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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붉은 머리띠를 한 도사가 되어 (3)

 

 

동굴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장군묵은 출구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마다 가봤지만 무너져 내린 바위더미 위에는 볼 수 없었다.

그것들을 다 뚫고 나간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기주인가 뭔가 하는 자에 의해 모두 막혀버린 것 같소.]

장군묵은 현천록을 허공에서 한바퀴 빙글 돌린 다음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도장이 들어온 곳은 어딘가?]

현천록이 말했다.

[제일 먼저 무너졌소.]

장군묵은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만약 허튼짓을 하려한다면 두 손부터 날려버리겠소.]

현천록은 입을 삐쭉했다.

[내겐 그런 능력도 없소. 당신이 믿을 지는 몰라도 당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나도 꼭 알고 싶은 것들이오.]

장군묵이 묵묵히 현천록을 보다가 말했다.

[도장이 지난 세월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옥황빙서가 말해주는거요?]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진양진인은 팔십년 전부터인가 옥황신전에 들어가 옥황사자가 되었소. 삼년 마다 한 장식의 옥황빙서를 적임자에게 전해주는 역할이었소.]

현천록이 순순히 대답해버리자 장군묵이 어리둥절하는 표정이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하지만 옥황신전이 어디있는지 또 뭐하는 곳인지 물으면 할 말이 없소. 나도 아는 게 없기 때문이오.]

장군묵이 물었다.

[옥황빙서는?]

[그놈의 옥황빙서는 진양진인이 당신네 아홉째에게 줬소. 목숨을 요구하는 대가로.]

현천록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장군묵은 현천록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자기가 진양진인인데 남의 이야기하듯 하는 말이니까 언 듯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홉째? 아홉째를 만났단 말이오?]

현천록이 풀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을 거요. 하지만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지 않으면 결코 당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도 들을 수 없을 거요.]

장군묵은 가소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함부로 하면 현천록이 또 어떻게 나올지 몰라 잠시 보고 있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이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오. 조금 긴 이야기도 될 수 있소. 교활한 늙은 도사와 호기심 많고 해보고 싶은 것 많은 철부지 소년의 이야기요.]

장군묵은 호기심이란 말에 깊이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기심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힘이지.]

현천록이 말했다.

[당신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소. 한마디 물어보기 위해서 삼년을 기다리는가 하면 또 한 마디 물어보기 위해서 흉흉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한마디 물어보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훔치는 일도 서슴지 않으니 말이오.]

장군묵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당연하지 않은가? 결과가 나온다면 백년도 기다리고 목적을 위해서면 만번이라도 싸울 수 있지. 하물며 그냥 두어도 언젠가는 죽을 인간을 죽이는 것 따위가 뭐 어떴단 말인가?]

현천록이 칭찬하며 말했다.

[정말 호탕하오. 대장부는 마땅히 그래야 할 거요. 당신은 멋있는 사람이오. 나를 죽이려 들지만 않는다면 말이오.]

장군묵이 냉소하며 말했다.

[나는 사람이 귀찮을 뿐이지. 사실 죽이는 것도 귀찮지. 하지만 그냥 두는 것이 더 귀찮을 때는 약간 덜 귀찮은 쪽을 택하오. 그쪽이 바로 죽이는 쪽이지.]

현천록이 안도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귀찮게 굴지만 않으면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겠소.]

장군묵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천록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중원 어딘가에 칼이나 검, 방패, 창 따위를 잘 파는 꼬마가 있었소. 상당히 수완이 좋아서 단골 손님들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소. 그런데 어느 겨울날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소.]

현천록이 힐끗보니 장군묵은 이야기에 끌리는지 몸을 현천록 쪽으로 약간 기울이고 있다.

현천록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꿈은 참 빨리도 이루는구나. 되고 싶은 것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다 했더니, 시체도 되어보고 순찰사자노릇도 해보고, 사기꾼 노릇에 퉁소쟁이까지 되었다가 도사가 되는가 했더니 이제 이야기꾼이 되는구나. 그래 멋대로 되라. 언젠가는 다 정리가 되겠지.)

재미가 없지는 않다.

