 놀랐다. 해치지 않고 어떻게 막비강을 제압한단 말인가?

[교활한 녀석 같으니!]

학검성은 눈을 부라리며 오른쪽 다섯 손가락을 활짝 벌려 막비강의 어깨를 잡아 왔다.

그러자 막비강은 어깨를 아래로 살짝 내리며 돌연 뚱딴지같은 함성을 질렀다.

[!]

학검성이 어리둥절하여 손을 멈추며 물었다.

[너는 방금 뭐라고 말했느냐?]

쌍방의 거리는 한 걸음도 채 되지 않는지라 절대 정신을 분산시켜선 안 된다.

막비강은 이 틈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옆을 재빨리 통과하며 히히 웃었다.

[코는 제일 미끄러운 곳이라 쉽게 잡히지 않소이다.]

학검성은 몸을 돌려 막비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어린 녀석은 교활하기 짝이 없어 잘못 하면 오늘 본방이 창피를 당하겠구나.)

꾀를 써서 학검성을 통과한 막비강은 또 다른 늙은 거지 앞에 도착했다. 금릉삼로 중에 가장 풍채가 좋고 인상도 좋은 노개였다.

[죄를 범하겠소이다!]

!

막비강은 외마디 고함과 함께 오른손을 뻗어내는 척하다 갑자기 그 뒤쪽에서 왼손을 불쑥 밀어냈다.

이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일신 무공이 학검성보다 훨씬 고강했다. 그래서 막비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비강이 허초(虛招) 뒤에 실초(實招)를 숨기는 수단을 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그 바람에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엉겁결에 막비강의 왼손을 막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본래의 힘을 다 발휘하지도 못했다.

! !

늙은 거지는 서로의 장력이 충돌하는 순간 비틀거리며 일 장 밖으로 밀려나갔다.

[이 교활한 애송이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한 풍채 좋은 늙은 거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곁을 통과한 막비강을 뒤에서 덮쳐 왔다.

풍채 좋은 늙은 거지 옆을 지나치던 막비강은 갑자기 등 뒤에서 강맹한 경풍이 뻗어옴을 느끼고 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공격하려는 늙은 거지를 향해 경멸의 냉소를 날렸다.

[! 당신은 나를 통과시켜주고도 계속 공격을 하는 겁니까?]

[너는 노부가 미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기습을 했으니 통과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럼 당신은 지금껏 준비하지 않고 뭐 했소?]

막비강의 그 말에 늙은 거지는 말문이 막혀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범 형(范兄)! 통과시키시오. 그 망나니를 나 지당개(地堂丐) 이건영(李建英)이 혼내 주겠소!]

금릉삼로중 마지막 한 사람인 땅딸막한 늙은 거지가 나서며 말했다. 키가 작은 데가 살이 쪄서 온몸이 둥글 둥글한 이 노인의 눈빛은 새파란 빛을 띠고 있다.

(개방은 용독(用毒)에도 뛰어나다더니 이 늙은 거지는 독공(毒功)을 익혔구나!)

막비강은 지당개 이건영이란 땅딸보 거지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서 그가 일종의 독공을 연마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금강옥액을 복용한데다가 남산의성 악불령이 준 천오주도 갖고 있다. 상대가 아무리 음독한 독을 쓴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 심하게 혼내진 말게!]

범씨 성의 풍채 좋은 늙은 거지가 물러서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은연중에 막비강을 걱정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막비강은 그런 범씨 성의 노개에게 호감이 갔으나 내색하지 않고 오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당신은 아무 걱정말고 갖고 있는 재주를 다 펼쳐보시오! 내 얼마든지 상대해주겠소!]

막비강의 광오한 말에 지당개 이건영의 파란 눈빛에 살기가 더해졌다.

[애송이 놈! 스스로 자초한 화니 노부를 탓하지 말아라!]

지당개는 말하면서 양손을 쳐들었다. 그런 그의 열 손가락이 모두 검프르게 변해있었다.

(독공이다!)

겉으로는 큰 소리를 쳤지만 막비강은 내심 긴장했다. 독공은 처음 상대해보는 때문이다.

장내에는 일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막비강과 지당개 이건영은 서로를 노려볼 뿐 누구도 먼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칫 먼저 움직였다가는 상대방의 격렬한 반격을 받을까 꺼려해서였다.

헌데 그 일촉즉발이 순간이었다.

[멈추시오 이장로!]

화라락!

한소리 호통과 함께 계곡 밖에서 하나의 인영이 질풍처럼 날아들어왔다.

[방주(幇主)를 뵙소!]

나타난 인물의 뇌성 같은 고함 소리를 들은 거지들은 즉시 손을 모으며 허리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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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천록여의 (2)

 

머릿속으로 찬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장검을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을 때의 충격도 이처럼 크지는 않았다.

도깨비 장난을 본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장난의 깊숙한 곳에 자기가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일이 그의 앞에서는 너무도 태연하게 계속되고 있다.

심장이 격하게 뛰면서 진정되지 않았다.

활몽루가 사라지는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자꾸만 생사탄이 연상되었다.

현천록은 일곱째인 장군묵도 자기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삼년이나 기다려서 진양진인을 만나려 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활몽루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고, 그 속에서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

뒤에서 목탁소리와 함께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한 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계명사의 중들이 활몽루가 사라졌음을 보고 꿇어앉아 염불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 모두가 두려워하며 경건하게 염불을 왼다.

현천록은 그 자리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중들과 맞닥뜨리면 아직 자기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는데 또 새로운 시비에 말려들 것만 같아서다.

시간은 이경하고도 반은 지났을 것이다.

현천록은 낙엽처럼 날아올라 대웅전 지붕 위에 내려섰다.

활몽루만큼은 아니지만 대웅전의 지붕에서 보는 현무호의 밤도 아주 아름다웠다.

한데 대웅전의 지붕에는 현천록보다 먼저 와있는 선객이 있었다.

황색가사를 걸치고 회색바라를 진 중이었다.

현천록보다 더 작은 키에 몸은 민간에 팔리는 나한상(羅漢像)처럼 둥글고 납작한데 웃고 있는 얼굴에서는 도무지 나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오십을 넘은 듯도 하지만 탱탱한 살 때문에 주름살이 보이지 않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중의 입은 움직이지 않는데 목소리가 현천록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시주도 활몽루가 사라지는 걸 봤는가?]

불가에 비전되어 온다는 혜광심어(慧光心語)라는 고절한 무공이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웃고 있는 중의 입안에는 이빨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의 혜광심어가 다시 들려왔다.

[노납은 진양이란 도사를 만나러 왔네. 하지만 무슨 연고인지 스스로 문을 닫아버렸으니 다시 열 때까지 이 근처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됐어.]

현천록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스님께서 진양진인이 만나기로 했다는 분이시군요.]

중이 이빨 없는 입속을 들어내 보이며 웃는다.

[말이 좋아 만나는 것이지. 그냥 한판 싸워 삼년 전에 맺지 못한 승부를 가르면 되지. 한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먼. 진양 그 소코같은 도사가 노납을 포기할 리 없는데.]

그때 계명사의 승려가 현천록과 중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사람이 있다!]

중이 껄껄 웃었다.

[잠시 피하세나.]

스윽!

중은 허깨비처럼 다가와 현천록의 손을 잡고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불을 머금은 종이풍선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것 같은 신법이다.

[자금산(紫金山)에 가면 먹을 만한 풀뿌리들이 숨겨져 있는 곳을 알고 있네. 이것도 삼세의 인연이니 함께 가지 않겠나?]

중이 계명사를 벗어나며 말했다.

현천록은 중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저는 잠시 들려야 할 데가 있습니다. 장소를 알려주시면 찾아가도록 하지요.]

중은 현천록이 자기의 손을 놓고도 공중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떠있는 것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으하하하하! 대단한 시주였군. 나는 포두화상(葡頭和尙)일세. 영곡사(靈谷寺)에 와서 날 찾게나. 기다리고 있겠네.]

중은 뚱뚱한 몸에 믿기지 않는 속도로 자금산을 향해서 날아가버렸다. 마치 한 마리 거대한 붕새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

 

현천록은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성문을 날아넘고 태평북로(太平北路)의 번화가로 들어갔다.

삼경이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아직도 불을 훤하게 밝혀두고 있는 점포들이 있다.

현천록은 악기(樂器)를 파는 점포를 찾아 들어갔다.

점포에는 각양각색의 퉁소와 피리, 앵금, 거문고, 비파, 소고(小鼓) 등이 여기 저기 놓여있었다.

현천록은 대나무 퉁소를 하나 집어들고 점원에게 물었다.

[이건 얼마지요?]

점원이 손가락을 하나 세우며 말했다.

[한냥입니다.]

현천록은 점원이 자기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고 바가지를 씌우려 한다는 걸 알고 속으로 웃었다.

장사라면 진작 이골이 난 현천록이었다.

현천록은 대나무 퉁소를 내려놓고 조잡하긴 하지만 벽옥을 깎아 만든 퉁소를 들고 물었다.

[이건 얼맙니까?]

점원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스무냥입니다. 하지만 공자님께 어울리는 물건이라곤 할 수가 없군요.]

점원의 눈이 은근 슬쩍 한쪽 구석에 있는 퉁소를 향했다.

백금으로 만들었으면서도 얇게 뽑아 무겁지 않은 퉁소였다.

[삼백오십 냥입니다. 저희 가게에서 최고의 물건일 뿐 아니라 금릉에서는 이만한 물건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게는 겨우 두냥닷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로 주시오.]

현천록은 손을 내밀었다.

점원이 무명수건으로 백금퉁소를 닦은 후에 내주었다.

백금퉁소에는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현천록은 퉁소를 입에 대고 불어보았다.

[! !]

하지만 바람소리만 날 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점원이 의자를 내와서 앉게 하며 말했다.

[공자님께선 아직 퉁소를 배우지 않으셨군요. 헤헤... 소리를 내려면...]

점원은 대나무퉁소를 하나 집어들고 입을 대는 위치부터 가르쳐 주었다.

 

---부우!

 

대나무 퉁소에서 맑은 소리가 흘러 나왔다.

현천록은 점원이 했던 것과 똑같이 흉내냈다.

백금이 흐느끼는 듯 맑고 청아한 소리가 퉁소를 잡은 손 끝에 잔떨림을 남기며 울려나왔다.

점원이 뜻밖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천록은 손가락을 움직여 구멍을 막고 열고 하면서 소리를 변화시켜보았다.

여덟 개의 소리와 각각의 반음이 한 번씩 울리고 나서, 현천록의 백금퉁소에서는 너무도 애절하고 심금을 울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지그시 눈을 감고 이따금씩 고개를 약간씩 아래위로 움직이며 퉁소를 불고, 소성(簫聲)은 태평북로를 넘어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점원은 숨을 죽이고 현천록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도 악기를 매매하는 상인인 만큼 음()을 아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현천록의 퉁소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했다.

[소인은 애상곡(愛傷曲)을 공자님처럼 연주하시는 분을 만나 뵌 적이 없습니다. 귀가 열리고 가슴에 막혔던 것이 뻥 뚫리는 듯 하군요.]

한데 백금소를 부는 현천록의 몸이 조금씩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점원이 놀라며 땅에 엎드렸다.

[아이쿠! 신선님! 천상의 선재동자께서 강림하셨군요.]

현천록은 허공에서 몸을 바르게 폈다.

애절한 퉁소소리는 계속되고, 현천록은 신선이 승천하는 것처럼 밤하늘로 올라갔다.

 

x x x

 

붉은 안개가 발목을 축축하게 적시며 낮게 흐른다.

쌔액! 쌔액!

암흑의 동굴 속에는 상처 입은 야수의 것인듯 거친 숨소리가 흘러 나온다.

동굴 앞에 꿇어 앉은 여인의 무릎에는 벌써 피멍이 들었다.

[... 이제... 됐다! ... 계속... ... 말하라.]

사람의 음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낮고 탁한 음성이 동굴 속에서 흘러 나왔다.

여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공주님께선 정말 그런 무공이나 문파가 존재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셨습니다. 죽지 않는 몸을 지녔다면 무공의 끝에 달한 것이 아니냐면서...]

[허억! ! ... 결국 묻고 시 싶은 건... 그거 였...구만.]

[그렇사옵니다.]

동굴 속에서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계속되었다.

[죽지... 않는 인간... ...부도... 만난...적이 있다. 허억! ! 내 몸을 망가뜨린 바로 그 자였지.]

여인이 흠칫하며 머리를 숙였다.

[허어어억!]

동굴 속의 괴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주 온화한 미풍같은 음성이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부는 그 이후에 쭉 그에 대해 연구해왔는데 얼마 전에야 겨우 실마리를 잡게 되었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여인이 절하며 말했다.

부드러운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노부가 너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각, 중간에 내 말을 끊지 말고 들었다가 한마디도 빠뜨림없이 공주에게 전해줘라.]

여인이 가만히 엎드렸다.

괴인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사(不死)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있지만, 어떤 자들은 특이한 상황을 만나게 되어 죽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지.

이건 무공의 높낮음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노부는 일찍이 천하의 모든 무공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고금의 무공에 통달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자의 손에 어이없이 패해서 불구가 되고 말았지.

내 목숨을 연장시켜 가는 것은 능력이지만 이 능력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마침내는 다하고 말 것이다.

노부는 아직도 그자나 또 다른 자들이 어떻게 불사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 그들도 모를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자들은 세상 밖에서 이 세상을 꿈꾸는 자들 같기도 하고, 우리가 어쩌다가 그자들의 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설마 그럴 수야 없겠지만 몹시도 비슷하다.

어쩌면 그들이 장주(莊周: 장자)의 숨은 비법을 우연히 알아버린 것일 수도 있고, 하늘과 수명과 같이 했다는 고대 현인들의 법을 얻었을 수도 있지.

그러나 그런 자들을 없앨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살았다고도 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니까 죽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방법으로 소멸시켜 버릴 수는 있다.

어째든 그들도 존재하는 것이니 만큼 그 존재의 고리를 끊어주기만 하면, 보통 사람들이 심장을 찔렸을 때 죽고 마는 것처럼 그들도 소멸하고 말겠지.

죽지 않는 자들, 그들이 언제부터 무림에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무림의 이단자이자 이방인이기도 한데, 얼마나 많은 자들이 숨어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러나 노부가 다시 나서는 날에는 무림에서 그들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말겠다.]

동굴 속에서 책 한권이 천천히 날아나왔다.

[가져가서 공주에게 전해줘라. 그리고 요사스런 방사(方士)나 술사(術士)의 무리들은 조금도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해라. 공주가 내가 적은 방법대로 한다면 어떤 자라 할지라도 능히 없앨 수 있을 것이니...]

여인이 책을 두손으로 받쳐들었다.

아주 지친듯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정작 공주가 걱정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철인련맹(哲人聯盟)이다. 그자들이야 말로 경계를 늦출 수 없다.]

목소리가 점점 잦아졌다.

여인이 절을 하고 일어섰다.

[끄아아아아악!!]

더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는 인간의 비명이 다시금 동굴 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짙은 혈무(血霧)가 소용돌이치며 비명과 함께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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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동분서주

 

 

 

헌원여호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막비강은 다시 비석을 찾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부지런히 각지로 비석을 찾아다니면서도 틈틈이 헌원여호의 십팔초 도법도 수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비강이 하남성 동쪽 끝에 자리한 청양(淸陽)이란 지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청양현 교외의 관도를 지나다가 꼬불꼬불한 오솔길 끝에 큰 무덤이 하나 있음을 발견하였다.

명문가의 무덤인지 주위로 수천평의 묘역(墓域)이 잘 가꾸어진 무덤이다. 무덤을 에워싼 동백나무 숲의 동백나무들 하나 하나가 아람드리인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이 아주 오래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백나무 숲을 지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무덤 앞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높이가 무려 삼 장이 넘고 넓이는 여덟 자 가량이나 되었다. 그것은 막비강이 지금껏 본 그 어떤 비석보다도 컸다.

(! 정말 큰 비석이구나!)

막비강이 내심 기뻐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비석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황원현고위무대장군봉만호남궁공지묘(皇元顯考威武大將軍封萬戶南宮公之墓)>

 

무덤의 주인은 낭궁(南宮)성을 지닌 이 지방 출신 고위무장의 것이었다.

막비강은 이 비석 밑이야말로 무예비급을 숨기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라 단정하고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늘 갖고 다니던 곡괭이로 비석 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숱한 비석을 파헤치며 그의 땅 파는 재주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비석 밑을 완전히 파헤쳐 비석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비석 밑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를 않았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또 석 자 가량 더 팠지만 여전히 낡은 종이 한 장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무수한 비석을 보았지만 이 비석이 제일 큰데... 이것말고도 더 큰 비석이 어딘가에 있단 말인가?)

그는 내심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한 자만 더 파볼 요량으로 다시 또 비석 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이 간악한 도적놈!]

꽈릉!

등뒤에서 난데없이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등 뒤에서 한 줄기 경풍이 노도처럼 엄습했다.

돌연한 기습에 막비강은 깜짝 놀라면서도 본능적으로 허리를 비틀어 일 장 가량 피했다.

퍼펑!

순간 우렁찬 굉음이 울리며 비석이 세워졌던 자리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누구요?]

위기를 모면한 막비강은 급히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붉은 얼굴에 흰 수염을 기르고 아주 위맹하게 생긴 노인이 눈에서 분노의 안광을 발산하며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붉은 얼굴의 노인은 자신의 일장이 빗나가자 더욱 더 노하여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노려보고 있었다.

[애송이 도적놈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누가 감히 너더러 우리 선조의 묘비를 훔쳐오라고 시키더냐?]

막비강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노인장, 고정하십시오. 저는 결코 묘비를 훔치는 도둑이 아닙니다.]

[노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도 시치미를 떼려 하느냐? 훔칠 생각이 없다면 왜 묘비를 쓰러뜨렸느냐?]

[... 그것은 소문에 거대한 비석 밑에는 육령지(肉靈芝) 같은 것이 자라고 있다기에 이런 짓을 했으니 노인장께선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 육령지가 어째?]

붉은 얼굴의 노인은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그러다, 그는 문득 정광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막비강을 주시하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핫하하하! 이제 보니 바로 네놈이었구나! 혈검산장에서 아비의 보물을 훔쳐 도망친 망나니 녀석! 네놈을 잡아 혈검산장으로 끌고 가겠다.]

막비강은 노인이 한 눈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흠칫 놀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노인에게 손을 모아 보였다.

[노인장께선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비석을 쓰러뜨린 건 사실이니 원래대로 복구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 혈검산장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 왜 혈검산장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시는지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대담하게 이름을 바꾸어 노부를 속이려 들어?]

막비강의 변명에도 노인은 차갑게 냉소를 지었다.

[네 아비가 무림의 여러 문파에 너의 용모파기(容貌疤記)를 두루 보내 체포를 부탁했다! 용모파기에 적힌 대로라면 네놈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그 단호(丹壺;붉은 호리병)가 네놈이 바로 막비강이란 패륜아인 증거다.]

막비강은 막고천이 자신의 용모파기를 무림에 뿌렸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하지만 그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노인장께서 믿지 않으니 저로서도 어쩔 수 없군요. 제 이름은 곡능천이며 이 호로는 가친께서 술을 사서 담아 오라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노인장께선 단호라 말씀하시니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군요.]

[주둥아리 닥쳐라! 네놈은 혈검산장의 패륜아 막비강이 분명하다.]

[노인장은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곡능천이 막비강으로 변하고 호로가 단호로 변하다니 노인장께선 혹시 술을 많이 잡수신 것이 아닙니까?]

막비강의 비아냥에 노인은 화가 치밀어 그렇지 않아도 붉은 얼굴이 자색으로 변했다.

[네놈이 막비강이든 곡능천이든 상관없이 오늘 네놈을 때려죽이지 못하면 노부 남궁수방(南宮秀方)은 이곳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않겠다.]

(남궁수방!)

막비강은 노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 늙은이가 바로 오대세가(五大世家)중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셋째 가주인 적면화룡(赤面火龍) 남궁수방이었다니...!)

본래 무림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세가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오대세가다.

사천당문(四川唐門), 하북팽가(河北彭家), 진주언가(秦州諺家), 남천뢰가(南天雷家), 그리고 하남의 토호(土豪)인 남궁세가가 바로 오대세가다.

 

적면화룡 남궁수방!

 

이 인물이 바로 하남(河南) 남궁세가의 셋째 가주다.

그리고 막비강은 몰랐으나 그가 파헤친 비석은 바로 남궁일족 선조의 묘비였던 것이다. 남궁세가가 하남 일대의 큰 토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무덤의 주인이 일찌기 비옥한 하남 땅에 많은 땅을 사놓았던 덕분이다.

(! 재수 없게 걸렸군!)

막비강은 지금의 자기 실력으로는 절대 상대방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가 제일이지!)

화라락!

다음 순간 그는 재빨리 허리를 비틀어 묘역 밖을 향해 전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채 묘역을 벗어나지도 못했을 때였다.

[흐하하! 어디를 가느냐, 어린 도적놈아!]

맞은편에서 한 줄기 사나운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명 얼굴의 푸른 노인이 쏘아 왔다.

(저자는...!)

막비강은 다급한 가운데서도 그 푸른 얼굴의 인물이 남궁세가의 둘째 가주인 청면수라(靑面修羅) 남궁중방(南宮仲方)임을 알아보고 대경실색했다. 하여 급히 방향을 돌려 묘역을 에워싸고 있는 울창한 동백나무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동백나무 숲 속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핫하하! 이놈아, 너는 스스로 육임대진(六任大陣) 안으로 들어갔으니 이제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다.]

남궁수방의 우렁찬 웃음소리와 함께 눈앞이 캄캄해지고 경물이 사라지며 운무(雲霧)가 확 피어올랐다.

(아차! 진 속에 빠졌구나!)

막비강은 자신이 기문진에 빠졌음을 알고 실색했다. 이 동백나무 숲에는 도굴꾼들을 사로잡기 위해 진법이 설치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때 다시 남궁수방의 흉험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흐흐! 네 아비 막고천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당장 때려죽였다. 노부는 네놈을 진식 속에서 배를 곯아 반쯤 죽도록 만든 다음 꽁꽁 묶어 네 아비에게 보내겠다.]

막비강은 동백나무 숲 속에서 방향을 분별할 수 없게 되자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부었다.

[이 늙어빠진 노적아!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남궁수방이 냉랭히 대꾸했다.

[어린 녀석이 어른도 몰라보다니, 노부는 우선 네놈을 채찍으로 죽지 않을 만큼 때려 두 번 다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만들겠다.]

막비강이 재차 욕설을 퍼부으려 할 때였다.

[아이야, 그와 말다툼하지 마라! 노부가 이곳에 있는 이상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 없다.]

돌연 귓전에 생소한 음성이 전해 왔다. 그 음성은 너무나 가늘어 모깃소리 같았지만 똑똑히 들렸다.

막비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근에 고인이 숨어 있음을 알고 내심 크게 기뻐하며 고의로 몹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남궁중방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셋째, 나를 보자 자진해서 진 속으로 뛰어든 그 어리석은 놈은 도대체 누구냐?]

[형님은 놈이 막고천의 망나니 둘째 아들놈임을 모릅니까?]

[! 그놈이 바로 막비강이란 말이냐?]

[그 되먹지 않은 놈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거 참 이상하구나. 내가 듣기로 막고천의 둘째 아들은 본래 병약하여 병아리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다고 하던데 어떻게 무게가 삼천 근이 넘는 우리 조상님의 비석을 넘어뜨릴 수 있었느냐?]

[듣고 보니 이상하군요. 하지만 소제는 그 놈이 막비강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생김새나 지니고 있는 붉은 호리병이 막고천이 보내온 용모파기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선 사나흘 배를 곯려 놓은 뒤에 사로잡아 확인합시다.]

막비강이 상대방 두 사람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진다고 느꼈을 때였다.

[아이야, 내가 말하는 대로 걸음을 옮겨라. 앞으로 세 걸음... 우측으로 돌아 여덟 걸음... 좌측으로 돌아 한걸음... 앞으로 반걸음... 다시 좌측으로 돌아 열 걸음....]

귓전에 아까 그 모깃소리 같은 음성이 울려 왔다.

막비강은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문득 눈앞이 탁 트이며 이미 동백나무 숲 밖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면전에는 육순 남짓한 의원 차림의 노인이 오른손에 약초를 캐는 호미를 들고 막비강을 향해 빙긋이 웃고 서 있었다.

[! 빨리 나를 따라오너라!]

그는 막비강의 반응도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막비강은 미처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급히 그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의원 차림을 한 이 노인의 걸음걸이는 바람 같아 막비강은 달려야지만 간신히 따라갈 수 있었다.

약 반시간 가량 따라가자 노인은 녹음이 짙은 밀림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밀림 안에 들어서더니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며 히죽 웃었다.

[어린것이 제법 날래구나.]

막비강은 이 노인이 구출해 주지 않았다면 혈검산장으로 잡혀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임을 잘 아는지라 얼른 큰절을 했다.

[선배님께서 도와 주시지 않았으면 후배 곡능천은....]

노인이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을 가로챘다.

[아이야, 네 이름은 정말 곡능천이냐?]

막비강은 은인에게 거짓말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급히 또 포권의 예를 올렸다.

[후배의 본명은 막비강입니다. 그러나 집안이 변고를 당해 곡능천이라 이름을 고쳐 강호를 유랑하고 있습니다.]

[그럼 너는 혈검산장 금사혈검 막고천의 자식이 틀림없구나.]

막비강은 어쩔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이 곤혹의 빛을 띠며 물었다.

[너희 집에 무슨 변고가 발생했느냐? 그리고 네 부친 막고천은 무엇 때문에 사면팔방으로 사람을 풀어 너의 행방을 수색케 하고 있느냐?]

[이 일은 관계가 너무 중대하므로 당돌한 요청입니다만 노선배님의 존함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노부의 성은 악()가고...!]

순간 막비강은 혈검산장의 무사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한 분 기인을 떠올리고 얼른 말을 받았다.

[혹시 남산의성(南山醫聖) 악불령(岳不靈) 노선배님이 아니십니까?]

막비강의 말에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어찌 감히 의성이라 칭할 수 있겠느냐. 다만 몇 가지 약초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다.]

 

남산의성 악불령!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최고의 신의(神醫). 그의 재주는 죽은 자를 살리고 백골에 살을 붙일 지경이라 소문이 나 있었다.

또한 그는 의술뿐만 아니라 기문둔갑의 재주와 무공 방면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강호칠절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다.

막비강은 급히 포권을 했다.

[후배가 미처 몰라 뵙고 실례했습니다. 사실 집안의 변고는 입을 열기 부끄럽습니다. 막고천은 후배의 생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집을 나온 것입니다.]

남산의성 악불령이 놀라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게 사실이냐? 너는 어디서 그런 소식을 들었느냐?]

남산의성 악불령은 막비강이 눈물을 글썽이며 처연한 표정을 짓자 얼른 또 말을 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그만둬라! 노부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 묻겠는데 네가 남궁세가 조상의 묘비를 파헤친 의도는 무엇이냐?]

막비강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육령지를 찾아 공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악불령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이야, 너는 잘못 알고 있다. 육령지는 심산유곡에 들어가 찾아야지 어찌 남의 조상의 묘혈(墓穴)을 파헤쳐 얻으려 하느냐?]

악불령의 말에 막비강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악불령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하는 소문에 의하면 당년의 무성(武聖) 청구상인께서는 자신의 청구단서를 지기(地氣)가 서린 한곳 용혈(龍穴)에 묻어 두었다는구나.]

(이분은 내가 비석을 파헤치는 이유를 이미 알고 계시는구나!]

막비강이 부끄러워할 때 악불령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너의 무예로는 남궁세가의 세 가주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노부가 너를 도운다면 그들도 너를 어떻게 못할 테니 이 기회에 그것을 꺼내 오너라. 그러면 우리 두 사람에게 피차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막비강은 청구단서가 이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후배는 노선배님의 분부에만 따르겠습니다.]

[좋다. 그럼 노부는 우선 네게 몇 가지 진법과 내공의 입문공부를 가르쳐 주겠다. 그런 다음 보름 후 달 없는 밤에 다시 그곳에 가서 무덤을 파헤치자.]

막비강은 악불령이 내공심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자 황급히 큰절을 했다.

비록 막비강이 강호의 일류고수들인 염라철장과 무협제원등의 무공을 연마하긴 했지만 제대로 내공심법을 익히지 못해 그 위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었다. 초식과 달리 내공심법은 이끌어주는 스승이 없으면 큰 성취를 보기 어려운 것이다.

막비강이 절을 하려 하자 악불령은 담담히 웃으며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노부는 너를 제자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니 큰절까지 할 필요 없다.]

이어 그는 품속에서 두 권의 두껍고 얇은 책자와 환약이 든 봉투를 꺼내 막비강에게 주었다.

[노부가 보니 너의 자질이 뛰어난지라 내공심법 뿐만 아니라 특별히 노부의 진보약학(陣譜藥學)까지도 전수해 주겠다. 이 책자엔 노부가 연구하여 얻은 학문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보름 동안 빌려줄 테니 열심히 보도록 해라.]

두 권의 책을 건네준 악불령은 이어 여러 알의 환약이 든 봉투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그리고 이 약환은 역용환(易容丸)인데 각종 색깔이 모두 들어 있다. 한 알을 사용하면 약효가 보름간 지속된다. 사용할 땐 물 속에 풀어 피부에 발라라. 그리고 원래 면목을 회복하려면 양잿물에 씻으면 된다.]

막비강은 두 손으로 환약도 받아 품속에 넣고 물었다.

[노선배님께선 지금 어딜 가실 생각이십니까? 보름 후 후배는 어디서 노선배님을 기다릴까요?]

[여기서 기다려라. 그리고 그 책자들은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야....]

악불령의 말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 교활한 가짜놈 같으니...!]

난데없이 나직한 코웃음 소리가 전해 왔다.

[누구냐?]

갑자기 들려온 코웃음 소리를 들은 악불령은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이어 그는 벼락같이 몸을 뽑아 올려 십여 장 밖의 고목 위로 덮쳐 갔다.

와지직!

일순 무성한 나뭇가지가 강맹한 장력에 부러지고 앙상한 줄기만 남았으며 악불령은 나무줄기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과연 강호칠절 중 한 분답구나!)

막비강은 의성 악불령의 고절한 무공에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악불령은 상대방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한 듯 나무줄기 위에서 한바퀴 맴돌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막비강이 놀라고 있을 때 또 다른 방향에서 냉소 소리가 전해 왔다.

[! 남의 이름을 도용하는 노적 같으니...!]

악불령은 만면에 경악의 빛을 가득 머금은 채 날카롭게 외쳤다.

[어느 방면의 고인인지 모습을 나타내시오!]

그의 말이 막 끝났을 때,

[오냐! 원한다면 나타나 주마!]

냉랭한 일갈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예리한 파공성을 대동한 채 쏘아 왔다.

[! 당신은...!]

화라라락!

악불령은 안색이 일변하더니 황급히 숲 속으로 도주해 들어갔다. 그는 얼마나 급했던지 약초 캐는 호미까지 팽개쳐 두고 도망쳤다.

막비강은 잠시 머뭇거리다 허리를 굽혀 그 호미를 잡으려 했다.

바로 그때 늙으스레한 음성이 들려 왔다.

[아이야, 잠깐 기다려라!]

