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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천록여의 (2)

 

머릿속으로 찬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장검을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을 때의 충격도 이처럼 크지는 않았다.

도깨비 장난을 본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장난의 깊숙한 곳에 자기가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일이 그의 앞에서는 너무도 태연하게 계속되고 있다.

심장이 격하게 뛰면서 진정되지 않았다.

활몽루가 사라지는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자꾸만 생사탄이 연상되었다.

현천록은 일곱째인 장군묵도 자기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삼년이나 기다려서 진양진인을 만나려 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활몽루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고, 그 속에서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

뒤에서 목탁소리와 함께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란한 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계명사의 중들이 활몽루가 사라졌음을 보고 꿇어앉아 염불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지 모두가 두려워하며 경건하게 염불을 왼다.

현천록은 그 자리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중들과 맞닥뜨리면 아직 자기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는데 또 새로운 시비에 말려들 것만 같아서다.

시간은 이경하고도 반은 지났을 것이다.

현천록은 낙엽처럼 날아올라 대웅전 지붕 위에 내려섰다.

활몽루만큼은 아니지만 대웅전의 지붕에서 보는 현무호의 밤도 아주 아름다웠다.

한데 대웅전의 지붕에는 현천록보다 먼저 와있는 선객이 있었다.

황색가사를 걸치고 회색바라를 진 중이었다.

현천록보다 더 작은 키에 몸은 민간에 팔리는 나한상(羅漢像)처럼 둥글고 납작한데 웃고 있는 얼굴에서는 도무지 나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오십을 넘은 듯도 하지만 탱탱한 살 때문에 주름살이 보이지 않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중의 입은 움직이지 않는데 목소리가 현천록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시주도 활몽루가 사라지는 걸 봤는가?]

불가에 비전되어 온다는 혜광심어(慧光心語)라는 고절한 무공이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웃고 있는 중의 입안에는 이빨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의 혜광심어가 다시 들려왔다.

[노납은 진양이란 도사를 만나러 왔네. 하지만 무슨 연고인지 스스로 문을 닫아버렸으니 다시 열 때까지 이 근처에서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됐어.]

현천록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스님께서 진양진인이 만나기로 했다는 분이시군요.]

중이 이빨 없는 입속을 들어내 보이며 웃는다.

[말이 좋아 만나는 것이지. 그냥 한판 싸워 삼년 전에 맺지 못한 승부를 가르면 되지. 한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먼. 진양 그 소코같은 도사가 노납을 포기할 리 없는데.]

그때 계명사의 승려가 현천록과 중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사람이 있다!]

중이 껄껄 웃었다.

[잠시 피하세나.]

스윽!

중은 허깨비처럼 다가와 현천록의 손을 잡고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불을 머금은 종이풍선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것 같은 신법이다.

[자금산(紫金山)에 가면 먹을 만한 풀뿌리들이 숨겨져 있는 곳을 알고 있네. 이것도 삼세의 인연이니 함께 가지 않겠나?]

중이 계명사를 벗어나며 말했다.

현천록은 중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저는 잠시 들려야 할 데가 있습니다. 장소를 알려주시면 찾아가도록 하지요.]

중은 현천록이 자기의 손을 놓고도 공중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떠있는 것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으하하하하! 대단한 시주였군. 나는 포두화상(葡頭和尙)일세. 영곡사(靈谷寺)에 와서 날 찾게나. 기다리고 있겠네.]

중은 뚱뚱한 몸에 믿기지 않는 속도로 자금산을 향해서 날아가버렸다. 마치 한 마리 거대한 붕새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

 

현천록은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성문을 날아넘고 태평북로(太平北路)의 번화가로 들어갔다.

삼경이 가까운 시각이었지만 아직도 불을 훤하게 밝혀두고 있는 점포들이 있다.

현천록은 악기(樂器)를 파는 점포를 찾아 들어갔다.

점포에는 각양각색의 퉁소와 피리, 앵금, 거문고, 비파, 소고(小鼓) 등이 여기 저기 놓여있었다.

현천록은 대나무 퉁소를 하나 집어들고 점원에게 물었다.

[이건 얼마지요?]

점원이 손가락을 하나 세우며 말했다.

[한냥입니다.]

현천록은 점원이 자기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고 바가지를 씌우려 한다는 걸 알고 속으로 웃었다.

장사라면 진작 이골이 난 현천록이었다.

현천록은 대나무 퉁소를 내려놓고 조잡하긴 하지만 벽옥을 깎아 만든 퉁소를 들고 물었다.

[이건 얼맙니까?]

점원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스무냥입니다. 하지만 공자님께 어울리는 물건이라곤 할 수가 없군요.]

점원의 눈이 은근 슬쩍 한쪽 구석에 있는 퉁소를 향했다.

백금으로 만들었으면서도 얇게 뽑아 무겁지 않은 퉁소였다.

[삼백오십 냥입니다. 저희 가게에서 최고의 물건일 뿐 아니라 금릉에서는 이만한 물건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게는 겨우 두냥닷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로 주시오.]

현천록은 손을 내밀었다.

점원이 무명수건으로 백금퉁소를 닦은 후에 내주었다.

백금퉁소에는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현천록은 퉁소를 입에 대고 불어보았다.

[! !]

하지만 바람소리만 날 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점원이 의자를 내와서 앉게 하며 말했다.

[공자님께선 아직 퉁소를 배우지 않으셨군요. 헤헤... 소리를 내려면...]