자기 속에 얼마나 많은 모습이 있는지, 아니면 자기 속에 있는 것은 하나인데 아직 굳어지지 않아서 어떤 형태로든 상황에 맞춰서 변하는 것인지 알아보고 싶기도 했다.

현천록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자기의 이야기였다.

[지독한 노인이 하나 찾아왔는데 자기가 가진 검을 팔려고 했소. 검은 무당파의 진무검보다 못하지 않은 보검이었소. 하지만 다른 사람이 쓰기는 어렵고 그 노인의 몸은 딱 그검을 쓰기에 알맞았소. 몸과 검이 서로 닮아있었던 거요. 나는 아주 싸게 사려고 했소. 노인은 그걸 되사려면 얼마나 지불해야 하느냐고 물었소. 나는 그검을 다시 사려면 판 가격의 칠백배를 내야 된다고 말했소.]

장군묵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너무 비싸군.]

현천록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도 비싸지 않았소. 오히려 내가 단단히 당했으니까?]

[도장이?]

장군묵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현천록은 급히 말을 바꾸었다.

장군묵은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빨려들고 있는 중인데 흐름을 끊으면 산통도 깨어진다.

[그 꼬마가 당했단 말이오. 노인은 한푼도 받지 않고 검을 팔았소. 황당한 노릇이었지. 한푼도 받지 않았으니 칠백배 아니라 만배라도 똑같지 않소? 그냥 그 노인이 와서 다시 달라고 하면 나도 그냥 줄 수 밖에 없으니까. 꼬마는 그때서야 후회했소. 그럴 줄 알았다면 보관료를 아주 비싸게 책정하는 게 백번 낫지 않겠소.]

장군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현천록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단서까지 달아놓았소. 검을 잃어버리거나 하여 자기에게 되팔지 못할 때에는 꼬마를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소. 꼬마는 검을 들고 주인에게 가서 소상히 다 고했소. 주인은 그 검을 곰곰히 보고는 고독마검이라고 했소.]

장군묵이 코웃음을 쳤다.

[고독마검 불이태가 아직 살아있었군.]

현천록이 물었다.

[고독마검은 어떤 고수요?]

장군묵이 말했다.

[칠검동(七劒洞)의 제사검(第四劒)이지. 그 사이에 순위가 바뀌었는지 모르겠다만.]

현천록이 말했다.

[칠검동이라는 데도 있었군. 하여간 일은 그날 터졌소. 꼬마가 주인에게 고하고 자기 방으로 가는데 갑자기 눈 앞에 하얀 손바닥 하나가 보이지 않겠소? 그리고 꼬마는 정신을 잃어버렸소.]

장군묵이 말했다.

[그건 풍허객의 소월심인장(素月心印掌)이겠군. 상처도 없이 그냥 정신을 잃게 만들지.]

현천록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마 그럴거요. 꼬마는 맞은 것 같지도 않고 다친데도 없었으니까. 하여간 풍허객이란 사람이 나타났소. 그 꼬마를 제자로 삼겠다고 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그만 꼬마가 갑자기 죽고 말았소.]

장군묵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풍허객이 죽였소?]

현천록은 고개를 흔들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소. 저절로 고개를 뒤로 휙 젓히며 머리를 땅에 부딪히고 죽어버렸소.]

장군묵의 얼굴이 굳어지고 그의 눈이 현천록을 빤히 현천록을 쳐다보고 있었다.

현천록은 장군묵이 그런 눈빛을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건 구장심조의 첫 번째 껍질이 깨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한데 죽었으되 죽은 건 아니었소. 꿈인지 생신지 산건지 죽은건지 꼬마는 다시 정신을 차렸소. 삼년이 지났다고 하고, 온몸이 새까만, 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꼬마를 반겼소. 그 여인 이름이 아마 보초였을 것이오.]

순간 현천록은 목이 꽉 막혔다.

장군묵이 한손으로 현천록의 목을 쥐고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생사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무당파 제자는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지만 이제 그 맹세를 깨뜨릴 수도 있다.]

장군묵의 음성은 아주 무거웠고 숨이막힐 듯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현천록의 장군묵의 두 팔을 잡고 매달리며 겨우 말했다.