화락!

말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막비강의 면전에 내려섰다. 그 사람은 고희의 나이에 인자한 용모를 지닌 갈포(葛布) 노인이었다.

노인은 막비강을 보고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야, 너는 속았다. 하지만 노부는 너를 원망하지 않겠다. 가짜 악불령은 어디로 도망쳤느냐?]

막비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노선배님께선 왜 그를 가짜라 하십니까?]

[그것은 노부가 바로 악불령이기 때문이다.]

[예에? 선배님이 남산의성이시라구요?]

막비강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자의 이름은 강용(江庸)이고 별명은 소리장도(笑裏藏刀). 한 달 전 노부가 출타 중인 틈을 이용하여 노부의 채약 도구인 뇌강서(雷鋼鋤)와 약물감별필록(藥物鑑別筆綠)을 사취해 갔다. 노부는 사방으로 그를 찾아 헤맸는데 여기서 또 놓치고 말았구나.]

나타난 노인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했다.

막비강은 강용이란 자가 도주할 때의 낭패한 모습으로 미루어 면전의 노인이 진짜 악불령이라 단정하고 강용이 주었던 물건들을 모두 꺼내 악불령에게 돌려주었다.

[악 선배님께서 잃어버리신 물건은 이것입니까?]

악불령은 두 권의 두껍고 얇은 책자를 받아 뒤적여 보더니 가벼운 탄식을 했다.

[너는 매우 정직하구나. 이 두꺼운 약전(藥典)은 노부의 물건이다. 그러나 이 기공입문법(氣功入門法)은 강용의 물건이다. 너와 내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노부는 여기서 보름만 머물며 네게 기공입문공부를 전수해 주겠다. 네 의사는 어떠냐?]

[불감청이언정 고소언일 따름입니다!]

막비강은 얼른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강용을 만나게 된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악불령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노부의 약초 캐는 호미를 사취해 간 것은 이제 보니 청구단서가 숨겨져 있다고 소문난 위왕묘(魏王墓)를 도굴하기 위해서였구나.]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위왕묘를 파는 데 왜 선배님의 약초 캐는 호미가 필요합니까? 다른 것으로는 파지 못합니까?]

[위왕묘는 사방이 한철(寒鐵)로 뒤덮여져 있기 때문에 보통의 도구로는 이가 먹히지 않는다! 오직 노부의 뇌강서만이 한철의 극성이라 도굴이 가능하지. 물론 간장(干將) 막야(莫耶)같은 보검으로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것으로는 많은 시간과 진력을 소모해야 한다. 위왕묘를 도굴하려면 노부의 뇌강서가 제일 적격이지. 하지만 위왕묘에 청구단서가 숨겨져 있다는 말은 믿지 못할 소문이다.]

[청구단서가 위왕묘 안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까?]

[어디에 숨겨져 있는진 노부도 모른다.]

악불령은 고개를 설레 저었다.

[너도 생각해 봐라. 청구상인이 죽은 지는 채 백년도 되지 않는다. 반면 위왕은 삼국시대의 효웅 조조(曹操)를 칭하는 게 아니냐? 두 사람의 시대가 천년 넘게 차이가 나는데 위왕묘 안에 청구단서가 있을 리 있겠느냐?]

[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막비강도 고개를 끄떡였다.

[강용이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인진 모르겠지만 기관이 거미줄처럼 설치되어 있는 위왕묘에 들어갔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막비강은 이 말을 듣고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그는 청구단서가 비석 밑에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이 비급은 그가 절예를 연성하고 피맺힌 원수를 갚는 데 중대한 관계가 있는지라 악불령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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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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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여전히 밤. 단지회 총단. #72>에 나온. 음침한 인상의 건달들이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환락가에 자리하고 있긴 해도 영업장이 아니라 주변이 북적거리진 않는다. 지키는 무사들은 대부분 손가락이 한 두 개씩 없다. 단지회의 건달들이다.

#72>와 달리 문은 닫혀있지 않는데 정문 처마에는 <斷指會>라는 글이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장원 내의 어느 건물. 역시 건달 몇이 경비를 서고 있고 불이 켜져 있다.

건물 내부. 사무실 분위기. 소수마녀가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서 서류들을 보고 있다. 좌우에는 면사로 얼굴을 가린 두 명의 여자가 서서 서류들을 분류하여 소수마녀에게 주고 있다. 한 년은 무기가 검이고 한 년은 무기가 칼이다. 소수마녀의 심복인 도마녀와 검마녀다. 탁자에는 분류된 서류들이 많이 쌓여있고. 소수마녀의 앞쪽에는 사우가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사우; (살 떨리는구만.) 소수마녀의 눈치를 보고

사우; (가주님 몰래 해먹은 돈이 적지 않은데... 숨긴다고 숨겼지만 들킬 가능성이 있다.) 침 꼴깍

<소수마녀 나유타(那由他), 가주의 조카이기도 한 저년의 눈썰미가 예리하다는 건 암흑마가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무표정하게 서류를 검토하는 소수마녀의 모습 배경으로

사우; (들키기 전에 이실직고를 해야하나?) 눈치 보고. 그때

! 이윽고 마지막 서류를 내려놓는 소수마녀.

사우; [... 수고했네 막내.] 억지웃음

사우; [아랫것들이 실수를 한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대강은 전에 올린 보고서 내용에 근접할 거라 생각하네.]

소수마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무표정하게 보고

사우; (할 수 있을 때까지 발뺌을 해야 한다.) + [물론 미심쩍은 부분이 있겠지만...] 거기까지 말할 때

<회주님! 보고 올립니다.> 밖에서 들리는 음성

사우; (살았다.) + [무슨 일이냐?] 문쪽을 돌아보며 신경질 부리는 척

<대경도장을 운영하는 정필이 급히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이어지는 음성

사우; [정필이 놈이 무슨 문제를 일으킨 거냐?]

<아비가 진 도박 빚의 담보로 잡아온 계집을 누군가 빼돌렸다고 합니다.>

사우; [겨우 계집 하나 놓친 것 때문에 날 귀찮게 하는 거냐?] 눈 부라릴 때

<... 죄송합니다. 하지만 놓친 계집은 경국지색이라 잘만 팔면 수만 냥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음성

사우; [수만 냥의 가치가 있는 계집!] 벌떡 일어나고. 과장되게 놀라는 척 하며

사우; [그럼 모른 척 할 수가 없지.] [본좌가 직접 추격에 나설 테니 어떤 상황인지 보고할 준비를 해둬라.]

<존명!> 문 밖에서 들리는 음성

사우; [이런 일이 벌어졌네.] 소수마녀를 돌아보며 간사한 표정으로 웃고

사우; [나머지 얘기는 급한 일 처리하고 돌아오는 대로 함세.] 문을 열고 나가며 말하고. 문 밖에는 건달들 십여 명이 서있다.

사우; [몇 만 냥짜리 상품이 달아났다면 묵과할 수 없다! 손이 빈 놈들은 전부 추격에 동참해라.] [다른 조직에도 협조를 요청하고...] 문을 닫고 나오며 외치고

[존명!]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회주님!] 일제히 대답하는 건달들

사우; [가자!] ! 날아가고. 건달 몇 놈이 함께 날아가고

 

문이 닫힌 방안. 무언가 생각하는 소수마녀

도마녀; [어찌할까요?] [최소한 삼만 냥 이상이 빈 것같습니다만...]

검마녀; [빚 담보로 잡혔던 계집이 도망쳤다는 것도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꾸민 조작일 수도 있사옵니다.]

소수마녀; [사우에 대한 처분은 가주님께 맡긴다.] [혐의를 정리해서 가주님께 보고서를 올려라.]

[!] 대답하며 다시 서류를 정리하는 도검마녀. 그러다가

[!] [!] 흠칫! 하며 돌아보는 두 년. 소수마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수마녀; [바람 좀 쐬고 오겠다.] [늦을지 모르니 먼저 자도록 해라.] 문으로 가며 말하고

[다녀오시옵소서!] 인사하는 두 여자를 등지고 건물을 나가는 소수마녀

밖에서 경비서다가 흠칫! 하는 건달들

소수마녀; [도망친 계집에 관해 아는 자를 불러라.] 걸어가며 말하고.

[존명!] 한 놈이 대답하고

걸어가는 소수마녀. 다른 곳으로 달려다는 대답한 놈

소수마녀; (아비가 진 도박 빚의 담보로 잡혀온 계집...) (어쩐지 남의 일 같지가 않게 느껴진다.) 걸어가며 생각하고

소수마녀; (굳이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만... 어떤 사정이 있는지나 알아보자.)

 

#107>

도박장. 여전히 불이 환하지만

어수선한 분위기. 건달들은 몇 명 안보이고 하인과 하녀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다.

이진진이 잡혀있던 건물. 방안에는 여전히 건달5와 건달6의 시체가 있고. 그 앞을 건달4와 다른 한놈이 지키고 있다. 주변에는 하인과 하녀들이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다. 헌데

근처 다른 건물들 사이의 어둠 속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고 있는 청풍. 복면은 벗었고 옷은 간수1의 옷이다. 허리춤에 칼을 한 자루 차고 있다.

청풍; (그러니까 이각(二刻; 30) 전쯤에 누군가 진진이를 구해갔다는 것인데...) 눈 번뜩이고

청풍; (아마 어머니일 것이다.) 끄덕

<가끔 여자답지 않은 힘을 쓴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어머니는 무공을 익히신 게 분명하다.> #11>에서 진삼낭이 이산하를 던지던 장면을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이하는 #11>의 장면

 

진삼낭; [닥쳐요!] 이산하를 확 뿌리치고. 그러자

! 이산하의 몸이 몇 미터를 날아가 벽에 처박힌다. 집 전체가 흔들리고

회상 끝

 

청풍; (어머니가 한발 앞서서 진진이를 구해냈다니 다행이긴 한데...) 생각할 때

건달7; [너희들도 와라!] 건달 한명이 근처를 달려가며 외치고. 건물을 지키던 건달 4와 다른 건달이 흠칫! 돌아보고

건달7; [단지회 전체에 총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손이 비어 있는 놈들은 모두 도망친 년의 추격에 나서야한다.] 달려가며 외치는 그 건달.

[젠장 일이 커지는구만.] [가세.] 타탁! 건달4와 다른 건달도 궁시렁 대며 건달7을 따라 달려가고

청풍; (잘 되었다.) ! 그늘에서 나와 건달4 일행을 따라간다.

청풍; (단지회의 파락호들 사이에 슬쩍 끼어들면 어머니가 진진이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알아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건달4 일행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하고

<물론 단지회에서 어머니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대경도장에서 달려 나오는 건달들 십여 명을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그자들 중에는 청풍도 끼어있다.

 

#108>

금릉성 밖의 빈민가. 아직 불이 환한 금릉과 달리 빈민가는 어둠에 잠겨있고

청풍의 집. 부서진 입구.

그곳에 서서 보고 있는 운신장

운신장; (여기가 진진이란 아이의 집이 분명한데...) 부서진 집 안을 들여다보며 생각

운신장; (아연아가씨의 아들을 찾으러 돌아온 김에 혹시나 해서 찾아와본 것인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구나.)

운신장; (진진아.) 스으! 구름처럼 허공으로 떠오르며 이진진을 떠올리고

운신장; (정말 위급한 상황을 만나면 몽운연형호의 힘을 깨우도록 해라.) (그럼 그곳이 어디든 내가 달려갈 테니...) 구름처럼 변해 사라지는 운신장

 

#109>

황금전장. 깊은 밤. 불이 거의 다 꺼졌는데

뇌옥 근처만 밝다. 뇌옥의 문이 열려있고 안쪽에서 환한 불빛이 흘러나온다. 무사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안을 보고 있고

뇌옥 내부. 횃불이 여기저기 걸려있어 환한데

청풍이 갇혀있던 감방의 철문이 열려있고 철문 밖에는 몇 명의 황금수라들이 서있다.

감방 안쪽. 벽세황과 이세창이 서있고. 그 앞에서 귀견수가 간수1의 시체를 확인하는 중이다. 물론 간수1은 복면을 벗은 상태고. 감방 안에는 간수2, 3, 4가 두려움에 떨며 서있다.

귀견수; [상처는 크지 않지만 치명적이었소.] 간수1의 목 상처를 살피면서

귀견수; [뭔가 뾰족한 것으로 찔렀는데 경추 사이를 정확히 파고 들어가서 숨통을 끊어놓았소.] [이 정도로 치명적인 일격은 일류고수라도 쉽게 가할 수 있는 게 아니오.]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고

이세창; [이청풍, 그 새끼가 도축하던 솜씨로 간수장을 죽였군.] 이를 부득 갈고

벽세황; [할 말 있으면 해봐라.] 간수2, 3, 4에게

간수2; [... 이가놈은 쇠붙이로 벽을 긁어서 간수장의 신경을 건드렸습니다요.] 벽에 생긴 긁힌 흔적을 가리키며 말하고

간수3; [그 도발에 넘어간 간수장이 감방으로 들어오자 기습을 해서 죽인 것 같습니다.] 눈치 보며

간수4; [간수장을 죽인 이가놈이 간수장의 복면과 옷으로 갈아입고 빠져나가는 바람에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벽세황; [저놈들 끌고 가서 치워라.] 문쪽에 서있던 황금수라들에게 신경질적으로

[... 소장주님!] [... 제발 자비를...] 기겁하며 물러서는 간수2, 3, 4. 하지만

! ! 그자들의 목을 움켜쥐는 황금수라들. 눈이 돌아가며 말을 못하는 간수2, 3, 4

간수들의 목을 잡은 채 끌고 나가는 황금수라들. 목이 잡히는 바람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 채 끌려 나가는 간수들. 긴장하며 보는 이세창

벽세황; [총관!]

이세창; [예 소장주님!] 눈치 보며 급히 대답하고

벽세황; [죽이든 살리든 상관하지 않겠소.] [이가놈을 끝장냈다는 증거를 가져오시오.] 이를 부득 갈고

이세창; [분부 받들겠습니다.] 포권하고. 이어

이세창; [... 가세!] 서둘러 뇌옥에서 나가며 황금수라들에게 외치고

귀견수와 황금수라들을 이끌고 서둘러 뇌옥 입구로 가는 이세창

벽세황; (아직 멀었다 벽세황!) 이를 부득 갈고

벽세황; (좀 더 모질었어야했다.) (이가놈을 바로 죽여 버렸으면 후환이 없었을 것을...) 간수장의 시체를 보고

벽세황; (앙심을 품은 그놈이 소소의 추문을 무림맹에 고자질하려 들 건 의심의 여지가 없고...) (소소를 이용해서 무림맹을 장악하려던 내 원대한 야망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벽세황; (기필코 이가놈을 잡아 죽여야만 한다.) 강렬한 표정

 

#110>

새벽. 인적 없는 강가의 길. 안개가 끼어있는 그 길을 달려가는 마차. 그리 크지 않은 마차를 모는 것은 물론 이산하다. 허리에 칼을 차고 있고

이산하; (아슬아슬하게 금릉을 빠져나오는 데는 성공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성문이 닫혀서 금릉을 벗어나지 못할 뻔했다.)

이산하; (그후 밤새 동쪽으로 달려 단양(丹陽)이 이제 멀지 않았다.) (단양에서 배를 타면 대운하를 통해 태산(泰山) 쪽으로 갈 수 있다.)

이산하; (태산에는 무림맹의 총단이 있다.) (태산 근처에만 가도 단지회 놈들은 겁을 먹고 추적을 포기할 것이다.)

이산하; (진진이엄마가 태산쪽으로 가자고 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같기도 한데...) + [!] 생각하다가 눈 치뜨고

구우! 비둘기 몇 마리가 마차 위를 지나간다. 뒤에서 날아와 마차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모습이고

이산하;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날아다니는 비둘기라면 혹시...) 이마에 손을 대고 비둘기들을 올려다본다.

날아 지나가는 비둘기들의 발목에 천이 묶여있다.

이산하; (역시 전서구다!) 긴장으로 굳어지고

이산하; (우리와 상관이 없는 전서구들일 수도 있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야겠구나.) 무언가 생각하고

 

#111>

흔들리는 마차 안. 마차가 작아서 내부도 그리 넓진 않고. 의자나 탁자도 없다. 마부석쪽으로 작은 쪽문이 있지만 닫혀있다. 진행 방향으로 바닥에 앉아있는 진삼낭. 등을 벽에 기댄 채 앉아있고. 진삼낭의 무릎에는 이진진이 곤히 잠들어 있다. 이진진의 머리를 쓰다듬는 진삼낭.

진삼낭; (미안하다 청풍아.) 입술 깨물고. 청풍을 떠올리고

진삼낭; (네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만...) (지금은 진진이를 지키는 게 우선이로구나.) 애잔한 미소

진삼낭; (이래서 핏줄보다 소중한 건 없다는 말이 생겼을 텐데...)

진삼낭; (널 내게 맡긴 아연아가씨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한숨. 그때

깨어나는 이진진

이진진; [어머니...] 고개 들고

진삼낭; [더 자거라. 아직 날이 밝으려면 한참 있어야한다.] 미소 지으며 이진진의 머리를 쓰다듬지만

이진진; [아니에요. 전 충분히 잤어요.] 일어나고

이진진; [어머니는 밤새 안 주무신 것같은데 눈을 좀 붙이세요.] 자세 바르게 하며 말하고. 하지만

진삼낭; [피곤하긴 하다만 잠을 잘 수 있을 것같지는 않구나.] 한숨

진삼낭; [곧 단양에 도착할 텐데...] [그곳에서 대운하를 통해 북경으로 가는 배에 타면 그때 자도록 하마.]

진삼낭; [다행히 네 오빠가 준 돈이 거의 다 남아있어서 배를 얻어 타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게다.] 소매 속에 들어있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만지고

이진진; [북경에는 아는 사람이 있는가요?] 눈치 살피며

진삼낭; [북경에는 없지만 태산 근처 제남(濟南)에는 지인이 몇 있단다.]

이진진; [태산에는 무림이라는 세계를 지배하는 무림맹의 총단이 있다던데...]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어요.] 눈치 보며

진삼낭; [어미가 무림인이 아닐까 생각해왔겠지?]

이진진; [어렸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어머니는 무공을 익히신 것같았어요.] 끄덕이고

진삼낭; [무공...] [익히긴 했지.] [비록 내세울만한 실력을 못되지만...] 아련한 표정으로 독백하고

말없이 기다리는 이진진

진삼낭; [진진이 너도 다 자랐으니 어미의 비밀을 알 때가 되었구나.] 미소 끄덕

진삼낭; [사실 어미는 무림맹 사람이었단다.]

이진진; [어머니가 무림맹 소속이었군요.] 흥분

진삼낭; [그렇긴 하다만 그리 대단할 게 없는 신분이었다.] [무림맹 맹주 철면무제님의 유일한 핏줄이신 섭아연 아가씨의 몸종이었을 뿐이다.]

이진진; [몸종이라 해도 무림맹주님의 외동딸을 모셨으면 절대 보잘 것 없는 신분은 아니었겠어요.]

진삼낭; [무림맹 내의 은밀한 사정은 누구보다 잘 아는 위치이긴 했다.] 끄덕

진삼낭; [다만 어미는 무공에 별 관심이 없어서 섭아연 아가씨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무공수련에 열심을 내진 않았단다.]

진삼낭; [그게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었지.] [무공만 제대로 익혔어도 그 후에 닥친 여러 번의 고난을 좀 더 쉽게 넘길 수가 있었을 텐데...] 한숨

이진진; (익힌 무공이 대단치 않은 것이라 오빠와 내게는 가르치지 않으셨겠구나.) + [헌데 어쩌다가 무림맹을 떠나시게 된 건가요?]

진삼낭; [어미는 섭아연 아가씨의 부탁을 받고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무림맹을 떠났었단다.]

진삼낭; [하지만 곧 원수들이 알아차리고 추적을 했는데...] [절체절명의 순간 네 아버지가 도와주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마차 앞쪽을 보며

진삼낭; [네 아버지가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된 것은 그때 어미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다친 후유증 때문이었다.]

이진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마부석 쪽을 보고

 

#112>

[!] 마부석의 이산하의 눈이 부릅떠지고

마차가 달려가는 멀리 앞쪽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산하; (이런...) 급히 말 고삐를 당겨 마차의 속도를 줄이고

이산하; (이른 새벽에 이런 외진 길가에 어슬렁거리는 놈들이라면...) 긴장한 채 머리 앞을 보고

<흑사회의 파락호들이다!> 네 명의 건달들이 길을 막고 서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모습 배경으로 이산하의 생각 나레이션. 안개가 제법 짙게 끼어 있어서 그자들은 아직 마차를 발견하지 못했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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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天祿如意

 

 

객실의 창으로는 별빛이 쏟아지고,

침대 곁에 가져다 놓은 화로(火爐)에서 파란 연기가 실날처럼 피어올라간다.

(이 녀석이 엉뚱한 짓을 하면 즉시 죽여 버려야지.)

이매봉은 손가락 끝에 은밀히 공력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다.

(정말 죽기는 죽을까?)

장검에 심장을 관통당하고도 멀쩡했던 걸 생각하면 죽일 수 있다는 확신도 잘 들지가 않는다.

그리고 일곱째라는 장군묵도 마음에 걸린다.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현천록은 거울을 보며 자기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변신을 한다더니 겨우 거울이나 보는 거였나? 이 밤중에 설마 사내 녀석이 단장하고 나가는 건 아닐 테고... 아니, 혹시 모르지. 기녀를 찾아갈 수도 있으니까.)

이매봉은 취해서 잠든 척하며 현천록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현천록은 거울을 보고, 정확하게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의 눈을 보면서 나직하지만 아주 분명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현천록이다. 나는 열다섯이고 아주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시를 사랑하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이매봉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속으로 잘도 변신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현천록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계속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매봉은 가소로워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함께 있으면서 비밀을 탐지해내고 하는 것도 바로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깔깔 웃고 말했다.

[! 이 녀석아! 제발 그만 웃겨! 네가 뭔데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그래? 황제한테도 그런 힘은 없어.]

현천록이 슬며시 웃었다.

[다 들었어요?]

이매봉이 침대에 가부좌를 하고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뀐다.

[들으라고 중얼거리는 소릴 누가 못들어.]

현천록이 말했다.

[내 말은 진짠 걸요.]

이매봉이 고개를 약간 돌려 흘겨보며 물었다.

[정말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현천록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변신만 하면 뭐든 안될까요?]

이매봉이 소리쳤다.

[그놈의 변신! 변신! 변신! 병신같은 녀석! 네가 뭐 손오공이라도 되는 줄 알아!]

현천록이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으음! 변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변신은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에 불과해요. 직접 보지 않으면 못 믿겠지만.]

이매봉은 기가막힌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아! 이녀석 아예 날 상대로 사기칠려고 작정을 했군. 그럼 증거를 한 번 보여 봐!]

현천록이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요. 나와 함께 있으면 곧 알게 되겠죠.]

[뭐야! 벌써 허풍이었다고 고백하는 거야?]

이매봉이 이죽거렸다.

[급해할 것 없어요. 사람이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해가 뜨는 법이니까요.]

현천록은 천연덕스럽고 말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이매봉이 소리쳤다.

[어딜 가?]

현천록이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함께 자요?]

이매봉이 멍하니 있다가 깔깔 웃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함부로 말하면 내 손에 죽게 될 거다.]

현천록은 잘 자라 하곤 문을 닫았다.

 

X X X

 

현무호(玄武湖)는 금릉성의 열세 개 성문 중 현무문 밖에 있는 큰 호수다.

호수에는 다섯 개의 섬이 있으며, 그 섬들은 모두 교각과 토담으로 호수 밖 땅과 이어져 있고, 섬마다 정자와 누각이 서있어 현무호에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달빛은 교교하고 달빛을 받은 눈은 은세계를 호숫가에 펼쳐놓는다.

하늘은 달과 별과 무수한 영웅들의 운명을 담고, 호수는 하늘을 담고 땅 위에 펼쳐져 있다.

성벽 위를 오가는 한 쌍의 파수꾼들 머리 위로 잠들지 못한 밤새들이 나는데,

삘릴리...!

엷은 선으로 하늘을 가둔 호수 위로는 끊일 듯 이어지며 애절한 퉁소 소리가 흐른다.

사람은 고적하여 머리를 떨구고 고향을 생각하며, 소리에 취한 노루 한 마리가 모가지를 길게 뽑아 달을 본다.

별똥별 하나는 하늘에서 떨어져 호수가로 사라지고, 나직한 사람의 한숨소리는 애꿎은 이의 가슴에 떨어진다.

퉁소소리 끊인 곳에 고루의 북소리가 이경(二更)을 알리고, 밤바람이 언 눈을 쓸어 은가루를 뿌린다.

계명사(鷄鳴寺) 활몽루(豁蒙樓)는 현무호를 보기에 제일 좋은 곳, 사람 있어 좋고 현무호가 있어 아름답다.

현천록은 호반을 거닐며 퉁소소리를 듣다가 취한 듯 끌려 계명사로 왔다.

활몽루는 잘 보이건만 들려오던 퉁소소리는 사라지고 찬바람이 귀청을 얼릴 듯하다.

계명사의 문은 닫힌 지 오래지만 현천록은 활몽루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음률은 모르지만 이 퉁소소리는 너무도 그의 심금(心琴)을 울려 놓았다.

현천록은 흰색 담장을 날아 넘었다.

계명사의 승려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아니면 추위 때문인지, 나 다니는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다.

현천록은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눈 위를 걸으며 활몽루로 향했다.

활몽루에서 언뜻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청하는 손님은 오지 않고 청하지 않은 손님만 왔구만.]

창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현천록은 좀 더 다가가 불당의 그늘에서 누각 위를 보았다.

어깨에는 붉은 수실이 날리는 보검을 메고 머리에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푸른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가 퉁소로 막 올라온 듯한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사가 가리키는 인물은 현천록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오늘 낮부터 알게 된 사람이긴 하지만,

커다란 낭아봉에 삐죽삐죽 돋아있는 강철이빨이 달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바로 생사탄의 일곱 번째라는 칠척거인 장군묵이다.

장군묵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소코도사! 당신은 불과 사흘을 기다렸지만 나는 삼년을 기다렸소.]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냐?]

늙은 도사가 호통을 쳤다.

장군묵이 웃으며 말했다.

[도사! 도사와 나는 인연이 없지 않소. 하나 그 인연을 말하기 전에 도사는 좀 너그러움을 지녀야겠소.]

늙은 도사가 흉폭한 살광을 발하며 말했다.

[건방진 놈! 감히 노도에게 망발을 하다니! 네놈 사조라도 노도앞에선 고개를 숙일 텐데...]

장군묵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이런! 도사! 잘 들으시오. 도사에게는 내가 불청객이겠지만 내게는 도사가 삼년을 기다린 손님이오. 손님이 너무 무례한 건 아니오?]

현천록은 장군묵을 발견한 후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낮에 만나본 장군묵의 성격을 생각해볼 때 저런 모습은 조금 이상한 데가 있었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아주 멸시하는데 저 도사에 대해서는 꽤 참을성을 발휘하는구나. 저 도사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서 일까?)

늙은 도사가 휙 돌아서며 말했다.

[노도는 여기서 옛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냥 간다면 몰라도 더 이상 귀찮게 한다면 네놈은 목을 두고 가야 할 것이다.]

장군묵이 도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무당에서 삼백년 내 최고수라 불렸던 진양진인(眞陽眞人)이 이토록 답답한 놈일 줄이야.]

진양진인이라 불린 늙은 도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육십년 만에 노도를 알아보는 자를 만났군.]

장군묵이 말했다.

[나는 소코도사 당신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삼년을 기다렸지. 쓸데없는 생각말고 순순히 대답해주시오.]

늙은 도사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치면 가운데 손가락을 둥글게 말았다가 튕겼다.

쌔앵!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어나며 푸른 빛줄기가 장군묵의 왼쪽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장군묵이 낭아봉을 살짝 치켜들어 막으며 냉소했다.

[오행지(五行指) 중에서 청목지(靑木指). 백금지(白金指)와 적화지(赤火指)도 함께 펼쳐야지.]

진양진인이 흠칫 놀라 손을 멈추고 말했다.

[넌 누구냐? 어떻게 오행지를 알고 있느냐?]

장군묵이 껄껄 웃었다.

[오행지가 뭐 대단하다고 놀라? 태극혜검(太極慧劒)이나 자하천강신공(紫霞天罡神功) 쯤 된다면 몰라도.]

진양진인이 장군묵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장군묵이 빙그레 웃었다.

진양진인의 턱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설마... 설마... 당신이 본파에서 전설로 전해오는 창허진인(蒼虛眞人)은 아... 아니겠지?]

장군묵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사한텐 안된 일이지만 옛날엔 그렇게도 불린 적이 있지.]

진양진인이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고 말했다.

[사대 제자 진양이 존장을 뵙습니다.]

장군묵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절이나 받자고 찾은 게 아니다. 나는 이미 무당을 떠났으니 내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지.]

진양진인이 떨면서 말했다.

[본파의 제자들은 진인께서 아직 세상에 계신 줄 알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장군묵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도사가 살아있는 줄 알아도 마찬가지일 텐데.]

진양진인이 아무말도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장군묵이 말했다.

[아직 도사가 만나기로 한 친구는 오지 않는 모양이군.]

진양진인이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 오늘이 정한 날의 마지막 날입니다. 반드시 날이 새기 전에 올 것입니다.]

장군묵은 난간에 걸터앉았다.

[삼년 전에 나는 도사를 처음 보았소. 그리고 그 중놈과 약속하는 것을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땐 도사를 붙잡고 물어볼 수가 없었지. 빌어먹을! 나도 쫓기는 중이었으니까.]

진양진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엇이든지 하문하십시오.]

장군묵이 불쑥 물었다.

[도사는 지난 한 갑자 동안 어디에 있었소?]

진양진인의 잔등이 가늘게 떨렸다.

떨면서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그것만은... 제자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장군묵이 낭아봉을 흔들면서 말했다.

[도사가 무당 출신만 아니라면 벌써 머리가 터져 뇌수를 뿌렸을 걸?]

진양진인이 더욱 웅크리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제자는 맹세에 묶인 몸인지라...]

장군묵의 눈이 불길을 토할 것 처럼 이글거렸다.

그의 전신에서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살기가 지나쳐서 유형화된 것이었다.

진양진인의 몸이 공포로 인해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장군묵이 입을 열고 느린 어조로 말했다.

[삼년전에 나는 도사가 펼친 수법을 보았다. 그건 결코 내가 알고 있는 무당의 수법이 아니었지. 무당의 수법이라면 모두 알고 있으니 내가 모르는 무당의 수법일 수도 없고. 더구나 내가 알기로는 현 무림에서 그런 수법을 쓰는 문파나 방회가 없다는 게 문제였지.]

[무슨 말씀이신지...]

장군묵이 말했다.

[그때 도사는 오늘 만나기로 한 중과 대결하면서 무공도 아니고 진법(陳法)도 아닌 요상한 수법을 펼쳤었지. 난 그 수법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도사가 어디서 그 수법을 배웠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바로 그 순간, 진양진인이 갑자기 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퍼엉!

가죽 북이 터지는 듯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현천록의 눈에는 활몽루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것으로 보였다.

장군묵이 고함치는 소리도 들렸다.

[바로 이 수법이었지!]