점원은 대나무퉁소를 하나 집어들고 입을 대는 위치부터 가르쳐 주었다.

 

---부우!

 

대나무 퉁소에서 맑은 소리가 흘러 나왔다.

현천록은 점원이 했던 것과 똑같이 흉내냈다.

백금이 흐느끼는 듯 맑고 청아한 소리가 퉁소를 잡은 손 끝에 잔떨림을 남기며 울려나왔다.

점원이 뜻밖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천록은 손가락을 움직여 구멍을 막고 열고 하면서 소리를 변화시켜보았다.

여덟 개의 소리와 각각의 반음이 한 번씩 울리고 나서, 현천록의 백금퉁소에서는 너무도 애절하고 심금을 울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지그시 눈을 감고 이따금씩 고개를 약간씩 아래위로 움직이며 퉁소를 불고, 소성(簫聲)은 태평북로를 넘어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점원은 숨을 죽이고 현천록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도 악기를 매매하는 상인인 만큼 음()을 아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현천록의 퉁소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했다.

[소인은 애상곡(愛傷曲)을 공자님처럼 연주하시는 분을 만나 뵌 적이 없습니다. 귀가 열리고 가슴에 막혔던 것이 뻥 뚫리는 듯 하군요.]

한데 백금소를 부는 현천록의 몸이 조금씩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점원이 놀라며 땅에 엎드렸다.

[아이쿠! 신선님! 천상의 선재동자께서 강림하셨군요.]

현천록은 허공에서 몸을 바르게 폈다.

애절한 퉁소소리는 계속되고, 현천록은 신선이 승천하는 것처럼 밤하늘로 올라갔다.

 

x x x

 

붉은 안개가 발목을 축축하게 적시며 낮게 흐른다.

쌔액! 쌔액!

암흑의 동굴 속에는 상처 입은 야수의 것인듯 거친 숨소리가 흘러 나온다.

동굴 앞에 꿇어 앉은 여인의 무릎에는 벌써 피멍이 들었다.

[... 이제... 됐다! ... 계속... ... 말하라.]

사람의 음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낮고 탁한 음성이 동굴 속에서 흘러 나왔다.

여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공주님께선 정말 그런 무공이나 문파가 존재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셨습니다. 죽지 않는 몸을 지녔다면 무공의 끝에 달한 것이 아니냐면서...]

[허억! ! ... 결국 묻고 시 싶은 건... 그거 였...구만.]

[그렇사옵니다.]

동굴 속에서 쥐어짜는 듯한 음성이 계속되었다.

[죽지... 않는 인간... ...부도... 만난...적이 있다. 허억! ! 내 몸을 망가뜨린 바로 그 자였지.]

여인이 흠칫하며 머리를 숙였다.

[허어어억!]

동굴 속의 괴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주 온화한 미풍같은 음성이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부는 그 이후에 쭉 그에 대해 연구해왔는데 얼마 전에야 겨우 실마리를 잡게 되었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여인이 절하며 말했다.

부드러운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노부가 너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각, 중간에 내 말을 끊지 말고 들었다가 한마디도 빠뜨림없이 공주에게 전해줘라.]

여인이 가만히 엎드렸다.

괴인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불사(不死)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있지만, 어떤 자들은 특이한 상황을 만나게 되어 죽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지.

이건 무공의 높낮음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노부는 일찍이 천하의 모든 무공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고금의 무공에 통달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자의 손에 어이없이 패해서 불구가 되고 말았지.

내 목숨을 연장시켜 가는 것은 능력이지만 이 능력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마침내는 다하고 말 것이다.

노부는 아직도 그자나 또 다른 자들이 어떻게 불사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 그들도 모를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자들은 세상 밖에서 이 세상을 꿈꾸는 자들 같기도 하고, 우리가 어쩌다가 그자들의 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설마 그럴 수야 없겠지만 몹시도 비슷하다.

어쩌면 그들이 장주(莊周: 장자)의 숨은 비법을 우연히 알아버린 것일 수도 있고, 하늘과 수명과 같이 했다는 고대 현인들의 법을 얻었을 수도 있지.

그러나 그런 자들을 없앨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살았다고도 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니까 죽인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방법으로 소멸시켜 버릴 수는 있다.

어째든 그들도 존재하는 것이니 만큼 그 존재의 고리를 끊어주기만 하면, 보통 사람들이 심장을 찔렸을 때 죽고 마는 것처럼 그들도 소멸하고 말겠지.

죽지 않는 자들, 그들이 언제부터 무림에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무림의 이단자이자 이방인이기도 한데, 얼마나 많은 자들이 숨어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러나 노부가 다시 나서는 날에는 무림에서 그들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말겠다.]

동굴 속에서 책 한권이 천천히 날아나왔다.

[가져가서 공주에게 전해줘라. 그리고 요사스런 방사(方士)나 술사(術士)의 무리들은 조금도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해라. 공주가 내가 적은 방법대로 한다면 어떤 자라 할지라도 능히 없앨 수 있을 것이니...]

여인이 책을 두손으로 받쳐들었다.

아주 지친듯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정작 공주가 걱정해야 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철인련맹(哲人聯盟)이다. 그자들이야 말로 경계를 늦출 수 없다.]

목소리가 점점 잦아졌다.

여인이 절을 하고 일어섰다.

[끄아아아아악!!]

더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는 인간의 비명이 다시금 동굴 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짙은 혈무(血霧)가 소용돌이치며 비명과 함께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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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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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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