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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피로 물들다 (2)

 

--- 더 많이 알고 싶다.

 

이것은 현천록이 생사탄을 나오기 전에 보초에게 했던 말이다.

어쩌다보니 생사탄과 구장심조에 대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진양진인을 만나게 되었지만,

현천록은 그 의문들은 의문들이고 일단은 무엇이라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단은 배워야 뒤에 변신할 수 있다.

현천록은 머지않아 자신도 먼저 생사탄에 들게 되었던 사람들처럼 생사탄과 구장심조의 궁극적인 비밀을 캐기 위해서 세상을 떠돌게 될 것임을 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먼 곳의 일처럼 느껴지고, 당장은 인생이 회색으로 변하지 않게 마음 속에 즐거움을 유지하는 것이 더 급선무다.

진양진인이 시키는 대로 그의 장검을 가지고 현천록은 동굴 입구를 무너뜨려 막았다.

구장심조는 무공과 비슷한 것이기는 하지만 힘을 더해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보검의 힘을 빌리지 못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동굴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시간 정도 노력해서 동굴은 입구에서 삼장여 깊이까지 완전히 내려앉았다.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소리도 밖에서 생기는 어떤 소리도 그 깊이를 뚫고 오가지는 못한다.

입구가 막히고 모닥불이 꺼지자 동굴 속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자기 손가락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진양진인은 현천록에게 자기를 안고 동굴 안쪽으로 더 들어가도록 시켰다.

그들이 숨은 동굴은 금릉 현무호 동쪽의 자금산 이름모를 골짜기에 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은 동굴 속을 걷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무질서한 돌뿌리들과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바위들, 그리고 움푹꺼진 웅덩이와 벼랑들이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징그러운 벌레나 독충들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뒷발에 중심을 두고 앞발로 더듬게. 그리고 천천히 중심을 이동시키며 나아가야 하네.]

진양진인이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도 현천록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앞을 막은 바위를 가볍게 타고 넘었다.

진양진인의 말했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는데 자네는 몸이 아주 가볍군.]

현천록은 암흑 속에서 실풋 미소를 지었다.

진양진인이 가둔후에 도망쳐온 일곱째 장군묵과 현천록이 똑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기절초풍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몸이 가벼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게가 없다시피 한 것을.

현천록이 말했다.

[얼마나 더 들어가야 합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눈을 감게. 시각이란 참으로 번다한 것이네. 사람의 감각은 아주 특이해서 가장 분명한 것 같은 것이 실은 가장 둔한 것이라네.]

현천록은 그의 말에 어떤 현기(玄機)가 깃들어있음을 느꼈다.

즉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감으나 뜨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진양진인이 계속 말했다.

[눈보다는 귀가 더 정확하네, 귀보다는 코가 더 확실하고, 그보다 더 정확한 건 바로 감각을 넘어서서 느끼는 것이라네. 실상 속된 경지를 벗어나려면 오감에 의지하는 버릇부터 버려야 하는 것이지.]

진양진인은 노래를 읊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며,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지려 하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여 내 속에 받아들이네. 내가 나의 존재함을 껍질 밖에 알리니, 스스로 존재하는 것들도 모두 내게 그들이 있음을 알려오네.

 

현천록이 말했다.

[물 냄새가 나는군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아주 총명하군. 그럼 이제 자네 코앞에 있는 튀어나온 바위를 조심하게.]

현천록은 진양진인을 안은 채 동굴 속에서 삼리는 족히 걸었다.

거리는 겨우 삼리정도지만 그 어려움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양진인이 말하는 대로 눈을 감고 그렇게 걷고 있는 동안, 현천록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였다.

암흑 속의 모든 상황이 마치 자기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명확하지 않지만 점점 감각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진양진인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한 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현천록은 물이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곳으로 암흑을 헤치며 걸어갔다.

감각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감각이 주위를 느낄 때마다 참기 힘든 미묘한 흥분이 일어난다.

그것은 기쁨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종류의 희열이었고 맺혀 있던 무엇이 풀어지는 해방감이기도 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속 벼랑을 뛰어 넘어 좀 더 아래로 내려간 현천록은 마침내 물가에 도착했다.

멈추어 섰지만 솔직하게 말해 더 걷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굴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의 두 팔에 들리운 상태에서 손가락 두 개로 현천록의 손등을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현천록은 물이 어둠보다는 밝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둠 속에서 물은 희게 보였다.

그리고, 자기가 선택해서 들어왔고 진양진인이 원해서 이곳까지 오게 된 그 동굴이 범상한 동굴이 아님을 알았다.

동굴 속에 있는 물은 물이지만 엄청나게 거대한 물이었다.

물은 작은 강을 이루고 소리없이 흐른다.

강의 폭은 이십 장 정도고 깊이는 짐작할 수가 없다.

아무 소리도 없는 중에 그 엄청난 물이 발 앞에서 흐른다는 사실이, 그것을 느낀다는 사실이 현천록에서 숨이 막히는 어떤 희열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소리가 없어서 장엄함이었다.

진양진인은 현천록이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오로지 감각을 향수(享受)할 뿐이지만 마음은 무심에 가까워져 있고 발은 뿌리를 내린 듯이 굳건해져 있다.

 

소리없이 흐르는 지하의 강물처럼 시간도 조용히 흘러갔다.