현천록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눈앞에서 활몽루가 아지랑이로 변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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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덤에서의 하룻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막비강은 나직한 떨림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드는 순간 막비강은 자신의 몸 아래 무언가 따스하고 뭉클한 물체가 깔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따스하고 뭉클한 물체가 나직이 떨며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고 보니 내가 헌원여호 아주머니와...!)

막비강은 문득 간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닫고 질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손바닥 가득히 뭉클하는 살덩이가 만져졌다.

눈을 뜬 막비강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막비강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만 헌원여호의 한쪽 가슴을 누른 것이다

[...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막비강은 더듬거리며 급히 헌원여호의 가슴에서 손을 떼며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헌원여호의 벌려 세운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된 막비강은 다음 순간 숨이 콱 막히는 충격을 받고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 무렵 어느덧 날이 밝아 고묘 입구로 밝은 햇살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리 넓지 못한 석관 속인지라 막비강은 헌원여호의 드넓은 육체 위에 엎드린 자세로 잠이 들어 있었다.

석관 바닥을 가득 메운 채 누워있는 헌원여호의 자세는 실로 뇌쇄적이었다.

저고리는 벗겨져 있고 치마는 허리춤까지 걷혀 올라가 있었다.

석관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헌원여호는 석관 속에 반듯하게 눕고 자신의 몸 위에 막비강을 태운 자세로 잠이 들었었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한 아름이 넘는 육중한 허벅지는 비스듬히 벌려 세워져 있었다.

벌려 세워진 허벅지 중심부에는 막비강이 헌원여호에게 동정을 바치고 한 명의 어엿한 사내가 되었다는 증거가 보였다.

(안 돼!)

막비강은 실색을 하며 급히 석관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헌데 그 순간 그의 허리를 잡아 부드러우나 단호하게 끌어당기는 손이 있었다.

막비강이 놀라 내려다보니 헌원여호가 그윽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나 막비강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 아주머니!]

막비강이 어찌할 줄 몰라 더듬거리려는데 헌원여호가 손을 내밀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

[네 도움이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분면색마의 마수에 떨어져 비참한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네게 입은 은혜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가 없겠구나!]

헌원여호는 암호랑이라는 무림의 평판과 달리 너무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견마지로를...!]

말하던 헌원여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막비강이 울상을 지으며 아랫도리를 두 손으로 가리려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

(요 색골 꼬마가...!)

헌원여호는 당혹한 표정이 되었다.

본래 그녀는 사내를 버러지처럼 아는 성격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정 내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의 부친 사해신존 헌원궁은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는 옛말을 그대로 실천한 인물이었다.

사해신존은 숱한 여자를 사랑하여 여러 명의 자식들을 낳았었다.

헌원여호도 사해신존이 칠순이 넘어 손녀 같은 어린 시녀를 건드려 낳은 자식이었다.

시녀였던 어머니의 비천한 신분이 어린 헌원여호에게 큰 상처를 주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녀의 성격이 비뚤어진 것은 철이 들기도 전에 당한 난행(亂行) 때문이었다.

유달리 조숙한 그녀를 배다른 오라버니가 욕정의 제물로 삼아 버린 것이다.

 

헌원여호는 어렸을 때도 성장이 빨랐다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이미 처녀티가 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물론 체격만 컸지 그녀는 여전히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였다.

헌데 그런 그녀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복 오빠가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헌원여호의 이복오빠는 언제부터인가 그녀에게 아주 살갑게 대했다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이런 저런 장난감이나 소품들도 자주 선물해주었다.

대신 툭하면 끌어안기도 하고 몸의 여기저기를 만지기도 했다.

기분이 좀 이상하긴 했으나 어린 헌원여호는 이복 오빠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무슨 낌새를 챘는지 그녀의 어머니는 가급적 그녀를 이복오빠와 단 둘이 있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녀출신인 헌원여호의 어머니는 본처처럼 한가한 신세는 아니었다

늙은 남편의 시중을 비롯하여 이것 저것 할 일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딸을 혼자 두는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봄날 마침내 사단이 벌어졌다.

늘 다정하던 이복오빠가 전혀 딴 사람처럼 변해 그녀를 유린한 것이다.

그렇게 헌원여호는 아직 철이 들기도 전에 순결을 잃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이복오빠에게....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이 헌원여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그 일이 그녀로 하여금 사내라면 버러지만도 못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만일 다른 사내가 자신의 몸에 야심을 품었다면 그 즉시 상대의 눈알을 뽑아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순진무구한 어린 소년과 살을 섞은 그녀는 더 이상 강호에 알려진 그 무서운 암호랑이가 아니었다.

 

헌원여호는 간밤의 경험이 막비강으로서는 처음임을 모를 리 없었다.

치욕스런 첫 경험으로 그녀 자신이 어떤 상처를 입었던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막비강이 혹여 자신과 같은 상처를 입지나 않을까 근심하게 된 것이다.

그와 함께 억눌러 왔던 열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 어차피 이 아이에게 허락한 몸...!)

이미 막비강을 한차례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대담하게 만들었다.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겠구나!]

헌원여호는 발그레 상기된 표정으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미끈한 두 다리를 들어올렸다.

(허억!)

순간 막비강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 사이에 헌원여호는 벌려 쳐든 자신의 다리를 석관의 양쪽 모서리에 걸쳤다.

헌원여호도 다시금 흥분되어 숨을 할딱이며 막비강을 재촉했다.

드넓은 대지같은 헌원여호의 몸에 엎드린 막비강은 필사적으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막비강이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그는 혼자였다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고 헌원여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의복은 대충 입혀진 상태였는데 머리맡에 한 권의 비단책자가 놓여 있었다.

 

<헌원십팔해(軒轅十八解)>

 

고색이 창연한 그 책자의 표지에는 그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헌원여호 가문의 비전무공 중 하나인 헌원도법(軒轅刀法)의 비급이었다

헌원여호는 하룻밤 인연의 표시로 자신의 절기가 담긴 그것을 막비강에게 남긴 것이다.

 

<널 잊지 않으마!>

 

표지 안쪽에는 그 같은 글이 한 줄 적혀 있었다.

(저도 아주머니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막비강은 비급을 꼭 쥐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간밤의 일이 흡사 일장춘몽처럼 여겨졌다

막비강은 뜻밖의 상황에서 어엿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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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이진진이 갇혀있던 건물을 밖에서 본 모습. 경비서는 건달들이 건물 앞을 지나가고.

건물의 문이 조금 열려있고

그 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진삼낭. 진삼낭의 뒤에는 이진진이 두려움과 흥분에 떨며 서있고

건달들이 멀어지는 것이 문틈으로 보이고

진삼낭; [되었다. 이제 나가도 된다.] 끼익! 문을 열고 나가고

이진진과 함께 담장 쪽으로 가는 진삼낭. 뒤를 돌아보며

담장의 구석진 곳에 이른 모녀. 담장은 3미터가 넘고. 하지만

진삼낭; [엄마가 도와주마.] 뒤에서 이진진의 허리와 엉덩이를 잡고.

번쩍! 이진진을 들어서 위로 올려주는 진삼낭.

손을 뻗어 담장 윗부분을 잡는 이진진

이진진의 발바닥을 잡고 위로 밀어 올리는 진삼낭

힘겹게 담장 위로 올라가는 이진진

[!] 놀라는 이진진

담장 밖의 골목. 인적이 없는 곳인데 마차 한 대가 어둠 속에 서있다. 말 한 마리가 끄는 사람 타는 마차인데 그리 크진 않다. 그 마차 옆에는 이산하가 서서 올려다보고 있다.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고

이진진; (아버지!) 감격

두 손을 벌려서 뛰어내리라고 하는 이산하

뛰어내리는 이진진.,

두 팔로 받는 이산하.

콰당탕! 이진진을 안은 채 나뒹굴고.

이진진; [... 괜잖으세요 아버지?] 이산하를 부축하여 일어나고

이산하; [아비 걱정은 하지 말거라.] 일어나고

이산하; [미안하다 진진아! 미안해.] 딸을 끌어안고 우는 이산하

이진진;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버지.] 같이 끌어안고 우는 이진진

담장 안쪽에서 뒷걸음질 치는 진삼낭

심호흡하고

! 앞으로 달려가고

! 도약해서

휘릭! 단번에 담장 위로 올라서는 진삼낭. 진삼낭은 무공을 익히긴 했지만 막 하늘을 날아다닐 정도로 대단하진 않다.

이산하와 끌어안은 채 울다가 돌아보며 놀라는 이진진. 휘익! 진삼낭이 담장 위에 내려서고 있고.

이진진; (어머니가 무공을 지니고 계셨을 줄이야.) 놀랄 때

진삼낭; [서둘러요.] 휘릭! 뛰어내리고

진삼낭; [언제 단지회 놈들이 알아차릴지 몰라요.] 덜컹! 마차의 문을 열며 말하고

이산하; [... 알겠소.] 서둘러 마부석으로 올라가고

이진진을 먼저 마차에 태우고 자신도 타는 진삼낭

! 마차의 문이 닫히고.

이산하; [이랴!] 말 고삐를 채는 마부석의 이산하

두두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마차

 

#98>

황금전장. 밤이 깊었고.

뇌옥. 무사들이 입구를 경비하고 있다.

 

뇌옥 안.

입구쪽의 문이 열린 감 방 안에서 간수들 네 명이 마작을 하고 있다. 모두 복면을 쓰고 있는데 간수1이 덩치가 가장 크다. 이 감방은 간수들의 생활공간이라 이런 저런 집기들이 많다. 무기나 고문도구들도 있고. 그러다가

까각! ! 무슨 소리가 들려 움찔하는 간수들

간수1; [이거 뭔 소리야?] 문쪽을 보고

간수2; [쇠붙이로 돌 벽을 긁는 소리 같소.] 마작 패를 만지며

끼긱! ! 이어지는 소리

간수3; [이청풍, 그놈이 갇혀있는 감방 쪽에서 들리는 소리요.] 역시 마작 패를 만지며

간수4; [그놈 설마 수갑이나 족쇄로 돌벽을 뚫고 나갈 생각인가?]

간수2; [두께가 세자가 넘고 쇠같이 단단한 오석을 어느 세월에 뚫어?] 복면 속에서 웃고. 그때

간수3; [됐어! 삼색동순(三色同順;마작의 족보)!] 달칵! 자기 패들을 뒤집어 모두에게 보여주며 웃고

[이런!] [당했구만!] [젠장!] 다른 세 놈 자기들 패를 허물어 버리며 투덜대고. 그때

기익! 끼기긱! 이어지는 쇳소리

간수1; [저 찢어죽일 놈 때문이다,] 벌떡 일어나고

간수1; [정신 사나워서 도무지 패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 ! 몽둥이를 하나 잡고

간수1; [저 새끼하고 한바탕 놀고 올 테니 너희들끼리 한판 돌아라.] 몽둥이를 들고 입구로 나가고

간수3; [아주 죽이지는 마십쇼. 장주님으로부터 죽이라는 지시가 내려온 건 아니나...] 마작 패를 섞으며 말하고

 

#99>

복도를 걸어가는 간수1. 끼익! 끼긱! 그 사이에도 소리가 이어지고

간수1; [이청풍! 네놈이 아주 매를 버는구나.] 복면 ,속에서 이를 갈며 청풍의 감방으로 다가가고

옆구리에 찬 열쇠꾸러미를 벗이며 철문 위쪽의 틈으로 안을 보는 간수1

끼긱! ! 청풍이 등을 보이는 자세로 벽을 향해 앉아서 손목에 찬 수갑으로 벽을 긁고 있다. 발목에 차고 있던 족쇄를 풀었지만 벽을 보고 앉아있어서 그 사실이 안 보인다.

간수1; [오냐! 오늘 저승이 어떤 곳인지 살짝 구경하고 오게 해주마.] 철컥!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리고. 이어

철컹! 문을 열고 들어가는 간수1. 하지만

끼긱! ! 청풍은 돌아보지 않고 수갑으로 벽을 긁고 있고

간수1; [우리 신경을 긁어대는 걸로 복수를 할 생각인 것 같은데...] 열쇠고리를 허리에 차며 안으로 들어서고. 문은 열린 상태

간수1; [먼저 내 몽둥이찜질부터 견뎌야할 것이다!] 몽둥이를 쳐들어 청풍을 내리치려 하고. 바로 그때

부악! 철컹! 앉은 채로 홱 돌아서며 족쇄를 강하게 휘두른다. 간수1의 정강이를 노리고

빠캉! 간수1의 정강이를 강타하는 족쇄의 끝 부분들

간수1; [끄악!] 비명 지르는 간수1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다음 순간

! 청풍의 손에 들린 가는 쇠꼬챙이가 간수1의 목을 아래에서 찌른다. 복면 아래쪽에서 위로

간수1; [끄윽...] 복면 속에서 눈을 까뒤집고

 

#100>

<끄악!> 마작 하던 놈들 귀에 들리는 간수1의 비명

간수2; [시작했구만.] 마작하면서 웃고

간수3; [걱정이야. 간수장 성격에 빡치면 이가놈을 죽일 수도 있어.]

간수4; [후환을 모르지 않을 테니 죽이진 않을 걸세.] [신경 끄고 빨리 패나 가져가.] 마작에 열중하고

 

#101>

다시 청풍이 갇혀있던 감방

따당! 들고 있던 몽둥이를 떨어트리는 간수1. 몸이 앞으로 기울어져 청풍의 몸 위로 쓰러지려 한다

청풍; (금강불괴가 아닌 한 느닷없이 정강이를 맞으면 극심한 고통에 몸이 앞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쇠꼬챙이를 간수1의 목에 깊이 찔러 넣은 채 눈 번득이고

청풍; (그럼 짧은 쇠꼬챙이로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지.) ! 일어나며 다른 손으로 간수1의 뒷덜미를 움켜잡아서 쇠꼬챙이가 더 깊이 목에 파고 들어가게 하고

간수1; [... 이 새끼...] ! 양손으로 청풍의 목을 마주 움켜쥐며 벌벌 떨지만

꾸욱! 목이 조여지면서도 쇠꼬챙이를 더 깊이 밀어 넣는 청풍

부르르! 청풍의 목을 조이던 간수1의 손이 떨리고. 다음 순간

퍼억! 청풍의 옆으로 나뒹구는 간수1

청풍; [헉헉!] 옆으로 주저앉으며 헐떡이고

청풍; (가축이 아닌 인간을 죽였다.) 옆에서 죽어가며 벌벌 떠는 간수1을 보고

청풍; (인간으로서는 해선 안되는 짓이지만 죄책감도 후회도 들지 않는다.) (지난 며칠간 겪은 풍파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메말라버린 때문일 것이다.) 간수1의 복면을 잡고

청풍; (이자를 죽이지 않으면 여길 살아서 나갈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 간수1의 복면을 벗긴다. 복면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추악하게 생긴 얼굴이다.

 

#102>

대경도장. 깊어지는 밤. 여전히 흥청. 입구를 건달들이 지키고 있고. 그러다가

건달4; [왕융, 이 새끼 오줌을 얼마나 오래 싸는 거야?] 건달3이 오줌 누러 간 골목 쪽을 보며 오만상 쓰고

[오줌 싼다는 핑계로 샌 거 아니야?] [왕융이 놈 요즘 도화루의 춘앵이 년한테 빠져 있잖아.] 다른 놈들도 궁시렁대고

건달4; [일 팽개치고 농땡이 치러 간 거면 그냥은 못 넘어가지.] 골목으로 가고

건달4; [누군 좋아서 경비서는 줄 아나?] 궁시렁 대며 골목으로 들어가고. 헌데

[끄으으...] 골목 어둠 속에 누가 바닥에 쓰러져 벌벌 떨고 있다. 그걸 보고 놀라는 건달4

[왕융!] 건달4의 비명 배경으로 골목 안에 쓰러져 있는 건달3의 모습. 아랫도리를 부여잡은 채 벌벌 떨고 있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고

 

#103>

다시 황금전장의 뇌옥.

뇌옥 내부. 간수들이 마작을 하고 있는 감방. 문이 열려있는데

마작 하던 세 놈이 흠칫! 하며 입구쪽을 본다. ! 누군가 열린 문 앞을 지나간다. 복면을 쓴 인물이다. 이자는 물론 간수1이 아니고 간수1의 복면과 옷을 입은 청풍이다. 복면을 쓰고 있을 때는 청풍(복면)으로 표기

간수2; [어디 가쇼?] 마작하며 묻고

청풍(복면); [피를 좀 봤더니 찜찜하다. 나가서 손 좀 씻고 오겠다.] 말하며 지나가고. 실제로 복면과 옷에 피가 묻어있다. 복면 뿐 아니라 옷도 간수1의 것으로 갈아입고 있다.

간수2; (목소리가 얇은데...) + [그러게 적당히 하지 그랬소?]

간수3; [우리끼리 패 돌릴 테니 피 냄새 지우고 오쇼.] 건성으로 말하며 마작하는 놈들

복도를 지나 뇌옥 입구인 철문으로 가는 청풍(복면).

청풍(복면); (마지막 고비다.) 눈 번뜩

청풍(복면); (이 철문만 통과하면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게 된다.) 떨리는 손으로 철문의 손잡이를 잡고. 이어

철컹!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밖에서 경비 서던 무사들이 돌아보고

무사1; [어딜 가나 간수장?]

청풍(복면); [이가놈 버릇을 고치려다가 피를 좀 봤소.] [우물에 가서 손 좀 닦고 와야겠소.] 철컹! 철문을 닫고

무사1; [죽이진 않았겠지?] 한숨

청풍(복면); [걱정 마시오. 살려는 뒀으니...] 무사들을 등지고 걸어간다.

무사1; [성질들 하고는...]

무사1; [하긴 저렇게 무자비하고 잔혹한 성질들이니 간수 노릇을 하고 있지.] 멀어지는 청풍을 보며 혀를 찬다.

청풍(복면); (드디어 뇌옥을 빠져나왔다.) 곁눈질로 뒤를 보며 흥분. 주먹 꽉

청풍(복면); (벽소소...) 벽소소를 떠올리고

청풍(복면); (생각같아서는 그년의 거처를 찾아가 화풀이를 하고 싶지만...)

청풍(복면); (진진이가 위기에 처해있을 테니 촌각을 아껴 대경도장으로 가야한다.)

청풍(복면); (조금만 더 기다려라 진진아. 오빠가 구해주러 갈 테니...) 서둘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청풍(복면)

 

#104>

뇌옥 내부

청풍이 갇혀있었던 감방, 철문은 닫혀있고

철문 안쪽, 벽쪽에 입구를 향해 등을 보이는 자세로 누가 누워있다. 양손과 발목에 수갑과 좃쇄가 채워져 있고 몸에는 피에 쩔은 누더기를 걸친 사내.

그 사내의 얼굴 보여주고. 물론 청풍이 아니라 간수장이다. 청풍이 그자와 옷을 바꿔 입었다. 목에 생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105>

다시 대경도장. 입구를 지키는 건달들이 뭔가 불안한 표정으로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고

도박장 내부. 이진진이 갇혀있었던 건물 앞에 여러 명의 건달들이 서서 웅성거리고 있다. 건달4와 동료들도 그 중에 있다. 열려진 문을 통해 건물 안쪽의 모습이 보이고

건달5와 건달6이 죽어있고 두 명의 나이 든 건달들이 살펴보고 있다. 그때

정필; [무슨 일이냐?] 뛰듯이 다가오고. 건달1과 건달2가 뒤따라오고. 급히 물러서고나 돌아보는 건달들

정필; [이가년이 도망쳤다는 게 사실이냐?] 분노하며 건물로 다가오고

[총관님!] [어서 오십시오.] 겁에 질리고 눈치 보며 굽신거리는 건달들

[!] 건물로 다가와 눈 부릅뜨는 정필.

건물 안의 모습. 건달5와 건달6이 죽어있고 살펴보던 건달 두 명은 옆으로 물러서있다.

정필; [어떤 놈 짓이냐?] 이를 부득 갈고

건달4; [... 왕융 말로는 범인은 나이가 좀 있는 계집이었다고 합니다.] 눈치 보며

정필; [나이가 있는 계집?] 눈 부릅.

건달5; [그리고 이각쯤 전에 뒷문쪽 골목에서 마차 한 대가 급히 빠져나가는 걸 본 놈들이 있습니다.]

정필; [그럼 뭘 기다리고 있어?] [당장 추적하지 않고!] 버럭 고함지르고

[... 죄송합니다 총관님!] [즉시 추격하겠습니다,] 겁에 질려 굽신거리는 건달들

정필; [회주님께도 지금 상황 보고하고 지원을 부탁드려라.] 눈 부라리며

[존명!] [분부 받들겠습니다 총관님!] 대답하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건달들, 건달1과 건달2만 남아있다.

정필; (이진진을 구해간 게 나이 든 계집이라면...) 걸어가며 이를 부득. 눈이 번들

정필; (이진진의 어미일 것이다. 내가 들이닥쳤을 때 집에 없었던...)

정필; (네년이 뭔가 내력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만...) (반드시 잡아서 딸 년과 함께 몸을 팔게 해주겠다.) 사악하게 웃고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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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3)

 

 

현천록은 장군묵의 손에서 빠져나와 일장 밖에 내려섰다. 공중에서 그가 움직이는 모습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장군묵이 현천록에게 말했다.

[무공을 익혀라. ! 하잘 것 없는 인간들을 상대하는데는 무공이 제일이다. 인간이란 것들은 그저 무공만 강하면 죽어드는 것들이니까.]

소녀가 검을 든 손을 흔들었다.

차라락!

갑자기 그녀의 손에 있던 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군묵이 말했다.

[저 수법은 어검술이다. 멀리 있는 적을 죽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검을 자기 옷속에 숨겨서 보관하기에도 편리하지. 저런 걸 익혀놓으면 괜찮을 게야.]

소녀의 얼굴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녀의 어검술을 알아본 사람도 지금까지 없었는데 거인이 대충보고 알아차리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오늘 내가 단단히 홀렸군. 당신들 사형제인가 본데, ! 난 이제 싸우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관두자고.]

그녀가 현천록에게 말했다.

[이봐! 감정갖지 마. 뭐 복수하겠다면 언제든지 받아주기는 하겠지만.]

현천록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마음 없어요.]

소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정말?]

현천록이 한걸음 물러섰다.

소녀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찌르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찔러도 소용없잖아.]

장군묵이 코웃음쳤다.

[! 하찮은 인간이.]

소녀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봐요! 자꾸 날더러 하찮다고 하는데 당신은 하찮은 인간이 아니면 대체 뭐죠? ?]

[!]

장군묵은 코웃음을 치고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가 깔깔 웃었다.

[그봐요. 자기도 대답하지 못하면서. 꼬마야 그렇지 않아?]

현천록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한테 그래봤자 소용없어요. 나도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소녀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내 속을 들켜버렸네. 할 수 없지. 그럼 우리 친구할까? 친구사이엔 비밀도 조금씩은 나누잖아.]

현천록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생각하며 소녀를 보았다.

소녀가 옆에 와서 말했다.

[난 이매봉(李梅鳳)이야. 넌 현천록이지? 아니 미장이라고 했던가?]

장군묵이 현천록의 손을 잡고 끌며 말했다.

[저 여자는 무시해라. 아주 간살스러워서 가까이 하면 골치아픈 일만 생길게다.]

현천록이 말했다.

[당신은 무공을 어떻게 익혔어요?]

장군묵이 말했다.

[? 난 하하하! 처음에 무당파에 들어갔지. 무당파에 들어가서 칠년쯤 있으니까 더 배울게 없어지더군. 가르쳐 주는 건 그대로 배우고 가르쳐 주지 않는 건 훔쳐배웠지. 그 다음에 공동파에 가서 삼년을 있었고, 다시 화산파에서 오년을 배웠지. 공동파 놈들과 화산파 놈들은 내가 배우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 정도 배우고 나니까 더 배울 필요가 없어서 그만두고 그때부턴 온전해지려고 세상을 계속 여행하고 있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르지.]

현천록이 말했다.

[말씀해주시겠어요?]

장군묵과 현천록이 강변을 따라 걷고, 이매봉이 현천록의 옆에서 다정한 사이처럼 나란히 걷는다.

장군묵은 철저히 그녀를 무시하며 말했다.

[보초님은 옛날에 고향인 천축(天竺)의 무공을 배우셨고, 첫째와 둘째, 셋째는 원래부터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넷째는 혼자 연구해서 자기 무공을 몇 가지 만들었고 다섯째는 아예 무공을 배우지 않았지. 여섯째는 뒤늦게 남의 제자노릇을 해서 지금은 한 문파의 장문인 소릴 듣고 있고, 여덟째는 뭐하는지 모르겠다. 싸돌아 다니는 건 알겠는데 도통 말을 하지 않으니까. 뭐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겠지. 난 이제 가마.]

나란히 걷던 장군묵의 모습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져버렸다.

바람에 갈대가 날리고 장강 물이 흔들리지만 그 못지 않게 이매봉의 눈도 흔들렸다.

소매 속에서 주먹이 가볍게 쥐어졌다.

현천록은 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

이매봉이 현천록의 손을 잡더니 손등을 꼬집었다.

[아야!]

현천록이 비명을 질렀다.

이매봉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꿈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현천록이 탄식하며 말했다.

[난 사람도 아니예요.]

이매봉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날 속이려고 어림도 없어. 너나 그 거인녀석이나 다 비밀이 아주 많은 문파에 속해있는 사형제지간이겠지. 너무 신비한 척 하지 말라구.]

현천록은 개구쟁이처럼 혀를 쏙 내밀었다.

시간이란 강은 넓고 넓어서 슬픔도 기쁨도 아주 빨리 쓸어가 버린다.

흘러가는 시간 속의 일들은 붙잡고 있으면 있는 만큼 고통만 커진다.

현천록은 어리지만 보낼 건 빨리 보내고 다가오는 것들을 즐겨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x x x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꽤 유명한 객점인 선인루(仙人樓)에 들어갔다.

이매봉이 혀를 차며 말했다.

[! 너 정말 사기꾼이지. 변신의 천재야! 모습은 바꾸지도 않고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낸다는 건 정말 여자들도 하기 힘든 고급스런 기술인데 말이야.]

현천록은 점소이가 안내하는 탁자로 다가가며 말했다.

[내 속엔 원래 여러 가지가 있었어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죠.]

이매봉이 맞은 편에 앉으며 웃었다.

[안 그런 사람도 있나?]

[난 항상 변신을 꿈꿨어요. 내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 그런 꿈을 꿨으니까요.]

현천록이 담담하게 말한다.

이매봉은 가짢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 뭘하겠다는 건데?]

[변신을 하겠어요. 아는 것만으로도 변신은 되겠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변신을 하겠어요.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도록.]

[얼씨구.]

이매봉이 코방귀를 뀐다.

[너같은 녀석은 정말 처음이야. 아주 웃겨.]

현천록이 말했다.

[난 원래 낙천적이었어요. 한데 다른 일이 조금 있었다고 낙천적으로 살지 못한다는 건 옳지 않죠. 지금보다 좀 더 낙천적으로 즐겁게 살겠어요.]

[누가 말려?]

[매봉누님 말씀이 맞았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즐겁기만 하면 되는 거죠. 나 이전에도 도둑놈들이 있었고 사기꾼들도 있고 강도도 있었을 테니까 도둑이나 강도가 하나쯤 더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죠.]

[누님? 큭큭! 이런 걸 점입가경이라 하겠지?]

이매봉이 기가막힌 듯 소리를 낮추고 웃었다.

현천록은 진지하게 말했다.

[강도, 사기꾼, 도둑, 거지, 학자.... 난 뭐든 다하겠어요. 뭐든 다 되어보고, 즐겁게 살겠어요.]

[왜 여자도 한 번 되어보지 그래?]

이매봉이 점소이가 가져다 놓은 말리화(茉莉花) 차를 마시며 빈정거린다.

현천록이 말했다.

[그것도 괜찮겠군요.]

푸웁!

이매봉의 입에서 차가 뿜어져 나왔다.

현천록은 자기가 알고 있는 요리란 요리는 모두 주문했다.

선인루의 주인은 현천록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고는 돈 많은 공자라고 미리 지레짐작을 하고는 원하는대로 술과 요리를 갖다 주었다.

덕분에 이매봉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현천록은 처음 마시는 술에 얼굴이 붉어지고 조금 알딸딸해진 상태가 되었다.

[어떤 게 재미있을까요?]

이매봉이 약간 혀가 꼬인 음성으로 말했다.

[놀려주기, 때려주기, 골탕먹이기, 빼앗기, 속이기, 만들기, 배우기, 이기기, 죽이기, 지배하기, 애보기, 훔쳐보기, 뒤통수치기, 함정에 빠뜨리기. 물건사기, 보석감상하기, 꽃키우기, 닭잡아 먹기, 정의로운 척하기, 뽐내기..... 뭐 헤아릴 수도 없지. 남자라면 또 다른 것도 좀 있을 테고.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하면 그게 다 재미있는거야.]

[이제 계산해요.]

현천록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매봉이 따라 일어섰다.

몸이 조금 비틀거렸다.

[숙박비도 같이 계산해. 오늘은 너무 마셨어.]

이매봉이 현천록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주인이 잽싸게 주문표들 들고 와서 얼만지를 말해준다.

현천록은 이매봉에게 고개를 돌렸다.

[헤헤...]

주인이 이매봉을 보며 손을 비빈다.

이매봉이 소리쳤다.

[뭐야! 돈도 없이 먹고 마셨단 말이야?]

현천록이 태연하게 말했다.

[알고 있었잖아요.]

이매봉이 골치아픈 듯이 이마를 짚었다.

[이런.... 하는 수없지. 이걸로 계산해.]

소매 속에서 분홍색 주머니가 나왔다.

현천록이 주머니를 열자 그 속에서 콩알만한 주보(珠寶)들과 금원보(金圓寶)가 보였다.

금원보 하나로 값을 치르고 현천록은 이매봉을 끌다시피하며 삼층의 객실로 올라갔다.

이매봉이 눈을 감은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녀석이 설마 처음 변신한다는 게 채화음적(菜花淫賊) 따위는 아니겠지? 하여간 틈을 좀 보여 약간은 가까워져야겠어. 이 녀석도 이 녀석이지만 배후가 더 궁금하단 말이야. 장군묵인가 하는 녀석만 해도 도무지 추측할 수 없는 놈이었는데 그녀석이 겨우 일곱째라니.)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인데 몸이 푹신한 침상에 눕혀졌다.

그리고 현천록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첫 번째 변신을 하자.]

이매봉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이녀석이 정말 채화음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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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여전히 황금전장. 주방.

음식 만드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주방. 수많은 요리사들이 화덕에서 웍을 돌리며 요리를 하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탁자 위의 도마에 식재료를 놓고 칼질을 한다.

그 중 한 화덕에서 웍을 돌리며 요리하는 주대육. 주대육 뒤에는 요리사1이 방짜로 만든 큰 접시를 두 손으로 들고 대기중이다. 다른 요리사들이 힐끔거리며 보고

<별일이로군. 총주방장님이 직접 요리를 하시다니...> <그러게나 말이야. 오늘 저녁에는 딱히 귀빈이 들른 것도 아닌데...> 요리사들 곁눈질로 보며 생각할 때

이윽고 웍을 화덕에서 들어서 웍 안의 요리를 요리사1이 들고 있는 접시에 옮기는 주대육. 요리는 깍두썰기한 고기와 부추, 파등의 길쭉한 야채를 섞어서 볶은 요리다.

