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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로 물들다. (1)

 

 

 

이매봉은 양피지로 묶인 얇은 비급을 넘겨보았다.

겨우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글씨가 작기는 하지만 한번 읽으면서 그녀는 비급 속에 들어 있는 모든 내용을 다 기억했다.

[휴우! 그럼 그렇지! 역시 별 것 아니었어! 금강불괴를 깨뜨리는 것보다도 훨씬 쉽잖아.]

이매봉은 어깨에 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심하려면 한 번 쯤은 실험을 해봐야겠지.]

이매봉은 동의를 구하는 듯 고개를 숙여 한 사람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정말 키가 작은 소인(小人)이 무릎을 꿇고 않아있었다.

얼핏보아서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정교한 밀랍인형 처럼 보였다.

앉아있는 키는 한자가 조금 안되니 선다한들 한 자 반이나 될까말까할 정도다.

그러나 여타 난쟁이들과는 확연하게 달란다.

어느 하나가 기형적으로 크거나 작지 않고 사지는 비례를 잘 이루고 있었으며 오관이 반듯하여 멀쩡한 사람이 그대로 작게 비쳐보이는 것 같과 마찬가지였다.

얼굴로 짐작해볼 때 소인의 나이는 스물 다섯 쯤 된 것 같다.

이매봉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상관숭(上官崇)! 그렇지 않아?]

소인이 말했다.

[속하 상관숭은 오직 명에 따를 뿐 어떤 판단도 하지 못합니다.]

이매봉이 깔깔 웃었다.

[멍청이! 그럼 조용히 따라와.]

상관숭은 나직히 존명을 외쳤다.

키가 보통사람과 똑같다면 상당한 미남자 소릴 들었을 얼굴이다.

이매봉이 창밖으로 날아가며 말했다.

[일단 그녀석을 찾아야겠어.]

 

x x x

 

인시(寅時)가 지나면서 현무호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 둘씩 은밀히 호변에 모여들던 사람들은 묘시(卯時)가 되면서는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

살기를 속으로 갈무리하며 서로 눈치만 살피면서 계명사를 힐끗힐끗 살피는가 하면 어떤 자는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수공을 펼치기도 했다.

동녘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호수 면에 어리는 물안개는 현무호를 용왕의 수정궁(水晶宮)처럼 보이게 했다.

땅은 아직 어둡지만 하늘이 먼저 밝아 온다.

그리고 부지런한 잡새들이 모이를 찾아 나는 소리가 들린다.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도 어언 삼백 여를 헤아릴 정도가 되었다.

한데 어느 순간,

 

--- 파앙!

 

어디서 터져나온 소리 때문인지 대기(大氣)가 문풍지처럼 진동했다.

아주 먼곳에서 들려온 폭죽소리 같기도 하고 바로 곁에서 터져나온 큰 소리 같기도 했다.

 

---파앙!

 

이미 경직되어버린 고막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저기닷!]

누군가가 소리치며 몸을 솟구쳤다.

 

---으하하하하하하!

 

미친듯한 웃음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 곳에서 신기루처럼 한 채의 누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활몽루!

사라졌던 활몽루가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휘휘휙!

휙휙!

군웅들이 병기를 뽑아들고 활몽루를 향해서 날아갔다.

번득이는 검광과 살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다.

번쩍! 번쩍!

활몽루에서 한 거인이 허공을 밟고 걸어나왔다.

[미천한 것들!]

활몽루와 함께 사라졌던 일곱째 장군묵이었다.

[목을 바쳐라!]

장군묵은 고함치며 검을 휘두르는 자의 머리를 낭아봉으로 날려버렸다.

퍼억!

그자의 머리는 산산조각나서 흩어졌다.

[옥황빙서(玉皇聘書)를 내놔라!]

한 노인이 장군묵의 등에 일장을 내려치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벌써 장군묵의 왼손에 있는 낭아봉은 노인의 배와 가슴을 찢어발기고 있는 중이었다.

[으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소리를 끝으로 노인의 시체는 현무호로 떨어져 버렸다.

장군묵은 평지를 밟듯이 허공을 밟으며 걸어갔고, 다시 옥황빙서를 외치는 자가 창으로 장군묵의 목을 찔렀다.

장군묵은 사방은 물론이고 아래 위까지 몰려드는 군웅들로 인해 포위당했다.

[버러지같은 놈들!]

장군묵의 얼굴에 잔인한 웃음이 걸렸다.

창으로 그를 찔렀던 자는 두 개의 낭아봉에 찢어져 형체도 남기지 못했다.

참혹한 모습에 군웅들은 치를 떨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장군묵을 공격했다.

장풍과 검광이 풍우처럼 몰아쳤다.

그러나 장군묵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장군묵은 한줄기 바람처럼 군웅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아아!

 

사람들의 찢어진 살점들을 가득 물고 있는 낭아봉이 춤을 추고, 그가 스쳐간 곳에는 찢어져 버린 시체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낭아봉에 죽는 자들은 공포 외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고, 비명은 아직 살아있는 자들이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장군묵을 보고 질렀다.

죽은 자들의 피를 뒤집어쓴 거인 장군묵은 그 자체로 지옥에서 도망쳐나온 악귀같았다.