현천록은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편평한 바위에 진양진인을 내려놓았다.

진양진인이 말했다.

[자넨 자네 감각을 해방시켜주었네. 지금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곧 보이지 않는 감각이 확장됨을 느끼게 될 것이네.]

현천록이 말했다.

[이건 무공인가요?]

진양진인이 말했다.

[초상감각(超常感覺)이지. 상승무공을 익히는 기틀일 뿐이네.]

[초상감각...]

[이 감각을 얻는 자는 상승무공을 빨리 익힐 수 있으나 익히지 못하는 자는 백년을 수련해도 상승무공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지. 노도가 자네 자질을 잠시 시험해보려는 의도였는데... 자넨 아주 특이하군.]

현천록이 물었다.

[무엇이 그리 특이합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지금 자네가 달한 그 정도의 초상감각에 이르려 하면 자질이 뛰어난 사람도 삼년은 수양해야 도달할 수 있는 수준 정도일세. 그것도 무공을 상당히 지닌 상태에서! 한데 자네는 불과 한 시간 남짓 사이에 그런 경지에 달했으니... 아주 놀랍네.]

현천록이 웃었다.

[그렇게 칭찬할 것 없습니다. 도장과 내기를 했으니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 테니까요.]

진양진인은 빈말이 아니었지만 현천록이 그렇게 말하자 그게 아니라고 우기기도 뭣했다.

화제를 돌렸다.

[우리를 쫓는 그는 정말 무서운 인물이네. 동굴을 무너뜨렸다고 하지만 반드시 우리를 찾아내고 말 것일세.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이지.]

현천록이 말했다.

[어떤 방법을 씁니까?]

진양진인이 말했다.

[노도는 그의 손에 중상을 입었네. 노도의 공력이 전적으로 양의신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이미 찢어발긴 시체가 되었겠지.]

얼굴에서 쓴 웃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양의신공에도 불구하고 이 상태로 노도가 살 수 있는 것은 스무날 남짓하네. 상처가 너무 엄중하기 때문에 스스로 치유할 수도 없고 오직 양의신공을 익힌 사람이 도와주어야만 하네.]

현천록이 말했다.

[도장이 회복하는 것이 바로 그의 손을 벗어나는 방법인가요?]

진양진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멀쩡할 때도 하지 못했는데 이 몸으로 어떻게 그런 기적을 꿈꿀 수 있겠는가?]

현천록은 진양진인의 보검으로 근처에 있는 바위들을 벽돌처럼 재단하기 시작했다.

진양진인이 그의 뒤에서 말했다.

[노도는 원래 옛 친구와 활몽루에서 만나기로 했었네. 한데 그가 오지 않고 마왕같은 그가 왔었지.]

진양진인의 아주 오래전의 일을 회상하는 것같은 어조로 말했다.

[사실 그는 자네가 말한 대로 우리 무당파의 창허진인이었던 분이지. 이제 자네를 경계하지 않으니 그대로 말해주겠네. 창허진인은 본파에서만 전해오는 이름으로 강호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

진양진인은 자기가 윗대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창허진인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창허진인이 무당파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옛날이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나이가 스물여섯이라고 했는데, 무공을 배우기에는 이미 근골이 굳어있어서 적당치가 않았다.

그러나 무당파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했고, 가장 기본적인 무공부터 배웠는데 배우는 속도가 놀랄만큼 빨랐다.

빨리 배웠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펼칠 수 있었고 타고난 신체적인 조건이 더해져 그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무당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은 모두 장삼봉 조사 이후로 최고의 인재가 등장했다는 것을 알았다.

창허진인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무당파의 모든 무공을 다 익히도록 했다.

창허진인은 존장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익히면 익힐수록 진전이 더욱 빨라졌다.

삼년이 지나지 않아서 당시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고수인 장문인의 무공을 뛰어 넘었고,

다시 이년이 지났을 때는 장문인을 삼초 이내에 패배시킬 정도의 무서운 고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이년 쯤 무당파내에서 제자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들이 나돌고 있었다.

첫 번째 소문은 좋은 소문으로 창허진인이 벌써 신선이 되었거나 아니면 이전부터 신선이었다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당에 들어온 지 오년이 지났는데도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무공을 그처럼 빨리 익힐 수 있었겠는가 하는 추측이 그 소문의 근거였다.

장문인이나 장로들도 이 말에는 관심을 보였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도 어쩌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나 두 번째 소문은 달랐다.

창허진인이 장경각(藏經閣)에 숨겨져 있던 마공(魔功)들을 익힌다는 소문이었다.

무당의 장경각에는 무당파의 고수들이 마두들을 제압했을 때 빼앗아 봉인해놓은 마공비급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무당의 제자로 무당의 무공을 자기에게 허용된 이상으로 익히는 것은 다만 징계를 받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마공을 익혔다는 것은 발견되는 즉시 죽임을 당한 후에 파문된다는 것을 말한다.

당시의 장문인은 무당의 이십칠대인 광화도장(光華道長)이었다.

의혹을 그대로 묻어둘 수 있는 단계를 지나버리자 광화도장은 먼저 강호에 흩어져 있던 모든 제자들을 구월구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해 무당산으로 소집했다.

광화도장은 창허진인을 전 제자들 앞에서 심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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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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