주대육; [되었다.] 웍을 접시에서 떼고

주대육; [식기 전에 갖다주고 와라.]

요리사1; [예 총주방장님!] 고개 숙이고

서둘러 주방에서 나가는 요리사1

웍을 다시 화덕에 내려놓으며 그걸 보는 주대육

주대육; (미안하다 청풍아.)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주대육;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로구나.) 벗은 모자로 이마의 땀을 닦고

주대육; (내 요리를 먹고 힘내서... 아무쪼록 뇌옥을 탈출하기 바란다.) 밖을 보며 소리없이 한숨 쉬고

 

#91>

뇌옥. 뇌옥 입구에 요리사1이 서있다. 두 손으로는 접시를 들었는데 접시는 반원형의 뚜껑으로 덮여있다. 뇌옥 입구를 지키고 있던 네 명의 무사들이 요리사1과 대화중이다.

요리사1; [총주방장님이 옛정을 생각해서 이청풍에게 주라고 만든 요리요.] 접시를 내밀며 말하고. 긴장한 표정

[죽어 마땅한 놈에게 총주방장님이 직접 요리를 해서 보내다니...] [이가놈에게 이렇게 과분한 대접을 해도 되는 건가?] 다른 무사들은 궁시렁 거리지만. 나이가 가장 많은 요리사는 심각한 표정이고

무사1; (장주님에 끼치는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총주방장은 본장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무사1; (그런 거물에게 미움을 사서 좋을 일은 없지.) + [간수장을 나오라고 해라.] 동료에게 말하고.

무사2; [예 당주님!] 대답하며 철문으로 가고

무사2; [간수장! 문 좀 열어보시오.] 땅땅! 손잡이에 달린 고리를 때리며 철문에 난 길고 좁은 환기구에 대고 외치고. 그러자

<무슨 일이오?> 철컹! 문이 열리며 말소리가 들리고. 이어

철문을 반쯤 열며 내다보는 복면을 쓴 간수1

무사1; [총주방장님이 이청풍에게 음식을 만들어 보내셨네. 가져다주게나.] 옆에 서있는 요리사1에게 간수1에게 가라고 고개짓하며 말하고.

간수1; [총주방장님의 요리? 중죄인에게 과분한 대접이로군.] 다가오는 요리사1을 보며 복면 속에서 눈 번뜩이고.

요리사1; [이청풍에게 잘 좀 전해주시오.] 접시를 내밀고

간수1; [그러지.] 덜컥! 말하며 접시를 덮은 반구형의 덮개를 열고.

그러자 드러나는 요리

간수1; [냄새 죽이는군.] 복면 속에서 코를 벌름. 이어

손가락으로 대충 음식을 휘젓고

요리사1; [... 무슨 짓이오?] 기겁하고

간수1; [음식 속에 혹시 이상한 걸 숨겼는지 확인하는 게 간수장인 내 의무야.] 이리저리 휘저어 보며

요리사1; [아무리 그래도 총주방장님께서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분노하는데

간수1; [화낼 거 없어. 난 내가 할 바를 하는 것뿐이니 총주방장님도 화를 내진 못할 게다.] + [이상없군.] 음식에서 손을 떼고

간수1; [요리는 틀림없이 이청풍에게 전해주었다고 총주방장님께 전해드려라.] 한손으로 접시를 잡고 다른 손으로 들고 있던 뚜껑을 요리사1에게 내밀고

요리사1; [총주방장님께는 내가 여기서 보고 들은 대로 전해드리겠소.] ! 간수1이 내미는 뚜껑을 낚아채며 화난 표정,.

이어 거친 걸음으로 뇌옥을 떠나는 요리사1

간수1; [아이구 무서워라. 너무 무서워서 오금이 다 떨리네.] 피식 웃으며 요리사1의 뒷모습을 보고

무사1; [그만 이청풍에게 요리를 가져다주게나.] 한숨 쉬며 들어가라고 손짓하고

간수1; [예예...] 냉소하며 그그긍! 안쪽에서 철문을 닫고

철컹! 닫히는 철문.

무사1; (어리석은 놈! 총주방장의 성질 건드려봐야 좋을 거 하나 없거늘...) 혀를 차며 철문을 보고

 

#92>

청풍이 갇혀있는 감방. 어둡다. 철문에 아래 위로 나있는 환기구로 불빛이 흘러들고

바닥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청풍.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멍하니 눈을 뜨고 있다. 물론 양 손목과 발목에는 수갑과 족쇄가 채워져 있다.

이진진과의 즐겁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자신의 팔을 잡고 웃던 이진진. 이진진을 업고 개울을 건너던 어린 시절의 자신. 좁은 방에 가족들끼리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웃던 모습. 도축장으로 가는 자신을 빈민가 입구에서 배웅하던 이진진의 모습 등. 하지만

건달들에게 끌려가며 울부짖는 이진진의 모습을 연상하고

청풍; (진진아!) 이를 악물고

청풍; (미안하다. 못난 오빠를 용서해라.) 주르르! 눈 꼬리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청풍; (네가 잘못되면 나도 더 이상 살아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끄윽! ! 필사적으로 울음 삼키며 울고. 그때

[웬 청승이냐?] 철컹! 철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간수1. 한손에는 접시를 들고 있고

간수1; [사내놈이 계집애처럼 질질 짜기나 하고...] [같은 사내로 창피하니 아랫도리에 달린 거 떼버려라.]

대답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는 청풍

간수1; [원한다면 어르신이 싹뚝 잘라줄 수도 있다.] 옆에 멈춰서며 히죽 웃고

여전히 대답 없는 청풍

간수1; [그 새끼...] 피식 웃고

간수1; [이래저래 낙심이 크겠지만 이거 먹고 힘내라.] [총주방장님이 널 위해 특별히 만들어보낸 요리다.] 접시를 청풍에게 내밀고. 그러다가

간수1; [어이쿠!] 일부러 손을 뒤집어 접시를 떨어트린다.

후두둑1 음식들이 청풍의 얼굴과 가슴에 쏟아지고. 움찔! 하는 청풍.

따당! 구리로 만든 접시가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간수1; [이를 어쩌나? 손이 떨려서 음식을 쏟아 버렸구만.] 히죽 웃고.

그래도 반응 없는 청풍

간수1; [어쨌거나 요리를 전해주라는 총주방장님의 지시는 이행한 셈이니 날 탓하진 마라.] 덜컥! 바닥에 떨어진 구리 접시를 집어들고

간수1; [배고프면 바닥에 쏟은 요리 주워 먹어라.] 흐흐흐! 웃으며 감방에서 나가고.

철컹! 다시 닫히는 철문.

청풍; (쓸데없는 짓을 하셨다.) 주대육을 떠올리며 우울한 표정

청풍; (두 번 다시 햇빛을 볼 수 없는 신세인데 맛난 요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철컹! 수갑으로 채워진 두 손을 움직여 얼굴과 가슴에 쏟아진 음식을 떼어낸다. 헌데

멈칫! 고기와 함께 볶아진 부추, 파등의 길쭉한 야채들을 얼굴에서 떼어내던 청풍의 손이 멈칫하고. 이어

청풍; (이건...) 집어든 길쭉한 야채를 올려다보며 눈 치뜨고

츠으! 다른 야채들과 섞여있는 꾸불구불한 철사. 상당히 굵은 철사인데 검게 코팅이 되어 있어서 부추나 파와 구분이 안되었다.

청풍; (쇠꼬챙이!) 흥분하여 철사를 올려다보고

청풍; (요리에 쇠꼬챙이가 끼어있었다. 검은색이 칠해져있고 부추와 파에 섞여있어서 눈에 뜨이지 않았다.) 올려다보며 흥분하고

청풍; (총주방장님!) 주대육을 떠올리며 힘겹게 일어나고

청풍; (이건 그분이 내게 보내주신 구원의 열쇠다!) 흥분하며 쇠꼬챙이를 보고

<이것만 있으면 수갑과 족쇄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제법 걸리겠지만...> 수갑에 난 구멍에 쇠꼬챙이를 끼우려 하며 흥분하는 청풍의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93>

금릉의 환락가. 불야성. 한창 흥청거리는 시간이다.

환락가 뒷골목. 도박장이 즐비한 곳.

그중 대경도장에도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건달들이 몇 명 입구에 서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고. 그러다가

건달3; [저녁 먹을 때 곁들인 반주 때문인지 오줌보가 터지겠구만.] 얍삽한 인상의 서른살쯤 된 건달이 오만상을 쓰며 다리를 꼬고

건달4; [내 그럴 줄 알았다. 반주치고 너무 많이 푼다고 했더니만...] 혀를 차고

건달3; [물 좀 빼고 올게.] 아랫도리를 부여잡고 옆의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고

건달4; [하여간 왕융 저 새끼는 술 욕심, 계집 욕심이 지나쳐서 문제야.] 혀를 차고. 다른 놈들도 공감하고

근처 골목에 숨듯이 서서 그걸 보는 여자의 실루엣. 진삼낭이다.

 

#94>

좁고 어둑한 골목. 음침해서 오가는 사람은 별로 없고

촤아! 골목 담벼락에 대고 오줌 싸고 있는 건달3

건달3; [휴우! 살 것 같다.] 부르르! 쏴아! 몸을 떨며 오줌을 싸고

건달3; [하마터면 바지에 그냥 지릴 뻔 했다.] 웃고. 하지만 그 직후

! 날카로운 칼끝이 건달3의 등에 닿는다. 옷을 뚫고 들어와 살갗에 조금 박히는 그 칼은 그리 길지 않은 휘어진 칼이다. 바로 진삼낭의 두 자루 칼 중 한 자루다.

건달3; (!) 기겁하는데

진삼낭; [큰 소리 내면 그 즉시 척추를 끊어버리겠다.] ! 뒤에서 칼을 건달3의 등에 댄 채 살벌한 표정

진삼낭; [그럼 평생을 앉은뱅이가 되어 지내야할 것이다.]

건달; (계집...) + [... 원하는 게 뭐냐?] 곁눈질로 뒤쪽의 진삼낭을 보며.

진삼낭; [네놈들이 저녁 무렵에 끌고 온 계집아이가 지금 어디 갇혀있는지 말해라.] 살벌한 표정으로

건달3; [... 계집아이라니...] 비지땀. 곁눈질하며

건달3;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 [!] 기겁하며 아래를 보고

! 진삼낭이 다른 칼을 건달3의 거시기에 대고 있다.

진삼낭;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환관으로 취직하게 해주겠다.]

건달3; [... 말하겠다. 그러니 제발 조심해다오!] 울상

 

#95>

대경도장의 안채.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안쪽에 건물들이 많다.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그 건물들로 도박꾼들과 몸 파는 여자들이 드나든다. 건물 안에서 야한 소리들도 들리고. 건물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건달들이 몇 보이고. 경비 서는 중이다.

그러다가 누군가를 발견하는 건달들.

여자 한명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쟁반을 들고 걸어간다. 여자는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어서 얼굴이 잘 안 보인다. 이 여자는 진삼낭이다. 들고 있는 쟁반에는 술병과 안주, 술잔이 얹혀져 있고

[저 년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온 들병이겠지 뭐.] 건달들이 진삼낭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고

진삼낭; (다행히 날 의심하는 자들은 없다.) (대경도장 내에는 도박꾼들에게 몸을 파는 여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건달들을 곁눈질로 보며 어느 건물로 가는 진삼낭.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한 건물이다.

진삼낭; (오줌 싸다가 내게 걸린 놈의 진술대로라면 진진이는 저 건물에 갇혀있다.) 초긴장한 채 건물로 다가간다.

 

건달3; [... 네가 말한 그년은 얼굴이 반반한 덕을 봤다.] 건달3이 겁에 질려 말하던 장면이 진삼낭의 머리에 떠오르고

건달3; [가족이 빚을 못 갚아서 끌려오는 년들은 바로 사창가에 넘기거나 도박장 내에서 몸을 팔게 되어 있었다.]

건달3 [하지만 그년은 워낙 미색이 뛰어나 총관이 욕심을 냈다.] [비싸게 팔아먹기 위해 흥정을 하다 보니 아직 다른 데로 팔려가지 않은 것이다.]

회상 끝

 

진삼낭; (아무쪼록 그자의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다.) 이를 바득 갈며 앞쪽 건물로 가고

 

#96>

건물 내부. 두 명의 건달이 탁자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다. 정필을 따라왔던 네 명의 건달 중 두 놈이다. 한쪽 구석에 놓인 더러운 침대에는 입에 재갈이 물린 이진진이 쓰러져 있다. 두 손도 뒤로 돌려진 채 광목천으로 묶여있고. 발목도 역시 광목천으로 묶여있다. 눈을 감은 채. 허리띠에는 운신장이 준 작은 호리병을 달고 있는 것 주의

건달5; [저 년 볼수록 대단한 물건이지?] 이진진을 보며 동료에게

건달6; [좀 병약한 게 흠이긴 하지만 얼굴은 그야말로 경국지색이야.] [이 바닥에 살면서 숱한 기녀들을 보았지만 저만한 미태를 지닌 년은 못 봤어.]

건달5; [그래서 총관이 흥분해서 사방팔방으로 구매자를 찾고 있잖아.]

건달6; [저년은 잘만 팔면 몇 만 냥을 받을 수도 있을 거야.] [그럼 총관은 한방에 신세 피는 거지.]

건달5; [비싸게 팔면 수고한 우리에게도 떡고물이 좀 떨어지겠지?]

건달6; [그랬으면 좋겠지만 총관이 워낙 짠돌이라 우리 몫이 떨어질지 모르겠구만.] 고개 젓고.

건달5; [하여간 아깝게 되었어.] [팔 물건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먼저 맛을 봤을 텐데 말이야.] 이진진을 보며 입맛 다시고

건달6; [경험 없는 계집들을 길 내주는 게 우리 역할이기도 하지.] 히죽거리고

진저리를 치는 이진진

이진진; (제발...) 두려움에 떨고

이진진; (진진이를 구하러 와줘 오빠.) 청풍을 떠올리며 울고. 바로 그때

덜컹! 문이 열리며 진삼낭이 들어온다. 한손으로 술병과 안주가 얹혀진 쟁반을 들고. 이진진은 눈을 감고 있어서 진삼낭을 못 알아보고

건달5; [어 네년 뭐야?] 흠칫! 하며 돌아보고. 건달6도 술 마시며 곁눈질로 진삼낭을 보고

진삼낭; [총관님께서 두 분이 수고하신다고 술을 보내셨어요.] ! 문을 닫으며 말하고. 순간

이진진; (이 목소리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엄마!> 쟁반을 들고 건달들에게 다가가는 진삼낭을 배경으로 이진진의 흥분

건달5; [총관님도 참 자상하시구만.] 경계 풀며 웃고

건달6; [어린 계집 감시하느라 지루할까봐 들병이를 보내셨어.] 히죽거리며 진삼낭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 직후

진삼낭; [물론 제가 가져온 건 술만이 아니랍니다.] 가까이 다가오고

건달5; [알아. 네년이 뭘 또 가져왔는지...] 히죽거리며 손을 뻗어 진삼낭의 엉덩이를 만지려 하고. 그 순간

! 콰창! 들고 온 쟁반을 그자의 상판에 강하게 처박는 진삼낭.

건달5; [!] 쟁반에 얹혀져 있던 음식과 그릇에 얼굴이 강타당하며 뒤로 나자빠지려는 건달5

건달6; [네년이..] 경악하며 급히 허리에 찬 칼을 뽑으려 하지만

스악! 오른손으로 왼쪽 소매 속에서 휘어진 칼을 뽑아 그대로 휘두르는 진삼낭

서걱! 목이 깊이 베이며 눈 치뜨는 건달6. 허리에 찬 칼을 뽑으려는 자세로

건달6; [!] 푸학! 베어진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앞으로 쓰러지려하고

건달5; [지랄...] 콰당탕! 나뒹굴며 얼굴에 묻은 음식을 손으로 쓸어내고. 하지만

건달5; [!] 일어나려다가 기겁하고. 진삼낭이 덮치며 두 손으로 칼을 거꾸로 잡고 내리찍는다

건달5; [... 안돼!] 손으로 막으려 하지만

! 그대로 건달5의 가슴에 칼을 깊이 찍는 진삼낭. 건달5의 몸을 깔고 앉는 자세로

놀라 일어나려는 이진진

건달5; [끄윽...] 눈을 까뒤집다가

털썩! 바닥에 널브러지는 그자의 팔 다리

진삼낭; [버러지들...] ! 일어나며 건달5의 가슴에서 칼을 뽑고

진삼낭; [감히 내 딸을 해꼬지 하려한 대가다.] 가슴에서 피가 뿜어지는 건달5의 시체에서 떨어지고. 건달6은 목이 반쯤 잘려 탁자에 엎어진 자세로 죽어가고 있다.

진삼낭; [안심해라 진진아.] 서둘러 침대로 가고. 이진진은 울고 있고

진삼낭; [엄마가 여기서 데리고 나가줄 테니...] 사각! 다가가 이진진의 손목을 묶고 있는 광목천을 칼로 잘라주고. 이어

이진진의 발목을 묶은 천도 잘라주는 진삼낭. 그 사이에 이진진은 입에 물려진 재갈을 자신의 손으로 끌어내리고.

진삼낭; [서두르자. 아버지가 뒷문 쪽에 마차를 대고 계실 것이다.] 이진진의 발목에 묶여있던 광목천을 제거하고. 순간

이진진; [흐윽!] 오열하며 진삼낭의 품에 와락 안기는 이진진. 놀라는 진삼낭. 하지만

진삼낭의 목을 끌어안고 바들바들 떨며 우는 이진진. 말은 하지 않는다

진삼낭;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진진의 등을 다독이고

진삼낭; (하지만 걱정마라. 어미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널 지켜줄 테니...) 결의에 찬 표정이 되고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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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1 자 이제 첫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2)

 

 

파릇파릇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순찰사자의 눈빛에 동추겸은 반쯤 얼어버렸다.

혈도를 제압당하고 양 팔의 뼈가 어긋낫지만 살기어린 순찰사자의 눈앞에서는 그걸 다 잊어버릴 정도다.

신화병기점의 일꾼들이 모두 눈밭에 엎드리고 있고,

순찰사자는 길길이 뛰면서 욕설을 퍼붓는다.

[동추겸! 이 미친 놈아! 네 놈이 쇠를 다루는 재주만 없었어도, 아니 회주님께서 큰 일을 맡겨 놓지만 않으셨어도 네 모가지가 백 번은 짤렸을 거다.]

동추겸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입안이 모두 터져서 양쪽 뺨이 복어처럼 부풀어 올랐다.

순찰사자가 고함쳤다.

[당장 벗어! 어디서 순찰사자의 옷을 주워입고 감히!]

동추겸은 어긋나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팔로 눈물을 찔끔거리며 토끼가죽 옷의 단추를 벗긴다.

순찰사자라고는 하지만 키가 훤칠한 처녀아이일 뿐이다.

동추겸은 속으로 재수가 옴붙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머리 속으로 뭔가 불길한 생각이 확 지나갔다.

여태까지 너무 맞아서 얼떨떨했기 때문에 생각지 못했다.

(가짜 순찰사자는? 그리고 금은동철석의 오보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동추겸의 손발이 와들와들 떨기시작했다.

너무 끔직한 결과가 연상이 된다.

동추겸은 그대로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순찰사자가 앙칼지게 고함쳤다.

[웬놈이냐!]

순간, 피웃! 소리와 함께 예리한 물건이 바람을 가르며 순찰사자를 향해서 날아오고 왔다.

[!]

순찰사자가 코웃음을 치면서 왼손을 뻗었다.

빳빳하게 펼쳐진 종이 순찰사자의 손에서 부르르 떨렸다.

순찰사자가 두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대리석바닥에 자그마한 발자국이 두 개나 생겨났다. 모두가 자로 잰 듯이 한치깊이였다.

순찰사자의 안색이 확 변했다. 종이의 제일 왼쪽에 칙()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순찰사자가 즉시 무릎을 꿇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순찰당 소속 제 삼순찰사자 조림(趙琳)이 칙서를 받듭니다.]

순찰사자가 마당을 향해서 또 고함쳤다.

[모두 엎드리지 않고 뭘하느냐! 정말 죽고 싶으냐?]

순찰사자 조림은 서쪽을 향해서 세 번 절한 후에 칙서를 소리높혀 읽었다.

[순찰사자 조림은 본 회주를 대신하여 칙서를 큰소리로 읽도록 하라.]

순찰사자 조림은 자기가 읽고 또 절하며 말했다.

[삼가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또 읽기 시작했다.

[먼저 짧은 시간에 오보를 갖춘 동추겸의 공로를 높이 치하한다. 동추겸은 이 순간부터 순찰사자로 승진한다. 하지만 근무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곳 금릉으로 제한한다.]

동추겸이 감격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머리를 땅에 찧었다.

[회주님께 충성을.]

순찰사자 조림은 계속 읽었다.

[동추겸의 선물은 잘 받았다. 그러나 오보가 지금의 것으로는 부족하니 몇 년의 시간을 더 들여서라도 다시 증량하도록 하라. 그리고 순찰사자는 동추겸에게 순찰사자로서 익혀야 할 무공을 전수해줄 것을 명한다.]

순찰사자의 말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동추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동추겸은 현천록을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그분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역시! 이 동추겸의 눈이 옳았다. 아마도 그분은 아직까지 아무도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우리 회주님이신게 틀림없다! 나는 회주님의 모습을 대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순찰사자 조림이 동추겸의 어깨뼈를 다시 맞추어 주었다.

뚜둑! 소리가 나며 뼈가 제 자리를 찾는다.

조림이 말했다.

[동순찰! 축하합니다.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경우는 처음이라 나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조림의 음성이 조금 여자다워졌다.

동추겸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잘 좀 지도해 주십시오.]

조림이 말했다.

[회주님께서는 나이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상승 무공을 익히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본 회의 최고 요직인 순찰에는 아직 스물 다섯을 넘긴 사람이 없어요. 한데 동순찰은.....]

[소인은 마흔 세 살입니다.]

[더구나 동순찰은 한 꺼번에 다섯 단계나 승진했어요. 솔직히 회주님께서 무슨 생각을 가지신 건지 전 알 수가 없군요.]

조림이 나직하게 한숨을 쉰다.

동추겸은 황홀하여 몸둘 바를 모르고, 조림이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따라와요. 순찰사자의 무공을 가르쳐 드리죠.]

 

X X X

 

현천록은 금릉을 벗어나 동쪽으로 이십리 가량 날아갔다.

금릉을 돌아흐르는 장강 물이 눈 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눈을 이고 서서 바람을 따라 집단으로 군무를 추는 갈대들, 그리고 그 위를 날며 먹이를 찾는 겨울 철새들의 요란한 날개짓들.

해가 서산에 잠길 시간이 가까워 옴에 따라 땅과 하늘 사이의 모든 것들은 잠들 때를 준비 하는 듯하다.

현천록은 심한 기갈(飢渴)을 느꼈다.

품 속을 뒤져보니 생사탄에서 가져왔던 사과 한알 밖엔 먹을 게 없다.

갑자기 뒤에서 웃음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신같은 꼬마네. 쫓아오느라고 애를 먹었어.]

돌아보니 신화병기점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서있다.

사각! 사각!

소녀가 갈대를 해치고 다가오며 말했다.

[누가 너같은 꼬마를 길렀을까? 전설적인 경공인 어풍비행(御風飛行)을 다 사용하고 말이야.]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난 무림인이 아닌 걸요. 무공도 배우지 못했어요.]

소녀가 현천록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면서 말했다.

[그런 말하면 누가 믿을 것 같애? 깜찍한 녀석. 속이는게 아예 버릇이 되어버렸구나. 나도 처음 만났다면 꼼짝없이 속았을걸?]

현천록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인데.....]

소녀가 말했다.

[넌 눈이 반짝반짝하는게 잘 속이게도 생겼어. 혹시 거짓말할때는 콧구멍이 벌렁거리진 않아?]

현천록이 말했다.

[가슴이 벌렁거려요.]

소녀가 깔깔 웃고 말했다.

[! 이제 나한테는 뭘 줄거야?]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본 사람 몫도 반은 된다는 말을 알고 있겠지?]

현천록은 한숨을 쉬면서 사과를 내밀었다.

[다 가져요. 까짓 전 좀 굶죠.]

소녀가 황금빛 사과를 받아들고 또 웃는다.

[하하하하! 이 시침떼기 녀석! 좋아 이건 일단 받아놓지. 내가 말하는게 이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녀석이!]

웃는 모습이 아주 소탈하고 아름답다.

현천록은 넋을 잃고 홀린 듯이 소녀의 얼굴을 멍하니 보고 서있었다.

!

이마에 불통이 튀겼다.

[어린 녀석이 아주 색골이네. 엉큼하게 쳐다보기는.]

소녀가 코가 닿을 만큼 바짝 다가서며 핀잔을 준다.

현천록은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이런 말 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정말 예뻐요.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제일 예뻐요.]

소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 짜식아!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그래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현천록이 말했다.

[무림인이 되는 건 아주 재미있을 것 같군요.]

[?]

소녀가 눈이 동그라지며 말했다.

[넌 그럼 정말 무공을 배우지 않은거니?]

현천록은 호주머니를 터는 시늉을 했다. 무공은 쥐뿔만큼도 배운 적이 없다는 몸짓이다.

소녀가 커다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럼 아까 펼쳤던 어풍비행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건 그냥 제 몸이 가벼워져서.....]

[한번 시험해보면 다 알게 되겠지.]

소녀가 말하면서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번쩍!

어느 틈에 뽑아들었는지 한자루의 검이 소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검은 순식간에 현천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푸욱!

검날이 현천록의 등으로 삐죽 빠져나왔다.

현천록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소녀를 보고 있었다.

가슴이 꽉 막혀 오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소녀의 얼굴에 서릿발같은 한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의 생글거리며 웃던 얼굴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위엄과 살기로 가득찬 얼굴이었다.

현천록의 가슴이 떨려왔다.

소녀가 현천록의 가슴을 발로 차서 몸을 밀어냈다.

쓔욱!

다시 검이 빠져나왔다.

현천록은 뒤로 밀려나서 오른손을 자기 가슴에 갖다 댔다.

검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통증이 사라졌다.

그리고, 당연히 흘러야할 피가 나지 않았다.

소녀가 검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검결을 지어 현천록을 겨누며 말했다.

[요사스런 수법이군. 배교(拜敎)냐 아니면 마교(魔敎)?]

현천록은 손을 옷 밑으로 넣어서 상처를 만졌다.

하지만 만져지지 않았다.

생사탄에서 보초가 하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지만 산 것에 좀 더 가깝다.

 

갑자기 슬픔이 콱 밀려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

[분신이 아니라면 한곳 쯤은 틈이 있겠지?]

소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순간 그녀의 검에서 아지랑이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이 검은 가느다란 아지랑이같은 기운을 뿜어냈고, 그것들은 엃히고 설키면서 그물처럼 되어 현천록을 애워쌌다.

한 자루의 검에서 피어오른 검망(劍鋩)이다.

스치는 것은 무엇이든 소리없이 베어진다.

바로 그때였다.

[누가 우리 막내에 손대느냐?]

천둥같은 소리가 들려오며 검은 그림자가 현천록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쿠웅!

파파파파파팟!

땅이 진동하고 푸른 불꽃이 수없이 작렬했다.

멍하니 서있는 현천록의 앞에 칠척거인이 서있었다.

양 손에는 각기 하나씩의 굵은 낭아봉(狼牙棒)을 들었고 허리에는 긴 채찍을 허리띠 대신 두르고 있었다.

소녀는 깜짝 놀랐다.

그런 거한이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나타날 때까진 기척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놀라게 했다.

더구나 지금까지 누구도 피하지 못한 검망을 깨뜨려버리기도 했다.

소녀는 경각심을 돋우면서 천천히 한 걸음 물러섰다.

[낭아봉을 쓰는 고수가 있다는 소린 듣지 못했군요. 역시 세상은 넓어요.]

칠척거인은 그 큰 몸에도 불구하고 아주 균형이 잘 잡혀있고 이글거리는 눈은 불을 토할 듯하다. 갑옷만 갖춰 입는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이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칠척거인이 소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하찮은 인간이 감히 막내에게 손을 대려 하다니!]

소녀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정말 사람같지 않군요. 귀하는 그 녀석의 아버지인가요 형인가요?]

칠척거인이 냉소하며 말했다.

[너는 감히 물을 자격이 없다. 다시 한 번 막내에게 손을 대려 했다가는 보초님의 명을 거역하는 한이 있어도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칠척거인은 돌아서서 현천록의 어깨를 잡아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미장! 반갑구나! 나는 일곱째인 장군묵(張君墨)이다. 네가 태어나는 걸 다른 형제들과 함께 지켜봤다.]

[날 내려줘요.]

현천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장군묵이 말했다.

[세상은 짜증나는 곳이다. 네가 순조롭게 살아가려면 최소한 삼십년, 길면 백년은 지나야 할게다. 하하하하!]

현천록은 침울하게 말했다.

[나는 기쁘지 않아요.]

장군묵이 말했다.

[난 다른 형제들과는 생각이 다르다. 특히 보초님과는. 하찮은 인간들이 감히 우리를 집적거리는 건 질색이다. 너도 인간들이 감히 너를 범하지 못하게 해라. 우리는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하하하하하!]

장군묵은 소녀를 돌아보며 콧방귀를 끼었다.

[! 하찮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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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요! 놓으란 말이에요!] 울부짖으며 집에서 끌려나오는 이진진. 건달1과 건달2가 이진진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고 끌고 나온다. 그 앞에서 정필이 걸어가고 나머지 두 명의 건달은 주변을 둘러보며 함께 걸어간다. 험상궂은 그놈들 표정 때문에 몰려든 빈민가 사람들 겁에 질려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이진진; [아버지! 아버지!] 울부짖으며 멀어지는 이진진

[이게 무슨 난리여?] [저놈들, 흑사회의 파락호들 같은데 왜 이씨네 집에 쳐들어온 건가?] [하여간 진진이가 큰일 났구먼. 저놈들에게 끌려가면 사창가로 팔려갈 게 뻔한데...] [빨리 진진이 엄마나 청풍이에게 연락해야하는 거 아닌가?] 빈민가 사람들 웅성대고. 하지만 아무도 나서서 뭔가를 하진 않고. 일부는 문이 부서진 청풍의 집 안을 기웃거리고. 집 안에는 이산하가 쓰러져 있다.

[...] 사람들 사이에 서있는 뺑덕어미같은 인상의 여자

서둘러 정필 일행이 간 곳으로 달려간다.

 

#86>

역시 해가 막 진 저녁 무렵. 금릉.

금릉의 번화가. 고급스러운 찻집

찻집 안에서는 남녀가 차를 마시고 있고

룸이 있는 복도. 여자 점원의 안내를 받아 오는 진삼낭. 진삼낭은 차림은 추레하지만 태도는 당당하다.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점원; [이 방이에요.] 어느 방문 앞에 서서 진삼낭을 돌아보고

진삼낭; [수고했어요.] 말하며 동전 한 닢을 점원의 손에 쥐어주고

점원; [뭘 이런 걸...] 새침하던 얼굴이 환히 펴지고

진삼낭; [부를 때까지는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점원; [그리하겠사옵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밝게 웃으며 왔던 길 돌아간다.