[이야기는 아직 남았소. 가만히 기다리면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듣게 될거요.]

장군묵은 다시 그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태도가 조금전처럼 즐기는 모습이 아니었다.

검의 자루를 은근히 만지면서 허튼짓을 하지말라는 위협적인 행동도 포함되어있었다.

현천록은 한숨을 쉬었다.

장군묵은 필요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그 꼬마는 죽지 않는, 아니 죽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소. 구장심조라는 무공이면서도 아니고 아니면서도 무공인 이상한 힘 때문이었소.]

장군묵의 입이 실룩였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꼬마는 보초라는 분에게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생사탄의 비밀과 구장심조의 진정한 뜻을 찾기 위해서 세상을 나다닌다고 들었소. 그말을 듣자마자 꼬마는 자기도 그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았소.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 먼저 알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소. 자기 앞에 펼쳐질 운명을 믿고 있었던 것이기에 그는 일단 좀더 많이 알기로 작정했소.]

장군묵은 현천록이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자기네 아홉째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는지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다면 생사탄의 사람을 어떤 수단으로도 말하게 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호기심이 걷잡을 수없이 피어올랐지만 현천록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꼬마는 세상에 다시 나왔다가 일곱째를 만났소. 그리고 그날 밤에 현무호의 야경을 구경하다가 퉁소소리에 이끌려 계명사 활몽루로 갔소. 활몽루에는 어떤 도사가 퉁소를 불고 있었는데 그다지 좋은 인간이 아니었소. 그 때문인지 꼬마보다 먼저 일곱째가 그 도사를 혼내주려 했소. 한데, 도사가 요상한 수법을 부려서 활몽루를 사라지게 했소.]

장군묵의 눈에서 형형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현천록은 그 눈빛에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계속 말했다.

[꼬마는 활몽루와 함께 그들이 사라져버리자 재빨리 성안으로 달려가 퉁소를 하나 구했소. 그리고 현무호 가운데 섬에서 퉁소를 불었소. 그 도사와 똑같은 곡이었소. 이윽고 허공에서 갑자기 도사만 나타났소. 호수에 떨어졌는데 퉁소소리에 이끌려 꼬마가 있는 쪽으로 나왔소. 꼬마는 도사를 포로로 잡았소. 그도 도사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게 있었기 때문이오.]

꿀꺽!

장군묵이 침을 삼켰다.

현천록은 계속 말했다.

꼬마가 도사를 데리고 자금산의 동굴 속에 숨은 일과 그 도사와 내기를 한 일, 그리고 어떻게 태극혜검을 배우게 되었고 어떻게 암습을 당했으며 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그래서 그 꼬마는 졸지에 빨간 머리띠를 맨 도사가 되어버렸던 것이오.]

장군묵이 현천록의 손목을 덮썩 잡았다.

현천록은 가만히 있었다.

장군묵은 현천록의 왼손을 보며 소리쳤다.

[미장! 정말 아홉째 너구나!]

현천록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묵심환이 나타나고 있었다.

현천록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나라고 하지 않았어요?]

장군묵은 화를 누르지 못하고 발로 땅을 굴렸다.

쿠웅!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동굴 전체가 울렸다.

[그 교활한 도사놈이 이런 짓을 꾸미다니! 아직 멀리 가진 못했겠지.]

현천록이 말했다.

[내 몸을 봐요. 남의 몸도 이렇게 바꿔버리는데 자기가 변신하는 건 더 쉽겠지요. 어떻게 알아보고 찾는단 말입니까?]

장군묵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네 몸에 펼쳐진 수법은 나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현천록이 놀라며 말했다.

[그럼 계속 이대로 있어야 된단 말예요?]

장군묵이 힐끗보며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허허허허!]

현천록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변신을 하자고 했는데 너무 기가막힌 변신을 해버렸다.

빨간 머리띠를 맨 늙은 도사가 되어버렸다.

그때 펑펑! 하는 장력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강맹한 장력인지 현천록과 장군묵이 있는 곳까지 바람이 확 밀려왔다.

[이 미친 중놈아! 죽으려면 곱게 죽지 왜 동굴은 무너뜨리려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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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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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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