살신(殺神)이었다.

공포가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옥황빙서를 외치며 달려들던 자들은 콩튀듯이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군묵은 이미 그들 모두를 죽이기로 작정한 듯 달아나는 자들부터 쫓아가 몸을 짓이겨 죽였다.

! !

[으아아아아!]

도망치면서 공포에 질려 고함치는 자들, 하지만 그 고함소리가 끝나는 순간에 그들의 목숨도 끝나고 있었다.

일각도 채 지나기 전에 현무호는 생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삼백여 시체들이 호수와 호변에 흩어져 있고 호수 물은 그들의 붉은 피가 흘러들고 있었다.

 

x x x

 

[소협은 능히 자기를 지킬 만한 무공을 지녔는가?]

진양진인이 속을 뻔히 짐작하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없습니다.]

다시 진양진인이 말했다.

[바람보다 빨리 달아날 수는 있는가?]

현천록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진양진인이 빙그레 웃었다.

[소협은 오늘 정오가 지나기 전에 죽을 것이네.]

진양진인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현천록이 흥미진진한 듯 눈을 반짝이며 쳐다본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활몽루를 보았다면 노도가 궁여지책으로 그곳에 가둔 마왕(魔王)도 봤을 것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창허진인은 도장의 윗 어른이 아닌가요?]

진양진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노부 나이가 일백하고도 서른 두 살이네. 무당에 노도보다 더한 선배가 어디있단 말인가?]

현천록이 말했다.

[그럼 신선이 된 장삼봉 진인은 도장의 후배입니까?]

진양진인은 일순 말이 막혔다.

(이놈이 정말 만만찮구나. 은근히 내 욕을 하다니.)

진양진인은 다시 한 번 웃고 말했다.

[장삼봉조사께선 승천하시고 속세를 계시지 않으니 선배라고 할 수도 없네. 하여간 그자는 마왕이랄 수 있네. 여러 곳의 무공을 훔쳐 배웠으며 또한 나이를 짐작할 수없지. 더구나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쯤으로 아는 자네.]

현천록이 미소를 지었다.

진양진인이 계속 말했다.

[그는 앞으로 한 두 시간만 지나면 내가 만든 결계를 깨뜨리고 다시 뛰쳐나올 것이네. 집요하게 노부를 찾아올텐데 자네를 그냥 둘 리가 없지. 노부와 함께 낭아봉에 찢겨 죽고 말걸세.]

그는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자네가 노도를 낚았으나 먹고싶은 어떤 요리도 하기 전에 우린 함께 죽는단 말이네. 노도야 살 만큼 살았으니 죽는게 뭐가 아쉽겠나만 자네는 허허허... 조금 억울하겠군.]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억울할 수도 있겠지요.]

진양진인이 얼굴을 굳히면서 말했다.

[결국 자네가 노도를 데려온 건 실수였네. 무슨 목적이 있었던 간에 결과는 이처럼 끔찍하게 나타날 테니까.]

현천록이 모닥불에 장작을 하나 더 던져 넣었다. 진양진인의 말에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진양진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네. 지금부터 서두른다면 우린 완전히 그 마왕의 손을 벗어날 수도 있네. 자네가 노도한테 묻고 싶은 건 그 후에 다시 의논하면 되지.]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 그럼 내기를 하나 하도록 합시다.]

진양진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 녀석은 역시 어리다. 상황을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철없는 소리만 하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노도가 너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들어주마.)

진양진인은 한심하다는 듯이 탄식하며 말했다.

[어떤 내기인가? 우린 시간이 없네.]

현천록이 말했다.

[먼저 도장이 생각한 방법대로 한 번 해봅시다. 하지만 나는 그 방법으로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데 걸겠습니다.]

진양진인은 껄껄 웃었다.

[노도가 이만큼 살았지만 자네처럼 명랑한 소년은 처음이네. 하지만 자네는 노도를 너무 모르고 있군. 노도는 계책을 생각해서 아직까지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세.]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실패하고나면 그때는 내 방법을 쓰도록 하지요.]

진양진인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조건은 어떤지 한 번 들어보세.]

현천록이 웃으며 물었다.

[분명히 자신있겠지요?]

진양진인이 껄껄 웃고 말했다.

[노도가 입밖에 낸 건 모두 자신있는 것들 뿐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이길 경우에는 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도장이 나을때까지 돌봐주겠습니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네가 이길 경우에는?]

[내가 묻는 말이 어떤 것이든간에 무조건 대답해주십시오.]

진양진인의 얼굴이 미미하게 실룩거렸다.

현천록이 말했다.

[어쩌면 도장의 금기(禁忌)를 깨야하는 대답도 있을 것입니다.]

현천록의 눈이 그래도 과연 내기를 하겠느냐는 듯이 바라본다.

진양진인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법도 없군. 노도는 오직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으니 좋네.]

[맹세하십시오.]

현천록이 말했다.

진양진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노도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다 맹세일세.]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도장의 계책을 말해보십시오.]

진양진인이 자기 옆에 끌려져 있는 장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일은 단순하지 않네. 자네가 내 지시에 아주 잘 따라 주어야 하네.]

현천록이 말했다.

[필요하다면 따라야겠지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럼 저 입구부터 무너뜨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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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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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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