점원; (차림은 추레한데 예의는 바른 여자잖아. 수고비도 줄 줄 알고...) 동전을 보며 희희낙락하고. 그 뒤에서 그걸 보며 방문을 여는 진삼낭

[어서 와요 언니.]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진삼낭의 귀에 들리는 음성

여자1; [헤매지 않고 잘 찾아오셨네요.] 작은 룸. 두 여자가 다과를 앞에 두고 앉아있다. 여자1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하녀 차림의 여자. 다른 여자는 40대의 까칠한 인상의 여자인데 역시 하녀차림이다.

진삼낭; [오가면서 이 찻집을 몇 번 본적이 있었거든.] 두 여자의 맞은편에 앉고

여자1; [그랬구나.] [이쪽 언니는 황금전장에서 일하는 제남댁이에요.] 함께 앉아있는 여자2를 소개하고

진삼낭; [반가워요. 정희동생에게서 말씀 많이 들었어요.] 여자2에게 인사하고

여자2; [정희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마지못해 오기는 했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요.] 새침하고

여자2; [황금전장은 사업 성격상 보안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어요.] [그래서 내부 사정을 허락없이 누설했다가는 경을 칠 수가 있다구요.] 새침하게

진삼낭; [물론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었답니다.] ! 말하며 주머니를 하나 여자2 앞으로 밀어주고

여자2; [이게 뭔가요?] 눈 반짝. 알면서도 묻고

진삼낭; [얼마 안되지만 저의 성의예요.] [초면인데 어려운 부탁을 드려서 죄송해요.] 은근하게 돈주머니를 밀어주고

여자2; (묵직하네.) +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진삼낭이 밀어준 돈 주머니를 집어 들며 입이 귀에 걸리고

여자2; [그래서 날 통해서 알고 싶은 게 뭔가요?]

진삼낭; [제 아들이 어제부터 황금전장에서 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여자2; [그래요?] 놀라고

여자2; [우리 황금전장에서 일할 정도면 뭔가 대단한 재주가 있겠어요.]

진삼낭; [제 아들 이름은 이청풍인데 고기를 잘 다룬답니다.] [그래서 황금전장의 총주방장님께서 직접 영입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여자2; [주방에서 일한다면 살림 담당인 나와는 마주칠 기회가 없었는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진삼낭; [그래도 같은 황금전장에서 일하니까 제 아들 소식을 들을 기회가 있지 않겠어요?]

여자2; [그렇긴 하지만... 헌데 왜 아드님 소식을 제게 묻는 건가요?]

진삼낭; [아무래도 제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같아요.] [어제 이른 새벽에 나간 후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답니다. 물론 연락도 없구요.]

여자2; [그건 확실히 걱정이 될만한 상황이군요.]

여자2; [알았어요.] [황금전장으로 돌아가는 대로 아드님 소식을 알아보도록 할게요.] [주방에서 일한다고 했으니 소식을 듣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진삼낭; [부탁드릴게요.] 굽신

진삼낭; [제 아들 소식을 알아내 주시기만 하면 또 사례를 드리겠어요.]

여자2; [걱정 마세요. 아드님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내는 대로 정희 동생을 통해 연락을 드릴게요.] 살갑게 말하고.

 

찻집에서 나오는 세 여자.

굽신거리는 진삼낭. 대충 인사하며 다른 곳으로 가는 두 여자

진삼낭; (생긴 것처럼 욕심이 많은 여자다.) 희희낙락하며 멀어지는 두 여자를 보고

서로 보며 뭐라 말하면서 키득거리는 두 여자.

진삼낭; (돈 벌 욕심에서라도 청풍이의 소식을 알아내는데 최선을 다하겠지.) 멀어지는 두 여자 보며 생각하는데

[진진엄마!]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돌아보는 진삼낭

뺑덕어미; [여기 있었네! 만나서 다행이야!] 달려오는 뺑덕어미같은 여자. 숨이 턱에 찼다. 주변의 사람들 피하면서 눈 흘기고

진삼낭; (우리 옆집에 사는 여자...) + [홍이엄마! 여긴 웬일이에요?]

뺑덕어미; [무슨... 무슨 일이 있으면 이쪽 거리로 와서 찾아달라고 했잖아.] 헐떡이며 멈춰서고. 그러자

진삼낭; (설마!) + [참 그랬지요.] 불길한 예감

뺑덕어미; [큰일 났어.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진삼낭의 손목을 잡아끌고 돌아가려 하고

진삼낭; [무슨...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끌려가며 굳어지는 얼굴

뺑덕어미; [... 흑사회의 파락호들이 몰려와서 진진이를 끌고 갔어!]

[!] 눈 부릅뜨는 진삼낭

 

#87>

황금전장. 역시 저녁 무렵

감옥. 일반 무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데 감옥 철문이 열려있다. 일반무사들 외에도 여자무사1이 동료 여자 무사 두명과 함께 서있다.

 

청풍이 갇혀있는 감방. 청풍이 바닥에 누워있다. 손목에는 수갑,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진 채. 옆에 죽 같은 음식이 담긴 그릇이 있지만 손 대지 않은 모습이고

청풍; (아무리 생각해도 여길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청풍; (몸이 만신창이인 것도 있지만...) 철컥! 수갑에 채워진 두 손을 움직여 보고

청풍;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수갑과 족쇄 때문에 어떤 시도도 해볼 수가 없다.) 철컥거리는 수갑. 수갑에는 열쇠 구멍이 있다.

청풍; (물론 수갑과 족쇄에서 풀려난다고 해도 이 뇌옥을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한숨. 그때

철컹! 감방의 철문이 열린다. 흠칫! 하며 돌아보는 청풍

간수1; [이 감방입니다.] 철문을 연 채 누군가에게 말하고. 그러자

벽소소; [냄새 때문에 코가 썩겠어.] ! 오만상 쓰며 철문 밖에 나타나는 벽소소. 아주 화려한 옷을 입었다.

청풍; (벽소소...) 내심 분노하지만 말없이 보고

벽소소; [어머나! 몰골이 말이 아니네.] [정의의 사도께서 어쩌다 이리 초라한 모습이 되셨을까?] 안으로 들어오진 않고 철문 밖에서 청풍을 놀리고

청풍; [용무가 뭐요?] 누운 채 고개만 돌려 보면서 묻고

벽소소; [그래. 나도 이 냄새나고 더러운 곳에 촌각도 있기 싫으니 용무만 말하고 갈게.]

벽소소; [아주 기쁜 소식이 있는데 네게 직접 전해주고 싶어서 찾아왔어.]

청풍; (저 방탕한 계집이 기쁜 소식이라고 하니 당연히 나쁜 소식이겠지.)

벽소소; [이청풍 네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누이가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청풍; (설마!) 눈 치뜰 때

벽소소; [맞아! 이진진이란 바로 그년 신변에 문제가 생겼어. 나에게는 기쁜 그 소식을 전하려고 찾아온 거야?] 마녀처럼 웃고

청풍; [무슨 짓을 한 거냐?] 분노하며 벌떡 일어나고

청풍; [설마 네년 진진이를 건드린 거냐?] 철컹! 철컹! 이를 갈며 입구로 돌진하려 하지만 발목에 채워진 길지 않은 족쇄 때문에 빨리 움직이지 못한다. 게다가

간수1; [얌전히 있어라!] ! 감방 안으로 들어오며 발길질로 청풍의 명치 아래를 차고

콰당탕! 나뒹구는 청풍. 하지만

청풍; [말해라! 진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일어나려 바르작거리며 악을 쓰고

벽소소; [궁금해 하는데 알려주는 게 도리겠지?] 배시시 웃고

벽소소; [네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은 사창가에 끌려갔어.] [어쩌면 지금쯤 사내놈들에게 몸을 팔고 있을지도 몰라.]

청풍; [!] 눈 부릅. 엄청난 충격을 받고

벽소소; [상상해보렴. 네 누이의 가련한 몸뚱이가 냄새나고 징그러운 털북숭이 사내들에게 깔려 바르작 거리는 모습을...]

청풍; [으아아아!] 철그럭! 철그럭! 악을 쓰며 입구로 기어가고. 하지만

벽소소; [문 닫아줘. 전하고 싶은 소식은 다 전했으니까.] 돌아서며 말하고

간수1; [예 아가씨!] 그그긍! 철문을 다시 닫고

청풍; [멈춰라 벽소소! 거기 서라!] 철컥! 철컥! 악을 쓰며 기어가지만

! 닫히는 철문

청풍; [이 문 열어! 이 문 열란 말이다!] ! ! 악을 쓰며 철문을 수갑 채워진 손으로 때리며 악을 쓰고. 하지만

벽소소; [호호호! 감히 내게 불경한 대가다.] [네놈은 두 번 다시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 마녀처럼 웃으며 복도를 걸어간다. 간수1이 돌아보며 따라가고. ! ! 그 뒤에서 청풍이 철문을 수갑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감방 내부. [으아아아!] ! ! 수갑 찬 손으로 철문을 마구 두드리는 청풍

청풍; [진진이는 안된다!] [진진이를 해꼬지 하지 마라!]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지만 대답은 없고. 그러다가

청풍; [크으...] 철무 앞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오열하고

청풍; [미안하다 진진아! 이 어리석고 무능한 오빠를 용서해라.] 이를 갈며 울고

<반드시...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복수하고 말겠다.> 으아아아! 악을 쓰며 울부짖은 청풍의 모습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88>

다시 빈민가. 이제 해가 져서 날이 어두워지려하고.

청풍의 집 앞. 빈민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고

그러다가 흠칫 하며 돌아보는 빈민가 사람들

그곳으로 사슴처럼 달려오는 진삼낭. 그 뒤쪽으로 상당히 떨어져서 뺑덕어미가 따라오고

[진진이 엄마가 왔다.] [빨리 와봐요 진진이 엄마!] [큰일 났어요.] 사람들 외치고

진삼낭; [여보!] 그 사람들 헤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집안. 난장판이 된 그곳에서 이산하가 망연자실하여 주저앉아있다.

진삼낭; [진진이... 진진이를 끌고 간 게 어떤 놈들이에요?] 이산하의 멱살을 잡고

이산하; [... 여보...] 넋이 나간 표정이고

진삼낭; [말해요! 어떤 놈들이냐구요?] 이를 갈고

이산하; [... 단지회의 인간들이었네.] 비통한 표정으로

진삼낭; [단지회라면... 대경도장의 인간들이 무슨 명목으로 진진이를 끌고 간 건가요?] 눈 부릅

이산하; [청풍이가 오백냥은 갚았지만 이자를 안 갚았다며...] 끄윽!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하고

진삼낭; [죽일...] 치를 떨고

이산하; [미안하오. ... 다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오.] 고개 떨구며 울고

진삼낭; [닥쳐요!] ! 남편을 패대기치고. 나뒹구는 이산하

진삼낭; [울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이러고 있을 동안 진진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이를 갈며 한쪽 바닥으로 가고. 이어

! 발로 그 부분을 강하게 밟고. 그러자

콰직! 바닥이 부서지며 일부가 일어나고

콰직! 손으로 일어난 부분을 잡아 뜯는 진삼낭. 무릎 꿇은 채

! 그러자 드러나는 바닥 아래의 공간. 두 자루의 그리 길지 않고 휘어진 칼과 상당히 큰 칼이 그곳에 숨겨져 있다.

두 자루의 휘어진 칼을 집어 들어서 양쪽 허리띠에 꽂는 진삼낭

[칼이야!] [방바닥에 칼을 숨기고 있었어.] 밖에서 보던 사람들 놀라고

진삼낭; [받아요!] ! ! 큰 칼을 이산하의 앞쪽 바닥에 던지고

진삼낭; [당신이 표사(鏢士) 생활할 때 쓰던 칼이에요.] 일어나고. 손을 품속에 넣고

이산하; [대경... 대경도장에 쳐들어갈 거요?] 올려다보고

진삼낭; [이걸로 마차를 한 대 구해서 대경도장 뒤쪽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철걱! 묵직한 돈주머니를 한 개 이산하 앞에 던지고

이산하; [... 하지만 우리 힘으로 단지회 놈들 손에서 어떻게 진징이를...] + 진삼낭; [날 봐요!] 몸을 숙여서 이산하의 어깨를 잡고

진삼낭; [십팔 년 전 당신은 나와 청풍이를 구하기 위해서 무림의 일류고수들과도 감연히 맞섰던 용자예요.]

진삼낭; [게다가 몸은 비록 옛날 같지 않다고 해도 지금의 당신은 딸을 지켜야만 하는 아버지잖아요.]

[!] 무언가 깨닫는 표정이 되는 이산하

진삼낭; [죽을 때 죽더라도 후회를 남기지 않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산하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몸을 일으키는 진삼낭

진삼낭; [늦지 않게 마차를 구해서 대기하도록 하세요.] 뛰듯이 집 입구로 가고. 마을 사람들 급히 좌우로 비키고

곧 집을 등지고 달려가는 진삼낭

[... 저게 진짜 진삼낭 맞아?] [말보다도 빠르게 달리잖아!] [설마 진진이 엄마가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었던 건가?] 사람들 놀라며 보는 사이에 진삼낭을 멀어지고

진삼낭; (기다리고 있어라 진진아!) 휘익! 이를 악물며 달려가고

진삼낭; (엄마가 반드시 구해줄 테니...) 달려가는 진삼낭

다시 청풍의 집. 마을 사람들 흩어지고 있고

혼자 방에 주저앉아있는 이산하. 이산하 앞에는 칼과 돈 주머니가 놓여있다.

이산하의 뇌리에 떠오르는 진삼낭의 말

 

진삼낭; [십팔 년 전 당신은 나와 청풍이를 구하기 위해서 무림의 일류고수들과도 감연히 맞섰던 용자예요.]

진삼낭; [게다가 몸은 비록 옛날 같지 않다고 해도 지금의 당신은 딸을 지켜야만 하는 아버지잖아요.]

회상 끝

 

이산하; [그렇지. 나는... 진진이의 아버지지.] 웃으며 칼을 잡고

이산하; [내 귀여운 딸... 진진이가 위험에 처했는데 이렇게 주저앉아있을 수는 없다.] 칼을 허리띠에 끼우고. 이어

돈 주머니를 집어들고 바닥에 구르는 지팡이도 집어들고

이산하; [진진이 엄마 말 대로 죽을 때 죽더라도 후회는 남기지 말고 죽어야겠지.]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입구고 간다.

 

#89>

황금전장. 이제 여기저기 불이 밝혀지고 있다.

황금전장의 후원. 인적이 없는 조용한 곳. 그곳으로 오는 일단의 여자들. 등을 든 두 명의 하녀가 앞장서서 길을 밝히고. 그 뒤를 벽초천의 후처 온유향과 벽옥령이 따라오고. 소복을 입은 두 모녀 뒤에는 천으로 덮인 쟁반을 든 두 명의 나이 든 하녀가 따라온다. 쟁반에 얹혀진 것은 술이 든 주전자와 술잔과 제사 음식들인데 천으로 덮여있다.

벽옥령; [... 여긴 사당(祠堂)으로 가는 길 아니야 엄마?] 좀 겁을 먹은 표정으로 온유향의 소매를 잡고

온유향; [그렇단다.] [이 앞쪽에 우리 벽씨가문의 영령들을 모신 사당이 있단다.]

벽옥령; [이 밤중에 사당에는 왜 가는 거야?] [오늘이 조상님들 중 어느 분의 제삿날이야?] 겁에 질려서

온유향; [맞아. 옥령이에게는 가까우면서 먼 어떤 분이 돌아가신 날이란다.] 미소 짓고

벽옥령; [옥령이에게 가까우면서도 먼 분?] [그런 분이 있었나?] 갸웃하고. 그러다가

벽옥령; [엄마!] 놀라 앞을 가리키고

일행의 앞쪽 사당 건물이 있다. 좀 음산한 분위기. 주변에는 당연히 인적도 없고. 사당 뒤는 높은 담장. 헌데 사당 안에서 흐릿한 불빛이 흘러나온다.

하녀들도 겁을 먹고. 하지만

온유향; [어머나...] 입을 조금 가리며 웃고

온유향; [고인께서 기뻐하시겠네.] 웃으며 사당으로 다가가고

벽옥령; (고인께서 기뻐하시겠다고?) (누가 먼저 와서 분향(焚香)을 하고 있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온유향 뒤로 숨 듯이 서서 따라가고. 그러다가

[!] 놀라는 벽옥령. 문이 열린 사당. 그 사당 안 제단에 촛불이 두 개 켜져 있고. 어떤 사내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벽세황이다.

벽옥령; [오빠! 오빠잖아!] 안도하며 사당으로 달려가고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있다가 돌아보는 벽세황

벽옥령; [오빠! 여기서 뭐해?] 쪼르르 달려오고. 그 뒤에 온유향이 하녀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고

벽세황; [옥령이 너야말로 이 밤에 여긴 웬일이냐?] 일어나고

벽옥령; [옥령이야 뭐 엄마 따라왔지.] 문간에 서서 말하며 뒤를 돌아보고

온유향; [큰 애야. 네가 먼저 와있었구나.] 사당으로 들어오고

벽세황; [어머니...] 옆으로 물러나며 허리 숙이고

온유향; [언니가 기뻐하시겠구나. 아들이 기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서...] 제단을 보고. 제단에는 위패가 세워져 있는데 <先妣 劉氏神位> 라는 글이 적혀있다.

벽세황; [마침 어머니 기일이기도 하고...] [무림맹으로 떠나면 한동안 들르지 못할 것 같아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온유향; [잘 했다. 고인께서도 아들이 올리는 분향만큼 기꺼우실 게 없을 게다.] 말하며 하녀들에게 손짓하고

하녀들이 제단에 음식과 술상을 차리기 시작하고. 벽세황은 옆으로 물러나 두 손 앞으로 모은 채 보고 있고

벽옥령; (내게 가깝고도 먼 분...) (바로 세황오빠와 소소언니를 낳으신 큰 어머니의 기일이었어.) 문간에 서서 그걸 보며 생각하고.

벽옥령; (큰어머니가 소소언니를 낳다가 난산으로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새로 맞아들인 부인이 어머니였지.) 제사상 앞에 무릎을 꿇는 온유향을 보며 생각하고. 음식을 차린 하녀들은 옆으로 물러섰고. 벽세황은 하녀들 중 한명으로부터 술이 든 주전자를 건네받았다.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쥔 술잔을 옆으로 내미는 온유향. 역시 무릎을 꿇고 그 술잔에 술을 따라주는 벽세황.

술잔을 들고 몸을 일으켜 술잔을 향로 위에 몇 번 돌리는 온유향. 벽세황은 술 주전자를 제사상 옆에 내려놓고 일어서고

술잔을 제사상 위에 올리는 온유향. 벽세황은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보고 있고

온유향; (미안해요 언니.) 한숨 쉬며 합장하고

온유향; (제가 새 엄마 노릇을 잘못 한 탓인지 소소가 자라면서 엇나가버렸답니다.) 눈 감고 합장한 채 생각하고

온유향;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온유향; (동생이 어떻게든 소소를 잘 타일러서 부덕(婦德)을 지키게 할 테니까요.) 고개 숙이며 기원하는 온유향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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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 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현천록은 금릉으로 돌아왔다.

바람에 떠밀리다시피하여 성문을 들어서서 발이 이끄는대로 걸어서 신화병기점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하는 말들을 들으니 정말 세월이 변한 것 같다. 겨우 삼년이 흘렀을 뿐인데.

병기점에는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점포를 보고 있다.

신화병기점에서 새로 사람을 고용한 적은 현천록이 있을 때는 한 번도 없었다.

[공자께선 어떤 물건을 찾으십니까?]

서른이 막 넘었을 듯한 점원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현천록은 그 점원의 손에 들려 있는 주판을 보았다. 항상 그의 손때가 묻었던 주판인데 이제 주인이 바뀌어져 있었다.

현천록은 함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 손님이 아닙니다.]

점원이 눈치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오늘 오신다던 그분이신 모양이군요. 제가 주인어른께 즉시 통보해드리겠습니다.]

점원은 현천록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인어른? 언제부터 노야를 주인어른이라고 부르게 됐지?]

현천록은 팔짱을 끼고 병기점 안을 휘휘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전에 있던 물건들도 보이지만 전혀 보지 못한 새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에 있던 것과는 아주 달라 보였다.

적어도 현천록의 눈에는.

현천록은 짧고 뭉퉁하게 생긴 칼을 하나 집어들었다. 손잡이가 말모양으로 생긴 꽤나 멋을 부린 칼이었다.

[이건 누구 솜씨일까? 노야께서 용케도 이런 물건을 내놓으셨네. 그래도 쇠는 아주 좋아. 극상품인걸. 차라리 녹여서 장아저씨가 새로 만들게 했으면 보기드문 신기가 나올 수도 있었을텐데.]

그때 안쪽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대 여섯명이 동시에 달려오는 모양이다.

아주 뚱뚱한 중년인이 겉옷을 걸치며 달려오고 있는 좌우에 몇 명의 젊은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뒤에서 소식을 전하러 갔던 점원이 달려오고 있었다.

[주인어른! 바로 그분입니다.]

중년인은 점포로 들어서자 마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순찰사자(巡察使者)님을 뵙습니다.]

따라온 네 명의 젊은이들도 즉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현천록은 얼떨떨해져서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죠?]

중년인이 흠칫하자 젊은이들 중에 한 사람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름을 묻고 계십니다.]

중년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소인은 신화병기점의 점주인 동추겸(董追謙)입니다. 강호의 친구들은 칠지한(七指漢)이라 불러줍니다. 그리고 이들은 제 수하들입니다.]

현천록은 놀라며 소리쳤다.

[뭐라구요? 당신이 신화병기점의 주인이라구요? 그럼 노야께서는 어디 계시죠?]

중년인이 아주 당황하며 말했다.

[.... 사자님! 그 그전의 주인에 대해서는 소인 잘 모릅니다. ...소인은 다만 삼년 전에 이곳 신화병기점에서 일하라는 명을 받고 왔을 뿐입니다.]

현천록이 젊은이들에게도 물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입니까?]

젊은이들은 무엇이 두려운지 납작하게 엎드리며 감히 대꾸도 하지 못했다.

칠지한 동추겸이 현천록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소인이 혹시 잘못한 게 있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사자님께서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현천록은 머리가 아파왔다.

잘 아는 곳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마찬가지 정도가 아니라 더 혼란스럽다.

[일어나세요. 전 여러분이 말하는 사자가 아닙니다.]

!

칠지한 동추겸이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차라리 소인에게 자결을 명해주십시오.]

동추겸의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현천록은 기가막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늘 자기가 앉곤 했던 자리에 앉았다.

가만 있자니 장부를 살펴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노야나 이곳 신화병기점의 식구들에 대한 소식이라도 들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현천록은 발 옆에 있는 서궤를 열었다.

한달에 한 번씩 책으로 엮이는 장부는 모두 그곳에 차곡차곡 들어있다. 아니 그전에는 그랬었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서궤를 열자 더욱 긴장하며 가늘게 떨었다.

서궤가 텅비어 있었다.

[여기 있던 장부들은 다 어디갔지요?]

현천록이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추겸이 식은 땀을 흘리며 말했다.

[...소인이 사자께서 내전으로 방문하실 줄 알고 안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현천록은 속으로 생각했다.

(신화병기점도 나만큼이나 신고(辛苦)를 겪었구나. 하여간 이 사람들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좀 더 알아보고 빨리 여기를 떠나자. 차라리 밖에서 알던 사람들을 만나 소문을 들어보는 것이 더 좋겠다.)

마음이 정해지자 현천록은 아주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전으로 모두 다 모아주세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동추겸이 쩔쩔 매면서 대답하고, 네 장점과 점원이 서둘러 달려갔다.

현천록은 동추겸과 함께 민노야가 정성껏 가꾸었던 동백나무 정원을 가로 질러 안으로 갔다.

동백나무들은 근년에 잘 다듬어지지 않았는지 거친 모습이지만 붉은 꽃봉우리를 눈 속에 드러내는 것도 있었다.

세월이 흐른 것을 제외하고 나면 변한 것은 없다.

현천록은 매일 같이 오가던 길을 걸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감회가 새롭건만 사람들이 옛 사람이 아니라는 건 쓸쓸한 비애를 자아내게 한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너무도 익숙한 걸음으로 내전을 향하자 더욱 두려워하며 오히려 그의 뒤를 따랐다.

민노야가 주무시던 전각 앞의 마당에는 낯 선 사람들이 칠십여명 가량 석상처럼 서있다.

현천록은 민노야가 새벽마다 식솔들을 점검하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며 전각 앞의 돌계단 위로 올라갔다.

쇠를 다루는 장인들, 가죽을 다루는 장인들, 그리고 금과 은을 다루고 정교한 세공을 하는 장인들이 구별을 지어 서있다.

현천록은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폈지만 모두가 낯선 사람들이었다.

동추겸에게 물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먼저 온 사람이 있었습니까?]

동추겸이 대답했다.

[소인이 제일 먼저 왔고 뒤이어 장인들과 일꾼들이 왔습니다.]

[그때 뭐 특이한 점은 찾지 못했습니까?]

[여기 살던 사람들은 아주 급하게 떠났던 것 같았습니다. 두 달만 지나면 꼭 그때가 되는데 불씨도 남아있었고 의복도 남아있었지요. 하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천록은 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뿐 그들이 어떤 변을 당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저절로 조금 위안이 되었다.

억지로 웃으며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하하하하! 이제 됐습니다. !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을 할까요? 준비해주세요.]

동추겸이 그제서야 얼굴 가득 웃음을 띄면서 말했다.

[그럼 이들은 일단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동추겸은 사람들을 흩고 난 다음에 현천록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민노야가 앉던 자리 앞에 장부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그 옆에는 붉은 비단으로 싼 네모난 물건이 보였다.

크기는 가로세로너비가 모두 한자쯤 되는 것 같았다.

장부의 형식이 달랐다. 모두 새 장부고 이전에 그가 작성했던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현천록은 더 읽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대충 훑어보는 척하며 슬쩍 앞으로 밀었다.

동추겸이 재빨리 눈치를 채고 장부를 더 밀쳐 놓았다.

그리고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당겨 놓았다.

현천록은 이게 뭐냐는 듯이 동추겸을 보았다.

동추겸이 겸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자님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소인이 준비한 것입니다. 약소한 것이니 개의치 말고 받아주십시오.]

현천록은 계속 동추겸의 얼굴을 주시했다.

동추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회주님께 바칠 물건을 소홀히 하진 않았습니다. 그건 따로 준비해 두었으니 사자님께서 출발하실 때.....]

그제서야 현천록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걸렸다.

동추겸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가져 오세요. 지금 가야겠습니다.]

동추겸이 예상했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현천록은 웃음이 터져나오려 하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어떤 상황도 비극으로만 가득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게 소위 말하는 뇌물이겠지. 회주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세력이 대단한 모양이구나.]

현천록은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가짜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죽이려고 들겠지?]

그때 동추겸이 손바닥만한 곽()을 두손으로 받쳐 들고 들어왔다.

자단으로 감싼 곽인데 열려 있고 그 속에는 손가락 모습을 본따 만든 작은 병들이 앙증맞게 들어있었다.

동추겸은 아주 조심스럽게 현천록의 앞에 곽을 놓았다.

한데 크기에 비해서 아주 둔중한 소리가 났다.

쿠웅!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은 것처럼 탁자가 약간 삐꺽거렸다.

[지난 삼년 동안 모은 금은동철석의 정화(精華)입니다.]

현천록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억! 소리를 낼뻔했다. 다행히 손이 빨라 재빨리 입을 막을 수 있었다.

동추겸은 그런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했다.

[회주님께서 각지의 금속을 보내주셔서 돌봐주신 덕분에 사명을 이만큼이나마 행할 수 있었습니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추겸도 마주 고개를 끄덕인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자기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지만 현천록에겐 다른 의미였다.

점포에서 보았던 말모양의 손잡이를 한 짧은 칼의 비밀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극상품의 철이 너무 쓸데없이 낭비되었던 이유를.

현천록은 오보(五寶:금은동철석의 정화)가 든 곽을 보면서 속으로 침을 삼켰다.

신화병기점에서 자란 현천록이기에 장인들로부터 오보에 대한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오보를 직접 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쇠를 다루고 금을 다루는 사람들은 만대의 영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욕심이 왈칵 일었다.

자기만 입을 꾹 다물고 꿀꺽해버리면 그냥 자기 것이 되어버릴 물건이다.

심장이 약간 빨리 뛰기 시작한다.

[좋은 물건입니다.]

동추겸이 기뻐하며 말했다.

[사자께선 역시 보물을 보실 줄 아는 눈을 가지셨군요. 회주님께서 천하의 보물을 두루 구하시지만 사실 이만한 보물은 또 구하기 힘드실 것입니다. 이걸 얻기 위해서 사용된 금과 은, 구리와 철, 그리고 돌은 아마도 산을 몇 개 쌓고 남았을 것입니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동점주께선 어떤 대가를 원하십니까?]

동추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얼굴이지만 감히 현천록의 앞이라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추겸이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소 소인을 벌하지 않는 것만해도 무상의 영광입니다. 하 하온데 대가라 하오시면....]

현천록은 속으로 웃었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사자는 아니지만 장사꾼이오. 장사꾼은 속이는 게 능사지만 난 물건을 속이진 않으니까 당신은 임자를 잘 만난 셈이오. 내가 당신한테 속이는 건 정황만 속이고 물건은 속이지 않으니까 용서해주오.)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을 벌할 자격이 없습니다.]

동추겸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현천록은 사실을 말했지만 동추겸의 귀에는 공이 너무 커서 사자가 자신을 낮추어 겸양하는 것으로 들렸다.

현천록이 또 말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따로 없군요. 하지만 이 토끼털 옷은 꽤 따뜻합니다.]

동추겸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회주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 동추겸 목숨을 바쳐서라도 충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점주님께서 순찰사자가 되셨음을 속하들이 앙축합니다.]

현천록은 속으로 아차했다.

일이 잘못되려니까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회주가 순찰사자를 임명할 때는 토끼털옷을 준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 깨닫기는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얼떨떨한 가운데 토끼털옷을 벗어서 동추겸에게 줘버렸다.

혹시 몸에 걸칠 만 한게 없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동추겸이 토끼털 옷을 꼭 움켜쥔 손으로 붉은 비단으로 싸인 물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자님!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습니까? 마침 속하가 준비한 선물도 바로 옷입니다.]

현천록은 붉은 비단을 풀어서 상자 속에 든 옷을 꺼냈다.

상자 속에는 아주 화려한 흰비단옷과 물소가죽으로 만든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잠사(天蠶絲)로 짠 홍색 머리띠가 들어있었다.

그 홍색 머리띠는 만져보고 나서야 겨우 천잠사임을 알 수 있었다.

너무 화려해서 감히 몸에 걸칠 엄두가 잘 나지 않을 정도였다.

현천록은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옷을 입으며 말했다.

[이러면 당신이 너무 손해보는 것 아닙니까?]

동추겸이 황급히 손을 저어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라는 시늉을 한다.

옷은 현천록에게 꼭 맞았다.

홍색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나자 어느 모로 보아도 현천록은 귀티나는 미소년으로 보였다.

동추겸은 입었던 옷 위에 토끼가죽옷을 걸치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소리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점주님! 적입니다! 적이 침입을...]

[!]

동추겸이 고함쳤다.

[모두 물러나라. 내가 직접 나가보겠다.]

동추겸은 현천록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으악!]

[! 아이구!]

여러 가지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현천록은 방안에 혼자 남게 되자 다시 의자에 앉았다.

민노야가 앉아있던 그 자리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참 소인배구나. 버릇도 고치지 못하고 재물을 보고 욕심내서 속였으니 참나.....]

동추겸이 빠져나간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나도 도망쳐야 할텐데..... ]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동추겸! 이 찢어죽일 놈아! 감히 사자가 왕림했는데도 거들먹거리기만 해? 어디 내손에 한 번 죽어봐라!]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다.

동추겸의 호통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네 이년! 무슨 개뼈다귀같은 소리냐! 너야 말로 이옷을 알아보지 못하느냐! 나도 똑같은 사자의 신분이거늘. 감히 이곳에서 횡패를 부리려하다니!]

[호호호호! 네놈이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사자가 입는 옷을 함부로 걸치다니! 너같은 놈은 백번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거야.]

현천록은 쳐들어 왔다는 적이 실은 적이 아니라 진짜 사자라는 걸 알았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속은 줄 알면 사자보다도 동추겸이 더 길길이 뛸게 틀림없다.

현천록은 계면쩍게 웃었다.

[역시 나쁜 일에는 금방 번잡함이 생기는군.]

바로 그때 현천록의 바로 옆에서 깔깔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호!]

아주 맑고 고운 음성이었다.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그의 옆에는 열일곱여덟 살 쯤 된 소녀가 그림자처럼 바짝 붙어서있었다.

분냄새와 소녀 특유의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찌른다.

현천록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푸른 비단옷을 입었는데 아주 고운 얼굴이었다.

생기가 넘쳐흐르고 입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생글거리고 있었다.

[솜씨가 아주 좋던데. 자연스럽게 속이고 자연스럽게 빼앗고, 자연스럽게 따돌리고.....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웠어.]

소녀의 음성은 정말 유리잔이 서로 부딪히는 것처럼 맑고 듣기 좋았다.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다 봤어요?]

[그럼 숨긴 게 있기나 하니? 발가벗기 까지 한 주제에.]

소녀가 킥킥거리며 웃는다.

현천록은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헛기침을 하면서 얼버무렸다.

[바른 행동은 아니었죠. 하지만 전 상인이었으니.... ]

소녀가 현천록의 어깨를 탁 치면서 호쾌하게 말했다.

[상인이면 어떻고 도둑놈이나 사기꾼, 강도면 어때?]

[?]

현천록이 뜻밖이라는 듯이 소녀를 쳐다보았다.

키는 현천록과 비슷하다. 하지만 겉보기만으로도 현천록이 몇 살은 더 어려 보인다.

소녀가 말했다.

[세상엔 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벌써 장사꾼도 많이 있었고 도둑놈이나 사기꾼, 강도도 많았단 말이야. 네가 그 무리들 중에 잠시 끼어봤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너한테 당할 놈이면 어차피 다른 놈에게 당하게 돼있어. 이런 걸로 자기 변명하느라면 세상이 너무 피곤해져.]

현천록은 자기 이마를 철석 치면서 말했다.

[절묘한 말이군요.]

비명소리가 가까워진다.

소녀가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동추겸 그 멍청이도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 어쩌면 매일 죽는 놈 중에 너 한녀석 더 보태져도 별로 다를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전 도망가야겠습니다.]

[글쎄.....]

소녀가 생글생글 웃는다.

순간 현천록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두 팔을 활짝 펴고 새처럼 활개짓을 했다.

휘이익!

그의 몸이 정말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어느 새 창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현천록은 정말 자기의 몸이 우화등선하는 신선의 몸처럼 아무런 무게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하늘을 흐르는 바람을 타고 몸을 내맡게 순식간에 십 여 채의 지붕을 넘어갔다.

소녀가 입으로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무공을 아는 녀석이었네.]

소녀가 큰 소리로 물었다.

[! 꼬마야! 너 이름이 뭐야!]

[현천록!]

멀리서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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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석관 속에서 벌어진 일      

 

 

 

(과연 백도제일고수의 딸답구나!)

막비강은 소문으로만 듣던 헌원여호의 위풍에 절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화색쌍요(花色雙妖)! 너희 연놈들이 더 이상 세상의 선량한 남녀를 망치지 못하도록 해주마!]

그때 장내의 헌원여호가 살벌한 표정으로 말하며 두 간부간녀에게로 다가섰다.

(저자들이 화색쌍요!)

막비강은 깜짝 놀라 가슴이 서늘해졌다.

 

 분면색마(粉面色魔) 관지(關志)!

 도화요희(桃花妖姬) 전옥교(全玉嬌)!

 

이것이 두 탕부탕녀의 이름이었다.

그자들은 한 사부를 모신 사형제간이며 또한 사실상의 부부이기도 했다

음탕한 방중술(房中術)과 채보술(採補術)로 악명을 떨친 쾌활문(快活門)이라는 문파가 그들의 사문이다.

또한 그자들은 중원육요(中原六妖)에 드는 절정고수들이기도 했다

개개인이 무협제원이나 염라철장에 필적하는 고수들인 것이다.

만일 막비강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섣불리 뛰어들었다면 응징을 하기는커녕 그들의 수중에 떨어져 노리개가 되었을 것이다.

원래 그자들의 실력으로는 단신으로 헌원여호와 충분히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의의 기습을 받아 둘 다 심한 중상을 입어 운신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사실 헌원여호는 일찍이 청련사에 침입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라도 단신으로는 화색쌍요를 확실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을 한 것이다.

막비강이 본 두 야행인 중 두 번째 야행인의 정체가 바로 헌원여호 헌원빙이었던 것이다.

[죽어랏! 네놈에게 몸을 망친 여자들을 대신해서 응징을 내린다!]

번쩍!

헌원여호는 중상을 입어 기식이 엄엄한 도화요희는 제껴 두고 먼저 분면색마에게 호치도를 휘둘렀다.

[악독한 계집!]

분면색마는 욕지거리를 해대며 다급히 몸을 굴렸다.

일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헌원여호는 더욱 사납게 칼을 휘둘렀다.

분면색마도 필사적으로 몸을 굴려 그녀의 살수를 피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마침내 분면색마는 한구석으로 몰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자의 몸은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으으으! 네년이...!]

분면색마는 절망의 표정으로 헌원여호와 그녀의 호치도를 올려다보았다.

[단칼에 죽여 주는 것을 감사해라!]

헌원여호는 냉혹한 표정으로 웃으며 호치도를 높이 쳐들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부르르!

돌연 헌원여호의 당당한 몸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으음!]

이어 갑자기 헌원여호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 헌원 아주머니가 왜 저러지?)

돌연한 상황에 막비강은 어리둥절했다.

[으하하하! 네년이 제 꾀에 빠졌구나!]

순간 그때까지 죽을상이던 분면색마가 갑자기 득의의 가가대소를 터뜨렸다.

[흐흐! 어떠냐, 헌원 계집년아. 환락쾌활분(歡樂快活粉)의 효과가?]

[흐윽! ... 네놈이 언제 최음제를...!]

헌원여호가 분노와 절망에 찬 음성으로 신음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삽시에 장작불처럼 달아올랐다

지독한 최음제에 중독된 현상이었다.

[흐흐! 궁금하다면 가르쳐 주지! 본좌의 묘약은 바로 저 황촉(黃燭)에 뿌려져 있었다!]

(! 그래서 비구니들이 모두 최음독에 중독당한 거였구나!)

분면색마의 말에 막비강도 확연히 깨달았다

분면색마는 황촉에 최음독분을 섞은 채 비구니들을 불러들여 그녀들을 색욕의 노예로 만든 것이다.

이를 알 리 없는 헌원여호는 무방비 상태로 독연기를 들이마셨으며 게다가 거푸 내공을 사용한 탓에 독기가 급속도로 온몸에 퍼져 버린 것이다.

[... 이 간악한...!]

헌원여호는 이를 갈았으나 온몸이 나른하고 정신이 혼미해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

그런 그녀를 분면색마는 거칠게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렸다

헌원여호는 무력하게 넘어졌고, 그 바람에 치마가 걷혀 새하얀 허벅지가 일부 드러났다

육척이 넘는 체격에 어울리게 그녀의 허벅지는 한 아름이 넘어 보일 정도로 투실투실하다.

[흐흐! 감히 본 신선의 몸에 상처를 냈겠다!]

드러난 헌원여호의 흐드러진 허벅지를 훑어보며 분면색마는 잔혹하게 키득거렸다.

[네년을 매음굴에 팔아버리겠다! 흐흐흐! 위명이 쟁쟁한 헌원여호께서 창녀가 되어 아무 놈에게나 가랑이를 벌리고 몸을 판다면 강호의 화젯거리가 되겠지?]

분면색마는 간악하게 웃으며 헌원여호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헌원여호는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푸들푸들 떨 뿐 반응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분면색마는 입맛을 다셨다.

[흐흐! 매음굴에 팔아넘기기 전에 우선 본좌가 일차 맛을 봐야겠다!]

그자는 만일에 대비하여 헌원여호의 혈도를 찍으려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악적! 물러서랏!]

쐐액! 콰차창!

돌연 창문이 하나 왕창 부서지며 작은 그림자가 득달처럼 날아들었다

막비강이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무모하게 뛰어든 것이다.

막비강은 자신이 결코 쌍요 같은 고수들의 적수가 못됨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객당으로 뛰어들자마자 무지막지한 살수를 휘둘렀다.

쐐애액!

그의 등에 짊어져 있던 곡괭이가 풍차처럼 분면색마에게 날아갔다.

[!]

분면색마가 깜짝 놀라 급히 물러서려는 순간 막비강은 이미 그의 지척으로 육박하며 장풍을 무찔러 내고 있었다.

분면색마도 다급히 장을 내밀어 막비강의 장풍을 맞받아쳤다.

퍼펑!

폭음이 일며 분면색마의 몸이 휘청했다

창졸간인지라 공력의 삼 할도 못 쓴데다가 호치도에 당한 옆구리의 상처가 터진 것이다.

하지만 막비강의 상황은 더 안 좋았다.

[!]

그는 온몸이 쩌르르 울려 대여섯 걸음 비틀거리며 물러서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그가 금강옥액을 복용하여 일갑자 가까운 내공을 얻었다 해도 아직은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한 것이다.

[허허! 요 쥐방울만한 것이 감히...!]

상대가 누군지를 발견한 분면색마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토했다.

[흐흐! 스스로 염라전에 뛰어들었으니 본좌를 야속하다 말아라!]

분면색마는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막비강에게 다가들었다.

(우라질! 역시 육요의 이름이 헛것이 아니었구나!)

막비강은 상상 이상으로 강한 분면색마의 공력에 압도당해 찬바람을 들이켰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내공을 일으켜 분면색마와 맞설 자세를 취했다.

그때였다.

[사형! 그 귀여운 놈을 죽이진 말아요!]

한옆에서 상처를 추스르고 있던 도화요희가 다급히 외쳤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고 있던 그녀는 상대가 몸은 어른 같지만 얼굴은 아직 치기 어린 소년임을 알아보자 음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이 망할 것아! 이런 지경에도 너란 년은...!]

분면색마는 화가 나서 도화요희 쪽을 돌아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번쩍!

갑자기 그때까지 죽은 듯이 누워 있던 헌원여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동시에 그녀의 호치도가 일섬 도광을 폭출했다.

[조심... 사형!]

[!]

[가자!]

세 마디의 서로 다른 외침이 동시에 터졌다.

분면색마는 갑자기 가해진 일격에 맞아 또다시 어깨에서 피분수를 뿜었다.

그자가 비틀하며 몸을 세웠을 때 이미 장내에는 헌원여호와 막비강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헌원여호는 사력을 다해 분면색마에게 일격을 가한 뒤 막비강의 손목을 잡아채며 객당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서랏!]

분면색마가 이를 갈며 뛰쳐나갔으나 헌원여호의 모습은 이미 야음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

 

응봉현 교외에 자리한 공동묘지.

어두운 야음 아래 수많은 고분들이 음산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었다.

쐐액!

문득 야음을 가르며 한 줄기 인영이 유성처럼 고묘군 사이로 떨어졌다.

[흐윽!]

떨어져 내린 인영은 곧 괴로운 신음을 발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선배님! 정신차리십시오!]

그 인영에 이끌려 함께 바닥에 나뒹군 소년이 실색하며 외쳤다

그들은 바로 청련사를 탈출한 막비강과 헌원여호였다.

막비강과 함께 단번에 수십 리를 달려온 헌원여호는 갑자기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녀의 상세를 살피던 막비강은 다급해졌다

헌원여호의 온몸이 불덩이같이 뜨겁고 연신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때문이다.

(큰일났다! 어떻게 최음제의 해약을 구하지?)

막비강은 솥 안에 빠진 개미처럼 어쩔 줄 몰라하며 허둥댔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우!]

돌연 두 사람이 날아온 쪽에서 분노에 가득 찬 장소성이 들리지 않는가?

(쌍요다!)

막비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장소성의 주인은 바로 분면색마였던 것이다.

(여기 있다간 잡히고 만다!)

막비강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한 몸이야 어떻게 숨는다 해도 헌원여호가 분면색마의 수중에 들어가면 큰일이었다

일대기인인 그녀가 분면색마 같은 색마에게 능욕을 당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급히 주위를 살피던 막비강의 시야에 하나의 커다란 고묘가 들어왔다.

(우선 저기로 숨고 보자!)

막비강은 급히 헌원여호를 들쳐업고 고묘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고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막비강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절감해야 했다

고묘 안은 휑뎅그렁하여 몸을 숨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도굴을 당한 듯 고묘 안에는 깨진 도자기 파편만이 널려 있을 뿐이었다.

묘실 가운데에는 큼직한 석관(石棺)이 하나 휑뎅그렁하니 놓여 있었는데 그나마 뚜껑도 열려진 채 깨져 있었다.

(다른 곳을 찾아 봐야겠다!)

막비강은 급히 돌아나가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그의 귓전으로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렸다.

(늦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분면색마가 지척까지 들이닥쳤음을 안 막비강은 도리 없이 헌원여호를 안고 뚜껑도 없는 석관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석관은 속이 깊고 넓어 둘이 들어갔음에도 공간이 넉넉했다.

막비강은 헌원여호를 바닥에 누이고 자신은 그 위에 엉거주춤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비록 위급한 지경이지만 감히 몸을 완전히 밀착할 용기는 없어서 두 손으로 헌원여호의 동체 옆의 바닥을 짚어 버틴 것이다.

그래도 하체가 서로 맞닿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막비강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옷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헌원여호의 튼실하면서도 보드라운 하체의 감촉이 막비강의 숨을 가쁘게 만든다.

헌원여호의 체격은 정말 당당해서 지난 반년 사이 쑥쑥 자란 막비강보다도 오히려 한 뼘 가량이나 더 컸다

그래서 막비강의 얼굴은 헌원여호의 가슴에 겨우 닿을 뿐이다.

막비강이 숨은 직후 인영이 번득하며 고묘 입구에 분면색마가 날아 내렸다

그자는 예리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으으음!]

막비강의 몸 아래 깔린 헌원여호가 열에 들뜬 신음 소리를 내지 않는가?

(큰일났다!)

막비강은 질겁했다

두 팔은 바닥을 짚고 있어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을 방법이 없다

이에 다급한 김에 막비강을 고개를 빼들고는 자신의 입술로 헌원여호의 입술을 그대로 덮어 눌러 신음 소리를 막았다.

[흐흐흐! 거기 숨어 있었느냐?]

하지만 분면색마가 눈을 번뜩이며 성큼 고묘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막비강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석관이 비록 제법 깊지만 뚜껑이 없는 상태이므로 그자가 가까이 오기만 하면 그대로 들키고 말 지경이었다.

바로 그 위기의 순간이었다.

후다다닥!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다급히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근처에서 도굴을 하던 도굴꾼들이 분면색마의 웃음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교활한...!]

막 석관 속을 들여다보려던 분면색마는 분노의 일성과 함께 석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곧 그자가 누군가를 쫓아가는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휴우! 정말 위험했다!]

막비강은 비로소 안도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헌원여호의 몸에서 일어서려 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헌원여호의 팔다리가 그의 몸을 뱀처럼 휘감는 것이 아닌가?

막비강이 질겁하는 사이 그녀의 미끈한 지체는 그를 마구 휘감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친 숨결을 토해내는 그녀의 옥용은 숯불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막비강은 자신의 몸을 휘감은 헌원여호의 온몸이 물결치듯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숨막히게 조여대는 사지, 몸 아래 깔린 헌원여호의 살이 마치 솜처럼 부드럽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 그의 하체 일부가 맹렬히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양물은 비록 어린 나이지만 금강옥액을 복용한 덕분에 보통 어른들을 오히려 압도할 정도로 장대하게 자라 있었다.

그런 그의 남성이 헌원여호의 자극으로 난생처음 극한까지 자라난 것이다

헌원여호의 입에서 자지러지는 신음이 터져 나오고, 그녀의 섬섬옥수는 막비강의 하의를 더듬어 벗겨 내렸다.

막비강은 이내 자신의 불덩이 같은 일부가 더할 수 없이 부드러운 살갗에 닿는 것을 느꼈다.

이미 헌원여호의 치마는 허리춤으로 걷어올려져 허연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막비강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음에도 수컷의 본능에 따랐다.

뜨거운 신음과 함께 헌원여호의 우람한 팔다리가 막비강을 으스러뜨릴 듯이 휘감았다.

두 남녀의 육체는 한치의 틈도 없이 결합된 채 미친 듯이 요동을 쳤다.

막비강은 헌원여호의 드넓은 육체에 매달리며 본능이 시키는 대로 허리를 굴렸다

막비강의 허리가 어색하게 들썩일 때마다 헌원여호의 입에서는 죽는 듯한 비명이 흘러 나왔다.

차갑고 비좁은 석관(石棺) 속은 어느덧 뜨거운 열락의 낙원으로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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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얼굴 검은 미녀가 살고 있고 (2)

 

 

 

현천록은 숲의 나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름답고 태고의 신비마저 간직한 듯한 숲이지만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벌도 없고 나비도 없고 벌레도 없다.

보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다가 그 무공을 익히게 되었어요?]

[?]

현천록은 자기가 잘못 들었는가 싶어서 반문하며 보초를 보았다.

보초의 눈은 측은한 빛을 담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 무공을 익히게 됐느냐고 물었어요. 덕분에 이곳에 태어나게 되었지만.]

현천록이 얼떨떨하며 말했다.

[전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걸요. 아무 것도.]

보초가 흑요석같은 눈을 반짝인다.

[‘그 무공은 아주 특이하죠. 어쩌다가 운명적으로 마주치고 나면 특별히 익히려 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에 깊숙히 파고들어 버려요.]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전 아무 무공도 모릅니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아직은 배우지 못한걸요.]

보초가 풋! 하고 웃었다.

꼭 바보라고 놀리는 웃음같다.

현천록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화는 나지 않았다.

보초가 물었다.

[미장! 아마도 사람과 물건을 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겠지요?]

[조금. 하지만 별 것 아니었어요.]

보초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현천록은 사과를 손바닥에서 슬슬 돌리며 말했다.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어요. 저도 잘 모르니까. 한데 어느 봄 날이었어요. 검을 만드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렇게 생긴 검은 요렇게 요렇게 쓰면 좋겠구나!’하고요. 그 후에는 뭘보든지 즉시 그에 알맞는 용도가 저절로 제 머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게 그뿐만 아니었어요. ‘저 사람은 저렇게 생겼으니까 저런 걸 가지면 잘 어울리겠구나. 또 저 사람은 뭘 어떻게 하면 어떻겠구나하는 생각까지 하게되었죠.]

보초가 말했다.

[그게 다 그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뜻밖에도 지금있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익힌 것 같군요. 누구도 미장 만큼 신지가 트이진 않았거든요.]

[대체 제가 어떤 무공을 익혔다는 거죠?]

보초가 손짓을 해서 현천록을 자기 앞에 앉도록 했다.

[구장심조(九贓心照)라 불리는 무공이지요. 바로 이분께서 처음에 만드셨어요.]

보초의 손이 사과나무의 가지를 툭 건드린다.

[하하.....]

현천록은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듣고 있는 자기도 이상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건 그냥 자기의 감정을 얼버무리는 웃음이다.

얼핏 보니 보초의 얼굴이 살짝 찌푸러져 있다.

현천록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보초가 말했다.

[구장심조는 이분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분은 만들었다고 말하지도 못하셨죠. 당신의 자질로는 결코 구장심조같은 절대적인 현공(玄功)을 창안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구장심조는 스스로 생명을 갖고 있다가 이분을 통해서 나타난거나 다름없죠. 아주 특이한 무공이니까요.]

현천록은 곰곰히 생각하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창안이 아니라 발견했다고 해야겠군요. 어떻게 특이하다는거죠?]

보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장심조는 사실 온전하지 못한 무공이죠. 구장심조가 온전했다면 이곳 생사탄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분께서는 구장심조를 알게된 후에 직접 익히셨고, 그 때문에 생사탄이 만들어졌어요.]

현천록은 이해할 수 없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보초의 흩어지는 듯한 음성이 귀를 간지럽히며 들려온다.

[구장심조가 완전해지면 지금과는 또 다르겠죠. 하여간 구장심조는 온전하지 못했고, 어떤 이유에서든 익히게 된 사람은 이곳 생사탄에 들게 되죠. 생사탄의 힘에 이끌려 오게 된다고 할까요? 생사탄은 말 그대로 삶과 죽음 사이에 만들어진 또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실제로는 삶과 더 많이 겹쳐져 있어요.]

[생사탄의 힘이 이끌려 오게 된다구요? 그럼 저도 제발로 여기까지 온건가요?]

현천록은 처음으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보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장심조를 익히고 나서 칠년이 지나게 되면 대체로 첫장에 막히게 되죠. 그때 보통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게되죠. 기도 끊어지고 심장도 멎어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세시간 정도 지나면 다시 기가 돌게되고 심장도 뛰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몸에 한꺼풀의 껍질이 생기게 되요. 그 껍질이 단단해지기 전에 생사탄으로 와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생사탄 밖에서 구장심조의 두 번째 장을 만나게 될테니까. 하여간 이건 신경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사탄의 힘에 이끌려 오게 되니 걱정할 건 없어요. 미장이 여기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리고 나서 삼년동안 껍질 속에서 영글어갔던 거죠.]

현천록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삼년이라구요? 제가 정말 삼년이나 잠을 잤단 말이예요?]

보초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놀라웠어요. 아직 어느 누구도 삼년 만에 껍질을 깨진 못했거든요. 구장심조를 아주 깊이, 우리 중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익혔다는 증거죠.]

현천록이 말했다.

[내 몸은 조금도 자라지 않은 걸요.]

[바깥바람을 쐬게 되면 자라겠지요.]

보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이제 생사탄 밖을 벗어나지 못해요. 미장이 아직 어려 보이지만 바깥바람을 쐬면 금방 자라는 것처럼, 나는 바깥바람을 쐬게 되면 금방 늙고 말겠죠.]

보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호. 여자는 아무도 봐주지 않을지라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어하잖아요.]

현천록이 물었다.

[밖에 나가면 난 그전과 똑같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볼 수는 있습니까?]

보초가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생사탄을 볼 수는 없지만 우리들을 볼 수는 있어요. 다만 그들이 우리를 보지 않으려 한다면 볼 수가 없겠지요.]

현천록은 그녀의 대답을 들으면서 속으로 자기를 질책했다.

(말도 안돼. 내가 정말 이 말들을 믿고 있는걸까? 머리도 아프지 않은데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보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분이 익히셨던 구장심조공은 미장 당신과 비슷한 정도였을 거예요. 하지만 다른 뭔가가 더 있었죠. 이분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힘으로 구장심조를 익히고 또 자기도 알지 못하는 힘으로 이분의 손에 닿은 모든 것들이 세상과 동떨어지게 만들었어요. 이곳 생사탄도 원래는 그냥 바다로 통하는 거친 여울이었을 뿐이었는데 이분이 여기에 사셨다는 것 때문에 이곳 전체가 세상에서는 사라져 버린 것이죠.]

현천록은 의미없이 중얼거렸다.

[재미있군요.]

보초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분께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너무 슬픈 일이었죠. 결국 이분은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외롭게 계시다가 함께 있을 친구들을 부르기 시작했죠.]

현천록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게 바로 구장심조공이 밖으로 나오게 된 이유겠군요.]

보초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맞아요. 이분은 전부터 아끼던 물건들을 세상으로 보냈어요. 구장심조공을 새겨서요. 그 물건들은 어떤 계기로든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보였고 구장심조공을 자기도 모르게 익히게 된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죠. 그리고 그들은 이곳 생사탄으로 왔고, 물건들은 다른 세속의 물건들과 뒤섞여 지금도 흘러다니고 있죠.]

보초가 고운 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얼굴이 검어서 이빨이 모두 하얀 보석같이 보인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 물건들이 생명을 다하고 사라져 버렸는지 아니면 그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는지 여기에 오는 사람은 정말 드물어졌으니까요.]

현천록이 물었다.

[그 물건들은 어떤 종류죠?]

[모두 아홉가지예요. 오죽편(烏竹片)이 있고 백설부(白雪符)가 있으며 또 현현도(玄玄刀)와 무극검(無極劒), 자룡배(紫龍杯)와 비취호(翡翠壺), 녹절장(綠節杖)과 청송포(靑松袍), 그리고 마지막으로 묵심환(墨心環)이 있군요.]

[그것들에는 다 구장심조공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현천록이 물었다.

보초가 말했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요. 대부분 구장심조공이 조금씩 기록되어 있지만 묵심환에는 이분이 자기의 공력을 나누어 담아 놓았지요. 그 때문에 그걸 얻는 사람은 저절로 구장심조공을 얻게 되죠. 내가 말한 순서대로 물건들이 밖으로 나갔는데 이 백년이 지나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묵심환을 내보냈다고 해요. 발견하고 손가락에 끼기만 하면 머지않아 이곳 생사탄으로 오게 될거라 생각했다죠.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까지 묵심환 때문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다들 다른 여덟가지 물건 때문에 오게 됐죠. 한데 미장! 갑자기 얼굴색이 왜 그래요?]

현천록은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보초가 근심어린 눈으로 계속 바라보자 마지못한 듯 머뭇거리며 자기의 왼손을 내밀었다.

[이건 내 비밀이죠. 아무도 몰라요.]

현천록이 푸념하며 말했다.

보초가 더 이상 커지지 않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살짝 벌린 입도 눈만큼이나 동그랗다.

[세상에..... ]

현천록의 왼손 중지에서 거무튀튀한 가락지가 생겨나고 있었다. 마치 나무가 자라나듯이....!

[묵심환! 묵심환이군요.]

[병기점에서 심부름하다가 암기들 속에 섞여 있는 걸 발견했었어요.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지만 거짓말 한다고 핀잔만 들었죠. 정말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손가락에 끼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눈에도 안 보일 때가 많더라구요.]

현천록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보초가 묵심환을 만져보며 말했다.

[미장의 구장심조공이 특별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놀라워요.]

 

x x x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디서 뭘하죠?]

[모두가 일을 하고 있어요. 길을 찾고 있는 거죠.]

[어떤 길?]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죠. 그럴려면 미완성인 구장심조공을 완성해야 하고, 지금의 동료들은 그 나머지 비결이 세상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고 있어요. 여기서 나무가 되어 버린 사람들은 땅과 바람과 비와 햇살 사이에 그 비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고요.]

[완성한다는 게 어떤거죠?]

[아홉번을 넘어서야해요. 아홉겹 속에 숨어있는 마음과 자연의 습리를 밖으로 끌어 내야하니까요. 미장 당신은 겨우 한겹을 벗은 것 뿐이죠. 지겹도록 살게 되겠죠. 여덟 겹을 더 벗게 될 때까진.]

[여덟 겹을 벗고 나면.....?]

[그땐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나무가 될 수도 있고. 하지만 아무도 사람이 되진 않았어요. 구장심조 속에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큰 힘과 진리가 숨겨져 있을 테니까 그곳으로 다가가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요. 사람이 되면 너무 유한해서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죽고 말테니까요.]

[아홉겹을 벗은 사람도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한 사람만 아홉겹을 벗어도 생사탄은 사라지겠죠. 또 다른 생사탄이 만들어질지는 몰라도 이분의 생사탄은 사라져요.]

[한겹 한겹 벗을 때 마다 어떻게 다른가요?]

[처음에는 육신의 무게를 잃어버리게 되요. 깃털보다 가벼워져서 바람에 몸을 실을 수가 있을 정도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런 건 저절로 알게 되요. 미리 안다고 해서 어떤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뭘해야 할까요?]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해요. 무엇이든지. 미장은 아직 젊잖아요. 무한에 가까울 정도의 시간이 있어요.]

[꼭 불노불사의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군요.]

[호호호! 신선 비슷하긴 하지만 실패작이죠. 그러나 이것 하나는 명심해요. 어쩌면 이 생사탄은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와도 연결되어 있는 몽환의 공간일 수도 있다는 걸요. 여기서의 시간은 긴듯해도 실제로는 찰라에 불과할 수도 있고 갑자기 사라지고 나면 그냥 백일몽을 꾼 것 정도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구장심조공을 익힌 사람의 마음이 지어낸 곳이니 어련할까요? 저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미장! 떠나기 전에 한 번 물어볼게요.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

[아직은 더 알고 싶어요. 그리고 뭐든지 다 해보고 싶어요.]

[그 다음은?]

[변신(變身)을 하겠어요.]

[엉뚱하군요.]

 

X X X

 

뺨이 수축되어 팽팽해질 정도로 날씨가 차갑다.

눈발이 섞여있는 바람이 성긴 베옷 속으로 스며들어 가까스로 짜낸 체온을 휩쓸어가버린다.

하얀 눈들은 산과 들과 숲을 덮고 있고, 이제 금방 생긴 발자국도 조금씩 소리없이 덮어간다.

현천록이 다시 세상에 나와서 본 첫 모습이었다.

손이 시리고 발이 시리고 이빨이 시리다.

눈은 세상을 덮은 것만으로 모자라서 이제 사람까지 덮어버릴 요양으로 진눈개비 재주를 부린다.

마음 속의 생사탄에서 자기가 빠져 나왔는지, 생사탄 속에 있던 마음이 밖으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보이진 않지만 생사탄은 문만 열만 볼 수 있는 방안의 침상처럼 가까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거리는 영원히 멀어지지 않을 것 같다.

생사탄에서 나올 때 보초가 준 고급스런 토끼가죽 옷이 그의 손에 들려있다.

열두살이던 몸이 세상을 대하면서 갑자기 커져서 몸에 걸쳤던 옷이 찢어지진 않았지만 꽉 끼인다.

하얀 눈밭에서 발가벗고 토끼가죽 옷으로 갈아입었다.

흰눈과 흰 토끼가죽 옷을 입은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분간하기 힘들게 되었다.

현천록은 가슴을 활짝 펴고 차가운 바람을 깊이 들이켰다.

들여 마신 바람은 전신의 모공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것 같다.

가슴이 확 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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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검은 얼굴의 미녀가 살고 있고

 

 

 

새로 생긴 무덤은 굶주린 짐승들에 의해 금방 파헤쳐진다.

그래서 상주(喪主)들은 무덤 곁을 떠나지 못하고 흙이 굳어지고 띠가 자랄 때까지 무덤을 지키기도 한다.

시체 썩는 냄새는 땅속에서 땅속으로 퍼져 나가고, 영민한 여우나 들개들이 그 냄새에 이끌려 찾아온다.

눈은 모든 추악함을 덮고 땅은 온갖 더러움을 덮어 자신과 동화시켜 버리지만, 밤은 종종 그 속에서 신비를 잉태하기도 한다.

 

--- 여기 피지도 못한 소년 죽어가니 들을 이가 없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노라.

 

급하게 나무를 깎아 만든 묘비에 쓰여진 이상한 글은 아주 보기드문 명필의 솜씨다.

밤은 신비를 잉태했으나 신음은 묘비가 하도록 했다.

묘비는 꺾이고 무덤은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밤은 무덤 속에 있어야 할 그 무엇과 함께 사라져 갔다.

 

X X X

 

아주 어두웠다.

시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꽤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그의 눈으로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입안에서 맴도는 반벙어리의 소리인양 귀바퀴를 맴돌고 있다.

몸은 물에 젖은 솜뭉치 마냥 나른하게 늘어져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둥둥 떠서 허공을 헤매는 것 같기도 하고, 물속에서 물결을 따라 흐르는 것 같기도 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바람없는 무저갱 속을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살아온 날들의 기억이 미치는 가장 먼 곳에서 시작해서, 다시금 자신을 자각하게 된 이 순간 직전까지의 모든 일들을 머리 속으로 더듬어 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 정말 처음으로 자기와 타인을 구별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처럼 혼자있는 자신을 발견했었다.

처음부터 무한히 그곳에 있었던 성도 싶고 무심코 걷다가 낯선 곳에서 갑자기 정신이 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생활들과 더불어 기억들은 새롭게 만들어지고 그 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머리가 띵해오며 천지가 지금 보이는 암흑과 똑같은 색으로 변했을 때까지.

[막 부화하려고 해요. 조심해서 지켜 보세요. 이런 장면은 쉽게 볼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무엇인가 빠져버린 것 처럼 흩어지는 음성이 들려왔다.

[여러분도 저런 과정을 거쳐서 태어났어요. 물론 그때는 아주 오래 전이겠죠. 사실 그동안 이런 일은 너무 드물었어요.]

한 사람만이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웅얼거리던 소리들 마저 없어지고 쥐죽은 듯 고요하다.

오직 흩어지는 묘한 음성이 나른하게 정적 속을 퍼져 나가고 그의 귀에 까지 스며든다.

아니, 그 소리는 그의 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백 칠십 년 전에 한 번, 그리고 그때부터 제일 가까웠던 건 이백 사십년 전이었어요. 나도 다시금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어요. 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은 모두 단절되어 버리는가 했거든요.]

그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의문이 생기지 않았다.

그 음성이 갖는 부드러운 마력때문인지 아니면 의문자체가 그의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듯 하면서도 흩어지는 묘한 음성이 계속되었다.

[보세요. 빛이 나죠? 저 빛이 점점 더 강해지다가 사라지고 나면 그때부터가 진짜예요. ! 벌써 강해지는군요. 언제보아도 감탄스런 빛이죠. 너무 아름다워요. 북쪽의 극지에 갔을 때 본 극광보다 더 아름다워요. 모두 잘봐 두세요. 다시 이 빛을 구경하려면 이제 몇 백년, 아니 몇 천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

음성이 갑자기 격해졌다.

[정점! 이럴 수가! 벌써 빛의 정점에 달했어요. 우린 생각보다 운이 더 좋아요. 좀더 일찍 보게 되겠군요. 이제 곧 저 빛이 사라지고 암흑처럼 깜깜해질 거예요. 하지만 어둠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모두가 이 극적인 장면을 볼 수 있어요....... 암흑.... 암흑이군요.]

그는 몸이 두 개로 나뉘는 것 같은 이상감각을 느꼈다.

무거운 부분이 몸에서 떨어져 내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의 몸은 무게를 잃어버리고 깃털보다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너무도 가벼워 바람을 타고 흐를 것만 같았고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귓전으로 떨리는 음성이 흩어지며 지나갔지만 더 이상 머리 속으로 스며들지는 않았다.

의식이 공중을 부유하는 꿈같은 상태가 얼마간 지속되었다.

그는 갑자기 자기 속에서 치민 갑갑함에 발을 쭈욱 뻗으며 몸을 뒤척였다.

순간 강렬한 빛이 눈의 조리개를 콱 수축시켰다.

[탄생했습니다. ! 여러분. 새로운 동료입니다. 아직 이 세상과 일에 익숙치 않을 테니 어디 있으나 항상 여러분이 돌봐주기 바랍니다. 이 새로운 친구의 이름은..... ....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모습이니까 우린 미장(未長)이라고 부르기로 하죠. 이 친구도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 제각기 바쁠테니까 인사는 다음에 하도록 하세요. 그림자가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이내 만나게 될 테니까요.]

그가 빛에 적응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상한 빛들이 천장을 스며들어온 빛에 의해 점점 작아지며 소멸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타서 없어지는 유성처럼 밝게 빛나며 사라져갔다.

! 그리고 그곳에는 공간이었다.

[미장! 활짝 웃어요. 여기서는 당연히 그래야 돼요.]

그의 앞에 불쑥 뭔가가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곤륜노(崑崙奴: 흑인)처럼 새까만데 눈은 커다란 보석처럼 반짝이고 가냘픈 입술이 짙은 자주빛을 띄고 있는 여자였다.

젊은지 어린건지 구별하기 애매모호한 나이같고 얼굴의 윤곽은 마치 새기다 만 다듬어지지 않은 목각인형처럼 이목구비가 날카롭고 선명했다.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서 궁장을 했는데, 귀밑머리를 살짝 겉어 올리는 새까만 손에 하얀 손톱이 값비싼 장식품인양 귀여워보였다.

그리고 흰옷과 아주 잘 어울린다.

오똑한 콧날이 그의 코에 맞 닿을 만큼 가까이 있다.

그는 얼굴을 조금 뒤로 물리며 말했다.

[저는 현천록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여기가 어딘가요?]

가냘픈 입술이 약간 샐쭉였다.

[먼저 웃어야 하는데...... 하는 수 없지요. 처음일 테니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겠죠.]

현천록은 여자의 입에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꽃향기같기도 하고 사탕을 금방 먹었을 때 사라지지 않은 냄새같기도 했다.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말소리가 깨어져 들려온다.

[당신 이름은 미장이예요. 그리고 나는 보초(步哨)라고 하죠. 여기는 생사탄(生死灘)이라 불리는데 나나 미장같은 사람들이 잉태되어 태어나는 곳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 이름이 별로 의미가 없어요. 내가 태어났던 옛날만 해도 정말 거친 바닷가의 여울이었지만 지금은 이름만 남고 바다는 멀리 물러나 가버렸으니까요.]

현천록은 입술을 달짝여 말했다.

[전 죽은 것입니까 아니면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난 것입니까?]

보초가 흰 소매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여긴 생사탄이라고... 따라서 미장은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았어요. 미장이 해야할 일을 가르쳐 주죠. 이제 그만 일어나요. 미장!]

현천록은 보초의 손길을 따라 일어나 앉았다.

천장이 눈에 확 들어오지만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빛이 천장의 한가운데서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사람 몸에 물에 젖은 종이를 붙였다가 마른 후에 떼어낸 것 같은 물체가 있었다.

약간 섬뜩하게 보인다.

현천록은 그것이 자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제 이름은 현천록입니다. 천록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보초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미장이죠. 그리고 우리들 중의 막내이기도 하고.]

[이건 당신네 문파의 전통입니까?]

현천록의 말을 들은 보초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호호호호! 호호호! 아휴~ 우스워!]

현천록은 자기가 다시 어떤 문파에 잡혀 왔다고 생각했다.

고독마검이란 노인도, 그리고 풍허객도 그를 제자로 삼기 위해서 엉뚱한 짓들을 벌였었다.

보초라는 이상한 여자가 있는 이곳도 잠시 본 대로라면 풍허객과 그 의도에 있어서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았다.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 문파의 이상한 의식들이 더 우습게 느껴집니다.]

보초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허리를 펴며 말했다.

[따라와요. 보여주지 않을 수 없군요. 하긴 그럴만도 하죠. 누구나 처음에는 그런 오해들을 하곤 하니까.]

 

현천록은 빛이 나는 천장을 가진 둥글고 큰 방을 빠져나와 보초를 따라 걸었다.

복사뼈 만한 크기의 희고 검은 자갈들이 가지런히 깔려있는 길을 걸어 푸른 하늘이 바다처럼 맑게 보이는 숲에 이르렀다.

참나무와 떡갈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가문비나무가 서있는 그런 숲이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굵고 가지들이 구불구불했다.

단 한 번도 손보지 않은 자연목들이 분명했다.

[여기는 우리들의 무덤, 말하자면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어요.]

보초는 참나무 한그루에 손을 대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

현천록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모든 게 장난 같았다.

[무덤은 어디 있죠?]

[전체가 무덤이지요. 이분도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었답니다.]

옹이진 늙은 참나무를 만지는 보초의 얼굴이 무척 진지하다.

현천록은 감회어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어쩌면 지금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보초가 말했다.

[나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굴참나무가 되는 날이 오겠죠.]

현천록은 보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무 슬퍼 마세요. 전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당신 이야기만큼 이상한 분은 아닌 것 같군요. 한데 왜 하필이면 모두 나무가 되는 거죠?]

보초는 현천록이 잡은 손을 끌면서 우거진 숲속 굵은 가지들 밑으로 점점 깊이 걸어갔다.

[하필이면이 아닙니다. 원하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어요. 심지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현천록은 괜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힐끗 보초의 옆모습을 살폈다.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상한 매력이 그 얼굴에서 흐른다.

피부는 까맣지만 너무도 맑은 것 같다.

[하지만 다들 나무가 되길 원하더군요. 나도 이제는 그게 조금씩 이해가 되고....]

보초가 밝게 웃으며 현천록을 보았다.

현천록은 마주 씨익 웃었다.

적당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잘 듣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한 웃음이다.

보초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 말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요. 천지의 이치에도 맞지 않고...... 또 우리 뜻에도 맞지 않았으니까요. 남들은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죠.]

현천록은 손가락으로 십장 밖에 서있는 한그루의 자그마한 과일나무를 발견하고 말했다.

[저 나무는 아주 작군요. 제 키만한데요.]

보초가 현천록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린 저분께 인사하러 왔어요. 불평을 하려거든 저분께 실컷 해요. 나도 옛날에는 그랬으니까.]

현천록은 긴가민가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초가 귀엽다는 듯이 현천록의 뺨을 톡! 건드리고 앞서 걸었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황금빛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작은 나무의 밑둥만은 이 숲속의 여느 나무 못지않게 굵었다.

하지만 이내 붓끝처럼 뾰족하게 올라와 잎을 달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사과나무 앞에서 보초가 말했다.

[생사탄을 만든 분이고 우리들을 이곳으로 이끈 분이기도 하며 가장 먼저 나무가 되신 분이기도 하지요.]

현천록은 나무의 신비함에 감탄했지만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잎을 하나 가져도 될까요?]

보초가 사과를 하나 따서 현천록에게 내밀었다.

사과냄새가 폐부까지 스며든다.

[고마워요.]

현천록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는 걸요.]

보초가 옆의 풀밭에 앉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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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암호랑이라 불리는 여인

 

 

 

(!)

막비강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치떠졌다.

그는 지금 한 칸 객당의 처마 밑에 박쥐처럼 매달려 있었다.

객당의 사방 창문은 두터운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천이 조금 갈라진 곳으로 불빛이 흘러 나오며 객당 안의 정경이 막비강의 눈에 들어왔다.

헌데 굵은 황촉의 불꽃이 너울거리고 있는 객당 안에서는 차마 듣기 민망한 교성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 저런 천인공노할...!)

막비강은 너무나 놀라고 화가 나 하마터면 매달린 처마에서 떨어질 뻔했다

널찍한 객당의 바닥에서는 차마 눈뜨고 못 볼 난잡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여러 명의 여인들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비구니들이었다.

비구니들은 나이가 천차만별로 십오륙 세의 어린 소녀가 있는가 하면 사십대의 원숙한 중년비구니도 있었다.

그녀들은 아마도 이곳 청련사의 비구니들인 모양이었다.

비구니들은 회색 가사를 훌훌 벗어버린 채 몸을 비틀며 거친 숨을 토하고 있었다.

(바득! 겉으로만 절이었지 사실은 창녀들의 소굴이었구나!)

막비강은 여승들의 치태를 보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는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현장을 떠나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 고것들...!]

문득 객당 안에서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막비강은 움찔 놀라 시선을 옮겼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찢어질 듯이 치떠졌다

객당 바닥 한구석에서 그는 천만 뜻밖의 광경을 본 것이다.

중년의 비구니와 어린 비구니를 사내도 여자도 아닌 아닌 자가 유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과 상체는 분명 여자인데 하체는 사내인 기괴한 자였다.

믿기지 않는 장면에 막비강은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비구니들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모두 미약에 중독되었다!)

막비강은 비구니들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흐려져 있는 것을 알아보았.

(악독한 놈! 저놈이 여자로 위장하고 이 절에 유숙하며 비구니들에게 미약을 썼구나!)

비로소 사정을 이해한 막비강이 분노에 몸을 떨 때였다.

[호호호! 재미가 좋군요, 사형!]

삐꺽!

요사스런 웃음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실내로 들어섰다.

막비강은 급히 몸을 움츠리며 새로 나타난 인물을 바라보았다.

실내로 들어선 것은 한 명의 미소부였다

풍만한 몸매에 요염한 용모를 지닌 삼십대 중반의 그 여인은 얇은 나삼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허리에는 한 명 소년이 안긴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잠옷을 입은 그 소년은 막비강 나이 또래였다.

막비강은 나타난 여인이 바로 자신이 처음 보았던 야행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흐흐! 누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랐소?]

두 비구니를 농락하던 사내가 고개만 돌린 채 여인을 돌아보았다.

[! 너무 불공평해요! 사형은 손 하나 까딱 않고 재미를 보고...! 다음번에는 중들이 사는 절에서 자자구요!]

여인은 안고 온 소년을 바닥에 누이며 눈을 흘겼다.

[흐흐! 좋도록 해라! 사매가 밤새 몇 명의 땡중을 파계시키는지 지켜보는 것도 각별히 재미있겠지!]

사내는 음탕하게 웃었다.

미소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납치해 온 소년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헌데 그녀의 만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때였다.

콰쾅!

갑자기 한 쪽 창문이 박살나며 한 줄기 인영이 질풍처럼 날아들지 않는가?

[죽어랏! 요망한 것들!]

번쩍!

날아든 인영은 앙칼지게 외치며 벼락같은 섬광을 두 탕부탕녀에게로 휘몰아쳐 냈다.

[!]

[!]

한창 열락에 빠져 있던 두 남녀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그들은 유린하던 제물들을 팽개치며 다급히 몸을 굴렸다.

하지만 암습자의 무공은 실로 신쾌한 것이었다.

스팟! 후두둑!

[!]

[!]

피가 확 번지며 두 마디의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소년을 농락하던 요부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가슴까지 쩍 갈라져 나뒹굴었고

비구니들을 유린하던 사내는 옆구리에서 피분수를 흘리며 물러섰다

요부는 왼쪽 가슴이 거의 두 쪽이 나 자칫했으면 심장이 쪼개질 뻔한 중상이었다.

[... 너는!]

[헌원여호(軒轅女虎)!]

나타난 암습자를 본 두 탕부탕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헌원여호라면 강호칠절 중에 드는 고수이신데...! 그분이 나타났단 말인가?)

막비강은 호기심이 동해 고개를 쭉 빼밀고 실내를 들여다보았다.

과연, 실내에는 피투성이가 된 두 탕부탕녀 앞에 한 명 여인이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이는 삼십오륙 세 정도, 여자의 몸인데도 키가 육 척(六尺)에 가깝고 체격이 딱 벌어져 한눈에 봐도 일대여걸의 풍모가 풍기는 여인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반면 끊어질 듯 잘록한 허리, 얼굴도 대단한 미모로 보는 이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했다.

다만 눈썹이 사내처럼 짙고, 눈꼬리가 홱 올라갔으며, 입술의 모양이 단호하고 냉막하여 절로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여호(女虎)라는 별호가 실로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수중에는 호랑이 이빨처럼 뾰족뾰족한 날이 돋은 육중한 호치도(虎齒刀)가 한 자루 들려 있었다. 방금 두 탕부탕녀를 휩쓸어 버린 것이 바로 그 칼이었다.

(여자가 저토록 무지막지한 중병기를 쓰다니...!)

막비강은 절로 질려 숨을 죽였다.

 

 헌원여호(軒轅女虎) 헌원빙(軒轅氷)!

 

이것이 바로 무림의 암호랑이로 불리는 이 여걸의 이름이다

비록 삼십대 중반의 많지 않은 나이지만 그녀는 정파백도의 유수한 고수들인 강호칠절 중 일인인 것이다.

사실 그녀는 대단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사해무련(四海武聯)>

 

당금 강호무림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세력들인 사패천 중 남패천(南覇天) 사해무련이 그녀의 출신인 것이다.

사해신존(四海神尊) 헌원궁(軒轅弓)이란 영웅이 육십 년 전에 창건한 사해무련은 사패천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하다

무림인들은 사해무련을 공공연히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부를 정도다.

서패천 혈검산장, 동패천 유가총림(儒家叢林), 북패천 북산검호각(北山劍豪閣)등이 비록 사해무련과 함께 사패천으로 꼽히지만 실제 전력을 비교하면 사해무련에 비해 많은 손색이 있다

사실상 장강 이남의 무림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남패천 사해무련인 것이다.

그 사해무련의 창건자 사해신존 헌원궁이 헌원여호 헌원빙의 생부다. 또한 당대 사해무련의 방주인 사해용왕(四海龍王) 헌원척(軒轅拓)은 헌원빙의 오라버니이기도 하다.

정파무림 제일고수로 추앙받는 사해신존의 진전을 이었기에 헌원빙은 삼십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호칠절의 반열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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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창;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인지요?]

벽소소; [이청풍이 놈의 누이동생을 사창가에 팔아버리세요.]

[!] 눈 부릅뜨는 이세창

벽소소; [단지회란 쓰레기들을 이용하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이세창; [... 굳이 이청풍의 누이까지 건드릴 필요는...] 비지땀 흘리며 말할 때. + 벽소소; [당연히 있어요.] 이 부득 갈며 내뱉아서 이세창의 말을 막고

벽소소; [이가놈 때문에 내가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그냥 죽이는 걸로는 성이 차지 않아요.] 마녀같은 표정이 되고

침 꿀꺽 입 다무는 이세창

벽소소;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이가놈에게 지옥을 경험하게 해야겠어요.] [하나뿐인 누이동생이 더러운 사내놈들에게 깔려서 노리개가 되는 걸 알면 어떤 기분이 될지 궁금하네요.] 광기서린 표정으로 헐떡이고. 한손으로는 자신의 치부를 만지면서

이세창; (... 위험해!) 식은땀

이세창;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저 계집 근처에 있다가는 벼락을 맞는 수가 있다.) 비틀거리며 물러서지만

벽소소; [이제 결정을 해주셔야겠어요 총관님!] 요염하게 웃으며 자기 잠옷 자락을 들춰보이고

벽소소; [날 범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죽을 것인지...] [아니면 나와 함께 도원경을 경험할 것인지를...]

이세창; (함정...) 식은땀

이세창; (치졸하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빠졌다.) 식은땀 흘리면서도 허리띠를 풀기 시작하고

벽소소; [어머나!] 그걸 보며 눈 치뜨고

벽소소; [역시 총관님은 계산이 참 빠르시군요.] [하긴 그 정도 눈치가 있으니 황금전장의 총관이 되셨겠지만...] 바로 눕고

이세창; (어느 쪽을 선택해도 지옥...) 거칠게 옷을 벗고

이세창; (기왕에 떨어질 지옥이라면 달콤한 지옥쪽이 낫겠지.) ! 벽소소를 덮친다. + 벽소소; [하악!] 마주 끌어안으면서 자지러지고

 

#79>

건물 밖. 혼자 건물 근처에 서서 건물을 보고 있는 여자무사1

야한 소리가 여자무사1의 귀에 들리고

여자무사1; (구역질이 난다.) 혐오의 표정

여자무사1; (하지만 남에게 매인 몸이니 몬 본 척, 못 들은 척 해야만 한다.) 한숨 쉬며 돌아서고

 

#80>

황금전장의 감옥. 황금수라들이 아닌 일반 무사들이 지키고 있고.

어둑한 복도를 걸어가는 주대육. 복면을 쓴 간수1의 안내를 받으며 간다. 복도 좌우에는 철문이 달린 감방들이 죽 늘어서 있고. 철문에는 아래위로 좁은 창문이 하나씩 달려있다. 눈높이쯤에 달린 위쪽의 창문은 감시용. 아래쪽의 창문은 배식구

간수1; [주방장님께 진 신세가 있어서 무리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오는 주대육을 곁눈질하며

간수1; [제가 주방장님을 이청풍과 만나게 했다는 걸 총관님이 알면 불벼락이 떨어질 것입니다.]

주대육; [말이 새나가지 않도록 할 테니 걱정말게.]

간수1; [아무쪼록 그래주십쇼. 여깁니다.] 어느 철문 앞에 멈춰서며 허리춤에서 열쇠고리를 끌러내고

열쇠를 철문에 나있는 구멍에 끼우고.

끼릭! 철컥! 열쇠를 돌리자 철문 안에서 무언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간수1; [면회는 일각 안에 끝내주십시오. 언제 총관님이 불시에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끼긱! 철문을 열어주며 말하고

주대육; [그렇게 함세.] 안으로 들어가고

간수1이 뒤에서 문을 닫는 배경으로 놀란 표정으로 들어서는 주대육

감옥 안의 모습. 지저분하고 바닥에 넝마가 깔려있는 위에 청풍이 눈을 감은 채 누워있다. 청풍의 몸은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데 누더기가 된 옷을 대충 걸치고 있다. 누더기가 된 옷이 벌어진 사이로 난자당하고 불에 탄 청풍의 몸이 드러나고. 눈을 감은 채 누워있는 청풍의 두 손은 수갑이 채워져 있다. 발목에도 족쇄가 채워져 있다.

청풍의 무참한 모습을 여기저기 보여주고

주대육; (예상은 했지만... 끔찍한 꼴을 당했구먼.) 혀를 차며 청풍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이어

! 청풍의 목 옆을 만져보는 주대육. 그때

청풍; [아직... 죽지는 않았습니다.] 눈을 감은 채 말하고.

움찔! 놀라는 주대육

청풍; [물론 내일까지 살아있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겠지요.] 천천히 눈을 뜨고

주대육; [미안하다.] 옆에 주저앉으며 한숨

주대육; [내가 널 황금전장으로 불러들이는 바람에 이런 꼴이 된 것같구나.]

청풍; [주방장님께서 미안해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주대육을 올려다보고

청풍; [이런 일을 당하는 것도 정해진 운명일 테니까요.] 허탈하게 웃고

주대육;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구나.) + [희망을 놓지 말거라.] 청풍의 이마를 닦아주고

주대육;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이용해서 널 꺼내주겠다.]

청풍; [저는... 운 나쁘게도 알아서는 안되는 비밀을 알아버렸습니다.]

주대육; [알아서는 안되는 비밀?] 움찔! 하고

청풍; [장주는...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제가 세상에 나가는 걸 원치 않을 것입니다.]

주대육; (역시 청풍이를 죽이려는 게 총관이나 소장주가 아니라 장주였구나.) 표정이 심각해지고

주대육; (그렇다면 내가 해보려던 어떤 시도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 가엾은 아이는 이 음침한 뇌옥에서 생을 마감하겠구나.> 감옥 안의 모습 배경으로 주대육의 생각 나레이션

 

#81>

오후. 환락가. 사람들 북적대기 시작하고. 야한 여자들이 호객을 하고. 한량들이 기루와 술집을 드나들고

환락가의 뒷골목. 도박장이 즐비한 곳. #4>#27>에 나온 뒷골목. 그때와 다른 점은 연신 도박장으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고. 도박장을 지키는 건달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 새벽녘과 다르다.

그 중 <大慶賭場>이라는 간판이 걸린 도박장. 이산하가 돈을 잃은 그곳. 입구에 건달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서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고

도박장 내부. 벌써 손님들이 바글바글

도박장 내부의 끝. 건달들이 지키는 문이 하나 있다. 닫혀있는데 지키는 건달들이 왠지 긴장한 표정

 

#82>

이세창; [천냥일세.] ! 돈주머니를 탁자 앞으로 밀어주고. 이셍창 맞은편에는 정필이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이세창; [이번 일을 깔끔하게 해치우면 천냥을 더 얹어주겠네.] 이세창 뒤에는 두 명의 황금수라가 서있고. 방안에는 그들과 정필만 있다. 다른 건달들은 방안에 없다.

정필; [먼저...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이총관님!] 굽신. 돈 주머니를 챙길 생각은 못한다. 잔뜩 긴장해서

정필; [분부하신 일은 어려울 것도 없지만... 이리 하시는 이유를 혹시 알 수 있을지요?] 눈치 보며

이세창; [자세한 내막을 자네가 알 필요는 없네.] 고개 젓고. 음산한 표정으로

이세창; [자네는 그냥 이청풍의 누이를 잡아다가 사창가에서 몸을 팔게 하면 되는 게야.] 강렬한 표정으로

[!] 침 꿀꺽! 긴장하여 침 삼키는 정필.

 

#83>

해가 지려는 저녁 무렵. 어느 작은 도시.

그 도시의 객잔. 객잔 마당에는 장세명이 타고 온 마차와 호위 무사들이 카고 온 말들이 묶여있다. 마부들과 종업원들이 구유 앞에 묶여있는 말들에게 물과 먹이를 주고 있다.

 

객잔 후원의 독채. 무림맹 무사들이 지키고 있고.

장세명; [아연아가씨의 아들로 여겨지는 놈이라...] 화려한 객실. 풍신장, 운신장과 마주 앉아서 이마를 모으는 장세명

풍신장; [그놈을 찾느라 총관님의 경호에 소홀했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장세명; [내 경호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고개 젓고

장세명; [그보다 자네가 발견했다는 놈이 정말 아연아가씨의 소생일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풍신장; [나이도 비슷하고...] [아연아가씨와 용무린을 섞어놓은 듯한 용모를 지닌 놈이었습니다.] 청풍이 벽소소의 말발굽을 쳐서 어린 계집아이를 구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말하고. #17>의 장면

풍신장; [십팔 년 전, 진삼낭의 종적이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이 금릉이기도 하니 그놈이 아연아가씨의 소생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장세명; [사실은 나도 용무린과 아연아가씨를 연상케 하는 놈을 금릉에서 목격했었네.]

풍신장; [그렇습니까?] 흠칫! 놀라고. 운신장도 놀라고

 

건물을 밖에서 본 모습. 시간이 좀 지났고

풍신장; [이청풍... 도축장에서 일하다가 황금전장의 숙수로 영입된 놈이라...] 눈 번뜩이며 운신장을 보고

운신장; [이틀 전 그때, 도축장을 살펴볼 걸 그랬어요.]

풍신장; [지나간 일이니 후회해봐야 뭐하겠나?] 고개 젓고

장세명; [이청풍이 종적을 감춘 게 영 찜찜하네.] [진배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청풍은 도축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게야.]

풍신장; [황금전장의 말과 달리 이청풍은 도축장에 돌아간 게 아니겠습니다.]

장세명; [그놈 신변에 뭔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네.] 끄덕이고

풍신장; [누군가 우리처럼 이청풍의 신분에 의문을 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장세명;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들은 다시 금릉으로 돌아가서 이청풍의 행방을 찾아보게나.]

풍신장; [하지만 저희들은 총관님을 경호해야하는데...]

장세명; [내 걱정은 말게나. 내 한 몸 지킬 능력은 있으니...]

장세명; [게다가 이청풍이 정말로 아연아가씨 소생이라면 향후 무림정세를 뒤흔들 태풍의 눈같은 존재야.] [반드시 찾아내서 신병을 확보해야만 하네.]

풍신장; [알겠습니다.] 일어나고. 운신장도 일어나고

풍신장; [저희들은 다시 금릉으로 돌아가서 이청풍의 종적을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포권하고. 운신장도 포권하고.

장세명; [수고해주게나.] 끄덕

문을 열고 나가는 풍신장과 운신장. 돌아보는 무림맹 무사들

화악! 휘익! 밖으로 나오자마자 돌풍과 함께 사라지는 풍신장과 운신장. 놀라지만 호들갑 떨지는 않는 무림맹 무사들

장세명;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이청풍의 모습에서 아연아가씨를 떠올렸으면 바로 낚아채서 확인을 해봤어야 했는데...) 열린 문을 통해서 밖을 보며 생각하고. 무사중 한명이 문을 닫아주려 한다.

장세명; (연로하셔서 매사에 의욕을 잃으신 맹주님께 큰 선물을 드릴 기회를 놓친 것같다.) 한숨 쉬고. 닫히는 문을 보며

 

#84>

역시 해가 지려는 저녁 무렵이다. 청풍의 집이 있는 빈민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고

골목에서 뛰어놀다가 흠칫 놀라는 아이들

골목으로 들어오는 정필과 네 명의 건달. 건달들 중에는 #12> #27>등에 나온 건달1과 건달2도 있다.

겁에 질려 급히 피하거나 숨는 아이들

정필의 뇌리에 떠오르는 #79>의 장면에서 이세창이 하던 말

 

이세창; [천냥일세.] ! 돈주머니를 탁자 앞으로 밀어주고. 이셍창 맞은편에는 정필이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이세창; [이번 일을 깔끔하게 해치우면 천냥을 더 얹어주겠네.] 이세창 뒤에는 두 명의 황금수라가 서있고. 방안에는 그들과 정필만 있다. 다른 건달들은 방안에 없다.

회상 끝

 

정필; (그리 대단할 것도 어려운 일도 아니라 회주님께는 보고하지 않았는데...)

정필; (의뢰한 자가 황금전장의 총관이라는 사실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이마를 찡그리고

정필; (이진진이란 년을 확보하는 대로 돌아가서 회주님께 경과보고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걸어가고. 앞쪽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과 빈민가의 사람들이 물살 갈라지듯 피한다.

 

#85>

청풍의 집.

원룸 형태의 집 내부. 한쪽의 부엌에서 이진진이 요리를 하고 있다. 도마로 야채를 서는 중이다. 화덕에 올려놓은 냄비에서는 무언가 끓고 있고. 방에는 이산하가 이불을 덮고 누워있다.

이진진; (어머니는 하루 종일 돌아오지 않고 계신다.) 통통! 칼질을 하며 생각하고. 허리춤에 운신장이 준 호리병을 차고 있는 것 주의

이진진; (아마 황금전장의 사정에 밝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 하시는 모양인데...)

이진진; (천지신명님!) (제발 오빠를 지켜주세요.) 한숨 쉬고. 그때

이산하; [... 네 어미가 돌아오는 게 늦는구나.] 콜록 기침을 하고

이진진; [급한 일이 있으셔서 오늘 좀 늦는다고 하셨어요.] 돌아보며 말하고

이산하; [미안하구나 진진아.] [마음고생 시킨 것도 모자라서 앓아누워 수발까지 들게 만들고...] 콜록! 기침하고

이진진;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 미소

이진진; [당연히 해야할 일이잖아요. 미안하다는 말씀은 두 번 다시 하지 마세요.]

이산하; [너같이 착한 딸을 걱정하게 만들고... 아비가 면목이 없다.] 한숨 쉬는데

! 문이 부서질 듯 열리고.

이진진; [!] 놀라 비명 지르면서 문쪽을 보고. 뒷걸음질 치며. 이산하도 놀라 벌떡 일어나고. 그때

정필; [저 년이 이진진이겠지?] ! 부서진 문으로 들어오며 이진진을 보고

이진진; [... 당신 누구예요?] 칼을 든 채 방쪽으로 뒷걸음질 치고

이산하; [... 정총관! 이게 무슨짓이오?]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정필; [무슨 짓이냐고?] 히죽 웃으며 들어서고. 그 뒤에서 건달들이 따라 들어온다.

정필; [빌린 돈 안 갚아서 담보로 건 네 딸년 데리러 왔다.] 이진진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음산하게 웃고

이산하; [... 무슨 소리요? 내 아들이 대경도장으로 찾아가 오백냥을 갚았다던데...] 앞으로 나와 이진진을 몸으로 가로 막는 이산하

정필; [오백 냥은 갚았지!] [하지만 이자는 받지 못했어.]

이산하; [이자?]

정필; [이산하, 넌 오백 냥을 대부받으면서 하루 이자로 삼 푼씩 내기로 했었다. 기억나나?]

이산하; [물론 이자로 삼푼을 내기로 했지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갚았으니 이자는 없는 거 아니오?]

정필; [그걸 누가 정한 건데?]

이산하; [뭐요?]

정필; [여러 소리 할 거 없고, 이자를 못 갚았으니 약정한 대로 네 딸년을 대신 데려가겠다.] [끌고 가라!]

[예 총관님!] [이년아. 이 오라버니들이 기막힌 곳으로 데려가 줄 테니 순순히 따라와라.] 앞으로 나오는 건달1과 건달2

이산하; [개수작들 마라!] ! 이진진이 들고 있던 부엌칼을 잡아채어 자신이 들고

이산하; [피 보기 싫으면 빨리 내 집에서 나가라!] 부엌칼로 앞을 겨누며 이를 갈고. 하지만 그 직후

! 건달1의 수도가 이산하의 부엌칼 든 오른손 손목을 치고. 그 바람에 부엌칼을 놓치는 이산하의 손. 이어

! 건달2가 이산하의 명치에 주먹을 꽂는다. 몸이 앞으로 꺾이는 이산하

이산하; [끄윽...] 기절하려 하고. + 이진진; [아버지!] 비명 지르며 뒤에서 이산하를 부축하려 하지만

[어딜!] [이년아. 오라버니들과 놀자!] ! ! 좌우에서 이진진의 팔을 잡는 건달1과 건달2. 이어

퍼억! 바닥에 나뒹굴며 기절하려는 이산하

정필; [가자!] 돌아서고

이진진; [아버지! 안돼요 아버지!] 건달1과 건달2에게 끌려가며 울부짖고.

이산하; [진진...진진아...] 까무라치려 하며 문쪽을 본다. 꿈틀거리며

울부짖으며 끌려가는 이진진의 얼굴. 하지만

스으! 이내 블랙아웃 되어서 시야가 사라지는 이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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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목숨을 거래하다 (2)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하늘에 총총한 별이 보였다.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들었으면 일어나거라.]

붉은 장포를 걸친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 등을 보인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현천록은 자기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전혀 낯선 곳이었다.

물어보자고 해도 갑자기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마구 떠오르는 대로 이번엔 당신이 개대신이냐고 물을 수도 없으니까.

그때 중년인이 불쑥 말했다.

[내 제자가 되어 검법을 배워볼 생각이 없느냐?]

현천록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갑작스런 말씀이군요.]

[하하하하하!]

중년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장부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거지 그런 애매한 대답이 어디있느냐?]

보통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의 얼굴이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다.

하지만 네모난 눈에서는 광채가 어려있고 얼굴빛도 어둠속이지만 붉은 기운이 흐른다.

큼직한 얼굴에 낙천적인 웃음이 크고 부리부리한 눈과 어울려 정말 대장부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현천록이 말했다.

[소생은 대협을 처음봅니다. 한데 어찌 함부로....]

중년인이 돌아서서 빙그레 웃었다.

[어린 녀석이 억지문자는..... 집어치워라. 애들은 애들 말을 해야지.]

현천록은 조금 머슥해졌다.

장사를 하면서 상대를 추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골수에 너무 깊이 박혀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를 납치해온 장본인에게 조차 그렇게 말하는 건 확실히 너무하다.

[억지문자가 아니라 장사꾼이 의례하는 말입니다.]

현천록은 마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하하하!]

마주 앉은 중년인이 파안대소를 했다.

[나는 풍허객(風虛客)이라고 한다. 낮에 네가 어떤 영감을 상대하는 걸 보고 훔쳐야겠다고 생각했지.]

현천록의 눈이 동그라졌다.

[풍허객? 풍허객이었어요?]

하마터면 도둑이 아니고 풍허객이냐고 말할 뻔했다.

현천록이 풍허객을 직접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무림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며서 풍허객의 이름은 지겹도록 들어왔다.

풍허객은 원래 화산파(華山派)의 차대 장문인으로까지 지목되었던 기재였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화산파에서 파문을 당했다.

화산파를 나온 후, 소문에 의하면 화산에서 배운 검을 버리고 독자적인 장법을 하나 창안했다고도 하며, 전설적인 고수로 알려진 삼절오악(三絶五嶽)과도 겨루었다는 말이 있다.

그때는 또 장법이 아닌 검법을 사용했다는 말도 있다.

하여간 무림의 골치덩어리로 알려져 있는 풍허객에 대한 크고 작은 소문은 항상 끊이지 않고 전설처럼 흘러다닌다.

그리고 진짠지 아닌지 모르고 전설을 더욱 전설같이 만들어 버리는게 풍허객의 또 다른 별명이 허풍객(虛風客)이란 사실이다.

현천록은 호기심에 반들거리는 눈으로 풍허객을 보았다.

[호오! 이놈봐라! 마치 내게 대해서 알 건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군. 하하하하! 이놈아! 장사꾼이라 쉽게 믿지 못하고 나를 감정하는 거냐 아니면 내가 허풍객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눈을 하는거냐?]

풍허객이 껄껄웃었다.

현천록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애석하군요. 대협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시군요.]

풍허객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내게 엉뚱한 소릴 하면 볼기짝을 때려놓을 테다.]

현천록의 말이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낼듯하자 풍허객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현천록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전 대협께서 탐낼 정도의 위인이 못됩니다.]

풍허객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현천록의 눈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나서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민정후(玟情候)영감이 벌써 손을 썼나? 그 영감은 벌써 삼십년 동안 제자를 받은 적이 없는데..... 아닌 것 같은데..... ]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저희 노야께서는 무공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풍허객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민영감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겠군.]

현천록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민노야에게 허락을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신화병기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한데 갑자기 풍허객이 소리를 꽥 질렀다.

[민영감! 아직도 보고만 있을 거요?]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아이구 깜짝이야!]

간이 떨어지는 것처럼 손이 아래로 툭 쳐졌다.

풍허객이 쳐다보고 있는 나무 사이에서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비추어 보였다.

현천록은 그가 민노야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노야!]

현천록이 달려가며 소리쳤다.

민노야가 가볍게 소매를 저었다.

현천록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기우뚱거리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너를 해칠 사람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아라.]

풍허객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민영감은 확실히 나를 알고 있는구려!]

민노야의 키는 다리가 길어서 앉아 있을 때보다 서 있을 때 훨씬 커보인다.

노인답지 않게 몸도 꼿꼿하고 키도 클 뿐만 아니라 하얀 수염이 아주 위엄있다.

현천록은 자기도 나이를 먹는다면 언젠가는 민노야처럼 수염을 기르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민노야가 풍허객의 앞으로 다가오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무림의 말썽꾸러기인 풍허객을 어찌 모르겠나?]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호탕하게 살 뿐이오. 그동안 잘 있었소? 어째 좋아보이지는 않소.]

[악겁이 가득한 세상에 발을 딛었는데 어찌 좋아보일 수 있겠나?]

[하하하하! 쓸데 없이 머리 굳어지는 소릴랑 맙시다. 골치아파서 뚜껑열리면 당신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으니까.]

풍허객은 다가오는 민노야를 보면서도 아주 친한 벗을 맞이하듯이 자연스럽게 대하며 웃었다.

그러는 사이 민노야는 더 다가와서 풍허객과 세자 정도의 거리에 마주 섰다.

그제서야 두 사람사이에 흐르는 어떤 미묘한 긴장이 현천록에게도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현천록의 팔다리가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민노야가 하얀 눈썹 밑은 새까만 눈을 빛내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 아이를 탐내는 건 풍허객으로선가 아니면 자네의 다른 신분으로선가?]

풍허객은 재미었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거야 원~ 쩝쩝! 무림은 영감을 잘 모르는데 영감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단 말이야.]

[노부의 말에 답해주게.]

민노야는 풍허객을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한다.

풍허객은 수박밭을 털다가 걸린 개구쟁이같이 시큼털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하면 어떻게 할꺼요?]

민노야가 말했다.

[자네는 신룡(神龍)같은 인물이네. 구름 속에 숨은 신룡같은 숲 속에 숨은 바람같아서 흔적은 있어도 찾으려면 찾을 수가 없지. 삼절오악이 자네의 분탕질에 한숨만 쉬고 가만 있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하하하하하!]

풍허객이 숲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현천록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다리가 떨려오고 속이 미슥거리며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다.

내공이 깃든 웃음소리다.

신화병기점의 손님들도 웃을때는 억지로 공력을 끌어올려 과시하곤 했지만 풍허객의 웃음소리와는 비교조차 할수 없이 미미한 정도였었다.

현천록은 들은 말이 있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야단났다. 웃음소리로 내장을 뒤집어 죽이기도 한다는데 .....)

하지만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풍허객은 갑자기 웃었던 것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알면 됐소. 하지만 영감도 저 아이에게 좋은 뜻만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영감이 무림에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는걸?]

풍허객은 자기 말이 옳다는 듯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하긴 영감이라면 능히 그렇게 할 만도 하지.]

민노야의 눈썹 아래 눈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무슨 근거로 쓸데없는 소릴 하는가?]

풍허객은 느긋하게 바위에 기대면서 말했다.

[첫째로 저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무공은 조금도 가르치지 않았소. 후후후. 영감이라면 저 아이가 보기드문 인재라는 걸 모르진 않았을 테고, 또 천하 고수들 중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힐 영감이 가르친다면 최소한 십오년 후에는 무림을 주름잡을 인재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소? 한 번 대답해 보시오.]

민노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겠어. 하지만 자넨 노부를 과하게 평가했네.]

풍허객이 냉소하며 또 말했다.

[둘째, 삼십년 전에 무림을 떠난 영감이 내게 대해 너무 자세히 알고 있단 말이오. 나를 주목하고 있는 놈들은 대체로 어떤 음모를 꾸미는 놈들이거든. 후후. 영감이 저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제자로도 삼지 않는다면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결론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민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옳은 말로도 들릴 수 있겠군.]

풍허객은 팔짱을 끼며 오만하게 말했다.

[그럼 아니란 말이오?]

민노야는 현천록을 힐끗 보며 말했다.

[노부가 자네에 대해 많이 아는게 불만이라면 내게 대해 말해줄 수 있네. 그리고 노부는 저 아이에게 양심에 부끄러울 짓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지. 애석하게도 자네의 고심한 분석은 아무 소용없네.]

풍허객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껄껄! 영감! 서로 더 이상 잡담은 그만두고 내게 넘기시오. 영감한테 신세 한 번 진 걸로 달아놓겠소.]

현천록은 조금 우습기도 어이없기도 했다.

신화병기점에서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종의 신분도 아니다.

의식주를 모두 그곳에서 해결하고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민노야가 길러준 은혜는 있지만 지금까지 밥값을 못한 것도 아니다.

결코 그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물건처럼 이리저리 건네질 그런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한데도 오늘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영감은 물건을 팔면서 죽이니 살리니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를 훔쳐와서 민노야한테 넘기라니 말라니 하고 있다.

현천록은 지금까지 물건을 넘기고 말고 하는 주체였지 그 대상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열 두 살이면 밤마다 열 두가지 꿈을 꾸지만 한 번도 그런 꿈은 없었다.

그는 이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을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영 거래가 자기 통제를 벗어나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즉시 풍허객의 말에 끼어들었다.

[두분께선 더 이상 언쟁하지 마십시오. 주인어른, 그리고 풍대협님! 두 분은 지금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장사를 궂이 하시려고 하는 중입니다.]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전을 각오하고 있지. 그런데 왜 남는게 없단 말이냐? 이기면 너를 얻게 되는데.]

민노야가 빙그레 웃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삼십년 전의 노부를 보는 것 같네.]

풍허객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보다 강한 사람은 있어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당금 강호에는 존재하지 않소.]

이야기가 또 현천록을 젖혀두고 이어진다.

현천록이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잠깐만! 풍대협님!]

풍허객이 현천록의 이마를 툭치면서 말했다.

[아이들은 어른들 일에 낄 것 없다.]

현천록의 이마에 식은 땀이 맺혔다.

[저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지 주고 받거나 팔리는 물건이 아닙니다.]

민노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 말이 옳네.]

풍허객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그말을 처음에 들었다면 조금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소. 하지만 요런 영악한 녀석이니 내 목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팔 하나쯤은 주더라도 될 성하지 않소?]

목소리가 아주 기백에 넘친다.

민노야가 현천록에게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지금 너를 강탈하려는 도적을 만났구나.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냐?]

현천록은 우물쭈물했다.

[....저는.....]

노야께서 지켜주셔야 합니다하고 말하려하니까 물건을 지키는 건 주인이나 주인의 하수인이 하는 일이니까 노야를 주인으로 인정해버리는 결과가 될 것 같다.

그리고 혼자 어떻게 하려고 하니 무림의 말썽꾸러기라는 풍허객을 상대로 만만하지가 않다.

현천록이 불쑥 고개를 돌리며 풍허객에게 물었다.

[저를 제자로 삼아서 대협께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풍허객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를 제자 삼아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피곤하기만 할 따름이지.]

현천록이 말했다.

[그럼 왜 저를 제자로 삼으려하십니까?]

[왜냐고? 하하하하! 그건 저 영감이나 아까 그 삿갓 쓴 늙은이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지.]

풍허객은 아주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현천록은 가만히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제가 대협의 제가가 되지 않겠다면 죽이시겠군요.]

풍허객이 말했다.

[하하! 내가 죽이기 전에 그 늙은이가 죽일 걸?]

현천록은 민노야에게 물었다.

[노야! 그 노인도 풍대협과 똑같은 이유에서입니까?]

민노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풍허객이 민노야에게 말했다.

[그 늙은이가 누군지 알고 있소?]

민노야가 조용하게 말했다.

[고독마검(孤獨魔劒) 불이태(不二台)!]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바로 고독마검 불이태요. 저 아이는 이미 불이태의 표적이 되었으니 내가 아니면 민영감 당신도 쉽게 지킬 수 없을거요.]

현천록은 이야기가 이정도까지 나와서야 오늘의 일들이 대충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아까 그 노인이 고독마검 불이태구나. 그 사람은 세외로 나간지 팔십년이나 되었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었네. 어쨌든 고독마검이나 풍허객, 두사람 다 나를 제자로 삼으려고 이런 소동을 벌였으니 최소한 날 죽이진 않겠다.)

현천록은 처음부터 죽음에 대한 걱정 따위가 없는 낙천적인 소년이었지만 상황을 더 자세히 알게 되자 그 만큼 더 느긋하게 되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노야께서 천하에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기인이라는 건 정말 금시초문이다. 고독마검이나 풍허객보다 내게는 그 사실이 더 충격적이구나.)

그때 민노야가 말했다.

[자네 능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네.]

풍허객이 민노야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물러서시오.]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없네. 나는 이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걸세.]

민노야가 현천록에게 말했다.

[얘야. 도적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해냈느냐?]

현천록은 문득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달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거품을 물며 뒤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그의 등이 활처럼 휘어져 머리가 땅에 세차게 부딪혔다.

민노야와 풍허객이 가까이 있었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상황이라 잡아줄 수가 없었다.

!

둔탁한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풍허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민노야와 풍허객은 동시에 현천록을 잡았다.

그러나 머리가 이미 깨진상태였다.

민노야의 손가락이 현천록의 머리 속으로 쑥 들어갔다.

피가 샘처럼 쏟아진다.

두 사람은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현천록의 몸이 식어가고 있었다.

[자살을 하다니! 이런 심약한 놈이었소?]

풍허객이 민노야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네. 다만 자네도 이 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뿐.]

풍허객이 냉소하며 말했다.

[내게 책임을 따지겠다면 언제든지 좋소. 영감과 한 번 싸워주겠소.]

민노야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멀쩡하던 현천록이 갑자기 거품을 물고 뒤로 쓰러져 죽다니.

암습을 받았거나 독에 당한 것도 아니고, 또 평소에 간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민노야는 탄식을 하면서 한 손을 휘둘러 땅을 팠다.

우우웅!

푸악!

민노야의 특이한 산수(散手)의 수법에 따라 땅에는 길죽한 웅덩이가 생겨났다.

풍허객은 수직으로 솟아올라서 밤하늘 속으로 숨어 버렸고,

민노야는 현천록을 묻은 후에 그곳을 떠났다.

자라면 언젠가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무수한 씨앗들이 그러하듯이, 큰 나무는커녕 싹도 튀워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인간의 씨앗들도 많은 법이다.

현천록도 그런 씨앗에 속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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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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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을 거래하다. (1)

 

 

신화병기점(神火兵器店)은 금릉(金陵)에 사는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곳이다.

크기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꼬마라 할지라도 모두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어느 누구도 신화병기점의 사람들이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만 무성했지 실제로 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신화병기점은 낡은 중고 철검부터 시작해서 옛날 검이나 도를 모방한 물건들, 그리고 특이한 주문품에 이르기까지 무기라면 없는 것이 없다.

만약에 없다면 신화병기점 내에 있는 대장간에서 만들어서라도 준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화병기점의 병기들 품질은 그저 그렇다.

그저 그렇다는 말은 살 때는 최소한 마음에 들기 때문에 하는 말이고,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쓸 때는 실망하고 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 병기를 구하기 위해서 금릉에 들린다면 몇 군데 병기점을 들려본 후에 한 숨을 푹 내쉬면서 다시 신화병기점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곳의 병기들은 최소한 살 때는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현천록(玄天祿)은 이런 천화병기점에서 밖으로 잘 알려진 유일한 사람이다.

병기점의 주인인 민노야(玟老爺)의 이름은 한 번씩 들어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를 만나거나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해당한다.

현천록이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한 사람의 몫을 충분하게 잘 해낼 수 있는 어른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제 겨우 열 두 살이며 신화병기점의 점원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현천록의 키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주먹 하나 정도 더 크다. 그 점만 제외하고 나면 그가 다른아이들 보다 특별히 달라보이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는 무림인들 사이에 아주 잘 알려져있다. 그것은 그가 물건을 볼 줄 아는 특별한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 감별안은 다른 아이는 고사하고 어른들에게 조차 없다.

현천록의 그런 특이한 재능이 발견된 것은 그가 아홉 살 때인 삼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병기점 안에서 잡심부름을 하면서 조금도 주목받지 못했던 현천록은 어느날 담당점원이 자리를 비운 한 시간 만에 진열되어 있는 병기들 중에서 삼분지 일을 팔아버렸다.

담당점원이 돌아와 처음에는 강도를 당한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수북하게 쌓여있는 은자를 보고는 깜짝에 깜짝을 몇 번 곱한 만큼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현천록은 세 살 때 신화병기점에 들어오면서 본 이후 실로 육년 만에 주인인 민노야를 만나게 되었다.

민노야는 그를 묵묵히 보다가 신화병기점의 정식 점원으로 일하라고 했고, 그 이후에 신화병기점(神火兵器店)의 새로운 신화(神話)가 만들어지며 현천록은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 되었다.

어느 누구라도 현천록이 추천하는 물건을 직접 보고 만져본다면 결코 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누군가는 현천록은 병기와 사람의 인연을 잘 볼 줄 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현천록은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고, 그 위에다 어떤 물건들의 특징이든간에 단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재주가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항상 즐거워하며 손님들에게도 그 즐거움을 나누어주는 재주 아닌 재주가 있기도 하다.

신화병기점의 사람들이 무공을 익혔다는 말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고, 심지어는 여러 가지 비밀기관이 점포 내에 설치되어 있다는 말도 있다.

아직 신화병기점에 뛰어들어 행패를 부린 자는 없지만 그 이유를 신화병기점에 다 돌릴 수는 없다.

신화병기점의 병기는 완벽하게 손님을 만족시키지 못할 지 몰라도 그 병기를 팔고 있는 열두살짜리 꼬마는 항상 손님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나이도 어린 그가 이마에 띠를 두르고 작은 주판을 허리춤에 차고 혼자 점포를 지키지만 주인인 민노야는 걱정도 않는다.

 

어쨌든 현천록은 신화병기점의 정식 점원이었고, 그 때문에 간단한 글과 회계를 배우기도 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현천록에게 장사를 잘 한다는 것보다 더 뿌듯한 기쁨이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다 보면, 자기가 글을 가슴 속에 담고 있다는 것이 돈을 가득 가진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종종 느끼게 된다.

그것은 남이 모르는 두근거리는 비밀을 가슴에 간직한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현천록은 간단한 글을 배웠지만 점점 더 많이 알아갔다.

그러나 그것을 감추는 것도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기가 배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

한가지를 배우고 한가지를 알게 되면, 그것으로 그의 하루는 아주 보람되고 알찬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무엇을 배울 때 마다 자기가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신한다고 믿고 있다.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존재와 무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고, 모르던 현천록에서 무엇인가를 더 알게 된 현천록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항상 변신(變身)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손님의 발길 만큼의 매상은 항상 오르는 것이기에 장사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할뿐 그다지 염려하지는 않는다.

민노야는 현천록의 수완을 높이 사서 그에게 상당한 돈을 준적도 있다. 그러나 현천록은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먹는 것과 자는 것, 입는 것, 그 모든 것을 신화병기점에서 해결할 뿐만 아니라, 현천록에게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나이지만 그가 배우고 익히는 것들은 결코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들 것이며, 또한 그것들이 언젠가는 그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주리라는 믿음, 바로 변신에 대한 그의 믿음이 있다.

그런 생각은 그가 무엇을 하더라도 항상 즐겁게 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죽립(竹笠)을 써서 얼굴을 반쯤 가린 흰 수염의 노인이 점포 안으로 들어왔을 때도 그의 마음 속은 항상 즐거운 음악을 듣는 것처럼 즐거웠다.

현천록은 명랑한 목소리로 죽립노인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노대협께선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요?]

죽립노인은 아무 대꾸도 없이 진열되어있는 이천 종에 가까운 병기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현천록은 그 사이에 죽립노인을 찬찬이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병기를 살피던 죽립노인의 눈과 노인을 살피던 현천록의 눈이 마주쳤다.

노인의 눈은 일 순간에 칼날처럼 번득이며 현천록의 눈을 파고 드는 듯했다.

현천록은 병기점을 하면서 온갖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죽립노인같은 인물은 처음이었다.

죽립노인에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짓누르는 공포같은 것이 있었다.

현천록은 본능적으로 이 순간이 자기 평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런 느낌은 대체로 그에게 있어선 틀림없었다.

삼년 전에 정식 점원이 되는 날도 바로 이런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느낌은 세월 때문인지 오늘보다는 조금 약했었다.

현천록은 숨을 천천히 들여쉬면서 말했다.

[노대협께선 병기를 고르시는 것은 아닌 듯 하군요.]

죽립노인이 아주 탁한 음성을 내뱉었다.

[네가 병기를 볼 줄 안다는 아이 현천록이냐?]

현천록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죽립노인이 말했다.

[내게 맞는 병기를 골라라. 네가 권하는 병기면 어떤 것이든지 다 사도록 하겠다.]

노인의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다른 손님들과 진배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현천록은 죽립아래로 노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애쓰며 말했다.

[저희 가게엔 노대협께 권해드릴 만한 물건이 없습니다.]

[....!]

죽립노인의 눈이 다시 번개불처럼 번득였다.

현천록은 간담이 서늘했지만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

[어째서냐?]

노인의 음성이 은은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현천록은 죽립노인이 흑도의 유명한 고수일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노대협께선 제가 권해드리고 싶은 물건을 이미 가지고 계십니다.]

죽립노인은 아무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길이는 넉자세치, 너비는 두치반, 두께는 삼푼이고 무게는 두근반인 장검이 있다면 제가 권해드릴 테지만 안타깝게도 저희에겐 그런 물건이 없고 노대협께선 벌써 가지고 계시는군요.]

죽립노인은 한손으로 죽립을 슬쩍 만지면서 말했다.

[그럼 노부가 내 검을 네게 팔고 난 후에 다시 산다면 어떻겠는가?]

현천록이 말했다.

[파셨다가 다시 사신다면 보통은 두 배로 값을 치뤄야 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 즉 노대협의 경우에는 송구스럽지만 칠백배의 돈을 내야 됩니다. 그래도 하시겠는지요?]

스르르릉!

맑은 소리와 함께 새하얀 검날이 검갑에서 뽑혀 나왔다. 보통의 검보다 한자 가량이나 길고 한치는 더 넓은 아주 특이한 장검이다.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네 목을 베겠다.]

노인은 손목을 살짝 움직였다.

서릿발같은 한기가 현천록의 목을 파고들었다.

현천록이 담담히 말했다.

[검은 만년한철로 만들었으니 보기드문 보검입니다. 하지만 길이와 너비가 범상한 검들과는 달라서 누구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검을 쓰는 방법도 함께 얻지 못한다면 이 검은 오히려 가진 사람을 해치는 화근이 되기 쉽습니다.]

노인은 냉소하며 말했다.

[충분한 이유가 못된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만약에 노대협께서 이 검을 제게 파신 후에 그냥 가버리신다면 저희 병기점에서는 하는 수 없이 이 검을 녹여서 다른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는 검으로서가 아니라 만년한철 한 덩어리에 해당하게 되겠지요.]

노인은 수긍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노대협께서 이런 명검을 다시 구하시려고 한다면 만년한철 한 덩어리의 값보다 최소한 일천배는 더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제가 칠백배를 받고 다시 팔겠다는 것은 아주 싼 값에 제공하겠다는 저희 주인님의 의지가 이미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철컥!

노인은 흰무지개가 서린 명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현천록에게 불쑥 내밀었다.

[약속을 지켜라. 칠백배다.]

현천록은 두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사백육십냥을 드릴 수 있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노부는 한푼도 받지 않고 팔겠다. 나중에 다시 사러오마.]

[!]

순간 현천록은 말문이 콱 막혔다.

노인이 말했다.

[보름 후에 오겠다. 그때 되사도록 하지.]

무림의 기인들이 하는 일은 예측할 수가 없다.

(당했다!)

현천록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황당하기까지 하다.

검을 팔면서 땡전한푼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그 노인이 되사러 올 때 역시 땡전한푼 받을 수가 없다.

칠백배를 버는 것은 이런 계산 앞에선 한심한 노릇이다.

현천록은 자기가 보름동안 꼼짝없이 그 검을 지키고 있어야 할 신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에 잃어버리거나 도둑맞는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에구! 검을 그냥 보관하려는 생각이었는데 그걸 읽지 못했다니.)

입맛이 쓰다.

빨리 읽었으면 보관료라도 비싸게 요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여간 현천록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노인의 모습은 벌써 십여장 밖에 있었다.

그리고 현천록의 귀로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소리가 파고 들었다.

[노부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어기는 사람은 시체가 되도록 해주기도 하는 사람이지.]

깨끗하게 한 방 먹었다고 인정한 현천록은 마음에서 툴툴 털어버리고 웃었다.

[내 속에는 내가 되길 원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아직 시체는 없는데. 하하하.]

하지만 점원은 크게 웃어서는 안된다.

 

현천록은 저녁이 되어 결산을 하고 난 후에 내원에 들어가 민노야에게 보고하며 그 사실을 알렸다.

민노야는 탁자 앞에 앉은 채 자기 손으로 그 검을 뽑아서 검날을 만져보며 말했다.

[보검이군. 금석을 무처럼 자를 수 있는 검이야. 네 목이 베어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새파란 검날에 민노야의 옆얼굴과 촛불이 함께 일렁이며 비친다.

현천록은 눈을 반짝거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노야! 이런 보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전설상의 오대명검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 보검인지....]

민노야가 말했다.

[오래된 검은 아니다. 기껏해야 일백오십년, 단 한 사람만이 사용했고 아주 많은 피를 흘렸다.]

현천록이 놀라며 물었다.

[그럼 그 노인은 일백오십살이 넘었단 말씀입니까?]

민노야가 말했다.

[그렇겠지.]

현천록은 아주 신기해하면서 물었다.

[일백오십살이면 강태공이 살았다는 나인데도 아직 정정했군요. 신선이 되지 않고도 그 만큼 살 수 있어요?]

민노야가 곱게 가꾼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천지는 광활하고 인간은 헤아릴 수가 없지. 무슨 일이든 다 있는게 세상이니라.]

현천록이 불쑥 물었다.

[한데 그 노인은 대체 무슨 이유로 검을 맡기고 이런 기행을 하는 걸까요?]

검의 날은 너무도 깨끗하여 아무런 흔적도 없다. 마치 쇠가 아닌 유리같다.

뱀가죽을 감아놓은 손잡이에 상아를 깎아붙여 놓은 고독(孤獨)이란 글자가 특이할 뿐이다.

민노야는 검을 내려 놓았다.

그의 얼굴 색이 밝지 못하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져 현천록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주제넘게 너무 많이 물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현천록은 자기가 아직 어리니까 그 정도 잘못 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호기심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에겐 왕왕 성가신 법이니까.

[그만 물러가거라!]

한마디 가볍게 던진 후, 현천록의 대답을 찾는지 민노야는 깊은 사숙에 빠져들어 움직이지 않는다.

현천록은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왔다.

! ! !

태앵~ !

아직도 병기창에서는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천록은 그 소리가 자기의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무언가 불길한 그림자가 그에게 드리워진 채 벗겨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무 죄도 지은게 없는데 왠지 가슴이 조금씩 조여드는 괴상한 기분이다.

! 한 번, 아주 오래전에 갑자기 덮친 개에 물리기 직전에도 이런 기분이 들었었다.

현천록은 혹시 또 개가 어디 숨어있다가 덮쳐들지나 않을까 싶어서 발꿈치를 들고 최대한 소리를 죽여서 살금살금 걸었다.

헌데 현천록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민노야가 정성들여 가꾼 동백나무 숲을 지날 때였다.

반짝!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하얀 손바닥 하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는 천지가 캄캄해오면서 깊은 물 속으로 끝없이 가라 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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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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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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